오늘의 복음 묵상

2020년 4월 20일 부활 제2주간 월요일

Margaret K 2020. 4. 19. 19:38

2020년 4월 20 부활 제2주간 월요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요한 3,1-8)


“Amen, amen, I say to you,
unless on e is born of water and Spirit
he cannot enter the Kingdom of God.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오늘 독서는 기도에 전념하는 초대 교회 공동체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최고 의회와 감옥에서 풀려난 뒤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자신들에 대한 종교 지도자들의 박해 때문에 기도합니다. 그런데 그 기도 내용은 참으로 흥미롭습니다. 박해하는 이들에게서 안전하기를 바라기보다 오히려 박해의 위협에도 자신들 안에서 하느님의 일이 계속 이루어지기를 청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할 수 있기를 기도한 것입니다.

오늘 화답송의 시편은 바로 이들 교회 공동체가 박해를 각오하면서 바친 기도 속에서 따온 노래입니다. “주님, 당신께 피신하는 이 모두 행복하옵니다.”
그렇다면 박해받으면서도 기도에 전념하며 주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할 수 있었던 초대 교회 공동체 신자들이야말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니코데모에게 강조하신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 이들이라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담대함’이란 두려움 없이 용기를 낸다는 말이기에 복음을 전하는 이에게 꼭 필요한 덕목입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도 담대하지 않으면 진리 앞에서 자신을 감추려고 합니다. 밤에 예수님을 찾아온 니코데모가 그렇습니다. 그러나 박해의 위협에서도 담대히 주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는 것은 물과 성령으로 새롭게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물과 성령으로 새롭게 태어난 베드로와 요한 그리고 첫 신자들은, 박해의 두려움 속에서도 기도하며 담대히 주님의 말씀을 전한 부활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박기석 사도요한 신부)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언젠가 식당에 갔다가 우연히 보게 된 장면이 생각납니다. 이 식당은 신발을 벗고 들어가는 곳으로, 식사를 마치고 나올 때 한 꼬마 아이가 신발장 앞에서 가만히 서 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왜 그러니? 뭘 도와줄까?”라고 묻자, 아이는 “신발”이라고 간단히 말합니다. 혼자 신발을 신을 수가 없어서 신발 신겨줄 부모를 기다리고 있었나 봅니다.

아이를 보면서, ‘나도 저랬겠지?’라는 혼잣말을 해 봅니다. 누군가의 도움으로 신발을 신을 수 있었고, 누군가의 도움으로 옷을 입었을 테고, 또 누군가의 도움으로 대소변 처리도 했을 것입니다. 아주 기본적이고 쉬운 것도 도움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 사실을 잊어버립니다. 마치 태어나는 순간부터 모든 것을 잘했던 것처럼 그리고 누군가의 도움 없이 이렇게 성장한 것처럼 착각합니다. 그래서 감사하지 못하고 이기적이고 욕심 많은 모습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약하고 부족한 모습은 이제 나이가 들고 병이 들어 힘이 빠졌을 때 다시 반복됩니다. 처음의 모습, 도움을 받아야만 할 때로 되돌아갑니다. 이는 도움을 줄 수 있을 때, 사랑을 나눠줄 수 있을 때는 최대한으로 실천해야 함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닐까요? 이를 깨닫고 적극적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야말로 겸손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기적을 본 사람 중에서, 바리사이이며 유다인들의 최고 의회 의원이었던 니코데모라는 사람이 밤에 주님을 찾아옵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고 싶어 했던 것이었지요. 이제껏 보여줬던 표징들은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놀라운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니코데모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이제까지 가지고 있었던 편견의 틀에서 벗어나서 온전히 주님을 바라볼 수 있게 되고, 이로써 이미 우리 곁에 온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의 신원을 궁금해하고 그 답을 굳이 찾을 필요가 없음을 이야기하시는 것이지요. 그보다 더 필요한 것은 지금까지 머물러 있는 악습의 틀에서 벗어나서 새롭게 태어나는 것입니다.

앞서 인간은 겸손해져야 한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이 겸손의 삶이 새롭게 태어나는 삶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욕심과 이기심을 벗어던지고 주님을 따라가는 것, 부정적인 마음으로 남을 판단하기보다 긍정적인 마음으로 주님과 함께 하는 것. 이렇게 새로운 탄생을 통해서만이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거짓은 날아다니고, 진실은 그 뒤를 절뚝절뚝 따라온다(조너선 스위프트).



나의 유언은?

“여러분에게 간청합니다. 내가 죽거든 내 육신을 사막에 내버려 새들과 들짐승의 먹이가 되게 하십시오. 나는 하느님을 거슬러 많은 죄를 지었기에 무덤에 안장되기 합당치 않습니다. 아니면, 우리가 살고 있는 그곳에 구덩이를 하나 파서 어떠한 영예의 표도 없이 나를 묻어 주십시오. 죄 많은 내 영혼을 위해 기도해주기를 간청하며, 또한 여러분 모두에게 용서를 청합니다. 나 역시 여러분을 용서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자비를 베푸시기를 기원합니다.”

15세기, 러시아 수도 생활의 개혁 운동을 주도한 닐 소르시키의 유언입니다. 한 시대의 영성을 아름답게 수놓은 위대한 영적 사부의 유언은 한없이 소박하고 겸손했습니다.

사실 하느님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질 수밖에 없는 우리입니다. 그러나 하느님보다 더 커지려고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하느님의 영광보다 나의 영광을 드러내는데 더 큰 노력을 기울입니다.

교만의 마음이 생기게 될 때 하느님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특히 죽음 앞에서 나약하고 부족한 나를 똑바로 인식하게 될 것입니다.                   

육의 욕망은 하강기류고 영의 욕망은 상승기류다

-전삼용신부-


  2008년 7월 어느 날 아침, 자포자기한 듯한 남자가 웨일스의 서부 해안을 따라 터벅터벅 걷다가 공중전화를 발견하고는 전화기를 집어 들어 긴급 구호 번호를 돌렸습니다.

“내가 집사람을 죽인 것 같습니다. 누군가 침입한 거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랑 싸웠습니다. 그런데 크리스턴이었습니다. 내가 꿈을 꾸었던 것 같습니다. 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한 걸까요? 내가 무슨 짓을 한 걸까요?”

      브라이언 토머스는 몽유병 환자였습니다. 평소에도 침대에서 나와 집 안을 걸어 다니거나 장난감을 갖고 놀았고 심지어 뭔가를 직접 만들어 먹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 깨어나면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토머스의 어머니에게 그가 잠옷 바람으로 잔디밭을 돌아다니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그냥 습관이라고 대답하고 넘기고는 했습니다. 그는 아내를 무척이나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내도 그를 사랑하였습니다.

      사건 당일도 토머스 부부는 밴을 가지고 캠프를 즐기고 있었습니다. 부부가 밴에서 자려고 할 때 캠프장 주변에서 젊은이들이 요란하게 자동차 경주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청바지를 입고 검은 재킷을 입은 청년이 캠핑카 안으로 들어와 아내를 덮친 것이었습니다. 토머스는 그 청년의 목을 잡고 아내에게서 떼어내려 했습니다. 그 청년은 토머스의 팔을 할퀴며 반격했지만 그럴수록 토머스는 더 힘을 주었습니다. 그러다 그 청년이 절대 움직이지 않았고 그때 잠을 깨게 된 것입니다. 자신 앞에는 자신이 목 졸라 죽인 아내가 쓰러져 있었습니다.

[참조: 「습관의 힘; Part 3 사회의 습관」, 찰스 두히그, 갤리온]


      우리 안에는 통제되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게 타인에게 피해를 줄 수 있는 욕망이 있습니다. 이를 육체의 욕망이라고 합니다. 이 욕망에 자신을 맡기면 나중엔 자신도 자신을 통제할 수 없는 상황까지 가고 맙니다. 같은 책에 ‘앤지 바크만’이란 여자도 나오는데 그녀는 도박의 바람에 자신을 맡겼다가 부모의 유산까지도 더 잃고 빚쟁이로 남게 된 사연도 소개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상승기류의 바람, 혹은 하강기류의 바람에 자신을 맡길 수밖에 없습니다. 육체의 욕망에 자신을 맡기면 하강기류에 맡기는 것이고, 성령의 바람에 자신을 맡기면 상승기류에 맡기는 것입니다. 육체와 영의 두 욕구에 동시에 자신을 맡길 수는 없습니다. 육체의 욕구에 자신을 맡기는 삶에서 영의 욕구에 자신을 맡기는 사람으로의 전환을 ‘새로 남’이라 부릅니다.

      오늘 복음에서 니코데모가 예수님께 찾아와 구원에 관한 이야기를 나눕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것보다 “새로 남”을 강조하십니다. 그러나 니코데모는 이해하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새로 남은 ‘영’으로 새로 남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육에서 태어난 것은 육이고 영에서 태어난 것은 영이다.”라고 하십니다. 영으로 새로 난 사람들은 마치 바람에 자신을 맡긴 돛단배처럼 영의 욕구에 사로잡혀 살아갑니다. 육으로 난 사람은 육의 바람에 휩쓸리고 영으로 난 사람은 성령의 바람에 휩쓸립니다.

      그런데 영으로 난 사람은 위로 올라갑니다. 이 때문에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회오리바람을 타고 불 마차를 타고 하늘로 오른 이유는 성령의 이끌림에 자신을 맡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육의 바람에 휩쓸려 사는 사람은 영으로 사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영에서 태어난 이도 다 이와 같다.”고 하십니다.

      영화 ‘국제시장’은 1950년 12월 22일, 흥남철수작전 때 정원이 60명인 배에는 선장 레너드 라루 선장을 비롯한 47명이 이미 승선해 있었습니다. 끝없는 피난민들을 바라보던 라루 선장은 배에 실려있던 물자와 무기 25만 톤을 바다에 던져버렸습니다. 피난민들도 자신들이 가져온 물건들을 버리며 동참했습니다. 그렇게 16시간 동안의 탑승으로 총 14,000여 명이 배에 탑승합니다. 사람 무게만 700여 톤에 이르고 정원의 230배에 달하는 인원이었습니다. 바닷속의 수천 개의 기뢰의 위험과 추위, 배고픔과 공포 속에서 사흘을 항해한 끝에 5명의 신생아가 탄생하였고 12월 25일 거제도 항에 단 한 명의 희생자도 없이 도착하였습니다. 빅토리아호는 가장 많은 생명을 구한 배로 기네스북에 등재되었습니다. 제독을 설득시켜 끝까지 한 사람이라도 더 구하려 했던 빅토리아호 레너드 라루 선장은 한국전쟁 후 1954년 마리누스로 이름을 바꾸고 베네딕토 수도원에 입회합니다. 그는 이 철수작전에서 하느님의 힘을 느꼈다고 술회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작은 배가 그렇게 많은 사람을 태울 수 있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한 사람도 잃지 않고 그 끝없는 위험을 극복할 수 있었을까요. 저는 그해 크리스마스에 황량하고 차가운 한국의 바다에 하느님의 손길이 우리 배의 키를 잡고 계셨다는 명확하고 틀림없는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성령의 바람에 자신을 맡기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추측을 초월합니다. 왜냐하면, 그 바람의 방향이 너무나 다르기 때문입니다. 라루 선장이 2001년 사망할 때까지 수도원 동료들은 그가 14,000명을 구한 영웅인지 대부분 몰랐다고 합니다. 미국 교회는 그를 성인품에 추대하기 위해 추진 중이라고 합니다. 마리누스는 바다의 사람이란 뜻입니다. 우리도 어느 바람에 자신을 맡길 것인지 정해야 합니다. 이것이 새로 태어남의 시작입니다.


-조재형신부-


영어와 한국어는 표음문자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자음과 모음으로 소리 나는 것을 모두 적을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누구나 쉽게 읽고 쓰는 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영어와 한국어는 어순에 차이가 있습니다. 영어는 동사가 주어 뒤에 바로 나옵니다. 한국어는 동사가 맨 나중에 나옵니다.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안다고 말을 하기도 합니다. 한국말은 변화의 여지가 많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동사가 나중에 나오기 때문에 명사의 의미가 다양하게 변할 수 있습니다.

 

믿음과 믿는다.’는 비슷하지만 차이가 있습니다. 믿음은 명사이고, 변화의 여지가 없습니다. 믿는다는 동사이고 변화의 여지가 있습니다. 유혹 앞에 무너지는 믿음이 있고, 고통과 박해 앞에 쓰러지는 믿음이 있고, 유혹을 물리치는 믿음이 있습니다. 고통과 박해를 받아들이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 고백은 나는 믿나이다.’라고 시작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많은 변화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겨자씨의 비유, 씨 뿌리는 이의 비유는 변화를 이야기합니다. 밀알 하나의 비유도 그렇습니다. 밀알 하나가 썩지 않으면 하나로 남지만, 썩어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십니다.

 

몸이 아파 병원에 입원한 자매에게 사제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자매님은 누구인가요? 나는 두 아이의 엄마입니다. 자매님은 누구인가요? 나는 한 남자의 아내입니다. 자매님은 누구인가요? 나는 학교의 선생입니다. 그러자 사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엄마, 아내, 선생에 대해서 묻지 않았습니다. 자매님은 누구인가요? 자매님은 사제의 이야기를 듣고 깨달았다고 합니다. 나는 명사가 아니구나! 나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동사이구나! 하느님께서도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있는 나다.’ 하느님은 창조주이시기도 하고,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하시기도 하고, 하느님은 기다려주시기도 하는 그런 분입니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를 대하는 한국의 대응 방법이 국제적인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바이러스는 명사가 아니었습니다. 바이러스는 계속 변형이 이루어지는 동사였습니다. 한국은 변하는 바이러스에 맞게 접근하였습니다. 선제적인 검사로 확진자를 격리시켰습니다. 환자는 병원이라는 고정관념을 버리고, 경증환자는 생활치료 센터로 보내는 방안을 마련하였습니다. 투명하게 통계자료를 공개하였습니다. 변화하는 바이러스는 감추고, 속여서는 막을 수 없었습니다. 새로운 검사 방법을 고안했습니다. ‘드라이브 스루, 워킹 스루는 명사적인 관념에서는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포항의 수산물 양식장에서는 드라이브 스루 방식으로 회를 판매하였습니다. 회는 횟집이라는 관념을 버렸기에 가능했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명사가 아닙니다. 우리는 생로병사의 고정관념에 익숙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부활은 변화를 이야기합니다. 더 깊은 곳으로 그물을 던지듯, 오른쪽으로 그물을 던지듯 변화하는 삶이 부활입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주님은 갈릴래아로 가라고 하십니다. 갈릴래아는 명사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끊임없이 행동하고, 가르치고, 표징을 보여주었던 삶의 자리요, 변화의 자리입니다. 그곳에서 눈먼 이는 눈을 떴습니다. 중풍병자는 일어났습니다. 나병환자는 깨끗해졌습니다. 죄지은 이은 용서받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던 하느님 나라가 시작되었습니다.

 

저희가 이 땅의 부모에게 받은 모습을 벗어 버리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모습으로 변화되게 하소서. 저희가 그렇게 할 때, 주님께서는 손을 뻗으시어 병자들을 고치시고, 주님의 거룩한 종 예수님의 이름으로 표징과 이적들이 일어나게 해 주십시오. 기도를 마치자 그들이 모여 있는 곳이 흔들리면서 모두 성령으로 가득 차, 하느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하였다. 너희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여라. 거기에는 그리스도가 하느님 오른쪽에 앉아 계신다.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영에서 태어난 이도 다 이와 같다.”


성령의 활기찬 동반에 힘입어 제자들은 간절히 기도하고, 힘차게 선포하며, 박해 속에서도 기쁘게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양승국신부-

 

니코데모는 참으로 특별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바리사이면서 유다 최고 의회격인 산헤드린에 속하는 의원이었습니다.

 

 산헤드린(Samhedrin)은 예루살렘 유다인들의 최고 의회 기관을 말합니다. 유다 전통에 따르면 모세가 최초로 구성했고 에즈라가 재조직했답니다. 산헤드린은 대사제를 의장으로 하여 원로들, 귀족 사제들, 바리사이들을 포함해 총 71명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산헤드린은 율법의 복잡한 내용을 해석하는 등, 종교적인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지만, 주된 기능은 정치적인 것이었습니다. 행정권과 사법권은 물론 율법에 따른 형사권도 행사하는 등, 유다 정치 체제 전반에 걸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산헤드린 의원들은 대체로 예수님이란 존재를 껄끄러워했거나, 아예 무시했습니다. 그러나 니코데모만은 예외였습니다. 그는 언제나 예수님 편에 서 있었으며 예수님께 우호적이었습니다.

 

 그런 니코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오는데, 찾아온 시간이 대낮이 아니라 밤늦은 시간이었습니다. 그가 찾아온 ‘어두운 밤 시간’은 그의 내면 상태, 영혼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니코데모는 예수님께서 하느님으로부터 오신 특별한 스승이라는 것은 파악하고 있지만, 그분께서 구원의 빛이요 생명의 빛이신 메시아라는 깨달음에는 아직 도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직 예수님을 향한 믿음에 있어서 초보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에 바리사이들과 산헤드린 의원들 가운데 그나마 괜찮은 사람이었던 니코데모를 향한 예수님의 알쏭달쏭한 가르침, 그러나 진리로 가득한 촌철살인의 가르침이 시작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요한 복음 3장 3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요한 복음 3장 5절)

 

 ‘위로부터 태어나다.’라는 말씀은 ‘거듭 태어나다.’, ‘새로이 태어나다.’, ‘하느님에게서 태어나다.’라는 의미입니다. 위로부터 태어나다는 것은 또한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즘 첫번째 독서로 봉독되는 사도행전의 말씀을 묵상하노라면 깜짝 놀랄 일을 발견하게 됩니다. 한때 무기력하고 의기소침했던 제자들, 나약하고 우유부단했던 제자들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습니다.

 

 완전 딴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완전 환골탈태한 새로운 모습으로, 그 어떤 박해나 협박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맞섭니다. 용맹하고 당당하게 주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선포하다가 체포되어 산헤드린 앞으로 끌려갔던 베드로와 요한 사도였습니다. 더 이상 머뭇머뭇하던 과거 그들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노회하고 구린 산헤드린 의원들 앞에서 조금도 주눅들지 않고 하고 싶은 말을 다 했습니다. 더 이상 더듬더듬, 주저주저가 아니라 술술~감동적이고 논리정연한 설교를 펼쳐나갔습니다.

 

 풀려난 두 사도는 동료 제자들이 모여있는 장소, 곧 초대 교회로 달려갔습니다. 그 기쁜 소식, 자신들이 적대자들 앞에서 얼마나 당당하고 통쾌하게 주님의 말씀을 전했는지를 알려줬습니다.

 

 그 말을 전해들은 동료들은 한 마음으로 목소리를 높여 하느님께 기도를 바쳤습니다. 성령으로 가득찬 초대교회 공동체의 모습이 참으로 인상적입니다. 더 이상 의혹이나 불신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박해와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없습니다.

 

 환골탈태한 제자들! 그 배경에 과연 무엇이 자리잡고 있는가 생각해봅니다. 바로 성령이십니다. 성령은 초대 교회 공동체 전체를 뒤덮고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이제 한 사람 한 사람 안에 힘차게 활동하고 계십니다.

 

 성령의 활기찬 동반에 힘입어 제자들은 간절히 기도하고, 힘차게 선포하며, 박해 속에서도 기쁘게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없다.”(요한 3,3)

-이영근신부-


니코데모는 최고의회 의원으로서 세상의 명예와 권력과 재물을 다 지닌 탄탄한 지위에도 불구하고 참된 행복을 찾지 못한 그는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러니 밤에 그가 찾아온 것은 단지 자신의 행동을 조심하는 신중함이나 두려움만이 아니라, 그의 영혼의 상태를 말해줍니다. 사실 의 의미는 무지와 불완전함을 의미합니다. <시편>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은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여 어둠 속을 걷고 있으니

세상의 기초들이 모두 흔들린다.”(82,5)


<로마서>에서도 이렇게 말합니다.

밤은 물러가고 낮이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그러므로 어둠의 행실을 벗어버리고 빛의 무기를 갖춥시다.”(로마 13,12)


오늘 복음에서 니고데모에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없다.”(요한 3,3)


<요한복음>에서 (아노텐: , 새로)란 단어는 다섯 번 나오는데, 여기에서는 높은 데, 하늘 혹은 하느님으로부터를 의미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위로부터 태어난다.’는 것은 하느님 아들의 모습을 갖게 됨을 말합니다. 그러니 이는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받은 유대인인라고 해서 다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또 단순히 생활 개선이나 악습을 고치거나 질병을 치료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과 권능에 의한 전적인 새로운 변화로 태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위로부터 태어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예수님께서는 이를 구체적으로 이렇게 설명해 주십니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요한 3,5)


이는 위로부터 태어난다는 것이 물과 성령으로태어나는 것임을 말해줍니다. 곧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흘러내린 그 물로 깨끗해지고, 예수님의 숨이신 성령으로 죄 사함을 받아 태어나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곧 십자가의 죽음에서 새로 태어난 부활생명을 말합니다. 그것은 하느님에게서 난 생명이요, 그리스도의 형상을 지닌 생명입니다. 선사받은 생명이요, 변화된 생명으로 사는 것입니다. 새로운 생명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너는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요한 3,8)


바람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그 소리와 그 결과를 통해서 그 실재를 알려줍니다. 그처럼, 영으로 새로 태어난 사람은 구체적 행실의 변화로 그 실재를 드러내줍니다. 성령의 열매를 드러내는 삶을 통해서 알게 됩니다. 그러니, 영으로 새로 태어난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 오히려 변화의 영께 자신을 내어맡기는 것, 그렇게 변화되는 일, 그리하여 변화된 눈으로 모든 것을 새롭게 보는 일, 모든 것 안에서 당신의 현존과 활동, 곧 그분의 사랑을 보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세상이 이토록 경이로운 것은 세상이 새로워져서가 아니라, 제가 영으로 새로워진 까닭인 것입니다. 아멘.


- 오늘 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영에서 태어난 이(요한 3,8)


주님,

제 영혼의 무지를 깨우소서. 빛으로 새로 나게 하소서.

제 영혼의 밤을 몰아내소서. 제 어둠의 행실을 벗기소서.

당신 빛으로 당신을 뵈옵게 하소서.

세상이 이토록 경이로운 것은 세상이 새로워져서가 아니라,

제가 새로워진 까닭입니다. 아멘.


영으로 태어나야 한다

-반영억신부-


무엇을 배우는 사람은 가능한 유명한 사람으로부터 지도를 받기 원합니다. 그래야 효과 있게 제대로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처음부터 제대로 배워야 기초가 바로 섭니다. 그러나 유명한 사람도 좋지만 성실하고 눈높이를 맞춰주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너무 잘 나서 바닥에 있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도 간혹 있기 마련입니다. 그 사람은 자기 수준 이하에 있는 사람을 무시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운동이나 피아노를 배우는데 있어서 전문가의 지도를 받을 때는 제대로 합니다. 그렇지만 아직 기초가 서기도 전에 여러 사람들이 이렇게 저렇게 가르쳐 준다고 하여 그것을 따라 하다가는 죽도 밥도 안 됩니다. 한편 오래도록 꾸준한 훈련과 연습을 한 사람의 수고와 땀을 인정하지 못하고 단 번에 그들보다 더 나은 운동선수나 피아니스트가 되려고 한다면 그것은 분명 욕심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상의 일에도 좋은 선생을 만나기 바라는데 하물며 우리 인생사의 스승을 모시는 일을 소홀히 할 수는 없습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있음을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요한3,3).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육에서 난 것은 육이고 영에서 난 것은 영이다”(요한3,6).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위로부터 태어나야 하는데 위로부터 태어난다는 것은 영으로 태어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영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인간적인 삶의 틀에 매여 있지 않고 오직 하느님의 뜻과 섭리에 맡기고 사는 삶을 말합니다. 영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도 없을 뿐더러 그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새로 태어나야 합니다. 하느님의 가르침을 새기고 하느님의 사람으로 살지 않는 한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할 수 없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무릇 육을 따르는 자들은 육에 속한 것을 생각하고, 성령을 따르는 이들은 성령에 속한 것을 생각합니다. 육의 관심사는 죽음이고 성령의 관심사는 생명과 평화입니다. 육의 관심사는 하느님을 적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것은 하느님의 법에 복종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복종할 수도 없습니다. 육 안에 있는 자들은 하느님 마음에 들 수 없습니다”(로마8,5-8). 라고 적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성과 인간논리의 능력을 뛰어넘는 성령께 의탁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영으로 태어난 사람의 삶은 ‘바람이 제 불고 싶은 데로 불듯이’(요한 3,8) 더 이상 틀에 박힌 삶이 아닙니다. 자유로운 삶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눈에 드는 자유로움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8,31-32).

그런데 진리는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니 잊지 마십시오. 매순간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는 사실을! 하느님의 말씀 안에 거듭 태어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여러분은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할 수 있게 하십시오”(로마12,2).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으로 마무리 합니다. "주님께서는 살아 계시고, 희망과 꿈을 그리고 존귀함을 땅에 묻은 많은 얼굴들 안에서 다시 살아나길 원하십니다. 우리를 이 길로 인도하시는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우리를 맡겨 드리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아닐 것입니다...... 그분의 심장 박동이 우리들의 약한 심장 박동을 변화시킬 수 있도록 맡겨드립시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새로워지려고 날마다 노력해야 한다 

-송영진신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요한 3,3).”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육에서 태어난 것은 육이고 영에서 태어난 것은 영이다(요한 3,5-6).”

예수님은 메시아로서 인류를 구원하시는 분이라는 것과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하느님과 같으신 분이라는 것과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으려면
예수님을 믿고 회개해야 한다는 것이 우리 교회의 기본 교리입니다.
그런데 이 교리를 알고 있는 것만으로는, 그것을 믿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아는 것’은 믿음이 아니고, 알고 있는 그것이 진리라고 믿어야 믿음입니다.
또 믿는다고 생각하기만 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것도 아직은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은 곧 ‘삶’이 되어야 합니다.
‘아는 것’과 ‘믿는 것’과 ‘믿음대로 사는 것’이 모두 하나로 합해져야 합니다.

예수님 말씀에서 “위로부터 태어나다.” 라는 말씀과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다.”
라는 말씀은, 사실상 같은 말씀인데, 이 말씀은 믿음으로써 ‘삶 전체’가 변화되고,
인생 전체가 변화되고, 마음과 생각과 영혼이 완전히 새롭게 변화되어서
‘새사람’이 되는 것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라는 말씀은 아무도 제외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라는 말씀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라는 말씀도 같은 말씀인데, “구원받지 못한다.” 라는 뜻입니다.
“육에서 태어난 것은 육이고” 라는 말씀은, 인간의 자연적인 탄생은
아직은 구원받을 자격을 얻지 못한 상태로 태어나는 일일 뿐이라는 뜻입니다.
“영에서 태어난 것은 영이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서
구원을 받으려면 ‘영으로’ 새로 태어나야 한다는 뜻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다음 말을 예수님 말씀에 대한 해설로 삼을 수 있습니다.
“성경에도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 인간 아담이 생명체가 되었다.’
마지막 아담은 생명을 주는 영이 되셨습니다. 그러나 먼저 있었던 것은
영적인 것이 아니라 물질적인 것이었습니다. 영적인 것은 그다음입니다.
첫 인간은 땅에서 나와 흙으로 된 사람입니다. 둘째 인간은 하늘에서 왔습니다.
흙으로 된 그 사람이 그러하면 흙으로 된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늘에 속한 그분께서 그러하시면 하늘에 속한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흙으로 된 그 사람의 모습을 지녔듯이, 하늘에 속한 그분의 모습도
지니게 될 것입니다. 형제 여러분, 내가 말하려는 것은 이렇습니다.
살과 피는 하느님의 나라를 물려받지 못하고,
썩는 것은 썩지 않는 것을 물려받지 못합니다(1코린 15,45-50).”
예수님은 우리를 ‘새사람’으로 만들어 주시려고 이 세상에 오신 분입니다.
그리고 ‘새사람’으로 변화된 우리를 하느님 나라로 데려가시는 분입니다.
그 일은 예수님 혼자서 하시는 일이 아니라,
우리 쪽에서도 ‘새사람’으로 변화되려고 노력해야 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은총과 우리의 노력이 합해져서 구원이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을 만나서 완전히 새롭게 변화된 사람들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은 바오로 사도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고 그리스도교를 박해했던 그는 어느 날 갑자기 예수님을 만나서
완전히 변화되었고, 완전히 새사람이 되었습니다(사도 9장).
그것은 예수님의 은총과 바오로 사도 자신의 응답이 합해져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다른 사도들은 대체로 서서히 단계적으로 변화되었고,
오순절 날 성령을 받고 나서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사도 2장).
배반자 유다의 경우에는 처음에는 어느 정도 변화가 있었겠지만,
나중에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갔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예수님을 배반했습니다.

오늘날의 신앙인들 가운데에도 바오로 사도처럼 세례를 받을 때 한 순간에
변화되어서 새사람이 되는 사람도 있고, 다른 사도들처럼 신앙생활을 하면서
서서히 단계적으로 변화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유다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한 번 변화되었다고 안심할 수는 없고,
날마다 새로워지려고 노력하고, 또 계속해서 ‘새사람’으로 살아가려고 노력해야
비로소 ‘새사람’으로 변화되는 일이 완성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 변화 자체는 신앙생활의 목적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의 목적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과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변화는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방법입니다.
그러니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때까지, 또 구원받는 일이 완성될 때까지
‘새로워지려는 노력’을 계속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나는 주님 안에서 분명하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더 이상
헛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다른 민족들처럼 살아가지 마십시오(에페 4,17).”
“여러분은 예수님 안에 있는 진리대로, 그분에 관하여 듣고
또 가르침을 받았을 줄 압니다. 곧 지난날의 생활 방식에 젖어
사람을 속이는 욕망으로 멸망해 가는 옛 인간을 벗어 버리고,
여러분의 영과 마음이 새로워져, 진리의 의로움과 거룩함 속에서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창조된 새 인간을 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에페 4,21-24).”
세례를 받고 신앙인이 되었다면
신앙인답게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만일에 세례를 받은 후에도 새로워지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그래서 세례를
받기 전과 다르지 않게 산다면, 그것은 자기 스스로 세례의 은총을 헛일로
만들어버리는 일인데, 그런 경우에 대해서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경고합니다.
“우리의 주님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써 이 세상의 더러움에서
벗어난 그 사람들이 그것에 다시 말려들어 굴복을 당하게 되면, 그들의 끝은
처음보다 더 나빠집니다. 의로움의 길을 알고서도 자기들이 받은 거룩한 계명을
저버린다면, 차라리 그 길을 알지 못하였던 편이 나을 것입니다. ‘개는 자기가
게운 데로 되돌아간다.’ 그리고 ‘돼지는 몸을 씻고 나서 다시 진창에 뒹군다.’는
속담이 그들에게 그대로 들어맞았습니다(2베드 20-22).”
<“가다가 중단하더라도 간만큼 이익이다.” 라고 말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신앙 여정에서는, 가다가 중단하면
처음부터 가지 않은 사람보다 더 나쁘게 됩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동안 받았던 은총을 저버리는 것은
큰 죄를 짓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은총을 저버리는 사람들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경고하셨습니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그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 ......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루카 12,47-48).”>  


성령으로 새로 태어나야!

 -조욱현신부-


복음: 요한 3,1-8: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지 않으면...

니코데모는 예수님을 믿은 많은 사람’(요한 2,23) 가운데 하나였다. 그는 유대인들의 지도자였으나,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더 알고 싶어 밤에 비밀리에 찾아왔다. 요한복음 신학에 나타나듯이 밤은 죽음을 의미한다. 아마 니코데모는 이 밤으로부터 빛을 얻고자 하는 의도가 아니었을까 라는 것으로도 생각된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하느님에게서 오신 스승”(2) 하느님과 함께 일하시는 분이라고 하면서도, 예수님께서 바로 하느님이심을 아직 알지 못한다.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3) 이 말씀은 새로 태어나 올바른 가르침을 받지 않는 한, 우리는 하늘 나라에서 멀리 떨어진 바깥 어느 곳에서 방황하고 있을 것이란 말씀이다. 새로 태어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근본적인 변화를 의미하며, 그것이 바로 위로부터, 하느님으로부터 태어나는 것이다. 이렇게 태어나지 않으면 누구도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는 말씀이다. 위로부터 태어난다는 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태어나는 것이며, 새로 태어남으로 새로운 창조가 이루어지며, 새로운 창조물로서 그분을 더 깊이 알게 된다.

 

니코데모는 두 가지 태어남이 있지만 한 가지만 알고 있었다. 두 가지 태어남은 이렇게 볼 수 있다. 하나는 땅에서 비롯하고 하나는 하늘에서 비롯한다. 하나는 육에서 비롯하고 하나는 영에서 비롯한다. 하나는 죽을 운명에서 비롯하고 하나는 영원에서 비롯한다. 하나는 남자와 여지에게서 비롯하고 하나는 하느님과 교회에서 비롯한다는 것을 모두 알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 이미 늙은 사람이 어떻게 또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어머니 배 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야 없지 않습니까?”(4)라고 했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5) ‘물과 성령이란 바로 세례를 의미한다. 세례는 죽음과 부활의 상징이자 새로운 탄생이라고 한다. 부활한다는 것은 죽음 후에 새로 창조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듯이 세례로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이 태어났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물에 잠김으로써 죽은 것이며, 성령으로 말미암아 부활하여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물에 잠기는 것은 매장을 상징하고 머리를 물에서 들어 올리는 것은 성령을 통해 이루어지는 부활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육에서 태어난 것은 육이고 영에서 태어난 것은 영이다.”(6) 육이라는 것은 죄 때문에 죽음을 피할 수 없지만, 하느님의 성령께서는 썩음을 모르시고 죽음을 넘어 생명을 주신다. 그래서 신앙인들은 이 멸망을 초래하는 삶에서 우리 자신을 떼어 놓아야 한다. 육적인 삶은 죽음이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음을 동반하지 않는 삶의 방식을 찾아야 한다. “영에서 태어난 것은 영이다.”라는 것은 바로 성령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영적이다.”라는 뜻이며, 영예와 은총에 따른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마음 역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적인 것이 될 것이다.

 

이것이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7)는 말씀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영에서 태어난 이도 다 이와 같다.”(8) 우리는 바람이 소리를 내긴 해도 볼 수는 없는 것처럼, 영적으로만 볼 수 있는 탄생 역시 우리의 눈으로는 볼 수 없다. 또한 인간의 사고로는 파악할 수 없는 성령의 역사이다.

 

육신을 가진 우리는 언젠가 죽을 수밖에 없지만 성령이 주시는 생명은 인간의 능력과 삶이 다다를 수 없는 그 이상의 하느님께서 주시는 삶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변화는 우리가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사랑할 때에 이루어진다. 이렇게 하느님의 뜻을 우리가 받아들일 때 우리는 새로이 태어나게 되는 것이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하늘 나라의 시민이 되는 것이다. 이 미사 중에 우리가 진정으로 주님 안에 항상 새로이 태어나는 자 되고, 하느님의 자녀로서 살아가는 자 되도록 기도하자.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요한 3, 5)

-한상우신부-

다시 태어나는
성령의 길이
있습니다.

다시 태어나야
비로소 보게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쁨입니다.

다시 태어나는
기쁨을 성령께서
주십니다.

성령의 도우심이
우리에게는
필요합니다.

모든 것을
제자리로
되돌려놓으시는
성령이십니다.

육은 새로운
욕망을 주지만
성령께서는
새로운 삶을
주십니다.

성령께서는
이와같이
사랑의 마음을
주시며 육(肉)으로
뒤덮인 우리 삶을
영(靈)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거짓자아를
벗어나게 하시는
성령의 은총입니다.

생명의 길로
들어서게 하는
성령을 믿습니다.

성령께
이 모든 여정을
맡깁니다.


-오상선신부-


부활 시기가 진행되어 가면서 미사의 말씀은 조금씩 성령 강림을 준비합니다.

"그 사람이 밤에 예수님께 와서 말하였다"(요한 3,2).

예수님을 찾아온 니코데모가 바리사이에 최고의회 의원이었다니, 당시 이스라엘의 정치와 종교 분야에서 꽤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었을 겁니다. 예수님의 존재와 가르침, 행적에 대해서 호감과 신뢰가 있지만 주변의 눈치 때문에 당당히 예수님을 찾아오기가 어려웠겠지요.

"위로부터 태어남"(요한 3,3)
"물과 성령으로 태어남"(요한 3,5)
"영에서 태어남"(요한 3,8)

예수님께서 니코데모에게 새로운 탄생에 대해 이야기하시지만 그는 알아듣지 못합니다. 탄생을 육신의 어머니를 통한 출산에 국한해서 사고하기 때문이지요.

예수님께서 친히 보여 주실 부활은 죽음을 거쳐 새 생명으로 되살아남이지요. 우리가 살아가면서 체험할 수 있는 부활은 그동안 살아온 육적인 삶에서 벗어나 영 안에서 거듭 나는 것입니다. 육에 몰입되어 사는 삶 자체가 곧 죽음의 상태니까요.

오늘 니코데모가 보여준 두려움 섞인 조심스런 행보는 죽음과 새 생명의 경계에서 주저하는 기득권자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새 것을 얻기 위해서는 놓아야 하고 떠나야 하는데, 그로서는 지금껏 몸 담고 있는 영역이 죽음일 수 있음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으리라 짐작해 봅니다.

제1독서에서는 최고 의회에서 풀려난 베드로와 요한이 동료들과 함께 기도드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제 주님 저들의 위협을 보시고 주님의 종들이 주님의 말씀을 아주 담대히 전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사도 4,29).

그들은 위협과 공격을 없애달라고 청하지 않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담대히 말씀을 전하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놀랍지요! 좀 심하게 말하면 겁쟁이에 비겁하기까지 했던 제자들이 오순절 성령의 힘으로 거듭난 덕분입니다.

"그들이 모여 있는 곳이 흔들리면서 모두 성령으로 가득 차 하느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하였다"(사도 4,31).

그들이 느낀 흔들림은 외적인 현상뿐 아니라 내적인 감동까지 포함한 진동이었으리라 여겨집니다. 성령께서 임하시니 모두가 뜨겁고 역동적이며 강렬한 힘에 사로잡혀 하느님 말씀을 전하지요. 아주 "담대히!" 말입니다.

담대함은 확신에 찬 자신감에서 나옵니다. 그 근저에는 믿음이 단단히 자리하지요. 인간적인 자기 힘과 능력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예수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새 생명에 대해 무지를 넘어 모호하고 의뭉스러워 보이기까지 한 태도의 니코데모 역시 언젠가는 믿음에서 우러난 담대함을 증거할 때가 올 것입니다.

"이제는 죽음이 그분을 누르지 못하리라"(입당송).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더 이상 죽음의 영향을 받지 않으십니다. 죽음같은 두려움을 벗어버린 제자들도 마찬가지일 것이고요. 언젠가 니코데모도 그러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육신의 죽음과 부활을 포함해 지금 우리 각자의 삶에서, 죽음에서 새 생명으로 건너감이 무슨 의미일지 곰곰히 숙고하라고 오늘의 말씀이 초대하시는 듯합니다.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로 바람처럼 자유로이 자신을 내맡기고 살아가려면, 우리를 정박시킨 닻을 끊고, 그동안 안주했던 안전지대에 이별을 고하는 죽음 같은 결단도 필요하지요. 이렇게 부활은 삶의 곳곳에 매복되어 매 순간 피어날 수도, 사장될 수도 있는 선물입니다.

담대해지기

-김찬선신부-

http://www.ofmkorea.org/ofmhomily/339941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7년 4월 24일 부활 제2주간 월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