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4월 17일 부활 팔일 축제 내 금요일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져 보아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
(요한 21,1-14)
"Cast the net over the right side of the boat
and you will find something."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동료 사도들을 처음 부르셨던 루카 복음 5장 1-11절을 떠오르게 합니다. 실제로 오늘 복음 곧 요한 복음 21장은 복음서 전체 가운데 부록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이렇게 내용이 추가된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미사 전례를 위하여 “그때에”라고 복음을 시작하였지만 사실 오늘 복음의 성경 본문은 “그 뒤에”로 시작합니다. “그 뒤”는 초기 교회의 시작을 말하는 것이고, 예수님 부활 직후의 교회 공동체 시기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이 부록은 이 시기의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시는 이 방법을 통하여 앞으로도 교회 공동체에 당신을 드러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처음 제자들을 부르시던 때에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행동한 끝에 물고기를 많이 잡게 되었고, 이것을 계기로 ‘사람 낚는 어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요한 복음의 이 고기 잡는 기적은 예수님 부활 이후의 사건으로서 교회 공동체에 관계해서 전해집니다. 결론은 사람 낚는 어부를 넘어 처음에 없었던 ‘아침 식사’ 곧 ‘성찬례’인 미사가 거행됩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손수 마련하신 아침 식사인 성찬례를 통해서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인 교회가 만들어지고 유지됩니다. 그러기에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몸을 나누는 것이야말로 부활 신앙을 믿고 살아가는 우리의 가장 큰 임무라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박기석 사도요한 신부)

갈릴래아는 모든 것 위에 선교를 참 사명으로 삼는 삶이다.
-전삼용신부-
한 자매가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연애를 한 남자와 결혼을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남편의 외도와 도박과 폭력으로 이혼을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신부님을 찾아갔는데 신부님은 “이혼하는 것은 자유인데, 한 달만 더 살아보십시오. 이제 아내로 살지 말고 마지막으로 남편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마음으로 선교사라 생각하고 살아보십시오. 그래도 10년을 함께 살았는데 신앙인으로서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는 것 아닙니까?”라고 충고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그 자매는 한 달은 선교사로 더 참아낼 수 있을 것 같다며 그 충고를 받아들였습니다.
자매는 한 달 동안 시어머니가 잔소리해도 ‘나는 며느리가 아니다. 나는 선교사다. 저 할머니도 구원해야 한다.’라며 참았고, 남편을 대할 때도 ‘저 형제도 내가 구해야 하는 영혼이다.’라고 생각하며 대했습니다.
며칠을 지켜보던 남편이 왜 이렇게 사람이 달라졌느냐며 물었습니다. 그러자 부인은 “형제님, 저는 당신을 위해 한 달 동안 파견된 선교사예요.”라고 말했고, 그렇게 정말 자신에게 잘 대해주는 유일한 아내가 떠날까 두려워 남편은 자신이 잘할 테니 모든 것을 용서해 달라고 청했습니다. 그렇게 그 가정은 다시 축복을 받았습니다.
아내로 사는 것이 더 중요할까요, 선교사로 파견되어 사는 것이 더 중요할까요? 주님께서 우리를 파견하시는 이유는 아내라는 직무를 통해 선교하라는 목적입니다. 선교보다 높은 하느님의 뜻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궁극적으로 선교하러 세상에 파견되신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뜻을 따르시며 인간으로서 어떻게 하느님을 만나며 살아갈 수 있는지를 삶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은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세 번째 제자들에게 나타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베드로를 포함한 7명의 예수님 제자들이 밤새 물고기를 잡았지만 잡지 못하였습니다. 새벽에 멀리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순종하여 그물을 던졌더니 153마리나 되는 물고기가 잡혔습니다. 153은 ‘하느님의 자녀들’이란 히브리어의 숫자 값이고 7명의 제자는 7성사를 통한 하느님 자녀의 창조를 돕는 교회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것은 ‘기도’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도를 통해 얻는 답은 정말 예수님에게서 오는 것인지, 아니면 자기 생각인지 헛갈립니다. 그러나 많은 하느님의 자녀들이 그 말씀의 실천을 통해 탄생하는 것을 본다면 그 말씀이 그리스도에게서 온 것임을 의심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게 됩니다. 선교를 위해 기도함으로써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는 기쁨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고 채충석 요셉 형제는 서울대교구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선교왕이었습니다. 1998년 공덕동 본당 신자일 때 선교 대상을 받았었는데, 그분은 무려 7개월 동안 700여 명을 입교시킨 적도 있습니다. 그 후로도 꾸준히 선교하여 10여 년 동안 무려 3,000여 명 이상을 입교시켰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채 요셉 형제는 처음에 불교신자였고 아내는 가톨릭 신자였습니다. 제법 큰 사업을 경영하다 사기를 당해 한순간에 삶이 무너졌습니다. 매일 술로 울분을 달랬고 세상을 원망하며 지냈습니다. 몸이 망가져 심근경색으로 수술을 받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생존확률이 반반이라고 했습니다. 신앙이 두터웠던 아내는 본당 신부님과 수녀님에게 기도를 청했고, 본당의 신자들을 찾아다니며 백방으로 기도를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의사도 믿기 어려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수술하지도 않았는데 거짓말처럼 완치된 것입니다.
이 일을 계기로 그는 하느님을 믿게 되었고, 주신 은총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 보답하기에는 그것으로는 부족함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본당 선교분과장을 맡아 선교를 시작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대부분의 선교왕들은 선교는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마치 서울대 들어간 학생이 공부가 제일 쉬웠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 이유는 선교왕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선교하려고 하지 않고 성령의 힘으로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채 요셉 선교왕도 ‘기도’를 강조합니다.
“기도하지 않고서는 선교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선교도 성령과 함께 성령의 힘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힘으로 하지 않기에 힘들지 않은 것입니다. 채 요셉 형제는 한 시간 기도하면 세 시간만 선교한다고 합니다. 자신의 기도 시간에 오시는 성령의 힘이 정확히 언제쯤 사라지는지 아는 것입니다. 이런 분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기도할 시간이 부족한 것입니다. 음식을 먹지 않으면 배가 고파지는 것을 알기 때문에 굶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처럼, 하느님의 양식의 힘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기도를 굶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복음을 전하신 뒤 음식을 드셨느냐는 제자들의 질문에 당신의 양식은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은 영혼을 구하는 일이고, 아드님의 뜻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뜻에 순종할 때 배고프지 않습니다. 무력감이 사라집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당신도 음식을 주시지만, 당신 제자들이 잡은 물고기도 구워서 주십니다. 선교하는 가운데 얻은 하느님의 자녀들이 제자들에게도 힘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선교하기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배고픔을 느끼지 않고 항상 힘에 넘칩니다. 그런 자신을 보며 더는 그리스도께서 함께 계심을 의심할 수 없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이 누구신지 묻지 않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주님의 뜻은 선교밖에 없습니다. 선교를 위해 노력해봅시다. 선교를 위해 기도해봅시다. 이것이 갈릴래아의 삶이고 갈릴래아로 가면 반드시 그리스도께서 계십니다. 그리스도를 만나면 항상 배가 부릅니다.

-조재형신부-
평화신문을 읽으면서 가슴이 따뜻해지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유명한 학원 강사로 많은 돈을 벌었지만 수도승처럼 사신 선생님의 이야기입니다. 영어와 불어를 동시통역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분이었습니다. 학원 옥탑 방에는 작은 기도실을 만들어 시간이 되면 기도하신 분이었습니다. 충분히 존경받을 수 있고, 노년을 편안하게 지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선생님은 그물을 배 오른편으로 던졌습니다. 6년 동안 공부해서 침구사 자격증을 얻었습니다. 남미 페루의 작은 공소로 가서 아픈 사람들을 도와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환자들을 고쳐주신 것처럼 아픈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 주었습니다. 너무 과로해서 잠시 귀국했지만 몸이 좋아지면 다시 남미 페루로 가신다고 합니다.
교구의 선배 사제의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그분은 평화신문 미주 지사의 일도 하셨습니다. 원로사목자가 되신 후에 더 바빠지셨습니다. 신부님은 수경침을 배웠습니다. 배고픈 사람에게 빵을 주는 것도 좋겠지만 배고픈 사람에게 빵을 만드는 기술을 전해주는 것이 더 좋습니다. 신부님께서는 멕시코로 가서 사람들에게 수경침을 알려주고, 수경침을 보급했습니다. 사람들은 수경침을 배웠고, 아픈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었습니다. 멕시코가 너무 멀어 지금은 필리핀으로 다니시며 수경침을 알려주십니다. 신부님 역시 그물을 오른편으로 던졌습니다. 편안한 노년을 지내셔도 충분하지만 신부님은 더 힘들고 어려운 이들을 찾아다니십니다. 코로나19가 지나가면 다시금 수경침을 전하기 위해서 길을 떠나신다고 합니다.
한국은 코로나19를 효과적으로 막아내고 있습니다. 첨단 의료 체계, 신속한 검사, 투명한 공개, 시민들의 자발적인 협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물을 오른편으로 던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전염병이 퍼진 현장으로 달려간 간호사가 있었습니다. 마스크를 오래 착용해서 콧잔등에 상처가 났고, 밴드를 부쳐야 했습니다. 현장으로 달려간 의사가 있습니다. 방호복을 입으면 땀이 비 오듯이 흐르고, 답답했습니다. 그런 방호복을 5시간씩 입으며 환자를 치료하였습니다. 손으로 마스크를 만들어 전달한 83세의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성금을 전달한 어린이가 있었습니다. 한국이 코로나19를 막아내고 있다면 이는 그물을 오른편으로 던진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물을 오른편으로 던지라고 하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물을 오른편으로 던졌습니다. 그러자 그물이 터질 만큼 고기가 잡혔습니다. 오른편은 단순히 방향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른편은 주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의미합니다.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동시통역의 길을 버리고 침구사가 되어 아픈 이를 도와준 선생님이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노년에 수경침을 배워 아픈 이를 도와주는 사제가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전염병이 퍼진 현장으로 달려간 간호사와 의사가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표징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부활은 우리가 주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따라야 한다는 표징이기도 합니다.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 그래서 제자들이 그물을 던졌더니, 고기가 너무 많이 걸려 그물을 끌어 올릴 수가 없었다.”

실패의 밤을 건너온 우리에게 건네시는 주님 위로의 말씀, 와서 아침을 먹어라!
-양승국신부-
낚싯대를 드리우고 앉아있다 보면 꼭 그런 사람 있습니다. 제발 그냥 좀 지나가주면 좋겠는데, 꼭 물어봅니다. “많이 잡으셨어요?” “뭐 좀 잡히나요?” 어떤 분은 더 사람을 난감하게 만듭니다. 잡은 고기를 가둬놓은 망까지 들어 쳐다봅니다.
큰 놈으로 몇 마리 건진 날은 어깨가 으쓱하지만, 피라미 새끼 한 마리 못 건진 날은 창피하기도 하고, 그러는 사람들 보면 은근히 화까지 납니다. 제자들 심정도 마찬가지였겠지요. 밤새 티베리아스 호수 여기저기를 다니면서 백방으로 노력해봤지만 단 한 마리 못 잡았습니다. 말을 건넬 힘도 없어 다들 묵묵히 먼산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런 제자들을 향해 저 멀리서 누군가 손나팔을 모아 외칩니다. “애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 제자들 심기는 더 불편해졌겠지요. “젠장, 불난데 부채질이야 뭐야? 저 사람은 왜 신새벽부터 나타나서 남의 속을 긁는 거야, 도대체 저 양반 뭐 하는 사람이지?” 그러나 제자들은 불편한 심기를 애써 억누르며 대답합니다. “못잡았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포인트를 딱 잡아주시면서 조언을 건네십니다. “그물을 배 오른 쪽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 그분의 말씀에 제자들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습니다.
‘저 사람이 지금 누굴 놀리나? 우리는 이 바닥에서만 경력이 30년인 전문직 어부들이야! 누가 누구를 가르키고 있어 정말!’그러나 포스와 위엄이 잔뜩 느껴지는 그분의 말씀에 압도된 제자들은 못마땅해 하면서도 그물을 배 오른 쪽에 던졌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거짓말 같은 일이 생겼습니다. 얼마나 많은 물고기가 잡혔던지, 그물이 터져나갈 정도였습니다. 그제야 눈치빠른 요한 사도가 알아차렸습니다. 베드로에게 보고를 합니다. “주님이십니다.”
잡힌 물고기는 총 153마리였습니다. 예로니모 성인에 따르면 고대 자연과학자들은 세상 모든 물고기의 종류를 153가지라고 여겼습니다. 세상 모든 민족들이 주님의 그물 안으로 총집합하게 될 것임을 암시하는 징표가 그물 속에 든 153마리의 고기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잡힌 물고기를 몇마리 갖고 오라고 하시고는 손수 숯불을 피우셔서 노릇노릇 맛있게 구으시고, 빵도 꺼내놓으시고는 외치십니다. “와서 아침을 들라.”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자상하고 따뜻한 성당오빠, 낚시오빠 인증입니다. 참담한 실패의 밤을 보낸 허기진 제자들 앞에 손수 빵과 물고기를 대령하시는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은 최후의 만찬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날 새벽 티베리아스 호숫가 제자들의 마음은 착찹함 그 자체였습니다. 하늘처럼 믿었던 스승님께서 그리도 무기력하고 끔찍하게 세상을 떠나신후, 제자들은 삶의 의미요 기둥이 무너져버렸습니다. 사는게 사는게 아니었습니다. 가만히 앉아 있다가는 돌아버리겠다는 생각에, 몸이라도 좀 움직이면 나을까 싶어, 야간 작업을 나간 것입니다.
고기라도 넉넉히 잡혀주었다면, 매운탕이라도 끓여놓고 술이라도 한잔 하면서 쓰라린 심정을 달랠 수 있었을텐데, 그날 따라 단 한마리도 못잡았습니다. 뭘해도 안되는 자신들의 처지가 한심하기도 하고 비참하기도 해서, 큰 상심에 빠져있는 제자들 사이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등장하십니다. 스승님의 부재상태에서 임재상태로 상황이 전환되자 우울했던 제자단 분위기는 급반전됩니다.
주님이 계시지 않던 밤 바다는 어두웠던 실패의 밤이었지만, 날이 밝아오면서 이른 아침의 신선함 속에 주님께서 다가오셨습니다. 주님의 현존과 부재 사이의 차이는 엄청납니다. 주님께서 우리 내면에, 우리 공동체 안에 부재하실 때 풍기는 분위기는 절망과 낙담, 우울함과 나약함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우리 공동체 안에 활발히 현존하실 때 풍기는 분위기는 기쁨과 희망, 따스함과 풍요로움, 강한 생명력과 낙천성입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절망과 시련의 바다를 항해하는 우리를 향해 다가오십니다. 손수 맛갈지고 따뜻한 밥상을 차려주십니다. 실패와 좌절 속에 힘겨워하는 우리에게 위로와 격려를 아끼지 않으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오늘 이 아침에도 실패의 밤을 지새운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다정한 위로의 한 말씀을 건네십니다.“와서 아침을 먹어라.”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지금까지 고수해온 낡은 삶의 방식을 버리고 새로운 계명을 선택하라는 초대입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더불어 이제 새로운 세상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세상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질서 속에 새로운 판으로 바뀌었습니다. 우리가 헛된 망상의 그물을 거두어들이고 주님께서 건네시는 새로운 그물을 펼칠때 놀라운 사랑의 기적은 계속될 것입니다.

와서 아침을 먹어라.”(요한 21,12)
-이영근신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두 번씩이나 발현하셨건만, 제자들은 자신들의 사명을 깨닫지 못했을 뿐 아니라 절망에 빠져있고 과거의 생업이었던 고기 잡는 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밤새 한 마리의 고기도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을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어주셨건만, 그들은 자신들의 주제파악을 하지 못하고 엉뚱한 곳에서 그물을 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절망과 실의에 빠져 엉뚱한 곳에 그물을 던지고 있는 제자들의 삶의 현장으로 찾아오시어 말씀을 건네십니다.
“그물을 배 오른 쪽에 던져라.”(요한 21,6)
그들이 그렇게 하자,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이 잡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새 날 아침을 열치시고 오시어, 숯불을 피워 고기를 구워서 식사를 준비하시고 부르십니다.
“와서 아침을 먹어라.”(요한 21,12)
주님을 먼저 알아본 이는 요한이었지만, 그분께 먼저 달려간 이는 베드로였습니다. 요한은 관조적이고 베드로는 열정적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요한은 사랑을 받은 이가 되고, 베드로는 일을 맡은 이는 이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른 것은 와서 시중들라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께서 그들에게 시중을 드시려고 부르신 것입니다. 사랑하시려고 부르신 것입니다. 당신께서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게 하고 깨우쳐주고자 하신 것입니다. 비록 제자들은 당신을 버리고 도망쳤지만, 그리고 절망과 실의에 빠져 있지만, 당신께서는 그들을 소중히 여기십니다.
‘숯불에 구운 물고기’는 수난 받으신 당신의 몸을 드러내준다고 볼 수 있습니다. ‘빵’은 십자가에서 찢어지고 바수어진 당신의 몸을 드러내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당신 자신을 바쳐 부활생명을 담은 사랑의 아침 밥상을 차려주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할 일은 먼저 당신의 밥상을 받아먹는 일인 것입니다. 먼저 베풀어진 당신의 시중을 받는 일, 먼저 베풀어진 당신의 사랑을 먹는 일입니다. 그래야 당신의 색깔을 드러내고, 당신의 향기를 뿜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먼저 알아야하는 것은 당신이 주님이심을 아는 일일 것입니다. 당신의 사랑을 아는 일이요, 그리고 그 사랑을 먹는 일일 것입니다. 그래야 그 사랑을 증거 하고 부활생명을 증거 하게 될 것입니다. 곧 저희의 삶으로 당신께 상을 차려 올려야 할 일입니다. 형제를 섬김으로 생명의 밥을 짓고, 말씀의 시중으로 반찬을 마련해야 할 일입니다. 희망과 믿음과 사랑의 국을 끓이고, 의탁과 내맡김의 생선을 구워 드려야 할 일입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은 제가 저의 삶으로 당신께 상을 차려 올리렵니다.
내 형제들을 섬김으로 생명의 밥을 짓고, 말씀의 시중으로 반찬을 마련하겠습니다.
희망과 믿음과 사랑의 국을 끓이고, 의탁과 내맡김의 생선을 굽겠습니다.
오늘은 주님께서 오시어 아침을 드십시오. 사랑합니다. 주님!!
-오늘 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와서 아침을 먹어라.”(요한 21,12)
주님!
이 아름다운 아침, 당신이 차려주신 생명의 밥을 먹고 새로워지게 하소서.
배추 잎을 먹고 자란 배추벌레가 배추색깔이듯이, 당신 생명과 사랑을 먹고 자란 제가 종일토록 당신의 색깔을 내고, 당신의 향기를 품게 하소서.
저의 삶이 당신께 차려 올리는 밥상이 되게 하소서.
형제 섬김으로 생명의 밥을 짓고, 말씀 시중으로 반찬을 마련하게 하소서.
희망과 믿음과 사랑의 국을 끓이고, 의탁의 생선을 굽게 하소서. 아멘.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반영억신부-
우리 앞길에는 항상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이 놓여 있습니다. 이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며 살아갑니다. 오르막길은 어렵고 힘들지만 보람도 있고 기쁨도 있습니다. 그러나 내리막길은 쉽고 편하지만 밋밋하고 지루하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기왕이면 쉬운 길을 택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지나고 보면 거듭나는 길은 어렵고 힘든 것을 통해서 입니다. 어려움을 겪지 않고는 결코 새로 태어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옛 사람들은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 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후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과 함께 있었는데 그는 “나는 고기 잡으러 가네.”하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다른 제자들도 “우리도 함께 가겠소.”하였습니다. 일상으로 돌아간 고된 삶의 현장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밤새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셨고 그래서 마음을 잡을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 밤새 고기를 잡지 못할 수밖에요. 어느덧 아침이 될 무렵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하며 그들에게 말하였지만 그들은 그분이 예수님인 줄을 알지 못했습니다.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라는 예수님의 물음은 이미 빵을 준비해 놓고 당신의 식사를 더 풍요롭게 할 수 있는 물고기의 유무를 물으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나의 부활 식사를 위해 너희가 할 수 있는 몫이 무엇이냐?’그분의 나눔에 우리 역시 무엇인가를 준비하기를 바라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불행이도 제자들은 예수님의 식사를 위해 아무것도 준비할 수 없었습니다. 밤새 애섰으나 그들의 손에는 그 어떤 것도 잡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힘없이‘못잡았습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자신들이 먹을 양식조차 구하기 힘든 무력함과 고단함이 느껴지는 이 자리에 예수님께서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이르셨고 이 말씀을 받아들인 순간 나눔의 자리는 풍성해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하고 이르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그물을 던졌더니 고기가 너무 많이 걸려 그물을 끌어 올릴 수가 없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가 베드로에게“주님이십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베드로는 덜컥 겁을 먹고 호수로 뛰어들었습니다. 자신의 힘이나 능력으로는 도저히 감당해 내지 못할 사건이 예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을 내려놓는 포기를 통해 예수님을 제대로 만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받는 제자는 누구보다 빠르게 주님을 알아봤고, 베드로는 빠르게 행동한 사람으로 기억됩니다. 깨달음과 행동의 조화로움이 어디에서든지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방금 잡은 고기 몇 마리를 직접 요리하시고 빵을 들어 그들에게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주셨습니다. 제자들 가운데는 “누구십니까?”하고 감히 묻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분이 주님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아본 것은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지고 난 후 입니다. 이른 아침 왠 젊은이가 나타나서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했는데 그들이 어부라는 자기의 자존심을 내세워 그대로 행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그들은 여전히 주님을 알아 뵙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행하였습니다. 그야말로 순명을 한 것입니다. 순명은 주님을 알아보는 눈을 뜨게 했고, 많은 고기를 낚는 기적을 낳기도 했습니다. 순명은 이성과 판단의 희생입니다. 어부의 자존심을 포기하는 행위입니다. 그리고 이 희생은 다른 어느 것보다 주님의 마음에 드는 것이었습니다. 삶이 우리 뜻대로만 되지 않는데서 오는 포기의 순간이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근심과 걱정, 실망과 좌절 속에서도 주님께서는 여전히 함께하십니다. 다만 문제에 집착해서 그분의 손길을 느끼지 못할 뿐입니다. 내 것을 내려놓고 주님의 뜻에 나를 맞추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제자들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예수님을 잃은 것이 더없이 큰 아픔이었지만 주님의 부활을 통해 믿음을 키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살아계실 때 수 차례 당신의 수난과 죽음, 부활을 예고했지만 제자들은 그것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더 이상 “누구십니까?”하고 묻지 않았습니다. 지금의 어려움을 거듭날 수 있는 기회로 알고 기뻐하는 오늘이기를 기도합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일곱 제자에게 나타나시다.
-송영진신부-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 때,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요한 15,5).”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21장에 있는 ‘고기잡이 기적 이야기’는, 제자들이 예수님 없이
무엇인가를 하려다가 아무것도 못하게 되었다가 예수님의 지시에 순종하면서
많은 열매를 맺었다는 이야기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선교활동을 포함해서 신앙인이 신앙인으로서 하는 모든 일은, 겉으로 보기에는
‘내가’ 하는 일로 보이지만, 내가 나 혼자서 하는 일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하는 일이고, 사실은 주님께서 하시는 일을 내가 도와드리는 일입니다.
그런데도 그것을 잊어버리고 자신만의 힘으로 무엇인가를 해 보겠다고
덤벼들었다가는 아무것도 못하게 되어버립니다.
세속의 눈으로 보면 어떤 성과를 거둔 것으로 보일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눈으로 보면 예수님 없이, 또 예수님과 상관없이 거둔 성과들은
아무것도 아닌 일입니다.
실제 인간 세상의 모습을 보면, 허무하게 무너질 바벨탑을 쌓아놓고서
그것을 자신의 업적이라고 자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성전 파괴 예고 말씀이 좋은 예입니다(루카 21,5-6).
솔로몬이 지었던 예루살렘 성전은 유다 왕국이 멸망할 때
파괴되었는데(2열왕 25,9), 헤로데 왕이 성전을 재건했고,
그 성전은 대단히 웅장하고 아름다웠다고 전해집니다.
하지만 헤로데가 지은 성전도 로마제국을 상대로 한 독립전쟁 때
또다시 파괴되었고, 오늘날까지 복구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헤로데가 성전을 재건한 것은 신앙심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업적을
과시하기 위해서였고, 또 그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던 사제들은
성전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습니다(루카 19,46).
그러니 그런 건물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지 않을 정도로’
허물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오늘날의 우리도 신앙생활을 한다는 명목으로
그런 어리석은 짓을 할 때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한다면서 실제로는 ‘사람의 일’을 하고,
주님을 위한 일이라고 내세우면서도 실제로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일하고,
올바르게 주님을 섬기지 않으면서 자신의 업적만 과시하고......
물론 처음부터 그렇게 잘못된 마음으로 한 것이 아닌 경우도 많습니다.
시작할 때에는 사심 없이 순수한 마음으로 시작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일을 하다가 주님을 잊어버리고 ‘일만’ 생각하는 때가 있고,
일의 성과에만 집착하기도 하고,
그러다가 결국 아무것도 아닌 일로 전락하게 됩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하든지 선교활동을 하든지 간에,
신앙인으로서 어떤 일을 할 때에는 기도부터 해야 하고, 기도하면서 해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예수님 없이 하는 일이 되어버립니다.
“시몬 베드로가 그들에게 ‘나는 고기 잡으러 가네.’ 하고 말하자,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소.’ 하였다. 그들이 밖으로 나가 배를 탔지만
그날 밤에는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다(요한 21,3).”
이 이야기 끝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세 번째로 나타나셨다는 말이 있기
때문에(요한 21,14) 지금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이미 두 번이나 만났고,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이라는 충격과 슬픔에서 벗어나서
부활 신앙을 갖고 있는 상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야기 전체를 상징으로 생각하면, 고기를 잡으러 가겠다는 베드로 사도의 말은
‘사도로서’ 무엇인가를 하겠다는(선교활동을 하겠다는) 말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 아직 예수님을 만나기 전이라면, 고기를 잡으러 간다는 말은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먹고살 궁리나 하겠다는 뜻이 되겠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뒤라면
먹고살기 위해서 고기를 잡으러 가겠다고 말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어쩌면 베드로 사도는 처음에 부르심을 받을 때 예수님께서 하셨던 말씀,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루카 5,10).” 라는 말씀을
기억해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무엇인가를 하려고 나서긴 했지만
‘예수님 없이’ 자신들만의 힘으로 하려고 했습니다.
여기서 ‘밤’은 ‘예수님 없는 시간’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즉 제자들이 예수님 없이 자신들만의 힘으로 일하는 상황을
상징하는 시간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자신들만의 힘으로 충분히 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얻지 못했습니다.)
“어느덧 아침이 될 무렵, 예수님께서 물가에 서 계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분이
예수님이신 줄을 알지 못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 하시자, 그들이 대답하였다. ‘못 잡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
그래서 제자들이 그물을 던졌더니, 고기가 너무 많이 걸려
그물을 끌어 올릴 수가 없었다(요한 21,4-6).”
여기서 ‘아침’은 정신을 차리는 시간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제자들은 예수님께 도와달라고 기도를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데,
완전히 정신을 차리기 전에, 아직도 자기들의 생각에만 사로잡혀 있을 때에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던 것일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람의 지시에 순종한 것인지,
그들 중에 일부가 예수님을 알아보고 순종한 것인지 확실하지 않은데,
어떻든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았든지 아니든지 간에 예수님의 말씀에는
거역할 수 없는 힘이 들어 있었고,
제자들은 그 힘에서 예수님의 힘을 느꼈을 것이고, 그래서 그 힘에 순종했습니다.
중요한 점은 예수님의 지시에 순종해서 놀라운 기적을 보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예수님 없이는 아무것도 못하지만, 예수님과 함께라면
사람의 생각을 초월하는 위대한 성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잡은 고기의 수 ‘153’은 ‘놀라운 성과’를 상징합니다.
< 오순절 날 성령을 받은 사도들이 설교했을 때,
그날 하루 세례를 받은 사람의 수가 ‘삼천 명’이었는데(사도 2,41),
‘삼천’은 ‘153’처럼 ‘놀라운 성과’를 나타내는 숫자입니다.
그런데 사실 숫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령으로 충만해진 사도들의 모습입니다.
사도들의 모습을 보면, 유대인들이 무서워서 문을 잠가 놓고 숨어 있었던 때의
모습은(요한 20,19) 완전히 사라졌고, 성령 덕분에(함께 계시는 예수님 덕분에)
믿음과 용기와 열정으로 가득 차 있는 위대한 사도로 변화된 모습입니다.>

베드로의 주님 사랑
-조욱현신부-
복음: 요한 21,1-14: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져 보아라.
예수님께서는 티베리아스 호숫가에서 제자들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셨다. 베드로와 토마스, 나타나엘, 제베대오의 아들들 그리고 다른 두 제자들이 함께 있었는데, 베드로가 “나는 고기를 잡으러 가네.”(3절) 하자 모두 함께 고기를 잡으러 갔다.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 주님께서 성령을 불어 넣어 주셨는데, 제자들은 갑자기 예전의 직업, 고기를 잡는 어부로 돌아갔다. 사도라는 직책도 자기 스스로 생계를 해결하는 것을 금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밤에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다.
그들이 일하다가 지쳤을 때, 예수님께서 그들 앞에 나타나신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고기잡이를 하는데 한 마리도 잡지 못하는 것을 보신다. 그분은 그들과 대화를 나누느라 당신이 누구신지를 드러내지 않으신다.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 하시자 “못 잡았습니다.”(5절) 예수님께서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6절) 제자들은 스승님을 뵙고, 그분의 말씀대로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잔뜩 잡았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물가에 서 계셨다. 제자들은 배에 있었다. 다른 제자들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는데,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가 그분을 알아보고, 베드로에게 “주님이십니다.”하고 말하였다.(7절) 그 말을 듣고 베드로는 그분께로 달려갔다. 다른 제자들이 고기가 든 그물을 끌고 왔다.(8절) “그들이 뭍에 내려서 보니, 숯불이 있고 그 위에 물고기가 놓여 있고 빵도 있었다.(9절) 제자들의 아침을 준비해주신 것이다. 여기에는 깊은 의미가 있다.
물고기의 모습은 바로 예수님의 모습이다. 물고기가 음식이 되기 위해서는 물 밖으로 나와야 하며, 죽어야 하고 그리고 불에 구워져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아들로서 인간들에게 구원의 원천이 되기 위하여, 당신의 신성을 버리시고 즉 물 밖으로 나오셨고 죽으시고(십자가 형) 영광을 받으셨고(성령의 불꽃) 우리를 구원하셨다. 이제는 우리의 삶도 이러해야 하는 것이다. 나의 고집으로부터 나의 선입견에서 과감히 벗어나(물 밖으로 나옴),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나 자신이 죽는 삶(죽음)으로 부활의 기쁨을 체험하는 삶(성령의 불로 타오름)이 되어 다른 사람에게 생명의 양식이 되는 삶이(“와서 아침을 먹어라”(12절)) 되어야 한다.
고기가 물속에 있으면서는 음식이 될 수 없다. 밖으로 나와야 한다. 우리 자신 항상 나의 편견이나 아집에서 하느님을 향해 끊임없이 탈출하는 삶이 필요하다. 여기에 우리의 삶의 근본적인 변화와 하느님 안에 기쁨이 있다.
다음으로 153마리에 대한 것이다. 이 100이라는 숫자는 앞으로 그리스도에게로 모이는 이방인들이 가득 찬다는 의미일 수 있다. 그리고 50 역시 완전한 숫자 7의 일곱 배와 1이 더해진 숫자이다. 50은 여기서 또한 충만한 숫자이다. 희년이 50년마다 오고 있다. 이것은 모일 수 있는 이스라엘 백성의 수를 뜻한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마지막으로 3은 삼위일체를 뜻하며 모든 것은 그 영광을 위하여 이루어진다는 뜻이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10은 10계명을 의미하며, 7은 성령을 나타내는 수이다. 그래서 1부터 17까지를 더하면 153이 된다. 이 숫자는 계명과 성령 안에서 은총을 나누는 모든 사람의 수를 상징한다고 한다. “방금 잡은 고기를 몇 마리 가져오너라.”(10절)
153은 물고기의 종류가 또한 그만큼 된다는 것으로 모든 종류를 포함한다는 의미이고, 고기가 그토록 많이 잡혔는데도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교회라는 그물은 아무리 많은 나라의 백성들이 들어와도 그 모두를 받아들일 만큼 충분하다는 것이다. 이 그물을 베드로가 끌어올렸다는 것은 그의 역할로서, 백성들을 모아 사도들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기능을 가리키고 있다고 보고 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와서 아침을 먹어라.”(12절) 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잔치를 벌이신다. “예수님께서는 다가가셔서 빵을 들어 그들에게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주셨다.”(13절)
물에서 나와 인간의 음식이 되는 고기처럼, 하느님이신 아드님이 사람이 되시어 인간의 구원의 빵이 되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 우리도 같은 삶으로 그분께 영광을 드리는 삶을, 그분을 닮아 가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주님의 도움을 청하자.

못 잡았습니다.(요한 21, 5)
-한상우신부-
끝내 어리석음만
반복하는 우리들
삶입니다.
아무 것도
못 잡은
그 자리에서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패배와 실패를
정직하게
인정하는 그 삶이
신앙인의 참된
자세입니다.
인정할수록
깊어지는 부활의
관계입니다.
정직하게
인정할 때
나아갈 방향을
다시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나아갈
방향은 생활의
힘찬 부활입니다.
서로에게 정직한
그 자리가
부활의 자리입니다
그 자리에서
다시 만나게 되는
뜨거운 부활입니다.
실패한 그 자리가
부활의 힘찬
첫 시작이 됩니다.
실패를 뚫고
찾아오시는
부활의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요한 21, 6)
다시 생활로
또 생활에서
만나게되는
생활의 부활입니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인간 존재 깊은 곳에 있는 질문을 끌어올립니다. 그 질문은 다름 아닌, 바로 "누구십니까?"(요한 21,12)입니다.
"어느덧 아침이 될 무렵, 예수님께서 물가에 서 계셨다"(요한 21,4).
예수님의 부재 상태에서 제자들은 생업으로 돌아가 배를 탑니다. 그런데 밤새 애쓰고도 물고기를 한 마리도 못 잡은 채 아침을 맞지요. 이미 스승의 죽음으로 실패의 상흔이 깊은 터인데 고기잡이마저 실패의 연속이니 그 착찹함이란 이루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옷을 벗고 있던 베드로는 겉옷을 두르고 호수로 뛰어들었다"(요한 21,7).
주님이시라는 말에 베드로가 당장 움직입니다. 허둥지둥 물에 뛰어들면서도 잊지 않고 옷을 걸치는 걸 보면 스승께 예를 갖추고 싶은 것 같습니다. 베드로의 행동에서 한시라도 먼저 주님을 만나고 싶은 마음이 읽힙니다.
주님의 부재가 제자들을 얼마나 공허하고 두렵게 했는지, 불안과 외로움, 패배감으로 움츠리게 만들었는지 느껴집니다. 흡사 목자 잃은 양들과 같았을 겁니다. 풍선처럼 부풀었던 기대가 컸던 만큼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어버린 상태는 허무하기 그지 없습니다.
"'누구십니까?' 하고 감히 묻는 사람이 없었다. 그분이 주님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요한 21,12).
그들은 예수님의 지시대로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잡게 되었던 기억이 있습니다(루카 5,1-11). 또 빵과 물고기로 군중을 먹이신 일도 또렷하게 남아 있지요. 그러니 오늘 만난 이분이 부활하신 예수님이심을 의심할 수 없습니다.
제1독서에서는 치유받은 이의 일로 베드로와 요한이 붙잡힙니다. 특히 부활이 없다고 믿는 사두가이들에게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증언은 매우 민감한 사안이기도 하지요.
"당신들은 무슨 힘으로 누구의 이름으로 그런 일을 하였소?"(사도 4,7)
유다 지도자들, 원로들, 율법 학자들이 묻습니다. 보아하니 단순한 어부에 불과한 두 사도에게서 그런 능력이 나왔을 리는 없고, 그들을 통해 움직이는 다른 힘에 대해 알고 싶은 겁니다. 이 질문은 "그분이 누구십니까?"와 다르지 않습니다. 그들이 진짜로 듣고 싶은 대답은 이미 그들 안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두려움의 수면 아래로 은폐한 이름을 그들이 모를 리 없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사도 4,10)
답은 명쾌합니다. 이 이름 밖에는 아무 대가 없이 이런 기적을 일으킬 존재가 없습니다. 무상의 은총으로 조건 없이 구원을 베푸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 뿐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다가가셔서 빵을 들어 그들에게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주셨다"(요한 21,13).
이스라엘은 목자이신 주님을 "상을 차려 주시는 분"(시편 23,5 참조)으로 노래합니다. 밤새 지친 제자들을 위해 이 새벽에 손수 빵과 물고기를 구워 건네시는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참된 목자이십니다. 빵은 당신 몸이고, 물고기(익투스)는 박해 받는 그리스도인들 간에 "하느님의 아들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은밀한 표상으로 초대교회 때부터 전해졌지요.
예수님은 빵도 주시고 물고기도 주시면서 당신을 주고 또 주십니다. 형체가 다 없어질 때까지 아낌없이 다 내어 주십니다. 부활은 어쩌면 당신이 온전히 비워질 때까지 다 내어주시고 빈 무덤이 되신 예수님의 고유한 현존 방식일 겁니다. 이런 예수님 앞에서 누구도 "누구십니까?" 하고 물을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영적인 삶을 무엇에 비길 수 있을까요. '주님의 현존과 부재의 리듬 안에서 파도 타기'라 하고 싶습니다. 주님을 잃은 공허감이 큰 만큼 그분을 만나려는 걸음도 빨라지겠지요. 그분께 달려가는데 체면도 위선도 거추장스럽습니다. 그리움이 컸으니 해후의 갈망도 절실합니다. 허둥지둥 주님을 향해 호수에 뛰어드는 베드로가 남 같지 않습니다.
그런데 부재도 주님의 현존 방식 중 하나입니다. 자상히 상을 차려주시고 빵을 건네시는 것 못지 않은, 그분다운 동행 방식입니다. 그분은 없는 듯 함께하고 계시지요. 그러니 벗님! 두려워 말고 우리 담담히 나아갑시다. 그분이 계시지 않는 것 같은 공허와 어둠 속에서도, 충만한 사랑으로 우리를 가득 채워주실 때에도 변함없이 "당신 백성을 안전하게 이끄시는"(입당송) 주님이시니까요.

이름의 힘
-김찬선신부-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떨었다고 할 때처럼
듣기만 해도 떨게 하는 이름이 있습니다.
'이름만 대면 통과!'라는 말도 있습니다.
이것이 다 이름에 힘이 있다는 얘기지요.
그러나 모든 이름이 힘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누구의 이름을 대면 '그게 누군데?' 하는 이름도 수두룩하고,
반대로 아버지가 누구시냐고 물어서 누구시라고 하면
즉시 대하는 것이 달라지는 그런 경우도 있지요.
그러니까 아무 이름이나 힘이 있는 것이 아니고
힘 있는 사람의 이름이 힘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사도행전에서 유대 지도자들은 제자들이
무슨 힘으로 그리고 누구의 이름으로 불구자를 고쳤는지 묻습니다.
"당신들은 무슨 힘으로, 누구의 이름으로 그런 일을 하였소?"
유대 지도자들도 힘이 있는 사람들이고
그래서 그들의 이름이면 통하는 곳이 있습니다.
이 세상 권력의 세계에서는 그들의 이름이면 다 통하지요.
그래서 그들은 힘과 이름의 관계를 알고 있는 것이고,
하지만 자기들의 힘이 통하는 것은 이 세속 안에서지
불구자의 치유와 같은 영역에서는 아니기에
그 치유가 누구의 힘에 의한 건지 묻습니다.
제자들은 그래서 예수님의 이름의 힘이라고 대답하는데
그저께 독서에서 불구자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치유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은도 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
우리가 그리스도교 신앙인이라면 무엇을 하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한다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우선 함부로 그러니까 자기 멋대로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함부로 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먹칠하지 않고 그리스도인 답게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그런 방식으로 하겠다는 겁니다.
우리가 하루에도 몇십 번 또는 몇백 번씩 주님의 기도를 바치며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를 외우는데 우리가 무엇을 하건
그것이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빛나게 하는 것인지 아버지 이름에
먹칠하여 이름이 지워지게 하는 것인지 자기검열을 하며 하겠다는 겁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오늘 사도행전의 제자들처럼
무엇을 하든 예수 그리스도의 힘으로 하겠다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일을 내 힘으로 하겠다거나
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어불성설語不成說?
그렇습니다. 속된 말로 바꿔 말하면
입으로 계속 뭐라고 씨부리지만 말이 되지 않는다는 뜻이지요.
우리가 하느님의 일을 하면서 내 힘 조금도 들지 않으려는 것도 문제지만
내 힘으로만 하려는 것도 문제이고 어찌 보면 더 큰 문제입니다.
왜냐면 내 힘들이지 않으려는 것은 꾀부리거나 게으른 것이지만
내 힘으로만 하려는 것은 무신론적인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뜻이 아버지의 힘/이름으로 이루어지기를 바라신 주님처럼,
이제 성령을 받아 무엇을 하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한 제자들처럼
하느님의 일은 주님의 이름으로 하기로 결심하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져 보아라.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요한 2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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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처음 제자들을 부르시던 때에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행동한 끝에 물고기를 많이 잡게 되었고, 이것을 계기로 ‘사람 낚는 어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요한 복음의 이 고기 잡는 기적은 예수님 부활 이후의 사건으로서 교회 공동체에 관계해서 전해집니다. 결론은 사람 낚는 어부를 넘어 처음에 없었던 ‘아침 식사’ 곧 ‘성찬례’인 미사가 거행됩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손수 마련하신 아침 식사인 성찬례를 통해서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인 교회가 만들어지고 유지됩니다. 그러기에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몸을 나누는 것이야말로 부활 신앙을 믿고 살아가는 우리의 가장 큰 임무라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박기석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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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세 번째 제자들에게 나타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베드로를 포함한 7명의 예수님 제자들이 밤새 물고기를 잡았지만 잡지 못하였습니다. 새벽에 멀리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순종하여 그물을 던졌더니 153마리나 되는 물고기가 잡혔습니다. 153은 ‘하느님의 자녀들’이란 히브리어의 숫자 값이고 7명의 제자는 7성사를 통한 하느님 자녀의 창조를 돕는 교회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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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힌 물고기는 총 153마리였습니다. 예로니모 성인에 따르면 고대 자연과학자들은 세상 모든 물고기의 종류를 153가지라고 여겼습니다. 세상 모든 민족들이 주님의 그물 안으로 총집합하게 될 것임을 암시하는 징표가 그물 속에 든 153마리의 고기인 것입니다.
-양승국신부-
---주님을 먼저 알아본 이는 요한이었지만, 그분께 먼저 달려간 이는 베드로였습니다. 요한은 관조적이고 베드로는 열정적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요한은 사랑을 받은 이가 되고, 베드로는 일을 맡은 이는 이가 됩니다.
-이영근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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