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4월 21일 부활 제2주간 화요일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영에서 태어난 이도 다 이와 같다
(요한 3,7ㄱ.8-15)
"‘You must be born from above.'
The wind blows where it wills,
and you can hear the sound it makes,
but you do not know where it comes from or where it goes;
so it is with everyone who is born of the Spirit."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오늘 독서는 예루살렘에 있던 초기 교회의 이상적인 모습을 간략하게 전해 주며, 그 공동체의 삶이 얼마나 복음에 충실하였는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사도행전의 저자인 루카는 예루살렘 교회 공동체가 완벽하게 복음을 따라 살았다는 사실보다는, 복음적인 공동체가 되려면 본질적으로 무엇이 필요한지를 제시하려 하였는지도 모릅니다.
초기 교회 공동체는 먼저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는 ‘물질의 나눔’을 실천합니다. 그러나 합법적인 재산의 소유를 부정하지 않으며 온전히 자기 결단에 따라 각자의 재산을 공동체의 유익을 위하여 내놓았습니다. 그 나눔을 실천하는 바탕에는 “한마음 한뜻”이 있습니다. 그리스에서 우정을 바탕으로 하는 ‘한뜻’은 단순한 친구 사이의 공유를 넘어 믿는 사람들 곧 신자들의 공통적인 신앙에서 비롯됩니다. 여기에 히브리식 개념인 ‘한마음’이 더해집니다. 유다인들은 전통적으로 기도의 시작을 알려 주는 표지로 ‘한마음’을 사용하였습니다. 따라서 믿는 사람들의 공동체가 주님과 이루는 일치와 구성원 간의 친교를 하느님 앞에 드러내고 기도할 때에 모두 한마음이 되어야 하였습니다.
그런 가운데 오늘 복음을 보면, 세속적인 개념의 차원에서 물질 그 자체에 얽매여 하느님 나라의 이상을 이해하지 못하는 니코데모가 등장합니다. 위로부터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하느님의 영 안에서 새로워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니코데모는 여전히 이를 깨닫지 못합니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예수님을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그러기에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아버지 하느님과 그 외아드님 예수님에 대한 우리 믿는 이들의 한마음 한뜻이야말로, 물질을 넘어 친교로 나아가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길이라고 하겠습니다.
(박기석 사도요한 신부)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아~ 나도 누가 사다 주는 햄버거를 저렇게 멋진 승용차 안에서 편히 앉아 먹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 차 안에서 햄버거를 먹고 있는 사람도 벤치에서 햄버거를 먹고 있는 청년을 바라보면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 나도 저 청년처럼 다리가 건강해서 햄버거를 사 먹으러 여기저기 돌아다닐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서로 다른 생각을 하면서 서로가 상대방을 부러워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런 모습이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이렇게 세상일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우리입니다. 내가 갖지 못한 것만을 바라보면서 감사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힘든 세상일이라며 불평불만을 갖는 우리입니다. 이렇게 세상일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는데 하물며 하늘 일을 제대로 볼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영에서 태어나서 하늘 일을 제대로 볼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니코데모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세상일을 이해하지 못했다면 하늘 일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니코데모에게 이해력의 부족만이 아니라 믿음의 부족도 탓하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것은 이해를 넘어서는 것이며, 따라서 그 가르침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은 믿음뿐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영으로 새롭게 태어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굳은 믿음을 가지고 주님을 받아들일 수가 있습니다. 가장 좋은 길로 우리를 이끌어 주신다는 믿음, 어떤 순간에서도 희망의 길을 열어주신다는 믿음, 그래서 진심으로 늘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우리를 위해 이 땅에서 오셨습니다. 믿는 사람들이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 사랑의 주님을 볼 수 있는 사람만이 행복의 길로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언젠가 어느 분이 거리에 있는 자판기를 두드리며 화를 내는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다. 자판기에 동전을 넣었는데 원하는 것이 나오지 않는다는 이유였습니다. 이 자판기를 관리하는 사람이 있다면 환불을 받든지 아니면 어떤 조치를 받겠지만 누가 관리하는지를 알 수 없는 거리에 세워져 있는 자판기라 어떻게 할 수가 없었겠지요. 결국 이분은 화만 내다가 그 자리를 떠나셨습니다. 그런데 이 자판기를 바라보면서 우리의 신앙도 이렇지 않나 싶습니다.
어느 신부님께서 자신의 책에서 ‘자판기식 신앙’과 결별해야 한다는 글을 쓰셨습니다. 즉, 자판기에 동전을 넣어 원하는 물건을 취하는 것처럼, 하느님께 원하는 바를 청해서 들어주시길 요구하는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공감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보다도 더 못한 신앙은 아닐까요?
거리의 자판기에는 돈이라도 넣지만, 신앙에 있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요구만 하는 것 같습니다. 마치 자판기에 돈도 넣지 않고 원하는 물건을 쏟아내라고 화를 내는 것만 같습니다. 기도나 봉사도 하지 않습니다. 사랑실천도 없습니다. 그저 하느님께 자기가 필요한 것만 달라고 합니다.
자판기 신앙을 뛰어넘어 ‘날강도 신앙’은 아닐까요?

우리를 하늘로 끌어올리는 성령의 바람은 십자가다
-전삼용신부-
1500년대 프랑스 카푸친 수도회에 성인으로 추앙받는 암브로시오란 수사 신부가 있었습니다. 어깨에 손바닥과 같은 특이한 점을 가진 채 수도원 앞에 버려져 아기 때부터 수도원에서만 산 수도사입니다. 그러나 그의 엄격함은 같은 수사들에게도 두려움을 주었습니다. 한 번은 고해성사를 보는 수녀가 임신한 사실을 알고는 원장 수녀에게 말하여 아주 심한 벌을 받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마귀가 암브로시오 수사를 넘어뜨리기 위해 아름다운 여인으로 변신하여 그 수도회에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암브로시오 수사에게 조금씩 명예와 건강에 신경 쓰는 사람으로 만들고 더 나아가 쾌락의 맛을 느끼게 해 줍니다. 결국, 그는 한 여인을 좋아하게 되는데,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자신의 여동생입니다. 마귀는 암브로시오 수사가 그 여인을 범하도록 도와줍니다. 그때 어머니가 들어와 자신도 모르게 어머니까지 살해합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자신을 찌르는 수도사의 어깨를 보고는 자기가 철모를 때 수도회에 버린 아들임을 깨닫게 됩니다. 암브로시오 수사는 어머니까지 죽이게 된 자신을 보며 비로소 정신을 차립니다.
암브로시오 수사에게 화형이 선고됩니다. 죽기 전에 그는 사탄과 타협을 합니다. 자신의 영혼을 줄 테니까 자신 때문에 미쳐버린 여동생을 정상으로 돌아오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아무래도 좋으니, 그녀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여동생은 정상으로 돌아오고 암브로시오 수사는 하느님 자비에 의탁하며 죽어갑니다. 영화 ‘더 몽크(수도사)’(2011)의 줄거리입니다.
저도 신학교에 들어왔을 때는 ‘어차피 사제가 되기로 한 것, 존경받는 사제가 되자!’라는 마음으로 산 적이 있었습니다. 극도의 절제 생활을 하였습니다. 새벽 3시 30분에 일어나서 혼자 성체조배 하였고, 식사는 고기를 먹지 않으며 하루 한 끼만 먹었습니다. 그래서 지금보다 15킬로가 덜 나갔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암브로시오 수사의 초기 모습과 비슷했다고 생각됩니다. 내 안에서 어둠의 힘이 더 강했던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그렇게 사는 삶이 ‘나 자신’을 높이기 위한 삶이었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하늘로 오르는 삶은 나 자신을 낮추어 이웃을 높여주는 삶입니다.
암브로시오 수사는 죽기 직전에 자신의 들어 높여짐이 아닌, 자신이 피해를 준 사람의 행복을 위해 지옥에 가는 것을 선택하였습니다. 자신을 잊지 않고 이웃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수도자가 되고 사제가 되어도 결국 자신이 들어 높여지는 사람이 되려는 마음을 가지면 실제로는 낮아지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암브로시오 수사에게 어머니의 피는 그 자아가 완전히 죽는 독이 되었습니다. 그 피는 암브로시오를 십자가에 못 박아 만인들 앞에 죄인으로 서게 했고 결국 누군가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릴 줄 아는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 안에서 하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는 성령과 같습니다. 성령은 십자가로 마치 엘리야를 들어 올린 바람처럼 우리를 하늘로 들어 올립니다.
오늘 복음도 어제와 이어지며 예수님께서 니코데모에게 새로 태어남에 관해 가르치시는 내용입니다. 사람은 행동을 바꿔서가 아니라 새로 태어남을 통해 구원에 이릅니다. 이는 니코데모와 같은 바리사이들에게는 매우 충격적인 이야기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니코데모는 ‘물과 성령으로 위로부터 새로 태어난다’는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해 주십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새로 나야 하늘로 올라갈 수 있는데, 예수님께서 새로 나는 방법을 알려주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성령으로 새로 나셔서 하늘에 계신 분이십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뱀에 물렸던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가 들어 올린 구리뱀을 보며 상처를 치유하였습니다. 우리 안에는 우리 각자를 물어 죽이는 뱀이 있습니다. 예수님에게도 그 뱀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 혹은 당신 뜻을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써 당신 자신이 하늘로 올려짐을 받으셨습니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당신 자신을 십자가에 들어 올리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 자신을 성령의 힘으로 그렇게 한다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이것이 새로 태어남입니다. 새로 태어나는 사람의 마음 안에서는 항상 이런 기도가 울려나올 것입니다.
“나는 아무래도 좋으니, 모든 사람이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스도는 당신은 아무래도 좋으니 우리만 구해 달라고 십자가에 당신 자신을 매다셨습니다. 우리도 그 십자가를 보며 나는 아무래도 좋으니 이웃의 행복을 위해 우리 자신을 못 박습니다. 이렇게 누군가를 새로 태어나게 만드는 자아의 독은 누군가의 자아에서 흘러나온 피입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십자가의 구리 뱀이 되셔야 했던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2020년은 인류 역사에 새로운 분기점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코로나19를 대하는 방법으로 나눠질 거라고 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코로나19는 전염성이 강하고, 기저질환이 있는 사람에게는 심각한 문제를 야기합니다.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사망자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의료체계가 늘어나는 환자를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코로나19를 효과적으로 막는 방법으로 단절과 봉쇄를 이야기합니다. 대부분의 국가는 국경을 봉쇄합니다. 시민들에게 집에 머물도록 명령합니다. 재택근무를 유도합니다. 필수적인 시설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시설은 강제로 문을 닫게 합니다. 단절과 봉쇄는 고립을 초래하기도합니다. 정보를 공유하지 못하기에 가짜뉴스가 생길 수 있습니다. 경제활동과 무역이 위축됩니다. 자영업자와 소 상공인의 피해가 심각해집니다. 세계 경제도 엄청난 피해를 맞이합니다. 의료체계가 열악한 나라의 피해가 심각합니다. 병실이 모자라고, 치료할 의사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공포와 두려움입니다. 물건을 사재기하고, 이웃은 잠재적인 전파자가 됩니다. 개인의 자유와 행동은 감염병 방지의 일환으로 제약을 받게 됩니다. 국경의 봉쇄는 큰 효과가 없었습니다. 국경을 봉쇄한 국가에서도 코로나19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자국민의 귀국을 막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코로나19를 효과적으로 막는 방법으로 연대와 협력을 이야기합니다. 어려움에 처한 나라에 의료진을 파견하고, 의약품을 지원하는 겁니다.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권고합니다. 마스크를 착용하고, 사회적인 거리두기를 지키며, 손을 자주 씻도록 합니다. 증상이 의심되면 자발적인 자가 격리를 지키고, 의료진의 도움을 요청합니다. 경제와 방역을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진단시약을 개발하고, 증상이 있는 사람을 신속하게 검사합니다. 경증의 환자는 자가 격리를 하거나, 국가에서 지정한 시설에서 의사의 도움을 받습니다. 중증의 환자는 병원에서 집중 치료를 받습니다. 이렇게 하면 바이러스의 확산을 저지할 수 있고, 중증의 환자도 효과적으로 치료할 수 있습니다. 사회적인 동요도 적고, 사재기와 같은 혼란도 막을 수 있습니다. 국가와 의료진이 환자를 적극적으로 치료하고, 완치될 수 있다는 신뢰가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대통령이 제안했고, G20의 정상들이 화상회의를 했습니다. 코로나19에 대해서 연대와 협력을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한국은 국경을 봉쇄하지 않았고, 시설을 폐쇄하지 않았고, 시민들에게 명령을 내리지 않았습니다. 한국은 선제적인 검사를 통해서 바이러스 확산을 늦출 수 있었고, 투명하게 정보를 공유하면서 신뢰를 얻을 수 있었고, 자발적인 시민의 협력으로 사회적인 혼란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분명 바이러스는 또 다른 형태로 다시 올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바이러스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와 방법입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우리가 어떤 방법을 선택하면 좋은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들 가운데에는 궁핍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땅이나 집을 소유한 사람은 그것을 팔아서 받은 돈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놓고, 저마다 필요한 만큼 나누어 받곤 하였다. 사람의 아들이 들어 올려지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으리라.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한다. 그러나 너희는 우리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어떻게서든 위로부터 다시 태어납시다!
-양승국신부-
초막절에 열린 유다 최고의회에서 용감하게 예수님을 변호하였으며,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후,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과 함께 예수님의 시신을 거두어 장례까지 치렀던 니코데모와의 대화는 계속됩니다.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영에서 태어난 이도 이와 같다.”(요한 복음 3장 7~8절)
위로부터 다시 태어나는 유일한 비결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이 땅에 하강(下降)하시고, 상승(上昇)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과, 그 신앙을 드러내는 구체적인 행위인 세례입니다. 결국 우리는 세례로 거듭 나야만 위로부터 다시 태어날 수 있고, 그 결과 하느님을 뵐수 있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바리사이로서 율법이나 지적인 측면에 있어 최고봉에 서있던 니코데모였지만, 간단하면서도 심오한 예수님의 가르침 앞에 여전히 알쏭달쏭합니다. 그래서 또 다시 의문 부호를 찍습니다. “그런 일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습니까?”(요한 복음 3장 9절)
다시 태어난다는 것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영적인 재생을 말씀하시는데, 니코데모는 육체적 재생으로 오해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적 재생의 중요성과 필요성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이왕 말이 나온 김에 짧막하게나마 성령의 존재에 대해 가르치십니다.
성령은 마치 바람같다고 설명하십니다. 바람이 동서남북 어디로든 자유자재로 부는 것처럼 하느님의 영, 성령께서도 자유롭게 움직입니다.
하느님의 성령도 바람같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니 우리네 인생도 마치 바람같습니다. 나름 버틴다고 두 다리에 힘을 딱 주고 지상에 서있지만, 성령의 세찬 바람이 언제, 어디에서 확 불어올지 모릅니다.
그 바람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갈지도 짐작할 수 없습니다. 더 머물러 있고 싶어 아무리 발버둥쳐도 성령께서 ‘자 때가 되었다! 일어나자!’ 그 한 마디면 그걸로 끝입니다.
위로부터 다시 태어나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은총과 축복은 놀랍습니다. 물과 성령의 세례로 다시 태어난 우리 영혼과 육신은 마치도 잠자리 날개처럼 가벼워질 것입니다.
평소 잘 들리지 않았던 부드러운 주님 음성을 더 명확하게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가벼워진 몸을 성령의 바람에 내맡겨 어디로든 마음 편히 떠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떻게서든 위로부터 새로 태어나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위로부터 새로 나게 될 때 그리도 지긋지긋하던 십자가가 사실은 가장 큰 하느님 은총이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위로부터 새로 나게 될 때 그리도 우리를 지루하고 고달프게 만들었던 일상생활이 눈부신 경이로움으로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위로부터 새로 나게 될 때 그리도 우리를 성가시게 했던 이웃들이 가장 아름다운 선물로 여기게 될 것입니다. 말끔하게 정화되어 순수해진 영혼의 눈으로 이웃들을 바라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 안에 들어있는 값진 보화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위로부터 다시 나게 될 때 주변 모든 사물들이 다 스승으로 변할 것입니다. 산들바람에 흔들리며 떨어지는 꽃잎들, 푸른빛을 더해가는 대나무 숲, 출렁이는 물결, 고요한 호수, 황금빛 석양...이 모두는 다 인생의 진리를 말해주는 스승이 될 것입니다.
위로부터 다시 태어날 때 예수님은 더 이상 멀고먼 옛 사람, 이천년 전의 나자렛 사람이 아니라, 오늘 내 일상생활 전체를 동반하시는 ‘나의 주님, 나의 스승님’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요한 3,7
-이영근신부-
부활과 관련된 성경의 용어들은 크게 두 가지 내용을 드러내줍니다. 하나는 “살다, 다시 살다”(hayah)라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일어서다, 다시 일어서다”(qum, heqis) 라는 뜻을 나타내는 용어들입니다. 곧 ‘부활’과 ‘들어 높여짐’입니다.
지난 부활 8부 동안의 “말씀전례”에서는 첫 번째 뜻을 드러내주었습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죽지 않으셨다. 다시 살아나셨다’는 내용을 드러내주었습니다. 이제, 오늘부터는 두 번째 뜻인 “들어 높여지다, 영광스럽게 되다”라는 뜻을 드러내줍니다.
이는 놀라운 사실, 아니 억지스럽고 당혹스런 사건을 전합니다. 죽었는데 죽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더 당혹스런 것은 죽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다시 살아났다고 합니다. 다시 살았을 뿐만 아니라, 드높여졌다고 합니다. 분명 누명을 쓰고 죽는 실패인데도 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오히려 이겨 승리했다고 합니다. 여기에는, ‘아래’로 내려갔으나 ‘위’로 올라가는 역전의 대전환이 있습니다. 그것은 “놀라운 변화”입니다. 그리고 오늘도 우리는 바로 ‘이 놀라운 변화’, 역전의 대전환을 살아갑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니코데모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요한 3,7)
여기서, ‘위’(ano) 혹은 ‘아래’(kato)라는 말은 물리적인 위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위”란 산을 오른다든지, 로켓을 타고 우주 위로 올라가는 것을 공간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위’란 무엇인가?
요한이 ‘위’와 ‘아래’라는 말을 쓸 때, 이는 ‘두 가지 질서’를 말합니다. 두 가지 방식, 곧 그 질서 안에 놓인 특별한 방식을 말합니다. ‘아래’ 질서의 통치원칙은 자기중심적인 ‘나’입니다. 그러나 ‘위’ 질서의 통치원칙은 사랑의 성령입니다. 이는 우리는 지상에 묶인 존재이지만, 동시에 하늘에 속한 자임을 말해줍니다.
그렇다면, 대체 우리는 어떻게 “위”로부터 태어날 수 있는가?
곧 ‘위’로 올라가는 일이 가능한가?
니코데모가 예수님께 여쭙습니다.
“그런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겠습니까?”(요한 3,9)
이는 어디선가 이미 들은 낯익은 질문입니다. 마리아가 주님의 천사에게 했던 질문입니다. 이 질문은 우리가 전 인격으로 응답해야 하는 질문입니다. 곧 성모님처럼 ‘피앗’으로 응답해야 하는 질문입니다.
우리는 이 질문을 이렇게 바꾸어서 자문해 볼 수 있습니다.
나는 왜 영으로 다시 새로 태어나지 못하고 있는가?
대체, 왜 오늘 새로운 쇄신의 삶을 살고 있지 못하는가?
이 질문에 답하여,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우리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물며 어찌 믿겠느냐?”(요한 3,12)
우리가 영으로 다시 태어나지 못한 이유는 받아들이지 않고, 믿지 않기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곧 자신에 대한 고집 때문에, 다시 새로 나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자신의 생각과 관행에 대한 완고함 때문에, 믿고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영으로 다시 태어나는 방법은 오로지 하나의 길이 있을 뿐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고집을 내려놓고,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곧 응답하고 실행하는 일입니다. 여기에는 전환이 있고 새로움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새로움’이란 마치, 요한 바오로 2세께서 “새로운 복음화”를 말씀하시면서 하신 말씀처럼, 복음이 새로운 것이 아니라, “열의에 있어서, 방법에 있어서, 표현에 있어서 새로움”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영으로 새로 태어난 사람의 특징은 모든 것을 새롭게 보는 데 있습니다. 하느님을 받아들여 ‘하느님의 눈’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곧 세상이 새로워서가 아니라, 자신이 새로워져 모든 것을 새롭게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받아들이는 자들의 특색입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저희가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과 활동을 보게 하소서!
당신 눈으로 새롭게 보게 하소서! 아멘.
- 오늘 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요한 3,13)
주님!
당신은 패배했지만 악을 이기고 승리하셨고,
죽었지만 죽음을 넘어 다시 살아나셨고,
추락했지만 드높이 들어 올려 지셨습니다.
당신과 함께 내려갈 줄을 알게 하소서! 하여, 당신과 함께 올라가게 하소서!
숨겨져 있는 저의 생명이 당신과 함께 드러나게 하소서! 아멘.

행동하는 믿음
-반영억신부-
개나리, 진달래, 라일락, 벚꽃, 영산홍이 계절의 변화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미선나무도 하얀 꽃을 피웠습니다. 긴 겨울의 추위를 견뎌 낸 나무들이 새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며 자태를 뽐내기 시작했습니다. 영양을 충분히 지닌 나무와 그렇지 못한 나무들이 드러납니다. 밑거름이 중요한데 웃거름으로 겉만 다스렸던 나무들은 힘이 없습니다. 밑거름이 충분하면 필요할 때마다 알맞은 영양분을 흡수하지만 밑거름이 충분하지 못하면 일시적인 효과를 내는 웃거름에 매달리게 됩니다. 결국은 튼실하지 못하여 쉽게 명을 다하게 됩니다. 무엇보다 밑거름이 소중합니다.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을 읽고 미사참례를 하며 기도에 충실한 사람은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소유자가 됩니다. 그는 꾸준합니다. 그러나 기도생활을 소홀히 하는 사람은 일시적인 효과를 찾아 헤맵니다. 세상에 떠도는 유명한 곳을 찾아 돌아답니다. 그러면서도 정작 삶의 변화는 없습니다. 신심단체활동 등 생색내는 일에는 열심히 하면서도 미사에 소홀히 한다면 그것은 주객이 전도된 것입니다. 큰 믿음을 지니려면 먼저 기초를 튼튼히 해야 합니다. 기도생활로 밑거름을 줘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는 믿음의 생활은 모래위에 집을 짓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3,14-15).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의 십자가로 구원을 이루신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사람들이 모세의 손에 들린 구리뱀을 쳐다보았을 때 살았고, 보지 않은 사람은 죽었듯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그분께서 하시는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이해하는 것에 멈춰서는 안 됩니다. 행함으로써 증거 되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행함으로써 열매를 맺게 됩니다. “너는 이스라엘의 스승이면서 그런 것도 모르느냐?”(3,10).는 주님의 꾸지람을 새겨들어야 합니다. 닫힌 마음에는 진리가 들어갈 수 없습니다.
영원한 생명은 단순히 미래에 주어지는 것만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이미 주어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 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한17,3).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영생이란 하느님과 예수님 그리고 믿는 이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인격적인 사랑의 관계입니다. 그분과 일치하여 살아가는 것입니다.“지금 우리가 주님과 함께 누리는 생명”을 가리킵니다. 그 관계는 이미 여기서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믿음의 삶이 중요합니다. 알프레드 디 수사 신부는 말합니다. “천국이 이 땅에 있는 것처럼 살아라. 아무도 바라보지 않는 것처럼 춤추라. 아무도 듣고 있지 않은 것처럼 노래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라. 천국이 이 땅에 있는 것처럼 살아라.” 믿음에 행동이 따르지 않으면 그런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사람이 믿음만으로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되는 것이 아니라 행동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생활 안에서 행동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합당히 지니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게 되고, 우리 안에 있는 거룩함의 힘을 보여주게 될 것입니다”(니사의 성 그레고리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믿음
-송영진신부-
우리 교회의 교리 가운데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교리도 많고,
이해하기 어려운 교리도 많습니다.
성경 내용 가운데에도, 또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에도 그런 말씀들이 있습니다.
좋은 예가 요한복음 6장에 있는 ‘생명의 빵’에 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생명의 빵’에 관해서 말씀하셨을 때
그 말씀을 제대로 알아들은 사람은 별로 없었습니다.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 하며,
유다인들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졌다(요한 6,52).”
“제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말하였다.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요한 6,60)”
“이 일이 일어난 뒤로, 제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이 되돌아가고
더 이상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않았다(요한 6,66).”
예수님의 말씀이 이해되지도 않고, 받아들이기도 어려워서
제자들(신자들)마저도 예수님에게서 떠나버렸습니다.
사도들의 편지라고 해도 알아듣기 쉬운 말만 들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베드로 사도는 바오로 사도의 편지에 대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참고 기다리시는 것을 구원의 기회로 생각하십시오.
이는 우리가 사랑하는 바오로 형제가 하느님에게서 받은 지혜에 따라
여러분에게 써 보낸 바와 같습니다. 사실 그는 모든 편지에서 이러한 것들을
이야기합니다. 그 가운데에는 더러 알아듣기 어려운 것들이 있는데,
무식하고 믿음이 확고하지 못한 자들은 다른 성경 구절들을 곡해하듯이
그것들도 곡해하여 스스로 멸망을 불러옵니다(2베드 3,15-16).”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잘못이 아닌데,
이해가 안 된다고 해서 억지로 해석하려다가
자기 마음대로 ‘말씀’을 왜곡하는 것은 큰 죄입니다.)
사도들도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 때가 많았습니다.
“제자들 가운데 몇 사람이 서로 말하였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또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 하고
우리에게 말씀하시는데, 그것이 무슨 뜻일까?’
그들은 또 ‘`조금 있으면`이라고 말씀하시는데, 그것이 무슨 뜻일까?
무슨 이야기를 하시는지 알 수가 없군.’ 하고 말하였다(요한 16,17-18).”
(오늘날의 우리도 성경을 읽다가 사도들처럼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군.”이라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잘 모르겠다. 이해가 안 된다.” 라고 솔직하게 말하는 것은 잘못된 일도 아니고
부끄러운 일도 아닙니다.
모르면서도 아는 척 하는 것이 잘못이고, 죄입니다.)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오셨으니 ‘모든 사람’이 금방 알아듣게
말씀하셨어야 하지 않을까?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을 하시면 누가 그 말씀을
알아듣고 구원을 받을 수 있겠는가?”
이 질문의 답은 다음 두 가지입니다.
1) “먼저 믿으면 언젠가는 깨닫게 될 것이다.”
‘생명의 빵’에 관한 말씀 때문에 사람들이 예수님에게서 떠나버린 뒤에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요한 6,68-69).”
이 말은, 예수님의 말씀을 잘 알아듣고 이해했기 때문에 예수님 곁에 남아
있겠다는 뜻이 아니라, 이해되지는 않지만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라고 믿기
때문에 남아 있겠다는 뜻입니다.
(신앙생활은 전문적으로 성경을 연구하는 박사들만이 할 수 있는 생활이 아니라,
누구나 할 수 있는 생활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자기 이름을 쓸 줄도 모르는 사람들이
박사들보다 더 깊이 ‘구원의 진리’를 깨닫는 경우도 있습니다.)
2) “믿음은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받아들여서 실천하는 것’이다.”
알아도 실천하지 않으면 그것은 아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사는 것이 곧 ‘잘 아는 것’입니다.
사실 실천에 관한 말씀 가운데에는 어려운 말씀이 없습니다.
(물론 하기 싫어하는 사람은 어려운 말씀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한다. 그러나 너희는 우리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내가 세상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않는데,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찌 믿겠느냐?(요한 3,11-12)”
이 말씀에서 ‘세상일’은 지상에서 이루어지는 일들,
누구나 눈으로 볼 수 있고 믿을 수 있는 일들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 지상에서 하신 일들과 가르침들, 또 사람들이 지상에서
실천해야 할 일들을 가리키는 말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세상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않는데” 라는 말씀은,
“내가 선포한 복음과 나의 가르침들을 안 받아들이면서” 라는 뜻이 됩니다.
‘하늘 일’은 하느님의 신비, 하느님의 계시 등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찌 믿겠느냐?” 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복음과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아버지 하느님께 갈 수 없다는 뜻이 됩니다.
< 먼저 예수님을 믿어야 하느님을 제대로 믿을 수 있습니다(요한 14,6).
예수님에 대한 신앙이 먼저 이루어져야 하느님에 대한 신앙이 이루어집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3,13-15).”
이 말씀은, 십자가에 못 박혀서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신 예수님만이
사람들을 구원하실 수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일을(민수 21장) ‘세상일’로,
예수님의 십자가로 구원을 받는 것을 ‘하늘 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또 지상에서 예수님을 믿는 것을 ‘세상일’로,
하늘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을 ‘하늘 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어떻든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바란다면 예수님을(예수님만) 믿어야 합니다.>

새로 태어난 자의 삶
-조욱현신부-
복음: 요한 3,7-15: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의 아들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7절) 위로부터 태어난다는 것은 하느님에게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새로이 태어남을 의미한다. 하느님께서는 교회를 통하여 당신과 함께 머무를 자녀들을 낳으신다. 우리는 성령 안에서 말씀과 성사로 태어났다.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8절) 즉, “너희는 그분의 소리를 들을 테지만 그분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는 말씀이다. 성령의 역사는 우리가 보고 알아들을 수 없는 것이다.
아무도 성령을 보지 못한다. 어떻게 성령의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시편 노래가 바로 성령의 소리이고 복음 선포가 바로 성령의 소리이며 하느님의 말씀이 바로 성령의 소리라고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한다. 우리가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성령 안에 살고 있지 못하다면, 우리는 다시 태어난 것이 아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전혀 알지 못하는 그런 사람일 것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성령에서 태어난 이도 이와 같다.”(8절)고 하신 것이다.
“그런 일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겠습니까?”(9절) 니고데모는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기가 매우 어려운 듯하다. 이 태어남에 대해서도 구약과 관계가 있다. 창조된 첫 사람의 갈빗대로 만들어진 여자, 아이를 못 낳는 여인의 잉태, 물로써 행해진 기적들, 예를 들면, 갈대바다를 건넌 일, 천사가 물을 출렁거리게 한 못, 요르단 강에서 시리아 사람 나아만이 깨끗하게 된 일 등, 이 모두가 미래에 이루어질 영적 태어남과 정화의 상징이다. 이사악도 이러한 탄생의 예형이었다. 이런 것을 암시하듯이 예수님께서는 “너는 이스라엘의 스승이면서 그런 것도 모르느냐?”(10절)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한다. 그러나 너희는 우리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11절) 아드님은 아버지와 성령과 함께이시기에, 증언을 하실 때 복수로 ‘우리’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은 우리가 물과 성령으로 새로이 태어남과 당신이 하느님 아버지에게서의 탄생과 비교해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의 새로이 태어남은 하늘의 일이기는 하지만, 아버지에게서 태어난 아드님의 탄생에 비교하면 우리의 일은 세상의 일인 것이다. 그 세상일도 그들은 믿지 않는다고 하시며,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찌 믿겠느냐?”(12절) 하신 것이다.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13절) ‘하늘에서 내려온 이’라는 말은 그분의 기원이 성령께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분은 말씀으로서는 하늘에 계시며 육으로는 사람의 아들이시다. 그 육의 기원은 다른 어느 누구도 아닌 바로 성령께 있다. 그래서 육이 되신 말씀은 비록 육이시지만 결코 말씀이 아닌 적이 없으신 분이다. 그분이 내려오신 것은 우리가 올라가게 하시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땅에 속한 인간이 하늘에 속한 존재가 될 때, 영적 탄생이 이루어진다. 즉 그리스도께 결합될 때, 그리스와 함께 올라가는 것이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14절) 십자가가 들어 올려져 땅 위에 나타난다. 그 십자가는 영광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다. 십자가 위에서 흠숭을 받으시고 십자가로 선포되는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기 위해서이다. 뱀은 세상의 모든 인간을 집어 삼키던 죄를 의미한다. 그 뱀을 들어 올린 표징은 십자가에 못 박히실 분을 통하여 그 뱀에게 죽음을 선고되었음을 보여주신 것이다. 그래서 저주를 받게 된 자들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15절) 우리의 생명을 위해 하느님께서 아들을 선물로 주셨다. 그분이 ‘하느님의 아들’이며 영원한 생명의 원인이시다. 십자가에 달리심으로써 다른 이들의 생명을 구하신 분이 죽음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다. 십자가에 달리신 분을 믿는 이들이 멸망하지 않았다면 십자가에 달리신 분이 어찌 멸망할 수 있겠는가?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께서 더 확실한 생명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자녀들인 우리 신앙인들은 그분이 입으신 영광을 향하는 삶을 갖도록 모든 노력을 다하여야 한다. 그분이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영광을 입으셨으니, 우리가 그분을 닮는 것, 즉 우리도 우리가 지고 가는 나 자신의 십자가를 통하여 그 영광을 입을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삶이 바로 나 자신의 인간완성을 이루어줄 뿐 아니라, 하느님 앞에 또한 영광을 드리는 길이며, 구원에 이르는 길이다. 이러한 은총을 청하며 열심히 기도하자.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히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3, 15)
-한상우신부-
꽃은 시들고
꽃잎이
떨어져 내립니다
꽃 진 자리에서
영원한
생명에 대한
물음을 다시
던지게 됩니다.
믿음의 길을
따라가면
영원한 생명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음을 믿습니다.
깨어진 믿음을
사람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사람들 속에서
다시 살리십니다.
믿음의 방식은
예수님의
방식입니다.
믿음의 본질은
십자가의
힘입니다.
들어 올려진
십자가처럼
삶의 모든
갈피마다
믿음을
필요로합니다.
십자가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진정
믿음의 길을
충실히 걷는
사람입니다.
사람의
아들로부터
시작하고
주어지는
믿음의 생명입니다.
믿음 안에
십자가가 있고
예수님 안에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믿음과 생명을
완성하십니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진정한 자유인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 영에서 태어난 이도 다 이와 같다"(요한 3,8).
하느님의 숨, 기운, 바람은 성령을 가리킵니다. 성령을 받은 이, 성령의 사람은 매인 데 없이 자유롭게 하느님의 뜻을 향해 움직이지요. 성부, 성령과 하나이신 예수님이 바로 그러하십니다.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3,14-15).
누구보다 자유로우신 예수님께서 선택하신 곳은 "십자가 위"입니다. 세속적 영광에로 '들어높여짐'이 아니라 당신을 믿는 이들의 죄를 대속해 구원을 안겨 주시려는 자발적 '들어올려짐'입니다.
하고 싶은 걸 마음대로 하는 것이 자유라면 대개는 주어진 자유를 자기 이익이나 편의를 위해서 쓰고, 조금 더 관대하게 가족, 친구, 지인, 자기 편을 위해 사용하겠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온전한 자유로 죽음을 선택하고 받아들이십니다. 그 희생의 목적은 믿는 이들의 영원한 생명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초대 교회 신자 공동체의 생활상을 보여 줍니다.
"신자들의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사도 4,32).
공동 소유는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상당히 낯선 개념입니다. 기초생계가 제도적으로 보장되어 있는 수도자들의 덕목 정도로 국한해서 생각할 정도지요. 이천 년 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새로운 길"에 들어선 이들이 자청하여 가진 것을 내놓고 함께 누렸다니 참 놀랍습니다. 어떤 제도나 이념이 강제하지 않는 상태에서 온전한 자유로 소유를 공유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라 고백하는 영적 형제자매들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겁니다.
소유를 처분하거나 활용하는 일은 온전히 소유자의 자유 영역이니 제 유리한 대로 사용한다 해도 누가 뭐랄 수 없지요. 그 소유한 바를 모두를 위해 기꺼이 내어놓고 필요한 만큼만 나누어 받는 것은 온전한 자유로 공동선 추구하는, 성숙함 정도로는 설명할 수 없는 거룩한 결단일 것입니다.
"모두 큰 은총을 받았다"(사도 4,33).
모두, 누구도 소외됨 없이 큰 은총을 누렸다고 하니, 얼마나 아름답고 가슴 벅찬 말씀인지요! 사실 악이 탐욕과 이기심, 질투와 욕정을 거느리고 인간 세상에 스며들기 전까지 하느님께서 당신 모상으로 지으신 우리 모든 인간은 그렇게 은총을 누리고 만끽했습니다.
차별과 소외, 착취와 수탈로 소유의 불균형이 시작되고 권력과 기회의 치우침이 심화되면서 인간은 받은 은총을 누리지 못하게 되어 버렸습니다. 불안과 빈곤, 질병과 죽음의 위협, 상대적 박탈감과 분노가 은총을 누리던 복된 상태에서 우리를 점점 더 멀리 떼어놓고 말았지요.
"그들 가운데 궁핍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사도 4,34).
받은 이는 궁핍에서 벗어나고, 그렇다고 내놓은 이가 궁핍해지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얻은 이와 덜어낸 이가 함께 더불어 자유를 얻지요. 복음 속 예수님과 독서 안 신자들의 모습에서 모든 걸 훌훌 털어낸 홀가분하고 큰 자유가 느껴집니다.
사랑하는 벗님! 부의 극단적 치우침 현상이 함께 더불어 은총을 누려야 할 인간 삶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운 오늘날, 말씀이 우리를 새 질서로 초대하십니다. 예수님처럼 목숨을 내놓거나 초대 교회 신자들처럼 가진 걸 내놓는 건 아니라도 분명 각자의 영역에서 가능한 부분이 있겠지요. 예수님이 그러하셨고 신앙의 선조들이 그러했듯이 자유는 비움의 산물입니다. 불고 싶은 데로 부는 영의 바람에 실려 자유와 은총을 쟁취하고 누리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우리의 소유가 꼭 필요한 건지
-김찬선신부-
http://www.ofmkorea.org/ofmhomily/340548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영에서 태어난 이도 다 이와 같다(요한 3,7ㄱ.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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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당신 자신을 십자가에 들어 올리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 자신을 성령의 힘으로 그렇게 한다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이것이 새로 태어남입니다. 새로 태어나는 사람의 마음 안에서는 항상 이런 기도가 울려나올 것입니다.
“나는 아무래도 좋으니, 모든 사람이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스도는 당신은 아무래도 좋으니 우리만 구해 달라고 십자가에 당신 자신을 매다셨습니다. 우리도 그 십자가를 보며 나는 아무래도 좋으니 이웃의 행복을 위해 우리 자신을 못 박습니다. 이렇게 누군가를 새로 태어나게 만드는 자아의 독은 누군가의 자아에서 흘러나온 피입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십자가의 구리 뱀이 되셔야 했던 것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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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으로 새로 태어난 사람의 특징은 모든 것을 새롭게 보는 데 있습니다. 하느님을 받아들여 ‘하느님의 눈’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곧 세상이 새로워서가 아니라, 자신이 새로워져 모든 것을 새롭게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받아들이는 자들의 특색입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저희가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과 활동을 보게 하소서!
당신 눈으로 새롭게 보게 하소서! 아멘.
-이영근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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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프레드 디 수사 신부는 말합니다. “천국이 이 땅에 있는 것처럼 살아라. 아무도 바라보지 않는 것처럼 춤추라. 아무도 듣고 있지 않은 것처럼 노래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라. 천국이 이 땅에 있는 것처럼 살아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라. 천국이 이 땅에 있는 것처럼 살아라.” 믿음에 행동이 따르지 않으면 그런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사람이 믿음만으로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되는 것이 아니라 행동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생활 안에서 행동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합당히 지니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게 되고, 우리 안에 있는 거룩함의 힘을 보여주게 될 것입니다”(니사의 성 그레고리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반영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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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믿으면 언젠가는 깨닫게 될 것이다.”
‘생명의 빵’에 관한 말씀 때문에 사람들이 예수님에게서 떠나버린 뒤에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요한 6,68-69).”
이 말은, 예수님의 말씀을 잘 알아듣고 이해했기 때문에 예수님 곁에 남아
있겠다는 뜻이 아니라, 이해되지는 않지만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라고 믿기
때문에 남아 있겠다는 뜻입니다.
-송영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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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성령을 보지 못한다. 어떻게 성령의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시편 노래가 바로 성령의 소리이고 복음 선포가 바로 성령의 소리이며 하느님의 말씀이 바로 성령의 소리라고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한다. 우리가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성령 안에 살고 있지 못하다면, 우리는 다시 태어난 것이 아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전혀 알지 못하는 그런 사람일 것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성령에서 태어난 이도 이와 같다.”(8절)고 하신 것이다.
하느님의 자녀들인 우리 신앙인들은 그분이 입으신 영광을 향하는 삶을 갖도록 모든 노력을 다하여야 한다. 그분이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영광을 입으셨으니, 우리가 그분을 닮는 것, 즉 우리도 우리가 지고 가는 나 자신의 십자가를 통하여 그 영광을 입을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삶이 바로 나 자신의 인간완성을 이루어줄 뿐 아니라, 하느님 앞에 또한 영광을 드리는 길이며, 구원에 이르는 길이다. 이러한 은총을 청하며 열심히 기도하자.
-조욱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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