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칸 영성

성 프란치스코가 추구했던 가난 연구자 - 함 혁

Margaret K 2020. 4. 16. 0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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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성 프란치스코가 추구했던 가난

연구자 - 함 혁

Ⅰ.  서론

     1. 연구동기와 목적

    현대 세계에서 심각히 대두되는 문제 중의 하나는 빈부의 격차라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가 과거에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과거에는 이 문제가 한 사회 내에 국한되어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세계적인 차원으로 확대되었다. 옛날에도 언제나 부유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은 있었다. 그러나 현재는 부유한 나라와 가난한 나라들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소비주의와 합리주의, 부자와 빈자간의 분열 속에 굶주림과 기아와 빈곤이라는 용납할 수 없는 불의와 차별과 억압이라는 위협으로 인하여 하느님으로부터 이루어지는 정의와 평화란 구현될 수 없는 요원한 사실로 많은 사람들에게 인식되고 있다. L. Boof, 『정 그리고 힘』, 박정미옮김, (왜관:분도출판사, 1987), p.9.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역사 안에서 당신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느님과 역사 한 가운데다 당신 거처를 마련하시는 하느님과 역사 한 가운데다 당신 거처를 마련하시는 하느님을 믿을 것, 즉 하느님의 거처 안에서 살아갈 것을 요구하신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아버지의 해방시키는 사랑을 선포할 것을 요구하시는 것이다. G. Gutierez, 김수복 옮김 『가난한 사람들의 역사적 위력』(서울;성요셉출판사, 1987), p.31.

    자기를 철저히 부인하고 일체의 소유를 버리고 낮은 자가 되어 오직 그리스도를 모방하려고 애쓰고 가장 그리스도의 성심을 품고 산 사람이 아씨시의 프란치스코이다. 기독교 최대의 성자 아씨시의 프란치스코는 기독교의 오랜 역사 속에 인류생활에 어느 누구보다 그리스도 영성의 깊은 감동을 전해주고 있다.
    프란치스코의 일생은 그리스도를 향한 열정으로 사랑과 평화를 증거하였고 그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현대인들은 프란치스코를 광인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프란치스코는 그리스도를 모방한 사람이었다. 프란치스코의 어리석음은 십자가를 향하는 아름답고 거룩한 어리석음이었고 프란치스코는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논리를 가지고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따라 살았다. E. Doyle, 정현숙 옮김 『성프란치스코의 태양의 노래』(왜관:분도출판사, 1986), p.13.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기독교 전통 속에 위대한 성인이다. 프란치스코의 삶에 감동과 충격을 받았던 본인도 그러한 삶의 정신으로 살아보고 싶은 소망으로 수도회에 입회하여 생활하고 있다.
    성 프란치스코는 기독교 전통속에 위대한 인물이기에 그의 영성과 살아온 삶에 대해서 연구한 자료들이 풍성하지만 다수가 그 당시의 역사적 상황과 시대적 배경, 종교적 배경에 대해서 연구하고 프란치스코의 삶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본 연구의 중심은 성 프란치스코의 영성과 시대적 배경에 관한 사변적 전개보다는 그의 삶의 네 기초인 가난, 겸손, 단순성, 그리고 기도 중 프란치스꼬회 한국관구 편, 『아씨시의 프란치스꼬』(왜관:분도출판사, 1981), p.6.
가난의 모습을 중점으로 고찰해보고 800여년전에 실천했던 프란치스코의 삶이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에 어떻게 모범이 될 수 있는지 진단해 보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하는 삶의 기본 자세 정립을 도모하여 보고자 한다.

  2. 연구방법

    본 논문의 연구 방법은 프란치스코의 글과 전기작가들의 전기 그리고 현대문서 및 연구 논문들을 참고하여 연구하게 된다.
    본 논문은 총 아홉 장으로 구성되는 데 프란치스코 사상의 역사적 배경과 일반적 영성분야는 고찰하지 안고 가난의 문제를 중점적으로 살펴보기 위하여 중심을 두었다.
    Ⅰ.장에서는 연구 동기와 목적에 대해서 서술하였고, Ⅱ.장에서는 가난의 일반적 이해에 대하여 다루었고, Ⅲ.장에서는 프란치스코의 삶의 배경과 그의 생애에 대하여 살펴보고. Ⅳ.장에서는 프란치스코가 경험했던 영적 체험을 고찰해보고. Ⅴ.장에서는 청빈이라고 말하는 자발적 가난을 살펴보았다. Ⅵ.장에서는 가난을 실천한 프란치스코의 삶을 살펴보고. Ⅶ.장에서는 가난의 열매. Ⅷ.장에서는 자발적 가난의 완성의 의미에 대하여 살펴보고 결론을 맺고자 한다.


Ⅱ. 가난(청빈)에 대한 이해

1. 가난의 일반적 개념

  1) 부의 개념

    사전적인 의미로서 부는 “많은 재화, 특정한 경제 주체에 속하는 재(財)의 총계” 耘平語文硏究所, 『New Ace 국어사전』(서울:금성교과서(주), 1994), p.857.
로 먼저 재화의 많고 적음이 1차적 요건이 된다. 자본주의 아래에서 경제활동의 동기는 영리 추구에 있으며 자기의 직접적인 욕망 충족에 필요한 재화를 얻기 위한 것으로 이해된다. 주종완, 『알기 쉬운 경제학』(서울:지학사, 1985), p.34.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이윤을 획득하는 것이 생산 활동의 동기이며 이 때문에 부의 축적이 유일한 목적으로 되고, 수단 그 자체가 목적으로 되는 경향마저 나타나게 된다. 위의책, p.35 참조.
그러기에 개인의 가치도 그가 얻는 소득의 양에 따라 결정되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하며, 재화의 충족을 위한 부패, 부조리 등이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나 부를 소유한다는 것은 개인적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사회적 차원에서도 인간의 해방과 자아 완성을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전제 조건 중의 하나로 본다.
    이처럼 재하의 획득에 의한 부는, 물질적으로 풍요한 현대 사회에 있어서 그 중요성을 인정받고 있으나 정치 경제적 요건들과 결합되어 부조리를 일으키기도 하며, 그래서 정치, 경제, 종교적 소수의 특권층이라는 부정적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고 있다.

  2) 가난

    가난은 일반적으로 “살림살이가 넉넉치 못함, 빈곤” 耘平文化硏究所, 앞의책, p.3.
을 의미하며, 이것은 다시 말해 “물질적으로 가진 바 없는 빈곤한” K. 브라세르, 「그리스도교와 맑스주의와 가난한 사람들」, 『신학전망 56호』, p.49.
상태를 말하고 있다. 또한 “억압, 궁핍, 고통, 권리 박탈을 나타내는 은유” K .브라세르, 위의책, p.44.
로 사용되어 폭넓은 의미를 가지기도 한다. 이렇게 가난이 재화의 적음이나 사회적 ‘소외’로 이해되면서 외적으로 보여지는 상태에 중심을 두게 되었다.
    이러한 가난은 일반적 표현으로 ‘먹고살기 힘든 상태’를 의미한다. 사람들이 먹고 살기 힘든 상태에 이르게 되는 것은 처음부터 받은 유산이 없어서 그렇게 되거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착취와 불의가 만연하는 사회, 제도적 상황으로 인해서 그렇게 되기도 하지만 어떤 이들은 물려받은 것이 있다 하더라도 본인들의 신상에 생긴 갑작스런 변화로 인해서 그렇게 되기도 한다. 결국 현대에서의 가난은 개인의 능력과도 관계하고 있지만, 더 큰 요인으로 외부적 환경에 의해 좌우된다고 하겠다.
    이상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가난과 부의 개념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하지만 가난이 단순히 부와 반대되는 것으로서 없어져야 한다는 이분법적 사고로만 이해 될 수 있는 것인가?
    이제 가난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입장인 성서의 개념을 통하여 가난의  보다 폭넓은 의미를 알아보고자 한다.

  2. 성서에 나타난 가난

  1) 가난의 성서 언어적 고찰

    히브리어에서 ‘가난’에 해당하는 '이와레쉬'라는 단어는 ‘가난하다, 가난하게 되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또한 ‘루쉬’(rūsh)는 ‘가난한 자’라를 뜻한다. 신약성서에서 빈곤을 뜻하는 헬라어 ‘프토케이아(ptōcheía)’는 ‘구걸, 혹은 극빈상태로 떨어지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가난한’은 ‘프토코스(ptǒchos), 아니(ani), 달(dal)이란 형용사에 어원을 두고 있다. 형용사 ’‘가난한’은 히브리어 ‘에비욘(ebyon), 달(dal), 아니(ani), 루쉬(rush)’와 헬라어  ‘프토코스’(ptochos)가 있는데 ‘에비욘’은 ‘갈망하는, 궁핍한, 가난한’이란 뜻을 갖고 있고, ‘달’은 ‘움직임, 흔들거림, 약하고 낮은 것’이란 의미를, ‘아니’는 ‘구부리다, 예배하다, 압박 받는, 온유한’이란 의미를, ‘루쉬’는 ‘흔들리다, 떨리다, 가난하게 되다, 곤궁하게 되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그 외에도 빈곤, 연약을 뜻하는 달라(dallâh)와 가엾음, 불쌍함의 뜻을 지닌 헬카(hēlkȃ), 가난하게 만들다란 뜻의 야라쉬(yāras), 원하다란 뜻의 페네스 등이 쓰이고 있다. 이러한 표현들 가운데 가난을 더 면밀히 들어내는 단어는 직접적으로 가난을 이야기했던 단어와 겸손과 온유라는  뜻에서 유래된 가난이 있다. 아나(’ānā)와 동근(同根)을 갖는 아니(ʻānī)가 ‘온유한’이란 의미를 통해 가난을 이야기하며, 또한 ‘아니’는 윤리적, 영성적 의미를 짙게 띄우고 있다. 서인석, 『성서의 가난한 사람들』(왜관:분도출판사, 1981), p.40.
그리고 70인역에서 사용되던 프라우스(praüs)는 ‘양순한’, ‘평화로운’이란 의미로 겸손한 자를 뜻하면서 하느님의 가난한 사람을 겸손한 자 안에서 표현하고 있다. 위의책, 186참조.
본장은 다음 두 책을 참고하여 재정리하였다.
    편찬위원회(민영진 外),『성서대백과 사전 제1권』(서울:성서교재간행사,     1979), pp.55-59.
    이성호, 『새성서대사전』(서울:성지사, 1978), pp.5-7, 1341-1343.


  2) 구약성서의 가난

    구약성서의 가난이라는 주제는 하나의 커다란 맥을 형성하고 있다. 이스라엘에는 모세의 영도 하에 시나이 사막과 카데스 사막에서 유랑을 하던 시기를 지나 기원전 1150년경의 가나안 정복과 정착생활, 그리고 기원전 587년 남조 유다가 멸망할 때까지 빈곤과 비참, 착취의 희생물이 되어 버린 가난한 이들이 있었다. 이스라엘에서의 가난한 사람들은 단순히 물질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구약성서에서 가난한 이들에게 적용되던 낱말은, 구체적으로 가난에 대한 직접적 언급은 거의 없고, 가난한 이들의 생활과 연관시켜 사용하고 있다. 서인석, 『성서의 가난한 사람들』(왜관:분도출판사, 1983), pp.19-25.

    구약에서는 “그 자체가 , 가난한 자들의 가련한 생활을 묘사하는 구체적인 낱말들을 많이 갖고 있었으며, 구약 성서는 이들을 십분 활용하고 있다. 히브리어는 가난한 자를 가리켜 ‘라쓰’(ras, 궁핍한 자), ‘달’(dal, 연약한 자, 가난한 자), ‘에비온’(ebion, 불쌍한 거지), ‘아니’ 또는 ‘아나우’(ani, anaw ;복수형, 아니윔, anawim;억눌린 자, 핍박받는 자)등의 말을 사용한다. 그러나 성서에서 말하는 ‘가난’은 경제적 사회적 상태만을 뜻하지 않고, 인간의 정신적 성향과 마음의 자세 J. 켈리, 「청빈과 부의 성서적 의미」, 『사목 47호』, p.20.
를 나타내기도 하여, 가난이 지니는 정신적 부를 드러내고 있다.
    역사적으로는 가난에 대한 해석은 그 표현에서만큼 다양하게 해석되는데, 하느님께 대한 상선벌악의 불완전한 개념을 지니고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오히려 물질적인 풍요가 하느님께 대한 확실한 보상의 증거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가난은 기껏 해서 참아 견뎌야 할 대상이며 심지어 멸시해야 할 상태였던 것이다. 그래서 가난을 흔히 태만과 방탕의 결과임을 지적하고 있으며(잠언 11,6; 13,4,18; 21,17) 비참한 생활로 빠지게 하는 나태함을 혹독히 비판하고 있다. 하지만 예언자들은 대부분의 가난한 자들이 운명의 희생물이거나 인간의 불의 때문에 생긴다는 것을 지적하며, 이런 불우한 자들을 변호하고 이스라엘의 죄를 고발하고 있다.
    이렇게 구약성서에서 ‘가난한 이’라는 말은 “경제적으로 박탈되고 사회적으로 지위를 갖지 못하고 외국의 지배자나 자국의 관헌으로부터 부당하게 대접받는 그런 집단의 사람들에게 특히 적용” D. Dorr, 오경환 옮김, 『가난한 이들의 선택』(왜관:분도출판사, 1987), p.13.
되고 있다.
    또한 가난은 이렇게 물질적 ‘빈곤 상태’ 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겸손’을 표현하기도 하는데, “구약 성서를 그리스어로 번역한 역자들도 잘 이해했듯이 여기에서 가난한 자라는 말은 물질적으로 가난한 자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히브리어의 ‘아나우’(anaw, 복수)를 번역할 때, 그들은 ‘프토코스’(ptochos, 궁핍한 자), ‘페네스’(penes, 옹색한 자) 외에도 ‘프라우스’(praus)라는 말을 사용한다. 그리스어 프라우스는 시련 중에 있으면서도 ‘양순하고’ ‘평화로운’사람을 상기시키는 개념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또한 ‘아니윔’을 ‘겸손한 자’라고 번역할 수도 있다. 구약 성서 안에서 ‘아나와흐’(anawah, 가난함)를 정의(스바 2,3), 야훼를 경외함(잠언 15,33; 22,4), 믿음, 충성심(집회 45,4; 민수 12,3)등과 결부시키고 있는데, 이들의 근본적인 태도는 사실 겸손이다.” 광주 가톨릭 대학 편집부 편, 『성서신학사전』(광주:광주 가톨릭대학 출판부, 1984), p.2.
이처럼 구약성서에서 말하는 가난이란 단순히 물질적 궁핍 상태나 사회적 상태만이 아닌 사람의 내적 자세를 나타낸다.    
    가난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느님을 신뢰하게 만든다. 예레미야는 자기 생활을 통해, 가난과 고통과 불행이 자기 자신을 완전히 양도 할 수 있는 하느님의 선택된 방법이라는 교훈을 주었다. 우리는 여기서 가난이 자동적으로 덕스러운 것이 될 수 있다고 속단해서는 안될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장하는 바는 좋은 조건, 즉 교육과 건전한 영신적 분위기이다. 바로 이러한 조건들이 영성적인 덕과 자세로 나아가게 해 준다. 그러나 이러한 조건이 조성되지 않거나 종교에 위배되는 요소가 개체될 경우, 가난은 죄악과 해악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자주 책망을 당하면서도 목이 곧은 사람은 갑자기 패망을 당하고 피하지 못할 것이기”(잠언 29,1) 때문이다. 좋지 못한 상황 속에서의 가난은 종교적 심성을 저하시킬 우려도 있다. “나에게 부도 주지 마옵소서. 부유하면 ‘누가 주님인가?’하고 당신을 부인할까 두렵고, 가난하면 도둑질해서 하느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렵나이다”(30,8-9). 잠언이 이 양자를 다 두려워하는 것도 바로 그 이유 때문이다. J. 켈리, 앞의 책, p.22.

    따라서 단순히 물질적 재화가 결핍되었다고 해서, 온전한 가난으로 이해될 수 없다. 물질의 결핍은 하느님께 개방된 상태, 즉 정신적 겸손의 상태가 이루어져야만 진정한 의미의 ‘가난’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구약에서의 ‘가난한 자’는 물질적인 동시에 정신적으로 가난한 이들을 칭하는 것이다.

  3) 가난의 사회적 배경

    부유함과 가난함에 대한 성서의 시각을 이해하기 이해서는 우선 당시의 사회 상황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초기 구약 시대는 구조적으로 부족 사회의 구조였고, 이러한 부족들은 반 유목의 형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회에서는 개인보다는 공동체의 생존이 우선시 되기 마련이다. 부족의 일치단결이 중요시되는 이런 사회에서는 개인의 사유재산에 대한 관념이 오히려 희미했고, 따라서 경제적인 면의 상대적 평등이 구현될 수 있었고 부유함과 가난함의 문제는 별 의미가 없었다.
    이러한 사회구조는 이스라엘 백성의 팔레스티나 정착과 함께 변모되기 시작한다. 정착 생활은 근본적으로 토지에 기초를 둔 경제 구조를 의미한 것이고 비로소 빈부격차의 문제가 본격적으로 발생하기 시작한다. 이제 경제 구조를 전제하는 ‘가난한 자’, ‘약자’가 발생하게 된 것이고, 이스라엘 백성의 ‘종교적 동기’는 이들에 대한 배려가 촉구된다. (신명기 16-26장, 23장 등 참조) 어쨌거나 이제 구약 시대 안에서 가난의 문제는 본격적인 사회 문제로 전제되기 시작한 것이 분명하며, 구약성서는 역사서, 예언서, 지혜문학, 시편 등의 전반에서 가난을 하나의 테마로 자리매김한다. 서인석, 『성서의 가난한 사람들』(왜관:분도출판사, 1979), pp.19-31.


  4) 성서의 가난에 대한 시각 분류
  
  ① 창세기-민수기

    그렇게 가난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하려 하진 않는다. 그러나 가난한 자의 동정이 깔려 있다. 여기서는 가난을 제거하기 위해 재산을 나눌 것을 요구하고 있다. 가난한 자는 하느님의 보호를 받는다는 신념과 함께 온갖 피조물, 즉 맘몬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이 하느님께 속해 있고 사람은 이를 일시적으로 소유할 뿐이라는 인식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가난 제거의 신념’은 안식년과 희년과 같은 율법을 낳게 했다.(레위 25,36-37, 출애 23,10-11, 창세 16,1-16) L.J. 호프, 나요섭 옮김, 『성서에 나타난 가난』(서울:나눔사, 1992), p.26.


  ② 신명기

    가난을 이스라엘 사회 안에 존속해서는 안 되는 어떤 것으로 생각했다. 가난은 그 자체로 악이었으며, 이스라엘 사회 안에 가난이 존재함은 율법을 준수하지 않은데 대한 징벌의 하나로 인식했다(신명기 28,29). 그러므로 신명기는 이스라엘의 부유한 자들로 하여금 가난한 자의 짐을 덜어주도록 유도하고 있으며, 동시에 이스라엘의 가난한 자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왜 가난해 졌는가를 깨우치도록 촉구한다. 그리하여 결국은 가난한 이와 부유한 이가 모두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만들고자 한다.
    이를 위해 부유한 자들은 그들의 권리와 요구를 포기하도록 촉구하고 있다(대부금의 이자 청구 금지 23,19-20/ 빈자들의 빚을 정기적으로 탕감해 줄 것 15,1-6/ 해방된 종에 대한 관용 15,12-18)
    결국 신명기 저자는 이스라엘 전체가 한 가족으로서의 상호 관계를 설정하도록 촉구하는 것이다. 한 가족 안에 가난한 자와 부유한 자가 함께 있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토지와 재물이 어느 특정한 개인 및 계층에게 절대적으로 속할 수 없음을 알게 하려고 노력한 것이다. 위의책, pp.45-48.


  ③ 전기 예언서

    이스라엘의 신명기적 역사에는 슬프고 비극적인 이야기가 반복되어 나타난다. 많은 약속으로 시작해서 그러한 대 비극과 실망으로 끝맺기 때문이다.
    즉, 서두에는 에집트의 노예 상태에서 벗어난 자들의 이야기가 서술되어 있고 이 들은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간다. 그곳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은 새로운 경제 질서를 확립하기 위해서 그 땅에서 버림받은 빈자들과 연합해야 했다. 물론 이 새로운 질서는 계급의 구별 없이 한 공동체를 이루는 질서이어야 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후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느님의 뜻을 왜곡하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백성의 일부는 자기에게 할당된 토지에 만족하지를 못했다. 그들은 남의 땅까지 소유하려 들었고, 결국 이스라엘은 그 땅을 잃어버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위의책, pp.76-77.


  ④ 후기 예언서

    하느님께서 가난한 자들의 보호자라 생각하던 이스라엘의 신념은 아마도 하느님의 은혜 입은 자들을 가난한 자들이라고 여기는 새로운 관념을 불러일으킨 것 같다. 가난한 자들이 의지할 수 있는 분은 하느님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들이 가지는 신념과 비슷한 신념을 하느님 안에서 가지라고 요청하는 선지자의 외침이 본문에 많이 나타나는 반면, 가난 그 자체를 하느님께로 가까이 가게 하는 요인으로 이상화하지는 않는다. 이제 가난은 비도덕적 방법을 사용하여 땅과 재산들을 차지함으로써 자신들의 재산을 증식시킨 부자들에 의해 창출된 악이다. 따라서 이들에 대한 하느님의 엄한 심판이 내려질 것이라 보고 있다. 위의 책, pp.110-111.


  5) 신약에서의 가난

    앞에서 구약 성서 안에서 가난이 지니는 여러 의미를 살펴보았다. 가난은 단순히 물질적 빈곤 상태뿐만 아니라 야훼 하느님께 대한 신앙의 기초 안에서 발해지는 내적 개방성, 즉 겸손으로 여겨진다. 그렇다면 신약에서 예수의 행위와 선포로 이어지는 가난은 어떻게 이해될 수 있을까? 이것을 알아보기 위하여 우선 이스라엘 백성이 고대하던 메시아인 예수가 삶에서 보여준 실제적 가난에 대한 문제를 살펴보고 이에 비추어 복음적 가난에 대하여 알아보겠다.

  ① 예수의 실제적 가난

    신약성서의 기록을 보면 예수님은 짐짓 스스로 가난하셨고, 가난한 자의 구원자이셨다. 그분은 루가 사가에 의하면 “가난한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루가 6:20)라는 말씀으로 복음, 기쁜 소식을 전하는 벽두에 선언하신다. 가난한 사람들이야말로 당신이 고대하시는 하느님 나라의 상속을 받을 특전을 지닌다고 하신다.
    야고보 서간을 보면 “내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하느님께서는 세상에서 천대받은 가난한 사람을 택하셔서 믿음에서 부요한 사람이 되게 하시고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약속해 주신 그 나라를 차지하게 하신 것이 아닙니까?”(야고 2:5). 라고 말하면서 이제 오시는 메시아는 하느님께서 이미 약속하신 대로 가난한 자들을 구하시는 主이심을 말한다. 김수환, 「가난에 대하여」『사목 46호』, p.8.

    루가 14장 12절 이하에 나오는 잔치 -하늘 나라 잔치에 초대받아 맛있는음식을 먹게 될 사람들은 역시 “가난한 사람, 불구자, 맹인, 절름발이”등, 모두가 현실 사회에서 천대받는 불우한 사람들이다. 예수님은 이같은 이미 이사야가 예언한 대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 성령의 기름바름을 받고 성부로부터 보내진 구세주다.(루가 4:18; 마태 11:5). 같은책.

    예수님은 실로 가난한 자를 위해 오신 메시아다. 사실상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을 찾고 그를 따른 무리, 예수님 스스로 찾아다닌 사람들은 주로 가난하고, 헐벗고, 병들고, 고통받는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의 나라를 상속받을 가난한 사람들은 누구인가?
    구체적으로 말해서 가난하다는 것은 굶어 죽는다는 것을, 배우지 못한다는 것을, 타인에게 수탈 당한다는 것을, 수탈 당하고 있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다는 것을, 자기가 인격을 가진 한 인간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복음적 가난의 의미가 규정되자면 이러한 가난은 물질적이요 문화적이며, 집단적이요 항쟁적인 가난과 관련해서 규정되어야 할 것이다. G. Gurtierrez, 「가난:연대성과 반항」『사목 46호』, pp.47-48.

    예수님은 실로 가난한 자를 위해 오신 메시아다. 사실상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을 찾고 그를 따른 무리, 예수님 스스로 찾아다닌 사람들은 주로 가난하고, 헐벗고, 병들고, 고통받는 사람들이었다.
    예수님은 이미 말씀한 대로 이들을 위해서 스스로 가난한 자가 되셨다. 베들레헴에서 나실 때(루가 2,7)에도, 나자렛 생활(마태 13,55) 중에도, 복음 선교를 하실 때에도 “머리 둘 곳도 없다”(마태 8,21)고 하실 만큼 가난하셨다. 특히 십자가상에서 그는 가진 것이 무엇이 있었는가? 가난한 자 중에도 가난한 자, 천대받는 자 중에서도 가장 천대받고 버림받는 상태가 아니었는가? 십자가에서 그는 가진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재산만이 아니라, 명예도, 신망(信望)도, 제자들까지도 모두 잃은 상태였다. 성부로부터 까지 모든 것을 빼앗긴, 모든 점에 버림받은, 그야 말로 적빈(赤貧)의 처참한 상태였다. 김수환, 앞의 책, p.8.

    예수의 생애에서 살펴보듯이 그분의 삶 자체는 가난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물질적 가난 그 자체에 의미를 두지 않고 있다. 실제로 그분은 “세례 요한처럼 고행하시지 않으셨다. 예수은 친히 유다인들에게 ‘요한이 나타나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는 것을 보고서는 「저 사람이 미쳤다」하고 말하던 사람들이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는 것을 보고서는 「보아라 저 사람은 먹고 마시기만 좋아하고 세리와 죄인하고만 어울리는 구나」하고 말합니다’라고 말씀하셨다(마태 11,18-19) 예수 그리스도는 보통 사람들과 같은 생활을 하셨다. 그는 음식을 금한 일이 절대 없었다. 그는 아무런 특이한 고신 극기를 하시지 않으셨다. 그는 지상 재물을 하느님의 선물이라 여기시고 그것을 감사하게 사용하셨다.” J. 다니엘루,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신학전망 15호』,       p.97.
이렇듯 예수는 가난하셨지만 가난에 머무르지 않고 자유로우신 분이셨으며 질병이나 죽음을 지겨워하신 것처럼 ‘비참’에 대해서도 지겨움을 느끼셨다. 그는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비참 속에 내려가셨던 것이며 비참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오직 비참한 사람을 사랑하셨다. J. 다니엘루, 위의 책, p.91참조.

    예수께 있어 가난은 그것이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일 자세를 더욱 북돋아 주는 한에 있어서만 의의가 있었다. 실제 예수께서는 당신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모든 것에서 완전히 초연할 것을 요구하시고, 물질적 부로부터의 탈피는 그 중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씀하신다. 또한 당신 제자들에게 지상 재물에 대해 정신적으로 초연할 것을 요구하시고, 지상 재물이 갖고 있는 위험에 대해 경계심을 갖도록 가르치신다. 그리고 더욱 완전하게 당신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물질적 가난의 생활을 영위할 것을 요구하신다( 루가 12,33; 마태 19,21; 마르 19,21.28; 루가 18,22.28.) 허성석, 『수도적 가난』(서울:가톨릭대학 석사학위논문), p.12.
다시 말해 복음서가 전해주는 예수의 가난은 구약의 어쩔 수 없이 처해진 악으로의 가난도 아니고, 개인 수덕을 위한 금욕적 가난도 아닌, 그저 실제적으로 자청한 자유로운 가난이었고, 삶 자체였다. 그리고 이제 그러한 삶을 모든 이에게 요청하고 있다. L.J 호프, 위의 책, p.179.

    또한 마태오 복음에서 등장하는 예수님의 첫 설교의 골자는 바로 ‘빈자들의 행복’이다. 이는 부에 관한 일반적인 생각을 뒤엎으며 하느님 나라의 상속자는 결국 빈자라는 사실을 새롭게 천명하는 것이다. J. 켈리, 「청빈과 부의 성서적 의미」『사목, 47호』, p.25.

    더욱이 최후의 심판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마태오 복음에서는 당신 자신을 일상 생활에서 만나게 되는 가장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자로 규정하고 있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마르 10,17-22, 마태 19,16-21, 루가 18,18-23의 세 공관 복음서에 공통적으로 기술되고 있는 부자 청년 이야기는, 이러한 요청의 긴박성을 전해주면서 당신을 따르기 위해 가난한 삶을 스스로 살아갈 결단이 있는가를 우리에게 묻고있는 것이다. 자신의 부를 포기할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돌아서는 그 부자 청년을 보며 예수께서는 말씀하신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를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루가 18,25)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에 매우 주목해야할 사항이 있다. 바로 가난한 삶으로의 초대에 대한 응답을 예수께서는 하느님 나라와의 긴박감 속에  촉구하시는 것이다. 다시 말해 구약에 있어서 가난의 문제는 부유한 억압자들의 회개를 촉구하고, 가난한 이들을 위로하는 역할을 했던데 반해, 이제 가난은 직접적으로 “구원”을 위한 화두로 고양되어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가난과 구원의 밀접함은 마리아의 모습에서도 잘 드러난다.
    “주님은 전능하신 팔을 펼치시어 마음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권세 있는 자들을 그 자리에서 내치시고 볼 것 없는 이들을 높이셨으며 배고픈 사람은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사람은 빈손으로 돌려보내셨습니다.(루가 1,51-53)
    마리아가 부르는 ‘마리아의 노래’는 하느님과 가난한 자의 관계를 정리하면서 가난한 자의 우월성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부분이라 하겠다. 이러한 가난의 우월성은 가난이라는 상황이 하느님의 은총을 더 자유로이 받아들이고 그분의 왕국을 위해 더 완전히 봉사하도록 하는 힘이라는 데에 있다.


  6) 복음적 가난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예수의 사명은 약하고 불행한 이들에게 하느님의 자비를 드러내는 데 있었으며 그 본질적인 임무는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일이었다.
    “가난”이란 신구약성서에서 나오는 근본적 개념 중의 하나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그분의 생애와 모습에서 결코 빼어 놓을 수 없는 것이 “가난”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영성에 있어서, 이 “가난”을 사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며 하나의 진수를 이룬다고 할 수도 있다.
    한편, 물질 문화의 급속한 발전과 생활의 향상, 그리고 각자가 자기 이익과 안락을 추구하는 현대 사회에서 성직자와 수도자가, 어떻게 “가난”을 실천하며, 어떤 의미에서 “가난한 자”가 되어야 하느냐의 문제는 결코 작은 문제가 아니다. 김보록, 「복음적 가난」『신학전망, 1988. 여름』, p.131.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이 선포되는 것은 그들의 윤리나 영성이 남보다 뛰어나거나, 하느님의 통치를 더 잘 준비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 이유는 가난과 고통 속에서 허덕이는 불행한 사람들에게 당신의 자비와 은혜를 베품으로써 정의를 구현하자는 하느님의 의도에 있는 것이다. 허성석, 「수도적 가난」, (서울:가톨릭대학 석사학위논문, 1994), p.12.
예수께서는 하느님 통치의 기쁜 소식을 선포함으로써 가난한 이들의 고통을 종식시키고자 하셨으며, 당신의 삶 안에서 그 모방을 보여 주셨다. 또한 예수께서는 그러한 삶을 그리스도인들에게 따를 것을 요구하신다. 복음적 가난이란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이며, 예수와 함께 도래한 하느님 나라에 대한 결단이라 할 수 있으며, 이것은 곧,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를 위하여 일함에 있어 지상 재물에 대하여 자신의 태도를 선택하고 행동하는 하나의 방식”인 것이다. 허성석, 앞의 책, p.16.
하느님의 뜻 이외에는 매사에 자유로운 것이 복음적 가난이며, 그것은 빈곤 자체에 집착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원하시면 빈곤을 받아들일 용의가 있는 데에 있다. 빈곤은 그것이 하느님과 뜻을 같이하는 것이라면 좋은 일이 될 것이다. 이와 같이 복음적 가난은 온전히 하느님 나라의 이익에만 전심하고 지상의 재물에 대해서는 해방된 그러한 마음 자세로 나타나고 있다. J. 다니엘, 앞의 책, p.16.

    그런데 가난에 대한 그리스도교인의 자세는 역시 구체적인 양상으로 실현되는 법이다. 복음적 가난을 궁핍과 필수품의 결여와 동일시 할 수는 없고 청빈과 검소한 생활이나 혹은 집단주의와 재물을 공동으로 나누어 가지는 것과도 동일시 할 수 없는 것이지만, 그러나 이들 각기 다른 가난을 현실화하는 방법들이 가난의 완성에 도달하는 하나의 수단으로서는 큰 가치가 있다는 것도 또한 못지 않게 사실인 것이다. 위의책.
그래서 복음적 가난은 마음의 자세라는 정신적 가난뿐만 아니라 실질적이고 물질적인 가난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물질적 가난은 분명, 일종의 사회악이기도 하다. 복음적 가난의 목적은 가난을 즐기는 데 있지 않고, 인간에게 우상으로 군림할지도 모를 소유에서 해방시켜 하느님께로 나아가게 하는 데 있다. 소유욕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인간은 인색함에도 자유로울 수 있다. 그러므로 복음적 가난은 이웃 사랑을 낳게 하는 것이다. 서인석, 앞의 책, p.25.

    가난은 사랑과 해방의 행위이며, 구속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인간의 수탈과 소외의 궁극적 원인이 이기심이라면 자진해서 가난을 선택하는 가장 깊은 이유는 이웃사랑이다. 그리스도교인의 가난은 가난한 이들과의, 불행과 불의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과의 연대성의 헌신으로서만 의미가 있으며, 가난이라는 하나의 이상을 좋아해서 가난하게 되려 함이 아니라 오히려 가난한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없게 되기 위함인 것이다. 여기서 추구되는 이상은 애덕이며, 가난한 이들에 대한 참 사랑이다. G. Gutierrez, 앞의 책, pp.60-61.
따라서 그리스도교 인들은 가난한 이들을 사랑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그래야만 하느님의 뜻을 실현할 수 있을 것이며 그 속에서 이상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복음적 가난이란 부의 분배를 통한 가난의 종식만이 아니라,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자신을 투신함으로써 하느님 나라가 가진 사랑의 산 표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며, 가난에의 동참을 통해 비참한 가난에 시달린 나머지 하느님을 생각할 겨를도 없는 극빈자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이 그들에게도 현존한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게 하는 징표가 되는 것이다. 서인석, 앞의 책, p.39.

    지금까지 성서에 나타난 가난의 의미를 살펴보았다. 구약과 신약은 다같이 가난은 분명 극복되어야 할 대상이지만 하느님께서는 특수한 방법으로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 머무시어 당신께로 가까이 이끄신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성서가 말하는 가난은 본질적으로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성립되어야 하는 것이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나 규칙에서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하느님과의 관계는 온전히 하느님 나라의 이익에만 전심하고, 지상의 재물에 대해서는 해방된 그러한 마음 자세를 나타내며, “누가 부자이나 가난한 자이냐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였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신석기, 「수도생활의 신원성」『신학과 사상, 12호』, p.49 참조.











Ⅲ. 성 프란치스코의 생애

    성 프란치스코의 영성과 정신을 가장 명백히 접할 수  있는 곳은 그의 글이다. 성인 생애의 마지막 몇 년 동안에 쓰여진 글들은 세 가지 범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로는 두 개의 회칙(인준 받지 못한 1221년회칙, 인준받은 1223년도 회칙) 둘째,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와 형제회에 보낸 편지들, 그리고 권고의 말 등이다. 이 글들에서는 수도회의 머리로서 공식적인 권위를 가지고 말한다. 다른 한편 어느 봉사자와 레오 형제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영신의 안내자처럼 말하고 있다. 이 편지들에서는 아주 개인적으로 말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하느님 찬미에의 초대, 덕행들에게 바치는 인사,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 드리신 인사, 주의 수난 성무일도, 그리고 태양의 노래에서 성 프란치스코는 자신의 깊은 정감을 표현하면서, 자신을 쉬지 않고 깊이 기도하는 사람으로 드러낸다” 유수일,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추구했던 삶의 본질」『신학전망,   113호』, P.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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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 프란치스코가 추구했던 삶을 요약하면 첫째, 하느님께 온전히 중심을 두는 삶. 둘째,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 셋째, 거룩한 복음의 양식을 따르는 삶. 넷째, 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삶으로 나눌 수 있다.
    토마스 첼라노는 프란치스코의 세속 생활을 이렇게 표현한다.
    “스뽈레또 계곡 기슭에 위치한 아씨시의 고을에는 일찍부터 세상의 허영심에 따라 오만무레하게 자란 프란치스코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 부모의 천박한 생활과 행실을 오랫동안 모방하여 그의 허영심과 교만함도 한층 심했다” T. Celano, 한국관구회 편, 『프란치스코의 생애』, (왜관:분도출판사,     1986), p.52.
물론 이 말이 당시의 성인전 형식 중 은총의 역할을 빛나게 하기 위하여 먼저 죄에 얼룩진 과거를 나열하는 소위 아우그스띠노 신학의 영향을 받은 형태라 하더라도 세상의 허영심, 부모의 천박함 등의 표현으로 볼 때 프란치스코의 세속 생활은 보통 사람과 그리 다를 바 없는 생활이었음을 추측하여 볼 수 있겠다.
    이와 같은 프란치스코가 어떻게 자신의 일생을 바쳐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르고 전 존재를 온전히 벌거벗은 채로 그분께 봉헌 할 수 있었는가? 그것은 은총으로서의 하느님 체험이 그 기초가 되었다고 말 할 수 있다.
    “이분이 아직도 죄 중에 있는 젊은이의 열정에 활활 불탔고 철없는 나이가 젊은이의 욕구를 채우도록 무절제하게 충돌했을 때, 그리고 자신을 어떻게 길들여야 할지 몰라서 해묵은 뱀의 독으로 자극되었을 때, 그리고 자신을 어떻게 길드여야 할지 몰라서 해묵은 뱀의 독으로 자극되었을 때, 갑자기 하느님의 복수, 아니 차라리 하느님의 기름 부으심이 그에게 베풀어져 정신적 고뇌와 육체적 고통이 그에게 닥쳐오게 하심으로써 우선 그의 잘못된 각성들을 일깨워 주고자 하셨다.” 위의 책, p.55.
는 토마스 첼라노의 말처럼 하느님은 그를 거룩한 은총으로 채워주셔서 영웅적인 덕으로 찬미를 받을 수 있게 하여 주신 것이다. Bonaventura, 한국관구 편, 『보나벤투라에 의한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전기』,(왜관:분도출판사, 1986), p.10.

    프란치스코의 초기 하느님 체험은 4단계로 나눌 수 있다.
1198년 아씨시의 귀족들과 볼로냐의 노동자들 사이에 투쟁이 일어나 이 여파로 말미암아 아씨시와 페루지아 간의 전쟁으로 번지게 되자 아씨시의 방어에 참가하게 된 프란치스코는 1202년 페루지아의 성요한 다리 전투에서 패배하여 1년 동안 포로생활을 하고 난 후 1203년 석방된다. J. Jorgensen, 최정오 옮김,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서울:계성출판사, 1982), p.32.
그는 포로 생활에서 풀려나오자마자 중병에 걸려 오랫동안 고열로 생사의 기로를 방황하는 동안 사후 문제에 대하여 묵상하게 되면서 현세의 공허함을 차츰 깨닫기 시작했다. 병이 다소 차도를 보이자 밖으로 나가 들판의 아름다움과 포도원의 쾌적함 그리고 그 밖의 보기 좋은 것들을 보았으나 이미 그의 마음속에는 피조물의 노래가 더 이상 마음을 끌지 못하였다. T. celano, (1986), p.55.
하느님께서 그를 당신의 도구로 사용하기 위해서 이때부터 프란치스코를 회개의 길로 들어서게 하신 것이다. 이 시기를 그의 회개의 1단계로 생각할 수 있다.
    회개의 1단계를 거친 후 점차 건강이 회복되자 프란치코는 다시 계속적인 생활로 되돌아가 앓기 전과 조금도 다름없는 전철을 밟기 시작했다. 전보다 더 큰 일을 보다 진기한 모험을 하기 위해 먼 나라로 가서 공을 세울 꿈을 꾸며 어릴적 꿈인 기사가 되고자 하였다. J. Jorgensen, (1986), p.33.
급기야는 이탈리아로 가는 귀족을 따라 자신의 꿈을 이루고자 하였던, 프란치스코에게 하느님께서는 전투용 장비로 가득 찬 집의 환상을 보여주신 후 프란치스코를 부르신다. T. Celano, (1986), p.57.
보나벤투라에 의하면 하느님께서 프란치스코의 꿈속에서  “프란치스코야, 네 고향으로 돌아가라, 네가 보았던 환시는 사람의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으로 네 안에서 이루어질 영적인 일을 예언한 것이다.” Bonaventura, (1986), p.20.
라고 말씀하심으로써 프란치스코를 부르셨다고 한다.
    집으로 돌아온 프란치스코는 세상사의 혼잡에서 물러나 자기자신 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간직하고자 힘쓰며 아씨시의 읍 근교에 있는 동굴에서 친구와 함께 값지고 엄청난 보화에 대하여 이야기하면서 홀로 끊임없는 기도로써 하느님과의 대화를 통하여 자신의 갈 길과 그의 뜻을 실행하고자 온 정성을 기울였다. T. Celanno, (1986), p.59.
이 시기를 그의 회개의 2단계로 볼 수 있겠다.
    그 후 프란치스코는 그리스도의 기사가 되기를 원한다면 먼저 완전한 자가 되어야 하며 자기 자신을 극복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결심 속에서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평소 혐오스럽게  생각하던 나병환자를 만나게 되

자 그는 자신의 결심을 상기하고 달려가 나병환자에게 입맞추고 자신의 사랑을 드러낸다. 보나벤투라에  의하면 프란치스코는 자신이 입맞춘 나병환자가 눈앞에서 사라지는 경험을 체험하고 기쁨에 넘쳐 미래에 더욱 열심히 할 것을 결심하며 하느님을 찬양하였다고 한다. Bonaventura, (1986), p.21.

    어느 날 다미아노 성당 십자가 앞에서 기도하던 그는 십자가로부터 들려오는 “프란치스코야 나의 집을 세워라”하시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게 된다. 이 체험을 통해 프란치스코는 주님의 고난에 대한 생각 속에 사로잡혀 살아 있는 동안 줄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상을 마음속에 항상 지닐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다한다. J. Jorgensen, (1991), p.51.
바로 이 시기가 프란치스코의 회개의 제 3단계라 말할 수 있겠다.
    그러나 프란치스코는 자신의 아버지에게 핍박받고 감금당하게 된다. 어머니의 도움으로 풀려났으나 계속적인 아버지의 방해를 받은 그는 주교와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옷을 벗어 아버지에게 되돌려주며 “앞으로는 베드로 바르나드로를 아버지라 부르지 않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나의 아버지로 섬기겠습니다.” 위의 책, p.58.
라고 말함으로써 자신은 이제 이승의 것을 모두 떨어버리고 온갖 근심 걱정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고달픈 길에서 가난한 몸으로 평화를 찾을 것을 선포한다. T. Celano, (1986), p.67.
이때를 프란치스코의 마지막 회개의 단계로 볼 수 있다.
    이 후로 프란치스코는 성 다미아노 성당, 성 마리아 성당 등을 수리하며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전을 가지고 다니지 말고 식량자루도, 여벌의 옷이나 신도, 그리고 지팡이도 가지고 다니지 마시오” (마태 10, 9-10)라는 복음 말씀을 생활 규칙으로 삼아 완전히 자기비하에 다다르기 위하여 모든 겸손과 친절로써 전심을 다해 봉사하며 Bonaventura, (1986), p.22.
그리스도의 완전한 일치를 이루는데 장애 되는 모든 것을 제거하고 완전하고 극단적인 가난을 포용하며 살아가게 된다. 프란치스코 한국관구,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와 성녀 글라라의       글』(왜관:분도출판사,   1987), p.16.

    이상에서 살펴본 프란치스코의 하느님 체험을 통한 회개의 생활 속에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은 하느님의 은총이라는 측면과 동시에 인간의 응답이라는 측면이라 하겠다. 프란치스코의 회개 과정 중 우리가 소홀히 하여서는 안될 사실은 그의 회개가 단순하게 이루어진 것이 아닌 응답하고자 하는 그의 노력 속에서, 하느님께 대한 굳은 신뢰 속에서, 하느님의 은총을 통하여 점차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프란치스코의 가장 흥미 있는 면모 중의 하나는 그가 실제로 자기 삶 안에서 하느님을 만났고 체험했으며 그분께 자신을 완전히 내맡겼다는 점이다. 그는 유언에서 회개 생활을 시작하게 해주신 것도 주님이셨으며, 나병환자를 돌보게 된 것도, 세속을 떠난 것도, 성당에 대한 크나큰 신앙심을 준 것도, 사제들에 대한 신심을 주신 것도, 그에게 형제들을 주신 것도, 회칙을 쓰게 하신 것도 모두 주님이 하여 주셨다고 말한다. 위의 책, p.103.
이 말을 토대로 우리는 그가 얼마나 전 생애를 통하여 매 순간 순간 주님께 응답코자 노력했다는 것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프란치스코는 삶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의식하고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뜻을 세밀히 따르려 하였고 그분의 선하심과 위대하심에 늘 감사와 찬미를 드리고자 했다. 프란치스코는 영혼의 어떠한 부름도 대답을 받지 못한 채 지나쳐 가도록 결코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것을 경험할 때 하느님이 그것을 허락하시는 한 그것을 가장 최대한으로 이용하였다. 여행길에 있을 때에 하느님의 영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낄 때면 자기의 동료들은 계속 나아가게 하고 자신은 멈추어 서서 이 새로운 영감을 받았다. 그는 하느님의 은총을 헛되게 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Bonaventura, (1986), p.110.

    프란치스코의 이러한 열정과 겸손과 신뢰는 현재 그리스도께서 부어주시는 은총의 보고 속에 살아가는 우리에게 충격과 반성의 기회를 제공한다.
Ⅳ. 성 프란치스코의 신비체험

    하느님의 체험을 통해 새로운  삶을 살게된 프란치스코의 가난 생활의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의 육화와 수난 신비에 대한 간절한 사랑으로 바탕을 이룬다. 프란치스코의 전 생애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핵심이며 전부였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정확하게 말해서 “가난한 사람이 되신 하느님이시다” 왜냐하면 당신이 가난한 사람으로서의 생활과 생애를 사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런 가난한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아버지의 아들을 알아본다. 예수 그리스도는 가난한 사회 환경 가운데서 태어나시고 가난한 사람과 호흡을 같이하고, 동고동락하셨으며, 가난한 사람들에게 우선적으로 당신의 복음을 전하시고, 보호하셨으며 아버지 앞에 영신적으로 온전히 가난한 분이셨다. G. Gutierez, 김수복 옮김, 『가난한 사람들의 역사적 위력』(서울:성요셉출판사, 1987), p.26.
성서 속에 예수는 자신을 비움으로써 우리의 인간성을 취하신(필립 2,7) 가난한 자, 멸시받는 나자렛 출신(요한 1,46), 목수의 아들(마태 13,55)이셨다. 그분은 영광과 권력을 통하여 사명을 수행하라는 악마의 유혹을 물리치셨으며(마태 4,5-10) 박해의 무죄한 희생자로서 부당한 재판에 의하여 범죄자로 처형되신 분이셨다. D. Dorr, 오경환 옮김, 『가난한 이들의 선택』(서울:분도출판사, 1987),   p.14.  

    바로 이와 같은 예수 그리스도가 프란치스코 생활의 중심이었다. 그는 가난하고 불쌍한 모든 사람들을 한 형제 자매로 보고 그리스도를 섬기듯이 그들에게 봉사였다. 프란치코에게 있어서 진실로 그리스도는 하느님을 만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었으며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는 장소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을 볼 수 있었으며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었다. 프란치스코는 “나를 보았으면 곧 하느님을 본것”(요한 14,8)이란 말씀대로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에서  모든 것을 보는 가운데 그리스도 중심적인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가 가난한 생활을 택한 것도 그리스도께서 어느 덕행 보다도 가난을 받아들이셨기 때문이다. 프란치스코 한구과구 편,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와 성녀 글라라의   글』(왜관:분도출   판사, 1985), p.158.
그는 가난을 하느님의 아들과 특히 가까운 것으로 깨닫고 나서 비록 온 세상이 가난을 멸시하고 있었으나 영원한 사랑으로 가난과 정혼하려 하였다. 위의 책, p.16.

    가난이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 때문이라는 것을 그의 가르침에서도 알 수 있다. 수사들에게 가난에 대하여 이야기 할 때 프란치스코는 종종 복음의 구절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도 두는 둥지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조차 없다” (마태 8,20)를 인용하면서 완전한 가난을 실천하려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모든 세속적인 지혜와 세상의 지식마져도 어느 정도까지 포기해야 비로소 그는 하느님께서 이루신 큰 일들을 이야기 할 수 있게 되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이의 품속으로 자신을 완전히 벌거벗은 체로 봉헌할 수 있게 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Bonaventura, (1991), p.76.
이는 가난의 최종목적이 결국 그리스도께 자신을 봉헌하는 것임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프란치스코의 가장 높은 지향과 주된 바람과 최고의 결심은 복음을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을 통하여 실행하는 것이었고 조금도 한눈을 팔지 않고 열의를 다하여 애타게 갈망하는 온전한 정신과 뜨겁게 타오르는 온전한 마음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치심과 발자취를 따르는 것이었다. 그는 끊임없는 묵상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말씀을 되새겼고 예리한 사고력으로 그리스도의 행적을 되새겼다.
    그는 그리스도의 지상생활의 모든 면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깊이 체험하였으나 특히 그분의 육화와 수난의 신비에서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였다. 토마스 첼라노는 육화와 수난의 신비에 매료된 프란치스코를 이렇게 전한다.
    “육화의 겸손과 수난의 사랑이 특히 그를 사로잡았으므로 그는 다른 것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하느님의 성인은 부제였으므로 부제복을 차려 입고 거룩한 복음을 낭랑한 목소리로 노래하였다. 그의 목소리는 우렁차면서도 부드러웠고, 맑고 낭낭하였으며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최고의 보상을 받게 했다. 그는 둘레에  있는 사람들에게 가난한 임금의 탄생과 작은 마을 베들레헴에 관하여 재미나게 말을 하였다. 그는 그리스도 예수를 부르고 싶을 때면 사랑에  불타서 그분을 ‘베들레헴의 아기’라고 부르곤 하였고, ‘베들레헴’이라는 말을 할 때의 그의 목소리는 마치 어린양의 울음소리 같았다. 그의 입은 말로써 보다는 차라리 감미로운 사랑으로 채워져 있는 형편이었다. 그뿐 아니라 ‘베들레헴의 아기’나 ‘예수’라는 말을 할 때 그의 혀는 이 말의 감미로움에 입맛을 다시고 입술을 핥으며 맛과 향기를 보는 듯 하였다” T. Celano, (1986), pp.139-141참조.

    토마스 첼라노의 말만 보더라도 프란치스코 성인이 얼마나 예수 그리스도의 육화의 신비에서 감동과 생명력을 느끼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Ⅴ. 자발적 가난의 영성

  1. 복음과 가난

    프란치스코가 따르고자 하는 첫 동료들이 하나 둘씩 생겨났을 때 그는 하느님이 원하시는 삶이 무엇인지를 복음서를 통해 찾고자 하였다. 그래서 첫 동료들과 함께 성 니꼴라오 성당으로 가서 그 당시 만연했던 대중신심인 소위 “사도들의 제비뽑기”(Sortes Apostolorum)를 통해 복음서를 세 번 펼쳐 보았다. 이렇게 해서 뽑은 세 구절은 ①“완전하게 되려거든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나서 나를 따르라”(마19:21), ②“여행 중에 아무것도 지니고 다니지 말라”(눅9:3), ③“나를 따르려면 자기 자신을 부정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마16:24)였다. 모두 그리스도를 따르라는 주제였고, 이에 프란치스코는 “이것이 우리의 생활이요, 우리와 앞으로 우리를 따르게 될 이들의 회칙입니다” Bonaventura, (1991), p.34.
라고 하였다. 여기서 두드러지게 드러난 주제는 가난이었는데, 가난은 소유의 부재만이 아닌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가능하게 하는 자기 단순화였다. 프란치스코는 가난한 자 중에서도 가장 가난한 자들과의 자비롭고 다정한 유대 속에서 정의적인 인간애를 실현했던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만이 세상은 부정되고 그리스도를 진정 따를 수 있다고 그가 믿었기 때문이다. W. Walker, 이영헌 외 3인 옮김, 『세계기독교회사』(서울:대한기독교   출판사), p.189.

    교회의 엄청난 부와 권력 뒤에도 도사리고 있던 ‘탐욕’에 대한 저항은 이 가난을 자발적으로 선택한 프란치스코의 복음적 삶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이제 그리스도교의 가장 큰 죄는 교만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모든위계 질서 속에서 인간적 삶을 소외시켰으며 부와 복잡한 교리와 쾌락의
영광 속에 갇혀 버린 교회의 욕심인 것이다. 프란치스코는 교회에 가난에 대한 사랑을 다시 부여하고, 교회의 부유함으로 인해 스캔들을 만든 사람들에게 교회를 신빙할 만한 것으로 만들었다. A. Franzen, 최석우 옮김, 『교회사』(왜관:분도출판사, 1982), p.241.

    참된 교회, 즉 신자의 공동체는 예수의 삶을 다시 살고 재현함으로써 거룩한 복음 자체인 그리스도의 길을 가는 소박하고 순결한 순례자들의 모임이다. 그러한 순례자들은 하느님의 나라를 앞당겨 사는 ‘교회 종말론 성격의 증인’이며, 자신의 존재와 삶을 다 바쳐 하느님의 존재와 하느님 나라의 탁월성을 선포하는 ‘신약교회의 예언자’요, 자아 포기와 그리스도의 추종을 통해서 이 세상에 그리스도의 삶을 재현시키는 ‘교회의 거룩한 표징’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이덕근, 「교회와 세상을 위한 수도생활과 수도공동체」『사목 176     호』, p.3.
따라서 복음은 프란치스코의 관심의 핵심이었으며, 그것에 낀 모든 때를 벗기고 온갖 주와 해석을 거부함으로써 글자 그대로 단순화하여야 한다.
    프란치스코는 예수의 생애를 재생하고 재현하기를 바랬다. 이것이 복음을 글자 그대로 따르고자 하는 그의 주장의 뿌리였고, 그의 관심의 진수인 복음에 대한 어떠한 윤색도 거부한 까닭이었다. L. Boff, 박정미 옮김, 『정 그리고 힘』(왜관:분도출판사, 1987),         p.45-46.
그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고난, 가난, 겸허는 우리를 하느님께로 인도하여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고, 그의 사랑 속에 몰입시켜 직접 체험케 한 후, 다시 이 세상으로 나와 이웃과 형제들에게 그 사랑을 나누어주게 한다. 류기종, 『기독교영성』(서울:은성, 1997), p.124.
프란치스코는 이렇게 복음을 통해서 자신의 성소를 찾게 되었으며, 그리하여 그는 유언에서 “거룩한 복음의 양식에 따라 살아야 할 것을 주님 친히 가르쳐 주셨다”고 말한다. 그래서 당시의 프란치스코는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삶을 이상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2. 그리스도의 모방

    프란치스코는 자신과 형제들의 삶을 “순종하며 소유 없이 정결하게 살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는 것" 엄두섭, 『수도생활의 향기』, (서울:보이스사, 1992), p.255.
으로 제시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지상에서 사셨던 것처럼 산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당시 일반화 되어 있었던 정주적(定柱的)인 수도승적 양식을 거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와  사도들처럼  일정한 거주지 없이 탁발하는 방랑 생활을 기본 생활 양식으로 삼게 된다. 프란치스코의 글 안에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혹은 ‘사도가 말합니다’라는 표현들을 자주 발견하게 되고, 초대교회 공동체의 아름다운 모습을 기술하고 있는 사도행전의 내용을 발견할 수 없는 것이 그 증거라고 할 수 있다. 김승종, 『프란치스코탁발 수도회의 영성연구』(한신대신학대학원논문,   1997), p.32.

    그런데 프란치스코가 발견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은 당시 교회가 갖고 있었던 그리스도 상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프란치스코의 시대는 교황권이 절대적인 경지에 오른 시기였기 때문에 지상의 왕권은 교황권에 예속되어 있었다. 이 시대의 풍만한 그리스도관은 부활 승천하셔서 전능하신 하느님 오른편에 앉아 계시면서 지상의 대리자를 통해 통치하시고 영광 중에 재림하시어 심판하실 왕이라는 것이었다. 따라서 교회는 그리스도를 대신해서 세상을 통치하고, 세속의 권세는 영적인 권세인 교황권에 굴복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프란치스코가 복음서를 통해서 발견한 그리스도는 “가난하시고 겸손하시며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이라는 것이다. 바로 그것을 통해 그리스도는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것이다. 또한 프란치스코의 가난한 사람과 고난 당하는 사람들에 대한 동정심은 그를 이끌어 “십자가에서 고난 당한 자”를 향한 동정심에 깊이 잠기게 하였다. 따라서 프란치스코와 그의 제자들이 따르게 될 그리스도는 영광의 그리스도가 아니라 가난하게 사셨고 겸손하게 사셨으며 결국 우리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벌거벗은 채로 못 박히셨던 현실의 그리스도인 것이다. 이러한 그리스도 관은 우리로 하여금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우선적으로 열려진 해방의 영성에 이르게 한다.  

  Ⅵ. 성 프란치스코의 가난의 실천

    하느님으로부터 프란치스코가 받은 초자연적 선물들 중에서 완전한 가난에 대한 그의 사랑은 그를 정신적으로 부유하게 자라게한 특별한 특권을 이루고 있었다. 그는 가난이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항구한 벗이었으나 현세상으로 부터 모욕을 당하는 것을 알았다. 그는 가난을 위하여 모든 것을 벗어 던졌다. 그는 가난을 모든 덕의 여왕이라고 부르면서 그리스도께 가장 가까이 가게 하여 주는 길은 가난이라 즐겨 말했다. Bonaventura, (1991), p.75-76참조.

    그에게 있어서 가난은 완덕에 이르는 길이었고 영원한 부의 약속이며 보증이었다. T. Celano, (1986), p.270.
한 수사가 구원에 관하여 물었을 때 프란치스코는 “나의 형제 들이여 나를 믿으시오. 가난은 구원의 특별한 방법입니다. 그것은 겸손의 근원이며 모든 완전의 뿌리이며 그것의 결실은 보이지 않으나 풍성하오, 그것은 우리가 모든 완전의 뿌리이며 그것의 결실은 보이지 않으나 풍성하오, 그것은 우리가 모든 것을 팔아 사야할 복음서에 나오는 밭에 감추어진 보화이오”라고 말함으로써 가난이 구원의 특별한 지름길임을 깨우쳐 준다. Bonaventura, (1991), p.76.

    토마스 체라노는 프란치스코가 가난한 사람임을 증명하면서 “아무도 그가 복음의 진주를 간수하는데에 안달한 만큼 자기의 보물을 간수하는데에 안달한 사람이 없었다.” T. Celano, (1986), p.270.
고 말한다. 사실 그는 수도생활을 시작할 때부터 죽을 때까지 한벌의 투니카와 한 가닥의 허리끈과 팬츠만을 가진 부자였고 다른 것은 일체 없었다. 그의 초라한 수도복은 그가 어디에 자기 재산을 두었는지를 드러내 준다.
    프란치스코는 형제들에게 가난에 대하여 이야기 할 때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둘 곳조차 없다”(마태 5,20)라는 복음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집처럼 작은 집에서 자기들의 소유가 아닌 다른 사람의 소유 집에서 순례자처럼 고향을 그리며 평화스럽게 지낼 것을 가르쳤다. 형제들의 공동체에 입회하고자 하는 자에겐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면 가서 너의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라”는 예수의 말씀대로 자신의 모든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고 난 후 입회할 것을 요구하였다. 위의 책, p.77.

    프란치스코의 가난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난에 온전히 동참함으로써 자신을 비우고 그리스도를 채우는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되었다. 프란치스코의 가난은 물질적인 가난, 즉 단순히 물질적 소유의 포기나 소그적 나태가 가져다주는 빈곤, 그리고 금욕적 방법의 물질적, 육체적 엄격성에 국한 된 것은 아니었다. 그의 가난은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온전한 자신을 산 제물로 바친 겸손 안에서 사랑으로 자기의 모든 것을 완전히 포기한는 것까지 포함하는 적극적 의미의 가난이다. 프란치스코의 포기는 자기의 절대적이고도 완전한 희생이라고 할 수 있겠다.
    프란치스코는 항상 모든 면에서 가난하고자 노력하였다. 살림도구에 있어서도 순례자임을 살림도구가 나타낼 수 있도록 하고 귀향 살이 하는 사람들임을 노래하도록 하기 위하여 식탁이나 그릇 안에 있는 내용물이 세속에 대한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면 그것이 무엇이든지 좋아하지 않았다. T. Celano, (1986), p.274.
책에 있어서도 물질적으로 값이 많이 나간다해서 책을 찾아서는 안되며, 책의 아름다움 때문이 아닌 영적인 이익을 위해서 책을 찾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위의 책, p.275.

    또한 그는 잠자리에 있어서도 그의 형제중 거적을 깔고 그위에 반은 삭아서 헤진 누더기 이부자리라도 덮을 수 있는 형제는 그 이불을 신혼의 원앙 금침으로 여길 수 있도록 잠자리에 가난이 밸 수 있게 하였다. 위의 책, p.276.

    프란치스코에 있어서 돈은 똥이나 파리에 비유되었다. 길거리에서 발견한 돈자루를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자는 형제에게 그 돈이 뱀으로 변하는 것을 보게하여 주어 돈이 하느님의 종들에 있어서는 하나의 악마요, 독사일 뿐임을 깨우쳐 주었으며 Bonaventura, (1991), p.79.
멀리에서 많은 형제들이 뽀르찌웅꿀라의 성마리아 성당을 방문하였을 때 그들의 양식을 위하여 지원자들의 돈을 모아두었다가 긴요하게 쓰자는 형제에게 그러한 애정의 잘못됨을 인식시키고 차라리 돈을 예비하여 두느니 복되신 동정녀의 제대보를 벗기고 제대의 장식들을 팔아 충당할 것을 지시함으로써 돈의 소유를 금지하였다. T. Celano, (1986), p.280.
그의 가난은 모든 것을 포기하지만 사랑으로 가득 채우는, 낮아지지만 높아지는, 모든 것을 버리지만 모든 것을 소유하는 적극적이고,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가난이다.
    옷에 있어서도 투니카를 두벌 이상 소유하는 것을 원치 않았으며 그 두벌의 투니카도 헝겊을 기운 것만을 허락하였다. 그의 이러한 제재는 절실한 필요가 아닌 인간의 기호에서 시작되는 필요는 영혼을 좀먹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스스로의 모범으로 자신의 투니카에 거친 베를 대고 기웠으며 자기보다 더 형편없는 옷을 입은 사람을 볼 때마다 그는 부러워하고 자신을 꾸짖었다. Bonaventura, (1986), p.80.
그는 가난이 그 걸인 안에서 빛나고 있음을 간파하였던 것이다.
    가난에 대한 사랑으로 프란치스코는 저절로 주어진 희사보다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구걸한 희사를 쓰길 더 좋아했으며 형제들에게도 적극 권고하였다. 한번은 오스띠아 추기경의 저녁식사 초대에 참석하기 전에 동냥한 사실을 추기경이 알고 불쾌하였을 때 “우리가 기꺼이 마음으로 참되어 가난하게 될 때 우리로 하여금 천상 왕국의 계승자와 왕이 되게 하는 것은 바로 그분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단순히 대부로 잠시 동안 당신에게 주어진 기만적인 부를 위해서 이 위험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위의 책, p.81.
라고 말함으로써 자신의 동냥이 지극히 거룩한 예수 그리스도를 참되게 따르고자 하는 완전한 자기비하의 가난 정신으로부터 비롯됨을 나타내고 있다. 또한 구걸을 부끄러워하는 형제들에게 프란치스코는 지극히 고귀하신 하느님의 아드님이 이 세상에 우리를 위하여 스스로를 낮추시고 가난하게 되심을 상기시키면서 동냥을 부끄러워하지 말 것을 깨우쳐 주곤 하였다. 프란치스코 한국관구 편,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와 성녀 글라라의   글』(왜관:분도출판사, 1986), p.87.
프란치스코의 이런 복음적 가난은 그의 전 생애를 통하여 그를 그리스도와 함께 있게하여 주었다.
    그의 가난은 단순한 물질적 재화의 소유권의 포기나 물질 사용에 있어서의 엄격성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마음의 가난을 위한 물질적 가난임을 간과하여서는 안될 것이다.
    그는 완전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 위하여 “너희 가운데 누구든지 나의 제자가 되려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루가 14,33)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자신이 소유한 모든 것을 포기하였다. 위의 책, p.30.
그리스도의 완전한 제자가 되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았던 프란치스코는 실로 재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는 그분 말씀의 참뜻을 올바로 깨닫고 실행한 지혜로운 자였던 것이다. 제 2회칙에서는 프란치스코 성인의 가르침을 빌어 참된 가난에 대하여 잘 설명하고 있다. 회칙에서 가난이란 외면적인 어떤 형태이기보다는 오히려 특히 내면적인 것으로 말하고 있다. “자기의지를 자기 것으로 생각하고 주님이 말씀하시고 이루어 주신 선행을 자랑하게 되는 사람은” 위의 책, p.31.
마음으로 가난한 사람이 아니며 자기에게 해가 될 듯한 말 한마디를 들을 때나 어떤 물건을 빼앗겼을 때 계속 괘씸하게 생각하고 흥분하는 자들도 마음으로 가난한 사람이 아니다. 같은 책, p.37.
오히려 프란치스코 성인의 거룩한 말씀과 교훈에 의하면 교만하지 않고 재산이나 권력에 의존하지도 않으며 “배고픈 사람을 좋은 것으로 먹여 배불리시고 부유한 사람은 빈손으로 들려 보내신” 주님께 모든 희망을 두고 “매사에 자신을 낮추고 자랑하지도 말고 기뻐하지도 말며 좋은 말과 일이 있더라도 자만하지 말고, 특히 하느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하시는 말씀과 좋은 일에 대하여 마음속으로 자랑하지 않도록 노력하는”사람이 참으로 가난한 사람이다. 같은 책, p.4.

    프란치스코는 “우리는 그분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난의 길을 택하였습니다” T. Celano, p.288.
라고 말하면서 결국 물질적 가난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주인으로 모시기 위한 마음의 가난을 픙요롭게 하는 기초로서 작용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프란치스코의 무소유에 대한 가르침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그는 자신 뿐 아니라 자기 형제들에게도 집이나 재산을 소유하는 것을 금지하였으며 심지어는 자신이 기거하는 방을 어느 형제와 프란치스코의 방이라 불렀다 하였으며 영적인 이익을 위한 한도 내에서만 책을 찾아 가르쳤다. 이러한 물질에 대한 소유 금지는 형제들이 그 물질의 소유로 인하여 참된 가난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름에 방해받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었음을 추측할 수 있겠다.
    프란치스코는 물질에 대한 무소유뿐만 아니라 직책이나 의지에 대한 무소유 즉 완전한 무소유를 말한다. 그는 아무도 장상직을 자기 소유로 생각하지 말고 물러날 때나 얻게 될 때에도  항상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 고 말씀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흥분하거나 자랑하지 말라고 권고한다 프란치스코 한국관구,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와 성녀 글라라의       글』(왜관:분도출판사, 1986), p.32.
또한 아담의 불순종을 예로 들면서 의지조차도 소유하여서는 안된다고 가르친다. 같은 책, p.70.

    프란치스코의 무소유, 즉 가난이란, 하느님에의 찬양 곧 그분께 대한 자녀적 사랑을 드리고 이웃에 대한 사랑의 실천 방법이며 복음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기 위한 것으로서 가난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라는 것을 찾아낼 수 있다.
    프란치스코는 가난 속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참다운 자유와 해방을 보았던 것이다. 그의 모범과 가르침은 우리에게 인간이란 하느님의 구세사를 위한 도구일 뿐이라는 것을 깨우쳐 주면서 그는 우리에게 “여러분에게 당신 전부를 받으실 수 있도록 여러분의 것 그 아무것도 여러분 자신을 위하여 남겨두지 마십시오” 같은 책, p.135.
라고 간구한다.
    그리스도의 가난한 사람들은 겁낼 것이 아무것도 없다. 하느님께서 거룩한 섭리의 과정 속에서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필요한 것들을 그와 같은 가난이 모자라게 결코 내버려두시지 않기 때문이다. Bonaventura, (1991), p.85.

    그리스도께서 가장 천한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지만 만왕의 왕 되신 가장 높은 분이시고, 가장 가난한 자로 오셨지만 가장 부유한 자요, 십자가의 고난의 어둠 중에 있었지만 어둠을 깨치고 부활하셔서 인류를 구원하신 역설적 진리를 프라치스코는 그대로 따랐던 것이다.




  1. 가난에 대한 사랑

    토마스 첼라노는 “프란치스코의 가장 높은 지향과 주된 바람과 최고의 결심은 복음을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을 통하여 실행하는 것이었고 조금도 한눈을 팔지 않고 열의를 다하여 애타게 갈망하는 온전한 정신과 뜨겁게 타오는 온전한 마음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발자취를 따르는 것” T. Calano, (1986), p.139.
이라고 기술하고 있듯이 프란치스코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신 분이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에게는 가난한 그리스도와 같이 가난의 길을 걸어가며 살았고 가난을 “귀부인이신 거룩한 가난”이라고 의인화시켜, “귀부이신 거룩한 가난이여 주께서 당신의 자매인 거룩한 겸손과 함께  당신을 축복하시길!” 엄두섭, 『성프란치스코』(서울:은성출판사, 1989), p.159.
이라고 말한다.
    프란치스코는 ‘귀부인 가난’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그 귀부인과 혼인하여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원했다. 토마스 첼라노의 전기에 가난과 혼인에 대하여 “그는 가난을 하느님의 아들과 특별히 가까운 것으로 깨닫고 나서, 비록 온 세상이 가난을 걷어찼지만 그는 영원한 사랑으로 가난과 청혼하려 하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가난과 결혼이라는 표현은 역사상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프란치스코에게는 그리스도의 가난 속에서 그리스도와 완전한 결속과 신적 사랑의 절정을 발견하고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 포용하려 했던 것이다. 이러한 청빈에 대한 사랑은 프란치스코에게 있어서 물질적 가난도 있지만 아무리 물질을 다 버렸다 해도 그것이 하느님과 이웃 앞에서 자기를 높이는 자기 의(義)가 된다면, 그것은 가난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완전한 가난은 자신의 마음을 비우고 오직 그리스도와 사랑을 갈망하는 청빈임을 프란치스코는 ‘영적인 권고 14’에서 설명하고 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5:3) 여러 가지의 기도와 신심 행사에 열중하고 육신의 많은 극기와 고행을 하면서도 자기에게 해가 될 듯한 말 한마디만 듣거나, 혹은 어떤 것을 빼앗기기만 하면 발끈하여 내내 흥분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런 이들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진정한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미워하고 빰을 치는 사람들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코 한국관구 편, 『성 프란치스코와 성녀 글라라의 글』(왜관:   분도출판사, 1991), p.37.

    완전한 가난은 또한 “세상적 지혜와 지식까지도 포기하는 것이다. 그렇게 할 때만이 자신을 온전히 봉헌할 수 있는 것이다” Bonaventure, (1991), p.76.
라고 권면한다.  

Ⅶ. 성 프란치스코의 자발적 가난

   1. 가난에 대한 열매

    자발적 가난의 첫 번째 형태는 “복음적 생활양식으로 온몸을 바치는 것”이다. 이것은 하느님 앞에서 우리는 애긍을 베풀자일 뿐이니, 아무 것도 우리 것으로 간직해서는 안되며 오히려 우리가 가진 바와 존재전체를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위하여 그들을 섬기는데 그리고 하느님의 뜻을 섬기는 데에 온전히 내 놓아야 한다는 복음정신에서 스스로 선택하는 가난이다. 이렇게 자발적으로 가난을 선택한 이들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충성을 다하는 것이고 가난한 자들에게 봉사하는 것이며, 이것은 곧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리며 그분을 대신하여 먼저 사랑을 베푸는 영광을 누리는 것이다. 이런 종류의 가난한 사람은 단순하고, 초연하며, 주고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다. L. Boff, (1987), p.103.

    이제 프란치스코가 추구했던 청빈, 자발적 가난으로서의 열매들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1. 겸손

    프란치스코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하는 열정으로 시작한 가난의 생활은 그에게 겸손, 기쁨, 순종의 열매를 선물하였다. 프란치스코는 겸손함이 지극하며 모든 덕의 수호자요, 덕의 더 없는 영광을 지닌 자였다. 그는 칭찬에는 당황하며 모욕을 당할 때에는 매우 기뻐하였다. Bonaventura, (1995), p.64.

    토마스 첼라노(Thomas Celano)는 프란치스코에 대하여 이렇게 전한다.

    “그는 자세에서 겸허하였으며 그의 의견에서 더욱 겸허하였고 평판 앞에서 가장 겸허하였다. 이 하느님의 왕자는 보잘 것 없는 사람 중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었기에 이 작음이라는 가장 반짝이는 보석 외에는 웃 사람 같아 보이는 것이 없었다. 오만스런 말투가 그의 입에는 없었고 과시하는 듯한 자세가 없었으며 행동에 겉 치래라곤 전혀 없었다.” T. Celano, (1986), p.348.


    프란치스코의 이 겸손의 자세는 그의 모든 상황이 그렇듯이 복음에 그 근본을 두고 있다. “당신들 중에서 높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종이 되어야 합니다. 사실은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대소물로 주러 온 것입니다.”(마태 26,28) 이와 같은 복음의 말씀을 따라 겸손을 추구하였던 프란치스코는 권고와 충고를 주기 보다 오히려 권고와 충고를 받아들여 어느 때라도 개선될 준비가 갖추어져 있었다. 그는 널리 퍼진 그의 명성이나 거룩함에 자부심을 갖지 않았으며 의견을 말할 때에도 자신이 먼저 의견을 내세우는 법이 없었다. 위의 책, p.354-355.

    프란치스코의 겸손은 아버지의 구원계획을 이루시도록 육화 되시고 우리와 같은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 형제가 되신 그리스도의 신비 즉, 그분의 온전하신 Kenosis(자기비하)의 모범을 절대적 자기포기로 추종하는 절실한 마음가짐이며 자세라고 할 수 있다.

  2. 순종

    프란치스코의 가난의 열매로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순종이다. 그는 완전한 가난의 생활 속에서 순종의 덕을 얻었으며 그것을 지켜나가기에 항구하였다. 형제들의 회칙에서 프란치스코는 우리의 생활은 순종과 정절 안에 소유 없이 살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발자취를 따르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프란치스코 한국관구, 『아씨시의 성프란치스코와 성녀 글라라의        글』(왜관:분도출판사, 1987), p.50.
순종의 덕의 중요성을 명시하고 있다. 그는 언제나 순명의 생활 안에 살기를 원하였고 다른 사람의 지시에 복종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그는 총 봉사직을 사임하였을 뿐 아니라 순명의 보다 훌륭한 선업을 위하여 장상으로 모실 특별 원장을 자신을 위하여 청하고 평생 공경심과 복종으로 섬겼다. T. Ceiano, (1986), p.358.
  
    프란치스코의 순명은 매우 민주적이었던 것 같다. 이 점은 그의 제1회칙 죄지은 형제들에게 주는 충고에서 잘 드러나고 있는데 그는 장상 밑에 있는 형제들도 장상의  “영혼” 즉 영적  생활을 돌보아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에 “그들의 행동을 세밀하고 주의 깊게 살펴 볼 것이다. 만일 어떤 관구장이 우리 생활의 규칙을 따라 영신적으로 살지 않고 육적으로 사는 것을 목격하면, 3번 권면하고 그래도 스스로 고치지 않는다면 온갖 반대를 물리치고라도 성신강림 총회 때에 전 형제의 종인 총장에게 보고할 것이다. 프란치스코 한국관구, 『아씨시의 성프란치스코와 성녀 글라라의        글』(왜관:분도출판사, 1985), p.54.
라고 함으로써 권위란 하나의 봉사이며 권력이 아님을 상기시키면서 순종이란 형제들 상호간에 권한이나 지배와 같은 수직관계를 나타내는 것이 아닌 사랑의 정신으로 자진하여 서로 봉사하고 섬김으로써 그리스도의 가르치심과 모범을 따르는 거룩한 덕행임을 깨우쳐 주고 있다.
    위와 같은 프란치스코의 순종을 가능케 하였던 신학적 기초는 그의 유언에 나타나는 데로 매사에 활동하시는 하느님께 대한 신앙과 매사에 당신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느님께 대한 신앙이었다. 그의 유언의 첫 부분에서 프란치스코는 자기 회개와 영혼의 방향, 그리고 형제와 초기의 생활을 상기시키면서 모든 것이 주님께서 이루어 주신 일임을 고백하고 있다. 위의 책, pp.103-104참조.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하느님은 프란치스코의 생애의 결정적 순간마다 그 안에서 그를 통해 활동하였으며, 그는 완전한 협조와 조건 없는 승복으로 모든 일에 하느님의 작용에 마음을 열고 그분의 요구에 무조건적으로 순종하였다는 것이다. 또한 프란치스코는 모든 일에서 하느님의 활동을 발견하면서 그것을 통해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계시를 내려주고 있으시다는 것을 믿었다. 물론 그는 다른 형제들이 자신의 생각을  하느님의 계시라고 보는 위험을 막기 위해 자신이 받은 내적 영감을 즉 계시를 따라 행동하기 전에 항상 다른 형제들의 의견을 듣기를 좋아했으며 중대한 일에 있어서는 교회의 허락 없이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프란치스코는 참된 순종에 대하여 “순명하는 형제는 장상 안에서 인간을 볼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 때문에 자기 자신을 내놓았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T. Clano, (1986), p.358.

    결국 순종이란 한 인간에게가 아니라 그를 통해 당신 뜻을 알려주시는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다. 이러한 순종은 참된 신앙심을 요구한다. 현대 사회에서 순종이란 말은 마치 진열장 안에 놓여 있는 골동품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수도자나 목회 후보자들은 순종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은총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