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0년 3월 14일 사순 제2주간 토요일

Margaret K 2020. 3. 13. 19:20

2020년 3월 14일 사순 제2주간 토요일


집으로 돌아오는 아들을 멀리서 본 아버지는

측은한 생각이 들어 달려가

아들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다.
(루카. 15,1-3.11ㄴ-32)


While he was still a long way off,
his father caught sight of him, and was filled with compassion.
He ran to his son, embraced him and kissed him.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서, 주요 인물은 아버지와 두 아들 곧 큰아들과 작은아들입니다. 이 비유는 아버지의 자비를 강조합니다. 아버지는 변함없이 그 자리에서 집을 떠난 작은아들을 기다리며, 또 큰아들의 불평을 들어 주고 그를 위로하는 사람입니다. 이 비유는, 하느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잘 드러내고 하느님의 특징적인 모습을 요약해서 전하기에 많은 이들에게 찬사를 받습니다.


이 비유를 읽으며 작은아들의 모습과 우리 자신을 비교해 봅니다. 죄를 짓고 하느님에게서 멀리 떠나 방종한 생활을 한 작은아들이 죄를 지으며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과 겹쳐지기 때문입니다. 작은아들이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하고 발길을 돌리는 모습은, 죄를 뉘우치고 돌아서서 하느님과 화해하는 회개의 의미를 잘 드러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렇게 돌아오는 이들에게 잔치를 베풀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큰아들은 우리가 생각해야 할 또 다른 모습입니다. 착실하게 아버지의 명을 따라 살았던 큰아들은 작은아들의 귀환을, 회개한 아들이 돌아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큰아들 또한 우리의 모습입니다. 공동체를 지키며 열심히 활동하지만 언제나 그 자체가 기쁨이 되지는 않습니다. 때로는 오히려 무거운 짐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회개한 이를 받아들이는 하느님의 자비가 큰아들에게는 불평과 불만을 자아내기도 합니다. 그는 아버지가 ‘늘 함께 있다.’라고 한 말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여러분은 두 아들 가운데 어느 모습에 더 가깝습니까?
(허규 베네딕토 신부)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자기는 사랑하지 않으면서 남으로부터 사랑받으려는 사람과 자기가 먼저 사랑하면서 동시에 남으로부터도 사랑받으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의 삶이 힘들까요? 둘 다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이 바라는 사랑을 온전히 채워줄 사람은 세상에 없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사랑받으려는 마음이 생기면 자연스럽게 동반하는 것이 미움입니다. 미움의 감정을 품으면서 행복하다고 말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 베푸는 마음만 가지고 있는 사람, 상대방에게 전혀 기대하지 않는 사람이야말로 행복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랑만 있기 때문입니다.

산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산이 이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사랑하기 때문에 산이 좋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산을 오르며 커다란 행복을 얻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왜 그렇게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는지, 심지어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하셨던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그냥 사랑 자체에만 집중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함께 식사한다고 투덜거리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죄인이 회개하여 새 삶을 얻는 것을 기뻐하라는 의미로 되찾은 아들 비유 말씀을 해주십니다.

작은아들은 아들 자격을 잃어 마땅했습니다. 아버지 집을 떠났을 뿐만 아니라 방종한 생활을 했습니다. 더군다나 재산을 탕진하여 어렵고 힘들 때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달라고 말하겠다고 했지만, 정작 아버지 앞에서는 이 말을 쏙 빼놓는 것을 보면 기회주의자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작은아들을 기쁘게 받아들여서 살진 송아지를 잡는 거룩한 잔치까지 벌입니다. 아버지는 작은아들의 성공만을 기뻐하는 분이 아니라, 모든 잘못을 뉘우치고 당신 집으로 돌아오는 것 자체를 기뻐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사랑 자체만을 보시는 것입니다.

이 아버지의 모습이 바로 하느님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인은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면서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이 죄인들을 향해서도 사랑의 마음으로 봐야 하는 것을 그래서 죄인들이 하느님께로 돌아오는 것을 기뻐하는 것이 아버지 뜻에 함께하는 것이 됩니다.

우리 역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처럼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구별하려고 합니다. 이런 구별이 나를 절대로 행복하게 해주지 못합니다.
잘못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잘못을 고치지 못하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다(루소).



사는 거 빡세!!

‘미성년’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이 영화의 한 장면 중에 이제 막 태어난 인큐베이터에 있는 동생을 향해 누나가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이 누나는 나이가 그렇게 많지 않지만, 어려운 형편에 계속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습니다).

“사는 거 되게 빡세다. 각오는 돼 있어? 힘내!”

사는 것이 내게는 어떠했는가 생각해보면 이 말에 큰 공감이 갈 것입니다. 나를 뛰어넘는 일을 해야 할 때도 있고, 하기 싫은 일도 해야 합니다. 사랑하고 친해지고 싶지만, 미움과 부정적인 마음이 들 때는 왜 이렇게 많은지요? 그래서 빡센 세상임을 깨닫습니다.

빡세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빡센 세상이 자연스러운 세상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야 편하고 쉬운 세상만이 진짜라고 착각하는 것에 빠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빡세지만 의미가 없을까요? 이를 이겨냈을 때의 기쁨은 그저 편하고 쉬운 일을 겪게 되었을 때와 비교했을 때의 엄청나게 큽니다. 결국 빡센 세상도 주님의 선물이 될 수 있습니다. 큰 기쁨을 그래서 큰 행복으로 나아가는 선물입니다. 이제 스스로에게 늘 이렇게 말해 보십시오.

“사는 거 원래 빡센거야. 각오는 돼 있어? 힘내!!!”                  

먼저 성령의 배고픔을 느껴봐야 회개할 수 있다

-전삼용신부-


고 채충석 요셉 형제는 서울대교구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선교왕이었습니다. 1998년 공덕동 본당 신자일 때 선교 대상을 받았었는데, 그분은 무려 7개월 동안 700여 명을 입교시킨 적도 있습니다. 그 후로도 꾸준히 선교하여 10여 년 동안 무려 3,000여 명 이상을 입교시켰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채 요셉 형제는 처음에 불교신자였고 아내는 가톨릭 신자였습니다. 제법 큰 사업을 경영하다 사기를 당해 한순간에 삶이 무너졌습니다. 매일 술로 울분을 달랬고 세상을 원망하며 지냈습니다. 몸이 망가져 심근경색으로 수술을 받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생존확률이 반반이라고 했습니다. 신앙이 두터웠던 아내는 본당 신부님과 수녀님에게 기도를 청했고, 본당의 신자들을 찾아다니며 백방으로 기도를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의사도 믿기 어려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수술하지도 않았는데 거짓말처럼 완치된 것입니다.

      이 일을 계기로 그는 하느님을 믿게 되었고, 주신 은총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 보답하기에는 그것으로는 부족함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본당 선교분과장을 맡아 선교를 시작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대부분의 선교왕들은 선교는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마치 서울대 들어간 학생이 공부가 제일 쉬웠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 이유는 선교왕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선교하려고 하지 않고 성령의 힘으로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채 요셉 선교왕도 ‘기도’를 강조합니다.

“기도하지 않고서는 선교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선교도 성령과 함께 성령의 힘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힘으로 하지 않기에 힘들지 않은 것입니다. 채 요셉 형제는 한 시간 기도하면 세 시간만 선교한다고 합니다. 자신의 기도 시간에 오시는 성령의 힘이 정확히 언제쯤 사라지는지 아는 것입니다. 이런 분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기도할 시간이 부족한 것입니다. 음식을 먹지 않으면 배가 고파지는 것을 알기 때문에 굶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처럼, 하느님의 양식의 힘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기도를 굶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합니다. 이런 자세가 회개한 그리스도인의 자세입니다.

      오늘 복음은 ‘돌아온 탕자’의 유명한 내용입니다. 돌아온 탕자는 ‘회개’한 세리와 죄인들의 상징이고, 아버지 곁에서 종처럼 평생을 봉사한 형은 회개할 줄 모르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의 상징입니다.

      탕자는 아버지의 유산으로 살 때에는 그것만큼 행복한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유산이 다 사라지자 돼지 밥으로라도 자신의 배를 채우려 했습니다. 반면 형은 아버지 곁에서 항상 배고픈 줄 모르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결국 아버지께 인정을 받은 아들은 첫째가 아니라 둘째였습니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둘째와 같이 회개한 사람들입니다. 미사와 기도를 할 수 있었을 때가 그리워 지금의 이 시간이 매우 힘겹습니다. 따로 단식하지 않아도 너무 허기가 져서 유튜브로라도 미사를 하고 강론을 듣습니다. 이렇게 회개한 신자들은 다시는 양식을 주시는 아버지를 떠나는 일이 없습니다. 양식을 먹지 못하는 배고픔이 어떤 것인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첫째 아들처럼 회개하지 않은 이들은 매일 미사를 하고 매일 기도를 해도 그 힘을 느끼지 못합니다. 이들은 미사를 하지 못하는 지금과 매일 미사를 할 수 있었을 때나 큰 차이를 느끼지 못합니다. 같은 기도를 하고 미사를 해도 어떤 이들은 그것을 삶의 에너지로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이들은 자신이 그렇게 열성적인 사람임을 보이기 위해 다니기도 합니다. 기도는 성령의 에너지를 채우기 위해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신앙생활과 봉사 생활을 아무리 열심히 해도 하느님께 인정받지 못합니다.

      회개하려면 단 5분 기도하더라도 그 힘을 느껴야 합니다. 성령의 힘이 언제쯤 소진되는지 명확히 알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성령의 에너지를 측정할 수 있는 계기판이 있어야 합니다. 그 계기판이란 바로 자신의 ‘기분’입니다. 행복하면 성령의 에너지가 충만한 것입니다. 불안해지기 시작하면 하느님의 양식이 소진된 것입니다. 아버지가 첫째 아들에게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라고 말하듯 성령의 에너지는 나의 기분으로 알 수 있습니다.

      먼저 이 유산으로 살아보지 않으면 그 배고픔을 느낄 수 없기 때문에 회개도 일어날 수 없습니다. 기도를 통해서만 행복할 수 있음을 느낀 경험이 있어야 회개도 가능합니다. 그래서 회개도 은총입니다. 하느님의 은총만으로 참으로 행복하고 힘이 넘치는 경험을 해야 합니다.


-조재형신부-


며칠 전입니다. 묵주 반지가 바지 주머니에 있었는데, 깜빡하고 세탁기에 돌릴 뻔했습니다. 부랴부랴 주머니에 있던 묵주 반지를 꺼냈습니다. 빨래하기 전에 주머니를 꼭 확인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잃어버릴 뻔 했던 묵주 반지를 보니 반갑기도 하고, 기분이 좋았습니다. 돌아보니 그런 경험이 몇 번 있었습니다. 외국 여행 중에 화장실에 지갑을 흘린 적도 있었습니다. 다시 화장실을 찾아갔고 지갑은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핸드폰을 물에 빠트린 적도 있습니다. 다행히 핸드폰에 저장된 주소록을 복구한 적이 있습니다. 소중한 분들의 연락처를 잃어버릴 뻔 했습니다. 노트북이 바이러스에 감염된 적도 있습니다. 노트북에 있던 자료를 다 날릴 수 있었습니다. 다행히 자료를 다시 살려냈던 적도 있습니다. 살면서 이런 경험은 한두 번씩은 있을 겁니다.

 

어릴 때의 기억입니다. 호기심이 많았던 저는 겁도 없이 버스를 탔습니다. 버스에서 내렸는데 세상에는 다른 버스들이 많았습니다. 제가 탔던 버스의 번호를 몰랐고, 돌아가는 길을 몰랐던 저는 그만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저는 파출소에서 하룻밤을 지냈고, 다음 날 아버지께서 저를 찾으러 오셨습니다. 50년이 훌쩍 지난 일입니다. 저는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어머니께서는 지금도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그때 입었던 옷, 그때 신었던 신, 그때 저의 머리 모양까지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어머니에게 저는 세상 무엇보다 소중했기 때문입니다. 비록 하루였지만 어머니의 가슴은 새카맣게 타들어갔다고 하십니다. 돌아왔을 때의 일은 기억나지 않지만, 어머니께서 저를 야단치시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어머니의 마음은 다 같을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이라고 여겨졌던 세리, 과부, 고아, 장애인들과 가까이 하셨습니다. 아무도 가까이 하지 않았던 나병환자의 손도 잡아 주셨습니다. 여인의 죄를 묻지 않으셨습니다. 강도당해서 쓰려졌던 사람을 치료해준 착한 사마리아 사람을 칭찬하셨습니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은 예수님의 이런 태도를 문제 삼았습니다. 죄인들과 함께 지내는 것이 율법의 정신에 맞지 않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그런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오늘 돌아온 아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비록 죄를 지었어도, 뉘우치고 돌아오기만 하면 용서해 주시는 분이라고 하십니다. 용서하실 뿐만 아니라, 돌아온 아들을 위해서 잔치를 열어주시는 분이라고 하십니다. 아버지의 집에는 머물 곳이 많으니 언제든지 돌아오면 된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회개하기만 하면, 잘못을 진정으로 뉘우치기만 하면, 하느님께로 돌아오기만 하면 하느님께서는 우리 죄가 다홍같이 붉어도, 진홍같이 붉어도 양털처럼 희게 하고, 눈처럼 희게 하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돌아온 둘째 아들을 대하는 큰 아들을 봅니다. 큰 아들의 가장 큰 잘못은 선과 악을 스스로 판단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동생을 받아들이고 아낌없는 사랑을 주시는 것, 그와 같은 판단을 하는 분도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오늘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는 큰 아들처럼 하느님을 우리의 기준으로 규정하려고 할 때가 있습니다. 진정한 자유와 행복은 하느님을 따르면서 나의 모든 것을 하느님의 선하심에 맡겨드릴 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분은 분노를 영원히 품지 않으시고 오히려 기꺼이 자애를 베푸시는 분이시다. 그분께서는 다시 우리를 가엾이 여기시고 우리의 허물들을 모르는 체해 주시리라. 아버지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사랑을 기억하라

  -반영억신부-  

 

저는 램블란트가 그린 탕자의 귀향을 좋아 합니다. 그 그림은 바로 오늘 복음의 내용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버지 품에 안기는 아들의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아버지의 눈은 사시가 된 채로 그려져 있습니다. 아버지는 집나간 아들이 그리워 마음과 눈이 늘 아들에게로 향하여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들이 어떤 행동을 취하든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은 한결같고 또 그칠 수가 없는 법입니다. 자식은 부모를 땅에 묻지만 부모는 자녀를 가슴에 묻습니다. 무릎을 꿇은 작은 아들은 다 닳아버린 신발 때문에 발바닥을 드러낸 채 아버지의 가슴에 모두를 맡겨버렸고 그 주변에서 사람들이 그들을 바라봅니다. 한 구석에서는 희미하게 보일 듯 말 듯 한 여인이 이 장면을 애달프게 지켜보고 있는데 어머니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아들이 용서를 청하든 그렇지 않든 돌아온 것만으로 모든 것을 받아들이시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우리의 하느님을 발견합니다. 우리보다 먼저, 그리고 나보다 나를 더 잘 알고 계시며 내가 알기도 전부터 나를 사랑하고 계시는 하느님아버지, 나의 허물과 잘못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용서하시며 품어주시기에 감사하고 기뻐합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회개한 작은 아들을 볼 수 있습니다. 아들이 옛 생활을 버리고 아버지께 돌아왔는데 그것은 아들이 아버지의 사랑, 아버지집의 풍요로움을 기억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아버지의 집 처지가 밖에 보다도 못하였다면 그는 아버지 집을 구지 찾을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아들이 아버지의 넉넉함을 기억한다는 것은 큰 은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자비로우신 아버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허물과 잘못, 죄에도 불구하고 변함없는 큰 사랑으로 감싸주시는 아버지는 바로 우리 하느님 아버지이십니다. 단죄하기 전에 풍성한 자비를 베풀어 주시는 하느님의 품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집을 나간 아들이나 집안에 붙어있던 아들이 모두 아버지의 마음을 모르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작은 아들은 아버지, 재산 가운데에서 저에게 돌아올 몫을 주십시오(루카15,12). 하여 자기 것을 챙겨서 집을 나갔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은 생각지도 않고 자기 좋을 대로 한 것입니다. 반면 큰 아들은 아버지의 품 안에 있으면서도 그 사랑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고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루카15,29). 하며 투정을 부렸습니다. 큰 아들의 마음에는 이만큼 했으니 이만큼은 받아야 된다는 보상심리가 잠재하고 있었는데 결국 그것이 밖으로 표출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한 번도 아들을 종처럼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스스로 종처럼 생각했습니다. 바로 그 두 아들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큰 아들이든 작은 아들이든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며 아버지 품을 그리워하는 사순절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자비와 사랑이 넘치는 아버지 품에서 행복하기를 희망합니다.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이사 49,15). 미루지 않는 사랑,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 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이영근신부-


나 일어나 아버지께 가리라.

가서,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다고 말하리라.”


참으로 벅찬 아름다움입니다.

죽어서 눕힌 채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서 아버지께 가는 길이기에 그토록 아름답습니다.

그것도 떳떳하게 성공해서 가는 것이 아니라, 죄인으로서 돌아가는 길이기에 더더욱 가슴 저미도록 아름답습니다.

뉘우치고 돌아가서 행동으로 죄를 고백하는 일, 참으로 이토록 아름다운 일은 없습니다.

그래서 시나이의 성 이사악은 말합니다.

자신의 죄를 아는 이가 기도로 죽은 이를 살리는 이보다 위대하다.

~자기 자신 때문에 한 시간 동안 우는 이가 온 세상을 통치하는 이보다 위대하다.

자신의 나약함을 아는 이가 천사들을 보는 이보다 더 위대하다.”


바로 이러한 회개를 두고, 오늘 <복음>에서는 하느님께서 기뻐하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그 회개는 죄에 대해 뉘우침과 통탄을 넘어서, 그 죄로부터 일어나 아버지께 돌아가는 행위 속에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베드로와 가리옷 유다가 다 같이 스승이신 예수님을 배반하고서 울음으로 통탄해 했지만, 베드로는 예수님께 돌아와 구원의 길을 가고 유다는 돌아오지 않음으로써 파멸의 길을 간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회개는 뉘우침이라는 내면적인 통회와 돌아옴이라는 외면적인 행동이 요청됩니다.

그리고 작은 아들의 뉘우침돌아옴 뒤에는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깨달음이 있습니다.

 그는 넘어지고, 무너지고, 부서진 바로 그 자리에서, 다름 아닌 아버지의 집에서 받은 사랑, 아버지의 사랑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아버지는 돌아오는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어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춥니다. 그리고 미리 마련해 두었던 가장 좋은 옷을 입히고, 반지를 끼워주고, 신발을 신겨줍니다.’(루카 10,20-22 참조)


참으로 아름다운 장면입니다.

사실, 아버지는 아들이 방종으로 유산을 다 탕진하리라는 것을 훤히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방탕한 생활로 재산을 허비할 때에도, 결코 그에게서 신뢰를 거두지 않았던 것입니다. 아니, 그렇게 당신을 거부하고 배신할 때마저도, 결코 그에게서 희망을 거두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가 돌아오리라고 믿고 희망하며 좋은 옷과 반지와 신발을 미리 마련해 두었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로마서>에서 말한 것처럼,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주셨습니다.”(로마 5,8).

이것이 바로 아들을 향한 결코 멈추지 않으시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바로 이러한 하느님의 사랑이 오늘 <복음>에서는 잃어버린 아들이 돌아올 때까지믿고 희망하며 기다리는 아버지의 사랑으로 비유되고 있습니다.

비록 죄에 떨어졌을지라도, 결코 멈출 수 없는 아버지의 지극한 사랑 말입니다.

바로 이 사랑에 대한 깨달음이 그로 하여금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게 하고 새로운 삶에로 태어나게 하는 원동력이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는 아담과 하와가 나뭇잎 대신 가죽옷을 입었듯이(창세 3,21) 아버지로부터 옷과 반지와 신발로 받고 자신의 신원을 되찾습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회개는 가슴으로 뉘우치는 것을 넘어, 아버지께로 돌아오는 행동을 넘어, 새로운 탄생에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나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깨달음이 있습니다.

결코 멈추지 않으시는, 나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 비록 보잘 것 없는 죄인 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마치 전부인 양 소중히 여기시는 하느님의 지극하신 사랑 말입니다.

이처럼, 회개는 자신의 죄보다도 더 깊은 하느님의 사랑을 보며, 상처가 깊어가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깊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순시기를 보내는 지금, 우리는 그리스도의 상처를 바라보면서, 오히려 그리스도의 사랑이 깊어갑니다.

그리고 작은 아들과 함께 이 아름다운 사랑의 노래를 부릅니다.

나 일어나 아버지께 가리라.

가서,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다고 말하리라.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루카 15,6)


주님!

저를 먼저 찾으시고 끝까지 찾으시니 찬미를 받으소서.

보잘 것 없는 하나를 사랑하되 전부를 사랑한 것처럼 사랑하고

먼저 사랑하되 끝까지 신실하게 사랑하시니 찬미를 받으소서.

보잘 것 없는 죄인 하나이지만 전부인 양 소중히 여기시니

바로 이것이 제가 지닌 최상의 기쁨입니다. 아멘.


-조욱현신부-


복음: 루카 15,1-3.11-32: 아버지, 저는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항상 '가진 사람들'보다는 '잃은 사람들', 세리 마태오, 간음한 여자, 사마리아 여인, 자캐오 등과 같은 사람들을 가까이하시고 자리를 함께 하신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의 이러한 처신을 비난하였다. 자기들 보기에 부정한 사람들을 받아들이고 가르치시는 주님을 사악하고 불경스런 태도로 비난하였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되찾은 아들의 비유를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다.(11) 이 두 아들은 두 백성을 의미한다. 율법을 가지고 있었던 유대인이 큰 아들, 어리석은 우상숭배를 하는 다른 민족은 작은 아들이다. 율법에 대한 이해가 큰 아들과 작은 아들로 구분을 하게 된 것이다. 여기서 작은 아들은 자신에게 돌아올 유산을 달라고 한다. 작은 아들은 아들의 자격을 잃어 마땅하였다. 작은 아들은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어서 살아있는 아버지의 너그러움에 기대어 자기 쾌락을 쫓기로 결심한 것이다.

 

“며칠 뒤에 작은 아들은 자기 것을 모두 챙겨서 먼 고장으로 떠났다.(13)고 한다. 아버지에게서 떠났다고 하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에게서 떠났다는 의미이다. 그리스도에게서 떠난 사람은 누구나 자기 고장에서 쫓겨난 사람이다. 그는 먼 고장에서 방탕하게 살며, 인자한 아버지이신 당신께서 주신 재물을 모두 허비하였다. 음탕한 욕정의 세계에 사는 것은 어둠의 세계에 사는 것이며 당신 얼굴에서 멀리 떨어져 사는 것이다. 작은 아들은 이렇게 아버지를 떠난 삶을 살았다.

 

고장에 심한 기근이 들었다고 했는데, 이는 식량의 기근이 아니라, 선행과 덕행의 기근이었다. 하느님의 말씀을 떠난 자가 진짜 굶주리는 자이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태 4,4)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가 곤궁에 허덕이고 굶주림으로 고통받는 것은, 방탕한 쾌락에는 만족이 없기 때문이다. 영원한 양식으로 배를 채울 줄 모르는 자는 늘 굶주릴 것이다.

 

“그래서 그 고장 주민을 찾아가서 매달렸다. 그 주민은 그를 자기 소유의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다.(15) 아버지에게 의탁하지 않고 낯선 사람에게 자신을 넘기는 사람은 가혹한 심판자에게 당하게 된다. 아버지의 사랑을 등진 그는 돼지 치는 신세가 되었다. 진흙투성이 돼지우리에 뒹굴며 더러운 오물을 뒤집어쓰니까 그는 아버지의 집의 평화로운 생활을 등지고 떠난 것이 얼마나 비참하고 괴로운 일인지 실감을 하게 된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팔이꾼들은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에서 굶어 죽는구나.(17) 그는 죄인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아버지의 아들로 남아있었다. 창녀들과 어울리며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했지만, 아버지를 떠나 남의 땅의 포로가 되었으나 그는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불렀다. 그는 아들이라는 영예로운 자격을 잃지 않았다. 성령께서는 죄를 지은 이에게서도 떠나지 않으신다는 말씀이다. 성령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21) 작은 아들은 아버지께 돌아오며 울부짖는다. 날마다 드리는 기도에서 교회는 작음 아들이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음을 증언한다. 아버지는 아들이 아직 멀리 있을 때에 아들에게 달려간다. “그리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20) 아버지는 아들의 죄를 드러내거나 비참하게 만들지 않으려고 입맞춤으로 아들의 죄를 용서하고 포옹으로 덮어준다. 그렇게 상처의 흔적 하나 남지 않도록 말끔하게 고쳐 준 것이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22) 가장 좋은 옷은 영원불멸하는 영광을 아들에게 입히고 반지를 끼워줌으로써 예전에 지녔던 명예도 되찾아 준다. 신발을 신겨주는 것은 발도 헐벗지 않게 하고 신발을 신은 채로 옛날의 삶으로 돌아오게 해 준 것이다.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23) 되찾은 작은 아들을 위하여 준비된 송아지다.

들에서 돌아온 큰아들, 율법의 백성은 아버지 집에서 춤추며 노래하는 소리가 들리는 데도 안으로 들어가려 하지 않는다. 유대인들은 아버지의 집인 교회에 와서는 질투 때문에 바깥에 서 있다. 그들은 안에서 울리는 다윗의 수금 소리와 시편을 노래하는 소리를 듣고, 수많은 사람들이 어울려 춤추는 것을 본다. 그러나 들어가려고는 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다른 민족 형제들을 심판한다.

 

아버지가 밖으로 나가 아들에게 말한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31-32) 아버지의 것이 모두가 그의 것인데, 아버지와 함께 살 던 모든 삶이 매일의 잔치였는데 그것을 알지 못하고 종같이 살아온 큰 아들에게는 기쁨이 없었다. 더구나 이제는 시샘 때문에 형제가 파멸하기를 바라니 아버지의 잔치에 참여하여 기쁨을 맛볼 자격이 없다.

 

작은 아들은 사랑의 모습을 되찾았기 때문에 즐거워해야 한다는 것이다. 작은 아들이 아버지의 자비로우심으로 잔치에 참여할 자격을 얻었다면 큰 아들도 아버지의 허락이 없으면 그 잔치에 참석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 역시 모두 하느님의 사랑에로 되돌아가야 함을 알고 기도하며 노력하자.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루카 15, 32)

-한상우신부-

한 사람이
드디어 일어나
아버지를 향합니다.

삶에 정답은
없습니다.

넘어지면서
일어나고
일어나서는
또 넘어집니다.

넘어짐과
배고픔을 통해
잃었던
작은 아들을
일으킵니다.

최악의 상황이
오히려 하느님
자비를 뜨겁게
만나는
은총이 됩니다.

아버지
하느님을 통해
가장 나쁜 것이
가장 좋은
것이 됩니다.

배고픔을 거쳐
잔치에 이릅니다.

넘어짐을 거쳐
회개에 이릅니다.

구원의 여정은
회개의 주인이신
아버지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여정입니다.

우리 삶의 전부를
사랑하시는
아버지를 다시
만나게됩니다.

사랑을 만들고
계시는 아버지를
드디어 만나는
회개의 기쁨입니다.

우리를 향한
애타는 하느님
사랑을 다시
만납니다.

잔치를 베푸시는
아버지를
기억합시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 '방향성'을 관상합니다

"세리와 죄인들이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모여들고 있었다"(루카 15,1).

평소 율법 밖으로 밀려난 이들이라 손가락질 당하던 세리와 죄인이 예수님을 향해 모여듭니다. 그들은 "말씀을 들으려고" 예수님을 향합니다. "들음"으로써 삶의 미혹과 진동을 떨쳐내고 구원의 희망이라도 실낱처럼 건져보려는 간절한 바람이 느껴집니다.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다"(루카 15,11).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이 세리와 죄인들을 환대하는 예수님에 대해 투덜대자 예수님은 저 유명한 비유를 들려 주시지요. 아버지를 떠나 방탕하게 산 작은 아들과, 아버지 곁에서 스스로를 종처럼 비하하며 산 큰 아들 모두를 향하는 아버지 이야기입니다.

"그는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갔다"(루카 15,20).

작은 아들은 현실의 세리와 죄인들처럼 아버지를 향하고 있습니다. 이 방향성은, 먼저 떠났었고 길을 잃었으며 실패했고 비로소 자기 처지를 자각했기에 가능한 결과입니다. 주님을 향하기 위해 일부러 죄를 짓거나 그분을 등질 필요는 없지만, 많은 경우 죄와 어둠은 은총을 부릅니다.

"큰아들은 화가 나서 들어가려고도 하지 않았다"(루카 15,28).

아버지는 거지꼴이 되어 돌아온 작은 아들을 조건 없이 환대했지만 형은 동생이 몹시 불편합니다. 아니, 그런 놈을 다시 거두어 최상의 대우로 복귀시키는 아버지가 못마땅한 것이지요. 큰아들은 아버지와 동생이 있는 잔치의 현장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습니다. 그의 어둠이 그들을 밀어냅니다. 생명의 잔치에서 일렁이는 기쁨을 배척합니다.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루카 15,31).

착실한 모범생 큰아들이 당신 곁에서 이토록 사랑을 갈구하며 이토록 외로웠다니 아버지는 속이 탑니다. 그래서 그를 달래며 마음을 돌리려 합니다.

사실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가산을 나누어"(루카 15,12) 주었다고 했습니다. 작은 아들만 아니라 큰아들도 분명 제 몫을 받았지요. 제 것을 제 것으로 누리지 못한 큰아들의 자발적 소외와 두려움이 오히려 안쓰럽습니다. 자유인이면서 스스로를 종처럼 억압하며 살았기에, 있어도 자유롭고 없어도 자유로운 동생이 고울 리 없지요. 형의 분노에는, 자기는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한 일을 마음껏 저질러도 심판받지 않는 동생에 대한 부러움도 뒤섞여 있는 듯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아들의 방향성이 아버지를 떠나기도 하고 향하기도 하고 또 고집스레 버티기도 하지만, 아버지의 방향성은 오로지 아들을 향한다는 걸 봅니다. 유산을 요구할 때도, 작은 아들이 돌아올 때도, 큰 아들이 어깃장 부리며 버틸 때도 아버지는 변함없이 그들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제1독서에서 미카 예언자는 그런 주님의 속성을 너무 잘 알기에 당신 생기신 모습 그대로 우리를 좀 봐달라고 졸라댑니다.

"보살펴 주십시오"(미카 7,14).
"놀라운 일들을 보여 주십시오"(미카 7,15).
"저희 죄악을 ... 던져 주십시오"(미카 7,19).
"성실히 대하시고 ... 자애를 베풀어 주십시오"(미카 7,20).

사랑하는 벗님! 하느님이 이렇게 졸라대는 예언자가 귀찮으실까요? 절대 그렇지 않지요! 오히려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당신을 향해 간청하는 자녀를 향해 몸을 돌리고 허리를 굽히고 팔을 벌리고 머리를 숙여 그가 바라는 바를 해주지 않을 수 없으실 겁니다. 아버지는 그런 분이니까요.

스스로 아버지 곁에 있다고 여기고, 자신이 율법과 제도 안에 공고히 자리잡고 있다고 믿는다면, 오히려 방심해서는 안 됩니다. 아버지 곁인 줄 알았지만 영 다른 곳을 바라보며 다른 마음, 다른 생각으로 스스로를 고립시킬 수도 있으니까요. 우리는 자주자주 자신을 살펴 내가 어디에 있는지, 누구를 향하고 있는지 헤아려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향해 달려오시는 아버지를 정향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이 사순절이 참 은혜로운 시간입니다.

누가 더 죄인일까? 
-김찬선신부-


오늘 복음은 주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세리들과 죄인들이 몰려드는 것을
보고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이 투덜거리자
주님께서 그들에게 비유를 들려주시는 내용입니다.

이것을 보면서 드는 생각은 누가 더 죄인이고,
누가 더 불쌍한 죄인인가? 바로 그거였습니다.

세리와 바리사이 중에 누가 더 죄인일까요?
작은아들과 큰아들 중에 누가 더 불쌍할까요?

이 질문은 인간이란 모두 죄인이라는 생각이 전제되어 있는 것이고,
모두 죄인이지만 죄 없다고 생각하는 바리사이와 세리 중에
누가 더 죄인이고 불쌍한 죄인이냐를 묻는 것인데 
죄 없다고 하는 바리사이가 더 죄인이라는 생각이 깔려 있는 거지요.

비유에서 큰아들은 아버지 곁을 떠나지 않았으니
잘못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동생보다 아버지께 잘해드렸다고 자부하고,
큰아들뿐 아니라 우리 인간은 보통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겉으로 보면 아버지를 떠나지 않았으니 잘못한 게 없다고 할 수
있겠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아버지와 함께 산 것이 사랑 때문에 산 것이
아니라 억지로 산 것이고 그래서 종살이를 살았다고 생각한다면
과연 잘못한 것이 없다고, 아버지께 잘해드렸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종처럼 살았다는 말을 들은 아버지 마음이 얼마나 참담하겠습니까?
참담한 마음이 들게 하고서 아버지에게 잘해드렸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사순 시기를 시작하는 재의 수요일 첫 독서 요엘서에서 주님은
"마음을 다하여 나에게 돌아오너라. 옷이 아니라 마음을 찢어라,"라고
말씀하시듯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사랑도 없고 그래서
억지로 당신 곁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기꺼운 마음이겠지요.

이것은 하느님이 아니어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옆에 누운 여자가 다른 남자를 생각하고 있다면 그것은
내게 딱지를 놓고 떠난 것보다 더 참을 수 없는 모욕이 될 것이고,
그래서 마음으로부터 돌아오지 않으면 아예 죽여버리고 싶을 겁니다.

이런 면에서 사랑하는 마음이 없이 옆에 있는 큰아들이
마음 가는대로 아버지를 떠났다가 마음이 바뀌어 돌아온 동생보다
잘해드린 거라고 결코 말할 수 없겠지요.

그러나 옛날의 저는 사랑보다 죄 짓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에 꽂혀
하느님께서 왜 죄를 지을 수 있는 자유를 인간에게 주셨는지,
다른 피조물처럼 죄짓지 않게 만들지 않으셨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 하느님께서 원하신 것은 사랑이고
자유를 주신 것도 사랑때문임을 오늘 복음을 통해서 깨달았습니다.

과격하게 표현하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죄를 짓지 않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것이고 그래서 사랑 없이 억지로 당신 곁에 있는 것보다
한때 죄를 짓더라도 마음을 돌이켜 사랑으로 당신께 돌아오기를 바라십니다.

자유는 죄를 짓게도 하고 사랑을 하게도 하고,
하느님을 떠나게도 하고 하느님께 다가가게도 하지요.

당신을 떠날 수 있는 자유를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 하느님의 사랑이라면
하느님이 주신 자유로 하느님을 떠나는 죄를 지을 수 있지만
그 자유를 가지고 하느님께 돌아가는 것이 우리의 사랑입니다.

이것을 묵상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8년 3월 3일 사순 제2주간 토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집으로 돌아오는 아들을 멀리서 본 아버지는 측은한 생각이 들어 달려가 아들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다.(루카. 15,1-3.11ㄴ-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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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개하려면 단 5분 기도하더라도 그 힘을 느껴야 합니다. 성령의 힘이 언제쯤 소진되는지 명확히 알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성령의 에너지를 측정할 수 있는 계기판이 있어야 합니다. 그 계기판이란 바로 자신의 ‘기분’입니다. 행복하면 성령의 에너지가 충만한 것입니다. 불안해지기 시작하면 하느님의 양식이 소진된 것입니다. 아버지가 첫째 아들에게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라고 말하듯 성령의 에너지는 나의 기분으로 알 수 있습니다.

기도를 통해서만 행복할 수 있음을 느낀 경험이 있어야 회개도 가능합니다. 그래서 회개도 은총입니다. 하느님의 은총만으로 참으로 행복하고 힘이 넘치는 경험을 해야 합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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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돌아온 둘째 아들을 대하는 큰 아들을 봅니다큰 아들의 가장 큰 잘못은 선과 악을 스스로 판단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동생을 받아들이고 아낌없는 사랑을 주시는 것그와 같은 판단을 하는 분도 바로 하느님이십니다오늘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는 큰 아들처럼 하느님을 우리의 기준으로 규정하려고 할 때가 있습니다진정한 자유와 행복은 하느님을 따르면서 나의 모든 것을 하느님의 선하심에 맡겨드릴 때 주어지는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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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아들의 마음에는 이만큼 했으니 이만큼은 받아야 된다는 보상심리가 잠재하고 있었는데 결국 그것이 밖으로 표출되고 말았습니다그런데 아버지는 한 번도 아들을 종처럼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스스로 종처럼 생각했습니다.

-반영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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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일어나 아버지께 가리라.

가서아버지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다고 말하리라.”


시나이의 성 이사악은 말합니다.

자신의 죄를 아는 이가 기도로 죽은 이를 살리는 이보다 위대하다.

~자기 자신 때문에 한 시간 동안 우는 이가 온 세상을 통치하는 이보다 위대하다.

자신의 나약함을 아는 이가 천사들을 보는 이보다 더 위대하다.”


뉘우침이라는 내면적인 통회와 돌아옴이라는 외면적인 행동이 요청됩니다.

그리고 작은 아들의 뉘우침과 돌아옴 뒤에는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깨달음이 있습니다.

-이영근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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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날의 저는 사랑보다 죄 짓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에 꽂혀
하느님께서 왜 죄를 지을 수 있는 자유를 인간에게 주셨는지,
다른 피조물처럼 죄짓지 않게 만들지 않으셨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 하느님께서 원하신 것은 사랑이고
자유를 주신 것도 사랑때문임을 오늘 복음을 통해서 깨달았습니다.

과격하게 표현하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죄를 짓지 않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것이고 그래서 사랑 없이 억지로 당신 곁에 있는 것보다
한때 죄를 짓더라도 마음을 돌이켜 사랑으로 당신께 돌아오기를 바라십니다.


자유는 죄를 짓게도 하고 사랑을 하게도 하고,
하느님을 떠나게도 하고 하느님께 다가가게도 하지요.

당신을 떠날 수 있는 자유를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 하느님의 사랑이라면
하느님이 주신 자유로 하느님을 떠나는 죄를 지을 수 있지만
그 자유를 가지고 하느님께 돌아가는 것이 우리의 사랑입니다.

-김찬선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