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3월11일 사순 제2주간 수요일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몸값을 치르러 온 것이다.”
(마태 20,17-28)
The Son of Man did not come
to be served but to serve
and to give his life as a ransom for many."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 수난과 부활에 대하여 세 번째 예고하십니다. 예루살렘 입성을 앞두고 하신 마지막 예고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여전히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하였습니다. 제베대오의 아들인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께서 부르신 첫 제자들입니다. 그들은 어머니와 함께 높은 자리를 부탁합니다. 그리고 이 일로 제자들 사이에는 불만이 생깁니다.
이 이야기는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의 생각을 대조적으로 보여 줍니다. 아마도 제자들은 예수님과는 다른 결과를, 자신들의 스승이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예루살렘은 예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장소이지만 제자들은 세상의 영광과 구분하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영광은 자신을 온전히 버림으로써 얻는 영광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군림하고 힘으로 다스리는 나라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제자들은 예수님을 세상의 임금처럼 생각하고 서로 높은 자리를 얻으려고 합니다.
제자들의 모습은 세상 안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우리를 되돌아보게 합니다. 우리도 때로는 섬기는 것보다 섬김을 받는 것에 익숙하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세속적으로 쉽게 받아들이며 세상의 시각으로 이해하고는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느냐?” 하고 질문하십니다. 신앙인으로 사순 시기를 지내면서 찾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답해야 합니다. 섬기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모습으로 그 질문에 답해야 할 것입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예전에 만났던 한 청년이 생각납니다. 그는 우리나라 최고 명문대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원하는 학과에는 성적이 조금 부족해서 점수에 맞춰 전혀 관심 없는 학과에 들어간 것입니다. 여기에는 부모의 강요가 있었지요. 학교가 중요하다면서 이 학교를 나와야 성공할 수 있다면서 말이지요. 이 청년은 몇 년 뒤에 다른 학교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학과로 옮겼습니다. 부모님의 큰 반대가 있었지만 행복하지 않은 선택에 계속 머물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현재, 자기 일에 기쁘게 생활하고 있습니다. 남들의 섬김을 받는 자리는 아니지만 소소한 행복에 크게 만족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만약 부모의 강요에 따라 살게 되었다면 아마 평생 부모를 원망하지 않을까요?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길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면 이 역시 후회의 이유가 되지 않을까요?
교육과 학력은 자신의 꿈을 이루는 도구로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할 성공의 도구로 생각하게 될 때 잘못된 길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청합니다.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그 당시에도 치맛바람이 있었나 봅니다. 이 어머니의 청은 영적 식별력이 전혀 없는, 단순히 세상의 성공 기준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이 말에 그 옆에 있었던 다른 열 제자가 두 형제를 불쾌하게 여깁니다. 제자들 역시 세상의 성공 기준에 묶여 있었던 것입니다.
“너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라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주님 스스로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셨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오셨습니다. 이 점을 기억하면서 우리 역시 높은 사람, 첫째가 되려는 마음을 벗어던져야 합니다.
주님은 몇몇 사람만 하늘 나라에서의 높은 자리에 앉도록 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 예외 없이 구원되어 하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하려고 오신 것입니다. 주님은 이 세상 사람들이 바라보는 성공의 도구가 아니라, 하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우리의 꿈을 이루게 하시는 분입니다.


지금 20년째 인터넷에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라는 제목의 묵상 글을 올리고 있습니다. 이제까지 쓴 글의 양이 자그마치 A4 용지 10,000페이지가 훨씬 넘는 양입니다. 처음에는 나 자신의 성장을 위해 쓰게 되었던 묵상 글이지만, 이제는 하나의 의무처럼 되고 말았습니다. 이 묵상 글을 봐주시는 분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약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앞으로 20년을 더 글을 쓴다고 예상하면 지금까지 썼던 만큼의 글을 쓰게 되겠지요. 이렇게 많은 글을 쓸 정도의 소재가 계속 있을까요? 글 쓰는 것이 결코 쉬운 작업이 아닌데, 편하게 살 수 있는 길을 놔두고 매일 글을 쓴다는 것이 끔찍하지 않을까요?
이런 생각을 하게 되면 지금을 행복하게 살 수가 없습니다. 미래는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래는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를 희망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냥 하루하루가 이어져서 20년이 된 것처럼, 또 하루하루를 이어가다 보면 또 다른 20년을 맞이하게 되겠지요. 걱정보다는 희망을, 슬픔보다는 기쁨을 미래에서 찾아야 합니다.

양식이 되어주는 것이 가장 장 섬기는 방식이다
-전삼용신부-
세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 갈 무렵 승리한 연합군은 고아들을 모아서 캠프별로 배치하고 먹을 것을 배급했습니다. 먹을 것을 넉넉히 나눠 주고 군인들이 정성껏 보살폈지만, 아이들은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습니다. 아이들은 계속해서 두려워했고, 신경이 극도로 예민해 있었습니다. 결국, 군인들은 정신과 의사에게 자문했습니다. 의사는 아이들의 마음을 치료하기 위해 한 가지 방법을 제안했습니다. 아이들이 잠자리에 들 때마다 빵을 한 개씩 배급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빵은 먹지 않고, 밤새도록 그냥 머리맡에 두어야 하는 특별한 빵이었습니다. 빵은 놀라운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아이들은 다음 날에도 먹을 빵이 있다는 것 때문에 안심하고 깊은 잠을 잘 수 있었습니다.
삶이 불안해 잠을 잘 수 없는 이유는 지금 먹을 것이 없어서라기보다는 내일 먹을 것이 없을 수도 있다는 불안함 때문일 것입니다. 하느님은 광야에서 단 한 번도 이스라엘 백성을 굶기신 적이 없으십니다. 당신께 의탁하는 백성을 하느님은 분명 지금도 그렇게 대해주실 것입니다. 마치 아이들에게 평화를 안겨준 빵 한 개처럼 우리도 이웃에게 그런 존재가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오늘 복음의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향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삶은 끊임없이 골고타 정상으로 등산하는 것과 같은 과정이었습니다. 그렇게 죽음으로 가셨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에게 생명의 빵이 되기 위함이었습니다. 누구에겐가 힘이 되려면 나는 죽어야 합니다. 내가 살아있으면 다른 이들의 에너지를 빼앗지만, 내가 죽으면 다른 이가 나 덕분으로 살아갈 힘을 얻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두 제자와 그의 어머니가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라고 청합니다. 어머니는 자신의 자녀들이 예수님께 더 사랑받는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더 커지고 더 살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예수님께서 마시려는 잔은 무엇일까요? 우리를 위해 빵이 되어주라는 아버지의 명령이십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라고 하십니다. 섬김은 누군가에게 힘을 주는 행위입니다. 빵이 되는 행위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체성혈로 하느님께서 아버지이심을 믿고 오늘도 편안한 잠을 잘 수 있습니다.
천재로 불리던 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의 인생은 항상 오르막길이었습니다. 그는 주위의 기대대로 하버드대학의 교수가 됐습니다. 그가 집필한 30여 권의 책은 모두 인기도서가 됐고, 그를 만나기 위해 수많은 사람이 모여들었습니다. 그의 인생은 오직 성공과 성취로 장식됐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사람이 폭탄선언을 했습니다. “나는 교수직을 포기합니다. 이제 장애아시설에 들어가 새로운 인생을 살아갈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그 많은 명예와 보수를 왜 버리려 합니까? 차라리 후학을 양성하십시오.” 그는 “오르막길 인생은 성공과 칭찬에 가려 예수님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제 낮은 곳에서 예수님을 만날 것입니다.” 인생의 말년을 매사추세츠 정신지체인 시설에서 장애인들의 용변 식사 목욕 등 구질구질한 일을 하는데 보내고 주님께 갔습니다. 이분이 바로 『상처 입은 치유자』의 저자 헨리 나우웬 신부입니다.
헨리 나우웬 신부님은 상처 입은 치유자, 곧 성체의 삶을 사셨습니다. 성체는 우리 손바닥 위에 올라올 만큼 작고, 마치 죽은 것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성체만큼 큰 것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을 살리는 양식이고 그 안에 예수님께서 사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모신 성체들입니다. 내가 밀떡처럼 완전히 죽었을 때 참으로 아버지께서 우리를 성체로 인정해주실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주시는 잔을 마시면 성체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성체성혈과 닮은 만큼 하늘나라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이웃에게 빵이 되어주는 삶만큼 가치 있는 삶은 없습니다.

-조재형신부-
예전에 인상 깊게 보았던 영화를 소개하고 싶습니다. 제목은 쇼생크 탈출((The Shawshank Redemption)입니다. 우리말로는 탈출로 변역되었지만 원뜻은 ‘구원’입니다. 신학적으로 의미 있는 단어입니다. 나의 노력과 의지로 구원받을 수 있지만, 진정한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과 죽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영화는 우리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두려움은 당신을 죄수로 가두지만, 희망은 당신을 자유롭게 합니다.(Fear can hold you Prisoner, Hope can set you Free.)” 희망이 있다면 좁고 열악한 환경의 감옥에서도 자유를 얻을 수 있지만, 두려움이 몰려오면 넓고 풍요로운 세상에서도 감옥에 있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주인공은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주인공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희망이 있다면 감옥은 시간이 많은 곳입니다. 주인공은 여러 단체에 꾸준히 편지를 보냈습니다. 재소자들을 위해 책을 보내달라고 하였습니다. 편지를 받은 단체에서 책을 보내주었고, 도서관을 만들게 됩니다. 책을 통해서 감옥에 있는 사람은 더 넓은 세상을 볼 수 있었습니다. 책을 통해서 삶의 진정한 의미와 가치를 알게 되었습니다. 세상에서는 보지 못하였고, 알 수 없었던 것들입니다. 지질학을 공부한 주인공은 교도소가 위치한 지역의 암반이 무르다는 걸 알았고, 매일 조금씩 흙을 퍼서 교도소 밖으로 연결되도록 굴을 팠습니다. 20년이 걸렸습니다. 희망이 있었고, 시간은 많았기 때문입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18년간 유배지에서 생활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유배지에서의 생활을 견디지 못했습니다. 억울함은 화병이 되었고, 잊혀질 거라는 두려움은 절망이 되었습니다. 절망에 빠진 몸은 유배지의 세찬 바람을 견디지 못하였습니다. 두려움에 빠진 몸에게 시간은 삶의 고통이었습니다. 억울함과 두려움으로 시간을 보냈다면 유배지는 정약용 선생에게 감옥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정약용 선생은 희망을 가졌고, 학문을 연마할 소중한 시간으로 생각했습니다. 정약용 선생에게 유배지는 학문을 연마하는 학교였고, 수양의 장소였습니다. 우리가 다산 정약용 선생을 기억하고, 그의 학문에 존경을 표하는 것은 유배지에서 그가 저술했던 책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산이 남긴 ‘목민심서(牧民心書)’는 유배지의 고통 속에서 핀 희망의 꽃입니다.
오늘 예레미야 예언자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그들은 제 목숨을 노리며 구덩이를 파 놓았습니다. 제가 당신 앞에 서서 그들을 위해 복을 빌어 주고 당신의 분노를 그들에게서 돌리려 했던 일을 기억하소서. 숨겨진 그물에서 저를 빼내소서. 당신은 저의 피신처이시옵니다. 제 목숨 당신 손에 맡기오니, 주님, 진실하신 하느님, 저를 구원하소서.” 힘들고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예레미야 예언자는 희망을 간직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제자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었고, 많은 표징을 보았고, 넓은 세상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은 욕망과 욕심이라는 감옥에 있었습니다. 그들이 원한 것은 명예, 권력, 재물이었습니다. 몸은 언제나 아버지의 집에 있었지만 마음은 다른 곳에 있었던 루가 복음 15장의 큰아들과 같았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할 새로운 길을 알려주십니다. 십자가와 겸손입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그리스도인들에게 야망이 있다면 그것은 주님과 이웃을 위해 헌신하고픈 야망이어야 합니다!
-양승국신부-
예수님 시대 당시 유다 사회 안에서도 ‘서열’은 꽤 중요했던가 봅니다. 당시 아버지는 아들에게 있어 하늘같은 존재였습니다. 죽으라면 죽는 시늉까지 해야 했습니다. 장남과 차남 사이의 격차 역시 하늘과 땅 차이였습니다. 공식적인 자리에서 어느 자리에 앉느냐 하는 문제는 그들에게 목숨을 걸 정도로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 보시기에 그런 가식적인 행동들이 참으로 한심스러웠습니다. 예수님께서 더욱 실망하신 것은 그토록 오랜 기간 계속 반복해서 특별교육까지 시킨 제자들마저도 아직 자리다툼에 연연하는 모습을 보였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가장 측근 제자들끼리, 그것도 길을 걸어가는 도중에 누가 제일 높은 사람인가 하는 문제를 두고 싸웠습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우리에게 한 때 야망과 출세욕으로 가득했던 야고보와 요한 사도, 그리고 그들의 어머니 살로메의 미성숙한 모습을 적나라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단이 에브라임에서 예리코로 내려가고 있는 중에 갑자기 그들의 어머니가 나타났습니다. 두 아들을 옆에 세워둔 채 그녀는 예수님께 절을 하면서 일종의 인사청탁을 하였습니다.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마태오 복음 20장 21절)
인사청탁을 하러 온 어머니가 설마 빈손으로 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분명 한손에는 품질 좋은 토종꿀 한병을, 다른 손에는 잘 키운 씨암탉 한 마리를 보자기에 싸서 들고 오셨을 것입니다. 사실 그녀가 보인 행동은 꽤나 민망한 모습이었지만, 용서해줄 만한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두 아들이 잘 되기만을 간절히 바라는 어머니로서, 예수님께 좋은 자리를 청탁하는 것은 야망이라기보다 강한 모성애라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더 큰 문제를 지닌 사람들은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 사도였습니다. 그들은 스승님께서 건설하실 새로운 왕국에 대한 헛된 기대감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지상적 통치권을 학수고대하고 있었고, 그 나라가 서게 되면 물좋은 자리, 총리 자리와 당대표 자리를 꿈꾸고 있었던 것입니다.
두 사도가 보여준 모습 중에 꽤나 치사한 부분이 있습니다. 예수님과 24시간 동고동락하던 그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조금 한가한 시간에 스승님께 면담을 신청하고 자신들의 속마음을 직접, 솔직히 표현하고 청했으면 차라리 나았습니다. 그런데 두 제자는 비겁하게도 어머니를 앞세워 간접적인 인사청탁을 시도한 것입니다.
아직도 갈길이 먼 미성숙한 제자들앞에 예수님께서 느끼셨던 자괴감은 하늘을 찔렀을 것입니다. 그러나 또 다시 예수님께서는 자상하고 친절하게 당신 사명의 핵심을 상기시켜주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태오 복음 20장 26~28절)
우리 교회는 지상적인 영예와 세속적인 자리를 탐내고 추구하는 출세 제일주의자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단체가 아님을 기억해야겠습니다. 누군가가 교회를 통해 자신의 개인적인 야심과 출세욕을 충족시키고자 애를 쓰다면, 그는 예수님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가련한 존재로 추락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권력을 탐하고 추구하는 자는 스승 그리스도를 망신시키고 악용하는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종교가 한 개인의 야심을 실현시켜주는 도구가 될 때, 주님께서 참으로 슬퍼하고 분노하실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야망이 있다면 그것은 주님과 이웃을 위해 헌신하고픈 야망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욕심이 있다면 그것은 주님과 이웃을 섬기고 싶은 욕심이어야 합니다.

무엇을 원하느냐?
-반영억신부-
많은 사람이 으뜸으로 인정받고 그에 상응하는 대접을 받고 싶어합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대접을 받는 사람은 흔하지 않습니다. 겉으로는 그렇게 보인다 하더라도 진정한 존경과 사랑으로 인정을 받는 사람이 많지 않음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세속 안에 있으면서도 세속을 떠나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진정 존경을 받을 사람입니다. 세상은 높아지라고 하지만 오히려 섬기는 사람, 세상은 첫째만을 기억하지만 오히려 종이 되는 삶을 사는 사람이야말로 하느님께로부터 인정을 받는 사람입니다.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는 자기 두 아들이 주님의 오른편과 왼편에 앉기를 소망하였습니다. 어머니가 자식이 잘 되기를 바라는 것을 어찌 탓할 수 있겠습니까마는 아무 정성과 노력이 없이 좋은 자리를 차지하겠다고 하면 그것은 욕심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욕심을 지니게 되면 반드시 적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제베대오의 두 아들이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 한다는 낌새를 알아챈 다른 열 제자가 그 두 형제를 불쾌하게 생각한 것에서도 바로 그러한 마음을 대변해 줍니다.
“무엇을 원하느냐?” 물론 영광을 원합니다. 그러나 영광은 고통 없이 주어질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수난과 죽음을 통하여 부활의 영광에로 나아가십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수난을 예고하시지만 제자들은 딴청을 부렸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마태20,22)하고 물으시자 “할 수 있습니다.”하고 대답하였지만 사실 그들은 의미도 모르고 대답한 것입니다. 그 잔은 모욕과 천대, 고통과 십자가의 죽음을 뜻했습니다. 종이 되어 남을 섬기는 낮아지는 삶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나 덥석 대답해 놓고는 딴전을 피우는 그들의 모습이 우리에게도 여전합니다.
세례성사를 받으면서 마귀를 끊어버리겠다고 선언해 놓고서는 어려운 일이나 우환이 닥치면 하느님 보다는 ‘어디 용한 사람이 없나?’ 살피게 됩니다. 허례허식을 버리겠다고 맹세하고는 주님을 바라보지 않고 주변 사람에게 잘 보이려는 행동을 합니다. 남이 나를 섬겨주기를 바라는 허영의 마음이 가득할 때도 있습니다. 오로지 주님을 믿으며 주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삶을 믿는다고 고백하고서는 미사참례를 소홀히 할 때도 있습니다. 모처럼 손님이 오면 함께 미사 참례하자고 권유하면 좋으련만 그를 배려한다는 빌미로 주일미사까지 궐합니다. 약속된 영생에 대한 희망을 말하면서도 눈앞에 것에 흔들리는 것이 우리의 마음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으십니다. 아직도 아무 수고와 땀도 없이 영광을 바라느냐? 고 물으십니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기꺼이“할 수 있습니다.” 대답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대답에 항구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군림해서 힘으로 내리누르는 삶이 아닌, 자신의 모든 것을 온전히 내어놓는 삶을 살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사랑은 섬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내어바칠 만큼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도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하기를 갈망해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종이 되어야 한다.”(마태 20,26-27)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대한 세 번째 예고 장면과 섬김과 출세에 대한 말씀입니다. 오늘은 섬김과 출세에 대한 말씀을 보고자 합니다.
제베대오의 두 아들과 그들의 어머니는 예수님께 주님의 나라에서 하나는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있기를 청합니다.
곧 높은 자리를 청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결코 그들의 열망을 나무라시지는 않으십니다.
오히려 이를 보고 불쾌하게 여기는 다른 제자들을 함께 불러 당부하십니다.
“높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종이 되어야 한다.”(마태 20,26-27)
이는 높은 사람, 으뜸인 사람이 되지 말라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어떤 사람이 진정한 높은 사람인지를 가르쳐주십니다.
그리고 높은 사람이 되는 진정한 길을 가르쳐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높은 사람이란 남을 섬기는 사람이고, 그런 사람이 되고자 하면 먼저 종이 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러니 왕이 되고 싶다면 ‘먼저’ 아내를 왕비로 대해야 하고, 왕비처럼 살고 싶으면 ‘먼저’ 남편을 왕으로 받들어야 하고, 성인이 되고 싶으면 ‘먼저’ 다른 사람을 성인으로 여겨야 함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남을 불신하고 신뢰하지 못하면 그렇게 신뢰받지 못하고 불신 받는 사람이 될 것이요, 남에게 자비로우면 남들에게도 자비를 입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누군가에게 억울함을 당하고 있다면 필시 그도 나에게 억울함을 당하고 있을 것입니다.
결국, 섬기는 사람이 섬김 받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아버지를 섬기셨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었으며 당신을 배신하고 도망쳐 버릴 그 제자들을 섬기셨기에 섬김 받으십니다.
그러나 단지 작고 낮은 자라고 해서 섬기는 자인 것은 아닐 것입니다.
혹은 희생과 헌신으로 봉사한다고 해서 섬기는 자인 것도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섬긴다는 것은 자신이 낮아진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인격을 존중하고 소중히 여기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자신을 낮춘다 하더라도, 상대방을 귀하게 여기는 ‘들어 올림’이 없다면, 진정한 섬김이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섬김은 내가 낮은 자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형제를 높은 자 되게 하는 데 그 본질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우리를 높이기 위해서, 우리를 하느님 되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섬기셨듯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섬기는 사람은 섬기는 그 사람을 닮아갑니다.
스승이신 예수님을 섬기면 예수님이 되어가고, 진리를 섬기면 진리가 되어 갈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저는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섬기기보다 섬김 받기를 좋아하고, 상대를 높이기보다 자주 낮춰보고 있으니 말입니다.
참으로, 예수님과는 반대방향으로 달리는 기차에 몸을 싣고 달려가고 있는 꼴입니다.
그러니, 오늘도 “주님을 섬기는 학원”(<베네딕도 규칙서> 머리말 45)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형제 섬기기를 통하여 주님 섬기기를 배워야 할 일입니다.
-오늘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너희는 내 잔을 마실 것이다.”(마태 20,23)
주님!
제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원하시는 것을 주소서.
깨지기 쉬운 질그릇 같은 제 몸에 당신 생명을 담아주소서.
언제나 당신의 죽음을 짊어지고 다니면서 당신의 생명이 드러나게 하소서.
오늘도 제 몸이 깨지고 부서져, 당신의 생명을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조욱현신부-
복음: 마태 20,17-28: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종이 되어야 한다
제자들은 주님의 수난과 부활에 대한 말씀을 계속 들어 왔지만, 주님의 기적을 보고도, 말씀을 듣고도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서는 그것을 듣는 것 자체가 괴로운 말씀이었다. 그들은 지금까지 그분이 행하신 무수한 기적들을 보았는데, 이런 분이 고난을 당하신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주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에 제배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가 아들들과 함께 나아가 예수님께 청하고 있다.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21절) 이 자리는 분명히 두 아들들이 원하는 것인데 그들은 어머니를 내세워 대신 청하고 있다. 주님께서는 지금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고 계시며, 그 길은 십자가의 길을 가시는 것인데, 이 순간에 아직도 당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제자들을 볼 때, 더욱 서운하셨을 것이다. 자리다툼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22절) 복음에서는 잔과 세례라는 말씀이 나온다. 그런데 잔과 세례는 같은 것이 아니다. 잔은 수난을 의미하지만, 세례는 죽음 그 자체를 말한다. 예수님께 잔은 수난이었고 세례는 십자가의 죽음을 의미한다. 죽음에는 고통이 따른다. 그러나 모든 고통이 죽음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고난은 당했어도 죽임을 당하지 않은 사람도 많다. 이들이 고백자이다. 실로 주님의 잔을 마시기는 했어도, 예수님께서 받으신 세례는 받지 않았다.
“할 수 있습니다.”(22절) 그들은 시련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이렇게 대답할 수 있었다. 전쟁을 모르는 사람은 전쟁놀이가 재미있다. 그 잔의 의미를 모르니까 그렇게 대답하였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의 길 앞에서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이 저를 비켜가게 해 주십시오.”(마태 26,39) 하고 말씀하셨는데, 제자들이 그 잔이 어떤 것인 줄 알았다면 “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었을까? 수난의 괴로움은 참으로 크다. 그러나 죽음은 훨씬 더 무서운 것이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도 마시고,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내 오른쪽이나 왼쪽에 앉는 것은 내가 허락할 일이 아니라, 정해진 이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마태 10,39-40) 이 말씀은 거절하는 말씀이 아니다. 이 말씀을 듣고 나머지 제자들이 불쾌했다고 한다. 모든 사도들이 세속적인 마음으로 주님을 따랐기 때문이었다. 주님께서는 사도들 사이에 형제애가 깨지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모두가 희망을 가지게 해 주셨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들의 예를 드시면서 그들과 같이 백성들 위에 군림하지 말고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26절)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것과 같이 하느님 안에 능력 있고 성숙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보다 잘 섬길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28절)고 하셨다. 그분을 본받도록 하자.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마태 20, 22)
-한상우신부-
사랑의 빵과
고난의 잔은
언제나
함께합니다.
빵안에 고난이
있고 고난 안에
빵이 있습니다.
상처 없는 삶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세상도 사람도
모든 생명또한
상처를 받으며
걸어갑니다.
상처와 아픔을
공유하는 이 땅의
사순(四旬)입니다.
예수님의 수난은
우리를 돌아보게
합니다.
십자가 없이
완성될 수 없는
사람의 여정입니다.
사람은
사람이란
고난의 잔을 통해
진정한 사람이
되어갑니다.
고난의 잔은
십자가의 수난은
어디로 가야 할지를
일깨워주는 가장 좋은
삶의 스승입니다.
고난이 있습니다.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리고 또다시
예수님이 계십니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는 수난을 준비하시는 주님을 만납니다.
"보다시피 우리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마태 20,18).
오늘 복음의 대목은 하필이면 예수님의 세 번째 수난 예고와 제베대오 아들들의 청탁, 두 주제가 연달아 이어집니다. 누차 밝히시는 당신 사명과, 그에 대한 제자들의 몰이해가 극명한 대조를 이루지요.
예수님께 예루살렘은 예언자들을 죽인 도시인데 제자들에게는 출세와 영광의 도시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성공에 편승해 좋은 자리를 먼저 차지하려고 어머니까지 동원해 눈치 싸움에 돌입한 듯합니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마태 20,26).
예루살렘 입성을 눈앞에 둔 시점에서 두 제자의 숨은 의도가 드러나 제자단 안에 분열이 시작되니 스승의 마음이 어떠실지 짐작이 갑니다. 그동안의 지도가 물거품이 된 것 같은 실망감과 분노로 불호령이라도 떨어질까 싶지만 예수님은 꾹 참고 간곡한 목소리로 만류하십니다.
"사람의 아들도 ... 섬기러 왔고 ...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태 20,28).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세속의 질서와 하느님 나라의 질서가 엄연히 다르다는 걸 다시 차근히 일러주십니다. 세속 권력의 힘과 사랑이라는 계명의 힘 역시 헷갈릴 수 없이 다른 세계의 일이라는 걸 알아듣길 바라십니다. 아직 십자가 길에서 제자들에게 버림받으시기 전이지만, 이미 예수님은 외로우실 것 같습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재차 섬김과 희생 제사의 소명을 일러 주시지요.
제1독서에 드러난 예레미야 예언자의 모습에 예수님이 어른거립니다.
"선을 악으로 갚아도 됩니까?"(예레 18,20)
이 질문에서 예레미야의 서러운 울분이 고스란히 전달됩니다. 그는 하느님의 뜻을 이스라엘에 전달하려고 위험을 무릅쓰고 밤낮없이 수고했지만, 돌아은 건 조롱과 모욕, 모함과 박해 뿐이었습니다. 유다 사람들과 예루살렘 주민들이 제 입맛에 맞는 말을 해 줄 사제와 현인, 거짓 예언자에게 백성의 운명을 맡긴 채, 하느님의 목소리를 무참히 훼손하고 웃음거리로 만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당신 앞에 서서 그들을 위해 복을 빌어 주고 당신의 분노를 그들에게서 돌리려 했던 일을 기억하소서"(예레 18,20).
사람에게 이 말을 했다면 괜한 공치사 밖에 되지 않을 터입니다. 예레미야는 자기 말에 귀 기울여 주시는 오직 한 분, 하느님께 온갖 고통과 외로움 속에서 부르짖습니다. 그의 순수하고 충실한 기도와 축복, 용서의 중재는 하느님과 예언자, 둘만의 숨겨진 짝사랑이었던 것입니다.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자기를 위해 수난하고 죽으신 예수님의 구원 업적을 아는 이들과, 구원의 현실을 누리면서도 이를 모르는 이들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희생에 대해 감사하고 닮으려 애쓰는 이들은 물론, 당신을 모르거나 무관심하거나 심지어 배척하는 이들을 위해서도 죽으셨습니다.
자기들을 위한 예레미야의 기도를 모르는 가운데, 그를 해치려 음모를 꾸미는 이들이 있듯이, 예수님께서 치르신 몸값의 수혜자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이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무지는 무지일 뿐, 그렇다고 주님께서 당신의 희생 제사를 중단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지는 않으시지요. 그러니 수난의 목전에 이르러서도 움켜쥐고 있는 제자들의 야심 정도가 그분을 흔들 수는 없습니다.
어차피 예언자는 그런 운명입니다. 매번 이해 받고 갈채와 덕담에 취해서 살고 있다면 오히려 자신이 진정한 신앙인인지, 예언자적 소명을 살고 있는지 되물어야 합니다. 예언자의 기도와 중재, 축복은 하느님과 자신만 아는 숨은 짝사랑일 때 진짜일 확률이 큽니다.
사랑하는 빗님! 세상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든, 이웃들이 우리의 호의에 어떻게 응답하든 우리는 주님과 함께 묵묵히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는 사람들입니다. 성체에 대한 허기와 함께 깊어가는 이 사순절에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부여잡고 더 기도하고 희생하며 세상의 고통을 보듬고 떠받치는 오늘 하루 되시길 기원합니다.

최악 너머의 선-2018
-김찬선신부-
http://www.ofmkorea.org/ofmhomily/325632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몸값을 치르러 온 것이다.” (마태 20,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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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겐가 힘이 되려면 나는 죽어야 합니다. 내가 살아있으면 다른 이들의 에너지를 빼앗지만, 내가 죽으면 다른 이가 나 덕분으로 살아갈 힘을 얻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예수님께서 마시려는 잔은 무엇일까요? 우리를 위해 빵이 되어주라는 아버지의 명령이십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라고 하십니다. 섬김은 누군가에게 힘을 주는 행위입니다. 빵이 되는 행위입니다.
“오르막길 인생은 성공과 칭찬에 가려 예수님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제 낮은 곳에서 예수님을 만날 것입니다.” 인생의 말년을 매사추세츠 정신지체인 시설에서 장애인들의 용변 식사 목욕 등 구질구질한 일을 하는데 보내고 주님께 갔습니다. 이분이 바로 『상처 입은 치유자』의 저자 헨리 나우웬 신부입니다.
헨리 나우웬 신부님은 상처 입은 치유자, 곧 성체의 삶을 사셨습니다. 성체는 우리 손바닥 위에 올라올 만큼 작고, 마치 죽은 것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성체만큼 큰 것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을 살리는 양식이고 그 안에 예수님께서 사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모신 성체들입니다. 내가 밀떡처럼 완전히 죽었을 때 참으로 아버지께서 우리를 성체로 인정해주실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주시는 잔을 마시면 성체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성체성혈과 닮은 만큼 하늘나라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이웃에게 빵이 되어주는 삶만큼 가치 있는 삶은 없습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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