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3월 8일 사순 제2주일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마태오. 17,1-9)
"This is my Son,
the Beloved, my Chosen on e.
Listen to him."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는 온전한 인간이시자 온전한 하느님으로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복음서는 이런 예수님을 다양한 방식으로 설명합니다. 그 가운데 수난과 죽음은 예수님의 인성을 잘 드러내는 반면, 부활은 그분의 신성을 드러내는 중요한 사건입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거룩한 변모는 부활하신 뒤에 드러날 신성을 미리 보여 주는 사건입니다.
거룩한 변모 사건은 구약 성경의 중요한 사건을 암시하는 요소와 성경의 상징적인 요소들로 가득합니다. ‘높은 산’이나 영광스럽게 변모한 모습은 이집트 탈출과 광야의 역사를 생각하게 합니다. 베드로 사도의 초막에 관한 내용도 그렇습니다. 모세는 이집트 탈출을 통하여, 엘리야는 바알의 사제들과 하였던 내기를 통하여 하느님의 위대하심과 영광을 드러낸 예언자로 복음서에 자주 등장합니다. 하느님의 영광과 변모를 통하여 드러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이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복음서는 그 영광을 “그분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그분의 옷은 빛처럼 하얘졌다.”라고 표현합니다. 주님의 영광을 우리의 언어로 표현하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오히려 베드로 사도의 반응이 그 영광을 잘 표현하는지도 모릅니다.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거룩한 변모는 하느님이시지만 우리를 위하여 고난의 길을 가신 예수님의 구원을 강조합니다. 그러기에 그분의 수난은 값지고 수난을 통하여 드러나는 사랑은 위대합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키엣 대주교-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의 마음을 보는 것은 더욱 어렵습니다. 이미 그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착각하여 그의 마음을 보려고 노력하지 않기에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습니다.
다른 사람의 영혼을 보는 것은 마음을 보는 것보다 더욱 어렵습니다. 영혼은 믿음으로만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어 우리 옆에 계셨지만 알지 못했습니다. 가난하고 평범한 인간의 육체 속에 하느님의 영광을 지니고 계셨지만 그 빛을 보는 사람이 없었기에 영광스러운 신성을 드러내신 스승을 본 제자들은 놀랍고 희망에 넘쳤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은 나와 형제의 마음 속에 있는 씨앗과 같습니다. 피곤하여 지치고 흐려진 눈으로는 숨겨져 있는 그 빛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눈을 가리고 있는 죄의 허물이 벗겨지면 벗겨질수록 하느님의 빛이 밝게 드러날 것입니다.
내면의 침묵 속으로 침잠할수록 하느님께 가까이 갈 수 있습니다. 나와 형제의 마음은 바로 하느님이 머무시는 성전이며 성령의 씨앗을 기르는 고귀한 밭이기에 서로를 존중해야 합니다.
이번 사순절에 마음 속 깊이 계신 내 안의 하느님을 만날 수 있도록 생각하고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금식은 마음 속에 계신 하느님께 다가가는 가장 쉬운 방법 중 하나입니다. 우리 몸에는 너무나 많은 것들이 쌓여 하느님의 영광을 느끼지도 볼 수도 없습니다.
하느님 영광의 빛이 비추일 수 있도록 세상의 풍요로운 물질로부터 잠시 멀어져 몸과 마음을 비우십시오.
금식은 바로 우리 마음 속에 계신 하느님의 신성한 씨앗이 싹이 틀 수 있도록 보호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나의 내면을 밝게 비추어 흐릿해져 가는 나의 양심과 영혼이 되살아난다면 내 안에 모셔진 하느님께서도 다시 살아나실 것입니다.
내 안의 하느님이 밝게 빛날 수 있다면 나도 하느님의 영광을 다시 세상 사람들에게 비춰주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주님의 사업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하신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 그리스도인의 길입니다.
주님, 저희 형제 안에 계신 주님을 볼 수 있는 굳건한 믿음을 주소서. 그리고 보이지 않는 현실도 볼 수 있는 섬세한 마음을 주소서. 아멘

1. 주님의 변모가 내가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겪어야 하는 어려움을 견뎌내는 믿음이 되고 있습니까?
2. 내 몸 깊이 계신 하느님 영광의 빛을 비추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3. 지금 모두가 어려움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생각이 아닌 행동으로 실천하는 주가 되기 바랍니다.

여기에 초막을 짓겠습니다.
-임상만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 그리고 요한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가셨는데,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눈이 부시게 변하였다는 내용이다.
예수님의 변모 장면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이고, 구원의 역사를 이루신 예수님의 생애에 매우 중요한 전환점을 이루고 있다. 예수님께서 산에 오르시기 직전까지 갈릴래아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던 당신의 모든 활동을 끝내시고 앞으로 있을 수난과 죽음에 대해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후 바로 이루신 첫 행보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이 사건을 기점으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어 수난의 길을 걸으셨다. 그러기에 이 변모 장면은 그 자체의 의미도 중요하지만, 특히 이 일이 당신의 수난 예고로 이어지는 상황에 더 깊이 주목해야 진정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타보르 산에 오르시기 직전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시몬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5-16)라고 대답한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정말 그리스도이시고, 그분은 모세나 엘리야와 같은 이스라엘의 영웅으로 새 나라를 세우실 것이라는 희망과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셔야 한다는 말씀을 반복하시자(마태 16,21), 그는 충격에 빠지게 된다.
이런 절망적 상황 속에서 베드로가 목격한 장면, 즉 타보르 산에서 예수님께서 빛처럼 귀하게 변하신 모습 그리고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은 베드로에게 ‘그럼 그렇지!’ 하는 확신을 다시금 갖게 했고, 순간 들뜬 마음을 참지 못하고 큰소리로 외쳤다.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마태 17,4).
베드로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엘리야와 모세에게 거는 정치적, 종교적 기대감을 노골적으로 표출해 예수님께서 백성들이 바라는 영웅적이고 화려한 인물로 우뚝 서기를 바라는 속내를 보인 것이다.
그러나 곧이어 하늘의 소리가 들리면서 베드로의 환상은 깨끗하게 깨진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태 17,5)
이것은 ‘너희의 환상과 기대를 위해 그곳에 초막을 짓고 머무를 것이 아니라 즉시 산 아래로 내려가서 부활을 향한 수난 속에 자신을 던질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라’는 명령이었다. 왜냐하면, 이것이 바로 제자들이 걸어가야 할 길이기 때문이고, 산 아래 지상의 삶에서 각자가 수난의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다면 누구도 영원한 생명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자신의 인생 가운데 가장 중요한 시점의 산에 서 있게 된다. 계속 머무르고 싶은 성공한 사람의 모습으로, 한 부분도 내어주기 아까운 가진 자의 모습으로 혹은 자기 마음껏 갑질할 수 있는 권력자의 모습으로 영원히 머무르고 싶고, 그 마음으로 초막을 짓고 싶은 순간들일 수 있다.
그러나 그곳은 자기 자신의 타보르 산, 모든 욕심과 환상을 내려놓고 오직 주님으로 온전히 변화되어 내려와야 할 기회의 산이기도 하다. 우리 눈에 보이는 화려한 것을 다 버리고 수난의 현장으로 걸어가시는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 빛의 길이며 부활의 길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기도하며 사순 시기의 여정을 이어가야 한다. 왜냐하면, 초막이 아니라 현실에서 그분과 함께 머물 때만 그분의 영광을 보게 되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여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십시오.”(2티모 1,8)

배타적 투쟁이 아니라 공존의 소중함으로
-김혜윤수녀-
오래전 유학시절의 일입니다. 버스 안에서 어느 모녀의 대화를 듣게 되었는데 젊고 아름다운 엄마는 어린 딸에게 세상이 얼마나 위험하고 불안한 곳인지를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길거리 가다가 절대로 방심하면 안 돼, 저런 집시들도 많고 무서운 아저씨들도 있고… 알겠지?” 엄마의 사랑이 깊은 만큼 가정교육도 철저하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아름다운 모녀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런데 문득 ‘나라면 정말 어떻게 가르쳤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상에 대한 혐오와 경계만을 아이들에게 주입할 때, 우리 주변을 하느님이 주신 축복의 장소로 유지하고 지켜야 할 인간의 과제는 어떻게 되나…? 하는 걱정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세상과 구별되는 높은 산에서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게 되고, 이는 그 체험을 간직하고 다시 세상으로 내려가기 위한 것임을 가르쳐줍니다. 학습된 의심과 경계, 증오는 오히려 세상과 인간을 격리시키고 인간과 인간을 분열시키는 무서운 폭력이 될 수 있습니다. 세상을 불길하게 여기는 부정적 시각보다 더 훌륭한 의식은 세상을 좀 더 축복과 은총의 자리로 인식하고 인간으로서의 노력을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 복음의 맥락
마태오복음은 영광스런 변모(마태 17,1-9) 본문을,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예고(16,21-28) 다음에 배치합니다. 수난과 죽음에 대한 언급으로 혼란스러워 하던 제자들에게, 이제 모세(구약의 율법)와 엘리야(예언자들)의 시대를 아우르는 ‘완성의 때’가 오고 있음을 이 신비적인 체험을 통해 알려주신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 복음의 구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동사 두 개가 있는데 ‘오르다’와 ‘내려오다’입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 오르셨다”(1절)로 시작하고 “그들이 … 내려올 때에…”(9절)로 마무리됩니다. 하느님을 온전히 만나기 위해 그분의 현존이 있는 곳으로 오를 필요가 있고 그 만남이 이루어진 후에는 낮은 곳으로, 불의와 가난, 지침과 병듦이 있는 바로 그 현장으로 내려와야 하는 것입니다.
■ 아름다움에 대한 계시
사건은 “높은 산”(1절)에서 발생합니다. 고대로부터 산은 하느님의 현존이 있는 신성한 장소로 여겨졌습니다. 거기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변하셨는데…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옷은 빛처럼 하얘졌”다(2절)고 합니다. ‘변하다’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메타모르포오마이’이며 이는 모양, 형태, 양상이 바뀌는 것을 의미합니다.(영어 transfigure 혹은 transform으로 번역) 사실 이 사건을 예수님의 ‘거룩한 변화’로 옮기는 번역에는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늘 거룩한 분이시기에 거룩하게 변화되었다는 표현은 사실상 모순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과 공관복음의 병행구절을 봐도 ‘거룩하게 변하다’는 표현은 찾을 수 없고 ‘영광스럽게 변하다’라는 표현만 발견됩니다. 그러므로 이 본문은 예수님의 ‘변화’보다, 그분이 본래적으로 가지고 계셨던 눈부신 신적 초월성에 대한 ‘계시’의 내용이라고 보는 것이 맞겠습니다.
한번 상상해 봐도 좋을듯합니다.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은 높은 산에 올라, 평소와 전혀 다른 예수님을 보게 됩니다. 누구도 범접하지 못할 영광스러움과 그로 인한 충만한 거룩함은 지금까지 예수님과 함께하면서 감수해야했던 어려움들과는 너무도 다른 것이었습니다. 군중들과 함께 지내면서 늘 피곤에 시달려야 했고 정치적 기득권자들과의 갈등이 고조되면서 위협과 긴장 속에 있어야 했던 그들에게 그 순간은 이례적인 아름다움이었을 겁니다.
베드로가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4절)라고 하며 “제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4절 ㄴ)라고 구체적 계획까지 세우는 것은 충분히 이해되는 반응입니다. 시각적 요소와 함께 청각적 요소도 등장하는데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5절)이라는 소리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셨을 때 하늘에서 들려왔던 것과 동일한 내용이었습니다. 이 청각적 요소들은 이미 시각적인 요소들을 통하여 계시된 예수님의 신적 초월성을 분명히 확인시켜주는 역할을 합니다. 다가올 십자가 사건으로 절망에 빠질 수 있는 제자들에게 그분이야말로 하느님께서 “가장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임을 미리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 보여줄 땅으로 떠나라
아브람(아브라함)도 유사한 여정을 걷게 됩니다. 고향에서 친족과 안정되게 살아가고 있던 그에게 하느님은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줄 땅으로 가거라”(창세 12,1)고 하십니다. 자족과 안위에서 ‘일어나 떠나고’ 하느님이 이끄시는 곳으로 ‘가야’ 하는 명령을 받은 것입니다. 이러한 도전에 아브라함은 매우 단순하고 명확하게 반응합니다. 준비의 시간이나 이유를 묻지 않고 “주님께서 이르신 대로 길을”(4절) 떠나는데, 이로써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내리며 너의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2절)고 하는, 인간을 위한 하느님의 구원 역사가 시작됩니다.
나오고, 떠나서, 가야할 곳은 하느님께서 보여주시는 곳, 바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안락하고 행복하다고 느꼈던 자리에서 일어나 떠날 용기와 결단이 필요합니다.
코로나19로 모두가 힘든 때를 보내고 있습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분석하고 보도한다고 해서 그것이 언제나 훌륭한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불안이 불행을 생산하기 때문입니다. 과잉된 보도로 사회적 불안을 조성하고 그 때문에 누군가 불행해지는 일이 없도록 묵묵히 자기 주변을 돌보며 차분한 자세로 일상에 임할 때입니다. 소중한 것을 지키려면 수고가 필요하고, 따라서 현재의 위기는 더 진실하고 아름다워질 수 있는 축복과 은총일 수 있습니다. 함께 이 과정을 겪으면서 우리는 공존과 상생이라는 참된 인간성과 존엄을 회복하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다툼과 상처, 무례한 검열과 무차별한 의심을 넘어 “일어나라. 그리고 두려워하지 마라.”

위안을 주는 기도생활
-신희준신부-
혹시 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를 보신 적이 있으신가 요? 비행기를 타고 드넓은 초원과 구름 위를 나는 두 주인 공이 마주한 너무나도 아름다운 풍경! 그리고 그 배경에 들 리는 모차르트의 클라리넷 협주곡 제2악장의 아름다운 선 율! 개인적으로 제가 제일 좋아하는 이 음악 작품은 오늘의 복음 말을 묵상할 때마다 제 머릿속에 항상 떠오릅니다.
어느 날 예수님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십니다. 음악을 들으며 예수님 과 제자들이 산에 오르는 모습을 그려봅니다. 복잡한 속세 를 떠나 잠시 고요와 평화를 찾아 산을 찾는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을 그 평화로운 장면 말이죠. 예수님은 산을 자주 찾으셨습니다. 특히 기도하기 위해 서 산을 오르셨습니다(예컨대, 마태 14,23; 24,3 등 참조). 보통은 혼자 기도하기 위해서 산을 오르셨지만, 오늘은 제자들과 함께 산을 찾으셨는데, 아마도 제자들에게 좋은 기도 체험 을 주기 위해서가 아닐까 싶습니다. 아니나 다를까요, 함께 기도하던 제자들은 놀라운 일을 목격하게 됩니다. 우선, 예수님의 얼굴이 해처럼 빛나고 옷 이 하얗게 변하는 것입니다. 그다음으로 이스라엘의 율법 을 대표하는 모세와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을 대표하는 엘리 야 두 사람이 등장해서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는 것이었습 니다. 이 장면을 목격한 제자들은 마치 천국에 있는 듯한
기쁨과 위안을 얻었던 모양입니다. “주님, 저희가 내려가 지 말고 여기 그냥 쭈-욱 지냈으면 좋겠습니다”라는 베드 로의 발언이 제자들의 솔직한 마음을 표현하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살다 보면 이런저런 일로 고민에 빠지기도 하고, 마음에 상처를 받아 분노에 빠지기도 하고, 또 신앙생활에 회의를 느끼기도 합니다. 이럴 때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산’에 올 라 같이 기도를 해야 할 것입니다. 기도의 목적은 여러 가 지일 수 있겠지만, 기도 중에 특별한 체험을 통해서 마음의 위안이나 신앙생활에 대한 믿음을 얻는 것이 그 가운데 중 요한 하나가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기도를 통해 받은 마음의 위안은 오래가지 않습 니다. 사실 너무나 빨리 사라질 때가 대부분입니다. 현실 의 파도는 여전히 려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기도할 때 마다 이런 체험이 주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마치 물이 없 는 사막에서 오아시스는 어쩌다 만나게 되는 것처럼, 특별 한 기도 체험 역시 아쉽지만 가끔만 주어집니다. 하지만 이 ‘비정기적’이고 짧은 체험만으로도 삶의 온갖 무게를 이겨 낼 힘을 우리는 꼭 얻으리라 믿습니다. “제가 비록 어둠의 골짜기를 간다 하여도 재앙을 두려워하지 않으리니 당신께 서 저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막대와 지팡이가 저에게 위안을 줍니다.”(시편 23,4) 아멘.

다가오는 공감을 통해 희망을 넘는 희망으로
-방상훈신부-
“저도 해내지 않았습니까? 여러분도 가능합니다.”요즘 사회에서는 별반 다를 것 없는 사람인데 나도 해냈으니 여러분도 가능하다는 공감과 격려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런 말에 힘을 얻고 일상으로 돌아오지만, 돌아오는 것은 막연함입니다. 단기적인 목표를 생각하고 이어질 다음의 목표 를 정하고 나아가길 연속, 그러다 지칠 때면 큰 ‘희망’이 보이지 않아서 ‘그냥 앞만 보고 달렸구나!’ 라는 마음속 외침만이 나의 내면을 울립니다. 이를 신앙생활로 바꾸면 어떨지 싶습니다. 당장 해야 하는 기도, 봉사, 특별히 사순 시기를 맞이하여 더 깊이 바라보면 나의 신앙생활이라는 길이 나의 일 상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우리에게 하느님께서는 오늘 말씀 전체에서 희망을 주고 삶의 이유를 말씀하시며 삶이 곧 신앙의 길임을 알려주십니다. 떠나는 이 길이 막막함이 아닌 거룩함 과 기쁨 그리고 보이는 것보다 더 큰 희망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막연합니다. 우리의 입장은 1독서의 아브라함과 같습니다. 이렇게 좋은 것을 두었다고 따라오 라고 하시는데 도저히 잘 모르겠다는 생각만이 머리에 맴돌기도 합니다. 2독서의 말씀처럼 ‘정답들’ 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 길이 내 안에 하느님을 열심히 담아내며 모든 불안과 두려움의 원천인 죽음 까지도 이겨내게 할 것이라는 것도 완전히 변화될 것도 복음의 예수님이 보여주신 모습으로 알고 있 습니다. 다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한 가지가 있습니다. 희망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점, 복음에서 보여준 모습이 다가 아니라 보이는 찬란한 모습을 뛰어넘은 더 큰 영광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보이는 예수님의 모습처럼 변화되고 있기에 복음을 통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서두에 말한 것처럼 “나도 해내지 않았니? 너희도 보여준 예수님의 모습처럼 따르면 가능하단다.”라는 하느님의 음성이 우리 마음에 와 닿게 됩니다.
사순시기의 시작에 다짐한 것들, 하루에 하나씩 해내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우리는 “해처럼 빛나고”, “빛처럼 하얘”지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이렇게 눈에 보이는 것부터 해냈다는 성취감과 동시에 그 변 화를 이뤄내 주신 감사함과 기쁨을 찾는 한 주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고난으로 마음이 아프고 바라볼 수 없다면 나에 대한 채찍질보다 부족함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지혜를 청하며, 고난 뒤 의 찬란한 영광을 꿈꿔야 할 것입니다. 저 멀리 보이는 것 같지만, 나아가는 것 그 자체가 삶의 이유 임을 기억하고 하느님의 응원으로 힘을 얻길 바라며 응원의 말씀으로 글을 마칩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두개의 열쇠
-김명현신부-
우리는 회개와 참회의 시기인 사순 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회개와 참회의 시기에 우리는 절제하며, 속죄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러한 삶은 분명히 힘 든 것인데 교회는 이 시기를 “복되신 은총의 때”로 선언하고 있습니다. 회개와 참회라면 온통 회색으로 생각하는 현대인들에게 이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말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의 가치보 다 하느님 나라의 가치를 더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 에게 이 시기는 참으로 복된 은총의 시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 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고 하시며 모든 사 람을 하느님 나라에로 부르셨습니다. 이 말씀에 따 르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데 두 가지 열쇠가 필 요합니다. 바로 회개와 신앙이라는 열쇠입니다. 회개 와 참회의 사순 시기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첫 번째 열쇠인 회개를 이루는 시기입니다.
하느님은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서시는 분이시기에 회개와 참회를 하는 사람을 내치시는 분이 아니라 오히려 사랑과 자비로 품어주시는 분이 십니다. 또 회개를 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자비와 사 랑을 믿는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회개하는 사람 안 에는 하느님에 대한 신앙의 열쇠가 생겨납니다. 이 렇듯 사순 시기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열쇠를 만드는 시기이기에 어찌 “복되신 은총의 때”라고 하 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타볼산에서 예수님의 거 룩한 변모를 보고 하느님의 말씀까지 듣게 됩니다.
제자들은 거룩한 변모를 목격하기 전에 먼저 수난 과 부활에 대한 예고 말씀을 들었고, 십자가를 지 고 당신을 따르라는 당부의 말씀도 들었습니다. 거 룩하신 모습을 드러내기 전에 왜 예수님은 수난과 십자가의 삶을 말씀하셨겠습니까? 그것은 예수님께 서 수난을 통하여 부활의 영광에 이르며, 제자들은 십자가의 삶을 통하여 그분의 부활에 동참할 수 있 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 게 다가올 수난과 고통이 헛된 것이 아니라 영광에 이르는 길임을 확신시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형제 여러분! 사순 시기에 회개와 참회의 삶을 사 는 것은 죄와 죽음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계로 향하 는 것입니다. 아브람에게 새로운 땅으로 가라고 하 신 하느님은(제1독서) 오늘 우리에게 죄와 욕망의 삶에서 벗어나 자비와 사랑, 참회와 용서가 있는 새 로운 땅으로 나아가라고 초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삶은 세상의 기쁨과는 다른 것이기에 오직 “하느님 의 힘에 의지하여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2티모 1,8)할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거룩한 모습을 보여주신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회개 와 참회의 삶을 통하여 그분의 수난에 참여하면서 하느님 나라에 이를 두 개의 열쇠를 만들어 갈 것 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그러기에 사순 시기는 침울 한 회색빛 바위가 아니라 찬란한 하느님 나라를 품 고 있는 보석함입니다. 우리 모두 회개와 참회의 삶 을 통해 보석함을 열 두 개의 열쇠를 준비합시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설마 남의 집에 가서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사람이 있을까?’라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일상 안에서 이런 모습이 너무 많아 보입니다. 자기 생각만을 내세워서 상대를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이 바로 이런 모습입니다. 그러나 자기 생각만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생각을 인정해주는 것이 지극히 정상적입니다.
이는 주님을 향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주님께 얼마나 많은 원망을 하고 있습니까? 세상의 주인이신 주님의 집에서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꽃을 허락도 받지 않고 뽑아 버리는 것이 아닐까요?
오늘 복음을 통해,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베드로의 반응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베드로는 자기 생각을 이렇게 말하지요.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모세와 엘리야를 주님과 동등하게 여기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주님께서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십니다. 베드로의 비교가 부적절했기 때문입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거룩한 곳에 주님을 위한 초막을 준비하는 사람일 뿐입니다. 그래서 하늘에서 이러한 소리가 납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자기의 판단을 드러내고 싶을 때, 하늘에서 들린 이 소리를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자기 생각만을 드러내는 삶이 아닌, 주님의 말씀만 들으면서 살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보다 더 윗자리에 둘 수 있는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려고 노력할 때, 영광스럽게 변한 주님의 거룩한 변모를 우리의 삶 안에서 계속해서 체험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초등부 어린이가 교리 선생님께 질문을 던집니다.
“선생님! 하느님하고 예수님은 부자지간이 맞아요?”
교리 선생님은 “당연하지.”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러자 이 어린이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이렇게 또 묻습니다.
“선생님, 그런데 하느님은 성이 ‘하’씨이고, 예수님은 ‘예’씨에요? 부자지간이면 성이 같아야 하지 않아요?”
바로 그때 다른 아이가 이렇게 말합니다.
“이 바보야! 서양 사람들은 성이 뒤에 붙잖아! 하느님과 예수님 두 분의 성은 ‘님’씨야.”
저는 이런 생각을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는데, 아이들의 상상력은 대단한 것 같습니다.

깨어진 자 위에 영광과 권위가 내린다
-전삼용신부-
좀 길지만, 존 비비어 목사의 『순종』이란 책에 나온 그의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나는 퍼듀대학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하고 로크웰 인터내셔널사에 취직하여 다니다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고등부 목사로 한 교회를 섬기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 고등부 부서장의 아들이 울면서 나를 찾아왔습니다. 집안에서 온갖 경건치 못한 행동이 계속되고 있는데 어떻게 순결하고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면서 아이는 자초지종을 털어놓았는데, 그 말을 듣고 보니 그 애의 아버지가 나를 적대시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몇 달 후 아이들 네 명이 찾아와 내가 곧 해임될 거라는 말을 들었다면서 서운해했습니다. 그의 아들에게서 나온 정보였습니다. 그 아이는 자기 아버지한테 들었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그 아이 아버지인 부서장을 찾아갔습니다. 부서장은 사실을 시인하면서도 담임 목사 탓으로 돌렸습니다. 나를 내보내는 것이 담임 목사의 뜻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몇 주가 지났습니다. 상황은 더 악화되었습니다. 교회에 남아 있게 될지 떠나게 될지 모르는 상태라서 우리 집에는 긴장이 가시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대출받아 집을 산 상태였고, 아내는 임신 중이었습니다. 돈도 없었고 갈 데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일자리를 구하려고 이력서를 쓸 마음은 없었습니다. 우리를 그 교회로 인도하신 분이 하느님이라 믿었기에 아무 대안 없이 잠자코 있었습니다.
담임 목사는 결국 나에 대한 해임 안에 찬성했습니다. 나하고 개인적으로는 아무 얘기도 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나는 담임 목사와 그 부서장을 만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내게 자기변호를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튿날 담임 목사 사무실에 들어가니 담임 목사님 혼자 앉아 계셨습니다. 그는 나를 보더니 “하느님이 이곳에 보내신 비비어 목사님을 내가 내보낼 수는 없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마음을 바꾼 것이었습니다. 나는 안도했습니다. 하느님은 마지막 순간에 나를 지키셨습니다.
담임 목사는 이어 이렇게 물었다. "부서장은 왜 목사님을 해임하고 싶어 했을까요?“ 나는 모른다고 했습니다. 담임 목사는 그 사람과 화해하라고 당부했고, 나는 그렇게 하도록 노력하기로 했습니다. 그 만남 직후 그 부서장이 내린 결정에 관련된 문서가 내 손에 들어왔습니다. 거기에는 그 사람의 사악한 동기가 드러나 있었습니다. 나는 그것을 담임 목사에게 가지고 가려고 했습니다. 담임 목사 모르게 일어난 일을 알리고 싶었습니다.
나는 불편한 감정을 떨쳐보려 45분 동안이나 방에서 왔다 갔다 하며 기도했습니다.
“하느님, 이 사람은 부정직했습니다. 그는 이 교회 사역을 망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의 실상을 담임 목사한테 알려야 합니다! 입증할 자료도 있습니다. 단순히 감정적으로 그러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을 막지 않으면 그 사람의 타락한 행동이 교회 전체에 스며들 것입니다.”
그러나 한껏 열을 내던 내 입에서 불쑥 이런 말이 나왔습니다.
“하나님은 제가 진상을 폭로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그렇죠?”
그리고 그 순간 하느님의 평화가 내 마음에 흘러들었습니다. 나는 놀라 고개를 저었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아무 행동도 하지 않기를 원하셨습니다. 그것을 알았기에 나는 증거물을 폐기해 버렸습니다. 나중에 그 사건을 객관적으로 돌아볼 수 있게 되었을 때야 나는 비로소 그때 내가 진정으로 원한 것은 교회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변호하고 복수하는 것이었음을 알았습니다. 이기적인 동기로 그러는 것이 아니라고 나 자신을 세뇌했을 뿐이었습니다. 정보는 정확했지만, 동기는 불순했습니다.
그로부터 한 달쯤 지난 어느 날이었던가, 내가 교회 뜰에서 기도하는데 그 사람의 차가 들어왔습니다. 하느님은 그 사람에게 가서 겸손한 자세를 보이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즉시 반대했습니다. 그러자 하느님은 침묵하셨습니다. 20분 후 하느님은 다시 나를 떠미셨습니다. 즉시 그에게 겸손한 태도를 보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것이 하나님의 음성임을 알았습니다. 나는 그 사람 사무실로 갔습니다. 그런데 그를 보자 내 입에서 하느님이 나를 다루시지 않았으면 터져 나왔을 것과는 완전히 딴판인 말이 튀어나왔습니다. 나는 진심으로 그에게 용서를 구했고 그는 마음이 누그러졌습니다. 그날부터 그는 나를 공격하는 것을 멈췄습니다.
그로부터 여섯 달 후 그간 그 사람이 했던 모든 잘못이 담임 목사에게 발각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사람이 저지른 일은 내가 알던 것보다 훨씬 심했습니다. 그 사람은 바로 해임되었습니다. 심판은 왔으나 내 손을 통해 오지는 않았습니다. 그 사람은 내게 하려던 일을 자기가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이 일어났을 때 나는 기쁘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과 가족을 생각하니 오히려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런 상황에 처해 봤기 때문에 그 고통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이미 그를 놓아주었기 때문에 나는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참으로 많은 묵상을 하게 하고 저를 부끄럽게 만듭니다. 저는 이런 상황이었다면 그 명확한 근거를 윗사람에게 내밀었을 것이고, 이것을 밝히는 것이 교회를 위한 길이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존 비비어 목사에게서는 ‘깨어짐을 통해 오는 권위’가 드러납니다. 권위는 내가 세우려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나의 깨어짐을 보고 주는 것을 받는 것이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어떻게 당신의 권위를 세우셨을까요? 하느님이 하도록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감싸는 빛나는 구름과 그 속에서 들려오는 아버지의 음성에 기겁합니다. 아버지는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에 순종하지 않을 인간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에 순종하는 이들은 예수님과 함께 산에 오른 사람들뿐입니다. 그들도 결국은 깨어짐의 영성으로 교회의 권위를 가질 예수님의 후계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아버지께서 예수님께 그러한 권위를 부여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당신의 뜻을 따르기 때문에 사랑받는 아들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십자가를 지러 가시는 중이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고 당부하십니다. 하느님은 아드님이 당신 뜻에 순종하여 십자가를 지러 가시기 때문에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요한 10,17)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여 나는 목숨을 다시 얻는다.”고 하십니다. 그렇게 다시 얻는 목숨이 곧 아버지께서 주시는 영광이고 권위인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을 감싼 ‘빛나는 구름’이 그 영광이요, 그 목소리가 권위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참된 그리스도교의 권위는 아버지의 뜻을 위해 십자가를 진 사람에게서만 나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 많은 신천지 신도들은 이만희의 잘못된 권위에 그토록 순종하게 된 것일까요? 사이비 교주들의 이런 권위는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요? 성경에서 나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재림예수라고 하는 것을 성경을 통해 증명해냅니다. 그러면 성경을 진리라고 믿는 이들은 그 근거로 교주들을 마치 신처럼 떠받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삶 안에는 성경 말씀을 실현하기 위한 자신의 깨어짐이나 십자가가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세우고 남에게 십자가를 지웁니다.
군마는 자기 뜻이 꺾이기 전에는 전쟁터에 나갈 수 없습니다. 마구간에서 가장 세고, 빠르고, 재주가 많더라도 일단 깨지기 전에는 싸울 수 없습니다. 그 말은 마구간에 남아 있고 재주가 덜한 다른 말들이 전쟁터에 나갑니다. 깨지는 것이 약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깨어져야 권위에 대해 복종할 수 있게 되고 그래야 자신의 등 뒤에 탄 장수의 권위와 하나가 됩니다. 자기를 지키거나 몸을 사리려 하지 않을 때에야 주인은 비로소 그 말에 자신의 권위를 부여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하느님과 이웃 사랑을 위해 어떻게 깨어지실 것이고, 그 깨어지신 분을 위해 하느님께서 어떻게 높여주시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참된 권위의 근거는 그 사람 등 뒤에 있는 십자가여야 합니다.

-조재형신부-
교구장님의 인사이동에 따라서 미국으로 왔고, 신문홍보와 강의가 있어서 미국에서도 여러 곳을 다니고 있습니다. 건강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따뜻하게 맞이해 주시는 분들께도 감사드립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람에게 새로운 곳으로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람은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 두렵지만 길을 떠났습니다. 이것이 신앙의 길이고, 이것이 사랑의 길이고, 이것이 희망의 길입니다.
중국 우한에는 우리 교민들이 있었습니다. 정부는 3대의 전세기를 동원해서 교민들을 한국으로 데려왔습니다. 모두들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 탑승할 때, 우한에 남아 있겠다는 교민이 있었습니다. 우한 한인 교민회 총무가 있습니다. 한국의 가족들이 걱정하고 있고, 본인도 한국으로 가고 싶지만 남아 있는 교민을 돕기 위해 한국행 비행기의 탑승을 포기했다고 합니다. 다른 한분은 우한에 있던 한국인 의사라고 합니다. 부모님이 연로하셔서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에 탐승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한국으로 가면 우한에 한국인 의사가 한명도 없다는 말을 들었고, 남아 있는 교민을 돕기 위해 한국행 비행기의 탑승을 포기했다고 합니다. 그분들이 신앙인인지 알 수 없지만 그분들이 지는 십자가는 분명 신앙인의 삶입니다.
2주간의 격리 생활을 마치고 아산과 진천을 떠나는 날입니다. 아산과 진천의 주민들이 길에 나와서 따뜻하게 환송했다고 합니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가 전염성이 강하고, 위험하기에 주민들은 불안해하고,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교민들에게 머물 수 있는 자리를 내 주었고, 교민들은 주민들의 따뜻한 환송을 받으며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교민들은 아산과 진천 주민들의 따뜻한 환대를 기억할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에서 내리는 비는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을 가리지 않고 내린다고 하셨습니다. 태양은 선한 사람에게나 악한 사람에게나 가리지 않고 빛을 비춘다고 하셨습니다. 아산과 진천의 주민들이 신앙인인지 알 수 없지만 그분들의 배려와 포용은 분명 신앙인이 가야 할 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타볼산으로 가셨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은 거룩하게 변하셨고, 구약의 위대한 예언자인 모세와 엘리야가 함께 있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께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주님 제가 이곳에 초막 셋을 지어서 하나는 주님께 다른 초막은 모세와 엘리야에게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베드로 사도의 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고 싶었을 겁니다. 따뜻하고, 편하고, 아름다운 곳에 머물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신앙은 현실에 안주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나와 나의 가족들만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신앙은 꽃이 필 수 있도록 거름이 되어주는 것입니다. 물이 아래로 흘러 깊고 넓은 바다로 가듯이 신앙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곳으로 길을 떠나는 것입니다.
사순시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지난주에 우리는 깨어있는 신앙에 대해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깨어 있는 신앙은 악의 유혹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깨어있는 신앙은 회개하는 신앙입니다. 회개한 사람은 행동이 변해야 합니다. 행동이 변한 사람은 이제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위해서 살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거룩한 변모’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거룩한 변모는 외모가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한 변모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 길을 떠나는 것입니다. 그 길에 십자가가 있을지라도, 그 길에 고통과 좌절이 있을지라도, 그 길에 죽음이 있을지라도 길을 떠나는 겁니다. 아브라함은 길을 떠남으로서 하느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모세는 길을 떠남으로서 하느님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이끌 수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길을 떠남으로서 침묵 속에 계신 하느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길을 떠나심으로서 부활의 기쁨이 있음을 알려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을 폐지하시고, 복음으로 생명과 불멸을 환히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죽음을 제자들에게 미리 알려 주시고 그 거룩한 산에서 당신의 영광을 보여 주시어 구약의 율법과 예언서에 기록된 대로 수난을 통해서만 영광스럽게 부활한다는 것을 밝혀 주셨나이다. 아브람은 주님께서 이르신 대로 길을 떠났다.”

매일의 단조로움과 평범함 속에서도 주님 안에 충만하고 의미있는 하루를 살아내기 위하여...
-양승국신부-
오늘 사도단의 핵심 제자들,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 사도는 타볼산 위에서 강렬한 신앙 체험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얼굴이 거룩하게 변모되고, 모세와 엘리야도 나타나고...일종의 천국 체험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행복하고 꿈결같은 순간이 지극히 짧았다는 것입니다. 그 찰라의 순간이 너무나 황홀했고 행복했던 베드로 사도는 이제 그 상태가 영원히 지속되려니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영속적인 초막을 지어 지금 이 순간이 사라지지 않고 영원했으면 하는 마음에 다음과 같이 외친 것입니다.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마태오 복음 17장 4절)
우리 역시 가끔씩 그런 생각하지 않습니까? 좋은 사람들과 마치 천국처럼 풍광이 좋은 곳에 놀러갔을때, 지금 이 순간이 영원했으면, 여기서 한 몇년만 살았으면 하는 생각 말입니다. 그러나 야속하게도 그런 순간은 눈깜짝할 사이에 지나갑니다. 그리고 또 다시 우리 앞에 남는 것은 어제와 별 다를 바 없는 길고 지루하며 무미건조한 일상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환상 속에 머물러 있는 베드로 사도를 흔들어 깨우십니다. 어서 일어나라고, 찰라의 순간이었지만 맛보았던 은총 체험을 마음 깊은 곳에 간직하고, 저 산밑으로 빨리 내려가자고 초대하십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반드시 필요한 노력입니다. 신앙 생활 안에서 신비스럽고 황홀한 신앙 체험의 순간은 잠시뿐입니다. 단 한번의 그 뜨거운 은총 체험, 그 짜릿한 감동이 생애 내내 지속되지 않습니다.
즉시 다가오는 것이 하느님 부재 체험이요, 무미건조함이요, 지극히 권태로운 일상생활입니다. 따라서 중요한 노력이 매일의 단조로움과 평범함 속에서도 주님 안에 충만하고 의미있는 하루를 살아내기 위해, 또 다시 희망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런 느낌은 우리 뿐만 아니라 기도의 대가들, 전문가들인 성인성녀들께서도 많이 체험하셨습니다. 가장 구체적인 예가 마더 데레사 수녀님이었습니다. 만인이 칭송하고 흠모하는 위대한 인물이었던 마더 데레사 수녀님이었습니다.
영성생활의 정점을 찍은 살아있는 성녀로 존경받던 그녀였습니다. 그러나 그녀를 평생토록 따라다니던 무거운 십자가가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생애 내내 짙게 드리웠던 영적 어둠이었습니다.
마더 데레사 수녀님의 서한들을 하나하나 읽어나가면서 저는 정말이지 깜짝 놀랐습니다. 편지 속에는 셀 수도 없이 자주 자신이 겪은 하느님 부재 체험, 영혼의 어둔 밤에 대한 깊은 탄식과 하소연이 반복되고 있었습니다.
과연 이런 분이 시복시성에 합당할 수 있겠는가 하는 의문까지 들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책을 다 읽은 뒤에는 더 큰 놀라움이 저를 휘감았습니다. 계속되는 영적 메마름 속에서도 그녀는 지치지 않고 하느님을 갈구했던 것입니다.
하느님 부재 체험으로 인해 힘겨울 때면 어김없이 영적지도자들에게 눈물의 편지를 썼습니다. 결국 그녀는 그 고통스런 내적 경험들이 위대한 사명 수행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절차였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콜카타에서 봉사를 시작한 1947년 이래 1997년 돌아가실 때 까지 약 50년간에 걸쳐, 다시 말해서 전 생애에 걸쳐 하느님 부재 체험, 영혼의 어둔 밤을 지속적으로 겪은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물론 위대한 사업이 시작될 무렵(1946~1947년) 약2년간에 걸쳐 그녀의 영적 생활은 참으로 행복했습니다. 하느님과의 완전한 합일, 순수한 사랑, 강한 믿음, 열렬한 기도로 충만했습니다. 더 나아가 환시, 탈혼도 체험했습니다.
그러나 그 같은 달콤함은 잠시뿐이었습니다. 그분과 나누었던 사랑의 밀어, 그분으로부터 오는 한없는 위로는 찰나였습니다. 길고도 메마른 영적 사막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영적생활 가운데 우리가 눈여겨봐야할 강조점은 이것입니다. 하느님 부재 체험이 강하게 느껴질수록 그녀는 더욱 더 예수님께 집중했습니다. 예수님을 더 사랑했고 특히 예수님의 수난 속에서 그분과 하나 되고 싶어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가장 가난한 이웃들인 콜카타의 빈민가 사람들 안에 계시는 하느님의 현존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외쳤습니다.
“빈민가를 걸어가거나 어둡고 누추한 곳에 들어설 때 주님은 항상 그곳에 계십니다.”
계속되는 짙은 영적 어둠과 심연의 내적 고통에도 불구하고 그녀 인생의 결론은 한결같았습니다.
“이 모든 고통에도 불구하고 저는 하느님을 사랑합니다.”

이제는 우리의 몫입니다
-반영억신부-
사랑합니다. 한 주간 안녕하셨습니까? ‘코로나19’로 인해 미사참례도 못하는 안타까움이 큽니다. 확진자도 계속증가하고 불안이 커갑니다. 속히 안정되어 일상을 회복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리고 세상을 떠난 이들에게 하느님의 자비를 간구합니다. 특별히 건강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시련 안에서도 하느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는 은총이 함께 하기를 기도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필리피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미래의 희망을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내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내달리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하늘로 부르시어 주시는 상을 얻으려고, 그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다……..내가 이미 여러분에게 자주 말하였고 지금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는데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의 끝은 멸망입니다. 그들은 자기네 배를 하느님으로 자기네 수치를 영광으로 삼으며 이 세상 것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늘의 시민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구세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고대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당신께 복종시킬 수 있는 그 권능으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런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필리3,13-15.19-21).
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위로와 희망을 얻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같은 위로와 희망을 줍니다. 주님을 믿고 따르면 과거를 하느님의 자비에 맡길 수 있고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영광스러운 미래를 희망하며 오늘을 최선에 최선을 다하여 살 수 있습니다. 주님을 온전히 믿고 따르면 구원이 우리의 것이요, 영광스러운 변모가 나의 것입니다.
친구 둘이 집으로 돌아가는 산길 이었습니다
갑자기 곰이 나타났습니다.
둘이서 곰을 피하여 도망치는데 나무 한 그루가 보였습니다.
곰은 아직 친구들을 따라오지 못하였고
서로 받쳐주면 올라갈 수 있는 나무였습니다.
나무를 잘 타는 친구가 먼저 나무를 타고서 올라갔습니다.
나무를 잘 타지 못하는 친구는 겁에 질려 ‘곰은 죽은 짐승은 먹지 않은다’는 할머니의 이야기를 떠 올리며 그저 죽은 척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나무를 타고 올라간 친구가 아래를 보니 죽은 척 하는 친구에게 곰이 쿵쿵 다가와 흠흠 냄새를 맡았습니다. 얼마 후 곰이 돌아가고 나무에 올라간 친구가 내려와 말했습니다.
- 야, 곰이 너한테 뭐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더라. 뭐라고 하든?
- 응, 위급할 때 혼자 도망치는 놈하고는 친구하지 말래.
우리말에도 “친구는 어려울 때 알아본다.”는 말이 있습니다. 서로 깊은 우정을 가진 사람인지는 시련을 앞에 두면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신뢰와 사랑이 깊은 친구관계는 어려울 때 빛을 발하는 법입니다. 마스크 하나 구입하기도 어려운 오늘의 위기 안에서 서로의 관심과 배려가 그 어느 때보다도 필요함을 느낍니다.
이것은 신앙인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예기치 않은 어려움에 직면할 때가 있습니다. 이때 하느님께 대한 신앙체험이 있는 사람은 시련이 은총의 시기요, 위기를 기회로 만들게 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 대한 체험이 없고 건성으로 신앙생활을 한 사람은 시련에 그대로 쓰러지게 됩니다. 그리하여 냉담을 하기도 합니다. 좋은 체험을 갖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은총이고 복입니다.
오늘 복음은 바로 제자들에게 좋은 체험을 만들어주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산에 오르시어 당신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당신의 수난과 죽음에 앞서 희망을 주고 용기를 북돋아 주기 위한 것입니다. 어떠한 처지에서든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지키기를 바라셨습니다. 특히 당신의 십자가 죽음 앞에서도 사흗날에 다시 살아나신다는 희망을 간직하고 강건하기를 당부하신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빛나는 모습은 예수님의 고유 모습입니다. 다만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했을 뿐입니다. 요한복음 8장12절에 보면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입니다.”하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또한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5,14-16) 그리고 창세기 1장 26절.27절에는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모습대로 사람을 만들어”….. “당신의 모습을 닮은 사람을 창조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도 역시 영광스러운 모습을 지닌 것입니다.“그분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그분의 옷은 빛처럼 하얘졌다.”(마태17,2)고 하였는데 이제 해처럼 빛나야 할 사람은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의 삶이 해처럼 빛나서 주님을 드러내야 합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권고합니다. “여러분은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도록 하십시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하도록 하십시오.”(로마12,2) 쉽지 않지만 이 선택의 여정에서 하느님을 분명하게 선택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의 삶은 빛나게 되고 주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 같이 거울을 보고 얼굴을 가꾸며 몸단장을 하듯 영혼의 상태를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에 비추어 점검하고 부족함을 채워야 하겠습니다.
베드로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께,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고 거기서 머물고자 하였습니다. 초막은 하느님께서 거처 하시는 곳을 말합니다. 좋은 것을 보면 그것을 소유하고 싶고 아름다운 것을 보면 그곳에 오래도록 머물고 싶은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너무 쉽게 얻으려고 하는 것이 문제 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초막을 지으려면 자기의 취미나 하고 싶은 것, 돈 되는 것, 세상의 것을 버리는 희생이 요구됩니다. 쉽게 얻은 것은 쉽게 잃어버리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허황된 초막은 헐어버려야 합니다. 수고와 땀, 사랑과 정성이 깃든 초막이 필요합니다.
어떤 이들은 큰 믿음의 소유자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또 다른 이들은 기도를 잘하는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기도를 하지 않습니다. 기도는 기도하면서 배우게 되고 더 깊은 기도를 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노력하지 않고 쉽게 얻으려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들은바 대로 행해야 큰 믿음을 간직할 수 있고 믿음의 열매를 맛볼 수 있게 되며 확신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더 큰 믿음으로 나가게 됩니다. 그러나 믿음에 따르는 행동, 실천이 부족합니다.
사순절을 맞아 판공문제지를 나눠 드렸는데 풀어보신 분도 있고, 그렇지 않으신 분도 있습니다. 매일 성경을 읽고 성체조배를 하며 아침저녁기도를 빠뜨리지 않고 하시는 분이 계신가 하면, 일주일이 되도록 성경 한 줄도 안 읽고 기도를 소홀히 하신 분도 계십니다. 누가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겠습니까? 알면서도 행하지 못하니 열매가 없습니다.
복음을 보면 베드로가 주님과 함께 머물기를 희망하며 초막 셋을 지어 드리겠다는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빛나는 구름이 그들을 덮고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태17,5)하는 소리가 났습니다. “그의 말을 들어라.”는 말씀을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이제는 황홀경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믿고, 말씀대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초막 셋을 지어 천국 같은 그곳에서 천년만년 살고 싶어 했습니다. 안주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데리고 산에서 내려옵니다. 현실로 돌아와서 거기서 희망을 갖고 살아가기를 바라셨습니다. 이는 미사 안에서 기도하고 영성체하며 기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그 정신을 살아가라는 명령이기도 합니다. 행동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 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마태17,9) 명령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그 부활의 영광의 신비를 깨닫기 전까지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실 입이 가벼운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의 말에는 진실성이 없습니다. 요즘 세상에는 여러 체험을 자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기도의 체험, 이상한 현상이나 꿈을 과장하고 떠벌립니다. 거기에는 겸손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혹 그가 진정으로 하느님을 체험했다면 말이 아니라 삶이 변화되었을 것입니다. 이러저러한 현상이나 사건 안에서 진중하게 하느님의 뜻을 헤아릴 줄 아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제발 말하지 마라! 먼저 말씀대로 행하라.’고 당부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을 따르는 삶이 더 큰 언어입니다. 주님의 얼굴이 해처럼 빛났듯이 이제 우리의 모습이 빛나기를 기도합니다.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인간으로서 주님의 영광을 빛나게 하는 한 주간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미사참례를 못하는 요즈음 성경을 더 자주 읽으며 그 안에서 위로와 희망을 얻고 문제의 해답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주님, 제가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저의 희망은 오직 당신께 있습니다”(시편39,8).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일어나라. 그리고 두려워하지 마라.”(마태 17,7)
-이영근신부-
오늘은 ‘사순 제2주일’입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우리가 사순시기에 가고 있는 길이 어떤 길이며, 어디로 가는 길인지를 밝혀줍니다.
<제1독서>에서 “아브람은 주님께서 이르신 대로 길을 떠났습니다.”(창세 12,4).
그 길은 비록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는 길이지만, 당신께서 미리 준비해 놓은 ‘주님께서 보여줄 땅’으로 가는 길입니다.
그러면, ‘너는 복이 될 것이고, 세상의 모든 종족들이 너를 통하여 복을 받을 것’(창세 12,3)이라고 하십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 길에 우리의 동참을 촉구합니다.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여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십시오.”(2티모 1,8)
그런데, 사실 이 길은 예수님께서 이미 이루신 길입니다.
“이 은총은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미 우리에게 주신 것인데, 이제 우리 구원자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나타나시어 환히 드러났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을 폐지하시고, 복음으로 생명과 불멸을 환히 보여주셨습니다.”(2티모 9-10)
<복음>은 예수님에게서 환히 드러난 영광된 변모를 보여주십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당신 본래의 신적 초월성을 드러내 보이십니다.
이는 지금 우리가 가는 이 사순의 길이 어디로 향하여 가는 길인지를 보여줍니다.
사실, 오늘 복음 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수난과 부활에 대한 예고(마태 16,21-28)를 하신 다음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다가올 수난으로 닥쳐올 절망과 위기를 견디어 낼 수 있도록 예수님의 영광된 모습을 미리 보여주시면서 준비시키십니다.
그러니 이 수난의 길은 동시에 생명과 부활의 빛나는 길임을 밝혀줍니다.
내적 기쁨으로 차오르는 은총의 길이 됩니다. 그런데 그들을 덮은 그름 속에서 소리가 났습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이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태 17,5)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또한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확인시켜주십니다.
그러면서 그 변모의 길을 가는 방법을 가르쳐줍니다.
곧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라고 하십니다.
그러니 이 일은 예수님의 변모만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곧 예수님의 변모와 함께 우리의 변모에 대한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말씀 아래 머물러 있는가?
그리고 들은 말씀으로 인하여 변화되고 있는가?
그렇습니다. 지금 내가 있어야 할 곳은 말씀 아래에 머무는 일입니다.
그리고 들려오는 말씀이 내 안에서 성취되도록 말씀께 승복하는 일입니다
. 변화의 힘이신 말씀께서 나를 맘껏 쪼물딱거릴 수 있도록 말씀께 자신을 건네 드리는 일입니다.
곧 나 자신을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초막집으로 내어드리는 일입니다.
말씀이 이루어져야 할 공간이요 장소로 내어드리는 일입니다.
그러면, 사도 바오로가 말한 것처럼, ‘이 건물(초막)은 주님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나고,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함께 지어지게 됩니다.’(에페 21-22 참조). 그러면, 우리는 변모할 것입니다. “더욱더 영광스럽게 그분의 모습으로 바뀌어 갈 것입니다.”(2코린 3,18 참조)
오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진정 변모되기를 바라는가? 그렇다면 내 아들의 말을 들어라!
예수님께서는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린 채 몹시 두려워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라. 그리고 두려워하지 마라.”(마태 17,7)
마치 요즈음 ‘코로나19’로 불안과 두려움으로 어려워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이런 시련 속에서도 그냥 두지 않으실 것입니다.
당신께서 소중히 여기시는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한갓 박테리아도 아닌 생물과 무생물의 중간인 미물 중의 미물인 바이러스에게 우리가 정복되도록 버려두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주님의 사랑을 믿어야 할 일입니다.
동시에 코로나19 바이러스와 함께 우리 사회에 침범하고 있는 또 다른 바이러스인 타인에 대한 과도한 경계심이나 혐오 바이러스도 경계해야 할 일입니다.
지금, 사순시기를 지내고 있는 우리는 예수님의 구원을 위한 수난에 동참하고 새로운 변화의 길을 걸어야 할 일입니다.
세상의 고통에 대해 무디어지고 무관심해진 마음을 뉘우치고, 각박해져 가는 세상에 신뢰와 사랑, 배려와 존중을 심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태 17,5)
주님!
말씀의 권능으로 저를 덮으소서.
구름 속에서 울려오는 당신 음성으로 저를 덮으소서.
제 자신이 말씀이 이루어지는 공간이요 장소가 되게 하소서.
저의 비천한 몸을 영광스런 모습으로 변화시키소서. 아멘.

거룩한 변모
-조욱현신부-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많이 힘드시지요? 그러나 이 어려운 시기를 슬기롭게 이겨나가도록 많이 노력하시고 계시지요? 기도와 선행으로 지금 겪고 있는 이 모든 고통을 주님의 십자가를 묵상하며 우리의 십자가를 잘 지고 가는 사순절이 되도록 노력합시다. 오늘은 사순 제2주일의 강론을 여러분에게 드립니다.
복음: 마태 17,1-9: 예수님의 얼굴은 해와 같이 빛났다.
오늘은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주일이다. 예수님의 얼굴이 해와 같이 빛나고 그의 옷이 빛과 같이 눈부시다든지,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고, 구름이 그들을 덮고,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5절) 라는 소리를 듣고, 제자들이 두려워서 땅에 엎드린다든가, 예수께서 그들을 어루만지시며 두려워 말고 일어나라고 하시는 장면이다.
이 영광스러운 모습은 ‘하느님의 나라’가 예수님을 통하여 이루어지고 있으며, 여기서 모세와 엘리야까지도 그 나라의 구성원이 되고 있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것을 포용하시며 완성하시는 분이시다. 그리고 하늘로부터 나오는 ‘음성’은 예수님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 모든 영광을 보여주시고도 부활하시기 전까지는 함구하기를 명하신다(9절 참조). 왜 그랬을까? 그것은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은 예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부활의 신비를 미리 보여주시는 것으로서, 부활체험을 통해서만이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즉 영광스러운 예수님의 모습은 십자가의 길을 가야 하는 수난을 통해, 고통받는 종으로서의 사명을 완수한 다음에 얻게 되는 영광임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제자들은 오직 파스카의 체험을 통해서만이 이 모든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아마 당시에는 제자들도 알아듣기 어려웠을 것이고 지금의 우리에게도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아들’(이사 42,1; 마태 3,17 참조)이라고 하시면서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5절)고 하신다.
여기서 ‘듣는다.’는 말은 신앙의 빛으로 그리스도를 겸손과 영광 그리고 죽기까지 당한 수난과 부활의 신비를 함께 지니고 계시는 분으로 받아들이면서 그분을 따르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듣는다.’는 말은 ‘다시 체험하다.’, ‘다시 살다.’라는 말로 해석될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이것으로 사순절의 의미가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1독서에서는 아브라함의 소명을 통해 같은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다. 아브라함은 하늘로부터 오는 말씀을 ‘들을 줄’ 알았다. 그렇기에 하느님의 약속을 믿고 미지의 세계를 향해 떠날 수 있었다. 우리도 아브라함의 모범을 따라 “우리는 그분의 언약에 따라, 의로움이 깃든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2베드 3,13). 신앙만이 미래에 대한 열쇠를 가지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변모에서 찬란히 빛났던 그 빛이 이제는 모든 이에게 ‘불멸의 생명’을 가져다주는 그분의 ‘복음’을 통하여 빛나고 있다. 이제 이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의 신비가, 그리스도인들이 항상 살아있는 하느님의 말씀의 빛으로 끊임없이 ‘변화’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내가 변화하는 것은 주님의 말씀 즉 복음을 듣고 실천함으로써 이루어 가야 한다. 나 자신이 변화하려고 하는 각고의 노력이 없이는 부활의 영광을 기대할 수도 없고, 체험할 수도 없다.
우리 모두 그분의 말씀을 잘 들으며, 살아가며 주님의 부활 영광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열심히 노력합시다. 저희 신부들과 수녀님도 우리 교우들을 위해 미사를 봉헌하고, 묵주의 기도를 통해, 성체조배를 통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 시련의 시간이 하루빨리 지나가게 해 주시도록 우리 모두 기도합시다. 우리 신자들 모든 분의 주님 안에서 건강한 삶을 기도하며 축복을 드립니다.
그분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그분의 옷은
빛처럼 하얘졌다.(마태 17, 2)
-한상우신부-
봄은 아프게
계절의 문을
두드리며
우리에게 옵니다.
건강한 변화와
건전한 변모가
간절히 필요한
우리시대의
아픈 민낯입니다.
종교는 모두를
위하고 모두를
살게하는 그마음에서
더욱 빛을 발합니다.
속이고 감추고
얼버무리는
거기엔 빛나는
변화란 있을 수
없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이 캄캄한
사순시기에
우리에게서
하느님은 어떤
분이신지를
아프게 묻게됩니다.
하느님조차
돈벌이의
이용수단이
되어버린 지독히
아픈 우리의
현실입니다.
예수님의 변모는
사람의 길을
생명의 길을 다시
보여주십니다.
서로를 위하고
서로를 사랑하는
그마음이 빛나는
변모입니다.
조직적
이기주의에서
벗어나 함께 살아가는
삶의 의미를 다시
찾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마음에
모두를 위하는
사랑이
빠져버리는 그것이
재앙이며 사이비며
전염병입니다.
이 나라를
위하는 것이
정녕 무엇인지를
함께 찾읍시다.
그것은 눈을 들어
우리의 비참함을
먼저 보는 것입니다.
이토록 망가진
우리 내면에서
상식과 도리
개방과 결단을
다시 배우는
은총의 사순시기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종교의 역할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잘못한 것은
잘못 했다고
용서를 청하는
그것이 종교의
정직한 역할임을
믿습니다.
참된 것은 빛나고
그릇된 것은
숨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는 모두를
위한 개방이며
모두를 위한
희망임을 믿습니다.
지금 우리자신은
어디를 향하고
있습니까?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독서들 안에는 저마다의 명암이 공존합니다.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는데 그분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마태 17,1)
예수님께서 세 명의 제자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시어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곧 맞이하실 수난 전에 당신 신성의 영광을 드러내 보여주신 겁니다. 그동안 예수님 곁 가까이에서 먹고 자고 배우며 살아온 제자들에게 지금의 빛나는 모습은 두려움을 불러일으킵니다. 게다가 자기들을 덮은 구름이며 보이지 않는 곳에서 들려온 소리까지...
"제자들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린 채 몹시 두려워하였다"(마태 17,6).
신의 현현 앞에 선 인간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자기 체험과 이해 범주를 벗어난 사건 앞에서 그것이 아무리 빛나는 영광의 모습이어도 두렵기는 매한가지일 겁니다. 감히 쳐다보기도 어려울만큼 눈이 부실 지경의 빛 앞에서 어둡고 더러운 자기의 현실이 더 선명히 떠오를 테니까요.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날 때까지"(마태 17,9)
모세와 엘리야의 등장은 제자들을 고무시키기도 하고 근심이 되기도 하는 양가적 요소가 될 겁니다. 이스라엘의 율법과 예언서를 상징하는 위대한 성현인 동시에 누구보다 처절하게 혹독히 그 대가를 치르며 하느님을 증거한 대표적 존재들이니까요.
거기에 더해 스승이 죽는 이야기까지 또 나옵니다. 제자들이 이해했건 이해하지 못 했건 이미 예수님은 수난 예고를 한 번 하신 상태였지요(마태 16,21 참조). 방금 체험한 신비경에 들뜨다 말고 찬물을 끼얹어진 듯합니다. 잠시지만 상승과 하강의 편차가 마치 롤러코스트 같지요.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 어느 모습도 감추지 않으십니다.
제1독서는 아브람의 부르심 대목입니다.
"세상의 모든 종족들이 너를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창세 12,3).
이 얼마나 큰 복입니까! 누구라도 그 자신이 복의 근원이 된다면 놀랍고도 영광스러울 겁니다. 아브람은 원래 목적지였던 가나안 땅에 이르지 못한 채, 본고장 칼데아 우르도 아닌, 하란에 몸붙여 사는 이방인에 불과했고 더군다나 자손도 없는 처지였습니다(창세 11,27-32 참조). 언감생심 꿈도 꾸어보지 못했을 영예에는, 그러나 조건이 따릅니다.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창세 12,1).
아브람은 무엇보다 먼저 익숙하고 안정된 울타리를 박차고 나와야 합니다. 안정은 지금 누리는 현재이지만, 복은 불확실한 미래입니다. 당시 상황으로는 친족의 보호를 떠나는 것은 위험에 자신을 고스란히 내맡기는 형국입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티모테오에게 복음의 양면성을 솔직히 드러냅니다.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십시오"(2티모 1,8).
직설화법입니다. 요즘 말로 돌직구라 하지요. 감언이설로 상대를 안심시키거나 착각하게 만들지 않고 있는 그대로 표현합니다. 복음을 믿고 수호하는 길은 고난의 길임을 에둘러 피하지 않고 던집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복음으로 생명과 불멸을 환히 보여 주셨습니다"(2티모 1,10).
하지만 사도 바오로는 거기에 그치지 않고 곧 새 희망을 제시합니다. 그것도 "환히"!!! 드러냅니다. 이 "환히"라는 단어는 몇 절 안되는 제2독서 안에 두 차례나 반복됩니다. 마치 복음의 "빛나다"라는 반복된 표현을 반사하듯 말이지요.
빛과 어둠은 한 세트입니다. 그래서 하나만 선택할 수 없지요. 그것이 인생이건 신앙이건 다른 어떤 영역이건 간에 이 둘은 동전의 양면처럼 따라다닙니다. 상승과 하강, 영광과 수치, 생명과 죽음, 만남과 이별, 기쁨과 슬픔, 성취와 상실... 약하고 죄인인 우리는 그 한가운데를 아슬아슬 균형 잡으며 걷고 있는 겁니다.
사랑하는 벗님!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보여 주신 빛나는 영광의 얼굴 안에서 십자가를 볼 수 있기를 빕니다. 또한 일그러진 고통의 신음 속에서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속삭임을 들을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왜냐하면 빛과 어둠은 취사선택으로 하나만 골라낼 수 있는 개별 포장 세트가 아니라 한 덩어리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좀더 인내하며 주님을 모실 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주일 되시길 축원합니다.

타볼산에서 해골산으로
-김찬선신부-
http://www.ofmkorea.org/ofmhomily/324712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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