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0년 3월 5일 사순 제1주간 목요일

Margaret K 2020. 3. 4. 20:50

2020년 3월 5일 사순 제1주간 목요일


너희는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 주어라
(마태오 7,7-12)


 Do to others whatever 
you would have them do to you.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위로가 됩니다. 또한 “누구든지” 그렇게 청할 수 있다는 것은 더 큰 위로가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예로 들어 말씀하십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좋은 것을 주듯이 하느님께서도 청하는 이들에게 더 좋은 것을 주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좋은 것을 청하고 유익한 것을 청하라는 것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아무리 청하더라도 그것이 나쁘고 악한 것이라면 들어주지 않으실 것입니다. 우리에게 좋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유다교에서 잘 알려진 기본적인 가르침을 전하십니다. “네가 원하지 않는 것을 다른 이들에게 행하지 마라.” 이것은 당시 유명한 라삐의 가르침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해석을 우리에게 알려 주십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오늘 복음은 청하는 이의 자세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좋은 것을 더 많이 주실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누구든지” 청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 청하는 것과 함께 우리에게 필요한 자세는 우리가 “바라는 그대로” 이웃에게 행하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 말씀은 복음이 전하는 ‘가장 큰 계명’을 생각하게 합니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마르 12,31).
(허규 베네딕토 신부)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나의 배우자, 자식 그리고 부모님 또 친한 친구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무엇일까요? 저는 그들을 향한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황금률, ‘남이 너희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주어라.’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느 자매님의 말씀을 떠올리면서 최고의 선물이 그들을 향한 사랑의 실천이 아닐 수도 있다는 묵상을 할 수 있었습니다.

언젠가 성당에서 열심히 봉사활동을 하시는 자매님을 만나서 대화를 하게 되었습니다. 딸이 자신을 향해 화를 내며 이렇게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엄마는 다 가식적이야!!”

예수님을 믿고 따르면서 자녀를 위한 사랑, 남편을 향한 사랑, 또 이웃을 향한 사랑 실천에 남들보다 적극적으로 임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가식’이라는 딸의 비판을 받게 된 것입니다. 딸의 이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으면서, 자신의 모든 행동이 가식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을 하게 되었답니다. 즉, 마음으로는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았을 때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마음으로 사랑하지 않으면 얼굴에 드러납니다. 기쁘지 않으니 사랑을 실천하면서도 가식적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먼저 행복하게 또 기쁘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답니다.

아무리 나를 위해 신경을 써주는 것 같아도 얼굴에 싫은 표정이 드러난다면 상대방은 불쾌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너무 기쁘게 행동하면서 상대를 위해 신경 써준다면 나와 마찬가지로 기쁨을 얻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나를 행복하고 기쁘게 만다는 것이야말로 내가 만나는 모든 이에게 가장 최고의 선물을 주는 방법이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하느님께 먼저 청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모습은 열정적으로 하느님께 다가가는 것을 뜻합니다. 이렇게 열정적으로 다가가는 이에게 선하신 하느님께서는 원하는 것뿐만 아니라 더 좋은 선물을 주실 것이라고 하시지요. 바로 자신의 기쁨과 행복을 얻을 수 있게 됩니다. 그러고 나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주어라.’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자신이 먼저임을 주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야 마음으로도 기쁘게 상대를 향해 최고의 선물인 사랑을 전해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점을 떠올리면서 지금 나의 기쁨과 행복을 위해서 해야 할 것을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살게끔 하는 것이다(공자, 논어 중에서)



'나'에게서 벗어나기.

어느 마을에 한 형제님이 사랑하는 아들을 불의의 사고로 잃고 말았습니다. 이 형제님은 아들을 잃은 슬픔에 일을 할 수 없었고 식사조차 할 수가 없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이 형제님마저 무슨 일을 겪게 되지 않을까 싶어서 그 마을에서 가장 지혜롭다는 사람을 찾아가 도움을 청했습니다.

이 사람은 자신의 지혜를 총동원해서 형제님을 위로했습니다. 죽음은 하느님의 뜻이고 영혼은 영원하므로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이야기했지요. 형제님은 이 지혜로운 사람의 말에 큰 위로를 받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몇 년 뒤, 이 지혜로운 사람이 큰 슬픔을 겪고 있다는 소문이 들려왔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자신이 키우던 개가 죽어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앞서 아들을 잃었던 형제님이 지혜롭다는 이 사람을 찾아가 말합니다.

“제게 죽음은 하느님의 뜻이고 영혼은 영원하므로 죽음이 끝이 아니라면서요? 그런데 당신은 왜 이렇게 슬픔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까?”

그러자 지혜로운 사람은 말합니다.

“그 죽음과 이 죽음은 엄연히 다릅니다. 죽은 아들은 당신 아들이지만, 이 개는 제 개이거든요.”

자신의 슬픔이 세상에서 가장 큰 고통일 수밖에 없습니다. 가장 큰 어려움과 고통 속에 있는 것은 늘 ‘나’입니다. 이 ‘나’에서 벗어날 때 비로소 고통에서도 자유로움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요?                   

이웃에게 주려는 마음이 하느님께 청할 수 있는 힘이 된다.

-전삼용신부-


 결혼 30주년을 맞이한 60세 동갑 부부가 있었습니다. 결혼기념일에 천사가 나타나서 소원을 한가지씩 들어주겠다고 했습니다. 아내가 먼저 말했습니다.

“그동안 워낙 가난하게 살다 보니 여행을 못 했는데 세계 일주를 한번 해 보았으면 좋겠네요.”

그러자 천사가 항공권과 여행경비를 건네주었습니다.

      소원을 말하자마자 이루어지는 것을 지켜본 남편이 아내의 눈치를 슬슬 살피더니 멋쩍게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저보다 서른 살 젊은 여자와 살아봤으면 좋겠네요.”

그 말에 천사는 당황하며 “그동안 두 분이 열심히 살아서 드리는 혜택인데, 소원을 안 들어드릴 수도 없고…. 아무튼, 그렇게 원하신다면 이루어 드려야겠지만…. 그러나 참 이상한 소원도 다 있네요.”라면서 남편을 향해 날개를 폈습니다.

      그런데 젊고 예쁜 여자가 나타난 것이 아니라 남편이 폭삭 늙어 90세의 노인이 되어버렸습니다. 소원이 성취된 것입니다.

무언가를 청할 때, 자기 자신을 위해 청할 수도 있고 이웃에게 도움을 주려고 청할 수도 있습니다. 아내는 함께 여행 갈 것을 청했는데 남편은 자기 자신만을 위해 청했습니다. 어떤 때는 그렇게 청하는 것이 저주가 되어 돌아올 수도 있습니다.

      고 임언기 신부가 간암 말기로 임종이 임박한 오랜 냉담 신자에게 종부성사를 주러 갔을 때, 그 환자는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나 죄 없어!”라고 소리 질렀습니다. 그냥 죄 없는 것 같아도 용서만 청하면 사제가 알아서 다 해 주는데도 끝까지 청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그 사람이 평소에 남에게 무언가 베푸는 사람이 아니었음을 감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자비로운 분으로 여겨야 무언가를 청할 수 있습니다. 그러려면 내가 먼저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 때문에 오늘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라는 복음 바로 위에는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마태 7,1)라는 말씀이 나오는 것입니다.

      남을 심판하는 사람은 이미 남에게 아무 것도 주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받을 자세가 안 되어있습니다. 그러니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마태 7,6)라는 말로 끝을 맺으시는 것입니다. 거룩한 것은 말씀과 성체입니다. 사람을 판단하며 미운 마음을 지닌 사람에게는 성체와 같은 거룩한 것을 주어도 그 가치를 모르기 때문에 주지 않는 편이 낫다는 뜻입니다.

      가리옷 유다는 예수님을 배신하고 용서를 청하지 않았습니다. 그동안 배운 것이 있으니 그렇게 되면 마귀들이 사는 곳으로 가서 영원히 살아야 함을 알았을 것입니다. 왜 청하면 바로 용서받고 구원받는데도 아무것도 청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을까요? 그 이유는 자신이 누군가에게 아무것도 줄 수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양심’이란 것은 영원히 죽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지옥에서까지 양심이 그 가책으로 사람을 괴롭힌다고 합니다. 양심은 “너도 안 주면서, 뭘 청하냐?”라고 말합니다. 청하면 다 받을 수 있는데 줄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렸으니 양심상 청하지 못하고 그러다 지옥까지 가면서도 구원을 바랄 수 없게 됩니다.

      이에 오늘 복음에서 “청하여라!”라고 말씀하시다가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라는 황금률로 끝맺고 있는 것입니다. 청하라고 하시며 남에게 해 주라고 결론을 내리시는 것입니다. 무언가를 청하기 위해서는 나도 내어주려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평소 이웃에게 나의 것을 주려는 마음을 성장시키지 않으면 지옥문 앞에서 구원을 청할 수조차도 없는 사람이 됩니다.


-조재형신부-


음식점에 가면 직원이 메뉴판을 가져옵니다. 메뉴를 보면서 가격도 보고, 음식의 종류도 보고, 함께 한 사람과 메뉴를 정합니다. 어떤 사람은 꼼꼼하게 메뉴를 보고 자신이 원하는 음식을 정합니다. 어떤 사람은 가격을 먼저 생각하고 음식을 정합니다. 어떤 사람은 남들이 정하는 음식을 따라서 정합니다. 저는 꼼꼼하게 메뉴를 보고 결정하는 성격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이 정한 걸 따라서 정하곤 합니다. 생각보다 맛있는 경우도 있고, 생각보다 입맛에 맞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가톨릭 평화신문에서 일하면서 평화신문이 영적인 메뉴판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떤 분들은 꼼꼼하게 읽으면서 신앙에 도움을 받습니다. 어떤 분들은 관심 있는 부분만 읽으면서 신앙에 도움을 받습니다. 어떤 분들은 바쁘기 때문에 평화신문이라는 영적인 메뉴는 보지만 제대로 읽지 않습니다. 좀 더 좋은 메뉴를 준비해서 많은 분들에게 영적인 기쁨을 주고 싶습니다. 매주 수요일이면 따끈따끈한 신문이 나옵니다. 2시간 정도면 신문의 모든 내용을 읽어 볼 수 있습니다. 사목체험, 강론, 독자투고, 사랑이 피어나는 곳에, 교황님 소식, 교회 소식, 영성 등 다양한 메뉴가 있습니다.

 

요즘 제가 관심을 가지고 읽는 메뉴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이창훈 소장의 사도행전 이야기입니다. 4월에 사도행전의 무대인 그리스, 터키성지순례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뉴욕에서 가브리엘 행전을 쓰고 싶어서입니다. 사도들이 복음을 선포한 곳은 결코 편하지 않았습니다. 강도를 만나기도 했고, 이교도에게 끌려가기도 했고, 믿는 사람에게 배신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곳곳에서 천사들을 만났고, 협조자를 만났습니다. 이창훈 소장님의 사도행전 이야기를 읽으면서 2000년 전의 옛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살아 있는 이야기처럼 느껴졌습니다.

 

다른 하나는 하느님의 종 이벽 세례자 요한과 동료 132약전입니다. 순교자들의 이야기가 먼 옛날의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5대째 천주교를 믿는 집안에서 태어난 저의 집안의 이야기였습니다. 순교자들 한분 한분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무뎌진 저의 신앙을 돌아 볼 수 있었습니다. 형제가 순교하기도 했고, 아버지와 아들이 순교하기도 했고, 부부가 순교하기도 했습니다. 대부분의 순교자들은 스스로 체포되기도 했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순교를 기쁘게 받아들였습니다. 사도행전 이야기와 순교자들의 약전은 제게 용기를 주었고, 제게 희망을 주었습니다.

 

험한 파도를 헤쳐 나가는 배를 생각합니다. 노를 젓는 사람들이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자신이 하고 싶을 때 노를 젓는다면 배는 험한 파도를 뚫고 나갈 수 없을 것입니다. 배는 파도를 견디지 못하고 난파할지도 모릅니다. 파도가 거셀수록 함께 힘을 모아 같은 방향으로 호흡을 맞추어서 노를 저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여러분이 바라는 대로 이웃에게 해 주십시오. 우리가 두드리고, 찾고, 열어야 하는 것은 바로 생명에 대한 사랑입니다. 모든 이에게 모든 이가 되어주는 헌신과 봉사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라는 믿음입니다.

 

기도는 아침을 여는 열쇠고, 하루를 닫는 자물쇠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고, 기도로 하루를 마치는 사람에게는 하느님의 크신 자비가 늘 함께 할 것입니다. ‘주님, 제가 부르짖던 날, 주님께서는 제게 응답하셨나이다.’


가장 강력한 힘

   -반영억신부- 

 

기도는 사람들이 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힘입니다. 전지전능하신 분도 양보하시는 힘이며,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특권입니다. 전능하신 아버지께서 그 자녀의 필요와 염려에 관심을 나타내실 수 있는 길이고, 주 하느님나라의 창고는 기도로 열리며 믿음은 그 열쇠를 돌리는 것입니다”(작자미상).

    

 그런데 기도의 응답은 때때로 즉각 이루어 주십니다. 가르멜 산위에서 기도한 엘리야의 기도를 듣고 곧 불을 내려 주셨습니다. 천천히 적당한 때에 이루어주시기도 합니다. 다윗왕은 성전을 건축하려 하였지만 아들 솔로몬으로 하여금 성전을 건축케 하였습니다. 어느 때는 이루어주지 않음으로 응답이 되게 하십니다. 기도의 응답은 기도를 하는 사람에게 유익이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들어주어서 손해가 될 것은 들어주지 않음으로 해서 유익하게 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큰 사랑으로 우리의 필요를 반드시 채워주십니다. 그런데 그분께서 원하시는 때에 원하시는 최선의 방법으로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도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마태7,8). 라고 하셨습니다. 각자의 바람이 많이 있겠지만 세속적인 만족과 위로를 찾고 구하기보다 먼저 하느님을 찾고 갈망하여 영적인 성장을 이룰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했으면 좋겠습니다. 청해도 얻지 못하는 것은 욕정을 채우려는데 쓰려고 청하기 때문(야고4,3)이라고 하였으니 헛된 수고의 기도가 되지 않기를 바라며 하느님께 마음의 문을 열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울지 않는 아이는 젖도 못 얻어먹는다.”고 했습니다. 먼저 청해야 합니다. 그러나 누울 자리보고 발 뻗는다.”는 말도 있습니다. 들어주실 것을 청하십시오. 에둘러서 하거나 구구절절 설명하려들지 말고 그냥 청하십시오.


사실 문이라는 것은 열릴 때 열리고, 닫을 때는 닫을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에는 열고, 악에는 닫아야 합니다. 문을 두드리시는 주님께는 물론 아내에게, 남편에게 ,자녀에게, 부모에게, 형제에게, 이웃에게 문을 열어야 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부와 명예, 명성의 유혹에는 문을 열어서는 안 됩니다. 사랑의 마음은 열고 욕심의 입은 닫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든지 주실 수 있는 분이고 따라서 우리는 받을 수 있으니 행복합니다. 받지 못한다고 생각할 때도 있습니다만 구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오히려 더 고마운 응답일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청하고, 찾고 두드리되 내 뜻이 아니라 주시는 분의 뜻대로 이루어 주시길 바라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는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마태7,11).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좋은 것을 주시는 아버지 하느님께 좋은 의향을 가지고 마음껏 청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무언가를 반복해서 청하는 것은 기도가 아닙니다. 우리 자신을 그분 손에, 그분의 처분에 맡기고, 마음 깊은 곳에서 그분의 음성을 조용히 듣는 것입니다.” “기도는 심장과 심장의 만남입니다”(마더 데레사). 우리의 바람과 기도가 헛되지 않기를 빕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가? 주는 것인가, 받는 것인가? 내가 무엇인가를 받을 때, 어떻게 감사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는가? 주님과 더불어 베풀 수 있음에 감사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마태 7,11)

-이영근신부-


이틀 전에, 우리는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기도를 통해, 하늘에 계신 아빠, 아버지께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를 가르쳐주셨습니다.

오늘은 하늘의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깨우쳐주십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마태 7,11)


이는 우리 아버지께서 좋은 것을 많이 주시는 분이심을 밝혀주십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먼저 우리가 우리 아버지께해야 할 바를 이렇게 알려주십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마태 7,7)


주님께서는 먼저, 기도로 청하라고 하십니다. 입으로 청하는 것입니다.

 청하라는 것은 자신이 스스로 해결사가 되지 말고, 구원자이신 주님께 희망을 두라는 말씀입니다. 주님께 희망하고 열망하라는 말씀입니다.

나아가서, 희망하고 열망한 바를 신뢰하고 의탁하라는 말씀입니다.

 겸손하게 자비를 구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수도원에 입회하게 되면 제일 먼저 배우는 것이 바로 청하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구원자가 아니라는 것을 배우기 위해서입니다.

결국, 귀먹은 이가 들을 수 있기를 청하듯, 눈먼 이가 볼 수 있기를 청하듯, 자신의 처지를 알고 주님을 바라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먼저우리가 청하기를 바라십니다.

 당신께서는 우리의 필요를 청하기도 전에 다 아시지만, 우리가 그 필요를 깨달아 알고 절실하기를 바라시며, 또한 그것을 당신께 바라고 당신께 의탁하기를 바라십니다.

다음에는, 몸으로 찾아라.’고 하십니다. 찾는다.’는 것은 수고로움을 바치는 것이요, 몸을 바쳐 찾는다.’는 것은 믿음으로 찾는 것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믿지 않는 바를 찾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옛 부터 수도승의 다른 이름이 바로 하느님만을 찾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곧 온 몸을 바쳐 수고로움을 다 하여 믿고, 믿는 분을 찾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 주님께서는 먼저 우리를 찾아오신 분이십니다.

아담아 , 너 어디 있느냐?” 하고 말입니다.

 이사야서의 말씀대로, 내가 나를 찾아 부르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나 여기 있노라하고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다음에는, 가슴으로 두드려라고 하십니다.

 두드린다.”는 것은 가슴에 타오르는 한결같은 사랑을 말하는 것으로, 마음의 문을 열고 두드리라는 말씀입니다.

당신께서 마음을 열고 기다리고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사실, 우리 주님께서는 먼저 우리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십니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이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묵시 3,20) 하십니다.

이토록, 주님께서는 우리가 입()과 몸(행동)과 가슴(마음)으로 희망과 믿음과 사랑으로 아버지를 향하여 있고 아버지를 매달려 있기를 바라십니다.

곧 말로 희망하는 바를 청하고, 행동으로 믿는 바를 찾으며, 마음으로 사랑하는 바를 두드리라 하십니다. 우리 아버지가 아니시면, 그 누구도 우리를 구할 자도, 열 자도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아버지께서 이처럼, ‘좋은 것을 많이 주시는 분이시기에, 우리에게도 아버지께서 하신 것처럼 행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마태 7,12)


하오니, 주님!

희망할 줄을 알게 하소서! 그 희망을 당신께 두게 하소서!

제 희망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희망하는 바를 희망하게 하소서!

제 희망이 아니라, 아버지의 희망이 이루어지도록 제가 응답하게 하소서!

말로만 청하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진리이신 당신을 찾게 하소서!

한결같은 사랑으로 두드리시는 당신의 음성을 듣게 하소서!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하게 하소서!


-오늘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

청하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마태 7,7)


주님!

희망할 줄을 알게 하소서! 그 희망을 당신께 두게 하소서!

제 희망이 아니라 당신이 희망하는 바를 청하게 하시고,

당신의 희망이 이루어지도록 제가 응답하게 하소서!

말로만 청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이신 당신을 몸으로 찾게 하시고,

진리 안에서 행동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진리의 문을 한결같은 사랑으로 두드리게 하소서!

오 주님, 우리를 가로막은 장막을 찢으시고, 우리 서로가 열리게 하소서! 아멘.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 

-송영진신부-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마태 7,7-8).”

이 말씀은,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고 찾는 그것을 반드시 주실 것이고,
너희가 두드리는 그 문을 반드시 열어주실 것이다.” 라는
‘약속의 말씀’이기도 하고, “아버지께서 주시는 그것을 받으려면 청하고, 찾아라.
또 아버지께서 열어주시는 그 문 안으로 들어가려면 그 문을 두드려라.” 라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에 관해서 가르치실 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마태 6,8).”
이 말씀은, “아버지께서 알고 계신다.”는 단순한 말씀이 아니라,
“아버지께서는 너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계시고,
그것을 제때에 주신다.” 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기도’는 아버지께서 주시는 것을 ‘잘 받기 위한 준비’입니다.
앞의 말씀과 이 말씀을 연결해서 생각하면,
예수님 말씀은,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주시는 그것을 청하여라.
청하는 사람만 그것을 받을 것이다.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주시는 그것을 찾아라.
찾는 사람만 그것을 얻을 것이다.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열어주시는 그 문을
두드려라. 문을 두드리는 사람만 그 문 안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가 됩니다.
청하지 않으면 주시는 것도 못 받게 됩니다.
찾지 않으면 얻지 못합니다.

(우리가 청하는 일이 ‘먼저’이고 아버지께서 주시는 일이 ‘나중’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주시는 일이 ‘먼저’이고, 우리가 청해서 받는 일이 ‘나중’입니다.
영성체가 좋은 예입니다.
사제는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려고 성체를 들고 제단에서 내려갑니다.
그 성체를 받아먹으려면 사제 앞으로 가서 손을 내밀기만 하면 됩니다.
성체를 주는 일이 ‘먼저’이고, 성체를 받는 일이 ‘나중’입니다.
만일에 자기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면, 그것은 영성체를 하지 않겠다는
뜻이고, 그래서 그렇게 앉아 있는 사람에게는 성체를 주지 않습니다.
물론 몸이 아파서 움직이지 못하는 경우라면 사제가 찾아가서 성체를 줍니다.
그 경우에도 영성체를 하겠다는 능동적인 의사 표시가 있어야 합니다.)

‘문’의 경우에는, 아버지께서는 이미 하늘나라 문의 자물쇠를 열어 놓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문을 두드리는 것은,
잠긴 문을 열어달라고 두드린다는 뜻이 아니라,
이미 잠금 장치가 풀려 있는 그 문을 열고 그 안으로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하늘나라의 문을 ‘좁은 문’으로 표현하신 예수님 말씀이 있는데,
그 말씀은 하늘나라에 들어가려면 최선을 다해서 노력해야 한다는 뜻으로 하신
말씀이고, 어떻든 ‘좁은 문’이라고 해도 ‘이미 열려 있는 문’입니다.)

우리는 각자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청하기도 전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시는데,
우리는 그것을 잘 받고 있는가?
청하지 않아서 못 받고 있는 것은 아닌가?
(꾸준히 성실하게 기도하고 있는가?
혹시 혼자 있을 때는 기도하지 않고,
성당에서 미사 참례할 때만 기도하는 것은 아닌가?
혹시 기도를 습관적으로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사람들 사이에서도 진심으로 하는 말과 습관적으로 하는 말은 분명히 다르고,
듣는 쪽에서 그것을 금방 알아차립니다.
예를 들면, “사랑합니다.” 라는 말을 진심으로 할 때와 습관적으로 할 때의 차이,
또는 “감사합니다.” 라는 말을 진심으로 할 때와 습관적으로 할 때의 차이......
우리는 자신이 습관적으로 기도하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할 때가 많지만,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알고 계십니다.)

“너희 가운데 아들이 빵을 청하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생선을 청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마태 7,9-11)”

이 말씀은, “아버지께서는 너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신다.” 라는
‘약속의 말씀’이기도 하고, “무엇인가를 아버지께 청하려면
‘가장 좋은 것’을 청하여라.” 라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
나 자신이 모를 때가 많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나는 지금 이것이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하느님께서 보시기에는 ‘나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 경우에는 아무리 기도해도 하느님께서 들어 주시지 않을 것입니다.
(‘침묵’도 하느님의 응답의 한 방식입니다.
간절하게 기도해도 아무런 응답을 못 받을 때, 침묵만 지키시는 하느님을
원망하지 말고, 자신의 간청이 올바른지를 먼저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때’가 문제가 될 수도 있습니다.
나는 ‘지금 당장’ 받기를 바라지만, 하느님께서 보시기에는 ‘지금’이 아니라
다른 때가 가장 좋은 때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에 끈기와 인내가 필요한 법입니다.
또 하느님께서 주시는 그것이
“내가 받기를 바라지 않는 것(받고 싶지 않은 것)”일 수 있다는 것도 문제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겟세마니에서 바치신 기도를 본받아야 합니다.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이 저를 비켜 가게 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마태 26,39).”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마태 7,12).”

1) 우리는 ‘나에게만’ 좋은 것을 하느님께 청하면 안 되고,
‘모두에게’ 좋은 것을 청해야 합니다.
자기에게만 이익이 되는 것을 청하는 기도는,
기도가 아니라 자신의 이기심과 욕심을 드러내는 일이고, ‘죄’입니다.
2) 받으려고만 하지 말고 남에게 베푸는 일을 잘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나 하나만을 위한 생활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위한 생활입니다.
기도할 때에는 ‘믿음’만으로는 부족하고, 반드시 ‘사랑’도 있어야 합니다.
“사랑을 주는 것이 곧 사랑을 받는 것이다.” 라는 말은,
많은 사람이 알고 있는 진리입니다.  


-조욱현신부-


복음: 마태 7,7-12: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려라

유대인들은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하면서 살아왔기 때문에 기도를 잘 아는 민족이다. 그들은 하느님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듣는 귀가 말하는 입 가까이 붙어있는 것과 같이 하느님은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가까이 계셔 들어주신다.” 그리고 하느님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필요한 것과 요구를 내놓을 줄 아는 이를 더 사랑하신다.”고 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7-8)라고 가르쳐 주신다. 문은 청하고 구함으로써 두드리는 이에게만 열린다. 우리가 청하는 것은 사랑의 계명을 완수할 수 있는 힘을 청하는 것이며, 찾는다는 것은 복된 삶을 위한 진리를 발견하는 것이다. 우리의 참된 지식은 복됨으로 가는 길을 아는 것이다.

 

우리는 열렬한 마음으로 청하여야 한다. ‘찾아라.’는 의미가 이런 뜻이다. 무엇을 찾는 사람은 찾는 것에만 관심을 가지며 주변 상황에는 관심이 없다. ‘두드려라.’는 말씀은 열정적으로 하느님께 다가가라는 뜻이다. 예수님께서 곧 열어 주시는 것 같지 않아도 우리는 그곳에 남아 계속 문을 두드려야 한다는 뜻이다. 그분께 항구하게 청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인간의 삶을 예를 들어 설명하신다.

 

즉 “너희 가운데 아들이 빵을 청하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생선을 청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9-11)하신다. 우리가 악하다 해도 자식들에게는 좋은 것을 골라 준다. 그러니 하느님께서는 가장 좋은 것을 우리에게 주신다는 것이다. 부모가 자식을 속이지 않듯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속이지 않으실 것이다.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12)  예수님께서는 이 한 마디로 우리가 해야 할 모든 일을 간단히 요약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덕은, 즉 선행은 간단하고 쉬우며 모든 사람이 이미 알고 있는 것임을 가르치신다. 그래서 ‘너의 동료가 너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도 네 이웃에게 해 주어라.‘고 하신 것이다.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12) 하신다. 우리는 우리의 의무가 무엇인지 안다. 몰랐다고 핑계를 댈 수 없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우리를 대할 때, 이중적으로 대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현세적인 이익을 바리지 않는 마음으로 하지 않는 한, 다른 사람에게 참된 마음으로 봉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하느님께 기도하여 그분께서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는 것 같이 우리도 이웃을 대할 때 그런 자세로 임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내가 청하는 것을 이루어주시기를 원하지 않는가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마태 7, 11)
-한상우신부-

하느님 없이는
우리모두는
어쩔 수 없는

나약한
존재들입니다.

뜨거운 기도가
절실히 필요한
이시간입니다.

청하는 것을
주시는 분은
언제나
주님이십니다.

기도는 생활의
실천이며 생명의
풍요로운
깊이입니다.

기도 안에서
생명의
길을 찾습니다.

넘치게 주시는
선하신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믿음의 길이
기도의 길이
됩니다.

살아계신 그분을
보게 됩니다.

우리자신이
간절한
기도입니다.

우리자신이
간절한 기도가
되어야합니다.

신앙인들은
우리모두를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입니다.

기도로
이 어려움을
잘 뚫고
나갈 수 있도록
우리모두 기도합시다.

시작도 마침도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들은 청원 기도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제1독서는 에스테르의 기도 일부분입니다. 성경 속 아름다운 기도들 중 하나로 꼽히지요. 당시 유다인들이 재상 하만의 음모로 모두 몰살될 위험에 처합니다. 유다인 혈통을 밝히지 않은 채 왕비 자리에 발탁된 에스테르는 양부 모르도카이의 요구로 목숨을 걸고 크세르크세스 임금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로 합니다. 이 기도는 임금의 허락 없이 어전에 드는 모험을 감행하기 전에 드린 기도입니다.

"주님, 당신밖에 없는, 외로운 저를 도우소서"(에스 4,17-25).

사람은 때때로, 또는 자주 외로움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함께 공존하는 사회적 존재이고 더군다나 신앙 안에서 교회 공동체의 일원으로 살아가고 있어도 그렇습니다. 그것이 하느님 앞에 선 인간의 실존적 조건 중의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저의 주님, 저희의 임금님, 당신은 유일한 분이십니다"(에스 4,17-14).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에스 4,17-25).

독실한 유다 처녀로 교육받으며 성장한 덕에, 유배지에서 이방인 임금의 왕비로 살아가면서도 에스테르의 신관은 이스라엘 신앙의 정수를 담고 있습니다. 그녀는 유일하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 그러한 "당신 자신을 알리시라고"(에스 4,17-23 참조) 요청합니다.

복음에서 예수님은 아버지께 청하는 자세에 대해 가르치십니다.

"청하여라 ... 찾아라 ... 문을 두드려라"(마태 7,7).

우리는 이처럼 적극적으로 아버지께 다가가야 합니다. 하지만 청하고 찾고 두드리기 전에 먼저 무엇이 필요한지 제대로 파악해야겠지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누구보다 잘 아시고 그것을 주시려는 하느님과 우리의 주파수가 맞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마태 7,11)

"좋은 것을 더 많이" 이것이 바로 하느님 아버지의 심정입니다. 그분의 관심사는 우리의 행복이기에 무얼 더 챙겨 주고 도와주어야 할지 늘 살피십니다. 우리 자신보다 더 잘 보고 아시지요.

문제는 우리가 그분이 주신 "좋은 것"을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하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만족하지 못하고 줄곧 졸라대지요. 우리가 이기적이고 시야가 좁은데다 성급해서 그렇습니다. 유일하시고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 고작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자기 영광이나 청한다면 더 좋은 것을 더 많이 준비하고 계신 그분을 무색하게 만들어 버릴 수 있습니다.

에스테르 왕비의 기도에서 배웁시다. 그녀의 기도는 동족의 구원을 위해 죽음을 무릅쓰는 절박함에서 나왔습니다. 기도는 나와 이웃이 서로 별개의 섬이 아니라 함께 연결된 유기체임을 아는 데서 더 절실해지고 진정성 넘칩니다.

청하는 내용의 수혜자가 자신이 아니라 타인을 향할 때 하느님의 마음을 제대로 읽어드리는 기도가 됩니다. 내게 좋은 것들은 이미 주님의 선물 보따리 속에 마련되어 있는데, 우리가 자기를 잊고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주님 앞에 데려갈 적마다 아버지의 흡족한 축복과 함께 풀려나옵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마태 7,12).

사랑하는 벗님!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축복 받기를 바란다면 먼저 이웃을 축복해 주는 건 어떨까요? 그들과 함께 반드시 축복을 받을 겁니다. 신앙, 성장, 건강, 행복, 평화, 일치를 바란다면 먼저 이웃을 위해 빌어 주면 좋겠지요. 그들과 더불어 받을 겁니다. 이런 가운데 우리가 청하고 찾고 두드리는 바가 주님 마음과 한결 가까워져 갈 것입니다. 하느님은 그들을 위한 바람에 묻혀버린 나의 바람을 용케 아시는 분이십니다.

벗님이 잘 하고 계시듯 서로를 위한 기도가 더욱 절실한 요즘입니다. 이웃과 세상을 위해 더 열렬히 주님께 달아드는 하루를 엮어갑시다.

-김찬선신부-

http://www.ofmkorea.org/ofmhomily/323846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6년 2월 18일 사순 제1주간 목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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