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3월 6일 사순 제1주간 금요일
제단에 예물을 드리려 할 때에
너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형제가 생각나거든
그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그를 찾아가
화해하고 나서 돌아와 예물을 드려라.
(마태오 5,20ㄴ-26)
if you bring your gift to the altar,
and there recall that your brother
has anything against you,
leave your gift there at the altar,
go first and be reconciled with your brother,
and then come and offer your gift.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복음서에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주로 예수님과 논쟁하는 이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누구보다 최선을 다하여 율법을 따르고 지키던 이들이었습니다. 율법을 하나라도 어기지 않고 유다교에서 요구하는 것들을 실천하며 살았던 이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의로움을 능가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쉽지 않은 일입니다. 실상 우리는 계명을 지키는 것도 힘겨워하며 살아갑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정말 그들을 능가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도 듭니다.
법은 여러 사람이 함께 사는 사회에 필요한 최소한의 규정이라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언제부터인가 ‘법대로’ 하는 것이 가장 좋은 기준인 것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법대로’ 살던 사람들이었고 그것이 그들 삶의 가장 큰 기준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넘어서라고 말씀하십니다. ‘법대로’ 사는 것에 만족하고 떳떳해할 것이 아니라 그 의미를 생각하고 실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물리적으로 사람의 목숨을 해쳐서는 안 될뿐더러 보이지 않는 마음으로도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마음과 입으로 많은 이들을 해칠 수도 있습니다. 예물로 하느님과 화해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보다 먼저 이웃과 화해해야 합니다. 무엇인가 잘못한 것이 있다면 용서를 청하고, 손해를 입힌 것이 있다면 갚는 것이 먼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율법이 지닌 의미를 일깨워 줍니다. 그 의미를 먼저 생각하고 겉으로 드러나는 것만이 아니라 내적으로도 그렇게 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의로움에 이르는 길입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저 아무런 죄도 짓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가족의 강요로 고해소에 들어왔거나, 의무적으로 봐야 하는 판공성사를 위해 들어온 사람일 것입니다. 고해소 밖에서 ‘내가 어떤 죄를 지었지?’라면서 많은 생각을 하셨겠지요.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법을 어겨서 수갑을 찰 어떤 죄도 짓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런 죄도 짓지 않았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일 미사는 한 번도 빠지지 않으셨어요?”라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바쁘게 일하다 보면 많이 빠질 수밖에 없지요. 그런데 주일 미사 빠졌다고 해서 감방에 가는 것은 아니잖아요?”
이분은 사회법의 기준에 맞춰서 자기 죄를 살펴본 것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아무런 죄가 없는 것이지요.
한 남성이 어느 공공장소에서 소변이 너무 급해서, 오른쪽 손을 자신의 자동차에 올려놓고 자동차 뒷바퀴에 일을 보았습니다. 마침 지나가는 경찰이 이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 남성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공공장소에서의 노상 방뇨로 경범죄 처벌을 받았을 것으로 생각하겠지만, 경찰은 흘낏 한 번 보고는 그냥 지나갔습니다. 왜냐하면, 이 남성은 영국에서 이런 행동을 한 것이고, 영국에서는 법으로 괜찮다고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지역, 나라마다 다른 법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늘나라의 법과 이 세상의 법이 같을까요? 당연히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 세상의 법과 다른 하늘나라의 법을 오늘 복음을 통해 말씀해 주십니다.
율법의 옛 계명은 ‘살인해서는 안 된다.’라고 이르지만,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재판에 넘겨지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라고 하십니다.
다른 누군가에게 성을 내고, ‘바보, 멍청이’라고 하신 적이 있지 않습니까? 이보다 더 심한 욕도 퍼붓는 우리는 아닐까요? 분명히 이 세상의 법보다 훨씬 더 엄격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늘나라의 법은 마음에서 죄의 뿌리마저 뽑아 버리지 않아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죄의 뿌리를 뽑아 버리지 못하는 사람은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너무 심한 법 규정이라고 하면서 그 나라에 살지 않겠다고 하시겠습니까? 아니면 너무 심하다면서 위헌 신청을 하시겠습니까? 그 나라에 살려면 그 나라의 법을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문제는 죽음 뒤에 우리 모두 예외 없이 그 하늘나라에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반드시 지켜야 할 법이 됩니다. 죄의 뿌리를 뽑고 대신 그 자리에 사랑이 가득하게 해야 합니다.


어느 책에서 연필이 주는 교훈이라는 글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 내용을 정리해서 적어봅니다.
첫째, 연필은 뾰족하게 깎아야 합니다. 이처럼 우리의 몸과 마음을 깎아야 합니다. 이렇게 다듬는 것은 고통이 될 수도 있지만, 나의 쓸모를 높이게 됩니다.
둘째, 가장 중요한 것은 밖이 아니라 안에 있습니다. 겉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연필심이 부실하면 좋은 글씨를 쓸 수 없습니다. 우리 역시 내면의 성장에 힘을 쏟아야 합니다.
셋째, 연필로 잘못된 글씨는 지우개로 쉽게 지울 수 있습니다. 우리 역시 실수를 저지를 때마다 즉시 지워서 바로 잡을 수 있어야 합니다.
넷째, 연필로 글을 쓰지만, 훌륭한 글은 연필을 손에 쥔 작가에게 나옵니다. 나를 이끄는 존재인 주님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다섯째, 연필로 쓴 것을 지워도 자국이 남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삶에도 늘 흔적을 남깁니다. 그 자국들이 내 삶이라는 것을 인정하십시오.
연필이 주는 교훈을 생각하면서 지금의 나를 어떻게 변화시킬지를 묵상해 보셨으면 합니다.

행위보다 감정이, 감정보다 자기 정체성이 더 중요하다
-전삼용신부-
형과 동생이 싸웠습니다. 그것을 보고 엄마가 말했습니다.
“먼저 용서하는 사람이 형이다.”
역시 한 살이라도 더 먹은 형이 먼저 손을 내밉니다.
“야! 미안하다.”
아마도 동생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면 형의 스타일은 더욱 구겨졌을 것입니다. 동생은 원래 동생이니 동생이라는 말을 들어도 아무 상관이 없겠지만 형은 ‘동생’이라는 말을 들으면 곤란해집니다. 그러므로 “먼저 용서하는 사람이 형이다.”라는 말은 사실은 형이 먼저 용서하라는 말입니다.
이 짧은 이야기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요? 내가 누구냐는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행위도, 감정도 바뀔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의 행동과 감정을 통제하기 위해 ‘내가 누구인가?’라는 정체성을 아는 것만큼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의롭다는 말은 주님 마음에 든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의 의로움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들의 의로움은 ‘행위’의 의로움입니다. 그들은 율법에 “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라고 나와 있다면 살인하지 않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것보다 더 높은 단계의 의로움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행위의 의로움보다 더 높은 단계의 의로움은 ‘감정’의 의로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의롭게 하시기 위해 오신 것은 행위를 넘어서는 감정의 의로움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하느님은 이 감정으로 우리를 심판하십니다. 오늘의 이 말씀이 그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
형제에게 화를 내고 욕을 했다고 지옥에 던져진다는 것은 참으로 무서운 일입니다. 바리사이-율법학자들은 행위로 살인만 하지 않으면 된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감정’을 보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행위보다는 감정을 의롭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감정을 항상 기쁨과 평화, 사랑으로 지켜나갈 수 있을까요? 이것은 인간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열매가 사랑과 기쁨과 평화 등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령의 힘으로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를 수 있습니다. 내가 고아인 줄 알았다고 참 부모님을 찾게 되었다면 기분이 어떨까요? 지금까지 아무리 자기를 괴롭혔던 사람이 있더라도 그 부모님을 찾은 기쁨에 그 미운 마음이 싹 사라질 것입니다. 이렇듯 기분은 결국 자기 정체성에 의해 결정됩니다. 우리는 성령을 통하여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기쁨으로 우리 감정을 의롭게 할 수 있습니다.
자기 정체성은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믿음으로 세상을 살아갑니다. 하느님의 자녀라는 믿음으로 살아가면 감정의 흐트러짐을 막을 수 있습니다.
보물섬이라고 하는 불후의 명작을 남긴 스코틀랜드의 작가 로버트 스티븐슨이 가족들과 함께 주님의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벌떡 일어나서 문을 박차고 나가버렸습니다. 부인이 놀라 뒤따라 나가서 남편을 붙들고 왜 그러느냐고 물었습니다. 스티븐슨이 말했습니다.
“오늘은 내가 죄를 용서해달라고 주기도문을 주님께 드리기가 괴롭소, 마음이 편치 않소.”
하느님의 자녀라면 하느님의 자녀로서 유지해야 하는 감정이 있습니다. 감정은 정체성과 직결됩니다. 따라서 하느님 자녀로서의 명확한 자기 정체성은 행위의 의로움을 넘어서 감정까지 의롭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조건이 됩니다.

-조재형신부-
‘판도라의 상자’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상자 안에는 인간의 삶에 고통을 주는 것들이 들어있었습니다. ‘고통, 절망, 욕망, 근심, 걱정, 시기, 질투, 열등감’과 같은 것입니다. 판도라는 상자를 열어보면 안 된다는 말을 들었지만 상자 안이 너무 궁금해서 기어코 열고 말았습니다. 신화는 이야기합니다. 상자 안에 하나가 더 있었는데 그것은 ‘희망’이었다고 합니다. 험난한 세상에서 사람들이 고난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희망’이었다고 합니다. 희망에 대한 이야기 중에 기억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마지막 잎새’입니다. 병들어 죽어가는 소녀는 가을에 낙엽이 되어 떨어지는 나무 잎사귀를 보았습니다. 마지막 잎새가 떨어지면 자신도 죽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잎새는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잎새는 소녀에게 희망이 되었고, 소녀는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물질주의는 모든 것이 쪼개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것이 법칙에 의해서 움직인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있는 것들은 그 원인을 알면 원래대로 되돌릴 수 있다고 말을 합니다. 영적인 세상은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각각의 모든 것들은 사실 전체 안에 관계를 맺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법칙과 질서에 따라서 사는 것이 아니라, 의식과 마음에 따라서 사는 것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아주 작은 티끌에서도 우주 전체를 볼 수 있다고 합니다. 한 잔의 물에 있는 에너지로도 지구상의 모든 물을 증발 시킬 수 있다고 이야기 합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물질적인 법칙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아무리 큰 잘못을 했어도 진심으로 뉘우친다면 하느님은 눈에 보일 것 같지 않는 그 뉘우침을 보시고 용서해 주시는 분입니다. 오늘 성서 말씀을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비록 악인이라도 자기가 저지른 죄를 뉘우치고 하느님께 돌아오면 다시 생명을 얻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악인일지라도 회개하고 다시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십니다. 하느님 사랑은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똑같이 햇볕을 주십니다. 그 사랑은 회개하는 사람의 몫입니다. 사람이 안고 사는 분노도 나쁘지만, 그것보다 남을 멸시하는 태도가 더 나쁩니다. 모든 이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에 대한 미움과 분노, 멸시, 비난 등은 하느님의 사랑을 거부하는 태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말을 조심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비난하고, 상대방의 잘못을 지적하는 말보다는 상대방의 허물을 덮어주고, 상대방의 잘못을 용서해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주님의 말씀을 따르지 못하고 친구를 비난한 적이 있습니다. 동창신부가 제게 본당 사순특강을 부탁했습니다. 저는 나름대로 준비를 했는데 동창신부는 제게 이야기 한 것을 잊어버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부탁을 했다고 합니다. 동창신부님은 자신의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을 했고, 저에게도 사과를 하였습니다. 그랬으면 된 것인데 저는 다른 동창들에게 친구의 잘못을 또 이야기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친구가 제게 이렇게 말을 하였습니다. ‘친구도 사과를 하였고, 잘못을 인정했으니 더 이상 친구의 허물을 이야기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듣고 순간 당황했습니다. 그리고 친구의 이야기가 옳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잘못된 말은 세 사람을 죽이는 것이라고 합니다. 첫째는 잘못된 말을 하는 본인의 인격을 죽이는 것입니다. 둘째는 그 말을 듣고도 아무 말 못하는 상대방의 인격을 죽이는 것입니다. 셋째는 험담과 비난을 받는 당사자의 인격을 죽이는 것입니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

바보, 멍청이
-반영억신부-
저는 지옥을 갔어도 벌써 몇 번은 갔어야 할 사람입니다. 짧은 생을 살아 오면서 차마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더라도 마음에 들지 않는 행위를 보거나 접하면서 ‘바보, 멍청이 같은 이라고!’ 할 때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말이 이렇게 무서운 말이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 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마태5,22). 하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지금 살아있는 것은 분명 주님의 자비 덕분입니다. 덕을 입었으니 이제 정신을 바짝 차려 깨어있어야 하겠습니다.
‘말 한마디로 천냥 빚도 갚는다.’고 하였지만 오히려 말로 상처를 주고 일을 어렵게 만들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다재다능하지만 혀를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제 혀를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은 복됩니다. 말이 많으면 진실과는 거리가 멀어지기 쉽습니다”(알베리오네). 성녀 데레사도 “여럿이 있는 가운데 말을 적게 하십시오! 말 많은 사람을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말이 많은 사람일수록 소리만 요란한 꽹과리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누구의 감정도 상하게 하는 일이 없도록 말을 골라서 하고 모든 이에게 후회되지 않을 말을 찾으십시오”(십자가의 성 요한). “여러분의 입에서는 어떠한 나쁜 말도 나와서는 안 됩니다. 필요할 때에 다른 이의 성장에 좋은 말을 하여, 그 말이 듣는 이들에게 은총을 가져다줄 수 있도록 하십시오”(에페4,29). 다른 사람을 욕하고 미워하면 욕과 미움은 독이 묻은 화살이 되어 자신에게 돌아옵니다. 혹시라도 뜻하지 않은 말로 상처를 주고 서먹해진 관계가 있다면 상대가 다가오기를 기다리지 말고 서둘러 화해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마음을 살펴봤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마음에 담긴 것이 밖으로 나오게 됩니다. 선하고 거룩한 마음을 지녔으면 선한 것이 나오고, 그렇지 못한 미움과 분노를 담고 있으면 화가 나옵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이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호감을 사지만 어리석은 자의 입술은 자신을 삼켜 버립니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의 시작은 어리석음이고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의 끝은 불행을 초래하는 우둔함이다”(코헬10,13). 아무리 조심을 해도 마음한번 흔들리면 안에 있는 것이 쏟아져 나오게 마련입니다. 그러니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우선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에 초점을 두지 않고 ‘성 내지 말고’, ‘바보’, ‘멍청이’ 라고 하지 말라고 당부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것을 치료하기보다 뿌리를 다스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상기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사람은 제 입이 맺는 열매로 배를 채우고 제 입술이 내는 소출로 배부르게 된다. 혀에 죽음과 삶이 달려 있으니 혀를 사랑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는다”(잠언18,20-21).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뒷담화만 하지 않아도 성인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좋은 글이 있어 함께 나눕니다
침묵의 소중함 -토마스 머튼-
침묵은 양선함 입니다.
마음이 상했지만 답변하지 않을 때
내 권리를 주장하지 않을 때
내 명예에 대한 방어를 온전히 하느님께
내맡길 때 바로 침묵은 양선함 입니다.
침묵은 자비입니다.
형제들의 탓을 드러내지 않을 때
지난 과거를 들추지 않고 용서 할 때
판단하지 않고 마음 속 깊이 변호해 줄 때
바로 침묵은 자비입니다.
침묵은 인내입니다.
불평 없이 고통을 당할 때
인간의 위로를 찾지 않을 때
서두르지 않고 씨가 천천히 싹트는 것을
기다릴 때 바로 침묵은 인내입니다.
침묵은 겸손입니다.
형제들이 유명해지도록 입을 다물 때
하느님의 능력의 선물이 감추어졌을 때도
내 행동이 나쁘게 평가되든 어떻든
내버려둘 때 바로 침묵을 겸손입니다.
침묵은 신앙(믿음)입니다.
그분이 행하도록 침묵할 때
주님의 현존에 있기 위해 세상 소리와
소음을 피할 때
그분이 아는 것만으로 충분하기에 인간의
이해를 찾지 않을 때
바로 침묵은 신앙입니다.
침묵은 흠숭입니다.
"왜"라고 묻지 않고 십자가를 포옹할 때
바로 침묵은 흠숭입니다.

."너희는 “먼저 형제와 화해하라.”(마태 6,24)
-이영근신부-
우리는 지금 ‘사순시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이 시기의 큰 주제 중의 하나는 “의로움”입니다. 곧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 맺음”입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회개와 화해를 요구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의로움”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5,20)
그런데, 대체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는 의로움은 무엇일까?
그것을 예수님께서는 여섯 가지의 대당명제로 제시하십니다.
‘대당명제’란 한 명제를 먼저 내세우고, 그 다음에 그에 대한 반명제를 내세우는 것을 말합니다.
곧 이는 “~라고 이르는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렇게 말한다.”라는 형식을 갖추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그 여섯 가지 의로움 중에서, 첫 번째의 의로움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살인하지 말라”는 구약의 율법에 대해서 충분하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곧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거나, 형제를 ‘바보’ 혹은 ‘멍청이’라고 모욕하고 멸시하는 것까지도 ‘살인’에 포함시키십니다.
곧 형제에게 ‘성’내고 ‘바보’ ‘멍청이’라고 말하는 언어폭력도 ‘살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참으로 혀를 조심해야 할 일입니다. <집회서>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많은 이들이 칼날에 쓰러졌지만, 혀 때문에 스러진 이들보다는 적다.”(집회 28,18)
또한 이는 “혀”의 살인뿐만 아니라, 죄의 뿌리인 내면적인 면도 살인에 포함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사도 요한은 그의 편지에서 말합니다,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모두 살인자이다.”(1요한 3,15)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단지 ‘살인하지 말라’고 하시지 않으시고, ‘화해하라’고 하십니다.
곧 ‘살인하지 말라’는 율법의 근본적인 정신이 “화해”에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살인하지 않는 것이 본질인 것이 아니라, 화해하는 것이 본질이라는 말씀입니다.
화해하면 살인하지 않게 되지만, 살인하지 않는다고 화해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화해하는 일이 더 중요하고 우선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무엇보다 우선하는 일이 화해하는 일입니다.
곧 먼저 화해하는 일입니다.
이는 우리 주님께서 얼마나 형제들 사이의 사랑과 화해를 중요하게 여기시는지를 말해줍니다.
형제를 얼마나 소중하게 여겨야 하는 지를 말해줍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예물을 바칠 때, ‘먼저’ 해야 할 일을 말씀하십니다.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마태 5,23-24)
이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예물은 결국 ‘우리 자신’이라는 것을 깨우쳐줍니다.
곧 제단의 예물을 바치는 ‘우리 자신’이 예물이라는 말씀입니다.
마치, “야훼께서 아벨과 그가 바친 예물은 반기시고 카인과 그가 바친 예물은 반기지 않으시고”(창세 4,4) 예물과 예물을 바치는 이를 하나로 간주하셨듯이, 예물을 바치는 이를 바로 ‘예물’로 삼으십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제단의 예물보다 예물을 바치는 사람의 ‘의로움’을 바라십니다.
우리가 바치는 예물이 아니라, 우리가 당신 앞에 나서기에 합당한 사람이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니, 불목한 형제가 있는지 살펴보고, ‘얼른’ 화해해야 할 일입니다.
늦기 전에 기회가 있을 때 지체치 말고 화해해야 할 일입니다.
시비를 가리고 따지기 전에, ‘먼저’ 화해해야 할 일입니다.
시시비비를 가리고 것이 의로움인 것이 아니라, ‘화해’를 이루는 것이 ‘의로움’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오늘 예수님께서는 형제와 맺는 관계가 곧 하느님과 맺는 관계요, 형제와의 의로움의 관계가 곧 하느님과의 의로움의 관계임을 깨우쳐주십니다.
그러므로 형제와 ‘먼저’ 화해하고, 무엇이 우선이고 먼저 해야 할 일인지를 헤아려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먼저 형제와 화해하라.”(마태 6,24)
그리고 “먼저 하느님 나라와 하느님의 의로움을 찾아라.”(마태 6,33)
-오늘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 예물을 바쳐라.”(마태 5,24)
주님!
얼른 화해하게 하소서!
지체치 말고 기회가 있을 때, 먼저 화해하게 하소서!
화해한 제 자신이 당신께 드리는 참된 예물이 되게 하소서!
시비를 따짐이 아니라, 화해를 이룸이 의로움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미워하지 마라. 미움 받을 짓도 하지 마라.
-송영진신부-
“‘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 라고 하는 자는 최고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 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마태 5,21-22).”
이 말씀은, “미워하지 마라.” 라는 가르침입니다.
(죽이고 싶어 할 정도로 형제를 증오하고, 그래서 형제를 모욕하고,
형제에게 분노하는 것은 살인죄와 같다는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증오와 분노의 원인이 누구에게 있는지는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그 형제가 어떤 큰 잘못을 저질렀다고 해도, 그를 증오하고, 모욕하고,
그에게 분노를 터뜨리는 것은 죄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그의 죄’는 ‘그의 죄’이고, 그 일 때문에 짓게 된 ‘나의 죄’는 ‘나의 죄’입니다.)
이런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마태 18,15).” 라고
말씀하셨는데, 만일에 그 형제에게 가서 ‘바보’, ‘멍청이’ 라고 욕하면서
그가 죄를 지은 것을 심하게 비난하고 꾸짖었다면?
그런 경우에 그의 죄가 너무 커서 그렇게 크게 혼내야만 했다고 변명하더라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기준으로 해서 생각하면, 그것은 죄를 짓는 일이 됩니다.
(“타일러라.” 라는 말씀은, “사랑으로 회개시켜라.” 라는 뜻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타이르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정말로 사랑한다면, 상대방을 모욕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마태 5,23-24).”
이 말씀은, “미움 받을 짓을 하지 마라.” 라는 가르침입니다.
지금 이 경우에는 아무래도 미움 받을 짓을 한 쪽이 잘못한 경우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라는 말씀은,
“그 형제에게 가서 용서를 청하여라.”로 해석됩니다.
‘미움 받는 고통’과 ‘미워하는 고통’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큰 고통일까?
아마도 ‘미워하는 고통’이 ‘미움 받는 고통’보다 더 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 형제에게 가서 용서를 빌고, 그 형제와 화해하는 일은,
그가 겪고 있는 고통을 없애 주는 일이 되기도 합니다.
나의 고통보다 상대방의 고통을 먼저 생각하는 것, 그것이 사랑입니다.
(그것은 물론 나의 ‘미움 받는 고통’을 없애는 일이기도 합니다.)
“나는 잘못한 일이 없는데 그 사람이 혼자서 오해하고서 나를 미워하는 것뿐이다.
잘못이 없는 내가 왜 그에게 먼저 용서와 화해를 청해야 하는가?” 라고
따지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식으로 자꾸만 누구의 잘못이냐를 따지기 시작하면
화해의 길은 점점 더 멀어지게 됩니다.
그런 경우라면 빨리 가서 그 오해를 풀어주는 것이 옳습니다.
실제 인간 세상의 현실을 보면, 상처를 준 사람은 자기가 상처를 주었다는 것을
모르고 있거나 잊어버리는 경우가 많고, 상처를 받은 사람만 그 일을 잊지 못하고
오랫동안 원망과 원한을 품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현실을 생각하면, 예수님 말씀에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이라는 말씀은,
“제단에 예물을 바치기 전에 먼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사람이 있는지
잘 반성해 보아라.”로 해석됩니다.
(“생각나거든”이라는 말씀을
“우연히 생각나거든”으로 해석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예수님 말씀에는 “생각이 안 나면 어쩔 수 없고...” 라는 뜻은
들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미사의 시작 예식에 ‘참회 예식’이 포함되어 있는 것은, 예물을 바치기 전에 먼저
화해부터 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미사 때마다 바치는 ‘고백의 기도’와 ‘자비송’을
형식적으로, 또 습관적으로 바치면 안 됩니다.
예수님 말씀 그대로, “나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형제가 있는지,
혹시 내가 미움 받을 짓을 한 적이 있는지” 진심으로 반성하면서,
‘고백의 기도’와 ‘자비송’을 바쳐야 합니다.
(그런데 미사 중간에 고해성사를 볼 수는 없으니까,
실제로는 양심 성찰과 고해성사를 보는 일은 ‘미사 전에’ 하는 것이 맞습니다.)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법정으로 가는 도중에 얼른 타협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고소한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넘기고 재판관은 너를 형리에게 넘겨, 네가 감옥에
갇힐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마태 5,25-26).”
여기서 ‘법정’은 하느님의 심판을 뜻합니다.
‘고소한 자’는 “나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그 형제”일 수도 있고,
하느님의 법정에서 검사 역할을 하는 천사일 수도 있습니다.
(지금 이 상황에서는, 분명히 잘못한 사람은 ‘나’이고,
‘그 형제’는 나에게 억울한 일을 당한 피해자입니다.)
“법정으로 가는 도중에 얼른 타협하여라.” 라는 말씀은,
“살아 있는 동안에 회개하여라.” 라는 뜻입니다.
(이승에서의 인생은, 사실상 하느님의 법정을 향해서 가는 길입니다.)
‘재판관’은 하느님이고, ‘형리’는 죄인의 처벌을 담당하는 천사입니다.
‘감옥’은 연옥일 수도 있고, 지옥일 수도 있습니다.
연옥이라면 마지막 한 닢까지 다 갚으면 그곳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마지막 한 닢까지 다 갚는다는 말은 철저하고 완벽한 보속을 뜻합니다.)
지옥으로 떨어진다면 모든 것이 다 끝난 상황이고, 그곳에서 나올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승에서 살아가는 동안에도 연옥과 지옥을 겪을 수 있습니다.
자기 잘못을 뉘우치고, 후회하고, 자책하면서, 회개하고 보속하고 있다면,
그것이 바로 연옥의 고통을 겪는 것과 같은 상황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만일에 회개하기를 거부하고, 구원받는 것도 포기하고,
자포자기 상태로 살고 있다면, 그 상황은 지옥입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살면서도 마음 편하게 사는 것 같은 사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희망도 없이, 영혼과 양심의 평화도 없이 그렇게 사는 것은
결코 마음 편하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도 무의식 속에는 심판과 멸망의 두려움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조욱현신부-
복음: 마태 5,20-26: 먼저 가서 네 형제와 화해하라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는 의로움을 가지라고 하신다. 그들은 하느님의 뜻에 맞는 삶보다도 인간적 영광이라는 명예를 추구하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 의롭게 보이는 것을 중요시 하였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인간의 찬사라는 역겨운 의로움보다 거룩한 의로움의 행실과 믿음의 공덕을 더 귀중히 여기라고 하시는 말씀이다. 형식적인 신앙생활은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살인에 대해 말씀하시며,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모두 살인자입니다.”(1요한 3,15)라고 하시고, “자기 형제에게 이유 없이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마태 5,22),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22절) 라고 하신다. 예수님께서는 행실에서 율법이 단죄하지 않는 것도 징계하신다. 업신여기는 말을 하려고 마음먹었다는 이유만으로도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23절). 이 말씀은 ‘예물을 바치고 나서’나 ‘예물을 바치기 전에’가 아니다. 그것은 예물이 제단에 놓인 순간에, 제사가 시작된 바로 그때,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23-24절) 라고 하신다. 예물이 우리 앞에 놓여 있는 동안 우리는 형제에게로 달려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라고 하시는 것은 우선, 주님께서는 사랑을 가장 훌륭한 예물로 여기신다는 것을 알려주시는 것이고, 사랑이라는 예물이 없으면 제물도 받지 않으신다는 말씀이다. 둘째로는 주님께서는 화해를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 만드시어 어떤 핑계도 댈 수 없게 하신다. 화해하기 전에는 그의 제물은 봉헌되지 못한 채 제단에 그대로 놓여있을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먼저 화해하여야 한다.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법정으로 가는 도중에 얼른 타협하여라.”(25절) 우리를 고소하는 자는 우리의 양심이기도 하며 육체의 욕망과 악덕에 맞서시는 성령이시다. “육이 욕망하는 것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께서 바라시는 것은 육을 거스릅니다.”(갈라 5,17)라고 바오로 사도는 말씀하신다. 우리가 하느님과 화해하지 못하면 우리는 이미 죽음에로 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성령 안에서 하느님과 영원한 친교와 평화를 누리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성령께서 우리의 고발자가 되실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우리가 제단에 나올 때에도, 우리가 이웃과 가지는 관계가 올바르지 못하면 하느님과의 관계도 올바를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웃과의 관계는 바로 하느님과의 관계라는 점을 명심하여야 한다. 하느님과 화해하지 못하면 우리는 죗값을 모두 치루기까지 풀려나지 못한다고 하신다. 우리 이웃과의 진정한 화해를 통하여 주님과 화해하고 주님 앞에 참된 예물을 드릴 수 있도록 하자.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마태 5, 24)
-한상우신부-
제 멋대로
살아가는 우리들
삶을 반성하는
요즈음입니다.
우리 힘이 아닌
하느님의 힘으로
살아가는 우리들
일상입니다.
우리들 일상이
하느님 말씀을
듣게됩니다.
하느님 말씀은
우리 내면을
관통합니다.
십자가의 겸손이
화해와 용서의
밑거름이 됩니다.
믿음은 판단을
내려놓는 데서
거기에서
시작됩니다.
지울 수 없는
형제와 형제의
관계입니다.
화해는 가장
가까운 데서
길을 트는
기도입니다.
화해도 용서도
끊임없이 배우고
배우는 생명의
여정입니다.
화해와 용서로
돌아갈 우리의
짧은 시간입니다.
사람의 길이
화해의 길입니다.
사람과 사람이
아름답기를
기도드립니다.
주고받는 것이
화해와 용서이길
기도드립니다.
진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화해의 물길이
마음과 마음에서
쏟아지길 바라는
십자가에서
화해를 배웁시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들은 "돌아섬"을 제시하십니다. "돌아섬"이 곧 회개의 시작입니다.
"돌아서서"(에제 18,21.23.27.28)
제1독서에서 주님은 여러 차례 "돌아섬"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바라시는 바는 악인이 자기의 죄를 버리고 돌아서서 주님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 그는 "돌아섬" 이전의 모든 불의를 용서받게 됩니다. 그의 죄악이 주님께 더 이상 기억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다른 "돌아섬"도 있습니다. 의인이 자기 정의를 버리고 돌아서서 불의의 길로 들어서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주님께 그의 정의는 잊혀지고 나중에 저지른 불의 때문에 죽으리라는 것이 냉정한 현실입니다. 그러니 돌아서되 올바른 방향쪽으로 돌아서는 것이 관건입니다.
복음에서 예수님은 의로움을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마태 5,20).
유다 종교 지도자들의 의로움은 율법에 대한 그들의 열성을 드러내고 증명합니다. 자타가 공인하는 의로움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거기에서 더 요구하십니다. 신분상으로도 그렇거니와 정식 종교 교육도 받지 못한 제자들에게 "그들을 능가하라"고 촉구하십니다.
물리적 살인만이 불의가 아니라 형제에게 성을 내거나 바보, 멍청이라 하는 인격 살인까지 그에 버금가는 불의라고 하십니다. 육적 생명을 앗아가는 죄만 죄가 아니라 영혼의 생기를 빼앗는 위해 역시 엄청난 죗값을 치러야 합니다.
"그러므로"(마태 5,23)
예수님께서는 두 개의 권고를 방금 들은 엄격한 말씀의 해법으로 제시하십니다. 제단에 예물을 바치기 전에 화해하라는 것과, 자기를 고소한 이와 얼른 타협하라는 것입니다. 둘 다 "멈춤"과 "돌아섬"이 요구되지요.
사실 관계가 어그러지고 상처까지 입게 되면 화해나 절충이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이성과 윤리를 떠나 자존심으로 자기 입장을 밀고 나가는 경우가 다반사지요. 그때 잠시 멈추어 숨을 고르고, 여태까지 치달아온 방향을 돌이켜 서로에게 생명이 되는 방향으로 재조정하라고 권고하시는 겁니다.
이제는 이기고 지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서로 극으로 치닫던 방향을 돌려 일단 서로를 향하고, 그 다음은 대화가 되건 합의가 되건 만나는 겁니다. 중요한 건 그들이 방향을 바꾸어 돌아서고, 승패와 상관없이 그간의 제 길을 돌이켰다는 데 있습니다.
"내 생명을 걸고 말한다. 나는 죄인의 죽음을 바라지 않는다. 죄인이 돌아서서 살기를 바란다"(영성체송).
사랑하는 벗님! 주님께서는 우리가 돌아서기를 바라십니다. 이 말씀을 생명을 걸고 하시니 어마어마한 무게가 느껴지지요. 실제로 주님은 우리 회개를 위해 당신 생명을 거셨습니다.
돌아섬은 변절이나 줏대 없음이 아니라 오히려 서로의 생명을 살리는 일입니다. 잘못된 방향을 밀어붙이는 것이 죄를 쌓는 무모한 어리석음이고 상대를 죽이는 악이지요. 하물며 하느님도 우리 같은 죄인 때문에 마음을 바꾸시고 징벌을 돌이키십니다. 제단의 예물보다 시급하고 재판장의 판결보다 위엄 있는 것이 생명입니다. 서로의 생명을 북돋우고 살리는 하루 되시길 기원합니다.

하느님께 가기 전에
-김찬선신부-
오늘 주님께서는 하느님께 예물을 드리기 전에
먼저 형제와 화해를 하라고 하십니다.
부모를 찾아뵈러 가기 전에 형제와 먼저 화해를 하라는 것과 같은 뜻입니다.
하느님과의 수직적인 관계-기도는 충실히 하면서
이웃과의 수평적인 관계-사랑은 소홀히 하는 것은 안 된다는 뜻입니다.
바벨탑 얘기가 담고 있는 뜻이 여러 가지이지만
이런 면에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늘에 닿으려고 탑을 높이 쌓다가
이웃과의 소통이 단절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하느님은 저 위에 계시어
거기까지 기어 올라올 수 있는 사람과 만나주시는 분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 계시는 분이십니다.
사랑이시기에 사랑의 관계 안에 계시는 것이지요.
그러니 당신을 만나려면 단절된 관계를 풀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화해하라고 하신다고 화해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니 내가 스스로 화해하려고 해도 화해가 되지 않습니다.
잘 지내자고 찾아가 악수를 했는데도 화해가 되지 않습니다.
화해和解, 이 한자어의 뜻을 잘 보면 이유가 없지 않습니다.
和를 하려면 먼저 解를 해야 합니다.
화해란 다 풀어버리고 잘 지내는 것인데
그와 잘 지내기에 앞서 내 안의 풀 것을 다 풀어야 합니다.
무엇을 풀어야 합니까?
미움의 감정.
분노의 감정.
복수의 감정.
질투의 감정.
서운한 감정.
한 마디로 내 안의 모든 惡感情을 풀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악감정을 갖게 한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악감정을 가질 수밖에 없는 나를 봐야 합니다.
그에게 나의 감정 해소를 책임 지우지 말고
나의 감정은 내가 책임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를 들어 우리가 분노할 때
나에게 그렇게 한 사람에 대해 분노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게 당할 수밖에 없는 나에 대해 더 분노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를 향하는 분노의 화살을 그에게 돌렸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여 이제 우리는 그런 말에 서운했던 나의 옹졸함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런 말에 상처받았던 나의 허약함을 진정 강인하게 해야 합니다.
그의 계략에 넘어갔던 나의 허술함을 극복해야 합니다.
한마디로 전에는 그로 인해 내가 악감정을 가졌으나 이제는 그로 인해
넓어지고
강해지고
성숙해져
더이상 그에 의존하지 않고
나를 진정 사랑하게 되어야 합니다.
그 대신 하느님 사랑으로 충분하여
그와 상관없이 진정 행복하게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나의 삶에서 그를 배제하고
오직 기도만 하며 하느님과만 잘 지내려던 나에서
이제 그와도 잘 지내고
그와 함께 하느님께 기도하고
그와 함께 예물을 봉헌하러 가는 내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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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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