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3월 13일 사순 제2주간 금요일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마태21,33-43.45-46)
The stone that the builders rejected
has become the cornerstone;
by the Lord has this been done,
and it is wonderful in our eyes?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는 신약 성경의 독특한 비유입니다. 이 비유의 초점은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구약 성경에서부터 포도밭은 하느님의 백성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사용됩니다. 이 비유에서 밭의 주인은 하느님이시고, 주인이 애써 일군 포도밭은 하느님 백성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백성을 모으시고 그들을 잘 이끌도록 종교 지도자들을 세우십니다. 여기서 종교 지도자들은 소작인으로 비유됩니다.
포도 철이 되자 주인은 소출을 받아오도록 소작인들에게 종들을 보냅니다. 소출은 하느님 백성이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며 맺는 열매일 것입니다. 종들은 하느님께서 백성과 백성의 지도자들에게 지속적으로 파견한 예언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소작인들은 종들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실제로 많은 예언자들이 그들에게 거부당하였고 심지어 목숨을 잃기도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포도밭 주인은 자비로운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는 아들을 소작인들에게 보냅니다. 그런데 소작인들은 그 아들마저 죽이고 포도밭을 차지하고자 합니다. 주인이 보낸 아들은 우리를 위하여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백성의 지도자들에 의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이 비유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백성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입니다. 비록 지도자들이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하느님께서는 포기하지 않으셨고 결국 당신의 아드님마저 우리를 위하여 내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과 자비는 지금까지도 이어집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이처럼 완벽하지 않은 우리입니다. 그런데도 완벽하다고 착각에 자주 빠지는 우리는 아니었을까요? 나만의 옳음을 주장하며 상대방의 틀렸음을 꾸짖습니다. 나의 선함과 달리 다른 사람은 악하다면서 비판합니다.
예전에 신학생 때 후배들을 많이 혼냈던 기억이 있습니다. 후배의 모습이 잘못되었다면서 기합도 주고 언어폭력도 심하게 했었습니다. 그때를 떠올리면 얼마나 부끄러운지 모릅니다. 후배들이 그때의 이야기를 하면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옳고 선함만을 주장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모습을 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분명히 후회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복음은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 말씀입니다. 이 복음 말씀을 잘 보면 밭 임자가 소작인들에게 맡긴 일이 그렇게 많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밭 임자가 직접 포도밭을 일구어서 울타리를 둘러치고 포도 확을 파고 탑을 세웠기 때문입니다. 소작인에게 맡긴 일이라고는 그곳에 있는 것들을 보살피고 그들에게 주어진 것을 지키라는 것뿐이었습니다. 분명히 밭 임자는 자비로운 사람이었고, 소작인에게 큰 은혜를 베푼 사람입니다. 그러나 소작인들은 그 모든 것을 당연하게 여깁니다. 오히려 종들을 죽이고 아들까지 죽이면서 잠시 맡긴 것뿐인 재산을 차지하려고 합니다.
바로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을 향한 말씀이었지요. 이점을 이들 역시 알고 있었지만, 군중이 두려워서 자제합니다. 주님의 경고에는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오로지 권력에 대한 사랑과 영광에 대한 갈망 그리고 세상의 것을 추구하는 마음이 그들의 눈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자신들이 틀렸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까요? 전혀 몰랐을 것입니다. 자신들에게 피해를 준다는 생각에만 집중하다 보니,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겠지요. 그래서 나약하고 부족한 인간이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을 심판하고 단죄했던 것입니다.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주님께서 보여 주신 겸손을 본받아, 낮은 자리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런 글을 하나 읽었습니다.
10대는 두려움을 없애주기 위한 여행.
20대는 학습과 체험을 하기 위한 여행.
30대는 꿈과 희망을 갖기 위한 여행.
40대는 향후의 삶을 설계하기 위해 필요한 경험을 쌓는 여행.
50대는 살면서 미처 모르고 지나쳤던 것을 보기 위한 여행.
60대는 열심히 살아온 지난 시간에 대한 보상을 받는 여행.
70대는 삶의 짐을 내려놓는 여행.
인생 자체가 하나의 여행임을 깨닫게 해주는 글입니다. 그런데 여행이 무조건 좋고 기쁜 것은 아니겠지요.
학창 시절에 돈 없이 무작정 떠났던 여행을 떠올려 봅니다. 하루에 한 끼도 제대로 먹지 못하면서 했던 여행이었습니다. 차비를 아끼려고 무조건 걷기만 했던 시간이었습니다. 당시에 이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서는 “집 떠나면 고생”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 큰 수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그때의 여행에 대한 기억이 여운처럼 남아 있었습니다. 분명히 어렵고 힘들었지만 ‘나’를 성장할 수 있게 해주었던 감사한 시간이었습니다.
편하고 쉬운 여행보다 어렵고 힘든 여행이 나의 성장을 위해서는 오히려 필요합니다. 고통과 시련을 피하지 마십시오.

선악과를 건들지 않으려면 생명나무를 바라봐라
-전삼용신부-
헬렌 켈러의 『3일 동안만 본다면』 이라는 책을 보면 이러 말이 있습니다.
“만약 내가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유일한 소망 하나 있다고 하면 그것은 죽기 직전에 꼭 3일 동안만 눈을 뜨고 보는 것이다. 만약 내가 눈을 뜨고 볼 수 있다면 나는 나의 눈을 뜨는 그 첫 순간 나를 이만큼 가르쳐주고 교육해준 나의 선생 설리번을 찾아가겠다. 다음엔 친구들을 찾아가고 그다음엔 들로 산으로 산책을 하겠다. 다음날 이른 새벽에는 먼동이 트는 웅장한 장면, 아침에는 메트로폴리탄에 있는 박물관 오후에는 미술관 그리고 저녁에는 보석 같은 밤하늘의 별들을 보면서 하루를 지내고, 마지막 날에는 일찍 큰 길가에 나가 출근하는 사람들의 표정들. 아침에는 오페라하우스. 오후엔 영화관에서 영화를 감상하고 싶다. 집에 돌아와 내가 눈을 감아야 할 마지막 순간에 나는 이 3일 동안만이라도 볼 수 있게 하여준 나의 하느님께 감사한다고 기도를 드리고 영원히 암흑의 세계로 돌아가겠다.”
우리는 눈을 지니고 볼 수 있음을 당연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누군가에게는 우리의 일상을 단 하루만 살아보는 것이 평생소원일 수도 있습니다. 감사는 하려고만 하면 할 수 있지만, 할 마음이 없다면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소경이 됩니다.
관계 내에서 ‘감사’가 사라진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 관계를 더는 관계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믿음’이 사라져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감사는 믿음과 직결됩니다. 상대가 자신에게 더 많은 것을 해주고 있다는 믿음이 감사의 마음을 솟구치게 합니다.
이것은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하느님은 아담에게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주신 것을 믿는지 살펴보셨습니다. 바로 선악과나무를 당신께 바치는지 지켜보신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은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주셨음을 믿지 못했습니다. 감사히 봉헌해야 했던 선악과나무까지 차지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이와 똑같은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소작인들은 주인에게 수확철이 되면 소출의 일부를 바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그것을 바치기를 거부하고 그것을 받으러 온 하느님의 외아들까지 죽였습니다. 성경 전체의 흐름으로 따지자면 에덴동산의 선악과나 소작인들이 바쳐야 하는 소출의 일부는 ‘십일조’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유대인들이 십일조를 바치지 않았을까요? 겉으로는 잘 바쳤습니다. 그러나 ‘감사의 마음’이 빠져있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면 자신들의 주인의 아드님을 죽였기 때문입니다. 주인에게 감사했다면 아드님도 존경했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그런 사람들에게 더는 아드님을 내어주지 않으십니다. 아드님을 빼앗아 소출을 내는 백성에게 보내실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하느님의 나라를 잃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곧 하느님 나라이시기 때문입니다.
십일조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감사의 마음’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감사한 마음으로 봉헌할 수 있을까요? 내가 빵과 포도주를 봉헌하면 그 대가로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돌아온다는 것을 알면 됩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없습니다. 예수님 자체가 영원한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분은 우리가 바치는 선악과인 빵과 포도주에 담겨 오십니다.
감사의 마음이 생기려면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면 우리는 다 지옥행임을 믿으면 됩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서 성체로 들어오셔 사시는 예수님을 발견하면 됩니다. 만약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선악과에 손을 대기 전에 그 옆에 있는 ‘생명나무’를 볼 눈이 있었다면 선악과에 손을 대지 않았을 것입니다. 생명을 주는 나무가 곧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을 주셨으면 이미 우리는 하느님의 모든 것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니 무엇이 부족하다고 생각해서 불만을 가질 수가 없게 됩니다.
에덴동산에 생명나무도 있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헬렌 켈러 옆에서 나는 볼 수 있는 ‘눈’이 있음에 감사할 수 있듯이, 내 안의 생명나무를 발견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나무 때문에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게 됨을 믿읍시다. 구원은 내 행위나 공로가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사시기 때문에 얻어지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자신 안에서 성체로 오시는 그리스도를 발견하면서 감사한 마음이 솟아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감사하지 않는다면 생명나무를 가치 없게 여기는 사람이고 그들은 영원한 생명을 잃습니다.

-조재형신부-
장례미사엘 다녀왔습니다. 신부님께서 고인의 신앙과 봉사를 이야기하였습니다. 고인을 추모하기 위해서 많은 분들이 함께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고인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함께 추모하고 싶었습니다. 장례미사에 오신 분 중에 한국에서 알던 분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한 분은 같이 신학교에 다녔던 선배 신부님입니다. 신부님은 32년 전에 미국으로 오셨고, 미국에서 사제가 되었다고 합니다.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반가운 만남이었습니다. 다른 한 분은 서울에서 함께 꾸르실료 봉사하던 자매님입니다. 고인의 친척이었고, 장례미사에 참석하기 위해서 서울에서 왔다고 합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곳에서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인연으로 만나면서 예전에 읽었던 글이 새삼 떠올랐습니다. “선한 일은 아주 작은 일일지라도 행하고, 악한 일은 아주 작은 일일지라도 하지 마십시오.”
오늘 독서에서 우리는 요셉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요셉은 예수님의 삶과 닮은 점이 있습니다. 어떤 점이 닮았을까요?
첫째, 아버지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요셉은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았습니다. 형들이 질투할 만큼 아버지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느님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실 때, 타볼 산에서 거룩하게 변모하셨을 때도 하느님께서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표징과 가르침을 시기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둘째, 사랑하는 이들로부터 버림받았습니다. 요셉은 형제들에게 버림받았습니다. 은전 스무 닢에 형들은 동생을 팔았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배반당하셨습니다. 유다는 은전 서른 닢에 예수님을 팔아넘겼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배반하였습니다. 닭이 울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보셨고, 베드로는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모두 예수님을 배반하였고, 두려움에 숨었습니다.
셋째, 유혹을 받았습니다. 요셉은 타국에서의 외로움도 있었지만 유혹을 물리쳤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요셉의 굳건한 신앙을 보셨고, 요셉에게 큰 영광을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40일간 단식하셨을 때, 사탄의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사탄은 돌을 빵으로 만들어 보라고 하였습니다. 높은 데서 뛰어내려 보라고 하였습니다. 사탄에게 무릎을 꿇으면 재물을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탄의 유혹을 물리치셨습니다.
넷째, 용서하였습니다. 요셉은 자신을 버렸던 형제들을 용서하였습니다. 오랜 기근에 굶주렸던 가족들을 이집트로 내려왔습니다. 요셉의 용서로 작은 부족이었던 요셉의 가족은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을 용서하셨고, 평화를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용기를 얻었고,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12명이었던 제자들은 공동체를 세웠고, 공동체는 예수님을 머리로 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동생을 팔아넘긴 비정한 형제들이 있습니다. 주인이 보낸 종을 죽이고, 주인의 아들까지 죽였던 못된 포도원 소작인들이 있습니다. 이들도 닮은 점이 있습니다.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사랑해야 할 사람을 내쫓았고 죽였습니다. 사순시기를 지내면서 우리는 누구를 닮아야 할까요? 한없이 넓은 마음으로 형제들을 용서했던 요셉을 닮았으면 좋겠습니다. 배반했던 제자들을 용서하시고, 평화를 주셨던 예수님을 닮아야 하겠습니다.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이스라엘의 역사는 충실하신 하느님에 대한 반역과 불충실의 역사였습니다!
-양승국신부-
축구 시합을 관전하다보면 팀의 승리를 위해 탁월한 기량의 선수들도 중요하지만, 감독의 용병술도 아주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수 있습니다. 그래서 감독은 냉철하고 객관적이어야 하고, 사사로운 개인적 감정이 휘말리지 말아야 합니다.
전반전을 뛰고 나서 그 결과에 따라 라커룸을 향하는 감독의 머릿속에는 벌써 여러가지 생각들이 교차됩니다. 오늘 컨디션이 좋지 않은 선수, 그래서 최대한 빨리 교체해줘야 하는 선수는 누구인지? 그 포지션에 누구를 투입하면 좋겠는지, 등등.
그리고는 구상한데로 가차없이 교체를 실시해야 합니다. 교체 대상인 선수의 성격이 아주 과격해서, 아무런 죄도 없는 물병을 발로 걷어차거나 욕을 해도 개의치 말아야 합니다. 때로 팀웍 상승을 위한 선수 길들이기 차원에서 일부로 빼버리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우리는 낡은 포도주와 새 포도주가, 옛 백성과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이 어떻게 교체되는지를 똑똑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전반전에 출전했던 과거의 옛 백성들의 처신은 해도 해도 너무했습니다. 참다 참다 인내심에 한계에 도달한 하느님께서 즉시 선수 교체를 단행하신 것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포도밭 노래’를 통해 옛 백성의 그릇된 처신과 그에 따른 하느님의 진노에 대해서 잘 예언하고 있습니다.
“땅을 일구고 돌을 골라내어 좋은 포도나무를 심었네. 그 가운데에 탑을 세우고 포도 확도 만들었네. 그러고는 좋은 포도가 맺기를 바랐는데 들포도를 맺었다네. 내 포도밭을 위하여 내가 무엇을 더해야 했더란 말이냐? 내가 해 주지 않은 것이 무엇이란 말이냐? 이제 내가 내 포도밭에 무슨 일을 하려는지 너희에게 알려 주리라. 울타리를 걷어치워 뜯어 먹히게 하고 담을 허물어 짓밟히게 하리라.”(이사야서 5장 2~5절)
이스라엘은 하느님으로부터 좋은 포도밭을 선물로 받았으나, 흥청망청 놀고 먹고 마셨으며, 엉뚱한 곳에 신경 쓰느라 포도밭을 황폐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밭은 정직합니다. 주인이 조금도 관심도 가지지 않는데, 풍성한 소출은 절대 기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주인의 아들까지 죽여버린 포도밭의 소작인들은 이중적인 처벌을 받게 됩니다. 자신들이 임대한 포도밭은 다른 소작인들의 손으로 넘어가게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아들을 죽인 결과로 주인으로부터 죽임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충실하신 하느님을 향한 반역과 불충실의 역사였습니다. 그 역사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예레미야 예언자 역시 이 부분에 대해 깊은 탄식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너희는 순종하지도 귀를 기울이지도 않고, 제멋대로 사악한 마음을 따라 고집스럽게 걸었다. 너희는 앞이 아니라 뒤를 향하였다. 너희 조상들이 이집트 땅에서 나온 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나는 내 모든 종들, 곧 예언자들을 날마다 끊임없이 너희에게 보냈다. 그런데도 너희는 나에게 순종하거나 귀를 기울이지 않고, 오히려 목을 뻣뻣이 세우고 자기네 조상들보다 더 고약하게 굴었다.”(예레미야서 7장 24~26절)
하느님의 말씀도 무시했던 그들은 메시아로 보내신 당신의 아들 예수님 역시 무시했습니다. 사악한 소작인들이 한 것처럼 아들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고 갔습니다. 이제 그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죗값을 톡톡히 받을 것입니다.자신들에게 주어졌던 선물은 이제 새로운 시대 새로운 백성들의 손에 넘어갈 것입니다.
오늘의 비유 말씀은 심판의 말씀인 동시에 희망 가득한 약속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불의한 옛백성들에게는 심판의 말씀이나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하는 새로운 백성들에게는 구원과 기쁨을 주는 생명의 말씀입니다.
옛백성의 실패와 멸망은 새로운 아들이신 예수님을 처형함에서 절정에 도달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흘리신 계약의 피로 인해 새로운 백성이 출범한 것입니다.
하느님의 인류 구원 계획은 이스라엘의 불충실과 실패로 인해 무산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영광스런 부활로 인해 새로운 백성이 탄생한 것이고, 그 백성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영광과 구원이 선물로 주어질 것입니다.

“주께서 하시는 일이라 우리에게는 놀랍게만 보입니다.”(마태 21,42).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은 ‘포도밭의 사랑의 노래’를 들려줍니다.
(포도밭 주인(하느님)은 당신의 포도밭(이스라엘 백성)을 소작인(백성의 지도자)들에게 맡깁니다. 그리고 주인은 당신의 종(예언자)들을 여러 차례 보내지만 소작인들을 그 종들을 학대합니다. 하나는 매질하고, 하나는 돌로 쳐 죽이기까지 하였습니다. 결국 주인이 사랑하는 아들(예수 그리스도)까지 보내지만, 그마저도 포도밭 밖으로 끌어내어 죽입니다.)
이 이야기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얼마나 신뢰하고 사랑하고 계시는지를 실감나게 해 주는 노래입니다.
그 신뢰와 사랑이 너무도 커서 아들의 목숨까지도 건네주어 버리는 무방비의 신뢰와 사랑의 노래입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이 신뢰와 사랑의 노래는 애절한 그 신뢰와 사랑이 거절당하고, 배반당하고, 끝내는 목숨까지 살육당하는 처참하기 그지없는 가슴 아픈 노래입니다.
이 크신 하느님의 사랑과 신뢰에 우리는 얼컥 눈물이 젖습니다.
한편, 이 노래는 그 큰 사랑과 신뢰를 거부해버리고 마는, 나약한 우리 인간의 배신 이야기입니다.
또한 고귀한 사랑과 신뢰마저도 한갓 우리 자신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 짓부숴버리고 마는, 배은망덕의 패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이야기를 통해, 사제들과 원로들을 고발하며 꾸짖으십니다.
어리석은 인간의 꾀와 작태를 비웃으시며, 하느님의 깊은 섭리와 계획을 밝히고 계십니다.
집짓는 ‘사람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리돌이 되었다’는 성경말씀의 인용을 통해, 비록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되겠지만 오히려 그 죽음을 통해 새로운 구원의 시대가 펼치신다는 역설의 신비를 가르쳐줍니다.
당신께서는 버려진 돌이셨지만, 머릿돌이 되시어 새로운 집인 새로운 백성을 세우셨음을 말해줍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한정적으로 구원의 역사가 보장되었다는 유대인들의 생각은 파기되고, 새로운 이스라엘 백성인 교회공동체에 보편적 구원이 사명으로 맡겨졌음을 드러냅니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특별히 포도원 주인의 믿음과 사랑을 보게 됩니다.
도조를 받으러 보낸 종들이 두 번씩이나 무참히 맞고 죽는 배신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아들을 보내주시기까지 베풀어지는 믿음과 사랑입니다.
그것은 마침내는 당신의 아들마저도 죽음을 당하지만, 끝까지 포도원을 포기하시지 않으시는 무한한 신뢰와 사랑입니다.
이는 아무리 인간의 죄가 크다 하여도 인간의 죄를 뛰어넘는 하느님 계획의 초월성과 구원의 신비를 보여줍니다.
참으로, “주께서 하시는 일이라 우리에게는 놀랍게만 보입니다.”(마태 21,42). 사실, 도조를 바치지 않고 못된 일을 저지른 소작인들, 그들은 일상의 삶 속에서 잘못과 죄를 반복하고 있는 우리들의 자아상 입니다.
소작인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끊임없이 주시는 포도밭 주인에게 여전히 우리의 권리만 주장하고 있는 완고한 우리들의 자아상 입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하느님을 밀쳐내고, 그분의 권리를 강탈하지는 말아야 할 일입니다. 탐욕으로 인해 주인의 아들마저도 죽이고 마는, 악한 마음과 배은망덕은 말아야 할 일입니다.
지금 당장에 주시는 회개의 때를 잘 붙잡아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뜻에 따라 좋은 결실을 맺고, 그 풍성한 소출을 도조로 바쳐야 할 일입니다.
그렇게 바로 오늘이 그분의 신뢰와 사랑에 응답해야 할 때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마태 21,42)
주님!
당신께서 제게 하신 일, 놀랍기만 합니다.
도망칠수록 더 강한 사랑의 철창으로 꼭 가두시고,
제 안에 꿈틀거리는 반역을 멈추게 하십니다.
거부되고 버려지고 넘어져도 오히려 그를 통해 구원의 섭리로 이끄시고,
감춰둔 사랑의 신비를 보여주십니다.
언제나 제 머리 위에 당신 사랑을 두고, 당신께 속한 이로 살게 하소서! 아멘.

-조욱현신부-
복음: 마태 21,33-43.45-46: 저 자는 상속자다. 자, 저 자를 죽이자!
오늘 복음의 밭 임자는 포도밭을 일구고 울타리를 치고 포도 확을 파고 탑을 세웠다. 소작인들이 했어야 할 일들을 직접 하였다. 소작인들은 그렇게 많은 일을 해야 했던 것이 아니다. 주어진 것을 잘 지키기만 했어도 되었다. 모든 것이 다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나왔을 때, 율법을 주셨고 도시를 세워주셨으며 성전을 마련해 주셨고 제단을 준비해 주셨다. 그러고는 “멀리 떠나셨다.”(33절) 하느님께서는 끈기 있게 그들을 기다려 주셨다.
밭 임자는 “소출을 받아 오라고”(34절) 자기 종들, 즉 예언자들을 보냈다. 소출은 행실로 드러나는 복종심을 뜻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토록 세심한 보살핌을 받고 나서도 게으름을 피워 소출을 내지 못했을 뿐 아니라, 자신들을 찾아온 종들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밭 임자에게 용서를 청해야 했지만 그들은 성을 내고 자신들의 손에 피를 묻히기까지 했다. 그러나 주인은 그들의 회개를 위해 계속 종들을 보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주인은 아들을 보낸다.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37절) 이 말은 글자 그대로 소작인들이 그렇게 할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주님은 소작인들이 아들을 죽일 줄 알고 있었다. 소작인들은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듣든, 또는 듣지 않든”(에제 2,5)이라며 다른 곳에서 말씀하신다. 그들이 당신의 종들에게는 완고하게 굴었을지라도 아들의 존귀함에는 경의를 표했어야 마땅하기 때문이다.
소작인들은 어떻게 했는가? 자기들의 잘못에 대해 용서를 청할 시간이 있었지만, 예전에 저지른 죄보다 더 큰 죄를 짓는다. “‘저자를 죽여 버리고 우리가 그의 상속 재산을 차지하자.’하고 말하면서, 그를 붙잡아 포도밭 밖으로 던져 죽여 버렸다.”(38-39절)고 한다. 그들은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하고 소리치며, 주님을 도성 밖에서 십자가에 못 박기도 하였다. 그들은 율법이라는 상속재산을 차지하지 못하였고 스스로에게 죽음을 선고하고 말았다.
“그러니 포도밭 주인이 와서 그 소작인들을 어떻게 하겠느냐?”(40절) 하고 물으시자 그들은 “그렇게 악한 자들은 가차 없이 없애 버리고, 제때에 소출을 바치는 다른 소작인들에게 포도밭을 내줄 것입니다.”(41절)고 대답한다. 그 대답으로 그들은 자기들의 죄를 인정하였다. 주님께서도 당신의 말씀으로 이것을 암시하셨다. “집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동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42-43절)
그리스도께서 ‘돌’로 불리시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그분께서 놓으신 기초는 튼튼하여 그분 위에 서 있는 이는 거짓스런 속임수에 넘어가거나 박해의 폭풍에 흔들리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둘째, 사악한 자들은 그분 안에서 완전하게 파멸하기 때문이다. 돌과 부딪히는 것은 산산조각 나지만 돌은 멀쩡하다. 돌 위에 떨어지면 스스로 부서지고 만다. 그들의 파멸은 돌의 힘이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위에 떨어진 그들의 잘못이 그들을 그렇게 만든다.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자기들에게 하는 이야기인 줄 알고 예수님을 죽이자고 마음먹었지만 군중이 두려웠다. “군중이 예수님을 예언자로 여겼기 때문이다.”(46절) 그 군중들에게 변을 당할까 두려워 한 것이지만 그 군중들도 결국은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하고 외칠 사람들이었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은 참으로 주님의 일을 올바로 따르고 있는 소작인의 삶을 살고 있는가? 반성하며 살아갈 수 있는 은총을 청하자.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
하며 그들에게
아들을 보냈다.(마태 21, 37)
-한상우신부-
하느님의 뜻은
피조물인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생명에 존중이
빠져버리면
순식간에
욕심은 생명마저
집어삼킵니다.
눈과 귀를
멀게 하는
욕심입니다.
욕심이 끝내
화를 부릅니다.
빼앗고 빼앗기는
악순환만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의 모든 것은
실은 하느님께
되돌려드려야 할
하느님의 것입니다.
인간의 욕심은
하느님의 자리까지
마구 침범합니다.
왜곡된 욕심은
하느님께서 주신
하나뿐인
생명까지도 끝내
파국의 관계로
몰고갑니다.
신앙인의 본분은
생명을 존중하는
평화에 있습니다.
평화의 실천이
역사의 교훈입니다.
역사의 교훈은
우리를 하느님께로
이끕니다.
아름다운 삶이란
생명의 질서를
하느님 안에서
회복하는 일입니다.
생명의 질서는
오만함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존중을 우리가
배우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들이
사람을 사람으로
존중하는 회복의
시간이길
기도드립니다.
복음은 이렇듯
존중에 있습니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독서에는 사랑하는 아들을 잃는 아버지들이 등장합니다. 모두 하느님 아버지를 가리키고 있지요.
"어떤 밭 임자가 포도밭을 일구어 ... 소작인들에게 내주고"(마태 21,37)
이처럼 자기 밭을 소작인들에게 내준 포도밭 주인이 합당한 소출을 받으려 하다가 거부당합니다. 주인이 보낸 종들은 매질 당하거나 돌에 맞아 죽어가지요. 세상이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언자들을 다루어 온 방식입니다.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마태 21,37).
하지만 주인은 그런 소작인들에게서 신뢰를 거두지 않습니다. 자칫 아들을 잃을 수도 있다는 불안 따위는 아예 없는 듯합니다. 그저 자기 아들을 자기처럼 맞이하리라고 너무 순진하게 생각한 것 같습니다. 누군가를 의심하거나 왜곡하지 않는 비유 속 아버지는 하느님을 닮았습니다.
제1독서에서는 이집트 탈출이라는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적 대사건을 준비하는 성조의 일화가 펼쳐집니다.
"자, 내가 너를 형들에게 보내야겠다"(창세 37,13).
요셉을 편애하던 야곱은 바로 그 때문에 형들이 요셉을 미워하는 줄도 모르고 형들에게 그를 심부름 보냅니다. 아마 알았어도 형제간에 있게 마련인 소소한 질투 정도로 여겼을 테지요. 설마 요셉을 죽이고 싶어할 정도의 증오였다고는 상상조차 못했을 겁니다. 오늘 복음 속 포도원 주인처럼 순진했던 것 같습니다.
한바탕 비극적 사건이 두 독서 안에서 벌어집니다. 요셉은 구덩이에 던져졌다가 "은전 스무 닢에" 이집트로 팔려가고, 포도밭 주인의 아들은 소작인들에 의해 "포도밭 밖으로 던져"져 죽음을 당합니다. 그리고 성부의 외아들 예수님은 "은전 서른 닢"에 악인들 손으로 넘겨지실 것입니다.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마태 21,42).
고통스런 사건이 있었지만 결국 요셉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의 파스카 사건을 위해 준비하신 존재로 역사에 새겨집니다. 포도밭 주인의 아들은 제때에 소출을 바치는 다른 소작인들에게까지 포도밭이 개방되게 만든 단초가 되지요. 또 우리의 예수님은 완전한 희생 제사를 통해 구원의 문을 이스라엘을 넘어 온 인류에게 활짝 열어젖히십니다.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
오늘 만난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죄로 기울어지는 우리의 습성과 거듭되는 배반, 죄악에도 불구하고 단 한 번도 우리에 대한 신뢰를 거두지 않으시는 하느님! 속고 또 속아 당신까지 해쳐도 또 믿어 주시는 분!
그분은 아드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인 우리에게 거듭거듭 아드님을 보내십니다. 그분의 수난과 죽음을 통해 부활의 은총을 인류에게 주시고자 당신 존재가 무너지는 희생 제사를 기꺼이 허락하십니다. 그 덕분에 우리는 민족적 정통성을 넘어 "제때에 소출을 바치는 소작인으로" 포도밭을 얻게 된 이들들이지요.
자격도 못 되는 우리에게 쏟아지는 아버지의 신뢰에 감사할 뿐입니다. 그래서 그 신뢰에 뭐라도 응답해 드리고 싶은 오늘입니다.

우리는 주시는 대로 받는 소작인들
-김찬선신부-
오늘 독서와 복음의 공통점은 버림받음입니다.
요셉은 형제들에게 버림받고 주인의 아들은 소작인들에게 버림받습니다.
그래서 비유의 끝에 복음은 다음 시편으로 얘기의 결론을 짓습니다.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그런데 요셉이 형제들에게 버림받는 이유는 자기들도 아버지 야곱의
사랑을 받고 싶은데 요셉이 독차지하고 있으니 자기들이 아버지의 사랑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요셉을 없애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고,
복음에서 주인의 아들이 버림받는 이유도 주인의 땅을 소작인들이
차지하고 싶은데 그러려면 아들을 없애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시기 질투와 탐욕을 지닌 인간에게는 이 세상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일에 예수님과 예언자들이 걸림돌로 여겨지고,
그래서 그들에 의해 버림받은 돌이 되지만
하느님은 그 걸림돌과 버림받은 돌을 모퉁이 돌 삼아 구원을 이루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신앙인이라면 우리는 이 얘기들에서
몇 가지 가르침을 얻을 수 있어야 하는데 첫째로
이 세상 돌아가는 것 안에서 하느님을 보지 못하면
현세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내세에 대해서도 절망케 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들의 불의와 악행 앞에서
우리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흔들리면서 하느님은 어디 계시냐고,
하느님이 계시기는 하는 거냐고 절망적인 절규를 하게 되겠지요.
그런데 이런 우리에게 오늘 독서와 복음은 인간의 불의와 악행이
아무리 판을 쳐도 하느님의 구원 의지와 구원 능력을
의심치 말고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함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뒤집어 얘기하면 인간의 불의와 악행이 아무리 판을 쳐도
우리는 믿음의 눈을 가지고 하느님으로 인한 희망을 가져야 합니다.
또 다른 가르침은 우리가 백성의 원로들과 수석 사제처럼
되지 말아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명백하게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비유의 그 못된 자들이 되지 말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권력자들 때문에 절망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 희망을 잃지 말라고 하시면서
다른 한편 권력자들에게는 까불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 소유를 자기 소유로 만들려고 들지 말라는 것과
하느님께서 주시는 소작으로 만족하라는 것인데,
그런데 하느님 소유란 무엇이고 자기 소유로 만드는 것은 무엇입니까?
제 생각에 그것은 하느님 소유란 하느님께서 만드신 모든 것,
곧 세상인데 이 세상을 하느님과 상관없는 자기들 세상,
곧 세속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는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하고는
거기서 왕 노릇을 하려는 사람은 비록 최고 권력자가 아니어도
하느님 나라를 자기 것으로 만드는 세속적인 사람들이겠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예외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본당 공동체에서 어느 단체를 내 마음대로 주무른다면,
나의 자녀를 하느님의 자녀가 아니라 내 소유로 여긴다면,
사람은 물로 하느님도 거부하고 내 안에서 갇혀 산다면 마찬가지 아닐까요?
우리는 소작인이 되어야 하고 소작을 받아야지만 땅을 차지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소유를 강탈하려고 들지 말고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느님 나라가 그들의 것"이라는 말씀을 명심하는 우리,
주시는대로 받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관계 내에서 ‘감사’가 사라진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 관계를 더는 관계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믿음’이 사라져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감사는 믿음과 직결됩니다. 상대가 자신에게 더 많은 것을 해주고 있다는 믿음이 감사의 마음을 솟구치게 합니다.
에덴동산에서 하느님은 아담에게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주신 것을 믿는지 살펴보셨습니다. 바로 선악과나무를 당신께 바치는지 지켜보신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은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주셨음을 믿지 못했습니다. 감사히 봉헌해야 했던 선악과나무까지 차지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성경 전체의 흐름으로 따지자면 에덴동산의 선악과나 소작인들이 바쳐야 하는 소출의 일부는 ‘십일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에덴동산에 생명나무도 있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헬렌 켈러 옆에서 나는 볼 수 있는 ‘눈’이 있음에 감사할 수 있듯이, 내 안의 생명나무를 발견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나무 때문에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게 됨을 믿읍시다. 구원은 내 행위나 공로가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사시기 때문에 얻어지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자신 안에서 성체로 오시는 그리스도를 발견하면서 감사한 마음이 솟아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감사하지 않는다면 생명나무를 가치 없게 여기는 사람이고 그들은 영원한 생명을 잃습니다.
-전삼용신부-
----
'오늘의 복음 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0년 3월 15일 사순 제3주일 (0) | 2020.03.14 |
---|---|
2020년 3월 14일 사순 제2주간 토요일 (0) | 2020.03.13 |
2020년 3월 12일 사순 제2주간 목요일 (0) | 2020.03.11 |
2020년 3월11일 사순 제2주간 수요일 (0) | 2020.03.10 |
2020년 3월 10일 사순 제2주간 화요일 (0) | 2020.03.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