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0년 1월 30일 연중 제3주간 목요일

Margaret K 2020. 1. 29. 19:47

2020 1 30일 연중 제3주간 목요일


등불은 누구나 등경 위에 얹어 놓는다

누구든지 들을 귀가 있거든 들어라.” 

(마르 4,21-25)

 

 "Is a lamp brought in to be placed under a bushel basket
or under a bed, and not to be placed on a lampstand?

"Take care what you hear.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다윗은 주님께서 해 주신 일과 축복에 대하여 겸손한 마음으로 감사드린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등경 위에 올려놓듯 감추어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라고 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다른 것을 비추는 등불처럼 신앙인들에게 이웃과 세상의 참된 모범으로 살아야 한다는 윤리적 도덕적 잣대가 강조되고는 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등불이 빛으로 주위를 비춘다는 사실에만 치우쳐, 그 등불 자체가 빛을 낸다는 고유한 성질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을 잊어버립니다.등불은 그 자체로 빛납니다.
빛은 빛을 발할수록 더 많은 것을 비추지요.
다른 이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의무 때문도 아니고, 다른 이를 비추어야 한다는 희생 때문도 아닌, 그저 등불이 등불로서 제 역할에 충실할 때 더 많은 빛이 널리 퍼져 나갑니다.
이런 논리가 오늘 복음 마지막 구절에 그대로 나타납니다.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더 가지려고 하다 보면 제 본모습을 잃어버리게 되는 위험에 빠집니다.
오히려 자신의 모습에 충실하고 자신의 고유함을 되짚어 보며, 나 자신이 다른 이와 어떻게 다르고, 그 다름으로 나는 이 세상을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지 사유하는 데서 우리는 더 많은 것을 가질 수 있습니다.세상의 잣대를 따르기보다, 각자의 고유하고 소중한 모습을 제 삶의 자리에서 만들어 나가는 길, 그것이 신앙이고, 그 자리에 하느님께서 함께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내가 두 발을 디디고 살아가는 곳에 함께하십니다.
하느님과 동행하려면 내가 허투루 보내는 나의 시간과 공간을 먼저 챙겨 나가야겠습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만약 어떤 분이 다른 분의 의견에 반대 표명을 강하게 한다면 이 둘의 관계를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우선 합리적인 반대라고 한다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사사건건 반대하고 있다면 어떨까요? 또 그렇게 사람들 앞에 소리지를 것도 아닌데 강하게 말한다면 아마 이렇게 단정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둘의 사이가 좋지 않구나.”

정말로 좋은 사이라면 이렇게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무조건 받아들일 것이고, 그렇게 할 수 없다면 몰래 불러서 둘이서 문제의 해결을 먼저 이야기할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어떤 분이 주님에 대한 말을 합니다. 사랑이신 주님이라면 내게 이럴 수 없다면서 사람들 앞에서 큰 소리로 말합니다. 성경의 주님 말씀도 너무 현실성이 없다면서 부정합니다. 이분과 주님의 관계는 어떻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분명히 좋지 않은 관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의 관계가 절대로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기 힘들다고 생각된다면, 그리고 다른 이들에게 주님에 대한 자신의 부정적 생각을 털어놓게 된다면 주님과의 관계가 사랑이 아닌 적대 관계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우리는 주님과 어떤 관계를 만들고 있습니까?

주님께서는 우리를 세상의 빛이 되게 하셨습니다. 즉, 어둠 속에서 빛을 비추고, 구렁텅이에 빠진 이들을 위하여 우뚝 서도록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등불을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습니다. 즉, 세상의 빛이 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분명 주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모습이 되지 못합니다. 주님을 반대하는 것이고 주님과 적대 관계에 들어서는 것이 됩니다.

세상의 빛이 되는 것은 사랑을 실천하는 우리의 모범입니다. 그렇다면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세상의 빛으로 사는 지혜로운 사람의 모습이고,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등불을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이 아닌 세상과 특별한 사랑의 관계를 만들려고만 합니다.

주님의 뜻을 따르는 우리의 말과 행동이 곧 주님께 해드리는 것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의 사랑을 보시고 그 사랑보다 더 큰 사랑, 구원이라는 가장 큰 선물로 보태서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단순히 눈에 보이는 욕심과 이기심에 집중하게 할 뿐 아무것도 주지 않으면서 주님과 멀어지게 합니다.

주님과 적대 관계가 아닌, 사랑의 관계를 만들어야 합니다.
사랑에 빠질 때 그것을 이룰 가능성을 미리 헤아려야 하는걸까? 어떤 계산도 있을 수 없다. 우리는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다(빈센트 반 고흐).



등불은 등경 위에 놓아야 합니다.


상처는 그냥 흘려버리세요.

책을 읽다가 한참을 머무르게 하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책의 저자는 상담을 오랫동안 해 오고 있었는데, 어느 날 만난 40대 중년의 남성을 상담하면서 느낀 점을 이야기합니다.

이 중년의 남성은 어렸을 때 받은 상처 하나가 지금을 제대로 살지 못하게 한다고 주장합니다. 폭력적인 아버지 밑에서 심지어 어머니를 향해 죽이겠다고 칼을 빼 들고 분노하는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 없어서 제대로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계속 상담하면서 가족에 대한 원망이 반복된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사회성이 모자란 것, 대인관계의 어려움을 느끼는 것 등등 모두가 불우한 가정환경 탓으로 돌리는 결론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런 확신을 상담자는 얻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 자신의 상처를 이용하고 있구나.’

불우한 과거를 이야기하며 자기를 알아달라고, 지금 이런 상황을 이해해 달라는 뜻이었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의 모습을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는 자신의 상처에만 주목합니다. 이 상처가 자신을 제대로 살지 못하게 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남이 알아준다고 해서 상처가 극복되지 않습니다. 내가 나를 알아줘야 합니다.

그래도 수고했다고, 그래도 잘살고 있다고, 그래도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는 내가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나의 상처를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냥 흘려버려야 합니다.                   

더 배우려면 이젠 가르쳐라!

-전삼용신부-


 케네디 대통령은 중요한 연설을 앞두고 항상 원고를 외우고, 거울 앞에서 예행연습을 했다고 합니다. 그는 어느 대목에서 톤을 높여야 할지, 또 어떤 몸짓을 써야 할지를 미리 정하고 그대로 연습을 하는 것입니다. 시각은 많은 정보를 동시에 입수하고, 의식하고, 상상합니다. 그래서 성공체험을 마음속에 그려 두는 것입니다.

      이것을 몇 번 반복하는 사이에 기억으로 자리 잡습니다. 이것은 학습과 같습니다. 똑같은 장면은 물론이고 비슷한 장면을 목격했을 때 마음과 몸이 반응해서 집중력을 높입니다. 불안감은 해소되고 성공체험만이 뇌 속에 그려집니다. 케네디는 거울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이 훈련을 규칙적으로 반복하며, 청중들이 열광하는 장면을 머리에 떠올립니다.

      이런 예행연습을 통해 케네디는 자신감을 갖게 되며, 이미 성공을 예감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모습과 청중의 반응은 이미 자신의 뇌 속에 깊이 각인 되고, 이 장면은 연설 현장에서 그대로 재현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읽은 것의 10%, 들은 것의 20%, 본 것의 30%를 기억합니다. 보면서 들은 것은 50%를 기억합니다. 들은 것의 20%를 기억할 수 있는 사람은 남에게 말하며 가르치면 80%를 기억하고, 행동하며 말하며 가르치면 90%를 기억한다고 합니다.

      선생님이나 교수는 물론 대중을 상대로 정치를 하는 정치인이나 행정을 담당하는 부서의 장이나 군의 지휘관들은 참모와 휘하의 병사들을 대상으로 연설하며 가르치면서 자신의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남을 가르치면 돈 벌어 가며 자기공부를 하는 셈이니 일석이조가 아닐까요?

[출처: ‘가르치면서 배운다’, 이인수, 들판, 다음 블로그]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견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19)

      우리 모두는 스승이 되도록 파견 받았습니다. 그리고 스승의 역할을 할 때 주님께서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일상에서는 가르치려 들면 교만하고 버릇없다고 핀잔을 듣게 됩니다. 그렇다고 입을 다물고 있으면 아는 것마저 잊어버립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에게 주님께서 함께 계십니다.

      그러면 어떻게 가르쳐야 할까요? 기회를 노려야합니다. 선생님이라고 항상 가르치는 것은 아닙니다. 교실에서 들을 자세가 된 사람들에게 가르칩니다. 그런 상황을 노려야합니다. 살아가면서 모든 이들을 제자로 삼으라고 하신 예수님의 명령을 잊지 않으면 됩니다. 그러면 적당한 때, 적당한 상황이 눈에 들어오고 그때 가르치면 됩니다.

      가르치면 무엇이 좋을까요? 더 많이 알게 됩니다. 많이 안다고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가르치기 때문에 더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다음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는 땅에 대해 말씀하시고 이어서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등불을 가져다가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겠느냐? 등경 위에 놓지 않느냐? 숨겨진 것도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도 드러나게 되어 있다.”

      말씀의 씨가 땅에 뿌려져 열매를 맺으면 그 열매를 누군가가 따먹어야합니다. 바로 이웃이 따먹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깨달아 나의 삶을 바꾸어놓은 진리가 있다면 그 열매를 이웃에게도 전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지 않는 사람은 아직 열매를 맺지 못하는 땅입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새겨들어라. 너희가 되어서 주는 만큼 되어서 받고 거기에 더 보태어 받을 것이다.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나에게서 맺은 말씀의 열매를 누군가에게 전한다면 30배 맺히던 것이 60배, 100배가 맺게 되겠지만, 전하지 않으면 다시 세상 욕심과 육체의 욕망, 혹은 교만에 사로잡혀 열매를 맺지 못하는 땅으로 전락해버린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아직 완전하지 못할 때도 제자들을 계속 파견하시며 사람들을 가르치게 하셨습니다. 그 안에 있는 것들이 더욱 자라나게 하시기 위함이셨습니다. 가르치면서 배워야합니다. 배우기만 하면 한계가 있습니다. 아무리 오래 혼자 수련을 한다고 해도 깨달음의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가르치면 어렴풋하게 알던 것을 명확히 알게 되고 또 모르는 것까지 주님께서 다 알려주십니다. 더 가지려면 더 내어놓아야 하는 것은 모든 것에 해당하는 진리입니다.


-조재형신부-


30년 전입니다. 부제서품을 앞두고 30일 피정을 했습니다. 매일 기도하고, 산책하는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당시에는 눈이 많이 왔습니다. 산과 들이 하얗게 변했고, 제 마음도 정화되기를 바랐습니다. 저녁 먹고 동료 중에는 침묵 중에 눈 집을 만들기도 했고, 눈사람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저도 지도신부님에게 눈이 오는 피정의 집에 대한 느낌을 말씀드렸습니다. 겨울나무 가지에 핀 눈꽃은 참 아름답습니다. 눈사람을 만들 때입니다. 처음에는 눈이 조금씩 뭉쳐지지만, 눈사람이 커지면 눈이 더 많이 뭉쳐집니다. 떡이 크면 떡 고물이 많이 묻듯이, 눈사람이 크기 때문입니다. 눈에 대한 이야기를 하나 더 하고 싶습니다. 초등학교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물었습니다. 눈이 녹으면 어떻게 될까요? 아이들이 대답했습니다. 길이 더러워집니다. 물이 됩니다. 눈 속에 있던 것이 나타납니다. 여러분은 무어라고 대답하겠는지요? 한 아이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봄이 옵니다. 눈이 녹으면 날이 따뜻해지고 곧 봄이 온다는 아이의 생각이 놀라웠습니다. 따뜻한 마음으로 세상을 보면 세상은 따뜻하게 보입니다.

 

성지순례에 오는 분이 있습니다. 처음 오시는 분도 있지만 대부분 몇 번씩 순례를 하십니다. 순례를 통해서 얻는 기쁨과 은총이 크다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 순례 오기 전에 성서를 읽기도 하고, 단식하기도 하고, 꾸준히 준비합니다. 성지순례는 비용과 시간이 필요합니다. 더 열심히 일하고, 시간을 모아서 순례에 함께 합니다. 갈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경치를 보고, 성전을 보고, 유적을 보기에 바쁨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역사를 보고, 순교자를 보고, 신앙의 유산을 보게 됩니다. 순교자들의 뜨거운 신앙을 보면서 따라하겠다고 다짐하기도 합니다. 배교자의 나약함을 보면서 지금 식어가는 나의 신앙을 되돌아봅니다. 본당의 피정과 교육도 처음 오시는 분도 있지만 대부분 오시는 분이 옵니다. 피정과 교육을 통해서 얻는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주보를 보시고, 일정을 조절합니다. 대자나 대녀에게도 소개합니다. 육신의 건강을 위해서 맛있는 음식이 필요하듯이, 영혼의 건강을 위해서도 유익한 피정과 교육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경제적인 부분은 사회복지 제도와 연금으로 함께 나눌 수 있는 여지가 있습니다. 대부분의 선진국은 이런 사회보장 제도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 아픈 사람, 노인, 장애인에 대한 배려가 잘 되어 있습니다. 등록금이 없거나 있더라도 아주 적습니다. 돈이 없어서 공부 못하는 학생은 없도록 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의료보험, 국민연금이 잘 되어 있습니다. 상대적으로 싼 의료비용으로 최상의 의료 혜택을 받고 있습니다. 문화적인 부분도 함께 나눌 수 있는 여지가 있습니다. 인터넷은 우리가 원하는 문화적인 욕구를 충족시켜 주고 있습니다. 스스로 배우려고 하면 배울 수 있는 시설도 많습니다. 주민 센터나 구청에서는 다양한 문화 시설을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습니다. 도서관, 고궁, 미술관, 박물관도 관심만 있으면 쉽게 찾아갈 수 있습니다. 건강을 위한 시설도 동네마다 잘 되어 있습니다. 동네 하천도 정비되어서 산책하기 좋습니다. 곳곳에 운동 시설이 있어서 마음만 먹으면 체력단련도 할 수 있습니다.

 

신앙과 영혼의 문제는 함께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시원한 물가로 데려갈 수는 있지만 억지로 물을 먹일 수 없습니다. 경제, 문화, 건강은 갈망과 욕망이 있어서 누군가 도와주면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곤 합니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을 주는 진리, 말씀, 신앙은 누군가 도와주려하면 반발하곤 합니다. 그만큼 갈망과 열의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인본주의, 물질주의, 자본주의, 상대주의, 세속화에 익숙한 현대인은 인류의 현인들이 남겨준 영적인 에너지와 힘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물에 들어가야 수영을 배우듯이, 운전대를 잡아야 운전을 배우듯이, 신앙은 신앙생활을 해야만 그 깊이와 가치를 알 수 있습니다. 새벽 공기를 마셔본 사람은 일찍 일어납니다. 그 느낌을 알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영적인 가치와 보물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안타깝게 여기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너희가 되어서 주는 만큼 되어서 받고 거기에 더 보태어 받을 것이다.”

사랑하시는 성자의 이름으로 저희가 옳은 일에 힘쓰게 하소서. 당신 종의 집안은 영원히 당신의 복을 받을 것입니다. 주님 말씀은 제 발에 등불, 저의 길을 밝히는 빛이옵니다


제자들은 등불 같은 존재입니다. 활활 타올라야 하고, 동료 인간들의 어두운 삶을 환히 비춰줘야 합니다!

-양승국신부- 

 

오늘 복음은 몇 번을 읽고 묵상해도 아리송한 게 감이 확 와닿지 않습니다. “누가 등불을 가져다가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겠느냐? 등경 위에 놓지 않겠느냐? 숨겨진 것을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도 드러나게 되어 있다. 누구든지 들을 귀가 있거든 들어라.”(마르코 복음 4장 21~22절)

 

 때로 우리들 귀가 붙어 있기는 한데, 장식용으로만 활용될 뿐, 본연의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좀 더 귀를 기울여봐야겠습니다. 눈으로만, 인간적인 머리로만 읽고 이해하려고 애를 쓰지 말고, 마음의 눈, 영혼의 눈, 사랑의 눈으로 복음을 대하고자 노력해야겠습니다.

 

 등불은 숨겨둘 것이 아니라 높은 등경 위에 올려놓아, 주변을 환히 비추도록 해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좀 더 곰곰이 생각해보니, 아주 조금 이해의 폭이 생겼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로서, 그분의 가르침으로 인해 어떤 소중한 깨달음이나 깊은 통찰을 얻게 되었다면, 그것은 나만 비밀스럽게 간직해야 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 안에 꽁꽁 숨겨 둬서도 안되는 것입니다. 그 소중한 은총을 동료 인간들, 그리고 세상과 나누고 공유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분께서 선물로 주신 복음, 즉 구원의 기쁜 소식을 자신 안에 붙들고 있어서는 안됩니다. 이 세상 만민 모두가 아무런 차별없이 골고루 혜택을 받도록 그분의 복음을 적극적으로 전파해야 마땅한 것입니다.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께서는 비밀리에 가르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회당에서, 광장에서, 공개석상에서, 공적으로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그분 가르침의 진의(眞意)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분의 가르침이 종래의 지도자들과는 달리 판이하게 신선했고 파격적이었기 때문에 그랬을 것입니다.

 

 열두 사도들 가운데서도 최측근 제자들과 아주 소수의 특정인들만 그분의 말씀을 이해했고, 하늘나라의 신비를 정확히 파악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결코 소수의 특정한 사람들만의 것이 절대 아닙니다. 복음은 이스라엘을 넘어 온 세상에 전파되어야 할 보편적인 가르침입니다. 복음은 모든 인류에게 비춰져야 할 큰 빛입니다.

 

 ‘가톨릭’이라는 용어가 지니는 의미는 ‘공번되다.’ ‘보편적이다.’ ‘두루두루 광범위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가톨릭교회 공동체가 지향하는 바는 열린 교회입니다. 너그럽고 관대한 교회입니다.

 

 가톨릭교회는 우리끼리, 마음에 드는 소수의 사람들끼리만 비밀리에 운영되는 공동체가 결코 아닙니다. 우리 교회는 세상과 완전히 단절되거나 파벌을 형성해서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는 세상 속에서 하느님 현존의 구체적인 표지가 되어야 하며, 예수님의 인류 구원 사업을 증거해야 합니다.

 

 주님으로부터 특별히 불림을 받은 제자들은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이해할 수 있는 선물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것은 제자 자신들에게 큰 영예고 은총이지만, 그것을 자신들 안에 가둬두고 자신들의 영광으로만 돌린다면, 큰 죄악이 되고 맙니다.

 

 하느님 나라의 신비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값진 보물입니다. 그러나 그 보물은 인류를 위해 사용하라고 맡겨놓은 보물입니다. 주님께서 주신 깨달음은 공동체와 인류를 위해 봉사하라고 주신 선물입니다.

 

 따라서 제자들은 등불 같은 존재여야 마땅합니다. 활활 타올라야 하고, 동료 인간들의 어두운 삶을 환히 비춰줘야 합니다. 그들의 얼굴에는 스승 예수님의 얼굴이 반영되어 있어야 합니다.


어둠을 탓하기보다 등불이 되어라

   -반영억신부- 

 

등불은 등경위에 놓아야 제대로 비출 수 있습니다. 누구나 아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아는 사실을 제대로 활용하는 사람이 있고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믿음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의 삶이 빛나야 합니다. 세상의 어둠이 깊을수록 우리의 소명은 더 커집니다. 그러나 어둠을 탓하며 절망하는 이도 있습니다. 세상의 어둠을 탓하기보다 하나의 등불이 될 수 있도록 주님의 말씀으로 준비하는 이가 참 신앙인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5,14.16). 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가슴에 담고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주님을 증거 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면 그 기운이 이웃에게 전해지게 되어 있습니다. 좋은 기운이 감싸면 악한 기운은 서서히 떠나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진실한 마음과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히브10,22). 주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정령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마르4,25)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곧 말씀을 믿고 행하는 사람은 풍요로워지고 행하지 않는 사람은 결국 믿음을 잃게 될 것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간수하지 않는 것은 곧 잃어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자신의 삶을 비관하고 우울해 하며 남을 비판하고 불평불만하면서 아무런 생산적 활동을 하지 않는 사람은 결국 모든 것을 잃고 맙니다. 움켜쥐면 빼앗기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먼저 주면 빼앗길 것이 없습니다. 무엇이든 먼저 줄 수 있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부유한 사람이고, 주지 않는 사람은 가지지 못한 사람입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금고에 쌓아 놓았다할지라도 이웃과 나누지 못하면 그것은 있으면서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참으로 부유한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마음의 부자가 되어서 주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차고 넘치도록 받으시고 이웃과도 잘 나눌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무엇이라도 좋으니 남에게 도움이 되는 것 하나를 장만하시기 바랍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가진 것을 남에게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통해 우리의 삶이 바뀌게 될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서로 자극을 주어 사랑과 선행을 하도록 주의를 기울입시다”(히브10,24). 마무리 하겠습니다. “너희는 새겨들어라. 너희가 되어서 주는 만큼 되어서 받고, 거기에 더 보태어 받을 것이다”(마르4,24).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누구든지 들을 귀가 있거든 들어라.”(마르 4,23)

-이영근신부-


어제 <복음>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였습니다. 오늘 <복음>등불의 비유입니다. 어제 <복음>에서는 말씀이 씨앗에 비유되었다면, 오늘 <복음>에서는 말씀이 등불에 비유되고 있습니다.

누가 등불을 가져다가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겠느냐?

등경 위에 놓지 않느냐?”(마르 4,21)


여기에서, 등불은 하느님 말씀을 비유하고 있습니다. 말씀이 세상을 비추는 등불이요 빛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오리게네스는 함지은 영혼의 능력을, 침상은 몸을, 등경은 거룩한 교회를 표현한다고 해설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선포되면 그것은 세상 만민을 비추고, 진리의 빛으로 집 안에 있는 이들을 밝히며, 모든 사람의 마음을 거룩한 지식으로 채우게 된다.”


그러니 말씀을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아두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함지(루카; 그릇)인 우리의 능력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덮거나, 침상인 우리의 몸으로 말씀을 가려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곧 말씀을 자기의 능력이나 몸으로 가두어두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오히려 드높이라는 말씀입니다.

<마태오복음>산상설교에서 주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백성의 사명을 세상의 빛산위의 마을(5,14)에 비유합니다. 그렇습니다. ‘말씀세상의 빛이 되고 산 위의 마을이 되어 비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숨겨진 것도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도 드러나게 되어 있다.”(마르 4,22)


물론, 빛 아래서는 모든 것이 밝히 드러나게 되므로 거짓은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심판 때도 그러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메시아 비밀사상과 관련하여 알아듣게 되면 메시아로서의 예수님의 모습이 드러나게 되고 하느님 나라의 신비가 드러나게 될 것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말씀은 빛이 되어 우리를 비추고 하늘나라의 신비는 드러날 것입니다. 세상을 환히 비추고, 빛과 진리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사실을 깊이 새겨듣도록 촉구하십니다.

누구든지 들을 귀가 있거든 들어라.”(마르 4,23)


이는 듣는 이의 마음에 경각심을 불러일으킵니다. 또 앞의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떠올려줍니다. 곧 이 비유가 자 들어 보아라(4,3)로 시작하여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4,20)로 마치면서, 그 의미를 새겨듣도록 촉구합니다. 곧 이 말씀은 중요한 말이니 그 의미를 깊이 새겨들으라는 각성의 촉구와 경고의 의미를 지닙니다(마태 11,15;13,9;루카14,35).

또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되어서 주는 만큼 되어서 받고 거기에 더 보태어 받을 것이다.”(마르 4,25)


사실, 우리는 그릇만큼 받는 것이 아니라, 그릇이 비워진 만큼 받게 됩니다. 사실은 나누는 만큼 비워지는 것이니, 결국은 나누는 만큼 받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께서는 나누어주면 나누는 것보다 더 보태어 주신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입니다.”(마르 4,25)


이는 나누는 것이 더 많이 소유하는 것이라는 역설적인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결국 베푸는 사람은 베풀수록 더 많이 받고 덤까지 받지만, 베풀지 않는 사람은 있는 것마저 잃게 될 것입니다(마태 13,12;25,29;루카 19,26). 그렇게 말씀을 가진 자가 더 가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말씀의 등불은 거룩한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진정, 말씀의 비추임을 받은 영혼은 더욱 더 많은 열매를 맺고 더 밝게 빛날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도 그러할 것입니다. 아멘.


- 오늘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

누가 등불을 가져다가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겠느냐?”(마르 4,21)


주님!

말씀을 제 안에 가두어 두거나 제 발 아래에 두지 않게 하소서.

제 한량한 능력으로 당신 말씀의 권능을 덮지 않게 하소서.

당신 말씀보다 아무 것도 낫게 여기지 않게 하소서.

당신 말씀의 빛으로 살고, 빛에 속한 이로 살게 하소서.

제 삶이 세상을 비추는 빛이 되게 하소서. 아멘


등불의 비유  

-송영진신부-


“누가 등불을 가져다가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겠느냐? 등경 위에 놓지 않느냐?
숨겨진 것도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도 드러나게 되어 있다.
누구든지 들을 귀가 있거든 들어라(마르 4,21-23).”

이 말씀은 “세상의 등불이 되어라.” 라는 명령입니다.
마태오복음에 있는 산상 설교를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은 감추어질 수 없다.
등불은 켜서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다.
그렇게 하여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비춘다.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4-16).”
신앙인은 ‘빛이신 예수님’께서 주시는 빛을 받아서 사는 사람이고,
그 빛을 다시 세상 사람들을 위해서 비추어 주는 사람입니다.
등불을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는 것은 자신의 신앙을 드러내지 않는 것,
또는 자신이 신앙인이라는 것을 드러내지 않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는 큰 고난과 시련을 겪어도 계속 ‘세상의 빛’으로서 살았던,
즉 결코 선교활동을 멈추지 않았던 박해 때의 신앙인들을 본받아야 합니다.
스테파노 순교 후에 큰 박해가 닥쳤을 때,
당시의 신자들은 박해를 피해서 다른 지역으로 흩어져 갔지만,
자기가 신앙인이라는 것을 감추고 숨어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선교활동을 했고, ‘세상의 빛’으로서 살았습니다.
“그날부터 예루살렘 교회는 큰 박해를 받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사도들 말고는 모두 유다와 사마리아 지방으로 흩어졌다(사도 8,1).”
“한편 흩어진 사람들은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말씀을 전하였다(사도 8,4).”
조선시대 박해 때의 신앙인들의 모습도 같습니다.
박해를 피해서 흩어져 갔더라도 선교활동을 계속했고,
그래서 복음이 더 널리,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졌습니다.

“숨겨진 것도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도 드러나게 되어 있다.” 라는
말씀은, “복음과 신앙을 숨기거나 감추지 말고 드러내라.” 라는 명령으로
해석할 수도 있고, “너희가 숨기고 감추어도 언젠가는 복음이 온 세상에 전해질
때가 온다. 그때가 되면 자기의 신앙을 숨기고 감춘 사람이 받을 몫은 없다.”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이 말씀은,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마태 10,32-33).”
자기의 신앙을 숨기고 감추는 것도 심판의 대상이 됩니다.

그런데 선교활동은 인간적인 말재주로 하는 일이 아니라, ‘삶’으로 하는 일입니다.
산상 설교에 있는 ‘착한 행실’이라는 말은 바로 그런 뜻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신앙인의 삶’을 볼 때 ‘구원받은 사람의 삶’을 보게 됩니다.
(그렇게 될 수 있도록,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특히 명심해야 할 것은,
선교활동을 하기 전에 먼저 신앙인답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신앙인답게 살고 있어야 다른 사람을 제대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면 그 어둠이 얼마나 짙겠느냐?(마태 6,23)”
신앙인답게 살고 있지 않으면서도 자기는 잘 살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으면,
즉 어둠을 빛이라고 착각하고 있으면,
다른 사람을 빛으로 인도하기는커녕 더 짙은 어둠으로 끌고 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실 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개종자 한 사람을
얻으려고 바다와 뭍을 돌아다니다가 한 사람이 생기면, 너희보다 갑절이나 못된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마태 23,15).”
자기가 잘못 살아서 다른 사람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것은,
다른 사람을 죄와 악으로 인도하는 죄(‘남을 죄짓게 하는 죄’)를 짓는 것입니다.
‘남을 죄짓게 하는 죄’는 대단히 큰 죄입니다(마태 18,6).

“너희는 새겨들어라. 너희가 되어서 주는 만큼 되어서 받고
거기에 더 보태어 받을 것이다(마르 4,24).”

이 말씀에서 ‘탈렌트의 비유’가 연상됩니다.
‘탈렌트의 비유’에서 첫 번째 종과 두 번째 종은 주인이 맡긴 탈렌트를
잘 활용하여 많은 돈을 벌었는데, 주인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마태 25,21.23).”
(여기서 “많은 일을 맡기겠다.” 라는 말은, 더 많은 임무를 주겠다는 뜻이 아니라,
더 큰 은총을 주겠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해 듣고 신앙생활을 하게 된 것은
‘구원’이라는 ‘큰 은총’을 받은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그 은총을 혼자서만 누리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인도하는 일에 활용하기를 바라십니다.
주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인도하는 일을 잘한다면,
그것은 주님께는 큰 기쁨을 드리는 일이 되고,
복음을 전해 듣는 사람에게는 구원의 은총을 받는 일이 되고,
우리에게는 이미 받은 것보다 더 큰 은총을 받는 일이 됩니다.
그래서 모두가 큰 기쁨을 얻는 일이 됩니다.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마르 4,25).”

이 말씀은, ‘탈렌트의 비유’에 그대로 반복되어 있는데, 자기가 받은 복음과
자신의 신앙을 숨기고 감추면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이라는 경고 말씀입니다.
‘탈렌트의 비유’에 나오는 세 번째 종은 자기가 받은 탈렌트를 땅에 숨겨 두었다가
그대로 주인에게 반납하는데(마태 25,25), 주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자에게서 그 한 탈렌트를 빼앗아 열 탈렌트를 가진 이에게 주어라.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그리고 저 쓸모없는 종은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거기에서 그는 울며 이를 갈 것이다(마태 25,28-30).”
신앙인으로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쓸모없는 종’으로 전락하는 것입니다.
“죄만 안 지으면 된다.” 라는 소극적인 태도는 주님의 인정을 받지 못합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믿음을 실천하고,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조욱현신부-


복음: 마르 4,21-25: 등불은 등경 위에 둔다

누가 등불을 가져다가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겠느냐? 등경 위에 놓지 않느냐?”(21) 지혜의 등불은 감춰두지 않고, 사용하여 보게 하는 것이 그 목적이다. 아무리 좋은 우물이라도 물을 퍼주어야 맑은 물이 솟아나지만, 아무도 물을 긷지 않으면 우물은 더러워진다. 쇠도 사용하면 빛이 나지만 사용하지 않으면 녹이 슨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훈련을 통해 거룩한 옷을 입게 된다고 하겠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세상의 빛이라고 부르셨다. 그리고 산위의 마을이라고 하셨다.(마태 5,14 참조) 우리는 어둠 속에서 빛을 비추고, 구렁텅이에 빠진 이들을 위하여 우뚝 서도록 부름을 받았다. 등불을 함지 속에 숨겨 둔다면 우리는 어둠 속에 있게 되고 사람들이 와서 부딪칠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등불의 구실을 제대로 못하게 된다.

 

우리는 적극적으로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세상의 빛이 될 수 있게 하는 것은 바로 선행이다. 선은 참되고 충만한 것으로 어둠을 사랑하지는 않는다.(요한 3,21 참조) 선은 드러나는 것을 즐거워하고 눈에 띄는 것을 기뻐한다. 그리스도인의 겸손은 나서지 않는 것을 좋아하지만, 있는 그대로 드러나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선은 그 자체로 확산성이 있기 때문이다. 선은 그냥 퍼져 나간다.

 

너희가 되어서 주는 만큼 되어서 받고 거기에 더 보태어 받을 것이다.”(24) 내가 하느님께 받은 만큼 청하는 이에게 자비를 되돌려 주는 것만큼 정당한 일은 없다. 가난한 형제에게 베풀어야 한다. 그 형제는 그리스도이시다. 형제에게 주는 것은 그리스도께 드리는 것이며, 영원히 찬미받으시는 하느님께 드리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필요로 하신다는데 그분의 뜻을 따르지 않겠는가?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주신 것을 우리가 베풀기를 바라신다. 우리가 베푼다고 하는 것 가운데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지 않은 것이 무엇인가? 우리가 지닌 것 가운데 하느님께 받지 않은 것이 무엇인가? 우리가 무엇인가를 줄 때, 그것이 우리의 것인가? 우리는 우리에게 주라고 명령하시는 분의 것을 주는 것이다. 우리는 착취하는 사람이 되지 말고, 베푸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25) 우리가 들은 말씀을 온갖 노력을 다하여 기억하고 연구하고 실천하도록 하여야 한다. 말씀을 사랑하고 실천하는 사람에게는 자기가 사랑하는 대상을 이해할 수 있는 지력이 주어지겠지만, 말씀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비록 타고난 재능이나 학문을 통하여 그 뜻을 이해하는 것 같이 보이더라도, 참된 지혜에는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말씀을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가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을 빼앗겨도 무엇을 빼앗겼는지 알지를 못한다. 어떻게 해야 할까?


등불은

등경 위에

놓지 않느냐?(마르 4, 21)

-한상우신부-

등불은
등경 위에
놓아야 합니다.

신앙의 빛이
있어야 할 자리는
언제나 우리 삶의
자리입니다.

등불은
삶의 방향을
깨닫게합니다.

어둠을 밝히는
등불은 이미
우리 삶안에
있습니다.

어김없이 등불은
우리 삶을
비추어줍니다.

등불은
일상 생활과
신앙 생활을
하나로
결합시킵니다.

거짓과 허위
자존심과 고집에서
벗어나 진실된
나와 너를
만나게 합니다.

등불은
등경이라는
현실에서 빛을
발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또한
등불로서의 삶을
살길 바라십니다.

등불의
이 불빛은
타오르는 아픔을
기꺼이 감수하는
등불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등불이 되는
실천을 오늘도
우리들에게
가르쳐주십니다.

어리석음을
일깨워주는
등불이 있습니다.

등불의 삶은
실천의 삶입니다.


-오상선신부-


오늘 복음 대목은 길이가 짧지만, "빛", "등불", "드러남", "줌", "받음" 등 성경의 중요한 개념들이 집약되어 있어 여러 방향으로 해석 가능합니다. 그런데 문맥으로 보면 이 대목이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 이어서 나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오늘 저의 말씀 기도는 "주님 말씀은 제 발의 등불, 저의 길을 비추는 빛이옵니다"라는 복음 환호송의 길잡이에 힘입어 "말씀"의 차원으로 이끌려졌습니다.

"누가 등불을 가져다가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겠느냐?"(마르 4,21)

등불은 속성상 빛을 냅니다. 비록 작지만 불이기도 해서 열기가 없지는 않겠지만 등불을 사용하는 이유는 대개 난방을 위한 열보다는 어둠을 밝히는 빛 때문입니다. 그러니 등불을 밝힌 이상 그 빛은 한 공간을 밝게 채우려는 목적이 분명하지요. 등불을 켜놓고 감추거나 숨길 이유는 없습니다.

"숨겨진 것도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도 드러나게 되어 있다"(마르 4,22).

등불을 숨김 수 없듯이 말씀도 숨겨진 채 계시지 못합니다. 빛이 감추어질 수 없듯이 말씀 역시 어느 경로건 당신의 현존을 드러내게 되어 있지요.

"너희가 되어서 주는 만큼 되어서 받고 거기에 더 보태어 받을 것이다"(마르 4,24).

말씀을 접하려는 노력, 말씀에 집중하는 주의력, 말씀에 머무르는 시간, 말씀을 품고 삶으로 살아보려는 지향 등 우리가 말씀께 오롯한 정성을 드릴 때, 말씀께서는 반드시 그만큼 되돌려 주시고, 거기에 은총과 축복을 더 보태어 주십니다.

이어 예수님은 좀 무서운 말씀을 하십니다.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마르 4,25).

말씀은 말씀을 사랑하고 소유하고 깊이 머무를수록 깨달음이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는 신비입니다. 말씀과 깊은 친교로 들어갈수록 하나 더하기 하나는 더 이상 둘이 아니라 백 배, 천 배의 지혜와 사랑으로 팽창합니다.

반대로 말씀에 전혀 관심이 없거나 소홀하거나 겉으로만 흝는 이들, 말씀에 냉소하는 이들은 말씀을 알아듣던 기억마저 암흑 속에 잠겨버릴 정도로 생경하고 아득한 미혹 속에 갇히게 됩니다. 하느님이, 말씀이 언제 나와 관계가 있었던 적이 있었나 싶게 낯선 이방인이 되어 버립니다. 관계는 두절되고 자신이 굶주리고 헐벗었다는 자각조차 마비된 채 말씀의 진공 상태를 부유하는 불쌍한 영혼이 되고 맙니다.

제1독서는 주 하느님께 올리는 다윗의 감사 기도입니다.

"그러니 이제 주 하느님 당신 종과 그 집안을 두고 하신 말씀을 영원히 변치 않게 하시고 친히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 주십시오"(2사무 7,25).

어린 목동을 불러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세우신 하느님께서 다윗의 후손을 두고까지 축복을 내리시니 다윗이 이렇게 청합니다. 그 자손들이 하느님을 거부하지 않는 한 하느님 말씀은 영원할 것이며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느님 말씀의 증거가 될 것입니다.

"주 하느님 당신은 하느님이시며 당신의 말씀은 참되십니다"(2사무 7,28).

주님의 말씀을 들었고 믿었고 이루어짐을 체험하기까지 한 다윗이 이처럼 고백합니다. 이로써 다윗은 한 인간을 넘어 이스라엘을 대표해 하느님과 관계를 다시금 정립합니다. 또 참되신 하느님의 말씀께서 자손에게까지 대대로 영원히 당신의 효력을 이어가시리라 믿습니다.

"이제 당신 종의 집안에 기꺼이 복을 내리시어 당신 앞에서 영원히 있게 해 주십시오"(2사무 7,29).

이는 오늘 기도의 백미가 아닐까 합니다. 결국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주님의 복"이란, 곧 그분 앞에 영원히 있는 것, 즉 주님 앞에 존재하고 머무르는 것임이 선명히 드러납니다. 인간에게는 재물이나 명성, 건강, 권력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머무름이 최고의 축복입니다.

"주님 계실 곳, 하느님의 거처, 당신 처소, 길이 쉴 나의 안식처"(화답송).

화답송에서는 다윗에게 거절하셨던 주님의 집을 일컫는 말들이 표현을 바꾸어 나열됩니다. 이 단어들은 가시적 건축물인 성전을 초월하여, 말씀을 받아들여 품는 이들, 말씀에 머무르는 모든 이들까지 포괄해 가리킵니다.

"이곳은 길이 쉴 나의 안식처"(화답송).

사랑하는 벗님! 말씀이 현존하시는 영혼이야말로 주님 앞에 "있는" 축복을 사는 존재이고, 하느님의 거처이며 처소이고 안식처입니다. 우리가 말씀에 머무르는 동안 주님께서 우리 안에 오셔서 몸을 누이시고 쉬십니다. 우리와 사랑 안에 머무르십니다.

그런데 말씀으로 우리 안에 감추어져 계시는 그분은, 숨어계실 수 없으십니다. 등불은 드러나야 하고 빛은 어둠을 밝혀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내가 드러나는 게 아니라 말씀께서 드러나시고, 내가 빛나는 게 아니라 말씀께서 빛나실 것이니 두려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는 그저 말씀에 머물러 "그분 앞에 있는 축복"을 누리면 그만입니다.

보잘것없는 영혼으로 주님 앞에 나아와 말씀에 머무르는 우리에게 주님께서 이렇게 속삭이십니다. "내가 원하였으니 나 여기 머물리라"(화답송).

그러니 벗님! 오늘 감사히 주님을 맞이해 머무릅시다. 그분이 내게 머무르시는지 내가 그분께 머무르는지 분간할 수 없는 건, 그분과 나는 이미 하나인 까닭입니다. 아멘.

수시로 무시로   
-김찬선신부-


"주 하느님, 제가 누구이기에, 또 제 집안이 무엇이기에,
당신께서 저를 여기까지 데려오셨습니까?
주 하느님, 당신 눈에는 이것도 부족하게 보이셨는지,
당신 종의 집안에 일어날 먼 장래의 일까지도 일러 주셨습니다."

어제 사무엘기는 다윗이 어디를 가든 '함께 계셔주시는 하느님'에 대한
얘기를 했는데 오늘은 다윗에게 '해주시는 하느님'에 대한 얘기를 합니다.

그리고 이 '해주시는 하느님'은 과거에 이러이러한 것을 해주셨을 뿐
아니라 미래에 일어날 일까지 일러주시는데
일러주시는 것을 가르침 삼아 실천한다면 그대로 될 거라고 얘기를 합니다.

다윗에게 이렇게 '해주시는 하느님'은 사울에게도 해주셨고
우리에게도 해주실 텐데 사울이나 우리는 그것을 잘 느끼지 못하고
다윗은 어찌 그것을 잘 느끼는지 여기에 생각이 닿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어제 읽은 '씨앗의 비유' 복음과 연결이 되면서
그 이해에 도움을 받게 되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이 씨앗의 비유에서 길바닥에 떨어진 씨를
악마가 바로 채가는 것은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마태오 복음의 풀이를 인용하여 풀이를 합니다.
그런데 깨닫지 못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내가 들은 말씀이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거나
어리석은 사람이 보물을 보물인 줄 몰라보듯이
하느님의 말씀이 참으로 나에게 꼭 필요한,
보물과 같은 말씀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니까 깨닫지 못함의 첫 번째는 사람의 말이든 바람의 말이든
내가 들은 말이 하느님의 말씀임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고
사람의 말을 그저 사람의 말로, 바람의 말을 그저 바람 소리로 들음입니다.

어제 주님께서는 다윗에게 이렇게도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될 것이다.
그가 죄를 지으면 사람의 매와 인간의 채찍으로 그를 징벌하겠다."


사람을 통해 매와 채찍을 대신다는 말씀이고,
우리는 많은 경우 안 좋은 일을 당했을 때
그것이 하느님의 징벌이 아닐까 생각도 합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징벌은 인간을 통해서 내리고,
상은 당신이 직접 주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라면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직접 주실 때도 있지만 
통해서 해주실 때도 있는데 그것을 알아챌 수 있어야 하겠지요.

그래서 저를 반성합니다.
우리는 미사 독서 때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라는 말씀을 듣고
'하느님 감사합니다.'라고 화답하는데 미사 때처럼
사람들을 통해서건 바람을 통해서건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제가 하느님의 말씀으로 잘 알아듣고 깨달았다면 그때마다 
수시로 그리고 수없이 감사드렸어야 하는데 그러지 않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을 통해서 주님께서 매를 대셨다고 받아들인다면
이때도 감사를 드려야겠지만 무엇보다 용서를 청했어야 했지요.
그런데 저는 죄에 대해서는 용서와 자비를 많이 청하면서도
매를 대신 것에 대해서는 감사와 용서를 청하지 않았습니다.

어제저녁 성무일도 성경소구는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서 힘차게
활동하시면서 우리가 바라거나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풍성하게
베풀어 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라는 에페소서의 말씀이었는데
청원기도를 하면서 주님의 이 풍성한 베풀어주심을 수시로 무시로
감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기도했습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6년 1월 28일 연중 제3주간 목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등불은 누구나 등경 위에 얹어 놓는다 내 말을 마음에 새겨들어라(마르 4,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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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른 것을 비추는 등불처럼 신앙인들에게 이웃과 세상의 참된 모범으로 살아야 한다는 윤리적 도덕적 잣대가 강조되고는 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등불이 빛으로 주위를 비춘다는 사실에만 치우쳐, 그 등불 자체가 빛을 낸다는 고유한 성질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을 잊어버립니다.등불은 그 자체로 빛납니다. 
빛은 빛을 발할수록 더 많은 것을 비추지요. 

.세상의 잣대를 따르기보다, 각자의 고유하고 소중한 모습을 제 삶의 자리에서 만들어 나가는 길, 그것이 신앙이고, 그 자리에 하느님께서 함께하십니다. 

-박병규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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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은 읽은 것의 10%, 들은 것의 20%, 본 것의 30%를 기억합니다. 보면서 들은 것은 50%를 기억합니다. 들은 것의 20%를 기억할 수 있는 사람은 남에게 말하며 가르치면 80%를 기억하고, 행동하며 말하며 가르치면 90%를 기억한다고 합니다.

 가르치면 무엇이 좋을까요? 더 많이 알게 됩니다. 많이 안다고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가르치기 때문에 더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다음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는 땅에 대해 말씀하시고 이어서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등불을 가져다가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겠느냐? 등경 위에 놓지 않느냐? 숨겨진 것도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도 드러나게 되어 있다.”

      말씀의 씨가 땅에 뿌려져 열매를 맺으면 그 열매를 누군가가 따먹어야합니다. 바로 이웃이 따먹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깨달아 나의 삶을 바꾸어놓은 진리가 있다면 그 열매를 이웃에게도 전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지 않는 사람은 아직 열매를 맺지 못하는 땅입니다.

너희는 새겨들어라. 너희가 되어서 주는 만큼 되어서 받고 거기에 더 보태어 받을 것이다.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나에게서 맺은 말씀의 열매를 누군가에게 전한다면 30배 맺히던 것이 60배, 100배가 맺게 되겠지만, 전하지 않으면 다시 세상 욕심과 육체의 욕망, 혹은 교만에 사로잡혀 열매를 맺지 못하는 땅으로 전락해버린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아직 완전하지 못할 때도 제자들을 계속 파견하시며 사람들을 가르치게 하셨습니다. 그 안에 있는 것들이 더욱 자라나게 하시기 위함이셨습니다. 가르치면서 배워야합니다. 배우기만 하면 한계가 있습니다. 아무리 오래 혼자 수련을 한다고 해도 깨달음의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가르치면 어렴풋하게 알던 것을 명확히 알게 되고 또 모르는 것까지 주님께서 다 알려주십니다. 더 가지려면 더 내어놓아야 하는 것은 모든 것에 해당하는 진리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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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등학교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물었습니다눈이 녹으면 어떻게 될까요아이들이 대답했습니다길이 더러워집니다물이 됩니다눈 속에 있던 것이 나타납니다여러분은 무어라고 대답하겠는지요한 아이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봄이 옵니다눈이 녹으면 날이 따뜻해지고 곧 봄이 온다는 아이의 생각이 놀라웠습니다따뜻한 마음으로 세상을 보면 세상은 따뜻하게 보입니다.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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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을 믿는 우리의 삶이 빛나야 합니다세상의 어둠이 깊을수록 우리의 소명은 더 커집니다그러나 어둠을 탓하며 절망하는 이도 있습니다세상의 어둠을 탓하기보다 하나의 등불이 될 수 있도록 주님의 말씀으로 준비하는 이가 참 신앙인입니다주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5,14.16). 고 말씀하셨습니다.

-반영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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