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월 29일 연중 제3주간 수요일
“자, 들어보아라.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을 길바닥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쪼아 먹고....
어떤 것은 좋은 땅에 떨어져서 싹이 나고 잘 자라 열매를 맺었는데,
열매가 삼십 배가 된 것도 있고
육십 배가 된 것도 있고 백 배가 된 것도 있었다.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들어라.”
(마르코. 4,1-20)
“Hear this! A sower went out to sow.
And as he sowed, some seed fell on the path,
and the birds came and ate it up…
Some seed fell on rich soil and produced fruit.
It came up and grew and yielded thirty, sixty, and a hundredfold.”
He added, “Whoever has ears to hear ought to hear.”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하느님께서는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될 것”이라고 하신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좋은 땅에 떨어진 씨는 어떤 것은 서른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백 배의 열매를 거둔다고 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씨앗의 운명이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는 것으로 정해져 있다면, 더욱 많은 열매를 맺는 것이 좋을 테지요.
서른 배보다는 예순 배, 예순 배보다는 백 배의 열매가 백번 나은 것이겠지요.
그러나 씨앗을 우리 삶에 빗대어 보자면, 씨앗이 뿌려진 흙의 상태가 천차만별이라 열매를 얼마나 맺을지 가늠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일까요, 늘 많은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며 오늘도 얼마간의 요행을 바라며 삶의 씨앗을 곳곳에 뿌려 보기도 합니다.말씀을 씨앗에 빗대어 표현하는 예수님의 가르침도 다양한 땅의 모습을 염두에 둔 흔적을 담아냅니다.
길, 돌밭, 가시덤불, 그리고 좋은 땅 …….
어찌 보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길과 돌밭, 가시덤불에 떨어져 버린 말씀의 씨앗은 온갖 역경에 내던져진 가엾은 존재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무조건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논리는 그 씨앗에게는 크나큰 상처일 수 있겠지요.교회의 역사 속에 열매 맺지 못한 말씀의 씨앗도 있었지만, 말씀은 끊이지 않고 우리 신앙인의 삶 속에 울려 퍼졌습니다.
이른바 신자유주의식의 경쟁적 말씀 선포와 승리주의의 우월적 선교는 진정한 말씀의 선포가 아닐 것입니다.
말씀은 길과 돌밭, 가시덤불 속에서 뿌려졌고, 그런 말씀의 아픔들이 있었기에 어딘가에 열매를 맺는 말씀의 기쁨들이 생겨난 것이겠지요.오늘의 아픔을 제거한 자리에 말씀이 열매 맺지 않습니다.
아픔 속에 아파하는 이들 덕택에 오늘의 신앙이 따사로운 햇살 속에 무럭무럭 자라는 것입니다.
열매 맺는 씨앗 옆에 숨 막혀 죽어 가는 씨앗들이 있음을 기억해야겠습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저는 누구보다 성실합니다. 어떤 일이든 열심히 하겠습니다.”
채용 담당자는 이 학생이 마음에 쏙 들었지만, 이 회사에서는 타자기를 잘 다루는 사람이 필요했기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혹시 타자기를 다룰 줄 아나요? 타자기를 다룰 줄만 안다면 바로 일을 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이 학생은 잠시 생각을 하더니, 자신에게 4일의 시간을 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리고 4일 뒤부터 일을 시작했는데 누구보다도 능숙하게 타자기를 다루며 열심히 일하는 것입니다. 열심히 일하는 학생에게 채용 담당자는 곧바로 일하지 않고 왜 4일의 시간을 달라고 했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이렇게 대답합니다.
“저는 그동안 2가지 일을 했습니다. 처음 이틀은 타자기를 빌리는 데 쓰고, 나머지 이틀은 밤을 새워 타자 연습을 했습니다.”
이 학생이 훗날 미국의 31대 대통령이 된 ‘허버트 후버’입니다.
우리는 할 수 없으면 곧바로 포기합니다. 그러나 할 수 있는 방법을 먼저 찾아보고 포기를 해도 늦지 않습니다. 그래야 내게 다가온 기회를 나의 것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습니다. 여기서 씨 뿌리는 사람은 주님이고, 씨는 당신의 가르침이고, 밭은 인간의 영혼을 의미합니다. 씨 뿌리는 사람이 골고루 구별 없이 자신의 온 밭에 씨를 널리 뿌리듯, 주님께서는 어떤 사람도 차별하지 않고 당신의 가르침을 뿌리십니다. 그 씨앗이 좋고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밭으로 상징되는 우리의 마음이 중요합니다.
주님께서는 살아남는 씨보다 더 많은 씨를 잃어버린다고 할지라도 씨 뿌리는 일을 멈추지 않으십니다. 누군가는 가시덤불 속에, 돌밭이나 바위 위에, 길가에 씨를 뿌리는 일이 합리적이냐고 물을 것입니다. 당연히 합리적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합리적 사랑이 아닌 불합리해 보이는 사랑으로 지금도 계속해서 당신의 씨를 뿌리십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특히 주님 앞에 나아가는 것은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씨를 받아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한 노력을 멈춰서는 안 됩니다. 사랑의 주님과 함께라면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1) 모험에 대한 열망을 가지십시오.
자신이 누구이며, 어떻게 살고, 세상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하는 능력을 갖춰야 합니다.
2) 헌신하는 태도를 유지하십시오.
헌신은 모험을 완전히 끝마칠 수 있게 우리를 지탱하는 기본요소로 자신감과 믿음을 가져다줍니다.
3) 불확실한 일에 뛰어드십시오.
불확실함은 ‘가능성’이라는 선물을 줍니다.
4) 삶의 다양성을 받아들이십시오.
그대로 존중하고 포용하며 관계를 발전시킬 기회를 얻게 됩니다.
5) 동반자의 존재에 감사하십시오.
사람, 동물, 주님 모두가 우리의 동반자입니다.
이 다섯 가지 요건에 대해 스스로 점검해 보십시오. 이를 통해 분명히 내게 다가올 삶의 기회를 얻게끔 할 것입니다.

십자가의 의미를 알려줄 스승을 찾으려는 마음이 '들을 귀'다
-전삼용신부-
폴란드의 조그만 마을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웬일인지 독일군이 이 마을에는 나타나지 않아 불안한 가운데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는데 드디어 독일군이 나타났습니다. 일부는 마을로 들어가고 나머지는 학교로 가 학생 중에 드문드문 섞여 있는 유태인 어린이들을 끌어내려고 하였습니다. 독일군의 모습을 본, 가슴에 별을 단 유태인 어린이들은 무서워서 선생님에게 달려가 매달렸습니다. 코르자크란 이름을 가진 선생님은 자기 앞으로 몰려온 유태인 어린이들을 두 팔로 꼭 안아 주었습니다.
트럭 한 대가 학교 운동장으로 들어오자 아이들은 선생님의 팔에 더욱 매달렸습니다.
“무서워할 것 없단다. 하느님께 기도를 드린다면 마음이 좀 편해질 거야.”
독일군은 코르자크 선생님 곁에서 유태인 어린이들을 떼어놓으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코르자크 선생님은 군인을 막아서며, “가만 두시오. 나도 함께 가겠소!”라고 말했습니다.
“자, 우리함께 가자. 선생님이 같이 가면 무섭지 않지?”
“네, 선생님. 하나도 무섭지 않아요.”
코르자크 선생님은 아이들을 따라 트럭에 올랐습니다. 이 광경을 지켜본 독일군이 선생님을 끌어내리려 하자, “어떻게 내가 가르치던 사랑하는 이 어린이들만 죽음으로 보낼 수 있단 말이오.” 하며 선생님도 아이들과 함께 강제 수용소로 끌려가 마침내 트레물렌카의 가스실 앞에 도착했습니다. 선생님은 아이들의 손을 꼬옥 잡고 앞장서서 가스실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자신은 유태인이 아닌데도 사랑하는 제자들과 함께 죽음으로 나아간 것입니다.
지식을 가르치는 스승이 있고 의미를 가르치는 스승이 있습니다. 코르자크 선생님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사랑과 죽음의 의미를 가르친 스승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아리송하게도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들을 귀’가 뭘까요?
왜 다른 사람들에게는 비유로만 말씀하시느냐는 열두 사도들의 질문에 이렇게 더 아리송한 대답을 하십니다.
“너희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가 주어졌지만, 저 바깥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그저 비유로만 다가간다.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여 저들이 돌아와 용서받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주시기 위해 오신 분이 용서받지 못하게 비유로만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분별하기 위해서입니다. 비유를 통해 들을 귀가 있는지, 없는지 분별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들을 귀’란 무엇일까요? 오늘 복음에 따르면 열두 사도만 들을 귀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스승으로 여길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 제자들을 십자가의 희생으로 이끄십니다. 지식을 가르치시는 것이 아니라 죽음의 의미를 알려주시는 분이셨습니다. 길과 같은 사람이 되지 않으려면 교만을 죽여야 하고, 돌밭과 같은 사람이 되지 않으려면 육체와 싸워야하며, 가시밭이 되지 않으려면 재물에 대한 욕심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모든 비유의 해석은 다 십자가로 연결됩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지식은 원했지만 십자가는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참 스승으로부터 배울 ‘들을 귀’가 없었던 것입니다.
지금 수많은 성경공부가 있습니다. 그런데 삶을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구원과 연결시키지 못하는 스승도 있습니다. 스승 없이 스스로 깨우치려고 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영적인 눈을 가지지 못한 스승을 만나는 것도 문제입니다. 참다운 영적스승은 비유 안에서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발견하고 설명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성경의 모든 내용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구원과 연결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하나니아스라는 사람에게 안수를 받고 눈에서 비늘이 떨어졌습니다. 그러자 모세가 그리스도로 보이고 홍해를 건너는 것이 세례로 보이며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가 성체로 보이고 바위에서 물이 흘러나왔는데 그 생명의 물을 주시는 바위가 그리스도로 보였습니다(1코린 10,1-4 참조). 탈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구원의 신비로 보게 된 것입니다. 자신을 죽이는 십자가의 길로 이끌 스승을 찾으려는 마음이 ‘들을 귀’입니다.

-조재형신부-
예전에 집을 짓는 목수에게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하루살이와 메뚜기가 재미있게 놀았습니다. 메뚜기는 집에 갈 시간이 되어서 하루살이에게 내일 만나자고 하였습니다. 하루살이는 내일이라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아무리 현명한 하루살이도 내일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하루살이에게 내일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는 메뚜기와 개구리가 재미있게 놀았습니다. 개구리가 겨울잠을 준비하면서 메뚜기에게 내년에 보자고 했습니다. 메뚜기는 내년이라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아무리 현명한 메뚜기도 내년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메뚜기에게는 내년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문득 인간과 하느님이 대화한다면 그 결과를 알고 싶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겠다고 하십니다. 하느님 나라에서는 생로병사가 없다고 하십니다. 가난, 질병, 난민이 없다고 하십니다. 채우지 못한 욕망으로 괴로울 일도 없고, 아직 오지 않은 근심으로 지금의 기쁨이 사라지지도 않을 거라고 하십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일도 없고, 미워하는 사람과 만날 일도 없고, 거짓된 자아에 흔들리는 일도 없다고 하십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지복직관(至福直觀)의 기쁨이 있다고 하십니다. 아무리 현명한 인간도 영원한 생명, 하느님 나라를 이해할 수 없지 않을까요? 유한한 이 세상에서 영원한 생명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내일이 분명 있고, 내년이 오는 걸 안다면 영원한 생명도 있지 않을까요?
축의 시대(Axial Age)에 인류의 현인들은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무한한 삶으로 나갈 수 있기를 희망했습니다. 그들의 희망은 조로아스터교, 불교, 유교, 유대교, 그리스 철학으로 열매 맺었습니다. 축의 시대에 나타난 모든 가르침의 핵심은 황금률(黃金律)입니다. ‘내가 원하지 않는 건 남에게도 행하지 않는 겁니다. 받는 사랑보다 주는 사랑이 더 행복하다고 합니다.’ 인류의 문명, 문화, 역사, 경제, 예술은 영원한 삶에 대한 희망의 씨가 열매 맺은 겁니다. 그러나 하루살이가 내일을 이해하지 못했듯이, 메뚜기가 내년을 이해하지 못했듯이, 영원한 삶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었고, 지금도 있습니다. 시기와 질투, 욕망과 두려움은 인류를 추락하게 하였습니다. 전쟁, 폭력, 살인, 굶주림은 인류의 희망이 열매 맺지 못하게 하곤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사람’을 이야기하셨습니다. 현대인들이 뿌리고 싶은 씨는 무엇일까요? 어떤 열매를 원할까요? 재물, 성공, 명예, 권력은 아닌지요? 우리가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해서 얻고자 하는 건 그런 것이 아닐까요? 하느님 나라는 너무 멀리 있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생명도 아직은 아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이 욕망이라는 바벨탑을 향해 올라가지만, 그곳에서는 희망을 만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뿌리시는 씨는 무엇일까요? 하느님의 말씀, 진리, 영원한 생명, 하느님 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씨를 뿌리셨고, 제자들과 함께 그 씨가 열매 맺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보아도 보지 못하는 사람이 있었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들으라고 하십니다.
“주님이 너에게 한 집안을 일으켜 주리라고 선언한다. 너의 날수가 다 차서 조상들과 함께 잠들게 될 때, 네 몸에서 나와 네 뒤를 이을 후손을 내가 일으켜 세우고, 그의 나라를 튼튼하게 하겠다. 영원토록 그에게 내 자애를 베풀리라.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타향 땅이 고향 같고 고향이 다 타향과 같습니다. 우리는 지상에 살고 있으나 하늘의 시민입니다!
-양승국신부-
아쉬움 반, 설렘 반의 마음으로, 또 다른 떠남을 위해 짐을 꾸리고 있는데, 한 수도자의 글이 제 눈에 쏙 들어왔습니다.
“우리는 각자 자기 고향이 있으면서도 마치 타향살이 나그네와 같이 삽니다. 시민으로서 모든 의무를 수행하지만 나그네와 같이 모든 것은 참아 받습니다. 타향 땅이 고향 같고 고향이 다 타향과 같습니다. 우리는 지상에 살고 있으나 하늘의 시민입니다.”
수시로 보따리를 싸서 정처없이 떠나야 하는 고달픈 삶이 저희 수도자들의 삶이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면 얼마나 행복한 삶인지 모릅니다. 여기도 내 집이지만 거기도 내 집입니다. 발길 닿는 모든 곳이 나의 집이요 너의 집입니다.
따지고 보니 떠남은 참으로 큰 축복입니다. 만일 우리가 언제까지나 지금 이곳에 집착한다면, 언제까지나 우리가 지니고 있는 이 자리를 떠나지 않는다면, 우리 삶은 언제나 제자리일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작은 떠남의 순간은 영원한 떠남인 우리의 마지막 날을 준비하는 행위이기에 삶의 여러 순간 가운데 아주 소중한 순간입니다. 떠남의 순간이 있기에 우리는 보다 겸손해질 수 있습니다.
안주와 편리에 길들여진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다시금 과감히 길 떠나는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매일의 작은 희생과 양보, 기쁘게 물러남, 십자가의 수용 등을 통한 일상적인 떠남에도 보다 익숙해져야겠습니다.
우리 수도자들에게 있어 떠남은 슬픔과 아쉬움의 순간이기보다는 삶을 보다 풍요롭게 하는 은총의 순간입니다. 보다 자주, 보다 미련 없이 떠나는 사람에게 있어 삶은 언제나 경이로움이며 새로움입니다.
본격적인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께서도 발길 닿는 곳 마다 놀라운 기적과 업적을 드러내시자, 군중들은 집요하게 그분을 따라다니며 그분을 붙잡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분을 왕으로 추대하고자 계획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놀라운 일을 행하신 다음에는 즉시 물러나셨습니다. 또 다른 곳을 향해 아무런 미련도 없이 떠나가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들을 버려두신 채 다시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셨다.”(마르코 복음 8장 13절)
떠나야 할 순간이 왔을 때, 아무런 미련도 집착도 없이, 훌훌 털고 초연히 떠나가는 수도자들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떠나야 할 순간이 왔음에도 불구하고 미적미적 대는 모습은 또 얼마나 서글픈지 모릅니다. 지난 삶의 모든 것은 하느님 자비에 맡겨드리고, 또 다시 펼쳐주실 미래를 흥미진진하게 기대하며, 설레는 마음으로 떠나가야겠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떠남이 있어야, 새로움이 시작됩니다. 떠나지 않고 한곳에만 계속 머물고자 할 때, 일취월장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떠남을 통한 사라짐, 결국 소멸은 아름다움의 대모(代母)입니다. 서녘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사라져가는 석양을 바라보십시오. 더 이상 말이 필요 없습니다. 사라지는 뒷모습이 슬프기도 하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곱고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혈육의 정을 단호히 끊고 먼 길 떠나가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다시 한 번 우리들의 인생도 생각해봅니다.
우리들의 인생길, 신앙생활, 어찌 보면 나그네길입니다. 늘 떠나야 합니다. 보다 향상된 삶을 향해, 보다 본질적인 삶을 향해, 보다 가치 있는 삶을 향해, 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그 길을 향해 부단히 떠나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역설적이게도 고통의 근원은 소유입니다. 소유에 대한 집착이 번뇌의 출발점입니다. 인연에 대한 과도한 집착도 슬픔의 근원입니다.
철저하게도 모든 것을 버린 예수님, 그토록 정겨웠던 인연마저도 훌훌 털어버린 예수님이셨습니다. 세상 모든 것, 세상 모든 사람을 소유하기 위해 가진 모든 것을 다 버린 예수님이셨습니다.

열매는 손발에서 맺어진다
-반영억신부-
“봄에 씨를 뿌리지 않으면 가을에 거둘 것이 없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어떤 열매이든지 하루아침에 얻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씨를 뿌리고 물을 주고 거름을 주며 정성껏 가꾸어야 합니다. 씨를 뿌리지 않으면 거둘 수가 없습니다. 혹 씨를 뿌리더라도 아무 정성을 들이지 않는다면 풍성한 열매를 얻을 수 없습니다. 더더욱 햇볕을 주시고 비를 주시는 하느님의 안배가 없으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 입니다. 하느님의 은총과 인간의 협력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의 말씀을 주어도 그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또 살지 않으면 열매는 맺어질 수 없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서른 배, 예순 배, 백 배의 열매를 희망한다면 그에 상응하는 수고와 땀을 흘려야 합니다. 씨앗이 아무리 좋은들 그 씨앗이 떨어진 토양이 좋지 않으면 좋은 열매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또한 토양이 좋다고 해도 씨앗이 좋지 않으면 역시 기대하는 열매를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말씀은 언제나 풍요롭고 능력이 있는 살아있는 좋은 씨앗입니다. 그리고 우리 마음의 토양도 하느님께서 당신의 모상대로 만들고 숨을 불어넣어주었으니 더없이 좋은 밭입니다. 그렇다면 좋은 열매를 맺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언제나 주님께서 원하시는 열매가 풍성히 맺어지길 희망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능력을 믿고 말씀을 피상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씨앗이 길바닥에 떨어졌다는 것은 부와 권력, 쾌락을 추구하는 세상의 방식에 매달리기 때문에 자비와 용서, 나눔을 추구하는 하느님의 방식이 전혀 스며들지 못함을 뜻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다 해도 세상의 생활방식과 가치관에 사로잡혀 그 말씀을 무시하고 배척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이 밥 먹여 주느냐?”라고 비아냥거리는 사람입니다.
말씀의 씨앗이 돌밭에 떨어졌다는 것은 피상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처음에는 말씀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였지만 말씀 안에 꾸준히 머무르면서 그 말씀의 삶을 살지 못하기 때문에, 시련이 오면 말씀에 의지하기보다 세상 다른 것에 의지하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예를 들면, 수능이나 혼사 등 어려운 일이나 세상의 행복을 추구하는 일이 닥치면 점을 보러 가는 사람들입니다.
가시덤불에 떨어진 경우에 해당하는 사람은 세상걱정과 재물의 유혹과 그밖의 여러 가지 욕심에 가득 차 있는 사람입니다. 온갖 종류의 가시덤불, 진학, 결혼, 명예, 더 좋은 것, 미래에 대한 여러 걱정 등 욕심의 가시덤불은 말씀을 따르는 생각을 뒤덮어 버립니다. 하느님의 말씀도 자기 욕심을 채우는데 방해가 되지 않을 때만 좋은 것으로 인정될 뿐입니다. 가시덤불은 걱정과 욕심, 상처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상처를 지니고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열린 마음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여서 ‘서른 배, 예순 배, 백 배’의 열매를 맺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들은 하느님 말씀을 늘 최우선에 두고, 삶의 기반과 지침으로 삼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믿음, 희망, 사랑의 열매를 맺음으로써 등경위의 등불처럼 세상을 환히 비추게 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모든 삶의 기준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 말씀을 더욱 더 깊이 깨닫게 됩니다. 깨닫게 되면 풍성한 열매를 맺어 자신과 다른 이에게 유익을 줍니다.
말씀의 열매를 맺는 삶이 이어지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나 그 열매는 결코 하루아침에 얻어지는 것이 아님을 잊지 마십시오! 열매는 손발에서 맺어집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씨앗의 법칙 7가지
1. 먼저 뿌리고 나중에 거둔다. 거두려면 먼저 씨를 뿌려야 한다. 원하는 것을 얻으려면 먼저 주어야 한다.
2. 뿌리기 전에 밭을 갈아야 한다. 씨가 뿌리를 내리려면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상대에게 필요한 것과 제공시기 및 방법을 파악하라.
3. 시간이 지나야 거둘 수 있다. 곧바로 거둘 수 없다. 제공 했다고 해서 즉각 그 결과를 기대하지 마라.
4. 뿌린 씨 전부 열매가 될 수는 없다. 10개를 뿌렸다고 10개 모두를 수확할 수는 없다. 모든 일에 반대급부를 기대하지 마라.
5. 뿌린 것보다 더 많이 거둔다. 모든 씨앗에서 수확을 못해도 결국 뿌린 것보다 많아 거둔다. 너무 이해타산에 급급하지 마라.
6.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끼치면 손해를, 이익을 주면 이익을 얻는다. 심는 대로 거둔다.
7. 종자는 남겨 두어야 한다. 수확한 씨앗 중 일부는 다시 뿌릴 수 있게 종자로 남겨 두어야 한다. 받았으면 다시 되갚아라.

좋은땅의 사람
-이영근신부-
우리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해설까지도 직접 해주셨습니다.
이 비유는 세 가지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첫째>는 씨 뿌리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요, <둘째>는 씨가 뿌려진 땅에 대한 이야기, 곧 밭에 대한 이야기요, <셋째>로는 뿌려진 씨에 대한 이야기, 곧 열매인 결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의 마지막 구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말씀을 듣고 받아들여,
어떤 이는 서른 배, 어떤 이는 예순 배, 어떤 이는 백배의 열매를 맺는다.”(마르 4,20)
여기서, 우리가 우선적으로 알아들어야 할 것은 말씀이 열매가 아니라 씨앗으로 뿌려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씨앗은 열매를 맺는 권능 곧 능력을 지니고 있고, 동시에 그것은 ‘선사된 것’(datum)이요, ‘먼저 베풀어진 사랑’이라는 사실입니다.
이제, 선물인 말씀의 씨앗은 이미 우리 안에 뿌려졌고, 우리의 소명은 그 열매를 맺는 일입니다. 그것은 한 알의 밀알이 썩어야 열매를 맺듯이, 자신이 죽어야 맺는 일이요, 또한 그 열매는 자신이 먹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 내어주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열매는 자신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기보다, 타인과의 관계 안에서 맺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 서로는 구원의 길을 함께 가도록 짝 지워진 동반자요, 동행자가 됩니다. 곧 우리는 내 형제, 내 본당, 내 나라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거름이 되어야 하는 소명을 짊어지게 됩니다. 그러기에, 내 형제, 내 공동체, 내 나라가 바로 나의 소명입니다.
아를르의 체사리오는 말합니다.
“만일 누가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먹지’ 않는다면,
(먹지 않고 저장된) 말씀은 만나에 구더기가 끓었듯이 구더기가 끓게 될 것이다.”
한편, 이는 내가 몇 배의 열매를 맺고 있는가? 라는 질문은 내가 좋은 땅인가 아닌가를 묻는 질문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씨앗이 떨어질 때 그 땅이 좋은 땅 이었는지 아니었는지에 따라 열매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씨앗이 뿌려지면 그 땅은 그 씨앗으로 말미암아 좋은 땅이 되어가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땅은 씨앗과 함께 일구어지기 때문입니다. 곧 씨앗으로 말미암아 밭이 일구어지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 땅은 씨앗이 없다면 쓸모없는 땅인 것입니다. 단지 황무지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그러니 밭이 거룩한 것이 아니라, 씨앗이 거룩하고 씨앗으로 말미암아 밭이 거룩해지게 됩니다.
그러기에, 먼저 알아야 할 일은 밭에 씨앗이 선사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씨앗은 놀라운 능력을 갖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그 씨앗의 존재를, 그 가치를 깨닫는 일이요, 그 베풀어진 씨앗을 맞아들이는 일입니다. 곧 그 씨앗으로 말미암아 변화되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좋은 땅의 사람이란 어떤 사람일까?
그것은 땅을 지배하려들지 않고, 뿌려진 씨앗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입니다. 하늘을 쳐다보고 밭에서 일할 줄 알며, 땅의 노래를 하늘과 함께 부르는 사람이요, 하늘의 노래를 땅과 함께 부를 줄 아는 사람입니다. 땅을 윽박지르지 않고 갈라놓거나 파헤치지 않으며, 땅을 매만지며 피땀 흘려 자신의 지문을 새기는 사랑할 줄을 아는 사람입니다. 자신 안에 당신의 사랑이 부어졌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이요, 어느 누구에게도 사랑하기를 마다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하오니, 주님!
당신 말씀의 씨앗을 품고 살게 하소서! 당신 말씀으로 말미암아 살게 하소서!
말씀이 지금 여기, 내 형제와 더불어 내 공동체에서 이루어지게 하소서! 아멘.
- 오늘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마르 4,20)
주님!
좋은 땅의 사람 되게 하소서.
하늘을 쳐다보며, 함께 땅의 노래를 부르는
땅을 지배하지도 윽박지르지도 않고,
보살펴 매만지며 뿌려진 씨앗을 소중히 여기는
뿌린 씨를 거부하지 않고, 지지하며 북돋우는
씨앗의 소명을 도와주며, 열매를 맺어야 하는
마음 안에 사랑이 부어졌음을 받아들이는
그래서 누구에게나 사랑하기를 마다하지 않고, 결코 사랑하기를 그치지 않는
그런 좋은 땅의 사람 되게 하소서.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송영진신부-
“씨 뿌리는 사람은 실상 말씀을 뿌리는 것이다. 말씀이 길에 뿌려지는 것은
이러한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들이 말씀을 들으면 곧바로 사탄이 와서
그들 안에 뿌려진 말씀을 앗아 가 버린다. 그리고 말씀이 돌밭에 뿌려지는 것은
이러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말씀을 들으면 곧 기쁘게 받는다. 그러나 그들에게
뿌리가 없어서 오래가지 못한다. 그래서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곧 걸려 넘어지고 만다. 말씀이 가시덤불 속에 뿌려지는 것은 또 다른 사람들이다.
이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과 그 밖의 여러 가지
욕심이 들어가, 그 말씀의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한다.
그러나 말씀이 좋은 땅에 뿌려진 것은 이러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말씀을 듣고
받아들여, 어떤 이는 서른 배, 어떤 이는 예순 배, 어떤 이는 백 배의 열매를
맺는다(마르 4,14-20).”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는 사람들을 네 종류로 분류해 놓은 비유가 아니라,
‘좋은 땅’이 되어서 많은 열매를 맺으라는 훈계 말씀입니다.
모든 사람은 원래 그냥 백지 상태의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살다보면 어떤 때에는 ‘길’이 되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돌밭’이 되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가시덤불’이 되기도 합니다.
반대로, 꾸준히 노력해서 ‘좋은 땅’이 되기도 합니다.
(길, 돌밭, 가시덤불, 좋은 땅은 모두 내 안에 있습니다.)
만일에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길, 돌밭, 가시덤불’로 정해져 있다면,
결과도 이미 정해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 자체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만일에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좋은 땅’으로 정해져 있다면,
많은 열매를 맺는 것도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고,
그러면 신앙생활을 할 필요가 없게 됩니다.
구원받을 사람과 멸망할 사람이 이미 정해져 있다는 ‘예정론’은
우리 교회의 교리가 아닙니다.
정해져 있는, 그래서 바꿀 수 없는 운명 같은 것은 없습니다.
내가 마지막에 어떻게 될 것인가는 나의 노력에 달려 있습니다.
마태오복음서 저자는 예수님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마태 12,20-21).”
‘부러진 갈대’와 ‘연기 나는 심지’는 구제불능으로 보이는 사람을 상징합니다.
이 말을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 적용하면, ‘좋은 땅’으로 바뀔 가능성이
하나도 안 보이는 ‘길, 돌밭, 가시덤불’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완전히 망가진 것처럼 보이는 땅도 잘 개간해서
‘좋은 땅’으로 만드시는 분, 즉 예수님은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 외에는
다른 길이 안 보이는 사람도 회개시켜서 구원하시는 분입니다.
중요한 점은 예수님의 그런 노력에 ‘내가’ 응답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은 나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어떻게든 나를 구원하려고 애쓰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내가 먼저 나 자신을 포기해 버리면,
예수님도 더 이상 어떻게 해 주실 수가 없습니다.
1) 사탄이 와서 말씀을 앗아 가 버린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말씀을 들어도 귀 기울여 듣지 않고 흘려듣는다면,
또 그 말씀을 믿지 않고 말씀에 대해서 의심을 품는다면,
우리 마음에 빈틈이 생기고, 사탄이 그 빈틈에 자리 잡게 됩니다.
그러니 말씀을 들을 때에는 말씀만 들어야 합니다.
세속에서 들려오는 온갖 소리를 차단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중요하고 급한 연락이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미사 참례 중에도 휴대폰을 끄지 않고, 전화기에만 신경을 쓰고 있다면?
그것은 마음의 일부를 세속에 연결시켜 놓은 채로 말씀에 집중하지 않는 것이고,
예수님이 아닌 것에 한눈을 팔고 있는 것이고,
말씀은 안 듣고 세속의 소리들을 듣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탄이 와서 강제로 말씀을 빼앗아 가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내가 사탄에게 말씀을 내주는 것입니다.
말씀을 받아들여서 열매를 맺는 일은,
나의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노력이 필요한 일입니다.
딴 생각이나 하고 있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2) 말씀이 돌밭에 뿌려져서 뿌리가 없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신앙은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만일에 말씀을 기쁘게 듣긴 하지만 실천하지 않으면,
또는 실천을 하더라도 재미없고 힘들고 귀찮다는 생각이 들어서
조금 하다가 만다면, 말씀이 내 안에 뿌리를 내리지 못합니다.
그러면 환난이나 박해 때에 바로 넘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꾸준히 실천해서 신앙이 곧 생활이 된다면,
환난과 박해가 닥쳐도 흔들리지 않게 됩니다.
(평소에 기도하지 않던 사람이라면,
갑자기 어떤 일이 생겼을 때 기도를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고 당황하게 되고,
기도를 하더라도 기도의 힘을 믿지 못합니다.
안 하던 기도를 갑자기 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평소에 꾸준히 기도하는 사람은, 갑자기 어떤 일이 생겼을 때
그 일 때문에 놀라고 당황할 수는 있겠지만, 그래도 곧바로 기도할 수 있고,
기도를 통해서 마음의 안정과 평화를 되찾게 됩니다.
그리고 기도의 힘을 믿는 생활을 계속 해 왔기 때문에, 그 기도에 힘이 있습니다.
힘이 있는 기도는 반드시 좋은 결과로 이어지게 됩니다.)
3) 가시덤불이 말씀의 숨을 막아 버린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평소에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더라도,
어떤 뜻밖의 사고나 불행한 일을 당하면, 누구든지 근심 걱정에 빠질 것입니다.
걱정스러운 일이 생겼을 때 걱정을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믿음으로 그 걱정을 극복해야 합니다.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극복하려고 노력하면 되고,
도저히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라면,
기도하면서 주님께 그 일을 맡기면 됩니다.
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여러 가지 욕심에 사로잡힐 수도 있는데,
욕심인 줄도 모르고 그것을 그냥 인간의 본성이라고 생각할 때가 많고,
“누구나 다 그렇게 살고 있는데...” 라고 말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누구나 다 그렇게 사는 것”을 포기하고
세속 사람들과는 다르게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누구든지, 또 언제든지, 상황에 따라서 잠깐이라도 ‘나쁜 땅’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 위기를 하나씩 극복하면서 ‘좋은 땅’으로 나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그렇게 노력할 때, 내버려 두지 않고 우리를 도와주시는 분입니다.
바로 그 도움을 믿어야 합니다.)

-조욱현신부-
복음: 마르 4,1-20: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3절)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시키시어 우리에게 끊임없이 미래의 부활을 보여주신다.(1베드 1,3 참조) 씨가 땅에 떨어지면 땅속에서 썩지만, 주님의 위대한 섭리는 그 씨앗을 다시 태어나게 하고, 한 알의 씨앗에서 많은 것이 자라나 열매를 맺는다.
“씨를 뿌리러 나갔다.” 나갔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우리를 구원하신 역사적인 섭리 안으로 나가신 것을 의미하며, 우리와 더욱 가까이 계시기 위하여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셨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죄 때문에 문이 가로막혀 우리가 들어갈 수가 없었으므로 그분께서 우리에게 오신 것이다. 그분은 믿음의 말씀을 뿌리기 위해 나오셨다. 여기서 당신의 가르침은 “씨”요, 인간은 “밭”이며, 당신 자신은 “씨 뿌리는 사람”이라 말씀하신다.
“어떤 것은 길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다.”(3절) 씨 뿌리는 사람은 골고루 구별 없이 밭에 씨를 뿌리듯 주님께서도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모든 이에게 말씀이라는 선물을 주신다.(로마 5,15 참조) 그런데 인간은 그 씨앗을 잃어버린다. 그것은 씨 뿌리는 사람의 탓이 아니라, 씨를 받아들이는 땅, 곧 듣기를 거부하는 사람의 탓이다. 인간이라고 하는 밭이 어떠냐에 그 결실이 달려있다.
자연으로 보면 돌밭이나 길이나 가시덤불은 바뀌기는 힘든 것이다. 그러나 영적 질서에서는 돌밭이 기름진 땅이 될 수도 있고, 길도 사람이 지나가지만 않으면 풍요로운 밭이 될 수 있으며, 가시덤불도 걷어 내면 씨앗이 자라나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이것이 불가능하다면 주님께서는 씨를 뿌리지 않으셨을 것이다. 아무런 변화가 없다면 그것은 씨 뿌리는 분 탓이 아니라, 변화되기를 거부하는 자들의 탓이다.
돌밭에 떨어진 씨앗은 싹은 돋았지만 해가 솟아오르자 뿌리가 없어 말라버렸다고 한다. 싹이 말라버린 것은 뜨거운 열 때문이 아니라, “뿌리가 없어서 말라 버린 것이다.”(6절) 이런 사람들은 길에 떨어진 씨처럼 마음이 거칠고 무심하고 부주의 하다. 돌밭에 떨어진 사람들은 나약함 때문에 실패한 사람들이다.
“가시덤불이 자라면서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하였다.”(7절) 하느님의 말씀이 숨 막혀 버렸다면, 그것은 가시 때문이 아니라, 가시덤불을 그냥 내버려 두는 사람들 때문이다. 우리가 할 수 있다면 가시덤불이 자라지 못하게 막고, 우리의 재물을 쓸모 있게 사용할 수 있다. 그래서 “세상걱정”이라 했고, “재물의 유혹”이라 했다.(19절) 세상과 재물을 탓하지 말고 타락한 의지를 탓해야 한다.
“어떤 것은 서른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백 배의 열매를 맺었다.”(8절) 땅도 좋고, 씨 뿌리는 분도 한 분이시고, 씨도 같은데, 어찌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서른 배의 열매를 맨은 것인가? 이것은 땅의 준비 상태에 달려 있다. 좋은 땅이라고 해도 땅의 준비 상태에 따라 차이가 있다. 잘못은 농부나 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씨를 받아들이는 땅에 달려있음을 알 수 있다.
나는 과연 어떤 마음의 밭을 가지고 말씀을 듣고 실천하고 있는가? 내 마음의 굳은 땅은 쟁기로 갈아엎고, 돌을 골라내고, 가시덤불을 걷어 내야 한다. 사랑의 뿌리가 내릴 수 없는 단단한 땅을 가지고 있어서는 안 된다. 나는 어떤 결실을 내며 살아가고 있는지 생각하며 말씀의 씨앗을 잘 가꾸어 결실을 풍성하게 맺는 삶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은총의 삶을 주님께 청하며 기도하자.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마르 4, 3)
-한상우신부-
씨를 뿌리는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씨 뿌리는
여정 없이는 결코
우리의 여정안에서
맛있는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씨뿌리는
믿음과 용기안에
삶은 더더욱
풍요로운 하느님의
선물이 됩니다.
씨뿌리는 사람은
자신의 삶안에서
적극적이고
겸손한 사람입니다.
모든 환경안에서
건강한
삶의 의미와
삶의 가치를
일구어내는
사람입니다.
하느님께서
원(願)하시는 사람은
낙심하지 않고
희망의 씨를 뿌리는
사람입니다.
우리또한
우리 삶의
자리에서
행복의 씨를
뿌리는 사람이길
기도드립니다.
씨 뿌림과 열매
생명과
하느님 나라는
적극적인 삶안에서
이루어지는
믿음의 신비입니다.

-오상선신부-
오늘 복음은 그 유명한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입니다.
"그분께서는 호수에 있는 배에 올라앉으시고 군중은 모두 호숫가 뭍에 그대로 있었다"(마르 4,1).
군중이 많이 모여들자 예수님께서 따로 배에 올라 그들을 가르치십니다. 예수님은 호수 위에 계시고, 군중은 뭍에 있으니 장소적으로 대비를 이룹니다.
배가 연단 역할을 하는 셈입니다. 예수님께서 군중과 거리를 두고 조금 떨어져서 말씀을 하시니 다수의 군중이 알아듣기에 알맞은 구조가 형성됩니다. 존중과 배려로 건강하게 가르치고 배우기 위해서 이처럼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는 것이 필요하기도 합니다.
"(그분 둘레에 있던 이들) 너희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가 주어졌지만 저 바깥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그저 비유로만 다가간다"(마르 4,11).
예수님 둘레에 있던 이들과 바깥 사람들, 여기서도 대비가 일어납니다. 비유의 속뜻을 깨닫는 이들과, 그저 비유로 듣고 흘려버리는 이들이 존재합니다. 누가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하느님 나라의 신비는 예수님 곁을 지키는 이들, 말씀에 머물러 비유의 속뜻을 탐색하는 이들의 몫입니다.
"씨 뿌리는 사람은 실상 말씀을 뿌리는 것이다"(마르 4,14).
이미 복음 환호송에서 "씨앗은 하느님의 말씀, 씨 뿌리는 이는 그리스도"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바로 하느님의 말씀을 뿌리는 분이십니다.
길에 뿌려진 씨는 사탄이 앗아가고 돌밭에 뿌려진 씨는 박해와 환난에 말라버립니다. 땅이 씨앗을 제대로 품기도 전에 외부적 요인으로 씨앗의 생명이 사장되는 것이지요. 어쩌면 여기까지는 땅에게 고의적 책임을 백 프로 지우기 어렵다고 보입니다.
그런데 가시덤불 속에 떨어진 씨는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 그 밖의 여러 가지 욕심"(마르 4,19)에 숨이 막혀 열매를 맺지 못한다고 합니다. 땅이 말씀의 씨앗보다 가시덤불을 더 집중 성장시킨 탓이니 여기서부터는 땅의 책임이 큽니다. 말씀을 품기는 하지만, 세상 걱정, 재물, 욕심에 햇빛과 양분과 바람을 더 많이 몰아주니 말씀은 질식될 수밖에 없지요.
"그들은 말씀을 듣고 받아들여 ... 열매를 맺는다"(마르 4,20).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은 열매를 맺습니다. 그 사람은 하느님의 말씀이 자기 안에서 새 생명을 틔우도록 터를 비옥하게 만드는데 제 모든 에너지를 쏟아붓습니다. 제게 다가오신 말씀을 놓치지 않고 받아들여 품습니다. 그 씨앗에 머물러 싹이 나고 뿌리가 돋고 줄기가 엮이는 신비를 관상합니다. 이 지난한 기다림이 열매를 맺을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말씀에 매진합니다. 말씀이 자신을 드러낼 때까지, 신비의 얼굴을 비출 때까지 그는 쉬지 않고 싫증 내지 않고 머무릅니다.
제1독서에서 주님은 성전을 지어 바치고자 하는 다윗의 염원을 고사하시며 그에게서 한 집안을 일으켜 주리라 선언하십니다(2사무 7,11 참조).
"나는 너를 모든 원수에게서 평온하게 해 주겠다"(2사무 7,11).
이집트 탈출 이후 이스라엘이 땅을 차지하는 과정에서 얼마나 혹독하게 외세와 전쟁을 치러왔는지 우리는 압니다. 주님은 그들의 바람이 진정한 "평온"임을 아시고 이를 약속해 주십니다.
"그에게서는 내 자애를 거두지 않겠다"(2사무 7,15).
주님께서 많이 양보하십니다. 사울을 뽑으셨지만 그의 배반에 얼굴을 돌리셨고, 다윗을 택하셨으나 그 역시 온전한 종은 되지 못했지요. 솔로몬 또한 주님의 귀염을 받지만 말년에는 결국 왕국 분열의 빌미를 제공하고 맙니다(1열왕 11,1-13 참조). 그래도 당신 자애를 거두지 않겠다고 하시니 주님 사랑의 집념이 놀라울 뿐입니다.
결과적으로 보면 주님은 실패자십니다. 특별히 뽑아 세우고 아낌없이 사랑한 이들에게서 번번이 외면 당하셨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지치지 않고 씨를 뿌리십니다. 열매 맺지 못한 씨앗에 절망해 손 놓지 않으시고, 더 나은 사울, 더 나은 다윗, 더 나은 솔로몬을 찾아 씨 뿌리기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 중단 없는 씨 뿌리기가 바로 오늘 우리에게까지 이어진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말씀은 싹 틔우고 열매 맺을 좋은 땅을 갈망합니다. 좋은 땅도 말씀의 씨앗이 뿌려지길 설레며 고대하지요. 그런데 씨를 뿌리시는 주님은 미리부터 땅의 등급을 나눠놓고 좋은 땅만 골라서 씨를 주시지 않습니다. 저러면 손해지 싶을 정도로 길이건 돌밭이건 여기저기 무턱대고 뿌리십니다.
그리고 그 덕에 말씀이 우리에게까지 오셨습니다. 척박하고 메마르고 더럽기까지 한 오염된 땅, 우리 영혼에게까지 순결한 말씀이 심겨진 이유입니다. 순결한 말씀에는 땅까지 송두리째 정화할 힘이 있으니까요.
그래서 주님은 "내 자애를 거두지 않겠다"고 하시는 겁니다. 말씀에 깃든 그분 자애가 우리의 진홍빛 영혼을 눈처럼 희게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이로써 땅이 씨앗을 품는 게 아니라 씨앗이 땅을, 말씀이 우리 영혼을 품는 역전이 일어납니다. 그러니 말씀(씨앗)의 첫 열매는 순결해진 우리 영혼이 될 것입니다.
우리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는 주님 말씀에 머물러 주님과 하나 되는 오늘 되시길 축원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이동 성전
-김찬선신부-
"나는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데리고 올라온 날부터 오늘까지,
어떤 집에서도 산 적이 없다. 천막과 성막 안에만 있으면서 옮겨 다녔다.
네가 어디를 가든지 너와 함께 있으면서, 모든 원수를 네 앞에서 물리쳤다."
어제 하느님의 궤에 대해 얘기하면서 저는 이동식 성전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예루살렘에 정착하여 향백나무 궁을 짓고 살게 되었는데
하느님은 여전히 하느님의 궤에 머물고 계시는 것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이런 마음이 드는 것은 다윗이 못된 놈이 아니라 된 사람이라는 표시지요.
우리말에 못된 놈이란 효도할 줄 모르면 사람이 아직 못되었다는 뜻이고,
사람 양성이 덜 되었거나 요즘 말로 하면 인간성숙이 덜 되었다는 뜻이지요.
사실 이런 효도는 받아줘야 하는데 하느님께서는 이 효도를 거절하십니다.
효도가 시답지 않아서이겠습니까? 그렇지 않지요.
그렇다면 왜 거절하실까요?
쫓아다니며 괴롭힌다는 말이 있는데 쫓아다니시며 사랑하시겠다는 뜻입니다.
다윗은 정착하고 안정된 삶을 누릴지라도
하느님의 사랑은 안주하거나 성전에 안에 갇혀있지 않겠다는 뜻일 겁니다.
본래 사랑이 동적인 것이긴 하지만 찾아가시는 사랑을 하시겠다는 것인데
육화가 그 사랑의 대표적인 것이고,
공생활 내내 한곳에 머물지 않고 여기저기 선포 여행을 다니신 것이나
엠마오의 제자들에게 다가가신 사랑이 다 이런 사랑의 표현입니다.
근심 걱정은 별로 좋지 않은 것 또는 쓸데없는 것으로 흔히 얘기합니다.
실제로 그런 근심 걱정이 있습니다.
그러나 얼마 전 저는 대화 중에 '신앙인에게 염려란 곧 기도야!'란 말을
하면서 염려나 근심 걱정은 마음이 따라가는 거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사실 마음이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다면 사랑하지 않는 거지요.
그리고 마음이 움직이면 이내 몸도 움직이면서
그 사랑이 상대의 감각 안으로 최대한 들어가 감동을 주게 되지요.
하느님은 당신 사랑에게로 다가오지 않고 엠마오의 제자들처럼 떠나가는
사람에게는 몸소 다가가시어 동행과 동감을 해주시는 사랑을 하심으로써
마음의 감동도 주시고 마침내는 돌아서서 당신을 따르게 하시지요.
그리고 아장아장 걷는 어린이에게는 다치지 않도록 쫓아다니며 보호하는
사랑을 하시지만 성장케 되면 그때엔 그도 효도케 될 거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다윗이 어디에 있든 주님께서 함께 계시겠다고 하신 다음
그러나 나중에는 다윗의 집안이 바로 성전이 될 거라고 하십니다.
성전이란 하느님께서 계신 곳이니 주님이
우리 마음에 계시면 마음이 성전이고,
우리 가정에 계시면 가정이 성전이며
우리 집안에 계시면 집안이 성전인데
건물이 성전이 아니라 다윗 집안이 성전이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하느님께서 어떤 성전을 더 좋아하시고
어떤 교회를 더 좋아하시겠습니까?
주님께서 허물어져 가는 당신의 집을 고치되 가서 고쳐달라고 하셨을 때
프란치스코가 아시시에 있는 성당 셋을 고쳐드렸는데
주님께서 고치기를 더 원하신 것은 건물 성전이 아니라
쪼개진 당신 공동체를 다시 하나가 되게 하는 것이었고,
흩어진 당신 백성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가라는 것이었듯이
다윗에게도 건물로서의 성전이 아니라 집안이 성전이 되길 원하셨고,
다윗의 후손 중의 하나가 하느님을 위해 집을 지을 거라고 하십니다.
이런 묵상을 하면서 저에게는 코린토 전서의 다음 말씀이 마음에 남습니다.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그러므로 이제 주님의 궤가 이동 성전이 아니라
우리가 바로 이동 성전이 되어야 함을 묵상하는 오늘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자, 들어보아라.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을 길바닥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쪼아 먹고....어떤 것은 좋은 땅에 떨어져서 싹이 나고 잘 자라 열매를 맺었는데, 열매가 삼십 배가 된 것도 있고 육십 배가 된 것도 있고 백 배가 된 것도 있었다.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들어라.”(마르코. 4,1-20)
어찌 보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길과 돌밭, 가시덤불에 떨어져 버린 말씀의 씨앗은 온갖 역경에 내던져진 가엾은 존재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무조건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논리는 그 씨앗에게는 크나큰 상처일 수 있겠지요.교회의 역사 속에 열매 맺지 못한 말씀의 씨앗도 있었지만, 말씀은 끊이지 않고 우리 신앙인의 삶 속에 울려 퍼졌습니다.
말씀은 길과 돌밭, 가시덤불 속에서 뿌려졌고, 그런 말씀의 아픔들이 있었기에 어딘가에 열매를 맺는 말씀의 기쁨들이 생겨난 것이겠지요
아픔 속에 아파하는 이들 덕택에 오늘의 신앙이 따사로운 햇살 속에 무럭무럭 자라는 것입니다.
열매 맺는 씨앗 옆에 숨 막혀 죽어 가는 씨앗들이 있음을 기억해야겠습니다.
-박병규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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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가 주어졌지만, 저 바깥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그저 비유로만 다가간다.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여 저들이 돌아와 용서받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주시기 위해 오신 분이 용서받지 못하게 비유로만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분별하기 위해서입니다. 비유를 통해 들을 귀가 있는지, 없는지 분별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들을 귀’란 무엇일까요? 오늘 복음에 따르면 열두 사도만 들을 귀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스승으로 여길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 제자들을 십자가의 희생으로 이끄십니다. 지식을 가르치시는 것이 아니라 죽음의 의미를 알려주시는 분이셨습니다. 길과 같은 사람이 되지 않으려면 교만을 죽여야 하고, 돌밭과 같은 사람이 되지 않으려면 육체와 싸워야하며, 가시밭이 되지 않으려면 재물에 대한 욕심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모든 비유의 해석은 다 십자가로 연결됩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지식은 원했지만 십자가는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참 스승으로부터 배울 ‘들을 귀’가 없었던 것입니다.
성경의 모든 내용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구원과 연결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하나니아스라는 사람에게 안수를 받고 눈에서 비늘이 떨어졌습니다. 그러자 모세가 그리스도로 보이고 홍해를 건너는 것이 세례로 보이며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가 성체로 보이고 바위에서 물이 흘러나왔는데 그 생명의 물을 주시는 바위가 그리스도로 보였습니다(1코린 10,1-4 참조). 탈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구원의 신비로 보게 된 것입니다. 자신을 죽이는 십자가의 길로 이끌 스승을 찾으려는 마음이 ‘들을 귀’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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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으로 보면 돌밭이나 길이나 가시덤불은 바뀌기는 힘든 것이다. 그러나 영적 질서에서는 돌밭이 기름진 땅이 될 수도 있고, 길도 사람이 지나가지만 않으면 풍요로운 밭이 될 수 있으며, 가시덤불도 걷어 내면 씨앗이 자라나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이것이 불가능하다면 주님께서는 씨를 뿌리지 않으셨을 것이다. 아무런 변화가 없다면 그것은 씨 뿌리는 분 탓이 아니라, 변화되기를 거부하는 자들의 탓이다.
“가시덤불이 자라면서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하였다.”(7절) 하느님의 말씀이 숨 막혀 버렸다면, 그것은 가시 때문이 아니라, 가시덤불을 그냥 내버려 두는 사람들 때문이다. 우리가 할 수 있다면 가시덤불이 자라지 못하게 막고, 우리의 재물을 쓸모 있게 사용할 수 있다. 그래서 “세상걱정”이라 했고, “재물의 유혹”이라 했다.(19절) 세상과 재물을 탓하지 말고 타락한 의지를 탓해야 한다.
-조욱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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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 허물어져 가는 당신의 집을 고치되 가서 고쳐달라고 하셨을 때
프란치스코가 아시시에 있는 성당 셋을 고쳐드렸는데
주님께서 고치기를 더 원하신 것은 건물 성전이 아니라
쪼개진 당신 공동체를 다시 하나가 되게 하는 것이었고,
흩어진 당신 백성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가라는 것이었듯이
다윗에게도 건물로서의 성전이 아니라 집안이 성전이 되길 원하셨고,
다윗의 후손 중의 하나가 하느님을 위해 집을 지을 거라고 하십니다.
이런 묵상을 하면서 저에게는 코린토 전서의 다음 말씀이 마음에 남습니다.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그러므로 이제 주님의 궤가 이동 성전이 아니라
우리가 바로 이동 성전이 되어야 함을 묵상하는 오늘입니다.
-김찬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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