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월 27일 연중 제3주간 월요일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학자들은
예수가 베엘제불에게 사로잡혔다느니 또는 마귀
두목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느니 하고 떠들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을 불러다 놓고 비유로 말씀하셨다.
"사탄이 어떻게 사탄을 쫓아낼 수 있겠느냐?
한 나라가 갈라져 서로 싸우면
그 나라는 제대로 설 수 없다
.(마르 3,22-30)
The teachers of the Law who had come
from Jerusalem said,
"He is possessed by Beelzebul:
the chief of the demons helps him
to drive out demons."
Jesus called them to him and began teaching them
by means of stories or parables,
"How can Satan drive out Satan?
If a nation is divided by civil war,
that nation cannot stand.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사울이 죽자 원로들은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세운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모독하는 죄는 영원히 용서받지 못한다고 경고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먼저 하나만 기억합시다.
하느님께서 만드신 모든 것은 좋은 것입니다(창세 1장 참조).
좋은 것이 나쁜 것으로 변하는 것은, 실제로 좋은 것이 나쁜 것으로 변질되는 것이 아니라 좋지 않다고 규정하고 판단하는 우리 인식의 편향성이 그것을 나쁜 것이라 매도하기 때문입니다.사람들은 좋은 사람, 나쁜 사람으로 완전히 구분되지 않습니다.
누구 눈에는 좋고 또 누구 눈에는 나쁜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사람은 사람입니다.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는 우리 시선의 왜곡이 참으로 나쁜 것입니다.제 눈에 낯설고 불편하면 악마로 규정하는 일이 우리 신앙 공동체 안에서 자주 발견됩니다.
신심 활동을 하는 신자들 사이에 편 가름의 잘못이 자주 목격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아무리 나쁘더라도 그를 형제애로 보듬어 줄 수 있는 근력을 키워야 합니다.
교정 사목을 하면서 사형수를 찾아가 위로하고 격려하는 것은 왜일까요? 회개하고 뉘우치고 그래서 하느님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인간다움에 대한 열정 때문이 아닐까요? 비록 누군가가 아무리 나쁘더라도 늘 좋은 시선으로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기도할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합니다.신약 성경에 나타나시는 성령께서는 화합과 용서의 힘을 간직하도록 신앙인을 도우십니다.
서로 달라도 하나의 신앙을 지켜 나가도록 우리에게 용기를 주십니다.
서로가 다른 것이 당연하듯, 서로가 하나로 일치하는 것이 성령의 세상에서는 당연합니다.
다름을 틀림으로 생각하는 것이 진정한 악마입니다.
악마가 발붙이지 못하도록 서로를 품어 주어야겠습니다.
다름에 대한 적응, 이것이 참 좋은 세상을 향한 우리의 첫걸음입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전 국민이 자가용 비행기를 타고 피지나 하와이, 싱가포르로 매일 쇼핑하러 다녔고, 거리에는 람보르기니, 포르쉐 같은 고가의 자동차만 볼 수 있었습니다. 돈이 많으니 일을 하지도 않았습니다. 심지어 모든 노동력을 외국인 노동자로 때우고, 심지어 공무원까지 외국인을 채용했습니다.
이 상태로 30년이 지나자 일이라는 개념 자체는 실종했고, 여기에 인광석이 고갈되면서 1인당 국민소득이 2,500불에 불과한 가장 가난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인광석이 커다란 축복이라고 생각했겠지만, 인광석이 가져다주는 부로 인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게 했고 이렇게 나라 전체가 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탄의 유혹은 무엇일까요? 바로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사탄의 가장 큰 유혹이었습니다. 직접적으로 인간의 육체적 감각을 괴롭히고 고문하거나 그들의 육신을 때리지 않습니다. 그들의 의지, 더 정확히 말하면 탐욕을 다스리면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사탄의 특기입니다.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 학자들이 “예수는 베엘제불이 들렸다. 예수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라고 말합니다. 예루살렘에서 내려왔다는 것은 그만큼 권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의 말은 사람들에게 큰 영향력을 끼친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예수님에 대한 부정적인 말이 사람들을 예수님 곁에서 멀어지게 합니다. 주님을 적극적으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옆에 두고도 아무도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유혹하는 사탄의 활동이 활발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어떤 유혹에 굴하지 않고 끊임없이 주님의 뜻을 따르며 사는 길밖에 없습니다.


‘나는 참 별난 사람이다’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이 별난 모습은 특별히 문구류를 너무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책과 함께할 수 있는 문구류에 과소비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쟁여 놓기도 많이 해서 서랍 안에는 사용하지 않은 문구류가 많고, 구매할 때도 마음에 드는 것이라면 한두 개가 아니라 5개 이상을 묶음으로 구매합니다.
지금 쓰고 있는 만년필도 6개입니다. 만년필은 매일 사용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잉크가 굳거나 터져서 나중에 쓰는 데 불편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또 노트에 물이라도 흘리게 되면 무슨 글씨를 쓴 것인지 도저히 알아볼 수 없습니다. 그래도 만년필이 너무 좋아서 여러 개의 만년필을 돌아가며 쓰고 있습니다.
이렇게 아날로그식 감성을 가지고 문구류를 좋아합니다. 그런데 우연히 문구류에 대한 예찬을 늘어놓은 에세이를 보게 되었습니다. ‘나와 같은 사람이 있다니….’라는 생각으로 너무 반가웠고, 그래서 너무 즐겁게 책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다 읽고 나서 솔직히 남는 것은 별로 없는 책이었습니다. 그러나 너무나 재미있게 그리고 신나게 읽을 수 있는 책이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바로 동질감 때문입니다.
주님을 좋아하려면 동질감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동질감을 느끼게 될 때, 더 사랑하게 되고 그 안에서 큰 기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주님과 어떤 마음으로 함께 하십니까?

사랑을 하려고 해야 사랑할 줄 아는 사람들을 만난다
-전삼용신부-
라이언 화이트는 혈우병을 앓아서 수술을 받았는데 그만 에이즈 보균자의 피를 받게 되어 13살의 나이에 에이즈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어른들의 부주위로 죽음을 기다려야 했던 라이언은 누구도 원망하지 않고 너무나 밝게 학교생활을 하였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아주 친절하게 대하고 부모님을 공경하였습니다.
이러한 모습이 매스컴을 통해 전 미국으로 알려지게 되자 당시 레이건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 마이클 잭슨 등의 유명인사들의 위로와 선물도 받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죽음은 그를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라이언은 5년간의 투병 끝에 18세에 죽습니다. 소년이 죽기 전에 아버지와 나눈 대화내용이 크리스천잡지에 실렸습니다.
“아들아, 미안하다. 이제는 네게 아무것도 해 줄 것이 없구나. 이 아빠가 더 이상 어떤 선물도 줄 수 없음을 용서해 다오.”
그러자 아이는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빠, 전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에게 선물을 받았어요. 그런데 아빠 같은 선물을 준 사람은 없어요. 아빠는 저에게 천국에 가는 티켓을 주었어요.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셨잖아요. 이보다 더 위대한 선물은 없어요.”
어떤 아이들은 성당가라고 하면 성당 가서 뭐 하느냐고 말합니다. 그런데 어른들의 부주위로 암이 걸려 죽어가면서도 라이언은 큰 선물을 받았다고 감사해합니다. 왜 그럴까요? 아는 것만 보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있어야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당에 나와 보라고 하면 “종교집단은 다 돈 뜯어먹으려고 저러는 거야!”라고 말합니다. 자신이 그런 사람이니까 다 그렇게 보이는 것입니다. 자신 안에 사랑을 간직하지 못한 사람은 예수님께서 살과 피를 내어주어도 그 안에서 사랑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살과 피로 이웃을 위해 무조건적으로 무언가를 내어준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야 성체성혈에서 하느님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본인이 항상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모든 사람과 심지어 하느님도 이기적으로 바라봅니다. 그러나 성체성혈보다 큰 사랑은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안에서도 사랑을 발견해내지 못하면 그런 상태로는 구원의 희망이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분명 성령의 힘으로 마귀를 쫓아내셨습니다. 그러나 율법학자들은 “예수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 사람들을 미혹시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모독하는 것은 참을 수 있어도 성령님을 모독하는 것은 참을 수 없으시다는 듯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도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
이 얼마나 무서운 말입니까? 우리는 성령을 모독하는 사람이 절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성령은 사랑입니다. 내가 먼저 좋은 것을 줄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성령이 보입니다.
좋은 영은 좋은 영을 알아보고 나쁜 영은 나쁜 영을 알아봅니다.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의 영을 보고도 “예수는 더러운 영이 들렸다.”고 말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 안에 좋은 영이 계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힘으로 조금이라도 사랑의 선물을 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그래야 하느님도 그렇게 하실 수 있는 분으로 보입니다.
‘예쁘게 말을 하니 좋은 사람들이 왔다.’의 저자 심희정씨는 ‘독설 마녀’라고 불릴 정도로 옳고 그름이 명확했고 해야 하는 말은 꼭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게 옳다고 믿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남은 것은 외로움뿐이었습니다. 주위에 사람이 사라진 것입니다.
그녀가 20년째 기자로 일하면서 수많은 성공한 사람들을 만났는데 그들은 하나같이 말을 예쁘게 하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녀도 말을 예쁘게 하려고 시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어느새 주위에 좋은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만나도 알아보지 못하는 이유는 그리스도처럼 되려고 시도하려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성령을 받아도 알아보지 못하는 이유는 이웃에게 내 살과 피를 내어주려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려고 하는 사람만이 사랑을 할 수 있고 사랑을 해 보아야만 하느님의 사랑이 보입니다. 성령을 모독하는 사람은 사랑하려는 마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조재형신부-
보스턴엘 다녀왔습니다. 신학교, 내셔널 슈라인, 성 요셉 트라피스트 수도원을 방문했습니다. 신학교의 성당, 식당, 도서관을 보았습니다. 머물고 싶었고, 기도하고 싶었고, 공부하고 싶은 신학교였습니다. 내셔널 슈라인은 성당이 아름다웠고, 십자가의 길이 잘 조성되어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미사를 함께하였습니다. 트라피스트 수도원은 수사님들이 직접 건축하였다고 합니다. 오랜 시간 기도하셨던 수사님들의 영적인 힘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넓은 땅과 아름다운 성전이 있었지만, 기도하고 복음을 전할 젊은이가 부족해 보였습니다. 신학생이 줄어서 3개였던 신학교가 한 곳만 남았다고 합니다. 내셔널 슈라인에서 미사 주례를 하시던 신부님은 80은 훌쩍 넘어 보였습니다. 180명의 수사님이 있었던 수도원은 50여 명의 수사님이 있다고 합니다. 한국의 신학교, 성지, 수도원을 생각합니다. 아직은 젊은이가 많지만,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젊은이는 줄고 있습니다. 원인을 알면 치료하는 방법을 찾을 수 있습니다. 나름대로 원인을 생각해 봅니다. 여러분은 어떤 원인이 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음식이 맛있으면 사람들은 찾아오기 마련입니다. 교회가 잃어버린 맛은 무엇일까요?
첫째는 ‘말씀’입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실천하지 못했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에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용기를 얻었습니다. 중풍 병자, 소경, 나병 환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치유되었습니다. 다락방에 숨어서 떨고 있던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거리로 나왔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삶의 중심에 있어야 합니다.
둘째는 ‘기도’입니다. 풍요와 발전을 위해서 마르타의 삶에 충실했지만, 하느님의 뜻을 찾기 위한 마리아의 기도가 부족했습니다. 가족이 모여 함께 기도하는 시간을 마련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분주한 중에도 늘 기도하셨습니다. 구하면 주시고, 찾으면 얻고, 두드리면 열린다고 하셨습니다. 몸을 위한 여행과 휴가도 좋지만, 영혼을 위한 피정이 필요합니다.
셋째는 ‘교회의 가르침’입니다. 교부들의 가르침을 전하지 못했습니다. 영적인 서적을 가까이하지 못했습니다. 우리 영혼의 빈 창고에 세상의 것들이 들어왔습니다. 우리의 판단과 행동의 기준에 세상의 가치와 세상의 욕망이 함께 했습니다. 좋은 땅에 떨어진 씨는 풍성한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습니다. 교회의 서적과 신문을 가까이해야 합니다.
넷째는 ‘미사’입니다. 주일미사 참례 자가 줄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만찬을 하시기 전에 먼저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빵을 떼어 나눠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이것을 받아먹으십시오. 이는 여러분을 위해 내어 줄 내 몸입니다.” 미사는 예수님의 희생과 나눔의 재현입니다. 미사를 통해서 주어지는 은총을 받아야 합니다.
다섯째는 ‘나눔과 친교’입니다. 나눔과 친교가 적어지고 있습니다. 초대 교회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서 가진 걸 기꺼이 나누었습니다. 가난한 이, 과부, 고아, 병든 이, 노예, 이방인도 친교를 함께 나누었습니다. 초대 교회 신자들은 이 세상에서 이미 천국을 체험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말을 함께 묵상하면서 새로운 한 주간을 지냈으면 합니다. “아무도 다른 이에게 악을 악으로 갚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오히려 언제나 상호 간에 또 모든 이에게 선을 행하려고 애쓰십시오. 항상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원하시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전서 5장 15-18)”

선한 영과 악령을 구분하고자 노력하는 식별력이 더욱 요구되는 시대입니다!
-양승국신부-
유대인들의 사상 안에 베엘제불(Beelzebul)은 ‘악령들의 두목’을 의미합니다. 히브리어로는 복합명사 바알제불(Ba'al Zebul)인데, 이는 집주인(lord of the dewlling)이라는 뜻입니다. 악의 원천이 되는 존재로 악의 중심, 악령들의 대부 역할을 하는 ‘대마귀’(大魔鬼)라고 보시면 맞겠습니다.
그런데 오늘 예루살렘에서 파견되어온 율법학자들이 참으로 해서는 안될 말을 예수님을 향해 던지고 있습니다.
“예수는 베엘제불이 들렸다. 예수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쫒아낸다.”(마르코 복음 3장 22절)
해도해도 너무한 말, 어처구니없고 얼토당토 안한 말 앞에 예수님께서는 정말이지 억장이 무너졌습니다. 자신들을 베엘제불로부터 구원해주기 위해 이 땅에 내려오신 당신을 향해, 쌍수를 들어 환영하고 백번 천번 감사해야 마땅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신을 향해 베엘제불이 들렸고, 마귀 우두머리와 협력하여 마귀들을 쫒아낸다는 루머를 퍼뜨리니, 뭐라 할말을 잃고 마셨습니다. 율법학자들은 자신들이 퍼트린 악의에 찬 가짜 뉴스가 얼마나 큰 잘못인지 잘 모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이 땅에 내려오신 하느님이십니다. 그런데 하느님을 향해 마귀의 두목이라고 하니, 이보다 더 큰 신성모독이 어디 있겠습니까? 성령의 인도로 이 땅에 오셨고, 성령으로 충만하시며, 성령의 힘으로 악령을 쫓아내고 계신 예수님께 사탄의 하수인이라고 하니, 이보다 더 큰 성령 모독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율법학자들이 유포하고 있는 가짜 뉴스의 심각성과 폐해를 잘 알고 계셨던 예수님께서는 아주 강한 어조로 조기 진화에 나서십니다. 그들이 계속 엉뚱한 말을 계속할 때, 당신의 어린 양떼들이 받게 될 악영향이 심각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마르코 복음 3장 29절)
사실 예수님 가르침들 가운데 중요한 주제가 죄의 용서였습니다. 악의 길에서 돌아서서 아버지께로 돌아서기만 하면, 겸손하게 용서를 청하며 새 삶을 다짐하면, 그 어떤 무거운 죄라 할지라도 용서해 주신다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유독 성령 모독죄에 대해서는 아주 강경한 태도를 취하고 계십니다. 바리사이들이 오늘 저지른 죄가 성령 모독죄의 대표적인 모습입니다. 그들는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을 끝끝내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분에게 베엘제불이라는 오명을 뒤집어 씌웠습니다.
대놓고 하느님을 모욕하는 사람들, 끝끝내 하느님께로 돌아서기를 거부하는 사람들, 하느님을 정면으로 저주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예수님께서도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스스로 자신을 구원에서 배제시키니, 어찌해볼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혹시라도 주변에 그런 사람들이 없는지 잘 살펴봐야겠습니다. 그런 분들 리스트를 한번 작성해봐야겠습니다.
끝까지 예수님을 거부하는 사람들, 틈만 나면 하느님을 조롱하고 욕되게 하는 사람들, 하느님을 시험하고 욕되게 하는 사람들, 그들은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될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든 그들의 회개할 수 있도록 기도하고 또 구체적인 노력을 계속해야겠습니다.
요즘 주변을 살펴보니 여기저기 베엘제불들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이 시대 또 다른 대마귀들이요 악령들입니다. 그들은 교묘하게 위장하고 등장해 어린 양떼를 현혹시킵니다.
그들에게 있어 양떼는 섬김의 대상이나 사목의 대상이 절대 아닙니다. 먹잇감이요 욕구충족의 대상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분위기는 비슷합니다. 거짓 목자들은 가짜 뉴스를 진짜인양 목숨걸고 퍼뜨리고 있습니다.
목자로서의 가장 기본인 인성이나 품위, 겸손의 덕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천박한 언행과 기이한 억지논리로 양떼를 악의 구렁텅이로 몰고 가고 있습니다. 전형적인 베엘제불입니다.
선한 영과 악령을 구분하고자 노력하는 식별력이 더욱 요구되는 시대입니다. 더 눈을 크게 떠야겠습니다. 거짓 목자에게 현혹되지 않도록 유의해야겠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있습니다. 나름 열심한 가톨릭 신자들이 가짜 뉴스에 현혹되어 불행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거짓 매국 언론에 빠지지 않도록 경계심을 늦추지 않아야겠습니다. 홀로 식별이 어려울 때는, 엉뚱한 사람이 아니라 우리 가톨릭 교회 목자들의 조언에 귀를 기울여야겠습니다.

위기는 기회입니다
-반영억신부-
소위‘열심 하다’고 하는 사람이 주변 사람들로부터 환영 받지 못하는 경우를 봅니다. 본인은 정말로 열심히 복음을 살려고 노력하는데도 남들이 인정해 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상처를 받고 또 미움을 낳기도 합니다. 심지어 교회를 떠나기도 합니다. 성당에서 봉사를 한다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많은 시간과 경제적인 출혈을 낳으면서 일했다고 생각하는데 인정을 받는 것은 고사하고 오히려 비난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 원인이 어디 있을까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아마도 오해나 시기 질투하는 마음 때문에 그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당사자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 혹 복음과 일치된 삶을 잘 살아왔는지 반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겸손함이 없으면 밥맛이 떨어집니다. ‘사람들은 왜 저 모양일까?’하는 생각을 갖는 순간 기도의 효능은 없어지고 맙니다. 그러므로 엉뚱한 소리가 들릴 때 상대를 미워하지 말고 자신을 살펴 부족함을 채우는 은총의 시간으로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친척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마르3,21)고 생각하여 그분을 붙잡으러 나서기도 하였고, 율법학자들은 “예수는 베엘제불에 들렸다.”,“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마르3,22).고도 하였고 사람들은“예수는 더러운 영이 들렸다”(마르3,30)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소문은 진실 아니었습니다. 자신들의 반대자가 상대하기 거북하고 비겁하다고 해서 그를 악령에 사로잡힌 정신 이상자로 몰아 붙여 매장 시키려는 것은 아주 비열한 행위가 아닐 수 없습니다. 결국 거짓은 밝혀지고 그 헛된 소문을 통해서도 예수님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우리 삶에 있어서도 좋은 소문이든 나쁜 소문이든 때가 되면 진실은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소문과 비난에도 흔들리지 않는 온유함으로 자기 몫을 다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소문은 소문일 뿐입니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처신하느냐에 따라 더 큰 은총의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어떤 풍문을 통해 자신을 볼 수 있는 기회를 갖기도 하고 상대방의 속을 환히 보게 되기도 합니다. 그러니 주님의 말씀을 통하여 위기를 기회로 삼는 지혜를 얻기 바랍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이 잘 되는 것을 시기하고 질투하며 부러워하고 있다면 우리 마음 안에 이미 악이 활동하는 것입니다. 남을 모함하고 사실과는 다른 소문을 퍼뜨리고 선한 일을 하는 것을 방해하며 사람들을 갈라놓고 나를 과시하며, 나의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고 있다면 나는 분명 악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악에 사로잡히면 결국 성령을 거부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됩니다(마르3,30).
물론 주님께서는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그러나 고의적으로 죄를 범하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고자 노력하지 않는 행위, 주님께서는 죄의 용서를 할 권한이 없다고 생각하거나, 중죄를 범하여 나의 죄는 용서 받을 수 없다고 하느님의 자비를 포기하는 사람은 용서 받을 수 없는 법입니다. 특히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켜 주시는 성령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결국 어둠에 머물게 되고 그 자체가 용서 받지 못하는 상태의 영원한 죄입니다. 성령을 모독하는 죄는 어떤 특정한 죄라기보다는 마음이 비뚤어져서 예수님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영을 거부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성령을 통해 예수님 안에서 인간이 선과 생명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도록 자비와 용서를 선물하시는데 이런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고의적으로 거부하고 왜곡하며 그 상태를 즐기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스스로 멸망의 길을 선택하는 행위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령을 모독하는 죄는 용서받을 수 없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아들여 하느님 말씀에 나를 비추어 보고 바르지 못한 마음과 행실을 고쳐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는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5,16).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나를 스스로 착하다고 자만하지 말고 하느님 눈에 드는 겸손한 행실을 통해 은총에 은총을 더해가길 희망합니다.
얼굴도 잘생기고 말도 잘하면 ‘금상첨화’, 둘 중에 하나가 부족하면 ‘천만다행’, 둘 다 부족하면 ‘설상가상’이랍니다. 고쳐야 할 것은 얼굴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결코 마음에 도금을 입히지 마십시오. 미루지 않는 사랑,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마르 3,29)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용서받지 못하는 죄’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당신께서 성령의 힘으로 마귀 쫓아내는 일을 하신다는 것을 밝히십니다.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도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마르 3,29)
그런데 이상하지 않습니까? “영원히 용서받지 못한 죄”가 있다니 말입니다. 당신께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 속죄양이 되셨는데, 어찌 용서받지 못하는 죄가 있을 수가 있을까요?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원에 한계가 있다는 말일까요? 혹 하느님의 자비에 한계가 있다는 말일까요? 왜 용서받지 못한 죄가 있을 수가 있을까요?
우리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제대로 알아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용서받지 못한 죄”로 “성령을 모독하는 죄”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용서하지 않는 죄”가 아니라 “용서받지 못하는 죄”라는 점입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용서하시지 않으신다.’는 뜻이 아니라, 하느님께서는 ‘용서하셔도 그가 용서를 받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곧 용서받지 못함은 용서하시는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용서를 받아들이지 않는 인간으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가톨릭교회교리서>에서도 악마에 대해서 말할 때, 그들의 죄가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은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의 결함이 아니라, 그들의 선택이 지닌 돌이킬 수 없는 특성 때문”(393항)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 이는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 용서하지 않으시는 게 아니라 용서하시지만, 인간이 그 용서를 받아들이지 않아서 “용서받지 못한 죄”라는 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렇다면, “성령을 모독하는 죄”란 도대체 어떤 죄를 말할까?
그것은 용서하시는 성령의 활동을 의지적으로 배척하고 비난하거나, 혹은 사탄의 일로 단죄하거나 방해하거나 핍박하는 죄를 말한다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율법학자들이 바로 그런 죄에 걸려든 이들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성령을 모독하는 죄”가 왜 “용서받지 못하는 죄”가 되는 걸까?
그것은 용서를 하시는 성령의 활동을 고의적으로 방해하여 용서를 받아들이지 않는 바람에 새 생명으로 태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곧 빛을 주시고 성화시키시는 성령의 활동을 스스로 제외시킴으로써 결국 구원의 가능성이 상실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결국, 자신의 완고함과 고집으로 성령의 활동을 거부한 바람에 용서가 차단되어 버린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달리 말한다면, 그것은 주님이 아닌 피조물, 특히 ‘자기 자신’이라는 우상을 섬기고 따르는 결과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곧 우상숭배에 빠진 결과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는 자기 자신을 앞세우다 용서하시는 성령의 활동을 거스르는 일이 없어야 할 일입니다. 혹 아직 용서하지 못하고 있는 이들이 있다면, 당장 용서해야 할 일입니다. 지금 당장, 용서하시는 성령을 받아들여야 할 일입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저희가 용서하시고자 하시는 성령의 숨결을 거부하는 일이 없게 하소서!
용서하시는 당신의 자비와 사랑, 당신의 은총을 받아들이게 하소서.
- 오늘말씀에서 솟아난 기도 -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마르 3,29)
주님!
용서하시는 성령의 숨결을 거부하는 일이 없게 하소서!
제 생각과 제 자신이라는 우상에 빠져
구원의 빛을 스스로 차단하지 않게 하소서.
완고함을 꺾으소서. 당신의 사랑을 거부하지 않게 하소서
용서를 받아들이게 하소서. 하여, 받은 그 용서로 용서하게 하소서. 아멘.

마귀
-송영진신부-
“한편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학자들이, ‘그는 베엘제불이 들렸다.’고도 하고,
‘그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도 하였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부르셔서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어떻게 사탄이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 한 나라가 갈라서면 그 나라는
버티어 내지 못한다. 한 집안이 갈라서면 그 집안은 버티어 내지 못할 것이다.
사탄도 자신을 거슬러 일어나 갈라서면 버티어 내지 못하고 끝장이 난다.
먼저 힘센 자를 묶어 놓지 않고서는,
아무도 그 힘센 자의 집에 들어가 재물을 털 수 없다.
묶어 놓은 뒤에야 그 집을 털 수 있다.’(마르 3,22-27)”
율법학자들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권능과 권한’으로 마귀들을 쫓아내신다는 것을
인정하기가 싫어서 “그는 베엘제불이 들렸다.”,
또 “그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 라고 말했습니다.
마귀들은 사람의 힘으로는 쫓아낼 수 없는 강한 존재들이어서
하느님의 힘으로만 쫓아낼 수 있는데, 율법학자들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힘’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하느님의 힘’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 아니라면,
‘마귀 우두머리의 힘’으로 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 나름대로 논리적으로 말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의 억지 논리’를
‘당신의 합리적인 논리’로 반박하십니다.
사탄이 사탄을 쫓아내는 것은 ‘자멸 행위’입니다.
그래서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예수님의 논리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 “혹시 마귀들이 진짜로 쫓겨난 것이 아니라,
‘쫓겨나는 척’만 한 것은 아닐까?” 라고 의심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사실, 안 믿기로 작정한 사람을 믿게 만드는 것은 정말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확실한 증거를 제시해도 그 증거 자체를 부정합니다.
예수님께서 마귀들을 쫓아내실 때, 마귀들은 쫓겨나는 척을 한 것이 아니라,
진짜로 쫓겨났고, 예수님께 굴복했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사도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낼 때에도 그랬고,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낼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해서 생각하면, 사탄이 마귀들을 쫓아내라고
자신의 힘을 남에게 빌려 주는 일은 결코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마귀들은 서로 싸우는 척도 안 하는, 즉 자기들끼리 다투거나 싸우는 일은
전혀 없는, 굉장히 잘 뭉쳐 있는 존재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귀들의 단결력은 인간들의 단결력보다 훨씬 더 강력합니다.
따라서 그런 마귀들에 맞서 싸우려면
우리는 그것들보다 더 강하게 단합을 해야 합니다.
만일에 인간들이 단합하지 않고 서로 분열되고 흩어지면,
그것은 마귀들의 공격에 무방비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마귀들을 쫓아내시는 예수님을 모함하는 것도
사실은 마귀의 술책에 놀아나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를 가리켜서 온갖 비방과 모함을 하는 자들도
마귀가 바라는 대로 일하는, 사실상 마귀의 하수인으로서 일하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힘센 자’는 마귀들을 가리키고,
그 힘센 자를 묶어 놓는 분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마귀들을 완전히 제압해서 굴복시키시는 분입니다.
그런 분이기 때문에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릴 이유가 없습니다.
마귀 우두머리도 예수님 앞에서는 꼼짝도 할 수 없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마귀를 상대로 싸울 때 왜 예수님의 이름으로 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잘 나타냅니다.
만일에 예수님께 기도하지 않고 사람의 힘만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려고 시도하면
백전백패 할 것입니다.
여러 가지 ‘유혹’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우리 입장에서 특별히 더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마귀들이 천사로 위장해서 다가오거나,
심지어 예수님인 척 하면서 다가오는 경우가 있다는 점입니다.
“놀랄 일이 아닙니다. 사탄도 빛의 천사로 위장합니다. 그러니 사탄의 일꾼들이
의로움의 일꾼처럼 위장한다 하여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2코린 11,14-15).”
마귀가 사람들에게 접근할 때에는 마귀의 모습으로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천사의 모습으로 접근합니다.
(사실 마귀도 원래는 천사였습니다.)
겉모습만으로는 천사와 마귀를 구분하지 못합니다.
또 마귀가 성모 마리아의 모습으로 접근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성령을 받은 모습과 악령을 받은 모습이 비슷할 때도 많습니다.
(요즘에 ‘재림 예수’ 라고, 또는 ‘메시아’ 라고 자칭하는 자들을 자주 보는데,
그런 자들도 사탄의 하수인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구분하고, 어떻게 식별하는가?
예수님의 다음 말씀이 하나의 지침이 됩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을 하고 있지 않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내가 그 일들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요한 10,37-38).”
천사는 천사의 일을 하고, 마귀는 마귀의 일을 합니다.
마귀가 천사의 모습을 하고 사람들에게 접근해도
악한 마귀는 선한 천사의 일을 하지 못합니다.
천사가 하는 일은, 죄를 피하고 선을 행하도록 도와주고,
사랑을 실천하도록 도와주고, 더욱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그래서 사람들이 더욱더 하느님께 가까이 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 등입니다.
마귀가 하는 일은, 천사가 하는 일의 반대입니다.
죄를 지어도 괜찮다고, 선과 사랑을 실천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신앙생활은 나중으로 미루어도 된다고 유혹해서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드는 것, 마귀는 그런 일을 합니다.
마귀는 하느님과 사람 사이를, 또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간질하고 분열시킵니다.
용서하지 말고 앙갚음하라고 부추기고...
그 정도 죄는 회개하지 않아도 된다고 다독거리고...
신앙인으로서 해야 하지만 하기 힘든 일들은 하지 말라고 하고,
또 신앙인으로서 하면 안 되지만 하고 싶은 일들은 어서 하라고 재촉하고...
좁은 문으로 가지 말고 넓은 문으로 가라고 유혹하고...
참기만 하면서 자기 것도 챙기지 못하는 것은 어리석다고 하고...
기도하려고 할 때마다, 성당에 가려고 할 때마다 자꾸만 방해하고...

-조욱현신부-
복음: 마르 3,22-30: 성령을 거슬려 지은 죄는 영원히 용서받지 못한다.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학자들은 예수께서 베푸시는 기적을 하느님의 은혜로 인정하기보다는 마귀의 짓이라고 헐뜯었다. 주님께서는 “어떻게 사탄이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23절)라고 하신다. 사탄의 지배하에 있었다는 것은, 사탄은 인간의 의지, 즉 인간의 탐욕을 다스린다는 의미이다. “여러분은 공중을 다스리는 지배자, 곧 지금도 순종하지 않는 자들 안에서 작용하는 영에 따라 살았습니다.”(에페 2,2,)
“한 집안이 갈라서면 그 집안은 버티어 내지 못할 것이다.”(25절) 이 말씀은 성령 때문에 하신 말씀이다. 성령께서는 당신 자신을 거슬러 갈라서지도 않으실 뿐 아니라, 모아들이신 사람들이 갈라지지 않게 하신다. 성령께서는 서로 맞서 갈라진 죄를 용서하시고, 깨끗해진 사람들 안에 사신다. “신자들의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이 되었다.”(사도 4,32)라는 사도행전의 말씀처럼 되게 하시려는 것이다.
“먼저 힘센 자를 묶어 놓지 않고서는, 아무도 그 힘센 자의 집에 들어가 재물을 털 수 없다.”(27절) 여기서 ‘힘센 자’는 악마로 그에게서 털 세간이라는 것은 갖가지 죄와 불경으로 그자가 차지하고 있었던 사람들이며, 장차 그리스도 신자가 될 사람들을 가리키고자 한 것이다. 악마가 인간을 포박했던 것과 똑같은 사슬로 악마를 묶어야 했다. 인간은 이렇게 자신을 옭아매었던 죄의 사슬을 악마에게 남겨 둔 채, 주님께 돌아갈 수 있게 된다.(로마 5,18 참조)
악마가 묶이면 인간은 해방된다. 악마에게서 해방된 인간은 악마가 율법의 도망자요 하느님의 배반자라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악마는 단단히 묶였고 그의 재물인, 악마가 자기의 목적을 위해 불의하게 이용해 온 묶였던 인류이다. 이 인류는 하느님의 자비로 자신을 속박했던 악마의 권력에서 해방되었다. 하느님께서는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류를 회복시켜 불멸성을 갖게 해 주셨다.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도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28-29절) 성령께서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안에 머무르신다. 성령에 참여하기에 합당하다고 여겨지던 사람이 은총에서 등을 돌릴 때, 성령을 모독하는 것이다.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신앙인의 믿음과 삶의 토대를 거부하는 것이다.
우리 생활 속에서도 오랫동안 암흑 속에서 지내게 되면 눈은 보지를 못하게 된다. 오랫동안 누워있는 사람은 걸을 수 없게 된다. 이렇듯 하느님의 진리를 받아들이기를 너무나 오래 거절한다면 하느님의 진리를 보게 되더라도 그 진리를 인정할 수 없다. 그것이 곧 자기 자신을 사랑이시며 진리이신 하느님을 거부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그것이 성령을 모독하는 죄가 되고 영원히 용서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즉 인간 편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믿지 않고 하느님 앞에 나아오지 못하기 때문에 용서를 받을 수가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성령을 거스르는 죄는 하느님의 사랑을 믿지 못하고 악의 상태에 남아있는 것을 말한다. 우리 인간은 언제나 잘못할 수 있고 죄를 지을 수 있다. 그러나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가 생각하는 죄보다도 더 크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분의 사랑을 믿고 앞으로만 나아갈 수 있다면 우리는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가져야 할 자세는 하느님의 사랑을 믿으면서 그분 앞에 나 자신의 부족하고 나약함을 솔직히 인정하면서 용서를 청하는 것이다. 언제나 주님께로 돌아가려는 마음과 용서를 청하는 마음으로 그분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삶을 주시도록 기도하자.
어떻게 사탄이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마르 3, 23)
-한상우신부-
분열에서 분열로
번져가는 분열의
아픔입니다.
반목과 대립으로는
그 어떤 것도
이룰 것이
없습니다.
망가지게 하고
망가뜨리는 우리의
착각과 교만입니다.
예수님을
향해서까지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 말합니다.
전쟁과 경쟁으로
우리의 예수님까지
끌어들입니다.
예수님의 이름과
인격을 그 누구도
빼앗을 수는
없습니다.
내 안의 아무 것도
내려놓지 못한
어리석은 결과입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존중과 믿음임을
깨닫게됩니다.
서로를 폄하하고
서로를 인정하지 않는
불신의 관계에서
벗어나는 은총의
날 되십시오.
우리를 끝까지
지켜주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독서와 복음에서는 대비되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제1독서는 이스라엘이 통일 왕국으로 발돋움하는 중요한 사건을 기술합니다.
"우리는 임금님의 골육입니다"(2사무 5,1).
사울이 죽은 뒤 이스라엘은 그의 아들 이스 보셋을 중심으로 왕정을 이어가고, 다윗은 유다 집안의 임금으로 기름부음받아(2사무 2,4 참조) 자기 집안을 다스립니다. 이 상태로 사울 집안과 다윗 집안의 싸움이 지속되다가 이스 보셋이 죽은 뒤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가 헤브론에 있는 다윗에게 몰려와 임금이 되어 달라고 청을 하는 대목이지요.
아브라함의 후손인 한 민족이지만 불안정한 왕정 체제 수립 시기에 갈라진 그들이 다시 하나됨을 꿈꿉니다. 정치적이고 인간적인 견지에서야 분열의 요소들을 지울 수 없지만, 하느님께서 묶어 주신 한 골육이고 또 하느님께서 기름부으신 존재임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집안이, 다윗이야말로 하느님의 사람이고 그분 영이 머무르는 지도자임을 받아들이니 비로소 통일 왕국의 기틀이 마련됩니다.
반면 복음에서는 분열의 골이 심화되고 있습니다.
"예수는 베엘제불이 들렸다 ... 예수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마르 3,22).
예수님께서 세상에서 하신 활동이 질병과 마귀의 억압에 신음하는 이들을 구해주신 일이었음에도 율법 학자들은 그 의미를 애써 부인하려 합니다. 율법에 충실한 자기들을 '선'으로 규정하다 보니, 자기들이 못한 일, 아니 관심조차 없던 일을 이루시는 예수님을 그 반대인 '악'으로 치부해 버리려는 발상입니다.
자기들이 공고히 해놓은 제도와 관습을 수호하려, 설사 그것이 하느님의 영일지라도 다른 것은 철저히 거부하는 행태입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일어나는 선한 기적들도 과거에 없던 것이라면 그들의 이해 범위를 벗어나는 '악'일 뿐입니다. 그들은 고통에서 해방된 이들, 질병에서 치유된 이들의 기쁨과 찬미보다 예수님께 쏠릴 감사와 존경이 불안하고 불편합니다.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도 용서받을 것이다"(마르 3,28).
인간은 누구나 잘못을 저지르고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부족하고 모자라는 인간이 어떤 일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힘에 대해 설령 무지와 착각으로 오해하고 오류를 범한다 해도 인간의 약함에 기인한 그 죄와 잘못은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마르 3,28).
하지만 성령을 모독한 죄에 대해서 예수님은 단호하십니다. 현존하시는 하느님의 영이 이루시는 일임을 감지하면서도 제 이념과 이익을 위해 고의적으로 이를 거부하고 모독하는 이에 대해서 예수님이 이례적으로 엄중히 경고하며 선고를 내리고 계십니다. 아무리 주님의 자비가 무한하다 한들 이를 혐오하고 거부하고 피해버리는 이에게까지 가 닿을 수는 없으니까요.
사랑하는 벗님! 우리는 하느님의 영을 어떻게 감지할 수 있을까요? 일상의 시시콜콜한 일마다 하느님의 뜻이냐 사람의 뜻이냐 잣대를 들이대는 지나친 영성화도 피해야 하지만, 우리 삶의 방향을 결정 짓는 굵직한 사건들에서마저 하느님을 배제하는 무심함 역시 주의해야 합니다. 또 하느님의 뜻을 빙자해 약하고 힘 없는 이들을 길들이고 조종하는 것도 폭력이 될 수 있음을 성찰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영,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과정도 선하고 결과도 선합니다. 끝이 좋으니 다 좋다는 말은 신앙의 언어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자기 욕망에 기인하지 않았기에 누구도 두려움과 불편으로 몰아넣지 않았고, 오로지 상대의 선익을 위한 대가 없는 베풂이었습니다. 곧 성령께서 하신 일이었지요.
성령과 함께하는 영혼, 그리고성령께서 하시는 일을 깨닫고 받아들이는 영혼이 될 수 있기를 청하는 하루 되시길 기원합니다.

임금이 된 다윗은 행복했을까?
-김찬선신부-
"주님께서는 ‘너는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고
이스라엘의 영도자가 될 것이다.’ 하고 임금님께 말씀하셨습니다."
다윗이 드디어 임금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생각을 해봅니다.
다윗은 임금으로서 행복하였을까?
관구장이었던 저를 비추어보면 세속의 군주로서의 그는 불행했을 겁니다.
오늘 사무엘기에서 원로들이 와서 자기들의 임금이 되어달라고 청합니다.
한 인간으로서 이렇게 임금이 되어달라는 청을 받는 것은
갖고 싶었던 권력을 쥐게 된 기쁨이나 행복이 아니더라도
사람들이 자신을 임금으로 인정해준 것만으로 행복합니다.
권력욕이 큰 사람이 아닌 보통 사람일지라도 사람들이 나를
인정해 주는 것은 좋아하고 그리고 인정받을 때 행복하지요.
저도 다르지 않아서 형제들이 저를 인정한 거라고 생각했을 때는
기쁘고 흐믓했지만 그 기쁨과 흐믓함은 오래 가지 않았지요.
나무 위에 올려놓고 흔든다는 말처럼
사람들은 책임자를 뽑아놓고는 흔들기 때문입니다.
나무 아래 있을 때는 좋은 사람이지만
나무 위에서는 좋은 사람이 아닌 겁니다.
사실 나무 아래 있으면 좋은 사람이지만
위에 있으면 그리 좋은 사람이 아닙니다.
대통령 되고 난 뒤에 욕먹는 것이 다 이런 이유지요.
대통령이 되고 난 뒤에 사람이 변했을 수도 있지만
평범한 사람으로는 그 정도로 좋은 사람이지만
대통령으로는 부족한 사람이기 때문이고,
대통령한테는 평범한 사람일 때보다 더를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가 관구장이 된 것이 형제들이 선출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나를 뽑으신 것으로 받아들이면 전혀 달라집니다.
형제들에게 인정받은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책임을 맡기신 겁니다.
그래서 기쁨과 흐믓함보다는 책임이 무겁고,
책임감으로 직무를 수행하기에 인간적으로는 괴롭고,
하느님으로부터 힘을 받지 않으면 직무를 수행하기도 어렵습니다.
다윗은 어떻게 생각했고 어떻게 받아들였습니까?
오늘 사무엘기를 보면 하느님께서 자기를 뽑으셨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하느님 앞에서 원로들과 계약을 맺습니다.
"다윗 임금은 헤브론에서 주님 앞으로 나아가 그들과 계약을 맺었다.
그리고 그들은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세웠다."
그러므로 그는 인간적인 행복을 느끼기보다는 괴로움과 번민이 많았고,
하느님으로부터 힘을 받아 임금의 직무를 수행하다가도 가끔 죄를
짓기도 했는데 그것이 보통 고통이 없고 일이 잘 풀릴 때였습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그것은 틀림없이 일이 자기 뜻대로 잘 될 때 교만해져서 자기 스스로
만족하는 것이 인간인데 다윗도 다르지 않았기 때문일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앞으로 다윗이 어떻게 죄를 짓고,
그러면서도 어떻게 하느님께 돌아오는지를 보게 될 텐데
우리와 비슷한 이런 다윗에게서 우리는 이것을 배워야겠습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학자들은 예수가 베엘제불에게 사로잡혔다느니 또는 마귀 두목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느니 하고 떠들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을 불러다 놓고 비유로 말씀하셨다. "사탄이 어떻게 사탄을 쫓아낼 수 있겠느냐? 한 나라가 갈라져 서로 싸우면 그 나라는 제대로 설 수 없다.(마르 3,22-30)
‘예쁘게 말을 하니 좋은 사람들이 왔다.’의 저자 심희정씨는 ‘독설 마녀’라고 불릴 정도로 옳고 그름이 명확했고 해야 하는 말은 꼭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게 옳다고 믿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남은 것은 외로움뿐이었습니다. 주위에 사람이 사라진 것입니다.
그녀가 20년째 기자로 일하면서 수많은 성공한 사람들을 만났는데 그들은 하나같이 말을 예쁘게 하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녀도 말을 예쁘게 하려고 시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어느새 주위에 좋은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만나도 알아보지 못하는 이유는 그리스도처럼 되려고 시도하려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성령을 받아도 알아보지 못하는 이유는 이웃에게 내 살과 피를 내어주려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려고 하는 사람만이 사랑을 할 수 있고 사랑을 해 보아야만 하느님의 사랑이 보입니다. 성령을 모독하는 사람은 사랑하려는 마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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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 혹 복음과 일치된 삶을 잘 살아왔는지 반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겸손함이 없으면 밥맛이 떨어집니다. ‘사람들은 왜 저 모양일까?’하는 생각을 갖는 순간 기도의 효능은 없어지고 맙니다. 그러므로 엉뚱한 소리가 들릴 때 상대를 미워하지 말고 자신을 살펴 부족함을 채우는 은총의 시간으로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반영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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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용서받지 못한 죄”로 “성령을 모독하는 죄”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용서하지 않는 죄”가 아니라 “용서받지 못하는 죄”라는 점입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용서하시지 않으신다.’는 뜻이 아니라, 하느님께서는 ‘용서하셔도 그가 용서를 받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곧 용서받지 못함은 용서하시는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용서를 받아들이지 않는 인간으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가톨릭교회교리서>에서도 악마에 대해서 말할 때, 그들의 죄가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은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의 결함이 아니라, 그들의 선택이 지닌 돌이킬 수 없는 특성 때문”(393항)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 이는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 용서하지 않으시는 게 아니라 용서하시지만, 인간이 그 용서를 받아들이지 않아서 “용서받지 못한 죄”라는 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이영근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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