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0년 1월 25일 토요일 설

Margaret K 2020. 1. 24. 20:15

2020년 1월 25일 토요일 설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루카 12,35-40)


Blessed are those servants  

whom the master finds vigilant on his arrival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복을 내리시고 은혜와 평화를 베푸시겠다고 하신다(제1독서). 우리는 내일 일을 알지 못하며,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이다(제2독서). 사람의 아들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올 것이니, 늘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복음).

☆☆☆

오늘의 묵상

 초대 교회는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제 신앙의 처지를 점검하고 가꾸어 갔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초대 교회의 모습을 따라 사는 것이 참된 교회라고 천명하였습니다.
참된 교회의 모습을 상징하는 여러 표현 중에 ‘깨어 있음’은 독보적 가치를 지닙니다 잠을 자지 않고 깨어 있는 것은 무엇보다 제 삶의 본분을 다하는 일입니다.
종이 주인을 기다리는 것이 당연하듯, 도둑이 언제 올지 모르는 위험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집을 지키는 것이 당연하듯, 신앙은 특별한 목적을 가진 위대한 업적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지금 삶에 대한 온전한 투신과 삶의 본디 모습을 추구하는 일상의 열정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가끔 살아가기가 너무 힘들어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절망은 희망을 낳는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다.’라는 말들은 전혀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순탄하고 평온한 삶만을 꿈꾸기보다는 고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어쩌면 가장 신앙인다운 일일지 모릅니다.
초대 교회가 그러하였으니까요.
예수님께서 걸으신 수난의 길은 힘들고 아프지만 신앙인에게는 뜻깊고 보람 있게 여겨졌으니까요.아픈 삶을 이겨 내고 나면 ‘장밋빛 미래’가 있다는 약속을 받아서도 아니고, 후손들에게 영웅적 삶을 자랑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힘겹게 사는 지금, 오늘이 마지막 시간이고 그 시간을 먼저 사신 ‘예수님에 대한 사무친 그리움’ 하나로 초대 교회 신자들은 하루하루를 살아갔습니다.
그리고 그 곁에는 함께 아파하고 울어 주는 형제, 자매들이 있었습니다.‘깨어 있음’은 지금, 여기에 온전히 자신을 내어놓는 것입니다.
그 삶이 어떻든 서로 다독이며 ‘오늘’을 살자고 다짐하는 것입니다.
‘오늘’이 바로 구원의 날이기 때문입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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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배우이며 무술가인 이소룡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마음을 비워라. 물처럼 형태도 모양도 없는 사람이 돼라. 물을 컵에 담으면 물이 컵이 된다. 물을 병에 담으면 물이 병이 된다. 물을 찻주전자에 넣으면 물이 찻주전자가 된다. 물은 계속해서 흐르거나 부딪친다. 그러니 친구여, 물이 돼라.”

인상 깊은 말입니다. 그리고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소룡의 말처럼 우리는 어떤 상황에도 적응하며 살 수 있습니다. 물처럼 변화무쌍한 모습의 ‘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나’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어려운 환경 탓을 참으로 많이 합니다. ‘시간 없어.’,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 ‘나이가 많아.’, ‘저 사람이 있어서 안 돼.’ 등등의 환경 탓에서 벗어나기 힘든 우리입니다.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서 과연 자신의 원하는 모습을 얻을 수 있을까요?

나에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어떤 환경에서도 맞게 잘 살아갈 수 있는 ‘나’를 만드신 주님의 전지전능하심을 의심하지 마십시오. 이런 마음을 통해 하느님의 놀라운 일들이 이 땅에 펼쳐지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허리에 띠를 맨다는 것은 내 안에 있는 사나운 욕망을 억제하기 위한 것입니다. 즉, 자기 절제와 관련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등불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선한 행실로 빛을 내는 것이니, 정의와 연관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주님을 맞이하며 주님이 들어오실 수 있도록 문을 여는 방법이 바로 자기 절제와 정의에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자기 절제와 정의 없이는 주님을 맞이해서 문을 열어드릴 수 없습니다.

주인이신 주님께서 요구하는 이 점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는 그렇게 될 수 없습니다. 어려운 점이 너무 많아서 힘듭니다.’라면서 무조건 거부해야 할까요?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힘들다고 하더라도 주님께서 요구한다면 그에 맞는 마음 갖추고, 그에 따른 실천을 반드시 해야 합니다.

오늘은 설날입니다. 설날이면 많은 다짐을 하게 됩니다. 이 다짐에 자기 절제와 정의의 실천을 추가해야 하겠습니다. 젊든 늙었든, 또 능력이 많든 적든 상관없이 누구든지 허리를 동이고 깨어 있다가 주인을 맞이하는 사람이 진정으로 행복할 것입니다.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오실 사람의 아들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단순한 삶은 적게 소유하는 대신 사물의 본질과 핵심으로 통한다(도민지크 로크). 



처지를 바꿔서 생각해보세요.

작년 11월을 떠올려 봅니다. 정말로 바쁜 하루하루가 계속되었습니다. 성지의 일, 외부 강의, 잡지에 원고 쓰는 것, 평화방송 라디오, 그리고 신학교에서의 수업까지 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다 중요했지만, 그래도 이 중에서 특별히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신학교의 수업이었습니다. 교회의 미래를 담당할 신학생에게 하는 강의이기에 부담도 많았습니다. 특히 지난 11월처럼 많은 일이 겹쳐서 바쁘게 되면 부담감과 함께 신학교 가기가 더욱 싫어지더군요.

그런데 신학생들이 성지순례를 간다고 해서 한 주 수업을 못 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다음 주에 2시간 보강을 해서 하루에 4시간 수업을 했지만, 한 주 쉬는 것이 너무나 신났습니다. 아마 제게 수업을 듣는 신학생들은 모를 것입니다. 학생보다 선생이 학교 가기를 더 싫어한다는 것을 말이지요.

제가 문제 있는 것이 아닐까 싶어서 저를 가르치셨던 교수 신부님께 이 점을 물어보았습니다.

“신부님도 수업하기 싫었던 적이 있었어요?”

“나는 매번 하기 싫었어.”

당시 교수 신부님들이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 자리에 서보니 당시의 교수 신부님들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싶습니다.

처지를 바꿔서 생각해봐야 합니다. 그래야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습니다.                  

줄을 때 기분을 알고 싶으면 잠자리에 뜰 때 기분을 봐라

-전삼용신부-


 지금까지 역사상 수영을 마이클 펠프스보다 잘 한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는 당연하다는 듯 어느 대회나 금메달 두세 개는 기본으로 땄습니다. 베이징 올림픽 때였습니다. 스타트 총 소리가 울리자 여느 때처럼 물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그런데 눈앞이 조금씩 흐려졌습니다. 물안경에 물이 차기 시작한 것입니다. 세 번째 턴을 할 즈음에는 물안경 안에 물로 가득했습니다. 펠프스는 아무 것도 볼 수 없었습니다. 수영장 바닥에 그려진 선도, 터치판에 검게 쓰인 T자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여느 선수였다면 경기를 포기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펠프스는 당황하지 않았습니다.

      펠프스의 코치 바우먼은 어떤 불의의 사고에도 대비해야 한다고 생각해 펠프스에게 깜깜한 밤중에 일부러 불을 켜지 않은 채 훈련을 시킨 적이 있습니다. 펠프스는 몇 번의 팔을 휘 저어야 50미터를 갈 수 있는지 그때 알았습니다. 열아홉에서 스물한 번 정도였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았지만 펠프스는 연습한 대로 숫자를 헤아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역시 스물한 번째 스트로크를 하고 손을 쭉 뻗었더니 터치판이 손끝에 닿았습니다. 그의 계산이 완벽하게 맞아 떨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서둘러 물안경을 벗고 전광판을 보았습니다. 그의 이름 옆에 ‘WR(세계 신기록)’이란 글자가 번쩍거렸습니다.

[참조: ‘습관의 힘; PART 2 기억의 습관’, 찰스 두히그, 갤리온]


      오늘은 설날입니다. 설날은 새 해의 첫 시작이기도 하지만 또한 먼저 가신 분들을 기억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먼저 가신 분들을 기억하면 한 해를 어떻게 살아야 할지, 좋은 결심도 할 수 있게 됩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 복음의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더 실감나게 다가옵니다. 그때 예수님은 구원자가 아니라 심판자로 오실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주님께서 갑자기 오시는 날을 잘 준비할 수 있을까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연습해야 합니다. 매일 죽을 수는 없지만 매일 죽는 것처럼 살 수는 있습니다. 만약 연습을 잘 한 사람이라면 죽음이 크게 두렵지는 않을 것입니다. 공부를 열심히 했다면 시험이 두렵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매일을 시험 준비하는 것처럼 살아야합니다. 결국 우리 삶은 언제 오실지 모르는 그분을 만나기 위해 준비하는 과정일 뿐입니다.

      그럼 어떻게 죽음을 준비할 수 있을까요? 아이들이 시험을 준비할 때 어떻게 공부할까요? 매일 시험을 치르듯 공부합니다. 이렇게 미리 실전처럼 준비하지 않으면 막상 죽음이 닥치면 그 공포를 견디기 쉽지 않을 것입니다.

      죽음을 준비하기 위해서 매일 잠자리에 들 때의 기분에 집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죽음의 순간이 잠이 드는 순간과 같다고 말합니다. 묘비에도 “아무개가 열심히 살다 편히 잠들다.”라는 식으로 써 있기도 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매일 죽는 연습을 할 기회가 있는 것입니다.

      잠자리에 들 때의 기분은 매일 조금씩 다릅니다. 어떤 때는 무슨 불만족이라도 있는 듯 그냥 자면 억울해서 누워서 스마트폰을 보기도 합니다. 혹은 TV를 보다가 잠이 오기를 기다립니다. 가장 안 좋은 습관입니다. 시험을 망치는 지름길입니다. 잠은 죽음과 같기 때문에 미련 없이 떠날 수 있도록 모든 전자기기는 침실에서 멀리 떨어뜨려 놓을수록 좋습니다. 감사 일기를 쓰고 바로 잠이 드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마이클 펠프스의 가장 큰 적은 두려움이었습니다. 경기 때만 되면 두려움 때문에 근육이 경직돼 본래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바우먼 코치가 생각해 낸 것은 잠들 때, 깼을 때, 그리고 경기 전에 비디오테이프를 틀어보라는 것이었습니다. 진짜 비디오테이프가 아니라 자신이 경기해서 신기록을 세우는 상상을 끊임없이 해 보라는 것이었습니다. 실제 경기를 그 여러 번 상상했던 것을 한 번 더 반복해보는 것에 불과하도록 만들었습니다. 매 순간이 경기가 되고 매일 조금씩 긴장하는 연습을 하니 진짜 경기는 연습처럼 편안하게 느껴졌던 것입니다.

      우리도 매일을 진짜 죽는 날처럼 살아야합니다. 그래야 마지막 때에 놀라지 않을 수 있습니다. 세상에 죽음을 준비하는 것보다 가치 있는 일은 없습니다. 오늘 돌아가신 분들을 기억하고 기리며 동시에 올 한 해도 언제 주님께서 부르시더라도 기쁘게 응답할 수 있도록 하루하루 열심히 연습하며 살아갑시다.


-조재형신부-


미국에서 처음 맞이하는 설날입니다. 주님의 사랑이 설날을 맞이하는 모든 분들과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본당에 있을 때는 설날과 추석은 본당 어르신의 덕담을 들었습니다. 우리 민족 고유의 명절이고, 어르신들의 덕담을 듣는 것이 명절의 전통이기도 했습니다. 오늘 저는 보스턴 한인 성당에서 들었던 강론을 설날 덕담으로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커다랗고 근엄해 보이는 돌부처 아래에 볼품없는 돌계단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돌계단은 아무 거리낌 없이 밟고 올라가면서 돌부처 앞에서는 허리를 숙이고 존경을 표했습니다. 사람들이 돌아가고 난 뒤에 돌계단이 돌부처에게 불평하였습니다. 어찌하여 같은 돌인데 사람들은 나는 거리낌 없이 밟고 가고, 부처님에게는 깊은 절을 하는 겁니까? 그때 돌부처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내가 돌부처가 되기까지 셀 수 없을 만큼 정으로 맞았답니다. 돌계단은 나처럼 맞지는 않았지요? 우리가 보기에는 성공해 보이고, 좋아 보이는 많은 사람들도 시련과 아픔은 있었습니다. 남과 나를 비교하면서 좌절하면 절대 행복할 수 없습니다. 주변을 돌아보면 돌부처가 많습니다. 마치 저만 돌계단 같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하지만 돌계단이 없으면 돌부처에게 갈 수 없습니다. 돌계단인 걸 감사하고 만족하면 행복은 이미 저와 함께 있는 겁니다. 어쩌면 저를 보고 돌부처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을 겁니다. 지금 내가 볼 수 있고, 지금 내가 들을 수 있고, 지금 내가 생각 할 수 있고, 지금 내가 말 할 수 있고, 지금 내가 살아 있다면 우리는 충분히 행복한 겁니다. 주어진 현실에 만족하고, 감사하는 사람은 이미 행복과 함께 있습니다.

 

딸 셋을 둔 가난한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다 낡은 딸들의 신발을 보면서 가슴이 아팠습니다. 하는 일이 잘 안 되고, 딸들을 잘 키우지 못해서 마음이 아팠습니다. 중고 세탁기를 싸게 판다는 소식을 닫고 어느 집으로 갔습니다. 집은 컸고, 가구는 고급스러웠습니다. 이렇게 큰 집에 사는 사람은 얼마나 행복할까라고 생각했습니다. 분명 행복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품위 있어 보이는 부부에게 이야기했습니다. 저는 가난해서 딸들을 잘 돌보지 못합니다. 세탁기도 이렇게 중고로 산답니다. 이야기를 듣던 부인은 갑자기 눈물을 흘리며 집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가난한 아버지는 남편에게 물었습니다. 제가 무슨 실수를 했습니까? 그러자 부잣집 남편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은 지난 10년 동안 집 밖을 한 번도 나오지 못했답니다. 아내는 낡은 신발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아들 생각을 하며 울었답니다. 신발이 낡을 정도로 당신의 딸들은 밖으로 다니면서 세상을 보았을 겁니다. 집으로 돌아온 가난한 아버지는 낡은 신발을 들고 감사드렸습니다. 자신이 돌계단인줄 알았는데 생각하니 돌부처였습니다. 낡은 신발이지만 딸들은 사이좋게 지냈고, 들과 산으로 다니면서 파란 하늘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2020년은 경자년(庚子年)입니다. 어느 본당에서 새해 인사로 경자년이라고 말하기가 어색해서 경자씨라고 인사했다고 합니다. 신부님이 혹시 미사에 참석하신 분 중에서 경자라는 이름이 있으신가요? 물었습니다. 그러자 한분이 손을 들고 제가 이경자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신부님이 혹 기분 나쁘신지요? 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경자씨는 아니요 좋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신부님은 경자씨를 앞으로 나오라고 했고, 모두들 2020년 경자씨 사랑해요라고 인사하였습니다. 제단 앞으로 나온 경자씨도 손으로 하트를 그리며 여러분 사랑합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2020년 설날입니다. 우리도 서로 인사하면 좋겠습니다. “경자씨 사랑합니다.” 2020년 돌계단이든, 돌부처이든 주어진 현실에 만족하면서 기쁘게 살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행복은 덤으로 주어질 겁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셔요.


복을 빌어주는 사람

 -반영억신부-


구정 명절을 맞이하여 하느님의 복을 풍성히 받으시길 기원합니다. 설은 본디 신일(愼日)이라고 하여 근신하고 조심하는 날이라고 하였습니다. 한 해를 보내고 새로운 한해를 맞이하는 데에 근신하고 조심하는 마음이 우선적으로 요구되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루카12,40).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날 전통적으로 조상님께 차례를 올리고 웃어른께 세배를 드리며 조상의 묘를 찾아 성묘합니다. 부모님들은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설빔을 해 주고 할아버지 할머니께서는 큰절을 받고 세뱃돈을 주며 가정의 화목과 평화, 부와 안녕을 기원하였고 한 해를 살아갈 덕담을 해 주셨습니다. 덕담은 상대방이 잘 되기를 바라는 축원의 말입니다. 그리고 명절을 기다려온 것은 서로의 만남을 통해 친족애, 가족애를 돈독히 하고 새롭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주님을 믿는 우리는 만남의 중심에 사랑의 예수님을 모셔야 합니다. 덕담도 성경말씀으로 한다면 살아있는 말씀의 능력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설 명절에 하느님의 복을 풍성히 받으시길 기원하며통통,통통복을 받으시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 1.의사소통, 2.운수대통, 3.만사형통. 4.쓰레기통입니다.

 

첫째는 의사소통입니다. 서로 의사소통을 잘 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마음과 마음이 통해야 합니다. 가족은 물론 이웃과도 통해야 합니다. 잘 통하면 아프지 않습니다. 그러나 통하지 않으면 아픕니다. 무엇보다 하느님과의 소통을 잘하시길 빕니다. 하느님과 잘 통하면 이웃과는 물론 모든 것이 잘 통하게 됩니다.

 

둘째는 운수대통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사람에게 열어주신 길에 장애가 없기를 기도합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통해서 이루고자 하는 뜻이 있습니다. 그 뜻이 풍성히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셋째는 만사형통입니다. 하느님께서 열어주신 길을 가는데 있어서 하는 일 마다 잘 되기를 소망합니다. 성경은 하느님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 하는 일마다 잘 되리라’(시편1,2-3).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가르침을 가슴에 새김으로써 하는 일마다 잘되는 기쁨을 차지하시면 좋겠습니다.

 

넷째는 쓰레기통입니다. 아무 불평 없이, 아무 불만 없이 좋은 것이나 그렇지 않은 것이나 모든 것을 담고 품는 쓰레기통 같은 사람이 되시길 기원합니다.

    

예전에는 세뱃돈과 설빔을 받는 기쁨이 있었는데 지금은 서로의 만남에 의미를 두고 고향을 찾게 됩니다. ‘명절 증후군이라는 병이 생기기도 했지만 고유명절은 그래도 가족의 유대관계를 확인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저는 어린 시절에 명절이 되면 도심으로 나가있던 삼촌과 누나를 기다렸습니다. 명절에는 손에 선물꾸러미를 들고 오셨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용돈을 얻고 기뻐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선물이나 돈의 액수가 줄어들면 마음속으로는 서운해 하였습니다. 그저 공짜로 받는 주제에 주는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감사하지 못했습니다. 처음에 크게 받으면 다음에 받을 때는 더 많이 받을 것이라는 기대가 생기게 되고 기대를 충족하지 못하면 받았으나 감사할 수 없으니 줄때도 잘 줘야 하고 받을 때도 잘 받아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축복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공짜로 언제든지 주십니다. 알맞게 주십니다. 그러나 내 잣대로 재고는 받았네, 못 받았네 하면서 투덜댑니다. 그러나 분명 주님께서는 각자에게 알맞은 선물을 주셨습니다. 지금 받은 것에 감사하면 감당할 수 있는 축복이 또 주어집니다. 따라서 우리는 언제나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지금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 복을 받는 길입니다.


명절의 의미는 바로 감사하는 생활을 일깨우는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고향을 방문하여 조상들을 기리며 차례를 지내고 부모형제, 친척과 어른들을 찾아뵙는 것은 감사드림의 한 표현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에게는 감사의 원천인 하느님께로 먼저 눈을 돌려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모두를 마련하시고 우리가 사용할 수 있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혈족만이 아니라 모든 이웃에게도 감사하는 마음을 지니고 살아야 합니다. 모두가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하느님의 작품이요, 사랑받는 존재이고 사랑을 받아야 할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독서 민수기(6,22-27)를 보면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 주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하며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빌면 주님께서 몸소 복을 내리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복을 받는 일은 먼저 복을 달라고 애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으로 복을 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을 달라고 하기 전에 이웃을 위해 주님의 이름으로 복을 베푸는 몫을 차지해야 하겠습니다

 

바로 명절의 두 번째 의미는 복을 빌어주는 생활입니다. 어르신께 세배를 하면서 한 해의 건강과 무사안녕을 기원하며 덕담을 받고 이웃형제와 서로에게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인사하는 것이 오늘 하루만의 인사 치례가 되어서도 덕담으로 끝나서도 안 되겠습니다. 복을 빌어주는 만큼 삶의 모범으로 진정으로 복된 사람이 되어야 하고, 복을 받는 사람도 복 받을 만한 그릇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다른 사람을 진정으로 축복하는 삶, 생활로써 복을 함께 나누고 지켜주면서 감사의 마음을 키워갈 때 우리 주변은 더욱 빛나고 그리스도의 향기가 풍기는 아름다운 환경이 조성될 것입니다. 감사와 축복의 날에 주님께서는 충성스런 종과 불충한 종의 비유를 통해서 너희는 준비하고 있어라.”(루카12,40)고 말씀하십니다. 등불을 켜고 주인을 기다리는 충직한 종처럼 감사와 축복으로 매일을, 순간순간을 늘 깨어 준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조상을 위해 기도하고 서로에게 복을 빌어주며 이웃과 더불어 만남을 기뻐하는 날, 정월 초하루! 모두 모두 주님의 복을 많이 받으십시오. 믿는 이들은 영원한 복을 추구합니다. 참으로 복 중의 복은 하느님을 차지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의 모든 복을 주관하시고 천상의 복을 우리에게 약속해 주셨습니다. 이 세성을 넘어 영원한 생명, 하느님의 나라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믿는 이들에게 주시는 복은 이 세상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지속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기뻐하십시오, 이미 하느님을 차지하시고 섬기고 있으니 말입니다. 이 복을 결코 잃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신명기에는 너희가 주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들으면, 이 모든 복이 내려 너희 머리위에 머무를 것이다. 너희는 성읍 안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다. ...너희의 광주리와 반죽통도 복을 받을 것이다. 너희는 들어올 때에도 복을 받고 나갈 때에도 복을 받을 것이다”(신명28,2-6).라고 적혀있습니다. 그러니 주님의 말씀에 순명함으로써 복을 받으시길 희망합니다.

    

시편에서는행복하여라! 악인들의 뜻에 따라 걷지 않고 죄인들의 길에 들지 않으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 그는 시냇가에 심겨 제때에 열매를 내며 잎이 시들지 않는 나무와 같아 하는 일마다 잘 되리라”(시편1,1-3).고 하였습니다. 만사형통하려면 주님의 말씀을 되새기고 살아야 합니다.

    

시편저자는 말합니다.“주님을 경외하는 이들아, 주님을 신뢰하여라. 주님은 도움이며 방패이시다. 주님께서 우리를 기억하시어 복을 내리시리라. 이스라엘 집안에 복을 내리시고 아론 집안에 복을 내리시리라.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낮은 사람들에게도 높은 사람에게도 복을 내리시리라. 주님께서 너희를, 너희와 너희자손들을 번성하게 하시리라. 너희는 주님께 복을 받으리라. 하늘과 땅을 만드신 그분께”(시편115,11-15). 복을 주시는 분은 주 하느님이심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모든 복은 하느님께로부터 옵니다. 하느님께로부터 복을 충만히 받으시길 기도합니다.


앞서 4가지 을 얘기했는데 여기에 '전화한통'을 덧붙입니다. 자주 인사하고 먼저 안부 전하는 '전화한 통'입니다. ‘주전자입니다. 주저하지 말고 전화하여 자주 만나자!

    

저는 얼마 전에 어머니를 하늘아버지께로 보내드렸습니다. 93년의 생애동안 베풀어 주신 하느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서운함을 달랬습니다.

    

저는 어머니의 전화를 아주 많이, 자주 받았습니다. 어머니의 전화기 단축번호 1번이 제전화입니다. 시도 때도 없이 걸려오는 전화는 하루에 2-30번은 기본입니다. 한 번은 헤아려 보니 35번이었습니다. 제가 제때 받은 횟수는 18번이더군요. 처음에는 당혹스러웠지만 잊어버리고 누르시는 걸 어쩌냐? 하면서 받기로 했습니다. 능청스럽게 엄마, 아들 목소리 듣고 싶어서 전화했어요? 더 자주 하세요!’하기를 반복했습니다. 끊을 때는 엄마, 사랑해요!’하고 인사했습니다. 그러면 어머니가 나도 아들사랑하지!’ 하시던지 엄마가 더 사랑하지!’하셨습니다. 저도 모르게 자꾸 전화를 확인하지만 이제 더 이상 어머니의 전화는 없습니다. ‘엄마가 더 사랑하지!’ 하는 목소리를 들을 수도 없고, 제가 전화를 드릴 수도 없습니다. 여러분. 늦기 전에, 미루지 말고 전화하십시오. 그리고 고백하십시오. 사랑합니다. 엄마, 사랑해요, 아빠, 사랑해요! 애들아, 사랑한다! 새해에 서로에게 사랑을 고백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어머니의 기도를 누구보다도 많이 받은 자녀입니다. 제가 막내라서 더 애절하게 기도를 하셨습니다. 돌아가시기 일주일 전인데 저는 부제 후보자 피정지도로 피정의 집으로 떠나기에 앞서 어머님께 기도를 많이 해 달라고 부탁을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대뜸 엄마가 기도를 하지 않으면 누가 하느냐?’”고 하셨습니다. 저는 내심 걱정을 하였습니다. 약간의 단기기억상실, 치매증상이 있으신 어머니께 피정 중에 무슨 일이 생기면 안 되기에 말입니다. 그런데 그 날 밤, 어머니께서 아들을 위해 있는 힘을 다하여 기도하셨습니다. 2020년이 시작되는 첫 시간에 갑자기 일어나셔서 너무도 애절하게 기도를 하시기에 옆에 있던 딸이 녹음을 했습니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하느님께 비나이다. 그저 우리 신부님 일취월장하게 하옵시고 여러 사람 앞에서 실수 없이, 근심걱정 없이 잘 다닐 수 있도록 도와 주시옵고, 건강주시옵고, 보살펴주옵소서. 말문 열어 주시옵소서. 비나이다. 비나이다. 하느님께 비나이다. 우리 철부지 신부님, 뭘 알겠습니까? 불쌍하게 봐주시고, 봉사하고 잘 다닐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오래도록 같은 내용을 반복하며 기도하셨습니다. 이제 그 기도소리를 들을 수 없습니다.

 

자녀를 위해, 부모를 위해, 형제자매, 이웃을 위해 기도하기를 시작하시면 좋겠습니다. 그 기도의 힘은 반드시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누군가 나를 위하여 기도하고 있다는 것이 위로가 되고 희망이 되며, 힘이 되기를 바랍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명절귀신

명절 때 쫄쫄 굶은 조상 귀신들이 모여

서로 신세를 한탄했다.

 

씩씩거리며 한 조상귀신이 말했다.

설날 제사 음식 먹으러 후손 집에 가보니,

, 글쎄 이 녀석들이 교통체증 때문에

처갓집에 갈 때 차 막힌다고,

새벽에 벌써 지들끼리 편한 시간에

차례를 지내버렸지 뭔가?

가보니 설거지도 끝나고 다 가버리고 없었어,”

 

두 번째 분통터진 조상귀신이 말했다.

자넨 그래도 나은 편이여,

나는 후손 집에 가보니 집이 텅 비었더라구.

알고보니 해외여행 가서 거기서 제사를 지냈다는 거야.

거길 내가 어떻게 알고 찾아가누?”

 

아까부터 찡그리고 앉은 다른 조상귀신,

"상은 잘 받았는데

택배로 온 음식이 죄다 상해서

그냥 물만 한 그릇 먹고 왔어."

 

뿔난 또 다른 귀신,

"나쁜 놈들!

호텔에서 지낸다기에 거기까지 따라 갔더니,

전부 프라스틱 음식으로 차려서 이빨만 다치고 왔네."

 

열 받은 다른 조상귀신이 힘없이 말했다.

난 말야. 아예 후손 집에 가지도 않았어.

후손들이 인터넷인가 뭔가로 제사를 지낸다고 해서,

나도 힘들게 후손 집에 갈 필요없이

편하게 근처 PC방으로 갔었지.”

 

그래, 인터넷으로라도 차례상을 받았나?”

먼저 카페에 회원가입을 해야 된다잖아.

귀신이 어떻게 회원가입을 하노?

귀신이라고 가입을 시켜 줘야지!

 

에이 망할 놈들!”ㅎㅎㅎ

      

@@ 설날 속터지는 女子들 한탄!!.

 

1. 엎으러지면 코 닿을것 같이 가깝게 살면서도

명절 때 면 꼭 늦게 오는 동서.

2. 형편이 어렵다며 늘 빈손으로 와서는

지그집에 갈때는 이것저것 싸가는 동서.

3. 온몸이 쑤셔서 한 시라도 빨리 집에 가서 쉬고 싶은데,

눈치 없이 고스톱을 계속 치고 있는 남편.

4. 술이 잔뜩 취했으면서도 안 취했다고 우기면서 가는 손님 붙잡는 남편.

5. 시댁에는 금방 갔다 오면서 친정에 일찍 와서는

이 참견 저 참견하는 시누이.

6. 넓은 마당에서 잘 뛰어 놀다가 꼭 부침개 부칠때 와서는

식용유 뒤엎어 놓는 철없는 조카.

7. 기름 냄새 맡으며 간신히 부쳐놓은 부침개를

날름 집어 먹어버리는 시동생.

8. 며느리는 친정에 안 보내면서 시집간 딸은

빨리 안온 다며 찻길 막힌다고 빨리 오라고 전화하는 시어머님.

9. 시댁에는 30만원, 친정에는 10만원으로 차별하는 남편.

10. 시집에 늦게 와서는 '동서 수고한다.'

말 대신 '아직도 일하고 있어! 하며 큰소리치는 형님.

11. 막상 가려고 하면 '한 잔 더하자'며 술상 봐 오라는 시아버님.

    

@@ 마누라의 3? 현금, 지금, 입금

우리가 살아가는 데 꼭 중요한 세 가지 금이 있다.

돈을 상징하는 황금.

음식을 상징하는 소금.

그리고 시간을 상징하는 지금. 이 세 가지다.

남편이 마누라에게 이 말이 너무 멋있어서 문자 퀴즈를 냈다.

여보야세상 살아가는 데 중요한 3가지 금을 뭐라 생각하노??”

잠시 후 마누라한테서 답문자가 왔다. “현금, 지금, 입금.”

이 문자를 보고 남편이 허덕거리며 다시 문자를 보냈다.

방금, 쬐금, 입금.”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이영근신부-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주님의 축복을 빕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복을 내리시고, 은혜를 베푸시고, 평화를 주실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주인의 귀환을 깨어 기다리는 종들이 복을 받는다는 말씀(루카 12,35-38)과 사람의 아들이 갑자기 오실 것임을 명심하라는 말씀(루카 12,39-40)으로 되어 있습니다. 사실, <루카복음>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당신의 교회를 위하여 남겨주신 최후의 행위는 축복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승천 장면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손을 드시어 그들에게 강복하셨다.

이렇게 강복하시며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셨다.”(루카 24,50-51)


그렇습니다. 우리는 축복받은 존재입니다. 하느님의 생명과 자비를 입은 존재요,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입은 존재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당신 생명을 주시고, 당신 존재를 건네주셨습니다.

그러기에, 비록 지금 내가 그 어떤 어려움에 있다하더라도, 그 속에서 축복을 느끼는 자는 진정 복된 자입니다. 복이란, 그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께서 함께 계심을 깨닫는 것입니다. 곧 지금도 우리와 동행하시는 주님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처럼, 축복은 궁극적으로 하느님 존재 자체를 깨우쳐줍니다. 따라서 축복받은 사람이란, 그 어떤 상황에서도 하느님의 존재와 자비에 깨어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에 깨어있는 만큼, 꼭 그만큼 축복받은 사람이 됩니다.

<성경>에서, 축복은 하느님의 놀라우신 자비를 말합니다. 축복을 뜻하는 히브리어 단어(바레크)어떤 것을 선사함이요, 주어진 선물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살아있는 생명체만이 축복을 받을 수 있고, 무생물은 하느님께 봉사하기 위해 축성될 뿐입니다.

축복이란 말씀과 그 말씀의 신비를 통해 표현되고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곧 축복은 말씀입니다. 좋은 말(εύλογία, benedictio), 곧 좋게 되기를 빌어주는 말이요, 좋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하는 말이요, 위하여 건네주는 말입니다

축복을 빌어주는 이른 바 축복기도는 아주 간단합니다.


주님, 그를 축복해주십시오. 당신의 축복이 실현되도록 그가 응답하게 하소서!

저도 그를 축복합니다.


참 묘한 것은, 그렇게 축복기도를 하면 변한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이렇게 할 때, 이미 내 자신이 변한 것입니다. 거부하고 미워하던 그 상대를 축복해주는 그 순간, 바로 그 순간에 변화의 영이신 성령께서는 이미 내 안에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미, 내 안에서 그를 위하는 마음을 북돋으신 까닭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서로 변화됩니다.

이처럼, 이 소박한 우리의 축복기도는 우리에게 당신의 권능에 응답할 수 있는 장을 열어 줍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활동하시도록 공간을 열어 드립니다. 그분의 자비가 흘러들게 하고, 그분 존재를 건네받게 합니다. 바로 이 소박한 축복이 가져다 준 선물입니다.


다시 한 번 축복을 빕니다.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받아 누리는 축복의 한해 되길 빕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그대를 통하여 세상의 모든 이가 복을 받을 것입니다.”(창세 12,3). 아멘.


- 오늘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있는 종들!”(루카 12,37)


주님!

깨어 희망하게 하소서!

희망하여 그리워하게 하소서.

그리움 속, 제가 이미 행복한 것은 이미 임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임이 나를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멘.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송영진신부-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
이것을 명심하여라. 도둑이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루카 12,35-40).”

이 말씀을, “주님께서 내리시는 벌을 안 받으려면 깨어 있어라.” 라고
위협하시는 말씀으로 받아들일 사람도 있을 것이고,
“주님의 사랑을 받으려면 깨어 있어라.” 라는
희망과 격려의 말씀으로 받아들일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 말이 그 말 아닌가?” 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실제 신앙생활을 하는 태도는 크게 다릅니다.
주님이 무서워서 깨어 있는 경우에는 주님을 기다리는 일이 ‘고역’이 될 것입니다.
그 경우에는 주님이 도착한 뒤에도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사랑도 없고, 기쁨도 없고, 희망도 없습니다.
(그런 식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억지로’ 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주님을 사랑해서 깨어 있는 경우에는 주님을 기다리는 일 자체가
‘기쁜 일’이 되고, 주님이 도착하면 그 기쁨은 더욱 커집니다.
(신앙생활은 그렇게 ‘사랑’과 ‘기쁨’으로 해야 합니다.
이것은 누가 어떻게 해 줄 수 있는 일은 아니고,
각자 스스로 노력해야 할 일입니다.)

이 말씀은 신앙생활뿐만 아니라 인생살이 전체에 적용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신앙인의 인생은 “하느님에게서 와서 하느님에게로 돌아가는 나그네길”입니다.
하느님에게로 돌아가는 이 여행을, 마치 붙잡혀서 끌려가는 죄수처럼
억지로 걸어가는 여행으로 만들 것인지, 아니면 사랑하는 주님을 만나러 가는
기쁨과 희망에 가득 찬 여행으로 만들 것인지...
(죽지 못해서 억지로 사는 인생인지, 아니면 기쁨과 희망 속에서 사는 인생인지...
이것은 세속의 기준으로 생각할 일은 아닙니다.
물질적으로 부유해도, 또 세속적으로 출세하고 성공해도,
믿음이 없는 사람의 인생은 ‘허무’를 향해서 가는 방랑길이 될 뿐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믿는 신앙인의 인생은 인생살이가 가난하고 고달프고 힘들어도
‘사랑’과 ‘희망’이 있기 때문에 끝까지 잘 걸어갈 수 있습니다.
신앙인의 인생은 결코 허무하게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설날’을 인생이라는 나그네 여행의 중간 점검 시간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또 신앙인으로서 자신의 신앙생활을 점검해 보는 시간으로 삼을 수도 있습니다.
지나간 한 해를 돌이켜보면, 계획대로 잘 된 일들도, 잘한 일들도,
만족하고 보람을 느끼는 일들도 있을 것이고,
반대로 계획대로 안 된 일들도, 잘못한 일들도 있을 것이고,
아쉬운 일들도 있을 것입니다.
잘한 일들은 새해에도 더욱 잘할 수 있도록 노력하면 되고,
잘못한 일들은 새해에는 고치고 바로잡으려고 노력하면 됩니다.
이미 지나간 시간은 인간의 힘으로 붙잡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새로운 시간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뒤를 돌아보지 말고 앞만 보면서 걸어가야 합니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루카 9,62).”

설날을 맞이해서, 서로 ‘복’을 빌어 주는 인사를 많이 하는데,
신앙인에게 최고의 ‘복’은 “주님께서 함께 계시는 것”입니다(루카 1,28).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은, 모든 것을 다 가지는 것과 같습니다.
(온 세상을 다 가지는 것보다 훨씬 더 큰 복이고, 은총입니다.)
주님은, 세상 만물의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편 작가는 이렇게 찬미합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 것 없어라(시편 23,1).”
“제가 비록 어둠의 골짜기를 간다 하여도 재앙을 두려워하지 않으리니
당신께서 저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시편 23,4).”
그런데 우리가 따로 특별히 빌지 않아도
주님께서는 언제나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중요한 문제는 ‘우리가’ 주님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늘 우리와 함께 계시는데,
우리가 주님에게서 떨어져 있을 때가 많습니다.
믿음이 흔들리기도 하고, 한눈을 팔기도 하고,
세속의 소음들에 귀를 기울이기도 하고, 여러 가지 유혹에 넘어가기도 하고......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 함께 계시기를 기원하는 것은,
사실은 주님과 늘 함께 있도록 노력하라는 권고이고 격려입니다.

신앙인에게 두 번째로 좋은 복은 ‘희망’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로마 8,24).”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립니다(로마 8,25).”
이 ‘희망’은 ‘믿음’의 다른 표현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겠다고 약속하신 모든 좋은 것들을
틀림없이 받게 된다고 믿기 때문에 그것들을 받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또 희망하기 때문에 믿고 있습니다.
주님의 약속은 틀림없이 이루어질 약속이기 때문에,
주겠다고 약속하신 그 좋은 것들을 이미 받은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말한 것입니다.
믿음과 희망이 있다면 이미 구원을 받은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희망은 꼭 내세의 구원에 대한 희망만은 아닙니다.
우리는 언제나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는 주님께서
작년보다 나은 올해를, 그리고 어제보다 나은 오늘을,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주신다고 믿고 있고,
또 그렇게 되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이 믿음과 희망은 우리가 계속 살아갈 수 있는 힘입니다.
(만일에 믿음도 희망도 없다면 인생을 억지로 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일이 생겨도 믿음과 희망을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신앙인은 ‘믿으면서 희망하는 사람’입니다.
신앙인은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조욱현신부-


복음: 루카 12,35-40: “준비하고 있어라!”

오늘 복음은 종말론적인 가르치심이면서 또한 순간순간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시고 계시다. 우리가 설을 맞이하여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게 생명을 전해 주시고 이 땅에 살게 하신 우리 선조들에게 감사하며 이 미사를 봉헌하는 이날, 한 해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주님은 매 순간 우리에게 오시고 계시다. 그러기에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 죽음도 마찬가지이다. 언제인지는 알 수 없으나 항상 만날 수 있는 것이다.

 

값진 보물을 차지하는 것은 이미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 예수께서 여기서 사용하는 비유는 옛날 일반적인 것이다. 여행을 떠날 때에는 기다란 옷을 무릎까지 올려 전대를 묶는 튼튼한 가죽 띠로 묶고 여행을 떠난다. 그러나 여기서의 여행은 캄캄한 밤에 하는 것이고, 그러기에 밝은 등불을 밝힐 필요가 있다(35). 다음 말씀은 전혀 반대이다. 여행이 아니고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을 만나기 위하여 나가는 것이다. 주인이 와서 문을 두드리고 그에게 즉시 문을 열어주기를 원한다(36).

 

오시는 주님은 행복하다고 한 깨어있는 종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들을 위해서 즉시 잔치 상을 차리고 거기서 그들에게 시중을 들어줄 것이다(37). 종들이 깨어있다면, 주께서는 밤중의 어느 때에라도 오실 수 있다. 깨어있는 중에 말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한 밤중이나 새벽녘에 오실 수도 있다. 어떻든 깨어있는 종들을 만나면 영원한 행복의 종말론적인 명칭인 행복한자들이라고 해 주실 것이다(38).

 

예수께서는 일상생활에서 오는 측면에서 확실히 깨어있는 것을 함께 말씀하신다. 가정의 훌륭한 아버지는 확실히 깨어 강도의 침입으로부터 집을 지키기 위하여 강도가 오는 때를 알고 싶을 수 있다(39). 제자들에게 있어서도 오시는 사람의 아들이 언제까지 늦어지는지를 알지 못하고 있다. 어떻든 오실 것이다. 그리고 아무도 알지 못하는 시각에, “강도처럼오실 것이다(40). 이러한 것은 보통 신약에 나타나는 것으로 1데살 5,2; 2베드 3,10; 묵시 3,3에 나타난다.

 

우리의 삶 속에서 주님은 언제나 다가오신다. 그분은 나의 아내를 통해서도 오시며, 나의 남편을 통해서도 오시고, 나의 자녀들을 통해서, 부모님을 통하여, 내가 만나는 이웃을 통해서 등 여러 가지 형태로 오시고 계시다. 쉽게 말하면, 이웃을 통하여 우리는 주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분은 우리의 이웃을 통하여 우리를 만나고, 우리와 친교를 나누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이웃 안에 현존하시는 주님 때문에도 그 이웃과 더 깊은 사랑을 나눌 수 있다. 이 사랑이 바로 주님께 대한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웃은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이정표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웃이라는 이정표를 잘못 읽을 때, 우리는 엉뚱한 길로 갈 수 있다.

 

제자들은 미리 알고 있는 자들이다. 이제는 자신의 책임에 따라 더 잘 일할 수 있을 것이다. 주님이 오시는 순간은 아무도 알지 못한다. 우리에게 항상 오시고 계시지만 우리가 깨어있지 못하면 그분을 만날 수 없다. 깨어있을 때만이 우리는 그분을 뵙고 함께 살 수 있는 것이다. 이 미사 중에 하느님께, 그리고 우리를 지금 여기에 있게 하신 우리 조상님들께 감사드리고, 서로 사랑하는 삶으로 올 한해를 살아가도록 은혜를 청하며 이 미사를 봉헌하자.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루카 12, 40)

-한상우신부-

고단한 삶의
시간속에 우리의
설명절이 있습니다.

기념하고
기억하며
우리는 우리의
길을 찾으며
성장합니다.

우리의 마음과
마주하는
설명절입니다.

고향이 먼저
손을 내밉니다.

돌아볼 수 없는
사람은 참으로
소중한 것을
놓치고 사는
이들입니다.

준비하고
깨어있는
방식으로 삶은
행복을 되찾습니다.

행복은 행복을
움직이게 하시는
행복의 원천이신
하느님께 있습니다.

설명절의 소명은
감사와 사랑에
있습니다.

감사와 사랑의
씨앗을 듬뿍 뿌리는
설명절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잃어버린 것이
우리의 마음이듯
준비하고 깨어있는
감사의 설명절안에서
서로를 향한 기쁜
명절되십시오.

새해 복많이
받으십시오!

마음의 행복한
설명절 되십시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들 안에서는 축복이 그야말로 비처럼 쏟아집니다.

제1독서에서 주님께서는 사제 가문인 아론과 그 아들들의 축복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복을 내리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 주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민수 6,24-25).

"복, 지킴, 당신 얼굴을 비추심, 은혜, 당신 얼굴 보여주심, 평화..."

주님께서 주시리라는 이 선물들은 각기 다른 단어들로 표현되어 있기는 하지만 사실 하나입니다. 이들은 별개의, 각각의 선물들이 아니라 바로 이 모두가 포함된 하나의 선물, 주님 자신이십니다!

살아오면서 때에 따라 우리가 체험했던 주님의 따사로운 손길, 위로의 말씀, 든든한 동반, 눈물 어린 연민 등이 주님의 해체된 어느 한 부분들이 아니라 주님 자신이듯이, 비록 우리가 어느 영역에서 그분을 체험했다 하더라도, 그건 주님의 그 한 부분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에게 당신을 체험하도록 당신 자신을 내어 주신 것이니 말입니다.

제2독서는 축복과 함께 주님을 선물로 받는 우리의 자세를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은 '주님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살아서 이런저런 일을 할 것이다' 하고 말해야 합니다"(야고 4,15).

우리가 살아서 무언가를 한다는 건, 일단 생명의 주인께서 원하시고, 그래서 우리에게 허락되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니 숨쉬는 일부터 시작해 그 어느 것도 우리 권한에 맡겨진 건 없습니다. 우리가 살고 사랑하고 나누고 받는 모든 것은 자비롭고 겸손하신 주님께서 원하셔야 비로소 우리에게까지 다가오는 기적들입니다.

복음은 주인을 기다리는 종의 자세를 이야기합니다. 언제 들어도 가슴 설레는 이야기지요.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루카 12,36).

주인을 기다리다 때맞춰 문을 여는 것이 종의 의무이긴 합니다만, 이토록 즉각적으로 응답하려면 환대의 마음도 함께가야 합니다. 같은 문이어도 의무만으로 열리는 문과 사랑으로 열리는 문은 문 앞에 선 이에게 분명 다른 기운을 줍니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 시중을 들 것이다"(루카 12,37).

먼저 종이 "허리에 띠를 매고" 기다립니다. 이어서 주인도 허리에 띠를 맵니다. 띠는 길고 치렁치렁한 옷자락이 봉사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붙들어 매는 용도입니다. 이로써 주인이 자기 종에게 종을 자처하여, 종의 자리를 차지하고, 종이 됩니다. 종과 주인이 하나가 된 것입니다.

띠를 맨다는 건, 종이 된다는 건 상대를 위해 무엇이라도 할 태세를 갖췄다는 의미입니다. 상대를 위해 무엇이든 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지요. 어쩌면 이미 우리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고 계신 일이지요.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루카 12,40).

누군가 내게 "온다"는 것은 작은 일이 아닙니다. 예사로운 일도 아니지요. 오기 전, 오기로 마음 먹기 전에 이미 전 존재적 끌림이 예비되었고, 오는 내내 그리움과 설렘이 차곡차곡 산처럼 싸여서 이르렀습니다. 문 앞에 서서의 가슴 터질 듯한 행복과 기대감에는 곧 맛보게 될 해후의 환희가 이미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온다"는 것은 그 자체 안에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담긴 만남의 신비입니다.

거기에 더하여, 주님은 혼자 오시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당신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안고 오시면서, 또 당신의 형제와 자매와 이웃과 모든 피조물을 안고 오십니다. 그분이 이미 그들과 하나이니 당신 혼자만 오시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 한 분을 받아들이는 건 그분 마음이 향하고 그분 눈물이 감싸는 모든 존재를 받아들이는 환대입니다. 그리고 이 환대로써 우리는 제1독서에서 이야기하듯, 모든 복과 은혜와 평화의 주님을 맞아들이게 됩니다.

주님께서 오십니다. 오셔서 문을 두드리십니다. 그분은 복과 은혜 평화를 잔뜩 안고 오십니다. 그 복과 은혜와 평화 안에는 우리의 손길과 나눔과 미소와 기도가 필요한 세상이 들어 있습니다. 문을 활짝 열고 그들의 필요까지 맞아들이는 순간, 주인은 우리에게 와서 우리의 종이 되시고 우리와 하나가 되십니다.

사랑하는 벗님! 경자년 새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올해에는 더욱 기쁘게 깨어 주님을 기다립시다. 주님이 문을 두드리시면 열렬히 환대합시다. 주님께 딸려 온 사랑의 기회들도 놓치지 맙시다. 사랑이 하나이듯 이 모든 일이 하나로 흘러갑니다. 이미 주님을 얻었으니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주님께서 벗님에게 복을 내리시고 벗님을 지켜 주시길" 축원합니다. 아멘.

행복하다면 축복하여라!

-김찬선신부-

http://www.ofmkorea.org/ofmhomily/312213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9년 2월 5일 설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루카 12,35-40)


주님께서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허리에 띠를 맨다는 것은 내 안에 있는 사나운 욕망을 억제하기 위한 것입니다. 즉, 자기 절제와 관련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등불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선한 행실로 빛을 내는 것이니, 정의와 연관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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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떻게 하면 우리가 주님께서 갑자기 오시는 날을 잘 준비할 수 있을까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연습해야 합니다. 매일 죽을 수는 없지만 매일 죽는 것처럼 살 수는 있습니다. 만약 연습을 잘 한 사람이라면 죽음이 크게 두렵지는 않을 것입니다. 공부를 열심히 했다면 시험이 두렵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매일을 시험 준비하는 것처럼 살아야합니다. 결국 우리 삶은 언제 오실지 모르는 그분을 만나기 위해 준비하는 과정일 뿐입니다.

   죽음을 준비하기 위해서 매일 잠자리에 들 때의 기분에 집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죽음의 순간이 잠이 드는 순간과 같다고 말합니다. 묘비에도 “아무개가 열심히 살다 편히 잠들다.”라는 식으로 써 있기도 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매일 죽는 연습을 할 기회가 있는 것입니다.

   죽음을 준비하기 위해서 매일 잠자리에 들 때의 기분에 집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죽음의 순간이 잠이 드는 순간과 같다고 말합니다. 묘비에도 “아무개가 열심히 살다 편히 잠들다.”라는 식으로 써 있기도 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매일 죽는 연습을 할 기회가 있는 것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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