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0년 1월 22일 연중 제2주간 수요일

Margaret K 2020. 1. 21. 19:56

2020년 1월 22일 연중 제2주간 수요일


예수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는

“일어나서 이 앞으로 나오너라.”하시고

사람들을 향하여는 “안식일에 착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악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사람을 살리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 옳으냐?” 하고 물으셨다그들은 말문이 막혔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탄식하시며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손을 펴라.”하고 말씀하셨다
(마르3,1-6)


Jesus said to the man with the paralyzed hand,

"Stand here in the center." Then he asked them,

"What does the Law allow us to do on the Sabbath?

To do good or to do harm? To save life or to kill?"

But they were silent.

Then Jesus looked around at them

with anger and deep sadness

because they had closed their minds.

And he said to the man, "Stretch out your hand."

He stretched it out and his hand was healed.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년 다윗은 주님의 도우심으로 골리앗을 쳐 이겨 이스라엘군이 승전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완고함에 슬퍼하시면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 주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예수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바라봅니다.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하였고, 예수님의 질문에 입을 다문 채, 좀처럼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한가운데’로 초대한 이상, 우리는 대답해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과 의지를 드러내야 합니다.
어떻게 할까요? 우리 사회에 내쳐지고 소외받고 천대받는 이들이 우리 삶 한가운데 등장한다면, 우리는 그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우리는 여전히 입을 다문 채 다른 이들과 하느님께서 어떻게 하실지 쳐다만 보고 있을까요? 어쩌면 그런 수동적 침묵은 우리의 비겁함과 잇속 계산에 따른 이기심에서 말미암은 것은 아닐까요?예수님께서는 노기를 띠십니다.
그리고 손이 오그라든 이에게 “손을 뻗어라.” 하고 명령하십니다.
이 명령은 우리의 이기심을 깨부수는 명령과 같습니다.
“마음을 열어라.
이웃을 향하여라.
더 이상 너의 ‘밥그릇’만 채우지 말아라.” 하고 예수님께서 다그치십니다.세상은 이러한 예수님을 없애려고 계획합니다.
세상은 제 ‘밥그릇’을 위하여 신념도, 사상도 내팽개칩니다.
바리사이들이 헤로데 당원들과 예수님을 없애려고 모의합니다.
우리 역사로 보면, 일제 시대에 민족주의자들과 친일파가 한자리에 모인 것입니다.
어울리지 않는 이 두 집단이 함께 모의를 한다는 것이 신기하지만, 제 밥그릇 앞에서는 민족도, 나라도, 옳음에 대한 열망도 내팽개칠 수 있는 것이 세상인가 봅니다.
이런 세상에 그리스도인들이 지켜 나가야 할 것은 단 하나, 정의를 향하여 ‘손을 뻗는 일’입니다.
꽉 막힌 세상의 이기심 그 한가운데서 세상을 향한 사랑의 마음을 펼쳐 나가는 일입니다.
그 일을 하려고 우리는 오늘도 공동체 안에서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꽤 오래전의 일이 생각납니다.

어떤 형제님께서 어릴 때의 일을 말씀하시는데, 이상하게도 제가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이것저것 당시의 일에 관해서 이야기하다 보니 한동네에 살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동네에 10년 가까이 함께 살았는데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로부터 30년 뒤의 우연한 만남으로 함께 같은 공간에서 그것도 그리 멀지 않은 거리를 두고 있었음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이 분과의 만남을 통해, 누군가와의 만남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깨닫습니다. 같은 동네에 살아도 얼굴 한 번 제대로 못 보고 또 말도 전혀 나누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지금 누군가와 얼굴을 마주하며 대화를 나눈다는 사실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어떤 만남도 하찮게 여겨서는 안 됨을 깨닫습니다. 따라서 그 만남이 소중한 만남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과의 만남도 그렇다고 봅니다. 주님을 만나고, 주님을 믿고 따르고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대단한 것입니까? 이를 대수롭지 않은 만남으로 생각하기에 때로는 불평불만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또 좋은 만남이 아닌 별로 중요하지 않은 만남으로 만들었던 것은 아닐까요?

유대인의 회당에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손이 오그라들었지만, 거기 있던 사람들은 마음이 오그라들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곳에 계신 주님을 바라보지도 않았고, 그분께서 행하시려는 기적을 이해하지도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고 말씀하시지요. 만약 “안식일에 일을 해도 되느냐?”라고 물었다면 그들은 곧바로 율법을 어기려고 한다고 고발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정신을 말씀하신 것이지요. 율법은 구원을 위하여 필요한 것을 허용했고, 그래서 사랑을 위해서 좋은 일을 하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마음이 오그라들어 있어서, 예수님의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오그라들어 있기에 주님과의 만남을 좋은 만남으로 만들지 못하였습니다. 우리 역시 부정적인 마음, 세상 것에 대한 욕심과 이기심으로 가득 찬 마음이라면, 마음이 오그라들어 있는 상태가 될 것입니다. 당연히 주님과 좋은 만남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이제 그 마음을 쫙 펴고 주님과 좋은 만남을 만들어야 합니다.
언제나 현재에 집중할 수 있다면 행복할 것이다(파울로 코엘료).



천생연분

어느 부부를 만났는데 이들은 스스로 ‘천생연분’이라고 말씀하시더군요. 그래서 물었습니다.

“왜 천생연분이라고 생각하세요? 둘이 그렇게 딱 맞습니까?”

천생연분(天生緣分)이란 하늘이 마련하여 준 인연을 이르는 뜻의 한자성어로 모든 점에서 딱 맞을 때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뜻밖의 대답을 하십니다.

“아뇨. 우리는 달라도 너무 달라요. 그래서 좋아요.”

“왜요?”

“치킨 먹을 때 이이는 다리를 좋아하고, 저는 날개를 좋아해요. 그래서 다투지 않게 되고, 이렇게 달라서 좋은 점이 많기에 서로 잘 만났다 싶어요.”

천생연분을 우리는 성격이나 생각이 같아야 할 것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다르다는 것이 천생연분의 이유도 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천생연분이 아닐까요? 혹시 천생연분이 아니라고 고정을 해놓아서 최악의 커플로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요?

사랑이라는 말에 맞고 틀리는 것은 없는 것 같습니다. 내가 누군가를 정말로 사랑한다면 그 사랑이 내게 정답입니다.                   

사람은 각자가 믿는 것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산다.

-전삼용신부-


하루는 하늘에 떠 있는 해와 달이 서로 다투었습니다. 서로가 자기주장을 내세우면서 고집했습니다. 해는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나뭇잎은 초록빛이다. 바다는 푸른빛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언제나 바삐 움직인다. 그 결과 세상은 언제나 시끄럽다.”

반면 달은 상반되게 주장했습니다.

“무슨 소리야? 나뭇잎은 은빛이야. 내가 매일 보는데 그걸 모르겠어? 바다는 검고 사람들은 집에서 나오질 않아서 세상은 언제나 쥐 죽은 듯이 조용하단 말이야.”

      그때 바람이 지나가다가 그들이 다투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바람이 웃으면서 중재에 나섰습니다.

“얘들아, 그만 싸워. 너희들은 괜히 싸우고 있는 거야! 해가 떠 있을 때는 나뭇잎이 초록색이고 세상이 떠들썩한 게 맞고 달이 떠 있을 때는 달이 말한 것도 맞아. 나는 구름이 끼었을 때 회색 바다도 보고 나뭇잎이 검게 보이는 것도 보았어.”

그러나 해와 달은 자신이 본 것이 맞는다는 의견을 절대로 굽히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렇게 해와 달은 서로 만날 수 없는 사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이런 말을 많이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믿고 싶은 대로 믿는다. 그리고 믿는 대로 보이게 된다. 사랑에 조언이 필요치 않은 이유는 결국 자기 맘대로 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자신이 알고 믿고 있는 것과 일치하는 방향으로 해석하고, 판단하고, 결정하고, 선택하는 경향을 보인다는 것이 ‘확증편향’입니다. 결국 어떤 사람이 무언가를 바라보는 시선은 자신이 믿는 바를 확증하려는 편협한 시각인 것입니다. 각자 자신의 믿음을 증명하려는 시각으로 보기에 어떤 보이는 것에 대해 옳고 그름에 대한 논쟁은 무의미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나의 믿음이 올바르지 않으면 그 사람은 아무리 옳은 판단을 해도 오류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 정당을 좋아하고 어떤 사람은 저 정당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그 좋아하는 이유를 그 정당들이 내는 정책이 옳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삼성을 좋아하는 사람은 갤럭시를 살 것이고 애플이 좋다고 믿는 사람은 끝까지 아이폰을 살 것입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논하기 이전에 나의 믿음이 옳은지, 그른지를 먼저 살펴야합니다.

      오늘 복음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그분께서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라고 시작합니다. 의도가 불순한 자들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믿고 원하는 것은 자신들의 이익입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남에게 불필요한 피해가 가는 것도 옳은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타인을 행복하게 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물으십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그들은 대답할 수가 없습니다. 무엇이 합당한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알기는 하지만 자신들의 의도와 상반되기 때문에 알아도 모르는 것입니다. 머리로 따지는 옳고 그름은 마음의 의도를 넘어설 수가 없습니다.

      내가 옳고 그름에 대한 올바른 믿음을 가져야 다른 모든 것도 옳고 그름을 올바로 분별할 수 있습니다. 내가 믿는 것이 옳은지, 그른지는 하느님의 말씀을 통해 성찰해보면 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인간이 행복해지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니 안식일에 이웃의 병이 치유되어 행복해지는 것은 옳은 일입니다. 하느님의 뜻과 어긋나는 것을 원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옳다고 믿고 사셨던 것을 옳다고 믿고 살겠다는 마음을 굳혀야합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고 하셨는데 나는 ‘부자가 되어야 행복할 거야!’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조금 미워하며 사는 게 더 편해!’라고 믿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믿으셨던 것을 나도 믿게 될 때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올바로 판단하게 됩니다.


-조재형신부-


전설 따라 삼천리라는 라디오 프로가 있었습니다. 역사적 사실은 아니지만, 우리의 삶에 지침이 되는 이야기였습니다. 부모님을 지극 정정으로 섬기는 자식의 이야기, 사람을 해치는 호랑이를 때려잡은 용감한 청년의 이야기, 남모르게 재물을 나누었던 형제의 이야기, 홀로 남아 자식을 잘 키웠던 어머니의 이야기, 탐관오리의 재물을 빼앗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었던 의적 이야기, 귀신을 물리쳤던 스님의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마을마다 전설처럼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었고 그런 이야기들을 모아서 들려주었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민중의 삶이 되었습니다.

 

서양 문학의 원류가 되는 길가메시, 일리야드, 오디세이도 서양판 전설 따라 삼천리일 겁니다. 재미있는 이야기 속에 가족에 대한 사랑, 국가에 대한 충성, 친구에 대한 우정, 배신자에 대한 응징, 운명을 받아들이는 겸손, 새로운 세상을 찾아 떠나는 용맹, 진리에 관한 탐구, 죽음을 넘어서는 희망이 있습니다. 위기에 처한 국가를 구하는 영웅의 이야기도 있고, 이름 없는 시인의 아름다운 이야기도 있고, 시골에 사는 처녀와 총각의 순결한 사랑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런 전설이 음악으로 표현되고, 그림으로 표현되고, 연극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이런 신화가 문학이 되었고, 이런 신화가 신앙이 되었습니다.

 

사실이 햇빛을 받으면 역사가 되고, 달빛을 받으면 신화가 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류의 문화와 삶을 지탱한 것은 햇빛을 받은 역사와 달빛을 받은 신화가 한데 어울려진 겁니다. 논리와 이성을 바탕으로 한 과학과 기술은 현대 문명으로 꽃을 피웠습니다. 산업의 발전, 인터넷, 스마트폰, 인공지능은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였고, 편리함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산업의 발전은 낡은 전통이라는 이유로, 인류의 소중한 유산인 신화와 직관, 영성과 깨달음의 세계를 소외시켰습니다. 하드웨어는 커졌는데 그것을 운영하는 소프트웨어가 없는 느낌입니다. 생명은 잘게 쪼개지는 원자와 물질이 전부가 아닙니다. 생명은 파동과 에너지이기도 합니다.

 

고고학, 이성, 과학의 기준으로 성서를 해석할 수 있습니다. 양식비판과 편집비판을 통해서 시대를 구분하고, 첨부된 내용을 추려낼 수도 있습니다. 성서에 내포된 다른 종교와 신화의 영향을 가려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성서를 해석하는 또 다른 전통과 전승이 있음을 이야기합니다. 우리 삶의 지침이 되는 윤리와 교훈을 발견하는 해석입니다. 직관과 성찰을 통해서 영적인 깨달음을 발견하는 해석입니다. 교회는 그런 방법을 ‘Lectio Divina(거룩한 독서)’라고 하였습니다. 성서가 단순히 우리에게 윤리적인 삶의 지침을 주는 것이 아니라, 성서는 우리가 하느님과 대화하고,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 줍니다.

 

다윗과 골리앗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힘의 세기가 문제가 아닙니다. 죽이고 죽는 문제가 아닙니다. 세상의 것이 강하게 보일지라도 하느님의 힘을 이길 수 없다는 신앙입니다. 우리가 사는 시간과 공간에서 세상의 것이 이긴 것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승리한다는 신앙입니다. 손이 오그라든 환자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환자가 손을 펴는 문제가 아닙니다. 안식일의 규정을 지키는 문제가 아닙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선을 행하라는 신앙입니다. 십자가의 순간에도 선을 행하는 신앙입니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 밤을 새워 찾아다니는 신앙입니다.

 

예수님은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고 백성 가운데 병자들을 모두 고쳐 주셨네. 안식일에 좋은 일하는 게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하는 게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게 합당하냐? 죽이는 게 합당하냐?”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습니다. 혹독한 겨울이 지나면 화사한 봄날이 찾아옵니다!

 -양승국신부-

 

마르코 복음 2장 1절부터 3장 6절까지는 이른바 ‘갈릴래아 논쟁 사화’가 펼쳐지고 있습니다. 논쟁은 예수님: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 사이에 이루어졌습니다.

 

 갈릴래아 논쟁 사화는 중풍병자의 치유로 인해 야기된 사죄권 논쟁, 세리 레위의 부르심으로 인해 야기된 죄인들과의 친교 논쟁, 단식 논쟁, 그리고 어제와 오늘에 걸쳐 소개되고 있는 안식일 논쟁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갈릴래아 논쟁 사화 중 마지막 사건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치유한 일로 인해 벌어졌습니다. 오늘도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을 매의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또 다시 안식일 규정을 어겨가면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치유해주신다면, 곧바로 초강력 대응조치를 취하기 위해서 눈에 불을 켠채 감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잘난 안식일 규정에 따르면, 안식일에는 생명이 위독한 응급 환자의 경우에만 목숨을 구해주는 것이 허용되었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안식일에 병자를 치료하는 것은 엄격히 금지되고 있었습니다.

 

 안식일 제정의 본래의 의미를 망각한 채, 엄격한 잣대만 들이대는 바리사이들이었습니다. 한 동료 인간 존재가 지금 눈앞에서 겪고 있는 큰 고통과 깊은 상처는 안중에도 없던 바리사이들이었습니다. 그저 율법의 원리원칙만 적용하려는 바리사이들이었습니다.

 

 이런 바리사이들의 오그라든 마음, 완고한 마음을 몹시 슬퍼하시면서, 예수님께서는 지금 당장 생명에 지장이 없다 하더라도, 오랜 세월 심연의 고통을 겪어온 한 인간 존재의 눈물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크신 사랑과 한없는 자비는 바리사이들의 경직되고 틀에 박힌 사고방식을 훨씬 초월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변질된 율법을 상대화시키시고 율법 제정의 원래 목적인 인간의 대한 사랑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마르코 복음 3장 4절)

 

 손이 오그라든 사람의 치유를 통해 갈릴래아에서의 치열했던 논쟁이 마무리됩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거듭 머리를 맞대고 부단히 올가미를 던져가며 예수님을 몰고 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권위있는 가르침 앞에 반박할 여지를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결국 분노로 가득한 바리사이들은 헤로데 당원들과 합작하여 예수님을 죽이기고 모의합니다.

 

 오늘 우리의 손, 우리의 눈, 우리의 마음을 들여다봅니다. 혹시라도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들 못지 않게 오그라들데로 오그라든 것은 아닌지요? 잔뜩 경직되거나 왜곡된 것은 아닌지요?

 

 너무나 뜻밖의 선물을 받게 된 손이 오그라든 사람의 인생을 묵상하며 드는 생각입니다. 인간만사 계속 죽어라죽어라 하지만은 않습니다.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습니다. 혹독한 겨울이 지나면 화사한 봄날이 찾아옵니다. 기나긴 장마와 혹서가 지나가면 선선하고 청명한 가을하늘이 찾아옵니다.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그랬습니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하나 했었는데 기적처럼 예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오랜 기다림의 끝에 예수님을 만나는 행운을 손에 넣게 됩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오늘 비록 우리의 나날이 무척이나 암담하다 할지라도 언제 상황이 '짠'하고 바뀔지 모르는 것입니다. 오늘 기상 악화로 파도가 넘실대어 발이 꽁꽁 묶여있다 할지라도 기다리다보면 반드시 배를 띄울 때가 찾아옵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말며, 늘 희망하며, 그래도 새롭게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반드시 주님께서 친히 찾아가실 것입니다. 다정한 위로의 말씀, 너무나 감지덕지한 생명의 말씀을 건네실 것입니다.

 

 “손을 뻗어라.”


마음이 오그라든 병

   -반영억신부- 

 

얼음위에서 놀던 어린이가 얼음이 깨지면서 물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를 목격한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아이를 구해야 된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 이지만 실제로 자신의 몸을 던져 구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죽음을 각오한 사랑이 있는 사람이라야 가능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지 알지만 그렇게 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 앞에서 이기심을 고집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한 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 주셨습니다. 당시 율법에 의하면 안식일 법을 위반하는 사람은 추방당하거나 사형에 처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탈출31,14). 유다인들은 목숨이 위태로운 경우가 아니면, 안식일에 병자를 치료할 수 없다는 법적인 규정까지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치유해준 병자는 손이 오그라든 상태였기 때문에 목숨이 위태로운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바리사이들의 눈에는 예수님의 행위가 법에 저촉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당신을 고발하려고 지켜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손이 오그라든 병자를 치유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결국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없애 버릴까 모의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곱지 않은 시선에도 불구하고 안식일 법의 맹목적인 준수보다는 안식일에도 선행을 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비뚤어진 사람에게는 예수님을 고발할 마음만 커갔습니다.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지속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저항과 반대에도 꾸준히 실천할 수 있는 인내와 지구력을 지녀야만 합니다. 이러한 인내와 지구력은 예수님께 의지할 때 비로소 얻을 수 있습니다. 어려운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마음이 오그라든 사람은 모든 것을 자기중심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며 행동합니다. 그래서 아무리 좋은 것을 보아도 칭찬은커녕 흉보고 비난하며 불평합니다. 좋은 일에는 인색하고 남을 해치는 일에는 발 벗고 나섭니다. 이렇게 보면 신체적인 장애를 가진 사람보다 마음이 오그라든 사람이 더 문제입니다.


 손이 오그라든 사람의 치유를 보고 함께 기뻐하기보다 외적인 규정을 어겼다는 사실 하나에 집착해서 예수님을 해칠 궁리를 하는 사람은 바로 시기 질투하는 나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는 누구보다도 경건하고 하느님의 계명을 충실히 지킨다고 자만하면서, 실제로는 교만의 죄를 범하고 생명을 죽이는 악행을 저지릅니다.


 무엇이 옳고 그릇된 일인지를 알면서도 마음한번 비뚤어지면 대책이 없습니다. 그는 중환자입니다. 그는 치유 받아야 합니다. 손이 오그라든 사람보다도 더 먼저 치유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는 중병을 앓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안타까움이 큽니다. 혹 나도 잘못된 고정관념, 어떤 것에 대한 집착, 쓸데없는 고집, 자존심의 중병을 앓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야 하겠습니다. 손을 뻗어라 하시며 오그라든 손을 성하게 하신 능력의 말씀이 오그라든 우리 마음을 펴주시길 기도합니다. “손이 오그라든 사람은 다른 이를 해칠 수 없지만, 마음이 오그라든 사람은 다른 이를 해치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마음을 여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나를 위한 주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요한1,5).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의 손은 반역의 손, 질투심 때문에 동생을 죽인 카인의 손은 살인의 손, 은전 30냥에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의 손은 배신의 손,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한 무리의 손은 폭력의 손이다. 예리코를 가다가 강도를 만나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도 그냥 지나간 사제나 레위의 손은 오그라든 손이다. 반면 강도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어 간호해 준 사마리아 사람의 손은 선한 손이요, 봉사의 손이요, 활짝 펴진 손이다.” 선악과를 따먹기 위해 움켜진 손은 불행의 시작이었습니다. 자기를 위해서 움켜진 손은 결코 하느님을 만나지 않고는 펴질 수 없는 손입니다. 나의 손은 어떤 손인가? 살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나의 믿음은 어떻습니까?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느님,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믿습니까? 이 믿음은 나의 삶을 변화시킵니까?"(프란치스코).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일어나 가운데 서라. 손을 뻗어라.”(마르 3,5) 

-이영근신부-


어제 <복음>의 마지막 구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한 것이며, 당신이 안식일의 주인이심을 선언하셨습니다(마르 2,28).

오늘 <복음>도 여전히 안식일 논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주는지 고발하려고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에~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마르 3,4)


그들이 입을 열지 않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몹시 슬퍼하시면서 손 오그라든 사람에게 말합니다.

일어나 가운데 서라. 손을 뻗어라(마르 3,5)


손이 오그라든 사람은 누구인가?

손에 무엇인가를 꼭 움켜쥐고 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치 마음이 완고한 사람이 가슴에 자기 뜻을 꼭 움켜잡고 있듯이, 손에 무엇인가를 꼭 움켜쥐고 있는 사람입니다. 움켜쥐고 있는 바람에 형제들과 주고받고를 못하고 있어 소통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곧 자신의 고집 때문에 완고해져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고, 하느님과 형제들과 단절되어 있음을 말합니다.

혹 나도 지금 무엇인가를 꼭 움켜쥐고 있어 형제들과 소통하지 못하고 있지는 않을까?

나는 그것을 언제부터, 대체 왜 손에 쥐게 되었을까?


그런데 우리는 대체 언제부터 손을 꼭 쥐게 된 것일까? 묘한 것은 우리 모두는 태어날 때부터 손을 꼭 쥐고 태어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분명, 에덴에서부터 쥐었습니다. ‘선악과를 손에 움켜쥐었고, 교만과 불순명과 탐욕을 움켜쥐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왜 쥐었을까? 사실, 그것을 따먹고 높아지려 했지만, 오히려 추락이었습니다. 금단을 어기고 자유를 행사했지만, 그것은 자유가 아니라 오히려 속박이었습니다. 욕심 부려 자신을 채웠지만, 오히려 단절과 죽음이었습니다.

이처럼, 무엇인가를 움켜쥔다는 것은 곧 추락이요 속박이요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손이 오그라든 사람은 곧 원죄를 뒤집어 쓴 그리스도인을 표상합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꼭 움켜쥐고 있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무화과나무 잎으로 앞을 가리고 숨어 있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가운데 서라. 손을 뻗어라.”(마르 3,5)


오그라든 손을 편다는 것은 단지 움켜 쥔 것을 내려놓는 것만이 아니라, 손에 못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단지 움켜 쥔 것을 내려놓는 것을 넘어 자기 자신을 건네주는 것을 뜻합니다. 당신께서 손을 펴시어 십자가에서 못을 받아들이시고, 구원의 피, 화해의 피를 흘리셨습니다. 그리하여 첫 아담이 움켜쥔 손을 펴시고, 새 아담이 되셨습니다. 죽음과 어둠을 몰아내시고 생명과 빛이 되셨습니다. 참으로 당신은 안식일의 주인이시고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오늘 저희는 손을 펴고 성체를 받아 모십니다. 움켜쥔 것을 내려놓아야 할 일입니다. 손을 뻗어 상처를 입고 구원의 피를 흘려야 할 일입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당신의 손에 구원의 못을 받아들였듯이 말입니다. 사랑으로 상처 입을 줄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사랑으로 자신을 건네줄 줄을 알아야 할입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제 손이 당신 구원을 전해주는 손, 당신 사랑을 건네주는 손이 되게 하소서! 아멘


- 오늘 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

손을 뻗어라.”(마르 3,5)


주님!

주고받을 줄 아는 복된 손이 되게 하소서!

주고 싶은 것만 주고, 받고 싶은 것만 받는 손이 아니라,

주고 싶지 않아도 주고, 받고 싶지 않아도 받는 손이 되게 하소서!

선악과를 움켜쥔 탐욕과 불순명의 손이 아니라,

못과 창을 받아들인 사랑과 신뢰의 손이 되게 하소서!

움켜 쥔 것을 나누어주고 손을 뻗어

당신의 사랑과 구원을 받아들이게 하소서! 아멘.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송영진신부-


“예수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셨는데, 그곳에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그분께서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예수님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일어나 가운데로 나와라.’ 하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그러나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분께서는 노기를 띠시고 그들을 둘러보셨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몹시 슬퍼하시면서 그 사람에게,
‘손을 뻗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가 손을 뻗자 그 손이 다시 성하여졌다.
바리사이들은 나가서 곧바로 헤로데 당원들과 더불어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를 하였다(마르 3,1-6).”

여기서 “합당하냐?”는, “하느님 뜻에 합당하냐?”이고,
이 말씀의 뜻은,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이 무엇이겠느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질문은,
“하느님께서 사람들이 안식일에 무엇을 하기를 바라시겠느냐?”이고,
이 질문의 답은 당연히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이 안식일에 좋은 일과
목숨을 구하는 일을 하기를 바라신다.”입니다.
선(善)이시고, 사랑이신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이 평소에도 늘, 안식일에는 더욱더,
좋은 일(선한 일)과 목숨을 구하는 일을 하기를 바라십니다.

1) 안식일은 아무것도 안 하는 날이 아니라,
좋은 일과 목숨을 구하는 일을 해야 하는 날이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따라서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은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안 지키는 것입니다.
이 가르침에는 좋은 일을 하지 않는 것은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과 같고,
목숨을 구하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은 죽이는 것과 같다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이라는 이유로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은,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과 같고, 남을 죽이는 일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가르침은 안식일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날에 다 해당되고,
종교와 신앙생활 전반에 다 해당됩니다.
이웃이 어떤 고통을 겪고 있는데도 그 이웃에게 관심 갖지 않고,
그 이웃을 도와주는 일은 하나도 하지 않으면서, 골방에 틀어박혀서
기도만 하고 있다면, 그것은 그 이웃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예수님 기준으로는 죄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

2) 주일 미사 참례는 주일을 지키는 일 가운데 일부이지, 전부가 아닙니다.
따라서 주일 미사 참례만으로는 주일을 제대로 지켰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신앙인은 주일 하루를 온전히 주님께 봉헌하는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휴일을 즐기는 일 자체를 하면 안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휴일을 즐기더라도 신앙인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되고,
그날이 주일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주일 미사가 끝난 뒤에 나머지 시간들을
세속 사람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또 전혀 거룩하지 않은 모습으로, 세속적으로 놀면서 지냈다면,
그것은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라는 십계명을 안 지킨 것입니다.
(주일을 안 지킨 것입니다.)
실제로 그런 모습을 흔하게 봅니다.
이 말에 대해서, “너무 융통성 없고 고지식한 말이다.” 라고
반박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주일을 주일답게 제대로 지키는 것은
고지식한 일이 아니라, 신앙인의 본분입니다.
주일은 ‘노는 날’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쉬는 날’이고, ‘좋은 일’(선한 일)을
해야 하는 날이고, 이웃 사랑 실천을 해야 하는 날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물론 신앙인은 주일이 아닌 날에도 꾸준히 선행과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데,
주일에는 특히 더 잘 실천해야 합니다.
“그러면 도대체 언제 쉬란 말인가?” 라고 불평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은 마음과 정성의 문제입니다.
할 수 없어서 못하는 것과 할 수 있는데도 안 하는 것은 분명히 다릅니다.

복음 말씀을 보면, 사람들은 예수님의 질문에 대해서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예수님을 죽이려고 모의를 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논리적으로 반박할 수도 없고, 그렇지만 그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것도 싫고, 그래서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왜 그들은 침묵을 지키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을까?

1) 유대인들은, 특히 바리사이들은
“안식일은 아무것도 안 하는 날”이라는 잘못된 신념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서 예수님의 목숨을 빼앗으려고 한 것입니다.
나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서 나의 목숨을 바치는 것은 희생이고 헌신입니다.
그러나 나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서 남의 목숨을 빼앗는 것은 살인죄입니다.
하느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하느님께서 무엇을 바라시는지는 생각하지도 않고,
무엇이 ‘하느님의 선(善)’인지 생각하지도 않고,
큰 죄를 짓는 것은 지극히 어리석은 일입니다.
오늘날에도 자신의 신념만을 내세워서 남을 죽이려고 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살인을 하면서까지 지켜야 할 신념이라면, 그것은 결코 옳은 신념일 수 없습니다.
선(善)이 아닌 신념은, 즉 악한 신념은 신념이 아니라 그냥 악(惡)입니다.

2) 바리사이들은 대부분 “나는 옳다.” 라는 오만과 독선에 빠져 있었습니다.
“나는 옳다.” 라는 독선은 “너는 틀렸다.” 라는 편견과 짝을 이룹니다.
그 독선과 편견 때문에 자기들을 비판하는 사람들을 탄압하고 박해합니다.
바리사이들의 오만과 독선은 예수님에 대한 증오심과 결합되었고,
그래서 그들은 아무런 죄의식 없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오늘날에도 “나는 옳다.” 라는 독선에 사로잡혀 있는 자들이
자기들과 의견이 다른 사람들을 박해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교회 내부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3) 바리사이들 가운데에는 예수님을 무조건 싫어하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무조건 배척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처음에는 예수님이 갈릴래아의 시골 출신이고, 목수라는 점 때문에 싫어했는데,
나중에는 그냥 무조건 싫어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의 세상 사람들 중에는 그리스도교를 무조건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선한 일을 해도, 사랑을 베푸는 일을 해도,
그리스도교가 하는 일이라면 다 싫어합니다.
그런 태도는 자기 스스로 하느님을 등지는 것이고,
구원의 길을 버리고 멸망의 길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조욱현신부-


복음: 마르 3,1-6: 안식일에 손이 오그라든 병자를 고치시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다시 회당으로 가신다. 그런데 회당 한 쪽에는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고(1), 사람들은 예수께서 고쳐주시면 고발하려고 예수님을 지켜보고 있었다(2). 예수님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부르시어 일어나 가운데로 나와라.”(3)고 하신다. 그는 손이 오그라들었지만, 거기 있던 사람들은 정신이 오그라들었다. 그들은 그분을 바라보지도 않았고, 기적을 이해하지도 못했다.

 

주님께서는 기적을 행하시기 전에 그들의 마음을 준비시키신다. 그분은 물으신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악을 행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4) 만일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일을 해도 되느냐?’하고 물으셨다면 그들은 즉시 당신은 율법을 거슬러 말하고 있소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본 의미를 말씀하신다.

 

생명을 위해서라면 예외적으로 이러한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당시 유대인들은 사람이 우물에 빠졌을 경우 밖으로 끌어내어도 괜찮았고(마태 12,11) 소나 나귀의 경우도 그러하였다. 이처럼 율법은 구원을 위하여 필요한 것을 허용했고, 유대인은 안식일에도 음식을 장만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동의하지 않을 수 없는 질문을 던지신다.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4) 그들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선의를 지닌 사람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도와줄 가능성이 있을 때 사람을 비참한 상태에 그냥 내버려두는 것은 확실히 나쁜 것이고, 또한 어떤 상황에서도 사람을 돕는 것은 확실히 좋은 것이라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완고한 마음을 탄식하시면서 노기에 가득 차 그들을 둘러보시고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손을 뻗어라하시면서 성하게 해주셨다(5). 그리하여 여러 차례 예수님의 처사를 비난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헤로데 사람들과 모의하여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한다(6).

 

오늘 복음에서 우리가 묵상할 것이 있다. “손이 오그라들었다는 것은 인간의 죽은 행동의 상징이다. 바리사이들은 헤로데 사람들과 손을 잡고 예수님을 처치할 모의를 한다. 그들은 예수님의 창조하는 손을 잡는 것이 아니라 오그라든 손끼리 서로 잡았음을 볼 수 있다. 오그라든 손끼리 잡았으니 창조의 손을 없애는 결과를, 즉 죽은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나는 어떠한 손을 잡고 살아가는 신앙인인가? 내 손도 오그라들었는데 내가 잡고 있는 다른 손은 나의 손을 펴줄 수 있고 창조하는 생명을 주는 손인가 아니면 창조하는 손을 없애버리려고 하는 낡은 이데올로기의 권좌에 있는 손인가? 나 자신을 성찰해 보자.


손을 뻗어라.(마르 3, 5)

-한상우신부-

먼저 주님을
만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님 안에
믿음이 있고
주님 안에 치유가
있습니다.

믿음은
믿음을 낳고
용기는 용기를
낳습니다.

오그라든 마음을
펴주시는 분은
언제나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주님을
향한 믿음이
오그라든 삶에서
우리를 빠져나오게
합니다.

서로를 향해
뻗어가야 할
우리의
믿음입니다.

손을 뻗어야
서로를
어루만질 수
있습니다.

형제의 마음을
오그라들게 한
당사자가 바로
우리자신임을
깨닫게됩니다.

손을 뻗어
서로의
아픈 마음을
어루만지는

믿음이란
용기를 내어
손을 뻗는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는 하느님을 믿는 이의 당당함이 부각됩니다.

제1독서를 먼저 봅니다. 유명한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입니다.

"너는 칼과 표창과 창을 들고 나왔지만, 나는 네가 모욕한 이스라엘 전열의 하느님이신 만군의 주님 이름으로 나왔다"(1사무 17,45).

소년 다윗이 전장 한가운데로 나아가 필리스티아 거인 장수 골리앗과 마주합니다. 한눈에 보기에도 상대가 될 것 같지 않게 육체적으로 왜소하지만 다윗은 주눅들지 않고 당당합니다. 그건 그가 하느님을 단단히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칼이나 창 따위로 구원하시지 않는다 ... 전쟁은 주님께 달린 것이다"(1사무 17,47).

어린 소년이지만 다윗의 믿음은 허황되지도 두서없지도 않습니다. 그는 만물의 주인, 세상만사의 주인, 인간 운명의 주인이신 하느님의 주도권을 확신하면서 그분께 전적으로 의탁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손에 칼도 들지 않고 그를 죽인 것이다"(1사무 17,50).

하느님은 다윗의 믿음을 배반하지 않으십니다. 기름부음받아 주님의 영 안에서 살아가는 소년 다윗은 하느님의 힘으로 필리스티아 장수를 무찌르고 이스라엘에 승리를 안겨 주었습니다. 이로써 온 이스라엘은 자기들이 진정 하느님께서 손수 지켜주시는 하느님 백성임을 확인하지요.

복음 대목은 예수님이 안식일에 회당에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주시는 내용입니다.

"그곳에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마르 3,1).

예수님을 고발할 구실을 잡으려 지켜보는 사람들이 있으니, 사실 현장의 분위기는 썩 좋지 않습니다. 그래도 예수님 눈에는 가장 먼저 몸이 불편한 그 사람이 눈에 띈 것 같습니다.

"일어나 가운데로 나와라"(마르 3,3).

예수님은 위험을 피하려 뒤에서 슬쩍 치유를 일으켜 주시거나, 이번만 그냥 외면하고 넘어가거나 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정면으로 사람들의 악한 생각에 맞서 그들 한가운데서 당신 존재와 하느님의 권능을 드러내십니다.

숨거나 피하지 않는 예수님처럼 손이 오그라든 사람도 자신의 부끄러운 장애를 사람들 눈에 드러내야 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거저 얻는 기적은 없습니다.

"그분께서는 노기를 띠시고 ...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몹시 슬퍼하시면서"(마르 3,5).

복음사가는 이 대목에서 예수님의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냅니다. 노기는 노여운 기운, 곧 분노와 흡사합니다. 그런데 사람의 분노가 곧잘 폭언이나 폭력으로 표출되는 것에 비해, 예수님의 분노는 깊은 슬픔으로 옮아감을 알 수 있습니다.

깊은 슬픔. 어쩌면 이는 마음이 완고해져 형제의 고통에 관심을 꺼버린 사람들에 대한 격한 연민과 안타까움일 것입니다. 예수님 편에서는 그 완고한 자들까지도 당신의 사랑하는 형제들이기에 그들이 밉기보다 그들의 죄악이 아프고 슬프실 따름입니다. 예수님의 연민은 육신이 굳어버린 사람에게만이 아니라, 영혼이 굳어버린 사람에게도 거세게 흘러갑니다.

회당에서 당신을 고발하려고 노리는 무리 앞에 서신 예수님의 모습과 오늘 독서의 다윗이 겹쳐보입니다. 마치 골리앗처럼 버티고 선 제도권의 종교 권력자들 앞에서 예수님은 물러서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오직 하느님께 믿음을 두고 계시기에 흔들리지도 위축되지도 않으십니다. 그분의 당당함은 교만이나 오만에서가 아니라 진실한 자기 인식에서 나오는 겸손입니다.

"손을 뻗어라"(마르 3,5).

오그라든 한쪽 손처럼 마음과 존재가 움츠러 들었던 그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명령을 내리십니다. 그로서는 불편하고 부끄러운 몰골로 회당 가운데에 나와 선 것도 난처한 일인데, 이제는 거기에 더해서 이제껏 오그라들어 있던 감추고 싶은 손까지 내밀어야 합니다.

"그가 손을 뻗자, 그 손이 다시 성하여졌다"(마르 3,5).

그가 손을 뻗습니다. 아니, 뻗어 봅니다. 될지 안 될지 모르지만 일단 예수님을 믿고 본 것이지요.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 그 자리에 서 계신 예수님처럼, 그 역시 자기 안에 있는 희미하고 미소한 믿음을 싹싹 끌어모아 굳어있던 손을 힘껏 내뻗습니다. 이로써 믿음은 그의 것이 되었습니다.

"바리사이들은 나가서 곧바로 헤로데 당원들과 더불어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를 하였다"(마르 3,6).

섞일 일 없었던 종교 권력과 정치 권력이 이 기회에 하나가 됩니다. 이는 화합이 아니라 야합일 겁니다. 거대한 악의 기운 앞에 선 예수님이 마치 오롯한 믿음으로 나아간 순결한 소년 다윗 같습니다.

"그분은 나의 힘, 나의 산성, 나의 성채, 나의 구원자, 나의 방패, 나의 피난처"(화답송).

이 노래는 다윗과 이스라엘의 노래입니다. 또 손이 오그라들었던 이와 예수님의 노래이기도 하지요. 이것이 또한 나와 벗님의 노래이길 희망합니다.

사랑하는 벗님! 살다 보면 피할 수 없는 극한 고통에 삼켜지기도 합니다. 두려움과 절망, 슬픔으로 무너질 때도 있지요. 하지만 바로 이때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하시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악의 무리에게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동시에 우리에게도 숨어있지 말고 가운데로 나와 서라고, 손을 뻗으라고 이르십니다. 그 말씀에 순종하는 순간, 이 노래는 나의 노래가 될 것입니다. 아멘.

골리앗보다 크신 하느님  
-김찬선신부-


“너는 칼과 표창과 창을 들고 나왔지만 나는 네가 모욕한
이스라엘 전열의 하느님이신 만군의 주님 이름으로 나왔다.
주님께서는 칼이나 창 따위로 구원하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여기 모인 온 무리가 이제 알게 하겠다. 전쟁은 주님께 달린 것이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그때그때 넘어가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넘지 못하면 걸려 넘어지든지 가는 것을 포기하든지
해야 하고 그래서 그것을 넘어가기 위해서는 애를 먹어야 하고,
씨름을 해야 하며, 싸워서 이겨야만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중에는 아주 큰 문제가 있고 비교적 작은 것들도 있는데
제 인생에서 가장 큰 문제였고 그래서 제일 치열하게 다퉜던 것은
인생 그 자체로서 왜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거였습니다.

가장 큰 문제였기에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 10년을 싸웠는데
그런데 이 싸움을 통해 알고 나니 그것이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었고
그래서 그것을 알고 난 뒤에는 이것을 알기 위해
그렇게 오래 씨름하고 심지어 자살까지 생각했나 싶었습니다.

그런데 살아가다 보면 의외로 아무것도 아닌 것에 걸려 넘어지고,
아무것도 아닌 것을 두려워하며 지레 지고 들어갑니다.

저는 내향적인 성격도 있고 수도원 안에서 내내 살았기 때문인지
모르는 사람을 새로 만나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긴장이 되곤 해서
서품되고 본당에 처음 나갈 때 다양한 신자들을 만나기 위해
준비를 해야만 했고 그럼에도 신경성 탈모증으로 머리가 다 빠졌지요.

지금도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은 여전히 낯가림이 있고 특히
일로서 중요한 사람을 만날 때는 피하고 싶은 마음이 없지 않지만
그래도 이제는 처음 본당에 나갈 때와 비교하면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데 제게 있어 가장 한심한 것은 은행 일 보는 것과 같은 작은 일을
큰일로 생각하며 못한다고 하고 지레 겁을 먹고 지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일은 일생 안 하고 살아왔지만 이곳 가리봉에 오면서
어쩔 수 없이 하게 되었는데 해보니 못할 것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싸우기도 전에 지레 겁을 먹고 지고 들어가는 것은 오늘 이스라엘
군대가 골리앗을 크다고 지레 겁먹고 지고 들어가듯 다 그것을
내가 감당하기에는 그 고통이나 어려움이 크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앞서 왜 살아야 하는지 이유를 찾기 전에 자살하려고까지 했던 것도
살아야 할 이유도 없고 의미도 없는 삶을 고통스러운데도 굳이 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니 결국 고통 회피인데, 사실 너무 고통스러우면 죽고 싶지요.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제가 아는 한 분은 너무도 고통스러운 말기 암인데도 살고 싶어하십니다.
아직 어린 자녀들을 위해 살아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사랑 때문에 살아야 했고 자신의 삶도 사랑하게 되었으며,
그래서 하느님을 믿었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사실 사랑이 없었으면 그도 삶보다는 고통 없는 죽음을 선택했을 것이고,
하느님보다 죽음에서 고통 회피의 해결책을 찾았을 겁니다.

그러니 고통이 사랑보다 큰 사람이 고통의 회피로서 죽음을 택하는 것이고,
반대로 사랑이 고통보다 큰 사람은 고통을 무릅쓰고 삶을 선택할 것입니다.

그런데 또 다른 경우도 있습니다.
영원을 살아가기 위해 죽음의 강을 건너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경웁니다.
물론 영원의 하느님을 믿기 때문이고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골리앗보다 크신 분임은 말할 것도 없고
죽음보다도 크신 분임을 믿고 고백하는 오늘 우리가 바로 이런 사람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6년 1월 20일 연중 제2주간 수요일

2014년 1월 22일 연중 제2주간 수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예수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는 “일어나서 이 앞으로 나오너라.”하시고 사람들을 향하여는 “안식일에 착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악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사람을 살리는 것이 옳으냐죽이는 것이 옳으냐?” 하고 물으셨다그들은 말문이 막혔다예수께서는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탄식하시며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손을 펴라.”하고 말씀하셨다(마르3,1-6)


“사람은 자기가 믿고 싶은 대로 믿는다. 그리고 믿는 대로 보이게 된다. 사랑에 조언이 필요치 않은 이유는 결국 자기 맘대로 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자신이 알고 믿고 있는 것과 일치하는 방향으로 해석하고, 판단하고, 결정하고, 선택하는 경향을 보인다는 것이 ‘확증편향’입니다. 결국 어떤 사람이 무언가를 바라보는 시선은 자신이 믿는 바를 확증하려는 편협한 시각인 것입니다. 각자 자신의 믿음을 증명하려는 시각으로 보기에 어떤 보이는 것에 대해 옳고 그름에 대한 논쟁은 무의미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나의 믿음이 올바르지 않으면 그 사람은 아무리 옳은 판단을 해도 오류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논하기 이전에 나의 믿음이 옳은지, 그른지를 먼저 살펴야합니다.

  내가 옳고 그름에 대한 올바른 믿음을 가져야 다른 모든 것도 옳고 그름을 올바로 분별할 수 있습니다. 내가 믿는 것이 옳은지, 그른지는 하느님의 말씀을 통해 성찰해보면 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인간이 행복해지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니 안식일에 이웃의 병이 치유되어 행복해지는 것은 옳은 일입니다. 하느님의 뜻과 어긋나는 것을 원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옳다고 믿고 사셨던 것을 옳다고 믿고 살겠다는 마음을 굳혀야합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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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의 손은 반역의 손질투심 때문에 동생을 죽인 카인의 손은 살인의 손은전 30냥에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의 손은 배신의 손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한 무리의 손은 폭력의 손이다예리코를 가다가 강도를 만나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도 그냥 지나간 사제나 레위의 손은 오그라든 손이다반면 강도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어 간호해 준 사마리아 사람의 손은 선한 손이요봉사의 손이요활짝 펴진 손이다.” 선악과를 따먹기 위해 움켜진 손은 불행의 시작이었습니다자기를 위해서 움켜진 손은 결코 하느님을 만나지 않고는 펴질 수 없는 손입니다나의 손은 어떤 손인가살펴야 합니다.

-반영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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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 가운데 서라손을 뻗어라(마르 3,5)

손이 오그라든 사람은 누구인가?

손에 무엇인가를 꼭 움켜쥐고 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마치 마음이 완고한 사람이 가슴에 자기 뜻을 꼭 움켜잡고 있듯이손에 무엇인가를 꼭 움켜쥐고 있는 사람입니다움켜쥐고 있는 바람에 형제들과 주고받고를 못하고 있어 소통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입니다곧 자신의 고집 때문에 완고해져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고하느님과 형제들과 단절되어 있음을 말합니다.

 우리는 대체 언제부터 손을 꼭 쥐게 된 것일까묘한 것은 우리 모두는 태어날 때부터 손을 꼭 쥐고 태어난다는 사실입니다그러니 우리는 분명에덴에서부터 쥐었습니다. ‘선악과를 손에 움켜쥐었고교만과 불순명과 탐욕을 움켜쥐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왜 쥐었을까? 사실그것을 따먹고 높아지려 했지만오히려 추락이었습니다금단을 어기고 자유를 행사했지만그것은 자유가 아니라 오히려 속박이었습니다욕심 부려 자신을 채웠지만오히려 단절과 죽음이었습니다.

이처럼무엇인가를 움켜쥔다는 것은 곧 추락이요 속박이요 죽음을 의미합니다그러니 손이 오그라든 사람은 곧 원죄를 뒤집어 쓴 그리스도인을 표상합니다이제예수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꼭 움켜쥐고 있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무화과나무 잎으로 앞을 가리고 숨어 있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가운데 서라손을 뻗어라.”(마르 3,5)

-이영근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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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과 골리앗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힘의 세기가 문제가 아닙니다죽이고 죽는 문제가 아닙니다세상의 것이 강하게 보일지라도 하느님의 힘을 이길 수 없다는 신앙입니다우리가 사는 시간과 공간에서 세상의 것이 이긴 것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그러나 하느님이 승리한다는 신앙입니다손이 오그라든 환자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환자가 손을 펴는 문제가 아닙니다안식일의 규정을 지키는 문제가 아닙니다어떤 상황에서도 선을 행하라는 신앙입니다십자가의 순간에도 선을 행하는 신앙입니다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 밤을 새워 찾아다니는 신앙입니다.
-조재형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