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월 19일 연중 제2주일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요한. 1,29-34)
“Behold, the Lamb of God,
who takes away the sin of the world.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의 종이 어디에 희망을 두고 있는지를 노래한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인사하며 그들을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이들이라고 일컫는다(제2독서).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바라보며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라고 증언한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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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증언을 한다는 것은, 증언할 대상에 대한 탐구나 분석이 아닙니다.
증언은 제 삶의 자리에서 터져 나오는 간절한 외침입니다.
오늘 복음의 “어린양”은 그런 외침을 드러내는 대표적 표상입니다.
유다 사회가 간직한 “어린양”의 의미는 자신을 희생하여 타인을 살리는 대속이었습니다(탈출 12장; 이사 53장 참조).
제국들의 틈바구니에서 온갖 고초를 겪은 유다 사회는 스스로의 힘으로 다시 일어서기가 버거울 만큼 짓눌려 있었습니다.
그래서 현실의 절망은 하느님을 통하여 희망을 꿈꾸는 것으로 바뀌고, “어린양”은 미래에 펼쳐질 희망찬 구원의 상징이 되었습니다.요한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입을 빌려, 오시는 예수님을 “어린양”으로 규정합니다.
당시 사회는 세상을 죄악이 가득한 곳으로 이해하였습니다.
그럼에도 그런 세상 한가운데 오신 예수님을 “어린양”으로 규정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세상을 직접 주관하신다는 희망을 말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십니다.
죄악은 세상을 단절시키고 갈라놓고 찢어 놓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하느님으로 오셨고(요한 13,1 이하), 당신께서 원하시는 세상은 서로 사랑하는 친교의 자리입니다.증언을 하는 것은 우리 각자가 살아가는 세상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이며, 그 세상에 오신 하느님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사유하는 것입니다.
요한 복음은 “어린양”의 표상을 통하여 세상에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화합과 신뢰, 사랑임을 일깨웁니다.
화합과 신뢰, 사랑은 요한 복음이 쓰인 그 시대를 살아간 신앙 공동체의 간절한 바람이었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는 무엇을 간절히 필요로 하는가, 우리는 묻고 또 물어야 합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
-임상만신부-
창세기 3장을 보면, 태초에 아담과 하와가 선과 악을 알려는 욕심으로 금지된 열매를 따 먹자 눈이 열려 자기들이 알몸인 것을 알고는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서 두렁이를 만들어 입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끄러운 알몸을 가릴 수 없었기에 주 하느님 앞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는다. 이 모습을 불쌍히 보신 하느님께서는 사람과 그의 아내에게 가죽옷을 만들어 입혀 주셨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인간이 죄를 지어 얻은 부끄러움을 하느님께서 친히 이들에게 옷을 입히심으로써 덮어주시고, 당신과의 관계가 완전히 끝나지 않았음을 상기시켜 주시는 내용이다.
성경에 분명히 아담과 하와의 부끄러움을 나뭇잎으로는 가릴 수 없어 하느님께서 친히 가죽옷을 입히셨다는 내용이 나온다. 그런데 이 가죽은 동물의 희생이 아니면 얻을 수 없다. 다시 말하면 동물의 피 흘림으로 마련된 가죽옷으로만 비로소 인간이 지은 죄의 부끄러움을 가릴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매번 태어난 지 1년 정도의 어린 양을 제단에 희생 제물로 바치면서 하느님의 자비와 죄 사함을 구하는 제사를 드렸다. 그들 모두가 제단에서 흘린 ‘어린양의 피’가 아니면 도무지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때가 되면 죄인들을 위하여 하느님께서 친히 완전한 속죄와 죄 사함의 희생 제물을 마련하실 것이란 믿음으로 메시아, ‘하느님의 어린양’을 목매어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 복음에 보면, 요한 세례자는 예수께서 다가오시자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라고 증언한다. 구약에서 예언된 하느님의 자비가 예수를 통해 이미 이루어지고 있음을 선포한 것이다. 예수께서 인류의 모든 죄를 속죄하기 위해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희생 제물, 흠 없는 어린 양으로 세상에 오셨고, 장차 십자가에 속죄의 제물로 희생하실 것에 대한 증언이다. 그러므로 요한은 어린양의 희생 제물로 주어진 죄 사함을 얻기 위해 먼저 죄를 떠나 회개해야 하고, 하느님께 돌아왔다는 표시로서 세례를 받으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당시의 세례는 큰 죄를 지은 유다인이 공동체에서 쫓겨났다가 다시 돌아오거나, 이방인들이 유다교로 개종할 때 받는 ‘죄인들을 위한 정결례’ 형식이었기에 일반 유다인들은 거의 세례를 받지 않았고 따라서 요한의 세례도 마땅치 않게 생각했다. 자신들은 죄로 인한 해당 사항이 없다는 이유였다.
요한은 유다인들에게 하느님 앞에 누구도 죄 없는 사람은 없으므로 그들도 이방인들과 똑같이 회개하고 그 표시로 세례를 받으라 요구한다. 그리고 곧 오시어 물과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예수를 증언하고 있다.
이에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유다인으로서 나은 점이 있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사실 우리는 이미 앞에서 유다인들이나 그리스인들이나 다 같이 죄의 지배 아래 있다고 고발하였습니다.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의로운 이가 없다. 하나도 없다’”(로마 3,9-10)고 하면서 누구나 할 것 없이 주님의 세례를 받는 것이 유일한 죄 사함의 길임을 강조하고 있다.
예수께서 우리가 지은 죄의 부끄러움을 덮을 수 있도록 어린양으로 희생되셨다. 당신은 죄가 없으심에도 ‘죄인들을 위한 세례’를 스스로 받으심으로 우리도 세례를 통해 죄 사함의 은총을 얻을 수 있게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를 믿는 길밖에는 없다. 누구든지 자기 죄를 대신하여 예수께서 어린양으로 희생되셨음을 믿는 사람,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인해 죄 사함 얻음을 믿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입게 되어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여 구원에 이르기 때문이다.

어린양의 증언
-김창선-
성탄 시기에 기린 ‘주님 공현 대축일’과 ‘세례 축일’은 강생의 신비와 구원의 보편성을 알립니다. 연중 제2주일에 이사야 예언자가 전하는 ‘종의 노래’와 세례자 요한의 증언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는 메시아시고 ‘하느님의 어린양’이심을 밝힙니다. 오늘 미사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친교로 주님의 사랑을 증언하는 소명을 가슴에 새깁니다.
‘주님은 구원이시다’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이사야 예언자(기원전 8세기)는 메시아의 소명인 구원계획(이사 42장)을 시작으로 네 번에 걸쳐 ‘종의 노래’를 들려줍니다. 그 종은 바로 주님께서 마음에 들어 하시고, 당신의 영광을 드러낼 이스라엘(이사 49,3)입니다.
오늘의 제1독서는 그 둘째 노래(49장)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 구원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록 당신 종을 모태에서부터 빚으시어 ‘민족의 빛’으로 세우십니다. 셋째 노래는 주님을 신뢰하고 모든 고난과 박해를 이겨내는 종의 모습(이사 50장)이고, 마지막은 백성의 죄를 대신하는 어린양의 죽음이 승리한 생명의 길(이사 53장)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님이시지만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종의 모습’(필리 2,7)을 취하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성령과 함께하시는 주님(마태 12,18; 요한 1,32)께서는 이스라엘의 해방을 넘어 세상을 구원하시는 모든 민족의 빛(이사 49,6)이십니다.
사도 바오로는 제2독서(1코린 1,1-3)에서 코린토 교회 신자들에게 사도로서 자신의 소명을 밝히며 인사합니다. 주님의 자녀들은 하느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은총과 성령의 친교 안에서 거룩한 삶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비록 생각과 행동이 달라도 서로 받아들이고 사랑의 일치(교회 헌장 28)를 이루기를 기도합니다.
메시아 시대를 알리는 ‘선구자’요 ‘광야의 소리’인 요한 세례자는 빛을 증언하러 온 인물(요한 1,7-8)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라면 요한은 “타오르며 빛을 내는 등불”(요한 5,35)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그는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고,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요한 1,29)이심을 증언합니다.
구약시대에 ‘어린양’은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과 속죄를 위해 주님 제단에 바쳐진 파스카 축제의 어린양이고, 속죄일에 하느님과 화해의 희생제물(탈출 12, 레위16)이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증언한 ‘하느님의 어린양’은 예수님께서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의 표상입니다. 넷째 종의 노래에 나오는 백성의 죄를 대신하여 수난받는 종(이사 53장)과 종말에 승리하실 어린양(묵시 5-7장; 17,14)이 연상됩니다.
요한 세례자는 “내 뒤에 한 분이 오시는데,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라며 강생의 신비를 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태초에 창조주요 말씀(창세 1,1; 요한 1,1)이시고,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이심을 밝힌 것입니다.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말할 정도로 예수님과 요한의 관계가 친척이라는 전통적인 이해조차도 불식합니다. 지중해의 문화적 맥락에서 증언은 삶의 자리에서 감명 깊게 발견한 진실을 개인의 느낌과 생각과 소망을 담아 말과 행실로 밝히는 것입니다.
요르단강에서 물로 회개의 세례를 주던 요한은 거룩하신 예수님께 세례를 베푼 이유를 증언합니다. 주님의 계시(요한 1,33)대로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에 널리 알려지시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그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요한 1,32)”이 요한이 본 표지입니다.
바로 이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요한 1,34)이십니다. 공관복음(마태 3,17; 마르 1,11; 루카 3,22)은 “하느님께서 사랑하는 아들,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아들”로 표현합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고, 세상의 죄를 없애시어 하느님과 인간과 화해시켜주십니다.
죄는 세상을 죽음의 수렁으로 빠트립니다. 죄는 무엇이며 어디에서 온 것입니까? 이성과 진리와 양심을 거스르는 일이 죄입니다. 하느님을 외면하거나 업신여기는 탐욕의 삶이 죄의 뿌리입니다. 나 중심의 이기주의, 이웃과 공동체에 대한 무관심, 공동선에 대한 무책임이 세상을 진홍빛으로 물들입니다.
요한은 참 빛이신 예수님께서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요한 1,29)이라고 증언했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증언해야 할까요? ‘하느님의 어린양’의 피는 생명을 구하는 새 계약의 표지입니다. 오늘 미사에서 영혼의 양식인 성체를 모시고, 그리스도와 사랑의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그분 따라 사랑의 삶을 살기로 기도합니다.
그리스도인답게 살려는 한 신앙인을 봅니다. 그는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니 행복하다고 합니다. 매일 미사와 성사 생활로 영적 힘을 얻고, 거룩한 독서로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느님의 뜻을 따른다고 합니다. 그의 애송 기도는 ‘하느님의 어린양’이고, 강생의 신비와 사랑의 삶을 살기 위하여 삼종기도와 봉헌기도를 끊임없이 바친다고 합니다. 그의 모습이 성령 안에서 새 삶을 사는 복음화의 길이 아닐는지요?

하느님의 어린양
-유환민신부-
어릴 적 여름성경학교 때 노래도 좀 하는 연극에 출연했 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사악 이야기는데 제가 이사악이었 습니다. 아브라함이 어린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려 하자 이 사악이 노래합니다. “아버지, 아버지, 제가 뭘 잘못했나요? 하느님 말 잘 들었고요, 거짓말도 전혀 하지 않았어요.” 40년쯤 된 추억인데 이상하리만치 이 노래는 가사도 가락 도 생생합니다. 참고로 저는 잘못도, 거짓말도 무수히 하며 살았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는 장면은 창세기 22 장에 나옵니다. 번제물을 사를 장작을 진 어린 아들이 “불 과 장작은 여기 있는데, 번제물로 바칠 양은 어디 있습니 까?”(7절) 하고 묻자, 아버지가 대답합니다. “얘야, 번제물로 바칠 양은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하실 거란다.”(8절) 부자(父 子)는 번제를 바치러 산에 오르는 중입니다. 번제(燔祭)란 가죽 벗긴 짐승 전체를 제단 위에서 태워 연기로 바치는 희 생 제사를 말하는데, 이로써 죄를 씻고 하느님께 영광을 드렸습니다(레위 1장 참조). 어린 아들은 번제를 바치러 가는 아 버지가 제물로 쓸 짐승을 잊은 걸까 조바심 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아브라함도, 하느님도!) 번제물을 한시도 잊은 적 없습니다. 아들의 걱정에도 아버지는 무사히 제사를 지냈을까요?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요한 1,29) 오늘 복음은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님에 대한 세례자 요한의 증언입니다. 그분은 요한보다 “앞서신 분”이며(요한 1,30)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자(요한 1,33)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요한 1,34). 요한은 이토록 신비 롭고 특별하고 은한 분, 예수님을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란 상징적 표현으로 요약해버립니다. 어째서일까요?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해방되던 날에 ‘어린양’은 이스라엘의 맏아들을 대신해 죽었습니다(탈출 12장 참조). 요한 은 “하느님의 어린양”이란 말로 예수님이 바로 세상을 위한 대속(代贖)의 희생 제물임을 밝힙니다. “하느님의 어린 양”은 이사야서의 ‘주님의 종’을 떠올리게도 합니다. 그 종 은 하느님께서 마음에 들어 선택한 종으로, 민족들에게 공정을 펼칠 종이자 만민의 빛이 될 자입니다(이사 42장 참조). 동시에 그는 ‘고난 받을 종’입니다. 입 한 번 열지 않고 온갖 굴욕을 참아 받으며,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억울 한 재판을 받고 죽어갈 종입니다(이사 53장 참조).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하실 거란다.”(창세 22,8) 아브라함 과 이사악을 돌보신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마련하신 ‘어 린양’이 있습니다. 예수님입니다. 그분 예수님께서 내 죄를, 우리 죄를, 세상의 죄를 없애시려 당신을 내어주십니 다. 흠도 티도 없는 그 어린양으로 인해 우리는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 앞에 섭니다. “이 아드님 안에서 우리는 속량 을, 곧 죄의 용서를 받습니다.”(콜로 1,14)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이준신부-
가끔 고해소에 들어오셔서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시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만나게 됩니다. 저 역시 한참을 기다리다가 끝까지 아무런 말씀이 없으시면 먼저 묻습니다. “어르신 죄를 고백하셔야지요.” 이 물음에 이런 대답을 자주 듣습니다. “사는 게 죕니다.” 사람이 살아온 시간이 길면 길수록 지은 죄도 많아지나 봅니다. 이제 40년 남짓 살아온 저도 느끼고 살아갑니다. 오늘 복음 말씀 속 요한의 외침처럼 예수님은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 양”이시기에 이것을 깨달은 사람들 가운데 죄가 많은 사람일수록 예수님이 간절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요. 저도 그렇습니다. 죄를 좀 지으면 기도가 더 간절해지거든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외국의 많은 성당에 가보아도 성당 의자를 지키고 계시는 분들은 대부분 어르신이심을 보게 됩니다. 세월의 흐름에 의도하였던 혹은 의도하지 않았던 죄는 쌓이고 쌓여 예수님 을 더욱 간절하게 찾게 되나 봅니다. 이 글을 읽고 계신 거의 대부분의 분들은 오늘 복음에서 요한이 이야기한 주님께서 주시는 “성령의 세례” 를 받으신 분들이십니다. 그리하여 오늘 제2독서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분들이시지요. 그런 우리는 제1독서 이사야 예언자가 이야기한 모태에서부터 선별된 “주님의 종”이신 예수님께서 하신 것처럼, 하느님의 “구원이 땅끝까지 다다르도록”, “민족들의 빛”으로 삶을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주님의 빛을 가로막는 “죄”의 그늘 아래 자주 머무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기에 우리 주님은 어쩔 수 없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분으로 오셨어야 만 했나 봅니다.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셨던 많은 성인의 삶에도 죄의 얼룩 이 진하게 남아 있음을 보게 됩니다. 하지만 그분들의 삶의 여정 안에서 그분들이 지었던 죄의 크기보다 하느님 자비의 크기가 훨씬 컸음을 보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의 삶 안에서도 반드시 그렇게 해주실 것입니다.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우리는 세례자 요한에게서 무엇을 배우는가?
-송창현신부-
예수님 당시의 유다인들은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 었습니다. 하느님께서 결정적인 시기에 보내주시리라 약속하신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그런 와중에 세례자 요한이 나타났습니다. 하느님께서 요한에게 맡기신 사명은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는 일이었습니다. 요한은 이러한 자신의 사명에 충실합 니다. 그를 따르던 제자들도 있었고 그의 선포와 세 례가 사람들의 호응을 얻기도 했지만, 그는 결코 자 신을 메시아로 주장하지 않고 오실 메시아의 길을 준비하는 일에만 충실합니다.
우리는 흔히 세례자 요한에게서 겸손을 배우려 합 니다. 여기서 겸손이란 억지로 자신을 비하시키는 태도가 아닙니다. 겸손은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 을 정확히 파악하고, 거기에 맞게 자신을 자리매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요한에게서 배우려는 태도 가 바로 이것입니다. 요한은 자신의 존재 이유와 사 명을 정확히 파악했습니다. 그는 메시아의 선구자로 서의 자기 자신을 잘 알고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그 사명에 온 힘을 쏟습니다. 그래서 메시아이신 예수 님과의 관계에서 자신을 올바로 자리매김합니다. 요 한은 메시아를 메시아로 알아 모시고, 그분과의 관 계에서 자신을 어디에 놓을지를 잘 알았습니다.
우리는 자신을 정확히 파악해야 합니다. 하느님 앞에 있는 우리 자신을,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는 우리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렇게 정확하게 자신을 파악하고 인정할 때, 하느 님 앞에서 그리고 다른 사람들 가운데서 우리 자신 을 올바로 자리매김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정확하게 자신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 우리는 허상에 매달리 게 됩니다. 허상은 착각을 낳고 착각은 욕심을 낳게 됩니다. 허상은 실체가 없는 것이기에, 허상에 기초 한 자기 파악은 하느님과 사람들 가운데서 자신의 자리가 아닌 더 높고 화려해 보이는 자리를 탐하게 합니다. 잘못된 자기 파악이 잘못된 자리매김을 낳 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 자신과 하느님 사이의 올 바른 관계가 깨어지고,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과 의 관계가 왜곡되는 것입니다.
정확하게 자기를 파악하고 자리매김하는 사람은 세상을 당당하게 살 수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느님과 사람들 앞에서 바로 설 수가 있습니다. 그 렇게 사는 것이 바로 하느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 들과도 올바른 관계를 가지는 삶이고, 그것이 바로 올바른 삶의 길입니다.
오늘 우리는 세례자 요한을 만납니다. 우리는 그에 게서, 올바로 자신을 파악하고 자신을 자리매김하 는 삶의 태도를 배울 수 있습니다. 이런 삶의 기본 태도를 가진 사람들이 더 많이 필요한 시대를 우리 는 살고 있습니다

빛, 마음의 거리를 좁혀준다.
-이학률신부-
주님 성탄의 여운이 아직 가시지 않은 오늘 연중 2주일 미사전례의 말씀들은, 우리들 곁에 오신 메시 아 주님을 소개하는데, 첫째 독서를 따르면 그분은 “민족들의 빛”(이사 49,5)이시요, 복음에서는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요한 1,29)이십니다.
내게 오신 구원자 주님이 민족들의 빛,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라는 표상이 가지고 있는 구체적인 의미는, 오늘 전례말씀을 따르면, 자신을 사랑하는 하느님을 버리고 떠난 이스라엘을 다 시 하느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고,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세상 모든 민족을 그분께로 ‘모여들게’ 하 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구원은, 오늘 복음말씀에 비추어보면, 나와 너 안에 있는 죄로의 경향과 힘 을 극복하는 것으로써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이루어지는 구원의 실제 모습은, 주 님 구원에 참여한 사람들이 함께 예수님을 구세주로 고백하며 그분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1코린 1,2 참 조) 모습에서 조금 더 구체화되어 나타납니다.
나와 우리를 구원하는 메시아의 구원이, 우리들을 하느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고, 모여들게 하는 것이라면, ‘세상의 죄’는 사람들이 하느님께 등을 돌리게 하는 것이고, 그 결과로 그분과 멀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나와 우리들 안에 하느님께 대한 마음의 거리가 생겼다는 뜻이지요. 뿐만 아니라 내 자신과 세상 모든 사람들, 심지어 모든 피조물과의 사이에도 분열로 넘을 수 없는 벽으로 가로막히면서 생명이 오가는 친교는 제한을 받게 됩니다. 우리는 이런 분열과 벽, 거리감을 내 안에서 또 세상 어디에서나 항상 직면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또한 그로인하여 괴로워하고 고통을 당하 고 있습니다.
내 안에, 나와 너 사이에, 더 나아가 나와 자연과의 사이에 가로놓인 벽이나 장애물이 보이십니까? 바로 그곳에 주님께서 찾아오십니다. 그 벽을 치우고 거리를 좁히는 구원의 빛으로서.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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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청춘으로 돌아간다면 무엇을 하고 싶습니까?”
이 질문에 그녀는 단호하게 대답했습니다.
“내가 여기까지 오는데 치른 값이 얼마인데요. 나는 다시 그것을 되풀이하고 싶지 않아요. 나는 지금이 좋습니다. 지금 이 나이를 누리기 위해 지금까지 살아온 것입니다.”
많은 이가 과거로 다시 돌아가기를 희망합니다. 그러면 더욱더 잘 살 것만 같고 지금의 후회를 만들지 않게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작가 펄 벅의 말처럼 지금까지 치른 값을 생각한다면 다시 돌아가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있을까 싶습니다.
지금을 살기 위해 지금까지 살아왔던 시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니 지금이 내 인생에서 최고의 시간입니다. 내일은 오늘보다 더 나은, 최고의 시간인 ‘또 다른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더군다나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도 과거에 연연하면서 후회하는 삶이 아닌, 우리에게 다가올 하느님 나라를 희망하면서 지금, 이 순간을 최고로 만드는 삶이었습니다. 그래서 죄 속에서 힘들어하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완벽한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강생하셨던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오늘 세례자 요한이 증언하는 ‘하느님의 어린양’을 통해 우리는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제단에 봉헌되는 짐승들은 다섯 종류였습니다. 즉, 황소, 양, 염소, 산비둘기, 집비둘기입니다. 이 중에서 특별히 양은 숫양, 암양 그리고 어린양으로 구분합니다. 그렇다면 이 어린양은 어떤 때 봉헌될까요? 바로 일일 번제물을 가리킵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셔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매일매일 번제물로 우리 대신 봉헌되시는 어린양이라는 것을 말이지요. 그래서 이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고,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주님의 일에 충실할 것을 당부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면서, 주님께서 약속하신 하느님 나라를 희망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주님과 함께 하는 하느님 나라에 우리 모두 들어가야 합니다. 이 나라에 대한 희망을 간직하는 사람은 결코 지금을 함부로 살 수 없을 것입니다.


어떤 일을 처음 시작할 때, 의욕과 함께 행복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행복도가 조금씩 떨어지게 되지요.
예전의 기억 하나를 떠올려 봅니다. 어떤 청년이 이런 문자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신부님, 저 지금 너무 행복해요. 이번에 임용고시에 붙었어요.’
얼마나 기뻤으면 제게 문자 메시지까지 보냈을까 싶었습니다. 휴대전화 너머로 정말로 행복해한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지요. 하지만 그 행복은 오래가지 않은 것 같습니다. 몇 달 뒤에 이런 문자 메시지를 받게 된 것입니다.
‘신부님, 너무 힘들어요. 아이들이 너무 말을 안 들어요. 이러려고 선생이 되었나 싶어요.’
이렇게 시작하는 문자 메시지는 자신이 행복하지 못한 이유를 계속해서 담고 있었습니다. 행복이 왜 불과 몇 달 만에 사라지고, 고통과 시련의 삶이 된 것일까요?
설렘은 인간을 행복하게 만듭니다. 임용고시 합격으로 선생님이 되었다는 설렘을 갖게 되었고 그래서 행복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학생들과 부대끼면서 설렘이 사라진 것이지요. 설렘이 사라지면 희망이 없어지고 행복하지 않습니다.
설렘의 시간을 만들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희망을 놓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은 어떤 설렘으로 내 삶을 채우시겠습니까?

성령은 하느님의 피다
-전삼용신부-
스웨덴 한 시골마을에도 평범한 하루가 시작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버스를 타고 출근길에 올랐습니다. 버스는 사람들을 가득 싣고 비탈길을 조심스럽게 달리고 있었습니다. 운전기사는 브레이크가 말을 듣지 않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커브가 5개나 남았다는 표지판이 보였습니다. 운전기사는 능숙한 솜씨로 커브를 틀었고 이제 곧 오르막길이었습니다.
그런데 길 한 가운에서 아이들이 뛰어놀고 있었습니다. 버스 기사는 경적을 울렸고 아이들은 재빨리 길가로 피했습니다. 한 아이만이 신발이 벗겨진 채 버스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운전기사는 아이를 피하던지 절벽으로 차를 몰아붙이던지 결정을 내려야했습니다.
결국 아이를 희생시키기로 결심을 하였고 아이는 그 자리에서 숨지고 말았습니다. 비탈에 차를 세워둔 버스 기사는 황급히 뛰어내려 아이에게로 달려가서 아이를 껴안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버스에 탔던 사람들은 운전기사를 탓했습니다. 운전 실력도 없고 인정사정도 없는 인간이라며 심지어는 고발하겠다고 소리를 질러댔습니다. 버스 기사는 눈물을 흘릴 뿐이었습니다. 버스에 함께 탔던 한 노파가 말했습니다.
“그럼, 어쩌겠습니까? 우리가 다 죽는 편이 낫습니까? 저 운전기사는 우리 대신 자신의 아들의 죽음을 택한 것입니다.”
그제야 운전기사가 아이에게 무엇이라고 말하며 흐느끼는지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아들아, 내 아들아, 아빠가 미안하다! 흑흑!”
누구도 더 이상 말을 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세례’에 관한 내용입니다. 먼저 ‘세례자 요한’이 먼저 등장합니다. 그도 세례를 주고 있었습니다. 세례는 물로 씻는 정결례가 발전한 형태라 볼 수 있습니다. 죄를 없애는 것이 세례입니다. 요한은 “하느님의 어린양”을 소개시켜 줍니다. 요한의 세례는 참 세례를 주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을 볼 수 있게 하는 씻음인 것입니다.
요한에 따르면 하느님의 어린양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은 성령을 받은 분이셔야만 합니다. 어떤 인간이든 받은 것만을 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물로 세례를 주라고 요한을 보내신 분께서 “성령이 내려와 어떤 분 위에 머무르는 것을 네가 볼 터인데, 바로 그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다.”라고 알려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례를 통해 씻겨야 하는 인간의 죄는 무엇일까요? 새로 태어나기 위해 벗어버려야 하는 인간의 옛 본성일 수밖에 없습니다. 아기가 부모의 사랑을 받고 부모를 알게 되면 기어 다니고 싶은 본성을 벗어버리고 걷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만약 두 발로 걷게 된다면 옛 본성에서 깨끗해진 것입니다. 이를 위해 부모의 희생이 요구됩니다. 부모의 희생이 아이에게 믿음을 주어 옛 본성을 정화한 것입니다. 이것이 세례와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인간으로 살고 싶은 본성을 벗어버리지 못하면 하느님의 본성으로 살 수가 없습니다. 성령께서는 바로 인간의 본성을 벗겨버리는 힘이십니다. 그리고 그 성령은 하느님의 희생일 수밖에 없습니다.
일본에서 사무라이가 되고 싶은 천민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천민은 사무라이가 될 수 없었습니다. 그 아이의 어머니는 성을 짓는 성주에게 가서 자신이 그 기둥에 들어갈 테니 자신의 아들을 사무라이 교육을 시켜달라고 했습니다. 성을 지을 때 기둥에 산 사람을 넣고 지으면 그 성이 허물어지지 않는다는 전설이 있다고 합니다. 아이는 그 성에서 사무라이 교육을 받았고 귀족 아이들의 괴롭힘에 도망가고 싶을 때마다 어머니가 들어가 계신 기둥을 부여잡고 울었습니다. 어머니의 죽음에서 나오는 그 피는 도망치고 싶은 그 아이의 자아를 죽여 깨끗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아이는 사무라이로 새로 태어납니다.
이전 본성을 죽일 수 있는 힘은 ‘피’밖에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도 인간의 본성을 씻어주시기 위해 피를 흘리셔야 했습니다. 교회는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할 때 홍해를 건너는 것을 ‘세례’라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바다를 왜 ‘홍해’, 즉 ‘붉은 바다’라고 하였을까요? 옛 본성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느님의 어린양의 ‘피’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바닷물은 십자가의 신비를 상징하고” 그 물에 세례를 받는 것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그리스도의 죽음에 일치함을 의미한다.”(「가톨릭교회교리서」, 1220항)고 가르칩니다. 누구든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피로 이루어진 그 붉은 바다를 건너면 옛 본성이 그 피 속에 수장되고 그리스도와 같은 본성을 지닌 인간으로 새로 태어납니다.
하늘나라의 백성은 그리스도의 피로 자신들의 옷을 깨끗이 빤 정결한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묵시 7,14 참조). 예수님은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요한 3,5)고 하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냥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다.’라고도 말합니다(1코린 12,13 참조). 그래서 ‘그리스도의 피’로 세례를 받는다고 말하는 것이나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다고 말하는 것이나 다를 것이 없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피와 성령의 작용으로 교회 안에서 죄의 용서가 이루어지도록 하늘 나라의 열쇠를 받았습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981항)라고 말합니다. 하느님의 피가 곧 성령이고 그 성령으로 인간의 옛 본성인 죄가 씻기는 것입니다.
고해성사를 할 때 성령으로 죄가 사해집니다. 그 성령이 바로 그리스도의 피임을 안다면 비로소 죄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고해성사 할 때마다 자신의 자녀의 팔을 하나씩 잘라야 한다면 죄를 지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죄 사함의 값이 그리스도의 목숨 값임을 믿어야합니다. 그래야만 죄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성체가 그리스도의 몸임을 믿어야만 그 효과를 발휘하듯 성령도 그리스도의 피임을 믿어야만 우리가 정화됩니다. 기도를 통해 오시는 성령의 은총이 하느님의 피 흘리심임을 믿으며 “아멘!”합시다. 그리스도에게서 나오는 물과 피와 성령은 하나로 모아집니다(1요한 5,8 참조).

-조재형신부-
카렌 암스트롱의 ‘축의 시대’를 읽고 있습니다. 종교, 윤리, 철학, 영성의 기틀을 마련한 시대가 있었고, 현자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현자들은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난 목적이 무엇인지를 고민했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목적을 알았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성찰했습니다. 그들의 고민과 성찰은 종교가 되었고, 윤리가 되었고, 철학이 되었고, 영성이 되었습니다. 인공지능, 4차 산업혁명, 인터넷의 시대에도 현자들의 고민과 성찰은 여전히 우리에게 어둠 속의 한 줄기 빛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머무는 지구촌이 당면한 문제는 무엇일까요?
난민(難民)의 문제입니다. 전쟁과 폭력으로 정든 고향을 떠나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독재자의 폭압을 피해서 자유를 찾아 떠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난민이 편히 쉴 수 있는 자리가 필요합니다. 난민의 어린이들이 교육받을 수 있도록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난민이 배고프지 않고 먹을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지금도 배고픔과 추위에 죽어가는 난민이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사랑받는 존재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생태(生態)와 환경(環境)의 문제입니다. 이제 익숙해진 ‘지구 온난화’는 기상 이변의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너무 많은 것들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숲이 사라지고, 숲에서 살던 생명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공기가 오염되고, 물이 오염되고 있습니다. 우리의 선조들이 살았고, 우리의 후손들이 살아야 할 지구입니다. 자연과 우리가 하나라는 의식의 전환이 있어야 합니다.
빈부의 격차(隔差)입니다. 현재 세계 인구 중 30억은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한 채 하루에 1~2달러의 돈으로 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들에 사는 운 좋은 이들은 평균 수만 달러의 연 소득을 누리면서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빈부의 격차가 커지는 세계는 안전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습니다. 21세기 최대의 도전인 동시에 과제는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이 부와 기회, 책임을 나누는 일에서 시작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오늘의 성서 말씀에서 우리는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제1 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의 구원이 땅 끝까지 다다르도록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 저는 큰 모임에서 정의를 선포하나이다.” 땅 끝까지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정의가 이루어지도록 하라고 합니다. 출애굽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광야에서 헤매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셨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난민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는 겁니다. 2013년 교황이 되신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가장 먼저 찾아갔던 곳도 난민이 머무는 람페두사 섬이었습니다. 2019년에도 교황님은 난민을 바티칸으로 초청해서 성탄의 기쁨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저분은, ‘내 뒤에 한 분이 오시는데,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 하고 내가 전에 말한 분이시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모든 권한과 능력을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 영광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점점 커지셔야 하고, 나는 더욱 작아져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자연과 생태를 그런 자세로 대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보시니 좋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 모든 창조물은 우리의 형제요, 자매입니다. 그러기에 소중하게 대해야 합니다.
오늘 제2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 시대에 하느님의 평화를 주소서.” 하느님의 평화는 무엇입니까? 다시는 배고픔 때문에 눈물 흘리지 않는 평화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측은한 마음이 드셔서 오천 명을 배불리 먹게 하셨습니다. 가장 가난하고, 가장 굶주리고, 가장 헐벗고, 가장 병든 사람에게 해 준 것이 곧 나에게 해 준 거라고 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여러분에게 평화를 빕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불안, 근심, 걱정에서 벗어나는 것이 평화입니다.
우리는 미사 때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이라고 고백합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고백을 우리의 삶과 우리의 행동으로 보여주었으면 합니다. 우리가 모두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마음을 비추는 거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모습을 보고, 우리의 삶을 보고 세상 사람들이 지친 삶의 일상에서 위로를 얻고 희망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의 어린양
-반영억신부-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해 주십니다. 그 사랑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변함이 없으십니다. 그분의 사랑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드러났습니다. 이 시간 사랑이신 주님의 희생에 관해 묵상하는 가운데 은총을 입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한은 예수님께서 오시는 것을 보고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하고 말하였습니다. 어린양에 관해 생각해 봅니다.
첫째로 구약성경에서 보면, 어린양은 하느님께 바치는 희생제사 때 제물로 사용된 동물입니다. 제물로서의 어린양은 사람들의 죄를 대신하기 위해 제단에 올려졌고, 그때 제물의 피는 속죄의 수단으로 여겨졌습니다. 죄의 용서를 청한 것입니다.
둘째는 파스카의 어린양(탈출12,3-13)이 있는데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노예살이를 하고 있을 때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보내어 그들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이때 이집트 왕 파라오가 완고하게 말을 듣지 않자 하느님은 모세를 통해 열 가지 재앙을 내리시는데 마지막 재앙이 이집트에 있는 모든 맏이의 죽음이었습니다.
“왕좌에 앉은 파라오의 맏아들부터 맺돌 앞에 앉은 여종의 맏아들까지 이집트 땅의 맏아들과 짐승의 맏배들이 모조리 죽을 것이다.”(탈출11,5)
이때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별하여 살리기 위하여 한 집에 한 마리씩 새끼 양을 잡아 제사 지내고 그 피를 집의 좌우 문설주와 문 상인방에 바르도록 하여 이스라엘이 죽음의 재앙이라는 심판을 면하고 노예생활에서 자유롭게 되도록 해 주셨습니다. 그때부터 이스라엘에게 어린양은 구원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지금도 “건너뛰다.”라는 의미의 파스카 축제가 지속되고 이스라엘의 백성들을 살리기 위해 대신 죽은 희생양을 파스카의 어린양이라고 합니다.
셋째는 어린양의 모습으로 주님의 종 (“학대받고 천대받았지만 그는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털 깍는 사람 앞에 잠자코 서 있는 어미 양처럼 그는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이사53,7))을 얘기합니다. 여기서는 다른 이들을 대신하여 고난을 받음으로써 그들에게 해방을 가져다주실 주님의 종이 도살자의 칼 아래 죽음을 당하는 어린 양의 모습으로 비유됩니다. 오늘 1독서에서 예언되신 주님의 종이 바로 그분입니다. “너는 나의 종이다. 이스라엘아, 너에게서 내 영광이 드러나리라....나의 구원이 땅끝까지 다다르도록,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이사49,3.6)
신약성경에서는 예수님을 하느님의 어린양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분의 죽음이 지닌 속죄적인 성격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대신하는 속죄의 양이자 파스카의 양, 곧 희생양이 되셨습니다. 인간의 죄를 없애시는 참된 어린양이십니다. 예수님은 사실 하느님께서 우리들의 죄를 씻기 위한 속죄의 제물로 세상에 보내신 분이십니다.(1요한4,10)
미사 안에서도 우리는 하느님의 어린양을 찾습니다. 평화의 인사를 나누고 사제가 축성된 빵을 나누는 동안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평화를 주소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달라는 간절한 청원과 평화를 갈망하는 기도를 합니다. 그리고 성체를 영하기 직전 사제는 성체를 높이 들어 외칩니다.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시니, 이 성찬에 초대받은 이는 복되도다.” 그리고 우리는 응답합니다.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가 곧 나으리이다.”
이 말씀 안에 담긴 의미를 새롭게 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희생을 통한 죄의 용서와 평화의 선물에 감사와 찬미를 드리며 영성체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희생의 삶을 오늘 여기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신 속죄와 희생양이 되신 어린양을 모시는 우리의 행위에는 우리도 어린양이 되겠다는 의지가 담겨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양식을 받아 모셔도 효과가 없는 것은 하느님을 직접 모신다는 중대한 사실에 별로 주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그러므로 “준비된 마음 없이 습관적으로 성체를 모시는 것이 아니라 내적으로 깊은 신심을 가지고 모시도록 하십시오.”
어떻게 보면 우리를 위해 밥으로 오신 예수님처럼 우리도 이웃의 밥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너는 내 밥이야! ’하면서 남을 무시하고 깔보며 내 뜻대로 움직이려 합니다. 내가 “네 밥이 되어 줄께!”한다면 그야말로 바보천치가 되는 세상입니다. 자기 이익과 권리만 주장하고 남의 권리는 아랑곳하지 않는 이기적인 마음이 팽배해 있습니다. 이웃을 위해 양보하고 희생을 감수하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똑똑한 사람은 넘쳐나고 갈수록 각박하고 메마른 사회가 되어갑니다. 참고 인내하며 기다려 주는 마음을 잃어버린 지 오래입니다. 지금이야말로 하느님의 어린양의 삶이 필요합니다.
예수의 성녀 데레사는 “주님, 저는 황홀한 환시보다도 숨은 희생의 단조로움을 선택하렵니다. 희생과 사랑으로 작은 핀 한 개를 줍는 것이 한 영혼을 구하고 회개시킬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라고 기도하였습니다. 희생은 핀 한 개를 줍는 아주 작은 것에서 시작합니다. 그리고 희생은 주님 사랑의 징표입니다. 지금 삶의 자리에서 다가오는 희생의 기회를 놓치지 않기 바랍니다.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주님만이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그분의 삶을 따르는 길만이 세상을 바로잡아 줄 수 있음을 믿고 희생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 목숨을 내 놓으신 그 사실로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 놓아야 합니다.”(1요한3,16)
어린양의 정신을 일깨우기 위해서 자주 주님 앞에 무릎 굻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거룩한 구원자이시며 희생제물이 되신 주님은 살아있는 성교회의 심장인 감실 안의 성체로 현존”(교황 바오로 6세)하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결코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는 하루 하루되시기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은 바오로 사도를 봅니다.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 있으려는 것입니다. 율법에서 오는 나의 의로움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로움, 곧 믿음을 바탕으로 하느님에게서 오는 의로움을 지니고 있으려는 것입니다.”(필리3,8-9)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또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는 향기로운 예물과 제물로 내 놓으신 것처럼, 여러분도 사랑 안에서 살아가십시오.”(에페5,2)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29)
-이영근신부-
오늘은 연중 제2주일입니다. 오늘 <복음>에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증언합니다. 곧 예수님이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이심을 드러내는 동시에,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선언합니다.
먼저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29)
미사 중에는 ‘하느님의 어린양’이란 표현이 다섯 번 나옵니다. <대영광송>에 한 번나오고, <영성체 예식>에서 네 번 나옵니다. 곧 <대영광송>에서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와 평화 예식이 끝나고 사제가 축성된 빵을 나눌 때 신자들은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두 번).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평화를 주소서.”라고 기도하며, 이어서 사제는 성체를 높이 들어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시니 이 성찬에 초대받은 이는 복되도다.”라고 외칩니다. 곧 주님께서는 세상의 죄인들을 쓸어 없애 버리는 분이라고 하지 않고, 죄를 없애 버리는 분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면서 우리 또한 예수님처럼 세상의 죄를 없애고, 평화를 주는 어린양으로서 살겠다는 결심을 다집니다.
<성경>에서, 우선 ‘어린양’은 네 가지 의미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첫째>. 하느님께서 준비한 제물로서의 ‘어린양’(야훼이레: 야훼께서 준비하신다)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데리고 모리야 산으로 갔을 때, 이사악이 "아버지, 제사에 쓸 나무와 불은 있는데, 제사에 쓸 어린 양은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묻자, 아브라함은 "아들아, 그 어린 양에 대해서는 하느님께서 준비하시리라."라고 합니다. 곧 하느님께서 준비한 참된 어린양은 예수님입니다.
<둘째>. 파스카의 ‘어린양’입니다(탈출 12,1-27;레위 23,5-6;신명 16,1-7). 하느님은 모세를 통해 죽음의 재앙을 내리는데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게 하셨습니다. 이날 저녁 이스라엘 백성은 어린 양의 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의 맏이들을 살리기 위해 대신 죽은 ‘희생양’을 파스카의 어린양이라고 부릅니다.
<셋째>. 대신 죽는 속죄의 희생양으로서의 ‘어린양’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를 탈출하여 가나안 땅으로 이동할 때 그들은 40여 년 동안 사막을 헤매면서 양떼와 가축을 이끌고 천막을 치면서 옮겨 다녔습니다. 그러다가 밤이 되면 천막 주위에 사나운 맹수들이 다가 와서 으르렁거리며 위협하며 괴롭혔는데 그 때마다 사람들은 염소나 양을 한두 마리 맹수들에게 보내줍니다. 그 때 맹수들에게 보내지는 양이 '아자젤'이라 불리던 ‘속죄양’입니다. 그 후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정착한 다음, 대속사상이 나타나게 되고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죽는 희생양 제의가 생겨나게 되었고, 일 년에 한 차례(매년 7월 10일)씩 지난 일 년 동안 지은 모든 죄악을 용서받기 위해 속죄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 때 희생양 두 마리를 준비하여 한 마리는 하느님께 번제로 불살라 드리고, 다른 한 마리는 대제사장이 그 위에 자기의 손을 얹고 자기와 온 민족의 죄를 자복한 후에 광야로 내어 보냈습니다. 이 둘은 인간의 죄를 대신 속죄하기 위해 죽었습니다.
4. 승리하신 천상의 ‘어린양’이시다(묵시 5장). 어린 양은 목자로서, 모든 믿는 이들을 하느님의 축복으로 인도하실 분이시다.
오늘 우리는 <제1독서>에서 ‘야훼의 종’의 둘째노래를 들었습니다. 많은 학자들과 선지자들은 이 고난 받는 야훼의 종이 도대체 누구인지? 개인적인 한 인물인지? 아니면 하나의 집단인지? 남은 자들(렘난트)의 무리인지? 야훼의 가난한 사람(아나빔) 인지? 여러 각도에서 분석하고, 신진 인물이 등장할 때마다 그에게 재조명해 보았지만, 여전히 불가사의한 수수께끼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마침내 세례자 요한에 의해, 그 정체가 드러나게 됩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하느님의 어린양”이란 표상을 통해서 이를 밝혀줍니다. 이 표상에는 ‘야훼의 종’과 ‘대속의 희생양’의 두 가지 표상이 동시에 들어있습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이사> 53,7.12에 나오는 ‘야훼의 종’임과 동시에, <출애> 12장에 나오는 ‘파스카의 어린 양’인 구약성경 곳곳에 나오는 희생양입니다. 그러니까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는 예수님에 의해 “야훼의 고난 받는 종으로서의 어린양”으로 성취되고 완성됩니다.
특히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Agnus Dei, Qui tolis peccata mundi)라는 표현에서 “세상의 죄”라는 말에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세상’이란 물질적 공간적 그릇이 아니고, 온 세상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곧 이스라엘 사람들만이 아니라 이방 사람들도 포함하며, 옛날에 있던 사람들만이 아니라 오늘날 사는 사람들도 장차 이 세상에 태어날 사람까지도 포함하는 모든 사람들, 곧 전 인류를 일컫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세상의 죄’는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악들, 동서고금의 전 세계 모든 인류의 죄들을 포괄합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는 전 인류의 죄를 대속하는 속죄의 어린양이심을 드러내줍니다. 그리고 세례자 요한은 그분이 바로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증언합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의 삶 또한 세상의 죄를 짊어지고 어린양으로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아멘.
- 오늘 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29)
주님!
자신만이 아니라 타인을 위해서도, 세상을 위해서도 십자가를 질 줄을 알게 하소서.
허물을 뒤집어쓰고도 원망하지도 억울해하지도 않는 오히려 자신의 내어 주고 피 흘려 구원하는 제물의 삶이 되게 하소서.
당신께 드리는 사랑의 산 제물이 되게 하소서. 아멘.

하느님의 어린양
-송영진신부-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저분은, ‘내 뒤에 한 분이
오시는데,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 하고 내가 전에
말한 분이시다.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준 것은,
저분께서 이스라엘에 알려지시게 하려는 것이었다(요한 1,29-31).”
“나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물로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그분께서 나에게 일러 주셨다. ‘성령이 내려와 어떤 분 위에 머무르는 것을 네가
볼 터인데, 바로 그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다.’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요한 1,32-34).”
이 말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습니다.
1) 예수님은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메시아)이시고,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다.
2)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은 하느님께서 직접 계시하신 진리이다.
여기서 ‘하느님의 어린양’이라는 표현은, 탈출기에서, 이집트에 내린
열 번째 재앙 때에 이스라엘 백성 대신에 목숨을 바친
‘파스카의 어린양’과(탈출 12장), 이사야서에서, 백성의 죗값을 대신 치르기 위해서
속죄 제물로 바쳐진 ‘어린양’(이사 53장)이 합해진 표현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라는 말은,
“예수님은 당신의 목숨으로 사람들의 죗값을 대신 치르시고,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메시아” 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이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의 ‘죄’ 자체를
없애신다는 뜻은 아니고, 죄로 인한 죽음에서 사람들을 구원하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어도 인간 세상의 죄는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아직도 여전히 죄를 짓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 덕분에 죄에서 벗어나는 길을 알게 되었고,
구원을 받는 방법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심으로써 ‘구원의 길’이 열린 것입니다.
또 이 말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구원을 받으려면, 믿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회개를 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첫 선포는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입니다(마태 4,17).
‘구원’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이고, ‘회개’는 우리가 해야 하는 일입니다.
(회개하지 않는 것은 구원받기를 거부하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당신 자신을 속죄 제물로 바치신 일은,
우리를 대신해서 회개하신 일이 아니고,
죄에서 비롯된 죽음에서 우리를 구해 주신 일입니다.
회개는 아무도 대신할 수 없는 일, 죄인이 스스로 해야 하는 일입니다.
(고해성사는 남이 대신 볼 수 없습니다.
성찰, 통회, 정개, 고백을 남이 대신 할 수는 없습니다.
그 일들은 모두 죄를 지은 사람 자신이 스스로 해야 합니다.
그러나 보속은 남이 대신 해 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연옥 영혼을 위해서 기도하고 선행을 실천하는 일 등은
연옥 영혼이 해야 할 보속을 대신 해 주는 일이 됩니다.
살아 있는 사람을 위해서도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어떻든 회개는 죄 지은 사람 자신이 해야 합니다.)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어서 ‘사는 것’은 ‘내가’ 직접 스스로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사람을 살리시는 이야기들은 그것을 잘 나타냅니다.
죽은 소녀를 살리실 때, 예수님께서는 그 소녀의 손을 잡으시고
“탈리타 쿰!”이라고 말씀하시면서 그 소녀를 살리셨지만,
일어서는 일은 그 소녀 자신이 했습니다(마르 6,41-42).
‘나인’이라는 고을에서 어떤 과부의 외아들을 살리실 때에도
예수님께서는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를 살리셨지만,
일어나 앉는 것은 그 젊은이 자신이 스스로 했습니다(루카 7,14-15).
죽은 라자로를 살리신 이야기에는 그것이 더욱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무덤 밖에서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 라고 외치셨을 뿐이고,
무덤에서 일어나서 무덤 밖으로 걸어 나온 일은
라자로 자신이 했습니다(요한 11,43-44).
살기를 원하고, 살려고 노력하고, 살아가는 것은 ‘나 자신’이 스스로 해야 합니다.
그 모든 것을 남이 대신 해 줄 수가 없습니다.
신앙생활은 ‘내가’ 직접 해야 합니다.
‘남의 덕’으로 나의 신앙생활이 면제되지는 않습니다.
식구들이 성당에 가서 미사 참례를 한 것으로
나의 미사 참례가 면제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 내가 사랑하는 식구들의 회개와 구원을 위해서
열심히 기도하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넓게 생각해서, “우리가 세상 죄인들의 회개와 구원을 위해서
열심히 기도하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라고 물을 수도 있습니다.)
그 기도가 무의미한 일로, 즉 헛된 일로 끝나지는 않는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신앙인들이 열심히 바치는 기도 덕분에 은총이 내려서 죄인들이 회개하고,
또 신앙생활을 하지 않던 식구들이 나의 기도로 회개하고, 변화되어서,
구원을 향해서 나아가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죄 속에서 살던 사람이 회개하고 변화되는 것은
그 사람 자신이 할 일입니다.
죄인의 회개와 구원을 위한 우리의 기도는 주님을 변화시키려는 기도가 아니라,
지금 죄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을 변화시키기 위한 기도입니다.
(우리가 바치는 기도는 죄인이 회개를 면제받도록 하기 위한 기도가 아닙니다.)
< 세례자 요한이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라는 말을 두 번이나 하면서,
하느님께서 직접 예수님에 대해서 알려 주셨다는 것을 강조한 것은,
‘예수님은 메시아’ 라는 것을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들을 실천하면
구원을 받는다는 진리는,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이라는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 없이, 또 예수님의 가르침들을 실천하지 않고,
사람이 자신의 힘만으로 구원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평생 동안 학문 연구를 하고 도를 닦고 수행을 한다고 해도,
그래서 어떤 높은 경지에 도달한다고 해도, 그것으로는 구원 받지 못합니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 라는
예수님 말씀이 바로 그런 뜻입니다.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사도 4,12).”>

그리스도의 모습과 사명
-조욱현신부-
오늘의 독서와 복음은 그리스도의 모습과 사명을 참으로 잘 드러내고 있다. 그리스도의 빛나는 신비에 우리를 참여시키고 일치시키기 위하여 그 신비를 받아들일 수 있는 ‘열린’ 마음과 정신을 갖추어야 한다. 그것은 화답송의 내용을 잘 묵상하여 나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스도의 신비는 무엇보다도 순명과 희생의 신비이다. 그분은 순한 ‘어린양’처럼 우리 모두를 위해 당신 자신을 봉헌하신다.
복음: 요한 1,29-34: 하느님의 어린양!
이 ‘어린양’은 세례자 요한의 모든 증언의 핵심이다. 이 ‘어린양’의 의미가 정확히 어떤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어떤 사람들은 과월절 어린양(탈출 12,1-28)과 연관시켜 해석하기도 하고, 매일 아침저녁으로 성전에서 행했던 어린양의 봉헌(탈출 29,38-46)과 연결시켜 생각하기도 하고, “온갖 굴욕을 받으면서도 입 한 번 열지 않고 참았으며,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가만히 서서 털을 깎이는 어미 양처럼 결코 입을 열지 않았다”(이사 53,7)는 고통 받는 야훼의 ‘종’과 관련시켜 생각하기도 한다. 요한복음에서 어린양의 의미는 이 세 가지의 의미를 다 포함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오직 한 번 희생되심으로써 결정적 ‘파스카’를 성취하여 실현시키는 ‘고통 받는 종’이시기 때문이다.
이 ‘어린양’의 사명은 바로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29절) 것이다. 여기서 ‘없애다’(희: áirein)는 말은 ‘자기의 어깨로 나르다, 짊어지다’; ‘제거하다, 없애다’의 의미가 있다. 아마 요한복음사가는 이 의미를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셨다고 본 것이다. 즉 우리의 죄를 ‘당신 어깨 위에 짊어지시어’ 그 죄를 ‘없애주심으로써’ '거룩한‘ 때를 시작케 하시고 당신 제자들에게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가르쳐 주셨다(1요한 3,5-6 참조). 또 이 내용은 ’야훼의 종‘에 관한 내용과도 일치한다. 이사야는 “그는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지고 그 죄인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였다”(이사 53,12)고 하고 있다. 이것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과 같으신‘ 그분과 같다. 그분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 당신 자신을 거저 내어주시고 단신의 겸손과 순명과 무구함을 통해 ’종‘의 사명인 구원의 사명을 이루시는 분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구원을 역사의 매순간 모든 사람을 위해 실현시키고자 하셨다. 그래서 우리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실 뿐 아니라, 우리를 당신 안에 ‘잠기게 하신다.’. 즉 성령의 세례를 베풀어주신다. 이 성령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당신 교회에 베풀어주시는 항구한 선물이다. 그러므로 이 구원의 선물들, 특히 ‘세상의 죄’를 태워버릴 성령의 선물이 우리에게 넘쳐흐르기 위해서는 ‘어린양’이 반드시 죽임을 당하셔야 한다. 그러기에 요한복음사가는 십자가 사건을 전해주고 있다. “이미 숨을 거두신 것을 보고 다리를 꺾는 대신 군인 하나가 창으로 그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자 곧 거기에서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이렇게 해서 ‘그의 뼈는 하나도 부러지지 않을 것이다’라는 성서의 말씀이 이루어졌다”(요한 19,34.36). 이 것은 과월절의 어린양(탈출 12,46)을 상기시키고 있다. 즉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희생되시어 모든 사람을 항구한 당신 성령의 선물로써 죄의 종살이에서 끊임없이 해방시켜주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라는 것이다.
제1독서: 이사 49,3.5-6: 너를 만국의 빛으로 세운다.
제1독서는 ‘야훼의 종’의 노래의 둘째 노래의 일부를 전하고 있다. 여기서 ‘야훼의 종’은 야훼께서 자기에게 맡기신 구원의 사명을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있다(5-6절). 야훼의 종의 활동은 이스라엘의 재건 뿐 아니라 땅 극변의 모든 민족들에게 이르게 된다. 즉 구원은 커다란 빛과 같이 모든 민족들로 하여금 유일하고 참되신 하느님과 그분이 보내시는 그리스도를 알게 해줄 것이다. 그 어느 때보다도 오늘날 가까이 있거나 멀리 있거나, 믿는 사람이거나 믿지 않는 사람이거나 할 것 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빛과 구원이 필요하다. 현대의 인류가 가지고 있는 인류 생존 자체에 관한 문제들만 보아도 그렇다. 해결의 실마리는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어떤 면에서 우리의 이성과 마음을 흐리게 하는 우리 안에 있는 ‘죄악’으로부터 생겨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오직 그리스도만이 이 세상을 구원하실 수 있다. 그분만이 인간의 마음으로부터 모든 악의 뿌리 즉 ‘죄’를 ‘없애실’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죄’라는 말이 단수로 씌어졌다는 것을 주목하여야 한다. 죽임을 당한 ‘어린양’이 되심으로써 이 세상으로부터 ‘없애러’ 오신 것은 어떤 구체적인 죄가 아니라, 바로 ‘죄성’ 그 자체라는 것이다. 이 같은 방법으로 그분은 또한 우리 모두가 그분의 도움으로 영신적 물질적 구원을 실현시켜 나가기 위해 추구해야할 길, 즉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사랑의 길, 순진무구함, 겸손을 가르쳐주셨다. 세례자 요한의 ‘어린양’에 대한 증언은 바로 이러한 의미가 아니었겠는가?
그리스도의 이러한 모습을 우리가 닮아 우리 자신 또한 구원을 구체적으로 세상에 전해주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이어야 할 것이다. 만국의 빛이 되신 그리스도의 모습이 우리 자신에게서도 드러날 수 있는 삶을 청하면서 이 미사를 봉헌하자.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 29)
-한상우신부-
가슴 찡한
신앙의
고백입니다.
살리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
오십니다.
매일매일
미사를 통해
하느님의 어린양을
또한 들어높입니다.
우리모두를 위한
어린양이 되십니다.
어린양처럼
누군가의 희생이
우리를 살게합니다.
하느님의
어린양은
수난과 죽음
부활로 우리를
이끕니다.
하느님의
어린양을
보며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하느님의 어린양은
뜨거운 사랑입니다.
뜨거운 사랑으로
우리 삶을 치유하여
주십니다.
죄를 없애십니다.
진정한 사랑을
실천하십니다.
우리 힘이 아니라
하느님의 어린양
어린양의 힘이십니다.
약할 때 오히려
하느님을 드러내는
강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혼자서는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어린양과 함께
살아가야 합니다.
하느님의 어린양이
앞장서시며
삶의 방향을
잡아주십니다.
하느님의 어린양을
과연 보았고
마침내 믿습니다.
이 세상을
하느님 나라로
변화시키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십니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들 안에는 예수님의 정체성과 우리의 정체성이 확연히 드러납니다.
제1독서인 이사야서 주님의 종의 둘째 노래에서는 하느님의 직접적인 증언이 들립니다.
"너는 나의 종이다 ... 너에게서 내 영광이 드러나리라"(이사 49,3).
교회는 이 "종"이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 봅니다. 주님의 종은 이스라엘을 주님께로 모여들게 하고, 주님께서 이루실 구원이 땅끝까지 다다르게 하는 사명을 지닙니다. 종은 주인의 뜻에 순종과 사랑으로 따릅니다.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이사 49,6).
예수 그리스도는 "빛"이십니다. 빛에서 나신 빛이시고,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십니다(요한 1,4-9 참조). 그분은 세상에 짙게 드리운 어둠을 물리치시고 새 빛을 선사하십니다.
복음에서는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에 대해 증언합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29).
증언은 단순한 해설 이상의 선언입니다. 게다가 증언하는 이의 공신력이 증언 내용에 무게를 더하지요. 요한은 온 이스라엘이 예언자로 인정한 존재이니 이 증언은 과연 참되고 진실합니다.
"하느님의 어린양"
우리도 매일 미사 때마다 예수님께서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어린양이시라고 고백하며 자비와 평화를 청합니다.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탈출할 때 희생된 어린양, 율법에 따라 희생제물이나 번제물로 바쳐진 어린양이고, 또 이사야서 주님의 종의 넷째 노래에서 도살장에 끌려가는 바로 그 어린양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떨어지게 하셨"(이사 53,6)지요.
"주님이 제게 상을 차려 주시니 제 술잔 넘치도록 가득하옵니다"(영성체송).
예수님께서 기꺼이 내놓으신 당신의 살과 피로 상을 차리시고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우리 앞에 놓인 잔에 넘치도록 가득 부어진 포도주는 예수님의 피이고, 또 그분과 우리의 혼인잔치에 마련된 사랑의 포도주이며 성령이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입니까?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가 그 답을 들려줍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모든 이들과 함께 성도로 부르심 받은 여러분"(1코린 1,2). 그렇습나다. 우리는 바로 이런 사람입니다!
우리 정체성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빼고서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거룩한 무리, 거룩한 제자를 가리키는 "성도"라는 말씀 안에 곧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가 새겨져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를 되짚어 보는 일은 참 행복하지요. 그런데 우리가 사랑하는 예수님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그분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존재라면, 우리의 사명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그분의 본질까지 받아들여야 합니다. 곧 어린양이신 그분처럼 되어야 합니다.
피 흘리고 죽어간 창백한 모습의 희생된 어린양을 관상합니다. 약하고 힘 없고 아무 보호장치도 없이 제단 위에 누워 있습니다. 그의 살은 세상을 풍요롭게 할 생명의 양식이 되고 그의 피는 세상을 정화하고 흥겹게 할 포도주가 됩니다.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악의와 독기 앞에서 무장해제가 된 존재입니다. 저 어린양처럼 말이지요. 하지만 자기애로 똘똘 뭉쳐 살아온 우리가 저항도 항변도 없이 침묵하며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매달리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작고 소소한 일에서라도 세상을 돌고 돌아 우리에게까지 도달한 악의와 독기가 우리에게서 더 확산되지 않고 멈출 수 있다면 세상은 한층 더 선량해지고 더 밝아지고 구원의 길도 더 확장될 것입니다. 세상의 죄를 위한 예수님의 엄청난 희생만큼은 못되지만, 보복과 앙갚음을 포기해 악과 독의 사슬을 끊어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하느님의 어린양을 닮게 됩니다.
그런데 아무리 친한 이라도 섣불리 이 선택은 강요할 수 없습니다. 다만 어린양이신 예수님과의 관계 안에서 자발적으로 받아들이고 따라야 하는 죽음이니까요.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님이 더 애틋하고 더 감미롭게 느껴진다면, 지금 그분이 함께 어린양이 되자고 부르시는 겁니다. 우리에게 남은 건 응답입니다. 주님의 종이고 어린양이신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여러분은 그래서 작은 빛이십니다. 아멘.

당신은 누구시오며, 벌레만도 못한 저는 누구이옵니까?
-김찬선신부-
http://www.ofmkorea.org/ofmhomily/308812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요한. 1,29-34)
우리는 흔히 세례자 요한에게서 겸손을 배우려 합 니다. 여기서 겸손이란 억지로 자신을 비하시키는 태도가 아닙니다. 겸손은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 을 정확히 파악하고, 거기에 맞게 자신을 자리매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요한에게서 배우려는 태도 가 바로 이것입니다. 요한은 자신의 존재 이유와 사 명을 정확히 파악했습니다. 그는 메시아의 선구자로 서의 자기 자신을 잘 알고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그 사명에 온 힘을 쏟습니다. 그래서 메시아이신 예수 님과의 관계에서 자신을 올바로 자리매김합니다. 요 한은 메시아를 메시아로 알아 모시고, 그분과의 관 계에서 자신을 어디에 놓을지를 잘 알았습니다.
우리는 자신을 정확히 파악해야 합니다. 하느님 앞에 있는 우리 자신을,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는 우리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렇게 정확하게 자신을 파악하고 인정할 때, 하느 님 앞에서 그리고 다른 사람들 가운데서 우리 자신 을 올바로 자리매김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정확하게 자신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 우리는 허상에 매달리 게 됩니다. 허상은 착각을 낳고 착각은 욕심을 낳게 됩니다. 허상은 실체가 없는 것이기에, 허상에 기초 한 자기 파악은 하느님과 사람들 가운데서 자신의 자리가 아닌 더 높고 화려해 보이는 자리를 탐하게 합니다. 잘못된 자기 파악이 잘못된 자리매김을 낳 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 자신과 하느님 사이의 올 바른 관계가 깨어지고,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과 의 관계가 왜곡되는 것입니다.
정확하게 자기를 파악하고 자리매김하는 사람은 세상을 당당하게 살 수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느님과 사람들 앞에서 바로 설 수가 있습니다. 그 렇게 사는 것이 바로 하느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 들과도 올바른 관계를 가지는 삶이고, 그것이 바로 올바른 삶의 길입니다.
오늘 우리는 세례자 요한을 만납니다. 우리는 그에 게서, 올바로 자신을 파악하고 자신을 자리매김하 는 삶의 태도를 배울 수 있습니다. 이런 삶의 기본 태도를 가진 사람들이 더 많이 필요한 시대를 우리 는 살고 있습니다
-송창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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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대지’로 노벨 문학상을 받고 세계적인 인권사회운동을 펼쳤던 펄 벅(1892~1973)의 나이가 일흔이 되었을 때, 어떤 사람이 그녀에게 물었습니다.
“다시 청춘으로 돌아간다면 무엇을 하고 싶습니까?”
이 질문에 그녀는 단호하게 대답했습니다.
“내가 여기까지 오는데 치른 값이 얼마인데요. 나는 다시 그것을 되풀이하고 싶지 않아요. 나는 지금이 좋습니다. 지금 이 나이를 누리기 위해 지금까지 살아온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셔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매일매일 번제물로 우리 대신 봉헌되시는 어린양이라는 것을 말이지요. 그래서 이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고,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주님의 일에 충실할 것을 당부하는 것입니다.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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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 한 시골마을에도 평범한 하루가 시작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버스를 타고 출근길에 올랐습니다. 버스는 사람들을 가득 싣고 비탈길을 조심스럽게 달리고 있었습니다. 운전기사는 브레이크가 말을 듣지 않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커브가 5개나 남았다는 표지판이 보였습니다. 운전기사는 능숙한 솜씨로 커브를 틀었고 이제 곧 오르막길이었습니다.
그런데 길 한 가운에서 아이들이 뛰어놀고 있었습니다. 버스 기사는 경적을 울렸고 아이들은 재빨리 길가로 피했습니다. 한 아이만이 신발이 벗겨진 채 버스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운전기사는 아이를 피하던지 절벽으로 차를 몰아붙이던지 결정을 내려야했습니다.
결국 아이를 희생시키기로 결심을 하였고 아이는 그 자리에서 숨지고 말았습니다. 비탈에 차를 세워둔 버스 기사는 황급히 뛰어내려 아이에게로 달려가서 아이를 껴안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버스에 탔던 사람들은 운전기사를 탓했습니다. 운전 실력도 없고 인정사정도 없는 인간이라며 심지어는 고발하겠다고 소리를 질러댔습니다. 버스 기사는 눈물을 흘릴 뿐이었습니다. 버스에 함께 탔던 한 노파가 말했습니다.
“그럼, 어쩌겠습니까? 우리가 다 죽는 편이 낫습니까? 저 운전기사는 우리 대신 자신의 아들의 죽음을 택한 것입니다.”
그제야 운전기사가 아이에게 무엇이라고 말하며 흐느끼는지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아들아, 내 아들아, 아빠가 미안하다! 흑흑!”
누구도 더 이상 말을 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요한에 따르면 하느님의 어린양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은 성령을 받은 분이셔야만 합니다. 어떤 인간이든 받은 것만을 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물로 세례를 주라고 요한을 보내신 분께서 “성령이 내려와 어떤 분 위에 머무르는 것을 네가 볼 터인데, 바로 그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다.”라고 알려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례를 통해 씻겨야 하는 인간의 죄는 무엇일까요? 새로 태어나기 위해 벗어버려야 하는 인간의 옛 본성일 수밖에 없습니다. 아기가 부모의 사랑을 받고 부모를 알게 되면 기어 다니고 싶은 본성을 벗어버리고 걷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만약 두 발로 걷게 된다면 옛 본성에서 깨끗해진 것입니다. 이를 위해 부모의 희생이 요구됩니다. 부모의 희생이 아이에게 믿음을 주어 옛 본성을 정화한 것입니다. 이것이 세례와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인간으로 살고 싶은 본성을 벗어버리지 못하면 하느님의 본성으로 살 수가 없습니다. 성령께서는 바로 인간의 본성을 벗겨버리는 힘이십니다. 그리고 그 성령은 하느님의 희생일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는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할 때 홍해를 건너는 것을 ‘세례’라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바다를 왜 ‘홍해’, 즉 ‘붉은 바다’라고 하였을까요? 옛 본성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느님의 어린양의 ‘피’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바닷물은 십자가의 신비를 상징하고” 그 물에 세례를 받는 것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그리스도의 죽음에 일치함을 의미한다.”(「가톨릭교회교리서」, 1220항)고 가르칩니다. 누구든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피로 이루어진 그 붉은 바다를 건너면 옛 본성이 그 피 속에 수장되고 그리스도와 같은 본성을 지닌 인간으로 새로 태어납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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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렌 암스트롱의 ‘축의 시대’를 읽고 있습니다. 종교, 윤리, 철학, 영성의 기틀을 마련한 시대가 있었고, 현자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현자들은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난 목적이 무엇인지를 고민했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목적을 알았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성찰했습니다. 그들의 고민과 성찰은 종교가 되었고, 윤리가 되었고, 철학이 되었고, 영성이 되었습니다. 인공지능, 4차 산업혁명, 인터넷의 시대에도 현자들의 고민과 성찰은 여전히 우리에게 어둠 속의 한 줄기 빛이 되고 있습니다.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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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죄를 없애시는’이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의 ‘죄’ 자체를
없애신다는 뜻은 아니고, 죄로 인한 죽음에서 사람들을 구원하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어도 인간 세상의 죄는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아직도 여전히 죄를 짓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 덕분에 죄에서 벗어나는 길을 알게 되었고,
구원을 받는 방법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심으로써 ‘구원의 길’이 열린 것입니다.
예수님의 첫 선포는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입니다(마태 4,17).
‘구원’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이고, ‘회개’는 우리가 해야 하는 일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라는 말을 두 번이나 하면서,
하느님께서 직접 예수님에 대해서 알려 주셨다는 것을 강조한 것은,
‘예수님은 메시아’ 라는 것을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들을 실천하면
구원을 받는다는 진리는,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이라는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송영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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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은 자기에게 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 저기 오신다”고 소개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어린양은 단순히 희생제물로 바쳐질 어린양이 아니라,하느님을 인간 역사 안으로 끌어들이게 하는 중개자요 인간의 죄를 제거함으로써 인간과 하느님 사이의 화해를 이루게 하는 ‘하느님의 어린양’ 이십니다.
-고인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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