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월 17일 연중 제1주간 금요일
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
안토니오 성인은 3세기 중엽 이집트의 중부 지방 코마나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느 날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마태 19,21)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감화되어, 자신의 많은 상속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 뒤 사막에서 은수 생활을 하였다. 많은 사람이 안토니오를 따르자 그는 수도원을 세우고 세상의 그릇된 가치를 거슬러 극기와 희생의 삶을 이어 갔다. 성인은 ‘사막의 성인’, ‘수도 생활의 시조’로 불릴 만큼 서방 교회의 수도 생활에 큰 영향을 주었다. 전승에 따르면, 그는 4세기 중엽 사막에서 선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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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마르코 2,1-12)
When Jesus saw their faith, he said to him,
“Child, your sins are forgiven.”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이스라엘의 원로들은 사무엘에게 이스라엘을 통치할 임금을 세워 달라고 고집을 부린다(제1독서). 중풍 병자의 믿음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그의 죄를 용서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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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죄의 용서는 하느님께 미루어 놓고, 자기들끼리 단죄하기 바빴던 바리사이의 모습을 보며 오늘 우리 사회의 갈등을 반성합니다.
우리 나라는 경제 협력 개발 기구(OECD) 가입 국가들 가운데 사회 통합 지수가 늘 꼴찌 자리를 맴돌고 있습니다.
서로 포용하고 화해하고 보듬는 데 너무 인색한 사회가 되어 가는 것이 아닌가 염려됩니다.중풍 병자를 고치는 이야기의 주인공이 예수님과 중풍 병자라는 사실은 명확합니다.
그렇지만 오늘의 묵상은 중풍 병자를 들것에 뉘어 데리고 와서 지붕까지 뚫고 예수님과 만나게 한 네 사람에게 주목하고자 합니다.
그들의 이름도 출신도 사상도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그들이 죄인으로 낙인 찍힌 중풍 병자와 함께하였다는 사실입니다.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의 죄를 용서해 주셨고, 이를 치유의 사건으로 명확히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죄를 용서하신다는 사실을 예수님께서 이 땅 위의 반목과 대립, 그리고 단죄와 갈등의 한가운데서 보여 주셨습니다.“목에 칼이 들어와도 난 용서 못 한다.
내 눈에 흙이 들어오기 전까지 그 사람은 안 볼 거야.”와 같은 말들을 할 때가 있습니다.
죄와 그 때문에 생긴 상처에 짓물러 터진 마음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지만, 신앙인은 이를 이겨 내는 내적 힘을 키워 나가야 합니다.
무작정 참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죄에 허덕이는 우리네 삶에 다른 이의 도움이 함께할 수 있는 열린 마음을 간직하라는 것입니다.
인내는 형제애 안에서 더욱 견고해집니다.
죄를 용서하는 것은, 위대한 영웅의 초능력이 아니라 우리가 서로의 처지를 이해하고 함께 아파하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혼자 아픔을 감당하는 것과 함께 아픔을 나누는 것, 어느 쪽을 선택하시겠습니까? 하느님의 용서는 우리의 용서 안에서 확연히 드러납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솔직히 신학교를 졸업하고 사제가 되면서, 이제는 공부가 아닌 사목에 신경 써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사목도 잘 알아야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신학생 때보다도 더 열심히 공부하게 됩니다. 다시 신학생이라는 마음으로 말입니다.
다산 정약용 선생도 강진에 유배되었을 때 ‘소학’을 가장 열심히 읽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배움의 시작에 펼쳐보는 책이 ‘소학’이지요. 그렇다면 학문의 깊이가 남달랐던 정약용 선생은 이 책을 왜 다시 읽으셨을까요? 초심으로 되돌아가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돌아갔기에 그 엄청난 저작들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초심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을 처음 만났을 때의 모습으로, 사랑하는 사람과의 처음 만남으로, 내 일을 시작하며 가졌던 첫 마음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더욱더 성장하는 나를 만나게 될 것이고, 더 큰 기쁨과 행복 안에서 삶의 의미를 찾을 수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어떤 중풍 병자를 그분께 데려가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생겼습니다. 사방에서 밀어 대는 군중 때문에 예수님 앞으로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상황이 우리 신앙인의 모습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 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 앞에 가기가 쉽습니까? 세상의 많은 방해물이 있습니다. 돈, 명예, 욕심과 이기심 등등 주님 앞을 가로막는 방해물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 방해물을 피할 길이 없다고 그냥 포기하는 것이 맞을까요?
사방에서 밀어 대는 군중 때문에 예수님 앞에 갈 수 없다고 포기했다면 이 중풍 병자는 치유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또 군중들에게 길을 열어달라고 소리쳤어도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계신 자리의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중풍 병자가 누워 있는 들것을 달아 내려보냈습니다.
주님께 나아가는 방해물을 피해서 주님께서 가르치고 계시는 집의 지붕 위로 올라가야 합니다. 곧, 첫 마음을 기억하면서 성경을 더 열심히 읽고 기도와 묵상에 매진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종종 대단하다며 저를 추켜세우십니다. ‘새벽을 열며’ 묵상 글을 20년째 쓰고 있다는 것, 20년째 강의를 계속해서 하고 있다는 것, 성지의 일을 비롯한 여러 가지 하는 일에 대한 칭찬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저는 대단하지가 않은 것입니다. 부족한 부분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특히 고쳐야 할 모습들을 바꾸지 못하는 저의 나약함에 스스로 ‘하찮다’라고 생각합니다.
남의 평가도 중요하지만, 나의 평가가 중요함을 깨닫습니다. 그래야 ‘하찮은 나’에게 굴복하지 않는 ‘당당한 나’를 구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생각보다 쉽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위해서는 반드시 그래야 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렇게 ‘당당한 나’를 구현해 나갈 때, 가쁨은 훨씬 더 크다는 것입니다. 남의 인정보다 나 스스로 인정할 수 있는 것이 더 큰 기쁨입니다.
스스로 인정하는 ‘당당한 나’를 만드는데 오늘도 최선을 다하시길 바랍니다.

가장 큰 적은 자신 안에 있다.
-전삼용신부-
프랑스 왕국의 한 고관대작은 비밀편지를 미처 치우지 못하고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가 도둑을 맞았습니다. 그런데 그 도둑이 누구인지 알았지만, 비밀편지라는 것이 들통날까봐 경시청 총감에게 은밀히 편지를 찾아오라고 명령을 내립니다. 총감은 도둑의 집을 구석구석 다 뒤지고 심지어 천장 속, 벽까지도 조사했지만 찾지 못합니다. 총감은 뒤팡이라는 사립 탐정에게 부탁을 합니다. 뒤팡은 금방 편지를 찾아왔습니다.
“아니, 어떻게 그렇게 쉽게 찾았소?”
“편지는 편지 보관함 서랍 안에 있었습니다.”
“뭐라고요? 설마 비밀편지를 그렇게 허술 하게 놓아두었을 리 없다고 생각해서 편지함은 열어보지도 않았는데...”
“경감님은 ‘자기 생각’으로 편지를 찾았지만, 저는 일단 제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모두 내려놓고 ‘도둑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편지는 편지함에 넣어두어야겠더군요. 다시 제 생각으로 돌아와 편지함에서 편지를 꺼내왔습니다.”
사람 안에는 타인의 생각이 들어오지 못하게 만드는 ‘자기만의 생각’이 있습니다. 자기만의 생각에 빠지면 자기만 믿게 되고 심지어 하느님의 말씀도 거부하게 됩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고 하십니다. 자기의 생각이 곧 자기 자신입니다. 자신의 생각을 버리는 것이 자기 자신을 버리는 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이유는 베드로가 ‘자기 생각’에 묶여있었기 때문입니다. 수난하고 죽으셔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에 베드로는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마태 16,22)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태 16,23)라고 꾸짖으십니다.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것’이 곧 사람을 ‘사탄’으로 만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말할 때에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마태 5,37)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람은 돈과 육체적 즐거움과 명예만을 생각하게 시스템 되어졌습니다. 이것이 원죄의 영향입니다. 원죄는 뱀 때문에 비롯된 죄입니다. 교회는 인간은 원죄로 인해 생긴 악으로 기우는 인간 본성 때문에 끊임없는 영적 싸움을 치러야 한다고 가르칩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405항 참조). 또 원조들의 죄로 악마는 인간에게 어떤 지배권을 행사하고 있다고 말하고 “죽음의 지배력을 지닌 존재, 곧 ‘악마’의 권세에 예속하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만약 인간 본성이 손상되어 악으로 기울어진다는 사실을 무시하면 교육, 정치, 사회, 그리고 도덕 분야에서 중대한 오류를 범할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407항). 우리의 가장 큰 적은 우리 안에 있습니다. 그것과 화해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자아가 뱀인 것을 모르면 독이 든 것을 모르고 물을 마시는 것과 같습니다.
제 책에서 자아를 뱀과 같다고 말한 것에 대해 이해가 어렵다고 하시는 분들을 위해 조금 더 자세하게 설명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원죄의 영향이 인간 안에 있어 마치 뱀이 하와를 유혹한 것처럼 인간의 생각을 미혹한다고 말합니다.
“하와가 뱀의 간계에 속아 넘어간 것처럼, 여러분도 생각이 미혹되어 그리스도를 향한 성실하고 순수한 마음을 저버리지 않을까 두렵습니다.”(2코린 11,3)
이런 의미로 뱀은 인간의 마음과 생각을 미혹하는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와를 유혹한 뱀이 사탄일 수가 없습니다. 에덴동산에서 하느님께서 하와를 사탄과 두시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뱀을 조심하지 않고 그 뱀의 생각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인간도 사탄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각자 안에 뱀과 같은 자아가 있는데 그 이유는 생존욕구는 어느 정도 있어야 하는 것도 있고 그것이 있어야 하느님 뜻과 자신의 뜻 가운데 선택을 할 수 있는 자유가 보장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식욕과 성욕과 교만이 자아의 욕구입니다. 자아는 길들여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성모 마리아가 뱀의 머리를 발로 밟고 계신 것처럼 우리도 밟아야만 하는 존재입니다. 그래도 죽지는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40일간 단식하신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경은 이렇게 예언합니다.
“나는 너와 그 여자 사이에, 네 후손과 그 여자의 후손 사이에 적개심을 일으키리니 여자의 후손은 너의 머리에 상처를 입히고 너는 그의 발꿈치에 상처를 입히리라.”(창세 3,15)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뱀에게 저주를 내리시며 하신 말씀입니다. 성 이레네우스는 「이단 반박」에서 이 말씀을 성모 마리아를 통해 태어난 그리스도의 뱀에 대한 승리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교회도 “창세기의 이 구절은 ‘구속자 메시아’에 대한 첫 예고, 곧 뱀과 여인 사이의 싸움과 이 싸움에서 마침내 이 여인의 후손이 승리하리라는 것을 처음 알리는 것”(「가톨릭교회교리서」, 410항)이라고 설명합니다.
자아는 “발꿈치에 상처를 입히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위 창세기에서의 “발꿈치에 상처를 입히리라.”는 또한 “발꿈치를 바라보리라.”, “발꿈치를 보며 입을 벌리리라.”로 해석이 가능합니다. 성모 마리아와 예수 그리스도는 뱀에게 물리실 수가 없는 분들입니다. 뱀을 십자가에 매달고 발로 밟아 이기셔서 죄에 떨어진 적이 없으신 분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물렸습니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의 도움이 필요한 것입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411항 참조).
우리는 생각을 미혹하는 우리 안의 뱀과 싸워 이겨야합니다. 이 싸움을 하고 있어야 믿음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마치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처럼 불 뱀에 물려 죽어갈 것입니다. 우리는 장대에 매단 구리 뱀을 보아야 합니다.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 자신을 십자가에 마치 뱀처럼 매달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요한 3,14)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아를 죽이신 모습을 보고 우리도 각자의 뱀을 십자가에 매달아야 합니다. 자아는 결국 ‘자신의 뜻’이고 자신의 뜻이 죽어야 ‘하느님의 뜻’이 나를 지배하게 됩니다. 분명 내 뜻은 아버지 뜻을 따르지 못하게 방해하는 뱀의 유혹과 같습니다.
자신을 사랑해야 이웃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맞습니다. 그러나 몸을 사랑하려면 몸을 괴롭혀야 합니다. 단식해야 하고 운동해야 합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그 본성대로 방치하는 것이 사랑이 아닙니다. 싸우는 것이 사랑입니다. 「가톨릭교회교리서」도 “완덕의 길은 십자가를 거쳐 가는 길이다. 자아 포기와 영적 싸움 없이는 성덕도 있을 수 없다.”(2015항)라고 가르칩니다. “자아 포기” 없이는 그리스도를 따를 수 없습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2715항 참조).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을 이기셨다면 우리도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평생 싸워나가야 하는 우리 안의 가장 큰 적은 우리 자신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조재형신부-
이스라엘, 요르단으로 성지순례 다녀왔습니다. 성지순례를 통해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의 현장을 보았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건의 현장을 보았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는 자비의 현장을 보았습니다. 하느님께서 여전히 우리를 기다리시는 약속의 장소를 보았습니다. 순례하면서 많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판단, 비판, 시비를 가리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경청, 희망, 용서, 사랑의 이야기입니다. 약속의 땅을 바라보면서 눈물 흘렸을 모세를 생각합니다. 요르단강에서 세례를 주었던 세례자 요한의 강렬한 눈빛을 봅니다. 태어난 아기 예수님께 경배드리는 목동과 동방박사를 생각합니다.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포도주로 변한 물을 봅니다. 복음을 전하시는 예수님, 기뻐하는 제자들, 새로운 권위에 놀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믿음으로 치유되는 사람들,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지순례는 하느님의 사랑에 응답한 사람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여정입니다.
누군가 이야기했습니다. “신앙은 과거의 사건에 대해서 관대해지고, 지금 해야 할 일에 용기를 가지며,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 대해서 희망을 품는 겁니다.” 과거에 대해서 분노하거나 원망하면 지금 주어진 일에 용기를 내기 어렵습니다. 나는 할 수 없다는 열등감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고통 앞에 좌절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좌절하고, 절망하는 사람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품지 못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배신을 탓하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들에게 평화를 주셨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과 함께하셨고 함께 식사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다시 갈릴래아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은 절망에서 희망으로 일어났습니다. 좌절에서 용기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담대하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선포하였습니다. 용기는 희망의 꽃을 피우기 때문입니다. 미래에 대한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면 지금 용기가 없는 겁니다. 지금 용기가 없다면 신앙의 샘이 메마른 겁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신앙을 가진 사람을 칭찬하십니다. 중풍 병자는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따뜻한 이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중풍 병자는 용기를 냈습니다. 주님을 찾았습니다. 따뜻한 이웃은 움직이지 못하는 중풍 병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갔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에서 희망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중풍 병자가 일어난 것은 기적이 아닙니다. 절망에서 희망으로 일어난 겁니다. 두려움에서 용기로 일어난 겁니다. 원망과 분노에서 관대함과 자비로 일어난 겁니다. 이것은 단순히 기적이 아닙니다. 이것은 신앙의 신비입니다.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은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이야기를 보지 못하였고, 판단하고 분석하였기 때문입니다. 율법과 계명을 보지만 그것을 넘어서는 자비와 사랑을 보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느님의 나라를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느님의 아드님을 십자가에 못 받으라고 외칩니다. 그래서 그들은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합니다. 신앙이 완고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믿기 시작한 형제님께서 주변 사람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고 합니다. ‘사람이 많이 변했어!’ 그 형제님은 이제 자신의 이익과 욕심을 먼저 생각하는 것을 거절했고, 하느님의 사랑을 바라보며, 예전처럼 작은 일에 화를 내기보다는 참았고, 주일에는 무엇보다 미사에 참례하기로 정했고, 감사하는 삶을 살기로 정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재물과 명예, 욕심과 이기심의 바다를 건너 나눔과 봉사와 사랑과 평화의 세상으로 건너왔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실 때도,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울 때도, 나병 환자를 치유하실 때에도 말씀하십니다. ‘너의 믿음이 너를 구하였다.’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영원한 생명을 시작했으면 좋겠습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영혼의 치유요 정화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양승국신부-
예나 지금이나 중풍병은 참 무서운 병입니다. 환자 본인에게나 주변 사람들에게나 큰 고통을 안겨주기에 가급적 피하고 싶습니다. 중풍병은 뇌혈관의 장애로 인해 생기는 병인데, 주로 중장년이나 노인 남자에게서 많이 발병됩니다.
한번 중풍병을 앓게 되면 꽤나 여파가 큽니다. 신체 전반적인 기능의 마비와 후유증으로 인해 삶의 질이 급격히 떨어집니다. 의료 수준이 높아진 요즘에야 잘 치료하고 재활을 하게 되면 증상이 많이 완화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 시대 그런 호전 상황은 꿈조차 꿀 수 없었습니다. 하루하루 마비증세와 통증은 심해가고, 결국은 몸 전체가 마비되기에 이릅니다. 환자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하루 온종일 똑바로 누워 하늘만 바라보는 일이었습니다. 그 누군가 도움의 손길이 없으면 그 어떤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는 갓난 아기처럼 되어버리고 맙니다.
중풍병으로 인한 극심한 정신적 육체적 고통과 상처는 환자의 인생을 깊은 절망의 수렁으로 몰아갔습니다.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가족들에 대한 큰 미안함과 극도의 좌절감, 수치심뿐이었습니다. 기쁨이나 희망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인생, 숨은 쉬고 있었지만 죽은 목숨이나 다를 바 없는 그런 삶을 환자는 하루하루 견뎌내고 있었습니다.
이런 중풍병자에게 희망의 빛이 되어준 사람들이 있었으니, 네명의 착한 이웃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중풍병자를 예수님께로 데려만 가면 반드시 새삶을 얻게 되리라는 강한 믿음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당시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중풍병자를 향한 가련한 마음, 도와주고 싶은 마음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행동으로 실천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네 사람은 예수님을 향한 믿음을 구체적인 행동으로 옮긴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 보시기에 네 사람의 행동은 참으로 갸륵하고 영웅적인 행동이었습니다. 네 사람이 보인 행동, 지붕을 뚫고 환자를 내려보낸 행동은 비록 예의에 크게 어긋나는 행동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네 사람의 행동으로 실천하는 믿음을 보십니다. 조금도 개의치 않고 치유의 은총을 선물로 베푸십니다.
고통받은 한 가련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자비가 가장 필요합니다. 그러나 착한 동료 이웃 4사람의 협력도 필요합니다. 우리 자신의 건강과 구원에 만족해서는 부족합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많은 것을 받은 우리인만큼, 이웃들의 구원에 도움을 주는 착한 4사람이 되어야합니다.
우리 인간이 지니고 있는 최우선적인 관심이요 최우선적인 목표는 육체의 치유요 건강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다른 무엇에 앞서 영적인 치유와 구원에 관심을 가지졌습니다.
줄에 매달려 내려온 중풍병자에게 예수님께서는 먼저 영혼의 치유를 베푸십니다. “애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르코 복음 2장 5절) 그에게 가장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영혼의 구원임을 아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영혼의 구원, 즉 죄의 용서를 베푸신 다음, 육체의 치유를 베푸십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마르코 복음 2장 11절)
이렇게 예수님의 복음선포 활동에는 나름 순서가 있었습니다. 영적인 치유와 구원이 우선이었습니다. 죄를 용서받고 거룩함을 회복하는 것이 우선이었습니다. 육체의 치유는 그 다음이었습니다. 기적은 2차적인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환자를 대할 때 먼저 그의 영혼과 인간됨을 살폈습니다. 그 뒤에 육체적인 병의 치유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주관심사는 병의 치유를 넘어 한 인간 존재의 전인적인 구원이었습니다.
육체적 질병의 치유는 지극히 일회적인 것이고 한시적인 것입니다. 한번 치유받았다고 해서 영원히 사는 것을 절대로 아닙니다. 기적적 치유는 영원히 계속되고 반복되지 않습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영혼의 치유요 정화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영적 중풍 병자
-반영억신부-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기도를 하지 않는 영혼은 중풍 병에 걸렸거나 손발이 부자유스럽게 된 사람과 같아서, 손과 발에게 아무리 명령을 내려도 듣지 않는 것과 똑같은 이치이다….만약에 이런 영혼들이 그 커다란 비참을 깨닫지 못하고, 따라서 스스로 바로 잡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롯의 아내가 고개를 돌리다가 소금 기둥이 된 것처럼 자기한테서 머리를 돌린 탓으로 소금 기둥이 되어 버리고 말 것”(영혼의 성)이라고 하였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영적인 중풍 병자, 즉 영적인 감각을 상실한 사람이 되고 맙니다.
성경을 통해 주님의 말씀을 접하고도 아무런 깨달음을 갖지 못하고 은총에 감사할 줄 모른다면 장애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가지고 있지만 읽지 않고 보관만 하고 있거나 또 설령 읽었다 하더라도 하느님의 말씀으로 듣고 그대로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 상태가 중풍 병자나 다름없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중풍 병자에게 “얘야, 너는 죄를 용서 받았단다......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들 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마르2,5.11).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는 일어나 곧바로 들 것을 가지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밖으로 걸어 나갔습니다. 마찬가지로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그 말씀대로 이루어집니다. 사실 들것에 누워있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일어난다는 것은 부활을 뜻합니다. 그리고 일어나야 할 사람은 바로 나 자신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들것에 누워있습니다. 이제 일어나십시오. 말씀에 따르십시오. 그러면 영적인 감각을 발휘하게 됩니다.
사람들이 중풍 병자를 예수님께 데려간 것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넘어야 할 장벽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많아서 예수님께 가까이 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중풍 병자가 누워있는 들것을 달아내려 보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마침내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를 치유해 주셨습니다. 믿음은 이렇게 위대합니다. 믿음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고 기적을 낳습니다. 그 믿음이 내 믿음이든 다른 사람의 믿음이든, 믿음을 갖고 하는 일에는 그에 상응하는 하느님의 능력이 드러납니다. 그리고‘죄를 용서받았다’는 선언은 우리에게 큰 희망을 줍니다. 용서는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아무리 큰 잘못이라도 언제나 기회를 주십니다. 그럼에도 주님을 심판관으로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자주 심판관노릇을 하고 살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믿는다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시인하고 인정하는 것이며 마음과 영혼에, 삶 속에 받아들이는 것이고 맡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맡긴다는 것은 끊임없이 매 순간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근심걱정을, 인생여정을, 앞으로의 미래를 온전히 맡겨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기도를 해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고는 믿음을 성장시킬 수 없습니다. 그리고 “기도를 하지 않는 사람은 숨을 곳을 찾아 땅을 파는 두더지처럼 몸과 마음을 땅으로 굽힙니다. 그들은 현세적이고 지나가는 세상 것에 집착하기 때문에 높고 푸른 하늘을 바라보지 못합니다”(성 요한 비안네). 열심히 기도함으로써 영혼의 중풍 병자가 되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병원 일로 어느 신부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사무실 중앙에 “기도는 만사를 변화 시킨다!” 라는 글귀를 크게 붙여놓았습니다. 제가 기도에 너무 소홀했다는 반성이 되었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르 2,5)
-이영근신부-
참으로 놀라운 사실이 선언되었습니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르 2,5)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에게 ‘죄의 용서’를 선언하십니다. 그러나 이 엄청난 사실 앞에, 율법학자들은 어안이 벙벙해져 말합니다.
“이자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마르 2,7)
참으로 그렇습니다. 죄를 용서하실 수 있는 단 한 분, 오직 하느님이 아니고서야 그 누구도 용서할 수가 없거늘, 감히 누가 “죄를 용서받았다.”고 선언할 수 있을까? 유다인은 예로부터 죄의 용서를 하느님의 고유 권한으로 여겼습니다(탈출 37,4;이사 43,25;44,22). 더구나, 하느님께서 용서하셨다는 것을 대체 누가 알 수 있을까? 하느님이 아니고서야 말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느님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마르 2,10)
그리고 그 증거로 중풍병자를 치유하십니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그러자 그는 일어나 곧바로 들것을 가지고,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밖으로 걸어 나갔습니다.”(마르 2,11-12)
그런데, 참 이상한 일입니다. 왜, “들것을 가지고” 가라고 하시는 걸까? 중풍이 나았으면 당연히 들것은 버리고 가면 되는 일인데 말입니다. 마치, 루르드에 가면, 치유 받은 이들이 두고 간 목발이나 휠체어가 소복이 쌓여있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치유 받았어도 “들것”을 여전히 들고 다녀야 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왜냐하면, 몸이 치료되었다고 해서, 몸을 버려두고 다닐 수는 없는 까닭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미 치유 받은 이들입니다. 이미 용서받은 이들이요, 그러나 그 상처는 지니고 다닙니다. 왜냐하면, 상처는 제거해야할 그 무엇이 아니라, 치유 받았음을 보여주는 표지인 까닭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할례’라는 상처를 ‘하느님 백성의 표지’로 지니고 다녔듯이 말입니다. 야곱이 ‘엉덩이뼈의 상처’를 ‘축복의 표지’로 지니고 다녔듯이 말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상처’를 ‘구원의 표지’로 몸에 지니고 다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더 이상 '들것'에 매여 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이제는 기꺼이 들고 다녀야 합니다. 아니, 들것에 아픈 형제들을 태워 들고 집으로 가야 합니다. 마치 내 형제들이 나를 '들것'에 태워 예수님께 데려왔듯이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 인류를 태워 들고 아버지께로 가셨듯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가 바로 우리의 ‘들것’입니다. 진정, 상처에서 흐르는 용서의 피를 마실 때라야, 우리는 그 상처로부터 자유로워지고, 그것을 구원의 표지로 지니게 됩니다. 용서야말로 진정한 치유를 가져오는 권능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치유받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먼저 용서하십시오. 용서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먼저 하느님께서 용서하셨음을 믿으십시오. 그러면, 이미 치유 받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 우리는 이미 용서를 입었습니다.
그리고 그 영광된 상처를 치유의 표지, 축복의 표지, 구원의 표지로 받았습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
“일어나 네 들것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마르 2,11)
주님!
들것에서 일어나게 하소서.
일어나 들것을 들고 가게 하소서.
들것 위에 당신의 사랑을 들고 다니게 하소서.
십자가에서 사랑을 드러내듯
저를 일으키신 그 사랑을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중풍 병자를 고치시다.
-송영진신부-
“그때에 사람들이 어떤 중풍 병자를 그분께 데리고 왔다. 그 병자는 네 사람이
들것에 들고 있었는데, 군중 때문에 그분께 가까이 데려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분께서 계신 자리의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중풍 병자가 누워 있는
들것을 달아내려 보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르 2,3-5)”
“그러고 나서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그러자 그는 일어나 곧바로 들것을 가지고,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밖으로 걸어 나갔다. 이에 모든 사람이 크게 놀라 하느님을 찬양하며
말하였다. ‘이런 일은 일찍이 본 적이 없다.’(마르 2,10ㄴ-12)”
여기서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라는 말씀은, “나는 너의 죄를 용서한다.”입니다.
이 말씀에는 “나는 너의 병을 고쳤다.(너의 병은 고쳐졌다.)” 라는 뜻도 들어 있고,
“나는 너를 구원한다.(너는 구원받았다.)” 라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이 말씀에는, ‘병’을 ‘죄의 결과’로 생각했던
그 당시 유대인들의 사고방식은 들어 있지 않습니다.
또 그런 사고방식은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떻든 병을 고쳐 달라고 온 것이 분명한 병자에게 예수님께서 ‘죄의 용서’를
먼저 말씀하신 것은, 병자 자신이 ‘몸의 치유’보다 ‘죄의 용서’를 먼저 청했거나,
아니면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그의 죄를 용서하는 일이 더 급하고,
더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그 병자가 실제로 죄 속에 있었는지, 무슨 죄를 지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병에 걸려 누워 있을 때 자기의 죄를 더 의식하게 되고,
몸의 치유를 원하는 만큼 영혼의 치유도 원하게 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입니다.
그래서 병이 회개의 계기가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특정 질병에 걸린 병자들을 죄인 취급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그런 병에 걸렸다고 일률적으로 죄인 취급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병자를 죄인 취급하는 것은,
죄를 지어서 하느님의 벌을 받은 것으로 단정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느님은 아무 때나, 아무에게나 그런 식으로 벌을 내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가끔 회초리를 드실 때가 있긴 하지만,
그것은 아주 예외적인 일, 하느님께서 직접 개입하셔야만 할 때의 일입니다.)
평소에 건강관리를 소홀히 하는 사람은 있어도,
병자가 되고 싶어서 일부러 병에 걸리는 사람은 없습니다.
문병을 가서 “왜 평소에 건강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았느냐?” 라고
나무라는 말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말은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에게 상처만 주는,
참으로 쓸데없는 말, ‘사랑 없는’ 말입니다.
그런 말은 건강한 사람에게나 할 말이고, 또 병이 나은 다음에나 할 말입니다.
병에 걸려서 누워 있는 사람에게는 ‘사랑’만 주어야 합니다.)
또 “이 병은 하느님의 뜻이니...” 같은 말도 함부로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병고에 시달리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고,
어떤 고통에도 굴하지 않고 다시 일어나는 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 ‘용서’에 초점을 맞추면,
“믿음을 보시고” 라는 말은, “그 병자의 회개를 보시고”로 해석됩니다.
그 병자가 예수님께 ‘죄의 용서’를 먼저 청했다면,
그는 이미 회개했거나 회개하고 있는 중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치유’에 초점을 맞추면, “믿음을 보시고” 라는 말은,
“치유의 은총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음을 보시고”로 해석됩니다.
우리의 믿음이 기적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자비와 사랑이 기적을 일으킵니다.
믿음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은총을 잘 받기 위한 준비입니다.
예수님께서 믿음이 있는 병자들만을 고쳐 주셨다고 오해하면 안 됩니다.
자비로우신 예수님은 병자의 믿음과 상관없이
은총과 자비를 베풀어주시는 분입니다(요한 5,1-9).
그렇지만 안 믿어도 상관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믿는 사람은 주시는 은총을 잘 받아서 ‘영혼 구원’이라는 다음 단계로 나아가게
되지만, 안 믿는 사람은 은총을 주셔도 잘 받지 못하거나, 받아도 그것으로 그치고
다음 단계로 나아가지 않음으로써 받은 은총을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립니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라는 말씀 뒤에, 이 말씀에 시비를 거는
율법학자들의 말이 나오는데, 그것은 따로 생각할 주제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중풍 병자를 고쳐 주신 일은,
율법학자들에게 당신의 권한과 권능을 증명해 보이기 위한 일이 아니라,
그 병자에게 그냥 자비를 베풀어주신 일입니다.
율법학자들과의 논쟁이 없었어도
예수님께서는 그 병자의 병을 고쳐 주셨을 것입니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너의 병은 고쳐졌다.)” 라는 말씀은 그의 병을 고쳐 주신
말씀이고,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라는 말씀은,
그 치유가 완전히 이루어졌음을 확인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 병자의 병은 예수님께서 용서를 말씀하실 때 이미 치유되었습니다.)
“율법학자 몇 사람이 거기에 앉아 있다가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였다.
′이자가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그들이 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을 당신 영으로 아시고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느냐? 중풍 병자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네 들것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마르 2,6-10ㄱ)”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을 ‘사람’으로만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나는 너의 죄를 용서한다.)” 라는 예수님 말씀을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로 생각했습니다.
사람은 사람의 죄를 용서할 수 없다는 율법학자들의 생각은 맞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참 사람이시면서 참 하느님이신 분’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권한에 대한 그들의 생각은 틀렸습니다.
(고해성사는 사람이 사람의 죄를 용서하는 일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위임해 주신 권한을 집행하는 일입니다.)
“어느 쪽이 더 쉬우냐?” 라는 말씀은 “둘 다 어렵다.”,
즉 “둘 다 하느님의 권능과 권한으로만 가능한 일이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느님의 권능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보여 주심으로써
하느님의 권한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드러내셨습니다.

-조욱현신부-
복음: 마르 2,1-12: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신 사람의 아들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으로 가시어 어느 집에서 가르치시는 동안 “문 앞까지 빈자리가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2절)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어디서나 말씀과 행동으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셨다. 그때에 사람들이 어떤 중풍병자를 그분께 데리고 와서 그분 앞으로 데려가려 했지만 군중 때문에 데려갈 수가 없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그러한 일이 종종 있다.
하느님의 뜻이 아닌 것에 젖어있으면, 천상 은총의 약으로 새로워지고 싶어 해도 묵은 습관이라는 걸림돌 때문에 치유되기가 힘들다. 우리가 달콤한 기도에 빠져 주님과 달콤한 속삭임을 나누는 동안에도 세상의 잡념들이 군중처럼 몰려와 영의 눈으로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일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이때 우리는 다른 곳으로 갈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집의 지붕 위로 올라가야 한다. 즉 말씀을 향하여 가야 한다. 밤낮으로 주님의 법을 묵상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중풍병자를 데려온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5절)고 하신다. 주님께서는 그의 죄를 용서하시고 고쳐주셨다. 하느님 외에 아무도 죄를 용서해 줄 수 없다.(7절) 주님께서는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고쳐주셨으니, 참으로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아드님 말씀이심이 분명하다. 그분은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을 아버지께로부터 받으신 분이시다.
그러나 율법학자들에게는 이러한 말이 하느님만이 죄를 용서하실 수 있다는 그들 신앙의 본질을 모독하는 신성모독의 발언이었다. 이러한 죄는 레위 24,16에서 돌로 쳐서 죽이는 죄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율법학자들은 분개하여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7절) 하고 중얼거렸던 것이다. 그들은 하느님 밖에 아무도 죄를 용서해 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분이 그러한 권한을 가지고 계신 것을 모른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네 들것을 가지고 걸어가라.’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그러고 나서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9-11절) 하시자 중풍병자는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벌떡 일어나 요를 가지고 걸어 나갔다.
주님께 대한 신앙이 이처럼 기적을 가져올 수 있다. 이 중풍병자는 자신의 믿음으로 치유를 받았다기보다 친구들을 통하여 기적을 체험하였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이웃의 도움을 통하여 갖게 된 경우도 있을 것이다. 이제 우리가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이러한 기적을 체험할 수 있게 지붕을 벗길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르 2, 5)
-한상우신부-
복음의 실천은
용서입니다.
사람과 사람사이에
가장 필요한 치유는
용서입니다.
용서는
하느님의 힘을
인정하는 올바른
믿음입니다.
주님을
만나는 길은
믿음의 길이며
용서의 길입니다.
우리의 역사안에서
우리가 가야할 길또한
용서입니다.
용서하시는
주님을 통해 우리는
구체적인 일상으로
기쁘게 돌아갈 수
있습니다.
믿음안에서
착한 이웃들의
아름다운 삶을
만납니다.
혼자만의
믿음이 아니라
함께 하는
믿음입니다.
자라나야 할
공동체의
믿음입니다.
공동체는
서로의 아픔을
어루만져 주고
서로를 용서하고
서로를 받아들이는
믿음의 공동체입니다.
믿음의 공동체는
믿음을 실천하며
믿음의 길을
걸어갑니다.
믿음은 서로를
돌보아주는
용서입니다.
작은 것에서부터
용서를 실천합시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들 안에서는 당신 백성에게 배척 당하시는 하느님(예수님), 그래도 백성의 눈높이에 맞추어 응하시는 하느님(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때에 사람들이 어떤 중풍 병자를 그분께 데리고 왔다"(마르 2,3).
중풍 병자는 제 힘으로 예수님 앞에 나아올 수 없었습니다. 몸이 마비되어 말을 듣지 않는 상태니까요. 그의 굳어버린 몸은 예수님을 만나는 데 첫째 걸림돌입니다.
그래도 그는 다행히 좋은 이웃이 있어 예수님 계신 곳에 올 수 있었습니다. 네 명의 친구가 들것에 그를 싣고 나르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둘째 걸림돌이 가로막습니다. 바로 비슷한 지향으로 예수님 앞에 모여든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 말씀에 몰두하느라 문 앞에 환자가 도착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것 같습니다. 혹 알고서도 안 비켜주었다면 그들의 마음은 중풍 병자보다 더 완고히 굳어진 것이라 볼 수밖에 없겠지요.
들것을 들고 지붕까지 올라가 환자를 달아 내려보낸 네 명의 친구들 덕분에 중풍 병자는 예수님 발 앞에 놓여집니다. 그들의 기지와 집념이 대단하지요. 평지에서 막힌 길을 하늘을 뚫어 가능하게 만들었으니까요!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르 2,5).
네 명의 의인은 예수님 앞에 가기만 하면 반드시 치유가 이루어질 것이라 믿었기에 이런 수고쯤은 아무것도 아니라 여겼고, 예수님은 그 믿음을 대견히 보십니다. 그 덕에 중풍 병자는 치유의 선고, 말하자면 완치 판정 선고를 받지요.
그런데 갑자기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갑니다. 예수님 입에서 발설된 "용서"라는 말씀에 율법 학자들이 속으로 발끈한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선하신 하느님의 일을 행하시고도 일부 사람들에게 배척을 당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당장 뛰쳐 일어나 예수님을 얼싸안고 적극적으로 감사와 기쁨을 표현하면서 그분 인격과 만나고 싶은데, 지금 분위기로는 어렵겠습니다. 셋째 걸림돌은 제도가 공인하는 지식인들입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느냐?"(마르 2,8)
'의아하게 생각하다'는 어쩌면 사뭇 에둘러 완곡하게 표현한 말씀 같습니다. 소위 성경을 좀 안다는 율법 학자들 내면에서는 의혹과 의심과, 불경에 대한 두려움, 분노 등이 부글부글 엉기는 중이었을 테니까요.
그런데 이스라엘에서는 질병이 곧 하느님의 징벌이라 여겨졌지요. 그러니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는 표현은 "얘야, 네 병이 나았다"라는 말과 상이하지 않습니다. 용서 자체가 징벌 상태인 병에서 벗어남을 보증하니까요. 오히려 제 몸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른 채 누워있는 환자에게 다짜고짜 "일어나 네 들것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것보다 훨씬 전인적이고 친절한 말씀입니다.
"일어나 네 들것을 가지고 걸어가라"(마르 2,11).
그래도 예수님은 율법 학자들과 다른 청중이 듣기 편안한 말씀으로 바꾸어 중풍 병자에게 재차 치유 선고를 내리십니다. 눈치만 보던 그는 비로소 예수님 말씀대로 "일어나 곧바로 들것을 가지고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밖으로 걸어"(마르 2,12) 나갑니다. 들어오기 불가능할 정도로 꽉 막혀있던 군중의 무리는 기적을 체험하고 마음이 한결 유연해진 것일까요? 그가 걸어나갈 길을 열어준 걸 보니 말입니다.
제1독서에서 우리는 당신 백성에게 배척받으시는 하느님을 만납니다.
"그들은 사실 너를 배척한 것이 아니라 나를 배척하여 더 이상 나를 자기네 임금으로 삼지 않으려는 것이다"(1사무 8,7).
하느님을 임금으로 모신 신정 체제로 이어오던 이스라엘이 사람을 임금으로 섬기는 왕정 체제를 만들겠다고 나서자 하느님이 사무엘에게 이르십니다. 이 말씀을 하시는 하느님의 속이 어떠실까 머물러 봅니다. 애간장이 끊어지도록 사랑하는 자식들에게 소외되고 배척 받는 창조주 하느님. 차선으로 물러나 달라는 당당한 요구를 듣고 계시는 하느님.
"그들의 말을 들어 그들에게 임금을 세워 주어라"(1사무 8,22).
그런데 하느님은 인간의 마음 안에서 생겨나는 "악"도 허용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만큼 당신이 주신 자유의지가 크고 값진 선물이기에 악을 선택할망정 지켜주고 싶으신 겁니다. 대신 이제부터 하느님은 그 악으로 인해 허덕이게 될 인간을 구원하실 방도를 마련하실 겁니다. 이것이 바로 당신 손수 지으신 피조물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 방식, 존중 방식입니다.
복음으로 돌아갑니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마르 2,10).
사실 이 말씀은 예수님만 하실 수 있습니다. 누구의 죄를 용서하는 권한은, 그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음까지 불사하는 이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니까요. 게다가 이 말씀은 중의적 의미를 지닙니다. 지금 당장 중풍 병자의 치유를 통해 알게 해 주시기도 하겠지만,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해 그 앎이 완성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예수님과 인격적인 만남과 관계를 가지는데 걸림돌이 되는 것이 무엇일까 살펴 봅시다. 굳어버린 몸과 마음? 주님 주변을 에워싼 (별로 맘에 들지 않는) 사람들? 일일이 자기를 검열하고 단죄하는 내 안의 율법 학자?
반대로 내가 사랑의 치유를 체험하는데 도움이 되는 디딤돌을 떠올려 봅시다. 무거운 나를 끌고 끙끙 땀흘리며 주님께로 가는 이웃들? 당신을 배척하는 요구까지 기꺼이 수용하시는 하느님?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한 용서를 베푸시는 예수님?
디딤돌을 떠올리면, 오늘 치유받은 중풍 병자처럼 온 존재에 피가 돌고 온기가 차올라 영육이 한결 부드러워지고 유연해지지 않습니까? 그러니 이제 일어나 예수님 말씀대로 걸어 나갑시다. 은총으로 활짝 열리게 된 우리를 보고 세상은 하느님을 찬양할 것입니다.
"일어나 네 들것을 가지고 걸어가라"(마르 2,11). 네, 주님!

하느님을 임금으로 모시는 우리
-김찬선신부-
"이제 다른 모든 민족들처럼 우리를 통치할 임금을 세워 주십시오."
오늘 사무엘기를 읽으면서 드는 첫 생각은
이스라엘 백성은 왜 임금을 세워달라고 할까?
우리가 경험한 임금이나 대통령은 거의 대부분 오늘 사무엘이
이스라엘 원로들에게 얘기했듯이 안 좋은 것뿐이잖습니까?
사실 우리 각자가 다 하느님을 임금으로 모시고 살면
임금이 따로 있을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공동체도 모두가 하느님을 원장으로 모시고 살면
원장이 있어도 그만이고 없어도 그만일 것이며,
원장이 훌륭해도 그만이고 훌륭하지 않아도 그만일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느님을 임금으로 모시지 않고,
오늘 독서의 원로들처럼 하느님을 대신하는 임금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임금으로 모시는 족속들에게는 임금이 필요치 않고
하느님을 임금으로 모시지 않는 족속들에게만
하느님을 대신하는 임금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은 복음과 법의 관계와도 같습니다.
프란치스코 이전에 수도회들은 수도 규칙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프란치스코가 생각하기에 복음을 제대로 살게 되면
굳이 수도 규칙을 따로 가져야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우리말에 '그 사람 법 없이도 살 사람이야!'라는 말이 있듯이
그렇지요, 복음을 사는 사람이야말로 법 없이도 살 사람입니다.
그런데 복음을 제대로 살지 않는 사람도 두 부류입니다.
복음을 아예 살지 않는 사람이 하나이고
다른 하나는 복음을 산다고 하는데 그대로 살지 않고
자기식대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예를 들어 복음의 사랑은 살지 않고 복음의 자유를 살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복음의 자유가 사실은 복음의 자유가 아닙니다.
복음의 사랑을 살지 않는 복음의 자유는 실은 복음도 살지 않고,
수도 규칙도 살지 않으며 자기 좋을 대로 살겠다는 것일 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사랑을 살지 않는 복음의 자유가 어디 있습니까?
사랑을 살지 않으면 복음의 자유는 말할 것도 없고
복음이라는 말조차 입에 달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을 살지 않으면 아무리 복음을 떠들어도 복음을 사는 것이 아니고,
복음의 사랑을 살지 않을 때 자기 좋을 대로 욕심을 부리며 살기에
욕심을 통제할 법이 필요하고 법으로 통치할 임금이 필요한 거지요.
그런데 다행히 임금이라도 공정하고 사랑의 임금이라면
법을 올바로 집행하여 각 사람의 욕심을 올바로 공정하게 통제하지만
임금조차 제 욕심만 차리고 사랑이 없다면 임금이 오히려
법을 자기 손에 넣고 백성들을 착취하고 학대하는 폭군이 되거나
법을 공정하게 집행하지 않아 혼란을 일으키는 난군이 될 것입니다.
사실 폭군도 나쁘지만 난군도 폭군 못지않게 나쁩니다.
난군亂君이란 말 그대로 세상을 어지럽게 만드는 임금이지요.
법과 사랑을 공정하게 집행하지 않는 난군이나 책임자는
공정하지 않음으로 백성으로 하여금 서로 싸우게 합니다.
말하자면 전란戰亂을 일으키는 거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사무엘기를 읽으면서
나는 하느님을 임금으로 모시는 사람인지,
우리 대통령 또는 책임자는 하느님 대신 통치하는 사람인지
잘 식별하고 성찰하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마르코 2,1-12)
사람 안에는 타인의 생각이 들어오지 못하게 만드는 ‘자기만의 생각’이 있습니다. 자기만의 생각에 빠지면 자기만 믿게 되고 심지어 하느님의 말씀도 거부하게 됩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고 하십니다. 자기의 생각이 곧 자기 자신입니다. 자신의 생각을 버리는 것이 자기 자신을 버리는 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이유는 베드로가 ‘자기 생각’에 묶여있었기 때문입니다. 수난하고 죽으셔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에 베드로는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마태 16,22)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태 16,23)라고 꾸짖으십니다.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것’이 곧 사람을 ‘사탄’으로 만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말할 때에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마태 5,37)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람은 돈과 육체적 즐거움과 명예만을 생각하게 시스템 되어졌습니다. 이것이 원죄의 영향입니다. 원죄는 뱀 때문에 비롯된 죄입니다. 교회는 인간은 원죄로 인해 생긴 악으로 기우는 인간 본성 때문에 끊임없는 영적 싸움을 치러야 한다고 가르칩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405항 참조)
우리의 가장 큰 적은 우리 안에 있습니다. 그것과 화해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자아가 뱀인 것을 모르면 독이 든 것을 모르고 물을 마시는 것과 같습니다.
제 책에서 자아를 뱀과 같다고 말한 것에 대해 이해가 어렵다고 하시는 분들을 위해 조금 더 자세하게 설명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원죄의 영향이 인간 안에 있어 마치 뱀이 하와를 유혹한 것처럼 인간의 생각을 미혹한다고 말합니다.
“하와가 뱀의 간계에 속아 넘어간 것처럼, 여러분도 생각이 미혹되어 그리스도를 향한 성실하고 순수한 마음을 저버리지 않을까 두렵습니다.”(2코린 11,3)
이런 의미로 뱀은 인간의 마음과 생각을 미혹하는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와를 유혹한 뱀이 사탄일 수가 없습니다. 에덴동산에서 하느님께서 하와를 사탄과 두시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뱀을 조심하지 않고 그 뱀의 생각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인간도 사탄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각자 안에 뱀과 같은 자아가 있는데 그 이유는 생존욕구는 어느 정도 있어야 하는 것도 있고 그것이 있어야 하느님 뜻과 자신의 뜻 가운데 선택을 할 수 있는 자유가 보장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식욕과 성욕과 교만이 자아의 욕구입니다. 자아는 길들여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성모 마리아가 뱀의 머리를 발로 밟고 계신 것처럼 우리도 밟아야만 하는 존재입니다. 그래도 죽지는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40일간 단식하신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경은 이렇게 예언합니다.
“나는 너와 그 여자 사이에, 네 후손과 그 여자의 후손 사이에 적개심을 일으키리니 여자의 후손은 너의 머리에 상처를 입히고 너는 그의 발꿈치에 상처를 입히리라.”(창세 3,15)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뱀에게 저주를 내리시며 하신 말씀입니다. 성 이레네우스는 「이단 반박」에서 이 말씀을 성모 마리아를 통해 태어난 그리스도의 뱀에 대한 승리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교회도 “창세기의 이 구절은 ‘구속자 메시아’에 대한 첫 예고, 곧 뱀과 여인 사이의 싸움과 이 싸움에서 마침내 이 여인의 후손이 승리하리라는 것을 처음 알리는 것”(「가톨릭교회교리서」, 410항)이라고 설명합니다.
자아는 “발꿈치에 상처를 입히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위 창세기에서의 “발꿈치에 상처를 입히리라.”는 또한 “발꿈치를 바라보리라.”, “발꿈치를 보며 입을 벌리리라.”로 해석이 가능합니다. 성모 마리아와 예수 그리스도는 뱀에게 물리실 수가 없는 분들입니다. 뱀을 십자가에 매달고 발로 밟아 이기셔서 죄에 떨어진 적이 없으신 분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물렸습니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의 도움이 필요한 것입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411항 참조).
우리는 생각을 미혹하는 우리 안의 뱀과 싸워 이겨야합니다. 이 싸움을 하고 있어야 믿음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마치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처럼 불 뱀에 물려 죽어갈 것입니다. 우리는 장대에 매단 구리 뱀을 보아야 합니다.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 자신을 십자가에 마치 뱀처럼 매달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가톨릭교회교리서」도 “완덕의 길은 십자가를 거쳐 가는 길이다. 자아 포기와 영적 싸움 없이는 성덕도 있을 수 없다.”(2015항)라고 가르칩니다. “자아 포기” 없이는 그리스도를 따를 수 없습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2715항 참조).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을 이기셨다면 우리도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평생 싸워나가야 하는 우리 안의 가장 큰 적은 우리 자신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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