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0년 1월 16일 연중 제1주간 목요일

Margaret K 2020. 1. 15. 19:54

2020년 1월 16 연중 제1주간 목요일  


나병환자 하나가 예수께 와서 무릎을 꿇고 애원하며

“선생님은 하고자만 하시면

저를 깨끗이 고쳐 주실 수 있습니다.”하고 말씀드렸다.

예수께서 측은한 마음이 드시어 그에게 손을 갖다 대시며

“그렇게 해 주겠다. 깨끗하게 되어라.”하시자

그는 곳 나병 증세가 사라지면서 깨끗이 나았다.
(마르1,40-45)


A leper came to him

and kneeling down begged him and said,
“If you wish, you can make me clean.”
Moved with pity, he stretched out his hand,
touched the leper, and said to him, 
“I do will it. Be made clean.”

The leprosy left him immediately,

and he was made clean.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이스라엘인들은 필리스티아인들과의 전투에서 계약 궤마저 빼앗기고, 엘리의 두 아들도 죽임을 당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치유를 간절히 청하는 나병 환자를 낫게 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나병 환자와 예수님께서 주고받은 대화에는 하나 된 마음의 따뜻함이 느껴집니다. 

예수님의 치유는 당신의 능력을 드러내는 영웅 이야기로 서술되지 않습니다.
상대의 처지에 공감하고 화답하는 방식으로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하십니다.예수님께서 나병 환자에게 사제에게 가라고 하신 이유도 서로의 마음이 소통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레위 3,14; 신명 24,8 참조).
나병이라는 병도 문제지만, 그 병 때문에 대립과 반목으로 가득 찬 사람들의 완고함이 치유되기를 예수님께서는 바라십니다.
나병 환자의 병이 치유됨으로써 사람들의 완고함도 치유되기를 예수님께서는 바라고 계십니다.나병 환자는 자신의 치유를 세상 사람에게 알립니다.
말을 하는 데는 두 가지 서로 다른 자세가 있습니다.
하나는 제 말만을 내뱉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상대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위한 말을 건네는 경우입니다.
전자는 사람들의 마음을 닫게 하고, 후자는 사람들이 더 많은 이야기를 하도록 이끕니다.복음 선포는 후자의 말입니다.
복음 선포는 서로가 서로의 말을 하는 가운데 널리 퍼져 나가야 합니다.
말은 타인을 향하는 따뜻한 마음을 담아내는 그릇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담아낸 말을 거침없이 쏟아 낸 수많은 순교자들 덕분에 오늘 우리의 신앙은 따뜻한 말들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사랑, 희망, 용서, 화해 ……, 그 말들은 우리 교회가 세상에 보여 줄 수 있는 탁월한 선물입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어렸을 때 젓가락질을 못 한다고 혼났던 기억이 있습니다. 주먹을 쥐듯 젓가락질을 한다고 혼났습니다. 젓가락질이 힘들고 불편하더라도 고쳐야지만 예의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어른들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혼자 열심히 연습해서 고쳤습니다. 물론 고친 젓가락질도 틀렸다면서 또 혼나고, 이렇게 몇 차례의 교정 끝에 겨우 지금의 모습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어떤 사람에게도 젓가락질을 못 한다는 소리를 듣지 않고, 또 아주 능수능란하게 하고 있습니다.

사실 그때 어른들 앞에서 젓가락질하는 것은 커다란 스트레스였습니다. 그래서 어른 앞에서 식사하는 것은 늘 어려웠고, 일부러 그런 자리를 피하기도했습니다.

성인이 되어, 왜 젓가락질을 그렇게 해야 하는가 라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물론 젓가락질을 가장 편하게 할 방법이긴 하지만, 다르게 한다고 해서 왜 예의에 어긋나는 것이 될까요?

젓가락 예절이 먼 옛날부터 전해져 내려온 것으로 생각하지만, 조선 시대의 민속화에 나타난 젓가락질은 지금과 달리 X자 모습이었습니다. 지금처럼 V자 모양으로 젓가락 예법이 도입된 것은 일제 강점기의 일본에 의한 것이라고 하더군요. 어떻게 젓가락질을 하더라도 예절에 어긋날 것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다른 것을 틀렸다고 말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여기에 예절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하고, 다른 사람도 이렇게 한다는 보편성을 내세우기도 합니다. 그러나 다른 것이 틀린 것은 전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나병 환자를 고쳐 주십니다. 고쳐 주실 때의 장면을 복음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예수님께서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손을 내밀어 나병 환자에게 대시며 말씀하신 후, 그는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왜 이 나병 환자에게 손을 대셨을까 라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율법의 정결례에 따르면 나병 환자에게 손을 대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손을 대야지만 치료하실 수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말씀만으로도 고쳐 주셨고, 어떤 경우에는 환자게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대서 치유를 받기도 했습니다.

사람마다 다른 방식으로 다가가신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똑같은 방식으로 다가오시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에게 꼭 필요한 방식으로 다가오셨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런 모습을 보인 것은 우리 역시 하나의 틀을 만들어서 가두어놓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획일화하는 옹졸한 마음이 아니라, 다양함을 인정하며 받아들이는 넓은 마음이 주님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우리를 실망시키기 시작할 때 비로소 그 사랑을 제대로 알 수 있게 된다(알랭 드 보통).



주님과의 관계

꼭 가고 싶은 곳이 있었지만, 기회가 되지 않아 가보지 못했던 곳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곳에 대한 여행 에세이 책이 있는 것입니다. 얼른 책을 샀습니다. 다른 책보다도 먼저 큰 기대를 하면서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재미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게 가고 싶었던 곳에 대한 글이지만 별 감응도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아마 남이 여행하는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아서 일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내가 하는 여행을 하고 싶어서입니다.

자신이 직접 하는 경험이 중요합니다. 남의 경험을 통해서는 자신의 갈망을 절대로 채울 수가 없습니다.

주님에 대한 것 역시 남의 체험만으로는 채워질 수 없습니다. 내가 직접 주님께로 가고, 내가 직접 주님을 알기 위해 노력하고, 내가 직접 주님을 만나고, 내가 직접 주님과 대화를 나눠야 합니다.

주님과 관계는 어떠십니까? 여러분 자신의 뜨거운 체험을 만들고 있습니까? 혹시 남의 이야기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시지요?                  

순종보다 큰 가치는 없다

-전삼용신부-


  하루의 전투가 끝나고 나서 지휘관이 그날의 전투 상황에 대해 장교들과 함께 평가를 하고 있었습니다. 지휘관이 물었습니다. 어느 군인이 그 날 가장 탁월한 군인이었는지 생각들을 말해보라고 했습니다. 어느 장교는 가장 탁월한 군인은 그 날 용감하게 싸우다 전사한 군인이었다고 말했습니다. 다른 장교들도 자기 나름대로 의견을 제시했습니다.

     지휘관은 말했습니다.

“아니오. 여러분 모두가 다 틀렸어요. 오늘 전장에서 최선의 군인은 적을 죽이려고 칼을 들어 막 내리치려는 순간 퇴각 나팔 소리를 듣고 적을 치지 않고 팔을 내리고 나팔 소리대로 후퇴한 군인입니다. 지휘관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 군인의 가장 고귀한 일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평가하실 때도 같은 방식으로 하실 것입니다. 더 많이 선교하는 사람보다 순종하여 선교의 길을 포기할 줄 아는 사람을 더 기뻐하십니다. 주님의 뜻에 자신의 뜻을 죽이는 것만큼 큰 선교는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나병을 치유 받은 사람은 너무 기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고 당부하십니다. 그러나 그는 떠나가서 이 이야기를 널이 알리고 퍼뜨렸습니다. 그것이 주님께 도움이 되는 일이라고 스스로 판단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드러나게 고을로 들어가지 못하시고, 바깥 외딴곳에 머무르셨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순종하는 것은 더 좋은 일입니다. 복음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의 모습을 보고 더 깊이 감동합니다.      

      요즘 순종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합니다. 저의 책을 정말 많은 분들이 읽어주십니다. 그러다보니 그 내용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시는 분들도 생겨납니다. 가장 큰 거부감을 일으키는 부분이 “사람이 어떻게 하느님이라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저는 사람이 하느님이라 믿고 신앙을 고백할 수 있어야 구원에 이른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그러나 기존 교리에 익숙하신 분들은 사람이 열심히 노력해서 “하느님처럼” 되는 것이지 하느님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하느님임을 믿지 않으면 인간의 수준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성체로 영하고 그분과 한 몸이기 때문에 하느님이란 믿음을 가져야만 율법을 지킬 수 있습니다. 만약 베드로가 자신이 인간이라는 믿음에 사로잡혀 있었다면 물 위를 걸을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요? 늑대에게 자란 아이들이 자신을 늑대라고 믿는 이상 인간처럼 두 발로 걸을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그렇게 자기가 믿는 본성 속에 갇혀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하느님임을 믿어야합니다. 그래야 인간의 본성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믿는 만큼 성장합니다. 유태인들이 큰 성과를 올리며 사는 이유는 자신들은 하느님의 선택된 백성이라는 믿음 때문입니다. 그들은 바다가 있을 때 바다를 가를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바다 위를 걸을 생각을 해야 합니다. 자신이 인간이란 믿음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뗏목을 만들고 배를 만듭니다. 그런 식으론 베드로의 믿음에 도달하지 못합니다. 베드로 교회에 속하려면 먼저 하느님임을 믿고 하느님이라면 불가능한 것이 없다고 믿어야합니다.

      ​하느님만이 물 위를 걸으실 수 있습니다. “하느님처럼” 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처럼 되려고 선악과를 소유하고 먹고 서로를 심판하였습니다. 이미 하느님이 되었다고 믿어야 자신을 하느님처럼 만드는 이런저런 유혹에 빠지지 않습니다. 이미 하느님임을 믿지 않으면 하느님처럼 되려는 자아에 사로잡힙니다. 이미 하느님임을 믿어야 물 위를 걷는 연습을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치유 받은 병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병은 치유 받았지만 자신이 하느님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은 가지지 못했습니다. 그가 마음까지 치유 받고 믿을 줄 알았다면 굳이 자신의 이야기를 퍼뜨리면서 복음을 전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하느님이 되어야 부족한 것이 없어지고 부족한 것이 없어야 순종할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노력으로 보답하려 했습니다.

      인간이 하느님이 되게 하신 것에 가장 합당한 보답이란 하느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하느님의 말씀에 무조건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는 무엇을 행해서가 아니라 순종을 통해 자신을 하느님의 본성으로 올려주신 분께 보답을 드립니다. 하느님께서는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사람보다 순종할 수 있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가톨릭교회교리서」는 성 아타나시오의 말을 빌려 “그분은(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하느님이 되게 하시려고 인간이 되셨다.”라고 가르치며, 성 토마스 데 아퀴노의 말을 빌려 “하느님의 외아들은 ... 인간을 신으로 만들기 위하여 인간이 되셨다.”(460항)라고 가르칩니다. “폐기될 수 없는 성경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이들을 신이라고”(요한 10,35)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을 하느님이 되게 하시려고 인간이 되셨다고 교리서가 가르치는데 내가 하느님이라 믿는다고 해서 무슨 잘못이겠습니까? 오히려 믿지 않는 것이 잘못입니다.

      그럼에도 만약 교도권에서 “책을 이러저러하게 수정해라”, 혹은 “이 책을 더 이상 팔지 말라.”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를 고민합니다. 그럴 때마다 결론은 단순합니다. 고치라면 고치고 책을 더 이상 인쇄하지 말라고 하면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그것이 복음을 전하는데 장애가 되는 것처럼 느껴지겠지만 주님께 더 큰 영광을 드리는 길임이 확실합니다. 순종보다 더 큰 복음적 가치는 없습니다.


-조재형신부-


새해를 시작하면서 새 영세자의 다짐을 신문에서 읽었습니다. 새 영세자는 캐나다 토론토 한맘 성당에서 세례 받았습니다. 새 영세자는 미사 참례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교리 시간에 수녀님께서는 주일 미사 참례를 강조하셨고, 교리 배우면서 주일 미사를 참례하였다고 합니다. 성전 입구에서 제대로 행렬하는 사제를 바라보는 신자들의 모습이 아름다웠다고 합니다. 성전의 분위기는 세상에서는 볼 없는 엄숙함이었다고 합니다. 사제의 강론은 일상에 지친 삶에 큰 위로와 용기를 주었다고 합니다. 7개월 교리를 배웠고, 세례를 받았으니, 주님의 자녀로 충실하게 살겠다고 하였습니다. 신앙은 세례 받은 햇수로 커지는 건 아닙니다. 신앙은 하느님의 자녀로 살겠다는 다짐과 실천으로 커지는 겁니다. 새 영세자는 신앙인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알았고, 하나씩 실천하고 있으니 하느님의 사랑이 함께 하실 겁니다.

 

연중 제1주간 본기도의 내용은 주님 백성의 간절한 기도를 자애로이 들으시어 저희가 해야 할 일을 깨닫고 깨달은 것을 실천하게 하소서.”입니다. 한국의 국회의원들이 해야 할 일을 깨닫고 깨달은 것을 실천하면 좋겠습니다. 당리당략에 따라서 움직이기 보다는 국민과 국가를 위해서 움직이면 좋겠습니다. 강대국이 해야 할 일을 깨닫고 깨달은 것을 실천하면 좋겠습니다. 난민들의 어려운 처지를 헤아리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지구라는 푸른 별에 함께 사는 공동체임을 헤아리면 좋겠습니다. 환경 보호에 앞장서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해야 할 일을 깨닫고 깨달은 것을 실천하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 사람이 되신 것은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고, 백성 가운데 병자들을 고쳐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교회는 복음을 선포하고, 무엇보다 가난한 이, 외로운 이, 아픈 이의 친구가 되어야 합니다.

 

2020년 미국에서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였습니다. 저 역시 제가 해야 할 일을 깨닫고, 깨달은 것을 실천하려고 합니다. 매일 새벽 기도와 묵상으로 하루를 여는 겁니다. 매주 발행하는 신문의 지면을 알차게 채우는 겁니다. 미주 지역 가톨릭 한인 공동체의 소식을 전하는 겁니다. 가슴이 따뜻해지는 이야기를 전하는 겁니다. 지치고 힘든 이웃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는 이야기를 전하는 겁니다. 복음을 선포하는 마음으로 신문 홍보를 하는 겁니다. 성지순례를 가려 합니다. 매일 함께 미사하고, 순례하고, 기도하면서 신자들과 함께 하려합니다. 청소년들과 함께 멕시코 봉사활동을 가려 합니다. 청소년들이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는 걸 봉사를 통해서 느끼면 좋겠습니다. 눈 덮인 길을 걸어갈 때면 발걸음을 함부로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지금 나의 발자국이 뒷사람의 이정표가 되기 때문입니다. 제가 걸어가는 길이 부끄럽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충실하게 따라가면 좋겠습니다. 산다는 것은 수많은 처음을 만들어가는 끊임없는 시작입니다.

 

고인이 되신 신영복 선생님의 처음처럼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처음으로 하늘을 만나는 어린 새처럼

처음으로 땅을 밟고 일어서는 새싹처럼

우리는 하루가 저무는 저녁 무렵에도

아침처럼/ 새봄처럼/ 처음처럼

다시 새날을 시작하고 있다."


주님 앞에 무릎을 꿇어라

-반영억신부-


  편찮으신 분이 많습니다. 질병으로 다가온 고통을 이긴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주님께 믿음을 고백해도 아픔은 여전하기 때문에 진정 그분이 함께하시는 것인지 의문이 생길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기도합니다. 주님, 하고자 하시면 모든 것을 이루실수 있으시니 고통을 거두어 주시고 당신이 몸소 함께 하고 계심을 느끼게 해 주십시오. 고통이 계속된다면 믿음이 흔들리지 않게 지켜주시고, 오히려 그 아픔을 통해 당신의 수난 고통을 체험하는 시간으로 인도해 주십시오. 유다인들에게 나병은 하늘에서 내린 형벌로 저주 받은 모습이요(레위13,34). 죽음으로 향하는 상태(욥기18,13)였습니다. 나병에 걸린 사람은 공공장소나 사람들의 모임에 나타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과 접촉할 수 없었습니다. 혹시라도 누군가가 다가오면 자신이 ‘불결한 사람’ 이라고 외치면서 접근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법으로 규정하였습니다(레위13,45-46).


법은 접근을 막을 뿐 나병을 치유하기 위하여 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이것이 율법의 한계입니다. 문제는 알지만 해결 방법을 모색하지 않는 것은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의 나병환자는 예수님께 와서 무릎을 꿇고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르1,40). 하며 도움을 청하였습니다.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더 이상 다른 길이 없어서 마지막으로, 마치 물에 빠진 이가 지푸라기라도 잡고 매달리는 간절한 심정으로 하소연하는 것입니다. 나병환자는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이상의 것이라도 할 마음의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사실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항복의 자세입니다. ‘저의 목숨은 당신께 달렸으니 저를 살리든지 죽이든지 알아서 하십시오. 그저 저는 당신의 처분만을 기다립니다. 저로써는 더 이상 할 것이 없습니다.’ 라고 애원하는 자세요, ‘한 말씀만 하십시오. 당신은 저의 주인이고 저를 고쳐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고 저의 희망이십니다.’ 하는 순종의 자세이기도 합니다. 결국 무릎을 꿇은 것은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이러한 간절함에 예수님께서는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곧바로 “나병이 가시고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죄인이고 불결한 사람이기 때문에 하느님께 나아갈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기 때문에 더욱 다가와야 하고 또 그 어떤 것도 장애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주님은 사랑과 자비로 감싸주시고 치유해 주시는 분입니다. 아무런 조건 없이 지금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주시는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일’은 살리는 일입니다. 인간됨의 회복에 있습니다. 차별과 소외로 공동체에서 갈려나간 이들이 다시 공동체 안에 함께할 수 있는 길을 치유를 통해 보여주셨습니다.


  사실 우리는 육체적 질병뿐 아니라 정신적, 영적인 나병을 앓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릎을 꿇고 간절하게 애원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무릎을 꿇는 자세는 우리가 주님께 나올 때 취할 가장 기본적인 자세임에도 그렇게 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우리가 앓고 있는 병에서 치유되려면 먼저 무릎을 꿇는 자세부터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내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찾아야 합니다. 주님의 뜻이 가장 좋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 바오로회 유광수 신부님은 무릎 꿇지 못하는 원인을 다섯 가지로 말씀하셨습니다. 1). 자신이 믿는 주님이 어떤 분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2). 지금 자신이 어떤 병이 들었는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3).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주고자 하는 선물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4). 교만함 때문이다. 교만한 자세란 목덜미가 뻣뻣한 자세이다. 몸이 굳어 있는 사람이고, 마음이 완고한 사람이다. 5).하느님으로부터 자신이 받은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주님 앞에 무릎 꿇는 기쁨의 날 되시기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르 1,40)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은 나병환자의 치유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구약의 율법규정(레위 13,45-46 참조)에 따르면, 나병에 걸린 사람은 옷을 찢고 머리를 풀고서, 스스로 부정하다고 외쳐야 했습니다. 공공장소나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에 나타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과는 접촉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혹시 누군가가 저기에게 접근해 오면 자신이 불결한 자라고 외치면서 접근하지 못하도록 경고해야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어이된 일인지, 오늘 <복음>에서는 나병환자가 예수님을 피해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가와서 무릎을 꿇고 애원합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구약의 법과예수님의 복음의 차이를 극렬하게 엿볼 수 있습니다. 곧 구약의 율법은 나병환자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아야 한다는 규정을 제시할 뿐 그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이것이 율법의 한계라 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는 나병환자이기 때문에,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예수님께 와서 치유를 받습니다. 이처럼, <복음>은 우리가 죄인이고 불결한 사람이기 때문에 하느님께 나아갈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예수님께 다가가야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병들었고 죄인이기에, 감싸주시고 치료해주십니다. 예컨대, <요한복음> 8장에 나오는 간음한 여인 이야기에서도 이를 잘 볼 수 있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간음한 여인이 죄인이기 때문에율법에 따라 돌로 쳐 죽여야 한다고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죄인이기 때문에바로 그 이유 때문에 용서받아야 할 대상이라고 하십니다. <복음>은 이처럼, 규정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호의를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편, 나병환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르 1,40)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라고 하시는 것은 자신의 바람이 아니라, 스승님의 바람이 이루어지소서! 라는 의탁입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바람에 대해 하느님께서 응답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바람에 대해 우리가 응답하는 것을 말합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께서 겟세마니에서 하신 것처럼, 내 뜻이 아니라 당신 뜻대로 하소서라는 주인께 속한 이로서의 자세입니다.

이는 동시에, 당신의 치유의 능력, 곧 권능을 믿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 능력의 행사는 우리 자신에게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달려있기에 오로지 주님의 처분에 온전히 의탁한다는 뜻입니다. 곧 주님을 믿고 신뢰하고 의탁하며, 주님의 원의에 순명하겠다는 뜻입니다.

오늘, 우리의 기도는 어떠한가? 나의 바람을 하느님께 바라고 있는가,

아니면 하느님의 바람이 나에게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가?


오늘 우리는 우리의 희망이 아니라, 하느님의 희망이 우리에게 이루어지기를 기도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의 희망을 하느님을 통해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희망이 우리에게서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느님의 희망이 이루어지는 공가이요 장소로 자신을 내어드려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 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마르 1,41)


주님,

제 온 몸이 부스럼투성입니다

죄와 상처로 속이 문드러지고 마음이 병들었습니다.

불결하기에 저는 망설이지만, 당신은 오히려 불결하기에 다가오라 하십니다.

죄인이기에 저는 숨지만, 당신은 오히려 죄인이기에 용서받을 대상이라 하십니다.

당신께서 원하신 바를 이루소서.

제가 하고자 한 바가 아니라, 당신이 하고자 한 바를 이루소서!

저의 희망이 아니라, 당신의 희망을 제게서 이루소서.

당신이 원하니까 저도 원하게 하소서! 아멘.


믿음, 순종

-송영진신부-


“어떤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와서 도움을 청하였다.
그가 무릎을 꿇고 이렇게 말하였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그러자 바로 나병이 가시고 그가 깨끗하게 되었다(마르 1,40-42).”

이 이야기는 “예수님은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분”이라는 믿음을 고백하는
신앙고백과 같은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병 환자를 고쳐 주신 일은, 그에게 ‘새 생명’과 ‘새 인생’을
주신 일이고, 그를 죽음과도 같은 절망에서 구원해 주신 일입니다.
여기서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라는
말에는, “주님만이 저를 고쳐 주실 수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여러 의사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고,
또 기적을 행하는 여러 예언자들 가운데 한 분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인간에게 완전한 치유와 생명과 구원을 주실 수 있는
단 한 분뿐인 구세주입니다.

그 병자가 예수님을 그런 분으로 믿고 있는 것은 잘한 일이긴 한데,
그렇지만 “하고자 하시면”이라는 말은,
그의 믿음이 아직은 부족한 상태에 있음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의 ‘권능’에 대한 믿음은 있지만,
예수님의 ‘자비’에 대한 믿음은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가엾은 마음’이라는 말과 “내가 하고자 하니” 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자비’를 나타냅니다.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똑같이 가엾게 여기시는 분입니다.
또 사람들이 청하기도 전에 먼저 자비를 베풀어주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자비’ 자체이신 분입니다.
(어떤 사람은 가엾게 여기시고, 어떤 사람은 차갑게 대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또 마음 내킬 때에만, 당신이 하고 싶을 때에만 자비를 베풀어주시는 분이 아니라,
사람들이 청하기도 전에 이미 사람들의 사정을 잘 알고 계시고,
언제나 항상 우리가 청한 것보다 더 좋은 것,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곧 돌려보내시며 단단히 이르셨다.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네가 깨끗해진 것과 관련하여
모세가 명령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
그러나 그는 떠나가서 이 이야기를 널리 알리고 퍼뜨리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드러나게 고을로 들어가지 못하시고,
바깥 외딴곳에 머무르셨다.
그래도 사람들은 사방에서 그분께 모여들었다(마르 1,43-45).”

예수님께서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라고
엄하게 명령하신 것은, ‘몸의 병을 잘 고치는 의사’로만
소문이 퍼지는 것을 막으신 일입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님의 명령을 어기고,
예수님께서 병을 고쳐 주셨다는 것을 ‘널리 알리고’ 퍼뜨립니다.
이것은 분명히 불순종입니다.
그를 위해서, 또 그를 대신해서 굳이 변명한다면,
병을 고치고 건강하게 된 것이 너무 기뻐서,
또 병을 고쳐 주신 예수님이 너무 고마워서
사람들에게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그런 행동에 대해서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야기하지 말라고 했으면 이야기하지 말 것이지, 왜 말을 안 듣나?”
(그는 예수님의 권능에 대한 믿음은 가지고 있었지만,
예수님의 지시에 순종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믿음이 불완전하고 미성숙한 믿음이라는 것을 드러냈습니다.
정말로 믿는다면 순종해야 합니다.
순종하지 않는 것은 안 믿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최초의 죄’가 ‘불순종’이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아마도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따 먹지 말라는 하느님의 명령을
납득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사탄이 유혹해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유혹을 받기 전부터 그들은 하느님의 명령에 불만을 품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복음 말씀에 나오는 병자도 그랬을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명령을 납득하지 못했을 것이고,
“나에게 일어난 이 좋은 일을 널리 알리는 것은 죄가 되지 않는다.
죄가 되기는커녕 예수님을 위해서 좋은 일을 하는 것이다.”
라고 자기 마음대로 판단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고을로 들어가지 못하시고 ‘바깥 외딴곳에’ 머무르신 것은,
사람들이 ‘몸의 병’을 고치는 것만을 원해서 모여들었기 때문입니다.
(모여든 사람들은 복음 선포는 외면하고,
또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도 안 들으려고 하고,
병을 고치는 일만 하라고 고집을 부렸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병자가 예수님의 이야기를 널리 알리고 퍼뜨린 일은
결과적으로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크게 방해한 셈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계명을 실천하는 것은, ‘주님의 계명’이기 때문입니다.
왜 그래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아도, 실천하기가 너무 어렵다고 느껴져도,
그래도 주님의 계명이니까 실천합니다.
대표적인 예가 ‘재물(돈)’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 예수님께서 재물에 관해서 여러 가지 말씀을 하셨을 때,
‘돈을 좋아하는’ 바리사이들은 그 말씀들을 받아들이기는커녕
예수님을 비웃었습니다(루카 16,14).
아마도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들이
현실과 너무 동떨어진 이론일 뿐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아니면 재물(돈)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을 ‘하느님의 축복’이라고 생각했거나......
오늘날에도 그런 바리사이들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엄격한 가르침들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해서
어떻게든 완화시키려고 하고, 현실과 절충하려고 하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지 않는 자신의 생활을 합리화하려고 하고...
충실하게 예수님의 가르침들을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을
‘율법주의자, 근본주의자’ 라고 공격하고...
그들은 그렇게 살면서 점점 더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멀어져 갑니다.>  


-조욱현신부-


복음: 마르 1,40-45: 깨끗하게 되어라

오늘 복음에서는 나병환자 하나가 예수님께 와서 무릎을 꿇고 애원하며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40) 하고 말씀드렸을 때, 예수님은 측은한 마음을 가지시고 그에게 손을 대시며,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41) 하셨다. 그러자 나병의 증세가 깨끗하게 사라지고 나았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이 금하는 데도 나병환자를 만지셨다. 왜 그랬을까?

 

그분은 깨끗한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다.”(티토 1,15)는 것을 보여주시려고 그에게 손을 대신 것이다. 즉 한 사람 안에 있는 불결이 다른 사람에게 옮지 않으며, 외적인 불결이 내적으로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신다. 예수님께서는 만져서는 안 되는 나병환자에게 손을 대시어 우리에게 겸손을 가르치신다. 그들의 외적인 모습이나 허물 때문에 그들을 혐오하거나 업신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다.

 

예수님께서 만지시려고 손을 내미실 때, 이미 나병은 사라져 버린다. 주님의 손은 나병환자를 만지신 것이 아니라, 깨끗해진 몸을 만지신 것이다. 만일 우리의 영혼이 나쁜 병으로 감염이 되었거나, 죄로 오염이 되어있다면 지금 즉시 하느님께로 돌아와 이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 “주님,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이 하실 수 있습니다.”(마르 1,40) 하느님께서는 즉시 우리를 깨끗하게 해 주실 것이다. 그분의 거룩한 손은 나병으로 더러워지지 않았고, 환자는 그 거룩한 손으로 깨끗해졌다.

 

예수님께서는 이 기적을 행하시면서 침묵을 요구하셨지만 오래 감추어지지는 못했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도 이런 일이 벌어지곤 한다. 우리도 그런 경우가 많을 것이다. 예수님의 계명과 모범을 따르면서, 또 기도하면서 자신이 하고 있는 것이 알려지지 않기를 바라지만,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뜻과는 반대로 그 활동이 알려지기도 한다. 세상에는 이름 없는 천사들도 많다.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네가 깨끗해진 것과 관련하여 모세가 명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44) 주님께서는 나병환자를 사제에게 보내시어 사제직을 존중하셨고, 치유의 예물을 바치라고 명하셨다.(마태 8,4; 마르 1,44; 루카 5,14) 주님께서는 모세의 율법을 인정하셨다. 이 율법이 예수님에 의해 완성되고 있다. 그분은 당신의 말씀으로 나병환자를 치유하시고 사제에게 보내 예물을 바치게 하신 것이다.

 

우리가 결정적으로 하느님의 자비보다는 나 자신을 솔직히 드러내지 못하기 때문에 용서를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나의 죄보다도 하느님의 자비가 더 크시다는 것을 믿고 그분께 나아갈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언제나 우리를 기다리시는 그분께 갈 수 있는 용기와 은혜를 청하면서 항구히 기도하여야 할 것이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마르 1, 41)

-한상우신부-

삶의 바닥에서
만나게되는
간절한 치유입니다.

간절함은
주님을 향하고
주님을 드디어
만나게합니다.

깨끗히 났고
싶은 간절한 소망을
언제나 주님께서
들어주십니다.

끝내 우리를
치유와 구원으로
이끄시는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사람에게로
돌아갈 치유입니다.

잃어버린 관계를
되찾아 주십니다.

우리의 여정안에
치유와 회복이
있습니다.

치유는 우리의
과거와 현재를
이어줍니다.

치유는 길이며
치유는 탄생입니다.

신앙의 모든
감각들이 살아나고
깨어나는 기쁨입니다.

깨끗하게 되는
길을 주님을 통해
만나는 기쁜 날
되십시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들은 하느님의 뜻 앞에서 우리가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 깨닫게 해줍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르 1,40).

한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다가와 청합니다. 사람에게 가까이 갈 수 없었던 그로서는 큰 용기를 낸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하고자 하는' 의지가, '이루는' 능력과 하나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는 그저 자신을 예수님께 겸손히 의탁합니다.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마르 1,44).

그가 청한 대로 예수님은 그에게 손을 대어 낫게 해 주십니다. 하느님의 본성인 가엾이 여기는 마음이 예수님의 의지와 행위로 이어진 것입니다. 이 모두는 "선"을 지향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깨끗해진 그에게 침묵을 권하십니다. "말하지 말라"는 명령이라기보다 "말하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권고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그는 떠나가서 이 이야기를 널리 알리고 퍼뜨리기 시작하였다"(마르 1,45).

그러나 치유받은 그는 이 권고에 순종하지 않고 오히려 "널리 알리고 퍼뜨리기 시작"합니다. 왜 그랬을지 본인 이야기를 들어봐야 정확하겠지만 그럴 수 없으니, 그저 나름 인간적인 방식으로 예수님께 보답하려는 게 아니었을까 짐작해 봅니다.

사제에게 보여 깨끗해진 몸으로 공동체에 받아들여졌으니 굳이 더 소문낼 필요는 없었을 테고, 혹 이 기적으로 예수님께 더 큰 명예와 영광이 돌아가게 해드리고 싶었던 것 아닐까 싶습니다. 감사한 마음에 정말로 그게 예수님을 위하는 거라 여겼을 것 같습니다.

"바깥 외딴곳에 머무르셨다"(마르 1,45).

그 결과는 이것입니다. 수난과 죽음을 지나 부활까지 이르러야 성경에 기록된 진정한 메시아의 예언이 완성될 것이지만, 지금 이 차원에서는 자칫 예수님이 기적이나 마술을 일으키는 신비가, 치유자 정도로 보이기 십상이지요. 이에 열광해 몰려드는 이들 역시 딱 그만큼이 필요한 이들입니다.

나병에서 치유된 이는 예수님 말씀에 순종하는 대신 자기 나름대로 "선"이라 여기는 방식을 선택합니다. 그리고 이는 예수님 활동에 제약을 초래하지요. 불순종과 활동 방해. 여기까지 보면 예수님께서 베푸신 은혜에 대한 그의 보답은 그리 바람직하게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사방에서 그분께 모여들었다"(마르 1,45).

예수님이 드러나게 고을로 들어가실 수 없어 머무르신 "바깥 외딴곳"으로 사방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니, 이제 예수님 계신 곳이 중심이 됩니다. 세상의 중심이 경제와 종교, 문화가 융성한 고을 한복판이 아니라, 거기서 밀려난 변두리 인생들이 거하는 곳으로 이동된 셈이지요.

이 세상에 오신 하느님의 제자리는 예루살렘 성전 한가운데가 아니라 바깥 외딴곳입니다. 그분이 여기 계셔야 성전이나 성문 곁에 감히 얼씬도 못하는 가난하고 비참하고 죄인인 이들이 예수님을 쉬이 만날 수 있을 테니까요. 그러니 치유받은 이의 불순종이 꼭 부정적 결과를 낳은 것만은 아닌 것 같네요.

제1독서는 이스라엘과 필리스티아의 싸움 이야기입니다.

"주님의 계약 궤를 모셔 옵시다.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에 오시어 원수들 손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도록 합시다"(1사무 4,3).

패한 이스라엘은 패배의 원인에 대해 질문은 던지지만, 깊이 성찰하고 찾기보다 우선 계약 궤를 이 전장으로 모셔오기로 결정합니다. 그런데 "구원하시도록 합시다."는 말에서는 어째 주종이 뒤바뀐 듯한 냄새가 납니다. 마치 하느님이 그들의 명령을 들으셔야 할 것 같은 기세입니다.

"온 이스라엘은 땅이 뒤흔들리도록 큰 함성을 올렸다"(1사무 4,5).

계약궤의 도착에 고무된 이스라엘은 적진에 들릴 정도로 함성을 지릅니다. 그런데 이 경솔한 함성이 적군의 결기를 돋구어, 죽기살기로 항전한 필리스티아에게 오히려 더 크게 패하게 되지요.

하느님은 모든 인간이 추구하는 목적이십니다. 결코 우리 편의 이익을 위한 도구가 되실 수 없는 분이시지요. 하느님의 뜻을 묻지도 않고 자신들의 패인을 살피지도 않은 이스라엘이 계약 궤를 이용해 승리를 얻으려 한 자체에서 이미 패배는 시작되었습니다. 기적은 바라는 이의 지향의 순수성에 상응해 일어납니다. 하느님께서 순수 그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패배하여 저마다 자기 천막으로 도망쳤다. 하느님의 궤도 빼앗기고 엘리의 두 아들 호프니와 피느하스도 죽었다"(1사무 4,10).

여기까지 보면 이런 비극이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오랫동안 필리스티아에게 시달리며 고통을 겪어왔으니까요. 게다가 하느님 현존인 계약 궤마저 이방인 손에 넘어갔으니 이스라엘로서는 전부를 잃은 것과 다름없습니다.

엘리는 주님께서 사제로 선택하신 지파에서 난 사제이기에(1사무 2,28) 그의 아들 호프니와 피느하스 역시 사제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악행이 너무 심하여 하느님께서 이미 그들에게서 얼굴을 돌리셨지요(1사무 2,11-36; 3,11-14 참조).

엘리의 두 사제 아들들의 죽음 이후 이스라엘에서는 사무엘의 존재가 부각됩니다. 사무엘은 주님께서 "믿음직한 사제 하나를 일으키리니 그가 내 마음과 생각에 따라 행동할 것"(1사무 2,35)이라 하신 인물이지만, 사실 에프라임 지파 출신으로 엄밀히 말하면 사제 가문인 레위 지파의 아론 가문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에 임금이 없고 저마다 제 눈에 옳게 보이는 대로 행동하던 혼란한 판관 시대에, 엘리에게까지 이어진 세습 사제직이 하느님 선택에 의한 사제에게로 넘어간 것이지요.

계약 궤를 빼앗기고 사제마저 잃은 이 전쟁은,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방인에게까지 하느님의 권능을 알리고 사무엘로 하여금 이스라엘 전역을 다스리면서 왕정 제도로 이어질 준비를 하게 만드는 결과로 이어집니다. 그러니 인간의 눈에 보이는 끝이 결코 하느님 계획 안의 끝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벗님! 살다 보면 구비구비 여러 일들을 겪게 되지요. 우리 눈에는 딱 비극 같은데 어느 결에 좋은 열매가 맺히는 일도 있고, 분명 운수대통인 줄 알았는데 쓴 물만 삼키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니 팔랑팔랑 일희일비하는 우리를 부끄럽게 만드는, 너무도 무한하고 거대한 하느님의 계획 안에서 우리가 고백할 건 그저 "무지"밖에 없을 듯합니다.

다만, 무지한 우리의 청이 합당하려면, 주님을 자기 복락을 위한 도구로 이용하지 않고, 그분을 더 깊이 사랑하고 흠숭하기 위한, 그분을 목적으로 해야 합니다. 자, 주님은 나에게 수단입니까, 목적입니까? 답은 내 안에 있습니다.

얄팍한 청원 기도

-김찬선신부-

"주님께서 어찌하여 오늘 필리스티아인들 앞에서 우리를 치셨을까?"

이스라엘 군대는 필리스티아와 전투에서 두 번이나 대패를 합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충격이었을 텐데 특히
두 번째 전투에서의 대패가 더 큰 충격이었을 겁니다.
궤약의 궤를 진영에 모신 다음에도 대패를 하였으니 말입니다.

이스라엘 군대는 1차 전투에서 패한 것이 계약의 궤가 없이
싸웠기에 졌다고 1차전 후에 반성을 했는데 이것은 당연한 반성이었습니다.
이때라도 자기들이 하느님 없이 전투를 한 것이 잘못임을 깨달았으니 다행입니다.

그리고 전투에서 지고난 뒤 필리스티아 군대에게 졌다고 하지 않고
하느님께서 치셨다고 한 것도 올바른 믿음의 표현입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은 무엇을 하고 실패했을 때 그 실패의 원인을
자신의 약함이나 남의 강함에서, 곧 인간에게서 찾을 수밖에 없고
우리 신앙인 중에도 신앙이 약한 분은 원인을 그렇게 찾곤 하지만
신앙인이라면 실패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찾아야 마땅하겠지요.

이것이 물론 실패의 탓을 하느님께 돌리라는 것은 아니지요.
내가 잘못하고 탓을 남에게 돌리거나 하느님께 돌리는 것은
참으로 비겁하고 무책임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지만
이것은 탓을 돌리라는 것이 아니라 원인을 찾자는 것이지요.

아무튼 이스라엘 군대는 패인을 하느님 없는 전투라고 봤고,
그래서 두 번째 전투에는 계약의 궤를 모시고 나간 것인데 또 집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또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습니까?

물론 이것도 하느님께서 지게 하신 거라고 이해해야겠지만
문제는 계약의 궤를 모셨는데도 지게 하신 그 뜻이 뭣이냐 그거지요.

오늘 여호수아기에는 그 이유가 나와있지 않지만
제 생각에 그것은 진정 하느님을 믿은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이용해먹은 것에 불과하기 때문일 겁니다.
다급하니까 하느님을 찾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 인간 관계에서 급할 때는 도와달라고 애걸복걸하다가
지나고 나면 입 싹 닦고 모르는 체하는 경우가 많고
그래서 배신감을 느낄 때가 많은데 그와 같은 것이지요.

우리의 신앙 생활에 있어서도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참으로 하느님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며
늘 하느님께 의탁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 필요할 때만 하느님 찾고
필요가 없어지면 차버리는 그런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필요가 있으면 하느님도 있고
필요가 없으면 하느님도 없는
그런 하느님이시길 하느님은 원하시지 않고,
그런 신앙생활을 우리가 하는 것을 원치 않으시기에
그런 얄팍한 청원의 기도는 하느님께서 들어주지 않으십니다.

여러분이라면 그런 청원 들어주시겠습니까?
자식이 그럴 경우 그런 자식이 미워도
부모의 사랑 때문에 어쩔수없이 늘 들어주지만
자식의 버릇을 고쳐주기 위해서
한 번 정도는 눈 딱 감고 안 들어주실 때도 있지요?

아무튼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이용해먹지 말아야 함을
오늘 여호수아기의 얘기에서 배울 수 있어야겠습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8년 1월 11일 연중 제1주간 목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나병환자 하나가 예수께 와서 무릎을 꿇고 애원하며 “선생님은 하고자만 하시면 저를 깨끗이 고쳐 주실 수 있습니다.”하고 말씀드렸다. 예수께서 측은한 마음이 드시어 그에게 손을 갖다 대시며 “그렇게 해 주겠다. 깨끗하게 되어라.”하시자 그는 곳 나병 증세가 사라지면서 깨끗이 나았다.(마르1,40-45)


“예수님께서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손을 내밀어 나병 환자에게 대시며 말씀하신 후, 그는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왜 이 나병 환자에게 손을 대셨을까 라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율법의 정결례에 따르면 나병 환자에게 손을 대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손을 대야지만 치료하실 수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말씀만으로도 고쳐 주셨고, 어떤 경우에는 환자게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대서 치유를 받기도 했습니다.

사람마다 다른 방식으로 다가가신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똑같은 방식으로 다가오시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에게 꼭 필요한 방식으로 다가오셨던 것입니다.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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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나병을 치유 받은 사람은 너무 기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고 당부하십니다. 그러나 그는 떠나가서 이 이야기를 널이 알리고 퍼뜨렸습니다. 그것이 주님께 도움이 되는 일이라고 스스로 판단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드러나게 고을로 들어가지 못하시고, 바깥 외딴곳에 머무르셨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순종하는 것은 더 좋은 일입니다. 복음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의 모습을 보고 더 깊이 감동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성체로 영하고 그분과 한 몸이기 때문에 하느님이란 믿음을 가져야만 율법을 지킬 수 있습니다. 만약 베드로가 자신이 인간이라는 믿음에 사로잡혀 있었다면 물 위를 걸을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요? 늑대에게 자란 아이들이 자신을 늑대라고 믿는 이상 인간처럼 두 발로 걸을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그렇게 자기가 믿는 본성 속에 갇혀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하느님임을 믿어야합니다. 그래야 인간의 본성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믿는 만큼 성장합니다. 유태인들이 큰 성과를 올리며 사는 이유는 자신들은 하느님의 선택된 백성이라는 믿음 때문입니다. 그들은 바다가 있을 때 바다를 가를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바다 위를 걸을 생각을 해야 합니다. 자신이 인간이란 믿음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뗏목을 만들고 배를 만듭니다. 그런 식으론 베드로의 믿음에 도달하지 못합니다. 베드로 교회에 속하려면 먼저 하느님임을 믿고 하느님이라면 불가능한 것이 없다고 믿어야합니다.

      ​하느님만이 물 위를 걸으실 수 있습니다. “하느님처럼” 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처럼 되려고 선악과를 소유하고 먹고 서로를 심판하였습니다. 이미 하느님이 되었다고 믿어야 자신을 하느님처럼 만드는 이런저런 유혹에 빠지지 않습니다. 이미 하느님임을 믿지 않으면 하느님처럼 되려는 자아에 사로잡힙니다. 이미 하느님임을 믿어야 물 위를 걷는 연습을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치유 받은 병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병은 치유 받았지만 자신이 하느님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은 가지지 못했습니다. 그가 마음까지 치유 받고 믿을 줄 알았다면 굳이 자신의 이야기를 퍼뜨리면서 복음을 전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하느님이 되어야 부족한 것이 없어지고 부족한 것이 없어야 순종할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노력으로 보답하려 했습니다.

  「가톨릭교회교리서」는 성 아타나시오의 말을 빌려 “그분은(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하느님이 되게 하시려고 인간이 되셨다.”라고 가르치며, 성 토마스 데 아퀴노의 말을 빌려 “하느님의 외아들은 ... 인간을 신으로 만들기 위하여 인간이 되셨다.”(460항)라고 가르칩니다. “폐기될 수 없는 성경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이들을 신이라고”(요한 10,35)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을 하느님이 되게 하시려고 인간이 되셨다고 교리서가 가르치는데 내가 하느님이라 믿는다고 해서 무슨 잘못이겠습니까? 오히려 믿지 않는 것이 잘못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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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 덮인 길을 걸어갈 때면 발걸음을 함부로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지금 나의 발자국이 뒷사람의 이정표가 되기 때문입니다제가 걸어가는 길이 부끄럽지 않으면 좋겠습니다주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충실하게 따라가면 좋겠습니다산다는 것은 수많은 처음을 만들어가는 끊임없는 시작입니다.

고인이 되신 신영복 선생님의 처음처럼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처음으로 하늘을 만나는 어린 새처럼

처음으로 땅을 밟고 일어서는 새싹처럼

우리는 하루가 저무는 저녁 무렵에도

아침처럼새봄처럼처음처럼

다시 새날을 시작하고 있다."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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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우리는 육체적 질병뿐 아니라 정신적, 영적인 나병을 앓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릎을 꿇고 간절하게 애원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무릎을 꿇는 자세는 우리가 주님께 나올 때 취할 가장 기본적인 자세임에도 그렇게 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우리가 앓고 있는 병에서 치유되려면 먼저 무릎을 꿇는 자세부터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내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찾아야 합니다. 주님의 뜻이 가장 좋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 바오로회 유광수 신부님은 무릎 꿇지 못하는 원인을 다섯 가지로 말씀하셨습니다. 1). 자신이 믿는 주님이 어떤 분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2). 지금 자신이 어떤 병이 들었는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3).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주고자 하는 선물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4). 교만함 때문이다. 교만한 자세란 목덜미가 뻣뻣한 자세이다. 몸이 굳어 있는 사람이고, 마음이 완고한 사람이다. 5).하느님으로부터 자신이 받은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주님 앞에 무릎 꿇는 기쁨의 날 되시기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반영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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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르 1,40)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라고 하시는 것은 자신의 바람이 아니라스승님의 바람이 이루어지소서라는 의탁입니다그것은 우리 자신의 바람에 대해 하느님께서 응답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하느님의 바람에 대해 우리가 응답하는 것을 말합니다바로 이것이 예수님께서 겟세마니에서 하신 것처럼내 뜻이 아니라 당신 뜻대로 하소서라는 주인께 속한 이로서의 자세입니다.

이는 동시에당신의 치유의 능력곧 권능을 믿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그러나 그 능력의 행사는 우리 자신에게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주님께 달려있기에 오로지 주님의 처분에 온전히 의탁한다는 뜻입니다곧 주님을 믿고 신뢰하고 의탁하며주님의 원의에 순명하겠다는 뜻입니다.

-이영근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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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은 측은한 마음을 가지시고 그에게 손을 대시며,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41하셨다그러자 나병의 증세가 깨끗하게 사라지고 나았다예수님께서는 율법이 금하는 데도 나병환자를 만지셨다왜 그랬을까?

그분은 깨끗한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다.”(티토 1,15)는 것을 보여주시려고 그에게 손을 대신 것이다즉 한 사람 안에 있는 불결이 다른 사람에게 옮지 않으며외적인 불결이 내적으로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신다예수님께서는 만져서는 안 되는 나병환자에게 손을 대시어 우리에게 겸손을 가르치신다그들의 외적인 모습이나 허물 때문에 그들을 혐오하거나 업신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다.

예수님께서 만지시려고 손을 내미실 때이미 나병은 사라져 버린다주님의 손은 나병환자를 만지신 것이 아니라깨끗해진 몸을 만지신 것이다만일 우리의 영혼이 나쁜 병으로 감염이 되었거나죄로 오염이 되어있다면 지금 즉시 하느님께로 돌아와 이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 “주님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이 하실 수 있습니다.”(마르 1,40) 하느님께서는 즉시 우리를 깨끗하게 해 주실 것이다그분의 거룩한 손은 나병으로 더러워지지 않았고환자는 그 거룩한 손으로 깨끗해졌다.

-조욱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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