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0년 1월 13일 연중 제1주간 월요일

Margaret K 2020. 1. 12. 20:12

2020 1 13 연중 제1주간 월요일


"나를 따라오너라.
(
마르 1,14-20)


Come after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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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한나는 엘카나의 아내이고, 아이가 없다는 이유로 프닌나에게 괴롭힘을 당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복음 선포를 시작하시며 어부 네 사람을 제자로 부르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하느님의 나라는 ‘지금, 여기’에 드러난 종말의 완성입니다. 

종말은 저 멀리 떨어진 꿈 같은 시간이 아니라 오늘 여기, 우리의 결단의 자리에 있습니다.
종말은 기다릴 실재가 아니라 이미 시작된 현실입니다.그래서 급합니다.
우리의 결단이 급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마르코 복음을 학자들은 ‘급한 복음’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어서 빨리 종말의 삶을 받아들이라고, 종말은 시작되었다고 재촉하는 복음이 마르코 복음이라 그렇습니다.
그래서 마르코 복음 1장에는 ‘곧바로’, ‘즉시’라는 표현들이 넘쳐 납니다.제자들도 급하게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제자들은 우리와 다른 세상에 사는 고귀한 이들이 아닙니다.
고기 잡고 그물 손질하는 이웃집 아저씨들, 그들이 제자가 된 이유는 바로 ‘급하게’ 예수님께서 알려 주신 종말에 귀를 기울이고 몸을 움직였기 때문입니다.
못나고 부족하여 내세울 것 없어도, 우리는 지금 결단을 내릴 수 있습니다.따르기 위하여 버리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지요.
어찌하면 예수님을 더 잘 따를 수 있을까 고민하다 보면, ‘무엇 때문에 나는 지금의 나로 여기에 머물러 있나?’ 하는 질문에 사로잡힐 때가 있습니다.
따르는 것은 굉장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제자 됨을 영웅담으로 분칠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다만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지금, 보잘것없어 보이는 지금, 나를 다시 한번 제대로 보는 것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에 저당 잡혀 살아가는가 …….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오신 분이시지, 우리에게 저만치 오라고 강요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나를 제대로 볼 수 있는 곳에 예수님께서는 이미 계십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전라북도 고창 출신 석전 황욱 선생(1898~1993)은 붓을 손바닥으로 잡고 붓의 맨 윗부분을 엄지손가락으로 눌러쓰는 악필법의 창안자입니다. 왜 이런 방법으로 글을 썼을까 싶었습니다. 한 번 그렇게 펜을 잡고서 글을 써보았습니다. 도저히 잘 쓸 수가 없습니다. 원래 잘 쓰는 글씨가 아니지만, 더욱더 봐주기 힘들 정도의 글씨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글을 쓰게 된 사연을 찾아보니, 선생님께서 환갑이 넘어 수전증이 왔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손이 떨리니 도저히 글을 쓸 수 없는 상황이 온 것이지요. 그러나 선생님께서는 포기하지 않고 수전증에도 상관없는 악필법을 개발한 것입니다.

할 수 없는 이유가 우리에게 매번 다가옵니다. 그러나 그런 이유를 극복할 때 더 큰 기쁨을 얻을 수 있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극복하는 모습을 본 누군가도 힘을 얻어서 할 수 없는 상태에서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극복하기 위해 한 번 더 힘을 내게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극복하게 되었을 때, 이제까지 체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나 자신을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첫 제자들을 부르십니다. 그런데 인간의 상식을 뛰어넘는 일을 이루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분이 인간의 상식을 뛰어넘어 제자들을 부르시지요.

제가 있는 성지에서도 사람을 채용할 때 꼼꼼하게 이것저것을 살펴보게 됩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을 채용하겠습니까? 기왕이면 많이 공부한 사람을, 기왕이면 능력이 많은 사람을, 기왕이면 사람들의 좋은 평가를 받는 사람을, 기왕이면 성실한 사람을 뽑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렇지 않으십니다. 오늘 복음을 봐도 이름난 학자를 제자가 아닌, 배운 것 없고 능력이라고는 고기 잡는 것밖에 없는 어부를 제자로 뽑으십니다.

그 누구도 예외 없이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신 것이었습니다. 불가능한 겉모습이지만, 이들을 통해서 주님의 기쁨을 소식을 세상 끝까지 전파되었다는 것을 바라보면서 사람들은 다시금 용기를 얻어 주님을 따를 수 있게 됩니다.

주님의 이런 뜻을 생각하지 못하고 자기만의 틀을 만들어서 주님을 따를 수 없다고,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요? 부족한 나약하고 우리이지만, 딱 한 가지만 명심하면 충분히 따를 수가 있습니다.

복음에 나오는 제자들이 보여준 것처럼, ‘곧바로’ 예수님을 따르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르면 되는 것입니다.
과거가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는 것은 나쁜 소식이지만, 미래가 아주 다양한 모습으로 자네 손 안에 있다는 것은 좋은 소식이지(앤디 앤드루스).



싼 게 비지떡.

‘싼 게 비지떡’이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하찮은 물건을 이르는 말이지만, 이 안에는 의미 깊은 내용이 담겨 있더군요.

충청도에 박달재라는 곳이 있습니다. 이곳은 지방에서 한양으로 갈 때 반드시 지나야 하는 교통의 요지였습니다. 바로 이 요지에 주막이 하나 있었는데, 이 주막의 주모는 특별히 과거를 보러 가는 선비에게 보자기에 싼 무엇을 주었다고 합니다. 이 보자기를 받는 선비는 이렇게 물었지요.

“싼 게 무엇이오?”

바로 그때 주모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싼 것은 비지떡입니다. 가다가 배가 출출할 때 드세요.”

배려와 정이 묻어나는 이야기입니다. 단순히 값이 싼 하찮은 물건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배려하고 나눠주는 정을 생각할 수 있게 합니다.

이 의미를 알고 나니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그러면서 다시금 깨닫습니다. 더 알기 위해, 그래서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 노력하는 삶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조재형신부-


매일 가지고 다니는 묵주가 있습니다. 매듭으로 된 묵주인데 아주 튼튼하고, 묵주 알 사이가 넉넉해서 좋아하는 묵주입니다. 20여 년 전에 수녀님께서 주셨습니다. 수녀님은 당시 면역 결핍증 환자들과 함께 지내고 있었습니다. 환자 중에 한 분이 정성스럽게 만든 묵주를 수녀님께 드렸고, 수녀님은 가지고 있던 묵주가 있어서 제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며칠 전입니다. 묵주를 넣어 두었던 묵주 주머니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낮에 갔던 칼국수 집에 흘렸나 하고, 가 보았더니 없다고 합니다. 한참 낙담하고 있었습니다. 다시 한번 주머니를 찬찬히 찾아보니 묵주가 안 주머니에 있었습니다. 묵주를 다시 보니 반가웠고, 고마웠습니다.

 

묵주보다 더 소중하고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다른 것으로 채울 수 없는 것입니다. 건강입니다. 가끔 안타까운 소식을 듣게 됩니다. 소화가 안 되는 거 같아서 병원에 갔더니 췌장에 문제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서둘러 수술했다는 자매님이 있었습니다. 신앙에 충실했던 자매님께서 건강을 회복하기를 청합니다. 잘못된 생활습관과 불규칙한 식사와 운동 부족으로 건강에 문제가 있는 분도 있습니다.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몸입니다. 긍정적인 생각으로 규칙적인 운동을 하면 강건하지는 않더라도 일상에 지장이 없는 건강한 몸이 될 겁니다. 건강은 건강할 때 지키라는 말은 늘 명심하면 좋습니다.

 

건강보다 더 소중하고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마음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기에 우리는 쉽게 마음을 잃어버리곤 합니다. 증세가 잘 나타나지 않기에 잃어버린 마음을 찾을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넣어주신 숨은 곧 마음입니다. 그 마음을 우리는 양심이라고 부릅니다. 강도당한 이의 따뜻한 이웃이 되어준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가졌던 마음입니다.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고,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었던 세례자 요한이 가졌던 마음입니다. 재물의 절반을 가난한 이웃에게 나누어주고, 빚진 게 있다면 네 곱절로 갚겠다는 자캐오의 마음입니다.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갔던 둘째 아들의 마음입니다.

 

자아를 잃어버린 이들에게는 거짓 자아가 자리를 잡습니다. 교회는 거짓 자아를 칠죄종이라고 했습니다. 하느님과 같아지려는 아담의 교만이 있습니다. 지칠 줄 모르는 아합 왕의 탐욕이 있습니다. 지나치거나 부정적인 다윗의 성적 욕망이 있습니다. 다윗의 성공을 배 아파하는 사울 왕의 질투가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보여준 과식과 과음이 있습니다. 스테파노를 돌로 쳐서 죽였던 사람들의 분노가 있습니다. 일하지 않고, 혼인 잔치의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던 다섯 처녀의 게으름이 있습니다. 거짓 자아를 따라가면 우리는 하느님과 멀어지게 됩니다. 거짓 자아를 따라가면 공동체는 갈등과 분열을 겪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거짓된 자아에 매몰된 사람들에게 이제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고 말씀하십니다. 권력, 욕망, 재물, 명예를 추구하는 세상의 나라가 아닌 믿음, 희망, 사랑을 추구하는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첫 제자들의 모습과 행동에서 회개를 보았습니다.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행동입니다. 아버지와 배를 뒤로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행동입니다. 그렇습니다. 회개는 단순히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는 생각을 바꾸는 것이고, 행동을 바꾸는 결단입니다.

 

잃어버린 마음을 찾고, 양심을 찾는 길은 버리는 데 있는 것 같습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모든 권한과 능력을 버리시고, 인간이 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첫 번째 제자들도 배와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섰습니다. ‘죽으면 살리라라는 말처럼 모든 것을 버릴 때, 새로운 길이 열리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결단을 내렸습니다. 이제 제자들은 하느님 나라를 몸과 마음으로 느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과 함께 하루를 시작하면 좋겠습니다.


진정성있는 회개의 과정을 거친 사람은 부르시는 예수님의 둘도 없는 제자로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양승국시눕- 

 

기원전 63년 유다 독립 왕국은 로마 제국에 의해 막을 내리게 됩니다. 기원전 40년 로마 제국은 속국 유다를 다스리도록 새로운 왕을 임명하는데, 그가 헤로데 대왕입니다.

 

 그는 꽤나 능력자였던가 봅니다. 그는 로마 황제의 환심을 사기 위해 엄청 노력했습니다. 자신의 왕국 곳곳에 로마 황제와 로마인들이 좋아할 건축물들을 지었으며, 로마 제국의 문화를 도입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에게는 잔혹했던 군주였습니다. 베들레헴 지방, 2살 미만의 남자 아이들 대학살극의 주인공이 바로 그였습니다.

 

 기원전 4년 헤로데 대왕이 죽자 그의 왕국은 쪼개지는데, 그의 아들 헤로데 안티파스는 갈릴래아 지방과 베로이아 지방을 통치하게 됩니다. 아버지 못지 않게 안티파스 역시 잔혹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목을 날린 주인공입니다. 안티파스의 통치는 기원후 39년까지 지속되는데, 예수님의 공생활 기간과 일치합니다.

 

 세례자 요한이 헤로데 안티파스에게 체포된 직후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서 본격적인 활동을 개시하십니다. 예수님의 활동은 여러 기적들과 힘있는 가르침을 통해서 다양하게 펼쳐지고, 그 기적들과 가르침 안에는 하느님의 아드님으로서의 능력과 그분이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의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갈릴래아에서의 첫번째 공적인 활동은 다름 아닌 어부 넷을 당신의 첫 제자단으로 부르시는 것이었습니다. 공생활 시초에 첫 제자단이 등장하는 이유는 그 제자들이 바로 초대 교회를 이끌어갈 인물인 동시에, 스승님의 활동과 가르침을 직접 보고 듣고 배운 증인임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갈릴래아에서 예수님께서 행하신 첫 선포 말씀의 요지는 이것입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코 복음 1장 14절)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알리는 복음 선포는 공생활 기간 내내 계속될 예수님 설교 말씀의 핵심 주제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회개를 강조했다면,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선물로 주신 기쁜 소식을 강조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의 다스림, 하느님의 통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 나라는 이미 예수님으로 인해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들과 행동 하나하나에는 이미 하느님 나라의 현존과 구원의 현존이 실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예수님의 능력이 발휘되는 바로 그 자리가 하느님 나라입니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둘러앉아 있는 열두 사도들, 그리고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실천하는 백성들의 모임, 그 자체가 이미 하느님 나라입니다.

 

 예수님의 현존으로 인해 하느님의 나라, 그분의 왕국이 이미 시작된 것입니다. 은혜롭게도 그 왕국은 그 누구든 받아들입니다. 그 누구도 제외시키지 않습니다. 악인들, 세리들, 창녀들도 배제하지 않습니다. 환자들과 가난한 이들, 무거운 짐진 자들을 특히 환영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당신 존재 자체로 냉혹한 현실 세계를 환히 비추는 한 줄기 강렬한 햇살이요, 억압당하고 좌절하고 있는 우리들의 가슴에 보내주신 따스한 희망의 빛입니다.

 

 우리 각자에게 무상으로 주어진 이토록 은혜로운 하느님 나라 앞에 인간이 취할 가장 우선적인 태도는 회개입니다. 진정한 회개는 저지른 죄에 대해 가슴 아파하고 가슴을 치는 것으로 부족합니다. 그릇된 길, 우상숭배와 도덕적 타락에서 하느님의 길에로의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방향 전환을 요구합니다. 더 나아가서 다시 한번 자신을 하느님의 고귀한 창조물로 바라보는 노력, 하느님의 뜻대로 하시도록 자신을 내맡겨드리는 노력이 요청됩니다.

 

 이런 진정성있는 회개의 과정을 거친 사람은 자연스레 부르시는 예수님께 기쁘게, 큰 소리로 응답하며, 그분의 둘도 없는 제자로 살아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 낚여라

 -반영억신부-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세례를 받으신 갈릴래아에 가시어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 내용은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나라는 어떤 나라입니까? “하느님의 통치, 하느님의 권위가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내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법에 따라 다스려지는 나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걸어 다니는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또한 하느님의 나라는 어떤 한정된 장소나 지역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각자의 마음 안에 건설되는 나라입니다. 먼 미래에 올 나라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 와 있는 나라요, 죽은 다음에 들어갈 수 있는 나라가 아니라 현재 우리 안에 현존하는 나라입니다. 마음이 그리스도 예수님의 마음과 일치된 상태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품으신 바로 그 마음을 품기 위해서는 “회개”가 필요합니다. 회개는 후회와는 다릅니다. “회개는 한 번 하는 것이요, 후회는 두고 두고 하는 것입니다”(이현주).

 

회개는 하느님을 중심으로 생각을 바꾸고,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은 말이 아니라 행동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회개는 한 번 하는 것이지만 그 삶은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을 때까지 이어지는 삶입니다. '도둑이 회개 했다는 것은 평생 도둑질을 그만 두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끊임없이 회개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확실한 선택입니다. 그리고 "인간적인 자기이해 능력과 사고방식의 세계가 아닌 그 이상의 세계로 넘어 간다“는 뜻입니다. 이제는 인생을 이성의 잣대나 사고방식, 또는 지적인 능력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영의 세계로, 즉 복음적인 관점으로 보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유광수). 회개는 영적 여정의 첫 출발이며 복음을 알아듣기 위해 취해야 할 기본자세입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야 합니다. 복음은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 자신이며 그분이 선포하신 말씀, 보여주신 활동 모두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선포를 사는 것입니다. 내 마음과 정신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요,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복음이 바탕이 되지 않는 믿음은 모래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제자들에게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하셨습니다. 그러자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는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야고보와 요한도 그분을 따라나섰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낚였기 때문에 자기의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삶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삶은 바뀌었습니다. 그 삶은 ‘회개하라’는 주님의 선포에 대한 응답이었습니다.

 

분명 그들은 가족과 재물을 버렸기 때문에 예수님께 낚인 것이 아니라 먼저 낚였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내가 그분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그분이 나를 먼저 선택한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주님께 온전히 낚여있는지 돌아봐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얻기 위해 일상 안에서 버려야 할 것은 버려야 합니다. 성경을 읽고 묵상은 하지 못해도 드라마를 보고 운동을 하고, 기도할 시간은 없어도 여행을 하고 쇼핑을 하는 데는 많은 시간을 투자합니다. 모여서 수다를 떨며 뒷담화 할 시간에 봉사를 하고 성체조배를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늘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 그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그것을 다시 숨겨두고서는 기뻐하며 돌아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마태13,44). 더 큰 것을 얻기 위해서는 하나를 버려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버림으로써 얻게 됩니다.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은 단순히 필요 없는 것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가장 소중한 것의 순서를 바꾸는 것입니다. 첫 자리에 주님을 모시기 위한 선택이요, 진리 안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한 평생의 삶의 양식입니다. 버려할 것은 과감히 버리고 홀가분하게 주님을 따라나설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으로 사랑할 수 있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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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얻는 데에는 크게 두 방법이 있습니다.

구해서 얻는 것과 버림으로써 얻는 방법입니다.

구해서 얻는 것은 그 얻음이 아무리 커도

다음에 더 큰 목표가 생기기 때문에 만족이 없습니다.

그러나 버려서 얻는 것은

아무리 작아도 덤으로 얻는 기분이기 때문에 만족과 기쁨이 큽니다.

마음의 평안과 행복을 원하는 사람은

버려서 얻는 방법을 택합니다”(고도원의 아침편지 중에서).

 

“금을 얻기 위해서는 마음속에 가득 찬 은을 버려야 하고

다이아몬드를 얻기 위해서는 또 어렵게 얻은 그 금마저 버려야 한다.

버리면 얻는다. 그러나 버리면 얻는다는 것을 안다 해도 버리는 일은 그것이 무엇이든 쉬운 일이 아니다. 버리고 나서 오는 것이 아무것도 없을까 봐.

그 미지의 공허가 무서워서 우리는 하찮은 오늘에 집착하기도 한다“(공지영의 ‘수도원 기행’중에서).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이영근신부-


오늘부터 연중주간이 시작되었습니다. 오늘부터 복음은 <마르코복음>, 독서는 <1사무엘>을 듣게 됩니다.

오늘 <복음><마르코 복음>에서의 예수님의 첫 발설로 시작됩니다. <복음>에서 예수님의 첫 발설은 상당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복음서의 특색을 잘 나타내줍니다. 예컨대, <마태오복음>에서 예수님의 첫 발설은 지금은 이대로 하십시오. 우리는 이렇게 해서 마땅히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합니다.”(3,15)입니다. 이는 마태오복음이 하느님의 의로움에 중점을 두고 있음을 밝혀줍니다. <루카복음>에서의 첫 발설은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모르셨습니까?(2,49)입니다 이는 루카복음이 하느님을 찾는 순례여정을 중심으로 전개될 것임을 보여줍니다. <요한복음>에서의 첫 발설의 말씀은 무엇을 찾느냐? 와서 보라(1,38-39)입니다. 이는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궁극적인 바람인 영원한 생명을 찾아야 하는 바를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들은 <마르코복음>에서의 예수님의 첫 발설은 하느님 나라가 왔다복음의 선포입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이는 네 개의 내용으로 된 문장입니다. 때가 찼다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하신 일이 아무 때나 우연히 시작하신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곧 이전의 모든 시간이 지금의 이 를 준비하기 위한 것이었고, 지금이 바로 하느님께서 인간을 구원하기로 계획하신 준비해 온 결정적인 (카이로스)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가까이(원어의 뜻: 손 안에), 곁에 혹은 예수님과 함께 나라로,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이요 은총이라는 선포입니다. 그러니까 하느님 나라는 결코 가는 나라, 곧 죽어서 가는 나라가 아닌 것입니다. ‘이미온 나라인 것입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는 말씀은 대체 무엇이 복음이고 무엇이 회개인지를 밝혀줍니다. 복음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이요, 회개는 이를 믿는 것이라는 사실을 밝혀줍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성경이 가르쳐주는 복음과 회개의 참된 뜻입니다. 그리고 이는 동시에, 바로 지금이 회개의 때요, 믿음의 때라는 말씀입니다. 또한, 하느님 나라를 가져 온 예수님 자신이 곧 복음이요, 그러기에 예수님을 믿고 받아들이는 이들 안에 이미 현존하는 나라임을 말해줍니다(루가 11,20 참조).

그리하여 회개했음의 구체적인 모습은 하느님 나라가 이미 왔다복음을 믿는 것으로 표현되듯, 복음을 믿는다는 것의 구체적인 모습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으로 표현됩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도록 우리를 당신의 제자로 부르심입니다.

나를 따라 오너라.”(마르 1,17)


그런데, 예수님을 따르려면 첫 번째로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요? 놀랍게도 그것은 어떤 무엇을 준비하고 채우는 것이 아니라, 버리는 일입니다. 곧 가지고 있는 것, 내가 의지하고 있는 것을 버리는 일입니다, 제자들은 아버지도, 삯꾼도, 배도, 그물도, 모두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라나섰습니다. 결국, 버린다는 것은 자신의 실현을 위한 자신의 삶의 태도를 버리는 것이요, 자신이 중요하다고 여긴 자신의 가치관과 자기 자신마저도 버리고 것입니다. 반면에, 새로운 삶의 태도와 가치관을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잘못된 것, 좋지 않는 것은 당연히 버려야 할 것이지만, 좋은 것으로 여기던 것마저도 버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더 좋은 것, 더 값진 것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진정 의지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깨달은 까닭입니다. 그렇습니다. 제자들은 자신의 아버지보다도, 생계수단인 배와 그물보다도 더 값진 예수님을 발견한 까닭입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이 버림은 예수님을 따라 나서는 하나의 조건이요 방법일 뿐, 결코 목적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진정 중요한 것은 무엇을 버렸는지가 아니라, 무엇을 찾는지, 누구를 찾는지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버리기 위해 따르는 것이 아니라, 따르기 위해 버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오늘 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르 1,15)


주님!

언제나 당신을 향하여 있게 하소서.

제 자신을 빠져나가 당신께 나아가게 하소서.

어디에 어떤 처지에 있든지 당신과 함께 있게 하소서.

당신을 따라 당신의 나라에 들게 하소서.

제 안에 당신의 나라를 이루소서. 아멘.


신앙생활

-송영진신부-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 가시어,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4-15)”

성경의 예수님 말씀은, 이천여 년 전 어느 날 하신 ‘옛날의 말씀’이 아니라,
‘오늘, 이곳에서, 나에게’ 하시는 ‘지금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것은, ‘옛날의 말씀’을 공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금’ 나에게 하시는 말씀을, ‘지금’ 새겨듣고 실천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지식을 쌓기 위해서가 아니라 생명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살아 계시는 주님의 말씀은 언제나 항상 ‘살아 있는 말씀’이고,
‘지금’ 나에게 생명을 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때가 차서” 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 정하신 때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종말에 완성되는 하느님 나라를 뜻합니다.
< 온 세상은 전부 다, 처음부터 하느님의 나라였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전부 다 하느님의 자녀이고,
하느님 나라의 시민입니다.
그렇지만 ‘종말에 완성되는 하느님 나라’는 선택된 사람들만,
또 ‘자격이 있다고 판단 받는 이들만’(루카 20,35) 들어갈 수 있는 나라입니다.
신앙생활은 그 자격을 얻기 위해서 노력하는 생활입니다.>

“가까이 왔다.” 라는 말씀은, 인간 세상 근처 어디쯤에 와 있다는 뜻이 아니라,
“이미 시작되었다.” 라는 뜻입니다(루카 17,21).
‘종말’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 이미 시작되었고,
지금 진행 중이고, 마지막 날이 되면 완성될 것입니다.
< 신앙생활은 ‘종말 후의 삶’을 미리 준비하는 생활이기도 하고,
그 삶을 미리 사는 것이기도 합니다.
안 믿는 사람들이 ‘신앙인들의 삶’을 보고, 또 교회 공동체의 삶을 보고,
“하느님 나라의 삶이 바로 저런 것이구나.” 라고 생각하게 해야 하는데......
그렇게 생각할 수 있도록 우리가 그렇게 살아야 하는데......
우리는 과연 그렇게 살고 있는지...>

종말의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야 합니다.
‘회개’는 죄를 뉘우치는 것만을 뜻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도 포함해서, ‘온 삶’을 하느님의 뜻에 일치시키려는 노력이 회개입니다.
(‘종말 후의 삶’은 주님과 내가 완전히 일치되어 있는,
즉 주님과 내가 완전히 하나가 되어 있는 삶입니다.
그 일치를 이루는 일은 그때 해도 되는 일이 아니라,
지금부터 노력해야 하는 일입니다.
신앙생활은 주님과 하나가 되려고 노력하는 생활입니다.)
‘복음을 믿는다.’는 말은, 주님의 가르침을 믿고, 실천하는 것을 뜻합니다.
믿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실천해야 합니다(마태 7,21).
< 일부 종파에서는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지만,
실천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야고 2,17).
‘죽은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사실, 정말로 진실하게 주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주님의 가르침을 실천할 것입니다.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주님의 가르침을 실천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믿는다.’는 말은 거짓말입니다.>
그리고 ‘실천’에는 당연히 ‘회개’도 포함됩니다.
회개하지 않는 믿음도 ‘죽은 믿음’입니다.
정말로 진실하게 주님을 믿는 사람은 날마다 회개합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호수에 그물을 던지고 있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를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마르 1,16-18).”

이 이야기를 앞의 말씀과 연결해서 생각하면,
어부들은 예수님의 복음 선포를 들었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회개하고 복음을 믿었고, 부르심에 응답할 준비를 한 상태에서
부르심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준비되어 있었기 때문에 즉시 응답할 수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여기서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라는 말씀은, 이천여 년 전 어느 날 어부들에게만 하신 말씀이 아니라,
‘오늘, 이곳에서, 나에게’ 하시는 말씀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라는 말씀은, “나의 제자가 되어라.” 라는 뜻인데,
사도들만을 부르시는 말씀은 아니고, 모든 사람을 부르시는 말씀입니다.
(복음서에서는 ‘제자들’이라는 말이 ‘신자들’을 뜻할 때가 많습니다.
신앙인은 예수님의 ‘벗’이기도 하고, ‘형제’이기도 하고, ‘제자’이기도 합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신앙인은 당연히 ‘제자로서’ 예수님 뒤를 따라갑니다.
신앙생활은 스승이신 예수님 뒤를 따라가는 제자의 생활입니다.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은,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그 길 하나뿐입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라는 말씀은,
제자들(신자들) 가운데에서 특별히 뽑은 사람들을 사도로 삼으시겠다는 뜻으로
하신 말씀인데, 신앙인 전체에 적용해서 생각하면,
“너희는 사람 낚는 어부가 되어라.” 라는 명령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사람을 낚는다.’는 말은,
“사람들을 죽음에서 끄집어내서 생명으로 인도하는 일”을 뜻합니다.
신앙생활은 ‘내가’ 구원을 받으려고 하는 생활이지만,
동시에 다른 사람들도 ‘나와 함께’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는 생활입니다.
“남들은 구원을 받든지 말든지(멸망을 당하든지 말든지) 나만 구원받으면 된다.”
라는 ‘사랑 없는’ 태도로는 구원받지 못합니다.
사랑 없이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은 ‘내가 하는’ 생활이지만,
‘나 혼자 하는’ 생활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는’ 생활입니다.
(만일에, 저쪽 세상에 들어가서 보니 나 혼자만 와 있고,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면?
그러면 그곳은 하느님 나라가 아니라 지옥입니다.
이승에서 사는 동안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혼자서만 배불리 먹고, 혼자서만 즐거움을 누리고, 혼자서만.... 기타 등등...
그렇게 살고 있는 사람의 삶은, 그 삶 자체가 지옥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 자신이 그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사랑 없는 곳은 모두 지옥입니다.)  


-조욱현신부-


복음: 마르 1,14-20: 첫 제자들을 부르심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15) 이 하느님의 나라라는 표현은 오로지 복음서에만 있다. 하느님 나라는 주님께서 오신 다음에 활짝 열렸다.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17,21)고 쓰여 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15) 신앙의 기쁨은 회개에 따르는 어떠한 쓰라림도 보상해 준다. 거룩한 양심의 기쁨을 바라는 사람은 회개의 쓴 맛을 삼켜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시다가, 그물을 던지고 있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를 보시고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17)고 하신다. 예수님은 비천한 어부들 같은 가난한 사람들과도 어울리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인간의 상식을 뛰어넘는 일을 이루시려 그들을 부르신다. 즉 모든 민족에게 당신의 가르침을 전파하기 위해서 가장 무식하고 평범한 사람들을 일꾼으로 쓰시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셨다.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18) 주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서는 그분의 뜻에 맞지 않는 것은 즉 방해가 되는 것은 곧바로버려야 한다는 것을 이 말씀이 보여준다. 주님께 부름을 받은 야고보와 요한은 아버지와 배를 버렸고(19-20) 마태오는 세관에서 벌떡 일어났으며(마태 9,9), 어떤 이는 믿음 때문에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는 일조차 남에게 맡겼다(루카 9,59-60). 주님께서 부르신 이들 가운데 어떤 핑계를 대는 사람은 없었다.

 

주님을 체험한 사도들은 주님을 따르지 않을 수 없는 힘을 그분에게서 느꼈. 그분의 얼굴에는 그분을 뵙고 따라나서지 않을 수 없는 거룩한 그 무엇이 있었다는 것이다. 사도들은 영의 아버지를 따르고자 육의 아버지를 떠났다. 그것은 아버지를 버린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아버지를 참으로 되찾은 것이다. 주님의 제자가 되려면 재산과 허영심, 사회적 지위와 쓸데없는 욕심과 같은 온갖 껍데기를 벗어버리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야고보와 요한은 아버지 제배대오도 버리고 그들의 생계가 달려 있는 배마저 버렸다(20) 마태오와 바오로 사도를 보더라도 그리스도를 따르려면 그 무엇에도 집착이나 애착을 버려야 한다. 우리가 우선적으로 따라야 하는 것은 바로 하느님의 뜻이며 하느님의 말씀이고 하느님의 일이다. 여기에 언제나 즉시 기쁘게 !”를 드릴 수 있는 삶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뜻을, 말씀을, 일을 실천하여야 한다. 그러한 삶을 통하여 우리는 주님 안에 살아가게 되며, 우리의 삶이 다른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알게 해 주는 도구가 되게 할 것이다.

 

우리는 많은 경우에 올바른 선택을 하지 못하고 주님의 뜻에 반대되는 길을 가기도 한다. 언제나 주님의 부르심에 즉시 응답을 드리고 살아가도록 하여야 한다.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마르 1, 18)

-한상우신부-

복음은
따라야 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심을
가르쳐줍니다.

회개의 만남이
가장 큰
만남입니다.

버려야 따를 수
있는 믿음과
봉헌의 시간입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첫걸음은 언제나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삶이 다르게
다가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예수님을 따르는
믿음의 삶입니다.

따르면서
치유되고

따르면서
사람의 길을
제대로 보게됩니다.

주님을 따라야
되찾게되는
주님과 우리의
관계입니다.

회개의 여정은
버리고 따르는
관계의 여정입니다.

집착의 그물과
이기심의 배를
버리는 새로운
복음의 관계입니다.

회개의 관계는
복음의 관계입니다.

복음을 향해
나아가는 기쁜
첫걸음 되십시오.


-오상선신부-


행복했던 성탄 시기가 끝나고, 하느님 백성과 함께하시는 예수님의 행적을 따라 연중 시기에 들어섭니다.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 선포와 구원의 길을 함께할 제자들을 부르시는 대목이고, 독서는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판관 시대와 왕정 시대를 잇는 "주님의 믿음직한 예언자"(1사무 3,20) 사무엘의 등장을 준비합니다.

"보시고 곧바로 그들을 부르셨다"(마르 1,19-20).

마르코 복음은 군더더기 없이 간결합니다. 특히 이 부르심 사화에 등장하는 예수님과 다른 인물들의 행동이 속도감마저 느껴질 정도로 막힘 없이 이어지지요.

예수님은 먼저 "보시고" 그들을 "부르십니다." 예수님의 "봄"과 "부르심" 사이에는 간격이 그다지 길지 않습니다. 그분이 숙고를 하시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분의 "봄"이 찰나적이어도 그 자체가 곧 통찰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시선은 잘못된 부분과 헛점을 솎아내는 편집의 눈길이 아니라, 상대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담긴 가능성을 보는 눈길입니다.

오늘 예수님 눈에 띈 네 명의 어부, 베드로와 안드레아, 야고보와 요한은 즉각적 응답으로 예수님의 부르심에 호응합니다. 보통의 이스라엘 남성이라면 식민지 상황을 견디며 메시아윽 오심을 고대하였을 터라, 예수님의 출현과 부르심이 희망으로 다가왔을 법도 합니다.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마르 1,18).
"아버지 제베대오를 삯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마르 1,20).

그들은 "버리고" 떠납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이제껏 영위한 익숙한 삶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들은 호기롭게도 생계의 수단인 배와 그물, 혈육의 상징인 아버지를 버립니다. 새 질서로 들어서기 위해 옛것과의 연을 끊어냅니다.

버리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물건 하나, 기억 하나 버리지 못해 안절부절 주저했던 순간을 누구나 체험했을 겁니다. 모두 다 움켜쥘 수 없을 때, 더 가치로운 것을 선택하기 위해 덜 가치로운 것을 내려놓아야 하지요. 그래서 모든 걸 버리고 얻은 것이 더 귀하고 소중한 법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사무엘의 어머니인 한나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녀는 남편의 사랑을 받고는 있지만 하느님께서 태를 닫아 놓으셔서 아직 제 몸의 소생을 얻지 못한 상태입니다.

"당신에게는 내가 아들 열보다 더 낫지 않소?"(1사무 1,8)

아들 없는 설움에 우는 한나에게 남편 엘카나가 위로를 건넵니다. 이스라엘이나 고대 근동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문화 안에서 아들은 어머니의 힘이지요. 그런 아들을 갖지 못한 한나에게는 남편밖에 없습니다. 그가 전부인 셈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부르심에 모든 걸 버리고 따라나선 복음 속 제자들이 바로 열 아들보다 나은 한 신랑을 선택한 사람들 아닐까 합니다. 세상이 주는 명예, 재물, 권력 등 열 아들이 없어도 충실하고 사랑 넘치는 신랑, 주님 한분으로 만족하며 사는 길이 제자의 길이 아닐까요?

사랑하는 벗님! 우리 모두는 저마다 부르심 받은 시기도 다르고, 모습도 양상도 다르지만, 영혼 저 깊고 은밀한 곳에서 "당신에게는 내가 아들 열보다 더 낫지 않소?" 하고 속삭이신 주님의 소리를 듣고 길을 나선 이들입니다.

"주님 당신께는 생명의 샘이 있고 저희는 당신 빛으로 빛을 보나이다"(영성체송).

그렇습니다! 이 고백이 곧 세상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뒤로 하고 얻은 신랑, 주님을 따라나선 우리의 응답입니다.

하느님을 잉태할 돌계집 
-김찬선신부-


오늘 독서는 사무엘기의 시작입니다.
그리고 사무엘의 어머니가 될 한나의 얘기인데
한나는 아기를 낳지 못해서 후처로부터 멸시와 설움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나는 돌계집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하느님께서 태를 닫아놓으셨다고 하는 걸 보면.

사실 돌계집이란 생물학적인 표현일 뿐이고,
신앙적으로는 하느님께서 태를 닫아놓으신 거기에
사무엘기는 "주님께서 그의 태를 닫아놓으셨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나는 사무엘을 낳기까지, 그러니까 일시적으로
하느님께서 태를 닫아놓으신 돌계집이었던 것입니다.

종종 현대과학은 하느님을 배제하는 기계론적인 자연관에 근거하여
한번 돌계집이면 결정론적으로 영원히 애를 낳을 수 없다고 하지만
신앙의 눈으로 보면 무엇이든 그것은 하느님의 계획과 결정일 뿐이기에
하느님의 뜻에 따라 언제까지 돌계집이었다가 언제부터는 얼마든지
돌계집이 아니게 되는 것이 가능합니다.

그리고 신앙의 눈으로 볼 때 하느님의 뜻과 계획 안에 있는 사람은
인간적으로는 잘 안 풀리고 시련이 많은데 한나도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하느님을 잉태할 사람은 인간적으로 돌계집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남자건 여자건 상관없습니다.
하느님을 잉태할 사람은 인간적으로 돌계집이어야 합니다.
세속을 잉태한 사람에게는 하느님을 잉태를 태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신앙인이라면 뭣이 내 뜻대로 안 될 때 거기에
하느님의 뜻이 있고 내가 하는 것이 아무런 결실을 맺지 못하고
실패로 끝나곤 할 때 거기에 우리가 지금은 알지 못하지만
하느님의 어떤 계획이 있을 수 있음을 믿고 기다릴 수 있어야겠습니다.

그리고 이때 시련의 기간은 하느님을 잉태하기 위한 기간이겠지요?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6년 1월 11일 연중 제1주간 월요일

2014년 1월 13일 연중 제1주간 월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시기고 싶은 글

"나를 따라오너라.(마르 1,14-20


오늘 우리가 읽은 마르코 복음을 학자들은 ‘급한 복음’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어서 빨리 종말의 삶을 받아들이라고, 종말은 시작되었다고 재촉하는 복음이 마르코 복음이라 그렇습니다. 
그래서 마르코 복음 1장에는 ‘곧바로’, ‘즉시’라는 표현들이 넘쳐 납니다.제자들도 급하게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박병규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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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연중주간이 시작되었습니다오늘부터 복음은 <마르코복음>독서는 <1사무엘>을 듣게 됩니다.

오늘 <복음>은 <마르코 복음>에서의 예수님의 첫 발설로 시작됩니다각 <복음>에서 예수님의 첫 발설은 상당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그리고 그 복음서의 특색을 잘 나타내줍니다예컨대, <마태오복음>에서 예수님의 첫 발설은 지금은 이대로 하십시오우리는 이렇게 해서 마땅히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합니다.”(3,15)입니다이는 마태오복음이 하느님의 의로움에 중점을 두고 있음을 밝혀줍니다. <루카복음>에서의 첫 발설은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모르셨습니까?(2,49)입니다 이는 루카복음이 하느님을 찾는 순례여정을 중심으로 전개될 것임을 보여줍니다. <요한복음>에서의 첫 발설의 말씀은 무엇을 찾느냐와서 보라(1,38-39)입니다이는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궁극적인 바람인 영원한 생명을 찾아야 하는 바를 제시해주고 있습니다그리고 오늘 우리가 들은 <마르코복음>에서의 예수님의 첫 발설은 하느님 나라가 왔다는 복음의 선포입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이영근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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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는 하느님을 중심으로 생각을 바꾸고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을 뜻합니다그것은 말이 아니라 행동입니다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회개는 한 번 하는 것이지만 그 삶은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을 때까지 이어지는 삶입니다. '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끊임없이 회개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자기이해 능력과 사고방식의 세계가 아닌 그 이상의 세계로 넘어 간다“는 뜻입니다이제는 인생을 이성의 잣대나 사고방식또는 지적인 능력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영의 세계로즉 복음적인 관점으로 보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유광수). 회개는 영적 여정의 첫 출발이며 복음을 알아듣기 위해 취해야 할 기본자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제자들에게 “나를 따라 오너라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하셨습니다그러자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는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야고보와 요한도 그분을 따라나섰습니다그들은 예수님께 낚였기 때문에 자기의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었습니다예수님께서 그들의 삶의 중심이 되었습니다그들의 삶은 바뀌었습니다그 삶은 ‘회개하라’는 주님의 선포에 대한 응답이었습니다. 

-반영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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