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0년 1월 10일 주님 공현 후 금요일

Margaret K 2020. 1. 9. 20:02

2020년 1월 10일 주님 공현 후 금요일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그러자 곧 나병이 가셨다. 
(루카 5,12-16)

 

“Lord, if you wish, you can make me clean.”
Jesus stretched out his hand,

touched him, and said,
“I do will it. Be made clean.”
And the leprosy left him immediately.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진리의 성령께서는 하느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셨고, 그 생명이 하느님의 아드님에게 있다고 증언하신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병을 낫게 해 주십사 간청하는 나병 환자를 치유해 주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나병이라는 병을 육체적 결핍으로만 보는 시선은 잠시 접어 둡니다. 

예수님의 치유 능력을 놀라워하며 초인적 능력이라 칭송하는 마음도 내려놓습니다.
그리고 단순히 나병을 겪는 이의 마음에 머물러 봅니다.세상의 손가락질보다 더 힘든 것은, 자신의 모습과 화해하는 일이 아닐까 조심스레 짐작해 봅니다.
나병 환자는 낫기를 바랍니다.
그 마음은 예수님을 향한 간절함으로 이어집니다.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 자기 자신의 회복에 예수님의 마음을 초대합니다.
지금 이 모습으로는 도대체 살아갈 자신도, 용기도 없는 나병 환자는 예수님의 마음에 의탁합니다.예수님께서 응답하십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 예수님께서는 끌고 가시는 지도자가 아니라, 함께하시는 동반자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마음을 이야기하시기보다 우리의 마음속 이야기를 먼저 듣고자 하십니다.
세상은 적당한 거리를 둔 채, 서로가 불편하지 않을 만큼만 제 이야기를 터놓습니다.
서로의 마음을 터놓기보다 상대의 마음을 알아차리려 눈치만 느는 것이 세상살이가 되어 버린 듯합니다.유다 사회도 사제를 중심으로 공동체의 윤리와 법률을 다듬고 보존하고 되새겼습니다.
다만 공동체의 윤리와 법률에 어울리지 못한 이들에게는 거부와 차단만이 주어졌지요.
말하자면, 윤리와 법의 이름 아래 사람들의 마음이 닫혀 있어 서로 단절되었습니다.예수님께서는 ‘함께’ 살기를 바라십니다.
사제에게 보여야 하는 것은, 깨끗해진 몸이 아니라 다시 함께 살 수 있다는 희망이 아닐까 합니다.
이런 몰골로도, 이런 나약함에도, 이런 비참함 속에서도 나라는 존재를 소중히 여겨 주는 또 다른 마음을 얻는 것이 정말 우리에게는 따뜻한 복음이 아닐까 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함께하는 마음이라 늘 따뜻합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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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청년에게서 들은 고민 한 가지가 생각납니다. 그 고민은 같은 성당에서 활동하는 친구 한 명이 너무나도 밉다는 것이었습니다. 문제는 이 친구를 미워할 특별한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냥 미운 것입니다.

어떻게 그냥 미울 수가 있겠냐면서, 그래도 마음에 들지 않는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이 친구가 자기의 예전 여자친구와 지금 만나고 있다는 이야기를 해줍니다. 전 여자친구와는 완전히 끝난 관계이지만, 자기 친구가 전 여자친구 만나는 것을 보면서 괜히 미움의 감정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자친구에 대한 미움이 성당 친구에게 옮겨간 것이었습니다. 이런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마음에 미움이 가득할 때 어떻습니까? 그 어떤 사람도 예뻐 보이지 않습니다. 특히 미워하는 사람과 친한 누군가가 있다면 친한 그 사람이 자신에게 잘못한 것이 있는 것도 아닌데 괜히 미움의 대상이 되고 맙니다. 이런 마음으로는 세상을 기쁘게 살아갈 수 없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합니다. 따라서 미움의 대상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을 만드는 데 더욱더 집중해야 합니다.

사랑할 수 없는 이유가 아니라 사랑해야 하는 이유를 먼저 찾아야 합니다. 특히 나 자신을 위해서도 반드시 간직해야 하는 사랑의 마음을 잃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나병 환자를 고쳐 주십니다. 그런데 나병 환자의 몸에 직접 손을 대시지요. 이는 이스라엘의 정결 규정을 어기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말씀만으로도 이 나병을 고쳐 줄 수 있음을 다른 예로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에게 깜짝 놀랄만한 스캔들을 제공하는 행동을 하셨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구약시대에는 나병을 죄가 형상화된 것이나, 마귀가 들린 것으로 인식했습니다. 그래서 나병 환자로 선고받은 사람은 자기가 사는 곳에서 내쫓겨 그 외곽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그 의미는 유다인 사회에서 모든 것을 상실했다는 것입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나병 환자를 함부로 다뤄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병 환자는 사랑을 받아야 할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 역시 사랑을 받아야 할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 직접 당신의 손을 대신 것입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 시대의 유다인들처럼 사랑하지 않을 이유를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이런 모습으로는 주님을 따른다고 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지 않을 이유가 아니라, 사랑할 이유를 찾는 우리가 주님과 진정으로 함께 하는 모습이 됩니다.
나는 살면서 단 하루도 일한 적이 없다. 모두 재미있는 놀이였을 뿐이다(토마스 에디슨).



정상? 비정상?

파도가 심한 바다를 항해하는 배들은 약간 옆으로 기울어져 있다고 합니다. 파도가 심할 때 똑바로 가게 된다면 배가 전복되는 큰 사고가 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약간 기울어져서 항해하게 됩니다.

어쩌면 우리의 인생도 이렇지 않을까요?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 똑바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약간 기울어져서, 즉 비정상적인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 오히려 정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를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는 많이 웃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웃는 것이 건강해지는 정상적인 모습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만약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지금 막 경험한 사람이 유쾌하게 큰 소리를 내어 웃고 있다면 어떨까요? 이때는 비정상적인 모습처럼 보이는 슬피 우는 것이 정상입니다.

똑바로 살지 못한다고 힘들어할 필요가 없습니다. 똑바로 살지 못하는 것 같지만, 실상 가장 정상적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 마음은 다른 사람을 향할 때도 같은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어렵고 힘든 사람 모두 주님께로 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 안에서 큰 힘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바라지 않는게 죄다

-전삼용신부-


  저는 아버지께서 4년 전에 췌장암으로 갑자기 돌아가신 것 때문에 큰 죄책감을 지니고 있습니다. 제가 무엇을 해서가 아니고 아무 것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건강하셨고 병원에 입원하시어 췌장암 진단을 받으신 후 20일 만에 돌아가셨습니다. 건강한 일반인의 모습에서 하루하루 아주 빠른 속도로 숨도 쉬기 힘든 모습으로 변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물론 아버지께 믿기만 하면 반드시 기적도 일어날 것이라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저는 내심으로 의사의 말을 더 믿고 있었던 것을 압니다. 온 몸에 전이된 췌장암 말기는 기적이 아니면 회복될 수 없었고 저는 기적에 대한 확신이 없었습니다. 지금 와서는 그때 끝까지 희망하지 못했던 것이 매우 후회가 되고 그것 자체가 아버지께 죄를 지은 마음입니다.

      아버지께서 그렇게 돌아가셨으니 당연히 암이 극적으로 치료되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귀가 솔깃합니다. 특별히 근래에 가장 뜨거웠던 강아지 구충제로 암이 치료된 ‘조 디펜스’의 이야기는 저의 죄책감을 더 자극했습니다. ‘미리 알았더라면!’이란 생각이 자주 듭니다. 물론 TV에서는 아직 임상실험을 거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의사와 상의해야 한다고는 하지만 당장 내일 죽는데 부작용을 누가 무서워하겠습니까? 그런 지푸라기라도 잡아보지 못한 것이 한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나병환자는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하십니다. 그런데 만약 나병환자가 청하지 않았다면 예수님께서 “나도 원한다!”라고 하셨을까요? 하느님은 내가 먼저 원해야 원하십니다. 좋은 뜻을 갖는 것이 전부입니다. 인류를 위해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꿈을 품어야합니다. 그것을 품지 않는 것이 곧 죄입니다. 부모가 자녀가 잘 자라주기를 바라지 않는다면 그것이 죄가 아닐까요? 당연히 지금 나의 처지로서 바라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라면 하느님의 자녀로서 바라야 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을 바라지 않으면 죄인 것입니다.

      어제 우리나라 국립암센터에서 구충제의 항암효과에 관한 임상실험을 ‘가치 없어 취소’하기로 했다는 뉴스를 보았습니다. 연구진이 모여 2주간 자료검토를 한 결과 논문들도 다 허접한 수준이고 그냥 딱 봐도 효과가 없으니 굳이 실험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결론을 낸 것입니다.

      그런데 뉴욕대 화학과 박사이며 미국내과 전문의인 장항준 원장은 미국은 지금 “‘정부가 주도해서’ 구충제 임상실험중이다.”라고 말합니다. ‘미국 국립 보건원’(NIH) 주체로 케니스 코헨 소아 종양학 교수 중심으로 연구가 진행 중인 것입니다. 미국에서조차도 정부주도로 임상실험을 한다면 우리나라에서도 무언가 시도라도 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많은 이들은 이런 연구에 관심이 없는 것이 ‘돈’과 얽혀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만약 구충제가 암과 다른 질병에 효과가 있다면 수많은 암센터와 제약회사들이 문을 닫아야합니다. 문을 닫아야 하는 사람들에게 연구가 의뢰 되었으니 의욕이 생길 리가 없는 것입니다. 만약 그런 이유라면 그것이 죄입니다. 바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알렉산더 플레밍이 페니실린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인류 평균 수명이 고작 20~30세였다고 합니다. 워낙 유아나 아동기에 천연두, 홍역, 콜레라, 폐렴, 패혈증 등으로 사망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플레밍은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를 죽일 수 있는 무언가를 찾고 싶었습니다. 그가 바이러스 샘플을 덮지 않고 휴가 다녀 온 사이 어떤 곰팡이가 피어 그 바이러스를 죽이는 것을 목격하게 됩니다. 페니실린의 발견은 그의 지저분하고 정리를 잘 하지 않는 성격 때문에 발견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발견은 수천만 명의 생명을 살리고 연장시키는 엄청난 인류의 수확이 되었습니다.

      바라기만 하면 은총이 주어집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건강하고 행복하고 천국에 들어가는 꿈을 꿉시다. 그런 사람에게 페니실린과 같은 기적의 약이 주어질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주시려고 하는데 아무도 바라고 있지 않다면 그것 자체가 죄가 됩니다. 끝까지 해보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를 하지 않으려면 끝까지 바라는 수밖에 없습니다.


-조재형신부-


미국의 가로수는 키가 크고, 둘레가 넓습니다. 그런데 간혹 비, 바람에 큰 나무가 쓰러지는 걸 봅니다. 이유는 크기보다 뿌리가 깊지 않아서라고 합니다. 여름이면 물을 자주 주기 때문에 굳이 땅속 깊이 뿌리를 내리지 않아도 되기에 뿌리가 깊지 않다고 합니다. 대서양에서 잡은 청어도 그렇다고 합니다. 청어만 있을 때는 먼 항해에 지쳐서 대부분 죽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청어가 무서워하는 상어를 한 마리 넣어두면 청어들은 상어를 피해서 움직이게 되고, 먼 항해에도 대부분 죽지 않았다고 합니다. 때로 갈망과 갈증이 필요한 건, 나무도, 청어도, 우리의 삶도 비슷합니다. 요즘 아이들은 예전 아이들과 비교하면 체격이 크고, 키도 커졌습니다. 그러나 지구력과 체력은 예전의 아이들과 같지 않다고 합니다. 시련과 고통의 바람이 불어오면 쉽게 넘어지곤 합니다.

 

신앙은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행위가 아닙니다. 신앙은 하느님의 뜻이 나를 통해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행위입니다. 오늘 제1 독서에서 우리는 그 점을 볼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 바로 물과 피를 통하여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물만이 아니라 물과 피로써 오신 것입니다. 이것을 증언하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성령은 곧 진리이십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곧 하느님 아드님의 이름을 믿는 이들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여러분이 영원한 생명을 지니고 있음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물과 피를 통하여 세상에 오셨다고 이야기합니다. 피는 겟세마니 동산에서 밤을 새워 기도하실 때 흘리신 피입니다. 피는 가시관을 쓰시고, 채찍으로 맞으실 때 흘리신 피입니다. 피는 십자가 위에서 창으로 찔리신 옆구리에서 흘러나왔던 피입니다.

 

교회의 모습을 봅니다. 화려하고 쾌적한 성당이 있습니다. 영적인 갈증을 채워줄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아주 쉽고 편하게 성당으로 갈 수 있습니다. 인터넷 검색만으로 좋은 말씀과 강론을 찾을 수 있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봉사할 시간과 장소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주일 미사 참례 수는 매년 줄고 있습니다. 하느님께 찬미와 영광을 드리는 시간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영적인 도전과 갈증을 외면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크게 자란 나무지만 뿌리가 깊지 못해서 비와 바람에 쉽게 넘어지는 나무를 보는 것 같습니다. 성직자가 독신으로 사는 건 온전한 몸과 마음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같은 마음과 정성으로 하느님의 자녀를 사랑하기 위해서입니다. 독신의 의미를 알지 못하면 그냥 혼자 사는 사람과 다르지 않습니다. 권위와 독선에 취하면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흘리신 피를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과 순교자들이 걸어가신 길을 따라가지 못합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무엇일까요? 성서는 분명하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아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영원한 생명의 시작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은 물리적인 법칙을 넘어서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은 공간 안에서 시간을 무한정 늘리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길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길, 사랑의 길, 자비의 길을 함께 걷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약하기에 세상의 유혹 앞에 넘어지곤 합니다. 그래서 참된 가치와 진실한 행복을 선택하기보다는, 순간의 기쁨을 주는 것들을 택하게 됩니다. 잠시의 기쁨과 쾌락을 위해서 양심과 영혼을 속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은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외딴곳으로 물러가 기도하셨다.” 예수님의 권능과 표징은 하느님과 일치하는 기도에서 시작합니다. 광야에서의 고통과 시련을 이겨내는 영적인 갈망에서 시작합니다


깨끗하게 되는 것, 새롭게 시작하는 것,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양승국신부-

 

가끔씩 좌절과 실패, 오욕과 흑역사 속에 흘러온 지난 세월을 돌아볼때 마다 드는 생각입니다.

 

 ‘만일 다시 시작할수 있다면, 오답으로 가득한 내 인생의 시험지를 쫙쫙 찢어버리고 새롭게 시작하고 싶습니다. 상처와 부끄러움으로 가득한 지난 발자취를 지우개로 싹싹 지우고 원점에서 새출발하고 싶습니다.’

 

 이런 제게 오늘 주님께서는 그게 전혀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해주십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루카 복음 5장 13절)

 

 중증 악성 나병으로 인해 온몸이 종기와 상처투성이인 한 가련한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간절히 청합니다. 그가 얼마나 다급했으면 율법의 규정까지 어겨가며 예수님께 다가왔습니다.

 

 레위기에 따르면 나병환자들은 부정을 탄 사람으로 민가가 운집해있는 고을 밖에 머물러야 했습니다. 그들은 성한 옷을 입을 수 없었습니다. 일부러 옷을 찢어 입어야 했고, 머리는 풀어야 했으며, 윗수염을 가려야 했습니다.

 

 나병환자들은 사람들이 다가오면 큰 목소리로 ‘부정한 사람이요. 부정한 사람이요!’라고 외쳐야만 했습니다. 결국 나병에 걸렸다는 것은 공동체에서 추방된 존재, 죽음 목숨이나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그 나병환자는 얼마나 절박했으면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이렇게 청했습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루카 복음 5장 12절)

 

 그는 무릎을 꿇고 엎드림으로써 자신의 비참한 처지를 인정했습니다. 큰 비참함 만큼이나 그의 기도는 강렬했습니다. 강한 신뢰심을 바탕으로 간절히 청했습니다. 그는 자신 앞에 서 계신 예수님 안에 하느님 아버지의 능력이 작용하고 있다는 믿음을 고백했습니다.

 

 그는 나병으로 인해 온몸에 퍼져버린 상처만 깨끗해지기를 청한 것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병으로 인해 생긴 깊은 마음의 상처, 철저하게 실패한 것 같은 자신의 인생, 하느님과 세상을 향한 원망과 불신으로부터도 깨끗해지기를 청했을 것입니다.

 

 나병환자의 외침이 얼마나 간절했으면 그 외침이 하늘을 찔렀습니다. 예수님의 폐부를 깊숙히 찔렀습니다. 그분으로 하여금 강한 연민의 정을 불러일으키게 했고, 마침내 치유의 기적을 불러오는 기적을 일으키게 만들었습니다.

 

 은혜롭게도 우리 교회는 그 옛날 나병환자처럼 간절한 마음으로 깨끗해지고 싶으며, 다시 한번 새출발하고 싶다는 신자들을 위해 아주 좋은 시스템을 만들어놓았습니다.

 

 고백성사와 성체성사가 바로 그것입니다. 진정성 있게 잘 준비하고 온몸과 마음으로 성사에 참여한다면, 우리는 이 성사들을 통해 완전 깨끗하게 변화될 수 있습니다. 티끌 한점, 오점 한점 없이 순백의 빛나는 모습으로 뒤바뀔 수 있습니다.

 

 이 성사들을 통해 우리는 어제의 낡은 나를 강물에 흘려보내고, 새로운 나로 거듭나 새 인간으로 새출발할 수 있습니다. 죄와 죽음의 땅에서 노예살이하던 우리를 빛과 생명의 땅으로 건너가게 하는 은총의 파스카 성사가 고백성사요 성체성사인 것입니다.

 

 우리 영혼을 부자연스럽게 하고 위축시키는 부담스런 죄를 지었다면, 3개월, 6개월씩 끌어안고 힘겹게 살아가지 마시고, 즉각적인 고백성사를 통해 그때 그때 시원하게 털어가시기 바랍니다.

 

 고백성사를 보기도 그렇고, 안보기도 그런 애매한 경우에는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미사 시작 부분, 참회의 예절 순간이나 영성체 직전 주님의 기도 때는 아주 좋은 참회와 고백의 순간입니다.

 

 어찌보면 그 순간은 작은 고백성사의 순간입니다. 짧은 순간이지만 진정으로 통회하시면 됩니다. ‘내탓이요! 내탓이요!’가슴만 쾅쾅 크게 치지 마시고, 마음을 치시기 바랍니다. 진심으로 뉘우치고, 주님의 자비를 청하며 새롭게 시작하기를 다짐하시면 됩니다.

 

 그렇게 은총 상태를 갖춘 후, 정성스레 영성체에 임할 때, 우리는 성사 안에서 엄청난 기적과 놀라운 은총을 매일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외딴 곳으로 물러가

-반영억신부-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몰려왔습니다. 말씀도 듣고 병도 고치려고 모여들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지혜로운 말씀과 능력은 어디서 온 것일까? 생각해 봅니다. 그 답은 외딴 곳으로 물러가 기도하시는 모습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외딴곳은 ‘광야’로 가셨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달콤한 자리를 떠나 하느님을 만나러 나가는 작은 탈출입니다. 광야는 바로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늘 당신을 파견하신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찾고 그분의 뜻을 행하셨습니다. 그것이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주실 것이다”(마태6,6). 기도를 통해 나의 속을 보게 되면 내 뜻을 내려놓고 아버지의 뜻을 따르게 되고, 또 모든 것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느님과의 대화요, 영혼의 숨결이라고 합니다. “심장과 심장의 만남”이라고도 합니다. 하느님과 내가 하나가 되는 것이지요. 또한 “기도는 하느님과 맺는 관계이며, 그 관계를 발전시켜 나가는 것입니다”(토마스 키킹신부). 기도한다는 것은 무엇을 하더라도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생각하고 행동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기도’에서 말하듯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하는 것입니다. 오늘 나병에 걸린 사람이 엎드려 청한 것처럼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루카5,12).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하고자 하시면”이라는 것은 ‘모든 것은 주님께 달려 있고, 나는 오로지 주님의 처분만을 바랄 뿐입니다.’라는 뜻입니다. 이 믿음의 자세가 우리가 하느님께 기도드리는 자세입니다.

 

기도의 목적은 나의 원의를 이루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데 있는 것이고, 하느님과 사랑의 관계를 회복하는데 있습니다. 관계를 회복하면 모든 능력이 거기에 있습니다. 어느덧 나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려는 사람으로, 내 영역을 확장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나라를 확장하려는 사람으로 바뀌어있음을 감사하게 됩니다. 늘 행복하게 됩니다. 그러니 외딴 곳으로 물러가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되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기도한 나병환자의 마음으로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당시 나병은 불치의 병이고 전염성이 높기 때문에 가족은 물론 사회에서 격리되어 살아야 했고, 사람들은 그들을 철저히 소외시키고 외면을 했습니다. 나병환자는 공공장소에 나올 수 없는 상황입니다. 혹 누가 가까이 오면 ‘다가오지 말라’고 소리쳐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 나병환자는 더 이상 다른 길이 없어서 마지막으로 마치 지푸라기라도 잡고 매달리는 간절한 심정으로 하소연했습니다.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청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저를 살리든지 죽이든지 알아서 하십시오. 저의 목숨은 당신께 달려있습니다.’하는 표현입니다. 또한 ‘한 말씀만 하십시오. 당신만이 저의 희망입니다.’하는 순종의 자세입니다. 그리고 거룩하신 분 앞에 피조물로써 경배하는 자세입니다. ‘당신만이 저의 모두입니다.’하는 마음의 표현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앞에 나올 때 취할 자세는 바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는’자세입니다. 그 안에 치유의 능력이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이 외면하는데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손을 내밀어 병자에게 대시고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루카5,13)며 나병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나병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를 넘어서서 치유의 손길을 보내주셨습니다. 육체적 고통뿐 아니라 죄로 인한 벌로써 병을 얻었다는 종교적 단죄, 사회적 소외에서 해방시켜 그를 가족의 품으로 돌려보내 주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앓고 있는 어느 한 부분만이 아니라 몸과 마음 모두를 치유해 주신 것입니다. 주님은 육체만이 아니라 영혼의 모든 병을 치유해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자비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당신의 따뜻한 손길에.....

 

@93세 어머니께서 새해 첫날 하신 기도입니다.

이제 천국에서 더 간구해 주실 것을 희망합니다!

비나이다ㅣ. 비나이다. 그저 우리 신부님 일취월장하게 하옵시고 여러사람 앞에서 실수없이 걱정, 근심 없이 잘 다닐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고 건강주시옵고 보살펴 주시옵소서,

하느님께 비나이다. 비나이다.

우리 철부지 신부님 불쌍하게 봐주시고, 봉사하고 잘 다닐 수 있도록 해 주시옵소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이영근신부-


오늘도 우리 주님 공현은 계속됩니다. 지난 월요일에는 갈릴래아에서, 어제는 나자렛에서의 공생활의 시작으로 이사야 예언의 성취를 통해 당신이 하느님이심을 드러내 보이셨고, 지난 화요일에는 5천명을 먹이신 일을, 수요일에는 호수 위를 걸으신 일을 통해 모세의 활동을 완성시키시며 당신을 드러내셨습니다. 오늘은 나병환자의 치유를 통해 예언자 엘리사의 활동을 완성함으로써, 당신이 메시아이심을 드러내십니다. <2열왕기(5,1-27)에는 하느님의 사람 엘리사가 아람 임금의 군대 장수인 나아만을 요르단 강에 일곱 번 몸을 씻게 하여 나병을 낫게 함으로써 야훼 하느님이 주님이심을 드러내셨듯이,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나병을 직접 치유하심으로 당신이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십니다.

나병환자는 <레위기>에 따르면, 옷을 찢어 입고, 머리를 풀고, 윗수염을 가림으로써 자기가 죽은 사람과 다를 바 없음을 드러내야 하고, 사람이 다가오면 나는 부정한 사람이오. 나는 부정한 사람이오.(레위 13,45)라고 외쳐야만 했습니다. 그는 건강한 사람들과 인간관계를 맺을 수 없었고(민수 5,2-4), 공동체로부터 소외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이된 일인지, 오늘 <복음>에서 나병환자는 예수님을 피해간 것이 아니라, 엎드려 예수님을 주님이라 부르면서 깨끗하게 해 주기를 청했습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루카 5,12)


여기에서, 우리는 구약의 율법예수님의 복음의 차이를 극렬하게 엿볼 수 있습니다. 곧 구약의 율법은 나병환자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아야 한다는 규정을 제시할 뿐, 그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는 나병환자이기 때문에,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예수님께 와서 치유를 받습니다.

이처럼, <복음>은 우리가 죄인이고 불결한 사람이기 때문에 하느님께 나아갈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예수님께 다가가야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병들었고 죄인이기에, 감싸주시고 치료해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루카 5,13)


구약의 율법에 따르면(레위 13,45-46), 나병환자가 집 안에 들어서면 그 집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부정함을 입는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하물며 부정한 나병환자에게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댄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에게 손을 내밀어 만지십니다. 예수님의 은 구원의 힘을 드러내며, 그분의 신체적 접촉은 우정과 사랑을 표현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나병환자를 위한 사랑을 율법보다 더 앞세우십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부정을 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병환자가 깨끗이 나았습니다. 예수님의 거룩함은 부정을 피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만져 깨끗하게 하는데 있는 까닭입니다. 율법을 완성하시러 오신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규정보다도 율법의 정신인 사랑을 더 소중하게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이는 당신께서는 불결함에 더럽혀지지 않는 거룩하신 분이심을 드러내줍니다. 곧 당신의 신성을 드러냅니다. 마치, 호렙산의 불꽃 속에서도 타지 않는 떨기나무처럼(탈출 3,2), 성모님께 아기를 낳으면서도 동정성을 잃지 않게 하신 것처럼, 불결한 이를 만지면서도 자신은 불결해지지 않으시고 오히려 불결한 이를 거룩하게 하십니다. 그러기에, 참으로 당신께서는 거룩하신 분이시오, 사랑이신 우리 주님 구원자이십니다.

오늘, 우리 주님께서는 당신 뜻을 따르고자 하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루카 5,13)


-오늘 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루카 5,13)


주님!

불순함으로 제 온 몸이 부스럼투성입니다.

죄와 상처로 속이 문드러지고 마음이 병들었습니다.

불결하기에 저는 망설이지만, 당신은 오히려 불결하기에 다가오라 하십니다.

죄인이기에 저는 숨지만, 당신은 오히려 용서받을 대상이라 하십니다.

하오니 주님,

제가 하고자 한 바가 아니라, 당신이 하고자 한 바를 이루소서!

저의 희망이 아니라, 당신의 희망을 제게서 이루소서.

당신이 원하니까 제가 원하게 하소서! 아멘.


참 생명이신 예수님 

-송영진신부-


“예수님께서 어느 한 고을에 계실 때, 온몸에 나병이 걸린 사람이 다가왔다.
그는 예수님을 보자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이렇게 청하였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그러자 곧 나병이 가셨다(루카 5,12-13).”

여기서 ‘깨끗하게 하다.’ 라는 말은, 나병의 치유를 뜻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라는 말은, “저는 주님께서 저의 병을 고쳐 주실 수 있다고 믿습니다.
저를 고쳐 주십시오.” 라고 간청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의 처지를 생각하면, 이 말은 단순히 치유만을 간청하는 말이 아니라,
‘새 인생’을 살 수 있게 해 달라는 간청이고, ‘새 생명’을 달라는 간청입니다.
그는 죽는 것보다 더한, 또는 죽는 것이 더 낫겠다고 생각할 만큼
고통스럽고 절망적인 인생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에 병을 고친 다음에도 그의 인생에 아무런 변화가 없다면,
병을 고쳤다는 것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깨끗하게 하다.’를, ‘완전히 새롭게 하다.’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얻기를 바라고 있는 ‘영원한 생명’은 완전히 새로운 생명입니다.
그래서 그 생명은 ‘참 생명’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바로 그 ‘참 생명’을 주시는 분이고,
어디 다른 곳에서 그 생명을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생명을 우리에게 나누어 주시는 분입니다.
따라서 “참 생명이신 예수님”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을,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으로만 생각할 사람이 있을 수도 있는데,
만일에 안 죽고 영원히 사는 것 외에는 지금의 인생과 다른 점이 하나도 없다면,
어쩌면 그것은 끔찍하게 고통스러운 일이 될 것입니다.
묵시록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는 인생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느님 친히 그들의 하느님으로서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다시는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묵시 21,3-4).”
“그곳에는 더 이상 하느님의 저주를 받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묵시 22,3).”
만일에 안 죽고 영원히 살면서,
지금 겪고 있는 슬픔과 울부짖음과 괴로움을 계속 겪어야 한다면,
또 지금 울고 있는 것과 똑같이 울면서 살아야 한다면,
안 죽고 영원히 산다는 것은 영원한 고통과 슬픔 속에서 사는 것이 되어버립니다.
우리가 바라는 영원한 생명이 그런 것일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 후의 삶’에 대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저세상에 참여하고 또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 받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
그들은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루카 20,35-36).”
이 말씀은, 인간 세상의 혼인이나 가족 제도를 부정하는 말씀이 아니라,
저쪽 세상의 ‘완전히 새롭고 참된 삶’을 설명해 주신 말씀입니다.
부활 후에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는 인생은,
모든 욕망과 욕심에서 벗어난 인생입니다.
미움, 원한, 이기심, 고집, 집착 같은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 사이에 갈등도 없고 분열도 없고 다툼도 없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일도 아픔을 주는 일도 없습니다.
오직 사랑과 평화와 기쁨만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완전히 새롭고 참되고 영원한 생명을 향해서 나아가는 생활이고,
그 생명을 얻기 위해서 노력하는 생활입니다.
그렇지만 그 생명을 누리는 일은 언제인지 모르는 먼 훗날의 일도 아니고,
죽은 다음에야 이루어지는 일도 아니고, 지금 이곳에서 이미 시작된 일입니다.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는 않은 일입니다.)
우리는 죽은 다음에 들어가는 천국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지금 머무르고 있는 이 세상을 그런 나라로 만들어야 하고,
자신의 삶을(생활을) 그렇게 변화시켜야 합니다.
첫 번째로 할 일은 사랑 실천입니다.
사랑은 지옥 같은 곳도 천국으로 바꿀 수 있는 힘입니다.
이야기에 나오는 병자가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지옥 같은 인생을 살았다면,
그것은 거의 대부분 ‘사랑 없는’ 주변 사람들 탓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고자 하시면”이라는 병자의 말과
“내가 하고자 하니” 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고자 하시면”이라는 병자의 말은,
예수님의 자비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는 모든 것을 지배하는 주님이신 예수님의 ‘권능’은 믿고 있었지만,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의 ‘자비’에 대한 믿음은 부족했습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 병자가 청하기 전에 이미, 또는 청하지 않아도,
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는 것은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예수님의 권능과 자비를 모두 믿는 것입니다.
자비로우신 예수님은 내가 청하기도 전에 나의 사정을 알고 계시고,
나를 가엾게 여기시는 분입니다.

한 가지 더 생각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충분히 할 수 있는 일도 안 하려고 하고,
또 조금 까다롭고 어려운 일만 만나면 “힘들어 죽겠다.”고
주님을 원망하는 짓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요나 예언자입니다.
그는 아주까리 나무 그늘에서 더위를 피하고 있다가, 나무가 시들어 죽고
열풍이 불자 화가 나서, “이렇게 사느니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 라고
하느님께 불평했습니다(요나 4,8).
자기가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인데도 손끝 까딱 하지 않고,
죽을 만큼 절망적인 상황이 아닌데도 죽고 싶다고 투덜거리기만 하고,
가만히 앉아서 전부 다 주님께 해 달라고 요구하는 것, 그것은 기도가 아닙니다.
도저히 나의 힘으로 안 되는 일은 도와달라고 주님께 간청하지만,
내가 해야 할 일과 나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스스로 하는 것,
그것이 올바른 기도입니다. 


-조욱현신부-


복음: 루카 5,12-16: 나병 환자를 고치시다.

오늘 복음을 보면, 주님의 지엄한 권능과 나병 환자의 굳은 믿음이 짝을 이루고 있다. 그 환자는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린다. 자기 죄를 부끄러워하는 마음과 겸손의 표시이다. 그는 자기 상처를 내보이며 고쳐달라고 간청한다. 이 간청 속에 이미 믿음이 충만하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12) 주님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불결함 때문에 자신이 없었다.

 

나병 환자 치유는 예수님의 하느님 나라의 선포의 일부로서, 그분은 신성으로는 능히 병을 다스리고 당신의 인성으로는 환자에게 손을 내밀어 뻗으심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주님께서는 환자의 간청을 받아 주시고 당신에게 그런 능력이 있음을 감추지 않으신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13) 또한 당신의 전능한 손을 내밀어 그의 몸에 대신다. 그러자 곧 나병이 사라지고 환자의 괴로움도 끝났다.

 

나병 환자는 사제에게 가서 몸을 보이고 깨끗해진 데 대한 예물을 바치라는 분부를 듣는다. 사제에게 몸을 보이면 하느님의 은총으로 병이 나았음을 알게 될 것이다. 모세의 법규에 따라 예물을 바치게 하심으로써, 주님은 또한 당신이 율법을 폐지하지 않고 완성하러 오셨음을 보여 주신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일을 하시면서도 언제나 기도하시는 분이셨다. 그분이 그렇게 기도하셨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 열심히 기도하며 살아가야 하겠는가!

 

오늘 복음 말씀은 우리가 우리의 죄로 인하여 자기 자신을 멸시하고 또 쓰라린 수치로 가득 차 있을 때에도, 예수께서는 나병환자를 고쳐주듯이 우리의 죄를 깨끗이 해 주시고자 언제나 기다리고 계신다는 뜻이다. 이제 우리의 할 일은 무엇인가? 다른 것이 아니다. 복음의 나병환자와 같이 우리는 주님 앞에 나의 잘못을 솔직히 인정하고 주님의 자비를 구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예수님은 인간적으로는 손댈 수 없는 자에게까지 손을 대시고, 사랑할 수 없는 자를 사랑하시며, 용서할 수 없는 자를 용서하시는 분이시다.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 속에서 우리에게 향하고 있는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진정한 사랑이 어떠한 것인지를 우리는 마음으로 받아들여 알아야 하며, 내 자신이 그러한 사랑과 은혜를 받았다면 그것으로 인해서 우리도 또한 다른 이를 그러한 사랑과 용서로써 대하여야 함을 나병환자의 치유에서 알아야 할 것이다.

 

부족하고 나약한 우리 자신의 모습, 많은 경우 죄로 인해 더럽혀진 우리의 몸과 마음을 하느님 앞에 진실하게 인정하고 그분의 용서를 치유를 청하며, 용서받은 우리 자신이 이제 우리의 이웃의 잘못을 용서해줄 수 있는 삶이 되어야 한다.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다시 한 번 다짐하면서, 언제나 용기를 갖고 나아갈 수 있도록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자.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루카 5, 13)

-한상우신부-

주님께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여주십니다.

우리들의
아픔과 슬픔을
치유하여 주십니다.

예수님 안에
치유의 길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온 마음으로
우리의 아픔을
읽어주십니다.

삶의 실패자란
없습니다.

다시 치유되고
다시 시작 할
힘을 주십니다.

기다림이라는
믿음이
가장 알맞은 때에
치유라는 선물로
다가옵니다.

예수님에게서
버려진 사람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치유를 통해
우리의 마음을
다시 살리시는
주님을 믿습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
치유가 있습니다.

아픔의 문을 열어
다시 깨끗하게 하시는
주님의 치유가
여기 있습니다.

저를 깨끗하게
하여 주십시오.


-오상선신부-


주님 공현 대축일 후 다섯째 날인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는 세상의 고통을 위무(慰撫)하는 예수님 사랑의 원천이 무엇인지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루카 5,13).

온몸에 나병이 걸린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낫게 해달라고 간청합니다. 한센균이 몸의 어느 한 부분이 아니라 온몸에 퍼졌다는 건 이미 그의 병이 매우 심각한 상태에 이르렀음을 보여줍니다.

율법에서는 접촉조차 금하는 부정한 상태의 사람이지만 예수님께서는 거리낌없이 그에게 손을 대십니다. 치유에 앞서 지금 그에게 필요한 건 무엇보다 다정한 접촉이 주는 '사람 대접'이니까요. 병이 낫기 전에도 부정한 육신을 어루만져 준 이가 있었다는 기억은 그의 육신뿐만 아니라 움츠린 마음이 일어서는데 큰 지렛대가 될 것입니다.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령한 대로 네가 깨끗해진 것에 대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루카 5,14).

예수님 자신은 율법을 초월해 나병 환자와 접촉하셨지만, 그에게는 율법의 준수를 명하십니다. 이는 회복을 공적으로 인정받은 그가 공동체에 다시 복귀할 길을 열어주시려는 것입니다.

율법에 대한 예수님의 관점은 이처럼 유연하고 자유롭습니다. 그분께 율법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인간을 사랑하는 도구일 뿐, 그 자체가 목적이나 우상이 아닙니다.

많이 허물어지고 상했을 가련한 환자의 몸에 손을 대시는 예수님을 관상합니다. "하고자" 하는 의지로 불타오른 그분 마음, "깨끗하게 되어라" 하시는 말씀, 주저없이 보듬는 다정한유 손길... 예수님은 이 순간 세상에서 버림받았던 가장 가난한 이를 형제로, 벗으로, 하느님으로 받아들이신 것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을 증언하는 세 가지를 이야기합니다.

"물과 피와 성령"(1요한 5,8).

물은 예수님께서 받으신 세례를, 피는 십자가상 희생 제사를 가리킵니다. 성령은 세상에 보내주신 당신의 현존입니다.

이를 오늘 복음의 예수님과 연결해 보면, 물은 나병 환자를 치유하고 부정함을 돌이키는 정화를 상징합니다. 피는 예수님 마음에서 뜨겁게 타오른 연민의 사랑입니다. 성령은 "깨끗하게 되어라" 하시는 말씀을 이루어 주시는 영감의 주체이십니다. 예수님은 이 치유 기적을 통해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이 드러납니다.

이제 예수님의 소문이 점점 더 퍼져나가서 많은 군중이 모여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외딴곳으로 물러가 기도하셨다"(루카 5,16).

오늘의 복음 대목 끝자락에 한 줄로 언급된 이 말씀이야말로 예수님의 말씀과 사랑과 행동이 분출되고 지탱되는 원천이 아닐까 합니다. 외딴곳에서 하느님과 머무르는 기도! 즉 고독과 침묵으로 하느님과 마주하여 그분을 섬기고 그분을 사랑하는 일, 이것이야말로 이 지상에서 예수님의 신원과 정체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주님의 일입니다.

이 순간은 그 자체로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증언합니다. 그리고 이 순간에서 얻는 힘이 하느님의 일을 하시는 원동력입니다. 이 외딴곳의 기도가 있어 예수님은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계시건 성삼위 하느님의 사랑과 일치 안에 머무를 수 있으셨지요.

"하느님의 아드님을 믿는 사람은 이 증언을 자신 안에 간직하고 있습니다"(1요한 5,10).

주님을 믿는 우리는 존재 안에 물과 피와 성령의 증언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새겨진 이 증언들은 날마다 우리를 정화하고 불타게 하고 깨닫게 해줍니다. 이 증언이 곧 예수님의 현존입니다.

고통받는 이웃을 향한 우리의 애틋한 눈길, 경청하는 귀, 건네는 다정한 말 한 마디, 마주잡는 연대의 손길, 다가서는 발걸음... 그 원천은 하느님과 나누는 사랑이고, 우리 안에 간직한 예수님의 현존입니다. 우리 존재에 새겨진 하느님의 증언이 날마다 우리를 일으켜 세우고 재촉하고 끌어당깁니다.

사랑하는 벗님! 그러니 무엇보다 우선하여 외딴곳 하느님 앞에 머물기를 놓치지 맙시다. 아무리 바쁘고 분주하고 세상의 요구가 많아도 결코 이 순간을 놓아버려서는 안됩니다. 거기서 우리의 존재와 신앙과 사랑이 흘러나옵니다. 우리가 그 원천을 간직할 때 우리 자신이 곧 그리스도의 증언이 될 것입니다. 아멘.

공연자가 아니라 공현자가 되어야!  
-김찬선신부-


오늘 복음의 얘기는 나병 환자를 치유해주시는 주님의 사랑과 능력이나
치유를 받는 나병 환자의 겸손과 믿음의 관점에서 볼 수도 있지만
공현 시기를 보내는 요즘이니 오늘은 다른 관점에서 보려고 합니다.

곧 주님께서 치유를 해주신 다음 당신이나 당신의 치유에 함구하라고 하니
나병 환자는 그것을 동네방네 떠들고 다녀 더 알려지게 했다는 관점입니다.
말하자면 주님은 감추시는 분이시고 나병 환자는 공현자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주님도 공현자셨고, 당신을 감추시는 이유도
아버지 하느님을 공현하고, 하느님 나라를 이루시기 위해서고요.

주님께서 이러시는데 그런데 우리는 나를 내세우거나 드러내고
내가 영관이나 칭찬을 받으려 함으로써 하느님을 공현하지 않습니다.
제가 일생을 저 자신과 싸운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제가 좋은 일을 조금 하고는 그것으로 인해 내가 성취감을 느끼거나
다른 이들로부터 인정과 좋은 평가를 받으려 하지 말아야 한다고 저 자신과
싸웠는데 실은 그것이 제게 육적인 성취감과 인정욕구가 있다는 반증이지요.

그런데 일생의 노력이 요즘 와서 좀 열매를 맺는 것인지 아니면
나이를 먹어가면서 하느님께 좀 더 가까이 감을 의식케 되어서인지
이런 성취감과 인정욕구는 줄어들고 대신 하느님 앞에 저를 위치시키며
하느님 앞에서 저를 보는 것은 늘어나는데 그러나 아직도
오늘 주님처럼 기도 안으로 완전히 숨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오늘 주님은 나병 환자를 고쳐주시는 대단한 일을 하시고는
마치 돌이 호수에 퐁당 잠기고 말 듯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기도 안에 잠기시지 않습니까?

오늘 주님처럼 좋은 일을 하고 바로 기도 안에 들어가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랑의 행위를 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칭찬을 받기 위해 공연한 것이요,
하느님 공현이 아니라 나의 공현을 위해 공연을 한 것에 불과할 것입니다.

다음은 감추시려는 주님을 공현하는 공현자 나병 환자에 대해 보겠습니다.
우리도 나병 환자처럼 공현자가 되기 위해서지요.

그런데 우리가 나병 환자처럼 공현자가 되려면
우리도 나병 환자처럼 구원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공현자란 앞서 봤듯이 자기를 보여주는 쇼나 공연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의 구원을 선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구원을 체험한 적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구원의 주님과 주님 구원을 선포하고 공현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공현자가 되기 위해 우리도 구원을 받은 체험이 있어야 하겠지요.
그런데 그럼에도 우리가 공현자가 되지 못했다면 그것은 나환자에게는
주님께서 구원을 주셨는데 나에게는 구원을 주시지 않았기 때문일까요?

주님께서 주지 않으신 건가요, 내가 받지 않은 건가요?
아니면 주님께서 안 주신 것도 아니고 내가 안 받은 것도 아닌 건가요?
다시 말해서 구원을 받았음에도 그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것일 뿐인가요?

적극적인 구원 거부자가 있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이러저러한 이유로 햇빛을 싫어하고
밤을 더 좋아하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빛이신 주님을 거부하는 사람입니다.

구원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느님이 아닌 다른 자가 그의 구원이거나 자기 안에 구원이 있는 자입니다.

제 생각에 우리는 적어도 이런 사람들이 아닙니다.
주님을 구원자로 믿고 주님의 구원을 원하는 사람들입니다.
다만 구원이 주어졌고 누리고 있음에도 민감치 못한 사람은 있을 수 있고,
그래서 적극적인 구원 선포자와 공현자가 못 되는 사람은 있을 수 있지요.

매일 떠오르는 햇살의 구원은 느끼지 못하고 매우 극적인 구원만
구원으로 느끼는 내가 아닌지 그래서 돌아보는 오늘 우리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6년 1월 8일 주님 공현 후 금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그러자 곧 나병이 가셨다. (루카 5,12-16)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나병 환자를 고쳐 주십니다. 그런데 나병 환자의 몸에 직접 손을 대시지요. 이는 이스라엘의 정결 규정을 어기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말씀만으로도 이 나병을 고쳐 줄 수 있음을 다른 예로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에게 깜짝 놀랄만한 스캔들을 제공하는 행동을 하셨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당시의 사람들은 나병 환자를 함부로 다뤄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병 환자는 사랑을 받아야 할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 역시 사랑을 받아야 할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 직접 당신의 손을 대신 것입니다.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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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은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행위가 아닙니다신앙은 하느님의 뜻이 나를 통해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행위입니다오늘 제독서에서 우리는 그 점을 볼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 바로 물과 피를 통하여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물만이 아니라 물과 피로써 오신 것입니다이것을 증언하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성령은 곧 진리이십니다내가 여러분에게곧 하느님 아드님의 이름을 믿는 이들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여러분이 영원한 생명을 지니고 있음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물과 피를 통하여 세상에 오셨다고 이야기합니다피는 겟세마니 동산에서 밤을 새워 기도하실 때 흘리신 피입니다피는 가시관을 쓰시고채찍으로 맞으실 때 흘리신 피입니다피는 십자가 위에서 창으로 찔리신 옆구리에서 흘러나왔던 피입니다.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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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은 우리가 죄인이고 불결한 사람이기 때문에 하느님께 나아갈 수 없는 것이 아니라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예수님께 다가가야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병들었고 죄인이기에감싸주시고 치료해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루카 5,13)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에게 손을 내밀어 만지십니다예수님의 은 구원의 힘을 드러내며그분의 신체적 접촉은 우정과 사랑을 표현합니다.

-이영근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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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일을 하시면서도 언제나 기도하시는 분이셨다그분이 그렇게 기도하셨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 열심히 기도하며 살아가야 하겠는가!

복음의 나병환자와 같이 우리는 주님 앞에 나의 잘못을 솔직히 인정하고 주님의 자비를 구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조욱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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