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월 11일 주님 공현 후 토요일
신랑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내 기쁨도 그렇게 충만하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요한 3,22-30)
The one
who has the bride is the bridegroom;
the best man, who stands and listens for him,
rejoices greatly at the bridegroom’s voice.
So this joy of mine has been made complete.
He must increase;
I must decreas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참하느님이시며 영원한 생명이시다. 우리는 그분 안에 있다(제1독서). 요한은 예수님께서는 커지셔야 하고 자신은 작아져야 한다고 말한다(복음).
☆☆☆
오늘의 묵상
공관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께서 본격적으로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에 사라집니다.
반면, 요한 복음에서는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이 세례를 중심으로 함께 등장합니다.
누군가와 함께한다는 것은, 대개 두 가지 경우를 생각하게 합니다.
뜻이 맞아 서로 호흡을 같이할 수 있는 경우와, 뜻이 달라 힘겹게 숨을 몰아쉬는 경우입니다.
전자는 함께하는 기쁨을 가져다주고, 후자는 함께하는 것이 경쟁이나 대립, 또는 질투의 감정을 불러오고는 합니다.오늘 복음에 나타나는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은 어떤 경우일까요? 사람들이 세례를 받으러 와야 할 곳은 ‘여기’이지, 예수님께서 계시는 ‘저기’가 아니라는 그들의 시선에서 경쟁과 질투로 얼룩진 적개심마저 느껴집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런 제자들의 모습을 질타하기보다, ‘기쁨’을 이야기합니다.이 기쁨은 하느님과 그 백성의 결합을 상징하는 혼인에 빗대어 해석되기도 합니다만(호세 2,19-20; 에페 5,31-32 참조), 오늘 복음은 신랑과 신부의 결합보다 신랑의 등장에 대한 기쁨에 집중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신랑이신 그리스도의 등장을 기뻐합니다.
유다 전통에 따르면, 신랑의 친구 가운데 믿을 만한 친구 둘이 신랑과 신부의 결합을 지켜봅니다.
‘신랑의 목소리’는 신랑이 신부와 온전히 하나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리는 선포와 같습니다.신랑의 친구로서 요한은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과 인간이 서로 만나 한 몸을 이루는 친교를 기뻐하는 셈입니다.
내 것만이 옳고, 네 것은 그르다는 생각에 서로가 하나 되는 것을 거부하고 한자리에 있는 것조차 불편해하는 오늘의 세태는,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 보여 주는 경쟁의 결과입니다.
하느님의 일에서조차 경쟁할 필요가 있을까요?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대화하면서도 계속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모습, 스마트폰이 없으면 불안해서 제대로 생활하기 힘들어하는 모습, 특별히 할 일 없으면 인터넷에 들어가 그냥 시간을 소비하는 모습 등을 떠올리면 인간의 집중력이 얼마나 낮은지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신앙인 안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 얼마나 집중을 하고 있나요? 기도할 때, 미사를 봉헌할 때를 떠올려 보십시오. 그렇게 오랜 시간을 온전히 집중하기 힘들 것입니다. 왜 이렇게 다른 생각들이 주님께 집중하는 것을 방해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집중에 방해하는 것의 대부분은 이 세상의 것입니다.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에 관한 생각들이 주님 앞에 나아가는 것을 힘들게 만듭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요한의 제자들이 흥분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이 세례를 주었고 그리스도께서도 세례를 주셨습니다. 이에 따라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이 생겼고, 요한에게도 사람들이 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자기에게 온 사람들을 예수님께 세례를 받으라고 보냅니다. 그에 반해 그리스도께 세례를 받은 이들은 요한에게 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 점이 요한의 제자들이 화났던 이유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지요.
“스승님께서 증언하신 분, 바로 그분이 세례를 주시는데 사람들이 모두 그분께 가고 있습니다.”
바로 세상의 관점으로만 생각하고 있던 것입니다. 요한의 세력이 줄어드는 것에 대한 불만,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던 예수님의 세력이 더 커지고 있다는 불만 등으로 스승인 요한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세례자 요한은 주님께서 어떤 분인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더불어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기에, 자신은 주님에 앞서 파견된 사람일 뿐이고, 주님은 커지시고 자신은 작아져야 한다고 말입니다. 세상이 아닌 주님께 온전히 집중하고 있기에 겸손한 모습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주님께 집중하고 있습니까?


소중한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그 안에 어떤 기억이 담겨 있을 때입니다.
제게 있어 특별한 무엇은 ‘수단’입니다. 이 수단은 신학교 3학년 때 착의식을 앞두고 맞춘 것입니다. 벌써 25년이 넘었는데도 아직 이 수단을 입고 있습니다. 25년 전의 몸보다 훨씬 비대해진 지금의 몸이지만, 당시에 워낙 크게 맞춰서인지 지금 딱 맞습니다.
낡고 오래된 수단이지만, 불 쬐다가 태워서 기운 자국도 있지만, 여전히 사랑스러운 수단입니다. 왜냐하면, 신부 되기 전의 첫 마음을 기억하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누구는 오래되었으니 이제 버릴 때도 되지 않았냐고 묻습니다. 그러나 이 안에 소중한 의미가 담겨 있기에 버릴 수 없는 특별한 것이 되었습니다. 다른 옷과는 비교할 수 없는 전혀 다른 의미의 옷입니다.
옷도 이렇다면 사람은 어떨까요? 사람 역시 의미를 찾으면 너무나도 특별하고 소중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정적으로만 바라볼 때가 많습니다. 나의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는 대상으로만 생각하면 절대로 의미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그때 그 무엇과도 대신할 수 없는 소중함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조재형신부-
‘요즘 누가 종이 신문을 봅니까? 종이 신문을 본지 오래되어서요?’라는 말을 듣곤 합니다. 신문을 만들고, 홍보하는 제게는 어깨가 처지는 말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맛있는 집이라면 굳이 시간을 내서 찾아가곤 합니다. 먹어보고 맛있으면 이웃에게 소개하기도 합니다. 시간도, 비용도 기꺼이 낼 용의가 있습니다. 종이 신문이 영적으로 맛이 있다면, 지치고 힘든 일상에 위로와 용기를 준다면 기꺼이 시간을 내고, 비용을 지급할 것 같습니다. 신문을 정독하면 1시간이 조금 넘게 걸립니다. 1년에 150불이니 한 달이면 13불이 채 안 됩니다. 고맙게도 제게 용기와 힘을 주시는 분이 있습니다. 새 영세자에게 평화신문을 소개하고, 구독료를 내주시는 분이 있습니다. 친구들에게 성탄 선물로 평화신문을 보내 주는 문도 있습니다. 대자와 대녀에게 평화신문을 선물로 보내 주시는 분도 있습니다. 그분들은 평화신문의 가치를 알고 계십니다.
가톨릭 평화신문이 주는 영적인 양식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매주 ‘사랑이 피어나는 곳에’라는 지면이 소개됩니다. 주변에 우리의 손길이 필요한 사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구간에서 태어나셨듯이, 가난한 이의 모습으로, 병든 이의 모습으로, 외로운 이의 모습으로 여전히 우리에게 오시고 계십니다. 많은 분이 온정의 손길로 그분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고 있습니다. 지난 1년 동안의 교황님의 일정과 교회의 소식을 전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가난한 이의 친구가 되어야 함을 실천하고 계십니다. 토마스 머튼의 영성을 소개하는 지면도 있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에게서 느낄 수 있는 영적인 깊이를 봅니다. 현대의 신학 동향을 소개하는 지면도 있습니다. 간단한 교리 상식을 소개하는 지면도 있습니다. 열악한 환경에서 선교하시는 수녀님, 수사님의 이야기에서는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사도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미주 지역의 한인 가톨릭 공동체의 다채로운 활동과 나눔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평화신문은 영적인 종합비타민입니다.
어제도 말씀을 드렸지만, 영원한 생명을 사는 것은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아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았을까요? ‘마리아, 엘리사벳, 요셉, 즈카리야, 목동, 동방박사, 시메온, 안나, 베로니카, 키레네 사람 시몬, 십자가상의 한 죄인, 세례자 요한,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의 공통점은 겸손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성실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을까요? ‘헤로데, 왕궁의 사람들, 율법학자, 사두가이파, 바리사이파, 빌라도, 군중들’입니다. 그 사람들의 공통점은 자기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욕심 때문에 하느님의 뜻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파지는 사람들입니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성서를 보면 죄의 현장들이 잘 나타납니다. 아담이 뱀의 유혹을 받아 ‘선악과’를 먹은 일은 하느님과 같아지려는 교만함 때문이었습니다. 카인이 동생 아벨을 죽인 것은 동생에 대한 질투 때문이었습니다. 다윗이 우리야를 죽이고 바세바를 차지한 것은 욕망 때문입니다. 아합이 나봇의 포도밭은 빼앗은 것은 탐욕 때문입니다. 헤로데가 2살 이하의 어린이를 죽인 것은 분노 때문입니다. 부자 청년이 예수님을 따르지 못한 것은 인색함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밤을 새워 기도할 때 잠을 자던 제자들은 게을렀기 때문입니다. 옛날에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빨간 십자가가 도시를 가득 채워도, 화려한 교회의 건물이 우뚝 솟아도 우리와 함께 하는 예수님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세례자 요한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많은 사람에게 존경을 받았습니다. 회개의 세례를 주었고,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온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는 세례자 요한의 능력과 그분의 지혜를 보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분이 보여준 겸손함입니다. ‘나는 내 뒤에 오시는 분의 신발 끈을 풀 자격도 없다. 그분은 더 커지셔야 하고, 나는 더 작아져야 한다.’ 세례자 요한은 겸손함을 보여주었기에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 중에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사람은 없다.’
오늘 제1독서에서 사도요한은 이렇게 말을 합니다.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하느님에게서 태어나신 분께서 그를 지켜 주시어, 악마가 그에게 손을 대지 못합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속한 사람들이고, 온 세상은 악마의 지배 아래 놓여 있다는 것을 압니다. 또한,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오시어 우리에게 참되신 분을 알도록 이해력을 주신 것도 압니다. 우리는 참되신 분 안에 있고, 그분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이분께서 참 하느님이시며 영원한 생명이십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겸손함으로 죄의 뿌리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주님과 함께 참된 진리의 길로 가야 하겠습니다.

끝이 아름다워야 한다
-반영억신부-
모임에 참석해 보면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을 접하게 됩니다. 늘 다른 사람을 챙겨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대접을 받으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가만히 앉아서 인사받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일일이 먼저 찾아다니며 인사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좋게 소개해 주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초대받은 신분을 잊어버리고 자기가 주인공인 것처럼 행세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느 자리에 있든 자신의 위치를 알고 그 자리를 빛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은 세상 사람들에게 “회개하여라.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언하였습니다. 두 분은 다 자신의 방식으로 제자들을 불러 모으고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적으로 생각해 보면, 광야에서 금욕생활을 하고 세례를 베풀던 요한이 먹고 마시며 떠돌던 예수님보다 훨씬 더 구도자처럼 보이고 존경을 받았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예수님을 앞세우셨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의 등장으로 자기의 할 임무를 다 하였기에 예수님과 함께 나누는 자기의 기쁨을 신랑과 신부의 관계를 빗대어 자신을 “신랑의 친구로”비유합니다. 신랑 친구의 역할은 당시 혼인 잔치가 잘 이루어지도록 이것 저것 챙기며 준비하는 것이었습니다. 친구는 주인공이 아니라 잔치 뒤편에서 묵묵히 보조하는 역할입니다. 그 일에 충실한 사람이 요한입니다. 요한은 분명히 말합니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그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는 그런 일은 당연하지 않습니다. 사실 “달이 더욱 밝으려면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은 그만큼 흐려져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달을 이용하여 자기 손을 돋보이게 하려니 문제가 많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자기의 위치를 결코 잊지 않았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의 등장에 질투를 하는 제자들에게 오히려 자신이 물러설 때가 되었음을 밝혔습니다. 물러선다는 것은 쫓겨나는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스스로 물러나는 것입니다. 그 때를 잘 아는 사람이 성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하지 못해 추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참으로 끝이 아름다워야 합니다. 요즘 정치인들을 보면 아름답지 못한 모습입니다. 권력이 영원한 줄 아나봅니다.
‘요한의 세례는 그의 제자들에게 자부심과 긍지를 갖게 해 주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유다이즘 안에서 회개의 세례는 공식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고, 요한은 세례를 통해 많은 사람을 회개의 길로 이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이 요한에게 몰려들었고, 그로 인해 얻은 명성은 요한의 제자들이 갖고 있는 자부심을 부추겨 주었습니다’(박병규). 이때 많은 사람들이 새롭게 나타난 예수라는 인물에게 몰려가고 있으니 요한의 제자들은 적잖이 당황했으리라 봅니다. 그러나 자신들의 스승인 요한에 대한 애착은 예수라는 참된 메시아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걸림돌로 작용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 안에서 요한은 자기의 있어야 할 자리와 역할을 잊지 않았고 신랑과 함께 기뻐하였습니다.
우리 모두가 세례자 요한처럼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의 임무가 완성되는 순간에 모두가 함께 기뻐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우리가 열심히 봉사를 하고 물러선 자리도 늘 그렇게 주님만이 으뜸으로 계셨으면 좋겠습니다. 결코 주님을 몰아내고 그 영광의 자리를 내가 차지하는 일은 없기를 희망합니다. 우리가 자랑할 분은 십자가의 주 예수님뿐입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에 사랑을 더하여' 사랑합니다.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이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 사이의 관계를 분명하게 정립하면서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드러내줍니다.
오늘 <복음>의 시작은 세례자 요한처럼,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유다 땅에서 세례를 베푸셨다’(요한 3,22 참조)는 보고로 시작됩니다. 이 본문은 예수님께서 물로 세례를 베푸셨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유일한 본문입니다. 그리고 뒤에 4장 2절에서는 그의 제자들이 베푼 것으로 소개됩니다. 아마 예수님의 초기 제자들 중에는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도 있었고, 예수님의 방식으로 세례를 베풀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과 어떤 유다인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아마도 요한의 세례와 예수님의 세례의 성격에 관한 논쟁을 벌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들 사이에는 ‘정결례’를 두고 말다툼이 벌어졌습니다. (사실, 요한의 세례는 나중에 예수님의 지시에 따라 초대교회에서 행하게 되는 세례, 곧 성령을 통해 죄의 사함을 받고 새로운 신적 생명으로 탄생하는 삼위의 이름으로 베풀어지는 세례와는 달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제자들의 질문을 받고 예수님이 “하늘로부터 주어진 분”으로, 계시를 통해 오신 분이심을 밝힙니다.
“하늘로부터 주어지지 않은 사람은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다.”(요한 3,27)
이어서, 자신과 예수님을 동시에 증언하면서, 그리스도의 현현을 드러냅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에 앞서 파견된 사람일 따름이다.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이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29-30)
‘신랑’과 ‘신부’는 성경적 표상입니다. 곧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신부를 표상합니다. 초대교회는 이를 받아들여 ‘교회’를 그리스도의 신부로 보았습니다(에페 5,21-33). 그러니 신부인 교회는 신랑이신 그리스도의 차지임을 표상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을 ‘교회의 신랑’으로 드러내줍니다. 구약성경의 <아가서>는 신랑이신 예수님과의 신부인 교회와의 사랑을 아름답게 노래하고 있는 것으로 비유되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이라는 말은 그분만이 교회의 신랑이시며, 민족들의 구원의 동반자임을 말해줍니다.
한편, 요한은 자신을 신랑의 친구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신랑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29-30)
신랑의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고 신랑의 기쁨을 나누나, 결코 신부를 차지할 수는 없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5장에서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모두 알려주시며’(요한 15,15 참조), 우리를 당신의 친구로 삼으셨습니다. 이토록, 우리는 그분을 통해 아버지를 알게 되고, 함께 깊이 믿기에 예수님과 서로 친구가 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당신 친구들에게 당신 신부인 교회를 맡기셨습니다. 깊은 우정과 사랑으로 말입니다. 그토록, 친구를 깊이 신뢰하고 존중한 까닭입니다. 그리고 당신께서는 친구에 대한 사랑의 깊이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
그리고 당신께서는 친구에 대한 그 사랑, 그 신의를 십자가에서 온몸으로 몸소 드러내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분명 우리의 친구입니다. 우리 또한 예수님의 친구가 되기 위해서 그러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니 신랑의 친구인 우리는 신부인 교회를 차지할 수는 없지만, 교회를 친구의 신부로 사랑해야 할 일입니다. 뿐만 아니라, 한편으로는 우리가 교회의 일원으로서 신랑이신 그리스도의 신부의 사랑도 받고 있음을 가슴 깊이 새겨봅니다. 아멘.
- 오늘 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입니다.”(요한 3,29)
주님!
당신만이 저의 신랑입니다.
당신 음성에 귀 기울이게 하소서.
당신 마음을 듣게 하소서.
항상 당신을 향하여 있게 하소서.
당신 안에서 기뻐하게 하소서.
당신을 다 내어주셨듯이 제 전부를 드리오니 저를 차지하소서. 아멘.

-조욱현신부-
복음: 요한 3,22-30: 그분은 더욱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우리는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의 아름답고 겸손된 자세를 볼 수 있다. 즉, 요한이 세례를 베풀고 예수님도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었을 때에 사람들이 예수께로 가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요한의 제자들은 자기 스승 요한에게 불평을 한다. 그러나 요한의 답변은 그 모든 것을 초월한 답변으로서 3가지를 설명한다.
우선은 세례자 요한은 사실상 자신의 위치가 하느님의 단순한 전달자며 앞으로 오실 더 크신 분을 위한 선구자요 예비자로 보냄을 받았을 뿐, 그 이상의 자기가 아니라는 것을 제자들에게 확신시킨다.
둘째로 그 어느 누구도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 이상으로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말한다. 새로이 나타난 선생이 더 많은 제자와 더 많은 개심자들을 얻고 있다면, 그것은 요한에게서 사람들을 빼앗아간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위치를 정확히 인식하고 있는 요한의 모습이며, 하느님 앞에 자신의 처지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겸손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조상 대대로 자기들과 하느님은 너무나 밀접한 인연으로 함께 살아왔기 때문에 그 관계를 신랑 신부의 혼인관계 인연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래서 하느님을 신랑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신부로 표현했고, 이러한 인연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이방인의 신을 따를 때에는 마치 정혼한 여인이 혼인한 계약을 위반하여 부정의 죄를 범하는 것으로 탈출 34,15; 신명 31,16; 시편 73,27 등에서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로서의 신랑이요, 이스라엘 백성은 신부라는 것이며, 세례자 요한은 신랑과 신부를 맺어주는 연락자이며 신랑과 신부를 함께 모시는 사람으로서 혼인 잔치를 주재해 왔다는 것이다. 그러한 자기 자신이 신랑의 목소리를 듣고 기뻐하면서 그 신랑을 신부에게로 맞아들였고,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 임무는 끝났으니 기꺼이 그리고 즐거운 마음으로 그 무대 중심에서 물러난다는 것이다.
즉 요한의 사명은 이스라엘과 예수님을 만나게 하는 것, 그리고 신랑이신 그리스도와 신부인 이스라엘 사이에 혼인준비를 하는 것으로서 그 사명이 끝났을 때 자신은 뒤로 사라지는 것이 그의 행복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더 커지셔야 하고 자신은 작아져야 한다는 것은 좌절과 질투에서 나온 말이 아니고 자기의 임무를 다했다는 기쁨에서 나온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사람들로 하여금 따르게 해야 하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여 오늘 복음에 나타난 요한의 참된 겸손의 자세를 본받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세례자 요한의 겸손된 삶을 본받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 30)
-한상우신부-
하느님만이
계실뿐입니다.
우리의 자아가
작아져야
하느님과
일치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작아지면
모든 관계는
편안하고
평화롭습니다.
작아져야
우리의 실체를
제대로
알 수 있습니다.
작아져야
환상과 착각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작아져야
있는 그대로를
볼 수 있습니다.
작아지는 것이
참된 봉헌입니다.
하느님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봉헌의 여정은
우리의 자아가
작아지고
그분께서 우리의
모든 삶안에서
점점 커지시는
감사입니다.
작아지는 것이
새로워지는 것이며
하느님을 올바로
섬기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바치는
가장 아름다운 봉헌은
우리 자아가
작아지는 것입니다.
작아지신 아기
예수님의 봉헌을
기억합시다.
-오상선신부-
성탄시기가 거의 완성에 이르러가는 오늘, 미사의 말씀들은 우리의 시선이 누구를 향해야 할지 보여줍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에 앞서 파견된 사람일 따름이다"(요한 3,28).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 점점 확산되는 예수님의 존재감에 위기의식을 느껴 스승에게 우려를 표하자 요한이 이렇게 답합니다. 요한은 그리스도가 오실 길을 준비하는 사명에 충실했지요. 그의 말과 행동은 사람들 마음에서 자신을 지워버리고, 그 자리에 오직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채워넣습니다.
제1독서에서는 아드님이신 예수님과 아버지 하느님과의 관계를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오시어 우리에게 참되신 분을 알도록 이해력을 주신 것"(1요한 5,20).
여기서 참되신 분은 하느님을 가리킵니다. "참" 자체이신 분이시지요. 예수님의 온 생애와 말씀과 행위는 일관되게 아버지 하느님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영광을 구하지 않고 오로지 아버지께 모두 넘겨드리십니다.
"하늘로부터 주어지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요한 3,27).
그런데 천상 천하 모든 만물이 바치는 영광을 받으시는 하느님의 시선은 우리 인간을 향합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영광을 우리에게 고루 나누어 주십니다. 모든 피조물 가운데 특히 우리 인간이 복된 이유는 우리 각자에게 하느님을 닮은 구석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시선이 흘러가는 방향성을 인식한다면 시기 질투나 경쟁에 괜한 힘을 들이지 않을 겁니다. 우리가 받은 것, 타인이 받은 것이 무엇이든간에 하느님의 한 조각이니 비교할 필요도 키재기할 이유도 없습니다. 다름은 저마다 받은 선물의 다양성일 뿐이니까요.
"주님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 은총에 은총을 받았네"(영성체송).
부족함이 없으신 하느님은 완전하고 충만하시기에 우리 각자가 받은 은총 역시 무한하고 또 비교 불가합니다. 우리는 서로에게서 빛을 발하는 은총에 집착해 자기 것을 평가절하하기보다, 그에게 그 은총을 주신 분께로 시선을 돌려 그분께 영광을 돌려드려야 합니다.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이다"(요한 3,29).
요한은 자기가 하늘 나라의 혼인잔치에서 주인공인 신랑이 아니라 신랑의 친구임을 분명히 합니다. 신랑 친구는 신의와 충실성으로 혼인잔치를 지켜줍니다. 요한은 자기의 명성을 이용해 그리스도의 신부인 하느님 백성을 제 것으로 취하지 않고 곁에서 겸손히 신랑 신부의 사랑을 돕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를 차지하실 분은 오직 신랑이신 주님이십니다. 우리 마음과 영혼, 생각과 기억은 무엇에도 한눈 팔리지 않고 신랑이신 주님을 향해야 합니다.
결국 요한에서 그리스도께로, 그리스도에서 하느님께로, 하느님에서 우리에게로 이어졌던 시선은 다시 우리에게서 신랑이신 주님을 향해 되돌려집니다. 이 세상에 이보다 더 조화롭고 아름다운 순환이 또 있을까요!
사랑하는 벗님! 신랑이신 주님이 신부인 우리를 차지하고 기뻐하십니다. 곁에서 지켜보는 신랑 친구의 기쁨도 클 것입니다만, 신랑의 기쁨과 신랑 친구의 기쁨은 분명 다릅니다. 혼인잔치를 준비하며 신부 단장을 하는 우리는 시선을 잘 고르고 다듬어야 합니다. 신랑과 신랑 친구 사이에서 시선이 흔들리지 않도록, 진정 시선을 꽃아 넣어야 할 분을 놓치지 않도록, 사랑이 길을 잃고 헤매지 않도록 말입니다.
그리고 오늘 행복에 겨워 큰 소리로 이렇게 외칩시다.
"이분께서 참 하느님이시며 영원한 생명이십니다!"(1요한 5,21) 아멘.

부정과 긍정의 두 정체성을 가진 겸손
-김찬선신부-
오늘 복음은 사람들 가운데 나타나신 주님께 대해 세례자 요한이 증언하는
내용이기에 중요한 것은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한 얘기가 중심이지만
자신이 그분과 관계에서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얘기도 하고 있기에
오늘의 우리에게는 이 점을 보는 것이 더 필요하고 중요할 수도 있습니다.
말하자면 자기 정체성을 어떻게 가질까 하는 문제인데
자기 정체성을 올바로 갖고 확고하게 갖는 것이 다른 어떤 지식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것보다 중요하고 그래서 정체성만 올바로 또 확고하게
갖고 있다면 다른 것은 구구절절 얘기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관점에서 프란치스코가 클라라와 자매들에게 준
생활양식을 이해하면 좋을 것입니다.
"천상 성부의 딸과 여종들이 되셨고, 거룩한 복음의 완전함을 따라 사는
것을 택함으로써 성령의 정배들이 되셨기에 나는...여러분에 대해서도
애정 어린 보살핌과 특별한 관심을 가질 것을 바라고 약속합니다."
생활양식이라면 이렇게나 저렇게 살라는 얘기를 해야 하는데
프란치스코는 여기서 그런 얘기는 전혀 하지 않고 자매들이
성부의 딸과 여종이며 성령의 정배라는 점만 그저 얘기합니다.
정체성을 확고히 가지고 있다면 정체성에 맞게 살면 되는 것이지
굳이 이렇게 또는 저렇게 살라고 규정할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왕족에 속하는 사람은 왕족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으면
왕족의 품위를 지닐 것이고 스스로 왕족답게 살아가려고 애쓸 것입니다.
프란치스코는 자매들이 하느님의 딸과 여종이라고 하며 아울러
성령의 정배라고 하는데 그리스도의 정배라고 하지 않는 점이 특별합니다.
그리스도의 정배인 것도 좋지만 성령으로 그리스도를 잉태한 마리아처럼
성령으로 그리스도를 잉태하고 출산하는 어머니가 되라는 뜻일 것입니다.
아무튼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성부와의 관계에서 정체성과
성자와의 관계에서 정체성을 다음의 한 마디로 얘기합니다.
“하늘로부터 주어지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에 앞서 파견된 사람일 따름이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우선 자신은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모든 것을 받은 사람,
곧 생명과 소명과 파견을 받은 사람임을 얘기함으로써
하느님께서 주시지 않았으면 자기의 것이라고 아무것도 없는
자신의 가난을 겸손하게 인정하며 그러기에 무엇을 하건 자기 좋을 대로 하
지 않고 소명과 파견을 받은 대로 하는 것임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도 스스로 오지 않고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시어
이 세상에 온 존재들이고 그래서 우리가 무엇을 하고, 어디로 가야 할지
세례자 요한처럼 해야 하는데 종종 이것을 망각하고 마음대로 하려 들지요.
다음으로 성자와의 관계에서 요한은 자기를 그리스도가 아닐까 생각하는
자기 제자들과 사람들에게 한편으로는 그리스도가 아님을,
다른 한편으로는 그분의 선구자요 신랑의 친구임을 얘기합니다.
그래서 우리도 주님과의 관계에서 두 가지 정체성을 가져야 합니다.
두 가지 정체성이란 <부정의 정체성>과 <긍정의 정체성>인데
이 두 정체성을 다 가지는 것이 진정한 겸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오늘 세례자 요한처럼 진정 겸손하게
하느님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개망나니도 아니라는 정체성,
신부의 정배인 신랑은 못 되지만 신랑의 친구라는 정체성,
죄인이지만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을 받는 존재라는 정체성,
그리스도처럼 멋진 주인공은 아니지만 그리스도를 돋보이게 하는
멋진 조연자의 정체성을 가져야 함을 다시 한번 마음에 새겨야겠습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신랑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내 기쁨도 그렇게 충만하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22-30)
성서를 보면 죄의 현장들이 잘 나타납니다. 아담이 뱀의 유혹을 받아 ‘선악과’를 먹은 일은 하느님과 같아지려는 교만함 때문이었습니다. 카인이 동생 아벨을 죽인 것은 동생에 대한 질투 때문이었습니다. 다윗이 우리야를 죽이고 바세바를 차지한 것은 욕망 때문입니다. 아합이 나봇의 포도밭은 빼앗은 것은 탐욕 때문입니다. 헤로데가 2살 이하의 어린이를 죽인 것은 분노 때문입니다. 부자 청년이 예수님을 따르지 못한 것은 인색함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밤을 새워 기도할 때 잠을 자던 제자들은 게을렀기 때문입니다. 옛날에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빨간 십자가가 도시를 가득 채워도, 화려한 교회의 건물이 우뚝 솟아도 우리와 함께 하는 예수님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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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자신의 위치를 정확히 인식하고 있는 요한의 모습이며, 하느님 앞에 자신의 처지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겸손된 모습
세례자 요한은 신랑과 신부를 맺어주는 연락자이며 신랑과 신부를 함께 모시는 사람으로서 혼인 잔치를 주재해 왔다는 것이다. 그러한 자기 자신이 신랑의 목소리를 듣고 기뻐하면서 그 신랑을 신부에게로 맞아들였고,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 임무는 끝났으니 기꺼이 그리고 즐거운 마음으로 그 무대 중심에서 물러난다는 것이다.
즉 요한의 사명은 이스라엘과 예수님을 만나게 하는 것, 그리고 신랑이신 그리스도와 신부인 이스라엘 사이에 혼인준비를 하는 것으로서 그 사명이 끝났을 때 자신은 뒤로 사라지는 것이 그의 행복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더 커지셔야 하고 자신은 작아져야 한다는 것은 좌절과 질투에서 나온 말이 아니고 자기의 임무를 다했다는 기쁨에서 나온 말이다.
-조욱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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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 사람들 가운데 나타나신 주님께 대해 세례자 요한이 증언하는
내용이기에 중요한 것은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한 얘기가 중심이지만
자신이 그분과 관계에서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얘기도 하고 있기에
오늘의 우리에게는 이 점을 보는 것이 더 필요하고 중요할 수도 있습니다.
말하자면 자기 정체성을 어떻게 가질까 하는 문제인데
자기 정체성을 올바로 갖고 확고하게 갖는 것이 다른 어떤 지식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것보다 중요하고 그래서 정체성만 올바로 또 확고하게
갖고 있다면 다른 것은 구구절절 얘기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관점에서 프란치스코가 클라라와 자매들에게 준
생활양식을 이해하면 좋을 것입니다.
"천상 성부의 딸과 여종들이 되셨고, 거룩한 복음의 완전함을 따라 사는
것을 택함으로써 성령의 정배들이 되셨기에 나는...여러분에 대해서도
애정 어린 보살핌과 특별한 관심을 가질 것을 바라고 약속합니다."
프란치스코는 자매들이 하느님의 딸과 여종이라고 하며 아울러
성령의 정배라고 하는데 그리스도의 정배라고 하지 않는 점이 특별합니다.
그리스도의 정배인 것도 좋지만 성령으로 그리스도를 잉태한 마리아처럼
성령으로 그리스도를 잉태하고 출산하는 어머니가 되라는 뜻일 것입니다.
-김찬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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