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19년 11월 19일 연중 제33주간 화요일

Margaret K 2019. 11. 18. 19:43

2019년 11월 19일 연중 제33주간 화요일 


자케오야, 
어서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루가 19,1-10)

 

 “Zacchaeus, 
come down quickly,
for today I must stay at your hous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뛰어난 율법 학자 엘아자르는 온 민족에게 자기의 죽음을 고결함의 모범과 덕의 귀감으로 남기고 죽는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세관장 자캐오의 집에 들어가 묵으시며,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고 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제1독서에서 우리는 신앙을 위하여 목숨을 기꺼이 내어놓은 엘아자르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더럽혀진 삶보다 명예로운 죽음을 택한 엘아자르는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리코의 세관장이며 부자였던 자캐오는 이와 다른 방식으로 구원을 얻습니다.예리코는 사막 지역에 위치한 오아시스 성읍인데,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있어서 아주 부유하였습니다. 자캐오가 그런 성읍의 세관장이었으니 그의 부와 권세가 얼마나 대단하였을지 충분히 상상됩니다. 그렇지만 그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죄인으로 취급하던 세리들 가운데 가장 높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 유다인들 입장에서 완전히 “더럽혀진 삶” 자체를 사는 인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자캐오가 예수님께 관심을 기울입니다.이런 자캐오에게 예수님께서는 직접 손을 내미시며 그의 집에 머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죄인들 가운데 죄인이었던 세관장의 집에 머무시는 예수님을 보고 사람들은 투덜댑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자캐오는 자신이 가진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고, 자신이 횡령한 것이 있다면 네 곱절로 갚겠다고 선언합니다. 율법에 따르면 도둑질이나 횡령의 경우 배상액에 오분의 일만 얹어서 배상하면 되지만(레위 5,24 참조), 자캐오는 율법에 규정된 배상액의 무려 스무 배 이상을 배상하겠다고 약속합니다.이런 자캐오의 태도를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보니 구원의 기준은 예수님께 즉각적으로 돌아서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구원은 내일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회심하여 예수님께 돌아서는 이들에게 “오늘” 즉시 주어집니다.(염철호 요한 신부)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성지 밖을 잘 나가지 않습니다. 성지가 좋기도 하지만, 이 안에서 해야 할 일이 많기 때문입니다. 유일하게 나갈 때는 편찮으신 부모님과 함께 미사를 하기 위해 주말에 인천으로 가는 것뿐입니다.

사실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모든 것을 다 해결할 수 있는 요즘이 아닐까 싶습니다. 책을 사러 서점에 굳이 가지 않아도 되고, 필요한 문구류를 구매하기 위해 문구점에 가지 않아도 됩니다. 거의 모든 물건을 모두 인터넷에서 살 수 있습니다. 그것도 아주 괜찮은 것들을 싼 가격에 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저를 유혹하는 많은 인터넷의 쇼핑 사이트들을 직면하게 된 것입니다. 자매님들이 텔레비전 홈쇼핑의 유혹을 이겨내기 힘들다고 하던데, 그 이유를 조금이나마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물건을 사지 않으면 커다란 손해를 볼 것 같고, 내게 너무나 필요한 물건일 것 같기도 합니다. 그래서 얼마나 많은 쇼핑을 충동적으로 했는지 모릅니다.

요즘에는 유혹에서 조금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어떤 방법일까요? 자신을 향해 이런 질문을 던져보는 것입니다.

‘내가 이 물건을 산다고 해서 행복해질 것인가?’

“아니다”라는 답변이 나오면 곧바로 고민을 접어 버립니다. 문제는 이러한 생각을 하지 않고 그냥 충동적으로 질러 버리는 못된 결단력에 있었음을 깨닫습니다.

세관장이면서 또 부자였던 자캐오는 예수님을 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도록 자리를 내주는 것도 아니었고, 더군다나 키가 작아서 자신의 힘만으로 보기 어려웠습니다. 그때 그의 선택은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는 것이었습니다. 더 큰 어른이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간다는 사실, 부끄럽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예수님을 보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이 그의 부끄러움을 넘어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떠올리게 합니다. 사람들의 손가락질 받는 부끄러운 십자가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기꺼이 이 십자가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십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한 간절한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체면을 중시하면서 남의 눈치를 보기에 급급한 우리는 아닐까요? 주님을 만나고 주님과 함께 하는 길에는 부끄러움을 이겨낼 간절한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때 주님 앞으로 나아가는 큰 결단이 생겨날 수 있습니다.
새로운 것을 배우고 뭔가 새로운 것을 시도해보라. 그리고 멋진 실수를 해 보라. 실수는 자산이다(다니엘 핑크).



기술 발달이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다.

스마트폰 어플 중에 대중교통 어플을 종종 이용합니다. 버스, 전철, 기차 등등 대중교통을 이용하는데 많은 정보를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출발과 도착 시각을 알 수 있어서 약속 시각 맞추는 데는 꼭 필요한 어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다 보니 대중교통을 이용하기 전에 미리 확인해봅니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전에 이런 어플이 없었을 때는 어떠했지?’

어떠셨습니까? 저의 경우는 그냥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버스가 오지 않아서 약속 시각에 늦어도 상대방은 이해해주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절대로 이해해주지 않습니다. 상대방은 게을러서 그런 것이라면서 어떤 핑계도 허락하지 않습니다.

기술의 발달이 많은 편이를 제공합니다. 그러나 여유가 사라지고 남을 이해하는 넓은 마음도 사라지게 된 것은 아닐까요?                   

그리스도처럼 되고 싶은 마음이 구원이 시작이다

-전삼용신부-


많은 대중들이 선호하는 유명 연예인을 광고 모델로 내세우는 것은 ‘나도 저 사람처럼 되고 싶다’는 욕구를 활용해 소비를 촉진시키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따라하고 싶게 만드는 것입니다. 마틴 린드스트롬(세계적인 브랜드 컨설턴트)의 이야기를 들어봅시다.

      “광고 모델을 보면 그 사람과 동일시하고, 그 사람이 되고 싶어 하죠. 판매나 광고에서 모델을 내세워 ‘나도 저 사람이 될 수 있다’라고 느끼게 만듭니다. 그러면 소비자는 꿈을 꾸는 상태가 되죠. 이렇게 꿈꾸는 상태가 되면 자신의 모습을 거울에 비춰서 보는 게 아니라 그 모델을 통해서 봅니다. 저 사람이 곧 자신으로 믿으면서요.”

      [출처: ‘자본주의; 제2부 소비는 감정이다’, EBS]


      사람은 닮고 싶은 사람이 있어야 변하게 됩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결국 자신이 아니라 자신이 닮고 싶은 대상입니다. 아기가 늑대에게 키워지면 사람으로 성장할 수 없습니다. 이는 인간이 스스로는 변화할 힘을 지니지 못함을 말합니다. 변화가 타자에 의해 이루어지는 이유는 변화하려는 욕구는 타자에 의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아라는 욕구의 지배하에 태어났습니다. 자아는 생존욕구입니다. 자아의 욕구가 사라지면 생존할 수 없어 인간도 흙이 되어버립니다. 물론 자아의 욕구대로 살아도 결국엔 흙이 됩니다. 조약돌이 언젠가는 모레가 되는 것과 같고 나무가 언젠가는 흙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나무가 건축가를 만나면 수백 년이 흘러도 무너지지 않는 집의 일부가 되기도 하고 예술가를 만나면 수천 년이 지나도 가치 있는 조각품으로 새로 태어나기도 합니다. 인간도 하느님을 만날 때야만 하느님께서 영원한 집을 지을 재료로 사용됩니다. 하느님 나라는 영원하기에 하느님 나라의 재료가 된 이들도 영원히 존재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자캐오가 그런 변화를 원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자캐오는 자신의 욕구를 죽여주고 영원히 살게 할 새로운 욕구를 찾고 있었습니다. 자캐오는 자신의 힘으로는 존재의 변화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자신과 같은 인간으로는 자신이 변화될 수 없음도 알았습니다. 같은 본성끼리는 변화를 일으킬 수 없습니다. 나무가 나무를 만난다고 조각품으로 새로 태어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자캐오는 나무 위에 올라가서 자신을 영원한 조각품으로 만들어줄 하느님을 찾은 것입니다.

      자캐오는 돈을 좋아하는 자신의 욕구를 버리고 예수님의 사랑의 욕구를 선택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은 내어놓으라는 욕구이고 인간은 소유하려는 욕구입니다. 하느님은 다 빼앗겨도 감사하라는 욕구이고 인간은 더 가져야 감사하겠다는 욕구입니다. 오직 자신의 소유욕이 고통임을 아는 사람만이 자캐오처럼 자신의 소유욕을 꺾어줄 새로운 욕구를 맞아들이기를 원합니다. 새로운 욕구가 들어오면 필연적으로 이전의 욕구는 죽어야합니다. 나비의 욕구가 들어오려면 애벌레의 욕구는 버려야합니다.

      영원한 삶은 내가 나로 사는 것이 싫어서 그리스도처럼 살고 싶을 때 시작됩니다.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십자가 사랑의 욕구를 지니셨던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모든 인간이 자아에 지배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누구도 하느님의 본성으로 새로 태어날 수 없었습니다.

      그리스도 외에는 구원의 길이 없습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처럼 되고 싶은 마음이 없다면 변화도 일어나지 않고 구원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나로 사는 것에는 한계가 있고 그것이 고통임을 알기에 예수 그리스도처럼 살고 싶다는 마음이 바로 구원의 시작인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제가 있는 뉴욕에서 뉴저지를 가려면 꼭 건너야 하는 다리가 있습니다. ‘조지 워싱턴 브리지입니다. 왕래하는 사람은 많고, 다리는 하나이니 언제나 길이 막힙니다. 저도 다리에서 한 시간 정도 기다린 적이 있습니다. 뉴욕에서 오래 계신 분들은 다른 길이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아직은 그 길을 몰라서 막히긴 하지만 조지 워싱턴 브리지를 건너고 있습니다. 저도 이곳 생활이 익숙해지면 좀 멀리 가더라도 막히지 않고 가는 길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예전에 적성성당에서 서울 가던 때가 생각납니다. 가장 짧은 길은 문산, 봉일천, 구파발을 거쳐 가는 통일로입니다. 안개가 자주 끼고, 길이 막히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명동 성당 가기에는 가장 좋은 길입니다. 감악산을 넘어 의정부를 지나가는 동부 순환도로가 있습니다. 조금 멀지만, 단풍 구경하기에는 좋은 길입니다. 예전에는 산을 돌아가는 길이었는데 지금은 터널이 생겼다고 합니다. 파주와 일산을 거쳐 가는 자유로가 있습니다. 멀리 돌아가는 길이지만, 신호등이 거의 없어서 자주 이용하는 길이었습니다. 길게 쭉 뻗어있는 자유로가 생각납니다. 창문을 열면 한강의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왔고, 피곤함이 사라졌습니다. 강남으로 가기에는 좋은 길이었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아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이 있습니다. 어떤 길이 있을까요?

오늘 제1 독서에서 엘아즈르가 보여 준 것처럼 하느님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겁니다. 교회는 순교자들의 뜨거운 신앙을 기억합니다. 그분들이 흘린 피 위에 교회가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나 때문에, 복음 때문에, 박해받고 죽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지만 부활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자캐오가 보여 준 것처럼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는 겁니다. 회개한 것을 실천으로 보여 주는 겁니다. 교회는 회개한 사람의 신앙을 기억합니다. 순교자가 눈에 보이지 않는 뿌리와 같다면 회개한 사람은 눈에 보이는 줄기와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지만 아픈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합니다.’ 선한 사람 아흔아홉도 소중하지만 회개하는 사람 하나를 하늘나라에서도 더 기뻐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라는 그림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은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그 그림을 볼 수 없었고, 느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눈이 있어도 보지 않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보기를 원하셨습니다. 우리는 서로 비교하고, 같은 편으로 나누려고 합니다. 진보와 보수는 서로 원수처럼 지내야 하는 이념이 아닙니다. 국민의 선택을 받을 수 있도록 서로 정책을 개발하고, 약속을 지키는 것입니다. 지역을 나누는 것은 다른 지역을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의 특색을 키워나가는 것입니다. 학연을 나누는 것은 다른 학교 출신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후배들을 사랑하고, 학교를 지원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가족을 아끼고 사랑하는 것은 기본입니다. 그것이 다른 가족들을 무시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가족들의 아픔을 함께 나누는 것이 진정한 가족의 모습입니다. 하느님의 사랑 안에 우리는 모두 한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은 누구나 갈 수 있는 절대평가입니다. 우리의 재능과 능력은 본인을 위해서 사용해야 하지만 그 반은 남을 위해서 사용하라는 말씀입니다. 자신이 가진 능력과 재능을 자신만을 위해서 사용하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리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밤하늘에 별이 있어서 아름다운 것처럼, 우리들의 선행과 우리들의 봉사가 세상을 환하게 비추는 희망의 별빛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주님 보시기에 우리 모두 사랑스런 꽃입니다!

 -양승국신부-

 

오늘 봉독되는 두개의 독서는 특별한 귀감이 되는 두 멋진 신앙의 선배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비록 상반된 모습이지만 신앙인으로서 보여준 두분 삶의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고 감동적입니다.

 

 첫번째 독서인 마카베오 하권에서는 백발이 성성한 90노인 율법학자 엘아자르의 흔들리지 않는 성숙한 신앙, 마치 뿌리깊은 나무 같은 견고한 신앙을 소개합니다.

 

 엘아자르와 친분이 있었던 이교도 사제들은 어떻게든 그의 목숨을 한번 구해보려고 배교하기를 설득합니다. 당시 표독하고 사악한 왕은 유다인들에게도 이교 제사 음식을 먹을 것을 강요했습니다.

 

 사람들은 강제로 엘아자르의 입을 벌려 돼지고기를 먹이려 하자 엘아자르는 끝까지 거부했습니다. 안타까웠던 이교도 사제들은 돼지고기가 아닌 다른 고기를 돼지고기인양 준비해서, 엘아자르에게 먹는 시늉이라도 하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기품있는 노인 엘아자르의 태도는 너무나 의연하고 당당했습니다. 목숨이 끊어질지언정 변절하거나 배교하지 않겠다고 단호하게 선언하며, 스스로 사형틀 위로 올라갑니다. 더럽혀진 구차한 삶보다는 명예로운 죽음을 선택한 것입닌다. 90노인의 놀라운 기개와 용기가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우리 나이에는 그런 가장된 행동이 합당하지 않습니다. 많은 젊은이가 아흔 살이나 된 엘아자르가 이민족들의 종교로 넘어갔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또한 조금이라도 더 살아 보려고 내가 취한 가장된 행동을 보고 그들은 나 때문에 잘못된 길로 빠지고, 이 늙은이에게는 오욕과 치욕만 남을 것입니다.”(마카베오 하권 6장 24~25절)

 

 안타깝게도 연세 드시면서 자기 중심을 완전히 상실하고 변절하신 분들, 평생 지녀왔던 올곧던 생각들이나 지향들을 헌신짝처럼 내던져버린 몇몇 ‘맛이 간’ 어르신들과는 너무나 비교가 됩니다.

 

 두번째 독서는 엘아자르와는 완전 상반되는 또 다른 유형의 멋진 신앙인을 우리에게 소개합니다. 예리코의 세관장 자캐오입니다. 그는 안타깝게도 늦게야 주님을 만났습니다. 돌고 돌아서, 인생의 가장 어두운 길목이자, 가장 밑바닥에서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자캐오는 늦게 주님을 만났음을 크게 안타까워 했습니다. 자신의 지난 부끄러운 삶에 대해 크게 가슴을 쳤습니다.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깊은 회심을 했습니다. 그리고 회심의 결과로, 주님안에서 새 인생을 살겠노라고, 주님과 공동체 앞에서 공적으로 다짐했습니다.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했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루카 복음 19장 8절)

 

 크게 가슴치고 회심하는 자캐오의 모습이 얼마나 당신 마음에 드셨던지, 주님께서는 크게 흐뭇해하시며 아주 특별한 선언을 하십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루카 복음 19장 9절)

 

 성다경 어린이가 부른 동요 ‘모두 다 꽃이야’ 노랫가사가 들을수록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산에 피어도 꽃이고

들에 피어도 꽃이고

길가에 피어도 꽃이고

모두다 꽃이야.

 

아무데나 피어도

생긴대로 피어도

이름없이 피어도

모두 다 꽃이야.

 

봄에 피어도 꽃이고

여름에 피어도 꽃이고

몰래 피어도 꽃이고

모두 다 꽃이야.

 

 그렇습니다. 주님 보시기에 모든 꽃이 다 소중하고 아름답습니다. 주님 보시기에 순백의 정결한 백합도 아름답지만, 길섶에 저절로 피어나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발에 짓밟히는 민들레도 아름답습니다.

 

 주님 보시기에 아장아장 걷기 시작한 어린이도 사랑스럽지만,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노인들도 사랑스럽습니다.

 

 주님 보시기에 구교우 집안 출신으로, 평생 충실한 신앙생활을 해온 신앙인도 사랑스럽지만, 막 입교하거나 개종해오신 신입 신앙인들도 사랑스럽습니다.

 

 주님 보시기에 별탈없이 큰 죄나 방황없이 살아온 모범생 신앙인들도 사랑스럽지만, 늦게야 그분을 만나 돌아선 회심자들도 사랑스럽습니다. 주님 보시기에 우리 모두 사랑스런 꽃입니다.


순수해 진 댓가

 -반영억신부-

 

사람은 각기 자기 위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은 그에 맞는 처신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대접은 크게 받기를 원합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일수록 자기의 것을 포기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잘 대해주기를 바라며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갈릴래아 호수와 사해를 생각해 보십시오. 사해는 말 그대로 죽음의 바다입니다. 어떤 생물도 살지 못하고 주위에는 나무도 새소리도 없습니다. 사해는 물이 흘러 나가는 강을 지니지 않았기 때문에 받아들인 모든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 썩어버렸습니다. 반면에 갈릴래아 호수는 요르단 강에서 물을 받아들인 만큼 사해로 흘려보내기 때문에 언제나 생명이 넘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 입니다. 받을 줄만 알고 줄 줄을 모르면 결국 생명력을 잃고 맙니다.

 

자캐오는 세관장이고 부자였습니다. 그런데 세관장이라는 위신과 체면을 포기하고 나무에 올랐습니다. 주님을 뵙고자 하는 갈망 때문입니다. 갈망이 큰 만큼 키가 작다는 장애를 극복해야만 했고, 따라서 나무에 오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의 정성을 지나치지 않으시고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루카19,5) 하시며 그를 기억해 주셨습니다. 유대인들은 그가 세리였기 때문에 그를 죄인 취급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죄인을 찾아주시고 품어주셨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처신을 보고 못마땅해 하였지만 주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루카19,9-10).

 

만약 자캐오가 부자라는 것에 대한 자만이 있었더라면, 세관장이라는 위치를 고집했더라면 그 위신과 체면 때문에 나무에 오를 수 있었을까? 그는 자기를 버림으로써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만난 후 사람이 바뀌었습니다. 돈에 눈멀었던 그였지만 가난한 이를 위해 재산의 반을 내놓을 마음이 생겼고, 혹시라도 횡령한 것이 있다면 네 곱절로라도 갚아 자신이 지은 죄의 대가를 치룰 수 있는 준비를 갖추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이 아무리 풍요하더라도 인간의 협력이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캐오가 나무에 오르지 않더라도 자캐오를 부르실 수 있으시지만 그의 자유의지를 존중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루카19,10)고 하신대로 모든 이를 구원에로 초대하십니다. 그러나 모두가 구원의 기쁨을 누리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은 선물이지만 주님 때문에 자기의 위신과 체면을 버리고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이에게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자캐오가 구원을 얻었습니다. 오늘은 우리 차례입니다. 우리가 나무에 오르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생각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모쪼록 주님과의 깊은 입맞춤으로 삶의 쇄신을 이루기를 희망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1티모1,15).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송영진신부-


‘예수님과 자캐오의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말씀은, 맨 끝에 있는,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루카 19,9-10).”입니다.
이 말씀에서 ‘오늘’이라는 말은,
예수님을 만나는 때가 곧 구원이 시작되는 때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메시아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입니다.
그 구원은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한참 뒤에 받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만나는 바로 그때 시작됩니다.
(시작되는 때는 그때이고, 완성되는 때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 뒤입니다.)

‘이 집에’ 라는 말은,
자캐오와 자캐오의 가족이 모두 구원받게 되었음을 나타냅니다.
물론 식구들이 아무것도 안 하고 있으면서 자캐오의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구원받게 되었다는 뜻은 아니고,
식구들도 자캐오와 함께 예수님을 믿기 시작했고, 회개했음을 나타냅니다.
‘구원이 내렸다.’ 라는 말은, 예수님 쪽에서 보실 때의 표현이고,
자캐오 쪽에서 본다면 ‘구원을 받았다.’가 될 것입니다.
(구원을 내려 주시는 분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이고,
우리에게 내리는 구원을 받는 것은 우리 쪽에서 해야 하는 일입니다.
내려 주시는데도 우리 쪽에서 안 받으면 받지 못합니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라는 말씀에서 ‘이 사람도’
라는 말은, 아무도 구원에서 제외되지 않는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과거에 죄 속에서 살았더라도, 우상을 숭배하는 종교를 믿었더라도,
하느님을 모르고 살았더라도, 회개하고 변화되면 구원에서 제외되지 않습니다.
자캐오의 경우, 당시 사람들은 그의 직업이 세관장이었기 때문에
그를 구원받지 못할 사람으로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죄가 되는 직업이라면, 그 직업을 버리고 다른 일을 하면 됩니다.
(죄 속에서 살았다면 회개하고 보속하면서 새사람으로 살면 됩니다.
오늘날에도 직업 자체가 죄가 되는 직업이 있습니다.
진심으로 회개한다면 그런 직업은 버려야 하고, 다른 직업을 찾아야 합니다.)
과거가 아니라 현재가 중요합니다.
‘회개’는 과거를 지우고 새사람이 되는 일입니다.
여기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말은 유대 민족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구원받기를 바라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하느님의 백성이고,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그러나 스스로 그렇게 되기를 원해야 하고, 그렇게 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라는 말씀은,
“나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러 왔다.” 라는 뜻인데,
이 말씀도 역시 “아무도 구원에서 제외되지 않는다.” 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구원에 대해서 관심 갖지 않는 사람도 있고,
구원받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자기 스스로 자기 자신을 구원에서 제외시키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시기 전에는 ‘모든 사람’이 다 ‘잃은 이들’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함부로 다른 사람의 구원 문제를 판단하면 안 되고,
모두가 함께 구원받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고,
다른 사람이 구원받게 된 것을 함께 기뻐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예리코에 들어가시어 거리를 지나가고 계셨다. 마침 거기에
자캐오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세관장이고 또 부자였다. 그는 예수님께서
어떠한 분이신지 보려고 애썼지만 군중에 가려 볼 수가 없었다.
키가 작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앞질러 달려가 돌무화과나무로 올라갔다.
그곳을 지나시는 예수님을 보려는 것이었다(루카 19,1-4).”

자캐오가 예수님을 보고 싶어 한 것은 처음에는 호기심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만일에 군중의 방해를 받지 않고 쉽게 예수님을 볼 수 있었다면
그냥 그것으로 그쳤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군중이 너무 많았고, 그의 키가 작았고, 그래서 예수님을 볼 수 없게 되자,
그의 호기심은 예수님을 보려는 열망으로 바뀌게 되었고,
어떻게든 예수님을 보려고 애쓰게 됩니다.
아마도 그의 마음속에는 그 전부터 새로운 인생에 대한 갈망이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호기심은 “혹시 저분이 나에게 새 인생을 주실 수 있지 않을까?”
라는 기대감이 섞여 있는 호기심이었을 것입니다.

자캐오의 마음속에 생긴 ‘인생을 새롭게 바꾸고 싶다는 소망,
예수님에 대한 호기심, 예수님을 보려는 열망’ 등을
하느님의 ‘부르심’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보려고 애쓰는 그의 행동은 ‘부르심’에 대한 ‘응답’이 됩니다.
< 신학교나 수도원 지망자들, 즉 성소자들의 성소도 그렇게 식별합니다.
예외적으로 직접 ‘부르심’을 체험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성소자들의
성소는(부르심은) 사제나 수도자로서 살고 싶다는 소망의 형태로 이루어집니다.
그 소망 자체를 성소로(부르심으로) 판단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소망의 첫 출발점이 호기심인 경우가 많습니다.
사제나 수도자의 삶에 대한 호기심이 관심으로, 관심이 소망으로,
소망이 열망으로, 차츰 바뀌게 됩니다.
자캐오도 그런 단계를 거쳤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거기에 이르러 위를 쳐다보시며 그에게 이르셨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자캐오는 얼른 내려와
예수님을 기쁘게 맞아들였다. 그것을 보고 사람들은 모두 ‘저이가 죄인의 집에
들어가 묵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그러나 자캐오는 일어서서 주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루카 19,5-8).”

예수님과 자캐오의 만남은 우연히 생긴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섭리가 작용한 일입니다.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를 부르시는 말씀이고,
그가 기뻐하며 예수님을 맞아들인 일은 부르심에 행동으로 응답한 일입니다.
여기서 ‘오늘’이라는 말은,
부르심에 응답해야 하는 때는 ‘나중’이 아니라 ‘지금’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응답을 나중으로 미루는 것은 응답하기를 거절하는 것과 같습니다.
신앙생활은 부르심에 응답하는 생활이고,
이 생활은 항상 모든 것을 ‘지금’ 실천해야 하는 생활입니다.
자캐오는 ‘재산에 관해서 자기가 한 말’을 즉시 행동으로 실천했을 것입니다.
그 실천은 완전히 새롭게 변화되어 구원받는 ‘새 인생’의 시작입니다.) 


-조욱현신부-


복음: 루카 19,1-10: 사람의 아들은 잃은 사람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예수님께서 예리코에 들어가셨을 때 자캐오를 만나신다. 모든 사람들로부터 소외받은 이 자캐오는 예수님의 자비를 입는다. “마침 거기에 자캐오라는 사람이 있었는데”(2) 그는 세관장이었다. 그는 탐욕에 찌들고 재산 증식이 유일한 목표인 사람이었다. 세리들이 거의 다 그러한 사람이었다. 바오로 사도는 그것을 우상숭배라고 하였다(콜로 3,5) 이 가운데서 자캐오는 주님의 자비를 얻는 사람이 되었다.

 

부자는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려울 것이다.”(마태 19,23) 라고 하셨다. 그렇다면 부자인 자캐오는 어떻게 하늘 나라에 들어갔을까? 그는 자기 재물을 나누어 줌으로써 곧바로 하늘 나라에 재물을 쌓았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부자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지 않으시고, “들어가기가 어려울 것이라고 하셨다.

 

자캐오가 회심한 과정을 보기로 하자. 그는 예수님을 보려는 간절한 마음에서 돌무화과 나무로 올라갔다. 그 안에서는 구원의 씨앗이 싹텄다. 예수님은 그것을 보시고는 자캐오에게 손길을 뻗으신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5) 여기서 군중에 가려”(3)라고 했는데, 군중은 그의 죄를 가리킨다. 자캐오는 자기의 죄를 벗어버리고 높은 곳으로 올라갔다.

 

그는 군중을 떠나, 즉 죄를 떠나 나무 위로 올라갔고 거기서 군중의 방해 없이 예수님을 볼 수 있었다. 자캐오는 예수님을 보는데 장애가 되는 군중을, 죄를 무시하고, 대신 바보 같은 열매를 맺는 돌무화과나무 올라갔다. 우리도 끊임없이 죄를 벗고 돌무화과나무로 올라가서 예수님을 뵙도록 해야 한다. 우리가 예수님을 보지 못하는 것은 돌무화과나무로 올라가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오르는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자캐오는 예수님을 본 것만도 큰 은총이라고 생각했는데, 주님을 자기 집에 모시게 되었다. 은총이 쏟아져 내리고, 사랑으로 마음이 끓어오르기 시작한다. 그리고는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8) 절반을 내놓겠다는 것은 절반은 갖겠다는 것이 아니라, 갚을 것이 있다면 갚기 위해서이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9) 자캐오는 칭찬 들을 만한 사람이다.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가 천국의 문으로 가는 것을 막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많은 재물이 그를 하늘 나라의 입구로 데려다 주었기 때문이다. 재물이란 장애가 아니라, 영광을 얻는데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소유가 아니라 사용할 줄 모르는 것이 죄이다.

 

예수님은 자캐오를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하신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자기 재산을 내어 놓았기 때문이다. 우리도 그러한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10) 모두가 잃은 이들이며 죄 없으신 유일한 분이 오셔서 우리를 구원해 주실 것이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루카 19, 5)

-한상우신부-

우리보다 먼저
내려와 계시는
예수님이십니다.

내려오시는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기쁘게 내려오길
기다리시는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을 모시고
예수님과 함께
머물기위해서는
우리자신이
내려와야합니다.

내려와야 할 곳은
예수님 사랑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묶였던 모든 것이
자유로워졌습니다.

내려와야
예수님 안에서
제대로 쉴 수 있고
제대로
만날 수 있습니다.

내려와야 할
대상은 언제나
우리자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결코 자캐오를
비판하지 않으십니다.

회개는 이와같이
비판이 아니라
참된 소통이며
참된 가치관의
변화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잃은 사람들을
구원하러 우리에게
내려오셨습니다.

주님을 만나는
은총의 위령성월
되십시오.

내려옴이
구원입니다.


-오상선신부-


성경에서 '회개' 또는 '회심'(metanoia)은 '방향의 전환'을 뜻합니다. 하느님께로 방향을 돌리는 것을 뜻하지요. 오늘 미사의 독서들에는 '돌아서길 거부한 이'와 '돌아선 이'가 등장합니다. 그렇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둘 다 하느님을 향해 방향성이 고정됩니다. 독서의 엘아자르는 원래부터 지켜오던 방향을 유지, 고수했고, 복음의 자캐오는 회심으로 방향을 바꾼 덕에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두 갈래의 묵상으로 저를 이끄셨습니다. 먼저 이 친숙하고 유쾌한 복음 대목에서 자캐오가 예수님을 만난 과정을 통해 '기도의 길'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앞질러 달려가 돌무화과나무로 올라갔다. 그곳을 지나시는 예수님을 보려는 것이었다"(루카 19,4).

기도는 주님을 만나는 행위입니다. 그분은 우리 안에, 우리 밖에, 우리 곁에, 우리 위에 계십니다. 기도자 안에서 주님을 만나고 싶다는 갈망이 시작됩니다. 은총입니다. 이 갈망을 불어넣으신 분은 분명 성령이십니다. 이 갈망에 사로잡힌 그는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어 달려가기 시작합니다. 늘 현존해 계시지만 그저 자기 앞을 "지나시기"만 하셨던 주님을 이제는 꼭 붙잡고 그분과 만나고 싶습니다. 그래서 달리다가 또다른 영감을 만납니다. "너희는 멈추고 내가 하느님임을 알아라"(시편 46,11). 그래서 그는 멈추고, 올라갑니다.

"예수님께서 거기에 이르러 위를 쳐다보시며 그에게 이르셨다"(루카19,5).

이제 지나가시던 예수님께서 멈추십니다. 그리고 시선을 위로 돌려 그를 쳐다보십니다. 기도를 시작한 이의 노력이 헛되지 않습니다. 아스라한 막막함 속에서 주님을 부르는 그에게 주님께서 친히 "나 여기 있다"(이사 52,6) 하시는 듯합니다.

"자캐오는 얼른 내려와 예수님을 기쁘게 맞아들였다"(루카 19,6).

기도자는 저 뜬구름 같은 이상 안에서, 거룩해 보이는 타인의 영성 안에서 주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자기 실존이 뿌리 박힌 곳으로 내려와야 합니다. 그래야 손 내미신 그분을 맞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분은 더럽고 추하고 무질서한 "죄인의 집에 들어와 묵으십니다"(루카 19,7 참조). 이제 기도자는 자기 안의 내밀한 골방에 그분을 모셔들여 그분과 함께 머무릅니다.

황송하고 송구하고 죄스러운 마음이 밀려듭니다. 그런데 자기의 불결함과 자격 없음에만 묶여 있다가는 내 앞에서 사랑의 눈길을 보내고 계신 주님을 놓치게 됩니다. 그는 자기에게서 빠져나와 주님께 집중해야 합니다. 이토록 부족한 자신과 함께해 주시는 주님의 자비와 사랑을 실컷 누려야 합니다. 그래야 다음에 할 일이 떠오릅니다.

"보십시오, 주님!"(루카 19,8)

기도자는 고백합니다. 사랑과 자비로 절여진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대로 주님께 아룁니다. 변명이나 손익 계산 따위로 이성이 움직일 틈도 없이 마음이 시키는 대로 쏟아냅니다. 그의 마음을 차지하신 분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리라는 것 외에 아무것도 모르게 되어 버린 그는 이미 바보가 되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차례입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루카 19,9).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십니다. 그분은 어린애같이 들떠 큰소리를 뻥~ 치는 철부지의 소리도 주의깊게 경청하고 응답하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의 응답은 "구원"입니다. 이 더럽고 추하고 무질서한 "죄인의 집"을 끌어안아 어깨에 메신 것입니다.

이제 기도자는 말씀하시는 주님을 마치 온 존재가 귀가 된 것처럼 들어야 합니다. 그분 말씀을 듣기 위해 온 몸의 세포를 다 집중해서 귀 기울이고 침묵하며 기다리는 것, 이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의 열매는 맺힐 것입니다. 자기 안위와 탐욕과 욕망을 위해 거침없이 살아온 한 인생이 하느님께 돌아서면서, 하느님 모상인 피조물이 비로소 제 방향을 찾았으니 이제 그 열매는 이웃들에게 유익한 방향으로 흘라갈 것입니다. 무엇보다 기도자 자신이 주님을 만나 구원될 것입니다.

두 번째 묵상은 '대상의 선택'에 대한 것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이교 예식을 강요받은 한 의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저속한 얘기가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패싸움을 할 때 제일 강한 사람 하나만 제대로 제압하면 게임이 끝난다고 들었습니다. 아마 이교도들이 이 방법은 쓴 것 같네요. 동족에게 존경받는 "매우 뛰어난 율법 학자"(2마카 6,18)인 엘아자르를 표적으로 삼았으니 말입니다. 이미 "아흔 살이나 된"(2마카 6,24) 그에게 참 잔인한 일이지요.

"주님께서는 내가 ... 당신에 대한 경외심 때문에 이 고난을 달게 받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아십니다"(2마카 6,30).

엘아자르는 그들의 비겁한 회유와 협박에 굴하지 않고 고통 속에서 장렬하게 신앙을 증언합니다. 성경은 그 결과를 다음과 같이 기술합니다. "이렇게 그는 젊은이들뿐만 아니라 온 민족에게 자기의 죽음을 고결함의 모범과 덕의 귀감으로 남기고 죽었다"(2마카 6,31). 결국 이교도 예식을 강요하던 이들의 야비한 의도는 실패합니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루카 19,10).

이교도들은 이스라엘의 신앙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가장 영향력 있는 이들을 표적 삼아 달래고 회유합니다. 자기들 의도가 먹혀들 경우 엄청난 파급 효과를 누릴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들에겐 표적이 된 한 사람의 인격과 구원보다 그 효과가 더 중요합니다.

그런데 예수님, 사람의 아들은 다릅니다. 오히려 사람들에게 거부당하고 냉대받는 이를 선택하십니다. 그를 포용했다가 더 많은 이들(바리사이들을 포함하여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 열심한 이들)을 잃을 수도 있는 위험을 아시면서도 그렇게 하십니다. 실제로 오늘 자캐오를 선택하신 탓에 사람들의 투덜거림을 들으셔야 했지요.

하지만 그분은 이런 오해를 감내하시며 "세리와 죄인들"에게 손을 내미십니다. 그분의 관심사는 길 잃은 한 마리의 양, 방향성을 상실한 채 소외된 한 영혼이기에 그렇습니다. 이교도들과 달리 예수님께 한 영혼은 수단이나 도구가 아니라 온 존재를 기울여 경청하고 관심 쏟아야 할 목적입니다.

이제 두 갈래의 묵상이 하나의 길로 엮입니다. 기도는 우리와 만나고 싶어 먼저 손을 내미시는 주님의 초대로 시작됩니다. 영혼을 건드리시는 주님의 터치를 감지한 영혼이 불타올라 달리기 시작하면서 엮어지는 사랑 이야기가 기도입니다.

그렇다면 그분은 왜 굳이 나를 선택하셨을까요? 그분의 선택 기준은 무엇일까요? 오늘의 말씀이 그 답을 알고 있으니 다시 구구절절 설명을 되풀이할 필요가 없습니다. 기도의 영혼으로, 회심자로 불리운, 표적이 된 이는 그만큼 구원이 더 절실한 존재일 뿐입니다. 그러니 기도자가 되고 회심자가 되었다고 해서 내세울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만 알면 된답니다. 그저 하느님께로 방향을 돌릴 수 있게 된 은총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최후의 은혜

-김찬선신부-

http://www.ofmkorea.org/ofmhomily/289108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5년 11월 17일 연중 제33주간 화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자케오야, 어서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루가 19,1-10)


그리스도처럼 되고 싶은 마음이 구원이 시작이다

  사람은 닮고 싶은 사람이 있어야 변하게 됩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결국 자신이 아니라 자신이 닮고 싶은 대상입니다.

자캐오는 나무 위에 올라가서 자신을 영원한 조각품으로 만들어줄 하느님을 찾은 것입니다.

 자캐오는 돈을 좋아하는 자신의 욕구를 버리고 예수님의 사랑의 욕구를 선택한 것입니다

  영원한 삶은 내가 나로 사는 것이 싫어서 그리스도처럼 살고 싶을 때 시작됩니다.

 나로 사는 것에는 한계가 있고 그것이 고통임을 알기에 예수 그리스도처럼 살고 싶다는 마음이 바로 구원의 시작인 것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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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질러 달려가 돌무화과나무로 올라갔다. 그곳을 지나시는 예수님을 보려는 것이었다"(루카 19,4).

기도는 주님을 만나는 행위입니다.

기도자는 저 뜬구름 같은 이상 안에서, 거룩해 보이는 타인의 영성 안에서 주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자기 실존이 뿌리 박힌 곳으로 내려와야 합니다. 그래야 손 내미신 그분을 맞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분은 더럽고 추하고 무질서한 "죄인의 집에 들어와 묵으십니다"(루카 19,7 참조). 이제 기도자는 자기 안의 내밀한 골방에 그분을 모셔들여 그분과 함께 머무릅니다.

 기도자는 말씀하시는 주님을 마치 온 존재가 귀가 된 것처럼 들어야 합니다. 그분 말씀을 듣기 위해 온 몸의 세포를 다 집중해서 귀 기울이고 침묵하며 기다리는 것, 이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오상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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