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19년 11월 17일 연중 제33주일(세계 가난한 이의 날)

Margaret K 2019. 11. 16. 20:43

2019 11 17일 연중 제33주일(세계 가난한 이의 날)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루가 21,5-19)

 

By your perseverance  

you will secure your lives."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말라키 예언자는, 화덕처럼 불붙는 날이 와서 거만한 자들과 악을 저지르는 자들을 불살라 버리리라고 한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먹지도 말라며, 묵묵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벌어먹으라고 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이 다 허물어질 때가 온다고 하시며, 인내로써 생명을 얻으라고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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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이두매아 출신으로 유다의 임금이 되었던 헤로데는 유다인들의 호감을 얻으려고 기원전 20년경 성전을 증축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솔로몬 성전을 능가할 계획으로 성전이 산 전체를 덮을 정도로 큰 성전 지대를 건설하고 그 위에 성전을 세웠는데, 그 성전 지대의 크기가 어마어마하였습니다. 기원전 4년 헤로데가 죽은 뒤에도 공사는 계속되어 예수님 시대를 지나 기원후 64년까지 이어집니다.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이 보았던 성전도 여전히 증축 중인 성전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런 성전이 완전히 파괴될 것이라고 예언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기원후 70년경 예루살렘 성전은 티토가 이끄는 로마군의 공격으로 완전히 파괴되고 맙니다. 그들을 불살라 버리리라는 제1독서 말라키 예언자의 예언이 이루어지는 참이었습니다.예루살렘 성전 파괴 사건을 전후로 유다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의 대립이 커지기 시작하였고,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로마의 박해도 좀 더 체계적이고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를 이미 알고 계셨기에, 복음서 마지막에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하고 권고하셨습니다. 박해가 주어지더라도 그것은 우리를 생명으로 나아가게 해 주는 시련이니, 그것을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가는 길로 삼으라는 가르침입니다.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느 시대를 살아가든지 늘 종말을 살아가는 이들입니다. 그 때와 시간을 아무도 모르기에 언제나 깨어서 종말을 준비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가끔씩 종말을 잘못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이들이 있습니다. 어떤 이는 종말을 잘못 이해하여 불안에 떨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자신이 메시아라고 호도하며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이끌기도 합니다.종말에 대한 잘못된 이해와 교리가 넘쳐 나는 오늘, 독서와 복음은 분명하게 이야기합니다. 종말을 두려워하며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지 말고, 예수님의 제자로 각자의 자리에서 묵묵히 인내하며 살아가라고 말입니다. 그러면 종말은 우리에게 파멸이 아닌, 구원의 시간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염철호 요한 신부)


종말론적 신앙과 삶으로의 초대

-한민택신부-


전례력상 한 해가 저물어 가는 시점에, 오늘의 미사 전례는 종말에 대해 그리고 그리스도 신앙이 지닌 종말론적 성격에 대해 묵상하도록 초대합니다.

‘종말’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두려움이 아닐까 합니다.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확실함 속에서 사람들은 대체로 종말을 두려움의 대상으로 생각합니다. 실제로 그릇된 종말론을 등에 업고 미래에 대한 불확실함과 두려움을 조장하며 사람들에게 다가와 현혹하는 유사종교들이 우리 주위에 많이 있습니다. 유사종교의 그릇된 종말 신앙에 빠지는 이유는 종말에 관한 성경과 교회의 가르침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종말이나 심판을 막연히 두렵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종말이란 어떤 것일까요? 과연 종말은 존재하는 것일까요? 신앙인은 종말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할까요?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오늘 복음 말씀에 귀를 기울여봅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이 허물어질 때가 곧 올 것을 예고하시며, 이에 앞서 당신 이름으로 가장한 거짓 예언자들이 나타날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어서 전쟁과 반란이 일어날 것이고, 지진과 기근, 전염병이 생기며 하늘에서 무서운 일들과 표징이 일어날 것이고 박해가 일어날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 모든 말씀 뒤에 덧붙이십니다.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복음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멸망을 말씀하시지만, 이는 최종 심판에 관한 말씀이기도 합니다.(마태 24,3-14; 마르 13,3-13 참조) 잘 살펴보면 예수님은 종말과 심판에 관한 무서운 일을 말씀하신다기보다, 그러한 일을 겪더라도 두려워하지 말고 당신을 따르는 신앙의 길을 굳건히 걸어갈 것을 당부하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믿는 이들에게 종말과 심판은 두려움이 아닌 희망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복음은 신앙으로 끝까지 견디어 내면 생명을 얻으리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습니다.

한편 복음이 전하는 환난과 시련은 심판 때에 일어날 일만이 아니라 우리가 일상에서 겪는 일들이기도 합니다. 우리 삶에는 전쟁과 반란, 지진과 기근, 전염병, 박해 등이 끊이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때로 우리의 용기와 자신감을 앗아가고 좌절과 절망에 빠뜨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종말을 희망으로 기다리는 신앙은 갖가지 환난에서 주님이 오실 날이 머지않았음을 깨닫도록 합니다. 그분께서 곧 오시어 지금 우리가 겪는 시련과 환난을 없애 주고 영원한 행복과 안식을 주시리라는 희망을 선사하며, 지금 여기서 시련에 맞서 의연하게 살아갈 용기와 힘을 줍니다.

그분께서 곧 오십니다. 아니, 그분께서 이미 문 앞에 당도해 계십니다. 문 앞에서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우리와 함께 잔칫상에 자리하고자 하십니다. 우리 삶을 기쁨의 잔치로 초대하고자 하십니다. 이제 그분의 초대에 응해야 할 때입니다. 그동안 여러 가지 이유로 잔칫집에 들어가지 못했다면, 이제 마음을 다잡고 그분의 초대에 귀를 기울이고 마음을 열어드립시다. 우리 삶이 기쁨과 행복으로 가득 찬 하느님의 나라로 변모하도록 말입니다


호연지기(浩然之氣)

-서강휘신부-


호연지기(浩然之氣). 천지간에 넓게 퍼진 올바른 기운이라는 뜻이다. 시작은 작은 샘물처럼 미약하다. 그러나 7월의 장마처럼 일순간 거대한 홍수를 일으키고는 어느새 말라버리는 그런 물줄기는 아니다. 의로움과 거룩함의 샘은 땅 속 깊은 물골에서 길러져 멈추지 않는 것. 처음에는 미약해 보이지만 그것이 냇가를 이루고 강을 이뤄 마지막엔 거대한 바다로 흘러가는 생명의 위대함이다.

호연지기는 그래서 하루아침에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매시매초 자신 안의 하느님께 의지해 살아가는 사람에게 벌어지는 은총의 기적이다. 맹자는 이를 하늘로부터 받은 ‘의로움을 지속적으로 실천해 쌓아가는(집의(集義))’ 행위를 통해 몸에 익숙해지는 기운이라고 말한다. 이쯤 되면 그 사람은 외부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게 된다. 부동심(不動心)이다. 누가 뭐라 하든 제 멋대로 하는 고집불통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뜻을 제 몸으로 살아내서 스스로 욕심에 걸려 넘어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한결같은 마음, 일심(一心)이다.

“그러나 나의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움의 태양이 날개에 치유를 싣고 떠오르리니….”(말라 3,20)

오늘 제1독서 말씀이다. 시도 때도 없이 일어나는 제 욕심에 따라 사는 사람은 욕심이 채워지면 우쭐하고, 욕심이 채워지지 않으면 우울해 한다. 도무지 제 인생에 갈피를 잡지 못한다. 오늘 독서의 말라키아의 말처럼 “거만한 자들과 악을 저지르는 자들은 모두 검불이 될 것”이다. 짚단에 불이 붙듯, 자기만족의 화염에 열광하다 일순간 타다 남은 재로 끝나는 인생이다. 뿌리가 약하니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

하지만 하느님의 이름을 경외하는 바로 ‘너희들’은 ‘의로움의 태양이 날개에 치유를 싣고 떠오르게’된다. 경외(敬畏)란 공경하여 두려워하는 것이다. 공포에 떠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한계를 인식한 자들이 하느님께 의탁하는 거룩한 마음이다. 하느님을 모시는 마음이 어찌 한가할 수 있겠는가. 자연히 자신을 살핌에 조심스럽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경외다. 그래서 그들은 하느님의 소리에 따라 자신의 삶을 질서 지운다. 오늘 제2독서의 바오로 사도가 바로 그런 인물이다.

“우리는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에 무질서하게 살지 않았고”(2테살 3,7) 그래서 바오로는 수고와 고생을 하고 밤낮으로 일하며 모든 신도들에게 모범적인 삶을 보여준 것이다. 하느님의 소리에 따라 자신의 삶을 질서지우는 것. 이것이 바로 예(禮)다. 우리는 흔히 예를 형식적인 절차 정도로 생각하지만 사실 예란 하느님의 소리를 자신의 질서 있는 삶을 통해 표현해 내는 행위다.

프란체스코 하예즈의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


주자(朱子)는 그래서 예를 ‘하느님 뜻을 질서 있게 풀어놓은 무늬(천리지절문(天理之節文))’라고 표현했다. 하느님의 뜻과 사랑은 자연 만물을 통해 언제나 드러나고 또 우리가 생존하는 것만으로도 확인할 수 있는 위대함이다. 하지만 하느님의 뜻을 인간의 응답과 적절한 방식으로 표현해 낼 때 그 위대함은 더욱 아름다워진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누군가를 정말 사랑한다면 우리의 사랑 표현은 질서가 있어야 한다. 한순간 사랑하다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그 사람이 스스로 설 수 있도록 지켜봐야 하고 적절할 때 도움을 줘야 하는 것이다. 무분별하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적절한 무늬를 이뤄 예를 갖추는, 그렇게 그 사람을 존중하면서 사랑할 때 진정으로 사랑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사랑(仁)이 마땅한 방식(義)으로 표현되는 것이 바로 예(禮)다.

“여러분 가운데 무질서하게 살아가면서 일은 하지 않고 남의 일에 참견만 하는 자들”(2테살 3,11)은 누군가의 삶에 개입해 조정하는 것을 사랑이라 생각할지 모른다. 자신 스스로도 질서가 이뤄지지 않아 인생이 무엇인지,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면서 타인의 삶을 제단하고 참견하는 것만큼 무례한 것이 또 있을까. 우선 자기 자신이 세워진 다음, 자신의 삶이 질서 지워진 다음에야 우리는 사랑의 준비가 이뤄졌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 질서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세련되고 우아한 표현 방식을 찾게 된다. 교회의 여러 전례들과 예식들은 이러한 사랑과 질서를 표현해낸 것이다. 질서 있는 예식을 통해 우리는 외적인 우아함뿐 아니라 우리 안에 샘솟는 하느님의 기운을 지속적으로 끌어낸다. 이것이 몸에 배면 온 몸에서 그것이 드러날 것이다. 이것이 바로 호연지기다.

이것이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남의 일에 참견’하려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대단한 듯 여겨 ‘내가 그리스도다’, ‘때가 가까웠다’라고 호언장담한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경고하신 인물군들의 행태다. 오랜 기간의 인내와 실천 없이 그 때 그 때의 정세만을 보고 갑론을박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성전의 의미를 깊이 통찰하지 않고 “그것이 아름다운 돌과 자원 예물로 꾸며졌다”(루카 21,5)는 따위의 외적인 모습에 천착한다. 그런 그들에게 오늘 예수님은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루카 21,6)이라고 경고하신다. 내면에서 울려오는 하느님의 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고 겉으로 드러나는 것들에 이리저리 끌려 다니는 것의 허무함이다.

아름다운 성전의 외적인 형태에만 감탄한다면 쓰러져 간 잔재 위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하느님에 대한 원망이나 초라한 최후에 대한 슬픔뿐이다. 오늘 복음에서 큰 지진과 전염병, 하늘에서의 무서운 일들과 표징에 앞서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손을 대어 박해한다고 하신 말씀도 같은 이유다. 모든 재앙들을 하느님 탓으로 돌린 자들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태도는 그럼에도 하느님 편에 있는 자들에 대한 비난이다. 우리를 죽음으로 내몬 그런 하느님을 원망하라! 수 세기 동안 신앙의 반대편에서 무신론을 주장하던 자들이 외치던 구호다. 형제자매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세속의 흥망성쇠에도 자신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 일은 하루아침에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맹자가 이야기한 것처럼 매일의 삶에서 믿음에 근거한 의로움을 실천할 때 몸 안에 차곡차곡 쌓여가는 것이다. 그 때 우리의 믿음은 넓게 퍼져 나갈 것이고 우리를 비난하는 자들, 혹은 내 안에 도사리고 있는 의심에 흔들리지 않을 수 있다. 그것이 호연지기이며 부동심이다. 오늘 복음 마지막 말씀도 우리에게 그것을 알려주고 있다.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루카 21,17-19)


새로 태어나기 위한

-허규신부-


많은 사람들이 종말에 대해 궁금해합니다. 언제인지, 또 종말이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고자 합니다. 성경에서 종말은 두렵고 무섭게 표현되기 때문입니다. 전쟁이나 전 염병, 그리고 하늘에서 일어나는 무서운 일들이 종말을 설 명하는 주된 내용입니다. 종말은 말 그대로 이 세상의 끝을 말합니다. 이 세상은 사라질 것입니다. 하지만 종말은 단순 한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것이기도 합니다. 성 경은 현재의 세상을 고치거나 리모델링해서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은 사라지고 새로운 세상이 온 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의 끝을 말하지만 새로운 것, 새로운 세상이 태동하 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 종말의 다른 의미입니다. 성경은 이 것을 우리에게 전하기 위해 주위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 는 생명의 탄생을, 여자의 출산을 염두에 둡니다. 어머니는 새 생명을 낳기 위해 진통의 시간을 겪습니다. 그 고통의 순간이 지나고 이 세상에 새 생명이 태어납니다. 이 자연의 현상은 성경에서 종말을 말할 때 사용됩니다. 모든 것이 새 롭게 되는, 새로운 세상의 시작 전에 어머니의 진통과 같은 고통의 시간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종말입니다. 그렇기 에 종말은 고통스러운 일들이 일어나는 때로 생각합니다. 전쟁이나 전염병의 고통, 박해의 고난, 하늘의 표징들, 가 장 가까운 가족과 친구들 사이의 갈등이나 분열. 이런 모든 

것은 진통의 시간을 나타냅니다. 이 진통의 시간이 지나고 모든 것은 새롭게 되고 새로 태어납니다. 그래서 교부들은 모든 어머니들이 고통의 시간을 넘어 새 생명의 탄생에 기 뻐하는 것처럼 종말 역시 고통을 넘어서는, 새로 태어나는 기쁨을 준비하는 시간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오늘 이렇게 말하십니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연중시기가 끝나가는 이때에 우리가 듣는 종말에 관한 말은 새로 태어나는 것을 생각하고 우리의 삶을 돌아보 게 만듭니다. 종말은 미래의 일이지만 지금의 나를 돌아보 게 합니다. 신앙인은 종말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다시 말한다면 늘 새로운 생명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의 끝을 넘어 새로운 세상이 있는 것처럼, 죽음을 넘 어 생명이 있는 것처럼, 새롭게 주어질 생명에 희망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 희망은 우리의 믿음에 바탕을 둡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끝이 아니라 부활하신 것 을 믿는 이들에게 종말은 단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새 로 태어나는 과정입니다. 그렇기에 성경은 종말과 함께 희 망을 약속합니다. 시대와 배경은 다르지만 그 약속은 지금 도 유효합니다. 희망 안에서 기쁨을 누리게 하기 위한 것입 니다. “나의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움의 태양이 날개에 치유를 싣고 떠오르리라.” 그리고 그때에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세계 가난한 이의 날'을 맞으며

이창섭신부-

 

2016년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매년 연중 제33주일을 ‘세계 가 난한 이의 날(World Day of the Poor)’로 하겠다고 선포하셨습니다. 복음적 가난을 실천하라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뜻에 따라 한국 교 회도 연중 제33주일을 ‘세계 가난한 이의 날(World Day of the Poor)’로 지내고 있습니다. 사실 한국 교회는 이미 대림 제3주일을 ‘자선 주일’ 로 지내고 있지만 교회가 가난한 이들을 좀 더 배려해야 한다는 교황 님의 뜻을 헤아려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에서는 ‘자선 주일’과는 별도 로 ‘세계 가난한 이의 날’을 지내기로 결정합니다. 참으로 의미 있고 복된 일입니다. 일평생 가난한 이들을 가장 먼저 생각하셨던 예수 그 리스도의 모습과 뜻에 따라 교회가 더욱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실천을 한다하니 너무나 반가운 일입니다. 하지만 아직도 한참 부족하다 생각 이 드는 것은 쉽게 떨칠 수 없습니다.  꽤 오래전에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다른 성당으로 미사를 봉헌하러 간 적이 있었는데, 때마 침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아이들이 복사 옷을 입고 저를 반갑게 맞이해 주었습니다. 저는 제의 를 입으며 아이들에게 장차 커서 뭐가 되고 싶냐고 물었습니다. 그중 한 학생이 신부님이 되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너무나 큰 감동을 받아 왜 신부가 되려고 하냐고 되물었습니다. 그때 그 아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신부님들의 삶을 좀 봤는데 적어도 먹고사는 걱정은 안하시더라구요. 그래서 저도 신부가 되려구요.” 미사를 봉헌하는 내내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리고 창피했습니다. 아이들에게 비친 사제의 모습이 먹고 사는 데 지장 없는 사람으로만 비춰진 것 같아 너무 미안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가 다르게 점점 비대해져 가는 제 모습처럼 교회도 어느새 화려함과 편안함만을 추구하며 비대해지는 것 같아 반성과 걱정만 가득합니다. 이것이 교회의 세속화겠 지요. “성당을 짓되 나무와 흙으로 지어라.” 프란치스코 성인의 마지막 유언처럼 화려함보다는 소박하고 모든 이들을 위한 하느님의 집 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겠습니다. 그 마음으로 가난한 이들에게 가장 먼저 다가갈 수 있는 신앙 인이 되기를 함께 노력합시다.


마지막을 준비하며

-시성복신부-


  “모든 것에는 때가 있다.”(코헬렛 3,2)라는 말씀처럼, 한 해의 시작이 어제 같은데 벌써 정리를 해야 하는 때가 다가왔습니다.    

  “예루살렘의 찬란한 모습을 다 보지 못한 사람은 아름다운 것을 보았다고 할 수 없고, 그 성소의 눈부신 장식을 보지 못한 사람은 예루살렘이라는 도시의 매력이 무 엇인지를 모르는 사람이다.”라는 속담이 있을 만큼 아름답고 훌륭한 예루살렘 성전 을 바라보며 탄복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오늘 예수님께서 아무런 감정 표현도 없이 성전의 파괴를 예고하시는 이유는 모든 사람에게 바로 끝, 마지막을 생각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부터 지금까지, 자신이 그리스도라고 하는 이들도 있었고, 종말의 두려움을 강조하여 자신들 만의 세계를 구축하며 현실에서 도피하도록 이끄는 집단과 사람들도 여전히 생겨나고 있습니다.  

 

  권력자든 부자든 가난한 이든,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게는 끝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맞 이할 그 끝은 지금 주어진 이 순간에 어떤 삶을 사느냐에 따라 확연히 달라지게 마련입니다. 현실 사회에 서는, 어려운 이들의 삶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들만의 삶을 누리는 이들도 있고, 사회적 불평등 속에서 도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현실을 열심히 살되 그 삶을 나누지 않는 그 끝이 어떤지를 우리는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를 통해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마지막을 준비하는 자세는 현세 생활의 어려움을 회피하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삶 속에서 모든 사람들이 더욱더 하느님의 사랑에 마음의 문을 활짝 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생활하는 것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비록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 녹녹하지 않지만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함께 하겠다.” (마태 28,20)는 주님의 약속이 있으니, 주님을 만나는 그 순간까지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열심히 일하 며”, 그 삶을 이웃과 나누며 주님과 함께 힘차게 살아갑시다


'차라리'와 '그래도'

-장병욱신부-


오늘은 ‘세계 가난한 이의 날’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루살렘 성전 파괴에 대한 예언과 여러 재앙을 예고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 파괴를 시작으로 거짓 그리스도의 등장, 전쟁, 큰 지진, 기근, 전염병

그리고 무서운 일들과 큰 표징들이 일어날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아니라도 살다 보면 누구나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것 같은 절망의 때를 만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달자 시인의 글을 옮겨 적어 봅니다.

신달자 시인은 대화 중에 수 차례 “차라리 안 하고 말지!” “차라리 헤어지고 말지!” “차라리 죽고 말지!” 하면서

삶의 한 부분 부분마다 ‘차라리’라고 말하는 이의 얘기를 들으며 한 때 자신도 ‘차라리’를 연발 하며 살았던 기억을 떠올리며 이렇게 말합니다.

시인은 ‘차라리’ 하고 부정하기 보다 ‘그래도’ 하면서 희망을 찾았던 것은 기도의 힘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김승희 시인의 “그래도라는 섬에 살고 싶다”는 시를 적었습니다.

 

“가장 낮은 곳에/ 젖은 낙엽보다 더 낮은 곳에/ 그래도라는 섬이 있다/ 그래도 살아가는 사람들/ 그래도 사랑의 불을 꺼트리지 않는 사람들…”
세상이 끝장날 것만 같은 시기를 겪더라도 “인내로써 생명을 얻으라”는 주님의 말씀을 되새기며 인내는 가끔 시련을 동반하지만

하느님께 대한 희망을 놓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젖은 낙엽보다 더 낮은 곳에 사는 이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십니다.

신달자 시인도 ‘차라리’가 아니라 ‘그래도’는 언제나 자신에게 희망의 공간이었다고 말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담화문 첫 머리에 “가련한 이들의 희망은 영원토록 헛되지 않으리라”(시편 9,19) 하시면서

주님께 대한 신앙은 우리의 불안한 삶 안에서 잃어버린 희망을 되찾아 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말라키 예언자도 유다인들이 유배에서 돌아왔을 때 기쁨과 열정이 있었지만,

 

 

그것도 잠시뿐 또 다시 절망에 빠져 들자 주님께 대한 신뢰를 가져라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약속을 실행하실 것이라고 하시면서 ‘차라리’가 아니라 ‘그래도’ 살아가는 이들에게 힘과 용기, 희망을 주십니다.
“너희에게 의로움의 태양이 날개에 치유를 싣고 떠오르리라.”(말라 3,20)

-서공석신부-


교회 전례(典禮) 주년(週年)은 대림(待臨)시기와 더불어작하고, 그리스도 왕() 축일로 끝납니다다음 주일이 그리스도 왕 축일입니다전례주년이 끝날 이 무렵이면, 우리는 복음이 전하는 세상 종말에 대한 이야기들을 듣습니다세상의 종말을 말하기 위해 신약성서는 유대인들의 묵시문학에서 언어를 빌려옵니다. 묵시문학은 후기유대교가 세상 종말에 대해 상상한 것을 기록으로 남긴 문서들입니다. 예수님시대 유대인들은 그 문서를 잘 알고 있었고, 유대인들이 중심이 된 초기 그리스도신앙공동체도 그것을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따라서 그들은 세상 종말을 말하기 위해 자연스레 그 표현들을 사용하였습니다오늘 복음이 말하는 세상 종말에 있을 큰 재난(災難)도 그 문서들의 영향을 받아 기록되었습니다. 성전의 파괴, 전쟁과 반란, 기근, 전염병, 하늘의 징조, 박해, 이 모든 것이 세상 종말에 있을 것이라고 후기유대교 묵시문학은 상상하였습니다.

 

 그리스도신앙인은 죽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느님의 일을 보고, 그것을 배워 실천합니다신앙은 세상의 미래에 대해 비밀스런 정보를 주지 않습니다예수님은 세상 종말의 날과 때”(마르 13, 32)도 모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루가복음서가 기록될 당시, 예루살렘 성전은 이미 십여 년 전에 파괴되었습니다로마제국의 식민지였던 유대아가 기원후 66년 독립전쟁을 일으켰고, 그 전쟁은 4년 후, 곧 기원후 70년에 유대아의 패전으로 끝났습니다로마군대는 유대민족의 정신적 중심인 예루살렘과 그 성전을 처참하게 파괴하였습니다.  식민지가 반란을 일으키면, 어떤 비극이 기다리고 있는지를 보여 주려는 것이었습니다복음서가 기록될 당시, 그리스도 신앙인들은 유대교 당국으로부터 박해당하고 있었습니다따라서 복음서들은 유대교묵시문학이 말하던 종말이 이미 왔고,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열리는 새로운 미래를 볼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합니다오늘의 복음도 그런 의도를 담고 있습니다.

 

사람은 자기 힘으로 자기의 미래를 보장하고자 합니다우리는 건강한 미래를 위해 운동하고, 건강식품과 보약도 먹습니다다른 사람으로부터 존경받고 대우받는 미래를 얻기 위해 학생들은 열심히 공부합니다그리고 우리는 경제적으로 안정된 미래를 위해 저축하고 보험에도 가입합니다우리의 지혜와 노력으로 우리의 안정된 미래를 보장하려는 것입니다세상에 사는 인간으로 당연한 일이고, 그것을 잘 하는 사람을 우리는 지혜롭다고 말합니다.

 

신앙은 자기가 설계하는 자기중심적 미래가 아니라, 하느님이 주시는 미래를 살자는 운동입니다예수님은 당신의 힘으로 당신의 미래를 보장하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느님이 주시는 미래만이 참다운 우리의 미래라고 믿었습니다예수님은 현재 우리의 삶 안에 하느님이 살아 계셔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하느님이 우리 안에 살아계시면, 우리는 그분의 일을 실천합니다.  이웃이 불행하면 도와주고, 이웃의 생명을 소중히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고 죄를 용서하면서 그것이 하느님의 일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은 유대교의 실세들과 갈등을 겪고, 당신의 죽음이 다가 올 때도 당신의 노력으로 살아남을 궁리를 하지 않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질 것을 빌었습니다.  “아버지, 제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소서.”(마르 14, 36).  예수님은 하느님이 주실 미래만을 희망하였습니다이 세상은 자기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스스로 노력하지 않는 사람을 오래 살려 두지 않습니다죽음의 휘장을 넘어 하느님이 예수님을 살려 놓으셨다는 것이 부활입니다.

 

하느님의 일만이 우리가 사는 세상과 시간을 넘어서 존속할 것입니다. 푸르고 싱싱하던 대자연에 단풍이 아름답게 들어가고 있습니다이미 길에는 낙엽이 떨어져 우리 발아래에 밟힙니다.  앙상하고 스산한 겨울의 풍경이 곧 온다고 예고하고 있습니다우리도 그렇게 푸르렀다가 단풍이 들고, 또 떨어져 이 세상과 결별한다는 사실을 알려 주는 계절입니다우리를 버티어 주던 자존심, 명예, 지위, 재물도 우리의 미래를 보장해 주지 못하는 잠시의 푸름이고 아름다움입니다우리가 사생결단(死生決斷)하고 덤비는 일이, 우리 자신을 지키고 보존하고 높이기 위함이라면, 하느님의 미래는 우리 안에 들어설 자리가 없습니다하느님이 우리 안에 살아 계시면, 우리 자신과 주변을 보는 우리의 시선에도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조금 더 선하고, 조금 더 관대하고, 조금 더 자비롭게 주변을 보는 마음의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볼 수 없습니다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변한 우리의 삶입니다그것이 우리 가운데 있는 하느님의 나라입니다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당신들 가운데 있습니다.”(루가 17, 21).  하느님이 동기(動機)가 되어 우리의 삶이 변하면,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그것이 하느님의 나라라는 말씀입니다재물과 명예에 대한 우리의 욕심이 우리를 지배하면, 하느님은 우리 안에 계시지 않습니다우리가 계획한 우리의 미래만을 바라보며 사는 우리라면,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습니다하느님은 우리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축복이나 해주면서 하늘 저 멀리에 계시지 않습니다.

 

신앙은 우리가 하는 일이 더 잘 되도록 하느님의 힘을 빌리는 길이 아닙니다그리스도신앙은 우리의 길을 바꾸라고 권합니다. 우리의 미래를 우리가 보장하겠다는 환상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미래를 향한 길로 들어서라고 신앙은 권합니다하느님보다 우리 자신을 더 소중히 생각한다면, 우리가 실천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인간의 삶은 모험입니다. 남녀가 만나서 하나의 가정을 이루는 것도 모험입니다. 자녀를 낳아서 키우는 일도 아무런 보장이 없는 모험입니다인간에게 소중한 일들은 이렇게 보장되지 않은 것들입니다. 그런 일들은 우리가 헌신(獻身)하지 않고, 우리 자신만을 소중히 생각하면, 반드시 실패하는 모험입니다그리스도신앙도 모험입니다그것은 하느님과 함께 하는 모험입니다.  예수님이 당신의 삶과 죽음으로 이미 하신 모험입니다. 그분의 부활은 그 모험이 하느님의 생명과 기쁨에로 우리를 인도한다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하느님의 미래를 택한 사람은 하느님이 자기 안에 살아계시게 합니다.  선하고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시선으로 자기 주변을 봅니다. 그리고 그 시선 안에 들어온 현실이 요구하는 바를 실천합니다. 그리스도신앙인은 선하고 자비로우신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셔서 그분이 하실 일을 생각하고 실천합니다.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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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가 다시 20살의 ‘나’로 되돌려 주겠다고 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저 역시 이런 말을 듣게 되면 어떻게 할까를 잠시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러면서 먼저 ‘20살에 뭐 하고 살았지?’라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신학교에 들어가서 신부가 되겠다는 꿈을 키웠던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를 떠올리면 제대로 못살았습니다. 기도에 충실하지 못했고, 공부도 열심히 하지 못했습니다. 부족함이 가득했던 시간이었지요. 그렇다면 다시 20살로 되돌아가면 지금 더 멋진 신부가 되어있을까요? 부족함의 시간을 경험하지 못하면 그때보다 더 나은 ‘나’는 절대로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회 친구 한 명이 요즘 너무 어렵다고 해서 만나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지금까지 아무런 문제 없이 소위 잘 나갔던 친구였습니다. 단 한 번의 실패 없이 하는 일마다 잘 되던 친구였지요. 이 친구가 근래에 커다란 실패를 겪게 된 것입니다. 신용도 떨어진 상태라 어떻게 할지 모르겠다면서 울먹이더군요. 이제까지 실패가 전혀 없었기에 지금 더 힘든 것이었습니다.

실패나 실수를 두려워하는 우리입니다. 그러나 삶 전체를 볼 때 반드시 있어야 하고 나를 성장시키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이러한 실패나 실수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20세로 다시 돌아가서 실패나 실수 없이 사는 것은 좋은 길이 아닙니다. 더 나은 ‘나’를 만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 종말에 일어날 일을 알려주시며 그들에게 경계하라고 하십니다. 그때의 표징은 전쟁과 지진이 일어나고 곳곳에 기근과 전염병이 생기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혼란이 넘칠 때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예언자가 나타나서 혼란을 가중한다고 하십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이 종말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서 두려움을 갖기에 충분했을 것입니다. 성경을 통해 노아의 대홍수 사건을 잘 알고 있었고, 또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이야기도 알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그들의 역사를 보면 계속된 적들의 침략과 점령으로 인해 유배 생활까지도 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지금 현재는 로마의 지배를 받는 상황이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이야기가 절대로 근거 없는 이야기로 들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절망의 메시지만이 아닌 희망의 말씀을 전해주십니다.

“그러한 일이 반드시 먼저 벌어지겠지만 그것이 바로 끝은 아니다.”

세상의 멸망이 가까워진 만큼 구원자의 나라가 가까워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끝장인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실패나 커다란 실수를 했을 때 세상이 무너지는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은 아닙니다. 주님의 이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좌절에 빠져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삶이 아니라, 지금 당장 해야 할 주님의 일을 실천하는 삶에서 우리는 생명을 얻습니다.
사랑은 나중에 하는 게 아니라 지금 하는 것입니다. 살아 있는 지금, 이 순간에(위지안). 



문제는 실천.

스스로 글을 잘 쓴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책을 여러 권 출판해서인지 이러한 질문을 종종 받습니다.

“신부님,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 수 있어요?”

이런 질문에 무리 없는 대답을 알고 있습니다. 송나라의 구양수 선생님의 말씀으로 글쓰기의 황금률로 자주 인용되는 ‘다문다독다상량(多聞多讀多商量)’입니다. 즉, 많이 듣고, 많이 읽으며, 많이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말은 참 쉽습니다. 마치 의사가 환자에게 “식사 거르지 마시고, 술담배 끊이시고, 열심히 운동하면 건강해집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정말로 이것밖에 없습니다. 글 잘 쓰는 비결이 담겨 있다는 책을 읽어봐도 결국은 ‘다문다독다상량’입니다.

정답은 분명합니다. 문제는 실천이겠지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길, 그래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 역시 정답은 뻔합니다. 하느님 뜻에 맞춰서 열심히 사랑하며 사는 것입니다. 정답은 분명히 알고 있는데…. 문제는 실천이지요.                   

미움 받을 용기는 미워하지 않을 용기에서 나온다

-전삼용신부-


미국 콜로라도 주 덴버 시의 남서쪽에 리틀턴이라는 지역에 있는 콜롬비아인 고등학교에서 학생 25명과 용의자 2명이 총기 난사 속에 피투성이가 되어 죽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그런데 이 비극 가운데 살아남은 여학생이 증언한 놀라운 이야기 하나가 있습니다. 이 학교의 불량 서클 단원이었던 ‘트렌치 코트’ 마피아 단원 둘이 총기를 가지고 들어와서 학생들을 난사하고 있었을 때, 그곳에는 17살 된 캐시 버넬이라는 소녀도 있었습니다.

      총을 들고 있던 학생 하나가 그녀에게 총구를 목에 겨누고서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너 하느님 믿어?”

      만약 하느님을 안 믿는다고 했다면 살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 그 상황에서 그녀는 똑바로 그를 쳐다보며 대답했습니다.

      “그래, 나는 하느님을 믿어.”(Yes, I believe in God).

      그러자 그는 총구를 캐시의 가슴에 겨누고는 마구 총을 쏘았습니다.

      캐시의 이야기가 알려지기 시작하자 미국 크리스천 십대들 사이에서 “Yes, I believe in God”이라고 적힌 티셔츠를 입고 다니는 운동이 일기 시작했고, 플로리다 주의 한 도시에서는 2천 5백 명의 십대들이 모여 감동적인 신앙고백의 집회를 가졌습니다. 이 집회의 이름 역시 “Yes, I believe in God”이었습니다. 이 집회는 마약 속에 찌들어 죽어가던 미국 그리스도인 십대들을 일깨우는 살아 있는 운동으로 불붙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신앙을 가진 사람은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자신 안에 계신 하느님을 지키기 위해서는 목숨까지 걸어야 할 상황이 올 수도 있습니다. 이때 목숨이 아깝다고, 미움 받는 것이 두렵다고 믿음을 부인하면 몸은 살아도 영혼은 죽습니다. 하느님께서 믿음과 함께 사라지시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증언하기 위해서는 미움을 감수할 수 있어야합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에서 성전파괴에 대한 예언을 하시는데 이는 비단 예루살렘 성전을 향한 말씀만이 아니라 우리 각자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당신을 믿었다가 예루살렘처럼 폐허가 되는 사람이 되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말씀이십니다. 예루살렘의 그 자랑스럽던 성전은 서기 70년에 완전히 파괴되어 지금까지도 재건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이스라엘 백성을 상징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세속적인 행복을 추구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가난해지고 박해받고 미움 받는 죽음이었습니다. 현세적 행복을 추구하던 그들은 그래서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로부터의 영광을 추구하였습니다. 이것이 그들 폐망의 원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제자들에게 그런 종말을 맞지 말라고 이렇게 충고하십니다.

      “사람들이 너희에게 손을 대어 박해할 것이다. ...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친구들까지도 너희를 넘겨 더러는 죽이기까지 할 것이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미움 받을 용기가 없다면 박해를 이겨낼 수 없고 박해를 이겨낼 수 없다면 자신 안의 하느님의 존재를 증언하지 못합니다. 성전은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하느님을 만나게 하는 장소가 되어야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증언하지 못하는 성전은 참 성전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증거하지 못하는 신앙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미움 받을 용기가 있어야 하느님을 모실 수 있고 그래야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용기도 생깁니다. 미움 받을 용기가 있어서 관계가 단절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해야 오히려 관계가 집착이 아니라 더 친밀해 질 수 있는 것입니다. 술을 적정선에서 그만 마시겠다고 끊을 수 있는 사람이 술을 더 즐길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술을 끊을 용기가 없을 때 그것은 관계가 아니라 집착이 되고 중독이 됩니다. 그러면 자신이 진짜 망가지게 됩니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끊고 미움 받을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더 건전하고 친밀한 인간관계를 형성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미움 받을 용기를 지닐 수 있을까요? 미움은 나의 고통의 탓을 상대에게 돌리는 행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은 나의 탓이라고 여기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세상 모든 죄를 당신의 탓으로 여기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미워하고 십자가에 못 박는 것까지 당신 탓으로 여기신 것입니다. 이미 다른 사람을 미워할 마음이 없으니 다른 사람들이 당신에게 어떠한 해를 끼쳐도 상관이 없으셨습니다.

      사랑할 용기가 있어야 미움 받을 용기도 생기는 것입니다. 자신을 미워하려는 사람을 미워하겠다는 마음이 있다면 절대 미움 받을 용기가 생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미워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미워하지 않기 위해 미움 받을 용기를 포기하게 되면 정말 미운 사람들이 많이 생겨나게 됩니다. 미워하지 않을 용기를 얻으려면 모든 것이 나의 탓이라 할 줄 알아야합니다.

      어떤 신부님이 피정 때 신자들에게 들려준 자신의 체험입니다.

      “지난 11월이었습니다. 제가 (스위스에서 피정지도 할 때) 미사를 마치고 기도하고 있는데, 어떤 영감이 왔습니다. 당시 우간다에 있었던 어느 신부님께 전화를 드리라는 아주 엉뚱한 생각이었습니다. 처음에 너무 엉뚱해서 무시하려고 했지만 그 영감이 계속되었습니다. 그래서 전화를 했지요. 제가 전화를 한 그 순간에 신부님은 아주 큰 위기에 봉착해 있었습니다. 숲 속에서 차가 서버렸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크게 당황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제가 전화를 한 것입니다. 그곳은 아주 위험한 곳이었습니다. 제가 2006년에 강도를 만나 죽을 뻔한 바로 그 장소였습니다. 당시 4명의 강도가 권총을 빼어 저를 위협했었습니다.

      그 신부님이 다급하게 말했습니다. ‘안토니오 신부님, 시동은 걸리는데 차가 움직이지 않아요.’ 저는 보닛을 열게 하여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주었습니다. 간단한 일이었습니다. 안에 있는 줄이 하나 끊어져 있었는데, 그것을 연결해 주면 되는 일이었습니다. 차에 대해 아는 사람에게는 간단한 일이지만 차에 대해 모르는 사람에게는 엄청 당황스러운 일입니다.

      제가 스위스에서 우간다에 있는 차를 1분 만에 고쳐주었습니다. 저는 차 수리공입니다. 자격증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그 신부님의 행복을 되찾아 주었습니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우리는 다만 그분의 도구일 뿐입니다.”

                  [출처: ‘아주 특별한 순간’, 안토니오 사지 신부, 바오로 딸]


      하느님께서 우리를 도구로 쓰시려고 하는데 내가 기도를 하고 있지 않다면 어떻게 도구로 쓰실 수 있을까요? 만약 내가 하느님의 온전한 도구가 되었다면 어쩌면 굶어 죽는 사람도 없고 환경이 이처럼 파괴되지도 않을 것입니다. 유럽에 있는 어떤 아이는 환경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 전 세계의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은 마더 데레사와 같은 수녀님을 통해 수많은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십니다.

      그러니 세상에 죄가 있다면 그것은 내가 하느님의 온전한 도구가 되지 못한 탓일 수 있습니다. 이것을 안다면 미움 받아도 되지 않을까요? 어차피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자비만을 의탁해야 하는 죄인들입니다. “제 탓입니다. 용서하세요.”만 모든 이들에게 할 수 있어도 충분히 미움 받을 용기가 생깁니다. 미움 받을 용기가 생기려면 먼저 미워하지 않으려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미워하지 않으려면 모든 것을 나의 탓으로 돌려야합니다. 남 탓을 하면서 미움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사랑할 용기를 가집시다. 그러면 미움 받을 용기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40년 전에 이민 오신 분들과 식사하였습니다. 당시에는 미국과 한국의 차이가 엄청났다고 합니다. 미국은 동경과 꿈의 나라였다고 합니다. 꿈은 이루어졌고, 40년이 지났다고 합니다. 돌아보니 미국은 동경과 꿈의 나라였지만, 부단한 노력과 희생이 필요했다고 합니다. 언어를 배워야 했고, 새벽부터 일하셨다고 합니다. 배우자는 하느님 품으로 가셨고, 미국 땅에 묻혔다고 합니다. 짧은 시간이지만 40년의 삶이 절대 쉽지 않았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제 막 미국에서의 삶을 시작한 저에게 따뜻한 밥을 사 주고 싶으셨다고 합니다. 식사하면서 제게 앞으로 몇 년이나 있을지 물었습니다. 5년 정도 있을 예정이라고 대답했습니다. 힘든데 5년씩이나 있으려고 하느냐고 다시 물었습니다. 웃으면서 힘든 일 다른 분에게 맡기고 싶지 않아서요.’라고 대답했습니다. 문득 생각합니다. 제게는 40년 전에 이곳에 오셨던 분처럼 미국이 동경과 꿈은 아니었습니다. 미국과 비교해서 한국에서의 삶이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미국은 저에게 어떤 의미인지 생각하면서 문득 구상 시인의 꽃자리라는 시가 생각났습니다.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나는 내가 지은 감옥 속에 갇혀 있다

너는 네가 만든 쇠사슬에 매여 있다

그는 그가 엮은 동아줄에 엮여 있다

 

우리는 저마다 스스로의

굴레에서 벗어났을 때

그제사 세상이 바로 보이고

삶의 보람과 기쁨을 맛본다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그럴 수도 있지라는 마음을 가지면 가시방석과 같은 자리도 꽃자리로 변하는 걸 보았습니다. ‘그럴 수가 있나라는 마음을 가지면 꽃자리도 가시방석으로 변하는 걸 보았습니다. 멀쩡하던 차가 엔진오일이 새고, 배터리도 갈아야 했고, 수리 비용이 눈물 날 정도로 나왔습니다. ‘그럴 수가 있나라는 마음이 생기니, 왜 하필 지금 이런 일이 생기는지 속이 상했습니다. ‘그럴 수도 있지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미국 땅에서 수업료를 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더 큰 사고를 미리 예방했다고 생각하니 비용도 그리 아깝지 않았습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꽃자리를 만드는 방법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1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나의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움의 태양이 날개에 치유를 싣고 떠오르리라. 주님 앞에서 환호하여라. 세상을 다스리러 그분이 오신다. 그분은 누리를 의롭게, 백성들을 올바르게 다스리신다.” 하느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늘 꽃자리에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자비하심으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따라서 하느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본인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합니다.

 

2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에게 권리가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 여러분에게 모범을 보여 여러분이 우리를 본받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듣자 하니, 여러분 가운데에 무질서하게 살아가면서 일은 하지 않고 남의 일에 참견만 하는 자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한 사람들에게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지시하고 권고합니다. 묵묵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벌어먹도록 하십시오.”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라고 합니다.

 

최선을 다하지만 때로 시련과 고통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박해를 받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하셨습니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주님의 제자들은 인간적인 말솜씨나 인간적인 지혜에만 의존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양승국신부-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 활동으로, 종말론적 강화(講話)에 최선을 다합니다.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의 가르침이어서 그런지, 분위기가 무척이나 비장합니다. 마치 자식들에게 남기는 유언과도 같은 느낌입니다. 강력한 경고와 따뜻한 격려가 교차되고 반복됩니다.

 

 예수님 시대 이스라엘에는 묵시 문학 사상이 크게 유행하고 있었습니다. 일종의 난세(亂世) 문학입니다. 선민 이스라엘이 현세에서는 강대국 로마의 압제에 시달리겠지만, 종말, 곧 새로운 세상이 오면 사람의 아들이 하느님을 대신해서 세상을 심판하고 이스라엘을 구원할 것이라는 문학 사상입니다.

 

 이러한 종말 묵시 문학 사상은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에도 그대로 유입되었습니다. 공관복음서 저자들 역시 종말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에 묵시 문학 사상을 ‘종말 심판 설교’라는 소재로 인용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건축 중이었던 예루살렘 성전은 기원전 20년경 건축이 시작되었고, 기원 후 63년까지 지속되었습니다. 당대 이 성전은 얼마나 대단한 건축물이었던지,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손꼽힐 정도였습니다.

 

 하얀 대리석으로 쌓아올린 외벽은 화려하게 빛났습니다. 성소문을 덮고 있던 황금 포도 덩쿨은 장관이었습니다. 성전이 얼마나 수려했던지 당시 사람들 사이에 이런 말까지 나돌았습니다.

 

 “영광 가득한 예루살렘을 보지 못한 사람은 일생에 아무런 기쁨을 맛보지 못한 사람입니다. 아름답게 장식된 예루살렘 성전을 보지 못한 사람은 즐거움을 주는 도시를 제대로 보지 못한 사람입니다.”

 

 성전이 얼마나 아름답고 찬란했던지 순례객들이 큰 목소리로 감탄해마지 않았습니다. 그 모습을 본 예수님께서는 즉시 비운의 예언을 던지십니다.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루카 복음 21장 6절)

 

 예수님은 아름다운 석조 건물이나 성전을 장식한 휘황찬란한 보물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으셨습니다. 그보다는 살아있는 성전, 가슴치고 회개하는 백성, 거룩한 백성에게 더 많은 관심을 지니셨습니다.

 

 당시 사람들의 주 관심사는 종말이 언제? 어떤 표징과 함께 올 것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묻습니다. “스승님, 그러면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또 그 일이 벌어지려고 할 때에 어떤 표징이 나타나겠습니까?”(루카 복음 21장 7절)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시간에 대해서 명확하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곧 오는 것은 아니며, 그렇게 빨리 오는 것도 아님을 강조하십니다. 대신 그날이 다가오면 많은 거짓 예언자들이 등장해서 사람들을 현혹시킬 것인데, 그들에게 속지도 말고, 그들을 따라가지도 말라고 가르치십니다.

 

 루카 복음 사가는 당시 성행하여 사회를 긴장시키고 혼란시켰던 거짓 예언자들의 ‘재림 임박 사상’을 경계하라고 강조한 것입니다.

 

 계속되는 예수님의 가르침처럼, 제자들은 동족 유다인들과 이교도 당국자들 모두에게 박해를 받았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설교할 때 사제들과 성전수위대장이 나타나 두 사람을 체포해 투옥시켰습니다. 필리피의 치안관들은 바오로와 실라의 옷을 찢고 매질한 후 투옥시켰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아그리파 2세 왕의 법정에, 고린토 총독 갈리오의 법정에 섰습니다. 베드로와 요한과 스테파노는 산헤드린 앞에 섰습니다.

 

 제자들은 스승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인해 모욕과 박해를 당하고 맞고 투옥되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모욕당하고 박해받는 것을 더없는 기쁨과 특권으로 여겼습니다.

 

 제자들이 적대자들 앞에 섰을 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제대로 배우지도 못했던 베드로와 요한 사도가 학식으로 따진다면 당대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의회 의원들, 노회한 달변가들을 언변으로 눌러버렸습니다. 샛파란 청년 스테파노에 맞서 논쟁을 벌이던 가방끈 긴 그리스계 유다인들은 언변에 있어 당해낼 도리가 없었습니다.

 

 “너희는 명심하여, 변론할 말을 미리부터 준비하지 마라. 어떠한 적대자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내가 너희에게 주겠다.”(루카 복음 21장 14~15절)

 

 주님의 제자들은 인간적인 말솜씨나 인간적인 지혜에만 의존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위에서 주시는 능력, 성령께서 주시는 은총에 힘입어 주님의 말씀을 선포해야 할 것입니다.


아주 작은 일

 -김기현신부-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이 말씀을 들으면서 오전에 ‘생각’에 잡아 끌렸던 모습이 생각이 났습니다. 미사를 봉헌하는 동안에는 경문과 말씀에 집중해야 할 텐데, 내가 친구들과 얼마나 친밀한가.. 라는 생각이 오자 미사에 집중하지 못하고 쉽게 그리로 끌려가는 제 모습을 보았었습니다. 악한 영혼은 내 약점을 잘 알고 있다던데, 아마도 내 약점 가운데 몇 가지를 계속 먹이로 던지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사람들과의 관계가 얼마나 좋으냐.. 예전에도 이런 실수를 반복하지 않았느냐.. 등의 생각입니다. 그런 생각이 밀려오면 나도 모르게 지금 할 일도 뒤로 한 채 그 생각에 빠져들곤 합니다.

 

그런데 그 생각의 결말은 그리 좋지 않은 것 같습니다. 지금 해야 할 일에 집중하지 못하게 할 뿐만 아니라, 지금 내 자신을 나약한 존재로 사랑받을 만하지 않은 사람으로, 해 봐야 아무 소용없을 거라는 무력감으로 나를 이끌고 갑니다. 그러한 결과를 보면 아마도 나를 끌고 가는 생각이 성령의 이끄심은 아닐 겁니다. 그분의 이끄심은 우리에게 기쁨과 평화를 가져다줄 텐데요. 그리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먼저 내 안에 생각들을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분이 만들어 가시는 일이 내 예상과는 조금 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 이름 때문에 너희를 임금들과 총독들 앞으로 끌고 갈 것이다.

 

마음속에서 ‘이런 모습이라고.. 아닌 것 같은데..’ 라는 생각들이 수없이 밀려올지도 모릅니다. 내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모습으로 다가온 생각과 모습이어서, 그것이 내 삶에 손을 내밀고 있는지 조차 깨닫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내 생각과 악한 생각이 걷혀진 자리에서야 비로소 손을 내밀고 계신 그 모습이 보이리라 생각합니다.

 

바오로 사도도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방식이 자기의 두 발로 당당히 로마에 들어가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그를 수인의 모습으로 전혀 예상하지 못한 모습으로 그 땅에 들어가 복음을 전하게 하십니다. 그 일의 과정은 내 생각과 다르지만 전혀 예상하지 못했지만, 그 일을 이루시는 하느님을 보고 있는 내 마음에는 악한 생각이 끌고 가는 것과는 전혀 다른 평화와 놀라움이 가득했으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요? 혼자서 때로는 공동체이더라도 어찌 해 볼 수 없다는 무력감에 사로잡힐 때가 있습니다. 해 봐야 소용없는 느낌이 들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시는 일은 ‘그 모든 일을 바로 잡고 새롭게 하여라.’ 는 명령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러한 일이 너희에게는 증언할 기회가 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오늘 내가 있는 그 자리에 여러 작은 만남과 일을 보내 주십니다. 멀리 있는 무엇이나 해낼 수 없는 큰 어떠한 일이 아니라, 내 삶의 자리에서 응답할 수 있는 작은 일을 보여주십니다. 예전에 어떤 수녀님이 여기서 무언가를 한다는 생각이 아니라, 만나는 사람들에게 미소로 인사하고 맞이하면 언제가 그분의 사랑을 알게 되지 않을까요.. 라고 하시며 사신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요. 아마도 그러한 모습이 내 삶의 자리에서 주님이 바라시는 일에 응답하고 살아가는 일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때로 우리는 미래에 큰일을 이루기 위해 준비하는 데에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내거나, 너무 대단한 일을 생각하여 쉽게 좌절하고 아무 일도 할 수 없다고 무력감에 빠지는 경우도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때로 더 잘 되기 위한 노력에 너무 많은 힘을 쏟다가, 가까운 곳의 중요한 것을 놓치는 경우가 있는 것 같습니다. 매일매일 주님이 보내주시는 사람들과 작은 일들 안에서, 주님이 필요로 하시는 그 일들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너희는 명심하여, 변론할 말을 미리부터 준비하지 마라.

 

아마도 주님이 바라시는 것은 지금 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아주 작은 일, 그 일에 응답하기를 바라실 것 같습니다. 오늘 하루, 내가 할 수 있는 아주 작은 그 일을 실천해 봅시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예전에 호텔 예약을 잘못해서 전화를 했는데

그분 말이 너무 빨라서 못 알아들었다.

그런데 내가 천천히 말해달라고 할수록

그분은 더 빨리 말해주셨다.

나중에 알고 보니 중간에 단어 하나를 빼서

‘느리게 말해줘..’ 가 아니라,

‘너 말이 너무 느려..’ 라고 말하고 있었다.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반영억신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아들, 예수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종말에 대한 말씀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인들의 삶의 태도를 성찰케 하십니다. 이 시간 하느님의 성전이 된 우리의 마음가짐을 새롭게 해 주시도록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기구한 운명을 겪었습니다. 세 번에 걸쳐서 세워지고, 세 번 무너졌습니다. 첫 번째 성전은 가장 화려한 왕권을 누린 솔로몬 왕 때 건축되었습니다. 솔로몬이 죽고 이스라엘은 남북으로 갈라지게 되게 되었으며 남 유다는 기원전 587년 바빌론에 의해 멸망을 당하게 됩니다. 예루살렘은 폐허가 되고 성전은 무너졌으며 이스라엘 사람들은 바빌론으로 끌려가 노예살이를 하게 됩니다.

 

그 후 기원전 538년 바빌론을 제압한 페르시아의 키루스 황제에 의해 유배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귀환 이후 제일 먼저 성전을 재건합니다. 그러나 이 제2의 성전 또한 기원전 170년 경 시리아 왕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에 의해 점령되고 맙니다. 시리아왕은 유다인을 말살하기 위하여 정책적으로 유다교를 핍박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폐허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성전 한가운데 제우스 신의 제단을 세우고 유다인들이 가장 부정하게 생각하는 돼지고기로 제사를 지내게 하였습니다.

 

그 후 시리아가 멸망하고 로마의 폼페이우스 장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함으로써 이스라엘은 다시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로마의 헤로데 왕은 유다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예루살렘의 성을 다시 화려하게 증축합니다. 이 성전이 다시 폐허로 변할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예언을 하셨는데 오늘 복음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35년경 전후이고 기원 후 70년경 성전은 또다시 로마에 의해 폐허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 때 예루살렘 성만 무너진 것이 아니라 유다인들 전체가 나라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지금의 이스라엘로 정착하기까지 유다인들은 참으로 험난한 길을 걸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아직 복원되지 못하고 그 자리에는 이슬람 사원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유다교, 이슬람교, 그리스도교의 성지로써 의미 깊은 땅이 되어 있습니다. 그토록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하느님께서 함께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폐허가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충만하였지만 하느님을 외면하고 은총을 담을 그릇을 마련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세례성사로 하느님의 새 성전이 된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많은 은총을 받고도 감사하지 못하고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다면 언제 그런 재앙을 맞게 될지 모릅니다. 깨어 준비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사실 예루살렘이 스스로 돌아보고 회개의 길을 걸었더라면 멸망은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 종말에 앞서 겪게 될 환난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헛된 예언자가 나타나고, 자칭 ‘그리스도’라고 하는 자가 등장하며 민족과 민족, 나라와 나라가 맞서 일어나며 큰 지진과 기근, 전염병이 생길 것이라 했습니다. 세상의 종말은 결국 혼란을 겪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결코 헛된 예언에 속는 일이 없도록 하고 큰 표징들에 무서워하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사실 마음이 추우면 몸도 춥고 남도 추워 보이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내가 평정을 지키고 있으면 바깥바람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실 구세주 예수님을 믿고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물진대 어떤 표징이 일어나면 어떻고, 종말이 오면 어떻습니까? 그저 오늘을 그분과 함께 사는 것이 소중합니다. 주님과 함께라면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작은 불은 바람 앞에서 쉽게 꺼지지만 큰 불은 바람 앞에서 활활 탑니다. 마찬가지로 믿음이 큰 사람은 환난 앞에서 그 진가를 드러냅니다. 믿음의 사람은 이런 저런 소문으로 휘둘리지 않습니다. 소문의 사실과 진실을 살핍니다. 이렇쿵 저러쿵 쉽게 판단하고 단정 지으며 함부로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세상 종말에 앞선 외적인 혼란을 두려워 말고 오히려 마음 안에 평온이 없음을 염려해야 하겠습니다. 세상의 종말이 어떻게 오느냐를 걱정하기보다 현재의 내 삶의 상태가 어떠한가를 살펴야 할 때입니다.

 

사람은 어려움에 처했을 때 진면목을 볼 수 있습니다. 그때야 말로 그 사람의 크기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어려움을 처리하는 과정 안에서 진실된 모습을 보게 되고 하느님의 사람인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8장28절에서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사람에게는 선을 이룰 수 있게 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서 선을 지향하는 사람은 곧 하느님의 사람이요, 그렇지 않으면 하느님의 눈에 드는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신부인 저도 일상생활 안에서 하느님의 사람이 아닌 상태로 지낼 때가 종종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아마 누군가 제 속을 알면 큰 실망을 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 때문에 박해와 비난을 받게 됩니다. 어떠한 처지에서도 주님을 따라야 하지만 연약한 인간의 모습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미리 당신의 제자들에게 위로와 힘을 주십니다. ‘박해를 당하고 감옥에 갇히게 되고….. 그 때야말로 너희가 나의 복음을 증언할 기회이다……어떠한 적대자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내가 너희에게 주겠다’(12-15). 박해는 그리스도를 증언할 기회라고 했지만 어디 그것이 말같이 쉬운 일입니까? 일상 안에서도 변명과 합리화시키려고 하는 마음이 얼마나 많은데…..

 

감옥에 갇혀서 소신을 지킨다는 것은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참으로 믿는 사람은 걱정하지 않습니다. 믿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회당이나 관청이나 관아에 끌려갈 때, 어떻게 답변 할까, 무엇으로 답변할까, 또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성령께서 그때에 알려주실 것이다”(루카 12,12).

 

 이제 믿음을 지닌 제자들은 인간적인 말재주와 인간적인 지혜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능력과 지혜로 말하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4장13절을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최고 의회에서 증언하는 모습이 나오는데 의회 의원들은“베드로와 요한의 담대함을 보고 또 이들이 무식하고 평범한 사람임을 알아차리고 놀라워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6장10절에도 스테파노와 논쟁을 벌이는데 “그의 말에서 드러나는 지혜와 성령에 대항할 수가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최고 의회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모두 스테파노를 유심히 바라보았는데, 그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처럼 보였다”(사도행전6,15)고 했습니다.

 

 그야말로 믿음을 간직하고 지킨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로움인지를 체험하려면 주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사람으로 서있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됩니다. 혹 지금 힘들더라도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루카21,16),하시는 주님의 말씀에 위안을 얻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어려움 속에서 진정한 나의 모습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시련을 견디어 내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렇게 시험을 통과하면, 그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화관을 받을 것입니다”(야고1,12).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송영진신부-


“몇몇 사람이 성전을 두고, 그것이 아름다운 돌과 자원 예물로 꾸며졌다고
이야기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루카 21,5-6)”

여기서 사람들이 성전을 보면서, 아름다운 돌과 자원 예물로 꾸며졌다고
이야기했다는 것은, 성전이 아름답고 훌륭하다고 감탄했다는 뜻입니다.
그 당시 예루살렘 성전은 보는 사람마다 감탄할 정도로 아름다웠고,
웅장했다고 전해집니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라는 예수님 말씀은,

아무리 아름답고 훌륭하고 웅장하더라도
하느님 뜻에 합당하지 않은 것들은 모두 허무하게 사라질 것이라는 뜻입니다.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라는 말씀은 ‘완전한 파괴’를 뜻합니다.

종말 후의 세상은 완전히 새로운 세상입니다.
“나는 또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
첫 번째 하늘과 첫 번째 땅은 사라지고 바다도 더 이상 없었습니다(묵시 21,1).”
‘완전히 새롭다.’는 것이 어떤 상태인지 확실하게 알 수는 없는데,
적어도 ‘하느님 뜻에 합당하지 않은 것들’은 모두 사라질 것입니다.
인간들이 자랑하는 업적들, 문명과 문화 등은,
그게 하느님 뜻에 합당하지 않은 것들이라면 모두 사라질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완전히 파괴된 것은 하나의 본보기가 됩니다.
하느님 뜻을 거스르는 성전은 허물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건물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죄가 문제입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스승님, 그러면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또 그 일이 벌어지려고 할 때에 어떤 표징이 나타나겠습니까?’(루카 21,7)”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라는 질문은,
겉으로는 “예루살렘 성전이 완전히 허물어지는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라는 질문이지만, 뜻으로는 “종말이 언제 옵니까?” 라는 질문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전이 허물어지는 일을 ‘종말의 사건’으로 생각했습니다.
“그 일이 벌어지려고 할 때에 어떤 표징이 나타나겠습니까?” 라는 질문은,
“종말을 미리 예고하는 표징은 무엇입니까?” 라는 질문입니다.
그런데 종말에 관한 질문은, 이미 앞의 17장 20절에서 나왔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또 ‘보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 하고 사람들이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17,20-21).”
이 말씀의 뜻은, “종말은 이미 시작되었다.
또 종말을 미리 알려 주는 표징은 없다.”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심으로써 종말이 시작되었습니다.
우리가 보통 말하는 종말의 날은 ‘종말이 완성되는 날’입니다.
그리고 그 날이 언제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마르 13,32).
또 그 날을 미리 알려 주는 표징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그 날이 언제인지 알려 주시지 않는다는 말과
그 날을 미리 예고하는 표징을 주시지 않는다는 말은 사실상 같은 말입니다.
어떤 표징을 보게 되면 그 날이 곧 종말이 완성되는 날입니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
그리고 너희는 전쟁과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더라도 무서워하지 마라.
그러한 일이 반드시 먼저 벌어지겠지만 그것이 바로 끝은 아니다(루카 21,8-9).”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흔히 ‘종말의 징조’ 라고 생각하는 일들을,
즉 가짜 그리스도, 전쟁, 지진, 기근, 전염병, 박해 등을 언급하시면서(8절-17절),
그런 일들이 ‘종말이 완성되는 날’의 표징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그것이 바로 끝은 아니다.” 라는 말씀은, “그 날이 마지막 날은 아니다.”,
또는 “그런 일이 ‘종말이 완성되는 날’의 표징은 아니다.” 라는 뜻입니다.
자기가 ‘재림 예수’ 라고 주장하는 사람들,
또 종말이 완성되는 날의 날짜를 알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옛날에도 많았고, 지금도 많이 있고, 앞으로도 많이 나타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또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자칭 재림 예수’들과 종말의 날짜를 말하는 자들은 모두 사기꾼들입니다.

그리고 전쟁의 경우, 종말처럼 생각되는 대규모의 참혹한 전쟁들은
인류 역사에서 자주 일어났고, 앞으로도 일어날 가능성이 있습니다.
종말의 재난이 전쟁의 모습으로 닥칠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 전쟁이 혹시 종말의 재난은 아닐까?” 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종말의 재난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종말의 재난은 누구나 그것이 종말의 재난이라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긴가민가해서 판단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면 그것은 종말의 재난이 아닌 것입니다.

여기서 “그러한 일이 반드시 먼저 벌어지겠지만”이라는 말씀은,
종말이 완성되기 전이나, 완성되는 그 날에 반드시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또는 일어나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 말씀은, 인류 역사에서 전쟁은 흔히 일어나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전쟁 자체가 종말의 표징은 아니지만,
신앙과 사랑을 증명하는 기회가 될 수 있고,
따라서 심판 때에 어떤 선고를 받게 될지를 알게 해 주는 표징이 될 수 있습니다.
‘참 행복’ 선언에서 예수님께서는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마태 5,9).”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전쟁을 원하는 자들과 일으키는 자들은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심판 때에 엄한 처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사랑과 평화입니다.
사랑으로 미움을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과
전쟁을 막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들입니다.)

< 종말이 완성되는 날이 언제인지, 그 날이 되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궁금해 하는 것은 잘못된 일은 아니고,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나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가?”를 반성하는 일입니다.
언제 무슨 일이 벌어지더라도, 즉 언제 그 날이 닥치더라도,
당황하지 않고 ‘기쁘게’ 맞이할 수 있는가?
피하거나 숨지 않고 예수님 앞에 자신 있게 설 수 있는가?>  


마지막 오심: 주님의 날

 -조욱현신부-


오늘 전례는 영광 중에 오실 그리스도의 마지막 오심’, 즉 야훼의 날, 세상의 마지막 날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그분의 오심은 하느님의 사랑의 힘의 결정적 승리를 의미하는 것이다.

 

1독서: 말라 3,19-20: 너희에게 승리의 태양이 비쳐오리라

1독서는 주님의 날에 있을 의인들의 승리를 예언하고 있다. ‘이라는 상징적 개념은 주님의 날을 묘사할 때 많이 사용되는 개념이다. 교만한 자들풀무불처럼 불이 타오르는 날검불처럼 타서 없어지고 말 것이며, 야훼께 충실한 사람들에게는 심판의 불이 빛나는 태양으로 나타날 것이다. 그러므로 심판이 드러나게 될 주님의 날은 분명히 그리스도의 날일 것이다. 즉 모든 것이 그리스도께 그 가치를 인정받게 될 것이다.

 

복음: 루카 21,5-19: 너희가 참고 견디면 생명을 얻을 것이다

오늘 복음은 예루살렘 성전의 웅장함과 아름다움을 보고 놀라는 것으로부터 시작되고 있다. 예루살렘 성전은 너무나 아름답고 웅장하여 예루살렘의 찬란한 모습을 다 보지 못한 사람은 아름다운 것을 보았다고 할 수 없고, 그 성소의 눈부신 장식을 보지 못한 사람은 예루살렘이라는 도시의 매력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이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성전의 파괴를 예고하신다. “지금 너희가 성전을 바라보고 있지만 저 돌들이 어느 하나도 자리에 그대로 얹혀있지 못하고 다 무너지고 말날이 올 것이다”(6). 그래서 제자들이 언제그런 일이 일어나고, 징조가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7), 예수께서는 광신적인 헛된 소리를 조심하라고 하신다. “많은 사람이 내 이름을 내세우며 나타나서 내가 바로 그리스도다!’ 혹은 때가 왔다!’하고 떠들더라도 그들을 따라가지 말라”(8). 오류를 믿게끔 하는 것은 기만이다. 모든 것이 복음인양 떠들어대는 것은 사기이다. !공부 중요!

 

그러나 그러한 징조를, 위기를 의식하더라도 두려워하지 말고 믿는 마음으로 차분하게 기다리는 것이 중요함을 말씀하신다. 마지막 때의 모든 불길한 징조 가운데서 한 가지 독특한 사실은 그 때에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박해를 당하게 되리라는 것이다. 바로 이 때가 복음을 증언할 때라고 하신다. 그리스도인은 참으로 종말론적 삶을 살면 살수록 그만큼 강해질 수 있다. “그 때야말로 너희가 나의 복음을 증언할 때이다. 이 말을 명심하여라. 그 때 어떻게 항변할까하고 미리 걱정하지 말라. 너희의 적수들이 아무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내가 주겠다...너희는 나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겠지만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참고 견디면 생명을 얻을 것이다”(13-19). 그러기에 그리스도인은 전쟁과 박해 속에서도 항상 희망을 가져야 한다. 그 때에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

 

참으로 종말론적 기다림이란 다른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하느님 나라의 마지막 한 조각까지 건설하기 위해 그들의 불행과 고뇌와 모순에 철저히 파고 들어가 함께 하는 것이다. 그 하느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마지막 때에야 충만히 완성된다는 것을 굳게 믿고 우리 신앙인들이 현재의 삶에 충실해야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현세의 삶의 순간들은 하느님 나라를 체험하는 구원을 체험하는 구체적인 장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세상의 빛과 소금 그리고 누룩의 역할을 다 해야 한다.

 

2독서: 2데살 3,7-12: 일하기 싫어하는 사람은 먹지도 마라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주님이 오심이 가까웠다고 이 지상의 현실을 멀리하며 계속 불안감 속에서 게으른 생활을 하지 않도록 사람들에게, “일하기 싫어하는 사람은 먹지도 말라”(10)고 말하고 있다. 바오로 사도는 이 말을 당시의 신자들에게 자주 하였으며, 자신이 그 모범을 보였다. 정말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기다리는 자세는 모든 사람들이 더욱 그분의 사랑에 마음의 문을 활짝 열 수 있도록 이 세상의 일에 보다 열렬히 참여하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항상 자신이 처한 위치와 상황에서 자신이 맡은 책임을 항상 성실히 수행하기를 원하신다. 그러한 삶 속에서 언제나 다가오시는 주님을 그 마음에 맞아드릴 수 있기를 바라신다. 우리는 이러한 깨어있는 삶 속에서 언제나 하느님 앞에 서 있는’, ‘살아있는그리스도인이 될 것이다. 지금 내가 있는 자리에서 하느님의 자녀로서 최선을 다하며 살아갈 수 있는 우리가 될 수 있도록 은총을 구하며 이 미사를 봉헌하자.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루카 21, 18)

-한상우신부-

받아들임의
여정이 인내의
여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인내를
가르쳐주십니다.

예수님의 길이
바로 인내로써
생명을 얻는 사랑의
길이었습니다.

우리를 위해
참고 견디는
인내입니다.

모든 생애에
필요한 십자가의
인내입니다.

인내로써
믿음을
배우게 됩니다.

인내로써
십자가의 길을
걷게 됩니다.

시련속에서도
주님께
가까워지게 하는
인내의 시간입니다.

참고 견딜수록
더 단단해지는
우리의 믿음입니다.

이 모든 순간에
감사하게 됩니다.

그래서 인내는
절망이 아니라
희망이며 무너짐이
아니라 다시 일어서는
용기입니다.

생명을 얻는
예수님의 이름이
인내의 이름입니다.

인내로써
생명을 얻는
인내의 자녀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참고 견디는
우리가 인내의
신앙인입니다.

인내하고
기다리는 은총의
주일되십시오.


-오상선신부-


연중 시기의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는 이즈음에 미사의 말씀들은 줄곧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 곧 종말을 떠올려 줍니다. 그리고 "그날"의 성패는 일상성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고 오늘의 말씀들이 거듭 일깨우고 있습니다.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루카 21,6).
몇몇 사람이 하느님 현존 장소이며 이스라엘의 자부심인 성전의 위용에 감탄하자 예수님께서 이처럼 이르십니다. 한치 앞도 모르는 인간들이 쌓고 꾸미고 치장한 결과물이 무참히 허물어진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그들이 어떻게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결국 실제로 이루어지지요.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또 그 일이 벌어지려고 할 때에 어떤 표징이 나타나겠습니까?"(루카 21,7).
그들이 우리도 궁금해 할 내용의 질문들을 쏟아냅니다. 이에 예수님은 거짓 메시아의 출몰, 전쟁과 반란, 지진과 기근과 전염병, 무서운 일들과 큰 표징 들에 대해 미리 예고하십니다. 여기까지 보면 꽤나 두렵고 험한 재앙들이긴 하지만 인류나 민족 전체를 대상으로 닥칠 일이라 각 개인으로서는 별로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아마도 어떻게든 비켜 갈 요행이 내 것이기를 바라는 막연한 기대감도 없지 않겠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사실 "이 모든 일에 앞서"(루카 21,12) 박해와 신문, 미움과 죽음까지 겪으리라고 하십니다. 그것도 믿고 가깝게 지낸 가족, 친척, 친구들에게 등돌림 당하고 죽게 되다니 천재지변이나 전쟁 예고보다 더 가슴이 서늘해질 것 같습니다. 이제야 실감이 나지요.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루카 21,18).
그런데 예수님께서 제시해 주시는 대응책은 참 단순합니다. 지극히 원론적인 말씀에 가깝지요. 뭔가 더 특별하고 확실한 방법을 콕 집어주셔야 할 것 같은데 그저 흔하디 흔한 "인내"라니요.

그런데 깊이 생각해보면 우리 편에서 인내 밖에 달리 취할 수 있는 선택지가 별로 없습니다. 꾸준히 주어진 일상을 채워나가며 십자가와 고통을 받아들이다보면, 박해도 증언의 기회가 되고 지혜와 언변도 주어질 겁니다.

제1독서에서 예언자는 "다가오는 그날"(말라 3,19)에 대해 선언합니다. 불붙는 날이 거만한 자와 악을 저지르는 자를 불살라서 뿌리조차도 남기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움의 태양이 날개에 치유를 싣고 떠오르리라"(말라 3,20).
주님은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희망을 약속하십니다. 하느님께 대한 경외심은 갑작스럽게 생겼다 사라지는 일회성 감정이 아닙니다. 경외는 지혜의 산물이며 그분을 알아모시는 항구하고 충실한 관계성의 열매지요. 악행을 거듭할수록 악에 무뎌져 더 큰 죄를 쌓아 가듯이, 주님을 경외하는 마음도 쌓이고 쌓여 덕인 줄도 모르게 그의 인성이 되고 영성이 되어 갑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테살로니카 형제들을 위해 자기들이 보여준 모범에 대해 솔직히 이야기하면서 권고합니다.

"묵묵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벌어먹도록 하십시오"(2테살 3,12).
이 특별할 것 없는 권고는 사실 교회 공동체를 이루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근간이 됩니다. 각자 받은 고유한 은사에 따라 소박하고 충실하게 개인의 소명을 채워가는 것을 의미하지요. 일상을 꽉꽉, 충실히 채워갈 때 헛된 허세나 기만에 빠지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특별할 것 없는 "지금 여기 오늘"에서 보물을 길어올리는 이들입니다.

종말이 언제 올지, 세상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내게는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닥칠지 우리는 모릅니다. 다만 "그날"이 우리의 일상 가운데 급습하리라는 것만 말씀을 통해 어렴풋이 짐작할 따름이지요. 지상에서 허락받은 삶을 나름 채워가던 모습 그대로 종말을 맞이할 것이고, 또 그 모습에 맞갖는 보상이 주어질 겁니다.

그렇다면 종말을 기준으로 비포(Before)와 에프터(After)는 별 차이가 없을 것 같습니다. 충실히 하느님을 경외하며 감사와 사랑과 정의와 자비로 영혼을 채운 이들은 그 모습대로 주님을 맞이해 일치를 이루는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겠지요. 회개를 미루고 탐욕과 욕정과 이기심을 채우느라 급급하던 이들은 사람의 아들이 오셔도 만족을 모르고, 더 채우고 더 쌓고 더 즐기려 승냥이처럼 헤매겠지요. 다른 게 아니라 그것이 곧 징벌일 것 같습니다.

"저는 하느님 곁에 있어 행복하옵니다"(영성체송).
"그날"이 오기 전에도, 또 "그날"이 온 뒤에도 이 고백이 일상이 되면 좋겠습니다. 지금 나는 어떤가요? 지금 하느님 곁에 있어 행복합니까? 십자가와 고통을 껴안은 채로 하느님 때문에 행복합니까? 그럼 "그날"은 두려움으로 맞이하게 될 날이 아니라, 이제껏 간직하고 누린 그 행복이 영원으로 연장되는 교차점이 될 것입니다. 그런 여러분을 축하합니다.-김찬선신부-

끝이 행복한 사람 
-김찬선신부-


"하나도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

지난 5월부터 저는 일을 우리 정동수도원 공사장으로 나가고 있는데
요즘 정동길이 마지막 찬란함을 뽐내고 있습니다.

은행나무 이파리의 노랑이 봄 개나리의 노랑과는 같으면서도
사뭇 다른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습니다.
봄 개나리의 노랑이 생기와 생성의 아름다움을 뽐낸다면
가을 은행나무의 노랑은 성숙과 소멸의 아름다움을 뽐내는 것 같습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은행나무를 좋아해서 제가 처음 작곡한 것도
소신학교 때 은행잎 떨어지는 것을 보고 그 느낌을 노래한 것이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를 볼 때나
바람에 이파리들이 화리락 떨어지는 것을 볼 때 '아!'하고 감탄이 나오고,
조금 더 감탄이 이어지면 '아! 참 아름답다.'는 탄성이 저절로 나오는데
저만 그런 것은 아니겠지요?

오늘 복음도 성전의 아름다움에 사람들이 감탄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아름다움에 넋을 잃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 돌들이 하나도 남지 않을 것이라고 초를 치십니다.
아무리 아름답고 아무리 강해도 다 끝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뭐든지 다 종말의 때가 있어서 그 때가 되면 나뭇잎은 떨어지고,
성전은 허물어지고, 사람이라도 예외가 아니어서 다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종말이 올 때 당황하거나 우왕좌왕하지 않으려면
종말이 있다는 것을 우선 알아야 하고 다음은 늘 인식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때가 왔을 때 당황하고 우왕좌왕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종말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인식하지 않고 사는 사람이겠습니다.

그런데 종말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다 알지요. 그렇지만 이런 사람은 있을 수 있을 겁니다.

종말의 때가 있다는 것은 아는데
종말의 때가 왔다는 것은 모르는 사람,
지금이 바로 그때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
또는 지금이 바로 종말의 때라는 것을 거부하는 사람은 있을 수 있습니다.

'내 나이가 어때서'라는 말을 들을 때 저는 여러 느낌이 교차합니다.
세월에 순응치 않고 청춘이라고 억지 부리는 것 같아 거부감이 들기도 하고
나이 먹었다고 우울하고 의기소침하게 살지 않고 나이를 먹어서도
활기차게 살려는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삶의 자세 같아서 좋게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종말의 때를 당황하지 않고 잘 맞이하고
소위 말하는 선종을 잘하려면 이 때에 순응을 하고 때에 맞게 살아야겠지요.
종말을 우울하게 여기지 않고 반대로 종말을 거부하듯 나대지도 않으면서.

그러나 우리 신앙인은 종말과 관련하여 신앙 없는 사람들과 달라야겠습니다.
죽음을 맞이하는 때가 아니라 하느님을 맞이하는 때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종말은 삭막한 종말이 아니라 인격적인 종말이어야 하지 않습니까?
아무도 없이 홀로 죽음을 맞이하는 종말은 얼마나 불행하고 비참합니까?
그러니 옆에 누구 한 사람이라도 있어야 하고 온 가족과 친구가 있다면
그 죽음과 종말은 복되다고 할 수 있고 호상이라고도 할 수 있지요.

그러나 우리 신앙인에게 가장 인격적인 종말은 가족 친지뿐 아니라
무엇보다 하느님 안에서 임종하는 것이고,
이런 죽음이 선종이고 성사적인 종말이지요.

사실 하느님 없이 맞이하는 종말은 인생이 끝장나는 멸망일 뿐입니다.
불행하고 비참한 인생은 하느님은 없고 고통뿐인 인생인데
그보다 더 불행하고 비참한 것이 하느님 없이 죽음을 맞이하는 인생입니다.

그러므로 평생 하느님을 외면하고 살았더라도 죽을 때 그것을 뉘우치고,
죽음이 아니라 하느님을 맞이하는 끝이 행복한 사람이 되라고 가르침을 받는
오늘이고 연중 마지막 시기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6년 11월 13일 연중 제33주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루가 21,5-19)


호연지기(浩然之氣)

-서강휘신부-


호연지기(浩然之氣). 천지간에 넓게 퍼진 올바른 기운이라는 뜻이다. 시작은 작은 샘물처럼 미약하다. 그러나 7월의 장마처럼 일순간 거대한 홍수를 일으키고는 어느새 말라버리는 그런 물줄기는 아니다. 의로움과 거룩함의 샘은 땅 속 깊은 물골에서 길러져 멈추지 않는 것. 처음에는 미약해 보이지만 그것이 냇가를 이루고 강을 이뤄 마지막엔 거대한 바다로 흘러가는 생명의 위대함이다. 
호연지기는 그래서 하루아침에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매시매초 자신 안의 하느님께 의지해 살아가는 사람에게 벌어지는 은총의 기적이다. 맹자는 이를 하늘로부터 받은 ‘의로움을 지속적으로 실천해 쌓아가는(집의(集義))’ 행위를 통해 몸에 익숙해지는 기운이라고 말한다. 이쯤 되면 그 사람은 외부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게 된다. 부동심(不動心)이다. 누가 뭐라 하든 제 멋대로 하는 고집불통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뜻을 제 몸으로 살아내서 스스로 욕심에 걸려 넘어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한결같은 마음, 일심(一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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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하느님을 볼 수 없습니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변한 우리의 삶입니다.  그것이 우리 가운데 있는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당신들 가운데 있습니다.”(루가 17, 21)

  하느님이 동기(動機)가 되어 우리의 삶이 변하면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나라라는 말씀입니다.

-서공석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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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움 받을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더 건전하고 친밀한 인간관계를 형성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미움 받을 용기를 지닐 수 있을까요? 미움은 나의 고통의 탓을 상대에게 돌리는 행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은 나의 탓이라고 여기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세상 모든 죄를 당신의 탓으로 여기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미워하고 십자가에 못 박는 것까지 당신 탓으로 여기신 것입니다. 이미 다른 사람을 미워할 마음이 없으니 다른 사람들이 당신에게 어떠한 해를 끼쳐도 상관이 없으셨습니다.

      사랑할 용기가 있어야 미움 받을 용기도 생기는 것입니다. 자신을 미워하려는 사람을 미워하겠다는 마음이 있다면 절대 미움 받을 용기가 생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미워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미워하지 않기 위해 미움 받을 용기를 포기하게 되면 정말 미운 사람들이 많이 생겨나게 됩니다. 미워하지 않을 용기를 얻으려면 모든 것이 나의 탓이라 할 줄 알아야합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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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하느님 곁에 있어 행복하옵니다"(영성체송).
"그날"이 오기 전에도, 또 "그날"이 온 뒤에도 이 고백이 일상이 되면 좋겠습니다. 지금 나는 어떤가요? 지금 하느님 곁에 있어 행복합니까? 십자가와 고통을 껴안은 채로 하느님 때문에 행복합니까? 그럼 "그날"은 두려움으로 맞이하게 될 날이 아니라, 이제껏 간직하고 누린 그 행복이 영원으로 연장되는 교차점이 될 것입니다.

-오상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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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의 때가 있다는 것은 아는데
종말의 때가 왔다는 것은 모르는 사람,
지금이 바로 그때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
또는 지금이 바로 종말의 때라는 것을 거부하는 사람은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 신앙인에게 가장 인격적인 종말은 가족 친지뿐 아니라
무엇보다 하느님 안에서 임종하는 것이고,
이런 죽음이 선종이고 성사적인 종말이지요.

-김찬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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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아들임의
여정이 인내의
여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인내를
가르쳐주십니다.

예수님의 길이
바로 인내로써 
생명을 얻는 사랑의
길이었습니다

.-한상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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