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19년 11월 16일 연중 제32주간 토요일

Margaret K 2019. 11. 15. 20:20

2019년 11월 16일 연중 제32주간 토요일 


하느님께서 택하신 백성이 밤낮 부르짖는데도

올바르게 판결해 주지 않으시고

오랫동안 그대로 내버려 두실 것 같으냐?

사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 
(루가 18,1-8)

 

Will not God then secure the rights of his chosen ones
who call out to him day and night? 
Will he be slow to answer them? 
I tell you, he will see to it
that justice is done for them speedily.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지혜서의 저자는, 주님의 자녀들은 해를 입지 않고 보호를 받는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는 뜻으로, 불의한 재판관에게 졸라대는 과부의 비유를 드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제1독서인 지혜서는 하느님의 전능하신 “말씀”이 행하신 업적을 노래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 말씀이 육을 취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고백합니다. 그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의 일에 관하여 말씀하십니다.예수님께서는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는 불의한 재판관도 줄곧 졸라대며 매달리는 과부의 청을 들어주는데,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시지 않은 채 미적거리시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이 이야기는 분명 제자들에게 낙담하지 말고 계속 간청하라고 권고하시는 말씀입니다.그런데 오늘 복음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과부가 청한 것은 다름 아닌 “올바른 판결”이었습니다. 성경에서 올바른 판결이란 하느님 뜻에 맞는 판결을 뜻합니다. 재판관이 불의한 자, 곧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자였지만, 과부는 그에게 하느님 뜻에 맞는 판결을 내려 달라고 청합니다. 결국, 불의한 재판관은 올바른 판단, 곧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이들이 내리는 판결을 내려 줍니다.여기서 한 가지 진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간청해야 할 것은 “올바른 판결”입니다. 하느님께 선택받은 이로서 하느님의 뜻에 맞는 올바른 것이 이루어지기를 간청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니 우리가 늘 올바른 것을 간청하였는지 되돌아보게 됩니다.나 자신의 이익과 욕심을 채우려고 하느님께 무엇인가를 청한 것은 아닌지, 나에게 득이 될 것이라 여기지만 결국 나와 공동체에게 해가 될 무엇인가를 하느님께 청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과연 나는 모두를 위하여 유익이 되는 것을 하느님께 청하고 있는지 묻게 됩니다. (염철호 요한 신부)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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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책에서 나무늘보에 대한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느리고 잠을 많이 자는 것으로 유명하지만 솔직히 거북이보다도 느리다는 사실은 저를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보통 70㎝의 크기를 가지고 있는 나무늘보는 1분에 20㎝ 정도밖에 움직일 수 없다고 합니다. 여기서 의문점이 하나 생기지 않습니까? 이렇게 느리다면 포식자들의 먹잇감이 되어 멸종의 위기를 겪어야 정상일 것만 같습니다.

나무늘보는 날카로운 이빨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독을 내뿜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느릴 뿐입니다. 하지만 이 느린 점이 오히려 다른 동물의 눈에 잘 띄지 않는다고 합니다. 또한, 거의 움직이지 않아서 몸에 이끼까지 자생할 정도라고 합니다. 이 이끼가 자연스럽게 보호색 역할까지 하지요. 여기에 주식은 다른 동물이 잘 먹지 않는 나뭇잎입니다. 느리다는 것이 큰 걸림돌인 것 같았지만, 이 느림이 지금까지 멸종하지 않고 살아 있게 하는 나무늘보의 가장 큰 장점이 되었습니다.

자신의 단점이라 생각했던 것이 오히려 나를 특징짓는 그리고 나를 성장시키는 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나무늘보를 통해서 깨닫게 됩니다. 자신의 처지에서 스스로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포기할 이유를 찾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있는 이유를 찾아 나갈 때 분명히 삶은 내 편이 되어서 큰 기쁨과 행복의 시간을 갖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 나아갈 때도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한두 번 기도하고서 “주님께서는 들어주시지 않는다.”라고 포기한다면 결국 그 자리에서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도 자신이 할 일을 찾아서 해나간다면 그를 통해 또 다른 삶을 주님께서는 선물해 주십니다.

주님께서는 행복한 삶을 얻기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그 기도를 어떻게 해야 할까요? 길게 하는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끊임없이 하는 기도였습니다. 말을 많이 하면 더 잘 들어주시는 줄로 생각하고 많은 말로 기도하지 말 것을 명령하십니다. 그러면서 불의한 재판관의 이야기를 전해주시지요.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한 재판관이었지만 성가시게 계속 졸라 대는 모습에 어쩔 수 없이 들어주게 된다는 것을 이야기하십니다.

여기서 생각해 볼 것은 하느님과 비유에 나오는 재판관과의 비교입니다. 불의한 재판관처럼 하느님도 불의하실까요? 아닙니다. 하느님은 재판관과 정반대의 모습으로, 정의롭고 선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기도하는 사람의 청을 얼마나 더 잘 들어주시겠습니까?
인생의 소나기 먹구름 뒤에는 언제나 변함없는 태양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그러한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채규철).



쉽다는 이유로...

예전에 어떤 분께서 몸에 좋다면서 어떤 물이 담긴 물통을 주셨습니다. 여러 가지 약재를 우려서 만든 물인데 몸의 면역력을 키우는데 최고라는 것이었습니다. 맛이 궁금해서 물통의 뚜껑을 여는 순간 인상을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냄새가 너무 고약했습니다. 여기에 들어간 약재 중에는 오징어 말린 것도 들어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비린내가 심하게 났던 것이었습니다.

이분의 정성을 생각하면 어떻게든 먹어야 하겠지만, 하루에 세 번 이상을 무조건 먹으라는 명령을 따르기에는 너무나 힘든 물이었습니다. 이런 고충을 동창 신부에게 이야기했더니 이런 말을 해줍니다.

“먹지 마! 이 물 마시는 것보다 30초씩 손을 닦는 것이 더 효과가 있어. 30초만 소비하면 손의 나쁜 세균이 90% 이상 없어진다고 하잖아. 손만 잘 닦아.”

우리는 어렵고 힘든 것에만 길이 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 곁에 이미 길은 놓여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단지 저 멀리에 있는 것, 그리고 남의 길만 바라보고 있기에 나의 쉬운 길을 놓치는 것이 아닐까요?

건강을 지키는 손쉬운 방법이 참 많습니다. 그러나 쉽다는 이유로 효과가 없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죄송하지만 청하는 것을 멈출 수 없을 때 믿음의 기도가 된다

-전삼용신부-


어제 젊은 나이에 암으로 세상을 떠나신 최 루카 형제님이 스테파니아 반장님께 카톡으로 보낸 글들을 소개시켜 드렸습니다. 오늘은 그분이 병자성사를 받으시며 느낀 ‘기도에 대한 체험’을 함께 나누어보고자 합니다.

      “오늘 병자성사 시작 직전에 문득 제가 저지른 잘못이 제 머리를 스쳤습니다.

      저는 영과 혼과 육을 포함하여 제게 있는 모든 것을 주님께 봉헌하였고, 늘 그렇게 되새기며 지냈습니다. 불면의 밤이 계속되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지쳐갔을 때, 또는 참을 수 없을 만큼의 통증이 왔을 때 ‘주님, 저는 모든 것을 주님께 드렸고, 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물론 이 몸뚱이도 당연히 제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일 뿐이요, 저는 살아가는 동안 그저 주님의 것을 선량하게 관리할 뿐입니다. 그러니 제가 잠을 못자거나, 참기 어려운 통증이 오면 그것은 주님께 큰 손해(?)입니다. 그러니 주님 뜻에 다 맡기니 알아서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라며 투정(일종의 항의??) 섞인 기도를 하곤 했습니다. (‘이런 기도를 해도 될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초심자이니 감안해 주실 것이고, 저의 깊은 속마음까지 꿰뚫는 분이시니, 무슨 기도를 못하겠냐는 마음으로 고했습니다)

      그러면, 주님은 저를 재워주셨고, 통증을 없애주셨습니다. 물론 저의 기도에 대한 응답은 언제나 저의 잘못에 대한 가슴 깊은 회개가 있었을 때에만 그러한 응답이 있었습니다.

      오늘 병자성사 전, 갑자기 제가 주님께 봉헌한 저의 육신을 그리고 영과 혼을, 그동안 너무나 소홀히 다루었다는 생각에 눈물이 흘렀습니다. 조금 피곤하다는 핑계로 운동을 소홀히 하였고, 특히 기도와 성경읽기를 최근 들어 너무나 소홀히 하고 있는 제 모습을 깨닫고는 참회의 눈물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또 다시 제 기도에 바로 응답을 주신 것 같습니다. 제 왼쪽 복부에 기분 나쁜 통증(?) 같은 것이 있었는데, 성사 중에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감사하고 또 감사한 일이지요.”

      루카 형제님은 세례 받으신 지 얼마 안 된 분이지만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참으로 잘 아시는 분이셨습니다. 주님께 기도로 무언가를 청할 때 그분이 당연히 그런 은총을 주셔야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분께서 이미 많은 은총을 주셨음에도 감사하지 못한 자신을 먼저 회개합니다. 이미 너무 많이 받았기에 더 청하기 민망하고 죄송하지만 청하지 않을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청하니 주님은 이런 경우엔 들어주지 않으실 수 없으십니다.

      제가 강론을 공유하게 된 것도 유학 때에 저에게 강론을 원했던 몇 분들 때문이었습니다. 해외에서는 특강 같은 것이나 다른 신부님의 말씀을 들을 기회가 적기 때문에 몇 번 저를 만나신 분들이 귀찮더라도 메일로 강론을 보내주기를 청하셨습니다.

      만약 그분들이 “당신은 사제이니까 당연히 목마른 양들에게 양식을 보내주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라고 말했다면 묵상을 공유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들은 제가 공부하러 나온 입장에서 매일 묵상을 써서 보내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청하면서도 매우 미안해 하셨습니다. 그러면서도 청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저도 사제로서 당연히 강론을 나누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힘든 일이긴 했지만 기꺼이 매일 강론을 올려드렸습니다.

      공부를 하면서 강론을 매일 쓰는 것은 마치 피를 말리는 것처럼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피의 값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면 기꺼이 흘리고 싶었습니다. 하느님께서도 우리에게 그런 마음이실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청하는 것은 성령의 은총입니다. 성령은 하느님의 피입니다. 우리는 그 피를 청할 때 죄송한 마음이지만 그것이 없으면 안 되는 것을 알기에 어쩔 수 없이 청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청할 때 은총을 충만히 받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한 과부가 재판관을 귀찮게 하는 비유말씀을 해주십니다. 그 과부처럼 지치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당신께서 세상에 오실 때 그 과부와 같은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며 가슴아파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당연히 주셔야 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없는 성령을 주시고자 하십니다. 기도는 그 성령을 달라고 청하는 것이고, 하느님은 그 성령을 주실 때 죽을 듯한 고통을 당하십니다. 그래도 그 가치를 알고 청하는 사람이라면 언제든 내어주실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기도로 받는 은총은 하느님의 피입니다. 이미 받은 것에도 너무 감사하지만 그 은총이 조금이라도 끊기면 살 수가 없기에 청할 수밖에 없을 때 성령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 은총의 필요함이 절실할 때 청하는 것을 멈출 수 없습니다. 그런 죄송하면서도 멈출 수 없는 기도가 은총을 얻게 하고 우리의 믿음을 증명합니다.


-조재형신부-


동창 신부님이 서울에서 온다고 했습니다. 공항으로 마중 나가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잘 움직이던 차였습니다. 공항 가는 날, 엔진 오일을 교체하라는 표시가 났습니다. 간단한 문제인 줄 알고 정비소에 갔습니다. 정비소에서는 엔진 오일이 세고 있었다고 합니다. 정기 검사를 받아야 하는데 받지 않았다고 합니다. 차량을 정비하는데 하루는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차를 맡기고, 차를 빌려서 공항으로 가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다른 문제가 생겼습니다. 운전 면허증이 정비소에 맡긴 차에 있었습니다. 면허증 없이 차를 운전하는 건 불법 운전이 될 수 있다고 합니다. 걱정이 가득한데 고마운 분이 나타났습니다. 저의 사정을 아시고, 공항으로 함께 가겠다고 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 천사를 보내주셨습니다. 덕분에 동창 신부를 공항에서 잘 만났습니다. 동창 신부님 덕분에 차에 문제가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혹시 모를 더 큰 사고를 미리 방지할 수 있었습니다. 동창 신부님 덕분에 고마운 이웃을 만났습니다.

 

생각해보니 제게는 천사가 많았습니다. 지난여름입니다. 스위스 여행을 했습니다. 기차에서 지갑을 분실했습니다. 카드, 면허증, 신분증을 잃어버렸습니다. 현금도 잃어버렸습니다. 함께한 일행들은 저보다 더 걱정해 주셨습니다. 하루 지나니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그래도 여권과 스마트폰은 분실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새 지갑도 얻을 수 있었고, 헤어질 때는 약간의 도움도 받았습니다. 저의 세례명이 천사인데 천사가 되어 주기보다는 천사의 도움을 더 많이 받았습니다.

 

신자분들이 제게 부탁하는 것들은 몇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자녀들의 혼인성사 주례를 부탁하기도 하고, 미사를 부탁하기도 하고, 축성을 부탁하기도 합니다. 가끔 글을 부탁하기도 하고, 강의를 부탁하기도 하고, 면담을 부탁하기도 합니다. 별일이 없으면, 제가 할 수 있으면 그런 부탁을 들어 드리는 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간절히 청하면 들어주실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자비로우시고, 사랑이 크시기 때문입니다. 많은 경우에 우리가 미안해서, 양심에 부끄러워서 하느님께 청을 드리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전에 읽었던 시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가고 오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더 기다리는 우리가 됩시다.

더 많이 사랑했다고 해서

부끄러워할 것은 없습니다.

더 오래 사랑한 일은 더군다나

수치일 수가 없습니다.

 

요행히 그 능력이 우리에게 있어

행할 수 있거든

부디 먼저 사랑하고 더 나중까지

지켜주는 이가 됩시다.”

 

신앙인이라면 가져야 할 삶의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먼저 사랑하고, 더 오래 기다려준다면 힘들고 어려워도 바로 그런 곳이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이고, 바로 그런 곳이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과부의 끈질긴 기도가 재판관의 불의와 사악함을 자비로 바꾸어놓았습니다!

 -양승국신부-

 

불의하고 매정한 재판관과 끈질긴 과부가 한 판 붙었습니다. 재판관과 과부 둘 다 고집이 하늘을 찔렀습니다. 그런데 과부가 더 집요하고 고집스러웠습니다. 결국 과부가 판정승을 거두었습니다. 승리의 비결은 끈질김이었습니다. 결국 과부의 끈질긴 기도가 재판관의 불의와 사악함을 자비로 바꾸어놓았습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우리 가운데 와 있지만, 아직 완성된 것이 아닌 상태에서, 승리에 찬 종말을 기다리며 기도하는 이 중간 시기에, 그리스도인들은 다양한 박해와 고통 앞에 서게 됩니다. 그날이 너무 더디오는 것 같고, 주님은 너무 멀리 계시는 듯한 느낌에서 오는 실망과 좌절감이 상당합니다.

 

 이런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예수님의 위로와 격려의 말씀이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입니다. 비유는 기도할 때, 대충, 적당히 기도할 것이 아니라 끈질기게, 집요하게, 목숨걸고, 끝까지 물고 늘어지며 기도하라고 권고합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예루살렘에는 대사제와 70여명으로 구성된 최고의회격인 산헤드린이 설치되어 있어서, 절차에 따른 재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방 소도시나 시골에서는 대체로 회당을 지키는 율법 교사가 재판관 역할까지 도맡았습니다.

 

 유산이나 금전 관련 소송이 발생했을 때, 공인 재판관들은 재판을 열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불의한 재판관은 무관심하고 심술까지 궂어, 과부의 재판을 도와주고 싶지 않았습니다.

 

 과부는 재판만 열리게 되면 이길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재판관의 마음을 움직이게 할 수 있을 것인가?’가 과제였습니다. 과부는 뇌물을 제공할 처지도 못되었습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몇번을 거절 당한다 할지라고, 가고 또 가고, 청하고 또 청하고,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것뿐이었습니다. 마치 투견장에 들어간 큰 불독 한 마리처럼 말입니다.

 

 그녀의 집요한 압박에 재판관은 점점 그녀 존재 자체가 귀찮아지게 되었습니다. 틈만 나면 찾아와서 징징거리며 졸라대니, 스트레스가 점점 치솟았습니다. 과부가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파악한 재판관은 마침내 두손 두발 다 들고 만 것입니다.

 

 과부의 끈질김 앞에 불의한 재판관도 두 손 두 팔 다 들고 도움을 주었듯이, 하느님께서도 우리가 끈질기게 간청할 때 절대로 나몰라라 하지 않으신다고 가르칩니다.

 

 때로 우리를 좀 기다리게 하실지언정, 때로 우리의 조바심을 유발시키실지언정, 절대로 우리의 청을 거부하지 않으심을 믿어야겠습니다. 청하는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도우심에 대해 손톱만큼의 의심도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기도할 때, 절대로 낙심하지 말아야겠습니다. 부서진 마음과 꺽인 영을 안고 밤낮으로 청하고 또 청해야겠습니다. 그러나 끈질기게 기도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던져야 할 질문이 한 가지 있습니다. 과연 무엇을 끈질기게 청하고 물고 늘어질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의 간절한 기도 지향들을 읽어보며, 어이없을 때가 있습니다. 이런 기도 지향을 보시고 하느님께서 어떻게 생각하실까? 걱정될 때도 많습니다. 우리의 기도 역시 좀 더 큰 기도, 더 하느님 뜻에 맞갖은 기도, 더 영적인 기도로 성장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이 땅 위에 이루어지기를 청하는 기도, 내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구하는 기도, 아버지의 나라가 우리 가운데 빨리 임하시기를 간구하는 기도, 고통과 십자가, 실패와 상처 속에서도 낙담하지 않고 희망하기를 바라는 기도...


기도는 지속성이 있어야 한다

-반영억신부- 

 

“기도는 지속성이 있어야 합니다. 비록 잘못에 떨어졌다 할지라도 기도하기를 그쳐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그 잘못에서 벗어나 수 있게 하는 유일한 힘은 꾸준히 계속되는 기도를 통해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예수의 성녀 데레사). 자신의 기도가 들어지지 않을 때나 지치고 싫증이 나서 그만두고 싶을 때도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그때야말로 기도가 필요한 때 입니다. 그러므로 끈기 있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응답해 주십니다. 다만 우리가 원하는 때, 원하는 방법으로 주시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인내가 필요합니다. 기도는 하면 할수록 더 잘하게 됩니다. 기도를 자주함으로써 기도를 배우게 됩니다.

 

 우물쭈물, 어영부영, 할까? 말까? 망설이지 말고 기도하십시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필리4,6-7). 프란치스코 교황은 묻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빛을 낼 수 있도록 해 주는 건전지 역할을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간단합니다. 기도입니다." 그리고 기도는 진정한 것이어야 합니다.

 

 사실 기도를 하지 않는 사람은 어느 누구도 기도의 참 맛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알베리오네). 그리고 “우리는 주님께서 기도하신 바와 같이 기도하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방법대로 기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오늘 복음은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거들떠보지 않는 사람이지만 과부의 끈질긴 간청을 거절하지 못하고 올바른 판결을 내려준다는 이야기 입니다(루가18-4-5). 끈질긴 기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동시에 마음을 다해 청하면 반드시 들어주신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그러므로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청을 들어주신다는 것을 확인해야 하겠습니다. 야고보사도는 말합니다. “여러분이 가지지 못하는 것은 여러분이 청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청하여도 얻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욕정을 채우는 데에 쓰려고 청하기 때문입니다”(야고4,2). 그렇다면 떼를 써야 하지만 억지를 부려서는 안 되겠습니다. 기도는 내 뜻을 관철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며 순응하는 것입니다. 절실함에서 우러나오는 끈기로 기도하는 한 주간되시기 바랍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조욱현신부-


복음: 루카 18,1-8: 소원대로 판결해 주어야지

예수님께서는 복된 삶을 얻기 위해 기도하라고 하신다. 거기에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1)고 하신다. 그러면서 불의한 재판관에게 계속 졸라 대어 결국 자신의 말을 듣게 만든 과부의 예를 드셨다. 그 여자가 재판관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정이나 동정심에 호소해서가 아니라, 지치지 않고 졸라댔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도 우리가 항구하게 기도하면 자비롭고 의로우신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들어주신다는 것이다.

 

재판관과 과부, 둘 다 고집스러운 사람들이다. 그러나 과부의 끈질긴 기도가 좀 더 고집스러웠다.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는 불의와 인간을 업신여기는 사악함을 과부의 끈질긴 청원이 이겼다. 과부의 끈질김이 재판관의 불의와 사악함이란 두 나뭇가지를 변화시켜 그 성격과는 맞지 않는 달콤한 열매를 맺게 했다. 불의한 재판관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여자의 억울함을 풀어 주었다.

 

우리도 낙심하지 않고 끊임없이 기도한다면 하느님의 은총과 정의가 우리의 본성에 맞는 열매를 얼마나 많이 맺게 하겠는가? 하느님께서는 당신께 간구하는 사람들의 청을 얼마나 잘 들어주실지 깨닫기를 바라신다. 정의가 우리를 변호하고 은총이 우리에게 생기를 불어넣게 하면 억눌린 자들은 정당한 보상으로 정의의 열매를 받고, 환난 속에 있는 이들에게는 은총의 열매가 생기를 줄 것이다.

 

가난한 과부가 끈질기게 졸라대니 사악하고 불의한 재판관조차도 결국 그의 청을 들어주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우리를 모른 척 하지 않으신다는 것은 너무나 확실하다. 우리가 원하는 때가 아니라, 당신께서 원하시고 더 좋은 때에 들어주실 것이다. 나에게 필요한 것을 나보다 더 잘 아시는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부서진 마음과 꺾인 영을 안고 기도해야 한다. 당신이 원하시는 때에 더 좋은 방법으로 들어주실 것이다.

 

사람들은 의로움의 말씀을 팔아넘기고 많은 사람이 건전한 신앙을 버리게 만든다. 악마의 손에 놀아나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의 입이 아니라, 자기들 마음에서 나오는 대로 지껄일 것이다. 주님께서는 이것을 예고하시고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8)고 하신다. 그분은 모든 것을 알고 계셨다.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갈 것이라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신다. 마지막 때에 옳고 흠 없는 믿음에서 떨어져 나가는 사람이 생길 것이다. 사람을 속이는 영들을 따라가 양심이 마비된 거짓말쟁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일 것이다(1티모 4,1-2) 그러나 반대로, 우리는 하느님의 충실한 종으로서, 그분의 영광을 거스르는 자들의 사악함과 유혹에 흔들리지 않게 해 주시기를 기도하며 그분께 가까이 다가가야 한다.

 

항상 기도하는 자세를 갖도록 하고 그 기도가 하느님의 뜻에 합당하고 또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기도가 되도록 해야 하겠다. 내가 원하는 대로보다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으로 나에게 풍성히 이루어주시도록 맡겨드리는 자세를 가지고 기도하며 그분께 나아가도록 하자.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루카 18, 4)

-한상우신부-

기도도
낙심한 마음도
하느님을
향합니다.

우리의 아픔
우리의 억울함에

함께 아파하시고
함께 들어주시는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각자에게 맞는
올바른 판결을
내려주시는
분이십니다.

세상에서 가장
간절한 이름은
간절한 기도입니다.

산다는 것은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간절함과
절박함 속에서
우리 삶을 만나고
하느님을 만납니다.

그러고보니
가장 향기로운
마음또한
기도입니다.

삶과 죽음 사이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우리가
있습니다.

끝내 우리를
지켜주시고
사랑하시는
하느님이 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의로운
재판관이시며
지체 없이 우리에게
오시는 자비의
하느님이십니다.

사랑의 믿음을
키워나가는 기도의
위령성월 되십시오.

올바른 재판관이신
주님을 알고 있는
믿음이 올바른
우리의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하느님과
우리를 이어주는
가장 확실한 관계임을
믿습니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들은 다양한 주제들 너머로 구원을 이야기합니다.

"저와 저의 적대자 사이에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십시오"(루카 18,3).
예수님께서 비유 속에 재판관과 과부, 두 사람을 등장시키십니다. 재판관은 힘과 권력을 지닌 기득권자에 강자인 반면, 과부는 가장 약하고 힘 없는 존재를 대변합니다. 그런 과부가 "줄곧 그 재판관에게 가서 졸랐다"고 합니다. 그녀가 바란 것은 "올바른 판결"입니다.

"올바른 판결"(루카 18,3.5.7.8)이라는 말씀은 이 대목 안에 네 차례나 나옵니다. 이는 졸라대는 사람에게 유리한 판결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맞는 판결을 가리키지요. 어쩌면 이 과부는 대담한 배팅을 한 것입니다. 아무리 스스로 자신이 옳다고 여겨도 양쪽 입장과 정황을 듣고 공정히 판단해서 내려야 하는 "올바른 판결"이 꼭 재판 청구인에게 유리하게 돌아간다는 보장은 없으니까요.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시겠느냐?"(루카 18,7)
비유 속의 그 불의한 재판관도 결국 과부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는데, 공정하고 정의로우신 하느님께서야 어련하시겠냐고 하십니다. 귀찮을 정도로 졸라대면 하느님도 사람도 안중에 없는 재판관도 버틸 재간이 없는 것처럼, 하느님도 "밤낮으로 부르짖는" 청원 앞에서 당신 귀를 활짝 여시리라는 말씀일 것입니다.

여기까지 보면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루카 18,1)는 초대에 충실한 내용입니다. 우리는 바라는 바를 주님께 지치지 않고 청해야 합니다. 기도는 들어주실 때까지 청하라는 말도 있으니까요.

그런데 잠시 이 "올바른 판결"에 대해 숙고해 봅시다. 우리가 바라는 것이 주님 보시기에 꼭 올바르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나빠서가 아니라 더 멀리 더 넓게 보지 못하는 근시안적 한계와 본능적인 자기중심성 때문입니다. 이는 죄라기보다 지극히 인간다운 한계입니다. 우리는 전지전능하지 않으니까요.

그렇다면 하느님의 고민이 깊어지실 것 같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바라는 것의 진의를 꿰뚫어 보시기에 "진짜로" 우리에게 필요하고 유익하고 선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다. 그래서 당신의 "올바른 판결"이 지금 당장 기도한 이의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음을 감수하셔야 합니다. 실망하고 돌아설 그의 반응까지 각오하셔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도 그분은 "올바른 판결"을 뒤집으실 수 없습니다. 그분이 곧 진리시니까요. 그분은 감언이설로 포장해 우리 환심을 사려고 하시기보다, 당신이 우리를 잘 알고 계시고 또 사랑하신다는 것을 우리가 깨닫게 되기를 기다리십니다. 원하는 바를 얻지 못한 이들이 쏟아붓는 온갖 오해와 실망과 비난을 묵묵히 들으시며 감내하십니다.

사실 "올바른 판결"은 청한 이가 "올바른 판결"이라고 믿고 수긍하고 받아들일 때 완성됩니다. 그가 거부하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에게는 영원히 잘못된 응답으로 남을 수밖에 없을 테니까요.

여기가 바로 "믿음"이 필요한 대목입니다. "올바른 판결"은 우리에게 유리한 판결이 아니라 그야말로 하느님의 진리와 자비와 정의에 비추어 딱 알맞는 판결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내려 주시는 판결은 모두 올바르다는 믿음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그분은 올바르지 않은 것을 하실 수 없으신 하느님이시니까요.

우리에게 주신 기도의 응답이 "올바른 판결"이라 인정하는 것은 체념이나 자포자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매우 적극적인 수용과 믿음의 증언입니다. 당장 우리에게 이익이 되건 그렇지 않건, 또 그렇지 않아 보이건 하느님의 응답은 늘 옳다고 믿는 신앙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루카 18,8)
오늘 복음 대목에서 "기도"가 언급되기는 했지만 문맥상 앞에서는 "사람의 아들의 날", 즉 종말에 대한 말씀이 이어졌지요. 그리고 여기서 잠시 기도 이야기를 하시는 듯하더니 결론에서는 다시 "사람의 아들이 올 때"를 언급하십니다. 그날의 관건은 "믿음"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바라는 바에 대해 관심이 많으십니다. 저마다 부족한 우리가 하느님을 향해 가는 여정에서 모자라고 결핍된 것을 채워 주고 싶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당신과 하나 될 그 때를 위해 우리를 완성에 이르도록 차곡차곡 이끄시지요.

제1독서에 잘 드러나 있듯이, 그분은 우리를 구하시기 위해 "온 피조물의 본성"(지혜 19,6)까지도 바꾸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물이 마른 땅이 되고 홍해는 장애물 없는 땅이 되고 거친 파도는 풀 많은 벌판이' 되었지요. 이처럼 친히 창조하신 피조물의 본성을 뒤집어 흔드신 일시적 혼돈의 이유는 오직 하나, 당신 백성의 구원이었습니다. 자유와 해방, 즉 진정한 창조 질서를 회복하고 복원시키기 위한 기적이었습니다.

우리를 위해 그런 엄청난 기적도 일으키실 수 있는 하느님께서 지금 여기서 우리의 간절한 청에 "올바른 판결"로 응답하십니다. 그러니 이 응답이 당장 입맛에 맞지 않을 수 있지만, 지금 우리에게 꼭 알맞는 맞춤형 응답임을 믿고 감사해야 합니다.

누군가에게서 이런 고백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한때는 좋은 일에 대해서 하느님께 감사하고 궂은 일에 대해서는 주님께 서운했습니다. 그러다가 신앙이 좀 자라고 나서는 욥처럼 '우리가 하느님에게서 좋은 것을 받았다면 나쁜 것도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욥 2,10)느냐고 고백하며 기꺼이 받아들이려 노력했지요. 그런데 산전수전을 겪으며 지내던 어느날 이런 기도가 제 입에서 흘러나왔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은 다 좋은 것이다!'라고요. 인간적인 눈으로 보면 불운이고 고통이고 실패고 징벌같지만 그분께서 주시는 건 다 좋은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좋은 분이시라 좋은 것밖에는 내어놓으실 수 없는 분이니까요.

이런 믿음으로 주님의 응답을 "올바른 판결"이라 인정해 드릴 때 비로소 이 세상에 그분의 진심이 통하게 됩니다. 사람의 아들이 올 때까지 이 믿음을 견지하는 이는 복됩니다. 이미 진심이 통한 그와 주님은 한눈에 서로를 알아볼 수 있을 테니까요. 이미 닮은 꼴이 된 그의 존재가 곧 구원일 테니까요.

강요성 기도?  
-김찬선신부-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

오늘 기도에 대한 주님의 가르침에서 핵심어는
'낙심하지 말고'와 '끊임없이'가 아닐까 생각을 봅니다.
그런데 오늘 비유와 연결시켜 볼 때 끊임없이 기도한다는 것은
계속해서 졸라대고 심지어 떼까지 쓰라는 말일까요?
실제로 과부는 재판관에게 졸라댔다고 복음은 얘기하고 있잖아요?

그런 것은 아닐 거고, 낙심하지 말라는 말씀을 고려하면
계속해서 간절히 청하라는 뜻일 겁니다.
그렇다면 졸라대고 떼쓰는 것과 간청하는 것은 어떤 차이일까요?

졸라대거나 떼쓰는 것은 상대가 요청을 들어주지 않겠다고 하는데도
내가 원하는 것을 들어줄 때까지 계속 강요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 중에도 오늘 주님 말씀을 잘못 이해하고
이런 강요성의 기도를 하는 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오늘 비유에서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인간은 우습게 여기는 재판관도
떼쓰면 들어주는데 재판관보다 좋은 분이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은
마음 약해서 우리가 계속해서 떼쓰면 들어주실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것은 큰 착각입니다.
우리 인간은 이기적이기에 귀찮으면 안 들어줘야 할 것도 들어주지만
하느님은 사랑이시기에 안 들어줘야 할 것은 당신이 귀찮아도 끝까지
들어주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진리이시기 때문입니다.

진리에 어긋나는 것을 봐주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리고 진리에 맞갖도록 하는 것이 오히려 사랑이고요.
노자가 말하기를 천지불인天地不仁이라고 하였지요.

천지자연의 이치를 거스를 때 천지는 결코 인자하지 않다는 뜻인데
하느님도 진리와 정의에 어긋나면 벌을 주시지 눈감아 주시지 않고,
아무리 우리를 사랑을 하셔도 진리와 정의에 어긋나는 것을
들어주실 수 없기에 그래서 아무리 졸라대고 떼써도 들어주시지 않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말씀하신 대로
불의한 사람에게는 정의로운 사람이 되게 해 주는 것이 사랑인 거지요.

그래서 오늘 말씀에서 '올바른 판결'이라는 말을 또한 주목해야 합니다.
과부는 지금까지 불의한 사람들에 의해 희생을 당하였고
그래서 그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재판관들에게 얘기했지만
재판관들 또한 불의하여 지금까지 그 억울함이 풀리지 않았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또 다른 재판관을 찾아간 것이고,
마지막이기에 들어줄 때까지 끊임없이 졸라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는 졸라댈 필요가 없습니다.
말을 꺼내기도 전에 필요한 것을 아시는 하느님이시기에
진리와 정의에 어긋나지만 않으면 다 들어주실 것이고,
특히 가난한 사람의 억울한 사정을 못 본 체 않으십니다.

문제는 언제 어떻게 간청을 들어주시는지 바로 그것입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청하는 즉시 들어주시지 않는다고 느끼고 
청하는 그대로 들어주시지 않는다고 느낍니다.

여기서 하느님 사랑에 대한 우리의 믿음이 필요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으로 들어주시기도 하고 사랑으로 안 들어주시기도 합니다.
들어주셔도 사랑이고 안 들어주셔도 사랑이라는 말이고,
빨리 들어주셔도 사랑이고 늦게 들어주셔도 사랑이라는 말이며,
청한 그대로 들어주셔도 사랑이고 달리 들어주셔도 사랑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끊임없이 기도한다는 것은 이 하느님의 사랑을 믿지 못하고
강요성 떼쓰기나 졸라대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사랑을 믿기에 좀 늦어져도 낙심하지 않고 희망을 두는 것입니다.

낙심이란 희망 포기와 다른 말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니 빨리 안 들어주신다고 낙심치 않고
원하는 대로 안 들어주신다고 삐지지 않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7년 11월 18일 연중 제32주간 토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하느님께서 택하신 백성이 밤낮 부르짖는데도 올바르게 판결해 주지 않으시고 오랫동안 그대로 내버려 두실 것 같으냐? 사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 (루가 18,1-8)


기도는 내 뜻을 관철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며 순응하는 것입니다.

-반영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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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와 저의 적대자 사이에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십시오"(루카 18,3).

 잠시 이 "올바른 판결"에 대해 숙고해 봅시다. 우리가 바라는 것이 주님 보시기에 꼭 올바르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나빠서가 아니라 더 멀리 더 넓게 보지 못하는 근시안적 한계와 본능적인 자기중심성 때문입니다. 이는 죄라기보다 지극히 인간다운 한계입니다. 우리는 전지전능하지 않으니까요.

누군가에게서 이런 고백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한때는 좋은 일에 대해서 하느님께 감사하고 궂은 일에 대해서는 주님께 서운했습니다. 그러다가 신앙이 좀 자라고 나서는 욥처럼 '우리가 하느님에게서 좋은 것을 받았다면 나쁜 것도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욥 2,10)느냐고 고백하며 기꺼이 받아들이려 노력했지요. 그런데 산전수전을 겪으며 지내던 어느날 이런 기도가 제 입에서 흘러나왔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은 다 좋은 것이다!'라고요. 인간적인 눈으로 보면 불운이고 고통이고 실패고 징벌같지만 그분께서 주시는 건 다 좋은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좋은 분이시라 좋은 것밖에는 내어놓으실 수 없는 분이니까요.

-오상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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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황이 말씀 "불의한 사람에게는 정의로운 사람이 되게 해 주는 것이 사랑인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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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는 것은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간절함과
절박함 속에서
우리 삶을 만나고
하느님을 만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