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1월 13일 연중 제32주간 수요일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
(루가 17,11-19)
"Stand up and go;
your faith has saved you."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지혜서의 저자는, 임금들의 권력과 통치권은 주님께서 주셨다며, 지혜를 배워 탈선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 나병 환자 열 사람을 고쳐 주시나, 사마리아 사람만 돌아와 하느님께 영광을 드린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나병 환자 열 사람은 예수님을 보고 “멀찍이 서서 소리를 높여” 간청합니다. 율법에 따르면 나병 환자는 성한 사람에게 가까이 갈 수 없었기에 늘 거리를 두어야 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간청하려면 큰 소리로 외칠 수밖에 없었습니다.이런 그들의 처지를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손을 대시는 등의 특별한 치유 행위를 하지 않으시고, 그냥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하고 이르십니다. 아직 치유받기 전인데도 그들은 하나같은 믿음으로 사제에게 달려갑니다. 그러는 가운데 몸이 깨끗해집니다.그런데 그들 가운데 오직 사마리아 사람 하나만이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드립니다. 아홉 명의 유다인 나병 환자보다 예수님에게서 더 멀리 떨어져 있을 수밖에 없던 “외국인” 사마리아 사람 하나만이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를 드린 것입니다.이런 그를 보시고 예수님께서 이르십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오늘 복음에서 병을 치유받은 사람은 열 명이었지만, 진정 예수님에게서 하느님을 뵙고 구원에 이른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 하나뿐이었습니다.제1독서인 지혜서는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구원은 지위 고하, 출신 성분에 따라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것, 곧 지혜를 갈망하고 그것을 지키는 데서 옵니다. 우리에게 거룩한 것, 곧 지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염철호 요한 신부)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운명을 사랑하면 지금의 내 일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내 가족을 비롯한 나와 관계된 관계를 사랑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나의 감정까지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때 저절로 나오는 것이 ‘감사’입니다.
이 감사의 마음이 두려움을 내 삶에 끼어들지 않게 합니다. 잘못된 선택을 하게 만드는 두려움에서 벗어나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이 감사를 갖지 못하는 이유는 이렇듯 운명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받은 것을 보지 못하고 받고 싶은 것만을 떠올리면서 불평불만으로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하루에도 수천 번 뛰고 있는 내 심장을 떠올려 보십시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식사를 할 수 있고, 숨을 쉴 수 있다는 것, 더군다나 크든 작든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도 감사할 일입니다. 그러나 보고 싶은 것만 보려 하기에 감사할 이유를 찾지 못합니다.
나병 환자 열 사람이 주님을 찾아와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청합니다. 그러자 사제들에게 몸을 보여주라고 이르시지요. 가서 사제들에게 보이라고 하셨던 것은 이렇게 할 것을 율법이 지시했기 때문입니다(레위 14,2 참조). 이 점만을 봐도 주님께서 율법을 없애러 오신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신 말씀처럼 율법을 완성하시기 위해서 오신 것이지요.
이 율법의 완벽한 완성을 위해 주님께서는 나병 환자 열 사람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런데 깨끗해진 사람은 열 명이었지만, 다시 돌아와 감사의 인사를 드린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 한 명뿐이었습니다. 그 누구도 고칠 수 없는 나병의 치유라는 커다란 은총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감사를 드리지 못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고쳐주신 분에 대해서보다 나병이 나았다는 사실 자체에 더 마음이 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쳐주신 예수님이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사마리아 사람은 고쳐주신 분을 먼저 봅니다. 그 결과 나머지 아홉보다 훨씬 큰 구원이라는 은혜를 받게 됩니다. 주님께 이런 말씀을 들었으니까요.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우리는 얼마나 감사의 마음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고 있습니까? 감사의 마음을 표시하는 사람은 구원의 선물까지 받게 됩니다.


매일 아침 눈을 떠서 3가지에 대해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매일 내용을 달리해서 21일 동안 계속하면 비관론자도 낙관론자로 변한다는 연구 결과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은 평생 비관론자로 살아왔던 84살의 남자도 이 방법을 사용한 결과 낙관론자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은 인간의 성격 구조까지 바뀐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말을 자주 합니다.
“성격은 안 바뀌어.”
바뀌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감사의 마음을 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성격이 마음에 드십니까? 혹시 조금 더 나은 모습으로 바꾸길 원하신다면 감사하는 마음을 먼저 가져보십시오. 평생 비관론자로 살아온 사람도 3주 만에 낙관론자로 바뀝니다.

믿음의 크기와 찬양의 크기는 비례한다
-전삼용신부-
저는 다행히도 여러 나라의 미사 전례에 참석해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미사 안에서 찬미 소리의 정도와 그 미사에 참례하는 신자수가 비례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한 번은 독일의 한 성당의 평일미사에 참석하였습니다. 뒤쪽의 2층 성가대석에서 정말 아름다운 성가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습니다. 성가를 부르는 이들은 딱 들어도 프로였습니다. 모차르트, 베토벤 등의 걸출한 음악가들이 이런 분위기 때문에 탄생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미사 참례자 수는 10명이 넘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신기한 광경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미사 참례자들은 미사 내내 성가를 하나도 따라 부르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아름다운 화음 속에 자신의 목소리를 끼어 넣을 자신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미사가 아니라 콘서트였고 그 콘서트장에 몇 명의 노인들이 참석하여 음악을 감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우리나라 미사도 이와 비슷해지는 경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전례는 더 경직되고 그와 발맞추어 신자들은 덜 나옵니다. 성가대는 신자들이 따라 부를 수 없는 특송을 많이 부르고 신자들은 마치 성가대가 대신 찬미해 주는 것처럼 앉아있습니다.
평화의 인사를 할 때도 형식적입니다. 그냥 옆 사람과 고개만 살짝 숙이며 눈인사를 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어 제자들에게 나타나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셨을 때 그렇게 눈인사만 살짝 하였을까요? 서로 기쁨에 끌어안고 함께 찬미의 노래를 부르지 않았을까요?
전례의 생동감은 믿음에서 오는데 그 믿음은 소리 높은 찬미로 표현될 수밖에 없습니다. 신자들이 소리 높여 찬미하지 않으면 그 전례는 죽어가는 것입니다. 소리 높여 찬미 할 수 없는 이유는 구원받은 것에 대한 기쁨이 샘솟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나병환자 열 사람을 고쳐주십니다. 그런데 한 사람만이 다시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를 드립니다. 복음은 이 장면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사마리아 사람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행해지는 전례에 절대 참석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유다인의 전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려주시고 싶으신 것입니다. 전례에 참석하지 않더라도 기쁘게 찬미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이 구원된 사람이란 뜻입니다.
마르코복음 11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성전으로 가시다가 먼저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고, 성전으로 들어가 성전의 장사꾼들을 모두 쫓아내신 다음, 다시 돌아오는 길에 무화과나무가 바싹 말라 죽어버린 것을 보는 장면이 나옵니다.
문단의 구조가 마치 샌드위치처럼 성전이 기도하는 집이 되지 못하고 강도들의 소굴로 변해버린 것을 저주받은 무화과나무 이야기가 감싸고 있는 형식입니다.
성경에서 무화과나무의 열매는 ‘믿음’을 상징합니다. 믿음이 없는 전례는 결국 저주받은 무화과나무처럼 말라버릴 것이란 예수님의 경고인 것입니다.
오늘 복음말씀도 바로 참다운 예배는 어때야하는지 알려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온” 사마리아 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믿음이 있다면 받은 것에 감사해서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미사는 이전부터 ‘에우카리스티아’, 즉 ‘감사’로 불렸습니다. 감사한다는 것은 구원되었다는 믿음 때문에 생기는 감정입니다. 그러니 믿음이 있다면 감사의 찬미가 우러나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믿음이 있다면 창피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나병이 치유 받은 사람들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영원한 생명을 얻어 영원한 죽음으로부터 치유 받은 사람들입니다. 어떻게 찬미소리가 저 사마리아인보다 적을 수 있겠습니까?
제가 참례한 미사 중 가장 길었던 것은 6시간입니다. 피정 때였기 때문에 가능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6시간이 전혀 지루하지 않았습니다. 찬미를 하며 처음으로 눈물을 흘려보았고 평화의 인사를 하며 함께 미사에 참례한 사람들이 하느님 안에서 한 형제임을 느꼈습니다. 그 가슴 뜨거움은 꽤 오래 지속되었습니다.
뜨거운 찬양은 믿음의 결과입니다. 예수님은 다시 돌아와 큰 목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한 사마리아 사람만 구원받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전례가 과연 구원받은 기쁨에 성당이 떠나가라 찬양하고 춤을 추는 시간인지, 아니면 의무이기 때문에 참아내야 하는 무엇인지 되돌아볼 때인 것 같습니다.

-조재형신부-
신문사 옆에는 뉴욕에서 가장 큰 한인 성당이 있습니다. 본당 신부님의 배려로 잘 지내고 있습니다. 본당 신부님께서 피정 강의를 요청했고, 기쁜 마음으로 준비했습니다. 강의 도중에 ‘선한 일은 그것이 아주 작은 것이라도 기쁘게 행하고, 나쁜 일은 그것이 아주 작은 것이라도 단호히 행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선한 일은 반드시 되돌아온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저에게 선한 일은 신문을 구독하는 거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감사하게도 강의를 마쳤는데 신문을 구독하겠다는 분이 있었습니다. 앞으로도 가능하면 신문 구독에 대해 홍보를 하려고 합니다.
신문의 지면 중에 ‘사랑이 피어나는 곳에’가 있습니다. 매주 한 분씩 소개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분, 투병 중인분, 갑작스럽게 재난을 당한 분, 직장을 잃어버린 분, 얻어먹을 힘조차 없는 분들의 사연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있습니다. 매주 신문의 사연을 읽고 도움을 주는 분들이 있습니다. 저희는 성금을 한국의 가톨릭 평화신문으로 보내고 있습니다. 신문을 통해서 복음이 전해지는 모습을 보니 기분도 좋고, 보람이 있습니다.
이태석 신부님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던 분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그분은 시사 고발 프로를 10년 넘게 제작했습니다. 세상이 변할 줄 알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딸이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아빠 얼굴이 너무 어두워 보여! 화났어요?” 사회의 어두운 면을 보고, 바로 잡겠다고 방송했지만, 세상은 그리 깨끗해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거울을 보니 예전에는 늘 웃는 모습이었는데, 정말 화난 얼굴이 있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이태석 신부님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고, 아프리카로 가서 이태석 신부님의 삶을 촬영했다고 합니다. 누군가를 위해서 희생하고, 모든 걸 바치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았다고 합니다. 로마의 바티칸에 초대받았고, 교황님과 추기경님들 앞에서 이태석 신부님의 다큐멘터리를 보여 드렸다고 합니다. 어느 날, 딸이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아빠 얼굴이 참 밝아 보여요. 요즘 좋은 일이 있나 봐요?” 세상의 좋은 면을 드러내는 그분의 작품을 보았습니다. 유럽의 정치를 보았고, 유럽의 사회 복지 제도를 보았습니다.
인터넷으로 모든 걸 검색하는 시대입니다. 신문을 제작하고, 홍보하는 일은 분명 힘들고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신문을 보고, 마음이 변하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그 일을 하려고 합니다. 선한 일은 그것이 아주 작은 일이라도 하면 됩니다. 오늘 제1 독서인 지혜서는 우리가 그런 삶을 살아야 한다고 전해줍니다. “거룩한 것을 거룩하게 지키는 이들은 거룩한 사람이 되고 거룩한 것을 익힌 이들은 변호를 받을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나의 말을 갈망하고 갈구하면 가르침을 얻을 것이다. 힘없는 이와 고아의 권리를 찾아 주고, 가난한 이, 불쌍한 이에게 정의를 베풀어라. 힘없는 이와 불쌍한 이를 도와주고, 악인들의 손아귀에서 구해 내어라.”
오늘 복음에서는 치유 받고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를 드린 나병 환자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미사의 감사송은 우리가 감사드려야 할 이유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아버지께는 저희의 찬미가 필요하지 않으나
저희가 감사를 드림은 아버지의 은사이옵니다.
저희 찬미가 아버지께는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으나
저희에게는
주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에 도움이 되나이다.
그러므로 저희도 모든 천사와 함께 주님을 찬미하며
기쁨에 넘쳐 큰소리로 노래하나이다.”
(차동엽 노르베르또 신부님께서 선종하셨습니다. 신부님께서 천상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시길 기도합니다. 차동엽 노르베르또 사제와 죽은 모든 교우들의 영혼이 하느님의 자비하심으로 평화의 안식을 얻게 하소서.)

주님께서는 비극이나 참담한 실패 속에서도 적극적으로 현존하시고, 실패 속에서도 성공을 이끌어내십니다!
-양승국신부-
젊은 수도자 시절, 삶 자체가 온통 회색빛이던 시절, 사방이 높은 담장으로 둘러쌓여 탈출구가 안보이던 순간이 있었습니다. 이 세상에 나혼자 뿐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사방이 다 적군으로 둘러쌓인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그 누구에게도 표현하지는 못했지만, 마음 속은 분노와 불평불만으로 가득했습니다.
어렵사리 용기를 내어 영적 지도 신부님을 찾아갔습니다. 사려깊은 신부님께서는 꽤나 어려운 숙제를 하나 내주셨습니다. 우리 수도원의 장점, 경쟁력, 긍정적인 면을 한번 찾아보라고, 그리고 제 구체적인 삶속에 숨어있는 감사꺼리들을 한번 찾아보라고.
아무리 생각해도 장점이나 긍정적인 측면, 감사꺼리는 찾아볼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도 신부님의 각별한 당부도 있고 해서, 기를 쓰고 노력했습니다. 두달 가까이 애써 찾아보고 또 찾아봤습니다. 그랬더니 깜짝 놀랄 일이 생겼습니다.
자세를 완전히 낮추고, 눈을 크게 뜨고 찾아보니, 전혀 없을 것 같았던 작은 감사꺼리들을 하나 둘 발견했습니다. 시건이 흐를수록 감사꺼리들은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사방이 온통 은총과 축복으로 가득 차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간 제 눈이 어두워 지천으로 널려있던 선물과 장점, 기쁨과 감사꺼리들을 미처 보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간단한 결론을 내릴수 있었습니다. 제 위기의 가장 큰 원인은 '감사의 미덕의 결핍!' 이었다고. 그래서 지금은 자신있게 말씀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속적인 영혼의 평화와 행복의 비결은 항상, 그리고 모든 것에 감사하는데 있다는 것을!
자신과 동료 이웃들, 공동체와 세상을 향한 불평불만으로 가득한 분들에게 꼭 권장하고 싶은 일이 생겼습니다. 축복 노트, 감사 노트를 한권 장만하라고. 불평불만들은 자비하신 주님께 모두 맡겨드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은총과 축복, 주님께서 주신 선물과 감사꺼리들을 하나 하나 적어보시라고.
모든 감사꺼리들을 다 적었다고 생각이 들면, 가장 아랫쪽에 굵고 빨간 매직으로 이렇게 써보시기 바랍니다. '하느님 아버지! 이 모든 것에 대해 깊이 감사드립니다!'
감사 리스트를 적는 과정에 유의할 점이 한가지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감사 방식은 세상 사람들의 감사 방식과는 철저히 다르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만사형통, 승승장구 앞에서는 누구나 다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감사는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처럼!
바오로 사도는 고통속에서도 감사했습니다. 옥중에서도 감사했습니다. 병고와 박해 앞에서도 감사했습니다. 죽음의 칼날 앞에서도 감사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에 참여하게 되었다며 크게 감사했습니다. 바로 우리가 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감사입니다.
인간이란 존재, 참으로 신비스럽고 위대한 존재여서, 영적으로 충만해지는 어느 순간에 도달하면, 견딜 수 없는 비극이나 참담한 실패 속에서도 감사하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비극이나 참담한 실패 속에서도 적극적으로 현존하시고, 실패 속에서도 성공을 이끌어내시고, 비극을 아름다운 결말로 변화시키신다는 것을 굳게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 안에는 주님의 인호, 주님의 흔적이 아로새겨져 있기에, 그분의 능력에 힘입어, 인생의 폭풍우를 아름다운 무지개로 바꿀 수 있습니다. 끝까지 그분을 믿고 신뢰한다면 언젠가는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이 끔찍한 고통과 비극, 굴욕을 통해서 주님의 은총이 찾아오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모든 것에 감사하는 훈련을 시작해야 합니다. 고통과 시련으로 가득차 있다할지라도 지난 세월에 감사해야겠습니다. 지금 우리 눈앞에 펼쳐지는 이해하지 못할 현실에 대해서도 감사해야겠습니다. 앞으로 다가올 모든 것에 대해서도 깊이 감사해야겠습니다.

감사
-김기현신부-
오늘 복음 중간과 끝부분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복음의 내용을 보면 감사를 드리는 일이 곧 믿음을 고백하는 일임을 생각하게 해 주는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우리가 신앙을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특별한 일이 아니라, 그분이 주시는 선물에 대해서 자연스럽게 감사로 응답하는 일일 거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복음에 나오는 그 아홉 사람처럼 그 치유와 선물이 어디에서 왔는지 자주 잊고 사는 것 같습니다. 알아채지 못하니 감사드릴 수 없고, 감사하지 않는 삶은 내 자리를 그분에게서 점점 더 멀어지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열에 아홉 사람이 그렇게 예수님께 돌아오지 않은 걸 보면 감사를 잊고 사는 삶이 자연스럽고 편안한 삶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때로는 ‘감사’ 라는 단어를 마음속에서 자주 떠올리고 되뇌어 보아야 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감사’ 라는 단어를 반복하다보면, 알아채지 못하여 슬며시 지나가는 그 감사의 일을 붙잡고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것 같습니다. 저도 어제 복음을 읽고 ‘감사’ 라는 단어를 반복하여 생각하다가 두 가지 감사의 일을 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는 산길을 걸으면서 입니다. 보통 미사 후에 성당 뒤 야트막한 산을 두 시간 정도 걷습니다. 걷다보면 운동도 되고 마음도 정리되고 정신도 맑아지는 느낌이 듭니다. 그런데 며칠 전에 문득 이러한 산이 이 자리에 있음에 감사한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동안 이런 산이 있어서 참 좋다는 느낌으로 걷기만 했지, 그 산이 그 자리에 있어주어서 감사하다는 느낌은 가져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 산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사람이 많지 않고, 경사가 그렇게 심하지도 않고, 내 기분과 상관없이 나를 품어주는 이 산이 없었다면.. 아마도 여러 순간 힘들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동네 안에 이러한 산이 가까이 있게 해 주신 주님을 생각하고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저녁을 먹으면서 영상을 보는데 희귀병으로 팔 한 쪽을 잘 쓰지도 못하고, 수시로 통증이 몰려와 죽을 생각까지도 했던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분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문득 내가 아프지 않고 하루를 보내는 것에 대해서 얼마나 감사하고 있는가..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루를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살 수 있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큰일이고 선물인데, 때로 다른 생각이나 계획이나 고민으로 감사함을 너무 많이 잊고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어제는 평소에 알아채지 못한 부분에 대해서 새삼 감사하게 되는 순간들이 있었는데요. 그 감사하는 순간에 내 생각과 시선이 그것을 주시는 분에게 살짝 열리게 되는 것 같습니다. 내가 오기 전부터 그 길을 만들어 주신 분, 내가 아플 때 회복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 분, 하루라는 시간을 허락하신 분에게로 마음이 향하여 지는 것 같습니다.
오늘 하루, 일상 안에서 나에게 선물을 주시는 분에게 감사로 응답할 수 있도록 노력해 봅시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지금 성당에 나까지 신부가 셋이다.
함께 미사를 봉헌하는데,
서로 주례를 미루는 느낌이다.
미사 전 묵주기도가 끝나면,
이미 두 명은 약식 제의를 입고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

돌아가 감사를 드렸다
-반영억신부-
바오로 사도는 “항상 기뻐하십시오! 늘 기도하십시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1테살5,16-18)하고 말합니다. 그러나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게 보입니다. 차고 넘칠 때는 물론 부족함을 느끼는 가운데에서도 감사한다는 것은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닙니다. 잘되면 자기가 잘했기 때문이고, 잘못되면 탓을 다른 사람이나 하느님께 돌리고 원망하기도 합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것에 대해 서운함이 앞섭니다. 그 처지가 어떠하든 감사하면 또 감사할 수 있는 은혜가 주어지는데 그 순간을 참지 못하고 또 은혜를 입고도 전혀 아닌 양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마땅히 받을 것을 받았다고 아니, 더 받아야 하는 데 받지 못했다고 불평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던 중에 열 명의 나병환자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멀찍이 서서 예수님을 부르며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루카17,13)하고 외쳤습니다. 사실 그들은 부정 탄 사람들로 낙인 찍혀 멀리 동네 밖에 쫓겨나 살아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시고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하고 이르셨고 그들이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 졌습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열 사람이 깨끗해 졌는데 한 사람만이, 그것도 유다인이 아닌 사마리아 사람이 ‘돌아와’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는 사제에게 몸을 보이는 것보다 먼저 예수님을 뵙고 감사를 드리고 싶은 마음이 앞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하느님의 선물을 그들이 당연히 받아야 할 몫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선택 받은 사람이 누려야 할 혜택을 누린 것뿐이었습니다. 얼른 가서 사제에게 보이고 자신의 삶을 원래 자리로 되돌리고 싶은 마음이 앞섰습니다. 아니, 하느님의 은총보다 자기의 노력으로 이루어냈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구원의 혜택은 이방인, 죄인에게도 열려 있고, 한 인간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는 것은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은총과 그 사람 자신의 믿음과 협력이 중요합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이스라엘의 자녀들 가운데 들지 않는 이방인이었고 자기가 하느님께 어떤 것을 내세운다는 것은 감히 생각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그러나 자비를 간구했고 결국 얻었으며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가 몸의 치유를 통해 하느님을 만났다는 것이 더 큰 기쁨입니다.
그러나 아홉은 어디로 갔습니까? 그들은 그야말로 화장실 들어갈 때 마음과 나올 때의 마음이 달랐습니다.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간청하여 큰 은총을 입었음에도 하느님을 영접하지 못했습니다. 마땅히 받아야 할 선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주어진 은혜를 당연히 생각 말고 은혜를 통해서 능력의 하느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매사에 감사할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감사하지 못하면 결국은 불평불만 속에 살아가게 됩니다. 감사할 것을 찾아보십시오. 살아있음이 감사입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 십자가의 죽음까지도 받아들이신 예수님을 생각한다면 받기만 하는 것, 기다리기만 하는 것, 청하기만 하는 것, 이제는 그만할 때가 되었습니다.
“주님은 나의 힘, 나의 방패, 내 마음 그분께 의지하여 도움을 받았으니 내 마음 기뻐 뛰놀며 나의 노래로 그분을 찬송하리라”(시편28,7). 구원은 감사하는 이들의 것입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송영진신부-
“그분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시는데 나병 환자 열 사람이 그분께 마주 왔다.
그들은 멀찍이 서서 소리를 높여 말하였다.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시고,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하고 이르셨다.
그들이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졌다(루카 17,12-14).”
여기서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라는 말은, 병을 고쳐 달라는 뜻입니다.
사제들에게 몸을 보이는 것은 병이 나았음을 확인받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병자들을 고쳐 주시기도 전에
사제들에게 가서 몸을 보여주라고 말씀하셨을까?
어쩌면 “내가 너희의 병을 고쳐 주겠다.” 라고 약속하시는 말씀을 하셨는데
복음서에는 생략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렇다면 병자들이 예수님 말씀에 순종하고 사제들에게 간 것은,
병을 고쳐 주겠다는 약속을 믿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병을 고쳐 주실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고쳐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또 예수님의 약속을 믿었기 때문에 예수님 말씀에 순종하고 사제들에게 갔습니다.
따라서 여기까지는 그들의 ‘믿음’에 어떤 문제점이 안 보입니다.)
두 번째 의문이 생깁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그냥 병을 고쳐 주시지 않고 그들이 가는 동안에 고쳐 주셨을까?
이 의문에 대해서는 보통 “그들의 믿음과 순종을 시험하기 위해서” 라고
해석하는데, 믿음과 순종을 ‘알아보기 위한 시험’이 아니라,
‘더 단단하게 만들어 주기 위한 시련’입니다.
만일에 이야기가 여기서 끝났다면,
이 이야기는 별로 특별할 것이 없는 평범한 치유 기적 이야기가 됩니다.
그런데 병이 나은 다음에 아홉 명은 그냥 가고, 한 명은 되돌아옴으로써
다른 치유 기적 이야기들과는 다른 특별한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이어서 그에게 이르셨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 17,15-19)”
그냥 가버린 아홉 명은 예수님의 지시대로 사제들에게 가서
병이 나은 것을 확인받았을 것이고, 그다음에는 각자 자기 갈 길을 갔을 것입니다.
1) 그들의 첫 번째 잘못은 청할 줄만 알고 감사드리는 것은 잊었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자기들이 은총을 받은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태도입니다.
은총은, 큰 은총이든지 작은 은총이든지 간에 당연한 것은 없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언제나 항상 특별한 선물입니다.
(일상적으로 반복되는 일이라 하더라도......)
그냥 가버린 아홉 명처럼, 청할 때에는 정말로 간절하게 청하지만,
은총을 받은 다음에는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면서 감사드리지 않으면,
성숙한 신앙 단계로 나아가지 못하고 초보 단계의 신앙에 머물러 있게 됩니다.
계속 그런 식이면, 기복신앙으로 퇴보할 수도 있습니다.
오늘날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청하는 것만 잘하고 감사드릴 줄은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어떤 고통 속에 있을 때 도와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인데,
청원기도를 바쳤다면 감사기도도 바쳐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너희가 기도하며 청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이미 받은 줄로 믿어라.
그러면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마르 11,24).”
이 말씀은 원래 ‘의심하지 않는 믿음’에 관한 말씀이지만,
“이미 받은 줄로 믿어라.” 라는 말씀에 초점을 맞추면,
‘감사드리는 믿음’에 관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이미 받은 줄로 믿는다면, 원하는 것을 받기 전이라도 감사기도를 드리게 됩니다.
(사실 감사기도는 받은 후에나 바치는 기도가 아니라,
받기 전에도 바쳐야 하는 기도이고, 언제나 항상 바쳐야 하는 기도입니다.)
‘감사드리는 믿음’을 가지려고 노력해야
더욱 성숙한 신앙 단계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2) 그냥 가버린 아홉 명의 두 번째 잘못은,
‘몸의 치유’만 원하고, ‘영혼의 구원’은 원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물론 ‘몸의 치유’를 원하고, 그것을 간절하게 청한 것 자체는
잘못한 일이 아니라 잘한 일입니다.
그러나 몸이 치유된 것에만 만족해서 거기에서 멈추고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가지 않으면, 즉 영혼의 구원을 향해서 나아가지 않으면,
몸의 치유는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어버립니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요한 6,27).”
지상에서 사는 동안에 병 없이 건강하게 사는 것은 좋은 일이긴 하지만,
‘몸’은 썩어 없어질 물질일 뿐입니다.
영혼이 건강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아 누릴 수 있습니다.
(그 아홉 명은 그 뒤에 어떻게 되었을까?
그들은 계속 건강하게 살았겠지만, 그냥 그것으로 끝났을지,
아니면 나중에라도 예수님께 돌아와서 영혼 구원을 위해서 노력했을지,
그것은 알 수 없습니다.)
되돌아온 사마리아인은 사제에게 가지 않고 중간에 되돌아온 것으로 보입니다.
그가 사제에게 가지 않은 것은 아마도
“예수님은 하느님의 참 사제이신 분”이라는 것을 깨닫고 믿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예수님의 권능은 곧 하느님의 권능”이라는 것을
믿게 되었다는 점도 중요합니다.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라는 말은,
그가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게 되었음을 암시하고,
또 그가 ‘몸의 치유’로만 만족하지 않고,
예수님만이 주실 수 있는 ‘영혼의 구원’을 원했음을 암시합니다.
(발 앞에 엎드린 것은, 하느님을 향한 공경의 표시입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라는 말씀은,
그 사마리아인의 믿음을 칭찬하시는 말씀이기도 하고,
“이제부터는 믿음을 더욱 굳게 해서 영혼의 구원을 향해서 나아가라.” 라고
격려하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조욱현신부-
복음: 루카 17,11-19: 한센병 환자 열 사람의 치유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다가 10명의 한센병 환자들을 만나신다.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14절)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영적으로 깨끗해지도록 율법에 따라 그들을 사제들에게 보내신다. 아울러 치유도 해주셨다. 그래서 그들은 사제들에게 가는 동안에 깨끗해졌기 때문이다. 율법은 그들이 사제에게 몸을 보이고 병이 나은 것을 감사하는 예물을 올리라고 명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다른 한센병 환자에게 그러셨듯이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루카 5,13) 하시지 않고 사제들에게 보이라고 하신 이유이다. 성 라자로 마을의 피정의 집을 “아론의 집”이라고 명명했다. 아론은 사제이다. 구약에서 사제가 오늘 복음에서와 같이 한센병이 걸린 사람이 치유되었을 때, 보고 치유되었음을 선언한 다음 정상생활을 할 수 있었듯이, 아론의 집의 의미도 같다. 아론의 집에 들어 와서 모든 치유를 받고 기쁜 마음으로 돌아가라는 의미로 붙인 이름이다.
유대인의 지도자들인 사제들은 늘 그분의 영광을 시기하였다. 한센병 환자들은 생각하지도 못했던 놀라운 사실을 증거하였다. 주님께서 그들이 치유되기를 바라시자 자신들이 불행에서 구원받은 것이다. 그분은 그들을 먼저 고쳐주지 않으시고 사제들에게 보내셨다. 그들은 나병의 증세와 그것이 치유되었음을 아는 사람들이었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17절)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고쳐주신 한센인들을 꾸중하신다. 그들은 자기를 고쳐 주신 분에 대해서보다 나병이 나았다는 사실에 더 마음이 가 있었다. 결국 한 사람은 나머지 아홉보다 훨씬 많은 은총을 받았다. 병이 나은 것 말고도 주님께 이런 말씀을 들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19절)
유대인 한센인들 아홉은 감사하는 마음을 잊어버리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으로 이스라엘이 마음이 굳어 감사할 줄 모르는 백성임을 보여주신다. 외국인인 사마리아 사람은 유대인이 아닌 타민족이었다. 사마리아 사람은 감사할 줄 아는 반면 유대인은 그토록 은총을 입었으면서도 감사할 줄 몰랐다는 것을 알려준다.
감사드리는 이들과 찬양하는 이들은 같은 마음이다. 그들은 자신에게 은총을 내리신 분을 찬미한다. 바오로 사도가 모든 사람에게 “여러분의 몸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십시오.”(1코린 6,20) 하고 권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이사야도 “주님께 영광을 드리고 섬에서마다 그분에 대한 찬양을 알려라.”(이사 42,12)고 한다.
여기서 과연 우리는 나 자신에 대해서 이런 반성을 해 보아야 한다. 나는 과연 신앙인으로써 나에게 베풀어주신 모든 은혜에 진정으로 감사를 드리며 살고 있는 한 사람의 사마리아인인지를! 우리 모두가 하느님 앞에 똑같이 사랑 받는 귀중한 존재임을 알고 서로 사랑하며 항상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삶이 되도록 노력하자.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 있느냐?(루카 17, 17)
-한상우신부-
치유로 가는
모든 길 위에
치유의 주체이신
구원의 주님이
계십니다.
깨끗하게
하시는 분은
구원하시는 분은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주님께 돌아가야 할
우리의 믿음입니다.
때로는 우리의
간절함이
너무도 빠르게
하느님을 망각하는
당연함으로
바뀔 때가 종종 있습니다.
우리를 살게하시는
하느님을 너무 쉽게
우리는 잊어버리고
살아갑니다.
우리의 마음을
보는 데서
진정한 관계는
시작됩니다.
감사가 구원으로
찬미가 믿음으로
이어집니다.
감사와 영광을
먼져 올려드리는
삶이 진정한
믿음의 삶입니다.
믿음은 비로소
소중한 하느님의
사람으로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구원의 선물이 됩니다.
믿음이 없다면
구원이신
하느님께로
돌아갈 수도
없을 것입니다.
믿음으로 돌아가는
믿음의
위령성월입니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거룩함을 향합니다.
"그들은 멀찍이 서서 소리를 높여 말하였다"(루카 17,12-13).
예수님께 나병환자 열 사람이 치유를 청합니다. 그들은 간절히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도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오지 못합니다. 부정한 전염병이라고 접촉을 꺼리는 이들을 피해 살아왔기에 스스로 조심합니다. 그래서 "멀찍이"라는 말씀 안에는 그들을 바라보시는 하느님의 슬픔이 서려 있습니다.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카 17,13).
소문으로 들었는지 그들은 예수님께서 자비를 베푸시는 분임을 압니다. 치유와 기적, 죄의 용서와 말씀은 그분의 능력과 힘, 자비와 거룩함을 드러냅니다. 부정하다고 낙인 찍힌 그들은 그런 예수님께 자기들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해 더 다가설 수 없지만 그분께 무엇을 청해야 할지는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바로 자비입니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루카 17,15-16).
예수님 말씀대로 사제에게 몸을 보이러 가는 도중에 치유가 일어납니다. 그 중 한 명, 사마리아 사람은 가던 길을 멈추고 예수님께 돌아옵니다. 그는 이제 예수님 가까이 다가올 수 있습니다. 발 앞에 엎드렸으니 예수님과 매우 근접한 자리입니다. 이 가깝고 밀접한 관계성의 회복이야말로 단순한 치유를 넘어서는 자비의 효과입니다.
제1독서에서 지혜서 저자는 세상의 임금들, 통치자, 권력자, 군주들, 세력가들을 일깨웁니다.
"미천한 이들은 자비로 용서를 받지만 권력자들은 엄하게 재판을 받을 것이다"(지혜 6,6).
그러니 하느님에게서 권력을 받은 이들은 그 힘이 누구에게서 왔는지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들은 "지혜를 배워 탈선하는 일이 없도록"(지혜 6,9) 애써야 합니다. 그들이 지닌 세속적 힘은 세상에서나 유용할 뿐 오히려 진정한 구원에 장애가 되기 십상입니다.
"거룩한 것을 거룩하게 지키는 이들은 거룩한 사람이 되고"(지혜 6,10).
하느님의 거룩함에 합당한 사람이 되려면 그분 현존을 의식하며 살아야 합니다. 인간은 자신이 거룩하신 하느님 앞에서 숨쉬고 살아간다는 사실을 인식할 때 거룩해지니까요. 그리고 거기서 더 나아가 그분 마음을 차지하는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 고통 속에 비참히 살아가는 이들을 위해 그분께서 주신 힘을 쓸 줄 알아야 합니다. "작거나 크거나 다 그분께서 만드셨고 모두 똑같이 생각해"(지혜 6,7) 주신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루카 17,17)
돌아와 주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린 나병환자는 비록 한때 부정하다고 세상에서 내쫒긴 이였지만 거룩한 것을 거룩히 여길 줄 아는 이였습니다. 치유를 물리적 변화로 치부하지 않고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이라고 꿰뚫어 볼 줄 알았으니까요. 여기까지 깨달은 이는 가던 길을 멈추고 되돌아와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는 거룩하신 분 발 앞에 몸을 던짐으로써 거룩함을 얻습니다.
우리가 큰 사람이건 작은 사람이건, 건강하건 병들었건 모든 피조물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을 의식하며 살 때 거룩함이 우리에게 옵니다. 우리를 둘러싼 존재와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는 현상 안에서 움직이시는 하느님을 깨달을 때 거룩하게 됩니다. 거룩한 이는 거룩함을 나누어 주신 분께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기까지 이르러야 구원입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 17,19).
치유된 이는 깨끗합니다. 하지만 거룩한 이는 구원됩니다. 자비를 청하여 치유의 은혜를 받고, 감사를 통하여 구원을 받으시길 축원합니다.

감사의 이치
-김찬선신부-
http://www.ofmkorea.org/ofmhomily/286424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7년 11월 15일 연중 제32주간 수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루가 17,11-19)
바오로 사도는 “항상 기뻐하십시오! 늘 기도하십시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1테살5,16-18)하고 말합니다.
열 사람이 깨끗해 졌는데 한 사람만이, 그것도 유다인이 아닌 사마리아 사람이 ‘돌아와’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는 사제에게 몸을 보이는 것보다 먼저 예수님을 뵙고 감사를 드리고 싶은 마음이 앞섰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나의 힘, 나의 방패, 내 마음 그분께 의지하여 도움을 받았으니 내 마음 기뻐 뛰놀며 나의 노래로 그분을 찬송하리라”(시편28,7).
-반영억신부-
---
'하느님 아버지! 이 모든 것에 대해 깊이 감사드립니다!'
바오로 사도는 고통속에서도 감사했습니다. 옥중에서도 감사했습니다. 병고와 박해 앞에서도 감사했습니다. 죽음의 칼날 앞에서도 감사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에 참여하게 되었다며 크게 감사했습니다. 바로 우리가 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감사입니다.
-양승국신부-
---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루카 17,17)
돌아와 주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린 나병환자는 비록 한때 부정하다고 세상에서 내쫒긴 이였지만 거룩한 것을 거룩히 여길 줄 아는 이였습니다. 치유를 물리적 변화로 치부하지 않고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이라고 꿰뚫어 볼 줄 알았으니까요. 여기까지 깨달은 이는 가던 길을 멈추고 되돌아와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는 거룩하신 분 발 앞에 몸을 던짐으로써 거룩함을 얻습니다.
-오상선신부-
---
어제는 고통과 지혜의 관계, 곧 고통이 지혜롭게 한다는 점을 보았습니다.
오늘은 고통과 감사의 관계, 곧 고통이 감사하게 한다는 점을 보겠습니다
고통스러운 사람이 오히려 감사할 수 있습니다.
더 정확히 얘기하면 최악의 상황을 통과한 사람만이 감사할 수 있고,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이나 내가 가진 건강이나 부나 평화가
당연한 사람은 오히려 감사할 수 없습니다.
애원이 나올 때가 감사 할 수 있을 때입니다.
애원이 나올때가 최악일 때이기 때문입니다.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
-김찬선신부-
---
그냥 가버린 아홉 명은 예수님의 지시대로 사제들에게 가서
병이 나은 것을 확인받았을 것이고, 그다음에는 각자 자기 갈 길을 갔을 것입니다.
그들의 첫 번째 잘못은 청할 줄만 알고 감사드리는 것은 잊었다는 점입니다..
그냥 가버린 아홉 명처럼, 청할 때에는 정말로 간절하게 청하지만,
은총을 받은 다음에는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면서 감사드리지 않으면,
성숙한 신앙 단계로 나아가지 못하고 초보 단계의 신앙에 머물러 있게 됩니다.
그냥 가버린 아홉 명의 두 번째 잘못은,
‘몸의 치유’만 원하고, ‘영혼의 구원’은 원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요한 6,27).”
-송영진신부-
---
감사가 구원으로
찬미가 믿음으로
이어집니다.
감사와 영광을
먼져 올려드리는
삶이 진정한
믿음의 삶입니다.
-한상진신부-
---
'오늘의 복음 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9년 11월 15일 연중 제32주간 금요일 (0) | 2019.11.14 |
---|---|
2019년 11월 14일 연중 제32주간 목요일 (0) | 2019.11.13 |
2019년 11월 12일 연중 제32주간 화요일 (0) | 2019.11.11 |
2019년 11월 11일 연중 제32주간 월요일 (0) | 2019.11.10 |
2019년 11월 10일 연중 제32주일 (0) | 2019.11.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