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1월 11일 연중 제32주간 월요일
투르의 성 마르티노 주교 기념일
마르티노 주교는 316년 무렵 헝가리 판노니아의 이교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로마에서 공부한 그는 군인으로 근무하던 중 인생의 전환점이 되는 신비 체험을 하였다. 곧 추위에 떨고 있는 거리의 한 걸인에게 자신의 외투 절반을 잘라 주었는데, 그날 밤 꿈속에 그 외투 차림의 예수님께서 나타나신 것이다. 곧바로 세례를 받고 신자가 된 그는 나중에 사제가 되었으며, 370년 무렵에는 프랑스 투르의 주교로 임명되어 착한 목자의 모범을 보이며 복음 전파에 전념하였다. 프랑스 교회의 초석을 놓은 마르티노 주교는 프랑스 교회의 수호성인 가운데 한 분으로 존경받고 있다.
☆☆☆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
(루가 17,1-6)
If your brother sins, rebuke him;
and if he repents, forgive him.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지혜서의 저자는 세상의 통치자들에게, 정의를 사랑하고 주님을 찾으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남을 죄짓게 하지 않도록 조심하고,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고 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그리스어로 ‘스칸달론’, 영어로는 ‘스캔들’인데, 이 구절을 좀 더 분명히 번역하면 이렇습니다. ‘스캔들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그들을 통하여 스캔들이 오는 자(스캔들을 일으키는 자).’여기서 스캔들이란 하느님께 나아가는 데 방해가 되는 일종의 ‘걸림돌’을 뜻합니다. 이렇게 되면 오늘 복음의 첫 구절은, 하느님께 나아가는 데 방해가 되는 걸림돌을 만나지 않을 수는 없지만, 그런 걸림돌을 놓는 자는 참으로 불행하다고 선언하는 내용입니다.사실, 믿음이 약한 이들은 스캔들에 쉽게 걸려 넘어지기도 하고, 쉽게 죄를 짓기도 합니다. 그런 이들로 말미암아 공동체에 분란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공동체의 지도자들은 언제나 오늘 지혜서가 이야기하는 “가르침을 주는 거룩한 영”으로 죄를 분명하게 죄로 드러나게 해야 합니다.그러나 그 형제가 회개하여 공동체의 일원으로 다시 살아가고자 한다면, “다정한 영”으로 그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루에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라고 말하면 그를 용서해 주라고 가르치십니다.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자신들에게 믿음을 더해 달라고 청합니다. “가르침을 주는 거룩한 영”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식별과 “다정한 영”을 바탕으로 하는 용서의 경계를 결정하는 일은 그만큼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늘 주님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염철호 요한 신부)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그 뒤에 이 신부님을 다시 만나서 어떻게 되었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잘 해결되었어.”라고 답하는 것입니다. “왜? 이제 술 안 마신 데?”라고 묻자 아니라고 합니다. “그럼 성당에 안 나오신 데?”라고 묻자 이것도 아니랍니다.
해결은 신부님 스스로 이 형제님을 그냥 받아들이는 것이었습니다. 신부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해 주십니다.
“육신의 병을 한두 번 치료해주었는데, 또 아프다고 찾아오면 의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몇 번이라도 아플 때마다 찾아오면 치료해주어야지. 신부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 마음이 아파서 찾아온 것을 상대하기 힘들다고 거부하면 안 되지.”
주님께서는 “그가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나약한 우리는 누구나 실수를 저지르고 그래서 많은 일에 걸려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똑같은 죄를 반복해서 짓는 것을 진심으로 뉘우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곤 합니다. 그러나 뉘우치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만큼 나약하고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회개하는 자들을 용서해야 합니다.
이 용서가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이 주님께 믿음을 더하여 달라고 청하는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사도들은 믿음을 달라고 하지 않고 더하여 달라고 합니다. 가지고 있는 우리의 믿음만으로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용서의 실천이 이루어지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믿음 안에서 더욱 강해질 수 있도록 청해야 합니다. 믿음의 시작은 우리한테 달려 있고 온 힘을 다해 하느님을 믿고 의지하는 가운데 유지되는 것이지만, 그러는 데 필요한 확신과 힘은 거룩한 은총에서 옵니다. 이 믿음을 통해 하느님의 놀라운 힘이 은총의 모습으로 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 힘으로 불가능해 보이는 용서가 가능하게 됩니다. 주님의 사랑을 부족한 나를 통해서 세상에 펼칠 수 있게 됩니다. 주님의 도구가 되는 나 자신이 될 수 있도록 믿음을 더 해야 합니다.


2008년 스토니브룩 대학은 두려움의 사회 전염과 관련해 특별한 증거들을 추적했습니다. 초보 스카이다이버들을 비행기에서 뛰어내리게 한 후 겨드랑이 땀을 하나하나 채집한 것입니다. 그리고 학자들은 일반적인 땀과 두려운 상황에서 나온 땀을 구분해 분무기에 넣고 노련한 자원자들에게 흡입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자원자들이 두려움에 기반을 둔 땀을 흡입하자 두려움과 관련된 시상하부와 편도체 영역이 밝아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감장은 쉽게 전달됩니다. 따라서 내 감정이 부정적이라면 긍정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다가가야 합니다. 물론 내가 전염시킬 수도 있지만, 극복하려는 의지가 있다면 남의 긍정적 감정이 큰 힘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정, 우리 공동체를 바라보십시오. 과연 어떤 감정을 품고 있습니까? 내가 그런 감정을 만든 것일 수도 있고, 그 감정에 내가 전염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좋은 감정을 전염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하며, 필요하다면 다른 이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길을 찾는 노력도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감정은 전달됩니다.

용서만이 죄를 없애는 힘이다
-전삼용신부-
박보영 목사는 길거리 아이들을 데려다 키워준 훌륭한 분입니다. 목사님이 길거리 아이들을 거두어들일 때 그들이 입던 옷을 버리지 않고 비닐봉지에 잘 보관한다고 합니다. 이발하고 씻기고 새 옷을 입히면 아이들은 완전히 새 사람이 됩니다. 그러나 그런 삶이 마냥 즐겁지만은 않습니다. 규칙적인 기도와 공부, 그리고 단체생활은 다시 옛날의 자유로운 길거리 생활을 떠올리게 합니다. 조금씩 다시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려 할 때 목사님은 아무 말 없이 예전 옷을 한 번만 입어보라고 건네집니다. 그들은 몇 년 동안 냄새가 밴 그 옷을 집으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억지로 입혀봅니다. 그리고 그들보고 가지고 나가서 태우라고 합니다. 그 옷을 태우고 온 아이들은 몇 번이고 샤워를 하면서 몸을 씻는다고 합니다.
죄에서 벗어나게 하는 힘은 무엇일까요? 죄가 없어졌을 때의 행복입니다. 그렇다면 죄를 없애기 위해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계속 죄인의 냄새를 풍기게 해야 할까요, 아니면 깨끗해졌을 때의 행복을 느끼게 해야 할까요? 죄 없을 때의 행복을 느끼면 다시는 죄로 돌아가는 일이 없습니다. 어떻게 그 오물 냄새로 가득 찬 옷을 다시 입을 수 있겠습니까. 질책과 용서 중, 죄를 용서하는 힘은 용서에서 나옵니다.
질책은 매서운 바람과 같아서 옷깃을 여미게 만듭니다. 더욱 반발심이 들게 만드는 것입니다. 따듯한 용서만이 무거운 코트를 벗게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쓰시는 방법이 용서이고 사탄이 쓰는 방법이 질책입니다.
아담이 죄를 지었을 때 하느님은 가죽옷을 입혀주셨습니다. 그 가죽의 주인은 당신 아들 예수님입니다. 아드님의 껍질을 벗겨 우리를 입혀주시며 우리가 더 이상 죄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아버지의 뜻을 믿고 당신 몸을 십자가에 기꺼이 우리 죄를 위해 봉헌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사랑을 믿고 더 이상 하느님 마음을 아프게 해드려서는 안 되겠다는 마음을 갖습니다. 그렇게 죄에서 벗어납니다.
반면 사탄은 죄책감을 느끼게 만듭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자비로운 목소리로 부르실 때 나무 뒤로 숨게 만들었습니다. 또한 죄를 감추기 위해 나뭇잎으로 몸을 가리는 수고를 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런 노력으로 죄가 없어진다고 믿었지만 실제로는 나무에게 피해를 입히는 아무 쓸모없는 행위만 했던 것입니다.
죄를 지으면 그 죄를 짓는 사람이 가장 잘 압니다. 굳이 알려줄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가 알려주어야 하는 것은 그 죗값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다 하셨으니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죄를 감추기 위해 또 다른 죄를 짓는 일이 없어집니다. 자신의 죄책감을 감추기 위해 남을 판단하는 일도 없어지고 어차피 죄를 지었으니 다른 죄를 지어도 상관없다는 생각도 없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간음하다 잡힌 여인 앞에서 그녀의 죄를 들추어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녀의 죄책감을 조장하는 바리사이들을 쫓아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녀의 죄 때문에 죽으셔야 했습니다. 그렇지만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라고 하시며 오직 용서만이 죄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음을 알려주셨습니다. 자비만이 죄를 이깁니다.
오늘 복음은 이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남을 죄짓게 만드는 사람들이 용서를 하지 못하는 이들이라고 꼬집으십니다. 그들은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내던져지는 편이 낫다.”고 하십니다. 그러시며 남을 죄짓게 하지 않으려면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라.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 그가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
꾸짖으라는 말은 질책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렇게 죄를 계속 지으면 멸망의 길로 가는 것을 알려주는 예언자직을 수행하라는 뜻입니다. 질책은 상대의 잘못 때문에 자신이 불편하여 하는 것입니다.
용서는 인간의 힘으로 되지 않습니다.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통해 하시게 해야 합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용서를 통해 세상에 죄를 없애시는 분이십니다. 내가 먼저 하느님이 되어야만 용서가 가능해집니다.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들어오셔 그분이 나의 주인이 되셨음을 믿어야합니다. 이것이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라는 말씀의 뜻입니다.
돌무화과나무는 생명나무인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성체성혈을 상징합니다.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었을 때에만 그분의 힘으로 용서가 가능하고 그러면 세상의 죄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용서는 용서 받은 사람만이 용서로써 이웃의 죄가 사해짐을 믿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이웃을 죄 없는 사람으로 만드는 용서만이 다시 옛 죄를 입지 못하게 만드는 힘입니다.

-조재형신부-
가끔 상처가 날 때가 있습니다. 넘어지기도 하고, 부딪치기도 하고, 찔리기도 합니다. 상처가 나면 상처 부위에 약을 바릅니다. 상처가 덧나지 않도록 밴드를 부치기도 합니다. 붕대를 감기도 합니다. 이유는 상처의 부위가 예민해서 다시 충격을 받으면 더 아프기 때문입니다. 상처가 덧나면 오래가기 때문입니다. 저도 상처가 나곤 합니다. 약을 바르고, 밴드를 부치고 며칠 지나면 아물었습니다.
우리의 마음에도 상처가 날 때가 있습니다. 추월하는 차가 손가락질하며 갈 때가 있습니다. 당연히 기분이 상합니다. 내가 하지 않는 일에 대해서 모함하는 말을 들을 때도 있습니다. 당연히 억울합니다. 믿었던 사람이 가슴에 대못을 박을 때도 있습니다. 당연히 배신감에 화가 납니다. 생각이 다른 사람이 있습니다. 그 다른 생각을 존중하고, 인정하지 못하기에 화가 나고, 다툼까지 생깁니다. 꽃밭의 꽃이 다른 건 인정하면서, 생각이 다른 사람을 인정하지 못합니다.
몸의 상처는 약을 바르고, 밴드를 부치면서 마음의 상처는 오히려 더 키우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픈 상처를 건드리니, 당연히 더 아프기 마련입니다. 어쩔 수 없이 사랑하는 이와 헤어진 사람이 있었습니다.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지 않고, 분노와 원망의 기름을 계속 부었습니다. 더는 사람을 사귀지 않았습니다. 사람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수십 년이 지났습니다. 문득 거울을 보니, 어두운 얼굴이 앞에 있습니다.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지 않고, 내버려 뒀기에 덧나고 말았습니다. 삶이 기쁘지 않았고, 또 다른 사랑을 만나지 못한 건 마음의 상처를 돌보지 않아서입니다. 우리가 흔히 ‘화병(火病)’이라고 부르는 증상은 마음의 상처에 시기와 질투, 근심과 걱정의 기름을 부을 때 생깁니다.
같은 마음의 상처를 받았지만, 온 맘으로 받아들이고, 치유한 사람이 있습니다. 장 지오노가 소설로 표현한 ‘나무를 심은 사람’입니다. 아내를 잃었고, 자식까지 잃은 주인공은 혼자 숲속에서 세상을 원망하며 살았습니다. 어느 날입니다. 황폐해진 땅을 보았습니다. 새도 날아오지 않고, 사람도 떠난 땅입니다. 매일 그 땅에 나무의 씨를 심었습니다. 원망은 걷어내고, 사랑을 심었습니다. 수십 년이 지나자 황폐했던 땅은 숲이 되었습니다. 그 숲에 새와 나비가 찾아왔습니다. 마을 떠났던 사람들도 돌아왔습니다. 마음의 상처를 보듬어 주고, 사랑하면 그 상처에서 향기로운 꽃이 핍니다. 상처 입은 치유자가 되어 타인의 아픔도 이해하고,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자존심 때문에, 열등감 때문에, 시기와 질투의 기름을 부을 때가 있습니다. 잠도 오지 않고, 먹어도 소화가 되지 않습니다. 남의 떡은 커 보이고, 나의 떡은 작아 보입니다. 금수저가 아닌 것이 불만스럽습니다. 오해는 오해를 낳고, 분노는 더 큰 분노로 돌아옵니다. 한 번뿐인 삶이 기쁘지도, 감사하지도 않습니다. 우리 마음에 테러리스트(공격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마음을 위한 테라피스트(치유자)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지혜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세상 사람들아, 정의를 사랑하여라. 선량한 마음으로 주님을 생각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그분을 찾아라. 지혜는 간악한 영혼 안으로 들지 않고 죄에 얽매인 육신 안에 머무르지 않는다.” 하느님의 영은 분노와 원망의 마음에는 머물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영은 이해와 사랑의 마음에 머물러 우리를 영적으로 풍요롭게 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용서’를 말씀하십니다.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가장 큰 힘은 용서하고, 용서받는 겁니다.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우리가 용서하오니,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라는 청원은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입니다. 용서는 주는 것(Forgiveness)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Forgiveness is what this Course is all about. Forgiveness is your Salvation.(용서가 바로 이 과정의 모든 것이다. 용서가 그대의 구원이다)” 또 이런 말도 있습니다. ”You are Christ. Pure and Innocent, You Are. You are Forgiven. And, You Are Released.(당신은 그리스도입니다. 순수하고 결백합니다, 당신은. 당신은 용서받았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풀려났습니다.)”

지혜는 사랑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양승국신부-
이번 주간 내내 첫번째 독서로는 지혜서가 봉독됩니다. 이 책의 보다 완전한 이름은 ‘솔로몬의 지혜서’입니다. 지혜서의 본문 안에는 독자가 누구인지 암시되어 있습니다. 본문이 지칭하는 독자는‘세상의 통치자들’이지만, 내용상 독자층은 전체 이스라엘 백성들로 확장됩니다.
지혜서의 저자는 지혜에 대해서 이렇게 가르칩니다. 지혜는 다정한 영, 사람에게 우호적이며 사람을 사랑하는 영입니다. 결국 지혜는 하느님의 영입니다. 이러한 지혜는 간악한 영혼 안에 들지 않고, 죄에 얽매인 육신 안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솔로몬은 조금 더 깊이있게 다섯 가지 측면에 걸쳐 지혜를 소개합니다. 지혜는 하느님 권능의 숨결입니다. 지혜는 전능하신 분의 영광의 순전한 발산입니다. 지혜는 영원한 빛의 광채입니다. 지혜는 하느님께서 하시는 활동의 티없는 거울입니다. 지혜는 하느님 선하심의 모상입니다.
솔로몬은 살아 생전 언제나 지혜를 추구했고 그리워했습니다. 지혜를 사랑했고 존중했습니다. 그는 틈만 나면 지혜를 찬미했고, 지혜를 얻기 위해 간절히 하느님께 간구했습니다. 그는 지혜를 평생의 동반자로 삼았습니다.
또한 솔로몬은 세상의 통치자들을 향해 지혜를 얻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하라고, 그래야 자신의 손에 맡겨진 백성들을 올바로 인도할 수 있고, 구원에로 이끌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7장 말미에서 솔로몬은 장엄한 어조로 지혜의 본성을 찬미하고 있습니다. 이른바 ‘솔로몬의 지혜 찬미’입니다. 그는 지혜가 지니고 있는 스무가지 이상의 속성을 쭉 나열하고 있습니다. 하나 하나 짚어보니 오늘 우리 지도자들과 우리 각자에게 꼭 필요한 덕목입니다.
지혜는 명석합니다. 거룩합니다. 유일합니다. 다양합니다. 섬세합니다. 민첩합니다. 명료합니다. 청절합니다. 티없이 맑다는 말입니다. 분명합니다. 손상될 수 없습니다. 선을 사랑합니다. 예리합니다. 자유롭습니다. 인자합니다. 항구합니다. 확고합니다. 평온합니다. 전능합니다. 모든 것을 살핍니다. 명석합니다. 깨끗합니다. 빠릅니다. 모든 것을 통달하고 통찰합니다.
인류역사상 지혜롭기로 따지면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솔로몬이었지만, 놀랍게도 하느님 앞에 자신을 완전히 낮춥니다. 자신의 연약함과 무지를 고백하면서 겸손되이 하느님께 지혜를 청합니다.
“저는 정녕 당신의 종, 당신 여종의 아들, 연약하고 덧없는 인간으로서 재판과 법을 아주 조금밖에는 이해하지 못합니다. 사실 사람들 가운데 누가 완전하다 하더라도 당신에게서 오는 지혜가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여겨집니다.”(지혜서 9장 5~6절)
요즘 정계나 학계에서 국민들 인내력 테스트라도 하는 듯, 정말이지 참아주기 힘든 사람들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폼이란 폼은 다 잡으면서, 아주 고압적이고 교만한 얼굴로,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인양, 따져대고 가르치는 안하무인의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그들에게 참된 지혜의 덕이 겸비되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봅니다.
참된 지혜를 갖춘 사람은, 주님의 성령 안에 살아가기에 교만하거나 무례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하느님 앞에 얼마나 미소한 존재인지를 늘 기억합니다. 그래서 지극히 겸손합니다.
결국 지혜는 사랑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참된 지혜는 하느님에게서 오고, 그 하느님께서 지니신 가장 우세한 속성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지혜로운 삶은 사랑의 삶입니다.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리 발버둥쳐도 지혜를 얻을 수 없습니다.

용서받았음을 기억하라
-반영억신부-
유혹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죄의 유혹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광야에서 단식을 마치신 후 마귀로부터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사람은 결코 유혹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런데 유혹은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인간을 이용합니다. 그리고 유혹은 사람들이 자신을 그 도구로 사용되도록 허용함으로써 죄에 떨어지게 됩니다. 내가 동의함으로써 악의 상태에 머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혹이 없기를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오히려 극복할 힘과 능력, 지혜를 키워야 합니다. 유혹은 언제나 곁에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용서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용서가 말같이 쉽지 않지만 주님께서 모범을 보여 주셨기에 우리도 용서를 할 수 있습니다. 성 에드몬드는 “나는 비록 두 팔이 잘리고 두 눈을 빼앗기더라도 복수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주 예수님께서 자기를 못 박은 원수를 위해 기도하시고 용서하시기를 하느님 아버지께 청하지 않았습니까?”하고 말했습니다. 내가 하느님 안에 강해지고 뿌리를 내리면 그 어떤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기 때문입니다. 용서를 위해서 믿음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그러한 일을 저지르는 자!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것보다,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낫다”(루카17,2).고 말씀하셨습니다. 단호한 결단으로 유혹을 극복하라는 말씀입니다. 믿음에 따르는 단호한 결단은 유혹을 이깁니다.
가끔은 사람들로부터‘나는 그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는 말을 듣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삶의 여정 안에서 크든 작든 알게 모르게 많은 잘못과 허물을 안고 살아왔고, 또 앞으로의 여정 안에서도 끊임없는 자비와 용서를 입어야 할 연약함을 지녔습니다. 결국 우리자신이 용서가 필요한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할 때 비로소 타인을 용서할 수 있게 됩니다. 또한 남을 용서 하기위해서는 내가 이미 용서 받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무리 잘 살려고 애를 쓰고 남에게 피해를 안 주었다고 장담한다 해도 그것이 오히려 남에게 상처를 주고 아픔을 주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잘한다는 것이 하느님 앞에서는 부끄러움 일 수 있습니다.
사람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지만 피조물인한 연약함 속에 끊임없는 자비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용서를 시작할 뿐 용서를 완성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용서를 위한 회개를 시작하고 어떠한 상황이나 처지에서든지 앙갚음하고자 하는 유혹에서 자유롭기를 바랍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형제애
-송영진신부-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그러한 일을 저지르는 자!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것보다,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내던져지는 편이 낫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라(루카 17,1-3ㄱ).”
신앙인은 자기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노력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서도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남의 구원을 위해서 노력하는 것은 형제애를 실천하는 것이고,
형제애 실천은 신앙인의 본분이고 의무입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도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기는커녕
다른 사람들이 구원받는 것을 방해한다면, 그것은 이중으로 죄를 짓는 것입니다.
신앙인의 본분을 다하지 않은 죄와 남의 구원을 방해한 죄.
1) 유혹 - 남이 구원받는 것을 방해하는 일 가운데 첫 번째는 ‘유혹’입니다.
자기 혼자서 죄를 짓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다른 사람을 공범으로 끌어들이는 경우가 있고,
자기는 뒤로 빠져 있으면서
죄가 되는 일을 하도록 다른 사람을 부추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 해당되든지 간에 죄를 짓도록 남을 유혹하는 것은 큰 죄입니다.
2) 잘못 가르치는 일 - 성경이나 교리를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고,
그것으로 남을 가르쳐서, 결국 다른 사람들을
‘구원의 길’에서 멀어지게 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일도 큰 죄입니다.
3) 방관 - 다른 사람이 죄짓는 것을 방관하는 것도
‘남을 죄짓게 하는 죄’가 됩니다.
(헤로데가 세례자 요한을 죽일 때,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은
그 일을 구경하기만 했는데, 그들은 모두 살인죄의 공범이기도 하고,
‘남을 죄짓게 하는 죄’를 지은 자들이기도 합니다.)
개인의 범죄뿐만 아니라,
세상의 악과 불의와 부정부패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알면서도 침묵을 지키거나 남의 일이라고 구경만 하는 것은 모두 죄입니다.
예수님 말씀에서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 라는 말씀은,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런 일이 흔하게 일어나는 것이 인간 세상의 현실이라는 뜻입니다.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내던져지는 편이 낫다.” 라는 말씀은,
‘남을 죄짓게 하는 죄’는 대단히 큰 죄라는 것을 강조하시는 말씀입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라.” 라는 말씀에는, 본의 아니게, 또는 무의식중에
그런 죄를 짓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유혹하려는 의도가 아니었는데 결과적으로 유혹이 되는 경우도 있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교리를 잘못 가르치는 경우도 있습니다.
신앙인은 말 한 마디, 작은 행동 하나를 늘 조심해야 합니다.)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
그가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루카 17,3ㄴ-4).”
만일에 내가 형제를 용서하지 않아서 그 형제가 또다시 죄를 짓게 된다면,
그 죄에 대해서는 그 사람 자신이 심판을 받겠지만,
그를 용서하지 않은 나는 ‘남을 죄짓게 한 죄’를 지었기 때문에
나 또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용서’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무조건 참기만 하는 일이 아닙니다.
꾸짖어야 한다면 꾸짖고, 타일러야 한다면 타일러야 합니다.
그리고 사랑으로 용서해야 합니다.
꾸짖는 일과 타이르는 일과 용서하는 일은 모두
형제가 다시 죄를 짓는 것을 막기 위한 일이고,
그래서 그 형제가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입니다.
그 모든 일은 ‘형제애 실천’에 포함됩니다.
따라서 ‘용서’는 나의 구원을 위한 일이기도 하고,
형제의 구원을 위한 일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용서를 하려고 해도 안 되는 경우가 실제로 많습니다.)
그럴 때에 해결책은 ‘기도’입니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루카 17,6).”
이 말씀의 뜻은,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으시다는 것을 믿어라.”입니다.
바로 그 믿음이 있다면, 사람의 힘으로는 용서가 안 되는
그 형제를 용서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할 수 있고,
도저히 회개시킬 수 없을 것 같은
그 형제의 회개와 구원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가 회개하고 구원받는 것은 나무를 바다에 심는 것처럼 불가능한 일이다.”
라고 생각되더라도,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으시다는 것을 믿고,
그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여기서 정말로 중요한 점은 자기 자신의 구원을 믿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나는 죄가 너무 커서 구원받는 것은 이제 틀렸다.” 라고
자신의 구원을 함부로 판단하면 안 됩니다.
주님이신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도 포기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그러니 자기 스스로 포기하면 안 됩니다.
(죄 가운데 가장 큰 죄는 바로 ‘구원받기를 포기하는 죄’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사람이 ‘나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가족이, 친구들과 친지들이, 교회 공동체가, 천국에 있는 이들이,
주보성인이, 수호천사가 나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성모님도 나를 위해서 기도하고 계십니다.
(어쩌면 나를 위해서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나 자신’뿐일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과 예수님은 우리가 지옥에 가는 것을 결코 내버려두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혹시라도 ‘남을 죄짓게 하는 죄’를 지었더라도,
또 형제를 용서하지 않고서 원한을 품고 있더라도,
그것으로 구원받을 가능성이 영영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생명의 시작과 끝을 결정하는 것은 사람의 권한이 아니라, 하느님의 권한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나는 이미 끝났다.” 라고 선언할 권한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스스로 용서와 구원을 받기를 포기하지 않는 한,
누구에게나 구원의 가능성은 남아 있습니다.

-조욱현신부-
복음: 루카 17,1-6: 죄의 유혹과 용서, 믿음의 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라고 경고하신 다음 형제자매를 용서하라고 하신다. 죄라는 것은 무엇인가? 죄는 비열하고 불쾌한 행동, 정당한 이유가 있든 없든 화내고 모욕하고 모함하고 다른 사람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짓들이 죄이다. 주님께서는 이런 일이 없을 수 없다고 하신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인간을 그렇게 만드신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로 부터는 어떤 악한 것도 비롯되지는 않는다. 그분은 모든 덕의 원천이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날까? 나약한 인간은 누구나 실수를 저지르고, 그래서 많은 일에 걸려 넘어지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남을 죄짓게 하는 사람은 불행하다고 말씀하신다. “불행하여라, 그러한 일을 저지르는 자!”(1절)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란, 신자들을 유혹에 빠지게 하고, 조심스러운 이들을 피곤하게 하며, 조심스럽지 못한 사람을 넘어지게 하고, 모든 일을 어지럽히고, 모든 사람을 혼란에 빠뜨리는 일이다. 죄짓게 하는 일이 있어서 죄가 생겨나기 때문에 죄를 짓게 하는 일이 곧 죄이다. “우리는 모두 많은 실수를 저지릅니다.”(야고 3,2) 실제로 우리는 많은 잘못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예수님은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루카 16,19-31)에서 벌을 받으며 괴로워하는 부자 이야기에 이어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회개하는 사람들을 용서하라고 하신다.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3절) 만일에 용서해 주지 않아 절망한다면 한 사람을 죄악에서 소생시킬 수 없게 만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모르고 저지르는 잘못이 사람들을 놀라게 하지만 그때마다 책망하고 바로잡아 주어 나쁜 습관이 굳어지는 것을 막아야 한다.
“그가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4절) 우리는 병을 한두 번 치료해주고 마는 것이 아니라 몇 번이라도 아플 때마다 치료해주는 의사들과 같아야 한다. 우리 모두가 나약한 존재들이기 때문에 실수할 수 있다고 한다면, 우리를 꾸짖고 벌할 수 있는 이들이 자비롭고 쉽게 용서하는 사람이기를 기도하여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2)
사도들이 주님께 청한다.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5절) 사도들은 믿음을 더해 주십사고, 그래서 믿음 안에서 더 강하게 해 주십사고 청하고 있다. 믿음은 우리에게 달려 있는 동시에 거룩한 은총의 선물이다. 믿음의 시작은 우리에게 달려있고, 하느님을 믿고 의지하는 가운데 유지되지만, 그러기 위한 확신과 힘은 거룩한 은총에서 온다. 그래서 “믿는 이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마르 9,23)
겨자씨 한 알은 아주 작아 보인다. 겉모습은 보잘 것 없어도 맛은 이보다 강한 것이 없다. 교회가 지닌 신앙의 뜨거운 열정과 내적인 힘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짓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루카 17, 3)
-한상우신부-
죄와 회개 사이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회개는 용서를
용서는 믿음을
더하게 합니다.
용서와 믿음을
먹고 사는 우리의
관계입니다.
용서와 믿음은
서로를
깨어있게 하는
생명입니다.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길이
용서와 믿음의
길입니다.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용서와 믿음을
더하여 주십니다.
용서 받은
사람이기에
우리도
용서해야 합니다.
용서는 죄에
갇혀 있는 우리를
풀어주어 다시
깨끗하게 해줍니다.
위령성월은
우리자신을
다시 보게합니다.
하느님께
우리의 잘못을
고백하며
생생한 용서로
이끌어주시길
간곡히 청합니다.
용서의 마음이 없다면
믿음도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 인생이
아름다울 수 있는 건
용서가 있기 때문입니다.
회개와 용서를
향하는 믿음의
시간 되십시오.
용서가 우리를
구원할 것입니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들은 용서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루카 17,4).
예수님께서 죄를 지은 후 회개하는 형제를 횟수에 제한없이 용서해 주라고 하십니다. 일곱 번이라는 횟수는 완전한 수, 그러니까 딱 일곱 번이 아니라 무수히 많은 수를 가리킵니다. 번번이, 계속,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을 지경에 이르기까지 죄를 짓더라도 회개한다면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이 용서의 원형이십니다.
"저희에게 믿음을 더해 주십시오"(루카 17,5).
용서에 대한 가르침에 이어 믿음 이야기가 나옵니다. 두 주제를 이어서 배치한 복음사가의 의도를 헤아려 봅니다. 사실 용서에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먼저 형제에 대한 믿음입니다. 죄를 지은 형제의 회개를 믿어 주고 또 반드시 변화되리라고 믿어 주어야 합니다. 회개의 증거나 결과물을 다그쳐서도 안됩니다. 증거가 있다면 믿음은 필요 없으니까요. 다른 하나는 보다 궁극적인 영역으로, 그 형제 안에 계신 하느님께 대한 믿음입니다. 그를 선하게 지으시고 선으로 이끄시는 하느님을 믿을 때 용서는 나의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이 됩니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루카 17,1).
믿음이 약하고 불안정한 이들은 똑같은 현상 앞에서도 넘어지기 쉽습니다. 그렇게 나약함과 부족함으로 죄 짓고 회개하는 이를 용서해 주지 않는다면, 그는 분노와 절망과 자포자기라는 죄까지 더해서 짓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죄가 죄를 낳는 고리를 끊어 주는 길은 용서밖에 없습니다. 용서는 그의 짐을 덜어 주는 탁월한 방법입니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루카 17,6).
형제에 대한 아주 작고 미소한 믿음이라도 있다면 그 형제는 변화될 것입니다. 어쩌면 거듭되는 용서에도 거듭거듭 죄를 짓는 형제에게 치밀어오르는 분노와 실망을 내려놓고 숨을 가다듬으며 외치는 용서는 돌무화과나무가 뽑혀서 바다에 심겨지는 것 같은 기적도 가능하게 할 것입니다.
제1독서는 지혜서의 시작 부분으로 우리에게 지혜을 소개합니다. 지혜는 "가르침을 주는 거룩한 영"(지혜 1,5)이고, "다정한 영"(지혜 1,6)이며, "온 세상에 충만한 주님의 영"(지혜 1,7)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시험하지 않는 이들을 만나 주시고 당신을 불신하지 않는 이들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이신다"(지혜 1,2).
지혜서 저자는 아버지의 지혜이신 주님을 만나는 길을 명료히 밝힙니다. 바로 믿음입니다. 내게 이득이 될지, 믿어도 손해는 없을지, 괜히 믿었다가 인생 더 꼬이지 않을지 간을 보며 떠보느라 경계선 위를 뱅뱅 맴도는 이에게 지혜는 자신을 드러내지도, 만나주지도 않습니다.
용서에도 그런 믿음이 필요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불신의 눈으로 경계하시지 않고, 떠보고 시험하시느라 두 얼굴을 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우리도 회개하는 형제에게 시험과 불신을 거두고 믿어 주어야 합니다.
"선량한 마음으로 주님을 생각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그분을 찾아라"(지혜 1,1).
이 말씀은 세상 통치자들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를 향하는 초대입니다. 우리가 형제를 시험과 불신 없는 선량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용서할 때, 우리는 그 형제 안에서 하느님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그 형제 안에서 우리에게 발굴되실 겁니다.
지혜가 얕고 우매한 우리는 반복되는 용서가 죄의 반복을 부를까봐 우려합니다. 그래서 용서에 인색해지고 자꾸 시험해보려 합니다. 하지만 다른 각도에서 보면, 사실 반복적인 용서는 형제를 지치지 않고 회개하게 만듭니다. 그게 더 중요하지요. 바로 그것이 하느님이 바라시는 바이고, 또 우리에게 하고 계시는 일입니다.
아직 용서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 있나요? 하느님의 용서를 배우는 오늘 되시길 축원합니다. 용서받는 사람은 죄인이고 용서하는 이는 하느님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자녀는 하느님처럼 용서하는 이입니다.

사랑의 홀로서기
-김찬선신부-
오늘 복음은 죄에 대한 얘기입니다.
그러나 앞부분은 남을 죄짓게 하는 나의 죄에 대한 얘기이고,
뒷부분은 남이 내게 죄짓고 용서 청할 때 어찌해야 할지에 대한 얘기입니다.
먼저 남을 죄짓게 하는 죄에 대해서 보면 많은 경우 우리는
내가 남을 죄짓게 하는 게 아니라 남이 나를 죄짓게 한다고 생각하는데
가장 나쁜 경우는 자기가 미워하고서는 그 인간이 너무 나쁜 놈이어서
미워할 수밖에 없었다고 하며 미움의 죄를 남 탓으로 돌리는 경웁니다.
고백성사를 주다 보면 신자들이 이런 식으로 고백하는 경우가 많고
그럴 경우 저는 남이 잘못해서 미워할 수밖에 없다면
사랑도 남이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해야만 할 수 있는 거냐고,
그리고 남과 상관없이 스스로 사랑할 수는 없는 거냐고 예리하게 찌르지요.
그런데 저 자신을 보면 저도 똑같은 짓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고백성사 볼 때 그렇게 똑같이 보지는 않지만 미움의 순간에는
나의 사랑이 부족해서 미워한다고 생각지 않고 미워할 수밖에 없는 놈이라
어쩔 수없이 미워한다는 그런 식인 겁니다.
또 다른 경우는 남의 죄를 보고 내가 흥분하거나 분노하는 경우지요.
왜 바보처럼 남의 죄 때문에 내가 죄를 짓는지
남의 죄에 대해 내가 흥분하고 분노하는지 어리석다고 자조하면서도
남의 죄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나도 죄짓게 되는 죄의 연대성이 있고,
불가피성도 있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주님께서는 다른 연대성과 불가피성을 말씀하십니다.
남이 나를 죄짓게도 하지만 내가 남을 죄짓게도 한다는 말씀입니다.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
여기에는 남을 죄짓게 할 의도가 없음에도 죄를 짓게 하는 죄도 포함됩니다.
정녕코 남을 죄짓게 할 생각이 없는데도 죄를 짓게 하는 것이 우리입니다.
무심코 뱉은 말인데 그것이 그에게 상처가 되어 그를 분노케 하는 것이나
껌을 딱딱 씹거나 음악을 크게 틀어 남을 화내게 하는 것이 그런 거지요.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런 죄의 연대성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주님께서 인정하는 듯이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시잖아요?
그런데 정확히 이해하면 주님께서는 인정하시지만 긍정하시지는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불행하다고 하시잖아요?
무관심하고 무관하게 살면 남의 죄 때문에 내가 죄 지을 일도 없으니
남의 죄 때문에 내가 죄짓는 것을 무관심한 무죄보다는 낫다고 할 수
있겠지만 나의 사랑이 부족하기에 연대하여 죄를 짓는 것은 미성숙한
결과이고 그래서 우리는 불행하고 극복해야만 하는 거지요.
곧 남 때문에 죄짓는 내가 아니라 남이 어떠하든 사랑하는 내가 되는,
그런 압도적이고 주도적인 사랑의 내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같은 맥락에서 용서에 대해서도 말씀하십니다.ㅍ
한 번 간신히 용서할 수 있는 그런 빈약한 사랑이 아니라
수백 번 용서청해도 다 용서할 수 있는
그런 압도적인 사랑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죄의 연대성과 불가피성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그리고 이런 압도적인 사랑을 할 수 있으려면 홀로 설 수 있어야 합니다.
의존하여 서는 사람과 의존하여 사랑하는 사람은
지팡이가 없으면 서 있을 수 없는 사람처럼 허약한 사람인 것이지요.
그러니 우리가 의존을 한다면 하느님께만 의존하고,
우리가 의존하여 사랑을 한다면 하느님 사랑에만 의존해야 합니다.
곧 하느님 사랑으로 내가 충만해지고 그래서
하느님 사랑으로 누구도 용서하고 몇 번이고 용서할 수 있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의 사랑을 받아 다시 말해서 인간의 사랑에 의존해서 사랑하려
하지 말고 하느님 사랑을 많이 받아 사랑하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7년 11월 13일 연중 제32주간 월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어느 날입니다. 황폐해진 땅을 보았습니다. 새도 날아오지 않고, 사람도 떠난 땅입니다. 매일 그 땅에 나무의 씨를 심었습니다. 원망은 걷어내고, 사랑을 심었습니다. 수십 년이 지나자 황폐했던 땅은 숲이 되었습니다. 그 숲에 새와 나비가 찾아왔습니다. 마을 떠났던 사람들도 돌아왔습니다. 마음의 상처를 보듬어 주고, 사랑하면 그 상처에서 향기로운 꽃이 핍니다. 상처 입은 치유자가 되어 타인의 아픔도 이해하고,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조재형신부-
쇠퇴해진 형제회를 보았습니다. 원망하지를 말고 사랑의 나무를 심을 것입니다. 형제회를 떠났던 사람들도 돌아와 향기나는 형제회가 되는 날을 봅니다.
---
결국 지혜는 사랑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참된 지혜는 하느님에게서 오고, 그 하느님께서 지니신 가장 우세한 속성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지혜로운 삶은 사랑의 삶입니다.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리 발버둥쳐도 지혜를 얻을 수 없습니다.
-양승국신부-
---
사람은 결코 유혹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런데 유혹은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인간을 이용합니다. 그리고 유혹은 사람들이 자신을 그 도구로 사용되도록 허용함으로써 죄에 떨어지게 됩니다. 내가 동의함으로써 악의 상태에 머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혹이 없기를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오히려 극복할 힘과 능력, 지혜를 키워야 합니다. 유혹은 언제나 곁에 있습니다.
결국 우리자신이 용서가 필요한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할 때 비로소 타인을 용서할 수 있게 됩니다. 또한 남을 용서 하기위해서는 내가 이미 용서 받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무리 잘 살려고 애를 쓰고 남에게 피해를 안 주었다고 장담한다 해도 그것이 오히려 남에게 상처를 주고 아픔을 주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잘한다는 것이 하느님 앞에서는 부끄러움 일 수 있습니다.
-반영억신부-
---
신앙인은 자기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노력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서도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남의 구원을 위해서 노력하는 것은 형제애를 실천하는 것이고,
형제애 실천은 신앙인의 본분이고 의무입니다.)
-송영진신부-
---
죄와 회개 사이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회개는 용서를
용서는 믿음을
더하게 합니다.
용서와 믿음을
먹고 사는 우리의
관계입니다.
용서와 믿음은
서로를
깨어있게 하는
생명입니다.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길이
용서와 믿음의
길입니다.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용서와 믿음을
더하여 주십니다.
용서 받은
사람이기에
우리도
용서해야 합니다.
용서는 죄에
갇혀 있는 우리를
풀어주어 다시
깨끗하게 해줍니다.
위령성월은
우리자신을
다시 보게합니다.
하느님께
우리의 잘못을
고백하며
생생한 용서로
이끌어주시길
간곡히 청합니다.
용서의 마음이 없다면
믿음도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 인생이
아름다울 수 있는 건
용서가 있기 때문입니다.
회개와 용서를
향하는 믿음의
시간 되십시오.
용서가 우리를
구원할 것입니다.
-한상진신부-
---
왜 바보처럼 남의 죄 때문에 내가 죄를 짓는지
남의 죄에 대해 내가 흥분하고 분노하는지 어리석다고 자조하면서도
남의 죄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나도 죄짓게 되는 죄의 연대성이 있고,
불가피성도 있습니다.
정녕코 남을 죄짓게 할 생각이 없는데도 죄를 짓게 하는 것이 우리입니다.
무심코 뱉은 말인데 그것이 그에게 상처가 되어 그를 분노케 하는 것이나
껌을 딱딱 씹거나 음악을 크게 틀어 남을 화내게 하는 것이 그런 거지요.
그런 사람은 불행하다고 하시잖아요?
곧 남 때문에 죄짓는 내가 아니라 남이 어떠하든 사랑하는 내가 되는,
그런 압도적이고 주도적인 사랑의 내가 되는 것입니다.
-김찬선신부-
'오늘의 복음 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9년 11월 13일 연중 제32주간 수요일 (0) | 2019.11.12 |
---|---|
2019년 11월 12일 연중 제32주간 화요일 (0) | 2019.11.11 |
2019년 11월 10일 연중 제32주일 (0) | 2019.11.09 |
2019년 11월 9일 토요일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 (0) | 2019.11.08 |
2019년 11월 8일 연중 제31주간 금요일 (0) | 2019.11.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