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6월 21일 연중 제11주간 금요일
성 알로이시오 곤자가 수도자 기념일
알로이시오 곤자가 성인은 1568년 이탈리아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의 대를 이어 군인이 될 처지였던 그는, 귀족 사회의 폭력과 방종에 실망하고 선교사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 찼다. 그는 17세 때 재산 상속의 모든 권리를 포기한 채 로마에서 예수회에 입회하였다. 성인은 로마 전역에 흑사병이 번지자 환자들을 정성껏 돌보다가 감염되어, 1591년 23세의 젊은 나이에 신학생 신분으로 세상을 떠났다. 1726년 베네딕토 13세 교황은 그를 성인의 반열에 올리며 청소년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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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의 재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다.
(마태오 6,19-23)
For where your treasure is,
there also will your heart b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내가 자랑해야 한다면 나의 약함을 드러내는 것들을 자랑하렵니다.”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보물을 쌓으라고 하시며,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고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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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재물에 대한 경고의 말씀을 전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주 단순하고 일반적인 경험에서 시작하십니다. 인간의 소유욕은 사실 가장 근본적인 인간 본성에 속합니다. 그래서 재산을 얻고, 얻은 재산을 지키고 늘리려고 마음을 쓰며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좀과 녹이 값비싼 옷과 가구들을 못 쓰게 만들 수도 있고, 도둑이 뚫고 들어와서 아끼던 것을 훔쳐 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십니다.
그래서 하늘에 보물을 쌓으라고 하십니다. 하느님께 바치는 것은 온전히 그 가치를 인정받고 보존될 수 있음을 강조하십니다. 하느님께 바치는 것은 무엇보다 하느님께 드리는 마음의 봉헌이고, 하느님의 뜻을 생각하며 올바르게 쓰는 재물이며, 또 하느님께 직접 봉헌하는 감사의 표현입니다.
결국 그 모든 가르침은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는 것으로 표현됩니다. 우리의 마음이 재물을 쌓고 늘리는 데 집착해 있으면, 어느 한순간 재물과 함께 마음도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의 재물에 마음을 두고 산다면,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재물에도 자유롭고, 하늘에 쌓아 둔 재물은 영원히 안전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가르침은 이제 눈에 대한 것으로 옮겨 갑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라는 의미도, 눈이 마음의 등불이며, 그 사람의 모든 마음은 눈을 통하여 반영된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우리 마음이 세속적인 재물에만 쏠려 있다면, 우리는 결국 영적인 소경이 되어, 어둠 속을 헤매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을 바라보고 하늘에 쌓은 재물을 바라본다면, 우리 마음이 자유롭고 밝을뿐더러, 이 세상 모든 것이 환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것입니다. (이성근 사바 신부)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실제로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 내게 아픔과 상처를 주었던 사람에 대해서 이런 말을 종종 하지 않습니까?
“그 사람을 절대로 용서할 수 없어. 앞으로 다시는 보지 않을 거야.”
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가질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삶 안에서 그러한 생각을 말로써 다른 이들에게 전하는 사람을 그 누구도 존경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용서의 삶, 사랑의 삶을 실천하는 사람은 어떠합니까? 사람들은 그를 다시 보면서 존경을 표시합니다. 이렇게 어떠한 상황에서도 용서를 실천하는 사람은 존경을 받지만, 복수를 꿈꾸면서 남들을 향한 분노를 품고 있는 사람은 그 누구에게도 존경을 받지 못합니다.
내 자신이 남들로부터 인정받고 존경받고 싶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내 자신의 마음부터 바꿔야 합니다. 즉, 다시 한 번 상대방을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어느 순간 칭찬할 수 있는 한 가지라도 찾을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남을 칭찬하는 것이 자신의 자존감을 크게 상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남들에게 보이는 자신의 이미지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면서, 자기 자신을 칭찬하는 것과 동일한 효과를 얻을 수가 있게 됩니다.
이렇게 내 이웃을 다시 한 번 바라보는 삶은 지금을 살고 있는 스스로에게도 유익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모습을 하느님 아버지께서도 좋아하시는 모습입니다. 왜냐하면 하늘에 보물을 쌓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좀도 녹도 망가뜨리지 못하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오지 못하며 훔쳐 가지도 못하는 하늘에 쌓는 보화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하신 ‘눈은 몸의 등불이다.’라는 말씀에 더 깊이 묵상하게 됩니다. 지금 어떻게 보십니까? 혹시 대충 보고서 쉽게 판단하고 단죄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물건을 구입할 때에도 꼼꼼하게 살펴야 가장 좋은 것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얼핏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한 번 보고 또 볼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우리들을 바라보는 사랑의 시선에 동참해서 사랑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모습을 갖춰야 남들로부터도 존경과 사랑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글 쓰는 것이 어렵다고 말하는 사람을 많이 봅니다. 그 이유를 물으면 하나같이 이렇게 말하지요.
“글 쓰는 재주가 전혀 없어요.”
그러나 정말로 그럴까 라는 의문이 생깁니다.
중국 송나라 때의 문인 구양수는 글 잘 짓는 방법으로 삼다(三多)를 꼽았습니다. 그 유명한 다독(多讀), 다작(多作), 다상량(多商量)입니다.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것에 익숙해져야 글쓰기의 기초를 이룰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생각하는 사람은 글 쓰는 것을 그렇게 어려워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글 쓰는 것을 어려워하는 것은 이것들을 하지 않았기 때문은 아닐까요? 읽고 쓰고 생각하는 것은 자신의 재주와 상관있는 것이 아니라, 본인의 노력과 연관이 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자신이 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도 다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이유 같지 않은 이유를 붙여서 하지 못할 뿐, 충분히 할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이지요. 하지 못하는 이유를 찾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있는 노력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충분히 다 할 수 있습니다.

눈 맑게 하기
-전삼용신부-
김상운 기자의 지인이 어느 날 딸의 일기장에 “죽고 싶다”라는 내용의 글이 적힌 것을 보았습니다. 어릴 땐 책 읽는 것을 좋아했는데 지금은 소위 날라리 아이들과 어울리며 가수가 되겠다고 노래만 듣는다고 합니다. 아마 범생이 오빠에게 부모의 모든 관심이 쏠리는 것에 대한 반항인 것 같습니다.
“수진아, 너 나중에 뭐가 되려고 그러니? 이젠 제발 정신 좀 차려!”
엄마는 혼내기도 하고, 위협하기도 하고, 사정도 해보았습니다. 그러나 수진이는 점점 더 멀어져갔고 대화도 완전히 끊겨버렸습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었던 그녀는 한 학부모 교육 프로그램에 등록하였습니다. 교육을 받으며 분명히 깨달은 것은 ‘문제가 수진이가 아니라 자신에게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날 밤 수진이에게 학원 다니기 싫으면 안 다녀도 된다고 말했습니다. 수진이는 다니던 학원을 모조리 끊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철저하게 ‘딸의 눈’으로 모든 것을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딸이 좋아하는 라디오 음악프로도 함께 듣고, 가사도 함께 외우고, 노래도 함께 따라 불렀습니다. 딸이 좋아하는 가수에 관한 기사가 나오면 스크랩도 해주었습니다. 날라리 친구들을 데려오면 진심으로 따듯하게 대해주었습니다. 그러면서 딸이 이해가 되었고 왜 음악에 빠져들었는지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어느 날 등교하러 집을 나서던 수진이가 물었습니다.
“엄마, 내가 공부 못해도 나 사랑하지?”
“물론이지. 넌 언제나 내 딸이니까.”
어느 날 그녀가 식사를 준비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소리도 없이 들어온 수진이가 뒤에서 슬며시 그녀의 한 손을 잡았습니다.
“엄마, 나 이번 중간고사에서 100등도 넘게 올랐어. 반에선 5등!”
그녀의 입이 딱 벌어졌습니다.
“엄마, 감사합니다. 기다려줘서.”
수진이를 꽉 껴안은 엄마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습니다.
[출처: ‘왓칭 2; 공간을 넓힐수록 정말 ‘나’가 마법처럼 커질까’, 김상운, 정신세계사]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눈은 몸의 등불”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혹은 많은 경우 “눈은 마음이 창”이라고도 합니다. 마음이 눈의 맑기를 결정하고 눈의 맑기가 몸을 밝기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눈의 이야기를 하시기 전에,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고 하늘에 쌓아두라고 하십니다. 눈과 보물이 무슨 상관일까요? 예수님은 “사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바라는 것들이 있는 곳에 마음도 있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재물을 좋아하면 마음은 이 세상에 머물게 됩니다. 이 세상은 땅을 뜻합니다. 땅의 것을 좋아하면 마음은 땅에 머물게 되고 눈은 그 땅의 흙먼지와 같이 흐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눈은 마음의 창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사람의 눈을 통해 그 사람이 어디에 머무는 사람인지 어렵지 않게 알게 됩니다. 땅에 머무는 사람의 눈빛은 “나는 너를 이용하겠다!”고 말합니다.
수진이 어머니는 처음에 마음을 이 세상에 두었습니다. 세상 것을 희망하는 부모였습니다. 오빠처럼 수진이도 공부를 잘 해서 자신에게 자랑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 눈빛을 수진이가 읽은 것입니다. 세상에 마음을 둔 사람의 눈빛은 ‘너 왜 그렇게 살아서 날 만족스럽게 하지 못하니?’라는 비난의 눈빛입니다. 그런 비난의 눈빛을 받은 사람은 ‘난 저 사람의 만족을 위해 희생해야 하는 희생양이구나!’라고 여겨 자존감을 잃게 됩니다. 칭찬해주어도 역시 내가 좋아서 칭찬하는 것이 아니라 나 때문에 자신이 자랑스러워지니까 칭찬해주는 것임을 눈빛을 통해 읽어낼 수 있습니다.
나의 눈빛을 맑게 해야 합니다. 그 맑은 눈으로 바라봐줘야 상대도 자존감이 높아집니다. 맑은 눈은 이 세상에 대한 애착을 끊고 하늘의 것을 바랄 때 얻어집니다. 땅을 기어 다니는 뱀으로 상징되는 것이 자아입니다. 자아의 욕구는 눈을 흐리게 만듭니다.
따라서 내가 죽으면 눈이 맑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나의 눈으로 바라보면 상대는 항상 비난받는 느낌을 받아 주눅 들거나 화가 나기도 합니다. 나로 바라보면 나의 눈빛은 뱀의 눈빛이 되고 하느님으로 바라보면 하늘의 눈빛이 됩니다. 세상 것에 대한 욕망을 버려야겠습니다. 아니, 나를 버려야합니다.
그리고 하늘에 계신 예수님의 눈으로 세상과 사람을 바라봐야겠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내가 아닌 예수님에 의해 대접받는 느낌을 받을 것이고 그렇게 돌려받는 사랑도 많을 것입니다. 눈빛은 나의 주인을 누구로 정하느냐에 따라 저절로 바뀝니다.

-조재형신부-
서점에서 책을 구했습니다. 조정래 선생님의 신작 ‘천년의 전설’입니다. 조정래 선생님의 작품을 좋아합니다. ‘아리랑, 태백산맥, 한강’은 한국의 근, 현대사를 볼 수 있는 장편 소설입니다. 최근에는 황홀한 글감옥, 정글만리를 읽었습니다. 이번에 신작 천년의 전설을 출간하였고, 앞으로는 인간의 영혼과 내세에 관련된 글을 쓰겠다고 합니다. 올해 77세인 조정래 선생님이 책을 더 쓴다면 80이 넘은 나이에도 글을 쓰실 것입니다. 조정래 선생님에게 그의 작품은 아마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물’일 것입니다. 그분의 삶과 열정이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네잎 클로버는 ‘행운’을 상징하고, 세잎 클로버는 ‘행복’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행복을 상징하는 세잎 클로버는 쉽게 찾을 수 있지만, 행운을 상징하는 네잎 클로버는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행운이라는 보물을 찾는다면 저는 가난합니다.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남보다 체력이 뛰어나지 않습니다. 예술적인, 문학적인 감각이 발달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행복이라는 보물을 찾는다면 저는 풍족합니다. 안식년에 머물 수 있는 숙소가 있습니다. 휠체어에 의지해야 했던 어머니가 조금씩 걷게 되었습니다. 조카들이 모두 직장생활을 잘하고 있습니다. 새벽에 일어나 기도할 수 있는 습관이 있습니다. 신앙을 가진 집안에서 태어났고, 하느님의 자비로 여기까지 올 수 있었기에 풍족합니다.
오늘 축일로 지내는 알로이시오 곤자가 성인은 이탈리아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부유했지만 17세 때에 재산 상속의 모든 권리를 포기한 채 예수회에 입회하였습니다. 성인은 로마 전역에 번진 흑사병의 환자들을 정성껏 돌보다가 감염되어, 23세의 젊은 나이에 신학생으로 하느님 품으로 갔습니다. 사제가 되지는 못했지만, 세상의 것을 사랑하기보다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였습니다. 이웃에 대한 헌신과 사랑은 성인이 하늘에 쌓은 ‘보물’이었습니다.
오늘 제1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자신이 쌓아온 보물을 담담하게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해서 옥살이도 많이 하였습니다. 매질도 지독하게 당하였습니다. 유다인들에게 다섯 차례나 맞았습니다. 채찍으로 세 번, 돌질을 당한 것이 한 번, 파선을 당한 것이 세 번이었습니다. 강도의 위험, 동족에게서 오는 위험, 광야에서 겪는 위험, 바다에서 겪는 위험, 거짓 형제들 사이에서 겪는 위험이 있었습니다. 모든 교회에 대한 염려가 늘 마음에 있었다고 합니다. 바오로 사도에게는 ‘그리스도를 따름’이 가장 소중한 ‘보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재물을 하늘에 쌓아 두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늘에 쌓아 두어야 할 재물은 어떤 것인가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보화’는 금과 은이 아닐 것입니다. 보험과 적금 통장도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보화는 십자가입니다. 바로 이웃을 위한 희생과 봉사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보화는 사랑입니다. 죄인까지도 품어주는 사랑이며, 아무런 조건 없이 베푸는 사랑이며, 수난과 고통까지도 감수하는 사랑이며, 끝까지 믿어주는 사랑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행운이라는 보물을 찾으려고 한다면 하늘에 보물을 쌓을 수 없습니다. 행운은 성공, 재물, 명예, 권력의 다른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행복이라는 보물을 찾으려고 한다면 하늘에 보물을 쌓을 수 있습니다. 행복은 희생, 나눔, 헌신, 사랑의 다른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자랑하려거든 주님을 자랑하십시오!
-양승국신부-
전도 여행 중이던 바오로 사도가 이곳 저곳 신생 공동체들을 바라보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들이 버젓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화자찬이었습니다. 스스로에 대한 지나친 과대평가였습니다.
“내가 누군지 알아? 나는 순수 혈통의 히브리 사람이야!” “나는 국립 율법학교 정식 졸업생이야!” “나는 예루살렘 중심부에 살아!” “나는 일주일에 꼭 두번은 단식을 해! 나처럼 거룩한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 그래!” “나는 매일 성전에서 적극적으로 봉사활동을 하지!”
이 시대도 그런 사람들 참 많습니다. 입만 열만 자신의 지난 삶, 자신의 업적, 자신이 쌓아올린 탑을 찬양하는 말을 폭포수처럼 쏟아냅니다. 듣고 있노라면, 부끄러움의 유발자는 그인데, 왜 민망함과 부끄러움은 나의 몫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 이후 완전 환골탙퇴한 바오로 사도, 삶의 주도권이 완전히 그분께로 건너간 바오로 사도의 시선으로 바라보니, 너무 어이가 없어 웃음이 터져나올 지경이었습니다.
이제 바오로 사도는 잘 알게 되었습니다. 순수 혈통의 이스라엘 백성, 히브리인 가운데 히브리인, 열두 지파 가운데 베냐민 지파 소속, 여드레 만에 정식으로 받은 할례...이런 것들이 이제는 다 부질없고 소용없는 것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오히려 그런 특전들이 주님께로 다가서는 데 있어서 장애물이요 걸림돌이 된다는 것을 말입니다,
한때 자화자찬이라면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사람이었던 바오로 사도였기에, 그리고 자화자찬이라는 것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를 온 몸으로 체험한 바오로 사도였기에, 또한 칭찬은 자신이 아니라 이웃들, 더 나아가서 주님으로부터의 칭찬이 가장 큰 칭찬이라는 것을 잘 알게 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외칩니다.
“자랑하려거든 주님을 자랑하십시오!”
이어서 바오로 사도는 장엄한 어조로 주님을 자랑합니다. 주님의 일꾼인 자신이 그분을 온 세상에 전하기 위해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지를 자랑합니다. 그분을 선포하기 위해 노력하다가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었는지를 자랑합니다.
“마흔에서 하나를 뺀 매를 유다인들에게 다섯 차례나 맞았습니다.”(2코린토 11장 24절) 왜 마흔대가 아니라 서른 아홉 차례 매를 맞았는가? 하는 것은, 구약 성경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마흔 대 까지는 매질하여도 괜찮지만 그 이상은 안된다.”(신명기 25장 3절)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누군가로부터 기둥에 온 몸을 결박 당한 채, 심한 매를 맞아본 적이 있습니까? 바오로 사도가 하도 담담하게 말씀하셔서 그렇지, 공개석상에서 매를 맞는다는 것, 엄청나게 수치스런 일이고, 평생에 걸친 트라우마를 안겨주는 고통스런 일입니다.
그런데 바오로 사도는 틈만 나면 공개석상에서의 매질을 당했습니다. 매를 맞은 이유는? 유다인들이 십자가에 못박은 그분이 메시아라고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구원이 더 이상 유다인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것이라고 외쳤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가는 곳마다 몰려든 수많은 군중들의 모습을 고깝게 본 지역 관리들로부터 치안 유지를 방해했다는 죄목으로 또한 매를 맞았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몸에 가해진 매는 시늉만 내는 정도의 매가 아니라, 한 대 맞으면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의 치명적인 매였습니다. 따라서 전도 여행 중이던 바오로 사도는 혹독한 매 탓인지, 안색이 늘 좋지 않았고 병든 사람 같았습니다. 리스트라에서 심한 매를 맞고 난 바오로 사도는 의식을 잃게 되었고, 집행자들은 죽은 것으로 생각하고, 성밖으로 던져버리기까지 했습니다.
럭셔리한 전도 여행길이 아니라 사방이 적대자들로 우글거리는 여행길, 갖은 위험과 생명의 위협이 도사린 고통스런 여행길을 걸으면서도, 바오로 사도의 머릿속은 신생 그리스도 교회에 대한 걱정과 염려로 가득했습니다.
끔찍한 육체적 정신적 고통 속에서도 바오로 사도는 주님을 자랑했습니다. 자신의 약점을 자랑했습니다. 부족한 죄인인 자신 안에 활동하시는 주님을 자랑했습니다.

나의 보물 1호
-반영억신부-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 눈은 몸의 등불이다”(마태6,21). 하신 예수님의 의중을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 '눈이 몸의 등불'이라는 말은 곧 한 사람이 제대로 살아가려면 그 안에 빛이 있어야 하고, 그 빛은 '눈'의 상태에 의존한다는 뜻"입니다. 맑은 눈을 가진 사람은 관대한 사람이요, 성하지 못한 눈을 가진 사람은 질투심 많은 인색한 사람입니다. 관대한 마음을 가질 때 몸 안이 빛으로 가득 차 영적으로 건강한 사람이 되고, 인색한 마음을 가질 때 어둠 속에 싸이게 됩니다. 이기적인 보물에 집착하는 돌 같은 마음을 살 같이 부드러운 마음으로 변화시켜 주시길 청합니다.
나의 보물 1호는 무엇인가요? 그 보물을 이 지상의 삶이 끝났을 때 가져갈 수 있나요? 장례행렬 뒤를 따라가는 이삿짐 트럭을 본적이 없답니다. 천상을 그리워하면서도 마음은 세상에 고정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요? 보물1호가 무엇인지 중요합니다. 그것에 마음을 빼앗길 수밖에 없을 테니까요. 예수님으로 족합니까? 감히 '예'라고 하지는 못하겠습니다. 예수님으로 족하다면 그분께서 남겨주신 공덕을 가져갈 수 있을 것입니다. 남에게 베푼 것, 곧 사랑, 애덕, 섬김, 인내, 양선함, 다정함.....이것들이 얼마나 큰 보물인지요!
이 시간 맑은 눈을 가진 관대한 사람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감히 종이 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서로를 지배하고 더 많이 소유하려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서로를 피곤하게 합니다. 서로를 섬기면 기쁨과 평화가 넘치게 되지만 끝내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주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아버지 하느님께 순종하심으로써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믿는 이의 삶은 당연히 예수님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만 머리로는 아는데 행동으로 옮기지 못할 때가 너무도 많습니다. 구슬이 서 말이라 해도 꿰어야 보배인데 바보처럼 결심만 합니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마태6,21) 하신 예수님의 의중을 살펴 부디 맑은 눈으로 주님을 닮을 수 있는 은총의 날이 되길 희망합니다. 한 점 욕심이 없는 마음으로 세상을 보면, 보이는 모든 것이 하느님께서 주신 귀한 선물이요, 모든 것이 기쁨입니다. 주님의 눈으로, 주님의 마음으로 볼 것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늘의 문은 여기 삶의 자리에서 열리고 있는 만큼 인색함으로 세상에 매이지 말고 마음이 늘 하늘의 보물을 향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자석처럼 내 마음을 끌어당기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면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헌금하라는 이야기일까?
-남상근신부-
‘보물을 땅이 아니라 하늘에 쌓아라!’ 하늘에 어떻게 보물을 쌓을 수 있나요? 신부님들이 혹시 이 말씀을 이렇게 잘못 전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늘에다 쌓으라는 말은 교회에 헌금하라는 말씀입니다. 교무금 넉넉히 책정하고 주일 헌금 이왕이면 한 장 더 내십시오.” 천만의 말씀입니다. 이 보물의 이야기는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마태 6,1) 하신 말씀에 이어집니다.
이 땅에다 보물을 쌓아 놓은 사람은 저 하늘나라에 가서 받을 상급이 하나도 없다! 이런 식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지혜와 지식은 풍성한 구원이 되고 주님을 경외함은 시온의 보화가 되리라.”(이사 33,6) 이것이 보물입니다. 보물은 주님의 구원, 지혜, 주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그 진리를 올바로 알게 돼서 그 주님을 내가 경외하게 되면 이미 그 안에 보물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 결국 그 보물을 담고 있으면 그는 하늘이 된 것입니다. 이미 그는 하늘 안에 보물을 쌓은 사람입니다. 그 무엇도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대 데레사 성녀는 그렇게 고백하셨다지요. 하느님을 소유한 사람은 모든 것을 소유한 것이라고.
하느님은 우리에게 무언가 계속 요구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조욱현신부-
복음: 마태 6,19-23: 너희의 재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너희는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마라.”(19절)고 하신다. 이것은 무슨 의미이냐? 마음이 진흙 속에서 뒹군다면, 그 마음이 어떻게 깨끗할 수 있겠는가? 마음이 하늘을 향해 있다면 그 마음은 깨끗할 것이다. 하늘에 있는 것은 모두 깨끗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귀중히 여기는 것은 끝까지 지킬 수 없는 것은 사실이며, 결국 남의 손에 넘겨주는 것이다. 이것에 마음을 쓰고 온통 신경이 거기에 가 있게 되면 마음이 재물에 사로잡혀 어두워지고 만다는 것이다. 그 때에 우리는 참으로 우상숭배자가 된다. 하느님보다 그 재물이 우선하고 그 재물 때문에 우리는 하느님을 만나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원할 것에 대하여 생각하고 생활을 위해 노력하라고 하시며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20절)고 하신다. 여기에 나오는 하늘은 “하늘은 주님의 하늘”(시편 115,16)에 나오는 하늘이다. 우리는 지나가 버리는 것이 아닌 영원히 계속되는 것에 마음을 두고 그것을 보물로 삼아야 하므로, 여기서 말하는 하늘은 영적인 하늘이다. “첫 번째 하늘과 땅은 사라질 것”(묵시 21,1)이기 때문이다.
유대인들 사이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모노바즈라는 사람은 흉년이 들었을 때에 그의 모든 재물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그의 형제들은 사람들을 보내어 “그대의 조상들은 재산을 모았고 그들의 유산에 재산을 더 보태었는데, 이제 그대는 그대의 재산과 조상의 재산을 모두 흩어 버렸도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그들에게 말하기를 “나의 조상은 땅을 위하여 재산을 모았고 나는 하늘을 위하여 보화를 모았다. 우리 조상은 사람의 손이 다스릴 수 있는 곳에 보화를 쌓았으나, 나는 사람의 손이 통치할 수 없는 곳에 보화를 쌓아 놓았다. 나의 조상들은 이 세상에 보화를 모았고 나는 장차 올 세상에 보화를 모았다.”고 했다.
우리는 우리가 갖고 있는 재물이 일시적으로 창조주 하느님께로부터 받아 우리가 관리하고 있는 것임을 알고, 창조주 하느님의 뜻에 맡게 사용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우상숭배라는 것은 우리의 삶 속에서 진정으로 흠숭 받으셔야 할 하느님의 자리에 재물이 차지하게 되는 것이 우상이다.
예수님께서는 “눈은 몸의 등불이다.”(22절)라고 하신다. 눈은 우리의 정신을 가리킨다. 눈이 어두워지면 다른 지체들도 기능이 약해지듯이, 정신이 타락하면 우리의 삶은 악으로 가득 찰 것이다. 우리가 육신의 눈을 건강하게 지키려 하듯이 늘 건전한 정신을 지키려 해야 한다. 우리의 분별력이 무너지면 모든 행위들이 뒤죽박죽이 된다. 그래서 예수님은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면 그 어둠이 얼마나 짙겠느냐?”(23절) 하신다. 모든 것을 올바로 보고 실천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마라.(마태 6, 19)
-한상우신부-
보물은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에 쌓아야 할
하늘의 것입니다.
하늘의 것은
서로의 마음을
살리며 풍요롭습니다.
마음을 밝히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그분은 우리
삶의 등불이며
참된 빛이며
하늘의 보물입니다.
마음에 계셔야 할
유일한 하느님
나라입니다.
하늘에
쌓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고서는
밝을 수 없고
맑을 수 없습니다.
사랑의 빛이며
사랑의 보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삶의 분명한
목적과 방향이
되십니다.
빛을 만나듯
보물을 만나고
보물과 함께 행복한
소중한 만남이
우리의 삶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또한 하늘에
쌓아야 할 소중한
보물입니다.
우리의 모든 삶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쌓으십시오.
그것이 어둠을
밝히는 맑은 빛입니다.

"너희는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마라."(마태 6,19)
-오상선신부-
"보물"은 통상적으로 높은 가치로 환산될 수 있는 돈이나 재물을 가리킵니다. 이는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선으로도, 악으로도 작용할 수 있지요. 재물에는 사람이 소유하고 사용할 권리, 축적하고 안정을 누릴 권리가 담겨 있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끌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선한 힘도 악한 힘도 재물의 매력을 자기 것으로 취하기를 원합니다. 재물의 매력이 선하게 쓰인 예는 "자선"이고, 악하게 쓰인 예는 "자신을 위하여 땅에 쌓아 두는 것"이라 할 수 있지요. 자선은 재물의 주인이 하느님이시고, 또 재물의 종착지가 자신이 아님을 인정할 때 가능합니다.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마태 6,20)
썩고 망가지고 빼앗기기도 하는, 땅에 쌓은 보물에 비해 하늘에 쌓은 보물은 물성과 시간성에 영향을 받지 않아 길이 보존할 수 있고 언제라도 증식이 가능합니다. 단, 내 의지가 아니라 하느님 뜻 안에서 그렇다는 말입니다.
"사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마태 6,21)
각자가 보물로 여기는 것은 조금씩 다를 수 있습니다. 누구에게는 돈과 재물이고, 누구에게는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이며, 누구에게는 자기 육신이고, 누구에게는 명예입니다. 누구에게는 재능이고 또 누구에게는 자존심이지요. 또 라우렌시오 성인처럼 가난한 이들이 교회의 보물이라고 말씀하신 분도 있습니다. 그만큼 보물은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겠지요.
나의 보물이 무엇인지 알고 싶을 때, "지금 내 마음이 어디 있지?" 하고 물으면 답이 금방 나올 겁니다. 내 마음이 온통 하느님께 가 있으면 내 보물은 하느님이고, 내 마음이 재물에 가 있으면 그게 내 보물입니다. 그리고 그 보물이 땅에 속하는지 하늘에 속하는지는 누구보다 자신이 잘 알 것입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어리석게 보이는 것을 무릅쓰고 코린토인들의 눈높이에서 자기를 자랑합니다. 그들 눈에 영화롭게 보이는 "속된 기준"(2코린 11,18)에 걸맞게 땅의 원리에 맞추어 자기 자랑을 하다가, 결국 "내가 자랑해야 한다면 나의 약함을 드러내는 것들을 자랑하렵니다."(2코린 11,30)라고 다소 엉뚱한 쪽으로 방향을 돌리지요. 그동안 나열한 자랑거리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진짜 자랑거리, 하늘의 보물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겁니다.
왜 그럴까요? 사도 바오로는 인간의 약함에 깃든 하느님의 힘, 은총을 깨달았기에 그랬을 겁니다. 실상 보물은 흔히 생각하듯 재물이나 명성에 있지 않고 우리의 약한 곳에 있습니다. 바로 거기, 가난하고 초라하고 수치스럽기까지 한 한계점에 하느님의 힘이 깃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강점이 보물이라고 생각하지만, 하느님은 우리의 약점을 보물로 보십니다. 거기가 아니고서는 그분께서 우리 존재에 뚫고 들어오실 틈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약함에 하느님의 힘이 드러나기에 우리의 보물이라는 말입니다.
화답송에서는 곤경 중의 의인, 가난한 이, 두려워하는 이, 가련한 이를 통해 하느님의 구원을 노래합니다. 가난하지 않다면, 약하지 않다면 구원은 원래부터 내 능력에 속한 일일 뿐 하느님과는 별개의 문제가 되었을 겁니다.
땅에서는 땅의 원리에 따라 모으고 축적하고 움켜쥐고 과시하며 보물을 쌓는 반면, 하늘에서는 땅에서 버린 만큼, 나눈 만큼, 내놓은 만큼, 손을 펼친 보물이 쌓여갑니다. 하늘의 보물은, 땅에서 가난하다고, 약하다고, 느리고 효율도 떨어지고 바보같다고 손가락질 받던 것들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오늘 예수님은 "눈은 몸의 등불이다."(마태 6,22)고 하십니다. 진정한 보물을 제대로 알아보는 눈은 몸 전체를, 존재 전체를 환히 비춥니다. 그러니 어느 보물에 눈길을 주고 사느냐에 따라 한 존재의 인생이 달라지겠지요. 세상 이재에 밝은 눈으로 땅에 보물을 쌓고 살지, 영의 이치에 밝아 하늘에 보물을 쌓을지는 각자가 무엇을 보물로 여기는지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니 벗님이여, 자, 무엇을 자랑하시렵니까? 벗님의 참 보물은 무엇입니까?

병을 자랑하듯 약함을 자랑하는
-김찬선신부-
내가 자랑해야 한다면 나의 약함을 드러내는 것들을 자랑하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자랑을 합니다.
물론 자랑하고 싶어서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랑하는 사람을 부끄럽게 하기 위해서 자랑하고,
더 나아가 진정으로 자랑해야 할 것이 뭔지 알게 하려 자랑하는 거지요.
우선 출신성분에 대해 자랑을 합니다.
좋은 가문에서 태어난 것을 우리는 자랑하고 반대로
별 볼 일 없는 집안에서 태어나면 부끄러워하는데
세속적 가문이 아니라 영적인 가문이 좋은 것을 자랑해야 하는 거지요.
저로 말하면 안동 김가의 가문이 아니라 예수 가문을 자랑해야 하지요.
다음으로 바오로 사도는 자기가 한 일과
그 일을 하느라 자기가 당한 수고수난에 대해 자랑합니다.
이는 남자들이 군대에서 고생한 것을 자랑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고생한 것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실은
그 고생을 겪고 이겨낸 것을 자랑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가 자랑해야 할 것은 고생 그 자체가 아니라
그 고생을 끝까지 견뎌낸 인내심과 끈기여 하고
인내심과 끈기가 아니라 끈기 있게 인내케 한 사랑이어야 하며,
그 사랑도 다른 사랑이 아니라 주님께 대한 사랑이어야 하지요.
인내심과 끈기가 대단한 것도 자랑할 만하지만 얻는 것 없이
그저 끝까지 얻어터진 것을 자랑하는 거라면 뭣 때문에 자랑합니까?
나에 대한 사랑 때문이건 이웃에 대한 사랑 때문이건 사랑 때문에
고통을 견디어내고 무엇보다 주님 사랑 때문에 견딘 것을 자랑해야지요.
바오로 사도는 주님과 주님의 양들을 위해 정말 엄청만 고통을 겪었지요.
그는 자기가 겪은 고통을 나열합니다.
투옥, 매질, 채찍질, 돌팔매질, 파선과 표류, 갖가지 위험을 나열합니다.
우리는 그중 한 가지만으로도 고통을 대단히 많이 당했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그런 것이 자랑할 것이 못 된다고, 아니
자랑을 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왜?
이유는 단순합니다. 나를 자랑하는 것이 내게 유익이 되면 해도 될 텐데
유익이 되지 않기 때문이고 무익한 정도를 넘어 유해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유해한데도 왜 자랑을 하고, 유해하다면 왜 유해합니까?
자랑할 필요가 없는 사람, 다시 말해서 자기가 자랑하지 않아도
자랑하고 싶은 것을 알아주고 대신 나팔까지 불어주는 사람이 있으면
볼썽사납게 자기가 나서서 자랑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내세울 것이 별로 없고 그래서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그 얼마 안 되는 자랑꺼리를 알아달라고 자랑하는 거지요.
그렇습니다. 이것이 자랑하는 이유인데 헌데 자랑하는 것이 왜 유해합니까?
그것은 제 생각에 자랑이라는 것이 자기 도취케 하는 것이고
현실의 고통을 잊게 하는 아편과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랑이란 지금 나는 병들어 죽어가고 가진 것도 별로 없는데
화려했던 과거의 부귀영화를 얘기하거나 하나 남은 보석을 자랑하면서
나는 지금 괜찮다고 생각하게하고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말에 병은 자랑하라고 합니다.
자랑함으로써 숨기고 싶은 나의 병을 사람들 앞에 겸손하게 드러내고
그럼으로써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치유법을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랑해야 한다면 구원을 가져다주는 것을 자랑해야 합니다.
그래서 병을 자랑하듯 약함을 자랑해야하고 약하니 구해달라고 해야 합니다.
강하신 주님께 구원을 청하게 하는 약함을 자랑하는 오늘이 되어야겠습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5년 6월 19일 연중 제11주간 금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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