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6월 19일 연중 제11주간 수요일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그 자선을 숨겨 두어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아 주실 것이다.
(마태오 6,1-6.16-18)
When you give alms,
do not let your left hand know what your right is doing,
so that your almsgiving may be secret.
And your Father who sees in secret will repay you.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구제 활동을 할 때 마지못해 하거나 억지로 해서는 안 된다며, 하느님께서는 기쁘게 주는 이를 사랑하신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참된 의로움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우선 당시에 신앙의 실천으로 가장 높이 평가되던 자선, 기도 그리고 단식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이 덕목들도 올바른 정신으로 이행해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재산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그것을 자신에게 맡겨 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거기에는 나의 노력과 희생과 모든 것이 투자된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게 어렵게 모은 재산이 하느님께서 맡겨 두신 것이라는 의미는, 나의 노력 위에 하느님의 허락이 더해져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재산이라는 뜻이고, 그래서 자기 재산을 쓸 때도 하느님의 뜻을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한 일을 자랑하고 떠벌리고 다니는 사람들을 주시하십니다. 그러고는 올바른 길을 제시하십니다. “네 자선을 숨겨 두어라.” 사랑을 베풀 때는 아무도 모르게, 그리고 자신도 스스로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실천해야 하느님을 위한 선행이라는 말씀입니다. 한마디로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도나 단식을 할 때의 마음 자세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의 칭찬을 바라거나 은인이라는 소리를 들으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가장 은밀한 속까지 꿰뚫어 보시는 분이며, 그렇게 우리를 평가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반대로 우리의 자선이나 기도가 마치 사람들에게 보이려는 위선처럼 여겨져서 위축되거나, 하려던 것을 포기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는 부족하지만 나름대로 주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보고 계시고 알고 계신 주님께, 우리의 부족함을 내어 놓고 도우심을 빌며, 또 용감히 신앙의 길을 걸어가는 하루가 됩시다. (이성근 사바 신부)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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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어진 삶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려는 의지와 연관된 호르몬이 ‘세로토닌’인데, 세로토닌이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면 사람들은 ‘될 대로 되라. 어떻게든 지나가겠지.’라는 체념의 태도를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감사하는 마음을 표현할 때마다 이 세로토닌의 수치가 현저하게 올라가는 것입니다.
얼마 전, 평소에 존경했던 신부님으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그렇게 자주 연락을 주고받지 않았기 때문에 무슨 일인가 싶었지요. 그런데 전화를 받자마자 신부님께서는 “조신부, 고마워.”라고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알고 보니 지난달에 책을 출판하고서 교구의 원로 사목자 신부님들께 책을 한 권씩 보내드렸는데, 책을 잘 받았다고 고맙다는 전화를 하신 것이었지요.
신부님을 떠올려보니 앞선 연구가 특히 공감이 갑니다. 신부님께서는 늘 “고맙습니다.”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모습은 은퇴 후 지금까지도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언제나 건강한 모습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이 세로토닌의 수치를 항상 높여주고 있는 것이겠지요.
“신자들에게 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면서 살아야 해.”라는 신부님의 말씀이 기억납니다. 신자들이 있기 때문에 신부 생활 하고 있는 것이라면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섬기며 살라는 말씀이었지요. 그런데 이 말씀을 지키며 살기란 그렇게 쉽지 않더군요. 내 자신을 드러내는데 더 집중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삶이 아니라,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을 바라보면서 늘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감사하는 마음이 아닐까 싶습니다. 겸손하지 않은 사람은 절대로 감사의 마음을 갖지 못합니다.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사람이 어떻게 감사의 마음을 가질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사람의 소중함을 깨닫고 함께 하는 사람은 저절로 감사의 마음을 갖게 됩니다. 이러한 겸손의 삶이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께 나아가는 삶이 됩니다.
숨은 일도 보시는 아버지 하느님 앞에 하찮은 재주와 능력을 가지고서 교만을 떠는 부끄러운 모습에서 벗어나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친한 선배님이 계십니다. 그런데 이분은 자신의 것을 소유하려는데 욕심이 없습니다. 누가 “이거 정말로 좋아 보여요.”라고 말하면, “너 가져.”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나누는 분이십니다. 언젠가 감기 기운이 있다고 하자 생약 성분의 감기약인데 정말로 잘 듣는다며 자신이 가지고 있는 약을 전부 주십니다. 자신도 감기 기운이 있어서 이 약을 먹고 있는 중이었는데 말입니다.
사실 대단한 것을 주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절대로 나눌 수가 없습니다. 어쩌면 나눔이란 상대방이 필요하다고 느끼면 공짜로 주는 것이 아닐까요? 대단한 것만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화장실에 급하게 들어갔는데 그 칸에 화장지가 없습니다. 그때 그에게 가장 필요한 나눔은 화장지일 뿐입니다. 누군가가 나눠주는 화장지는 그에게 큰 감동일 것입니다.
거창하게 나누려는 마음을 먹으면 나눌 것이 없습니다. 거창하게 함께하려면 늘 망설여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저 지금 함께 하고 지금 필요한 것을 나누는 것, 이것이 가장 큰 사랑이 아닐까요?

자신과 봉헌은 오래 묵은 빛을 조금이라도 갚는 마음으로
-전삼용신부-
아버지가 계십니다. 아버지는 아들과 같이 명절 때나 그분의 생일 되면 선물을 한 아름 준비해 가지고 갑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그 은인에 대해 이렇게 말해줍니다.
“내가 어릴 때 늘 나를 도와주시던 분이시지...”
아버지는 어릴 때 너무 가난했습니다. 학비도 없고 항상 배고 고팠습니다. 그런데 지나가는 아버지를 불러 따끈한 밥도 먹여 주시고 작지 않은 돈을 주머니에 넣어 주시곤 했습니다.
그 후 이사를 해서 떠나왔고 잊혀 진 분이 됐는데 우연히 그 분을 길에서 만난 후 연락처를 알게 됐고 집을 찾아 가 본 이후 지금까지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아들이 말합니다.
“아버지 이정도면 그때 도움 받은 것 많이 갚은 것 아닌가요?”
아버지는 아들에게 말합니다.
“그래 이정도면 그 때 신세진 것 많이 갚은 거지. 그런데 그 때 받은 은혜는 갚아지는 것이 아니란다. 그건 그저 잊지 않고 고마워하고 감사하는 거지. 아빠는 지금도 그 때를 생각하면 얼마나 고마운지 그저 감사할 뿐이란다.”
아들은 숙연해 지며 뭔가를 깊이 깨닫는 모습을 지었습니다.
은혜는 계산적으로 갚아지는 것이 아닌 것이 맞는 말 같습니다. 부모님이 20년 키워주셨다고 20년 동안 그만한 용돈만 드리면 할 일 다 했다고 할 수 있을까요? 내가 꼭 필요할 때 받았던 그 사랑과 도움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가치일 것입니다. 그러니 아무리 갚아도 갚을 수 없는 것이 은혜입니다.
다 갚을 수는 없더라도 그 은혜를 갚으려고 노력한다면 그 사람은 그래도 의로운 사람으로 불릴 수 있습니다. 은혜를 모르는 사람이 의롭지 못한 사람입니다. 하느님께도 은혜를 갚으려 해야 의롭다 할 수 있겠습니다. 사람에게 받은 은혜도 다 갚을 수 없다면 하느님께로부터 거저 받은 구원의 은총은 아무리 노력해도 다 갚을 수 없을 것입니다. 다만 갚으려고 노력이라도 했다면 하느님께서 의롭다 해 주실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사람이 어떻게 의롭게 되는지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가난한 이들에게 아낌없이 내주니 그의 의로움이 영원히 존속하리라.”
하느님은 당신에게 갚지 말고 가난한 이들에게 갚으라고 하십니다. 어떤 사람에게 은혜를 받았는데 그 사람이 죽었을 때 그 사람의 자녀에게라도 갚으려고 합니다. 가장 가난한 이들이 하느님께서 아끼시는 자녀들입니다. 그들에게 갚는 것이 아버지에게 갚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난한 이들을 돕지 않는다면 의로워질 수 없습니다.
다만 주의해야 할 것은 자선을 베풀 때 ‘기쁘게’ 내어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모에게 보답하며 기쁘지 않다면 그것은 은혜를 갚는 것이 아니라 적선하는 것입니다. 받은 것에 감사하여 그것을 되갚는다고 생각하면 보답을 조금이라도 할 수 있어서 기쁘지만, 적선한다고 생각하면 나의 것을 내어준다고 믿어서 아깝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들이 한 일을 알려 칭찬이라도 받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자선을 베풀 때 “스스로 나팔을 불지 말라”고 하십니다.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는 선행은 의로운 행위일 수 없습니다.
그동안 묵혀온 오래된 빚을 조금이라도 갚는다면 속이 시원하고 기뻐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도 “저마다 마음에 작정한 대로 해야지, 마지못해 하거나 억지로 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기쁘게 주는 이를 사랑하십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기쁘게 줄 줄 아는 사람에게 주님께서 몇 배로 갚아주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가진 자는 더 가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을 들어봅시다.
“씨 뿌리는 사람에게 씨앗과 먹을 양식을 마련해 주시는 분께서 여러분에게도 씨앗을 마련해 주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여러 곱절로 늘려 주시고, 또 여러분이 실천하는 의로움의 열매도 늘려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모든 면에서 부유해져 매우 후한 인심을 베풀게 되고, 우리를 통하여 그 인심은 하느님에 대한 감사를 불러일으킬 것입니다.”
기쁘게 내어줄 줄 알면 더 가지게 됩니다. 이미 받았다고 여기기에 기쁘게 갚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받았다고 여긴다는 것은 이미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가진 자는 더 가지게 될 것이라 하셨습니다. 가진 자의 특징은 기쁘게 보답할 줄 아는 것에서 드러납니다. 자선을 하면서, 봉헌을 하면서 항상 오래 묵은 빚을 조금이라도 갚는 마음으로 기쁘게 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항상 모든 것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고 하느님 앞에서 의롭다는 칭찬을 들을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정치하는 사람들은 발언을 강하게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평범한 말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튀는 발언, 독창적인 발언, 상대방의 허를 찌르는 발언은 시원한 청량감을 주기 때문에 ‘사이다’라는 말을 듣습니다. 그러나 지나친 발언은 관심은 끄는지 모르지만,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고, 불쾌감을 주기도 합니다. 그런 발언이 족쇄가 되어서 정치인이 가장 바라는 선거 승리의 걸림돌이 되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사이다’ 발언에는 박수를 보내지만 ‘막말’ 발언에는 야유를 보낼 것입니다.
이번 주 예수님의 말씀은 신앙인이 따르기에는 부담이 되는 ‘강성’ 발언이 많습니다. 우리의 삶이 바리사이나 율법 학자의 의로움을 능가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율법과 계명을 없애려고 오시지 않고 오히려 완성하러 오셨다고 합니다. 이웃은 물론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구체적으로 친구가 오리를 가지고 하면 십리까지 가주라고 합니다. 누가 왼뺨을 때리면 오른뺨까지 내주라고 하십니다. 겉옷을 달라고 하면 속옷까지 내주라고 하십니다. 기도할 때, 자선을 베풀 때, 단식할 때 드러내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알고 계시면 되니 이웃들에게 자랑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 예수님께서 이렇게 강한 발언을 하셨을까요? 우리는 그 이유를 마태오 복음 5장의 산상설교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가치와 세상의 행복을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나라를 이야기하셨습니다. 그것은 기존의 가치와 패러다임으로는 결코 이룰 수 없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번 산상설교의 내용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합니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입니다.
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입니다.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들은 흡족해질 것입니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들은 자비를 얻을 것입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입니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가 될 것입니다.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시기에 의로운 사람에게도, 악한 사람에게도 드러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시기에 비가 선한 사람에게도 내리고 악한 사람에게도 내리듯이, 햇빛이 선한 사람에게도 악한 사람에게도 비추듯이 모든 이에게 자비를 드러내십니다. 다만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받아들이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하느님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마음이 악한 사람은 문 앞에 있는 하느님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지 못하고, 하느님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스님들께서 하시는 동안거, 하안거를 하지는 못하지만 매일 새벽 주님을 만나려고 노력하는 편입니다. 부족한 제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모두가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고 생각합니다. 기도는 갈망이 있어야 하고, 기도는 여유가 있어야 하고, 기도는 시간을 정해놓고 해야 하고, 기도는 규칙적으로 해야 하고, 기도는 삶의 우선순위에서 항상 먼저여야 한다고 강의를 했지만 제가 늘 그것을 실천하지는 못하였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을 하였습니다. “적게 뿌리는 이는 적게 거두어들이고, 많이 뿌리는 이는 많이 거두어들입니다. 저마다 마음에 작정한 대로 해야지, 마지못해서 하거나 억지로 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기쁘게 주는 이를 사랑하십니다.” 기쁜 마음으로 하는 봉사를 하느님께서는 더 사랑하신다고 이야기합니다. 억지로 하는 봉사도 있고, 마지못해서 하는 봉사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왕 하는 봉사라면 즐겁고 기쁜 마음으로 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살면서 너무나 성급하게 열매를 맺으려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기도, 희생, 사랑, 나눔’이 깊이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뿌리 깊은 신앙은 유혹과 시련에도 흔들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인정과 칭찬을 받기 위해 노력합시다!
-양승국신부-
가끔씩 깊은 반성과 성찰을 하게 되는 화두 하나가 있습니다. 저 자신의 철저한 이중성, 지극히 위선적인 모습이 바로 그것입니다.
강론대 위에서는 성인이 따로 없습니다만, 구체적인 현실 생활로 들어가보면 참담하기 그지없습니다. 민들레 홀씨처럼 사방으로 엄청나게 뿌려놓은 저 숱한 말들을 나중에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 걱정도 큽니다.
수도원 담 밖에서는 엄청나게 과대포장된 모습으로 그럴듯하게 비춰지지만, 함께 살아가는 형제들 앞에서는 속임수가 불가능합니다. 공동체 안에서의 제 모습은 너무나 보잘 것 없어, 고개를 들수 조차 없습니다.
진정한 신앙인, 제대로 된 영성가로서의 삶은 어떤 모습일까? 생각해봅니다. 그리 오래 고민하지 않아도 즉시 답이 나오는 것 같습니다. 말과 행동, 이상과 현실, 안과 밖의 간극을 최소화하려고 발버둥치는 사람이 아닐까요?
주변에 그런 사람들 많이 있습니다. 밖에서의 평가와 안에서의 평가가 천지차이인 사람들입니다. 아무리 밖에서 법없이도 살 사람이다, 성인군자다, 소리 듣는다 할지라도, 가정 안에서, 공동체 안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한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허당이요 속빈 강정 같은 존재일 뿐입니다.
본격적인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의 눈을 크게 거슬리게 하는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으니, 일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위선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의 준수에 목숨을 걸었고, 신앙생활도 열심히 했으며, 지극히 경건한 삶을 추구하고 있었지만, 그 모든 것을 일거에 다 까먹고 마는 치명적인 결함을 한 가지 지니고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그들의 트레이드 마크였던 위선적인 삶이었습니다.
겉보다 안을, 외형보다 내용을, 마음과 영혼에 더 큰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셨던 예수님의 눈에, 영혼이 사라진 육체에만 몰두하고, 정신과 마음, 영혼과 정성은 온데 간데 없고, 그저 형식과 절차만 중시하는 그들의 모습이 정말 웃기게 다가왔을 것입니다. 그들을 향한 예수님의 질책이 엄청 날이 서 있습니다.
언제나 보다 본질적이고 핵심적인 것이 무엇인지 고민해봐야겠습니다. 목표나 이상은 크게 지니되, 내 발밑을 유심히 바라봐야겠습니다. 이 세상 그 어떤 대상, 존재에 앞서, 가장 가까이 살아가는 가족들과 이웃들, 공동체 구성원들에 대한 소중함과 가치를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퇴직을 앞둔 5~60대 형제들, 이랬으면 좋겠다, 즉 이상적인 ‘영감상’에 대해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현실이 너무나 고달프다 보니, 다들 목표가 너무 엄청났습니다. 종합된 희망사항을 보면서 엄청 웃었습니다.
남자가 일단 과묵해서, 잔소리 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고집을 부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요리 학원도 좀 다니고 해서, 삼시새끼 스스로 해결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왕이면 준비하는 김에, 아침 식사 정갈하게 차려놓고 부인을 깨워주면 좋겠다. 연세 드셔도 퇴직하지 않고 쭉 직장 다녔으면 좋겠다. 해외 출장이나 지방 출장도 자주 가시면 좋겠다...
종합해보니 이 세상에 그런 영감님은 단 한 명도 없을 듯 합니다. 예수님께도 불가능한 일인 듯 여겨집니다.
예수님께서 경멸하시는 위선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 가장 가까운 사람들과 잘 지낼 필요가 있습니다. 미우나 고우나, 아웅다웅 티격태격해도 가장 가까운 그 사람을 가장 소중히 여기고, 또 다시 그를 선택하고, 그에게 또 다시 새롭게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이 정말 중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노력은 상대방에 대한 기대치를 크게 낮추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시선을 의식하라
-반영억신부-
순수한 의향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최선을 다했을 때 결과에 구애 받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공에로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하는 것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결과가 아무리 좋아도 의향과 과정이 바람직하지 않다면 추합니다. 의학이 발달한 요즈음 M.R.I 를 통해 사람의 곳곳을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PET-CT를 통해 암을 찾아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사람의 마음은 들여다 볼 수 없습니다. 아마 사람의 마음을 그렇게 들여다볼 수 있다면 많은 이들의 태도가 달라질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주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분이십니다.
상을 받으려 노력하지 않아도 주어진 몫에 최선의 노력을 다하면 상은 주어지는 것입니다. 최선을 다하는 그 모습자체가 바로 상입니다. 남에게 잘 보이려고 하거나 허풍을 떨어서는 숨은 일도 보시는 아버지 하느님 앞에 부끄러움만 더할 뿐입니다.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듣고 은인이라는 소리를 들을지언정 그것은 세상의 상일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늘의 것을 추구하고 하늘로부터 오는 상을 받아야 합니다. 세상의 것은 결국 모두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약속된 천상을 지향하고 지금 여기서부터 그 삶을 살아야 합니다. 아는 척, 가진 척, 잘난 척, 있는 척...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겉치레는 구원에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기도를 하든, 자선을 베풀든, 단식을 하든 그 자체가 아름다움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기도는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자선은 이웃과의 관계를 회복하며 단식은 나 자신과의 관계를 회복하게 합니다. 그런데 기도나 자선, 단식을 함에 있어 사람의 시선을 의식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시선을 의식해야 관계가 회복됩니다.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면 마음이 갈라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시선을 명확히 하면 숨은 일도 보시는 아버지께서 갚아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선행이나 악행이 M.R.I 보다 더 정확한 주님의 마음에 찍힌다는 것을 생각하면 감히 나의 처신을 함부로 할 수 없는 법입니다. 지금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아름답고, 그리고 최선을 다하다 보면 주님의 상급이 주어질 것입니다. 상을 보지 말고 지금 할 수 있는 것에 마음을 쏟을 수 있으면 그것이 기쁨입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모든 것이 결코 남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일이 아니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오로지 주님 마음에 드는 것으로 감사할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길 희망합니다.
“성인은 숨어서 남모르게 일한다.”고 했습니다.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것입니다. “외적인 드러남을 중시하는 사회에서 심지어 의로운 일마저 드러내려고 하는 시도를 자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함께야). 우리는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기에 앞서 하느님의 시선을 마음 안에 간직해야 합니다. 공연한 인간적 명성은 참된 길을 방해하는 요소로 작용하게 됩니다.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의 시선을 느끼는 하루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최용준-
종교중에서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로 그것을 얻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합니다. 예전에, 어느글에서 읽었습니다.
불교에서 명성이 자자한 성철스님을잘 아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분을 만나기 위해서는 먼저 3천배의 절을
올려야 하는데, 그럴려면 거의 하루 종일 절을 하고 나서 그분을 만나 뵐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교우들은 얼마나 많은 절을 하셔야 하느님을 만나 뵐수 있을 것 같습니까?
가톨릭은 계시종교이기에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라 창조주이신 그분에 의해서 만들어진 종교입니다. 하느님을
만나 뵙는다는 것은, 그분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느님을 만나 뵙는 것, 다시 말하면 그분을 알 수 있는
길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느님을 깊이 사랑하려면 모든 것을 내려 놓아야 합니다. 이를테면 모든 것을 비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비운다는 것은모든 것을 하느님께 믿고 맡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도 가장 필요하고 중요한 것이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하느님 사랑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바라보면 이 세상은 하느님의 따뜻한 사랑으로 가득합니다.
우리에게 그 사랑의 기쁨이 피어나게 되어서 행복도 느낄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는 각박하고, 거짓이 난무하고, 돈 중심이 되어버린 이기적인 세상에서 인간 중심의
삶을 살고 있는 이들이 대다수 입니다. 이처럼 혼탁한 세상에 살고 있는 어리 석은 사람은 예수님을 만나도 예수님을
알지 못합니다. 그것을 느낄 수 있는 지혜와 믿음안에서 성령이 함께 하게되면, 예수님을 만나도 알 수있는 것입니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같지 않고 너희 길은 내 길과 같지 않다. 하늘이 땅 위에 드높이 있듯이 내 길은 너희 길 위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 위에 드높이 있다.(이사 55,8-9)"

-조욱현신부-
복음: 마태 6,1-6.16-18: 올바른 자선
우리가 자선을 베풀 때는 그 자선이 사람들에게 보이려는 뜻으로 사람들 앞에서 베풀 수도 있고, 사람들 앞에서 베풀되 보이지 않게 할 수도 있으며,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사람들 앞에서 베풀지만 남의 눈에 띄지 않을 수도 있고, 몰래 베풀지만 남의 눈에 띄고 말 수도 있다. 예수님께서는 밖으로 드러난 결과가 아니라 마음 속 생각을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는 현재의 것에 대한 관심을 버리라고 하신다.
자신의 덕을 내 보임으로써 사람들의 칭찬을 얻으려 하지도 말고, 남 앞에서 넘치게 기도함으로써 신심을 자랑하지도 말라고 하신다. 하느님 때문에 하는 일은 하느님께서 받아들이시지만,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는 일은 인간의 칭찬이란 바람 속에 쏟아 붓는 것이다. 그런 것은 차라리 하지 않는 것이 더 낫다. 인간의 칭찬이라는 영광을 얻으려고 하는 것은 신심 깊은 마음의 표시가 아니기 때문이다.
자선은 자랑하려고 베푸는 것이 아니다. “오른손”, “왼손”의 의미는 이것이다. 오른손은 의인이나 의로운 행위를 말하고, 왼손은 죄가 되는 행동이나 죄인들을 말한다. 그러므로 의인인 오른손은 왼손이 하는 일을 몰라야 하고, 우리가 충실하고 신심 깊게 행하기 위해서는 죄안들 앞에서 자랑하지 말아야 한다. 다른 사람에게 알려지기도 하지만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자선을 베풀 수 있어야 한다.
기도는 사람들에게 하는 것도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다. 기도할 때에 우리는 천사의 무리와 하나가 되는 것이다. 기도는 천사의 무리와 하나가 되어 하느님께 찬미와 영광을 드리는 것이다. 대천사가 토빗에게 “너희의 기도를 주님 앞으로 전해 드린 이가 바로 나다.”(토빗 12,12)라고 했듯이 기도는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천사들 손에 들려 하느님 앞으로 간다.
골방이라는 것은 마음의 침실이다. 그 마음으로 자기가 기도하는 것과 자신이 기도를 바치는 분만을 생각하도록, 기도할 때에는 다른 것은 보지 말고 하느님만 바라보라고 하신다. 그래서 외적인 생각과 걱정을 완전히 끊기 위해, 육신의 감각으로 통하는 문을 모두 닫아걸라는 말씀이다. 그러한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것이다.
자선과 기도가 그렇듯이 단식을 할 때에도 겉꾸미는 행동을 하지 말라고 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남에게 보이려는 행위나 꾸밈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하시면서 “겉으로 꾸민다.”고 하시지 않고, “그들은 얼굴을 찌푸린다.”(16절)고 하신다. 그렇게 하는 것은 남에게 드러내는 자랑거리일 뿐 아무 것도 아니다.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마태 7,16)는 말씀으로 양의 옷차림을 한 이리들을 조심하라고 경고하신 바 있다. 그들이 맺는 열매를 보고 그들이 양의 옷을 입은 이리인지 실제로 양인지 결국 드러날 것이다. 말씀으로 언제나 참 열매를 맺는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도록 하자.
네 자선을 숨겨 두어라.(마태 6, 4)
-한상우신부-
사람의 관계가
사랑의 관계처럼
돌보고 베푸는
자선의 관계가
되어야합니다.
행복한 자선은
서로를 울리고
서로를 살립니다.
기꺼이 나누고
기쁘게 주는
사랑말입니다.
사랑이 빠져버린
신앙은 올바른
신앙일 수 없습니다.
신앙은 사랑하며
사는 기쁨으로
자선과 단식
기도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예수님의 초대와
사랑에는 조건이
없었습니다.
보답을
바라지 않기에
주님 안에서
더욱 풍요로워집니다.
자선의 중심에
아낌없이 주시는
주님이 언제나
계십니다.
주님을 드러내는
자선이 참된
자선입니다.
자선과 사랑은
우리 삶의 치유이며
신앙의 참된 본질입니다.
겸손과 봉사를 배우는
신앙의 기쁜 자선입니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 독서에서는 "의로움"이라는 말씀이 자주 등장합니다. 복음에서 예수님은 자선, 기도, 단식에 임하는 올바른 정신과 자세를 말씀하시는데, 과연 오늘의 가르침과 의로움은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구약 시대 사람들은 의로움을 획득하기 위한 방법으로 자선, 기도, 단식을 꼽았습니다. 이 세 가지 덕행은 당시뿐만 아니라 지금까지도 여전히 신앙생활에 유익을 주는 실천 방안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 자체로는 선하고 좋은 것이지요.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마태 6,1) 그런데 예수님 보시기에 위선자들의 자선, 기도, 단식은 사람의 시선과 평판을 의식한 경우가 비일비재했나 봅니다. 그들은 하느님께 인정 받기보다 사람들이 주는 인정을 더 갈망한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인정해 주는 "의로움"으로 충분했던 것이지요.
"네 자선을 숨겨 두어라."(마태 6,3)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마태 6,6) "네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지 말고..."(마태 6,18)
이처럼 다 숨기라고 하십니다. 떳떳치 못해서 감추라고 하시는 게 아니라, 자칫 떳떳함이 넘칠까 봐, 그래서 오히려 영혼에 독이 될까봐 감추라고 하시는 겁니다. 자선, 기도, 단식. 이 모든 것을 받으시는 분은 사실 하느님이시고, 그분은 숨어 계시는 "겸손"이시니까요.
숨은 자선, 숨은 기도, 숨은 단식은 비록 사람들의 시선에 감추어져 있어 인정과 존경을 비껴가게 할 수는 있지만, 하느님께서 의롭다고 하시는 진정으로 순결한 제물입니다. 어떤 불순한 동기도 섞이지 않은 순수한 봉헌입니다. 즉 사람에게서가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인정 받는 의로움이지요.
그런데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의로움과 은총을 연결짓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에게 모든 은총을 넘치게 주실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이 ... 온갖 선행을 넘치도록 할 수 있게 됩니다. ... '그의 의로움은 영원히 존속하리라.'"(2코린 9,8-9) 사도 바오로는 은총과 선행(자선, 기도, 단식)과 의로움의 관계를 이렇게 정리한 것입니다. 즉, 은총을 받은 이가 선행을 할 수 있고, 그 선행으로 그는 의롭게 된다고 말입니다.
과연 모든 것의 시작은 은총입니다. 은총이 아니고서는 아무도 스스로의 힘으로 선행을 할 수 없고, 자기 영광이라는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진정한 선행은 의로움을 가져다 줍니다. '숨어 계신 하느님' 앞에서 숨어서 행하는 자선과 기도와 단식이 우리를 의롭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우리가 행하는 영적 덕행들에 대해 사람들이 보내는 칭찬과 인정과 갈채는 맛깔지게 보이기는 하나 실상 얕은 맛에 불과한 유혹입니다. 그런 환호와 갈채가 사그라진 무대 뒤 적막 속에서 묵묵히 보이지 않는 하느님과 대면하며, 그 침묵 앞에서 여전히 기도하고 비우고 나누는 사랑의 몸짓을 계속 하는 이야말로 의로운 사람입니다.
그를 향한 시편 저자의 축복을 벗님에게 전합니다. "가난한 이에게 넉넉히 나누어 주니 그의 의로움은 길이 이어지고 그의 뿔은 영광 속에 높이 들리리라."(화답송) 아멘.
벗님의 숨은 자선과 숨은 기도와 숨은 단식이 벗님의 참 기쁨이 되고 하느님께 큰 영광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사랑은 희생이 아니라 유통이야!?
-김찬선신부-
제가 지금 복음 말씀이 전해지지 않은 나라에 씨를 뿌리겠다는
선교사들의모임인 파종회 회장을 맡고 있기 때문인지 오늘따라
오늘 독서 말씀 중에서 뿌린 대로 거두리라는 말씀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사실 “적게 뿌리는 이는 적게 거두어들이고 많이 뿌리는 이는
많이 거두어들입니다.”는 말씀은 너무도 당연한 말씀이지요.
만일 조금 뿌리고 많이 거두어들이려 한다면 얌체거나 욕심쟁이이고,
거두는 것 이전에 뿌리는 것 자체가 아까워 뿌리지 않으면 노랑이이며,
이도저도 아니고 뿌릴 것 자체가 없으면 가난뱅이겠지요.
옛날 아무리 먹을 것이 없어도 씨감자는 남겨둬야 한다고 했는데
똥구멍이 찢어지게 가난하여 다시 말해서 당장 먹을 것이 없어
씨감자까지 먹어 버릴 정도로 가난한 사람들이 있었고 지금도 있긴 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이 제게는 이렇게도 들립니다.
뿌릴 씨가 없어 뿌리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뿌리지 않아서 뿌릴 씨가 없다는 말씀으로.
왜냐면 누가 천애고아天涯孤兒, 곧 하늘 저 끝 아무도 없는 곳에 혼자 있는
고아이고 옆에 도울 이 아무도 없는 사람이라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뿌리고자 하는 사람은 뿌릴 씨를 구할 것이고 그래서 뿌릴 수 있을 겁니다.
혹 줄 사람이 없어도 “씨 뿌리는 사람에게 씨앗과 먹을 양식을 마련해
주시는 분께서 여러분에게 씨앗을 마련해 주시고, 또 여러분이 실천하는
의로움의 열매도 늘려 주실 것입니다.”고 오늘 바오로 사도는 얘기하듯
하느님이 주시니 뿌릴 씨가 없을 리 없습니다.
여기서 씨앗이란 선 또는 선행이고 씨앗을 뿌린다는 것은 선행을 실천하는 것이기에
이 말은 또한 “하느님께서는 기쁘게 주는 이를 사랑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에게 모든 은총을 넘치게 주실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은 언제나 모든 면에서 모든 것을 넉넉히 가져
온갖 선행을 넘치도록 할 수 있게 됩니다.”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하느님께서 다 마련해주시기에 다시 말해서 야훼이레이기에
마음만 있으면 얼마든지 선행을 할 수 있다는 얘기도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살아오면서 한 번도 조건 없는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어서
하느님께서 은총으로 모든 것을 넘치게 주신다는 것도 생각지 못하고,
무상의 선물인 은총을 받은 체험이 없으니 감사한 마음이 뭔지도
받은 것을 나누는 기쁨이 뭔지 모르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에게 하느님의 은총을 올바르게 매개하는 사람이 필요한데
말하자면 하느님 은총의 공인중개사가 필요한 것입니다.
얼마 전 저는 옛날 저의 야학 제자들과 좋은 나눔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때 모인 제자 중에 사진 찍으며 공인중개사 일을 하는 제자가 있었고,
생전 처음으로 제가 센터를 전세 얻었기에 그의 말이 귀에 쏙 들어왔습니다.
그의 말에 의하면 공인중개사가 신용을 얻으려면 매수자와 매입자 사이에서
농간을 부리지 않고 서로의 필요를 정확히 중개해야 하는데
서로의 필요를 정확히 중개하지 못하는 것은 자기 이익 때문이니
자기이익만이 아니라 공동선을 찾아야지 훌륭한 공인중개사가 되는 거지요.
내 게 아니라 하느님의 선을 나눌 때 그것이 공동선이 되고 사랑이 됩니다.
하느님의 선을 내 거라 생각하면 주는 게 아까워 아예 나눌 수 없고,
그때 하느님의 선은 고인물이 썩듯 똥이 되지만 나누면 공동선이 됩니다.
그러니까 사랑은 자기 것을 주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것을 나누는 것이고,
희생이 아니라 유통이며 이럴 때 하느님은 내 안에 숨어서 선을 행하시고
나는 나의 선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을 중개자가 매개할 뿐이며,
그래서 오늘 주님의 말씀처럼 위선치 않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사랑은 희생이라는 생각부터 오늘 바꿔야겠습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7년 6월 21일 연중 제11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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