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6월 20일 연중 제11주간 목요일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마태오 6,7-15)
Thy will be done,
on earth as it is in heaven.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어떠한 경우에도 신자들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고 자제하였고 앞으로도 그렇게 할 것이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기도할 때 빈말을 되풀이하지 말라고 하시며,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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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기도를 가르쳐 주십니다. 모든 기도는 우리가 하느님의 존재와 그 권능을 인정하는 일이면서, 하느님께서 내 생명의 주님이심을 고백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할 때에 빈말을 되풀이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십니다. 주님의 기도가 당시 사람들의 기도와 다른 점이 첫 줄에서부터 드러나는데, 그것은 자녀로서 아버지께 바치는 기도라는 사실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하느님을 부르는 것일 뿐 아니라, 하느님께서 나의, 우리의 아버지시라는 신앙 고백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셨는데, 그 말은 하느님께서 육으로 맺어진 친아버지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다인들은 그 호칭 자체를 신성 모독이라고 생각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기도를 통하여 우리 모두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자녀들임을 깨우쳐 주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의 기도가 완벽한 기도이면서 동시에 우리 기도의 본보기요 모범임을 발견합니다. 주님의 기도뿐 아니라 우리의 모든 기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그분 안에서 드리는 기도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감히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도, 그래서 우리가 청하는 것을 받을 수 있으리라고 기대할 수 있는 것도, 모두 예수님 덕분이기 때문입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주님의 기도에 이어 곧바로 “너희가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용서하면,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라는 주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마다, 내 안에서 하느님의 이름이 거룩히 드러나실 수 있기를, 그리고 하느님 나라가 오게 하시기를 진심으로 바라면서, 우리가 다른 형제를 용서해야만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용서하신다는 것을 마음에 새겨야 하겠습니다. (이성근 사바 신부)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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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의 싹 주변에는 사람이 받아들이기 힘든 솔라닌이라는 독성이 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싹이 난 감자가 아까워서 그냥 감자전을 만들어 손주에게 줬다가 손주가 실신을 해서 응급실에 실려 간 적이 있다는 이야기를 나중에 들었습니다.
아무리 싱싱한 감자라도 싹이 나면 아깝다는 생각을 가지고 그냥 먹는 것이 아니라 그 새싹과 새싹이 난 주변까지도 전부 잘라내야 합니다. 싹이 난다는 것은 분명히 좋은 의도의 생명이겠지만, 소화시키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감자의 싹 주변에 받아들이기 힘든 독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즉, 생명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라, 독성이 나쁘기 때문에 잘라내는 것입니다.
감자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면서 동시에 인간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인간 자체는 생명을 의미하는 것으로 무조건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짓는 죄라는 독성은 과감하게 잘라내야만 합니다. 감자의 독성을 인간이 소화시키지 못하는 것처럼, 인간이 짓는 죄 역시 인간이 스스로 소화시킬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성인성녀께서는 ‘죄를 멀리하고 선을 행하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죄를 행하면서 어쩔 수 없다는 말, 남들도 다 그렇게 한다는 말 등으로 갖은 이유들을 만듭니다. 그러나 죄에 물들게 되면 주님 앞에 제대로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이 죄는 과감하게 잘라내야지만 주님과 함께 할 수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주님의 기도를 직접 가르쳐주십니다. 이 기도의 말미에 이런 말이 있지요.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저희를 악에서 구하소서.”
죄의 유혹에 빠지지 않기 위해 우리 스스로 늘 주의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단순히 이방인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면서 주님께 기도한다고 해서 죄의 유혹에 빠지지 않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스스로 죄의 유혹이라는 싹을 과감하게 잘라버리고 그 주변까지도 제거해서 깨끗한 몸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수 있게 되며, 주님 안에서 참 행복의 삶을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인류 역사에서 한때는 불가능한 것으로 인식되었으나 결국은 이뤄낸 것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하늘을 나는 것이 아닐까요? 배가 유일한 운송 수단이었던 1850년대에 만약 어떤 사람이 금속 통에 사람 수백 명을 태우고 미국에서 중국까지 날아갈 수 있다고 주장한다면 어떠했을까요? 미친 몽상가 소리를 들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현재는 당연히 가능한 것이 되었습니다.
1980년대 초에 컴퓨터를 처음으로 접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컴퓨터가 타자기를 대신하리라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 컴퓨터가 타자기를 뛰어넘어서 우리 생활의 여러 부분에서 필수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주판이 전자계산기를 뛰어넘으리라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현재 주판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하느님의 일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하느님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신의 생각을 뛰어넘는 하느님의 일이란 없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의 일은 늘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습니다.

기도가 빈말이 되지 않으려면
-전삼용신부-
미국의 화웨이 제재는 엄청 무지막지합니다. 미국 대통령령에 의해 미국 부품과 프로그램의 제공이 중단되자 중국의 화웨이는 현재 존립 자체의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그 시발점은 아마도 미국에 뿌려진 화웨이의 스마트폰에 숨겨진 프로그램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 프로그램은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사람의 모든 정보가 중국으로 보내지게 만드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프로그램이 군사목적으로 만들어진 미국의 프로그램과 유사하다는 것입니다. 미국은 그래서 화웨이를 민간 기업이 아니라 중국 정부가 정보를 빼내는 수단으로 이용하는 국가기업에 가깝다고 보고 있습니다. 화웨이가 지난 10여 년간 유럽과 미국 등 거래 기업들로부터 상당한 양의 각종 기술과 영업 비밀들을 빼냈다고 보고 있습니다.
반면 중국은 외국으로 자신들의 정보가 유출될 수 있는 프로그램들을 적극적으로 막고 있습니다. 한국의 카카오톡과 같은 것들을 자국 내에서는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들의 정보는 외국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게 철저하게 규제하면서 자신들의 스마트폰을 쓰는 나라의 정보는 빼내왔다고 보는 것입니다.
화웨이 이름 자체가 ‘중화를 위하여’란 뜻으로 중국의 번영을 위한 기업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이런 자세로 자신들의 스마트폰을 사 달라고 한다면 누가 사주겠습니까? 그것을 사주면 나의 모든 정보가 그들 것이 됩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기도할 때 화웨이와 같은 태도를 취할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는 주님께 피해를 주는데도 자신의 청을 들어달라고 강요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너희는 기도할 때에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고 하십니다. ‘빈말’을 되풀이하는 기도는 힘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 들어 주시는 줄로 생각한다.”라고 하시며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고 하십니다. 화웨이가 스마트폰을 사 달라고 계속 광고한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습니다. 태도를 바꿔야합니다. 자신이 변하지 않는 상태에서 청하는 모든 것들은 ‘빈말’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주님 입장에서는 내가 청하는 것이 적어도 당신께 피해가 가지 않도록 규정을 만들어주셔야 했을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 복음의 ‘주님의 기도’입니다. 먼저 청하는 이가 당신께 합당한 사람이 되도록 만드는 것이 주님의 기도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하느님의 아드님이 바치는 기도이기에, ‘먼저 아들이 되어서’ 무언가 청해야지 적이 되어서 청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 불러야합니다. 참으로 당연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그런데 그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분입니다. 하늘은 땅과 상반됩니다. 아버지가 하늘에 살면 나도 하늘에 살아야합니다. 나의 아버지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이심을 안다면 땅의 것들에 집착하여 그것들을 얻고자 기도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것은 나의 영광이 아니라 아버지의 영광이어야 합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게 하는 것을 청해야합니다. 땅의 인간을 하늘의 자녀로 삼아주셨다면 무슨 수를 쓰더라도 그 보답을 다 할 수 없습니다. 내가 청하는 것이 과연 나의 영광을 위함인지 주님의 영광을 위함인지 살펴야합니다.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는 일은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게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나라란 아버지로부터 통치 받는 나라입니다. 나의 주인이 나인지 주님인지 먼저 살펴야합니다. 내가 나의 주인이면 나의 기도는 주님께 내리는 명령입니다.
아버지 나라는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그분이 지금 이 순간 나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관심을 가져야합니다. 주님은 당신의 뜻을 따라주는 만큼 우리 뜻에 관심을 기울이십니다.
주님의 뜻이 우리 양식이 되게 해야 합니다. 사마리아 여인에게 복음을 전하던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 당신 양식이라 하셨습니다. 주님의 뜻은 묻지도 않으면서 내 뜻만 강요하면 그것이 빈말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의 핵심은 사랑입니다. 사랑의 핵심은 용서입니다. 내가 이웃을 용서하지도 않은 채 다른 기도를 청한다는 것은, 내가 하느님의 뺨을 때리며 동시에 내 청을 들어달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되려면 유혹에 빠지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뱀의 소굴로 들어가 뱀에 물리지 않도록 기도하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유혹을 물리치지 않으면서 바치는 기도는 밖에서 부모를 욕되게 하며 집에서 부모에게 이거 달라, 저거 달라 청하는 꼴입니다.
악은 자기 자신입니다. 자기 자신이 마귀이고 사탄입니다. 자신의 욕구에서 벗어나는 것이 악에서 구함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죽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을 안다면 나를 살게 만드는 청은 들어주시지 않을 것입니다. 악에서 구함을 받는 유일한 방법은 나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입니다.
주님은 나에게 지금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다 알고 계십니다. 문제는 주님께서 필요한 것을 우리가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화웨이 사태가 일어나지 않도록 우리 청을 드리기 이전에 그분이 원하시는 것에 먼저 관심을 가져야합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것은 주님의 기도에 다 들어있습니다. 먼저 주님의 기도를 정성껏 바치면 나에게 필요한 것은 주님께서 알아서 다 채워주실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아침 식사를 마치면 동네 산책을 다니고 있습니다. 1시간 정도 걸으면 물을 마실 수 있는 음수대가 있고, 그 옆에는 혼자 할 수 있는 운동기구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그냥 지나쳤는데 요즘은 이것저것 운동기구를 이용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턱걸이를 합니다. 학생 때는 20개를 거뜬히 했는데 한 개도 힘이 듭니다. 며칠 전에 2개를 했고, 5개를 목표로 운동하고 있습니다. 5개를 할 수 있다면 내 몸을 다섯 번 들어 올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번이 나를 위한 것이라면 다른 4번은 이웃을 위해서 사용하면 좋겠습니다.
산책하면서 ‘EBS 라디오 문학관’을 듣고 있습니다. 마음을 움직이는 좋은 책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성우들의 목소리와 효과 음악이 있어서 재미있게 듣고 있습니다. 며칠 전에는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들었습니다. 가난한 구두 수선공이 추운 겨울 교회 앞에서 떨고 있는 젊은이를 도와주면서 생기는 일이 전체의 줄거리입니다. 젊은이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던 천사였습니다. 천사는 세상에서 3가지 진리를 알게 될 것이고, 3가지 진리를 알면 다시금 하느님께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천사에게 말씀하신 3가지 진리는 ‘인간의 내면은 무엇인가? 인간은 무엇을 이룰 수 없는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입니다. 책을 읽어 보신 분들은 천사가 찾았던 3가지 진리에 대한 답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예전에 읽었지만, 생각이 나지 않는 분이 있다면 오늘 하루 이 3가지 진리를 묵상하면 좋겠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복음을 전하는 사명으로 살았습니다. 갖은 시련과 박해가 있었지만, 복음을 전하였고, 공동체가 생겼습니다. 그리스도가 내 생의 전부라고 하였고,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산다고 하였습니다. 환난도, 칼도, 권세도, 천신도, 세상의 어떤 것도 그리스도와 맺어진 사랑을 갈라놓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위해서 평생을 살았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무엇으로 살아야 하는지 말씀하십니다. 기도가 우리 삶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가난함을 받아들이고, 기도하는 사람은 하느님께 의탁하며,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살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잘못한 사람을 기쁜 마음으로 용서합니다. 하느님께서 이미 나의 허물을 용서해 주셨음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나의 구원을 위해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셨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 네가 자주 가는 곳, 네가 읽는 책들이 너를 말해 준다.’라는 글을 읽었습니다. 요즘 내가 가족들과 함께한다면, 가난한 이웃들과 함께한다면, 봉사활동을 자주 한다면 바로 그 시간이 내가 살아가는 이유입니다. 요즘 내가 자주 가는 곳, 내가 자주 읽는 책, 내가 주로 만나는 사람들은 누구인지 생각해 봅니다.
“주님께 청하는 오직 한 가지, 나 그것을 얻고자 하니, 내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사는 것이네”

주님의 기도!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자상하고 따뜻한 마음이 넘쳐 흐르는 사랑의 기도!
-양승국신부-
가톨릭 신앙과 전례 안에는 정말이지 빛나는 보물같은 중요하고 본질적인 요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값진 보물들을 너무 쉽게 생각하고, 별 의미나 비중을 두지 않은 경향이 있습니다. 이유는? 너무 가까이 있다보니, 너무 익숙해지다보니 그렇습니다.
한 신앙인이 하느님께로 더 가까이 발돋움하는 데, 가장 유익한 도구이자 빛나는 보물은 성체성사입니다. 고백성사입니다. 아침 저녁 기도입니다. 성모님을 비롯한 성인들의 모범입니다. 성경입니다. 성호경입니다. 그리고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 주님의 기도입니다.
초기 교회에서는 주님의 기도가 얼마나 귀중한지에 대한 의식이 살아 있었습니다. 교리 교육을 마친 다음에야 비로소 주님의 기도를 ‘수여’받을 수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예비 신자는 세례를 받기 직전에야 비로소 주님의 기도를 바치기에 합당한 자로 간주되었습니다.
교회는 이를 전통적으로 ‘기도의 수여’라고 불렀는데, 예비 신자는 세례를 받은 다음에야 장엄한 예배에서 온 공동체와 함께 처음으로 주님의 기도를 바칠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주님의 기도가 많이 퇴색되었습니다. 너무 많이 소모되었다고나 할까요. 그 말마디와 문장들이 안개 속의 풍경마냥 아득합니다. 너무 습관적으로, 그저 아무런 생각없이, 영혼이나 정성이 사라진 주님의 기도를 바친 탓입니다.
예수님의 입과 제자들의 귀에 주님의 기도는 아주 분명한 기도였고, 기도의 말마디들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명확했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일차적으로 제자들의 기도였습니다. 예수님을 따라야 하는 제자들이 자신들의 원의와 계획은 잊고, 오직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만을 바라지 않으면 안된다는 점이 주님의 기도 속 모든 청원의 마디마디 핵심을 이룹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그들 본연의 기도로 주신 주님의 기도는 오롯한 청원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제자들에게 당시 대세였던 찬미의 기도를 가르쳐주시지 않고 청원의 기도를 가르쳐주신 것일까요?
설득력 있는 대답은 오직 하나 뿐입니다. 하느님 백성에게 닥친 급박함 때문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하느님께서 당상 개입해주시라고 부르짖는 외침의 기도입니다. 급박하게 외치는 청원 기도야말로 막 시작된 하느님의 다스림에 제대로 들어맞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기도가 당시 성행되던 고대근동의 장황하고 화려한 청원기도와 크게 차별화되는 점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짧고 단순하다는 것, 지극히 가족적이고 친밀하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기도에서 기도하는 이와 하느님 사이의 대화를 지배하는 것은 왕궁의 격조높은 의식이 아닙니다. 가족 내의 친숙함, 정확히 말해서 예수님의 ‘새 가족’의 친숙함입니다. 가족 사이에서는 이리저리 에두르지 않고, 거창한 말로 꾸지지도 않고 직접적으로 말하는데, 그런 가족적인 분위기가 주님의 기도 전반에 흐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정말로 ‘새 가족’으로 살았습니다. 그들은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기 위해 혈육으로 이루어진 옛 가족을 떠나야 했습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부인도 형제도 떠나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대신에 새 가족은, 백배나 되는 형제자매들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런 모든 상황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 바로 주님의 기도를 통해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한없이 부족하고 나약하며 큰 죄인인 우리, 작고 보잘 것 없는 존재인 우리들이 전지전능하신 창조주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자격을 주신 예수님의 자상하고 따뜻한 마음이 넘쳐흐르는 사랑의 기도가 바로 주님의 기도입니다.
(게르하르트 로핑크, ‘주님의 기도 바로 알기’, 생활성서 참조)

열매를 맺는 기도
-반영억신부-
기도는 사람 들으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찬미와 감사 청원이 다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하느님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을 의식합니다. 그래서 마음으로 기도하기보다 입으로 할 때가 많습니다. 마음이 간절할수록 말은 적어지는 법인데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을 너무 많이 하지 마라, 떠들어 대지 마라”고 하십니다. 이는 세속의 시끄러움, 허영의 시끄러움입니다.
살아가면서 흔하게 하는 말 중에 하나가 ‘기도해 주겠다. 기도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그 기억을 되살리고 약속을 지켰는가를 생각해 보면 소홀함이 많습니다. 약속도 하고 결심도 하지만 그저 흘려버린 경우도 있습니다. 간절함으로 청하고 믿음의 기도를 드려야 하며 삶의 기도를 봉헌해야 효과 있는 기도가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나의 원의를 알고 계시는 분께 떼를 쓰는 것보다는 제가 필요한 것을 알고 계시니 그 바람을 ‘당신께서 원하시는 때에 당신이 원하시는 방법으로 이루어 주십시오. 무엇이 주어지든 당신이 주시는 것이라는 것을 제가 잊지 않게 해 주십시오’하고 말씀 드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해야 하겠습니다.
허공에 대고 빈말을 되풀이하기 보다는 의심하지 말고 때를 기다리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사람이 들으라고 외치는 것이 아니니만큼 어눌한 말이면 어떻고 두서없는 말이면 어떻겠습니까? 더군다나 우리 아버지신데 말입니다.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 모시고 그 앞에서 재롱을 떨 수 있다면 그 자체가 얼마나 큰 은혜로움인지요? 그저 마음을 담고 사랑을 담아 믿음으로 올리면 그 정성을 헤아리셔서 흔들어 넘치도록 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담을 그릇은 항상 준비해야 합니다. 사실“기도는 사람들이 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힘, 전지전능하신 이도 양보하시는 힘, 견줄 바 없는 특권, 전능하신 아버지가 그 자녀들의 필요와 염려에 관심을 나타내실 수 있는 길, 주 하느님의 창고는 기도로 열리며 믿음은 그 열쇠를 돌리는 것”(작자미상)입니다.
혹 누군가에게 약속한 기도를 잊었다면 오늘 그 기도를 채우시고 지나가는 소리로 청했다면 진지하게 갈망하기 바랍니다. 그러나 내 뜻대로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합니다. 바라는 간절함이 큰 만큼 걸 맞는 삶으로 기도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기도의 목적은 지적인 사색에 있다기보다는 사랑에, 그리고 의지의 실천에 더 있기 때문입니다(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사실 간절함이 크면 클수록 입은 다물게 되고 마음은 하늘을 향하게 됩니다. 아직도 입에 있다면 깊은 침묵 속에서 주님을 만나는 기쁨을 차지하시기 바랍니다. 소음이 크면 그분을 만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제대로 기도하려면 먼저 침묵하십시오. 그리고 하느님 외에는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마십시오. 기도는 분명 하늘의 열쇠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남미 우루과이의 작은 성당 벽에 써있는 기도문
"하늘에 계신" 하지 말아라. 세상일에만 빠져 있으면서.
"우리"라 하지말아라. 너 혼자만 생각하면서.
"아버지"라 하지 말아라. 아들 딸로서 살지 않으면서.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하지말아라.
자기 이름을 빛내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면서.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하지 말아라.
물질 만능의 나라를 원하면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소서" 하지말아라.
내뜻대로 되기를 원하면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하지말아라.
가난한 이들을 본체만체 하면서.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하지 말아라. 누구에겐가 아직도 앙심을 품고 있으면서.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하지말아라.
죄지을 기회를 찾아다니면서.
"악에서 구하소서" 하지말아라.
악을 보고도 아무런 양심의 소리도 듣지 않으면서.
"아멘" 하지말아라. 주님의 기도를 진정 나의 기도로 바치지 않으면서.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는 주님의 기도에 대해 ‘완덕의 길’에서 “그 어떤 책보다도 훌륭한 주님의 기도를 정성스런 마음으로 겸손한 자세로 묵상한다면 다른 책이 아쉽지 않을 것입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친히 가르쳐 주신 기도를 마음을 다해 자주 바쳐야 하겠습니다.

-조욱현신부-
복음: 마태 6,7-15: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예수님께서는 믿지 않는 이들이 기도할 때 말을 많이 하면 하느님께서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이루어 주신다고 생각하지만, 그러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마음에서 우러난 믿음의 기도를 바치라고 하신다. 주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우리보다 더 잘 아시며, 우리가 아뢰기도 전에 우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고 계시다. 그러니 기도는 청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은총을 내려주실 마음이 드시도록 기도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신다. 우리는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 이것은 아들을 믿는 이들의 특권이다.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라는 말은 하느님을 찬미하는 말이며 우리의 믿음을 드러내는 말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찾는 우리에게 든든한 확신을 주실 수 있도록 아버지라 불리기를 바라신다.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9절)는 우리의 기도로 더욱 거룩해 진다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거룩한 이름이 나날이 우리 안에서 거룩해지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기를 기도하는 것은 우리가 열심히 살아 우리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하느님을 찬미하게 되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나라가 오기를 기도하는 사람들은 먼저 하느님 나라가 자신들 안에 세워지기를 그리고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서 다스리시기를 기도한다. 우리는 이미 하느님 나라의 시민이며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이다. 이 하느님의 나라는 그리스도이시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와 있지만 그것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다.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하느님의 뜻을 행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 모든 것 안에서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즉 의인들이 하느님의 뜻을 행하듯이, 죄인들이 회개하도록 죄인들도 당신의 뜻을 행하게 해 달라는 뜻이 담겨있다. 그리고 이 청원은 하느님의 정의가 마침내 행사되기를 바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일용할 양식은 나날이 구원의 양식으로 성체를 받아 모시는 우리가 죄 때문에 그리스도의 몸과 떨어지는 일이 없도록 기도하는 것이다. 이 양식을 받아 모시며 우리는 거룩한 신성에 참여한다. 이 일용할 양식은 하루에 충분한 만큼만 주어지며 내일을 위한 영원을 위한 양식이며 물질로 환원되지 않는 양식이다.
우리는 날마다 죄를 짓기 때문에 용서를 청하라고 하신다. 그러나 이 청원은 우리가 용서를 청하는 이들을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전제한다. 우리에게 용서를 청하는 이들과 같이 우리도 하느님 아버지께 용서받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미 용서받았으므로, 용서에는 하느님과의 확고한 계약이 담겨있다. 그것을 소홀히 할 경우 앞서 한 모든 청원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수 있을 만큼 중요한 계약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죄가 용서되는 것만이 아니라, 죄를 철저히 거부할 수 있기를 기도해야 한다고 하신다.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저희를 악에서 구하소서.”(13절) 이 청원은 우리가 사탄에게 끌려가도록 두지 마십사는 의미이며 현재와 미래에 항상 악으로부터 보호해 주시기를 청하는 것이다.
주님의 기도의 내용을 보면, 하느님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나라가 오게 하시며, 하느님의 뜻이 완전하게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세 가지 청원은 영원한 삶과 관련된 것이다. 일용할 양식과 죄의 용서, 유혹에 빠지지 않고 악에서 구원되기를 바라는 뒤의 네 가지 청원은 현세의 삶과 관련한 것이다.
주님의 기도를 잘 묵상하며 참으로 아름다운 기도를 바치며, 우리의 삶으로 이 기도를 살아야 한다. 이 주님의 기도를 잘 살려고 노력할 때에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더 좋은 방법으로 더 풍성하게 우리에게 베풀어 주실 것이다.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마태 6, 9)
-한상우신부-
주님의 기도는
삶을 위한
가장 아름답고
빛나는 기도입니다.
아버지 하느님의
현존을 가르쳐줍니다.
하느님의 현존은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분명히
깨닫게합니다.
일상의 용서와
사랑으로 우리를
이끕니다.
아버지 하느님께
우리 삶을
겸손되이 바치는
사랑의 기도입니다.
사랑의 이 기도는
삶의 나눔이며
삶의 봉헌이 되어
주님과 하나되는
일치의 참된
기쁨으로 초대합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지를
분명히 가르쳐줍니다.
우리의 삶이란
주님의 간절한
기도처럼
기도의 힘이
매순간 필요한
기도의 여정이
우리의 삶입니다.
기도와 은총
용서와 사랑
하느님 나라와 구원이
주님의 기도안에
모두 담겨있는
복음의 참기쁨입니다.

-오상선신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에 대해 가르쳐 주십니다. 기도란 하느님과 더 밀접하고 친밀한 관계성 안으로 들어가는 문이라 할 수 있지요. 그러니 기도로의 초대는 다른 어떤 의무 조항에 대한 가르침과는 성격이 좀 다를 것 같습니다. 규범적 측면에서는 여느 계명보다 강제성이 약하면서, 의무보다는 개인의 선택을 존중하는 편이고, 또 결과마저 선뜻 눈에 드러나지 않으니까요.
그러다 보니 기도는 하느님과의 친밀한 일치를 진정으로 간절히 원하는 이만이 쟁취할 수 있는 전리품과 같습니다. 하느님께서 기도를 주도하시기 전까지는 인간 편에서 의지와 노력, 시간과 공을 정성껏 쏟아부어야 하는 좁다랗고 긴 여정이지요.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마태 6,8) 주변의 누군가 나의 필요를 잘 알아채고 채워 준 행복한 경험이 있습니까? 처음엔 좀 어리둥절하다가 점점 놀랍고 감사하게 되지요. 누군가의 필요를 안다는 건 그만큼 사랑하고 존중하며 살핀다는 뜻입니다. 지나가는 그의 말을 한 마디도 놓치지 않고 귀담아 듣고 있다는 뜻이지요.
하느님 아버지께서 바로 그렇게 우리에게 귀를 열고 계십니다. 마치 우리를 향한 그분 존재 전체가 "귀"인 것처럼 말입니다. 그분은 이미 우리 마음 속에 오가는 찰나적 탄식과 한숨과 헛웃음까지도 단 한 마디 땅에 떨어뜨리지 않고 고이 받아 두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하느님 앞에 서서 미사여구 가득한 의례적이고 공허한 "빈말을 되풀이"(마태 6,7)하는 것은 그분을 외롭게 만드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나를 속속들이 다 아시는 분 앞에서 마음의 문을 열지 않고 딴청을 피우는 꼴이니까요.
이어서 가르쳐 주시는 "주님의 기도"에는 하느님 아버지와 인간의 공통 관심사가 총망라되어 있습니다. 성자 예수님 덕분에 인간에게 허락된 "아버지"라는 호칭, 그 호칭에 담긴 관계, 아버지의 나라, 아버지의 뜻, 일용할 양식, 죄와 용서, 악과 유혹... 인간이 생명을 받아서 나고 자라 제 몫을 다하며 살다가 늙고 죽는 순간까지 생명의 줄기를 이루는 모든 내외적 활동이 다 언급된 기도입니다. 자녀인 인간으로서 아버지인 하느님께 드려야 할 것과 청해야 할 것이 잘 요약되어 있지요.
"너희가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용서하면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마태 6,14) 기도에 대한 가르침은 이처럼 용서로 마무리됩니다. 잘 알다시피 용서는 사람 사이의 일도 되고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일도 됩니다. 나를 아프게 한 이를 용서하기 위해서는 아버지께서 내게 하시듯, 나도 그를 위해 "커다란 귀"처럼 되어야 합니다. 그의 분노와 실패와 슬픔을 한 마디도 놓치지 않고 귀담아 들을 때, 내게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그의 한계를 감지하게 되고, 결국 용서를 선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미 하느님께서 나를 위해 하고 계신 일이지요.
기도를 자칫 하느님과 사람의 일로만 한정하게 되면 기도가 삶과 유리되어 버릴 공산이 큽니다. 기도가 하느님과의 관계만큼 사람 사이의 관계를 단단히 결속시킬 때 진정한 기도일 겁니다. 용서가 결여된, 빈말만 되풀이하는 공허한 독백은 사람과의 관계도 하느님과의 관계도 깊이 이어주지 못합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용서는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용서와 이어집니다. 한 줄기로 닿아 있고, 연결되어 있습니다. 결국 용서는 하나입니다. 기도의 한 열매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사도 바오로의 다소 격앙된 목소리가 들리는 듯 합니다. "하느님의 열정을 가지고 열정을 다해"(2코린 11,2) 이끌었던 코린토 교회가 사도의 기대와는 달리 미혹과 오류의 경계를 아슬아슬 헤매는 듯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폐가 되지 않으려고 더 노력했던 바오로는 실망하지 않으려 애쓰면서 자기의 지향에 대해 어느 정도 표현을 하는 중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아십니다!"(2코린 11,11) 예, 맞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다 알고 계십니다. 각별히 사랑했고 그래서 더 삼가했던 지향을 하느님은 알아주십니다. 진통을 겪고 있는 코린토 교회 앞에서 섣불리 실망을 속단하지 않은 채 사도 바오로는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 하느님께 공을 넘기고 있습니다. 이쯤되면 서운함도 용서의 부담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이미 한 개인의 감정과 의도는 모든 걸 아시고 좋은 걸 주실 하느님 손으로 넘어갔으니까요. 이제는 그들이 알아 주어도 그만, 몰라 주어도 그만입니다. 하느님께서 아시고 필요한 것을 주실 것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그러니 우리는 시편 작가의 입을 빌어 주님께 이렇게 노래합니다. "주님, 당신 손이 하신 일들 진실하고 공정하시옵니다."(화답송) 우주 만물, 모든 피조물을 아시는 분이 하시는 일이니 어련하시겠습니까! 그분이 하시는 일은 모두 맞고 옳고 공정하니, 우리는 다만 아버지만을 청하고, 용서를 통해 용서를 받을 뿐입니다. 이 단순한 기도는 우리를 하느님 품 더 깊숙한 곳으로 이끌어갈 것입니다.
오늘은 이 '주님의 기도'를 기회가 되는대로 화살기도로 되뇌며 그분과의 깊은 만남 이루시길 축원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만 제대로 불러도?
-김찬선신부-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
오늘 주님께서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시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아들로서 기도하는 기도의 모범을 알려주십니다.
그러니까 당신이 아들로서 아버지께 기도하시는 것처럼
우리도 당신과 마찬가지로 아들로서 기도하라고 가르쳐주시는 겁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기도의 모범을 가르쳐주시기 전에
기도의 반대 모범으로 말씀하신 빈말을 많이 하는 기도란
아들과 아버지의 근본적인 관계가 형성되지 않은 채 괜히
마음에도 없는 말을 이말 저말 하는 것을 뜻하는 걸 겁니다.
마음에 없으면서도 다음에 한 번 만나자는 그런 말과 다르지 않고,
존경하지 않으면서도 존경한다고 괜히 추어주는 말과 다르지 않다는 것인데
어떤 경우 이렇게 빈말을 합니까?
우선 사랑하는 관계나 좋은 관계가 아니고 그래서 반갑지 않은 만남입니다.
만났지만 모르는 체 할 수는 없고 그래서 뭔가 말을 해야 하니까 하고
당장의 어색한 만남의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서 어떤 말이라도 하는 겁니다.
또 이런 경우도 있습니다.
단 둘이 만나면 모르는 체 해버릴 수도 있는데 사람들 보는 눈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얘기 저 얘기 하지만 실은 다른 사람들 들으라고 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와 하느님의 관계도 이런 만남이고 이런 대화일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하느님을 ‘하늘에 계신 어르신’이라고 하지 않고 “저희 아버지”라고
부르라 하신 것은 하느님이 하늘에 계신 어떤 객관적인 분일 수는 없고
내 인생을 좌우할 정도로 밀접한 관계의 분이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사실 이름도 부르지 못하게 할 정도로 하느님을 초월적 객관자로 여기던
당시에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신 것은 대단히 혁명적인
신관의 변화이고, 하느님은 하늘에나 계시라며 땅에는 얼씬도 못하게 하고,
더욱이 나의 일에는 아무 간섭도 못하게 하는 우리에게도 근본적인 관계의
개선을 요구하시는 것이고 밀접한 관계여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그럴지라도 밀접한 관계라면 어머니라고 부를 수도 있는 것이고,
우리의 감정으로는 어머니가 아버지도 더 좋은 감정이고 밀접하기도 한데
왜 아버지라 부르게 하신 건가요? 가부장적이고 남성우월적인 차원인가요?
사실 제가 자주 시도하는 것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보다
‘하늘에 계신 저의 어머니’라고 부르는 것인데 이때 저는 하느님을
어머니로 바꿔 부르고 ‘우리의’가 아니라 ‘나의’ 하느님으로 바꿔 부릅니다.
이는 하느님이 따듯한 분이요 나만의 하느님이기를 바라는 마음의 표시지요.
그런데 제 생각에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주님께서 부르라고 하신 것은
영성 심리적인 차원인 거 같습니다.
영성 심리적학에서는 하느님 앞에 서게 되면 인간은 남성이건 여성이건
모두 여성성을 띄게 되는데 이때의 여성성은 남자에 대한 여성으로서의
여성성이 아니라 수용성(receptivity) 차원에서의 여성성을 뜻하는 거지요.
여성은 요구적인 남성보다 훨씬 더 수용적이고 이해적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하느님께 늘 요구적이고 청하기만 하던 인간이 회개하게 되면
마리아나 성인들처럼 자기 뜻보다 하느님의 뜻을 찾고 받아들이게 되는데
이때 인간은 남성이건 여성이건 여성성을 띄고 하느님은 남성성을 띕니다.
제 생각에 주님께서는 이런 차원에서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셨고,
그래서 주님의 기도 전반부에는 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하게 빛나고,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고, 아버지 뜻이 이루어지게 되는 아버지 중심입니다.
그런 다음 내게 필요한 일용할 양식이나 용서나 구원을 청하라 하시는데
먼저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이고 다음에 우리의 필요도 청하라는 뜻입니다.
이런 뜻에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만 마음에서 우러나와 불러도
훌륭한 기도, 완벽한 기도라는 깨우침을 받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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