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 성녀 축일

1월28일 성 토마스 데 아퀴노 사제 학자

Margaret K 2018. 1. 15. 21:25

 1월28일 성 토마스 데 아퀴노 사제 학자♬Christus factus est  



Scene from the Life of St Thomas Aquinas (detail)-LIPPI, Filippino
1489-91. Fresco. S. Maria sopra Minerva, Rome


축일 : 1월 28일 
성 토마스 데 아퀴노 사제 학자
St. Thomas Aquinas
San Tommaso d’Aquino Sacerdote e dottore della Chiesa

Also known as
Doctor Angelicus; Doctor Communis; Great Synthesizer;
The Dumb Ox; The Universal Teacher c.1225 at Roccasecca, Aquino, Naples, Italy 
c.1225 at Roccasecca, Aquino, Naples, Italy -
7 March 1274 at Fossanuova near Terracina of apparent natural causes;
relics at Saint-Servin, Toulouse, France
Canonized :1323



이탈리아 아퀴노 교외 로까세까(城)에서 태어난 성 토마스는 아퀴노의 란둘프 백작의 아들이며, 
로마 황제와 프랑스의 왕 그리고 태오도라와 친척이었다.
그는 불과 다섯 살의 나이로 몬떼 까시노의 베네딕또 수도원으로 보내져서 교육을 받았고,
1239년경에는 그의 교육을 마무리짓기 위하여 나폴리 대학교를 다녔고,
1244년에 가족들의 완강한 반대를 물리치고 도미니칸이 되었다.
이때 가족들은 그를 강제로 데려다가 15개월 동안이나 로까세까성에 감금시킨 적도 있었다.

그는 뜻을 굽히지 않았으므로, 1245년에 다시 수도회로 돌아갈 수 있었고,
1245년부터 3년 동안을 파리에서 수학하였다.
그는 파리와 쾰른에서 성 알베르또(대)의 문하생으로 공부하여, 1256년에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1250년과 51년 사이의 어느 대에 사제로 서품되었고,
그 후에는 주로 나폴리, 아나니, 오르비에또, 로마 그리고 비떼르보에서 가르쳤으며,
1259년~68년 사이에 "숨마 꼰뜨라 젠띨레스"를 마루리 지으면서, 
저 유명한 "숨마 테올리지까((Summa Theologica.신학대전)"저작에 착수하였다.

파리로 돌아온 1269년에는 수도사제와 교구사제간의 논쟁에 말려들었고,
시제르 브라반트와 요한 펙캄 그리고 파리의 탕피에르 주교의 철학적인 가르침을 반대하고 나섰다.
그는 리용 공의회에도 참석하여 희랍과 라틴 교회의 재일치 가능성을 토의하라는 부름을 받았으나,
리용으로 가는 중에 테라치나 교외 포사 누오바에 있는 시토 수도원에서 운명하였다.

그는 1323년에 요한 22세에 의하여 시성되었고, 1567년에는 비오 5세에 의하여 교회박사로 선언되었고,
1880년에는 레오 13세에 의하여 모든 대학교와 대학 그리고 학교의 수호성인으로 선언되었다.



그의 칭호는 "보편적인 박사"(Doctor Communis)이다. 
레오 13세는 모든 신학생들이 그의 사상을 연구해야 한다는 "에떼르 빠뜨리"칙서까지 반포하였다.
그의 주요 사상은 곧 가톨릭 교회의 공식적인 가르침이 되었다.
아퀴나스는 그리스도교 최대의 신학지이며, 그의 사상은 그의 사후부터 현재까지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을 지배하고 있고,
그의 저서들은 신앙과 이성 간의 예리한 구분으로 특징 지어지는 탁월한 저작들이다.
그의 "마늄 오뿌스"와 미완성의 대작인 "신학 대전"은 현대 가톨릭 신학의 뿌리로 받아질만큼 위대한 신학 사상을 담고 있다.

이러한 그의 지적 능력 이외에도, 아퀴나스는 지극히 겸손하고 거룩한 사람이다.
그는환시, 탈혼 그리고 계시를 체험하였으며, "그리스도의 몸"축일 성무일도를 집필했고,
지금의 교회가 사용하고 있는 찬미가, 
예컨데 "빤제 린과, 베르붐 수뻬르눔, 라우다 시온, 아도로 떼 데보떼.Devoutly I Adore Thee (Adoro te devote) " 등을 썼다.
또한 그는 주의 기도, 사도신경 그리고 성서 일부에 대한 주해서를 썼다.
한마디로 그는 지성과 성덕의 금자탑이었다.(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Triumph of St Thomas Aquinas-TRAINI, Francesco
c. 1340.Tempera on wood, 375x258cm.Santa Caterina, Pisa


1225년경 아퀴노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먼저 몬테 카시노 수도원에서,그 다음 나폴리에서 공부했다,
도미니꼬회에 입회하여 파리와 쾰른에서 성대 알베르또의 지도하에 학업을 마쳤다.
철학과 신학에 관한 위대한 저서들 을 남겼고, 많은 이들을 탁월하게 가르쳤다,
1274년 4월 7일 시토회의 포사누오바 수도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1369년 1월 28일 프랑스 툴르즈로 그 유해가 옮겨졌고, 그때부터 이날을 성인의 축일로 기념해 왔다.



The Vision of Saint Thomas Aquinas. by Stefano Di Giovanni Sasetta.

아퀴노의 성 토마스 사제의 [강의록]에서
(Collatio 6 super "Credo in Deum")

십자가는 온갖 덕행의 모범을 보여 줍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우리를 위해 고난 당하시는 것이 과연 필요했겠습니까? 
네, 극히 필요했습니다. 두 가지 이유로 그러했습니다.
첫째로 죄를 기워 갚는 치료제로서, 둘째로 우리 행위의 모형으로서 필요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수난은 무엇보다 먼저 우리 죄의 치료제입니다.
우리는 우리 죄때문에 닥쳐온 온갖 악을 치료할 치료제를 그리스도의 수난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수난은 우리의 모범으로서도 이에 못지 않게 유익합니다.
참으로 그리스도의 수난은 우리의 전체 생활을 완전히 정향해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 완덕에 이르고자 한다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상에서 멸시하신 것을 멸시하고
또 그리스도께서 지향하신 것을 지향하기만 하면 됩니다.
십자가는 온갖 덕행의 모범을 보여줍니다.



여러분이 사랑의 모범을 찾고 있다면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라는 복음서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상에서 하신 일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분이 우리를 위해 당신의 목숨을 바치셨다면
우리가 그분을 위해서 당하는 곤란이 어떤 것이라해도 그것을 부담으로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인내의 모범을 찾고 있다면, 십자가 상에서는 그것을 더욱 위대하게 드러내 줍니다.
가장 위대한 인내는 두 가지 경우에서 나타납니다.
즉, 큰 어려움을 인내로이 참을 때나 또한 피할 수 있지만, 피하지 않은 어려움을 견딜때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상에서 극심한 고통을 당하실 때 다음의 성서 말씀대로 그것을 인내로써 견디어 내셨습니다.
"그분은 고통을 당하면서 위협하지 않으시고,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양처럼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십자가 상에서 보여 주신 그리스도의 인내심은 참으로 위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음의 근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만을 바라보면서 우리가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려갑시다.
그리스도는 장차 누릴 기쁨을 생각하며 부끄러움도 상관치 않고 십자가의 고통을 견디어 내셨습니다."

여러분이 겸손의 모범을 찾고 있다면 십자가에 못박히신 분을 바라보십시오.
하느님께서는 본시오 빌라도 치하에서 재판을 받다 죽임당하는 것을 원하셨습니다.
여러분이 순종의 모범을 찾고 있다면 죽기까지 아버지께 순종하신 분을 따르십시오.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즉 아담의 불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된 것과는 달리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의롭게 될 것 입니다."

여러분이 세상의 것을 멸시하는 모범을 찾고 있다면,"왕 중의 왕" 이시고 "주님 중의 주님"이신 분을 따르십시오.
"그분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온갖 보화가 감추어져 있지만"
그분은 십자가 상에서 옷 벗기우고 조롱 당하시고 침뱉음을 당하셨으며
매맞고 가시관을 쓰셨으며 마침내는 쓸개와 초를 마시셨습니다.

옷이나 재물에 애착심을 두지 마십시오. "그들은 주님의 겉옷을 나누어 가졌습니다."
명예를 구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조롱 당하시고 매맞으셨습니다. 명예직을구하지 마십시오.
"그들은 예수께 가시관을 엮어 머리에 씌웠습니다."
쾌락을 탐하지 마십시오. "목마를 제 그들은 주님께 마실 초를 주었습니다."(가톨릭홈에서)



여러 교회 박사 중 가장 유명한 이는 성 토마스 데 아퀴노일 것이다. 
그는 1266년 이탈리아 아퀴노 교외 로카세카 가족성(城)에서 백작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란돌프(Landulphus)라는 분이었는데,
황제 프리디리히 바르바로사에게는 조카가 되고, 하인리히 6세는 종형제(從兄弟)에 해당된다.
또 어머니 테오도라(Theodora)는 노르만디의 제왕을 친척으로 하고 있었지만,
그 중에도 로베르토 기스갈도나 달글레토와는 가까운 친척이었다.

그러나 장차 도미니코 수도원에 들어가서
가난하고 검소한 수도 생활을 보내려고 하던 토마스에 있어서는 그런 것은 상관이 없었던 것이다.

토마스가 다섯 살 때에 그의 아버지는 교육을 시키기 위해 그를 몬테 카시노의 수도원에 보냈다.
그 수도원장도 역시 란돌프라는 분으로 역시 아퀴노의 집안이었다.
어린 토마스는 덕행이나 학문 면에 놀랄 정도로 많은 진보를 했다.

그는 다른 아이들과 놀고 있을 때에도
종종 학문상의 의문이 머리에 떠오르면 즉시 놀음을 그치고 스승에게 달려가서 질문하는 것이었다.
이같이 해서 그는 10세 때 이미 보통의 17, 8세의 소년보다 더 많은 학식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므로 수도원장 란돌프는 아직 어린 토마스를 나폴리의 대학에 입학시켰다. 
그 대학은 당시 학생들의 풍기가 나쁜 것으로 세상에 알려져 있었지만,
토마스는 어떠한 유혹에 대해서도 위험을 느끼지 않았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 깊었던 만큼,
그의 마음은 언제나 고상한 것만을 찾게 되어 세상사물에 대해서는 티끌만큼도 마음을 붙이는 법이 없었다.

그는 특별히 성모 마리아를 공경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성모께서도 늘 그를 보호하셨다.
그가 도미니코회에 들어가는 데도 성모의 도움이 적지 않았다.
토마스는 14세때 양친 몰래 그 수도원에 들어갔다.



그런데 그의 부모는 독실한 신자이기는 했지만 자녀를 수도자로 만들 생각은 없었고 더군다나 
도미니코회는 아직 새로운 수도원이었던 만큼 토마스가 무단 입회한 것을 알게 되자 
대단히 분노하여 어머니 테오도라는 즉시 아들을 데리러 나폴리에 가게 되었다.

그런데 마침 토마스는 그때 장상의 명령에 의해 로마를 출발해 파리로 향해 떠나고 있었으므로
어머니는 점점 대노하여 토마스의 두 형인 란돌프와 라이노르도에게 그의 뒤를 쫓게 했다.

그들은 토마스를 붙잡자마자 이유 없이 죄수처럼 로카세카(Rocca Secca)성에 처넣어 버렸다.



그 후 갖은 수단과 방법으로 그가 수도 생활을 하지 못하도록 노력하며 
심지어는 더러운 여자까지 방에 들여보내어 유혹케 하고 그를 타락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토마스는 난로 속에서 불붙는 장작을 꺼내들고
이를 휘둘러 그 여자를 내쫓은 다음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성모의 보호를 간구했다.

바로 그 날 밤의 꿈에 한 천사가 나타나서 그의 허리에 거친 띠를 매어 주었다.
그는 그때 격심한 고통을 느껴 저절로 소리를 지르게 되었지만,
그 후부터는 한 번도 유혹을 당하지 않고 일평생 동정을 지킬 수가 있었다.
그것은 온전히 성모 마리아의 보호였다.



그의 견고한 의지와 경건한 생활에 우선 감동한 것은 그의 자매들이었는데, 
하루는 그를 광주리에 숨겨 성의 창문을 통해 내려보내 유폐(幽閉)의 장소에서 도망가게 했다.
그는 급히 수도원에 돌아와서 그 후 다시 국경을 넘어 외국에 피신했다.
그렇게 하는 동안 교황의 권고도 있고 해서 양친도 부득이 그에게 수도 생활을 허가하게 되었다.

토마스는 그 후 독일의 쾰른 시에 가서 유명한 교회 박사 성 대 알베르토의 제자가 되었지만
경건하고 겸손하고 침착한 그는 처음에는 같은 제자 동료 중에서 평범한 사람으로밖에 안 보였다.

그러나 그의 예민한 재지(才智), 그의 탁월한 덕은 기회 있을 때마다 찬란한 빛을 발휘하여
머지않아 아무도 그를 당할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245년 그는 파리로 유학을 명령받고 그곳의 유명한 대학에서 연구하기로 되었다. 
그는 파리의 도미니코회의 한 수도원에 기숙하고 매일 그곳에서 통학했던 것이다.
장성하자 그의 학덕도 점점 깊어지고 또한 높아졌다.

그는 십자가를 가장 좋은 서적이라고 칭하며
가끔 그에 대하여 묵상하고 하느님의 비추심과 은총을 받고 종교의 진리를 깨닫는 바가 심히 많았다.
그러므로 그는 모든 사람들에게 겸손과 순명, 정결과 청빈,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는 덕의 거울로 존경을 받았다.



3년 후 그는 쾰른에 돌아가 신품 성사를 받고 그곳 신학교의 신학교수에 임명되었다. 
그 후에는 나폴리, 아니니, 오르비에토, 로마 그리고 비테르보에서 가르치게 되었다.
또한 그는 쉽고도 심원한 서적을 저술하고, 한편 종조 파리의 여러 교회에서 강론도 했다.

그리고 나중에는 성왕 루이(루도비코)의 고문으로서 많은 신임을 받게 되었다.
파리 대학은 당시 전 유럽의 청년 학생을 흡수하고 있었던 만큼 토마스의 명성은 그의 저작과 더불어 삽시간에 퍼졌다.

*성 도미니코 사제 축일 8월8일.인창동성당게시판1308번
*성 대 알베르토 주교 학자 축일:11월15일.게시판1471번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축일:7월15일.게시판1274번
*성왕 루이(루도비코9세)축일:8월25일.게시판1331번.



1256년에는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261년 교황 우르바노 4세(Urbanus IV)는 유명한 학자 토마스를 로마에 초대했다.
그리고 1264년 오르비에토에 체재 중 성체 축일을 전 세계에 지킬것을 결정했다.
(이 축일은 벨기에의 리유티히 주교구에서 시작하여 그 당시는 다만 두세 나라에서 지냈을 뿐이었다.)

그래서 그를 위한 미사 전례문(典禮文)및 성무 일도서에 삽입할 성체 찬미가의 편찬을
당시의 고명한 신학자 성 토마스와 그의 친우 보나벤투라(Bonaventura)에게 위탁했다.

두 사람은 편찬을 마치고 난 후 보나벤투라가
먼저 토마스의 것을 읽고 나서 그의 완전함에 놀라 자기의 것을 무용한 것으로 생각해 태워 버렸으므로
교황께서도 토마스가 편찬한 것을 애용하게 되어 오늘에 이른 것이다.



이듬해 클레멘스(Clemens) 4세가 교황위에 등극하자, 
토마스는 1259년부터 68년 사이에 “숨마 콘트라 젠틸레스”를 마무리 지으면서
그의 저작 중 가장 걸작인 “숨마 테올로지카”(신학 대전, 神學大全, Summa Theoligica)의 집필에 착수했다.

이것은 고금을 통하여 세상에 나온 신학서 중에서 가장 유명하고 또한 가장 훌륭한 것이다.
천사적 박사라고 칭하게 된 토마스는 이 대작을 완성하는데 전후 9년 동안 심혈을 기울였다.



그랬던만큼 하느님께서도 이 서적을 축복하시어 하루는 그에게 나타나셔서 
"토마스야 너는 나에 대해 참 잘 썼다. 그 보수로 무엇을 원하느냐?”는 말씀을 듣고
토마스는 “주여, 당신 외에는 다른 것을 원치 않습니다”하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 외 그가 자기 친구 레기날드에게 말한 바에 의하면,
그는 하느님의 발현 시에 형언키 어려운 무수한 신기한 일을 보고
자기가 오랜 시간동안 심혈을 기울여 쓴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한다.

그는 그 날 부터 주님께 대한 동경심에 차라리 죽음을 원하게 되었다.



그러나 장상의 명을 받을어 볼로냐나 나폴리로 여행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1274년 교황 그레고리오 10세가 리용에서 회의를 소집했을 때
토마스도 참석하기 위해 그 곳에 가는 도중 조카딸 집에서 병을 얻어 위독하게 되었다.
이미 임종이 가까워온 것을 안 그는 “나는 수도자이므로 수도원에서 죽고 싶다”고 간절히 원했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부근에 있는 트라피스트회 포사노바 수도원에 옮겼다.

곧 죽음이 점점 다가오자 두 세명의 친우는 아가(雅歌)의 설명을 청했다.
그는 그들의 청을 들어 말하려 했으나 이미 힘이 없었다.
그는 눈물을 흘리며 성체를 모시고 얼마 안 되어 그의 영혼은 천국을 향해 올라갔다. 그때 그는 48세였다.



성 토마스는 돌아갔으나 그의 불멸의 명작은 지금 더욱 찬연히 광채를 발하고 있다. 
그는 1323년에 요한 22세에 의해 시성되었고,
1567년에는 비오 5세에 의해 교회 박사로 선언되었고,
1880년에는 레오 13세에 의해 모든 대학교와 대학, 그리고 학교의 수호성인으로 선언되었다.

레오 13세는 모든 신학생들은 그의 사상을 연구해야 한다고 “에떼르 빠뜨리” 칙서까지 반포했다.
그의 주요 사상은 곧 가톨릭 교회의 공식적인 가르침이 되었다.



성 토마스 데 아퀴노는 그리스도교 최대의 신학자이며, 
그의 사상은 그의 사후부터 현재까지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을 지배하고 있고,
그의 저서들은 신앙과 이성 간의 예리한 구분으로 특정 지어지는 탁월한 저작들이다.

그의 “마늄오푸스”와 미완성 대작인 “신학대전”은 현대 가톨릭 신학의 뿌리로 받아질만큼 위대한 신학 사상을 담고 있다.

이러한 지적 능력 이외에도 지극히 겸손하고 거룩한 사람이었다.
그는 환시, 탈혼 그리고 계시를 체험했으며, 지금의 교회가 사용하고 있는 찬미가, 
예컨대 ”빤제 린과, 베르붐 수페르눔, 라우다 시온, 아도로 데 데보테(Adoro Re Devote)"등을 썼다.

또한 주님의 기도, 사도신경 그리고 성서 일부에 대한 주해서를 썼다. 한마디로 그는 지성과 성덕의 금자탑이었다. (대구대교구홈에서)



불굴의 의지

도미니코회 수사들에게 가장 유명한 선배를 손꼽으라고 한다면 단연코 성 토마스 데 아퀴노를 들 것이다. 
급우들이 ‘길리기아의 벙어리 황소’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던 성 토마스는 불후의 명저 <신학대전>을 집필했다.
그러나 만약 어머니 테오도라의 고집대로 되었다면 그는 도미니코회가 아니라 베네딕토회의 수사가 되었을 것이다.
성 토마스는 유년 시절의 대부분을 몬테카시노에 있는 베네딕토 수도원에서 보냈다.
그는 나폴리 대학에 진학한 후, 도미니코회에 가입했고 결국 그 수도원에 입회하게 되었다.
아들이 몬테카시노의 대수도원장이 되기를 바랐던 어머니는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는 수도원에 있는 토마스를 납치해서
2년 동안이나 지하실에 가두어 놓고 온갖 수단을 동원해 그의 결심을 꺾으려고 했지만 결국에는 아들의 뜻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새해 첫날, 거창한 계획을 세우고는 작심삼일로 그쳐 버린 경험이 있을 것이다.
진정한 결단력은 머리 속에서 하는 다짐이 아니라 마음먹은 것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불굴의 의지를 말한다.
성 토마스는 뛰어난 학문적인 업적으로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있지만,
만일 그에게 학문에 대한 확고한 의지가 없었더라면 그의 위대한 작품은 결코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영적 성장에 필요한 일을 하고자 할 때, 가족이나 친구가 반대한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결심을 실천함으로써 자신의 믿음을 지키겠다. (까리따스수녀회홈에서)



설교자회의 영성.도미니코회의 독특한 생활
그리스도를 따름으로써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에 있어서 완성을 이루기 위하여, 
우리는 자신을 수도회에 일치시키는 선서를 통하여 우리 자신을 하느님께 온전히 축성하며,
특히 새로운 방식으로 자신을 보편 교회에 바치며 하느님 말씀의 완전한 복음화를 위하여 온전히 바치는 것이다. (근본 회헌 § III)

사도들의 사명의 협력자들인 우리는 성 도미니코가 생각했던 생활 방식을 따라, 
사도들의 생활을 본받아 공동 생활에서 한마음을 이루고, 복음적 권고[순명, 정결과 청빈]의 선서에 충실하며, 
전례의 공동적 참여, 기본적으로 성체성사와 성무일도, 기도[묵상, 묵주기도와 천주의 모친이신 동정녀께 대한 신심 등]와 금욕에 열성을 가지고, 
진리를 근면하게 공부하며, 꾸준히 규율을 준수[봉쇄, 침묵, 수도복 착용, 참회 고행으로 하는 일 등]한다. 

이 요소들은 서로 긴밀히 결합되어 있으며, 
서로 균형을 이루며 조화되고 서로를 풍요롭게 하여, 그 총체가 우리 수도회의 고유한 생활을 이루는 것이다. 
즉 가장 완전한 사도생활은 풍부한 묵상에서부터 설교와 가르침이 나오는 것이어야 한다. (근본 회헌 § IV)

그러므로 우리 형제 토마스 아퀴나스는 도미니코회의 카리스마를 "관상하고 관상한 것을 전한다"로 요약하였는데, 
이것은 우리의 소중한 모토가 되었다.
(천주교설교자회.도미니코수도회홈에서) 



빛과 인도를 구하는 기도문

형언할 수 없는 창조주 하느님, 
당신께서는 넘치는 지혜로
천사의 세 품을 만드셨고,
하늘의 놀라운 질서를 마련하셨으며,
우주 만물을 각자의 품위대로 배치하셨나이다. 

당신께서는 빛과 지혜의 원천이시고
모든 것의 시작이라 불리십니다. 

당신의 찬란한 빛으로
저의 지성의 어둠을 밝히시어
타고난 죄와 무지의 두 암흑을 몰아내 주소서. 

당신께서는
어린이들의 입에서도 찬양을 자아내시니,
제 혀가 당신의 지혜를 말하고,
제 입술이 당신 축복의 은총을 쏟아내게 하소서. 

이해의 명석함을,
보유할 수 있는 역량을,
배움의 방법과 수월함을,
해석에서는 정확함을,
말을 할 때는 충만한 은총을 주소서.

당신 영의 감도로 시작하게 하시고,
도중에 저의 발걸음을 인도하시며,
마칠 때 완성하게 하소서. 

이 모든 것을
주님이시고 사람이시며,
영원히 살아계시고 다스리시는
천주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기도-



성 토마스의 성체 찬미가

○ 엎디어 절하나이다. 
눈으로 보아 알 수 없는 하느님,
두 가지 형상 안에 분명히 계시오나
우러러 뵈올수록 전혀 알 길 없삽기에
제 마음은 오직 믿을 뿐이옵니다.
● 보고 맛보고 만져봐도 알 길 없고
다만 들음으로써 믿음 든든해지오니
믿나이다. 천주 성자 말씀하신 모든 것을.
주님의 말씀보다 더 참된 진리 없나이다.
○ 십자가 위에서는 신성을 감추시고
여기서는 인성마저 아니 보이시나
저는 신성, 인성을 둘 다 믿어 고백하며
뉘우치던 저 강도의 기도 올리나이다.
● 토마스처럼 그 상처를 보지는 못하여도
저의 하느님이심을 믿어 의심 않사오니
언제나 주님을 더욱더 믿고
바라고 사랑하게 하소서.
○ 주님의 죽음을 기념하는 성사여,
사람에게 생명 주는 살아있는 빵이여,
제 영혼 당신으로 살아가고
언제나 그 단맛을 느끼게 하소서.
● 사랑 길은 펠리칸, 주 예수님,
더러운 저, 당신 피로 씻어주소서.
그 한 방울만으로도 온 세상을
모든 죄악에서 구해 내시리이다.
○ 예수님, 지금은 가려져 계시오나
이렇듯 애타게 간구하오니
언젠가 드러내실 주님 얼굴 마주 뵙고
주님 영광 바라보며 기뻐하게 하소서.
◎ 아멘.

Devoutly I Adore Thee (Adoro te devote)

O Godhead hid, devoutly I adore Thee,
Who truly art within the forms before me;
To Thee my heart I bow with bended knee,
As failing quite in contemplating Thee.
Sight, touch, and taste in Thee are each deceived;
The ear alone most safely is believed:
I believe all the Son of God has spoken,
Than Truth’s own word there is no truer token.

God only on the Cross lay hid from view;
But here lies hid at once the Manhood too;
And I, in both professing my belief,
Make the same prayer as the repentant thief.

Thy wounds, as Thomas saw, I do not see;
Yet Thee confess my Lord and God to be:
Make me believe Thee ever more and more;
In Thee my hope, in Thee my love to store.

O thou Memorial of our Lord’s own dying!
O Bread that living art and vivifying!
Make ever Thou my soul on Thee to live;
Ever a taste of Heavenly sweetness give.

O loving Pelican! O Jesu, Lord!
Unclean I am, but cleanse me in Thy Blood;
Of which a single drop, for sinners spilt,
Is ransom for a world’s entire guilt.

Jesu! Whom for the present veil’d I see,
What I so thirst for, O vouchsafe to me:
That I may see Thy countenance unfolding,
And may be blest Thy glory in beholding. Amen.

-Saint Thomas Aquinas,( translated by E. Caswall)



Tantum Ergo Sacramentum

Down in adoration falling, 
Lo! The Sacred Host we hail.
Lo! o’er ancient forms departing,
Newer rites of Grace prevail:
Faith for all defects supplying,
Where the feeble senses fail.

To The Everlasting Father
And The Son Who reigns on high,
With The Spirit blessed proceeding
Forth, from Each eternally,
Be salvation, honor, blessing,
Might and endless majesty. Amen.


 

<수도원에서 죽고 싶습니다>


“주님, 당신 외에는 다른 아무 것도 원치 않습니다.”


“나는 수도자이므로 수도원에서 죽고 싶습니다.”


교회 역사 안에 가장 탁월한 철학자이자 신학자 중 한분으로 알려진 토마스 아퀴나스(1224-1274) 성인께서 남기신 말씀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당시 이탈리아에서 꽤 잘나가는 가문에서 출생합니다. 당대 영향력 있던 인물들을 든든한 배경으로 삼고 있던 아퀴나스 백작 가문이었습니다. 세속적으로 미래가 장및빛이었던 토마스였습니다.


그러나 토마스는 부모의 격렬한 반대에도 무릅쓰고 당시 신생 수도원이자 절대적 가난을 실천하던 탁발수도회인 도미니코수도회에 입회합니다. 당연한 결과겠지만 갖은 우여곡절을 겪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교회 역사 안에 길이 남을 대학자이면서도, 진정 겸손하고 가난한 수도자로서의 길을 충실히 걸어갑니다.


1265년 토마스는 자신의 저작 중에서 가장 눈부신 걸작인 신학대전(神學大典)대전의 집필에 착수합니다. 이 신학대전의 완성은 오랜 투쟁의 결실이었습니다. 그만큼 뼈를 깎는 오랜 고통의 세월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그런 토마스의 노고를 아셨던지 하느님께서도 이 대작을 축복하셨는가 봅니다. 일설에 따르면 어느 날 하느님께서 토마스에게 나타나셔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토마스야, 너는 나에 대하여 참 잘 썼다. 그 대가로 너는 무엇을 원하느냐?”


토마스는 겸손하게도 이렇게 대답하였답니다.


“주님, 당신 외에는 다른 아무 것도 원치 않습니다.”


토마스가 수도회 총회 참석차 볼로냐에 체제하고 있던 때에 생긴 에피소드를 통해 토마스가 얼마나 겸손한 사람이었는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새파란 수사’ 한 사람이 사색에 빠져 수도원 회랑을 거닐고 있던 토마스(이미 대학자로 교회와 수도회 안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던)를 붙잡았습니다. 토마스가 누군지 알 길 없던 ‘새파란 수사’가 토마스에게 이렇게 말을 건넸습니다.


“저는 지금 시내 볼 일 보러 가는 중인데요, 맨 먼저 눈에 띄는 형제를 데리고 함께 가도 좋다고 원장 신부님께 허락을 받았거든요. 같이 가 주셔야겠는데요.”


토마스는 ‘새파란 수사’와 함께 길을 나섰는데, 대단한 거구였던 토마스는 걸음이 빠른 ‘새파란 수사’와 도저히 보조를 맞출 수 없었습니다. 몇 번이나 뒤쳐지는 토마스를 향해, 그때 마다 ‘새파란 수사’는 “왜 그리 걸음이 늦냐? 살 좀 빼라!”고 수도 없이 야단을 쳤겠지요. 그러나 토마스는 전혀 개의치 않고 땀을 뻘뻘 흘리며 최선을 다해 쫒아갔다고 합니다.


잠시 후에 그가 대학자 토마스임을 알게 된 ‘새파란 수사’는 얼굴이 샛노래지면서 그때까지의 무례를 사과했습니다. 그러자 토마스는 이렇게 대답했답니다.


“수도생활은 순명으로 완전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만년에 도달한 토마스가 1273년 리옹에서 개최될 공의회에 참석하기 위해 여행하던 중의 일이었습니다. 꽤 심각한 질병에 걸린 토마스가 사경을 헤맬 지경이 이르렀습니다. 스스로 ‘때’가 되었음을 알게 된 토마스는 주변 사람들에게 이런 간절한 부탁-진정 수도자다운 부탁-을 하였답니다.


“나는 수도자이므로 수도원에서 죽고 싶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근처에 있던 시토회 수도원으로 옮겼으며, 이곳에서 생애 마지막 열흘을 보냈다고 전해집니다.


임종 사흘 전 성체를 영한 후 토마스는 이런 장엄고백을 하였습니다.


“내 나그네 길의 양식인 그리스도여, 지금 나는 당신을 받아 모시나이다. 내가 배우고, 밤을 지새우고, 애를 쓴 것은 모두 당신의 사랑 때문이었나이다. 나는 당신에 관해 설교하고, 당신에 대해 가르쳤나이다. 나는 당신께 반함을 알면서 말한 것은 한 번도 없었나이다. 하오나 만일 이 성사와 다른 사항에 관하여 잘못 말했거나, 잘못 적은 것이 있었다면, 모든 것을 거룩한 로마 교회의 판정에 맡기옵고 교회에의 순명 속에 이 생을 마감하나이다.”

-양승국신부-

 


♬Christus factus est - Santo Domingo de Sil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