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 성녀 축일

1월26일 성 디모테오 주교 순교자

Margaret K 2018. 1. 15. 21:23

1월26일 성 디모테오 주교 순교자 ♬Be Still My Soul  



축일:1월 26일 
성 디모테오와 성 디도 주교
Saints Timothy and Titus


디모테오와 디도는 사도 바울로의 제자요 협력자들이었다.
디모테오는 에페소 교회를 지도했고, 디도는 크레타 교회를 지도했다.
성 바울로는 그들에게 사목 서간을 써 보냈는데
그 서간들은 성직자와 신자들을 지도하는 데 있어서 유익한 많은 권고들을 담고 있다.

                          

디모테오 전후서는 어떤 책인가요?

디모테오 전후서란 이름은?
디모테오 전후서는 신약성서에서 열다섯번째와 열여섯번째로 나오는 편지로 데살로니카 후서 다음에 위치합니다. 
필립비서, 에페소서 등이 각각 필립비 교회와 에페소 교회의 불특정 다수의 신도들에게 보내는 편지라면,
디모테오 전후서는 사도 바오로의 협력자였던 디모테오라는 한 개인에게 보내는 편지죠.
개인에게 보낸 편지라 해도 교회 공동체 안에서 회람 낭독되다가 경전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게 되었으므로 훗날 서간성서에 한데 묶이게 되었답니다.

누가 썼나요? 
디모테오 전서와 후서는 모두 사도 바오로가 디모테오에게 편지를 띄웠다는 기록을 첫머리(1디모 1,1; 2디모 1,1)에 명확히 밝히고 있어요.
그렇지만 이들 편지에 쓰여진 문체가 바오로 친서와 현저하게 다른 것을 보면, 사도 바오로가 직접 쓰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여요.
학자들 중에는 바오로 주변에 있는 인물이 썼거나 바오로의 권위를 빌어 50-60년에 파송된 선교사들이 썼으리라고 보는 이들도 있어요.
다른 학자들은 후대에 바오로를 추종하는 어떤 사람이 썼을 것으로 보아요.

언제 쓰여졌나요?
디모테오 전후서에 실린 교회 제도가 초대교회와 다른 것으로 보아, 사도 바오로가 죽은 후 한 세대 이상이 지난 다음에 쓰여졌을 것으로 보아요. 
이냐시오가 117년경에 보낸 편지에는 감독과 장로가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는데, 디모테오 전후서에서는 혼용되고 있거든요.
학자들에 따라서 집필연대를 신앙인들의 2세대(70-100년)로 보기도 하고, 3세대(100-130년)로 잡기도 해요. 디도서보다는 조금 늦게 쓰여졌을 것으로 추정되어요. 

왜 썼나요?
유다인이든 이방인이든, 노예든 자유인이든, 여자든 남자든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할 사명은 사도 시대나 교회 시대나 늘 한결 같음을 일깨우고자 해요.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과거 및 구약성서, 유다인들의 윤리 및 가정규례, 바오로의 사도직과 가르침, 헬레니즘과 로마 문화와도 연계되어 있음을 강조하고 있어요.

즉 1세기 말 아시아 교회 전역에는 율법교사로 자처하면서도(1디모 1,7) 꾸민 이야기와 족보에 정신이 팔려(1디모 1,4) 결혼을 금하고 음식을 절제하며(1디모 4,3)
부활이 이미 이루어졌다고 주장하는(2디모 2,18) 이들이 여기저기서 늘어났어요.
디모테오 전후서는 이처럼 다른 이들의 신앙까지도 뒤흔들어 놓는 교회의 암적인 존재들과 맞서, 사도 바오로가 전해 준 그리스도교 사상만이 참된 삶의 길임을,
당시에 널리 퍼져 있던 그리스 - 로마 철학의 문체와 어휘, 논증방식을 사용해서 일깨우고자 해요.

<새김과 나눔>
사도 바오로가 선교지 교회 신도들과 주고 받은 일상적인 편지는 거룩한 성서로까지 인정됩니다.
우리가 무심코 띄우는 편지 한 장, 전화 한 통에도 하느님의 말씀이 담길 수 있다는 것을 깊이 생각하는 한 주간 되십시오.




성 요한 크리소스또모 주교의 강론에서
(Hom. 2 de laudibus sancti Pauli: PG 50,480-484)

나는 훌륭하게 싸웠습니다.

바울로는 감옥에 갇혀 있을 때 흡사 자신이 하늘 나라에 있는 것처럼 느꼈고, 상처와 채찍을 받을 때 상을 받는 이들보다 더 큰 기쁨을 지녔습니다. 
그는 상급에 못지 않게 고통을 사랑했습니다.고통은 상급을 얻게 해주므로, 그는 그것을 은혜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바울로가 무슨 뜻으로 이 말을 했는지 생각해 봅시다.
그에게는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이 상급이고 육신안에 사는 것은 투쟁이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 상급을 뒤로 미루고 투쟁하는 것을 더 필요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바울로에게 있어 그리스도로부터 저주받는 것은 큰 투쟁이고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이었습니다.
다른 모든 투쟁보다 큰 투쟁이고 다른 모든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이었습니다.
한편,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은 그에게 있어서 유일한 상급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로는 그리스도를 위해 상급보다 투쟁과 고통을 택했습니다.

누가 나에게 바울로는 그리스도를 위해 투쟁과 고통을 겪는 것을 즐거운 일로 여겼다고 이의를 제기할지도 모릅니다.
이 점에서 나도 전적으로 동감입니다. 우리에게 슬픔의 원인인 것은 그에게 가장 큰 즐거움의 원인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로는 무엇 때문에 위험과 환난을 상기하는 것입니까? 바울로는 어떤 때 큰 슬픔에 잠겨 있었습니다.
고린토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어떤 교우가 허약해지면 내 마음이 같이 아프지 않겠습니까? 어떤 교우가 죄에 빠지면 내 마음이 애타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은 바울로 사도의 놀라운 덕행의 모범을 경탄하는 것으로만 만족치 마십시오.
여러분은 또 그 모범을 본받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가 그의 승리에 참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바울로와 같은 공로를 지닌 사람이 그와 같은 상급을 얻으리라고 말하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사도 바울로 의 다음 말씀을 들으십시오.
"나는 훌륭하게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제는 정의의 월계관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그날에 정의의 재판장이신 주님께서 그 월계관을 나에게 주실 것입니다. 나에게뿐만 아니라, 다시 오실 주님을 사모하는 모든 사람에게도 주실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바울로가 우리 모두를 자기 자신의 영광에 참여하도록 초대한다는 것을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우리 모두에게 같은 영광의 월계관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약속된 그 선물들을 받기에 합당한 자가 되도록 힘써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바울로가 지닌 덕행들의 위대함과 탁월함을 그리고 그렇게도 큰 영광을 얻게 한 그의 열성과 견고성만을 생각지 말고
그에게나 우리에게나 똑같은 그 인간성도 생각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 어려운 것은 쉽고 가벼운 것으로 보일 것이고, 잠시 동안 여기에서 노력한다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와 은총으로
부패함이 없는 불사 불멸의 월계관을 얻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 이제와 항상 영원히 영광과 권세가 있습니다. 아멘.(가톨릭홈에서)





축일:1월26일 
성 디모테오 주교 순교자
ST. TIMOTHY
St. Timotheus, E. et M 
San Timoteo Vescovo
stoned to death in 97


리체니아의 리스트라 태생인 성 디모테오는 희랍인 아버지와 유대교에서 개종한 에우니체의 아들이다.
그는 성 바오로가 리스트라에서 설교할 때 그의 제자가 되었으며, 그 후 성 바오로의 친구이자 오른팔 역할을 하였다(행전 16:1~4).
그는 혹시 말썽이 날까봐 할례를 받은 후, 바오로의 제 2차 전교 여행에 수행하였다.
바오로가 유대인의 적개심 때문에 베레아를 몰래 빠져나갈 때,
디모테오는 그대로 남아 있다가 테살로니카로 파견되어 그곳의 상황을 보고하고, 또 박해 중의 크리스챤들을 격려하였다.
58년, 디모테오와 에라스토는 마체도니아로 파견되었으며, 그 후 코린토로 가서 바오로의 가르침을 명심하라고 권고를 하였다.
바오로가 체사레아에서 투옥되었고 또 로마로 이감되었을 때, 디모테오는 같이 있었음이 분명한데, 그 후 그는 에페소로 가서 그곳의 초대 주교로 봉직하였다.
그러나 그가 디아나를 공경하는 카타고리아 이교 축제를 공식적으로 반대하다가 돌을 맞아 순교하였다.
디모테오에게 보낸 바오로의 두 편지는 65년경에 마체도니아에서 썼을 것이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디모테오는 유니게라고 부르는 유다인 어머니와 그리스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이렇게 혼혈아였기에 유다인들에게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였다.
그는 47 년경 바울로에 의해 개종했고 후에는 바울로의 선교활동에 참여했다.

15 년 동안 바울로와 함께 일하며 어려운 사명을 맡아 처리했으며 바울로가 세운 교회에서 생긴 큰 혼란들과도 맞서야 했다.
후에 디모테오는 바울로가 로마에 연금되어 있는 동안 그와 함께 지내기도 했고 디모테오 자신이 감옥에 갇힌 적도 있었다.
바울로는 에페소 교회에서 자신을 대리하도록 디모테오를 내세웠다.
그의 생활은 현대의 활동적인 주교들과 비슷했다.
그는 복음을 전할 특권과 또한 그것으로 인해 바울로와 함께 반대자로부터 고통을 당하고 감옥에 갇히면서 바울로의 동료 주교가 되는 영예를 누렸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 특별한 성소를 받은 대 사도 성 바오로는 필립비 인들에게 보낸 편지 중에 
"주 예수께서 허락하신다면 나는 디모테오를 여러분에게 어서 보내고 싶습니다. 그래서 그편에 여러분의 소식을 들으면 내 마음도 기쁘겠습니다.
나와 같은 마음으로 여러분의 일을 진심으로 걱정해 주는 사람은 그 사람밖에 없습니다. 모두들 자기 일만 돌보고 예수 그리스도의 일은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디모테오는 여러분도 잘 알다시피 흠잡을 데 없는 사람으로 자식이 아버지를 섬기듯 나를 섬기면서 복음을 위하여 함께 일해 왔습니다"(필립 2, 19-22)하고
대단히 디모테오를 칭찬하고 있다.
실제로 성 바오로의 편지, 그 중에서도 디모테오에게 보낸 편지를 살펴보면, 그가 얼마나 디모테오를 사랑하고 신뢰하고 있었던가를 충분히 알 수가 있을 것이다. 

디모테오는 구세주께서 태어나시기 바로 전에 소아시아의 남쪽에 있는 리스트라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이교인이었지만
어머니 오이니게와 숙모 로이스는 경건한 유다교 신자였으므로, 디모테오도 어려서부터 천주 십계와 모세의 율법을 배웠고 덕행을 존중함을 알게 되었다.

그 동안 어머니와 숙모(叔母)는 유다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여러가지 기적과 고난과 부활 등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 그리스도교를 믿게 되었다.
그리고 45, 6년경 성 바오로가 첫 번째 전도 여행 도중 리스트라 도시를 방문했을 때, 그는 그녀의 집에 머무르게 되어 친절한 접대를 받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 때 디모테오는 친히 이 대 사도에게서 세례를 받게 되었으며 존래 성격이 온순한 그는 바오로에게 사랑을 받게 되고
그도 역시 바오로를 친부모와 같이 사모하게 되어 마침내 그의 두 번째 전도 여행에는 동반(同伴)까지 하고,
세 번째 전도 여행 때에도 선구자로서 그리스에 먼저 들어가서 은사가 오기를 기다렸다가 예루살렘까지 같이 가게 되었다.

예루살렘의 광신적인 유다교인들은 성 바오로를 ’율법의 파괴자’라고 미워하며 어느 날 그를 체포해 죽이려고 했으므로,
그의 무죄함을 잘 알고 있었던 로마 총독 펠릭스는 사도를 원수들의 손에서 구하기는 했으나, 유다인들의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그를 2년간이나 감옥에 가두었다.
그러므로 디모테오는 할 수 없이 성 바오로를 떠나게 되었지만, 스승이 다시 자유의 몸이 되자 그를 따라서 에페소로 돌아왔다.

그 동한 한가지 기묘한 일이 생겼다. 그것은 에페소 교회의 신자로 예언을 할 수 있는 은혜를 받고 있엇던 몇 사람이,
일제히 동시에 디모테오가 주교가 된다는 계시를 받았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성 바오로는 그 지방의 장로들과 같이 디모테오의 머리위에 안수(按手)하고, 그를 그 교회의 주교로 임명했다.

이것은 확실히 적재 적소(適材適所)라고 할 수 있는 것인데, 에페소와 같이 중요하고 성대한 교회를 맡을 수 있었던 사람은 다년간 성 바오로를 따라다니며
친히 그의 지도를 받은 독실하고도 성덕이 높은 디모테오를 제외하고는 다른 데서는 도저히 만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성 바오로가 "그러나 그대는 나의 가르침과 생활, 나의 생활 목표와 믿음, 나의 참을성과 사랑, 나의 인내를 본받아 살아왔습니다"(2디모 3, 10)
라고 격찬한 사실을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디모테오는 이 때 사도에게 이와 같은 찬사를 받을 만큼 그의 마음이 정직하고 선량하고, 또 어떠한 고난 박해에도 굴하지 않을 뿐 아니라
스스로 자진하여 엄한 고행을 해나갔다."이제는 물만 마시지 말고 위장을 위해서나 자주 앓는 그대의 병을 위해서 포도주를 좀 마시도록 하시오"(1디모 5, 23)
하고 성 바오로는 그의 고신극기의 과도함을 충고했다.

살아 있을 때에 성 바오로를 충실히 따른 성 디모테오는 죽을 때에도 은사와 같이 장렬한 순교를 했다.
그것은 에페소 시의 이교도들이 디아나라는 여신(女神)에게 대한 제사에 광분(狂奔)한 때였다. 디모테오가 그 여신은 우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지적하자,
발광하던 군중은 앞뜰에 그를 체포해놓고 곤봉으로 사정없이 때려 그를 참살했다고 한다.(대구대교구홈에서)



[성서의 인물]헌신적인 제자 디모테오-허영엽 신부(평화신문641호에서)

에페소에 있는 디모테오에게 한 통의 편지가 전달되었다. 스승 바울로에게서 온 편지였다. 디모테오는 반가운 마음으로 편지를 뜯고 읽어 내려갔다. 
얼마 전 사람들을 통해 이곳 사정을 스승에게 기별을 보냈었다. 그런데 편지의 내용은 디모테오가 바랬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디모테오는 내심 스승이 이곳 에페소를 떠나 자신에게로 오라고 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런데 바울로는 그냥 에페소에 머물러 있기를 원하고 있었다.
"나의 아들, 디모테오! 내가 마케도니아로 갈 때 말했던 것처럼 에페소에 머물러 있기를 바란다. "이 말은 사실 디모테오에게는 충격적이었다.
스승의 이 말은 "끝까지 싸워라! 회피하지 말라! 믿음의 싸움을 계속하라!"라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인간적으로 보면 디모테오에겐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사실 하루하루 버티어 온 것도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디모테오는 당장이라도 스승에게 달려가고 싶었다.
에페소에서 홀로 외로운 싸움을 하기에는 너무 지치고 힘든 상황이었다. 당시의 에페소는 황금에 대한 욕망에 사로잡혀 있어 물질과 돈에 굶주린 도시였다.
그래서 에페소 사람들은 너 나 할것 없이 부에 대한 열정으로 사로잡혀 있었다. 에페소는 이런 분위기는 교회에도 영향을 주어 많은 이단자들이 설치고 있었다.
젊은 디모테오만이 이단자들과 싸워야 했다. 그런데 그 싸움은 사실 젊은 디모테오에게는 힘겨운 것이었었다.
그런데도 바울로는 디모테오에게 혼자 싸우기를 명령하고 있는 것이다.

"디모테오야, 너는 에페소의 혼잡한 상황에서 빠져 나오고 싶어할 것이다. 그러나 후퇴해서는 안 된다. 지금 당장은 너에게 갈 수 없으니 네가 혼자 잘 싸워야한다.
내가 늘 너와 함께 영적으로 함께 있는 것을 잊지 마라." 디모테오의 눈에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그러나 그는 참고 견딜 것을 다짐했다.
디모테오는 그의 정신적 아버지가 도와주어 승리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디모테오는 이처럼 경건하고 헌신적인 인물이었다. 디모테오는 눈을 감고 스승을 만났던 그 날을 회고했다.

열심한 청년 디모테오는 어느 날 바울로를 만나게 되었다. 그와의 만남은 디모테오의 일생의 전환점을 이루는 가장 큰 사건이 되었다.
당시에 스승은 제 2차 전도 여행을 떠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바울로는 바르나바와 마르코 문제 때문에 결별을 하고 실라를 데리고 안티오키아를 떠나왔었다.
디모테오는 리스트라에서 사람들에게 평판이 좋은 사람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그리스 사람이었고 어머니는 유대인이었다.

바울로는 디모테오가 젊은 사람이었지만 몹시 듬직해 보이고 믿음이 갔다. 디모테오, 나와 함께 하느님의 일을 하지 않겠소.라는 바울로의 말에
디모테오는 가슴 쿵쿵거릴 정도로 흥분했다. 영웅은 영웅을 알아본다고 했던가. 바울로는 한눈에 디모테오의 됨됨이를 알아보았던 것이다.
디모테오는 리스트라에서 돌에 맞아 죽은 줄만 알았던 바울로가 구사일생으로 다시 살아나서 전도를 하기 위해 다시 떠나는 모습을 보았을 때, 뜨거운 감동을 체험했다.
그리고 자신도 바울로의 뒤를 따라 전도에 헌신하기로 작정했다. 바울로는 믿음 안에서 디모테오를 아들로 삼았을 정도로 그에 대한 신뢰는 대단했다.
바울로는 자주 디모테오를 "믿음 안에서 나의 참된 아들", "나의 아들", "나의 동업자이며 형제"라 는 애칭을 즐겨 사용했다.
결국 디모테오는 예수 그리스도와 바울로의 열정적인 제자로 성장했다.

바울로의 눈부신 전교활동 현장에서 디모테오의 신실하고도 은총 넘치는 활동이 큰 도움이 되었다. 디모테오는 사목자로 준비된 인물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경건한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신앙적인 분위기 속에서 자랐을 것이다. 디모테오는 비교적 어린 나이에 선교활동을 했다.
그래서 바울로가 그가 나이가 어려 남에게 멸시를 당할까봐 걱정을 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바울로는 디모데오를 믿고 전폭적으로 후원했다.
이처럼 제자를 확신을 갖고 믿는 스승을 만났기 때문에 디모테오는 큰 재목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디모테오도 자신을 믿어주고 기다려주는 스승의 기대에 부응하여 충실하게 스승의 말을 따랐다. 디모테오는 이처럼 바탕이 좋은 일꾼이었다.
디모테오는 자신의 처지에서 자족하며 최선을 다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자족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지금의 순간에 만족하는 마음이 아닐까.
사도 바울로는 그 옛날 디모테오에게 그랬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그대로 머물러라, 후퇴하지 마라, 싸워라 라고 하는 것 같다.



[성서의 인물] 디모테오의 할머니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허영엽 신부(평화신문673호에서)

사도 바오로가 아들처럼 아꼈던 디모테오에게 편지를 썼다.
“디모테오! 나는 밤낮으로 기도하면서 그대를 기억하고 하느님께 감사 드린다오. 나는 그대가 눈물을 흘리던 일을 기억하고 있기에 그대를 만나기를 기대하고 있소.
그대를 만나게 되면 내 기쁨은 한없이 클 것이오. 그대의 거짓 없는 믿음과 투철한 신앙심은 그대의 할머니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로부터 전해 받은 것이오.”

믿음의 특성은 다른 이로부터 전해 받는 것이다. 특히 부모의 신앙은 대개 자녀들에게 전승되기 마련이다. 
어린 시절의 가르침과 교훈은 일생을 가름하는 중요한 잣대가 되곤 한다. 디모테오 역시 할머니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에게서 믿음을 배웠다.
로이스와 유니게는 성서에 단 한 번밖에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두 사람은 위대한 사도 바오로에게 강한 인상과 감동을 주었다.

사도 바오로는 아들과 같이 사랑했던 디모테오의 됨됨이와 신앙의 자세가 그의 열심한 가정적인 분위기에서 비롯된 것을 알고 있었다.
디모테오의 가정은 신앙적으로 열심한 가정이었다. 로이스와 유니게, 그리고 디모테오에 이르는 삼대에 걸친 믿음의 고리는 이들을 육신적으로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 서로를 일치시키고 있었다. 혈통이 이어지는 곳에 신앙도 함께 했던 것이다.

디모테오의 경우에서처럼 신앙의 인연 역시 한 사람의 영혼에서 다음 세대의 영혼으로 전수되는 경우가 많다.
하느님이 주신 신앙을 대대로 꽃 피워 가는 디모테오의 가정은 신앙인의 가정의 모델이라 할 수 있다.

로이스와 유니게는 다른 열심한 유다인 가정처럼 디모테오를 어린 시절부터 철저하게 교육시켰을 것이다. 디모테오는 일찍부터 히브리 성서와 기도생활에 몰두했다.
어린 시절의 학습과 배움이 일생에서 얼마나 중요한 지침이 되는지는 굳이 강조할 필요가 없다.
유니게와 로이스 모녀는 어린 디모테오에게 주님께 헌신하는 삶을 미리 준비시킨 셈이었다.

훗날 이들의 참된 교육은 디모테오를 통하여 큰 결실을 맺었다.
그러나 로이스와 유니게는 디모테오의 결실을 자신들의 공로로 돌리지 않고 디모테오 뒤에서 돕는 것으로 기뻐했다.
이들은 겸손하고 참된 성품을 가진 신앙인이었다. 오늘날에도 훌륭한 사목자 뒤에는 훌륭한 부모님이 있는 경우가 많다.
이분들은 결코 자신을 드러내지 않지만 뒤에서 기도와 희생으로 사목자의 큰 용기와 힘이 되어준다.

일반적으로 인간의 교육은 태어나고 자란 가정에서 시작된다. 디모테오는 가정 안에서 사랑을 체험하면서 자랐을 것이다
유니게와 로이스가 디모테오에게 사랑의 마음을 심어주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가르친 사도 바오로의 가르침을 적극적으로 수용할 수 있었다.
이처럼 기초가 있는 교육이 중요하다.
디모테오에게도 사랑의 체험이 훗날 사람을 사랑하고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실제로 어린 시절 부모의 사랑을 잘 체험하지 못하면 이웃 사랑과 하느님의 사랑의 올바른 개념을 갖기 어렵다고 한다.

사도행전에서 보면 디모테오와 사도 바오로가 겪은 복음 전도의 고난과 육체적 고생은 그 중요한 동기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비롯됨을 알 수 있다.
오늘날 자녀교육 문제는 매우 심각한 수준이다. 오늘날 부모가 자녀에게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은 가정 안에서 사랑을 체험하게 하는 것이다.
자녀들의 잘못을 응석으로 받아주는 부모의 태도는 그들을 약화시키고 결국 자녀의 삶에 해를 끼치게 된다.

진실한 사랑은 그 사랑하는 자를 성숙시키며 자녀가 바르게 성장하도록 자유를 베푸는 것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때로는 부모 자신이 아픔과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정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 또한 모든 신자의 가정은 믿음을 계승하여야 할 의무가 있다.
순수한 믿음은 부모가 자녀에게 남겨주는 가장 위대한 유산이다. 왜냐하면 험난한 세상 안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믿음은 부모가 자녀에게 강요한다고 해서 전해지는 것은 아니다. 믿음은 부모 자식의 관계일지라도 인간적인 힘으로만 전해질 수가 없다.

그러므로 가정이 믿음으로 하나가 되고 한 가족이 믿음의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은 하느님의 은총이다.
부모는 하느님께서 자녀들을 자신에게 맡겨주셨다는 사명감을 지녀야 한다.
그러나 자녀들의 성장을 가능케 하시는 분은 분명히 하느님이심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Be Still My Soul-The St Philips Boy’s Choi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