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상이야기

시체순종(屍體順從)/수사님 말씀

Margaret K 2011. 6. 20. 20:37



 


 

(미켈란첼로의 피에타)

 


 

순종이란 따지지 않고 억지로 무조건 하는 것이다.

 

그래야 지성이 살아있는채로 죽는다.

 


순종이란 싫어도 억지로 무조건 하는 것이다.

 

그래야 의지가 살아있는채로 죽는다.

 


순종이란 기분이 나빠도 억지로 무조건 하는 것이다.

 

그래야 감성이 살아있는채로 죽는다.

 

 

 

배추를 거꾸로 심으라고 하면,

 

거꾸로 심어야 내가 산채로 죽는다.

 


시체(屍體)처럼 옮겨 놓는 대로 이리저리 옮겨진다.

 

산채로 죽어서, 일체(一體)의 세계에 든다.

 

 

 

 

명상이 있는 기도이 보나 수사님의 말씀입니다.(2011.6.19.)

삼위 일체三位一體에 도달하는 것이
성인들만이 누릴 수 있는, 우리는 감히 넘볼 수 없는 일체일까?
그러면 여러분이 그 일체에 어떻게 해야 들어갈 수 있나?

영혼은 지성, 의지, 감성의 활동이 같아야 완벽하나 우리는 감성에 놀아난다.
그러므로 감성만 잘 다루어 삼위일체로 인도하려고 한다.

감성에는 오감(, , , , )이 있는데 그 중 촉감이 가장 강하다.
성 보나벤투라는 인간이 가장 컨트롤할 수 없는 것이 촉감이라고 하였다.
촉감인 성性은 몸과 몸이 맞닿는 것으로 기쁨의 최고이나 극복하는 것이 문제다.
극복이 안 되면 죽을 때 까지 신음하며, 또 성욕을 감추지 못하면 더 의젓한 척 한다.

 

유혹이 있을 때 쾌락을 내 안에서 원하고 있다는 것을 확연히 볼 줄 알아야 한다.
그 원하는 것을 바라보기만 하면 그 원함이 꼬리를 뺀다.

그 대상이 없거나 산으로 피한다고 해서 없어질까?
내 안에 묘하게 숨어있어 나를 휘두르는 원함이 있다.
유혹의 대상이 문제가 아니라 끌려가는 이 원함이 내 안에 강하게 체득된다.

이 때 쾌락에 빠지고 싶은 마음을 인지하고 그것이 꼬리를 감추는 것을 느끼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내가 사라지면서 일체에 이른다.
나의 바램이 빠질 때 그 세계는 텅 비어있고, 황량하기도 하고 적막하다.
그러나 여기에 자꾸 머물면! 내가 쉴 곳은 여기였구나!”한다.

 

상대방이 무엇을 시켜도 따지지 말고 받아드리면 텅 빈, 일체의 세계다.
일상생활에서도 바램이 없고, 따지지 않으면 일체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다.
이는 성 프란치스코, 보나벤투라뿐만 아니라 나도 누리다가 죽는 세계다.

일체, 하나의 세계에 들어가면 생각이 끊어진다.
생각이 끊어지지 않는 것은 내 안에 바램이 있기 때문이다.
유혹에 빠지는 것은 유혹 때문이 아니라
내 안에서 바라는 낚시 caro에 이미 걸린 것이며 지옥이다.

그런데 애초부터 바램이 없으면 자유롭다. 그 꿋꿋한 기둥이 일체의 세계다.
그 세계는 너무 좋아 일부러 관상할 필요도 없다. 그 세계에 들어가서
여기를 바라보니 모든 바램이 없어 안과 밖이 같으며 일체의 세계에서 산다.
노력을 해서 관상세계가 아니라 가만히 있어도 관상생활이다.

하여튼 버려보라. 그 것을 버리고 싶지 않고 주위에서 버리라고 하는 것이
나를 채찍질하니 나오는 것은 눈물이다. 그 눈물을 거두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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