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9월 25일 한가위
+ 루카 12,15-21 <사람의 생명은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15 사람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1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어떤 부유한 사람이 땅에서 많은 소출을 거두었다. 17 그래서 그는 속으로 ‘내가 수확한 것을 모아 둘 데가 없으니 어떻게 하나?’ 하고 생각하였다. 18 그러다가 말하였다.
‘이렇게 해야지. 곳간들을 헐어 내고 더 큰 것들을 지어, 거기에다 내 모든 곡식과 재물을 모아 두어야겠다. 19 그리고 나 자신에게 말해야지. ′자,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
20 그러나 하느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21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
탐욕은 지나친 욕심이다. 사람을 파멸로 이끌 욕심이다. 그런데도 탐욕에 빠지는 이들이 늘어난다. 그러기에 주님께서는 경고하신다.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
“ 추석은 한 해의 결실에 감사하는 날입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감사할 일은 숨 쉬고 있다는 이 사실입니다. 호흡하며 살아 있다는 사실에 감사를 느낀다면 삶은 머지않아 주님의 축복으로 채워질 것입니다.
흔히들 사는 것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잘못 산다고 생각하기 십상입니다. 그러나 잘 사는 것의 기준은 사람의 판단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부자는 물질적으로 풍부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영혼은 무척 메말라 있었습니다. 그의 삶은 물질을 좇는 일이 전부였습니다. 이를 어찌 잘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잘 사는 삶은 감사하는 삶입니다. 오늘의 우리는 남과 비교하며 사는 것이 보편화되어 있습니다. 자신은 나름대로 행복한 삶이려니 여기지만 남과 비교할 때에는 못 산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잘생긴 얼굴임에도 어느 누구에 비하면 못생겼다고 판단합니다. 상대적 빈곤감입니다. 남과 비교함으로써 스스로 부족감에 빠지는 슬픈 현상입니다.
어려움을 극복하는 삶은 감사하는 생활일 때 가능해집니다. 오늘 추석 명절만이 아니라 늘 감사하는 생활을 계속할 수 있도록 노력합시다.
죽음이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양승국신부-
연초에 한 가정을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가족들과 인사를 나누는 중이었는데, 문간 방 안에는 아주 연세가 많으신 할머님 한분이 계셨는데, 그 할머님께도 인사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 집 분위기가 약간은 경직되어 있는 것 같아서 본의 아니게 저는 조금 오버를 하게 되었습니다. 분위기를 조금이나마 반전시켜보려고 그 할머님께 새해인사도 드릴 겸, 농담도 건넬 겸, 큰 소리로 이렇게 인사드렸습니다.
“할머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그리고 오래 오래 사세요. 그러나 너무 오래 사시지 마시고 100살까지만 사세요.”
그 말을 마친 저는 썰렁했던 분위기가 좀 부드러워지려니 했었는데, 분위기가 더 썰렁해졌습니다. 할머니 얼굴도 안 좋아지시고, 주변에 있던 사람들도 다들 난처해했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그 할머니 올해 연세가 99세였습니다. 99세 할머님께 100살까지만 살라고 했으니 얼마나 속상하셨겠습니까?
최근 우리나라 사람들, 평균 수명이 엄청 높아져서 OECD회원국 평균을 따라잡는다는 이야기 들으셨죠? 여성들은 80세 남짓, 남성들도 75세 정도라고 하니 대단한 수치입니다.
오늘 추석입니다. 먼저 떠나신 선조들 기억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남은 날들도 헤아려보며 ‘죽음’이란 단어에 대해 조금은 생각해봐야하는 날입니다.
과연 몇 살까지 살다 이 세상 떠나는 게 적당하다고 생각하십니까?
80살까지? 아니면 100살까지? 그도 아니라면 150살까지?
혹시 200살까지 살면 행복할 것 같습니까? 오히려 반대일 것입니다. 그렇게 사는 것은 정말이지 축복이 아니라 저주입니다.
이미 친구들은 다 세상 떠났을 것입니다. 아들들이나 손자들도 세상을 떠났을 것입니다. 새해만 되면 KBS, MBC, SBS, 세계 기네스 협회에서 다들 찾아와 난리들일 것입니다.
“시청자 여러분, 놀라지 마십니다. 올해 200세를 맞이하시는 어르신이 아직도 멀쩡히 살아계십니다. 그럼 취재나간 리포터를 연결해보겠습니다.”
그 정도 되면 오래 산다는 것이 축복이 아니라 고통입니다. 불행입니다. 정말 끔찍한 일입니다.
임종자들을 떠나보내며 드는 한 가지 생각이 있습니다. 죽음이 있어 정말 다행이란 생각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죽음은 하나의 은총입니다. 죽음은 해결사입니다.
만일 죽음이 없다면 끊임없이 반복되는 이 방황의 세월을 어떻게 할 것입니까? 죽음이 없다면 끝도 없이 되풀이되는 이 악습의 굴레를 어떻게 할 것입니까? 죽음이 없다면 이 처절한 소외감, 이 심연의 고독, 이 비참한 현실을 어떻게 한없이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의미에서 인간은 죽음이 있어 행복합니다. 죽음을 통해 거칠고 험난했던 오랜 여행길을 마칠 수 있습니다. 결국 죽음은 인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는군요.
그 오랜 세월, 상처와 고통의 나날을 접고 마침내 하느님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가는 한 영혼을 바라보며 죽음이야말로 인생의 가장 궁극적인 해결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죽음은 결코 마지막 날, 인생 종치는 날, 밥숟가락 놓는 날, 쫄딱 망하는 날, 무작정 슬퍼할 날이 아님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우리에게 있어 죽음은 그간 힘겹게 지고 왔던 모든 멍에를 홀가분하게 내려놓은 날, 기쁜 얼굴로 주님의 얼굴을 마주 뵙는 날, 환희와 축제의 날이 되길 기원합니다.
오늘 먼저 떠난 분들 위해 제사상을 차려놓고 아직도 마음이 정리되지 않으신 분들도 많으시지요. 뭐가 그리 급해서 그리도 경황없이, 잘 있으란 말 한마디 없이 떠나간 그가 야속하기도 하겠지요. 마음이 허전하고, 싱숭생숭하시겠지요.
너무 그렇게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이제 그는 우리보다 훨씬 사정이 낫습니다. 영원하신 하느님 아버지의 품에 안겨 영원한 복락을 누리고 있습니다. 편안한 얼굴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더 이상 고통도, 슬픔도, 울부짖음도, 원망도 없는 곳에서, 자비하신 주님 품안에서 기뻐하고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김인한 신부-
우리말 표현 중에 ‘고맙습니다’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아시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고마’란 말이 우리나라의 옛말로 땅 신의 이름이라고 합니다.
결국 고맙습니다라는 표현은 당신이 나의 신이 되어주었다는 말입니다.
나에게 그만큼 소중한 존재로 여겨진다는 표현입니다.
아시다시피 오늘은 우리 땅의 명절인 한가위입니다.
조상들 덕분에, 그리고 다른 이들 덕분에 이렇게 우리가
살아갈 수 있음을 되돌아볼 줄 아는, 우리네들입니다.
복음의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처럼 우리가 누리고 사는 것들이
내가 이루어낸 것이라고 생각하는 어리석은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고, 우리의 모든 것이 주님의 은총이며 다른 많은 이들의
사랑과 희생의 선물임을 알고 고마워하며 사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한민족 전체의 명절로
-변진흥(새천년복음화연구소 소장)-
추석, 곧 한가위를 ‘중추가절(仲秋佳節)’이라 부릅니다. 음력 8월은 가을의 정점으로 만물이 성숙하는 좋은 결실의 계절입니다. 한가위에 온갖 음식과 과실을 풍성하게 장만하는 것은 그 풍성한 결실을 나누는 우리 민족의 넉넉한 마음과 정서를 보여줍니다.
신라시대에는 8월 보름이 되면 온 마을 사람들이 함께 모여 길쌈놀이를 했다고 합니다. 양편의 길쌈 결과물이 많고 적음을 따져 내기에 진 편이 술과 음식을 마련해서 이긴 편에게 대접했습니다. 이기고 지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길쌈놀이를 하며 서로 땀 흘려 거둔 결실을 축복하고 나누었던 것입니다. 이때 노래와 춤을 추며 온갖 놀이를 즐겼는데, 이를 가배(嘉俳)라고 합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늘 한가위만 같아라.’는 속담에서도 알 수 있듯이 우리 민족은 풍요로움 속에서 조상의 은덕을 기리고 밝은 한가위 달과 함께 결실을 노래하는 풍속을 지켜왔습니다.
아직도 우리에게 추석은 큰 명절입니다. 고속도로를 주차장으로 만드는 귀성 인파는 결코 줄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추석은 남쪽에서만 명절입니다. 허리가 잘린 북한에서는 이러한 풍요를 누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북녘의 동포들도 조상의 은덕을 기리며 풍성한 음식을 나누는 행복을 누릴 수 있어야 하는데 그들은 한가위에도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있을 뿐입니다. 물론 그들 자신의 탓입니다. 그러나 한가위를 맞는 우리는 북녘 형제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남쪽 사회가 주님께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으로 책망받지 않는 길일 것입니다.
추 석
-윤경철 신부(부산가톨릭대학교 총장)-
달아 달아 밝은 달아 이태백이 놀던 달아/ 저기 저기 저 달 속에 계수나무 박혔으니/ 금도끼로 찍어내고 은도끼로 다듬어서/ 초가삼간 집을 짓고 양친부모 모셔다가/ 천년만년 살고지고 천년만년 살고지고
요사이는 달에 우주선이 갔다 오고, 달에 대한 탐사를 넘어 화성까지 탐사선을 보내고 발전이 많이 이루어진 시대라, 별 감흥은 없지만 그래도 나이가 지긋한 분들은 밝게 떠오른 추석 대보 달을 올려다보며 소망을 간구하고, 마음속으로나마 이 노래를 불러본 기억이 있을 것입니다.
설날이 한 해의 출발을 뜻 깊게 맞으려는 것이라면 추석은 한 해의 맺음을 알차고, 기쁘게 받아들이는 일종의 감사축일입니다. 농업이 우리의 주업이었기에 생활풍속은 봄이면 씨앗을 뿌리고, 한여름 내내 땀 흘려 가꾼 것을 가을에 수확하는 것에 각별한 뜻을 두어 왔습니다. 그건 땅에 대한 감사요, 하늘에 대한 감사요, 우리에게 삶의 터전을 넘겨준 조상에 대한 감사였습니다. 그리곤 정성어린 식탁을 마련해서 온가족이 모여 차례를 지내고 음식을 나누며 성묘로 하루를 보내곤 하였습니다. 그저 좋다는 말이 있듯이, 이런 추석날을 맞이하면 기쁩니다.
전도서 3장 1절의 표현처럼, “모든 일에 제 때가 있고, 하늘 아래 만사에 제 시기가 있듯이”, 추석명절을 맞이하면 우리는 우리보다 먼저가신 조상들을 회상하면서 효도의 정신으로 차례를 지내고, 조상 묘를 찾아 인사도 하게 됩니다. 이런 것을 일컬어 미풍양속이라고 했습니다.
‘차례’ 혹은 ‘제사’가 자연적인 효도에서 기인한다면, 우리 교회의 위령미사는 어떠한 성격이겠습니까?
“연옥이 존재하고 여기에 갇혀있는 영혼들은 살아있는 신자들의 기도와 특히 미사성제로써 도움을 받을 수 있다”(트리엔트 공의회 <1545-63녀>의 선언)는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교우들이 다 함께 모여 기도하고 미사를 지냄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모든 성인들의 통공인 지상의 교회인 우리들이 연옥교회의 영혼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런데 어떤 때에는 어리둥절하기도 합니다. 합동 위령미사를 봉헌한다고 발표하고, 여러번 알려주어도 도무지 관심이 없는 교우 가정이 많다는 점입니다. 미사 예물 때문에 그런 것일까? 그런 이유는 아닌 것 같은데…? 어째든 간에 왜 무관심한가? 만일 신자가정에서 외교인과 같은 제사를 지내지 않고, 그렇다고 성당에서의 합동 위령미사의 대열에도 끼이지 못한다면 정말 슬픈 현실이요, 납득하기 어려운 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일년내내 돌아가신 분을 위해 위령미사 한번 드리지 못한다면 깊이 생각해 볼 일이요, 한마디로 악한 표양을 주는 교우가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외교인들의 제사를 살펴보면, 지금은 가정의례준칙대로 하는지 모르지만 그 격식이 매우 엄하고 정중했습니다. 출타중인 사람을 제외하곤 다 모이는 것으로 빠지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제사가 끝난 다음, 제사에 참여한 모든 이가 함께 음식을 나누어 먹는 음복(飮福)의 부분은 특히 인상이 깊습니다. 음복하는 부분은 우리 교회에서의 영성체 부분에 해당한단는 생각도 해 봅니다. 미사참례는 하면서도 성체를 받아 모시지 못한다면, 이는 마치 일반가정에서 제사에 참석하고서도 그곳 음식을 먹지 않는 결례와 비슷합니다. 감히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시는 성체성사와 어떻게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추석을 맞아 위령미사의 중요성을 깊이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이런 추석 명절에 우리는 불우한 이웃형제들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소외된 분들을 기억해야겠습니다. 특히 전후방에서 나라를 몸 바쳐 지키고 있는 우리들의 자식인 국군장병들을 기억합시다. 그들에게도 우리와 똑같이 고향산천이 있고, 부모형제가 있지만 추석명절을 맞아도 이들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고향도 갈 수 없고, 부모와 형제들을 만날 수도 없습니다. 가고 싶어도 못 가는 고향,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 없는 부모, 형제, 친척들. 이 국군장병들이 바로 살아있는 나의 자식입니다. 추석명절이 군에 가 있는 우리의 자식들에게는 오히려 고통스러운 날일 수도 있습니다. 이들에게 부모님 같은 따뜻한 사랑의 마음을 전해야 할 것입니다.
추석을 지내는 오늘, 모든 연령에게는 따뜻한 자비가, 모든 교우 분들의 가정에 추석이 주는 그 풍요로움 같이 크나큰 은총 있으시길 기도합니다.
풍성한 은총에 감사를
-김정호 신부-
“오곡백과가 땅에서 났으니, 주 우리 하느님께서 복을 주심이로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명절의 기쁨을 전하면서 인사를 드립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1년 12달 오늘만 같아라”하는 한가위 명절을 맞았습니다.
여러분도 오늘 조상님들께 차례를 모시고 온 가족과 함께 기쁨을 나누고 계시겠지요?
여러분들의 각 가정마다 오곡백과의 풍요로움이 하느님께서 주시는 복으로 항상 머물기를
기도합니다.
오늘은 우리 민족이 갖는 고유한 명절입니다. 물론 중국에서도 8월 보름에 월병을 빚어 먹으며 즐거움을 나누고, 일본에서도 그와 비슷한 풍습을 일부 지방에서 갖는다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처럼 민족의 대명절로 지내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기에 오늘은 우리 민족 고유의 커다란 잔칫날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입니다.
오늘 명절을 가리키는 말들이 많이 있지요? 흔히 秋夕이라고 합니다만, 이 말은 四書五經 중의 하나인 禮記에 나오는 “朝春日 秋夕月”이라는 표현에서 빌어온 것이라고 합니다. 또 仲秋節이라고 부르기도 하지요? 이건 가을에 해당하는 3달을 初秋 中秋 終秋라고 하는데, 음력 8월이 중간에 들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또 다른 이름 “한가위” 혹은 “가윗날”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 이름은 그 역사가 신라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하는데, “가운데”라는 말마디와 관련이 된다고 합니다. 음력 8월 15일은 봄부터 시작해서 겨울에 이르기까지 1년중 가운데 위치하고 있으면서 달이 가장 둥그렇고 가깝게 보이는 대표적인 명절이기 때문에 한가위라고 부르게 된 모양입니다.
오늘 명절을 추석이라고 하든, 중추절이라고 하든, 한가위라고 하든, 가윗날이라 하든, 이 모두가 바로 오늘의 이 풍요로움, 이 넉넉함, 이 복스러움을 함께 나누려는 마음에서 나온 이름들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오늘 멀리 떨어져 지내던 가족들이 함께 모여서, 한편으로는 우리에게 비옥한 땅을 맡겨주시고 풍성한 결실을 맺게 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고, 또 한편으로는 오늘의 우리가 있기까지 애써주신 조상님들을 기억하면서 후손된 도리를 다시금 되새기기는 것입니다.
보도를 통해 들어보니까, 이번 명절에도 온 나라가 고향을 찾는 행렬로 줄을 잇고 있습니다. 얼핏 헤아려봐도 1000만을 훨씬 넘는 사람들이 대이동을 한다고 합니다. 아마 고향을 찾아, 부모님을 찾아, 또 친지들을 찾아 전 국민의 1/3가량이 움직이는 모습은 우리 민족에게서만 찾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전 세계 그 어디서도 이런 예를 찾아보기 힘듭니다. 오로지 우리 민족만이 갖고 있는 자랑스럽고 아름다운 관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이런 풍요로움을 허락하신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봅시다. 오늘 복음에서는 소출을 많이 얻게된 어떤 부자 한 사람에 대한 얘기가 나옵니다. 아마 기후도 좋고 병충해도 없어서 풍년이 들었나 봅니다. 남아넘치는 곡식단을 바라보면서 부자는 너무도 기뻤습니다. 그리고는 “이 많은 곡식을 어디에 다 보관해야 하나?”하면서 행복한 고민에 젖어 있었나 봅니다.
그래서 이 부자는 “지금 있는 작은 창고를 헐고, 더 크고 튼튼한 창고를 지어서, 거기에 곡식을 꽉꽉 채워놓고, 그 풍성함을 마음껏 누리리라” 하면서 행복해 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은 바로 그날 밤, 이 세상을 하직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니 그 많은 소출이 그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제 아무리 부요하다 하더라도 그의 재산이 생명을 보장해 주지는 못한다”하시면서, 자기를 위해서는 재산을 모으면서 하느님과 이웃에게는 인색한 삶을 살지 말라고 당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오곡백과의 풍성한 수확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풍요로움에 기뻐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고 하느님께서도 만족스러워 하십니다. 우리에게 이 명절을 기쁘게 지내게 하시면서 천상 도시의 잔치를 미리 즐기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에게 허락된 부유함을 즐길 권한을 받았습니다.
다만 우리에게 허락된 이 풍요로움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내 것으로만 삼으려 하지 말고, 이웃과 함께 나누려는 마음가짐도 아울러 갖추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 하느님, 저희 조상과 저희에게 헤아릴 수 없는 은혜를 베풀어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저희가 이제 주님께 받은 재물을 이웃과 나눔으로써 하늘에 보화를 쌓아, 세상을 떠난 조상과 부모, 형제, 친척들을 천국에서 만나게 하소서. 아멘.”........◆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
-박상대신부-
한 억만장자가 죽으면서 자식들에게 이상한 유언을 남겼다. 유언인 즉, “내가 죽거든 관 양쪽에 구멍을 내고 나의 양팔을 밖으로 내어 놓은 채 장례를 치러라.”는 것이었다. 왜 이런 유언을 남겼을까? 자녀들은 물론이고, 그의 장례식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아버지의 유언대로 장례식을 치른 후 며칠이 지나 큰아들이 동생들을 불러 모아놓고 아버지의 유산을 몽땅 털어 자선사업을 하자고 했다. 그는 아버지 유언의 뜻을 깨달았던 것이다.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 사람은 빈손으로 이 세상에 와서 빈손으로 돌아간다는 불교계의 진리와 같은 가르침이다. 누가 우리 중에 태어나면서부터 땅문서를 손에 쥐고 이 세상에 나왔거나, 돈을 쥐고 나온 사람 있는가? 아무도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이 죽을 때면 아무 것도 손에 쥐고 갈 수 없는 운명의 존재이다. 일 센트짜리 동전은 고사하고 지푸라기 하나도 쥐고 갈 수 없는 것이 우리 인간이다. 그래서 살아있는 동안에 어떡하든 많이 가지려 애쓰는 것인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해서만 사는 사람들처럼 보인다. 현대판 금송아지를 인생의 전부이며 목적인양 착각하며 산다. 돈으로 모든 것이 계산되고, 돈만 있으면 안 되는 것이 없고 돈이 최고라는 생각은 거의 모든 현대인들의 몸에 베여 있는 사실임을 부정할 수 없다. ‘돈은 더러운 것’이라들 말하지만 이 더러운 돈을 사람들은 다 좋아한다.
돈은 분명히 필요한 것이고 좋은 것이다.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이 편하다. 그러나 이런 돈이 우리 인생의 전부가 되고, 돈에 대한 탐욕 때문에 “돈방석에 한 번이라도 앉아 보면 다른 소원이 없겠네, 죽어도 좋겠네!”라는 말을 일삼는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혹자는 “공수래공수거”의 진리에 동의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요즘같이 물질이 풍요로운 시절에 태어나는 아이들은 “만수래(滿手來)”의 행운에 빠져있으니 말이다. 이 아이들이 어른이 되면 으레 “만수거(滿手去)”하려 할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과연 무엇을 가지고 태어나며, 과연 무엇을 가지고 갈 수 있을 것인지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무엇을 가지고 태어나는가? 그것은 우선 생명이다. 생명은 육체와 영혼으로 구성되어 있다. 생명이 있으면, 다른 것은 덤으로 주어지며, 많은 것을 자신의 노력으로 가질 수 있다. 시간, 능력, 건강, 재물, 권력, 명예, 배우자, 자녀 등이 그런 것이다. 살아 있는 동안에, 즉 육체를 가진 동안에 사람은 이런 소유들을 자기 마음대로 쓸 수 있다. 그러나 죽음에 이르러서는 모두 소유한 것에서 손을 떼야하며, 놓아두고 가야한다. 결국 이것들을 주신 하느님께 돌려 드려야 한다는 말이다.
오늘 복음(루카 12,15-21)에서 보듯이 부자는 밭에서 난 소출을 전부 자기의 것으로 착각한다. 착각은 누구나 할 수 있다. 부자의 잘못은 자기 영혼에게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고 한 약속에 있다. 사람이 현재의 소유를 마음껏 누릴 수는 있겠지만, 누가 그 미래를 장담할 수 있겠는가? 하느님 말고 누가 감히 한치 앞을 예견하며, 몇 년 앞을 아무 걱정 없다고 장담할 수 있단 말인가? 장담하던 바로 그날 밤에 부자의 생명은 왔던 곳으로 돌아가 버릴 수 있는 것이다. 부자가 재산을 부당하게 모은 것도 아니고, 그가 재물을 탐한 것도 아니다. 그저 재물이 자신의 전부이며 생명과 미래까지 보장해 줄 것이라는 믿음이 그의 잘못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가지고 가는가? 물질에 속하는 육체가 없으니 육체와 관계되는 어떤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한다. 따라서 영혼이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을 소유하려고 애써야 한다. 그것은 하느님이 계신 하늘에 보물을 쌓는 일이다. 내가 소유한 것이 많고 적고 간에 한가위의 보름달이 더 커지거나 줄어들지 않듯이 모든 것에 한결같은 마음으로 하느님께 감사하며, 하늘에 보물을 쌓고 살았으면 좋겠다.
'좋은글 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목숨을 구하는 본성 (0) | 2007.09.27 |
---|---|
네 가지 친구 (0) | 2007.09.25 |
마음으로 사람을 보아라 (0) | 2007.09.25 |
하루 그리고 또 하루를 살면서 (0) | 2007.09.25 |
천 번의 시련, 한 버느이 기회 (0) | 2007.09.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