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프란치스코

세 동료 전기

Margaret K 2007. 5. 8. 00:16

세 동료 전기

머  리  말



이 ?세 동료들이 쓴 전기(傳記)?는 많은 사본들이 있고, 또한 그 사본들이 매우 다양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이 전기는 적어도 14세기 초부터 높은 평가를 받아 왔음을 짐작할 수 있다. Pisa의 Bartolomeo도 1385년과 1390년 사이에 저술한 그의 저서 “De conformitate”에서 이 전기를 자주 인용한다. 1768년에는 Bolandist들까지도 ?잔꽃송이?(Fioretti)는 제외시키면서도 ?성인들의 행적?(Acta Sanctorum) 안에 이 전기를 프란치스코를 대표하는 자료로서 Celano의 제1생애와 성 보나벤투라의 대전기와 함께 삽입했다.


1894년에 이르러 Paul Sabatier는 프란치스코의 옛 전기물들에 대한 비판 작업을 시작한 이래 이 작품에 충분한 가치를 주었다. 그러나 Bolandist들 중의 하나인 Van Ortroy는 그의 유명한 논문 Analecta Bollandiana에서 ?세 동료들이 쓴 전기?를 혹평한다. 이 전기는 그 진위성(眞僞性)을 가려 볼 가치도 없는 13세기 말에 쓰여진 관공서식 전기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이에 반박하여 Paul Sabatier는 “소위 세 동료들이 썼다는 프란치스코 전기의 진위성”(The Authenticity of the Legend of St. Francis by the so called Three Companions)이라는 소제목의 논문을 썼다. 이것이 소위 프란치스칸 논쟁의 발단이다.


이 책의 비판본을 내는 작업이 지금까지 세 번에 걸쳐 있었다. 제일 먼저 1898년에 M. Faloci-Pulignani가 소위 “Spello-Foligno”로 불리우는 Capuchin 수도회 소유의 필사본을 중심으로 출판했고, 그 다음으로는 1939년에 P. Giuseppe Abate가 소위 “Sarnano”라고 불리우는 14세기 초의 필사본을 중심으로 비판본을 냈다. Abate의 주장은 이 전기의 작가가 Celano의 제1, 2생애와 보나벤투라 대전기와 익명의 페루지아 전기를 인용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 전기를 13세기 말의 전기라고 주장한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1974년에 Theophile Desbonnets가 Abate와 다른 학자들의 견해를 비판하면서, 필사본들 전반을 깊이 있게 대조하여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는 비판본을 출판했다. 본 역서는 이 비판본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Desbonnets가 연구한 결과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겠다.


1) Leo, Rufino, Angelo 이상 세 동료들이 1246년 8월 11일에 Greccio에서 쓴 편지는 확실히 신빙성이 있다. 왜냐하면 이 편지는 다른 모든 사본들에도 한결같이 등장하고 있고, 다른 문헌이나 아니면 단독으로 나타나는 경우는 단 한 번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편지의 문체가 ?세 동료들이 쓴 전기?의 문체와 다르다는 점이다. 하나의 가설을 세우자면 Crescentius 총장에게 보낸 자료들이 ?세 동료들이 쓴 전기?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다른 많은 자료들도 있었는데, 바로 그 자료들에 부착되어 있었던 편지가 바로 이 편지가 아닌가 하는 점이다. 세 동료들은 이러한 자료들을 1244년의 총회와 총장의 명을 받아서 작성했노라고 말한다: “지극히 복되신 사부 프란치스코의 행적에 관하여 형제들이 알고 있거나, 수집할 수 있는 자료들을 당신께 전해 드리는 것이 지난번 총회의 의결 사항이기도 했고, 당신의 명이기도 했기에… 우리는 전기의 형식을 취하지 않기로 하였다. … 그보다는 오히려 어느 쾌적한 들판에 핀 무수한 꽃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을 마음가는 대로 골라 모으듯 하였다. 따라서 역사적 순서를 따르지 않았고…,” “가장 아름다운 꽃을 마음 가는 대로 골라 모으듯 하였다”라는 말은 Perugia 전기의 형식과 맞아떨어지기 때문에 이 편지는 Perugia 전기에 달린 편지로 간주된다. 왜냐하면 ?세 동료들이 쓴 전기?는 편지의 내용과는 달리 전기의 형식을 갖추고 있으며, 역사적 순서를 밟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이 전기물은 총장에게 보낸 자료들 중의 일부이기는 하지만 “마음가는 대로 골라 모은” 자료의 일부는 아니라고 할 수 있다.


Celano 자신이 이 전기의 일부를 제2생애를 저술하는 데에 사용하는데, 그는 이 전기를 다른 자료들과 분리한다. 그리고 그가 이 전기를 다른 자료들과 분리할 때에 편지도 함께 거기에 포함시켰다. 이 때부터 이 편지는 Perugia 전기와 분리되어 ?세 동료들이 쓴 전기?와 붙어 다니게 된 것이다.


2) 이 전기의 작가는 과연 누구인가? 문체를 비교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는 일이지만 Perugia 전기의 작가는 아니다. Desbonnets는 다음과 같은 가설을 세우는데, 세 동료들 중의 하나라고 한다면 최소한 Leo는 아닐 것으로 본다. 문체가 Leo의 문체는 아니고, Rufino는 글을 남긴 형제가 아니기 때문에 저자를 Angelo로 본다. 그러나 이것도 확실성은 희박하기 때문에,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저자가 아시시 사정에 정통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아시시 출신의 어느 초기 형제들 중의 하나일 것으로만 짐작하고 있다.


3) 저술 연대는 언제인가? 이 문제를 밝히기 위해서는 여러 자료들을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이 전기와 관련성이 있는 전기들로써 서로 비교해야 할 전기물들은, Celano의 1,2 생애, 스피라의 Juliano, Perugia 전기, 그리고 성 보나벤투라의 대전기이다.

"세 동료들이 쓴 전기"는 Celano의 제1생애를 인용하면서 세부적으로 이를 보완한다. 또한, 스피라의 Juliano는 Celano의 제1생애를 이용하여 몇 가지를 보완하면서 1232년과 1239년 사이에 전기를 쓰는데, 이것도 세 동료들이 이용한다. 반면에 Celano는 이 "세 동료들이 쓴 전기"를 의지하여 제2생애를 쓴다. 제1생애에서 누락된 부분, 특히 프란치스코의 젊은 시절과 회개 부분을 보충한다.


따라서 이 전기의 1장에서 16장까지는 Celano의 제2생애 전에 쓰여졌고, 제1생애와 Juliano보다는 후에 쓰여졌다고 볼 수 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이 ?세 동료들이 쓴 전기?는 교황 Gregorio 9세의 1241년 서거 후 얼마 안되어서 쓰여졌음이 확실하다 (67번 참조).


따라서 '"세 동료들이 쓴 전기"의 1장에서 16장까지의 저술 기간은 5년이다. 제2생애의 저술 직전과 교황 Gregorio 9세의 서거 사이가 5년이 되기 때문이다. 이는 1246년에 Greccio에서 보낸 세 동료들이 쓴 편지와 시대적으로 맞아떨어진다.


가장 오래된 Sarano 필사본과 그 외의 많은 사본들도 16장으로 끝나는데, 몇몇 사본들만이 마지막 두개의 장을 첨가하고 있다. 즉, 프란치스코의 오상, 죽음 그리고 시성식을 덧붙이는데, 이 두 장은 그 문체에서 1장에서 16장까지의 문체와는 너무도 다르다. 이 두 개의 장은 바로 보나벤투라의 대전기 13장을 인용한 것이다. 따라서 이 부분의 저술은 1266년 이후로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Van Ortroy나 다른 전문가들처럼 이 전기를 가치 없는 것으로 볼 수 없다. 오히려 원천적 자료 중에서도 마지막 2장을 제외하고는 아주 중요한 자리를 점하는 것으로 여겨야 할 것이다. 이 전기는 제1생애와 더불어 프란치스코의 젊은 시절과 회개, 그리고 초기 형제회에 관해서 가장 완전한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 이 저자는 프란치스코를 매우 가까이 접한 형제이며, 프란치스코로부터 직접 많은 이야기를 들은 형제임에 틀림없다. 이 형제의 문체는 매우 자연스럽고 객관적인 어휘들을 사용하며, 수사적이고 장식적인 언어를 피한다. 그리고 프란치스코의 사건들을 신성화하려는 의도도 보이지 않는다. 우리의 관심을 끄는 많은 자료들을 제공하고 있다.



세 동료들이 쓴 전기


[머리글]


이 글은 복되신 프란치스코(Franciscus)의 세 동료들이 써 보낸 글이다. 이 글에서 그들은 프란치스코의 세속 생활 모습과 아울러 그의 경이롭고도 완벽한 회개를 기술하며, 또한 프란치스코 자신과 초기 형제들에게서 태동한 본 수도회의 기원과 기초를 기술한다.


[편지]


1. 그리스도 안에서 공경하올 아버지이시며, 또한 하느님의 은총으로 총봉사자가 되신 크레셴시오(Crenscentius) 형제께, 한때 지극히 복되신 사부 프란치스코의 부당한 동료들이었던 레오(Leo), 루피노(Rufinus), 안젤로(Angelus)가 주님 안에서 마땅하고 가없는 존경을 드리는 바입니다.


지극히 복되신 사부 프란치스코의 행적에 관하여 형제들이 알고 있거나 수집할 수 있는 자료들을 당신께 전해 드리라는 것이 지난번 총회의 의결 사항이기도 했고, 당신의 명(命)이기도 했기에, 그분과 함께 오랜 기간을 지낸 일이 저희에게는 부당한 일이었지만, 저희가 그동안 직접 목격한 사실들과, 다른 거룩한 형제들, 특히 가난한 부인들의 시찰자인 필립보(Philippus)의 형제와 아르체(Arce)의 일루미나토(Illuminato) 형제, 마리냐노(Marignano)의 맛세오(Masseus) 형제를 통해서 알 수 있었던 일들과, 또한 공경하올 에지디오(Egidius) 형제의 동료인 요한(Iohannes) 형제가 에지디오 형제에게서는 물론 복되신 프란치스코의 동료인 고(故) 베르나르도(Bernardo) 형제에게서 수집한 내용 가운데 우리들이 들은 것 일부를 사실 그대로 공경하올 총봉사자께 전해 드려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성성(聖性)을 내보이기는 하나 성성의 본질을 보여주지 못하는 기적들을 그저 단순히 나열하는 데에만 만족치 않고, 무엇보다도 그분의 거룩한 일상생활의 탁월한 면과, 거룩한 뜻에 맞게 살았던 이상(理想)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과, 거룩하고 칭송할 만한 지향(志向)들을 심혈을 기울여 보여주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이는 지존하신 하느님과 우리의 거룩하신 사부님께 찬미와 영광이 되고, 그분의 발자취를 따르고자 하는 이들에게 도움이 되고자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전기(傳記)의 형식을 취하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그분을 통해서 이루신 그분의 생활과 기적들이 이미 전기 형식으로 여러 개 쓰였기 때문입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어느 쾌적한 들판에 핀 무수한 꽃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을 마음가는 대로 골라 모으듯 하였습니다. 따라서 역사적 순서를 따르지 않았고, 이미 전기들 안에서 아름답게 사실대로 기술된 많은 부분들을 생략했습니다.


혹 총봉사자께서 보시기에 괜찮다고 여겨지시면, 여기에서 언급된 몇몇 항목들을 다른 전기들의 사이사이에 삽입하셔도 좋으리라 사료됩니다. 앞서 전기들을 쓰신 공경하올 분들이 우리가 서술한 것들까지 접하셨다면 전기에서 이것들을 빠뜨리지는 않았을 것으로 우리는 믿는 바입니다.1) 아니 오히려 그분들의 특유한 문체로 그것들을 다듬어서 후대에 기억에 남도록 하셨으리라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늘 편안하시기를 기원하오며 당신의 충실한 자녀들인 저희를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께 겸손하고 온전하게 내맡깁니다.


그레치오(Greccio)에서 1246년 8월 11일


제 1 장


프란치스코의 출생과 허영과 까다로움과 헙헙함,

그리고 이러한 성향들이 가난한 이들에 대한

관용과 사랑으로 전환된 경위.


2. 스폴레토(Spoleto) 계곡의 가장자리에 위치한 아시시(Assisi) 고을 출신의 프란치스코는, 아버지의 부재(不在) 중에 태어나서, 처음에 어머니께서 요한이라 불렀으나, 후에 불란서에서 돌아온 아버지가 그를 프란치스코라고 불렀다.

그는 성장하면서 두뇌가 명석하여 아버지의 사업인 장사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와는 사뭇 달라서, 보다 쾌활하고 자유로웠고 유희에 몰두하였으며, 밤낮을 가리지 않고 같은 또래들과 아시시를 배회하며, 수중에 들어온 돈을 모두 향연이나 그와 흡사한 일에 한 푼도 남기지 않고 써 버릴 정도로 낭비벽이 심했다.


이런 일로 해서 그는 그의 신분에 어울리지 않게 마치 귀족의 자녀가 되는 듯이 자기나 친구들을 위해서 돈을 물쓰듯한다고 부모님으로부터 여러 번 꾸중을 듣기도 하였다. 그러나 부모님은 부유하였고 또 그를 극진히 사랑하였으므로 이런 일로 그를 성가시게 하지 않으려고 이를 참아 넘기곤 하였다. 그러한 어머니는 이웃 사람들이 아들의 헙헙함을 언급할 때 이렇게 대답하곤 하였다: “내 아들이 장차 어떤 아이가 될 것으로 여기십니까? 조만간 분명히 하느님의 은총을 입어서 하느님의 자녀가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그는 마음이 후하고 헙헙하였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옷치장에 한껏 멋을 부려, 분에 넘치는 비싼 옷감들을 몸에 걸치곤 하였다. 까다로우면서도 또한 극히 허황한 데가 있어서 그는 가끔 헐한 옷을 화려한 천으로 기우라고 시키기도 하였다.2)


3. 그의 언행은 거의 천성에 가깝도록 예의 발랐고, 상처 주기 쉬운 말이나 점잖지 못한 말은 양심에 따라 결코 입밖에도 내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 역시도 해학적이며 남과 어울리기를 좋아하는 젊은이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점잖지 못한 말을 들으면 들은 척도 아니 하려고 굳게 마음먹었다. 이리하여 그에 관한 평판이 거의 온 지방에 퍼져서, 그를 아는 많은 측근으로부터 그는 장차 큰 일을 할 인물이라는 말을 들었다.


이렇게 타고난 그의 좋은 성품 위에 하느님의 은총이 작용하여 그는 자신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기에 이르렀다: “헛되고 덧없는 칭찬의 상급을 받기 위해서도 사람들에게 이렇게 예의 바르고 너그러운 너일진대, 하물며 무엇이나 후하게 백 배로 갚아 주시는 하느님이시니, 너 어찌 가난한 이들에게도 그처럼 관대하고 너그럽지 않을 수 있느냐?” 이 때부터 프란치스코는 가난한 이들을 환대했고 또 충분한 애긍을 베풀었다. 사실 그는 장사하는 상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재화를 헤프게 다루는 사람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늘 하던 대로 상점에서 옷감을 팔고 있는데, 한 거지가 안으로 들어와서 하느님의 사랑으로 동냥을 청했다. 그러나 그는 물욕(物慾)과 잇속 차리기에 급급하여 이를 거절했다. 그러나 그는 하느님의 은총의 빛을 받아서, 자기의 이러한 엄청난 과오를 스스로 심하게 탓하며 말했다: “그 거지가 만약에 어떤 귀족이나 영주의 이름으로 청했다면, 틀림없이 너는 무엇인가 그에게 베풀었을 것이다. 그런데 왕중의 왕이시요, 만물의 주인이신 분의 이름으로 그 거지가 청했으니, 그렇다면 너는 말할 것도 없이 그에게 무엇인가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겠느냐!”


이러한 일이 있은 후에 그는 누가 하느님의 이름으로 무엇을 청하면 그 청이 무슨 청이든 간에 절대로 거절치 않으리라고 마음속 깊이 다짐하였다.



제 2 장


페루지아(Perugia)에서 포로로 잡힘,

그리고 기사가 되고자 했을 때,

그에게 나타난 두 환시.


4. 페루지아와 아시시 간에 전쟁이3) 있던 해에 프란치스코는 많은 동향인들과 함께 포로가 되어, 페루지아로 끌려가게 되었으나, 그 태도가 하도 품위가 있어서 프란치스코만이 기사들과 같은 감방을 쓰게 되었다.

동향인 포로들은 깊은 우울에 빠져 있는 데도, 천성적으로 쾌활하고 명랑했던 프란치스코는 슬퍼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고, 오히려 즐거운 듯하였다. 이에 관하여 동료 중의 하나가 그에게 감옥에 갇혀 있는 꼴에 좋기는 뭐가 그렇게도 좋으냐고 하며 그를 얼간이 취급하였다. 이에 프란치스코는 또렷한 목소리로 응답했다: “그대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나는 얼마 안 가서 온 세상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을 것이다.” 그런데 다음과 같은 일이 있었다. 함께 온 기사 중의 하나가 다른 포로 동료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모두가 그를 상대하려 들지를 않았다. 그러나 프란치스코만은 그에게 친구가 되어 주었고, 다른 동료들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권하였다.

일 년이 지나서 두 마을간에 평화가 찾아와 프란치스코는 동료 포로들과 더불어 아시시로 돌아왔다.

5. 몇 해 후에 아시시의 한 귀족이 부귀와 영화를 얻을 양으로 아풀리아(Apulia)로 가려고 기사 장비 채비를 하고 있었다. 이 소식에 접한 프란치스코는 그와 함께 아풀리아로 가려는 열망에 사로잡힌 나머지, 그 백작 젠틸레(Gentile)4)의 기사가 되려고 호화로운 장비를 한껏 장만하였으니, 그 귀족보다 더 부유하지도 못하면서 돈 쓰는 일에는 훨씬 더 헙헙하였다.

그는 빠진 것들이 없는지 일일이 장비 점검을 마치고 나서, 완벽하게 목적을 달성하는 데에만 골몰하여 장도(壯途)에 오를 생각으로 마음이 부풀어 있었던 어느 날 밤에 주님의 방문을 받았다. 주님은 영화에 굶주려 안달하는 그를 환시를 통해서 그 영화를 마치 성취하기나 한 듯이 부추기셨다. 즉, 그 날 밤 그가 잠들어 있는데 어떤 사람이 그의 이름을 부르며 나타나 그를 어떤 아름답고 드넓고 화려한 궁전으로 데리고 갔다. 그 곳은 기사들의 무기들로 가득 차 있었다. 번쩍이는 방패들과 갖가지 군장비들과 공로패들이 벽에 즐비하게 걸려 있었다. 기쁨에 넘친 나머지 프란치스코는 너무도 놀라워 말문이 막혀서, 휘황찬란한 무기들과 아름다운 궁전이 누구의 소유인지를 물었다. 궁전을 포함하여 그 모든 것이 자기와 자기의 부하 기사들에게 달린 것들이라는 응답이 왔다.

그는 아침에 잠에서 깨어나 기쁨에 설레어 일어났다. 그는 아직 하느님의 영(靈)을 충분히 맛들이지 못한 처지였으므로, 이 꿈에 자신이 대제후(大諸侯)가 될 것이라는 세속적 해석을 가하고, 어마어마한 영화를 몰고 올 징조로 예감하면서, 그 백작(伯爵)의 기사가 되기 위하여 아풀리아로 떠나려 하였다. 그의 표정이 평소보다 판이하게 다르게 밝아 보이자, 많은 사람들이 의아스러워서 그에게 그 기쁨이 도대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를 묻자 이렇게 받아 넘겼다: “나는 내가 장차 대제후가 될 것임을 알고 있다오.”


6. 그 환시가 있던 바로 전날, 프란치스코는 대단한 품위와 기사도 정신을 유감 없이 발휘하였으니, 그것은 그 환시를 불러오기에 합당한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된다. 바로 그 날 새로 만든 값지고 화려한 모든 옷들을 어느 가난한 기사에게 주어 버렸던 것이다. 그리고 나서 아풀리아로 떠나 스폴레토(Spoleto)에 이르자 몸이 조금씩 아프기 시작하였다. 그러면서도 여행 걱정을 하며 잠시 누워 잠이 들었다. 비몽사몽(非夢似夢) 간에 어디로 가는 길이냐고 묻는 어떤 음성이 들려 왔다. 그가 자기의 모든 취지를 밝히자 그쪽에서 이렇게 물어 왔다: “누가 너를 보다 훌륭하게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있겠느냐? 주인이겠느냐 아니면 종이겠느냐?” 그가 답했다: “주인(Dominus)입니다.” 그쪽에서 다시 물어 왔다: “그러하다면 어찌하여 너는 종을 위하여 주인을 버리고, 머슴을 위하여 제후를 버리느냐?” 이에 프란치스코가 물었다: “주님(Domine), 제가 무엇을 하기를 바라십니까?” “너의 고향으로 돌아가거라. 거기에서 네가 무엇을 해야 할 지를 듣게 될 것이다. 네가 본 환시를 다르게 알아들어야 할 것이다.”

그는 정신이 들자 이 환시를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첫 번째 보았던 환시로 그는 세속적인 영화를 염원하며 기쁨에 겨워서 어쩔 줄을 몰라 하며 거의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던 터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 환시의 힘에 밀려서 자신의 내면(內面)으로 온전히 빠져들게 되었고, 이리하여 그는 그 날 밤을 온통 뜬눈으로 지새며, 의문에 싸여 이 환시를 되새겼다.

아침이 되어 그는 자신에게 환시를 보여주신 하느님의 뜻을 깨닫기를 기대하면서, 그리하여 자신의 구원을 하느님께서 몸소 보여주실 것을 기대하면서, 기쁘고 밝은 모습으로 서둘러 아시시를 향해서 발길을 돌렸다. 이미 그는 마음을 돌려서 아풀리아로 가는 것을 단념하고, 하느님의 뜻에 자신을 일치시키기를 간절히 원하였다.



제 3 장


주님께서 그의 마음에 처음 방문하시어 신락(神樂)으로 채우심.  이어서 그 힘으로 자기 자신과 온갖 허영을 하찮게 여기게 되어, 기도와 동냥을 하면서 가난을 사랑하여 덕행에 정진하기 시작함.


7. 그가 아시시로 돌아와서 며칠도 안되어, 그의 동갑내기들이 그에게 돈을 마구 쓰게 하려고 그를 두목으로 앉혔다.5) 이리하여 그는 전(前)에 많이 해본 솜씨로 호화로운 주연(酒宴)을 준비하였다.

주연이 끝나고 모두들 집밖으로 나왔다. 동료들이 앞장서서 노래를 부르며 시내로 빠져들어 갈 때, 그는 두목처럼 손에 지팡이를 든 채, 그들 뒤에서 노래 대신에 깊은 명상에 잠겨 그들을 뒤따랐다. 바로 그 때 그는 홀연히 주님의 방문을 받았던 것이다. 얼마만한 감미로움이 그의 마음을 빼앗아 갔던지 그는 말을 잃었고, 망부석(望夫石)이 되었으며, 모든 감각으로부터 자신을 떼어놓은 그 감미로움 외에는 그는 아무것도 느낄 수도, 들을 수도 없었다. 그래서 그가 후에 몸소 말한 것처럼, 그 때에 그는 감각이 마비되어 그 자리에서 꼼짝할 수가 없었다.

한편 그의 동료들이 뒤를 돌아보다가 그렇게 그가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을 보고는 되돌아와서, 그가 이미 딴 사람으로 바뀌어 있음을 보고는 몹시 놀랬다. 그리고는 이렇게 물었다: “무얼 생각하느라고 뒤따라 올 줄도 모르나? 장가들 꿈을 꾼 모양이지?” 이에 그는 또렷한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그래, 너희들 말대로 너희가 아직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그렇게 고결하고 풍요롭고 아리따운 정배를 맞을 생각을 하고 있었단다.” 동료들이 낄낄대며 그를 비웃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말로가 아니라 하느님의 영감을 받아서 그렇게 대답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 정배는 바로 참된 수덕(修德) 생활을 뜻하였으며, 그것은 가난 안에서 더욱 고결해지고, 더욱 풍요로워지며 더욱 아리따워지기 때문이다.


8. 이리하여 그는 이 때부터 자신을 하찮게 여기기 시작했고, 전에 마음을 빼앗겼던 것들을 경멸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직도 완전한 변화가 온 것은 아니었으니, 여전히 지상적(地上的)인 허영에서 온통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차츰차츰 세속적인 소란함에서 벗어나, 그리스도를 마음속에 간직하려고 애쓰곤 하였고, 모든 것을 팔아서 사들인 진주를 속인들의 눈에 뜨이지 않도록 감추면서 자주 하는 정도를 지나 거의 매일 은밀히 기도하려고 어디론지 사라지곤 했다. 때때로 그는 광장이나 혹은 사람들의 발길이 잦은 장소에서도 간헐적으로 찾아 드는 거룩한 기쁨에 이끌려 기도에 빠져들곤 하였다.

그는 전에도 가난한 이들에게 자주 은혜를 베풀곤 했지만, 그는 이 때부터 하느님의 이름으로 애긍을 청하는 가난한 이들을 결코 물리치지 않고, 그들에게 오히려 전보다 더 기쁜 마음으로 그리고 더 듬뿍 주기로 굳게 결심했다. 그래서 그가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그에게 걸인이 동냥을 청하면 가능한 한 때에 구애를 받지 않고 돈을 주었고, 돈이 없을 경우에는 걸인을 빈손으로 돌려보내지 않으려고 모자나 허리띠를 풀어 주기도 했다. 이것마저 없을 경우에는 은밀한 곳으로 가서 웃옷을 벗어 놓고는 걸인을 그 곳으로 남의 눈에 뜨이지 않게 보내어, 하느님의 사랑을 생각해서라도 그 옷가지를 가져가라고 청하곤 했다. 또한 그는 교회에 필요한 내부 용품들을 구입해서 쪼들린 사제들에게 아무도 모르게 보내 주기도 했다.


9. 아버지가 출타 중이어서 어머니하고만 단 둘이 밥을 먹게 될 때에도, 그는 온 가족 분량의 빵을 준비하곤 했다. 그는 어머니가 어찌하여 그렇게 수북히 빵을 식탁에 내놓는지를 물으면, 그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청하는 누구에게나 애긍을 베풀기로 작정했기에, 가난한 이들에게 애긍을 주기 위해서라고 답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다른 아들들보다6) 그를 더 귀여워하였으므로, 그의 여러 행동들을 유심히 지켜보고는 내심 놀라워하면서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그는 전에는 마음을 온통 친구들에게 빼앗겨서 친구들이 자신을 부르기가 바쁘게 집안을 뛰쳐나갔었고, 단짝 친구들 생각에 마음이 사로잡혀서 숟가락을 들어도 밥을 먹는 둥 마는 둥하고 자리를 박차기가 일쑤여서 부모의 마음을 애타게 하였었지만, 이제는 가난한 이들을 보거나 가난한 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 그의 마음은 애긍을 베풀 태세로 부풀어 있었다.


10. 이렇게 하느님의 은총으로 변모된 그는 아직은 세속 옷을 입고 있었지만, 아무도 그를 알아보는 이가 없는 도시로 가서 자신의 옷을 벗어서 아무 거지하고나 바꾸어 입고는, 하느님의 사랑으로 동냥을 청하는 일이 어떤 것인지를 알아보고 싶었다.

실제로 그에게 이 일은 로마(Roma)로 가는 순례길에서 이루어졌다. 그는 성 베드로 성당 안에 들어가서 순례자들의 예물이 너무나 빈약함을 발견하고, 혼자 이렇게 중얼거렸다: “사도들의 으뜸이 큰 공경을 받아서 마땅하다면, 어찌하여 그의 유해가 안장되어 있는 성당에서조차도 사람들이 이다지도 미소한 예물을 드리는 걸까?” 이리하여 그는 열정에 북받친 나머지 손을 지갑에 넣어 은전 한 움큼을 집어서 제대 창문으로 냅다 던졌다. 그리고는 그 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쨍그렁 하며 울리는 은전 소리를 듣고, 그 엄청난 예물에 놀래 버렸다.

그리고 나서 그는 많은 걸인들이 구걸하고 있는 성당의 광장 앞으로 나와서, 어느 거지와 아무도 모르게 옷을 바꾸어 입고는, 다른 거지들과 더불어 계단에 서서 불란서 말로 구걸을 하였다. 사실 그는 불란서 말을 정확히 구사할 줄은 몰랐으나 즐겨 말하곤 했다.

그 후, 그는 거지 옷을 벗고 자기 옷으로 갈아입은 후에 아시시로 되돌아오며, 주님께 자신의 길을 밝혀 주시기를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비밀을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않았고, 자신의 길을 인도하기 시작하신 하느님과 때때로 아시시 주교 외에는 아무에게도 자신의 길에 대한 의견을 청하지도 않았으니, 당시에는 그가 이 세상에서 무엇보다도 바랐고, 가난하게 살다가 죽기로 소원했던 참된 가난을 따르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제 4 장


나환자들을 통해서 자신을 극복하기 시작함,

그리고 처음에는 그토록 역겨웠던 것을

감미로움으로 느끼기 시작함.


11. 어느 날 그가 열심히 주님께 기도를 드리고 있는데 주님으로부터 이런 응답이 들려 왔다: “프란치스코야, 네가 나의 뜻을 헤아리기를 원한다면, 네가 육적으로 사랑해 왔고, 또 소유하고자 했던 것들을 경멸하고 혐오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만 되면 전에 너에게 달콤하고 감미로운 듯했던 것들이 역겨워질 것이며, 이와는 반대로 전에 네가 두려워했던 것들 안에서 형언할 수 없는 달콤함과 더할 나위 없는 감미로움을 맛보게 될 것이다.”

그는 이런 계시를 받고 나서 기뻤다. 이리하여 주님 안에서 강인해진 그는 말을 타고 아시시 교외로 가다가 어느 나환자 하나를 만났다. 나환자를 몹시 무서워했던 그는 이번에는 있는 힘을 다해서 자신을 억제하며 말에서 내려와서 나환자의 손에 입을 맞추고는 돈을 집어 주었다. 그는 그 나환자로부터 평화의 친구(親口)를 받은 다음에 다시 말에 올라서 가던 길을 갔다. 그 날부터 그는 하느님의 은총의 도움으로 자신을 완전히 극복할 수 있을 때까지 더욱 더 자신을 천하게 여기기 시작했다.

며칠 후에 그는 많은 돈을 가지고 나환자 요양소로 내려가서 모든 나환자들을 모아 놓고 각자의 손에 일일이 입을 맞추며 돈을 나누어주었다. 그런데 그 곳에서 나오면서 그가 느낀 일이었지만, 전 같았으면 역겨웠던 일, 즉 나환자들을 보고 만지는 일이 감미로움으로 바뀌어 있었다. 사실 그는 나환자들과 마주치면 비위가 상해서 아예 쳐다보지를 않으려고 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집 근처는 얼씬조차 하지 않았었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가 어떤 때에 그들의 집을 스쳐 지나가게 되거나 그들과 어쩔 수 없이 마주치게 되는 경우에는 비록 동정심이 생겨서 다른 사람을 통해서 그들에게 간접적으로 애긍을 해야겠다는 생각은 했을지언정, 그들에게 얼굴을 돌리고 손으로 코를 막아 버리곤 하였었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하느님의 은총으로 나환자들의 가족이 되었고 반려가 되었으며, 그의 유언에서 그가 말하고 있듯이 그는 그들의 한가운데에 머물면서 겸허하게 시중들었다.


12. 나환자들을 방문한 후에 마음이 선해진 그는 매우 사랑했던 어느 친구 하나를 한적한 곳으로 데려가서 그에게 엄청나게 값진 보물 하나를 발견했노라고 말하곤 했다. 그 친구는 몹시 가슴이 설레어서 프란치스코가 함께 가자고 청하기만 하면 언제나 기꺼이 따라나섰던 것이다. 프란치스코는 그를 가끔 아시시 근처의 어느 동굴로 데리고 가서 보물에 대한 기대에 들떠 있는 그 친구를 밖에 남겨 두고 동굴 안으로 들어가서 새롭고 오롯한 마음가짐으로 호젓이 성부께 기도하곤 하였다. 그는 그 속에서 하느님 외에는 아무도 알기를 원치 않았고, 그가 장차 차지하게 될 천상적 보물에 대해서 하느님에게만 끊임없이 질문을 던졌다.

인류의 원수가 그의 좋은 출발을 지켜보고 있다가, 그를 거기에서 떼어놓으려고 그에게 두려움과 공포를 일으키려 혼신의 힘을 다했다. 실제로 아시시에는 아주 괴기한 인상을 주는 여자 곱추 하나가 있었는데, 마귀는 하느님의 사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그녀의 모습을 떠올리도록 하고서는, 만일에 그의 품은 생각을 철회하지 않으면 그 곱추가 되게 하겠노라고 엄포를 놓았다. 그러나 강인한 그리스도의 기사는 마귀의 위협을 가볍게 보고, 하느님께 자신의 길을 인도해 주시기만을 동굴 속에서 부지런히 기도하곤 했다.

그러나 그는 마음 안에서 깨달은 바를 실제로 어떻게 완수해야 할 지를 몰라서 답답해했으며, 이러한 크나큰 정신적 고통을 견디어 내야만 했다. 갖가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서 그는 더욱더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거룩한 불꽃으로 타올랐고, 자신이 마음으로 깨달은 새로운 불꽃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을 수 없었으며 자신이 지은 막중한 죄를 뉘우쳤다. 그가 앞으로 다시 죄를 또 짓지 않을 것인지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었지만, 최소한 과거와 현재의 죄를 즐거워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나서 동굴 밖으로 나왔을 때, 그의 동료에게 그는 딴 사람으로 비쳐 보였다.



제 5 장


십자 고상(苦像)이 그에게 처음으로 말씀하심,

그리고 그 후 죽을 때까지

그리스도의 수난을 마음에 새김.


13. 어느 날 그가 열광적으로 하느님의 자비를 구하고 있었는데, 하느님께서 그가 무엇을 해야 할 지를 조만간 가르쳐 주시겠다는 계시를 보여주셨다. 그 순간부터 그는 너무나 기뻤던 나머지, 그 기쁨을 간직하지 못하고 사람들에게 자신의 비밀의 일부를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얼버무리는 식으로 조심스럽게 말을 했고, 자신은 아풀리아로 가지 않겠으며, 고향에 남아서 고귀하고 큰 일을 할 것이라는 사실만을 확실하게 말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의 동갑내기들은 그의 많은 변화를 알아보았다. 프란치스코는 가끔 그들과 육신적으로는 함께 어울리곤 했으나, 정신적으로는 이미 그들과 멀리 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농담을 하며 그에게 곧잘 이렇게 물었다: “프란치스코야, 너 장가들고 싶으냐?” 이미 말했듯이 이에 그는 얼버무리는 식으로 답했다.

며칠이 지났다. 그가 성 다미아노(Daniano) 성당을 지나가게 되었는데,7) 그의 마음속에서 그 곳에 들어가서 기도하라는 소리가 들려 왔다. 그래서 그는 안으로 들어가 십자 고상 앞에서 열심히 기도 드리기 시작하였는데, 그 십자 고상이 그에게 경건하고도 은혜로이 이렇게 말을 했다: “프란치스코야, 너도 나의 집이 허물어져 가는 것을 보고 있지 않느냐? 그러니 너는 가서 나의 집을 수리해 다오!” 그는 벌벌 떨며 몹시 놀라서 말하였다: “주님, 기꺼이 하오리다.” 그러나 그는 낡아서 곧 허물어질 듯한 바로 그 성당을 수리하라는 줄로 알아들었다. 이 말씀에 그는 기쁨이 넘쳤고, 빛을 받아 자신에게 말씀을 하신 분이 참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이셨다고 마음으로 느꼈다.

그래서 그는 성당 밖으로 나와서 밖에 앉아 있던 사제를 보고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많은 돈을 집어 주며 이렇게 말했다: “신부님, 저 십자 고상 앞에 등불을 끊기지 않고 밝힐 수 있도록 기름을 사십시오. 이 돈이 다 떨어지면 필요한 만큼 다시 돈을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14. 이리하여 이 때부터 그의 마음은 주님의 수난에 대한 생각에 상처를 입어 녹아 내렸다. 살아 있는 동안 그는 늘 주 예수의 성흔(聖痕)을 마음에 지고 다녔으며, 그리하여 후일에 그의 몸에 그분의 성흔들이 뚜렷이 복제되어 신비로운 형상으로 나타났고, 그것들을 아주 확실하게 모든 이가 알아볼 수 있었다.

그는 그 아래로 몸이 성할 때나, 병들었을 때나, 끊임없이 가혹하게 끔찍할 정도의 극기를 하였고, 거의 한 번도 그 가혹함을 늦춘 적이 없었고, 몸을 옳게 돌보려 들지도 않았다. 이 때문에 그는 임종하던 날 육신 형제에게 많은 죄를 지었다고 고백하였다.

한 번은 그가 혼자서 대성통곡(大聲筒哭)을 하면서 포르치운콜라(Portiuncula)의 성 마리아 성당 쪽으로 가고 있었다. 이를 본 어떤 영적인 사람 하나가8) 아마도 그가 병이나 고통으로 괴로워하고 있는 줄로 알고, 가엾은 생각이 들어서 어인 사연에 그다지도 우는지를 물었다. 그는 이렇게 답했다: “나의 주님의 수난을 생각하고 웁니다. 우리는 그분의 수난을 생각하고 대성통곡하면서 온 세상을 돌아다닌다 해도 부끄러워 할 일이 아닙니다.” 그러자 그 사람도 그와 더불어 똑같이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그리고 흔히 하도 비통하게 울어서 기도가 끝나고 나면 그의 눈은 붉게 충혈 되어 있었다. 그는 울기만 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수난을 생각하고 식음(食飮)을 전폐하기도 했다.


15. 그가 세속인들과 한 자리에서 음식을 나눌 경우에, 좋아하는 음식이 나와도, 그는 다른 사람들이 고행을 하느라고 음식을 멀리 한다고 짐작을 할까 봐서, 다른 핑계를 대고 음식을 약간 맛보는 척만 했다. 그리고 형제들과 함께 식사를 할 때에만 자주 음식에다가 재를 뿌리고는 고행 때문이 아닌 것처럼 하기 위하여, 재 형제는 깨끗하다고 말하곤 했다.

한번은 식탁에서 한 형제가 복되신 동정녀께서는 하도 가난하셔서 식사 때에 당신의 아드님께 먹을 것을 드리지 못했을 정도이셨다고 말하였다. 이 말을 듣자마자 하느님의 사람은 큰 고통에 긴 한숨을 내쉬고, 식탁을 버리고 땅바닥에 내려앉아서 빵을 먹었다.

그는 끼니때에 끼니가 시작되자마자 손을 멈추고 먹지도 마시지도 않은 채 천상사물(天上事物)에 대한 묵상에 빠져든 적은 그 수를 이루 헤아릴 수도 없을 정도로 빈번했고, 이러한 때는 자신의 묵상이 대화로 중단되는 것을 원치 않았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으며, 그렇게 한숨을 쉴 때는 매번 형제들에게 하느님을 찬미하라고 말하였고, 또한 자기를 위해서도 성실하게 기구를 해 달라고 부탁하곤 했다.

우리는 그의 눈물과 고행을 몇 가지만 열거했는데, 이는 프란치스코가 성 다미아노 십자 고상의 환시와 말을 들은 후에 죽을 때까지 어떻게 그리스도의 수난에 자신을 맞추어 나갔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다.



제 6 장


아버지와 친척들의 박해로부터 도망침,

그리고 성 다미아노 성당의 창턱에 돈을 던져 버리고

그 곳 사제와 함께 살았던 시기.


16. 십자 고상의 환시와 말씀으로 인하여 기쁨이 넘치게 된 그는 일어나서 십자성호(十字聖呼)를 긋고 나서, 가지각색의 옷감 보따리를 말에 싣고 폴리뇨(Foligno) 시로 갔다. 거기서 그는 타고 갔던 말과 싣고 간 물건을 모두 팔아 버리고 곧바로 다미아노 성당으로 돌아왔다.

거기서 그는 위에서 언급한 바 있었던 매우 가난한 사제를 찾아서, 그의 손에 큰 믿음과 정성으로 입을 맞춘 후에 가지고 간 돈을 그에게 건네주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자기의 청을 그 사제에게 차근차근히 말했다. 이에 어리둥절해진 사제는 그의 갑작스런 회개를 의아스럽게 여기며 믿으려 들지를 않았고, 자신을 속이려 든다면서 그 돈을 거절했다. 프란치스코는 자기가 말한 것을 사제로 하여금 믿도록 하려고 끈질기게 설득하였고, 그와 함께 살도록 허락해 줄 것을 간곡하게 청했다.

마침내 사제는 그에게 그 곳에 머무를 것을 허락하였으나, 그의 부모들이 두려워서 돈을 받지 않았다. 그래서 프란치스코는 실로 돈을 경멸한 나머지, 마치 그것이 티끌인 양 창턱에다 냅다 던져 버렸다.

그가 계속해서 다미아노 성당을 거처로 삼고 있는 동안, 그의 아버지는 집요한 정탐꾼처럼 아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수소문하여 돌아다녔다. 아들이 완전히 딴 사람이 되어 다미아노 성당에서 기거하고 있음을 소문으로 알게 된 아버지는 마음이 극도로 상하여, 이 뜻밖의 상황에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모아 그들과 함께 황급히 그에게로 달려갔다.

그러나 벌써 그리스도의 새 기사가 된 그는 부모가 오리라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지만, 협박하러 달려오는 그들의 소리를 듣고는 아버지의 분노를 피하기 위해서 준비해 둔 비밀 토굴로 내려가 몸을 숨겼다. 그리고 그는 거기서 한 달을 숨어 지냈다. 그 토굴을 아는 사람은 가족 중에서 한 사람밖에 없었으니, 음식을 남몰래 준비해 두었다가 때맞추어 가져오곤 했고, 그는 숨어서 그것을 먹었다. 그리고 그는 주님께서 이러한 박해에서 구해 주시며 그의 경건한 소망을 실현하는 일을 어여삐 여기어 도와주시기를 눈물을 흘리며 애절히 기도했다.


17. 이렇게 단식과 눈물로 정성을 다하여 그칠 새 없이 주님께 청하면서, 자신의 덕행이나 열성에 의존치 않고, 온전히 주님께만 희망을 두니, 주님은 어둠의 심연 속에 있었던 그를, 신묘(神妙)한 기쁨으로 가득히 채워 주셨고, 신비한 힘의 빛으로 비추어 주셨다.

이리하여 그는 온전한 불이 붙어, 힘차게 토굴을 박차고 나와서 아시시를 향해서 굳세고 기쁜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무기로 무장을 하여, 하느님의 불이 붙게 되자, 지금까지의 자신의 나태와 괜한 두려움을 질책하면서 담대히 자신을 박해자들의 손과 채찍에 내맡기기로 하였던 것이다.

전부터 그를 아는 사람들이 이를 보자, 그에게 미친놈이라는 둥, 얼빠진 놈이라는 둥 외쳐 대며 무참히 능욕하였으며 길바닥의 진흙을 집어던지거나 돌팔매질을 하였다. 사람들은 전과는 판이한 그의 행동과 육신의 고행으로 초췌해진 그의 몰골을 보고서는, 그의 이러한 꼬락서니가 배를 곯고 실성한 데서 온 것으로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기사는 이러한 모욕에 귀머거리인 양 마음이 부수어지거나 동요되는 일이 없이 하느님께 감사를 드렸다.

이렇게 동네 복판과 골목 구석구석에까지 소문이 파다하게 번져서, 마침내 이 소문이 아버지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고, 아버지는 동네 사람들이 자기 아들을 향해서 하는 짓거리들에 관한 말을 듣고서는 벌떡 일어나 그를 찾아 나섰다. 그를 구해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예 죽여 버리기 위해서였다. 아버지는 자제(自制) 따위는 아랑곳없이 마치 늑대가 양에게 달려들 듯이 눈을 부라리고,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지며, 그의 멱살을 손으로 휘어잡고는 집으로 질질 끌고 갔다. 그리고 그를 여러 날 동안 캄캄한 감방에 감금시키고, 온갖 말과 욕으로 그를 세속의 헛됨으로 되돌리고자 무진 애를 썼다.


18. 그는 말이나 결박이나 채찍으로도 풀이 죽지 않았고, 오히려 이 모든 것들을 꿋꿋이 견디어 냈으며, 그는 거룩한 결심을 수행하는 데에 오히려 더 빠르고 보다 힘찬 마음의 자세가 되어 있었다.

갑작스런 일로 그의 아버지가 집을 비운 사이에, 남편의 행동에 찬동하지 않았던 그의 어머니는 자기 아들과 단둘이만 남게 되자, 아들에게 부드러운 말로 일렀다. 그러나 아들의 결심이 확고히 서 있고, 그의 거룩한 결심으로부터 그를 되돌리기가 불가능함을 알아차리게 된 그녀는 아들이 측은한 생각이 들어서 그의 결박을 풀어 주고, 아들에게 자유로이 가도록 허락하였다.

프란치스코는 전능하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며, 전에 있었던 은신처로 되돌아갔다. 이제 그는 보다 큰 자유를 누리게 되었고, 악마의 유혹들을 거침으로써 유혹으로부터 교훈을 얻게 되었으며, 모욕으로부터 더욱 안전해진 영혼이 되어 한층 더 쾌활하고 강해진 모습이 되었다.

그러던 중에 아버지가 집에 돌아와서 아들이 눈에 뜨이지를 않자, 그는 아내에게 능욕을 줌으로써 죄에 죄를 쌓아올렸다.


19. 그리고 나서 그는 아들을 시 당국에9) 고발하려고 시청으로 달려갔다. 아들이 집에서 강탈해 간 돈을 청하여, 시 당국으로 하여금 그것을 자기에게 돌려보내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그가 몹시 격분해 있는 것을 보고, 시 당국은 전령을 시켜서 프란치스코를 불러서 대령케 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프란치스코는 전령에게 자기는 이미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서 자유인이 되었으므로 시 당국은 이제부터 자신을 재판할 권리가 없고, 자신은 다만 지존하신 하느님의 종일뿐이라고 하였다. 시 당국은 그를 강압적으로 끌어오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에 그의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는 하느님의 봉사 안에 들어 있기 때문에, 우리의 권한 밖에 있습니다.”

이리하여 아버지는 시(市)로부터는 아무것도 나올 것이 없음을 깨닫고, 시(市) 주교에게 소송을 냈다. 이리하여 신중하고 슬기로운 주교는 프란치스코에게 아버지의 소송에 나와서 정식으로 답변하도록 불렀다. 프란치스코가 전령에게 말했다: “주교님은 영혼의 아버지시요 주인이시니, 주교님께 출두하겠습니다.”

이리하여 그는 주교님께로 갔다. 주교님께서는 큰 기쁨으로 그를 맞이해 주셨다. 그리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그대의 아버지가 그대로 인하여 아연실색(啞沿失色) 하여, 몹시 노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당신께서 하느님을 섬기기를 원하신다면, 가지고 있는 돈을 아버님께 돌려 드리도록 하십시오. 왜냐하면 그 돈은 부당하게 번 돈일지도 모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당신으로 하여금 그 돈을 교회 일에 쓰게 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아버지의 죄 때문이니, 그분의 노기(怒氣)는 그 돈을 되돌려 받아야 가라앉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 아들이여, 주님을 믿고 용기 있게 처신하십시오. 그리고 걱정하지 마십시오. 주님께서 직접 그대를 도우실 것이며, 주님의 교회 일을 위하여 필요한 것을 그대에게 풍족히 보내 주실 것입니다.”


20. 이리하여 하느님의 사람은 주교의 말씀에 흡족한 격려를 받고 나서, 자기 앞에 돈을 놓고 주교에게 말했다: “주교님, 아버지의 돈뿐 아니라 옷가지들까지 기꺼이 돌려 드리겠습니다.” 그는 주교의 거실로 들어가서 자기의 옷을 홀랑 벗고, 그 옷 위에 돈을 얹어 놓고서는, 주교님과 아버지와 주위에 서 있는 사람들 앞으로 알몸으로 나와서 말했다: “여러분, 저의 말을 듣고 알아두십시오. 지금까지 저는 베드로 베르나르도네(Petrus Bernardus)를 저의 아버지라고 불러왔습니다. 그러나 저는 하느님을 섬기기로 결심하였기에, 아버지를 저토록 노엽게 하는 돈을 돌려 드리고 아버지의 소유인 제가 지금 몸에 걸치고 있는 일체의 옷가지들까지도 돌려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제부터 베드로 베르나르도네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겠습니다.” 이 때에 하느님의 사람이 자신의 화려한 옷 밑에 고행대(苦行帶)를 두르고 살아왔음이 드러났다.

이리하여 그의 아버지는 몸을 가눌 수 없을 만큼 울화가 치밀었고, 일어나서 옷가지와 돈을 받아 들었다. 그가 옷가지들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가지고 가자, 이를 본 주위 사람들은 아들에게 옷 조각 하나도 남겨 놓지 않는 그를 언짢게 여겼다. 그리고 그들은 프란치스코가 가여운 생각이 들어서 매우 슬피 울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주교는 하느님의 사람의 용기를 즉각 알아차리고, 그의 정열과 항심(恒心)에 심히 감탄한 나머지, 그를 자기의 팔 안으로 끌어당겨서 자기의 외투로 그를 가려 주었다. 주교는 프란치스코가 이 일을 하느님의 영감으로 하는 것임을 확연히 감지하였고, 자기가 목격한 이 일은 많은 신비를 내포하고 있음도 깨달았다. 이 때부터 주교는 그의 협조자가 되어, 그를 충고하고 보살피며 이끌면서 자비의 마음으로 그를 포용하였다.



제 7 장

성 다미아노 성당의 수리를 위하여 바친

막중한 노동과 어려움,

그리고 구걸로 자신을 극복하기 시작함.


21. 이렇게 해서 세상에 속한 모든 것으로부터 알몸이 된 하느님의 종 프란치스코는 하느님의 정의를 실현하기 위하여 자신을 텅 비웠고, 자기의 삶을 천히 여기면서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하느님을 섬기기 위하여 자신을 봉헌하였다.10) 그리고 그는 기쁨의 열정에 휩싸인 채 성 다미아노 성당으로 돌아와서, 은수자의 옷으로 갈아입고, 자신이 주교로부터 격려 받은 그 말로써 다미아노 성당의 사제를 격려하였다.

그리고는 다시 시내로 들어가, 그는 시내 한복판과 마음을 누비고 다니며 하느님을 흔연한 마음으로 높이 찬미하였다. 이렇게 주님의 찬미를 마치고 난 다음에, 그는 다미아노 성당을 수리하기 위하여 구걸을 시작하였다: “저에게 돌 하나를 주는 사람은 그만큼의 갚음을 받을 것입니다. 또한 돌 둘을 주는 사람은 두 배의 갚음을 받을 것이며, 돌 셋은 또 그 만큼의 갚음을 받을 것입니다.”

이렇게 단순한 무수한 말들이 그의 뜨거워진 정신으로부터 쏟아져 나왔다. 하느님께서 배움이 부족한 단순한 사람이라서 그를 뽑으셨다. 그는 모든 일에서 인간의 지혜로부터 나오는 유식한 말을 쓰지 않았고, 오히려 단순하게 자신을 나타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정신 나간 사람으로 여기며 업신여겼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그가 육(肉)과 속(俗)의 헛됨으로부터 어떻게 그토록 빨리 하느님의 사랑에 도취되어 들어갔는지, 그를 보면 감동하여 눈물을 흘렸다. 그는 남들의 조소에 개의치 않았고 끓어오르는 마음으로 하느님께 감사를 드렸다.

집에서 지금까지 약골로만 커 온 바로 그 프란치스코가 하느님의 사랑을 위하여 성당을 수리하느라고 등에 돌을 져 나르며 허리가 휘도록 얼마만큼 고생하며 일을 했는지를 말하기란 한두 마디로 될 일도 아니어서 난감하다.


22. 하느님을 섬기기 위해서 자기 힘에 부칠 만큼 열심히 일하는 그의 모습을 본 사제는, 자기의 생활이 쪼들렸음에도 불구하고, 프란치스코가 세속에서 얼마큼 귀하게 자랐는지를 잘 알고 있는 터라, 그를 위하여 특별한 음식을 장만했다. 프란치스코 자신도 자기가 세속에 있을 때에는 특별히 선별된 고급 요리만을 연달아 먹었고, 입에 당기지 않는 음식은 손도 대지를 않았었다고 말하였다.

어느 날 그 사제가 자기를 생각해서 특별한 음식을 준비하고 있음을 알아차린 프란치스코는 혼자 자신에게 말했다: “네가 어디를 가도, 너에게 이렇게까지 친절을 베푸는 사제를 또 만나지는 못할 것이다. 이 생활은 네가 택하고자 했던 가난한 사람의 생활이 아니다. 배가 고파서 하는 수 없이 손에 그릇을 들고 이 집 저 집으로 돌아다니면서 뒤범벅이 된 음식들을 모으는 그런 가난한 사람의 생활이 아니란 말이다. 그러니 너는 이 세상에 가난하게 태어나셔서 더욱 가난하게 사셨고, 또 십자가 위에서도 알몸으로 가난하셨으며, 또 그렇게 남의 땅에 묻히신 그분의 사랑을 위하여, 자원해서 가난하게 살아야 할 것이다.”

이리하여 어느 날 그는 각오를 단단히 하고, 그릇을 들고 집집을 돌며 동냥하면서 시내로 들어갔다. 프란치스코는 사람들로부터 받은 갖가지 음식 찌꺼기들을 그릇에 넣었고 이를 목격한 사람들은 그가 지금까지 얼마큼 곱게 커 왔는지를 잘 알고 있던 터라서, 그의 이러한 자기비하(自己卑下)와 신기하도록 변모한 그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는 그릇에 담긴 각종 찌꺼기를 막상 입에 대려고 하자 그만 처음에는 질려 버리고 말았다. 그는 그런 음식들을 먹어 본 적도 없었고 본 적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마침내 자신을 극복하고 나서 음식 찌꺼기들을 먹기 시작하니, 전에 먹어 본 그 어떤 특별하다는 요리도 결코 이만큼 맛이 있지는 않았던 듯이 여겨졌다.

이리하여 그의 심장은 주님 안에서 기쁨에 고동쳤다. 그는 비록 육신적으로 약하고 어려움도 많았지만, 이 일을 계기로 해서 주님을 위하여 어떠한 어려움과 괴로움도 기꺼이 견딜 수 있도록 강인해졌기 때문이다. 그는 쓴맛을 단맛으로 바꾸어 그를 한없이 단단하게 만들고 위로하시는 하느님께 감사를 드렸다. 이 일이 있은 후부터 그는 사제에게 자기를 위하여 다른 어떤 음식도 직접 만들거나 혹은 다른 사람에게도 준비하도록 시키지 말아 달라고 당부하였다.


23. 그의 아버지는 처량한 신세가 되어 버린 아들을 보고 한없이 괴로워하였다. 아들을 너무도 사랑했던 나머지 그는 고행과 추위에 초죽음이 되어 있는 아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괴롭고 부끄러웠다. 이리하여 그는 프란치스코를 만날 때마다 그를 저주하였다.

하느님의 종이 아버지의 저주를 듣게 되면, 그는 자기의 아버지 대신에 가난하고 버림받은 어떤 사람을 불러 그 사람에게 말했다: “이리 오십시오.  제가 얻은 동냥을 나누어 드리겠습니다. 아버지께서 저에게 저주를 하실 때 제가 당신께 ‘아버지, 저에게 축복을 내리십시오’ 하고 말을 하면, 그 때 저에게 아버지를 대신해서 십자가로 강복을 해주십시오.” 이리하여 그 가난한 사람이 그에게 강복을 할 때 프란치스코가 아버지에게 말했다: “하느님께서 아버지의 저주 대신에 축복을 내릴 다른 아버지를 저에게 주실 수 있음을 믿지 않으십니까?” 프란치스코가 이토록 조롱받고 멸시를 받으면서도 모든 것을 놀랍도록 인내로이 견디는 그의 모습을 보고 그를 조롱하고 멸시했던 사람들이 대단히 놀랬다. 어느 겨울 아침에 프란치스코가 누더기 옷에 의지하여 기도를 하고 있었는데, 그의 육신상의 형제가 그를 가까이 지나가며, 빈정대면서 자기의 동행자에게 말했다: “프란치스코에게 그 알량한 땀을 너에게 몇 품에 팔라고 하렴!” 하느님의 종이 이 말을 듣고, 불란서 말로 흥얼대며 대꾸했다: “나는 나의 땀을 나의 하느님께 비싸게 쳐서 팔 작정입니다.”


24. 그는 위에서 말한 성당을 차근차근히 쉬지 않고 수리하다가, 성당의 등불이 늘 켜져 있도록 하기 위하여 기름을 얻으려고 마을로 들어갔다. 그가 어떤 한 집으로 가까이 가려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 집 앞에서 한데 모여 노는 것이 보였다. 그들이 보는 앞에서 구걸을 한다는 사실이 부끄러워서 그는 발길을 돌렸다. 그러나 그는 생각을 고쳐 먹고 급히 돌아가서, 그 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에게 그들 때문에 동냥하는 것을 부끄러워했던 자신의 죄를 고백했다. 그리고 나서 그는 뜨거운 마음이 되어 그 집으로 들어가서, 성 다미아노 성당의 불을 위하여 하느님의 사랑으로 불란서 말로 크게 소리쳤다: “오셔서, 성 다미아노 성당의 일을 하는 저를 거들어 주십시오. 이 성당은 앞으로 여인들의 수녀원이 될 것이고, 그들의 명성이 생활로 인하여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 온 교회 안에서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그는 예언의 영에 싸여서 이 말로써 진실하게 미래를 예언하였던 것이다. 왜냐하면 이 곳은 가난한 부인들과 거룩한 동정녀들의 탁월한 수녀회와 영화로운 수도회가 들어설 거룩한 장소였기 때문이다. 복되신 프란치스코가 회개한 지 거의 육 년이 지나서 이 예언이 실현되었다. 바로 복되신 프란치스코를 통하여 복된 수도회의 출발이 이루어졌고, 자매들의 탁월한 생활 양식과 자매들의 영광된 수도회는 당시에 오스띠아(Ostia)의 주교였던 거룩하신 고(故) 그레고리오(Gregorio) 교황님께서 승인하셨고 교황청의 권위로 완전히 인준되었던 것이다.11)



제 8 장

프란치스코가 그리스도의 복음적 권고를 듣고 받아들여,

즉시 겉옷을 벗어버리고,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완덕의 새 옷으로 갈아입음.


25. 복되신 프란치스코는 성 다미아노 성당의 수리가 끝날 때까지도 은수자의 옷을 입고 있었고, 손에는 지팡이를 들었고, 발에는 가죽신을 신었으며, 몸에는 가죽끈을 두르고 다녔다. 그는 어느 날 미사를 드리다가,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을 설교하라고 파견하시면서, 그들에게 여행 중에 금이나 은, 작은 자루나 전대도 지니지 말 것이며, 빵과 지팡이도 가지고 다니지 말고, 신발과 두벌의 옷도 지니지 말라고 하신 말씀을 들은 데다가, 그 곳 사제로부터 이 말씀에 대하여 더욱 명료하게 설명을 듣고 나서 기쁨에 넘쳐 소리쳤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바로 이것이 내가 온 힘을 기울여 이루려고 원했던 것입니다.” 그는 들은 말씀을 모두 다 마음에 새기고, 환희에 넘쳐서 그것들을 실천에 옮기기 시작하였으니, 지체 없이 여벌옷을 벗어 던졌고, 그 때부터 지팡이와 가죽 신발과 작은 자루와 전대를 사용하지 않았고, 매우 낡고 거친 속옷을 입었으며, 가죽끈을 버리고 몸에 띠를 동였던 것이다. 그는 새로운 은총의 말씀을 어떻게 하면 실천에 옮길 수 있을까 하여 온갖 심려(心慮)를 다하였고, 하느님의 이끄심으로 사람들 앞에서 단순하게 복음적 완덕의 선포자로서 회개를 선포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말은 공허하지 않았고, 웃음거리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말에는 성령의 힘이 가득하였고, 듣는 사람들의 가슴 깊은 곳에 파고들어 그들로 하여금 대단한 경탄을 자아내게 하였다.

26. 프란치스코 자신이, 주께서 인사하는 법을 다음과 같이 계시로써 가르쳐 주셨다고 나중에 밝혔다12): “주께서 당신에게 평화를 주시기를!” 그래서 그는 자신이 설교를 해야 할 때에는 언제나 평화를 전하는 인사로 설교를 시작하였다. 너무나 신기하여 기적이 아니고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 프란치스코가 회두하기 전에 있었다. 어느 한 선각자가 프란치스코가 태어나기 전에 아시시를 자주 지나치며 다음과 같이 인사를 하였었다: “평화와 선! 평화와 선!”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전한 요한이 그리스도가 복음을 선포할 때에 사라졌듯이, 이와 마찬가지로, 이 선각자도 또 다른 요한처럼 평화를 전함에 있어서 프란치스코를 앞세웠고, 프란치스코가 나오자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고 굳게 믿었다.

이리하여 하느님의 사람인 프란치스코는 예언자들의 설교에서처럼, 예언의 영에 젖어 들어, 자기를 앞서간 전달자가 사라진 다음에 즉시 평화를 전했고 구원을 선포하였으며 그리스도와 불목(不睦)하여 구원의 길에서 멀리 있었던 많은 사람들이 그의 구원적 권고로 참다운 평화로 묶었다.


27. 복되신 프란치스코에 대하여, 특히 단순하고 진실한 그의 생활 방식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되자, 그가 회두한 지 두 해가 지난 후에 몇몇 사람이 그의  회개의 모범에 감동되기 시작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그들의 생활과 외모에서 프란치스코와 유대를 이루려고 하였다. 그들 중의 첫 번째가 고(故) 베르나르도(Bernardus) 형제였다.

하느님을 섬기는 데에 있어서 복되신 프란치스코의 항구함과 열의를 눈여겨본 베르나르도는, 실제로 프란치스코가 얼마나 많은 노동을 하여서 부서진 성당들을 수리하고 또 얼마나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는지를 생각하고, 프란치스코가 세속에 있을 때 곱게 자랐음을 잘 알고 있던 터라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것을 마음으로 결심하게 되었고, 생활과 외모에서 프란치스코와 견고히 하나가 될 것을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어느 날 남몰래 하느님의 종에게 가서 자기의 뜻을 열어 보이고, 저녁에 그를 자기 집에 초대하는 데에 동의를 얻었다. 그 때까지 아직 동료가 없었던 프란치스코는 날 듯이 기뻐하며 하느님께 감사를 드렸다. 왜냐하면 큰형이신 베르나르도는 매우 모범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28. 복된 프란치스코는 약속대로 저녁에 베르나르도의 집으로 가서, 큰 기쁨 중에 그와 더불어 밤을 밝혔다. 이야기 중에 큰형이신 베르나르도가 그에게 질문을 했다: “누가 만약에 많거나 적거나 간에 재물을 주인으로부터 받아서, 그 재물을 오랫동안 소유하고 있다가, 이제는 더 이상 지니고 싶지가 않을 때는 그로서는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좋겠습니까?” 복되신 프란치스코는 그러한 경우에는 그가 받은 재산을 주인께 돌려 드려야 한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큰형 베르나르도가 말했다: “그렇다면 형제여, 저는 형제의 적절한 판단에 따라, 나에게 재물을 주신 나의 주님의 사랑을 위하여 나의 모든 세속 재물들을 나누기를 원합니다.” 성인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일 아침 일찍이 성당으로 갑시다. 그 곳에 가서 주님께서 당신의 제자들을 어떻게 가르치셨는지 우리도 복음서를 통해서 알아봅시다.”

그들은 아침에 일어나서, 형제가 되기를 바라는 베드로라고 하는 사람과 함께 아시시 마을의 광장에서 가까운 성 니콜라오 성당으로 갔다. 그들은 기도를 드리려고 성당 안으로 들어갔으나, 어리숙하고 무지한 사람들이라서 세속을 포기하라는 복음서의 말씀을 찾을 줄을 몰랐다. 이리하여 그들은 주님께 자신들이 복음서를 첫 번째 펼칠 때에 당신의 뜻을 자신들에게 내보이시기를 정성되이 청했다.


29. 복되신 프란치스코가 기도를 마치고 나서, 닫혀진 책을 들고 제대 앞으로 나아가 무릎을 꿇고 책을 펼쳤다. 첫 번째로 펼치자 주님의 뜻이 나타났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어라. 그러면 하늘에서 보화를 얻게 될 것이다.”

이러한 말씀을 발견하자 복되신 프란치스코는 대단히 기뻐하며 하느님께 감사를 드렸다. 그러나 그는 복되신 삼위일체를 진실 되게 공경하는 사람이었으므로, 성서에서 세 번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는 성서를 두 번, 세 번 펼쳤다. 두 번째로 펼쳤을 때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왔다: “길을 떠날 때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 세 번째로 펼쳤을 때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타났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복되신 프란치스코는 책을 펼칠 때마다, 자기가 벌써부터 가지고 있었던 계획과 소원을 성삼(聖三)의 은총으로 밝히고 확인할 수 있어서 하느님께 한없는 감사를 드렸다. 그리고는 베르나르도와 베드로에게 말했다: “형제들이여, 이것이 우리와 우리의 동료가 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생활이며 규칙입니다. 그러므로 가서 들은 바를 실행으로 옮기십시오.”

이리하여 대단히 부자였던 우리의 큰 형님 베르나르도는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팔아 거액을 만들어서 마을의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베드로도 비록 조금이기는 했지만 가진 것을 다 팔아서 하느님의 뜻을 채워 드렸다.

모든 것을 없애고 나서 두 사람 다 잠시 후에, 성인이 은수자의 옷을 버린 직후에 입은 옷을 함께 받아서 입었다. 그 후로 그들은 주님께서 그들에게 보여주신 거룩한 복음의 양식에 따라서 살았다. 그래서 복되신 프란치스코는 당신의 유언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주님 친히 거룩한 복음의 양식에 따라 살아야 할 것을 나에게 계시하셨습니다.”



제 9 장

실베스텔(Sylvester) 형제를 부르신 방법과

수도원에 들어오기 전에 그가 본 환시.


30. 우리가 방금 이야기한 큰형 베르나르도가 자기의 모든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줄 때에, 그 자리에 있었던 프란치스코는 하느님께서 하시는 사업을 보고, 마음으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며 높은 찬미를 드렸다. 실베스텔(Sylvester)이라고 하는 한 사제도 그 곳에 있었는데, 프란치스코가 성 다미아노 성당을 수리할 때 이 사제로부터 얼마 가량의 돌을 산 적이 있었다. 실베스텔은 하느님의 사람의 권고 한마디에 거액의 돈을 뿌려지는 것을 목격하고서는, 슬그머니 욕심이 생겨서 그에게 다가가 말했다: “프란치스코, 당신은 나에게서 가져가신 돌 값을 제 값을 쳐서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탐욕을 경멸하는 프란치스코는 이 부당한 불평을 듣고서, 우리의 큰형 베르나르도에게 가서 돈이 들어 있는 베르나르도의 짧은 겉옷 주머니에 손을 넣고, 뜨거운 마음으로 충분한 돈을 꺼내서 불평하는 사제에게 주었다. 다시 두 번 사제의 손을 돈으로 채워 주며 말했다: “충분합니다. 형제여!” 그는 이렇게 돈을 받아 들고나서 기뻐하며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31. 그러나 며칠이 지나자 그 사제는 하느님의 이끄심으로 복되신 프란치스코의 행위를 곰곰이 되새겨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자기 스스로에게 말했다: “내가 가련한 사람이 아닌가? 이만한 나이에 그토록 재물에 탐욕을 부리다니? 그 젊은이는 하느님의 사랑을 위해서 재물을 멸시하고 지겨워하는 터에!”

그 날 밤 그는 꿈속에서 하늘 끝에 닿아 있는 거대한 십자가를 보았는데, 그 뿌리는 프란치스코의 입에 고정되어 있었고, 그 양팔은 세상의 이 끝과 저 끝에 맞닿아 펼쳐져 있었다.

그 사제는 일어나자마자 복되신 프란치스코야말로 그리스도의 참다운 벗이요 종이며, 그가 시작한 수도회는 온 세상에 널리 퍼져야 함을 깨닫고 믿게 되었다. 이리하여 실베스텔은 하느님을 경외하게 되었고, 자기 집에서 회개를 하였다. 그러나 얼마 안 가서 그는 이미 시작이 된 형제회에 들어왔고, 그 안에서 훌륭히 살다가 영광되게 삶을 마쳤다.


32. 우리가 이미 말한 대로, 하느님의 사람인 프란치스코와 두 동료 형제들은 몸을 운신할 곳이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포르치운콜라(Portiuncula)의 성 마리아라고 하는 한 버려진 초라한 성당으로 가서, 그 곳에서 가끔 함께 머무르려고 작은 집을 지었다.

얼마 지나서 에지디오(Egidio)라고 하는 아시시 출신의 한 사람이 그들에게 와서, 크나큰 공경심과 열심한 마음으로 무릎을 꿇고 하느님의 사람에게 자기를 그들의 동료로 받아 줄 것을 청했다. 대단히 성실하고 열심해 보였고, 하느님으로부터 많은 은총을 가져오리라고 여겨져서, 사실 곧 그렇게 되었지만, 하느님의 사람은 그를 아주 기꺼이 받았다. 이 네 형제들은 성령의 헤아릴 수 없는 기쁨과 즐거움으로 뭉쳐져 있었으나, 더 큰 발전을 위해서 서로 헤어져야만 했다.


33. 복되신 프란치스코는 에지디오 형제와 안코나(Ancona)의 마르키아(Marchia)로 갔고, 다른 둘은 다른 지방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마르키아로 가면서 주님 안에서 크나큰 기쁨에 흥겨워하였고, 성인은 크고 맑은 목소리의 불란서말로 하느님께 찬미의 노래를 부르면서, 지존하신 분의 선(善)하심을 찬양하고 또 영광을 드렸다. 그들은 가난 부인의 복음의 밭에서 크나큰 보화를 찾아서 만나기나 한 듯이 기쁨 중에 있었고, 가난 부인의 사랑 때문에 현세적인 모든 것들을 거침없이 그리고 기꺼이 똥으로 여기고 천시했다.

성인이 에지디오 형제에게 말했다: “우리 형제회는 바다에 자기의 그물을 던져서 수많은 물고기를 잡다가, 어린 물고기들은 바다에 도로 놔주고 큰 물고기들만을 골라서 그릇에 담는 어부와 흡사합니다.” 그는 이렇게 형제회의 놀라운 팽창을 예언했다.

하느님의 사람은 백성들에게 아직도 설교를 정식으로 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마을과 성(城)을 지나면서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하느님을 사랑하고 경외토록 권했고, 죄를 뉘우치라고 권했다. 또한 에지디오 형제는 프란치스코가 청중들에게 대단히 훌륭한 영적 권고자이니 프란치스코를 믿으라고 그들에게 권유했다.


34. 사람들이 이들의 말을 듣고 나서 말했다: “이들이 누구인가? 왜 이들이 이런 말을 할까?” 그들이 이런 질문을 던지게 된 것은 당시에 이 땅에서는 하느님에 대한 경외와 사랑이 사라져서 없었고, 회개의 길을 조금도 몰랐으며, 오히려 회개를 미련한 짓으로 여겼기 때문이었다. 당시의 사회가 이렇게 된 것은 온 세상의 육의 유혹과 세상의 탐욕과 생활의 교만, 이 세 가지 그물에 걸려 있어서, 이 세 가지가 그토록 기승을 부렸기 때문이었다.

이 복음적인 사람들에게 대한 의견들이 분분하였다. 어떤 사람은 그들을 틀림없이 바보나 술주정꾼이라고 하였고, 또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말은 바보들이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라고 우겼다. 청중들 중의 한 사람이 말했다: “이 사람들은 주님과 가장 완벽하게 하나가 되어 있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은 틀림없이 정신 이상자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포자기한 모습이기 때문이다. 음식도 겨우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맨발로 돌아다니며, 넝마옷을 입었으니 말이다.”

사람들은 그들의 거룩한 회개의 모습에 두려움을 보였으나, 아직은 그들을 따르려는 사람들이 없었다. 젊은 여자들은 멀리에서 다가오는 그들을 보고는 자기들도 바보나 미친 사람들이 될까 봐서 겁을 먹고 내뺐다. 그들은 그 지방을 돌고 나서 성 마리아 성당으로 돌아왔다.


35. 며칠 뒤에 아시시 사람 세 명이 그들에게 왔는데 사빠띠누스(Sabbatinus), 모리꾸스(Moricus), 까펠라(Capella)의 요한(Iohannes)이 그들이었다. 그들은 복되신 프란치스코에게 자기들을 형제로 받아 줄 것을 간절히 청했다. 프란치스코는 그들을 겸허하고 인자로이 받아들였다.

그들은 마을로 동냥하러 다닐 때 먹을 것을 조금씩밖에 얻지 못하고, 대신에 욕만 실컷 얻어먹었다. 자기들의 재산은 팔아먹고, 다른 사람의 것을 얻어먹으러 다닌다는 비난이었던 것이다. 이래서 그들은 처절한 궁핍을 견디어야만 했다. 그들의 부모나 친척들이 그들을 박해했고, 다른 사람들도 그들을 미친 사람이나 얼간이로 비웃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 아무도 이 집 저 집 돌아다니며 얻어먹기 위해서 자기 재산을 처분하는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느님의 사람이 의견을 여쭈려고 평소에 자주 찾아뵙던 아시시의 주교님께서 이번에도 인자로이 그를 맞으시며 그에게 말씀하셨다: “제가 보기에는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으면, 여러분들의 생활이 매우 어렵고 힘들 것 같습니다.” 이 말에 복되신 프란치스코가 답했다: “주교님, 만약에 저희가 재물을 소유하게 되면, 그 재물을 지키기 위해서 우리들에게 무기가 필요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언쟁과 싸움이 일어나는 법이고,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데에 말할 수 없는 방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희는 있다가 사라지는 어떤 재물들도 이 세상에서 소유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지나가는 모든 것들을 경멸하고, 그 중에서도 특히 돈을 멸시하는 하느님의 종의 이러한 대답에 주교님께서는 무척 기뻐하셨다. 프란치스코는 자기의 모든 규칙 중에서 가난에 가장 큰 역점을 두었고, 형제들에게 조심해서 돈을 피하라고 역설했다.

그는 실제로 형제들에게 남겨 준 최종적인 회칙이 있기 전에도 실험적으로 몇 가지 회칙들을 만들었었다. 그 중의 한 회칙에서 그는 돈을 천시하라고 하였다: “모든 것을 떠난 우리로서 조그마한 하찮은 것 때문에 하늘나라를 잃지 않도록 조심합시다. 만약에 어디서 돈을 보거든, 그 돈을 우리가 밟고 다니는 먼지보다 낫게 여기지 말도록 하십시오.”13)



제 10 장


복되신 프란치스코가 여섯 동료들에게

그들이 세상을 돌아다닐 때 만나게 될 일들을 예언하고

이에 인내하기를 권고함.


36. 성령의 은총에 이미 충만해 있던 프란치스코는 여섯 형제들을 불러 놓고 그들의 장래를 앞서 예언하였다: “지극히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하느님께서는 자비롭게도 우리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많은 이들의 구원을 위해서도 우리를 부르신 우리의 성소를 생각합시다. 그러니 우리는 세상에 나아가 말보다도 모범으로 모든 이들을 권면하여 그들의 죄를 뉘우치도록 해주고, 하느님의 계명들을 기억하게 합시다.” 그러고 나서 그는 덧붙였다: “우리가 보잘것없고 배운 것이 없다고 해서 두려워 말고, 오히려 세상을 이기신 하느님을 신뢰하여 단순하고 확신 있게 회개를 전합시다. 왜냐하면 그분은 여러분을 통해서 그리고 여러분 안에서 성령으로 모든 이들을 권면하시어 당신께로 돌아오게 하시고, 당신의 계명들을 준수케 하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은 성실하고 온유하고 관대한 사람들을 만나게 되어, 그들은 여러분과 여러분이 하는 말을 기쁘게 받아들일 것이나, 반면에 여러분들을 불성실하고, 거만하고, 불경한 사람들을 만나게 되어 그들은 여러분과 여러분들이 하는 말을 비난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모든 일을 인내롭고 겸손되게 견딜 수 있도록 마음의 준비를 하십시오.”

형제들이 이 말을 듣고 나서 겁을 내기 시작했다. 그러자 성인이 그들에게 말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조만간 현명하고 고귀한 사람들이 우리에게 올 것이며, 그들이 우리와 더불어 왕들과 왕자들과 당신의 가족을 온 세상에 늘려 나가시고 키우시는 주님께로 돌아올 것입니다.”


37. 성인은 이 말을 하고 나서 그들에게 강복을 주었고, 하느님의 사람들은 그의 권고들을 마음에 경건히 새기고서 떠나갔다. 그들은 성당이나 십자가를 만나면 머리를 숙여 경건히 기도를 올렸다: “그리스도님, 주님의 거룩하신 십자가로 세상을 구속하셨사오니, 우리는 온 세상에 있는 당신의 모든 성당에서 주님을 흠숭하며 찬미하나이다.” 그들은 십자가와 성당을 보면 어디에서나 항상 그 곳을 하느님이 계신 곳으로 믿었다.

그들을 만나는 사람들은 그들의 생활과 옷차림이나 다른 사람들과는 너무도 판이하게 다르고, 또 마치 숲속에 사는 야만인 같아 보여서 굉장히들 놀랐다. 그들은 도시나 성(城), 저택 그리고 집에 들어갈 때마다14) 모든 이에게 평화를 전했고, 모든 이를 격려하여 하늘과 땅을 만드신 창조주를 사랑하고 경외토록 하고 그분의 계명을 지키도록 하였다.

어떤 이들은 그들의 말을 반겨 들었으나, 어떤 이들은 그와는 반대로 그들을 비웃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들을 질문으로 피곤하게 만들었고, 그들에게 이렇게 물었다: “도대체 어디서 온 사람들이요?” 어떤 이들은 그들이 소속되어 있는 수도회를 물었다. 그런 수많은 질문에 대답하기란 피곤한 일이었으나 그들은 단순하게 자기들은 아시시 출신의 회개자들이라고만 대답했다. 실제로 그들의 공동체는 아직 수도회로 불리지를 않았던 것이다.15)


38. 많은 이들이 그들을 사기꾼이나 정신병자로 몰았고, 그들을 도둑으로 판단하여, 그들이 자기들 집안에서 물건을 몰래 가지고 달아날까 봐 두려웠던 나머지 자기들의 집에 들이기를 꺼려했다. 그들은 수많은 곳에서 수많은 고초와 모욕을 받았으며, 성당의 회랑이나 집들의 처마 밑에서만 따뜻한 영접을 받았다.

당시에 그들 중에 두 형제가16) 피렌체(FIorentia)에 가서, 동네를 돌며 동양을 하였지만, 그들은 처마 밑에 솥이 걸려 있는 집 한 채를 보고는 서로 얼굴을 보면서 말했다: “여기서 하룻밤 쉬어 갈 수 있겠는데?” 그들은 하느님의 사랑으로 그 집 여주인에게 자기들을 그 집에 받아 달라고 청하였으나, 그 여주인은 거절하였다. 이에 그들은 겸손하게 그 밤을 솥 옆에서나마 쉬어 가게 해 달라고 말했다. 그 여자는 이것은 허락했다. 그러나 그녀의 남편이 처마 밑에 있는 그들을 보고는 부인을 불러서 물었다: “당신은 왜 그 불량배들에게 우리 집 처마 밑에 있도록 허락하였오?” 그녀는 대답하기를 그들에게 집에 들어오는 것은 거절했으나 처마 밑에 훔쳐 갈 것이라고는 땔감밖에 없어서 처마 밑에서 자는 것은 허락했노라고 했다. 그녀의 남편은 그녀에게 당부하기를 그 날 밤 날씨는 몹시 추웠지만 그들에게 덮을 담요를 주지 말라고 일렀다. 그는 그들을 도둑이나 불량배로 여겼던 것이다.

그들은 가난 부인의 담요를 덮고 오직 하느님의 열(熱)로만 덥혀져서 솥 옆에서 밤기도 시간까지 짧은 잠을 잤다. 그리고는 밤기도 성무일도를 듣기 위해서 가까운 성당으로 발길을 옮겼다.


39. 날이 밝자 집 여주인이 바로 그 성당에 와서, 계속해서 열심히 기구를 드리고 있는 형제들을 보고는 속으로 말하였다: “남편 말대로 이들이 불량배들이나 도둑들이라면 그들이 저토록 경건히 쉬지 않고 기구를 드리지는 못할 것이다.” 그 여자가 아직도 이런 생각에 빠져 있는데, 마침 그 때 귀도(Guido)라고 하는 사람이 성당 안에 있던 가난한 사람들에게 적선을 하고 있었다.

그 사람이 형제들 앞에 와서 다른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듯이 돈을 주려 하자. 그들이 돈을 거절하여 받기를 원치 않았다. 그러자 그가 형제들에게 말했다: “왜 당신들은 가난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처럼 돈을 받지 않는 거요?” 베르나르도 형제가 대답했다: “우리가 가난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가난이 다른 이들에게는 짐스럽겠지만, 우리들에게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그분의 뜻을 채워 드리면서 가난을 자원해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감탄해마지 않으면서 그들에게 전에 재산을 소유했었는지를 묻고는, 그들이 재산을 많이 가지고 있었지만, 그 모두를 하느님의 사랑으로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대답한 형제는 프란치스코의 첫 제자인 베르나르도 형제였다. 오늘날 우리는 이 형제를 복되신 프란치스코 다음으로 참으로 가장 거룩한 아버지로 여기고 있다. 왜냐하면 그는 평화와 회개의 사신(使臣)인 프란치스코를 받아들이면서 하느님의 거룩한 사람을 최초로 따랐으며, 복음적 완덕에 따라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그것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었고, 그리고 가장 거룩한 가난 안에서 끝 날까지 그것을 견지했기 때문이다.

그 부인은 형제들이 돈을 거절하는 것을 보고는 그들에게 다가가서, 형제들이 좋기만 하다면 자기로서는 형제들을 기꺼이 자기 집의 손님으로 맞이하고 싶노라고 했다. 그들이 겸손하게 답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좋은 뜻을 갚아 주실 것입니다.” 귀도라는 사람은 형제들이 머무를 곳이 없음을 알고는 그들을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가서 말했다: “이 곳이 주님께서 여러분들을 위해서 마련하신 거처입니다. 원하시는 만큼 머물다가 가십시오.” 그들은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면서 그의 집에서 얼마간을 머물며 그들의 말과 모범으로 그로 하여금 주님을 경외하도록 감화시켰다. 이리하여 귀도는 많은 물건들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었다.


40. 귀도만은 그들을 이처럼 후하게 대접했지만, 그들은 어른들에서 아이들에 이르기까지 많은 이들로부터 비난과 모욕의 심한 천대를 받았다. 때때로 사람들은 형제들의 보잘것없는 옷까지 빼앗아 갔다. 이러한 일이 일어나면 하느님의 종들은 벌거벗긴 채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형제들은 복음의 권고에 따라서 옷을 한 벌만 입었었기 때문이며, 그럼에도 자신들에게서 빼앗아 간 옷들을 되돌려 달라고 하지도 않았다. 어쩌다 그들 중의 누가 동정심이 일어서 빼앗아 간 옷들을 되돌려 주려고 하면, 형제들은 그제서 반갑게 그것을 받았을 뿐이었다.

어떤 이는 형제들에게 진흙을 던지기도 했고, 어떤 이는 형제들에게 함께 놀자며 손에 주사위를 쥐어 주기도 하였다. 어떤 이는 형제들의 모자를 등뒤에서 잡아당겨서 형제들을 꼼짝달싹도 못하게 끌고 다녔다.

이와 비슷한 희롱들이 형제들을 천하게 여겼던 사람들에 의해서 저질러졌고, 그들은 형제들을 자기들 마음대로 괴롭혔다. 그들은 배고픔과 목마름과 추위와 헐벗음과 수많은 형극의 고난과 고뇌를 참아 받았다. 그들은 모든 일을 꿋꿋이 견디어 냈고, 복되신 프란치스코가 권고한 대로 인내했으며, 근심하지 않았고, 혼란에 빠지지 않았으며, 그들에게 악행을 저지르는 자들을 절대로 저주하지 않았다. 오히려 복음적 완덕에 이른 사람들처럼, 큰 이득을 보고서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했고, 시험과 환난 안에 있으면서 모든 것을 기쁨으로 여겼고, 이러한 박해를 받으면서도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서 복음의 말씀대로 정성껏 열심히 기도 드렸다.



제 11 장


네 명의 형제들을 받아들임,

그리고 초기 형제들의 서로 간의 열렬한 사랑,

그리고 그들의 열심한 노동과 기도와 완전한 순종.


41. 이제 사람들은 형제들이 박해를 받으면서 얼마만큼 즐거워하는지를 목격하였고, 그들이 기도에 얼마나 정성을 다 바치는지, 또 돈을 거절하고 돈을 지니지 않고 다니며, 서로서로 얼마만큼 사랑하는지를 직접 보았다.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일들을 보고 나서 형제들이야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제자들임을 깨닫게 되었고, 그리고는 마음에 양심의 가책이 일어서, 그들은 형제들에게 다가와서 전에 자기들이 상처와 모욕을 준 일을 용서해 달라고 청하였다. 형제들은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그들을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주께서 당신을 용서하십니다.” 그리고는 그들에게 그들의 구원을 생각해 보라고 유익하게 권유했다.

어떤 이들은 자기들을 형제들의 동료로 받아줄 것을 요구했다. 형제들의 수가 얼마 되지를 않아서 여섯 명 모두가 복되신 프란치스코로부터 새로운 형제들을 받아들일 권위를 위임받았으므로,17) 그들은 새 형제들을 자기들의 공동체에 받아들였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약속한 시기에 그들과 함께 포르치운콜라의 성 마리아 성당으로 갔다. 형제들은 모두 다시 서로 만나게 되자, 그 후로는 악인들에게서 받은 상처를 잊은 채 반가움과 기쁨에 넘쳤다.

그들은 영혼의 원수인 모든 게으름을 자기들에게서 완전히 내쫓으려고 매일 기도와 손 일을 했다. 그들은 한 밤중에 열성적으로 일어나서 한없는 눈물을 흘리고 한숨 지며 매우 열심히 기도했다. 그들은 마치 어머니가 외아들을 보살피듯이 그렇게 서로가 사랑하고 염려했으며, 서로에게 봉사했다. 사랑이 그들의 가슴속에서 강렬하게 타올랐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형제들 중의 그 누구의 몸과 마음을 위해서도 자기들의 목숨을 바치기가 쉬운 듯했다.


42. 어느 날 두 형제가 자신들에게 돌을 던지기 시작하는 미친 사람 하나를 만나게 되었다. 한 형제가 다른 형제에게 돌이 겨냥되는 것을 보고는 그 즉시 자기가 그 돌을 가로막았다. 차라리 그 형제보다는 자기가 돌을 맞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들 서로의 사랑이 이처럼 깊었기에 서로는 서로에게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었다.

형제들은 겸손과 사랑으로 다져져 있어서, 마치 자신들의 아버지나 주인을 공경하듯이 서로 공경을 했으며, 또한 특별한 일을 하기 때문에, 아니면 직책이나 받은 능력 때문에 우대를 받는 형제들은 모두 자신들을 순종에 온전히 내맡겼으며, 윗사람들의 뜻에 항구하게 자신을 맡겼다. 그들은 명령의 옳고 그름을 가리지 않았고, 명을 받은 것은 그것이 어떤 일이건 간에 그것을 하느님의 뜻으로 여겼다. 그러므로 순명을 채우는 일은 그들에게 수월하고 기분 좋은 일이었다. 각자는 스스로를 책하면서도 다른 형제들을 조금도 책하지 않았고, 그렇게 그들은 육신적 사욕을 눌렀다.


43. 어느 형제가 어쩌다 말을 실수해서 그 말이 다른 형제를 괴롭혔을 경우에는, 그는 이 일이 너무도 양심의 가책이 되어 자기의 잘못을 땅에 엎드려 겸손히 고백했고, 그 형제가 그 형제의 발을 자신의 입에 넣을 때까지 안절부절을 못했다. 만일에 마음에 상처를 받은 형제가 상처를 준 형제의 입에 자신의 발을 넣기를 싫어한다고 할 때에, 상처를 준 형제가 고위 성직자이면 상처를 입은 형제에게 순종으로 자신의 입에 그의 발을 넣으라고 했고 상처를 준 사람이 밑의 형제인 경우에는 밑의 형제가 고위 성직 형제에게 그렇게 명령해 달라고 부탁했다. 이렇게 그들은 그들 사이에 있는 모든 원한과 악행이 사라지도록 머리를 짜냈고, 서로간의 완벽한 사랑을 늘 유지하도록 노력했다. 각각의 형제는 악행을 덕행으로 막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서로 도와 가며 살았다.

그들은 어느 것도 자기 것이 되게 하는 소유를 요구하지 않았다. 한 형제에게 책이나 물건이 생기면 사도들의 전통과 실천에 따라서 그들도 공동으로 사용했다.18) 형제들은 참다운 가난 안에 살았고, 그들은 하느님 때문에 받은 물건에 대해서 관대하고 대범했으며, 하느님의 사랑 때문에 물건을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기쁘게 그것을 내주었고, 특히 자신들이 얻어 온 동냥도 가난한 이들과 나누었다.


44. 그들이 길을 걸을 때에, 거지가 그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으로 구걸을 해와도 줄 물건이 없으면 자신들의 초라한 옷을 잘라서 주곤 했다. 어느 때는 모자를 수도복에서 잘라서 떼어 주었고, 어느 때는 복음을 실천하기 위해서 옷소매나 아니면 수도복의 어느 한 귀퉁이를 잘라 내서 주었다: “청하는 누구에게나 주십시오.”  어느 날 한 가난한 사람이 형제들이 가끔 거처하던 포르치운콜라의 천사들의 성 마리아 성당으로 와서 그들에게 동냥을 청했다. 마침 그 곳에 어느 한 형제가 세속에 있을 때 입던 외투 하나가 걸려 있었다. 복되신 프란치스코가 그 형제에게 그 옷을 거지에게 주라고 하자, 그는 즉시 기쁜 마음으로 그렇게 했다. 그 형제가 자신의 옷을 그 가난한 이에게 주면서 보여준 공경심과 열심함 때문에, 그 동냥이 하늘에 가납된 때문이었는지, 여하튼 그 형제는 새로운 기쁨에 젖어 들었다.


45. 세속의 재물을 많이 소유한 부자들이 형제들에게 오면, 형제들은 그들을 기쁘고 반갑게 맞이했으나, 그들을 악행에서 돌아오도록 했으며, 회개로 부르려고 노력했다. 형제들은 장상에게 자기들을 고향에 가지 않도록 하게 해 달라고 청하곤 했는데, 이는 가족의 사랑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고, 친척들과의 교제를 피하기 위한 것이었고, 예언자의 말씀을 실천하기 위한 것이었다: “나는 친척들에게 나그네 되었고, 나의 어머니의 형제들에게는 이방인이 되었네.”19)

형제들은 재물을 탐하지 않았고, 이 세상을 사랑하는 자들이 탐닉해 온 지나가는 것들을 하찮게 여겼기 때문에 가난 안에서 대단히 즐거워할 수 있었다. 특히 그들은 돈을 마치 티끌인양 발로 짓밟아 버렸다. 그리고 그들은 성인의 가르침대로 금 조각을 당나귀의 똥만큼의 무게와 가치밖에 없는 것으로 여겼다. 형제들 사이에는 도무지 슬픔이 설자리가 없어서 주님 안에서 한없이 즐거워했다. 세상과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하느님과의 일치는 더더욱 가까웠다. 그들은 십자가의 길과 정의의 오솔길을 따라가면서, 자기들의 뒤를 따라오는 사람들에게 평평하고 안전한 길을 터 주기 위해서 회개와 복음 실천의 좁은 길을 방해하는 장애물들을 제거해 주었다.



제 12 장


복되신 프란치스코가 교황님께 자신의 계획을 알리고

회칙의 인준을 받기 위해서

열한 명의 동료들과 교황청에 감.


46. 복되신 프란치스코는 주님께서 자기 형제들의 수를 늘려 주시고, 형제들로 하여금 덕행에 정진하도록 해주시는 것을 보았다. 함께 하는 형제들의 수가 벌써 열둘이 되자,20) 열한 명의 형제들에게 그들의 우두머리요 스승이 말했다: “형제들이여, 보십시오. 주님께서 우리의 공동체를 자비롭게도 늘려 주시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어머니이신 거룩한 로마 교회로 가서 교황님께 주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시작하신 일을 보고합시다. 그렇게 해서 주님의 뜻과 명령으로 시작한 일을 이룩하도록 합시다.”

모든 형제들이 스승의 말에 동의하여 그들은 스승과 더불어 로마로 향했다. 스승이 그들에게 말했다: “우리 열두 명 중에서 한 명을 선출하여, 그를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앉혀서, 우리는 그가 이끄는 곳으로 가고, 그가 묵고자 하는 곳에서 묵도록 합시다.” 그들은 이 직책에 프란치스코 다음의 베르나르도 형제를 뽑았고, 그들은 스승이 말한 대로 베르나르도의 말을 따랐다. 그들은 기뻐하며 여행길에 올랐고, 하느님의 말씀에 대하여 대화를 나누었다. 그들은 하느님의 찬미와 영광과 영혼에 유익한 말 외에는 감히 말하지 않았고, 기도에 자주 전념했다. 그리고 주께서는 그들에게 머무를 곳을 언제나 마련해 주셨고, 필요한 것을 장만해 주셨다.


47. 그들이 로마에 도착해서 아시시의 주교를 만났다. 각별한 애정으로 복되신 프란치스코와 모든 형제들을 우러렀던 주교는 그들을 극진히 환대했다. 형제들이 그 곳에 온 이유를 몰랐던 주교는 처음에는 꺼림찍해 했다. 그들이 혹시나 주께서 자신들을 통해서 놀라우신 일을 시작하신 고향을 떠나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하여 두려웠던 것이다. 주교는 자기 교구 안에 생활과 행실로 자신에게 크나큰 만족을 가져다주는 이 장한 사람들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대단히 행복해 했었다. 그러나 주교는 그들이 그 곳에 온 사연과 그들이 마음에 품고 있는 바를 듣고 나서야 매우 기뻐하며, 도움과 조언으로 그들을 도왔다.

아시시의 주교는 하느님의 종들을 무척이나 사랑하고, 하느님의 은총에 진정으로 넘쳐 있는 성 바오로의 요한 주교로 알려져 있는 사비나(Sabina)의 추기경을 잘 알고 있었다. 아시시의 주교가 복되신 프란치스코와 그 형제들의 생활에 대해서 전에 이미 그 추기경에게 언질한 바가 있어서, 추기경은 하느님의 사람과 그 형제들을 만나 보기를 원했다.

추기경은 그들이 로마에 있다는 말을 듣고, 사람을 보내어 그들을 오도록 해서 크나큰 존경심과 사랑으로 그들을 맞이하였다.


48. 그들은 며칠 간을 추기경과 함께 보냈다. 추기경은 그들의 거룩한 말과 표양에 감동된 나머지, 그들의 일이 자기가 듣던 바와 일치함을 깨닫고는 그들에게 자기를 위해서 기도해 줄 것을 겸손하고 진실하게 부탁했고, 특별한 청으로 자신을 그들 형제들 중의 하나로 여겨 주기를 바랐다. 끝으로 추기경은 복되신 프란치스코에게 로마에 온 이유를 묻고 나서, 그들의 의중을 듣고는 교황청 안에서 그들을 위하여 힘써 주겠다고 하였다.

추기경은 교황청으로 가서 교황 인노첸시오 3세께 아뢰었다: “저는 거룩한 복음의 양식대로 살기를 바라고, 또 모든 일에서 복음적 완덕을 준수하기를 바라는 가장 완전한 사람을 보았습니다. 확실하건대, 우리 주께서는 이 사람을 통해서 온 세상의 거룩한 교회의 믿음을 쇄신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이 말을 듣고 교황님은 매우 놀라시어, 추기경에게 복된 프란치스코를 당신께 데려오라고 명하셨다.

49. 다음날 하느님의 종은 추기경의 안내로 교황님 앞에 서게 되었고, 하느님의 종은 자기의 모든 거룩한 의향을 교황님께 숨김없이 열어 보였다. 남달리 깊은 사려의 은총을 받으신 교황님께서는 성인의 청에 당연한 동의를 보이신 다음에, 마침내 그와 그의 형제들에게 많은 것에 대해서 훈계하시고 축복하시며 말씀하셨다: “형제들이여, 주님과 함께 떠나십시오. 그리고 그분께서 여러분에게 영감을 주시는 대로 모든 사람들에게 회개를 선포하십시오. 그리고 나서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여러분의 수효를 늘려 주시고 은총을 풍성히 내려 주시면, 우리에게 보고하도록 하십시오. 그러면 우리는 여러분들에게 더 많은 것을 허락하여 더 큰 일들을 더 안전하게 맡길 것입니다.”

교황님께서는 형제들에게 이미 내린 허락과 앞으로 내릴 허락이 하느님의 뜻과 일치하는 지를 명확히 알고 싶으셔서, 성인이 물러가기 전에 성인과 그 동료들에게 말씀하셨다: “나의 아들들이여, 여러분의 생활은 우리들이 보기에 힘겹고 어려울 듯합니다. 여러분들의 열성을 믿고, 여러분들을 믿어 의심치는 않지만, 우리로서는 장래의 여러분을 따를 사람들까지 생각해야 합니다. 그들에게는 이 길이 너무 어렵게 느껴질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교황님께서는 그들의 항구한 믿음을 볼 수 있으셨고, 그들의 희망의 닻이 그리스도의 기둥에만 내려져 있음을 알 수 있으셨고, 그들의 열정도 식지 않으리라는 것도 알 수 있으셨다. 그리하여 복되신 프란치스코에게 말씀하셨다: “아들이여, 가서 하느님께 당신이 나에게 요구하는 허락이 그분의 뜻에서 나온 것인지를 당신께 제시해 주십사고 기도하십시오.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알게 되면 당신의 청을 허락할 것입니다.”


50. 하느님의 성인이 교황님의 명에 따라 기도를 드리자, 하느님께서 그에게 영적으로 비유의 말씀을 하셨다: “어느 한 가난하고 아름다운 처녀가 사막에서 살았다. 어떤 왕이 그의 미모에 사로잡혀서 그녀를 자기의 신부로 맞아들였다. 왜냐하면 왕은 그녀가 멋진 왕자들을 낳아 주리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약혼식이 이루어졌고, 결혼식이 치러졌으며, 많은 아들들이 태어났다. 아들들이 장성하자, 어머니가 그들에게 말했다: ‘얘들아, 부끄러워 말아라, 너희 아버지는 임금이시다. 그러니 궁정으로 가거라. 그분께서 너희에게 필요한 것을 모두 주실 것이다.’ 이리하여 그들은 임금께 갔고, 임금은 이 아이들을 보자 그들의 아름다움에 눈이 휘둥그래졌고, 그들의 모습에서 자신과 흡사함을 보았다. 그리고는 그가 말했다: ‘너희는 누구의 아들이냐?’

그들은 사막에 살고 있는 한 가난한 부인의 아들들이라고 대답했다: 이 말에 임금은 그들을 반가이 껴안고 말했다: ‘조금도 두려워할 것 없다. 너희들은 나의 아들들이다. 내가 얼마나 많은 한갓 나그네들까지도 나의 식탁에서 기르고 있는지 보려무나. 하물며 너희는 나의 법적인 아들들이니, 훨씬 더 많은 권리를 가지고 있다.’ 임금이 그들을 덥석 껴안고 어명을 내려, 사막에 사는 부인과 더불어 자기가 낳은 아들 모두를 왕궁으로 보내어 왕궁에서 보살핌을 받도록 하라고 일렀다.”

복되신 프란치스코가 기도하는 동안에 이 환상이 그에게 나타났고, 거룩한 사람은 바로 그 가난한 부인을 자기 자신으로 이해했다.


51. 그는 기도를 마친 후에 재차 교황님을 알현하여 주께서 자신에게 보여주신 환시의 예(例)를 차근차근히 알려 드리고 이렇게 말씀드렸다: “교황님, 바로 제가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 사랑하시어, 당신의 자비로 영화롭게 하여 주신 가난한 부인입니다. 제가 바로 법적인 왕자들을 낳아 드린 가난한 부인입니다. 왕 중의 왕께서 손수 저에게 저에게서 태어난 아들들  모두를 건사하시겠다고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그분은 낯선 이방인들도 돌보고 계시기에 당신의 법적인 아들에게는 당연히 그래야 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죄인들의 자식들도 사랑하시기 때문에 죄인들에게도 지상의 좋은 것들을 주시는데, 하물며 당연히 보살핌을 받을 만한 복음적인 사람들을 두고 서 있겠습니까?”

이 말을 듣고 교황님께서는 심히 놀라셨다. 왜냐하면 복되신 프란치스코가 도착하기 전에, 이 볼품 없고 왜소한 수도자가, 라테라노(Laterano)의 성 요한 성당이 무너져 내리는데, 그의 등을 성당 밑으로 밀어 넣어서 성당을 떠받치는 환시를 보았기 때문이다. 교황님께서는 깨어나셔서 의아스러워 하셨고 놀라워 하셨다. 신중하시고 슬기로우신 교황님께서는 이 환시를 숙고하셨다. 그리고는 며칠이 안 되서 복되신 프란치스코가 교황님께 와서, 이미 설명을 드린 대로, 교황님께 방문한 목적을 아뢰었던 것이다. 그는 온 힘을 기울여 완벽하게 실천한 성서의 설교에서 따온, 짧고 단순한 말들로 되어 있는21) 자기가 쓴 회칙을 인준해 줄 것을 청했다. 이런 상황을 마치 경험한 것처럼 생생하게 보신 교황님께서는 프란치스코를 보시자 그에게서 하느님을 섬겨서 타오르는 불꽃같은 사랑을 알아보셨다. 그리고는 마음속으로 라테라노 성당에 관한 환시와 하느님의 사람의 말을 연결시켜 보고는 당신 혼자말로 말씀하셨다: “이 사람이야말로 그를 통해서 하느님의 교회가 지탱되고 유지될 경건하고 거룩한 사람이다.”

그리고 나서 교황님께서는 프란치스코를 포옹하시고, 그가 쓴 회칙에 동의하셨으며, 그와 그의 형제들에게 모든 사람들에게 회개를 선포할 허락을 주셨다. 그 허락은 형제들이 먼저 복되신 프란치스코로부터 설교할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조건을 붙였다. 교황님께서는 후에 추기경 회의에서도 이에 동의하셨다.


52. 복되신 프란치스코는 교황님의 허락을 받고 나서, 하느님께 감사를 드렸다. 그리고 땅에 무릎을 꿇고 교황님께 순종과 존경을 겸손하고 정성되게 약속했다. 교황님의 명령에 따라 다른 형제들도 복되신 프란치스코에게 순종과 존경을 서약했다. 교황님의 강복을 받고 나서, 형제들 모두가 사도들의 무덤을 방문하였고, 앞서 말한 추기경님께서 열두 명 모두가 성직계에 오르기를 바라면서, 복되신 프란치스코와 다른 열한 명의 형제들의 머리를 동그랗게 깎아주어 삭발례(削髮禮)를 시키셨다.


53. 하느님의 종은 열한 명의 형제들과 로마를 떠나 세상으로 돌아가면서, 자기의 뜻이 그렇게 쉽게 성취된 것을 대단히 놀라워했다. 그리고 거룩한 계시로 장래에 일어날 일들을 그에게 미리 보여주신 구세주께 대한 희망과 신뢰가 내적으로 나날이 커 갔다. 그의 뜻이 성취되기 전 어느 날 밤 그가 깊은 잠에 들었을 때, 자기가 어떤 길을 걷고 있는 듯하였다. 길가에는 대단히 크고 아름답고 튼튼하고 우람한 나무가 있었다. 그는 나무 가까이 간 다음에 나무 밑에 서서 그 나무의 크기와 아름다움에 넋을 잃고 있었는데, 갑자기 성인 자신이 그 높이만큼 커져서 나무의 꼭대기를 만질 수가 있었다. 그래서 그는 그 나무를 눌러서 간단히 땅에 닿게 할 수가 있었다. 이 세상에서 제일 높고 제일 아름답고 제일 힘이 있으신 인노첸시오 교황님께서 그의 청원과 뜻에 자비롭게도 몸소 몸을 굽히셨으니 이 일이 실제로 일어난 것이다.



제 13 장


복되신 프란치스코의 호소력 있는 설교. 

그가 머무른 첫 번째 장소와,

그 곳에서의 형제들의 삶과 그 곳을 떠난 경위.


54. 이 때부터 복되신 프란치스코는 도시와 성(城)을 두루 다니며22) 보다 많이 보다 완전한 설교를 하기 시작했는데, 인간의 지혜로 만들어진 말을 쓰지 않았고 성령의 가르침과 힘으로 하느님의 나라를 신념 있게 전했다. 그는 사도적 권위로 강해진 진실한 선포자였으므로, 그는 간교하게 아첨하는 감언이나 구슬리는 말투를 쓰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가 다른 사람에게 권하는 말은 자기에게 먼저 권해서 실천한 것들이었으며, 따라서 확신에 차서 진리를 말했기 때문이었다. 딴 세상 사람으로만 비쳐졌던 그를 보려고, 또 그의 말을 들으려고 달려갔던 유식하고 교양 있는 많은 사람들이 인간의 스승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적이 없는 그의 설교의 힘과 진리에 경탄했다. 귀족이나 평민이나 성직자나 평신도나 할 것 없이 많은 사람들이 성령의 이끄심에 불이 붙었고, 복된 프란치스코의 발자취를 따르려 했으며, 그들은 세상 걱정과 세상의 화려함을 버리고서 그의 지도 아래 같은 생활을 하게 되었다.


55. 복되신 사부님은 아들들과 함께 아시시에서 가까운 리보토르토(Rivotorto)의 아무도 돌보지 않는 버려진 헛간에서 살았다. 그런데 그 곳은 협소해서 그들이 앉거나 잠시 쉴 수가 없었다. 그들은 빵이 부족하여 굶주림에 시달리다가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구걸해서 얻은 순무만 먹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느님의 사람은 형제들의 이름을 헛간의 들보에 써 놓아서, 만약에 누가 쉬고 싶다거나 기도하고 싶으면 자기 자리를 알 수 있었으며, 장소가 협소해서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마음의 침묵을 흔들어 놓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이 그 곳에 살고 있을 때, 어느 날 어떤 농부가 헛간에서 묵으려고 당나귀를 데리고 그 곳에 왔다. 형제들의 반대에 부딪힐까 봐서 그는 곧바로 당나귀를 안으로 몰고 들어와서 자기 당나귀에게 말했다: “어서 들어가, 어서 들어가, 우리가 살기 썩 좋은 곳이다.”23) 거룩한 사부님은 이 말을 듣고 그 농부의 속셈을 알아차리고는 마음이 언짢았다. 왜냐하면 그 당나귀가 몰고 온 큰 소란이 그 때 침묵과 기도로 고요함에 빠져 있던 모든 형제들을 웅성거리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느님의 사람이 형제들을 향해서 말했다: “형제들이여, 저는 하느님께서 당나귀에게 거처를 마련해 주고, 사람을 자주 만나라고 우리를 이 곳에 부르신 것이 아니라, 주로 기도와 감사 생활을 하고 때때로 사람들에게 구원의 길을 선포하고, 구원에 도움이 되는 상담을 하라고 부르신 것으로 알고 있다.” 그들은 그 헛간을 떠나서24) 포르치운콜라의 천사의 성 마리아 성당으로 이사했고, 그 헛간은 나중에 나환자들이 사용하게 되었다. 그들이 그 성당을 받기 전에 그들이 함께 살았던 작은 거처가 성당 가까이에 있었던 것이다.

56. 그러나 얼마 후에 복되신 프란치스코는 하느님의 뜻과 영감으로 아시시 가까이 있는 수바시오(Subasio) 산의 성  분도 수도원의 원장으로부터 이 곳을 겸손 되이 받았다. 성인은 각별하게 정성을 다하여 총봉사자와 모든 형제들에게 이 곳은 세상의 어떤 성당이나 어떤 장소보다도 영화로우신 동정녀로부터 사랑을 받도록 해야 한다고 일렀다. 이 곳에 대한 성인의 찬사와 애정은 당시에 어떤 한 형제가 세속에 있을 때 본 환시로 더욱 커졌다. 복되신 프란치스코는 그와 함께 있는 동안에 그를 남달리 사랑했고 그를 각별한 친구처럼 대했었다. 그는 후에 수도원에 들어와서 신실하게 하느님을 섬기게 되었지만, 그는 세속에 있을 때에도 하느님을 굳건히 섬기기를 바랐다. 그는 수많은 눈먼 세속 사람들에 관한 환시를 보았다. 그 사람들은 포르치운콜라의 성 마리아 성당의 둘레를 무릎 꿇고 돌면서 두 손을 모으고, 얼굴은 하늘을 향한 채, 목이 메인 큰 목소리로 하느님께 당신의 자비로 빛을 볼 수 있도록 해줍시사고 울부짖었다. 그들이 기도하는 동안 큰 빛이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그들 위에 머물며 치유의 빛을 뿌렸던 것이다. 그 형제는 환시에서 깨어나 하느님을 더 확고히 섬길 것을 약속드리고, 며칠이 지나서 세상의 화려함을 철저히 무시하고 수도원으로 들어왔고, 그 곳에 머무르면서 하느님을 겸허하게 그리고 열심히 섬기며 살았다.






제 14 장


포르치운콜라의 성 마리아 성당에서

일 년에 두 번씩 있었던 총회.


57. 복되신 프란치스코는 성 분도회 원장으로부터 성 마리아 성당을 기증 받은 후에, 성령강림절과 그리고 성 미카엘 대천사 축일이 들어 있는 구월에 일 년에 두 번에 걸쳐, 그 곳에서 총회를 가지기로 결정하였다. 모든 형제들은 성령강림절에 성 마리아 성당에 모여서 어떻게 하면 회칙을 더 완전하게 지킬 수 있는지에 관해서 토론을 벌였고, 프란치스코는 형제들을 각 관구에 파견하면서 어떤 형제들에게는 사람들에게 설교를 해도 되는 직책을 부여하였고, 또 어떤 형제들에게는 각 관구 안에서 직책을 임명받도록 하였다. 그는 자신이 하는 모든 말을 사랑과 열성으로 자신의 생활 안에서 몸소 실천하여 보여주었다. 그는 거룩한 교회의 고위 성직자들과 사제들을 공경하였고, 노인들과 귀족들과 부자들을 존경했지만, 누구보다도 가난한 이들을 가까이 사랑했고, 마음속으로 그들을 동정했으며, 자기 자신을 모든 이들의 밑에 두었다. 그는 모든 형제들보다 높은 자리에 있었지만, 함께 살고 있는 형제 하나를 원장과 주인으로 모셨으며, 모든 교만의 기회를 자기에게서 없애기 위해서 겸허하고 열성적으로 그에게 순종하였다. 그는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머리를 땅에 닿을 정도로 숙였고, 이리하여 그는 언젠가는 하느님의 면전에서 하느님의 성인들과 뽑힌 이들 중에서도 들어 높임을 받게 될 것이었다. 그는 형제들에게 굳건히 지키기로 약속한 거룩한 복음과 회칙을 성실하게 지키도록 권고했다. 성무(聖務)와 교회의 서품에 크나큰 존경과 열성을 보이라 했고, 미사에 열심히 참석하고, 주님의 성체를 가장 경건히 흠숭하라고 했다. 그는 형제들로 하여금 지극히 거룩하고 경건한 성사를 집행하는 추기경 사제들을 각별히 존경하기를 바랐다. 그래서 형제들은 어디서나 사제들을 만나면 그들에게 고개를 숙여 절을 하고, 그들의 손에 친구를 할 것이며,  말을 탄 사제들을 만나면, 그들의 권위를 존경해서 그들의 손만이 아니라 그들이 탄 말의 발굽에도 친구하기를 바랐다.


58. 복되신 프란치스코는 형제들에게 당부하기를 어떤 사람도 판단하지 말고, 호화롭게 사는 사람들이나 화려하고 호화로운 옷을 입은 사치스런 사람도 비판하지 말라고 하였다: 왜냐하면 우리의 하느님은 그들의 하느님이기도 해서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당신께 부르실 수 있고, 그들을 불러서 의화(義化)시키실 수도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또한 형제들이 그러한 사람들을 형제와 주인으로 존경할 것을 원했다. 왜냐하면 그들도 같은 창조주로부터 지음을 받은 형제들이고, 또한 선한 사람들에게 육신에 필요한 것을 장만해 주면서 그들을 회개하도록 도와주는 주인들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어서 그는 말했다: “형제들의 처신은 남들이 형제들을 보고 형제들의 말을 들을 적마다 하늘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고, 하느님을 경건하게 찬미하게끔 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의 크나큰 소원은 자기와 형제들에게 이러한 착한 행실이 많아서, 그것이 하느님께 영광과 찬미가 되게 하는 것이었다. 그는 형제들에게 말했다: “형제들이 말로 평화를 전할 때에는 형제들의 마음에 한층 더 그러한 평화가 있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도 여러분들로 해서 분노하지 않고 또 불미스러운 이야기가 생기지 않도록 합시다. 오히려 그들을 여러분의 온화한 모습으로 평화와 자비와 화목으로 이끌도록 하십시오. 우리는 상처를 입은 사람들을 낫게 하고, 갈라져 있는 사람들을 하나로 묶고, 길을 잃은 사람들을 집으로 데려오라는 부름을 받았습니다. 우리 눈에 악마의 자녀로 보이는 많은 사람들이 오히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것입니다.”


59. 반면에 자비로우신 사부님은 과도하게 밤샘을 하고 단식을 하고 육신적 고행을 하여 기력이 쇠하도록 너무 엄격하게 자신들을 다루는 형제들을 질책하였다. 어떤 형제들은 자기 몸에서 나오는 모든 충동을 억누르려고 몸에 너무 심하게 고통을 가한 나머지, 마치 자신들을 증오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느님의 사람은 그러한 형제들을 알아들을 수 있도록 너그럽게 꾸짖었으며, 그들의 상처를 낫게 하는 붕대로 싸매 주면서 그들의 과한 고행을 금지시켰다.

총회에 모이는 형제들 중에 아무도 세속 일을 이야기하려는 형제가 없었고, 오히려 그들은 한결같이 거룩한 교부들의 삶을 이야기했고,25) 어떻게 하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더 잘, 그리고 더 완전하게 받을 수 있을까 하는 이야기만을 이야기했다. 총회에 참석한 형제들 중의 어느 형제가 유혹이나 고민에 빠져 있으면, 그 형제는 복되신 프란치스코의 감미롭고 뜨거운 말을 듣고 복되신 프란치스코의 회개만 보면, 신기하게도 유혹에서 풀려났고, 고민에서 해방되었다. 그는 그들을 동정한 나머지 진정 판정관으로서 말하지 않았고, 자녀들에게 애정 깊은 아버지로서 그리고 환자들을 대하는 다정한 의사로서 말했다. 그는 앓고 있는 형제와 더불어 고통스러워했고, 고난을 당하는 형제와 더불어 신음했다. 그러는 중에도 그는 마땅히 죄를 저지른 형제를 책망하였고, 고집 세고 거역을 잘 하는 형제들은 벌을 주어 눌렀다.

그는 총회가 끝나면 모든 형제들에게 강복을 주었고, 각 형제들에게 그들이 가야 할 관구를 정해 주었다. 하느님의 영을 가진 형제나 설교에 적합한 언변을 가진 형제에게는 그 형제가 성직 형제이건 평형제이건 관계없이26) 누구에게나 설교할 수 있는 허락을 내렸다. 총회에 참석한 모든 형제들은 그의 강복을 받고서 매우 큰 기쁨을 안게 되어 성무일도서(聖務日禱書)를 제외하고는 여행에 필요한 물건들을 아무것도 지니지 않은 채 길을 떠나, 순례자들이나 나그네처럼 세상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사제를 만날 때나, 부자를 만날 때나, 가난한 사람을 만날 때나 착한 사람에게나 나쁜 사람에게나, 누구를 막론하고 머리를 숙여 공손히 인사를 하여 그들에게 존경심을 보였다. 그들은 날이 저물어 거처를 찾아야 할 경우에는 세속의 평신도들에게 가기보다는 즐겨 사제들에게로 갔다.


60. 만일 사제들의 집에서 묵을 수 없게 될 경우에는, 형제들은 영적이며 하느님을 경외할 줄 아는 사람들의 집에 묵도록 하였다. 이러한 유숙은 형제들이 방문하는 도시나 마을에 사는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하느님께 형제들을 위해서 거처를 마련해 주도록 계시하실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렇게 형제들은 형제들을 위해서 집이 세워질 때까지 은인들의 집에 묵었다.

하느님께서는 젊은이나 노인의 가슴에 말씀이 아주 날카롭게 파고들도록 하기 위해서, 형제들에게 그 때그 때 필요한 말씀과 영을 주셨고, 이리하여 많은 사람들이 부모를 떠났고, 자기들이 소유한 재물을 떠나서 형제들을 따랐고 형제들이 입는 옷을 입었다. 사실상 당시에는 도처에 이별의 칼이 내려와서, 젊은이들은 죄의 찌꺼기에 싸여 있는 부모를 떠나서 수도원에 들어갔다. 형제들이 지원자를 수도원에 받아들일 때에는, 지원자를 프란치스코에게 데리고 갔으며, 지원자는 프란치스코의 손에서 수도복을 공손하고도 경건한 마음으로 받았다.

남자만이 이렇게 수도원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많은 처녀들과 과부들도 형제들의 설교에 마음이 뉘우쳐졌다. 그들은 회개 생활을 하기 위하여 형제들의 의견을 듣고 나서 각 마을과 성에 있는 수녀원의27) 문을 두드렸다. 이들을 위해서 형제 중의 하나가 방문하고 순시하는 직책에 임명되었다.28)  마찬가지로 혼인법에 묶여서 헤어질 수 없는 결혼한 남자나 여자는 형제들로부터 적절한 의견을 듣고 나서 자기들의 집에서 엄격한 회개 생활에 들어갔다.29) 이렇게 해서 거룩한 성삼(聖三)을 지극히 공경하는 복되신 프란치스코를 통해서 하느님의 교회가 세 수도회를30) 매개로 하여 쇄신되었다. 이 일은 그가 전에 세 개의 성당을31) 수리하는 것으로써 예견된 바 있었다. 세 개의 수도회는 각각 합당한 시기에 교황님으로부터 인준을 받았다.



제 15 장


형제회의 첫 보호자 추기경이었던

요한 추기경의 사망과

오스띠아의 주교인 우골리노(Ugolino) 추기경이

그 자리를 대신하여

형제회의 아버지와 보호자가 됨.


61. 공경하올 스승인 성 바오로의 요한 추기경은 자주 복되신 프란치스코를 도우며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추기경은 다른 모든 추기경들 앞에서 성인과 형제들이 이루어 가는 생활과 성업(聖業)을 칭찬하였다. 이리하여 다른 추기경들도 하느님의 사람과 그 형제들을 사랑하게 된 나머지, 추기경들마다 몇몇 형제들을 자기들 집에 데리고 있기를 바랐다. 특별히 형제들에게 일을 시켜서 봉사를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추기경들을 열심케 만드는 형제들의 거룩함과 형제들에 대한 그들의 존경심 때문이었다.

성 바오로의 요한 추기경의 서거에32) 이어, 주께서는 추기경들 중에서 당시에 오스띠아(Ostia)의 주교였던 우골리노 추기경을 이끌어, 복되신 프란치스코와 그 형제들을 매우 사랑하고 보호하고 후원하도록 하셨다. 그는 형제들을 실로 뜨겁게 사랑했고, 마치 모든 이의 아버지인 것처럼, 친자식들을 자연스럽게 사랑하는 친아버지의 사랑 이상의 것을 펼쳐 보였으며, 이러한 사랑으로 해서 추기경은 하느님의 사람과 그 형제들을 주님 안에서 영적으로 사랑하고 후원하였다. 복되신 프란치스코는 추기경의 고매한 인품을 소문으로 들었고, 실제로 그 소문은 명실상부(名實相符)한 것이었지만, 형제들과 함께 그에게 갔다. 추기경은 형제들을 반겨 맞으며 말했다: “형제들에게 저를 바칩니다. 그리고 형제들이 원하기만 한다면 형제들을 돕고 충고하고 보호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으로 형제들의 기도 중에 저를 기억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그러자 복되신 프란치스코는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며 추기경에게 말했다: “추기경님, 기쁜 마음으로 추기경님을 우리 수도원의 아버지요 보호자로 모시겠습니다. 그리고 모든 형제들로 하여금 언제나 추기경님을 위해서 기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나서 프란치스코는 추기경에게 성령강림절에 열리는 형제들의 총회에 참석하시도록 청했다. 추기경은 즉시 이를 기꺼이 받아들이시어 그 후로는 해마다 형제들의 모임에 참석했다.

그가 총회에 올 때, 총회에 모이는 모든 형제들이 행렬을 지어 걸어서 그를 마중 나갔다. 그러면 그도 마중 나오는 형제들을 보고서는 말에서 내려 성 마리아 성당까지 걸어서 갔다. 그리고 그는 하느님의 종 프란치스코가 복음을 낭독하는 미사를 집전하고 강론을 했다.



제 16 장


첫 봉사자들의 선출,

그리고 그들이 세상에 파견됨.


62. 형제회가 시작된 지 십일 년이 지나니, 형제들의 수효가 늘어났고, 그들의 공로도 커 갔다. 어떤 이들은 봉사자로 선출되었고, 이들은 카톨릭 신앙을 받들고 보존하는 거의 모든 나라의 방방곡곡에 다른 형제들과 함께 파견되었다.

어떤 지방에서는 형제들을 받아들이기는 하였으나, 형제들이 집을 짓고 자리를 잡는 일은 허락치 않았다. 어떤 지방에서는 심지어는 형제들이 주민들로부터 이교도 취급을 당한 나머지 쫓겨나기도 했다. 이러한 일들은 교황 인노첸시오 3세께서 형제회 및 형제들의 회칙을 인정하기는 하였으나 서면(書面)으로 인준해 주지 않은 데서 기인하는 일들이었다. 이러한 결격 사항 때문에 형제들은 성직자들이나 평신도들로부터 많은 시련을 받아야만 했다. 이러한 이유로 형제들은 여러 지방에서 이리저리 쫓겨다녔다. 이러한 고통과 번민에 처해 있는데다가 도둑들에게 몰리기까지 하여서 옷을 벗기우고 강탈을 당하고 폭행을 당했다. 그리고는 크나큰 쓰라림을 가슴에 안은 채 복되신 프란치스코에게 돌아왔다. 형제들은 알프스 넘어 독일(Alemania) 지방과 헝가리(Ungaria) 지방과 여러 지방에서 이러한 일들을 당했다.

이러한 소식들이 오스티아의 추기경의 귀에 전해지자, 그는 복되신 프란치스코를 불러 그와 함께 호노리오(Honorio) 교황님께 갔다. 그 때는 이미 인노첸시오(Innocentio) 교황께서 타계하신 후였다.33) 추기경의 청에 의해서 호노리오 교황님께서는 복되신 프란치스코가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서 작성한, 칙서가 첨가된 다른 회칙을 공식적으로 인준하셨다.34) 인준받은 회칙에 총회와 총회 사이의 기간을 늘리도록 되어 있었다. 아주 멀리 떨어진 지방에서 사는 형제들이 오가는 수고를 덜기 위한 것이었다.


63. 복되신 프란치스코는 호노리오 교황님께 형제회의 아버지가 되어 주십사 하는 청을 드리기로 했고, 또한 거룩한 로마 교회의 추기경 한 분, 즉 오스티아(Ostia)의 주교에게는 자신들의 문제들을 가지고 달려갈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사 하는 청을 드리기로 했다.

복되신 프란치스코가 추기경을 모실 수 있었고, 자기 수도회를 로마 교회에 맡길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한 환시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환시에서 다리에 털이 많이 달린 작고 검은 암탉 한 마리를 보았다. 그리고 그 암탉의 발은 집비둘기의 발 같아 보였다. 그런데 이 암탉은 병아리들이 너무 많아서 두 날개로는 도저히 그것들을 다 모아들여 품을 수가 없어서, 병아리들은 날개 밖에서 제멋대로 돌아다니고 있었다. 프란치스코는 잠에서 깨어나 이 환시를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즉시 성령을 통해서 자기가 상징적으로 그 암탉으로 그려졌음을 깨닫고 말하였다: “내가 바로 그 암탉과 같다. 나도 원래 작고 살갗이 검다. 반면에 나는 비둘기처럼 단순해야 하고, 덕의 날개인 사랑으로 하늘까지 날아야 한다. 주님께서 당신의 자비로 나에게 자녀들을 주셨고, 앞으로도 내 힘으로는 보호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자녀들을 주실 것이다. 그러니 그들을 거룩한 교회에 데리고 가서, 교회가 그 날개의 그늘 아래에 그들을 보호하고 기르도록 맡겨야겠다.”


64. 그는 이 환시를 보고 나서 몇 년이 지난 후에 로마로 가서, 오스티아의 주교를 만났다. 주교는 프란치스코에게 다음날 아침에 교황청으로 함께 가자고 했다. 왜냐하면 주교는 프란치스코가 직접 교황님과 추기경들에게 말씀을 드리는 것이 좋겠고, 직접 정성과 애정 어린 마음으로 자기 수도회를 그분들에게 맡기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복되신 프란치스코는 자기는 순진하기만 하여 아는 것이 없다며 이를 사양하였지만, 우선은 주교와 동행하여 갈 수밖에 없었다.

복되신 프란치스코가 교황님과 추기경님들 앞에 나타나자 그분들은 큰 기쁨에 싸이는 듯했다. 그는 일어나서 그분들에게 성령께서 가르쳐 주신 은총의 힘으로 말씀을 드렸다. 그는 말씀을 끝내고 나서 자기의 수도회를 교황님과 모든 추기경들에게 맡기겠다고 하였다. 교황님과 추기경들은 그의 말에서 깨달은 바가 대단히 많았고, 또 감동되어 마음속 깊이 그의 수도회를 보다 큰 애정으로 사랑하게 되었다.


65. 복되신 프란치스코가 교황님께 아뢰었다: “나의 주인이시여, 하느님의 교회를 위하여 깨어 돌보시는 교황님의 항구하신 염려와 수고를 볼 때 송구함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아울러 우리의 작은 형제회에 써주시는 높은 관심과 염려에 부끄럽기 한량없습니다. 열심한 수많은 귀족들과 부자들과 다른 수도자들이 교황님을 뵈러 감히 이 자리에 오지 못할진대, 하물며 수도자들 중에서 가장 비천하고 무시를 받아 마땅하여 교황님과 추기경님들에게 감히 접근할 자격이 없을 뿐만 아니라, 감히 문에 발을 디딜 수도 없으며, 그리스도인들의 권한의 핵심인 이 자리를 침범할 수도 없는 저로서, 이 자리에 서 있음은 그저 황공하여 낯 둘 곳이 없을 뿐이옵니다. 저는 외람 되게 성하께 이 오스띠아의 주교님을 교황님을 대신하는 아버지로 저희에게 관대히 허락하시기를 청합니다. 교황님의 높으신 권위가 늘 보장되는 가운데, 형제들이 필요할 때마다 이분께 달려갈 수 있을 것입니다.” 교황님은 그의 이러한 청에 뜻을 같이 하시어, 오스티아의 주교를 형제회의 권위 있는 보호자로 지명하심으로써 복되신 프란치스코의 청을 수락하셨다.


66. 오스띠아의 주교는 교황님으로부터 이 임명을 받고 나서 훌륭한 보호자로서 형제들을 옹호하기 위하여 형제들을 위하여 손을 쓰기 시작하였다. 형제에게 박해를 가했던 많은 고위 성직자들에게 서한을 띄워 더 이상 형제들을 거스르지 말라고 하였다. 그는 고위 성직자들에게 형제들을 교황청의 권위 있는 정식인가를 받은 훌륭하고 거룩한 수도자들로 여기어, 자기들의 교구에서 설교하고 거주할 수 있도록 돕고 아낌없는 충고를 해줄 것을 요구했다. 여러 추기경들에 의해서 이와 비슷한 내용의 편지들이 같은 목적으로 발송되었다.

다음 총회에서 복되신 프란치스코는 지방 봉사자들에게 새 형제들을 임의로 수도회에 받아들일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고, 추기경의 편지와 교황 칙서로 인준된 회칙을 봉사자들의 손에 들려서 어려움이 많았던 그들의 관구로 되돌려 보냈다. 박해를 가했던 고위 성직자들은 이러한 모든 것을 보고 나서, 형제들로부터 공식적인 증명서를 확인한 다음에, 형제들에게 자기들 교구에서 집 짓고 살면서 사람들에게 설교할 수 있는 허락을 기꺼이 내렸다. 이렇게 해서 형제들은 어려움이 컸던 교구에 거주하면서 설교를 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형제들의 겸허하고 거룩한 생활을 보고, 또 그들의 감동을 주는 매우 부드러운 말들을 듣고 나서 하느님의 사랑에 불타 올라, 회개를 하였으며, 그리하여 그들은 형제들에게 모여들어 열성과 겸손으로써 형제회의 거룩한 수도복을 받았다.


67. 복되신 프란치스코는 형제들에 대한 오스띠아 주교의 신뢰와 애정을 보고서, 그분을 가장 가까이 경모했다. 복되신 프란치스코는 하느님의 계시로 이 주교가 장차 교황이 될 것임을 벌써 알고 있었다. 그가 쓴 서한에서 그는 주교를 온 세상의 아버지로 호칭하며, 이 일을 늘 미리 시사했다: “그리스도 안에서 온 세상의 공경하올 아버님께…”

교황 호노리오 3세께서 타계하시어, 오스띠아의 주교가 그레고리오 9세라는 이름으로 교황으로 피선되었다.35) 그는 생애를 마칠 때까지 자신이 형제들에게 대해서뿐만 아니라 다른 수도회와 그리스도의 가난한 자들에 대해서도 중추적 후원자요 옹호자임을 보여 주었다. 무릇 그분의 공로로 보아서 그분은 성인들의 대열에 들었을 것으로 믿어진다.



제 17 장


복되신 프란치스코의 거룩한 죽음과

죽음에 앞서 2년 전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오상을 받으심.


68. 프란치스코가 사도들의 생활과 발자취를 따름으로써 그리스도와 완전히 일치된 지 20년이 지나서36), 사도와 같은 사람이었던 그는 1226년 10월 4일 일요일에 행복하게 그리스도께로 떠났다. 주님의 대전에 합당한 자가 되어 주님을 뵈었다.

거룩하여 이름이 나 있었던 형제 하나가 복되신 프란치스코의 영혼을 보았다. 그의 영혼은 보기에는 별과 같았고, 크기는 달과 같았고, 밝기는 태양처럼 빛났으며, 작은 흰 구름을 타고 큰 물 위를 지나서 하늘로 곧바로 올라갔다.

그는 주님의 포도밭에서 일을 많이 했고, 기도와 단식, 밤샘, 설교 그리고 구원을 위한 여행에 열정적이었고, 이웃에 대한 염려와 연민(憐憫)과, 자신을 비천히 보는 일에서 항구했다. 이러한 일들은 회개의 시초에서부터 그가 온 마음으로 사랑한 그리스도께 갈 때까지 해 온 일들이며, 그의 마음은 항구하게 그리스도를 찬미했고, 일의 열매로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였다. 그는 하느님을 열정적으로 마음 깊은 데서 사랑한 나머지 그리스도라는 이름만 들어도 안으로는 온전히 불타 올랐고, 밖으로는 하늘과 땅도 주님의 이름에 고개를 숙일진저 하고 외쳤다.

69. 바로 그 주님께서는 그의 타오르는 사랑과, 그의 마음 안에 늘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한 생각이 있었음을 온 세상에 내보이고 싶으시어, 그가 아직 살아 있는 동안에 유일무이(唯一無二)한 놀라운 특전으로 그의 몸을 경이롭게 꾸며 주셨다.

그는 천사적 원의(願意)의 열정으로 인하여 위로 하느님께 들어 높여졌고, 크신 사랑으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기를 원하신 그분 안에서 감미로운 연민을 지닌 사람으로 변해 갔다. 그가 죽기 2년 전의 어느 날 아침에 십자가 현양 축일이 가까이 왔을 무렵, 라베르나(La Verna)산 중턱에서 그가 기도를 하고 있을 때에, 날개가 여섯 개 달린 천사 하나가 그에게 나타났다. 그 날개들 사이에 십자가에 달린 아름다운 사람의 모습이 있었고, 천사는 두 손과 발을 십자가 모양으로 뻗고 있었으며, 얼굴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뚜렷하게 보여주었다. 두 날개는 그의 머리를 덮고 있었고, 다른 두 날개는 온 몸을 발까지 감싸고 있었고, 또 다른 두 날개는 날으려는 듯이 펼쳐져 있었다.

이 환시가 사라지자, 그의 영혼에 사랑의 놀라운 불꽃이 새겨졌고, 그의 몸에 놀랍게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상처 자국이 새겨졌다. 하느님의 사람은 하느님의 이 비적(秘蹟)을 공개하고 싶지가 않아서 죽을 때까지 숨기려 하였으나, 완전히 숨길 수는 없었고, 적어도 그의 가까운 동료들에게는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70. 그의 복된 죽음이 있은 다음에야 현장에 있었던 모든 형제들과 많은 세속 사람들이 그의 몸이 그리스도의 상처로 꾸며져 있음을 똑똑히 보았다. 그들은 그의 손과 발에서 못 자국을 본 것이 아니라, 살점들이 모여서 생긴 쇠같이 검은 색깔의 못을 보았다. 마치 창에 찔린 듯한 오른쪽 옆구리는 정말로 명료한 붉은 색깔의 창에 찔린 상처로 덮여 있었다. 그가 살아 있을 당시에 이 상처로 피가 자주 쏟아져 나왔다.

부정할 수 없는 이 오상(五傷)의 진실은 그가 살았을 때와 죽었을 때에, 사람들이 실제로 그것을 볼 수도 있고 만져 볼 수도 있어서 명확하게 밝혀졌을 뿐만 아니라 그가 죽은 다음에도 세계의 도처에서 그의 오상으로 인하여 일어나는 많은 기적들을 통해서, 주께서 그 진실을 더욱 명확히 보이셨다. 이 기적들은 하느님이 종이 살아 있을 때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고, 또 오상을 의심했던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서, 프란치스코와 오상을 확실히 믿도록 만들었고, 전에는 하느님의 종을 비난하던 그들이 주님의 자비하심을 통해서 사실을 받아들이고 나서는, 하느님의 종을 칭송하는 자들이 되었으며, 그의 가르침을 전파하는 매우 성실한 설교자가 되었다.




제 18 장


그의 시성(諡聖)


71. 하느님의 종인 프란치스코는 기적의 새 빛으로 이미 세상 구석구석을 비추었다. 그의 공로로 주님의 훌륭하고 특별한 은총을 받은 사람들이 그의 거룩한 시신을 공경하러 도처에서 달려왔다. 그레고리오 교황께서는 추기경들이나 다른 많은 고위 성직자들과 상의를 한 후에, 그리고 주님께서 그의 종을 통해서 이룩하신 기적들을 연구하고 인정하신 후에, 그의 이름을 성인들의 반열에 올리셨고 그의 축일을 그가 죽은 날에 성대하게 지낼 것을 명하셨다.

아시시에서 거행된 시성식에는 많은 고위 성직자들과 수많은 왕자들과 남작(男爵)들과, 세계 도처에서 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군중들이 참석하였고, 그들은 특별히 교황님으로부터 초대를 받아서 이 성대한 예절에 참석한 것이었다. 시성식은 그레고리오 교황 즉위 2년인 1228년에 있었다.


72. 교황님은 성인이 살아 있을 당시에 성인을 몹시 사랑하셨고, 매우 경이로운 시성으로 그에게 영예를 드렸을 뿐만 아니라, 그의 영예를 위하여 지은 성당 안에다가, 성당의 첫 번째 초석을 놓으셨고, 많은 성물(聖物)들과 매우 귀한 장식물로 성당 안을 풍성케 하셨다. 시성식이 있고 2년이 지나서 성인의 거룩한 시신은 처음에 묻혔던 곳에서 영예롭게도 새 성당으로 이장되었다.

교황님께서는 새 성당에 보석들이 박혀 있는 금 십자가를 보내셨는데, 그 안에는 주님의 나무 십자가 조각이 들어 있다. 또한 교황님께서는 여러 가지 장식물들과 제기(祭器)들과, 제단에 쓰이는 많은 성구(聖具)들과 많은 아름다운 제의들을 보내셨다.

교황님은 이 성당에 모든 하위 종속권을 면속해 주셨고, 당신의 사도적 권위로 이 성당을 작은 형제회의 머리와 모(母)성당으로 선포하셨으며, 이는 모든 추기경님들께서 공동으로 서명하시고 봉인하심으로써 공적인 특전에서 명확히 나타난다.


73. 하느님의 거룩한 사람이 생명이 없는 이런 물건들을 통해서 공경을 받는 것은 별다른 의미가 없고, 다만 육신적으로는 죽었지만 정신적으로 살아 있어서 하느님께서 그를 통해서 많은 이들을 회개시키고 구원하시는 일만이 참으로 의미 있는 일이다. 실제로 성인이 돌아가신 후에 그의 공로로 인하여 남녀를 불문하고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여 주님께 돌아왔을 뿐만 아니라, 귀족으로 태어난 많은 사람들이 자기들의 아들들과 더불어 프란치스코의 수도복을 입었고, 많은 부인들이 자기들의 딸들과 더불어 가난한 부인들의 수도원에 들어갔다.

현인들이나 학자들이나, 성직자들 못지 않게 평신도들도 이와 비슷하게 육신의 유혹을 경시하고, 불경스럽고 세속적인 생각을 포기한 다음, 작은 형제회를 택하여 들어왔다. 이리하여 그들은 각자가 받은 하느님의 은총의 크기에 따라서 모든 일에서 가난과, 그리스도의 발자취와, 그리스도의 가장 복되신 종 프란치스코를 따랐다.

참으로 영광된 삶을 무궁히 사는 프란치스코를 삼손에 비유해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삼손은 자기가 살아서보다 죽어서 더 많은 사람을 죽였다.37) 세세에 영원히 살아 있고 다스리는 지극히 거룩하신 우리 사부 프란치스코의 공로로, 프란치스코께서 우리를 그 같은 영광으로 데려갔으면 한다. 아멘.


번역을 마치고


?글라라의 전기?를 번역하고 나서, 쉴 틈도 없이 ?세 동료들이 쓴 전기?로 넘어왔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글라라와 프란치스코를 비교하게 되었다. 프란치스코는 그렇게 직접적일 수가 없다. 프란치스코가 직접적이라고 해서 프란치스코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그리스도께 갈 수 없다고 말한다면, 이 말에는 분명히 무리가 있을 것이다. 안다. 그러나 감히 그렇게 말하고 싶다.

프란치스코의 위대함이 나를 부끄럽게 하고, 또 그것이 나를 구한다. 프란치스코는 그리스도와는 또 다른 차원으로 다가오기에 하는 말이다. 그는 우주의 작품이다.

그의 공로에 매달려 살자. 그 길밖에  없다. 그 길밖에는 사실 살아갈 딴 방도가 없다. 사실 이러한 말도 그분을 생각하면 외람 되고 송구스럽기 그지없는 말이지만 말이다.

이번에는 라틴(Latin)어는 배 요셉 형제께서 보아주셨고, 우리말은 성균관 대학교의 성찬경 교수께서 보아주셨다.


1993년 6월 11일 금요일 새벽 3시 30분


성심원 “기도의 집”에서


이 보나벤투라 형제


----------------------------------

각주

1) 2Cel 2 참조.

2) 당시에는 헐한 옷을 화려한 천으로 기워 입는 것이 젊은이들 사이에 유행이었고, 설교자들은 이를 책망하였다.  외적으로 화려한 옷과 헐한 옷으로 구분되었던 당시의 계급 사회도 이러한 유행을 마땅치 않게 여겼다.

3) Perugia와 Assisi 간의 전쟁은 몇 번의 휴전을 포함해서 1202년에서 1209년까지 계속되었다. 여기서 말하는 전쟁은 1202년에 처음으로 시작된 전쟁이다.

4) 세 동료들이 쓴 이 전기에서만 프란치스코의 상관인 백작의 이름이 “Gentile”로 명시되어 나온다.  당시의 다른 역사 전문서에서는 “Gentile”라는 이름을 찾아 볼 수 없고, 오히려 이와는 달리 프란치스코의 상관으로 Brienne의 “Gualterio” 백작을 언급한다. 이 백작은 Apullia 전쟁(1201-1205)으로 유명한 인물이며, 교황 Innocentio 3세의 군대를 지휘한 기사다. 당시에는 음유시에서 백작을 수식하는 수식어로 “신사다운”의 뜻을 지닌 “Gentile”를 썼으며, 이 수식어가 후대에 이렇게 大文字化한 것이다.

5) 이 전기가 보여주는 세밀한 내용들은 모두 신빙성이 있다.  Assisi 시청의 기록 문서에서 발견된 것처럼 16세기까지도 Assisi에는 함께 무리를 지어먹고 마시고 노래하기 위하여 모여드는 젊은이들이 있었다. 이런 모임에서는 흔히 두목이 선출되었고, 두목은 그 지위의 표시로 지팡이를 가지고 다녔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들을 “지팡이 무리”라고 불렀다. 두목은 회원들에게 모임에 드는 비용을 분담시킬 권한이 있었고, 이 권한이 남용되지 않도록 분담 금액의 한계까지 비례적으로 정해 놓았다. 그래서 부자의 자녀이면서 인심 좋은 사람을 두목으로 앉히면 각자에게 돌아오는 분담금을 줄일 수가 있었기 때문에, 이에 프란치스코가 더할 나위 없는 적격 인물이었던 것 같다.

6) 문헌상으로는 프란치스코에게 Angelo라는 이름의 형제가 하나 있는데, 여기서 복수(아들들)로 나오는 것은 일반적인 용어나 혹은 성서적인 의미를 지닐 수 있고(창세 37,3), 혹은 형제 하나가 더 있었는데 그는 일찍 죽었다고도 볼 수 있다.

7) 1253년에 프란치스코의 조카, 즉 Angelo의 아들들인 Piccardo와 Jeannot가 아버지의 재산을 나누었다. 그 때의 유산 문서에 의하면 Angelo가 Litorto와 Bassno의 평야에 부동산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원래 Petro Bernardone의 소유였을 것이다. 프란치스코는 틀림없이 여기에 자주 왔었을 것이고, 그 곳에 가려면 성 다미아노 성당 앞을 지나쳐 잘 알고 있었을 것으로 믿어진다. 프란치스코가 수리한 성당 중의 하나인 성 베드로에게 봉헌된 성당도 Petro Bernardone 소유의 땅 안에 있는 것이다.

8) 이 사람은 Leo 형제로 여겨진다.

9) 19번과 20번을 보아 저자는 시법(市法)과 규정을 잘 알고 있는 사람으로 여겨진다.

10) 22번에서 반복해서 나오는 봉헌을 뜻하는 동사 “mancipare”는 법적인 용어로서 소유물을 완전히 양도한다는 뜻을 지닌다. 노예를 양도한다는 뜻으로도 많이 쓰였다. 그 반대의 뜻을 지닌 “emancipare”는 해방을 뜻한다.

11) 어떤 학자는 아직 결정적인 인준이 1253년까지도 이루어지지 않았고, Innocentio 4세에 가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를 착오로 본다. 그러나 Sabatier는 Innocentio 4세가 1245년 11월 13일자로 Clara 회에 보낸 회칙에서 ?세 동료들이 쓴 전기?를 인용하는 점으로 보아 착오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12) 유언 23.

13) 1회칙 8장 5절-6절.

14) cicitas(도시)는 주교가 거주하는 도시이고, castrum(성)은 성벽으로 둘러싸여 방비되어 있는 작은 도시이고, villa(저택)는 부유층의 집이며, docum(집)은 일반적으로 평범한 집을 뜻한다. 이로써 당시 주민들의 주거 환경을 짐작할 수 있다.

15) 이 이야기의 직접적인 출처가 되는 “Annonymus Peruginus(페루지아의 無名 傳記 = 페루지아에 보관되어 있는 작가 미상의 전기)”는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형제들의 공동체는 아직도 수도회라는 명칭을 지니지 못했다.” 벌써 형제들은 프란치스코의 회칙에 따라 공동체를 이루고는 있었지만, 교황 칙서를 통해 인준된 회칙이 없었기 때문에 수도회로 불리지를 못했다.

16) Bernardo와 Egidio 형제였다(1Cel 30 참조).

17) 이는 교회법적인 표현이다. 수도회의 입회는 위임을 받은 권위 있는 사람을 통해서 입회할 때만이 유효하다는 것을 주지시키는 것이다. 교회법 학자로서의 염려가 들었다. 최초의 여섯 명의 형제들이 교회법적인 측면을 도무지 무시함에, 이에 저자가 우려를 보이는 것이다.

18) 사도행전 2,4: 4,32를 시사하며, 사도행전의 이 두 문장은 수도회들의 회칙의 기초로서 언급되곤 한다.

19) 시편 69(68),9.

20) 여기서 12명이라는 지적은 그 제자들의 수에 있어서 프란치스코의 제자와 그리스도와의 제자가 일치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21) 유언 15.

22) “도시와 성”은 복음이 말하는 “도시와 마을”을 저자가 당대의 어휘로 바꾼 것이다.

23) 1Cel에서는 다음과 같이 더 첨가한다: “그 사람은 형제들이 그 곳에 머물면서 땅을 늘리고 집을 연달아 차지하려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24) Rivo-Torto의 이 헛간은 가까운 나환자 마을의 소유로 보인다.

여기에서 가까운 나환자 마을은 Arce의 S.Rufino 나환자 마을이었다.

25) 당시에 “교부들의 생애”라는 두꺼운 책이 있었는데, 내용은 사막의 교부들의 생활에 관한 것이었고, 이 책은 대수도원의 영성의 기초였었다.

26) 아직까지 형제회가 성직화되어 있지 않았었기 때문에 평형제도 설교를 할 수 있었다.

27) 후에 글라라회로 불리게 된 가난한 부인들의 수도회를 뜻한다.

28) 이에 필립보(Philippus) 형제가 임명되었다.

29) 재속 3회를 뜻한다. 1221년에 Roman 지방에서 회개자들의 무리가 이러한 생활 양식을 택했고, 이것이 후에 재속 3회로 발전하였다.

30) 프란치스코회와 글라라회와 재속회를 뜻한다.

31) 성 다미아노 성당과 성 베드로 성당과 뽀르찌웅콜라의 천사의 성모 마리아 성당을 뜻한다.

32) 이 추기경은 Laterano 4차 공의회가 시작되기(1215년 11월 11일에 시작) 몇 개월 전에 타계했다.

33) Innocentio 3세는 Perugia에서 1216년 7월 16일에 서거했고, 이어서 Honorio 3세가 이틀 후에 교황으로 피선되었다.

34) 여기서 말하는 회칙은 Honorio 3세가 1223년 11월 29일에 칙서로 인준한 소위 인준된 회칙이다. 그런데 1223년에 벌써 독일 관구가 크게 발전한 상태였기 때문에 62번의 앞뒤 문맥에 모순이 있다. 회칙을 인준 받았을 때는 이미 독일 관구가 크게 발전한 오랜 후이다. Sabatier에 의하면 1219년 6월 10일자로 세계의 모든 주교들에게 보낸 칙서가 이러한 종류의 어려움에 당한 형제들에게 실제로 큰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Sabatier는 위에서 언급된 칙서는 두 번째 칙서라는 것이다.

35) 그가 교황으로 피선된 것은 1227년 3월 19일로써 프란치스코가 죽고 나서 5개월 반이 지난 후였다. 그는 14년간 교황직에 머물렀고, 1241년 8월 22일에 세상을 떠났다.

36) 앞장에서 언급된 사건들은 1221년에 있었던 일들인데, 여기서

오상 이야기를 잠시 비치고 곧바로 1226년의 성인의 죽음으로 넘어간다. 그 중간의 사건들이 누락된 이유는 머리말을 참조하기 바람.

37) 삼손의 승리가 죽어서 나타난 것처럼 프란치스코의 승리도 그러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비유를 결론에서 보이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나 1228년 프란치스코의 시성칙서에서 프란치스코와 삼손을 길게 비유했던 터라, 사실은 자연스럽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