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2022년 12월 8일 한국 교회의 수호자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

Margaret K 2022. 12. 8. 06:22

2022년 12월 8일 한국 교회의 수호자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

성모 마리아께서는 잉태되신 순간부터 원죄에 물들지 않으셨다는 믿음은 초대 교회 때부터 생겨났다. 이러한 믿음은 여러 차례의 성모님 발현으로 더욱 깊어졌다. 1854년 비오 9세 교황은 ‘성모 마리아의 무죄한 잉태’를 ‘믿을 교리’로 선포하였다. 우리나라는 이미 1838년 교황청에 서한을 보내 조선교구의 수호자를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로 정해 줄 것을 청하였다.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은 이러한 요청을 허락하면서 요셉 성인을 공동 수호자로 정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한국 천주교회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를 요셉 성인과 함께 공동 수호자로 모시고 있다.

☆☆☆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루카 1,26-38)

Behold,

I am the handmaid of the Lord.

May it be done to me

according to your word.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나는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고, 내 영혼은 나의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리라. 신부가 패물로 단장하듯, 그분이 나에게 구원의 옷을 입히시고 의로움의 겉옷을 둘러 주셨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아이가 중요한 시험을 망쳤습니다. 좋은 결과가 아니라서 크게 실망했는데, 이 아이의 엄마도 크게 실망해서 식음을 전폐하고 누워버립니다. 이런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특히 수능이 끝나고 나면, 실망한 부모의 모습을 많이 봅니다. 분명히 더 큰 실망은 아이일 텐데, 부모가 더 크게 실망한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이는 그 부모가 심리적으로 아이에게 구속된 것입니다. 아이의 실패가 곧 자기의 실패이기 때문에, 아이의 마음을 돌보기보다 자기 슬픔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 것이지요.

이런 예도 있습니다. “시험 망친 건 너야. 잘 봤어야지.”라면서 외면하는 부모입니다. 이때에는 부모나 아이 각자 고립된 삶을 살게 됩니다.

관계라는 것은 구속된 것도 아닌 또 고립된 것도 아니어야 합니다. 만약 위의 상황에서 이렇게 말했다면 어떠했을까요?

“매우 속상하지? 실망하는 걸 보니 엄마 아빠도 마음이 안 좋아. 그래도 속상하다는 건, 그만큼 열심히 했고 또 기대했다는 뜻이겠지. 마음 잘 추스르고, 어떤 점을 보완하면 좋을지 함께 살펴보자. 엄마 아빠가 도울 것이 있으면 뭐든 말하렴.”

이렇게 말하는 관계가 된다면, 함께하면서도 자율적으로 자기의 인생을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남 탓하면서 주저앉지 않게 됩니다. 함께하기에 힘낼 수 있으며, 자기 인생을 사는 것이기에 기쁘게 살 수 있습니다.

우리의 관계를 잘 정립했으면 합니다. 함께하면서도 자율적으로 자기 인생을 살게 하는 관계는 가족, 친구, 이웃…. 모든 사람과 이루어야 할 관계입니다.

원죄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축일에 성모님께서 만드신 관계 역시 이 차원에서 묵상할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 잉태 소식을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들었을 때, 거부하고 포기하고 싶지 않았을까요? 또 그 소식에 좌절하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시에 결혼하지 않은 여자가 아기를 갖게 되면 간음했다고 해서, 돌을 던져 공개 처형을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모님께서는 우리의 모습과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십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하느님과 함께하지만, 자율적으로 본인의 선택을 내세우시며 자기 인생을 살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가요?

오직 사랑만이 아무 의미 없는 것에 의미를 줄 수 있어요(파울로 코엘류).

성모 마리아께서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실 자격기 있다는 근거는?

-전삼용신부-

https://youtu.be/CHkIdKSKYuk

 

오늘은 성모님께서 원죄 없이 잉태되신 날을 기념하는 대축일입니다. 성모님께서 원죄가 없으시다는 근거는 오늘 복음에서 가브리엘 천사가 성모 마리아께 이렇게 인사하는 것에서 드러납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루카 1,28)

 

은총은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은 후 인간에게서 떠난 성령의 선물입니다. 그런데 성모님께서 은총이 가득하시니 죄가 없으시다는 뜻입니다. 물론 에덴 동산에서처럼 하느님께서 함께 계십니다. 그렇다면 만약 우리도 죄가 없다면 은총이 가득해야 옳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함께 계시고 그것으로 기뻐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함께 계시다고 다 기뻐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은총이 없는 이들은 주님께서 함께 계심이 고통입니다. 그래서 마귀 들린 이들은 주님께 자신들을 떠나주십사고 청합니다. 견딜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사제가 되어 어떤 피정 교육에 들어갈 때 어떤 분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들어가시면 이러저러한 프로그램이 있는데 거기에서 꼭 일등 하셔서 우리 성당을 빛내셔야 해요!” 장난으로 하신 말씀인데 이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 정말 열심히 했습니다. 그런데 경쟁하면 누구나 느끼듯이 그곳이 지옥이 됩니다.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곳에 합당한 사람이 되기 위해 무언가를 열심히 해야 한다면 이는 은총이 가득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은총은 곧 ‘자격’입니다. 은총을 가지지 않고 어딘가에 머무르려 하거나 누군가를 만나려 하면 그것은 자격 없이 만나는 것입니다. 은총은 기도로 오는데 기도하지 않고 누군가를 만난다는 말은 자신 안에 이미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나중에 죽어서 주님 앞에 설 수 없는 사람들은 “내가 무슨 죄가 있어?”라고 이 세상에서 말한 사람입니다. 자신이 죄 없다고 여기는 사람은 스스로의 힘으로 하느님 앞에 설 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주시는 자격인 성령을 받으려 하지 않습니다. 기도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 앞에 설 수 있는 유일한 자격은 은총입니다. 성모 마리아는 스스로의 힘으로는 하느님께 합당하지 않다고 여겨 은총으로 당신을 가득 채우시는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겸손하신 분이십니다.

 

내가 주님께 합당하다고 여기는 만큼 합당하지 못합니다. 저도 술을 마시고 용기백배하여 성당에 올라가 성모상으로 보았지만, 성모상이 인간의 모습으로 보일 때는 무릎을 꿇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성령님이 아니면 성모 마리아도 감당할 수 없습니다. 내가 자격이 있다고 생각할 때 자격이 없어집니다. 내 힘으로 하려 하고 성령을 원하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금쪽같은 내새끼 125회’에 보면 중2 남자아이인데 호흡 곤란으로 4년째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집단 구타를 당하고 나서 그 상처 때문에 학교 가기를 거부합니다. 오은영 박사는 이것이 꾀병은 아니지만, 자신이 그런 병이 들었으면 좋겠다고 싶어서 진짜 그런 병이 든 것처럼 믿어진 증상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통해서 부모에게 이것저것을 얻어내는 것입니다.

 

왜 부모는 아이에게 이용당하게 된 것일까요? 부모는 너무 착하고 아이가 해 달라는 것은 지나칠 정도로 다 해줍니다. 아이는 부모의 이 약함을 아는 것입니다. 부모의 약함은 내 힘으로 아이를 잘 키울 수 있다는, 이런 말 하면 죄송하지만, 교만에서 나옵니다. 권위를 내세워야만 교만이 아닙니다. 내가 할 수 있다고 믿으면 교만입니다.

 

금쪽 처방을 받고서도 부모는 “너는 할 수 있어”, 혹은 “우리는 할 수 있어”라고 용기를 줍니다. 아이가 원하는 것은 그것이 아닙니다. 부모의 도움입니다. 그러니 아이는 조금 따라주다가도 힘에 부치면 이내 폭발하고 맙니다. 처음부터 부모가 아이에게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알았다면 아이가 스스로 자기의 문제를 해결하려 했을 것입니다. 부모의 탓을 해서는 안 되겠지만, 우리가 아이에게 합당한 부모가 될 자격이 있다고 믿으면 그 순간부터 합당한 부모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자격’이신데 그 자격을 이미 자기가 가지고 있다고 믿기에 성령의 힘을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자격이 있다고 믿을 때 자격을 잃습니다.

 

성모 마리아는 누구에게도 자격이 없다고 믿으셨습니다. 그래서 기도하셨습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충만하셨습니다. 이 은총을 지니셨기에 하느님께서 아드님을 맡기실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자신의 힘이 아닌 성령의 힘으로 아드님을 키울 능력이 있음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의 상징이 아브라함이 자기 종에게 온갖 패물을 주며 아들의 신붓감을 찾아오라고 한 이야기입니다. 레베카는 아브라함의 종에게 자신의 것을 내어주며 그 종에게 합당하지 못한 존재임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아브라함의 종은 레베카를 자신이 가져온 패물로 꾸며주었습니다. 이것이 ‘은총’이고 이사악을 만날 ‘자격’이 됩니다. 여기서 레베카가 아브라함의 종을 위해서 종과 종이 몰고 온 낙타들에게 물을 주는 시간을 ‘기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신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격이 없다고 고백하는 이에게 하느님은 은총으로 자격을 주십니다. 따라서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사람을 만날 자격 뿐 아니라 하느님을 만날 자격을 잃습니다. 자격 자체가 기도로 오시는 성령의 은총이기 때문입니다

죄와 싸우시는 하느님 사회교리의 다탕 원리: 사회의 공동선

-이기우신부-

https://www.youtube.com/watch?v=BXXrgUYhs00

 

-조재형신부-

‘변명’에는 두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하나는 자신의 잘못을 합리화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선악을 아는 나무의 열매를 먹은 아담에게 ‘너 어디에 있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아담은 알몸인 것이 부끄러워 숨었다고 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묻었습니다. “네가 알몸이라고 누가 일러 주더냐?” 아담은 자신의 잘못을 이렇게 합리화하고 있습니다. “당신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주신 여자가 그 나무 열매를 저에게 주기에 제가 먹었습니다.” 하느님께 책임을 떠넘기고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법적인 책임을 회피하는 것입니다. 도의적인 책임을 회피하는 것입니다. 158명의 숭고한 생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런대도 이렇게 변명하였습니다. ‘경찰이 있었어도, 안전조치를 했었어도 사고를 막기는 어려웠습니다. 그렇게 많은 인파가 한꺼번에 몰린 것은 하나의 현상입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행동입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변명’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진심으로 뉘우치는 ‘회개’입니다. 국민이 원하는 것은 무고한 목숨을 잃어버린 사람과 그 유족들에 대한 솔직한 사과와 그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안전조치를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카인에게도 ‘네 동생 아벨은 어디에 있느냐?’라고 물었습니다. 카인은 동생 아벨을 죽였으면서도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제가 동생을 지키는 사람입니까?’ 하느님께서는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도 같은 질문을 하실 것 같습니다. ‘네 동생 아벨은 어디에 있느냐?’ 우리의 욕심과 욕망 때문에 더불어 살아가는 많은 동물들이 멸종하였습니다. 원주민들은 삶의 터전을 잃어버렸고, 노예로 전락하였고, 숲은 파괴되었고, 물과 공기는 오염되었습니다. 어쩌면 우리들도 카인과 같은 대답을 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생명을 지키는 사람입니까?’ “스승님과 함께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저는 스승님을 모른다고 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했던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을 3번이나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소. 나는 그 사람을 모르오.” 나중에는 거짓이라면 천벌을 받겠다고 하면서 “나는 그 사람을 모르오.”라고 이야기합니다. 평소에는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위기의 순간이 오면 신앙을 저버리는 우리들의 슬픈 자화상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눈을 보았던 베드로 사도는, 닭이 우는 시간에 회개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돌아온 아들을 따뜻하게 맞이하였던 아버지처럼, 우리가 회개하고 뉘우친다면 주님께서는 우리를 따뜻하게 품어주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순명’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고향을 떠나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하느님의 뜻을 따랐습니다. 100세의 나이에 얻은 아들 이사악입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은 아들 이사악입니다. 그런 이사악을 하느님께서는 제물로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습니다. 아들을 하느님께 바치기 위해서 길을 떠났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자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면 좋겠느냐?’ 그러자 이사야 예언자는 주저 없이 대답하였습니다. ‘주님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 주십시오.’ 그리고 이사야 예언자는 구세주의 탄생을 알리는 예언을 하게 됩니다. 구세주가 오시면 일어날 일을 예언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겟세마니 동산에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하실 수 만 있다면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해 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고난의 잔을 마시고, 십자가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오늘은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마리아 대축일입니다. 교회는 성모님에 대해서 믿을 교리를 선포하였습니다. 오늘 축일로 지내는 원죄 없이 잉태되었다는 교리가 있습니다. 원죄가 없었기에 죽음을 거치지 않고 승천하셨다는 교리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이시기에 예수님을 낳으신 성모님은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었다는 교리가 있습니다. 성령으로 잉태하셨기에 평생 동정을 간직하고 있었다는 교리가 있습니다. 교회가 선포한 성모님께 대한 믿을 교리를 신앙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했던 성모님의 순명입니다. 변명은 우리를 하느님께로부터 멀어지게 합니다. 그러나 순명은 하느님께로 가까이 가는 ‘디딤돌’이 됩니다. “만물을 당신의 결정과 뜻대로 이루시는 분의 의향에 따라 미리 정해진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한몫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이미 그리스도께 희망을 둔 우리가 당신의 영광을 찬양하는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마리아는 그리스도의 무죄한 몸이 거처하실 수 있도록 가꾸어진 순결한 나무입니다!

-양승국시눕-

원죄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입니다. 과거에는 무염시태대축일이라고 했습니다. 무염시태! 저도 한때 무슨 뜻인가 의아해했고 알쏭달쏭해 했습니다. 한자로 표현해서 그런 것 같습니다.

 

무염시태(無染始胎)! 우리 말로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없을 무자에, 물들 염자입니다. 비로소 시자에, 아이밸 태자입니다.

 

그럼 한번 연결해볼까요? 성모님께서 ‘시태!’ 잉태되셨는데, 어떻게 잉태되셨습니까? 무염 상태, 즉 오염되지 않은 상태로 잉태되셨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에 물들지 않은 상태? 원죄에 물들지 않은 상태로 잉태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성모님께서는 아무런 흠 없이 무죄한 상태로 잉태되셨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성모 무염시태’라는 용어 대신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라는 말로 대체되었습니다.

 

교회 역사 안에서 성모님의 원죄 없이 잉태되심에 대한 교리는 오랜 연구와 반박, 옹호가 거듭되어왔습니다.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에 대한 초기 교부들의 표현이 참 아름답습니다.

 

“요아킴과 안나의 거룩한 딸인 마리아는 성령의 신방에서 티 없이 살았기에 하느님의 신부가 되고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인류 구원을 위한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육화 강생을 위해 마리아의 영혼을 준비시키셨습니다. 마리아는 그리스도의 무죄한 몸이 거처하실 수 있도록 가꾸어진 순결한 나무입니다. 순결하며 거룩한 영혼과 육신의 소유자 마리아는 가시덤불 속에 핀 한 송이 백합화 같습니다.”

 

성모님을 극진히 사랑했으며 성모님에 대한 탁월한 신심의 소유자였던 8세기 수도자 다마스쿠스의 성 요한은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에 대해 이런 기록을 남겼습니다.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인류는 모두 죄인이 되어 하느님의 크신 은총에서 흘러나오는 큰 선물을 잃어버렸습니다. 

 

그 선물은 죽음으로부터의 자유, 육체와 영혼의 질병으로부터의 자유, 욕정과 무지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인류 역사 안에서 마리아만이 은총이 가득하며 그러한 것들에 대해서 자유롭습니다. 마리아는 단 한 번도 당신의 시선을 창조주로부터 뗀 적이 없습니다.”

 

마침내 1854년 12월 8일 비오 9세 교황님께서 원죄없이 잉태되신 교리를 장업하게 선포되었습니다. 회칙 ‘형언할 수 없는 하느님’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는 잉태된 첫 순간부터 인류의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와 전능하신 하느님의 유일무이한 은총의 특전으로 말미암아 원죄에 물들지 않고 보존되었다.”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

-이영근신부-

오늘은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입니다.

우리는 이날을 한국교회의 수호자 대축일로 지내고 있습니다.

오늘은 엄청 기쁜 날입니다.

 

우리는 입당송에서 “나는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고, 나의 영혼은 나의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리라.”라고 노래하였습니다.

화답송에서도 “주님께 환성 올려라, 온 세상아. 즐거워하며 환호 하여라, 찬미노래 불러라.” 하고 노래하였습니다. 그리고 복음 환호송에서도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기뻐하소서.” 하고 기쁨을 노래하였습니다.

오늘 전례의 의미는 본기도에서 잘 요약해주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동정녀를 원죄 없이 잉태되게 하시어, 성자의 합당한 거처를 마련하셨으며, 성자의 죽음을 미리 보시고 동정 마리아를 어떤 죄에도 물들지 않게 하셨다.’

1854년 12월 8일, 교종 비오 9세께서는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 교의를 다음과 같이 선언하셨습니다.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는 잉태된 첫 순간부터 인류의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와 전능하신 하느님의 유일무이한 은총의 특전으로 말미암아 원죄에 물들지 않고 순수하게 보존되었다.”

이 선언은 세 가지 사항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원죄로부터의 면죄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마리아께서 지니신 특전의 성격을 말해줍니다.

둘째는 이는 그리스도의 공로와 하느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는 특전의 이유를 말해줍니다.

셋째는 마리아께서 원죄에서 보호된 것은 예수님께서 갈바리아에서 얻은 구원의 '선행된' 효과라는 사실입니다.

이는 특전의 방법을 말해줍니다.

이 교의의 선포는 성모님께서 예수님의 보편적인 구원으로부터 예외받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구원을 미리 입으셨다는 뜻을 말합니다.

그래서 '인류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예견된 공로에 비추어'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교의는 선포된 지 4년 후인 1858년의 루르드의 성모님 발현으로 확증되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발현하시어 자신을 '원죄 없이 잉태된 자'라고 밝히셨습니다.

'성모님의 원죄 없으신 잉태'는 우리에게 두 가지를 사실을 깊이 일깨워 줍니다.

하나는 성모님께서는 ‘은총을 가득히 받으신 분’(루가 1,28)이라는 사실이요, 또 하나는 ‘복을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성 안셀모는 성모님께서 ‘은총을 가득히 받으신 분’이라는 사실을 가리켜 이렇게 찬양하였습니다.

“당신이 받으신 축복으로 말미암아 모든 피조물은 창조주로부터 축복을 받고, 창조주께서는 그들로부터 찬미를 받으신다.”

이는 성모님께서는 원죄조차 없는, 티 없이 아름답고 거룩한 대성전이셨음을 말해줍니다.

바로 여기에 구세주 하느님의 아들을 품으신 까닭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무한하신 사랑으로 성모님을 원죄로부터 보호받는 축복을 가득 부어주신 까닭입니다.

이는 비록 인간이 죄의 굴레에 있다 하더라도 결코 하느님의 축복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음을 말해줍니다.

또 성모님께서 ‘복을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가리켜 이렇게 찬양하였습니다.

“모든 피조물이 당신의 충만함의 흘러넘침을 입어 새싹이 트듯 되살아났다.”

그리하여 성모님으로 하여 우리도 이제 ‘은총에 은총을 입게 되었고’(요한 1,16), 축복에 축복을 입게 되었습니다.

우리 역시 성모님처럼, ‘사랑의 감실이요, 거룩한 대성전’이 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제 성모님뿐만 아니라 우리를 당신의 거처로 삼으셨습니다.

그리하여 비록 우리가 원죄에 물들어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하지 못하지만, 이제는 저희 안에 주님을 모심으로써 저희 죄가 씻기게 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저희 또한 당신을 건네줄 수 있는 ‘복을 주는 이’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도 성모님을 말미암아 이토록 큰 축복을 받았으니, 우리도 역시 ‘복을 주는 이’가 되어야 할 일입니다.

이미 은총을 가득히 입었고, 주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시는 까닭입니다(1,28 참조).

성모님처럼 우리 역시 사랑의 감실이요, 거룩한 성전이 된 까닭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는 이토록 한없는 기쁨으로 성모님과 함께 찬미의 노래를 부릅니다.

“나는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고, 나의 영혼은 나의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리라.”

(입당송)

 

 

<오늘의 말 · 샘 기도>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루카 1,28)

주님!

참으로 큰 기쁨입니다.

제 안에 사랑이 있다는 이 사실, 참으로 놀랍고 아찔한 감미로움입니다.

하오니 이제는 그 사랑에 승복하게 하소서.

항상 저를 향하여 있는 당신 사랑 안에 머무르게 하소서.

아멘.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반영억신부-

세상은 ‘돈이면 안 되는 것이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많은 돈을 벌어야 하고 또 돈이 많은 사람을 부러워합니다. 그러나 정작 돈을 가지고도 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돈으로 하느님을 차지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많은 돈이 하느님을 멀리하게 만듭니다. ‘돈이면 안 되는 것이 없다’고 했지만, 사실은 돈이 하느님을 만나는데 결정적으로 장애가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물질, 재물을 따르기보다 “불가능한 일이 없는” 하느님께 마음을 두어야겠습니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나타나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라고 말했습니다. 마리아는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습니다. ‘곰곰이’ 생각한다는 것은 그것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에 대한 대답은 감당하는 책임과 희생이 들어있습니다. 그 바탕에 다시 ‘아기를 잉태’ 하게 되리라는 소식을 전달받았습니다. 더군다나 천사는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하며 명했습니다. 그러니 마리아가 당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자 천사는 늙은 나이에 임신한 엘리사벳의 잉태 소식을 전하며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1,37). 고 말했습니다. 마리아가 말하였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1,38).

 

마리아는 ‘곰곰이 생각한 후’ 자유의지로 응답하였습니다. 천사를 통해 전해진 하느님의 말씀을 믿었고 그 말씀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처녀가 임신을 한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지만 “하느님께는 불가능이 없다”는 사실이 두려움을 몰아냈습니다. 결국, 구세주의 잉태는 하느님의 은총과 거룩한 어머니 마리아의 믿음 안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은 잉태되고 또 태어나야 합니다. 하느님의 은총과 우리의 응답을 통하여 세상에 구세주를 낳아드려야 합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우리의 응답과 협력을 통해서 이루십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훌륭한 연장입니다. 인간의 자유로운 응답 없이는 아무것도 이루지 않습니다. 우리의 몫이 그만큼 소중합니다.

 

마리아가 이런저런 생각에 머리를 굴려 계산하고 앞으로 닥칠 일을 고민했더라면 아마도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하고 응답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약혼한 처녀가 부모도 모르고 약혼자도 모르게 배가 불러온다면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더군다나 그 아이가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한다면 사람들이 믿어주기나 할까요? 하느님을 모독한 죄로 쫓겨나든지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저에게 이루어 주소서’ 한 것은 곧 자신의 모두를 바친 것을 의미합니다. 어머니 마리아는 주님의 뜻을 겸손하게 받아들임으로써 우리가 어떻게 자신을 봉헌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사실 ‘안 되는 것이 없는 세상’에서 ‘불가능이 없는 하느님을 차지’하기란 너무도 힘이 듭니다. 그래도 우리의 어머니 마리아께서 순명의 모범을 보이시고 실제로 구원을 이루셨으니 우리도 일상 안에서 성모님의 마음과 하나 되어 단호한 결단과 더불어 온전한 봉헌의 삶으로 한 발 나아가야겠습니다.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는 겸손과 순명으로 하느님을 잉태 하셨습니다”(성 베르나르도).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마리아를 통하여 세상에 오셨으니 역시 마리아를 통하여 이 세상을 다스리기를 원하시며, 또한 마리아를 통하여 다시 오실 것이므로 마리아를 통하여 세상의 구원이 성취될 것입니다”(성 루도비꼬). 어머니를 통하여 예수님께로 나아가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불가능이 없으신 하느님께로 가기 위해 먼저 겸손과 순명의 어머니 마리아께 다가가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어머니를 통하여 예수님께로, 예수님을 위하여 어머니께로!

 

어떤 사업가가 신부님께 와서 물었답니다. “신부님, 제가 1억 원을 봉헌하면 하느님으로부터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요?” 그러자 신부님께서 대답하셨답니다. “그거 한번 시험해 봅시다!”

 

봉헌한다는 것은 그것을 통해 나의 이득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봉헌을 통해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어떤 기대나 바람을 이루기 위해서 재물을 내놓는다면 그것은 예물이 아니라 뇌물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결코, 뇌물을 즐기지 않으십니다. 마리아는 자신을 위하지 않고 하느님의 영광을 희망하였고 우리 모두를 위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갈망하였습니다. 그 참된 봉헌을 통해 우리에게 구세주를 낳아주셨습니다. 우리의 삶도 주님의 뜻을 이루고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봉헌의 삶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