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1년 8월 31일 연중 제22주간 화요일

Margaret K 2021. 8. 31. 07:12

2021년 8월 31일 중 제22주간 화요일

 

이것을 본 사람들은 모두 놀라며 

“정말 그 말씀은 신기하구나!

권위와 능력을 가지고 명령하시니

더러운 귀신들이 다 물러가지 않는가!”

하면서 서로 수군거렸다.

(루가 4,31-37)

 

They were all amazed and said to one another,
"What is there about his word?
For with authority and power he commands the unclean spirits,
and they come out."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서철신부-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나자렛의 회당에서, 구원이 당신 안에서 성취되었다고 선언하신 다음, 갈릴래아의 카파르나움으로 내려가시어 사람들을 가르치십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치유 기적을 본 군중과 목격자들은 ‘이게 대체 어떤 말씀인가? 권위와 힘이 있다.’라며 몹시 놀랍니다. “이 권위는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도유되신 데 기인하고 성경 본문을 어떠한 인간적 전통에 의지하여 해설하지 않으시고, 하느님께 직접 말씀을 받아 가르치시는 데서 성립된 것입니다”(박영식, 『루카 복음 해설 2』, 112면). 여기서 예수님과 같은 세례를 받고 성령을 받은 우리 자신에 대하여 깊이 묵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받은 세례성사에서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는 예식으로는 물을 붓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세례성사의 핵심은 ‘성령’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하는 말씀과 비둘기 모양의 성령께서 하늘에서 내려오셨습니다(마태 3,16-17; 루카 3,21-22 참조). 우리가 세례를 받을 때에도 똑같이 성령께서 내려오시어 머무르십니다. 우리가 성령의 거처가 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내 안에 머무르시면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그 성령께서 내게서 떠나지 않으시기에 우리에게 인호가 생깁니다.
그러면 우리 안에 머무르시는 성령께서는 무엇을 하실까요? 성령께서는 우리를 예수님께 인도하십니다. 예수님과 하나 되게 하시고, 예수님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살아가게 하시고자 우리를 변화시키십니다. 이렇게 우리도 예수님처럼 사랑의 삶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의 길은 죽을 때까지 걸어야 하고, 죽어야 비로소 완성됩니다. 예수님의 ‘세례’와 ‘죽음’이 대비되듯이, 이 사랑의 길은 십자가의 죽음으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세례를 받음으로써 우리는 그 사랑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완성하고자 끝까지 걸어가야 하겠습니다.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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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부싸움을 자주 하는 부부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싸우는 것을 보고 자란 대학생 딸은 어떻게 하면 부모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을까를 늘 생각했습니다.


어느 날 우연히 어머니의 휴대전화를 보게 되었는데, 통화목록에 ‘ㅅㅂㄴ’이 있습니다. 좋지 않은 단어가 생각나는 약자였습니다. 그래서 이 약자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궁금해서 어머니에게 “엄마, ㅅㅂㄴ이 누구야?”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당연하다는 듯이 “응, 네 아빠지. 누구겠니?”라고 답합니다.

딸은 엄마 아빠가 자주 부부싸움은 하지만, 이렇게 욕을 할 정도로 사이가 안 좋을까 싶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에게 “아니, 아빠를 어떻게 ㅅㅂㄴ(시발놈)이라고 할 수 있어?”라면서 항의했습니다. 그러자 어머니는 화를 내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설마, 네 아빠를 시발놈이라고 하겠니? ㅅㅂㄴ은 서방님을 말하는 거야.”

약자의 정확한 뜻을 알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냥 평소에 봤던 글자에 맞춰서 추측할 뿐이지요. 그러다 보니 어머니에 대한 오해를 딸이 가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추측도 참 많았습니다. 특히 사람들이 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모습을 예수님을 통해서 보게 되면서 여러 가지 추측을 합니다. 그러나 정확하게 예수님에 대한 신원을 알게 되는 것은 참으로 힘든 것 같습니다. 각종 표징을 보여줘도 또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전해줘도 사람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더러운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이 큰 소리를 지릅니다.

“아!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이 마귀의 말은 참일까요? 거짓일까요? 당연히 참입니다. 마귀들도 인정하는 예수님의 신원을 왜 사람들은 믿지 못했을까요?

마귀가 말했기 때문입니다.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의 모습이 어떠했을까요? 정상인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묘지 사이를 다니는 등 이상한 행동을 하고, 자신의 몸을 학대하는 것처럼 내동댕이쳐지기도 합니다. 이런 모습을 한 사람이 예수님의 신원을 정확하게 이야기한들 누가 믿겠습니까? 만약 당시에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던 바리사이나 율법학자가 말을 했다면 분명히 다 믿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귀의 말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혼란을 줘서는 안 되기에 함구령을 내렸던 것입니다.

주님을 제대로 알아보는 방법은 주님을 알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고, 주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래야 숨어있던 주님의 신비가 이 세상에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사랑은 자신과 삶 그리고 타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도와준다(프랭크 오스타세).

주님께 나아가기 위한 실천

어느 헬스트레이너가 몸매 관리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며 그 방법을 이렇게 말해 줍니다.

“매일 1시간씩 뛰거나 체육관에서 운동하면 됩니다. 그리고 이를 6개월에서 1년 동안 지속하십시오.”

이대로 한다면 어떨까요? 분명 멋진 몸매를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이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요? 모두 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런데도 왜 멋진 몸을 만들기 힘들까요?

알지만 그렇게 실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께 나아가는 방법을 우리는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주님 뜻에 맞게 살면 됩니다. 하지만 실천하지 못하기에 주님 앞에 제대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도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고 2,1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주님께 나아가기 위한 어떤 실천을 하고 계십니까?

 나는 어떤 권위?: 몽둥이-논리-피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은 ‘권위’에 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회당에서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을 낫게 하는 것에서 드러났습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영’에 관련된다는 뜻입니다.

     사람의 구조는 ‘육체-혼-영’으로 되어있습니다. 육체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권위가 있고, 혼(생각)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권위가 있으며, 영(마음)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권위가 있습니다.

    권위란 상대를 나의 뜻대로 움직이게 할 수 있음을 말합니다. 따라서 누구나 권위를 가지고 산다고 믿을 텐데 우리는 인간의 어디까지 움직일 수 있느냐에 따라 그 사람이 권위 있는 사람인지, 없는 사람인지 알 수 있게 됩니다.

  

    가장 낮은 단계의 권위. 사실 권위가 없을 때 사용되는 권위입니다.

소위 ‘폭력’이라고 하는데 몸을 움직이는 데 사용됩니다. 왜 그래야 하는지 설득할 머리도 없고 그저 힘만 있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권위입니다.

     

    궁예는 바닥에서 시작하여 후고구려를 건국한 훌륭한 인물이었습니다.

궁예는 폭군으로 유명했습니다. 그는 자기가 미륵불이라 자처하며 부처와 같은 수준에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가르칩니다.

    “그 옛날 원효는 나무아미타불만 외워도 불법을 다 알 수 있다고 하였느니라. 그러나 그보다 더 좋은 주문이 있노라. 그대들은 모두 외울지어다. 집에 있을 때나 일할 때나 잘 때나 일어났을 때나 모두 외울지어다. 옴마니 밤매훔을 외울지어다. 이것은 석가도 알았고 나도 알았던 불경의 모든 것이니라. 이 주문이 그대들을 이 지옥에 땅에서 극락으로 이끌 것이니라. 옴마니 밤매훔, 옴마이 밤매훔….”

     

이런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누구인가? 누가 기침 소리를 내었어! 누가 기침 소리를 내었는가 말이야!”

한 신하가 기침을 하며 말합니다.

    “소인이옵니다. 폐하.”

    “참으로 딱하구나. 짐이 지금 관심법을 하고 있는데 어찌 기침을 할 수 있느냐, 이 미련한 것아.”

    “송구하옵니다, 폐하.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내가 가만해 보니 네 머리에는 마군이(불도를 방해하는 온갖 번뇌를 비유하여 이르는 말)가 가득 찼구나. 여봐라. 저자 안에 있는 마군이를 때려죽여라!”

     

    이렇게 신하뿐만 아니라 여인들까지도 철퇴로 죽이는 일이 빈번하였습니다.

왜 폭력을 쓸까요? 말로 안 되기 때문입니다. 왜 말로 안 될까요? 설득시킬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자녀에게 폭력을 쓴다면 그것은 말로 설득할 논리가 없어서 그렇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자기 힘으로 누군가를 움직일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 문제입니다.

     

    다른 권위는 논리로 설득하는 사람입니다. 역시 자기 힘으로 누군가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지만, 폭력을 쓰지 않고 논리적인 설득력을 사용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나 설득력도 항상 한계를 지닙니다. 사람은 실제로 머리를 따르지 않고 마음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컬투쇼에서 들은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요즘 유행한다는 부모교육을 두 시간 동안 들은 엄마가 아이들에게 윽박지르지 않고 ‘… 구나’라는 말을 해야 한다는 실천방법을 터득해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유치원에 다녀온 아이가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먹으려 하자, “너 배가 아주 고팠구나. 그런데 손을 먼저 씻어야겠지? 손을 씻고 먹으면 더 맛있겠구나.”라며 설득하는 투로 말했습니다.

    항상 이렇게 아이를 설득하며 지내던 그날도 “친구와 싸웠구나. 친구와는 사이좋게 지내야지. 왜냐하면….”이라고 하는 순간 아이는 귀를 막고 이렇게 소리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만해. 그만해! 그냥 때려. 그럼 그냥 할게!” 

 

    우리가 머리로 이해한다고 그것을 다 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죄를 안 지어야 하는 것을 몰라서 죄를 지을까요? 안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마음이 바뀌어야 바뀝니다. 그래야 이해하려 합니다. 그렇다면 마음을 바꿀 줄 아는 힘이 가장 큰 힘입니다.

     

    마음엔 무엇이 살까요? ‘욕구’가 삽니다. 우리를 조정하는 것은 이 욕구입니다. 그런데 욕구는 ‘본성’입니다. 태어날 때 부여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 세속-육신-마귀의 본성을 타고났습니다. 따라서 이것을 바꾸는 방법은 새로 태어나는 수밖에 없는데, 새로 태어나려면 새로운 부모가 주는 ‘양식과 가르침’이 필요합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그 양식과 가르침을 성체와 말씀으로 주셨습니다. 따라서 가장 큰 권위는 나의 욕구를 바꿔줄 양식과 말씀을 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사람을 새로 태어나게 하려면 그보다 더 높은 하느님 본성이 필요합니다.

     

    예전에 방영된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임금이 있어도 나라를 좌지우지하는 권력을 지닌 미실이라는 여인의 캐릭터가 굉장히 충격적이었습니다.

    자신을 치려는 임금과 많은 군사 앞에서 그녀는 화랑들을 이끌고 나옵니다. 그녀가 화랑을 관장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임금과 군사들 앞에서 ‘낭장결의’(화랑들이 화장하고 죽음을 불사하겠다는 의지를 세우는 일)를 하고 할복하자 임금과 군사들은 칼을 집어 던집니다. 미실의 ‘권위’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미실은 당시 귀족의 아들들을 자신의 한 마디에 할복할 수 있게 만들었을까요? 그 이유는 미실이란 여인이 그들을 위해 죽어줄 수 있는 사람이란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드라마라 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해 죽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권위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먼저 우리를 위해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그 피가 곧 성령입니다. 그 성령으로만 우리 마음을 새로 태어나게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권위가 있으셨던 이유는 당신의 피를 흘리셨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정치적 권위를 얻으려고 경선도 하고 상대를 공격하기도 하며 노력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권위는 사람의 마음을 자신의 것으로 삼을 수 있는 권위입니다.

    먼저 생명이 아닌 십일조라도 기쁘게 내어놓을 수 있게 만들 수 있는 권위가 있다면 그것이 진정한 권위의 시작일 것입니다.

    피는 흐름입니다. 인간 본래의 본성은 소유입니다. 내가 누군가를 흐르게 할 수 있다면 이미 영적인 권위를 지니기 시작한 것입니다. 나는 자녀에게 소유하도록 가르치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세상을 위해 자신의 것을 내어놓는 사람으로 만드는 사람입니까?

 -조재형신부-

 

뉴저지에 있는 가정을 방문했습니다평화책꽃이라는 지면에서 책을 소개해 주시는 선생님의 집입니다작년 7월에 가기로 했는데 코로나 팬데믹 때문에 1년을 기다렸습니다정원에는 각종 허브가 있었습니다허브의 이름과 허브의 효능을 팻말로 적어 놓았습니다. ‘어성초신선초돌나물도 보았습니다풀들의 효능은 항생항균의 기능이 있다고 하였습니다잎을 말려서 차로 만들었고나누어 주셨습니다. 3년 동안 요리를 배워서 맛있는 음식을 준비해 주셨습니다요리를 배우니 손님이 오는 것이 걱정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손자들이 와도 걱정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주니 손자들도 좋아했다고 합니다정원에는 허브의 향이 있었습니다식탁에는 맛있는 음식이 있었습니다지하에는 작은 공연장이 있었습니다음식을 먹은 후에 아름다운 음악을 들었습니다선생님은 남편과 함께 음악 봉사를 다닌다고 하였습니다선생님의 글은 아름다운 마음과 나눔에서 나오는 것 같았습니다.

 

주변을 보면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는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2달 동안 신문사에 머물면서 아픈 사람들을 치료해 주셨던 신부님이 있습니다저보다 24살이 많으신 신부님입니다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을 신부님을 통해서 실감하였습니다아픈 사람들을 도와주려는 열정은 나이와는 상관이 없다는 것도 알 수 있었습니다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여러 마을을 다니면서 복음을 선포하셨던 것처럼 신부님께서는 뉴욕에 머물면서 보스톤에도 가시고워싱턴 DC에도 가셨습니다지금은 LA로 가셔서 아픈 사람들을 도와주십니다신부님의 따뜻한 마음과 아픈 사람을 도와주려는 열정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신부님의 도움을 받고 기쁜 마음으로 돌아가는 분들을 보았습니다한국의 안동 교구의 성당이 화재로 전소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미국의 교우분이 기꺼이 성당을 지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습니다. 1년이 지났는데 한국으로 보낸 돈만큼 다시 생겼다고 합니다투자한 곳에서 딱 그만큼만 수익이 났다고 합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잠들지 말고맑은 정신으로 깨어 있도록 합시다여러분이 이미 하고 있는 그대로서로 격려하고 저마다 남이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허브로 차를 만들어 나누어 주시는 분음악으로 봉사하시는 분맛있는 음식으로 이웃을 기쁘게 하시는 분은 이미 바오로 사도의 이야기를 실천하고 있습니다. 80이 넘은 연세에도 지치지 않으시고 아픈 사람들을 돌보시는 노 사제는 이미 바오로 사도의 이야기를 실천하고 있습니다멀리 한국에 들려온 안타까운 소식에 기꺼이 도움을 주신 분도 이미 바오로 사도의 이야기를 실천하고 있습니다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예수님의 권위를 이야기합니다예수님의 권위는 재물능력권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예수님의 권위는 이웃을 위한 연민과 사랑에서 나오는 것입니다이웃을 위해서 기꺼이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희생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8월의 마지막 날입니다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권위를 따라서 이미 하고 있는 그대로 서로 격려하고 남이 성장 할 수 있도록 도와주면 좋겠습니다.

 

그분의 말씀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다저이가 권위와 힘을 가지고 명령하니 더러운 영들도 나가지 않는가?” 

 신앙 고백에는 반드시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그분께 영광을 드리는 생활이 뒤따라야만 합니다!

 -양승국신부-

 

때로 말씀을 선포할 때 주저주저할 때가 있습니다. 자신감도 없고 어색하고 난감해서 차라리 아무런 말도 하고 싶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말씀에 권위나 무게가 없을 때입니다.

  

심각한 죄 중에 있을 때 그렇습니다. 누군가와 깊은 갈등 속에 있을 때 그렇습니다. 제가 선포하는 말씀과 구체적인 삶 사이에 너무나 큰 괴리감이 있을 때 그렇습니다. 

 

그런데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는 말씀 한 마디 한 마디에는 권위가 있었습니다. 선포하시는 말씀 가운데는 헛된 공약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선포하시는 말씀이 그 자리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말씀 앞에 사람들은 환호하고 박수를 쳤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의 카파르나움 고을로 내려가시어, 안식일에 사람들을 가르치셨는데, 그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의 말씀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다.”(루카 복음 4장 31~31절)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는 말씀이 권위로 가득 찬 이유는 말씀에 행동이 반드시 동반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모든 말씀은 하느님 아버지의 능력을 받아 하신 말씀이었기에 권위가 있었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권위 있는 말씀 앞에 마귀들조차도 굴복하고 머리를 조아렸습니다. 그날 회당에는 더러운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권위로 가득 찬 예수님 말씀 앞에 찍소리 못하고 물러나며 그분께 대한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아!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루카 복음 4장 34절)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말씀 한 마디 한 마디는 하늘과 땅을 뒤흔들 능력을 소유한 강력한 말씀이었습니다.

  

“그분의 꾸지람 앞에 하늘의 기둥들이 뒤흔들리며 놀라네. 당신의 힘으로 바다를 놀라게 하시고 당신 통찰로 라합을 쳐부수셨네.”(욥기 26장 11~12절)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부정한 영의 신앙 고백을 수용하지 않으시고 거부하시고 경멸하시며 크게 꾸짖으셨습니다. 신앙 고백에는 반드시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그분께 영광을 드리는 생활이 뒤따라야만 합니다.

  

오늘도 능력으로 가득한 하느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 말씀을 내 안에 깊이 간직하며, 그 말씀을 구체적인 삶 속에서 실천하며, 그 힘으로 이 하루를 기쁘게, 기꺼이 살아내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빛이 있으면 

 -반영억신부-

 

아침 미사봉헌 준비를 하면서 제의실이 너무 어둡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왜 이리 어둡지? 안 그랬는데…..그러고는 그만이었습니다. 전구 두개가 켜져야 하는데 한 개가 켜지지 않았습니다. 전구가 하나였다면 어둠이 짙어서 금방 전구를 바꾸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희미하게나마 준비할 수 있었으니 곧 잊어버렸습니다. 이제라도 얼른 전구를 바꿔야겠습니다. 

 

옛말에 “등불 하나가 천년 어둠을 물리친다.” 고 하였습니다. 빛을 가지고 있으면 어둠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능력을 지니고 있으면 악의 세력을 무서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빛을 지니지 못하였으니 문제입니다. 물론 희미한 빛을 지니고 있어서 더 문제이기도 합니다. 아주 큰 어둠이라면 빨리 손을 쓸텐데 희미한 빛이 기회를 놓치게 합니다. 

 

빛을 선택하면 어둠이 물러나고 어둠을 선택하면 빛이 물러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습니다. 어두울수록 더 큰 빛을 발하게 됩니다. 더러운 영은 예수님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며 대항을 시도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루카4,35) .하시며 더러운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에게서 마귀를 쫓아 내셨습니다. 그리고 분명 그 능력을 사도들을 비롯한 우리에게도 주셨습니다.(루카10,17이하) 따라서 주님께서 주신 능력을 잘 관리하고 키워야 합니다. 

 

야고보 사도는 “하느님께 복종하고 악마에게 대항 하십시오. 그러면 악마가 여러분에게서 달아날 것입니다. 하느님께 가까이 가십시오. 그러면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가까이 오실 것입니다”(야고4,7-8). 하고 말하였습니다. 내 안에 하느님의 영이 계시다는 확신으로, 알게 모르게 다가오는 어둠의 세력, 곧 하느님보다는 인간의 욕심을 부추기는 마음에서 자유롭기를 희망합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으로 마무리하겠습니다. “무릇 육을 따르는 자들은 육에 속한 것을 생각하고, 성령을 따르는 이들은 성령에 속한 것을 생각합니다. 육의 관심사는 죽음이고 성령의 관심사는 생명과 평화입니다. 육의 관심사는 하느님을 적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로마,6-8). 우리가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하느님의 힘>

 -송영지신부-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의 카파르나움 고을로 내려가시어,

안식일에 사람들을 가르치셨는데, 그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의 말씀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다(루카 4,31-32).”

 

여기서 ‘권위’ 라는 말은, ‘하느님의 힘’을 뜻합니다.

그래서 “그분의 말씀에 권위가 있었다.” 라는 말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에서 하느님의 힘을 느꼈다.” 라는 뜻입니다.

아마도 카파르나움 사람들도 예수님이 나자렛 출신이며,

가난한 목수의 아들이고 목수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하느님의 힘’이 들어 있는 말씀을 하시자 ‘몹시’ 놀랐습니다.

(이야기의 전체 내용을 보면, 카파르나움 사람들이 놀랐다는 말만 있고,

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말은 없습니다.

카파르나움 사람들은 나자렛 사람들보다는 예수님에 대한 편견이 적긴 했지만,

그 편견을 완전히 버린 것은 아닌 것으로 생각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에서 ‘권위’를(하느님의 힘을) 느낀 이유는 단순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과 같으신 분(하느님이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여러 가지 말로 복잡하게 설명할 이유가 없습니다.)

 

마르코복음을 보면, “그분의 말씀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다.” 라는 말 앞에

‘율법학자들과 달리’ 라는 말이 있습니다(마르 1,22).

당시의 율법학자들은 사람들을 가르칠 때, 자기의 지식을 자랑하려고

옛날의 유명한 학자들의 말을 인용하는 방식을 주로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하는 말에는 힘이 없었습니다.

또 그들은 대부분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마태 23,3) 위선자들이었습니다.

위선자들이 하는 말은,

듣는 사람들이 그가 위선자라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 힘을 잃어버립니다.

 

<말에 힘이 없는 경우들을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1) 하느님 말씀을 전하지는 않고 자기 생각을 말하는 경우.

그 경우에, 그 말에 하느님의 힘이 들어 있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2) 믿음도 없이 하느님 말씀을 전하는 경우.

사도행전을 보면, 믿음도 없으면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려고 시도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사도 19,13-14).

그때 그들은 마귀들로부터 심하게 역공을 당했습니다(사도 19,15-16).

믿음이 없으면 힘도 없습니다.

강론을 하거나 글을 쓰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3) 강론을 하거나 묵상 글을 쓸 때 남이 한 말을 인용하는 경우가 흔히 있는데,

자기의 지식을 자랑하려는 속셈으로 그렇게 하는 경우가 많고,

그것은 믿음이 없거나 부족하다는 것을 드러내는 일이 될 뿐입니다.

따라서 그런 말이나 글에 힘이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4) ‘말’과 ‘삶’이 다른 경우.

그것은 ‘위선’이라는 죄를 짓는 일이 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모독하는 죄를 짓는 일이 됩니다.

그 말에는 당연히 아무런 힘도 없습니다.

말씀을 전하려면 그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것은 한 번에 되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사도들의 말(설교)에도 ‘하느님의 힘’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 힘은 예수님에게서 온 힘이었습니다.

사도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설교를 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 대한 믿음으로, 예수님에게서 오는 힘을 받아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설교를 했고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그가 무엇인가를 얻으리라고 기대하며 그들을 쳐다보는데, 베드로가 말하였다.

‘나는 은도 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 그러면서 그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다. 그러자 그가 즉시 발과 발목이 튼튼해져서

벌떡 일어나 걸었다(사도 3,5-8ㄱ).”

“거기에서 베드로는 애네아스라는 사람을 보았는데, 그는 중풍에 걸려

팔 년 전부터 침상에 누워 있었다. 베드로가 그에게 말하였다. ‘애네아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고쳐 주십니다. 일어나 침상을 정돈하십시오.’

그러자 곧 애네아스가 일어났다(사도 9,33-34).”

“...... 바오로가 돌아서서 그 귀신에게,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에게 명령하니 그 여자에게서 나가라.’ 하고 일렀다.

그러자 그 순간에 귀신이 나갔다(사도 16,18).”

신앙인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는 일은 사실상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이고,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은 곧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요한 13,20).

 

“마침 그 회당에 더러운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크게 소리를

질렀다. ‘아!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꾸짖으시니, 마귀는 그를 사람들 한가운데에 내동댕이치기는 하였지만,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하고 그에게서 나갔다. 그러자 모든 사람이 몹시 놀라,

‘이게 대체 어떤 말씀인가? 저이가 권위와 힘을 가지고 명령하니 더러운 영들도

나가지 않는가?’ 하며 서로 말하였다. 그리하여 그분의 소문이 그 주변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루카 4,33-37).”

 

여기서 “이게 대체 어떤 말씀인가? 저이가 권위와 힘을 가지고 명령하니

더러운 영들도 나가지 않는가?” 라는 말은,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인가? 더러운 영들이 복종하고 떠날 정도로

저이의 명령에 하느님의 힘과 권위가 들어 있으니...” 라는 뜻입니다.

마귀는 하느님의 명령에만 복종하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마귀가 예수님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마귀가 예수님의 명령에 복종한 일은, “예수님은 하느님과 같은 힘을 가지고

계신 분”, 즉 “하느님과 같으신 분, 하느님이신 분”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하느님의 힘을 ‘느껴서’ 놀랐고,

그 다음에는 그 힘이 실제로 마귀에게 작용하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는 사람들에게는 놀랄 일이 아닌데,

그분을 사람으로만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몹시 놀랄 일입니다.)

마귀는 예수님을 알고 있었고,

예수님의 명령에 복종할 수밖에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복종하지 않으면 지옥으로 떨어지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어떻게든 저항하려고 했습니다.

“조용히 하여라.” 라는 예수님 말씀은, “아예 말을 하지 마라.” 라는 뜻이고,

마귀가 하는 말은 한 마디도 들을 가치가 없음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복음: 루카 4,31-37: 정말 그 말씀은 신기하구나.

 -조욱현신부-

 

나자렛에서 설교하신 다음 예수님은 카파르나움 회당에서 안식일에 가르치셨다. 새로운 창조는 옛 창조가 끝나는 때인 안식일에 시작되는 것을 보여주신다. 예수께서는 마귀를 쫓아내 주심으로 당신의 ‘말씀’에 ‘권위’가 있음을 나타내셨다. 마귀들이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34절) 말하지만, 예수께서는 조용히 하라고 꾸짖으신다. 그것은 마귀가 진실을 말해도 거기에 귀 기울이지 말라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더러운 마귀가 들린 사람을 치유해주신다. 그 마귀들은 예수님의 정체를 즉시 알아본다. 예수께서 거기에 함께 계신다는 것을 견디지를 못한다. 예수께서 가지신 능력은 인간뿐 아니라 마귀의 힘을 능가하였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하느님을 거역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느님을 멀리하려는 그 악의 세력은 하느님의 권능을 견디어낼 수 없다. 하느님 나라의 도래 앞에 마귀들도 예수님의 명령에 꼼짝 못 하고 떨어져 나갔다. 이것을 본 군중들은 그것을 새로운 가르침, 지금까지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새로운 가르침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놀란 것은 조용하고 간단한 말 한마디로 귀신 들린 사람을 고쳐주셨다는 것이다. 여기에 그들이 생각하는 지도자들 즉 그들의 스승들과 다른 크나큰 차이가 있음을 보았고 놀랐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은 그런 면에서도 새로운 권위 있는 가르침으로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예수님은 여기서 볼 때, 하느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보내신 당신의 아들임을 이러한 권능을 보여주심으로서 계시하신다. 그러나 하느님의 백성 이스라엘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다. 마귀들이 그분을 알아보는데도 말이다. 그러면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로서 그분을 올바로 믿고 따르고 있는가? 주님의 권능을 참으로 믿고 우리의 구세주로 고백하고 있는가? 성찰하도록 하여야 한다.

 

우리의 생각과 행동이 신앙인이면서도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는 그들과 같이 되지 않도록 살아가야 한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느님의 은총은 항상 우리에게 베풀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을 알아보는 것은 우리의 깨어있는 신앙의 눈이다. 우리의 모든 삶 속에서 하느님의 은총을 느끼기 위해서는 우리가 항상 하느님 안에 있는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즉 깨어있는 삶이 될 때 언제나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삶이 될 때 우리는 하느님 안에 한 형제자매인 우리의 이웃들을 제대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자세로 하느님의 뜻을 올바로 실천하면서, 또한 우리가 다른 사람들이 하느님을 만나게 되는 장이 되고, 우리 자신도 이웃 안에서 주님을 알아 뵙고 사랑해 드릴 수 있는 우리 되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이러한 삶으로 우리의 말과 행동이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참된 가르침이 되고 권위 있는 말씀이 될 것이다. 이것이 주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하느님 자녀의 삶이 아닐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루카 4, 34)

-한상우신부-


신앙의 기쁨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참기쁨이다.

예수님과
마주하는
은총의 기쁨을
우리가
누리는 것이다.

예수님의 삶을
만나는 시간이다.

예수님께서
살아계신
참된 권위이시며
참된 영광이시다.

다스리고
통치하시는
하느님이시다.

하느님의
현존이 바로
살아있는
권위이다.

예수님의
인격과
권위는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이다.

사람이
되어오신
예수님의
인격 안에

사람을
온전케 하는
권위가
들어있다.

복음은
예수님의
권위를
드러내고

권위는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를
치유하신다.

마귀를 내쫓는
권위또한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은총이다.

우리를
속죄와
구속으로
이끄시는
권위이다.

주님께서는
끊임없이
우리를
가르치신다.

예수님의 권위는
하느님의 강력한
뜻이시다.

우리는
예수님의 권위에
속한 사람들이다.

예수님의
권위는 능력을
드러내고 능력은
우리를 진정한
삶으로 이끄신다.

회개와 치유로
우리를
온전하게 하시는
예수님의
권위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8월의 끝날이다.

우리의
무능함을
절실히 깨닫는
은총의 8월이었다.

주님께
간절히
기도하는
신앙의
시간이다.

 -오상선신부-

 

8월의 마지막 날인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 빛으로 이끄시는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의 말씀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다."(루카 4,32)
나자렛에서와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카파르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 사람들이 놀랍니다. 당시 율법을 풀이해 주던 바리사이들이나 율법 학자들과는 달리 권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권위는 말씀이신 예수님께서 온 존재의 빛을 말씀에 실어 전하시기 때문에 감지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배움이 적고 덜 예민하고 그저 순히 사는 이라도 위선이나 허세, 자기 자랑, 오만은 대놓고 표현만 안 할 뿐, 기가 막히게 알아채기 마련이니까요.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루카 4,34)
나자렛에서는 육적인 교만으로 무지막지하게 변해버린 사람들이 예수님을 밀어내었다면, 오늘 회당 안에 있던 한 마귀 들린 이가 예수님을 밀어내며 외칩니다. 마귀도 안식일 율법을 준수하고자, 그리고 말씀을 듣기 위해, 또 공동체와 함께하기 위해 회당 예식에 참여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놀랍지요. 이 더러운 영은 열심하고 하느님을 잘 안다고 여기는 영적 교만을 상징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나자렛에서도 이곳 카파르나움에서도 마찬가지로, 예수님 말씀을 듣고 보통의 군중은 놀라움을 표현하며 경탄합니다. 놀라움은 인생에서 마주치게 되는 창조주의 온갖 섭리 앞에서 인간이 갖기 마련인 순수하고 겸허한 반응입니다. 반면 육적으로 교만했던 사람이나 더러운 영은 당신과 우리가 무슨 상관이냐며 예수님과 자기들 사이의 단절을 선언합니다. 상관 없다는 말은 건드리지 말라는 뜻도 될 겁니다. 

주님의 영 안에 머무르는 이에게는 놀라움이 자연스레 경탄과 경외로 이어지고 감사와 믿음, 의탁으로 열매를 맺지요. 반면 더러운 영은 경악과 경계, 거부로 더 소란스러워집니다. 서로 어울리지 않는 에너지에 악은 더 산만하고 거칠고 시끄러워집니다.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루카 4,35)
예수님께서 그 가련한 사람에게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영혼을 빛으로 끌어내시려 결심하신 이상, 이제 소외와 무관심과 적대감을 조장하는 악은 침묵하고 떠나가야 합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언젠가 닥칠 주님의 날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은 모두 빛의 자녀이고 낮의 자녀입니다. ... 그러므로 ... 잠들지 말고 맑은 정신으로 깨어 있도록 합시다."(1테살 5,5-6)
주님의 날은 누구에게나 도둑처럼 갑자기 덮칠 것이지만, 깨어 있는 영혼은 언제라도 주님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깨어 있는 이는 게으르고 나태하며 냉소적이고 공격적인 더러운 영에게 자신의 영혼을 내어주지도 넘기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모든 피조물이 형제이고 이웃이며 서로서로 긴밀히 상관이 있음을 아는 이는 연대성 안에 생생히 깨어 있습니다. 아무리 미소하고 작은 존재라도 그 안에서 창조주의 섭리를 발견해 놀랄 줄 아는 이는 경외하고 감사하면서 나날이 성장하지요.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그는 어둠에게 자신을 내어주지 않고 빛이신 분께 단단히 내린 뿌리를 거두지 않습니다.

"서로 격려하고 저마다 남이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1테살 5,11)    
사도는 깨어서 주님의 날을 맞이할 모든 신자들에게 함께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길을 제시합니다. 심판이나 단죄가 아니라 격려로, 끌어내리고 무너뜨리는 질투가 아니라 신뢰와 기다림으로 서로를 성장시키는 지혜와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빛 가운데 머물러 있기를 바라시기에 시시각각 엄습하는 더러운 악들에게 '조용히 하고 그에게서 나가라'고 엄히 명령하십니다. 그러니 삶의 그늘에서 실의와 좌절, 분노과 무관심의 유혹이 손짓을 해도 힘을 다해 말씀의 빛 안에 머무르시길 기원합니다.

그분께서 빛이시니 그분 안에 있는 이는 빛 안에 머무르는 것입니다. 말씀의 빛이 우리를 더욱 건강하고 밝고 맑은 영혼으로 성장시켜 줄 것이니, 서로 격려하며 함께 깨어 주님의 날을 기다립시다.  

8월 한달도 말씀 안에서 수고하셨습니다. 말씀이 여러분을 맑고 깨어있게 하고 여러분을 성장시켜 주셨으리라 믿습니다.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랑도 잠드는 그런 밤은 아니올시다.>

 -김찬선신부-

 

"여러분은 모두 빛의 자녀이며 낮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밤이나 어둠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잠들지 말고,

맑은 정신으로 깨어 있도록 합시다."

 

바오로 사도는 어제도 희망이 없는 다른 사람들처럼 되지 말라고 하더니

오늘도 다른 사람들처럼 잠들지 말고 맑은 정신으로 깨어 있으라 합니다.

이것은 마치 주님께서 '이방인들은 이렇게 얘기한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얘기한다'는 식으로 말씀하신 것과 같은 뉘앙스입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얘기하는 것이 다른 사람들을 깔보는 것은 아니지요.

다른 사람들보다 나아야 한다는 자극이요 도전이요 격려지요.

 

자꾸 제 얘기하는 것 같아서 얘기하는 것이 그리 흔쾌하지는 않지만

옛날의 저는 저 자신에게도 그리고 형제들에게도 다른 사람들하고

똑같을 거면 뭣하러 수도원에 들어왔냐는 태도를 강하게 견지했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성인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도 컸지요.

그러다가 이런 생각을 버리게 되었는데 이것도 하나의 욕심이고,

욕심 중에서도 고차원적인 욕심이며 교만이라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성인이 되려고 하기보다는 성인들이 살았던 사랑을 살자고,

성인이 목표인 삶이 아니라 하느님이 목표인 삶을 살자고

목표 수정을 했는데 이런 좋은 이유 말고 다른 이유도 있었습니다.

 

곧 특별한 사람이 되려고 하지 말고 평범한 사람이 되자는 것인데

향상向上의 의지를 포기한 평범이요,

다분히 편안함에 안주하는 평범이었지요.

 

어제 아침에도 혼자 미사를 드리면서 저를 성찰하고 반성하는데

요즘 들어 자주 저를 내어주기보다 저의 만족을 먼저 생각하는

그런 삶을 많이 살고 있음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문제를 만들거나 일을 벌이려 하지 않고,

성가신 일이나 상황을 피하려고 하는 것 등등.

 

이렇게 만족과 편안함에 안주하는 평범을 살기 시작하면

부지런히 움직이던 제가 활동을 멈추고 앉게 되고,

앉아 있던 저는 소파에 비스듬이 기대게 되고,

기대어 앉아 있던 저는 완전히 자리를 깔고 누울 것이고,

자리를 깔고 누운 저는 그만 잠에 빠지게 되겠지요.

 

밤이나 어둠에 속한 사람이 밤에 나쁜 짓을 하거나

쾌락에 빠져 지내는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밤이란 나쁜 짓과 쾌락의 시간만이 아니라

밤은 잠에 취해 있는 시간이기도 하잖아요?

 

밤에 깨어 나쁜 짓 하기 보다 잠자는 것이 차라리 낫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잠을 잔다는 것은 오늘 바오로 사도가 얘기하듯 맑은 정신으로

깨어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랑도 잠들고 좋은 일도 멈춘 상태지요.

 

죄 짓지 않기 위해 잠이나 자는 그런 소극적인 태도로는

사랑을 이룰 수 없고 무엇보다 하느님께 갈 수 없습니다.

 

육신의 잠은 좋은 것일 수 있지만, 영적인 잠,

그러니까 영이 잠들고 사랑이 잠든 그런 잠은 나쁩니다.

 

그러므로 오늘 바오로 사도의 가르침을 받는 우리는

썩어빠진 정신은 버리고 맑은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정신을 차리는 것은 오늘 복음의 더러운 영은 몰아내고

어제 복음의 주님처럼 영을 받는 것이니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대낮의 자녀로 살아야겠습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9년 9월 3일 연중 제22주간 화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