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1년 8월 30일 연중 제22주간 월요일

Margaret K 2021. 8. 30. 06:49

2021 8 30일 연중 제22주간 월요일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루카. 4,16-30)


The Spirit of the Lord is upon me,
because he has anointed me
to bring glad tidings to the poor.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서철신부-


 루카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공생활 이전의 모습을 길게 소개한 뒤에, 세례와 광야에서의 유혹, 그리고 갈릴래아의 전교 이야기로 예수님의 공생활을 소개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의 여러 회당에서 전교 활동을 시작하셨는데, 주로 나자렛과 카파르나움을 중심으로 하여 갈릴래아 호수 주변에서 활동하셨습니다. 갈릴래아는 이스라엘에서 비옥한 곡창지대이지만, 그곳 사람들은 대부분 소작인이어서 부자와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들에게 멸시와 천대를 받았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이들을 죄인으로 낙인 찍고 상종하려 들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이스라엘의 수도가 아닌 이방인의 땅, 아픈 이들의 땅인 갈릴래아로 가시어 복음을 전하십니다.

그런데 루카 복음에서 특이한 것은 ‘성령’에 대한 강조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이 열리며 성령께서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분 위에 내리셨습니다”(루카 3,21-22). 또한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가득 차 요르단강에서 돌아오시고, 성령에 이끌려 광야에 가시어”(4,1) 유혹을 이기시고, 그 “성령의 힘을 지니고 갈릴래아로 돌아가시어”(4,14)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십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4,18; 참조: 이사 61,1)는 이사야 예언자의 말처럼 예수님께서는 기름부음받은이, 곧 메시아가 되시어 이스라엘 백성뿐 아니라, 온 인류에게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십니다. 가난한 이, 빚 때문에 투옥되거나 잡혀서 유배 당한 이, 육체뿐 아니라 마음까지 어둠 속에 있는 눈먼 이, 사회적으로 짓밟히고 억압받고 소외된 약한 이들, 고통에 울부짖는 이들에게 구원의 손을 내미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이들과 함께 계신다.”라고 말씀하시며,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을 살리십니다. 이제 세례로 성령을 받은 우리도 아파서 울부짖는 이들에게 다가가 그들과 함께하고, 그들을 살리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대학교 교수인 친구와 이야기를 하다가 “요즘 아이들은 공부를 안 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자신이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들여서 노력하고 있는데, 아이들은 시간만 보내려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 때는 정말 다들 열심히 공부했는데….”라고 말합니다.


솔직히 저는 일반 대학이 아니라 신학 대학에 들어갔기에 일반 대학교 분위기가 어떤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저 때의 교수 신부님께서도 “너희들 지독하게 공부 안 한다.”라고 자주 말씀하셨거든요. 기숙사 생활을 하고 있어서, 일반 대학생들보다 더 많이 공부하고 있는 것이 분명한데도 공부 안 한다고 자주 혼내셨습니다.

늘 자기 관점에서만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하긴 운전자들에게 자신의 운전실력이 어떤지를 질문하면 대부분 다른 운전자에 비해 실력이 뛰어난 것으로 생각한다고 하더군요. 자기 관점에서 옳고 그른 것을 보려 하고, 그 입장을 가지고서 다른 이들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 역시 나는 옳고 예수님은 틀렸다는 생각으로 그런 단죄를 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자기 생각이 정답이었을까요? 큰 잘못이었고 후회할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고향 나자렛을 찾아가십니다. 그리고 회당에서 하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매우 중요한 선포를 고향 사람들에게 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반응이 영 이상합니다. 자신의 기준으로만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라며 판단하고 있습니다. 하찮은 목수의 아들인데, 무슨 하늘 나라를 선포하냐는 것이겠지요.

자신이 아는 것이 전부가 될 수 없음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알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그들은 자신이 아는 것 외에는 어떤 것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알기 위한 어떤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기준에 맞지 않는다면서 화만 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엘리야 시대의 사렙타의 과부, 엘리사 시대의 시리아 사람 나아만 이야기를 하면서 하느님의 선택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선민의식에서 벗어나야 함을 이야기하십니다.

우리는 주님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요? 자기 기준만을 내세우고 있다면, 주님께서는 우리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실 것입니다.
인간의 본질은 에상치 못한 일을 하는 것이므로, 모든 인간의 탄생에는 세상을 바꿀 가능성이 수반된다(한나 아렌트).

우울증

우울증은 흔한 정신질환으로 마음의 감기라고 불립니다. 그러나 결코 간단한 병이 아닙니다.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 가지 문제를 일어나게 할 수 있으며, 심한 경우 자살이라는 심각한 결과에 이를 수 있는 뇌질환이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의지가 약해서 그런 것 아냐?”라고 말씀하시는 분이 많습니다. 부정적인 생각을 버리고 긍정적 생각을 가지면 자연스럽게 우울감에서 벗어날 것이라고 말하지만,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고혈압의 원인이 될 수 있는 요인이 200개가 넘는다고 합니다. 혈압은 생물학적 측면에서 보면 아주 단순한 문제입니다. 그런데도 이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 200가지가 넘는데, 하물며 우울증 같은 복잡한 병에는 얼마나 많은 요인이 있겠습니까?

저도 잘 몰랐습니다. 얼마 전에 1,000페이지가 넘는 우울증에 관한 책을 읽으면서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되었을 뿐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하는 모습처럼, 남을 자기 기준에 맞춰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알기 위한 노력을 통해 이해의 시작이 이루어집니다.

지금 힘들어하는 분이 참 많습니다. 이들을 위한 기도가 필요합니다.

 '막연히'사는 사람은 죽음도 '막연해서'두렵다

-전삼용신부-


루카는 성령을 통한 그리스도의 구원 소명을 선포하는 사건이 나자렛에서 일어난 것으로 쓰고 있습니다. 물론 나자렛 사람들은 자신들이 아는 요셉이 메시아가 되었음을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선입관에 사로잡힌 교만을 지적하시고 그들은 그런 예수님을 절벽에서 떨어뜨리려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무 두려움 없이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십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메시아로서의 소명을 선포하는 것과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함은 하나의 사건으로 이어집니다.

     

    누가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한 삶을 살 수 있을까요? 하루하루를 주님 뜻에 따르며 자신을 버린 삶을 사는 사람일까요, 아니면 그냥 조금 더 살고 싶어 하는 사람일까요?

    말기 암 환자들을 많이 접한 경험을 책으로 쓴 김범석 의사가『어떤 죽음이 삶에게 말했다』라는 책에 소개한 죽음을 받아들이는 두 분의 말기 암 환자의 이야기입니다.

  

    70세의 노인 암 환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얼마나 살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의사로서 볼 때 6개월 이상은 힘들 거 같다는 말을 해 주었습니다. 그 환자는 담대하게 그것을 받아들였고 남은 시간 동안 자신이 정말 하고 싶은 일을 다 해보고 떠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 후로 그는 정말 매주 하나씩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해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 거창한 일이 아닌 아내와 바닷가로 여행 가서 해산물 요리 먹기, 종일 바다 보기, 좋아하는 노래를 모아 자식들에게 선물하기, 손주들에게 편지 쓰기, 고향 친구들에게 밥 사주기, 예전에 싸웠던 친구에게 연락하기 같은 일상적이면서도 소소한 일들이었습니다.

  

    그는 매주 병원에 올 때마다 지난주에 자신이 했던 일들을 소상히 늘어놓으며 즐거워했습니다. 진작에 그렇게 살았어야 했다는 말도 덧붙였습니다. 갑자기 할 일이 많아졌고 사는 게 즐거워졌는데 얼마 남지 않아서 몹시 아쉽다는 이야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그는 남은 시간을 즐겁게 보내며 떠났습니다.

  

    김범석 선생을 찾아온 다른 노인 환자도 있었습니다. 그는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의 기대수명을 듣고는 딱 10년만 더 살았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그건 지나친 기대였습니다. 평균적으로 그는 당해 추석도 넘기기 힘들다고 판단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꾸만 ‘10년만 더’를 말했습니다. 물론 모른 척하고 하는 데까지 해보자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다 환자가 의식이 없어지면 그만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의사로서 환자가 현실을 직시하기를 바랐습니다. 그리고 남은 시간도 인생의 귀중한 일부로 만들고 떠나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10년 더 사시면 뭘 하고 싶으세요?”

    “...” 

  

    침묵이 흘렀고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습니다.

    “뭐, 그런 거 있잖아요. 제주도로 가족여행을 가고 싶다거나, 손주가 학교 들어갈 때 교복 한 벌 해 주고 싶다거나, 아니면 고향에 한 번 다녀와야겠다…. 뭐 그런 거요.”

    “...” 

 

    여러 번의 질문에도 그는 끝내 대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막연히’ 좀 더 오래 살았으면 좋겠다는 바람만 있었을 뿐 구체적으로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는 자신도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이런 경우가 특별하지는 않다고 합니다. 오히려 일주일에 하나씩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사람이 이례적이라고 합니다. 사실 평범하고 건강한 사람도 자신이 뭘 원하는지, 무엇에 기쁘고 슬픈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모른 채 그저 막연하게 살아갑니다.

 

    그래서 의사로서 앞 환자의 예를 들어 그분을 도와주기로 했습니다. 다음 외래에 올 때 하고 싶은 일 열 가지만 생각해오라고 숙제를 내주었습니다.

    하루에 한 번 웃을 일 만들기, 핸드폰 사진 매일 찍기, 일주일에 세 번 산책하기, 자식들에게 하루에 한 통 문자 보내기, 아내에게 매일 고맙다고 말하기 같은 소소한 것이면 충분했습니다.

    하지만 숙제가 너무 어려웠는지, 너무 평범해서 특별하게 느껴지지 않았던 것인지, 그는 다음 외래에도 빈손으로 왔고 그렇게 주저하다 추석을 넘기지 못한 채 눈을 감았습니다.

  

    이 두 사례 중 죽음을 덜 두려워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첫 번째 사람이 죽음이 두려워 하루하루 충실히 살려고 했을까요?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오늘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이 두려워합니다. 삶이 막연하니 죽음도 너무 막연해서 두려운 것입니다.

    반면 삶이 해야 할 일로 채워지면 죽음도 해야 할 일의 일부가 됩니다. 그러니 오늘 해야 할 일 중의 하나가 죽음이 되는 것입니다. 죽음도 삶의 일부이기 때문에 삶이 명확할 때 죽음도 명확해집니다.

     

    어느 독특한 월터란 물리학 교수의 동영상이 있습니다. 그는 물리 공식에 광적으로 미쳐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월터 교수는 물리학 수업을 하면서 할 수 있는 것들은 강의실 안에서 실제로 보여줍니다.

    그런데 하루는 월터 교수가 살짝 더 이상했습니다. 15kg 되는 추를 자신의 턱에 갖다 대놓고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저는 믿습니다. 운동에너지 보존법칙을 100% 확신해요. 나 자신은 믿지 못할지라도. 조용히 해 주세요. 장난이 아닙니다. 어제 잠을 거의 못 잤더니 힘드네요. 셋, 둘, 하나.”

 

    추가 다시 돌아올 때 턱이나 목이 부서질 수 있는 상황인데도 학생들 앞에서 자신이 믿는 물리학 법칙이 틀리지 않음을 증명합니다. 에너지 법칙에 따라 추는 자신이 놓은 그 자리 이상 올라올 수 없습니다. 하지만 자신도, 보는 사람도 짜릿합니다.

  

    성령은 이렇게 우리에게 삶의 법칙을 주십니다. 당신 뜻대로 살면 행복할 것이란 법칙입니다. 그리고 그 법칙대로 살다 보면 하루하루가 정말 빡빡합니다. 해야 할 일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 덕분에 행복합니다.

    그리고 그 법칙대로 삶의 일부인 죽음도 주님 뜻대로 받아들이면 행복으로 끝날 것을 알게 됩니다. 법칙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월터 교수처럼 하루하루가 짜릿하면서도 주님의 말씀에 오류가 없음을 체험하며 기뻐합니다.

  

    ‘오늘은 뭐 하며 살지?’라는 식으로 절대 하루를 막연하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도 성령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분명 주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일이 있습니다.

    따라서 전날 잠들기 전에 다음 날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 그래서 꼭 해야 할 일을 두 가지에서 많게는 여섯 가지 정도 정하십시오. 아침에 일어나면 내가 정한 대로 기계처럼 움직이며 먼저 두 가지는 꼭 하십시오.

  

    이렇게 살다 보면 하나의 법칙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성령을 따라 사는 삶은 항상 기쁨으로 끝난다는 것을. 그리고 죽음조차도 하나의 소명임을. 그리고 그 죽음 뒤에 가장 큰 기쁨이 기다리고 있을 것임을.

    그렇게 우리는 죽음 앞에서까지 담대할 수 있어서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도 주님 뜻에 나를 맡기고 마지막 날이라고 여기며 기쁘게 살아갑시다. 하느님 뜻에 살짝 미치면 죽음까지 포함한 매일의 삶이 즐겁습니다.

 -조재형신부-


속담에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있습니다인류의 역사를 보면 속담처럼 이름을 남긴 사람들이 있습니다기원전 500년경에 이름을 남긴 사람들이 있습니다소크라테스부처공자입니다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을 남겼습니다서양 철학을 대표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부처는 깨달음을 이야기하였습니다세상의 모든 고통은 집착에서 온다고 하였습니다그 집착에서 벗어나면 깨달음에 이른다고 하였습니다공자는 세상을 다스리는 원리를 이야기하였습니다. ‘인의예지의 원리입니다. ‘?’라는 질문은 사람과 동물을 구별하는 기준이 되었습니다그 왜라는 질문에 부처는 깨달음을 이야기하였습니다공자는 인생의 길을 이야기하였습니다우리나라에도 이름을 남긴 분들이 많습니다저는 그분들 중에 세종대왕에게 감사드립니다저의 생각과 느낌을 표현할 수 있는 한글을 창제하였기 때문입니다우리는 이 세상에서는 묘비명을 남기지만하느님 나라에서는 우리의 모든 삶이 남아 있을 것입니다.

 

광야에서40일 동안 단식하며 기도하셨던 예수님은 사탄으로부터 3가지 유혹을 받으셨습니다돌을 빵으로 만들어보라는 유혹높은 데서 뛰어내려 보라는 유혹사탄에게 절하면 세상의 권력을 주겠다는 유혹을 받으셨습니다예수님께서는 사탄의 유혹에 이렇게 답하셨습니다. ‘사람은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하느님의 말씀으로 산다하느님을 시험하면 안 된다하느님 이외에 다른 것을 섬기면 안 된다.’ 우리가 살면서 겪게 되는 재물명예권력이라는 유혹을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이겨내셨습니다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공적으로 드러나는 이야기를 듣습니다예수님께서는 회당에 들어가셔서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를 펴서 이렇게 읽으셨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선포하신 말씀을 행동으로 보여주셨습니다과부의 헌금을 칭찬하셨습니다세리의 기도를 하느님께서 들어주신다고 하셨습니다가난한 이들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자비를 베푸는 사람들온유한 사람들평화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복음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은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하느님의 나라가 그들의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예수님께서는 마귀 들린 사람들을 치유해 주셨습니다눈먼 이들의 눈을 뜨게 해 주셨습니다듣지 못하는 이들은 듣게 해 주셨습니다중풍병자는 걷게 해 주셨습니다나병환자는 깨끗하게 해 주셨습니다하혈하는 여인을 치유해 주셨습니다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다고 하셨습니다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는 목자처럼 하느님께서는 회개하는 한 사람 때문에 기뻐하신다고 하셨습니다세상의 죄를 없애시기 위해서 기꺼이 십자가를 지고 가셨습니다고난과 모욕을 참아내셨습니다죽으셨지만 부활하셨습니다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셨습니다.

 

세상에 이름을 남기는 것은 능력과 재능 그리고 업적이 있어야 합니다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그러나 영원한 생명을 주는 하느님 나라에 이름을 남기는 것은 능력재능업적과는 크게 상관이 없습니다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고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길을 삶을 통해서 실천하면 됩니다. “형제 여러분죽은 이들의 문제를 여러분도 알기를 바랍니다그리하여 희망을 가지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처럼 슬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사명의 본질은 이 세상 전체, 인류 전부를 하느님 아버지께로 인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양승국신부-

 

사제가 된 후 부모님이 살고 계시던 본당에 가서 처음으로 강론할 때의 기억이 생생합니다. 참으로 기쁘고 행복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두렵고 떨렸습니다. 나름 감동적인 강론을 한번 해보려고 얼마나 준비에 준비를 거듭했는지 모릅니다. A4지 한 장 정도의 짧은 강론을 며칠에 걸쳐 준비했고, 그걸 또 거울을 보고 수십 번도 더 예행연습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오늘 복음에서 본격적인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께서도 당신의 고향 나자렛 회당에서 첫 강론을 하시는데, 아마 예수님께서도 마음이 비슷하셨을 것입니다. 요즘 미사 때 마다 강론 전에는 성경 말씀이 먼저 선포되듯이, 예수님께서도 강론을 하시기 전에 한 성경 구절을 찾으셔서 읽으셨는데, 정말이지 기가 막힌 성경 구절이었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은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이사야서 61장 1~2절) 

 

한 문장 한 문장, 글자 한자 한자가 다 예수님 당신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구절을 봉독하심을 통해 앞으로 펼쳐질 공생활 기간 동안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명확히 밝혀주신 것입니다.

  

회당 안에 있던 청중들은 이제 성경 말씀이 선포되었으니, 길고도 장황한 강론이 이어지겠거니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강론은 딱 한 마디였습니다. 1초밖에 안 걸렸습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복음 4장 21절)

  

아마 예수님께서 지금 이 순간 공생활을 하신다 해도, 절대로 강론 길게 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야말로 핵심중의 핵심만, 촌철살인의 한 말씀만 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단 한 마디 강론 말씀에 대한 반응은 다양했습니다. 짧지만 임팩트 있는 말씀, 권위로 가득한 간결한 강론에 놀라워하고 기뻐하고 감사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름 한편으로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하면서 도통 예수님을 메시아로 수용하지 않았습니다. 더 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 말씀에 화가 잔뜩 나서 그분을 회당에서 내쫓았고, 고을 밖으로 내몰았습니다. 벼랑 끝까지 끌고 가 절벽 아래로 떨어뜨리려고 했습니다.

  

이 얼마나 큰 신성모독이며 반역입니까? 자신들을 구원하러 오신 하느님의 아들,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께 감사하고 박수를 쳐도 부족할 터인데, 노골적인 살의로 그분을 죽이려고 한 것입니다.

  

나자렛 사람들이 예수님을 배척한 가장 큰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봅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메시지가 자신들의 입맛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지상적 번영, 물질적인 부와 정치적 권력, 이스라엘의 위대함과 관련된 공약의 말씀을 듣고 싶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물리치셨던 빵, 기적, 권세를 다시 한 번 요구했던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들의 이기적인 바램들과 교만한 허영심을 끝도 없이 충족시켜주시는 기적의 요술방망이 같은 분이 아님을 기억해야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파견되신 가장 큰 이유는 이 세상 전체, 그리고 인류 전부를 하느님 아버지께로 이끌어가기 위해서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 사명의 본질입니다.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반영억신부-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어떻게 혼을 내줄까? 고민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소리소문없이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버렸으면 좋으련만 그게 여의치 않자 결국은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아닌 척하면서 자기 뜻을 관철합니다. 때로는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있고, 쓴소리를 들을 수도 있으며 그것을 통해 오히려 자기 계발의 기회로 삼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하든 눌러버리고자 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남의 결정을 받아들이기보다는 오히려 결정하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마음이 더 크게 우리를 지배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려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무지를 일깨우는 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모두가 예수님을 좋게 생각했습니다(사도10,38). 그가 하는 말씀이 진리요, 은총의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가 목수 요셉의 아들로 알려지면서 그 권위는 사라져 버렸습니다. 예수님은 여전히 은총의 보유자이시고 권위를 가지고 계셨지만, 사람들의 편견과 선입견은 주어진 은총을 놓치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아는 게 병’입니다.

 

사실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면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고 얻게 됩니다. 그러나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이 약속된 구세주시라는 표징과 놀라운 일들을 보여주길 원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구미에 맞는 표징을 제시하기보다는 오히려 믿음을 요구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불경한 자로 단죄하고 죽이려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교육받은 편견대로 판단하며 자기들 식으로 구원을 상상하였습니다. 고은 시인이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이라고 통찰한 것처럼 힘이 빠지고 내 것을 내려놓아야 '새로운' 눈을 뜨게 됩니다.

 

이러한 일은 우리에게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받아들이고, 그러다가 의심하며 심지어 예수가 밥 먹여 주냐? 고 외면하기도 합니다. 자기의 기대가 자기 방식으로 채워지지 않을 때 혼란을 겪으며‘다 필요 없다’는 결론에 이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여전히 당신의 가실 길을 가십니다(루카 4,30). 일찍이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하신 말씀 그대로 입니다.“비와 눈은 하늘에서 내려와 그리로 돌아가지 않고 오히려 땅을 적시어 기름지게 하고 싹이 돋아나게 하여 씨 뿌리는 사람에게 씨앗을 주고 먹는 이에게 양식을 준다. 이처럼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이사5510-11).

 

결국 ‘주님의 생각과 우리의 생각이 같지 않고 주님의 길과 우리의 길이 같지 않습니다. 그분의 길은 우리의 길보다 높고 주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보다 높습니다.’ 따라서 주님을 바라보며 그분의 삶을 우리가 살아야지 그분이 내가 원하는 대로 맞춰주기를 바라서는 안 되겠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시고 이루시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가운데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길 희망합니다. 내 생각과 욕구에 맞지 않으면 내 것을 바꾸어야지 주님께 바꾸라고 떼를 쓰고 배척해서야 되겠습니까? 그러나 현실은 여전히‘너 죽을래!’'살려면 내 입맛에 맞춰!' 하고 구박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의 소리에도 귀를 기울여 보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복음>

 -송영진신부-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가 그분께 건네졌다.

그분께서는 두루마리를 펴시고 이러한 말씀이 기록된 부분을 찾으셨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예수님께서 두루마리를 말아 시중드는 이에게 돌려주시고

자리에 앉으시니,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의 눈이 예수님을 주시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17-21)”

 

예수님께서 이사야서 61장에 있는 ‘구원의 기쁜 소식’에 관한 예언을

읽으신 뒤에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라고

말씀하신 것은, “오늘 메시아 시대가 시작되었다.” 라고 선포하신 일입니다.

<실제로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그 날, 메시아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루카 2,11).

예수님의 선포는, 이제 당신이 구세주로서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하겠다는 선언입니다.>

구세주께서 세상에 오셨다는 소식도 ‘기쁜 소식’(복음)이고, 메시아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선포도 ‘기쁜 소식’(복음)이고, 구세주로서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하겠다는 예수님의 선언도 ‘기쁜 소식’(복음)입니다.

 

여기서 ‘가난한 이들, 잡혀간 이들, 눈먼 이들, 억압받는 이들’이라는 말은,

구세주께서 세상에 오시기 전의 인류의 상태를 상징하는 말로 해석됩니다.

예수님의 복음은 소외계층 사람들만을 위한 복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한 복음이고, 예수님은 소외계층 사람들만을 구원하려고

오신 분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오신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소외계층 사람들에게 더 많은 관심과 사랑을 쏟으셨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득권층과 지배계층 사람들을 구원에서 배제하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복음은, 소외계층에 속한 사람들에게는 ‘위로와 희망의 복음’이고,

기득권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 들어가는 ‘하느님 나라’는 차별도 없고,

역차별도 없는 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지역에서 활동을 시작하시고, 주로 그 지역에서

활동하신 것을, 소외계층 사람들만을 상대로 활동하신 것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있는데, 그 생각은 너무 좁은 생각입니다.

그리고 그 생각은 ‘모든 사람을 위한 복음’을,

‘특정 계층만을 위한 복음’으로 가두어 놓는 생각입니다.

예수님께서 주로 갈릴래아 지역에서 활동하신 것은, 그 곳이 이방인 선교를 위한

전초기지로 삼을만한 지역이었기 때문으로 해석됩니다.

(‘이방인 선교’ 라는 말은, 전체 인류를 대상으로 한 선교활동을 뜻하는 말입니다.)

또 갈릴래아 지역 사람들이 남부 유다 지역과 예루살렘 사람들보다

더 개방적이었던 것도 그 지역에서 활동을 시작하신 이유에 포함될 것입니다.

(여기서 ‘개방적’이라는 말은,

좀 더 열린 마음으로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유다 지역과 예루살렘 사람들은 갈릴래아 지역 사람들보다 훨씬 더 폐쇄적이고

보수적이어서, 만일에 그곳에서 복음 선포 활동을 시작하셨다면

처음부터 많은 어려움을 겪으셨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을 ‘마리아의 노래’와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루카 1,50-53).”

이 노래는 아무도 소외되지 않고 모든 사람이 구원받게 되었음을

찬양하는 찬미가입니다.

이 찬미가를 겉으로만 보면, ‘교만한 자들, 통치자들, 부유한 자들’은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으로 생각하기가 쉬운데, 그것은 오해이고,

하느님의 뜻은 ‘모든 사람의 구원’입니다.

(물론 교만한 자들과 통치자들과 부유한 자들은 구원받으려면 회개해야 합니다.)

이 노래에는,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세속의 권력이나 재물이 아니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만일에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하느님은 찾지 않고 세속의 권력과

재물만 욕심낸다면, 세속의 기득권층 사람들과 다를 것이 없게 됩니다.

 

“그러자 모두 그분을 좋게 말하며,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은총의 말씀에

놀라워하였다. 그러면서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하고 말하였다(루카 4,22).”

 

이 말은, 마태오복음과 마르코복음에 있는 이야기를 간단하게 압축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고향에 가시어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셨다. 그러자 그들은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 그런데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마태 13,54-57ㄱ; 마르 6,1-3).”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을

‘은총의 말씀’이라고 생각하긴 했습니다.

그러나 ‘복음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습니다.

복음(기쁜 소식)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니 복음을 듣고서도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가난한 목수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모습에 놀라기만 했을 뿐입니다.

루카복음의 “모두 그분을 좋게 말하며” 라는 말은, 예수님을 좋게 말했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은총의 말씀이라는 것을 인정했다는 뜻입니다.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라는 말은, 마태오복음과 마르코복음에

있는,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라는 말에 연결됩니다.

<복음(기쁜 소식)을 전해 주어도 기뻐하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구세주께서 주시는 구원과 생명이 아닌,

다른 것을 얻고 싶어 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자렛 사람들에게, ‘사렙타의 과부’의 이야기와

‘시리아 사람 나아만’의 이야기를 하신 것은(루카 4,25-27),

이스라엘 민족에 속해 있다는 특권의식과 자만심을 버리고,

회개하고 복음을 받아들이라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나자렛 사람들은 화를 내면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습니다(루카 4,29).

<복음은,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는 ‘생명의 은총’이 되지만,

믿지 않고 거부하는 사람의 경우에는 그 자신에게 ‘죽음의 저주’가 됩니다.>

 복음: 루카 4,16-30: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주고

 -조욱현신부-


예수께서는 메시아의 구원 시대가 지금 당신에게서 시작된다는 것을 명시한 이사 61,1을 읽기 위해 나자렛 회당에 오셨다. 예수께서 전도를 시작하시며 하신 첫 발언은 이사야의 말을 인용한,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대한 말씀이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18-19절)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왜 오셨는지, 또 무엇을 위해서 이 세상에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예수님의 생애의 핵심을 드러내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이 성서 말씀을 읽고 나서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21절) 하셨다. 그 순간 그분의 가르침이 시작되었다. 그분은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셨고 그들을 가장 먼저 축복하셨다. 그러나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22절) 하면서 배우지도 못한 사람이 글을 읽는 것을 보고 신기해하지만, 은총의 말씀에 놀라면서도 그 말씀을 하찮게 여겼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왜 고향에서 기적을 행하지 않으시는지 엘리야가 사렙타 마을의 과부에게만 갔고, 엘리사가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고쳐준 이야기를 들어 설명하셨다. 주님의 이 말씀은 완고한 이스라엘 대신 장차 당신을 맞아들여 치유 받을 다른 민족들을 가리킨다.

 

그리하여 나자렛 사람들은 이 말씀에 분노하여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다. 그들은 주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았다. 그들의 난폭함은 터무니없는 것이었고, 질투는 걷잡을 수가 없었다. 주님을 산 위 벼랑으로 끌고 가 거기에서 밀어버리려고 했다. 그러나 그분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 아직 수난의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그 말씀을 알아듣기 위해서는 신앙이 필요했는데 신앙의 눈이 필요했는데 그러한 눈을 가지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 문제였다.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배경을 알고 있다는 것 때문에 그들의 마음과 눈은 가려져 있었으므로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일생을 통해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그렇게 하셨다면,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는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가? 우리의 정신, 주어진 시간, 가진 능력을 무엇을 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고 있는가? 우리가 예수님처럼은 다 못하더라도 우리의 처지에서 내 능력껏 찾으면 할 수 있는 것이 많이 있을 것이다. 우리도 다른 이들 앞에 작은 구세주, 다른 구원자가 되도록 노력해야 하겠다. 항상 조그마한 일에서부터 주님의 뜻을 실천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구원을 전해줄 수 있는 우리 되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 21)

-한상우신부-


막아 설 수
없는 계절의
흐름이다.

말씀은
순리이다.

그 누구도
말씀을
역행할 수
없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어야 할
말씀이다.

말씀이
우리의
감춰진
선입견을
읽어준다.

말씀도
진리도
고향에서만은
환영을 받지
못한다.

환영을
받지 못해도
오늘 하루는

말씀이 있기에
생명의
말씀으로
소중하다.

선입견에
휘둘리지
않으시는

말씀의
주님이시다.

말씀은 언제나
말씀의 발자취를
남긴다.

말씀의 발자취는
이해와 긍정의
발자취이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이다.

말씀이
선입견으로
가득한 이곳을
비추며
찾아왔다.

나의 뜻을
내려놓고
말씀을
받아들이는
순간 복음이
되었다.

말씀으로
이끌어가시고
말씀으로
완성하시는
말씀의 오늘이다.

우리자신이
말씀으로
먼저 맑아져야 할
오늘 하루이다.

대자연은
스스로
그 길을
걸어간다.

계절과
계절 사이

사람과
마음 사이에
완성하시는
말씀이 있다.

말씀을
따른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 끝까지 희망하라는 메시지를 듣습니다.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루카 4,18)
예수님께서 나자렛 회당에서 선포하신 말씀은 그분의 온 생애를 요약합니다. 예수님의 강생은 성부 하느님께서 보내시고 성령께서 움직이신, 삼위일체 하느님의 구원사업의 전체그림입니다.

그날 나자렛 회당에서 예수님께 닥친 일들 역시 그분 공생활이 그대로 녹아있는 축소판과 같습니다. 그때 찾아 읽으셨던 이사야 예언서의 말씀대로 가난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구원하러 오신 소명이나, 일부는 그분을 좋게 말하며 받아들이고, 일부는 그분 출신을 트집 잡아 거부하는 모습들이 그렇습니다.

또 표징을 요구하는 이들에게 이방인과 죄인들이 먼저 구원된다는 예수님의 일침, 그로 인한 고향 사람들의 반격, 살해 위협,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들을 떠나시는 모습까지 마치 예수님의 전 생애를 한 편의 파노라마로 편집한 것 같습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이 나자렛 회당 사건을 예수님이 광야에서 유혹받으신 뒤 갈릴래아 전도를 시작하신 직후에 배열해서 마치 하느님 구원 사업의 발대식과 같이 펼쳐놓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수난과 죽음, 부활이 뺄려야 뺄 수 없는 중심 요소로 자리하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루카 4,30)
나자렛 주민들이 예수님을 내몰았던 "고을 밖"이 십자가형이 이루어진 예루살렘 성문 밖 골고타와 겹칩니다. 하지만 아직 때가 되지 않았기에 예수님은 그들 손을 벗어나 고향을 떠나십니다.

고향 나자렛이니 안식일 회당에 성모님과 그분의 형제들도 함께 있었을 확률이 크지요. 그들이 이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어디쯤 어떤 심정으로 있었을지, 그리고 예수님이 떠나신 후에도 놀란 가슴을 졸이며 얼마나 불안했을지 상상해 봅니다. 인생에서 시련과 배척과 죽음의 고통을 피할 길 없는 우리 모두의 심경과 다르지 않았겠지요.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죽은 이들의 문제"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셨다가 다시 살아나셨음을 우리는 믿습니다."(1테살 4,14)
죽음이 사람이라면 누구나 의문과 두려움을 갖는 실존적 문제인데, 박해와 순교로 늘 죽음의 위협에 직면해 있던 초세기 신자들에게는 더 말할나위 없는 현안인 셈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우리 구원을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가 수난과 죽음을 겪으시고 부활하여 하느님 오른편에 계신 예수님 생애 전체가 표징이고 희망입니다. 부활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믿음이 우리 구원의 여정을 지탱해 줍니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늘 주님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말로 서로 격려하십시오"(1테살 4,17)
죽음을 건너 부활로, 고통 이후에 영원한 행복으로, 희생을 너머 축복으로, 인내 뒤에 열매로...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신앙의 여정은 당장의 실패처럼 보이는 어둠과 시련을 딛고 승리로 활짝 피어나는 빛의 길, 생명의 길, 부활의 여정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
예수님은 배척과 모욕, 수난과 죽음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결국 승리의 길을 가셨습니다. 오늘 나자렛에서 벌어진 에피소드는 그분 생애의 골자를 보여주면서, 또 우리 삶의 구체적 순간마다에 희망을 부여합니다.

사랑하는 벗님! 삶의 질곡을 거치면서 갈등과 실패, 질병과 이별, 무기력과 슬픔 등의 도전과 시련에 맞닥뜨리더라도, 오늘 말씀 속 예수님과 함께 그 어둠을 가로질러 당당히 앞으로 나아가시기를 기원합니다. 환경적 한계와 스스로의 가난함을 십자가로 등짐 지고도, 영원한 승리인 "부활"이라는 눈부신 정점을 향해 힘 내어 나아가는 여러분 모두를 격려하며 축복합니다.   

 <희망없는 자의 슬픔이 아니도록>

 -김찬선신부-

 

"형제 여러분, 죽은 이들의 문제를 여러분도 알기를 바랍니다.

희망을 가지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처럼 슬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지난봄 저의 제자가 젊은 나이에 죽었을 때

저는 제 일생을 통틀어 제일 많이 울었습니다.

어머니 돌아가셨을 때보다도 더 많이.

 

희망을 가지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처럼 슬퍼하지 말라는

오늘 바오로 사도 말씀을 들으면서 그때 그렇게 슬펐던 것이 생각났습니다.

 

저의 제자가 죽은 것은 이 세상을 떠난 것이 아니라 희망하던 대로 

하느님께로 돌아간 것이라는 믿음은 제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나

얼마 전 제 동창 신부가 죽었을 때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그 슬픔은 믿음과 희망이 없어서가 아니었습니다.

 

어찌 보면 그가 죽은 것은 우리를 떠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로 간 것이며

희귀 암으로 고통스러웠던 몇 년을 생각하면 오히려 고통을 끝낸 것이니

슬퍼할 일이 아니라 기뻐할 일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울었던 것은 슬픔이라기보다는 서러움이었습니다.

그의 삶이 서러웠습니다.

일찍 죽은 것이 슬픈 것이 아니라

이 세상 고생만 하다가 죽은 것 같아서 서러웠던 것입니다.

 

아니, 고생만 하고 행복은 없었던 것 같아서 서러웠습니다.

그러니 이 서러움 안에는 저 세상에서만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도 행복했기를 바라는 그 바람이 있었던 거지요.

 

그런데 제 제자가 이 세상에서도 행복했기를 바라는 것은

물론 제자에 대한 저의 사랑 때문인 것이 분명하지만

그래도 부끄러운 것은 저의 희망과 기쁨과 행복이

아직도 초월적이지 못하다는 점이었습니다.

 

천국의 행복을 향한 희망이 이 세상 모든 고통과 불행을

뛰어넘게 할 정도의 희망이 되지 못했다는 점이었습니다.

 

특히 올해 김대건 신부님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기 때문인지

그 부끄러움이 더 큽니다.

 

김대건 신부님은 제 제자보다 훨씬 일찍 돌아가셨지요.

생각해보십시오. 25년을 사시고 돌아가셨습니다.

 

김대건 신부님의 고통은 제 제자보다 훨씬 컸지요.

가족이 풍비박산이 되고 일생이 고통뿐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김대건 신부님이 불행하셨습니까?

김대건 신부님이 당신은 불행하다고 생각하셨을까요?

김대건 신부님이 남긴 글들과 행적을 보면 불행의 흔적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의 모든 고통과 불행을 초월케 한 것이 무엇이었겠습니까?

아무리 고통이 커도 당신이 하느님 사랑 안에 있다는 그 믿음이었고,

이 세상의 짧은 고통을 넘는 영원한 생명과 행복에 대한 희망이었지요.

 

그러므로 이 세상의 고통이 그렇게 서럽고 그래서 자기 연민에 빠져 있다면

그것은 고통 가운데 있지만 하느님 사랑 안에 있다는 체험이 없다는 표시요,

모든 고통을 초월케 하는 초월적 희망이 없다는 표시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의 죽음을 슬퍼함이 아무리 사랑일지라도

희망을 가지지 못하는 사람처럼 슬퍼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9년 9월 2일 연중 제22주간 월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