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7월 27일 연중 제17주간 화요일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사람의 아들이요,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하늘나라의 자녀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자녀를 말하는 것이다.
(마태오 13,36-43)
"He who sows good seed is the Son of Man,
the field is the world,
the good seed the children of the Kingdom.
The weeds are the children of the Evil On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최종훈신부-
코로나 시대에 생긴 ‘살고픔’이라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무엇을 먹지 못하면 배고픔을 느끼듯 사람들을 만나지 못해서 느끼는 ‘살고픔’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만나 인사 나누고, 서로 안아 주고 눈을 맞추며 함께 눈물을 흘리면서 위로해 주는 것을 그리워하는 살고픔의 시대가 되었다고 합니다. 본당 소임을 맡지 않고 있는 사제에게도 신자들에 대한 살고픔이 있는 것 같습니다. 어려움과 고민을 공유하고 많은 대화를 통하여 문제를 해결해 나가면서, 같은 것을 보고 살아간다는 기쁨과 위로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바로 신자들에 대한 살고픔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신자들에게 사제는 어려운 사람입니다. 친해지고 싶지만 언제나 먼 발치에서 바라보는 존재지요. 그것은 존경의 의미일 수도 있지만, 때로는 자신의 존재가 초라하게 느껴져 다가가지 못하기도 합니다. 또한 늘 많은 사람에게 둘러싸여 있으니 접근 자체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교회 내 봉사 등 어떠한 계기로 만남이 잦아지고, 서로 많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사제에 대한 거리감은 점차 사라지기 마련입니다.
예수님 주위에도 늘 많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분께서 놀라운 기적을 행하셨고, 그분의 말씀에 힘과 권위가 있어 일반 사람들은 그분께 함부로 접근하지 못하였습니다. 가까이 다가가려고 해도 쉽게 다가갈 수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을 뵐 수도 가까이 다가갈 수도 없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밭의 가라지에 대한 비유 말씀을 설명해 달라고 거리낌 없이 예수님께 청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특별하게 느껴지는 이 일이 제자들에게는 일상과도 같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언제나 그분 곁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더 많이 듣고 더 많이 이야기하고 더 많이 그분을 알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더 많이 묻게 되고 더 자연스러워지고 더 친근하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을 더 가까이에서 만나려고 구약에서 성막을 만든 것처럼, 거룩하신 하느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하늘을 찌를 듯 높다 하더라도, 우리의 삶 가까이에서 만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야 그분을 알게 되고 친근해집니다.
예수님에 대한 살고픔을 가지십시오. 늘 그분 가까이에서 그분과 함께 지내십시오. 더 많이 묻고 더 많이 알아가고 그래서 더 많이 사랑하십시오. 그러면 더 많은 것을 예수님에게서 받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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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저녁 6시에 만나기로 했는데 저녁 5시 50분에 온 사람과 저녁 6시 10분에 온 사람 중에 누가 약속을 지킨 것일까요? 둘 다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일찍 온 사람이 약속을 지킨 것이고, 늦게 온 사람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부모님께 매주 한 번씩은 꼭 연락드리겠다고 약속하고서는 일주일에 한두 번 이상 연락하는 사람과 바쁘다는 이유로 한 달에 한두 번만 연락하는 사람 중에 누가 약속을 지킨 것일까요? 당연히 일주일에 한 번 이상 연락한 사람입니다.
약속이라는 것은 당연히 지켜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에게 더 나은 평가를 받을 수 있는 길은 약속 이상의 것을 지켰을 때였습니다. 6시 약속인데 일찍 나온 사람에게는 약속을 잘 지킨다는 평뿐 아니라 신뢰할 수 있는 말까지 듣게 됩니다. 부모에게 자주 연락한 사람은 약속을 잘 지킨다는 것 이상으로 효심이 지극한 사람이라는 말도 듣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과 많은 약속을 합니다. 그런데 약속한 만큼만 하면 충분할까요? 약속을 지키는 것은 당연하고, 그 이상을 행할 수 있어야 주님의 인정을 받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기도와 묵상, 봉사, 희생, 자선 등의 행동 자체에만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그 이상을 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가리지 비유 말씀을 설명하십니다. 수확 때에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태워 버린다고 하십니다. 이처럼 우리도 세상 종말에 심판을 받게 되는데, 남을 죄짓게 하는 자와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 모두가 불구덩이에 던져진다고 하십니다. 이렇게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남들처럼 사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또한 남들의 나쁜 점들만 배우고 좋은 점들을 외면하는 삶으로도 절대로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또 자신의 모습이 지금으로도 충분하다는 안일한 마음을 가지시는 분도 있습니다. 이 역시 하늘나라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하늘나라에 적합한 사람은 지금의 모습 이상을 실천하는 사람이 아닐까요? 지금보다 조금만 더 사랑하는 사람만이 하늘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게 됩니다.
이 가라지 비유를 통해 우리 인생을 소중하고 귀하게 다루어, 우리의 인생을 알차게 알곡으로 여물게 해야 한다는 마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즉,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기다려 주시나 영원히 기다려 주시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인생을 낭비해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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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살짜리 아이가 임신했습니다. 이제 겨우 중학생의 나이입니다. 학교에서 난리가 났을 테고, 혹시 뉴스에도 나올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아이의 집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온 집안이 뒤집혀질 일입니다. 그런데 이 상황이 조선 시대 이야기라면 어떨까요?
춘향전에 나오는 춘향이 나이가 15살 즈음이라고 합니다. 과연 사회적 물의를 일으킬만한 사건이었을까요? 현대에도 예멘 여성의 절반 이상이 18세 이전에 결혼한다고 합니다. 생각해보니 성모님도 예수님 잉태하셨을 때의 나이가 15세 즈음이었습니다.
지금의 큰 문제라는 것이 시대와 장소에 따라서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조금만 관점을 넓히면 이해하지 못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단지 ‘문제’라고 규정을 내리고, 문제의 이유만을 찾았던 것은 아닐까요?
서로를 진심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세상을 꿈꿔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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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을 "아빠!"라고 부르는 순간부터 가라지에서 밀이 되는 이유
-전삼용신부-
오늘은 예수님께서 ‘밀과 가라지의 비유’를 제자들에게 설명해 주십니다. 밀과 가라지는 잘 구별이 되지 않아서 다 자라고 나서 마지막 때에야 심판이 내려집니다.
지금은 두 자매가 똑같이 맷돌질한다고 하더라도, 두 형제가 똑같이 밭을 간다고 하더라도 둘 중의 하나는 밀이고 둘 중의 하나는 가라지일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이 똑같이 성당 봉사를 열심히 하고 있어도 한 사람은 밀이고 한 사람은 가라지일 수 있습니다. 겉모양으로는 구분이 안 되는 게 밀과 가라지입니다.
내가 밀인지, 내가 가라지인지 개인적으로 구별하는 방법이 있는데 시간에 따른 ‘변화’를 보는 것입니다.
작년에 밀이었으면 올해도 밀이고, 작년에 가라지였으면 올해도 가라지일 것입니다. 그것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런데 작년에 작은 밀이었다면 올해는 더 밀이 될 것이고, 작년에 덜 가라지 같았다면 올해는 더 가라지 같을 것입니다. 이것으로 구분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가리옷 유다와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는 더 그리스도답게, 그렇지 않은 가라지는 예수님의 모습과 더 상반되게 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라지를 말씀하시는데, “그러므로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태우듯이,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사람의 아들이 자기 천사들을 보낼 터인데, 그들은 그의 나라에서 남을 죄짓게 하는 모든 자들과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을 거두어,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곧 가라지는 ‘남을 죄짓게 하고 불의를 저지르는 자’입니다. 물론 밀도 죄를 짓습니다. 그러나 작년과 올해를 비교해 볼 때, 올해 덜 죄를 짓는 사람은 밀이고 더 죄를 짓는 사람은 가라지입니다.
그렇다면 가라지에서 밀이 될 수는 없는 것일까요? 성령의 씨앗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를 믿음을 줍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아빠!”라고 부를 수만 있게 된다면 그 사람은 이미 아무리 많은 죄를 짓고 있어도 가라지에서 밀로 돌아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자신이 변해가는데 자신이 가라지처럼 변하는지, 밀처럼 변하는지 그 기준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기준은 하느님을 똑같이 “아빠, 아버지!”로 부르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2015년 미국 마이애미의 한 재판장. 판사 ‘민디 글레이저’는 범죄자 ‘아서 부스’를 재판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50세였던 그는 절도 및 도주 혐의로 체포되어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피고인을 보고 판사는 느닷없이 웃음을 지었습니다. 피고인의 이름과 얼굴을 확인한 판사는 재판과 상관없는 질문을 하나 던집니다.
“혹시 노틸러스 중학교에 다니셨나요?”
그러자 피고인은 “오, 세상에!”를 연발하며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합니다. 피고인도 판사가 중학교 때 친구였던 것을 알아보았던 것입니다.
노틸러스 중학교는 미국 마이애미에 있는 명문 학교입니다. 둘은 이곳에서 학창시절을 함께 보냈던 것입니다. 절친했던 둘은 모두 우수한 성적을 보이는 모범생이었습니다. 언어 과목에 강점을 보였던 민디 글레이저는 판사가 되기를 꿈꿨고 수학과 과학을 잘했던 아서 부스는 신경외과 의사가 되기를 꿈꿨습니다.
하지만 17살이 되어 아서 부스는 도박과 마약에 빠졌고 결국 고등학교를 중퇴하였고 급기야 남의 돈에 손을 대며 절도죄로 체포되었습니다. 아서 부스가 징역형을 선고받은 해에 민디 글레이저는 대학을 졸업하고 로스쿨에 입학하였습니다.
10년간의 수감생활을 마치고 32세에 취직준비를 시작한 아서 부스는 범죄자를 받아 주는 직장은 찾을 수 없었고 다시 마약에 중독되어 도박에 손을 대기 시작하였습니다.
같은 시기 민디 글레이저는 판사가 되었고 아서는 얼마 안 가 또다시 절도죄로 체포되었습니다. 그리고 30년 만에 같은 중학교에서 모범생으로 출발한 둘은 판사와 피고인으로 만나게 된 것입니다.
민디 글레이저는 말합니다.
“항상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했습니다. 중학교 때 정말 좋은 아이였습니다. 친구들이랑 같이 축구도 자주 했었는데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거기서 뵙게 되어 정말 유감입니다. 아서 부스씨, 앞으로 당신이 스스로 변화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더 슬픈 건 우리가 벌써 이만큼 늙었다는 거죠. 진심으로 행운을 빌게요.”
이후 아서는 보석금 4,800만 원의 판결을 받고 10개월의 수감생활을 마치고 출소했습니다. 그리고 민디 글레이저 판사는 직접 마중을 나와 친구의 새 출발을 응원해줬습니다.
아서 부스는 말합니다.
“판사가 된 친구와의 만남은 제게 큰 충격을 가져다줬어요. 앞으로는 성실히 약물치료도 받고 똑바로 살아가겠습니다. 이제는 자포자기가 아닌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 볼게요.”
재판을 받을 때 아서 부스는 거의 오열하다시피 눈물을 흘렸습니다. 왜였을까요? ‘비교할 대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신도 저렇게 멋진 사람이 될 수 있었음을 자신의 비교 대상을 바라보는 바로 그 순간 비로소 깨달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이 어떻게 변하는지 비교할 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잘못된 방향으로 변화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잘못된 방향으로 나가도 바로 알아차릴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자신을 비교해야 할 그 대상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와 나의 삶을 비교하려면 나도 그리스도와 같은 형제임을 믿어야 합니다. 민디 글레이저 판사와 아서 부스가 같은 학교에서 같은 우등생이 아니었다면 아서 부스가 그렇게 살아온 세월을 보며 오열할 필요는 없었을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을 함께 “아빠!”라고 부르지 못하면 그분 아드님이신 그리스도와 내가 같아야 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어차피 출발점이 다르다면 말입니다.
따라서 밀은 하느님을 “아빠!”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부터 가라지가 밀이 될까요? 하느님을 “아빠!”라고 부르는 순간부터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우리 비교 대상이 됩니다. 그러면 더는 그분의 모범과 멀어질 수가 없기에 가라지가 되는 일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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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형신부-
부르클린 성당 미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다른 모임이 있었습니다. 짐이 있어서 신문사에 갖다 주시길 부탁했습니다. 형제님은 기쁜 마음으로 신문사에 갖다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돌아와 보니 작은 문제가 생겼습니다. 형제님이 문을 이중으로 잠갔습니다. 저는 비밀번호로 문을 열기에 이중으로 잠그면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다음날 직원들이 출근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옆에 있는 성당 사제관에서 하루 신세를 지기로 했습니다. 형제님은 미안한 마음에 칫솔, 양발, 속옷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여름이라 옷이 필요할 것이라고 하면서 갖다 주었습니다. 곰곰이 생각하니 신문사로 들어갈 방법이 있었습니다. 창문 하나는 잠그지 않았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창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이중문을 열었습니다. 잠시 당황했지만 신문사로 들어올 수 있었고, 덤으로 선물까지 받았습니다.
뉴스를 들으니 미국의 항공사에서 비행기 200대를 주문했다고 합니다. 코로나 시기가 진정이 되면 사람들이 여행을 갈 것을 예측하고 미리 주문했다고 합니다. 작년에 비행기를 이용할 때는 좌석의 여유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빈 좌석이 거의 없습니다. 용수철이 누르면 더 높이 튀어 오르듯이, 그동안 억제되었던 여행에 대한 수요가 늘어날 것 같습니다. 성당에서 청년들을 위해서 주일 미사 후에 식사 자리를 마련하였습니다. 정말 많은 청년들이 모처럼 모여서 정을 나누었습니다. 1년 넘게 만나지 못하였기 때문인지 모두들 반가워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식당에서도 비슷한 모습을 보았습니다. 작년에는 좌석의 20%만 손님을 받았어도 자리가 있었습니다. 요즘은 100% 손님을 받는데도 기다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항공사가 비행기 200대를 주문하듯이, 예비자 교리에도 많은 분들이 오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더욱 활기를 얻어 풍성해지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밀과 가라지의 비유를 설명해 주십니다. 밀은 나누려는 마음이고, 더 주려는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밀은 베푸는 것이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은 사람들이 보기에는 손해 보는 것 같지만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하느님의 축복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가라지는 빼앗으려하는 마음이고 소유하려는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시기와 질투의 마음 역시 가라지입니다. 이런 마음은 현실의 세상에서 조금 이익을 얻을 수 있지만 하느님과는 점점 멀어지는 마음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자비하고 너그러운 하느님이다. 분노에 더디고, 자애와 진실이 충만하며, 천대에 이르기까지 자애를 베풀고, 죄악과 악행과 잘못을 용서한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더 주려고 한다면, 더 베풀려고 한다면 우리는 ‘밀’이 되어 많은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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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마르고 척박한 사막 한 가운데를 지날 때도 자비하신 주님께서 늘 우리와 동행하고 계심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양승국신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이집트를 탈출하는데 선봉장이 되었던 영도자 모세의 삶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파라오의 횡포를 뒤로 하고 갈대 바다를 건너 탈출한 기쁨은 잠시뿐이었습니다.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 앞에 펼쳐진 장면은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이나 지상낙원이 아니었습니다. 끝도 없이 펼쳐진 황량한 광야를 지나며 노숙을 계속해야 했습니다.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기약 없는 나그네 신세였습니다. 찌는 듯한 불볕더위와 살을 에는 강추위, 굶주림과 갈증의 연속이었습니다.
요즘 캠핑이나 차박이 유행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일주일, 한 달, 일 년 계속된다면 다들 힘들어 혀를 내두를 것입니다. 며칠만 지나도 어서 빨리 안락하고 쾌적한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안달이 날 것입니다.
큰 무리를 이끌고 앞으로 나아가느라 정신없던 모세의 귀에 슬슬 불평불만이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매일 이런 저런 민원이 접수되어 스트레스가 많았을 것입니다.
어떤 민원들은 너무나 사소하고 짜증나는 것이어서 화도 났을 것입니다. 어떤 민원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해결할 수 없는 복잡한 것이어서 절망도 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찾아와서 대놓고 따지기도 했습니다. 왜 우리를 이집트에 그냥 놔두지 않고 끌어내서 이 광야에서 쌩고생을 시키는가? 이집트에는 맛난 고기며 신선한 야채나 과일이며, 얼마나 먹을 것이 많았던가? 하루 삼시 세끼 맨날 똑같은 메뉴도 이제 신물이 난다고!
다양한 측면의 위협으로 인해 리더십이 흔들릴 만도 한데, 지도자로서 모세의 모습이 놀랍습니다. 틈만 나면 공동체 분위기를 흐리게 하는 사악한 사람들로 인해 마음고생이 많았지만, 결코 그는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저 같았으면 ‘더러워서 못해 먹겠다. 내가 지금 왜 이 쌩고생을 하고 있지?“하면서 당장 때려치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힘든 순간이 찾아올 때 마다 백성을 잠깐 떠나 주님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수시로 조언을 구했고, 지혜와 도움을 청했습니다.
한없이 부족하고 변덕 투성이인 백성들을 대신해서 용서와 자비를 청했습니다. 모세의 기도는 강렬하고 간절했는데, 한번 주님과 대화를 시작하면 밤낮으로 사십 일을 단식하며 기도바치기도 했습니다.
“주님 제가 정녕 당신 눈에 든다면, 주님께서 저희와 함께 가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 백성이 목이 뻣뻣하기는 하지만, 저희 죄악과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 저희를 당신 소유로 삼아 주시기를 바랍니다.”(탈출기 34장 9절)
이런 모세의 모습을 어여삐 보신 주님께서는 흡족해하시면서 마치 절친에게 하듯이 친밀한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그 때 그 때 적절한 말씀을 해주셨고, 항상 함께 하실 것임을 약속하셨으며, 든든한 바위가 되어주셨습니다.
배우자나 자녀들, 손주 손녀들이 오래 전부터 성당에 나오지 않는 문제로 마음고생이 많은 자매님들께 제가 단골로 드리는 제안이 있습니다. 모세처럼 기도하라고 부탁드립니다.
주님과 점점 멀어지는 그들의 모습이 실망스럽고 슬프기도 하겠지만, 절대로 포기하지 마시고, 자매님께서 그들 몫까지 대신해서 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해보시라고 권고해드립니다.
고달픈 광야 생활이 길게 느껴지겠지만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메마르고 척박한 사막 한 가운데를 지날 때도 자비하신 주님께서 늘 우리와 동행하고 계심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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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인들은 아버지의 날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
-이영근신부-
우리는 이 세상에 판치고 있는 폭력과 불의와 죄악을 보면서 곧잘 흥분하고 분노하기도 합니다.
보고만 계시는 하느님이 실망스럽고 원망스럽기도 합니다. 또 교회와 우리 공동체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부정과 부조리와 모순을 보면서 경악하고 환멸감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리고 자신 안에 꿈틀거리고 있는 미움과 무관심과 온갖 악한 생각들을 보면서 심히 좌절하기도 합니다.
사실, 공동체 안에도, 우리 자신 안에도, 밀과 가라지가 같이 자라고 있습니다.
어찌해야 할지, 참으로 당혹스럽고 망막할 때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밀밭의 가라지 비유를 자세히 설명해주십시오.”(마태 13,36)라고 청합니다.
왜냐하면, 밭에 가라지가 있는 것을 발견한 종들이 집주인에게 “저희가 가서 그것들을 거두어 낼까요?”(마태 13,28)라고 묻자, 그는 “아니다. 너희가 가라지를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마태 13,29-30)라고 말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는 그 속에서 당신이 주님이심을 깨닫고, 주님이신 당신께 의탁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동행하시는 주님을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그 속에서 주님 사랑하기를 배우라는 말씀입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끝날”(마태 13,40)이 되면, 밀과 가라지의 분리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곧 가라지와 밀을 거두어 들일 ‘때’가 따로 있으며, 또한 그것들을 거두어드리는 일을 맡은 ‘일꾼’이 따로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는 밀과 가라지에 대한 주권이 바로 당신께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동시에, “세상의 끝날”이 될 때까지는 밀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도록 허용되었다는 말해줍니다.
이는 우리가 밀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는 것 속에서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앞의 파견설교에서,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마태 10,16)고 하시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 10,2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비록 악이 세상 안에 함께 자라고 있다고 해도, 우리가 그 악에 젖어 들거나 협조하거나 방조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단지 악을 피하고 선이신 하느님께로 나아가라는 것만도 아닙니다.
오히려 비록 우리가 악을 뿌리 뽑을 수는 없다 할지라도 악이 번지지 못하도록 막아야 하고, 악으로부터 선을 보호해야 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악이 더 이상 활개 치지 못하도록 싸워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태 10,34)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밀밭의 가라지”(마태 13,36)
주님!
가라지가 함께 자라고 있다 해도, 결코 협조하거나 방조하지 말게 하소서.
가라지를 뿌리 뽑을 수는 없을지라도, 번지는 것을 막고 선을 보호하게 하소서.
폭력과 불의와 죄악이 이 세상에 판을 쳐도,
미움과 무관심과 온갖 나쁜 생각들이 내 안에 꿈틀거려도,
가라지가 아무리 기승을 부려도,
어둠이 빛을 가리지 못하고 당신의 사랑을 가로막을 수 없게 하소서.
믿음과 희망과 사랑으로 꺼지지 않는 빛을 밝혀 사랑의 밀밭을 밝히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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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상의 은총
-반영억신부-
인생의 끝에 서면 하루라도 더 세상에 머물고 싶어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명의를 찾고 장수를 위한 갖가지 방법을 동원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행동을 욕심이라고 하기에는 모두가 가진 기대요, 바람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1요한2,17). 바오로 사도는 선언합니다. “자기의 육에 뿌리는 사람은 육에서 멸망을 거두고, 성령에 뿌리는 사람은 성령에게서 영원한 생명을 거둘 것입니다. 낙심하지 말고 계속 좋은 일을 합시다. 포기하지 않으면 제때에 수확을 하게 될 것입니다”(갈라6,8-9).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종말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이 자기 천사들을 보낼 터인데, 그들은 그의 나라에서 남을 죄짓게 하는 모든 자들과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을 거두어,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그때에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마태13,43). 이 말씀을 보면 주님의 말씀은 언제나 아름답고 축복으로 가득한 것만은 아닙니다. 그 안에는 엄중한 경고와 질책의 말씀도 함께 들어 있습니다. 그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미래가 달라집니다. 말하는 입보다 말하는 귀를, 듣는 귀보다 듣는 입을 지녔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세상의 종말은 개인적으로 볼 때는 죽음의 순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생여정의 수확 때인 죽음의 순간에도 남을 죄짓게 하고 불의를 저지르는 가라지의 상태로 있다면 불구덩이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나 의인의 상태였다면 아버지의 나라에 들어가게 되고 그 삶은 해처럼 빛나게 됩니다. 너무도 당연한 결과입니다.
“콩을 심은 데 콩 나고, 팥을 심은데 팥난다”.고 합니다. “뿌린대로 거둔다”.라고도 합니다. 불교에서는 “인과응보”를 말합니다. 원인과 결과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기 마련인데 선을 행하면 선한 결과가, 악을 행하면 악의 결과가 반드시 뒤따른다는 말입니다. 이 가르침을 통해서 자신의 절제와 동시에 늘 선한 일을 해야 하며 또한 자기수행을 게을리 하자 말아야 한다는 일깨움을 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한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많은 경우 불구덩이에 들어가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행동에는 쇄신이 없으니 안타깝습니다. 물론 구원은 인간의 노력만으로는 불가합니다. 인간의 공로에 앞서 하느님의 자비로운 무상의 은총으로 주어집니다.
얼마나 오래 살아왔는가 중요하지만 어떻게 살았느냐의 문제가 더 소중함을 생각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내가 가라지가 되어서도 안 되겠지만 가라지를 보고서 흔들려서도 안 됩니다. 세상에 담을 쌓고 세상을 향해 손가락질 하다가 자기도 모르게 영혼이 피폐해 집니다. 그러니 결코 악에 굴복당하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의인은 희생의 제물이고 그의 생애는 끊임없는 제사입니다”(성녀 벨라뎃다). 의인의 삶이 빛나듯 우리의 삶이 해처럼 빛났으면 좋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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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지의 비유>
-송영진신부-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사람의 아들이고, 밭은 세상이다. 그리고 좋은 씨는
하늘나라의 자녀들이고 가라지들은 악한 자의 자녀들이며,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악마다. 그리고 수확 때는 세상 종말이고 일꾼들은 천사들이다.
그러므로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태우듯이,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사람의 아들이 자기 천사들을 보낼 터인데, 그들은 그의 나라에서 남을 죄짓게
하는 모든 자들과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을 거두어,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그때에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마태 13,37-43).”
이 말씀은 ‘가라지의 비유’를 설명해 주신 말씀인데, 최후의 심판 때에
‘가라지 같은 자들’, 즉 악인들이 받게 될 심판과 처벌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마태오복음 13장 24절-30절에 있는 ‘가라지의 비유’를 보면,
수확 때까지 밀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라는 주인의 태도가
좀 더 강조되어 있습니다.
<‘가라지의 비유’ 말씀에서는 이 세상에 의인과 악인이 섞여 있는 현실에 대한
설명과 악인에게 즉결처분을 내리지 않으시는, ‘이해하기 어려운 하느님의 자비’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고, ‘가라지의 비유의 설명’에서는
끝끝내 하느님의 자비를 거부하는 악인들을 심판하시는 ‘하느님의 정의’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1) 심판에 초점을 맞추면, ‘가라지의 비유’는
뒤의 47절-50절에 나오는 ‘그물의 비유’와 거의 같습니다.
“하늘나라는 바다에 던져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과 같다. 그물이 가득
차자 사람들이 그것을 물가로 끌어 올려놓고 앉아서,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 버렸다.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천사들이 나가
의인들 가운데에서 악한 자들을 가려내어,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마태 13,47-50).”
인간 세상의 현실을 보면, 의인들은 항상 핍박 받고 고난을 겪으면서 살고 있는데,
악인들은 부귀영화를 누리면서 속 편하게 살고 있는 것으로 보일 때가 많습니다.
그런 현실을 보면서, 하느님께서 인간 세상의 일에 대해서 무관심하거나,
아니면 무능력한 것은 아닌가,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결코 인간 세상의 일에 대해서 무관심한 분이 아니고,
무능력한 분도 아니고, 언제인지는 몰라도 언젠가 당신이 정하신 때가 오면,
잘못된 것들을 모두 바로잡으실 것이라고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그날이 되면, 의인들의 모든 억울함과 한이 풀릴 것이고,
하느님은 지극히 공명정대하신 분이라고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그날이 올 때까지 의인들에게는 인내가, 악인들에게는 회개가 필요합니다.)
예수님 말씀에서 “그때에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
라는 말씀은, 의인들이 하느님 나라에서 하느님의 영광과 영예에 참여하게
될 것이라는 뜻인데, 이 말씀에는 의인들이 모든 억울함과 모든 설움을
보상받게 되고, 영원한 안식과 평화를 누리게 된다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악인들은 지옥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라는 말씀은,
그들이 영원한 절망과 분노와 후회에 빠지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바로 그 ‘절망, 분노, 후회’ 자체가 끔찍한 형벌이 됩니다.
(‘절망’은 구원받을 가능성이 영원히 차단된 것에 대한 절망이고,
분노는 자기 자신에 대한 분노와 하느님에 대한 분노이고,
후회는 회개하지 않은 것에 대한 뒤늦은 후회입니다.)
2) ‘하늘나라의 자녀들’이라는 말은,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려고
충실하게 노력하는 의인들을 가리키고, ‘악한 자의 자녀들’이라는 말은,
악마의 영향력 아래에서 살면서 죄를 짓고 있는 악인들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악마의 영향력 아래에 있다고 해도
죄인들의 죄는 그 죄인 자신의 책임입니다.
악마는 죄를 짓도록 유혹만 할 뿐이고,
죄는 죄 짓는 그 사람 자신이 짓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의인으로 태어나는 사람도 없고 악인으로 태어나는 사람도 없습니다.
살면서 의인이 되려고 노력하면 의인이 되는 것이고,
하느님의 뜻은 신경 쓰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막 살면 악인이 되는 것입니다.
의인들도 악마의 유혹을 받지만, 그 유혹을 물리침으로써 자기 자신을 지킵니다.
그 유혹을 물리치지 못하면 악인이 되는 것이고.
3) 그날이 되면 신앙인들도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경고했습니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또 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하시어,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 것이다(마태 3,11-12).”
심판 때에는 가라지들과 쭉정이들이 모두 심판 대상이 됩니다.
(가라지는 하느님의 반대편에 있는 악인들이고,
쭉정이는 신앙인이면서도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4) 하느님의 자비에 초점을 맞추면, ‘가라지의 비유’는
죄인들의 회개를 기다리시는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비유입니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수확 때에 내가 일꾼들에게,
먼저 가라지를 거두어서 단으로 묶어 태워 버리고 밀은 내 곳간으로
모아들이라고 하겠다(마태 13,30).”
여기서 ‘내버려 두어라.’ 라는 말은 ‘방치’하라는 뜻이 아니라,
회개할 기회를 주라는 뜻입니다.
“...... 주님께서는 약속을 미루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여러분을 위하여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2베드 3,9).”
“우리 주님께서 참고 기다리시는 것을 구원의 기회로 생각하십시오(2베드 3,15).”
악인들의 회개를 기다리시는 하느님의 자비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용서와 자비와 사랑이 없는 하느님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만일에 예수님이 ‘잃은 양’을 찾아나서는 착한 목자가 아니라면, ‘잃은 양’을 그냥
바로 버리는 냉정한 목자라면, 그런 분을 구세주로 믿고 따를 수 있을까?)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악인들의 회개를 무기한으로 기다리시는 것은 아니고,
당신이 정하신 ‘심판의 날이 되기 전까지만’ 기다리십니다.
심판의 날이 닥치기 전에 회개하면 살 것이고,
그 날이 닥칠 때까지도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할 것입니다.
5) 우리 교회의 옛말에, “하느님께서 정의의 잣대로 나를 심판하시면 나는 살아날
길이 없는데, 우선 먼저 자비의 잣대로 나를 측량하시니
나에게도 살아날 희망이 있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가라지’는 남이 아니라 ‘바로 나’일 수 있습니다.
“나는 절대로 가라지가 아니다.” 라고 큰소리치면 안 되고, 자만하면 안 됩니다.
나중으로 미루지 말고 지금 회개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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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마태 13,36-43: 추수 때에 가라지를 추려내어...
-조욱현신부-
예수님은 ‘가라지의 비유’를 통해서 이 세상이라는 밀밭에는 선인과 악인이 현재는 서로 섞여 살아가지만, 이 밀밭도 추수 때는 밀과 가라지가 따로 추려지듯이 밀과 같은 선인이나 가라지 같은 악인도 언젠가는 피할 수 없는 심판을 맞이하게 된다는 사실을 명심하여 준비하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은 여기서 성급한 판단을 내리는 잘못을 범할 수 있다. 그러나 그 판단은 우리의 소관은 아니다. 그것을 가리는 작업은 마지막 날에 하느님께서 하시도록 그분께 맡겨야 한다.
밀과 가라지가 싹 트고 자랄 때에는 서로 구별이 안 되듯이 이 세상에서 하느님 말씀대로 사는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엄밀히 구별하기란 참으로 어렵다. 어떤 사람은 보기에는 선한 사람으로 보일지 모르나 사실상 가라지 같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보기에는 가라지처럼 보이지만 하느님 앞에 서는 좋은 밀일 수도 있기에 판단은 우리가 할 수 없다. 그 사람의 전부를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조급하게 서둘러서 남을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는 쉽게 “그러면 저희가 가서 그것들을 거두어 낼까요?”(마태 13,28)하고 쉽게 판단할 수 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경우에 우리 이웃을 이러한 모습으로 판단하고, 쉽게 뽑아버릴 생각을 하면서 살아왔는지 반성해 보아야 한다. 내가 그러한 판단을 내리는 순간 나 역시 가라지로 되는 것이다. 남을 쉽게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심판은 오직 하느님께만 유보된 것이다.
우리가 모두 가라지가 없는 집안, 공동체를 바라는 것은 어쩌면 우리의 본성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 자신이 각자가 좋은 밀알이었다가 불시에 순간적으로 가라지와 같은 죄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두려운 마음과 함께, 매일 우리의 마음의 밭에는 무엇이 자라고 있고 무슨 열매를 맺을 것인가를 돌아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판단보다도 지금, 이 순간 충실한 삶으로 언제나 좋은 밀알로서 살아가도록 끊임없이 노력하는 삶이 중요하다. 또한, 지금 내가 올바르게 살지 못한다고 하느님 앞에 나오지 못한다는 어리석은 생각도 버려야 한다. 우리는 순간적으로 그렇게 될 수 있으나, 다시 하느님의 참된 자녀로 즉 좋은 밀알로 변화될 수 있는 우리이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이러한 노력하는 삶을 원하신다. 우리는 하느님 앞에 서게 될 때까지 노력하는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항상 깨어있는 삶이 있어야 한다. 아무도 완전한 자는 없으며 완전을 향해,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에 있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항상 회개하는 마음으로 하느님의 뜻으로 되돌아가는 삶을 통하여 주님께서 원하시는 좋은 밀알이 되도록 항구할 수 있도록 하자. “그때에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4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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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하느님의 자애와 심판 이야기입니다.
"주님께서는 마치 사람이 자기 친구에게 말하듯, 모세와 얼굴을 마주하여 말씀하시곤 하였다."(탈출 33,11)
모세와 주님의 관계는 매우 각별했습니다. 광야에서 아론과 미르암이 모세를 시기했을 때 주님께서 친히 나타나셔서 그들을 꾸짖으시며 "나의 종 모세는 다르다. ... 나는 입과 입을 마주하여 그와 말하고 ... 그는 주님의 모습까지 볼 수 있다."(민수 12,7-8) 하고 말씀하실 정도였지요.
모세는 충직함과 겸손으로 하느님을 섬기고, 하느님도 그에게 당신 마음과 계획을 열어보이십니다. 오늘 화답송에서 "하늘이 땅 위에 드높은 것처럼 당신을 경외하는 이에게 자애가 넘치시네." 하고 노래하듯, 경외심은 하느님의 자애를 부릅니다. 하느님과 사람이 이처럼 친밀한 사랑의 관계를 누릴 수 있다는 점에서 모세는 우리에게 큰 희망이 됩니다.
"저희 죄악과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 저희를 당신 소유로 삼아 주시기를 바랍니다."(탈출 34,8)
주님께서 모세에게 자비와 자애라는 당신 얼굴을 드러내시자 모세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얼른 땅에 엎드려 간청합니다. 금송아지 사건 후 하느님께서 실망과 분노로 백성과 동행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모세는 기회가 닿는 대로 이렇게 반복해서 빌고 또 빌며 함께해 주시기를 간청합니다.
"저희 죄악과 저희 잘못"
사실 백성이 우상 숭배에 떨어졌을 때 모세는 그 자리에 있지 않았지요. 이런 경우에는 대개 죄 지은 이들과 자신을 분리해 스스로는 결백하다고 주장하기 일쑤인데 모세는 달랐습니다. "저들의 죄악과 저들의 잘못"이 아닌 "저희 죄악과 저희 잘못"이라는 표현에서는 죄를 지은 백성과 자신을 동일화하면서 그 죄를 자신이 함께 떠안고 가겠다는 의지가 강하게 드러납니다.
이 모습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떠올립니다. 무죄하신 분께서 세상의 죄를 대신 지시고 스스로 가장 비천한 죄수의 신분이 되어 십자가에 달리셨지요. 그분의 희생 제사는 죄인들과 하나로 취급당하기를 꺼리지 않으시고 성부 앞에서 "저희"의 범주 안에 모든 죄인들을 끌어안으신 겸손과 자애의 결과입니다.
복음은 '밀과 가라지 비유'의 해설 부분입니다.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태우듯이,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사람의 아들이 천사들을 보낼 터인데, 그들은 그의 나라에서 남을 죄짓게 하는 모든 자들과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을 거두어,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마태 13,40-42)
예수님 입에서 무시무시한 심판의 말씀이 떨어집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끝까지 기다려 주시고, 죄에 떨어지게 만드는 약함을 이해해 주시며, 길 잃은 양을 찾아나서고, 언제든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는 분으로 알고 있는데 말입니다.
모세가 죄를 지은 백성을 위해 주님께 그토록 간절히 애원하였듯, 성부 하느님 앞에서 인류를 떠안고 당신을 죽음에 넘기신 예수님이시지만, 다가올 심판의 때를 유야무야 건너뛰지는 않으시리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종말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여전히 모호하고 미지근하게 선과 악의 경계에서 비틀거리는 우리를 위협하고 겁박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그러니 너무 늦지 말기를" 바라시는 염려의 뜻으로 들립니다.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마태 13,43)
이어지는 내일 미사의 제1독서를 미리 보면, 모세는 시나이산에서 주님과 그토록 친밀한 시간을 보낸 뒤 빛나는 얼굴로 산을 내려옵니다.(탈출 34,29 참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의인의 빛나는 얼굴'이지요.
아버지의 나라에서 그분을 마주하는 이들이 그 빛을 반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죄와 악의 유혹을 벗어버리고 고통과 시련의 도가니를 거친 영혼이 하느님 자애로 맑고 순수하게 변모되어 갑니다. 사랑하고 사랑받는 영혼은 찬란한 빛 안을 거닐며 빛이신 분과 함께 빛이 되어 갑니다.
사랑하는 벗님! 우리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뿌리신 좋은 씨앗들이지요. 이 본성 안에서 진실되고 선하고 아름답게 영글어 가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버지의 사랑으로 나날이 맑은 빛을 더해가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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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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