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1년 7월 25일 연중 제17주일

Margaret K 2021. 7. 25. 08:44

2021 7 25일 연중 제17주일 

 

예수님께서는 눈을 드시어 많은 군중이

당신께 오는 것을 보시고

필립보에게,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하고 물으셨다.
(
요한 6,1-15) 

 

When Jesus raised his eyes
and saw that a large crowd was coming to him,
he said to Philip,
“Where can we buy enough food for them to eat?”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최종훈신부-

 

 “살기 위해서 먹는가? 먹기 위해서 사는가?” 음식을 두고 이런 장난스러운 질문을 하는 것이 실례같지만, 굳이 답을 해야 한다면 이른바 ‘맛집 투어’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저는 “살기 위해 먹습니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이 질문에는 저마다 성향에 따라 답이 달라지겠지요. 그러나 가톨릭 신자라면 적어도 다음의 질문에 대해서만큼은 정답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당신은 살기 위해서 먹습니까? 아니면 죽기 위해서 먹습니까?” 무엇을 먹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신앙 안에서는 ‘어떻게 먹느냐’가 더 중요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먹고 있습니까?

오늘 복음을 통하여 두 가지 모습의 빵을 떠올려 봅니다. 한 가지는, 그저 자신의 배를 채우고자 저 혼자 숨기고 먹는 빵입니다. 다른 한 가지는, 부족하고 초라하지만 자신만을 생각하지 않고, 많은 사람 앞에 내어놓은 아이의 빵입니다. 빵을 먹어야 살아갈 수 있는 인간이지만, 그 빵을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 함께 살아가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 초라한 빵이 아무 소용없다는 포기와 절망은, 다만 살기 위해서 먹는 빵일 뿐입니다. 반면에 부족함을 느끼면서도 조심스레 내어놓은 아이의 빵은 작은 봉헌임에도 미안함과 감사한 마음이 깃든 빵입니다. 그 빵을 예수님께서는 모두를 살리는 빵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빵을 먹고 있습니까?
우리는 또 다른 빵을 먹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살기 위하여 먹는 빵이 아니고, 그것만 먹고 살아갈 수도 없는 빵입니다. 어찌 보면 그것은 죽기 위해서 먹는 빵입니다. 내어놓고 봉헌하고 희생하기 위해서 먹는 빵입니다. 그 빵은 인간의 생명을 버리고 하느님의 생명을 선택하게 이끌어 줍니다. 바로 예수님의 몸, 성체입니다. 그분께서 주신 성체를 받아 모시는 우리는 자신을 죽이고 함께 살아가는 삶을 택하였으면 합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받아 모신다는 것은 내가 살기 위하여 먹는 것조차도 또한 누군가를 살리고자 먹는 것임을 깨달았으면 합니다.

나누는 마음이 바로 은총의 시작입니다.

-키엣 대주교_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굶주린 군중을 외면하지 못하셨습니다. 그러나 가게 하나 없는 황량한 산에서, 만일 가게가 있다 한들 굶주림에 지친 오천명이 넘는 사람들을 어찌 다 먹일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보잘 것 없는 다섯 개의 빵과 물고기로 그 많은 군중을 배불리 먹이고도 남을 만큼의 놀라운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그리고 이 기적에 사람들이 동참하도록 하셨습니다.

동정과 연민은 마음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 연민은 위선일 수 있습니다. 마음을 실천으로 옮기지 못하는 이유는 다양합니다. ‘부끄러워서’ 또는 ‘힘들어서’, ‘여유가 없어서’ 라고 나름대로의 이유를 말합니다. 필립보가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 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한 것처럼 사람들은 불가능하다고 판단되면 시도조차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연민과 자비는 가진 것의 크고 작음이 아니라 그저 나누겠다는 마음이 구체적인 행동으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황량한 사막에서 빵과 물고기를 찾아 나섰고 작지만 자신들이 찾은 것들을 예수님께 모두 드렸고 예수님께서는 그 적은 것으로 모두가 배불리 먹을 수 있는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그리고 남은 부스러기를 모으도록 하였습니다. 제자들 역시 예수님의 기적에 작으나마 동참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 모든 일을 하실 수 있는 권능을 갖고 계시지만 우리 모두가 당신의 사업에 동참하기를 바라십니다. 돌을 빵으로 만들 수 있는 권능이 있으심에도 아이가 가지고 있는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받으셨습니다. 그 아이는 아마 허기진 사람들에게 비싸게 빵을 팔려는 욕심으로 왔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주님께 드렸습니다. 이러한 ‘내어 줌’이 수천 명을 배불리 먹일 수 있는 기적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이웃을 위해 나누는 마음이 바로 은총의 시작입니다.

우리는 방관자가 아닙니다. 작은 힘일지라도 주님의 사업에 동참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간절히 원한다면 좀 더 적극적이고 자발적인 행동이 필요합니다. 일의 시작은 노력에서 시작됩니다. 그 다음은 하느님께서 도와주실 것입니다.

기아와 풍요, 빈곤과 낭비, 이것은 세상 어느 곳에나 존재하는 현상입니다. 사람들은 풍족해지면 소중함을 잃어버립니다. 조금 전까지도 굶주림에 허덕인 군중들은 배가 부르자 먹고 남은 빵을 버렸습니다. 아끼고 절약하는 것은 주님이 주신 것에 대한 소중함을 아는 것입니다. 절약은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내 것이 아닌 우리 모두의 것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만일 내가 낭비한다면 다른 형제들은 부족할 것입니다. 세상의 빈곤은 자원이 부족해서 야기되는 것이 아니라 공정하지 못한 분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고 가진 자들의 낭비와 지나친 소비 때문입니다.

육체를 위한 양식이 아니라 마음의 양식을 찾아야 합니다

물질은 세상을 살아가는 데 반드시 필요하지만 그 물질이 전부는 아닙니다. 물질로 가득 채워진 영혼은 날 수 없습니다. 육체적 풍요로움 속에 가려진 영적 빈곤을 보아야합니다. 영적 욕구는 커지는데 어디서 그 양식을 채워야하는 지 알지 못합니다. 영적 양식은 물질적 양식과 다릅니다. 내가 가진 물질적인 것을 나눌 때 영적인 빈곤이 가득 채워질 것입니다.

빵의 기적은 나눔을 일깨워주는 가르침입니다. 연민과 자비의 마음으로 이웃에게 먼저 다가가는 열린 마음이 필요합니다. 내 옆에 있는 이웃을 보고 먼저 다가가는 마음이 행동의 시작, 은총의 시작입니다.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오늘 복음의 의미를 묵상해 봅시다.

2. 주님께서는 나의 작고 보잘 것 없는 절약이 세상에 기여할 수 있다고 하십니다. 지금 무엇을 절약하고 어떤 나눔을 실천하고 있습니까?

3. 주님께 영혼의 양식을 주실 것을 기도하십시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어렸을 때, 시골에 가면 수도가 없고 대신 펌프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펌프질을 해서 물을 끌어 올리기 위해서는 펌프의 윗부분에 한 바가지의 물을 부어야 했습니다. 이 물의 이름을 나중에 알게 되었습니다. 바로 ‘마중물’입니다.

도시에서 살다가 시골에 놀러 가서 처음 본 이 펌프는 상당히 낯설었습니다. 마중물을 넣지도 않고 그냥 펌프질만 했다가 아무런 물도 얻지 못했었지요. 그러나 이 한 바가지의 마중물을 부으니, 엄청나게 많은 물을 펌프는 제게 주었습니다.

우리 마음 안에 이런 사랑의 샘이 있습니다. 그런데 마중물을 찾지 못해서 사랑의 샘에서 사랑을 끌어 올리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요? 바로 주님께서 마중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주님을 보고 주님을 닮아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노력에서 넘치는 사랑이 내 안에서 펑펑 쏟아지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빵의 기적을 볼 수 있습니다. 장정만도 오천 명이 모여있는 상황입니다. 예수님께서 필립보에게 먼저 묻습니다.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예수님의 사랑을 전혀 의심하지 않는 제자 필립보입니다. 하지만 자기들도 가지고 있는 것이 전혀 없었습니다. 자기들도 쫄쫄 굶고 있는 상황에서 저 많은 사람을 배불리 먹일 수 있는 빵을 사 오라는 듯한 이 말씀에 답답했을 것입니다. 현실적인 상황을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면서 안드레아가 아이가 가져온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이야기합니다.

제자들이 먹기에도 너무나도 부족한 양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의 봉헌을 원하셨습니다. 무조건 필요한 것을 베풀어주시는 주님이 아닌, 우리의 것을 먼저 나눌 때 주님께서는 더 큰 기적을 일으켜서 모두가 부족하지 않게 하십니다. 즉, 너무나 부족한 빵과 물고기라도 모두를 위해 봉헌할 때, 이것이 마중물이 되어 모두가 배불리 먹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랑 실천을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너무 자그마한 사랑 실천이라면서 할 필요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반드시 물질적인 봉헌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어려운 이웃을 위해 기도해주는 것, 지금 내 옆의 사람을 위한 작은 배려를 실천하는 것 역시 우리의 작은 봉헌이고, 사랑의 실천입니다. 이러한 작은 사랑의 실천이 마중물이 되어 주님의 커다란 기적을 일구어낼 수 있습니다.

내 사랑 실천이 마중물이 된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오늘도 사랑의 실천에 집중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사람들이 왜 새로운 생각을 두려워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나는 오래된 생각이 두렵다(존 케이지).

칠극

판토하의 ‘칠극’을 읽었습니다. 조선 시대, 우리나라 지식인들이 천주교를 받아들이는 데 큰 역할을 한 책입니다. 칠극에서 으뜸가는 일곱 가지 죄를 이렇게 말합니다. 이를 가톨릭 교리 안에서 ‘칠죄종’이라고 하지요. 죄와 악습을 낳는 죄의 근원이라는 것입니다.

교만, 질투, 인색, 분노, 음식에 빠짐, 여색에 빠짐, 선에 게으름이 그것입니다. 그리고 이 죄를 이기는 일곱 가지 덕은 이렇습니다.

첫째, 겸양으로 교만을 이긴다.
둘째, 남을 아끼고 사랑하며 질투를 이긴다.
셋째, 재물을 희사하여 인색을 이긴다.
넷째, 인내를 길러 분노를 이긴다.
다섯째, 담백함으로 먹고 마시는 것에 빠지는 것을 이긴다.
여섯째, 욕망을 끊어서 여색에 빠지는 것을 이긴다.
일곱째, 천주의 일에 부지런히 힘 쏟아 선행에 게으른 것을 이긴다.

정말로 필요한 덕이 아닐까요? 사실 일곱 가지 죄에 자주 넘어가는 우리입니다. 그 유혹의 힘이 너무나 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를 이기는 덕이 꼭 필요합니다.
 

판도하의 ‘칠극’을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가장 많이 가지는 자는 유통업자다

-전삼용신부-

 

오늘은 요한복음의 5천 명을 먹이신 기적입니다. 공관복음과는 차별되게 요한복음의 5천 명을 먹이신 기적은 빵과 물고기를 나누어주는 사람이 제자들이 아니고 예수님입니다. 제자들은 그저 사람들을 자리 잡고 앉게 하고 버려지는 것이 없도록 남은 조각들을 모으는 것입니다.

  

    ‘빵’은 보통 ‘말씀’을 상징합니다. 가르침일 수도 있고 은총이신 말씀 자체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으십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태 4,4)

    이런 면에서 제자들은 ‘말씀의 유통업자’라 할 수 있겠습니다.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팔려고 하는 말씀에 관심을 두게 하고 팔고 남은 것들은 자신들의 몫이 됩니다. 그런데 결국 자신들의 몫이 가장 많습니다.

     

    오늘은 제가 돈을 벌어본 적은 없지만 돈 버는 이야기를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실제로 사회에서 살아가시는 분들은 비웃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냥 순수한 저의 생각이고 제 말이 틀려도 상관없습니다. 결국, 우리에게 남아야 할 것은 돈이 아니라 생명을 주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여러 면에서 ‘유통업자’들이 가장 많이 남는 것 같습니다. 유통업자는 생산자와 소비자를 연결해 주는 역할을 합니다.

     제가 제주도 여행 갔을 때 함께 간 누군가가 자연산 전복을 먹어보자는 제안을 했습니다. 그런데 며칠 동안 찾아다녀도 오분자기나 양식전복은 많이 보았어도 자연산은 찾지 못했습니다.

     얼마 뒤 분당 횟집에 갔는데 주방장이 커다란 자연산 전복을 들고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어디서 잡은 것이냐고 물어보니 제주도에서 나온 것이라 했습니다. 자연산 전복은 크고 값도 비싸서 잡은 현지인들은 먹지 못하고 도시로 팔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너무 비싸서 사 먹으려는 사람이 없다면 그것은 어떻게 될까요? 유통업자가 처리해야 합니다. 사 먹는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꼭 필요한 양만큼만 사기에 남는 것은 유통업자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 유통업자가 가장 많이 남는구나!’

왜냐하면, 팔면서 이윤을 추구하고 또 남는 것들도 자신들의 몫이 되기 때문입니다.

  

    생산하는 사람은 아까워서 못 먹고 사는 사람은 딱 먹을 만큼만 사기에 유통업자만 좋은 것입니다. 물론 가장 좋은 것은 가치 있는 물건을 생산하면서 동시에 유통할 수 있겠지만 말입니다. 큰 자본이 없는 보통 사람들이라면 유통을 하며 재산과 기술을 축적하여 생산까지 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일 것입니다.    

 

    하지만 남아봐야 처치 곤란한 상황이 되는 것들을 팔면 어떨까요? 스트레스가 심할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만약 학용품을 판다라고 가정해봅시다. 학용품을 팔고 많은 재고가 남았습니다. 결국, 이것은 유통하는 사람이 다 사용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채소나 과일이 남아도 시간이 지나면 상하기에 빨리 처리해야 합니다. 절대로 위의 것들을 파시는 분들을 비하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돈을 더 벌기 위해서라고 가정하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이런 가정하에서, 저 같으면 이런 것보다는 남아도 가치가 되는 것을 팔 것 같습니다. 물론 처음에 시작하는 비용이 많이 들기는 하겠지만 말입니다. 비싼 명품 가방이나 옷, 혹은 금은보석을 팔다가 남으면 그것이 또 나중에라도 팔 수 있는 것이 되기에 사실 이런 것들을 파는 것이 더 돈을 벌기에 유리할 것입니다.

     

    만약 내가 파는 것이 축적될 수 있는 기술이라면 어떨까요? 컴퓨터 기술이나 백신 기술과 같은 것이라면 어떨까요? 이것들도 팔고 나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축적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축적된 기술로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더 높은 성을 쌓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가장 돈을 많이 버는 회사들은 가치와 기술을 생산하거나 유통하는 회사들입니다.    

 

    세계 대기업들을 봐도 그렇습니다. 마이크로소프트나 애플과 같은 회사들은 기술을 팔면서도 그 기술을 축적하는 회사들이고 아마존이나 페이스북, 구글이나 알리바바와 같은 기업들은 가진 기술을 통해 사람을 이어주거나 물건을 유통해 주는 기업들입니다. 단순히 생산만 해서는 돈이 남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사람을 이어주거나 가치를 파는 이들이 가장 많이 남깁니다.

     

    사제는 무엇을 파는 사람일까요? 바로 ‘말씀’을 파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최대한 많이 팔기 위해 신자들을 모으고 그 말씀을 듣고 깨닫게 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런데 그런 일을 하다 보면 남기는 게 많습니다. 중요한 것은 남는 이 ‘말씀’은 생명처럼 고귀하고 또 축적되는 기술과 같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제게 언제부터 강론을 썼느냐고 물으신 분이 있기에 생각해보니 주일 강론은 신학생 때부터 썼습니다. 그러는 동안 제가 한 강론의 가장 큰 덕을 본 사람은 저 자신이었습니다. 전하려는 말씀을 통해 제가 더 많이 깨닫게 되고 또 그동안 축적된 기술도 많습니다. 사제는 그리스도와 신자들을 이어주는 역할입니다. 유통업자와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5천 명을 먹인 기적을 체험한 이들 중에 가장 큰 수혜자는 누구일까요? 예수님께서 그것이 당신 살과 피라고 말씀하실 때 끝까지 그분 곁에 남고자 했던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바로 말씀의 유통업자인 제자들뿐이었습니다. 세상에서는 어떤지 몰라도 오늘 기적만 보면 말씀의 가장 큰 수혜자는 그 말씀을 유통해 주는 복음 전파자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모두 ‘보편사제직’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누구나 복음을 전해야 하는 예언자직을 수행하기 위해 연결해 주는 유통업자의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말씀에 고프지 않고 항상 충만하여 기쁨과 평화를 누리려면 말씀을 이어주는 이가 되어야 합니다. 성경 말씀의 가장 큰 수혜자는 평신도라도 성경 말씀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이는 가르쳐 본 사람은 다 압니다. 자신이 가르치면서 더 배운다는 것을.

     

    더 가지고 싶은 게 있으십니까? 우선 무엇이 가치 있는 것인지 알고 그것을 유통하는 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돈입니까? 명예입니까? 세속의 즐거움입니까? 그런 것들은 가져도 더 가지고 싶고 공허하기만 합니다.

    신앙인이라면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이 가장 가치 있는 것이라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이젠 말씀의 유통업자가 되기로 마음먹으면 됩니다. 말씀으로 충만한 사람은 절대 목마르지 않고 배고프지 않습니다.

 -조재형신부-

 

한국에서 신부님이 오셨습니다원로사목자로 은퇴하신지 13년이 되셨습니다저보다 24살 많으신 토끼띠십니다. 80이 넘으셨는데도 아주 건강하십니다신부님은 은퇴하신 후에도 바쁘게 지내고 있었습니다수경 침을 배우셔서 아픈 사람에게 도움을 주셨습니다수경 침을 배우려는 사람에게는 친절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멕시코필리핀에서도 수경 침을 알려 주셨다고 합니다틈틈이 철사를 이용해서 십자가를 만드셨습니다만드신 십자가를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저도 하나 받아서 차에 걸어 놓았습니다은퇴 하신 후에도 아픈 사람을 위해서 봉사하시는 신부님을 존경합니다하느님께서는 그런 신부님에게 건강을 주신 것 같습니다나이를 숫자로 생각하면 주름이 늘지만 나이를 경험으로 생각하면 연륜이 쌓인다고 합니다은퇴를 한 후에도 봉사하는 시간을 가진다면 그것이 축복입니다직업에는 은퇴가 있지만 신앙생활에는 은퇴가 없습니다하느님께 갈 때까지 충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뉴저지의 뉴튼 수도원에는 한국과 특별한 관계가 있는 마리너스’ 수사님의 묘가 있습니다수사님은 20년 전인 2001년에 선종하였습니다수사님은 피난민들 가운데에서 하느님 형상을 보았기 때문에 배에 태울 수 있었고 1만 4000명의 목숨을 구하면서 소중한 생명의 가치를 깨달아 수도원에 입회하게 됐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625전쟁 중 수많은 피란민을 승선시켜 구조한 이른바 흥남철수 작전의 주인공입니다당시 60명이 정원인 화물선에 피란민 1만 4005명을 태운 배는 성탄절인 12월 25일 경남 거제에 무사히 도착해 수많은 이들을 전쟁터에서 구했습니다당시 구조된 이들의 후손은 지금까지 약 100만 명으로 추산되며당시 배에는 문재인 대통령의 부모와 누나도 타고 있었다고 합니다마리너스 수사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정신이 모범적으로 평가돼 시복시성 절차를 밟게 되었고지금 예비 조사가 진행되고 있습니다한국과 특별한 인연이 있는 마리너스 수사님의 시복이 이루어지면 좋겠습니다.

 

저는 은퇴하신 신부님과 마리너스 수사님에게서 한 가지 공통점을 보았습니다그것은 인간에 대한 사랑연민입니다또한 그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셨던 사랑과 연민입니다그 사랑과 연민이 있었기에 눈이 먼 사람은 눈을 뜰 수 있었습니다들리지 않던 사람은 들을 수 있었습니다중풍병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걸을 수 있었습니다나병환자는 깨끗하게 나았습니다죽은 소녀도 다시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기적과 표징이 있어서 믿는 것이 아닙니다사랑과 연민이 있는 곳에는 기적과 표징이 일어납니다교황님께서는 의료혜택을 받기 어려운 가난한 사람과 가난한 국가에 백신을 나누어야 한다고 하십니다한국교회도 교황님의 권고에 적극 동참하였습니다지난번에 있었던 G7 정상회담에서 10억 회 분의 백신을 가난한 나라에 제공하겠다고 하였습니다바이러스는 백신이 보급되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우리가 사랑과 연민으로 서로를 보듬어주고아껴주면 사라질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물고기 두 마리와 빵 다섯 개로 5,000명을 배불리 먹이시는 표징을 보여 주셨습니다표징의 시작은 예수님의 사랑과 연민이었습니다예수님께서는 아무 것도 먹지 못한 체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사람들을 측은하게 바라보셨습니다표징은 자발적인 나눔에서 시작되었습니다한 어린이가 가지고 있던 물고기와 빵을 기꺼이 내어 놓았습니다예수님께서는 물고기와 빵을 들어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셨습니다제자들의 걱정과 근심은 표징을 만들 수 없었습니다자신 것을 지키려는 소유욕은 표징을 만들 수 없었습니다사랑과 연민자발적인 나눔감사의 기도가 함께 만나면 표징은 언제나 일어납니다이태석 신부의 사랑과 연민이 있었습니다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후원이 있었습니다이태석 신부님과 함께 했던 젊은이들 중 54명이 의사가 되었습니다이제 그들은 이태석 신부님의 뒤를 이어서 어려운 이들을 위해아픈 이들을 위해 헌신 할 것입니다.

 

기적이 먼저가 아닙니다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먼저입니다표징이 먼저가 아닙니다가난한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이 먼저입니다오늘 바오로 사도는 그 점을 명확하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주님 안에서 수인이 된 내가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여러분이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겸손과 온유를 다하고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 주며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이고 성령도 한 분이십니다주님도 한 분이시고 믿음도 하나이고만물의 아버지이신 하느님도 한 분이십니다그분은 만물 위에만물을 통하여만물 안에 계십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면우리가 모두 주님 안에 하나라는 생각으로 살아간다면 하느님께서는 넘치도록 축복을 주실 것입니다.

 죽었다 깨어나도 용서 못할 사람을 용서하는 기적, 바로 오늘 우리가 행할 기적입니다!

 -양승국신부-

 

엘리야 예언자의 제자이자 후계자인 엘리사 예언자는 기적의 예언자로 유명했습니다. 구약 성경에 기록된 기적들만 14번인데, 기록되지 않은 기적들도 숱하게 있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가 행한 기적들은 예수님께서 행한 기적들과 자주 겹칩니다. 요르단 강물 위를 걸어서 건넌 기적, 죽은 여인의 아들을 살린 기적, 나병환자를 치유한 기적, 그리고 오늘 첫 번째 독서에서 소개된 바와 같이 보리 빵 스무 개와 햇곡식 이삭 한 자루로 백 명이나 되는 사람을 배불리 먹인 기적 등입니다. 

 

기적하면 빼놓은 수 없는 인물이 바오로 사도입니다. 그는 다마스쿠스로 가던 길에 낙마하고 눈이 멀게 되었으며, 그로 인해 삶이 180도 바뀌게 되는데, 이는 기적의 첫 시작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회개한 그에게 엄청난 능력을 선물하십니다. 그의 살갗에 닿았던 수건이나 앞치마를 병자들이 터치만 해도 질병이 사라지고 악령들이 물러갔습니다. 삼층 창문에 걸터앉아 있다가 추락사한 청년 에우티코스를 소생시키기도 합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더 큰 기적을 행합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의 기적입니다. 그는 옥에 갇힌 상태에서도 힘차게 주님 사랑의 복음을 선포합니다. 내일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암담한 상황에서도 기쁘고 환한 얼굴로 초대교회 신자들을 위로하고 격려합니다. 이것보다 더 큰 기적이 다시 또 있을까 싶습니다.

  

“형제 여러분, 주님 안에서 수인이 된 내가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이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 주며,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에페소서 4장 1~3절)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명을 먹이시는 기적을 행하십니다. 그분께서 기적을 행하시기 직전 안드레아 사도는 무척이나 회의적이었고 지극히 인간적이었습니다.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요한복음 6장 9절)

  

안드레아 사도는 아직도 예수님의 신원, 그분이 지니신 권능에 대한 신앙이나 확신이 부족했습니다. 그는 아직도 예수님을 예언자 중에 한 분이나 탁월한 랍비 중에 한 사람으로 생각했습니다. 자신의 삶뿐만 아니라 인류 공동체 전체, 세상 만물의 주인이 예수님이란 진리를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사실 기적은 예수님 시대와 사도 시대 기적으로 충분하고 흘러넘칩니다. 이제 기적의 시대는 지나갔다고 생각해도 무방합니다. 더 이상 죽었던 사람이 되 살아나고 죽어가던 사람이 순식간에 정상화되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 대신 또 다른 기적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기적은 또 다른 누군가가 행할 기적이 아니라, 오늘날 예수님의 또 다른 제자들이자 사도들인 우리 각자가 행할 기적입니다.

  

죽었다 깨어나도 용서 못할 사람을 용서하는 기적, 바로 오늘 우리가 행할 기적입니다. 회복 불가능한 중병에 걸려 하루하루 삶과 죽음 사이로 난 길을 걸어가면서도 환하게 미소 지을 수 있는 기적, 바로 오늘 우리가 행할 기적입니다. 내게 결코 호의적이지 않은 억울한 현실을 살아가면서도 초 긍정 마인드로 살아가는 기적, 바로 오늘 우리가 행할 기적입니다.

  

오늘 교회는 어르신들과 조부모님들을 각별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간 소홀했던 연로하신 부모님들의 영육의 건강을 위해 열심히 더 열심히 기도해야겠습니다.

  

과거와는 달리 노인에 대한 배려나 존경이 눈에 띄게 약화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결코 시대를 한탄해서는 안되겠습니다. 이럴수록 더 큰 그릇, 더 큰 거목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겠습니다.

 

누군가에게 의지하거나 기댈 생각 아예 접고, 더 당당하고 더 힘차게 살아가기 위해 노력해야겠습니다. 노년의 삶도 멋지고 찬란하고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온 몸과 마음으로 세상과 이웃들 앞에 보여줘야겠습니다.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이영근신부-

 

오늘은 연중 17주일입니다오늘 말씀 전례의 주제는 에 대한 것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빵의 모자람과 충만함에 대한 말씀입니다.

<1독서>에서는 예언자 엘리사가 보리빵 스무 개로 백 명을 먹이고도 남은 이야기를 전합니다.

<독서>에서는 바오로 사도가 하나인 참된 빵이신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라고 권고합니다.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보리빵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고도 남은 이야기를 들려줍니다여기서는 특별히 모자람과 충만함의 대조를 통해 예수님과 제자들의 차이가 극렬하게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군중이 당신께 오는 것을 보시고필립보를 시험해보려고 물으십니다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모자란 것이 무엇인지곧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그리고 그것을 어디서 구할 수 있는지를 제자들에게 깨우치시고자 하십니다.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요한 6,5)

 

이는 필요한 것이 “빵”이며그 “빵”을 사야 할 곳이 어디인지를 가르쳐주기 위함입니다곧 모자람을 채울 수 있는 분이 누구인지그리고 그분이 어디 계시는지를 알려주기 위함이십니다그것은 “빵”이신 당신 자신을 옆에 두고서 묻는 질문입니다사실은 당신 자신을 “빵”으로 내어주시고자 물으시는 질문입니다오늘 우리는 이 질문은 우리 자신에게 던져야 할 일입니다.

나는 지금 어디에서 빵을 구하고 있는가? 누구에게서 빵을 구하고 있는가?

 

그런데 필립보는 엉뚱한 대답을 합니다.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 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요한 6,7)

 

그는 예수님의 질문과는 상관없이 을 계산하면서 모자람을 볼 뿐입니다그리고 그것을 돈으로 계산할 뿐빵을 사야 할 곳을 찾지도 알지도 못합니다안드레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음을 이미 보았지만그도 을 계산하면서 모자람을 볼 뿐만 아니라그것을 소용이 없는 하찮은 것이라고 여깁니다.

그렇습니다그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를 보았습니다가져서 부유하고 힘 있고 줄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부자 어른이 아닌오히려 보호와 보살핌을 받아야 하고 주는 것을 받아먹어야 하는무능력하고 나약한 가난한 ‘아이’가 그것을 가지고 있음을 보았습니다그것은 모자라거나 소용없는 것이 아니라, ‘일곱 개의 충만함이었습니다그것은 제자들에게는 모자람이었지만예수님께는 충만함이었습니다이 ‘아이’가 바로 가난하면서도 지니고 있는무능하면서도 전능한예수님의 표상입니다그러나 그는 아직 알아보지는 못했습니다마치 막달라 마리아처럼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처럼구원자를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혹 우리도 그러고 있지 않는지 잘 보아야 할 일입니다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는지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빵 다서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나누어 주십니다그들은 배불리 먹었고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습니다그야말로 모두가 먹고도 남는 충만함입니다남은 열두 광주리는 열두 지파’, ‘열두 제자에서 보듯이 하느님 백성 모두를 나타내는 숫자입니다그렇습니다우리 모두가 먹기에 충분한 빵이 이미 있습니다.

 

사실오늘 우리가 들은 <요한복음>은 <공관복음>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단순히 자비를 베푸는 기적 이야기인 것이 아니라당신 자신을 “생명의 빵”으로서 내어주는 표징으로 제시됩니다곧 <공관복음>에서는 빵과 물고기를 제자들에게 나누어주게 하시지만,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빵과 물고기를 “직접 군중에게 나누어 주시면서”(요한 6,11) 당신 자신을 빵을 주시는 분으로 계시하십니다곧 당신 자신이 “생명의 빵”임을 표징으로 보여주십니다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요한 6,14)이심은 알아보지만여전히 “생명의 빵”으로 자신을 내어주시는 분으로 알아보지는 못했습니다오히려그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정치적이고 민족적인 임금으로 삼고자 합니다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군중과 제자들을 피하여외로이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십니다.”(요한 6,15).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빵”으로 건네주십니다우리는 이미 그 충만함을 받았습니다당신 생명의 충만함을당신 사랑의 충만함을 이미 입었습니다이제는 우리 자신을 빵으로 내어주어야 할 일입니다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요한 6,9)

 

주님!

보잘 것 없는 것이라고 하찮게 여긴 저를 용서하소서.

비록 작은 것이라도 무가치하게 여기지 않게 하소서.

당신이 저를 그러하듯값지고 소중하게 여기게 하소서.

가진 모든 것에 감사하게 하소서!

제 자신에 감사하고당신 사랑에 감사하고당신의 동행에 감사합니다아멘.

 기적을 낳는 믿음의 사람

 -반영억신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 하느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우리의 허물과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그 사랑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을 느끼려면 그만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이 시간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는 은총을 입으시길 기도합니다. 기도를 많이 해서 주님의 사랑을 많이 받는 것이 아니라 기도를 함으로써 주님께서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알게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믿음으로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열왕기 하권 4장 42절-44절에 보면, 어떤 사람이 맏물로 만든 보리빵 스무개와 햇곡식 이삭을 자루에 담아 하느님의 사람 엘리사에게 가져왔습니다. 그러자 엘리사는 시종에게 “사람들이 먹도록 나누어 주어라” 하고 일렀습니다. 그러자 시종은 “이것을 어떻게 백 명이나 되는 사람들 앞에 내 놓을 수 있겠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때 엘리사가 “사람들이 먹도록 나누어 주어라. 주님께서 이들이 먹고도 남을 것이라고 하셨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에게 내 놓으니 과연 주님의 말씀대로 사람들이 먹고도 남았습니다. 하느님의 손에 맡겨 드리면 분명히 달라집니다. 

 

우리 삶에도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 일이겠는가?”하는 의문이 있습니다. “저 많은 사람들에게 무슨 소용이 될까?”계산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인간적인 생각을 뛰어넘어 풍요롭게 하시는 분입니다. 바로 그러한 분을 믿는 것이 신앙입니다.‘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기껏해야 보잘것없고,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는 너무 부족해!’라는 생각을 접고, “나누어 주어라” 는 말씀만을 기억할 때 신비스러운 일이 일어납니다. 그야말로 기적이 믿음을 낳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기적을 낳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믿게 하려고(탈출4,2-5), 그리고 복음 전파를 위해(마태11,4-6)서 또한 말씀이 참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마르16,20) 기적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기적을 위한 기적을 일으키지 않으시고 믿음을 기반으로 능력을 체험케 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비스러운 현상이 일어났다고 하는 곳을 쫓아다닙니다. 그러나 그것이 모두 믿음을 성장시키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일 수도 있습니다. 사실 믿음으로 내 삶의 자리를 기적의 자리로 만들지 못한다면 신비로운 것을 아무리 많이 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기적의 체험은 특별한 체험이기도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잊어버리게 됩니다. 더 큰 신비한 것을 요구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는님의 말씀을 통해서 다져진 믿음이 중요합니다. 말씀이 영혼의 양식입니다. 어떤 신비한 현상이 기적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하느님을 더 많이 사랑하고 하느님의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이 기적입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또는 성모님에 대하여 많은 지식을 얻는 것보다 하느님을, 성모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더 필요합니다. 아버지 하느님께 순종하며 우리를 위한 사랑에 목말라 하신 예수님의 삶을 오늘 내가 살아야 합니다. 어머니의 삶도 마찬가지 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주님의 뜻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기에 복되십니다. 그러므로 기적을 쫓지 말고 기적을 낳으시길 바랍니다. 기적이라는 현상을 과거에 묶어놓지 말고 오늘 내가 주님의 손이 되고 발이 되어 기쁨과 평화를 이루십시오. 그것이 기적입니다.

  

요한복음 6장 1절에서 15절을 보면, 배고픈 군중을 바라보는 예수님과는 달리 필립보는 빵을 살 돈을 걱정했고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도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하고 실망스러운 모습이었습니다. 이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현실적인 자기입장에서 바라보고 자기 생각에만 갇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함께 계신 주님을 간과 했습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인간적인 계산을 먼저 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끊임없는 유혹입니다. 이 유혹을 단호하게 끊어 버리십시오! 그리하면 그 때 비로소 주님의 능력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이 먹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보리빵 다섯 개를 들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자리 잡은 이들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물고기 두 마리도 그렇게 하시어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주셨습니다. 그리고 먹고 남은 조각으로 열 두 광주리를 가득 찼습니다. 인간의 생각은 불가능해 보여도 주님의 손을 거치면 가능합니다.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아무리 적어도 모두를 내놓을 수 있는 마음이 있다면 그것은 결코 적은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많아도 내 놓을 수 있는 마음이 없다면 결코 많은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작아도 전체는 항상 부분보다 큽니다. 아무리 많아도 부분은 모두보다는 적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말씀으로 모든 것을 이루실 수 있는 분이시지만 한 아이가 건네준 빵과 물고기를 사용하여 배고픈 이들의 부족함을 채워주셨습니다. 인간의 협력을 높이 사신 것입니다. 많든 적든, 크던 작던 상관없습니다. 주어진 모두를 가지고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먹고도 남았습니다. 이렇게 주어진 것에 감사하면 더 크게 감사할 수 있는 은혜를 입게 됩니다. 우리에게 하찮은 것이라고 보이는 것도 주님의 손을 거치면 엄청난 일이 됩니다. 

 

덕이 출중한 성자가 여행 중에 다른 두 명의 여행자를 만났습니다. 이들은 동행이 되어 함께 걷다가 헤어질 때가 되었는데 성자가 말했습니다.“오늘 이렇게 만난 것이 은총이니 당신들에게 선물을 주겠소. 소원을 하나씩 이루어줄 테니 청하시오. 그런데 먼저 말한 사람의 소원이 이루어지면 다른 사람은 그 사람의 두 배를 받게 될 것이오.”

  

무엇이든지 소원을 하나씩 들어준다는 성자의 이야기를 듣고 두 사람은 너무 좋아서 얼른 소원을 말하고 싶었지만 말을 하려다 말고 멈췄습니다. 두 번째로 말하면 앞사람의 두 배로 받는다는 것을 기억했기 때문입니다. 서로에게 눈치를 주다가 결국 한 사람이 고심한 끝에 말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 한 쪽 눈을 멀게 해 주십시오.”그렇게 해서 동시에 한 사람은 애꾸눈이 되고 나머지 한 사람은 장님이 되었답니다. 자기만 생각하는 이기심과 끝없는 욕심은 삶을 파멸로 몰고 갑니다.

  

사도 바오로는 “적게 뿌리는 이는 적게 거두고 많이 뿌리는 이는 많이 거두어 들입니다"(2코린9,6). 하고 말했습니다. 은총을 심는 이는 은총을 거둡니다. 사랑을 심으면 사랑을 거둡니다. 비록 보잘 것 없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이것이라도”하고 사랑을 담아 내 놓으면 주님께서는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더 풍요롭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나눔의 기적을 낳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나누면 나눌수록 풍요로워지고 버리면 버릴수록 자유로워집니다. 그런 의미에서 풍요와 자유를 누렸으면 좋겠습니다.

  

배고픔에 지친 사람들이 빵을 먹고 배불렀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또 배고프게 됩니다. 그러므로 수천 명이 배부르게 빵을 먹은 현상에만 관심을 두지 말고 이 사건을 통해 가르치신 바가 무엇인지를 알아들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능력을 지니시고 우리와 동행하십니다.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해서 기적을 이루시고자 하십니다. 주님께 대한 믿음을 새롭게 하여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나눔의 기적을 이룰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당신의 생명을 내놓기까지 사랑하십니다. 더더욱 미사 안에서 당신자신을 성체의 형상으로 끊임없이 내어 주심으로써 우리를 영적으로 살찌우고 풍성하게 하십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하시려는 일이었습니다. 영성체를 할 때 마다 사랑의 실천을 다짐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성급하게 주님의 낙원을 꿈꾸고 기다리며 기적을 쫓지 말고 지금 여기서 주님처럼 사랑하고, 주님처럼 섬기고, 주님처럼 내어주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나의 주님, 예수님의 능력을 힘입어 삶의 자리를 기적의 자리로 만드시기 바랍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기적을 낳는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조욱현신부-

 

오늘은 지난 주일에 이어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군중들에 대한 예수님의 목자다운 배려인 빵을 많게 하신 기적을 전하고 있다. 이것을 마르코 복음에서 취하지 않고 요한복음에서 취하는 것은 이 기적에 이어 성체성사에 관한 이야기가 계속되고 있고,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정점이며 원천인 성체성사에 대한 교의적 근거를 제시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21주일까지 요한복음에서 언급되는 성체성사에 관한 것이 중심 주제가 될 것이다.

 

예언자 엘리사는 적은 음식으로 많은 사람을 배불리 먹였고 그 음식이 남기까지 하였다(2열왕 4,44 참조). 또 엘리사가 빵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라고 하자 제자가 놀랐던 것과(2열왕 4,43) 필립보의 경우와 비슷하다(요한 6,7). 복음사가들은 구약의 여러 가지 기적들의 문학형식을 모방하고 있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복음: 요한 6,1-15: 오천 명을 먹이신 빵의 기적

 

예를 들면, 만나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모세에 대해 언급하며(요한 6,31-33.49 참조), 장소에서도 따로 떨어진 산에서 기적을 행하시고(3절), 그때는 “유다인들의 축제인 파스카가 가까운 때였다.”(4절) 전하면서 구약의 이야기들을 모방하고 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약성경의 구원적 메시지의 “완성”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며, 과거 구원의 예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빵의 기적을 본 군중들은 모세가 백성들에게 약속하여 오랫동안 기다리게 한(신명 18,15) 그 예언자로 생각을 하고 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표징을 보고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이시다.’하고 말하였다.”(14절). 그리고 모세의 경우와 같이 예수께서도 산에서 기적을 행하셨고, 이 빵의 기적은(10절) 그러기에 새로운 그리스도교적 파스카를 상징하고 있다. 즉 옛것의 “완성”이면서 그것을 무한히 초월하는 “새로움” 자체임을 의미한다. 이 빵의 기적은 바로 이 ‘새로움’을 이해하게 해 주고 있다. “그래서 그들이 모았더니, 사람들이 보리 빵 다섯 개를 먹고 남긴 조각으로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찼다.”(13절).

 

빵을 나누어 받은 군중이 제1독서의 백 명이 아니라 “장정만도 그 수가 오천 명쯤”(10절)이라는 사실, 그리고 만나는 지나치게 거두어들일 수 없었으나(탈출 16,20) 예수께서는 “버려지는 것이 없도록 남은 조각을”(12절) 모으라고 한 것도 이 기적의 특수성을 말해 준다. ‘열둘’이라는 숫자는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외에 완전한 숫자를 의미한다. 이 ‘메시아적 빵’은 이제 오천 명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짐을 의미한다. 즉 예수님의 행동과 ‘감사드린다, eucharistéo’(11절) 라는 뜻의 성체성사의 특성이 예수께서 행하신 기적의 새로움을 말해 준다. 요한복음에는 최후만찬을 기술하고 있지 않지만 여기서 그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당신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15절) 한다. 군중들은 기적을 보고 감동하여 열광은 하지만 본래의 의미는 파악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 후에도 예수님을 찾은 것은 빵과 물질적 이익 때문에 모여들었다(요한 6,26절 참조). 그들이 생각하고 찾고 있던 메시아는 권능을 가지고 무엇이나 거저 베풀어주시고 물질적인 것까지도 해결해주는 메시아였다. 즉 편의주의적 메시아이다. 그러니 그리스도를 찾는 것 같지만, 자기 자신만을 찾고 있다. 자기 자신만을 찾을 때, 그리스도를 계시해주는 표지로서의 기적을 이해하지 못하고, ‘신앙’에 자기 자신을 여는 것을 방해한다. 그래서 그 잘못된 이해를 잠재우기 위해 예수께서는 산으로 피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당신의 생각과 군중들의 생각이 다르다는 것을 확실히 하신다.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5절) 하신 것은 제자들이 가난과 고통에 있는 사람들에 관한 관심과 책임감을 느끼도록 촉구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께서 베푸신 빵의 기적을 깨닫고, 당신 자신을 내어주시는 무한한 사랑인 성체성사에 암시된 표지의 깊이를 깨닫는 정도에 따라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진정한 나눔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여야 한다. 현세적이고 편의주의적인 신앙은 진정한 빵의 의미를 왜곡하여 이기적인 신앙으로 흐르기 쉬운 것이며, 하느님을 자칫 기계적인 하느님으로 만들기 쉽다.

 

바오로 사도께서는 사랑에 기인한 ‘단일성’을 말한다. 오늘 에페소서의 내용이 사랑으로 서로 너그럽게 대하라고 하면서 교회 공동체가 하나가 되어야 함을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교 신자를 신앙의 단일성에로 이끄는 요소들은 많다. 하나이시며 같은 성령, 한 분이신 하느님 아버지, 주님의 성체로 이루어지는 교회의 몸도 하나이다. “빵이 하나이므로 우리는 여럿일지라도 한 몸입니다. 우리 모두 한 빵을 함께 나누기 때문입니다.”(1코린 10,17).

 

성체성사는 단일성과 사랑의 원동력이다. 이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던 소년이 그것을 군중 앞에 내어놓을 수 있었듯이 우리도 우리의 사랑을 주님 앞에 드릴 수 있으며, 이것을 가지고 기적을 이루실 수 있을 것이며, 또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기 위해 그들을 찾아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성체성사의 의미를 즉 당신 자신을 무한히 내어주시는 그분의 사랑을 우리가 깨닫고 그 사랑 안에 우리도 하나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하여야 하겠다.

 "사람들을 자리 잡게 하여라."(요한 6, 10)

-한상우신부-


사람이
있는 곳에
빵이 있다.

사람들 속에
빵이 있다.

사람이
빵이 된다.

서로에게
빵이 되는
만남이
참된
만남이다.

아름다운 삶은
빵의 삶으로
드러난다.

빵을 통해
사람이
누군지를
알게된다.

빵은
배신하지
않는다.

사람을
정화하는
빵이다.

빵으로
하늘과 사람은
하나가 된다.

신앙은
우리가
빵이 되는
것이다.

빵으로
우리모두는
아름답고
소중한 존재가
된다.

사람들은
사랑의 빵으로
살아가는
이들이다.

빵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빵이 되는
사랑이다.

예수님께서는
잃어버린 사랑을
되찾아주신다.

사람은 많아도
빵은 없다.

사랑은 많이
이야기하지만
우리에게
참된 사랑은
없다.

하느님께서
빵이 되셨다.

살아있는
사람만이
빵을 먹듯

살아있는
사람이란
빵처럼
사랑하는
사람이다.

빵은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랑이 되고
빵이 되는
것이다.

빵이
사람을
만든다.

빵이 영원한
생명의 길로
우리를
인도한다.

빵을 진실로
믿는다.

사랑의 빵이
필요한
우리는
사랑의
사람들이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영원한 생명의 빵이신 예수님을 가리키십니다.

제1독서 대목은 엘리사의 기적 이야기입니다.

"이 군중이 먹도록 나누어 주어라. 주님께서 이들이 먹고도 남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2열왕 4,43)
하느님의 사람 엘리사는 어떤 사람이 봉헌한 보리 빵 스무 개와 햇곡식 이삭 한 자루를 백 명의 사람들에게 먹이라고 내어 줍니다. 하지만 사람 수에 비해 양이 터무니없이 적다보니 분부를 받은 시종은 사실 믿지 못했지요. 엘리사라고 산수를 못 하겠습니까만, 그가 주님의 말씀을 믿었기에 모두가 먹고도 남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복음은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 이야깁니다.

"마침 유다인들의 축제인 파스카가 가까운 때였다."(요한 6,4)
복음사가는 도입부에 유다인의 파스카 축제를 언급함으로써 복선을 깔아 놓습니다. 앞으로 이어질 놀라운 빵의 기적은 예수님께서 완성하실 희생제사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하시려는 일을 이미 잘 알고 계셨다."(요한 6,6)
많은 군중이 다가오자 예수님은 그들을 먹이실 생각부터 하십니다. 길고 험한 타향살이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자녀들을 먼 발치에서 발견한 모든 어머니들의 마음에 본능적으로 떠오르는 생각이 바로 이렇겠지요.

"당신이 하시려는 일"
예수님은 먼저 군중에게 빵을 실제로 먹이려 하십니다. 육신의 허기를 채워 힘과 생명력을 북돋아주시려는 겁니다. 아울러 당신 스스로, 죄와 죽음으로 고통 받는 인류를 되살리실 희생 제물, 무죄한 어린양이 되시려는 계획도 들어 있습니다.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요한 6,9)
군중 안에 끼어 있던 아이들 중 한 명이 마침 먹거리를 지니고 따라왔나 봅니다. 모르긴 해도 이 먹거리는 자신과 몇몇 일행을 위해 준비한 것이겠지요. 이 소박한 양식이 모든 이를 위한 마중물이 될 수도 있지만, 그러려면 먼저 아이가 관대히 자기 것을 내어놓아야 합니다.

황량한 광야에서 달리 양식을 구할 곳이 없고 그나마 수중의 돈마저 간당간당하다면 지금 지니고 있는 일용할 양식이 퍽 요긴할 텐데, 아이는 긴 생각 하지 않고 자기 음식을 내어놓습니다. 비록 어린 아이지만 예수님을 믿었고 허기 진 군중을 염려하시는 그분 마음을 헤아리기 때문이겠지요.

여분의 빵을 뒷주머니에 예비하지 않은 상태에서 가진 것 전부를 내놓는 행위는 바로 생명을 나누는 것과 같습니다. 이 아이의 봉헌은 미소하나마 파스카의 완성이신 예수님의 온전한 자기 봉헌을 떠올려 줍니다.

"남은 조각으로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찼다."(요한 6,13)
예수님의 감사 기도를 통해 아이의 빵과 물고기는 오천 명을 먹이고도 남을 양식이 됩니다. 모두 배불리 먹고도 남은 조각이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차다고 하지요. 더 보탤 필요 없이 넉넉하고 충만한 생명의 양식이 우리 가운데 계심을 가리킵니다. 열둘이라는 완전한 수로 남은 빵은 온 인류를 살리고도 남을 주님의 몸입니다.

제2독서에서는 그렇게 인류를 위해 내어 주신 주님의 몸이 하나임을 강조합니다.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이고 성령도 한 분이십니다."(에페 4,4)
예수님은 당신의 몸을 생명의 양식으로 남기셨습니다. 이천 년을 이어오면서 인류가 받아 먹었고 지금 우리도 모시는 성체는 한 분 그리스도의 한 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믿고 그분의 몸을 받아 모시는 우리 모두는 하나입니다.

적은 양에서 오천 명을 먹일 양으로 늘어난 기적의 빵은 당신 몸을 내어 주신 생명의 양식으로 이어집니다. 생명의 빵은 같은 빵을 나누어 먹는 우리 온 인류를 한 몸으로 아우르고, 이 빵을 먹는 우리 모두는 한 몸이신 그리스도를 이루는 겁니다.

사랑하는 벗님! 우리 모두는 인종, 국적, 성별, 나이, 빈부를 넘어 같은 몸을 받아먹는 한 식구지요. 우리가 누리는 영육의 모든 것이 서로 한 몸을 이루라고 안배하신 주님의 선물임을 깨닫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생명의 빵을 모시는 우리가 생명의 빵이 될 때 복음 속 빵의 기적이 비로소 지금 여기, 세상 곳곳에서 완성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
"아멘."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8년 7월 29일 연중 제17주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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