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7월 1일 연중 제13주간 목요일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마태오 9,1-8)
"Courage, child,
your sins are forgiven."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최중훈신부-
작년 한 해는 코로나19로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미사도, 성사도, 다른 이와의 만남도 모두 조심스럽고 위험한 때였습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점점 아무것도 하고 싶지가 않아졌습니다. 방역 단계가 낮아져 무엇인가를 할 수 있게 되었음에도, 이제는 해야만 하는 일마저도 귀찮아져 버렸습니다. 살면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을 때는 많습니다. 게으름과 귀찮음, 나약함 때문이거나, 실패할까 두려워하는 경계심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노력해 보았자 결과는 같다고 생각하며 먼저 포기하고 절망해 버리는 패배감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때때로 우리는 여러 핑계로 움직이지도 나아가지도 않고 그냥 그 자리에 머물러 있으려 합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중풍 병자는 온몸이 마비되어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평상에 누워 있을 뿐입니다. 아무런 희망도 열정도 없이 그저 누워 있습니다. 그런 그를 위하여 주위의 다른 사람들이 무엇인가를 합니다. 평상을 들고 예수님께 다가갔고 병자를 대신하여 예수님께 청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병자에게 희망과 열정을 보여 주십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어쩌면 죄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두려움과 패배감은 더 나빠지지 않기 위한, 자신이 더 피곤해지지 않기 위한 욕심입니다. 자신이 죄를 지을까 염려하여 병자들을 멀리하였던 바리사이의 죄와 같을 것입니다. 나태함, 두려움, 절망과 포기 속에서도 예수님을 바라보며 예수님과의 추억을 떠올리며 ‘일어나 걸어가는 것’, 그것이 죄에서 해방되는 또 하나의 발걸음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 이야기하십니다.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와 함께 내가 걸어 주겠다. 함께 일어나 가자.”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악법도 법이다.’ 누가 한 말일까요? 우리나라에서 일명 ‘테스 형’이라 불리는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말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소크라테스가 한 말일까요?
소크라테스는 그런 말을 했던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이 말은 일본의 법학과 교수였던 오다카 도모오가 했던 말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쓴 ‘법철학’에 이렇게 적어 놓았습니다.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든 것은 실정법을 존중했기 때문이다. 악법도 법이므로 이를 지켜야 한다.’
이 글을 썼던 1937년은 일본 군국주의 시절이었습니다. 즉, 그는 국가를 보호하기 위한 논리로 이 글을 쓴 것입니다. 이것이 상식에 관한 법에 저항하는 사람들을 핍박하는 독재의 도구로 쓰였음은 굳이 예를 들지 않아도 잘 아실 것입니다.
잘못된 앎이 일제 강점기의 시대로 다시 살게 합니다. 법은 국가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국민을 위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잘못된 앎으로 인해 과거 군국주의 시절로 우리를 계속해서 이끌고 있습니다.
주님에 대한 앎도 제대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 시대의 율법 학자들은 이 앎을 갖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그저 율법의 조항에만 관심이 있을 뿐, 그 율법의 정신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중풍 병자를 고쳐주려는 예수님을 향해 ‘이자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중풍 병자를 걷게 하심으로써 당신께서 하느님을 모독했다는 율법 학자들의 비난이 근거 없음을 그리고 이제 그들이 당신께서 어떠한 분이신지를 생각해서 보아야 함을 분명히 하시는 것입니다.
우선 중풍 병자를 걷게 하신 것은 중풍 병자의 의로움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에게 먼저 말씀을 건네신 이유를 복음은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라고 되어 있지요. 병자를 데려온 이들이 예수님께 올 수 있었던 믿음을 보신 것입니다. 은총의 대상자 때문이 아닌, 그 옆에서 기도해주는 사람을 통해서도 은총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주님은 늘 사랑으로 다가오십니다. 그래서 “얘야, 용기를 내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얘야”라는 표현은 “내 아들아~”라는 사랑이 가득한 따뜻한 표현이었습니다.
믿음으로 다가오는 사람을 당신의 사랑으로 절대로 외면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보여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이를 위해 기도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나의 믿음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주님이심을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콜라하면 떠오르는 두 회사가 있습니다. 코카콜라와 펩시콜라입니다. 이 두 회사의 경쟁은 자그마치 120년 동안 계속되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시장 점유율을 어떻게 될까요? 우리나라 탄산음료 시장을 보면, 코카콜라가 45.1%, 펩시콜라가 11.3%입니다. 이는 전세계 안에서도 늘 코카콜라의 압승임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맛 때문에?
브랜드를 노출하지 않고 콜라를 마시게 한 후, 맛이 더 좋은 쪽을 선택하는 블라인드 테스트를 했습니다. 그 결과 펩시콜라가 더 맛있다는 사람들의 평가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코카콜라가 더 많이 팔리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좋은 것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더 가치 있어 보이는 것을 선택하기 때문입니다. 좋다는 것을 알지만, 자기 가치의 기준이 그 좋은 것에 있지 않습니다. 주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과 돈. 무엇이 더 좋은 것일까요? 당연히 주님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대부분 돈을 선택합니다. 주님에 대해 막연히 좋다고만 생각할 뿐, 진정한 가치를 따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가치를 찾아야 합니다. 그래야 돈에 끌려가는 삶이 아닌, 주님과 함께 하는 참 좋은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모독하는 법: '다' 주실 수 없다고 말할 때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중풍 병자를 보시며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얘야!”는 영어로 하면 ‘Son’, 곧 “아들아!”라고 부르는 말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하느님이시면서 아버지로서 자녀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 학자들은 ‘이자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어떻게 사람의 죄를 용서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지 않는 오류가 숨어있습니다. 하느님이 사람이 되실 수 없다고 믿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무언가 하실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 오히려 하느님을 모독하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실 수 있고 그 사람이 되시어 행하시는 모든 권한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주실 수 있다는 것을 믿게 하시기 위해 그를 치유하시며 용서해 주십니다. 군중은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이 말은 죄를 용서하는 하느님의 권한을 예수님만이 아니라 교회도 행사하게 될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제가 하느님은 우리가 하느님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고 사실 우리가 하느님이 되게 하시려고 세상에 오셨다고 말하면 거의 신성 모독죄를 지은 것처럼 나무라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러나 저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당신 신성까지 ‘다’ 주시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면 오히려 하느님을 모독하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악보도 볼 줄 모르는 9살 아이가 피아노 음악이 나오는 영화를 한 번 보고 그대로 따라친다고 말하면 믿으시겠습니까?
바로 ‘영재발굴단’에 나왔던 배용준이란 아이입니다. 힘든 가정형편에도 엄마가 팔지 않고 둔 낡은 피아노는 용준이가 엄마를 기쁘게 해드릴 수 있는 유일한 도구였습니다.
하지만 아이의 부모는 정식적인 피아노 교육을 받게 해 줄 재력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이에게 살짝 ‘입양’ 이야기를 합니다. 아이의 능력을 펼쳐 줄 능력이 되지 않는 것에 너무 마음이 아프기 때문입니다. 아이는 음악 시디도 남이 버린 것을 주워와서 듣고 그대로 따라치는 연습을 합니다. 장난감도 옷도 새것을 사 준 적이 없고 다 주워다 씻고 빨아서 아이를 키우는 형편입니다.
아이는 천재인데 엄마는 아이를 뒷받침해 줄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안타깝게 여겨 입양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엄마에게는 아이에게 생명도 주고 싶지만 자기 생명이 아니라면 아들을 다른 부모가 키우게 하고 싶은 마음마저 있는 것입니다. 아이에게 가난을 물려주고 싶지 않은 엄마의 마음입니다.
물론 아이는 펄쩍 뛰면서 그러면 자기 죽어버릴 것이라 합니다. 아이는 엄마가 자기 목숨과 같습니다. 아이는 엄마를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피아노를 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용준이는 피아노를 치기 싫어합니다. 피아노 때문에 학교에도 못 가고 친구도 없습니다. 그러나 엄마를 위해 칩니다. 엄마의 사랑을 그리워하기 때문입니다.
1년 후 엄마는 암에 걸려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아이는 아픈 엄마를 위해 죽도록 하기 싫은 피아노를 칩니다. 엄마는 아프다가도 용준이 음악 소리만 들으면 통증이 없어진다고 합니다. 그러니 용준이는 피아노를 멈출 수 없습니다.
엄마는 자신이 없으면 용준이를 누가 돌봐주느냐며 걱정입니다. 자신이 죽는 것보다 용준이의 미래만을 걱정하는 것입니다. 용준이는 그런 어머니를 위해 이제 밥도 차리고 빨래도 하며 가정 살림을 돕습니다.
엄마는 죽어가면서 말합니다.
“태어나, 저의 유일한 존재 이유가 용준이었습니다.”
용준이는 말합니다.
“엄마는 ‘심장’이에요. 심장이 없으면 죽으니깐.”
용준이는 콩쿠르에서 어머니가 좋아하는 쇼팽의 즉흥 환상곡으로 대상을 안겨줍니다. 그리고 엄마는 아이를 남기고 떠납니다.
용준이는 울지 않습니다. 그리고 4년 동안 피아노를 치지 않습니다. 그러다 엄마가 원하는 것이 그것이고 자신이 잘할 수 있는 것이 그것이기에 다시 피아노를 칩니다. 예원학교 2학년으로 꿈을 키워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 데는 용준이를 자신의 집에서 키우며 피아노를 가르쳐주는 김지선 선생님도 큰 몫을 하였습니다. 결국, 엄마의 바람대로 엄마는 떠나고 더 능력 있는 분이 용준이를 맡아 키워주고 있습니다. 어쩌면 어머니가 목숨으로 아이를 그렇게 봉헌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엄마가 아이에게 다른 집으로 가면 어떻겠냐고 말했을 때 아이가 얼마나 상처가 컸을까요? 그러나 엄마가 자기를 미워해서 그런 선택을 한 것은 아님을 알았을 것입니다. 다만 용준이는 엄마가 줄 수 있는 것보다 엄마 자신을 원했던 것입니다.
엄마는 자신의 생명까지도 다 줄 수 있고 자신이 주지 못하는 것까지 주고 싶었을 뿐입니다. 자신이 능력이 안 되어 아이를 입양시키려는 엄마의 마음은 또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 내 생명까지도 다 내어주고 그것도 모자라면 다른 것도 찾는 것이 사랑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자체이신 분께 “그분은 이러저러한 것은 주실 수 없어!”라고 말하는 것이 오히려 하느님을 모독하는 것이 아닐까요?
개신교는 교회에 하느님께서 주신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포기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주실 리가 없다고 여긴 것입니다. 물론 살과 피를 주시는 성체성사도 포기했습니다. 인간에게 그 정도까지 주실 수 없다고 믿는 것입니다.
사람도 사랑하면 자신의 능력 이상을 주고 싶어 하는데, 사랑 자체이신 분이 어떻게 어떤 것은 주실 수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살과 피는 바로 그분의 심장입니다. 심장을 내어주실 수 있는 분이라면 신성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당신의 신성을 받아 우리가 본성상 하느님이 된다는 것이 무슨 신성모독이 되겠습니까?
예전에 성탄 자정미사가 끝나고 복사 아이들에게 집에 들어가며 떡볶이 사서 먹으라고 만 원짜리 몇 장을 주었습니다. 다음 날 그들은 그 돈을 그대로 가져왔습니다. 아마도 부모님이 사 주시고 저에게 다시 가져다주라고 한 것 같습니다. 저는 준 돈을 받아서 기분이 좋았을까요? 저는 그 정도도 주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 오히려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을 모독하는 사람은 하느님이 어떤 것을 주실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은 당신 모든 것을 다 주시고도 모자라 아마 더 주실 수 있는 것이 있으셨다면 그것을 주시기 위해 우리 아버지가 되시는 것도 포기하실 수 있으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하느님이 되고 또 하느님의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믿어야 하느님을 모독하지 않고 찬미하는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아버지처럼 완전해지기를 원하십니다. 할 수 있으니까 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부모처럼 할 수 있다고 믿는 자녀가 효도하는 자녀입니다.

-조재형신부-
예수님께서는 어린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가기 힘들다고 하셨습니다. 어린이들이 가까이 오는 것을 막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며칠 전에 어린이들이 쓴 글을 읽으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조금은 이해할 것 같았습니다. 오늘은 그 아이들의 마음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직행버스와 완행버스를 보면서 쓴 글입니다. “가다가 손님 오면 고약한 직행은 그냥 가고요. 인정 많은 완행은 태워줘요. 달리기는 직행이 이기지만 나는 인정 많은 완행이 더 좋아요.” 아이의 글을 읽으면서 오래 전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청량리에서 강릉까지 가는 완행열차였습니다. 좌석은 있었지만 힘들어하는 어르신에게 자리를 양보하였고, 바닥에 앉아서 친구들과 밤을 새워 이야기 했습니다. 지금은 완행열차도 없고, 깨끗하고 빠른 KTX를 타고 다닙니다. 하지만 예전과 같은 설렘과 낭만은 느끼지 못합니다. 하느님께서도 우리가 이 세상이라는 버스에서 정거장 마다 다 내려서 실컷 보고 오기를 바라실 것 같습니다.
집 선반에 매달린 메주를 보고 쓴 글입니다. “시골집 선반 위에 메주가 달렸다. 메주는 간장, 된장이 되려고 몸에 곰팡이가 피어도 가만히 있는데 우리 사람들은 메주의 고마움도 모르고 못난 사람들만 보면 메주라고 한다.” 어릴 때입니다. 장독대에는 간장, 고추장, 된장이 장독마다 가득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모든 것을 그렇게 직접 만드셨습니다. 햇볕이 좋은 날에는 장독 뚜껑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간장에 들기름 넣어서 국수를 비벼먹었습니다. 고추장에 나물 넣어서 비빔밥을 먹었습니다. 된장에 고추 찍어서 먹었습니다. 모든 것이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형제들이 작은 밥상 주위에 모여서 맛있게 먹었습니다. 하루 종일 놀다왔어도 어머니는 머라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긴 그때는 이런 말이 광고에 나왔습니다. ‘개구쟁이라도 좋다. 씩씩하게만 자라다오.’ 지금은 먹거리가 훨씬 많습니다. 신선한 야채가 있습니다. 우유도 있습니다. 생선과 고기도 원하면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어릴 때 먹었던 간장, 된장, 고추장이 생각나고, 작은 밥상이 그립습니다. 그곳에는 식구가 함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서 말씀을 통해서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믿음’입니다. 어린아이는 아빠가 손을 내밀면 높은 곳에서도 뛰어 내립니다. 아빠가 받아주실 거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가 의심을 하면 아빠가 손을 내밀어도 쉽게 뛰어 내리지 못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100세에 얻은 아들 이사악을 하느님의 제단에 바치려고 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 제물로 바치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말씀을 따랐습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욥도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좋은 것을 주셨을 때 감사했다면, 하느님께서 나쁜 것을 주셨을지라도 감사드립니다.” 인간의 이성으로 생각하면 이해하기 어려운 것들도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 바라보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조선 땅으로 왔던 파리 외방 전교회 신부님들을 생각합니다. 신부님들의 부모님들은 아브라함과 같은 마음으로 아들 신부들을 조선으로 보냈을 것입니다. 다시는 볼 수 없다는 것을 신부님들도 알았고, 부모님들도 알았습니다. 그것은 이성의 힘이 아니라, 신앙의 힘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중풍병자는 혼자서 예수님께 갈 수 없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중풍병자를 평상에 들고 예수님께로 데려 왔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중풍병자를 치유할 수는 없었지만 그들의 작은 수고와 노력은 중풍병자가 치유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런 봉사자들의 마음을 보시고, 중풍병자를 고통에서 치유시켜 주셨습니다. 어떤 분들은 좋은 방법을 찾기 보다는 지금 잘못된 것들을 찾고 비난하는 것을 봅니다. 그동안 열심히 일했던 분들의 수고와 땀은 생각하지 못하고 눈앞에 드러나는 작은 허물들을 먼저 이야기하는 것을 봅니다. 마치 오늘 복음에서 나오는 바리사이파 사람과 같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중풍병자를 평상에 들고 왔던 따뜻한 마음을 지닌 사람들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낼 수 있는 마중물이 될 때, 우리가 하느님의 뜻이 드러날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을 봉헌 할 때, 하느님께서는 더 많은 축복을 주십니다. 이제 우리 모두는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랑의 마중물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사람들이 어떤 중풍 병자를 평상에 뉘어 그분께 데려왔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똑바로 서기를 바라십니다!
-양승국신부-
제게 있어 ‘평상에 뉘어 예수님께 실려 온 중풍병자’ 스토리에 대한 묵상은 손에 잡힐 듯이 실감이 납니다. 스스로 힘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그 처지를 저도 200퍼센트 공감하기 때문입니다.
몇 해 전 저도 한동안 꼼짝 못하고 똑바로 누워 천장만 올려다보던 순간이 있었습니다. 그 몸에 미사도 나가야 하고 화장실도 가야하니, 일어나긴 하는데, 조심조심 침대에서 일어나는 데만 5분이 족히 걸렸습니다. 양말 신는데 5분, 옷 입는데 5분, 최소한으로 씻는데도 5분...평소 1분도 안 걸리는 거리가 10분 이상 걸렸습니다.
참으로 기기 막히고 비참해지더군요. 이게 과연 사는 건가? 싶은 마음도 들었습니다. 삶의 질이 순식간에 곤두박질쳤습니다.
그러나 그런 바닥 체험이 나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나 스스로 아무 것도 못하게 되니 긍정적인 부분도 있었습니다. 지체 장애인들이 일상적으로 겪고 있는 고통이 이런 것이로구나, 하는 것을 온 몸으로 체험했습니다.
또 한 가지 은혜로운 점이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 접하게 되다보니 ‘나는 아무 것도 아니로구나,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구나, 주님 자비 아니라면 나는 정말 비참한 존재로구나.’ 하는 깨달음이 다가왔습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세상 인자하신 한의원 원장님께서 “이 몸으로 그 동안 얼마나 힘들었어요? 마음 넓게 갖고 조금만 참으세요. 꼭 낫게 해 드릴께요!” 라고 말씀하실 때, 하느님께서는 동료 인간 존재 안에 굳게 현존해 계신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고통만이 전부였던 중풍병자가 은혜롭게도 치유자 예수님과 대면하는 은총을 입게 됩니다. 환우를 향한 가족들의 큰 측은지심, 그리고 반드시 일어나서 단 하루를 살아도 인간답게 한번 살아보겠다는 치유를 향한 환우의 강한 의지가 마침내 기적을 일구어낸 것입니다.
중풍병자는 춥고 어두운 긴 죽음의 터널을 잘 견뎌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인생의 봄날이 찾아왔습니다. 이제 평화로이 구원의 창가에 앉아 환하게 쏟아져 들어오는 생명의 햇살을 온 몸으로 받으며 자비하신 하느님의 업적을 찬미하고 있습니다.
중풍병자의 죽음 같은 오랜 병고, 그것이 한평생 그의 발목을 붙잡고 있었지만, 끝까지 잘 견딘 결과 이제 참 하느님의 부드러운 구원의 손길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는 육체적, 외적 치유뿐만 아니라 영적, 총체적 치유, 완전한 자유와 해방감, 구원을 이 지상에서부터 체험한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오랜 질병, 그리고 예기치 않았던 하느님의 개입, 그리고 마침내 은혜로운 치유를 통해 하느님의 전지전능하심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투병생활 뿐이었던 보잘 것 없는 자신의 전 생애를 통해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때로 끔찍한 고통을 주시지만 하느님께서는 그 고통과 함께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입장에서 봤을 때 끝도 없을 것 같은 고통 같지만, 그래서 쉽게 체념하고 쉽게 포기하는 우리이지만, 하느님께서는 전혀 예기치 않은 방법으로, 우리가 조금도 예상하지 못한 방법으로 우리 삶에 들어오셔서 우리를 말끔히 치유시켜주십니다.
하느님 편의 예고 없는 방문, 성령께서 주시는 뜻밖의 선물인 치유의 은총을 받아들이기 위해 우리 마음을 활짝 열 필요가 있습니다. 내 병세가 너무 심각해서, 의사도 내놓은 사람이어서, 내가 너무 나이가 많아서, 더 이상 내게 좋은 일이란 일어나지 않을 것이란 생각을 해서는 절대 안 됩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우리가 요구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크고 좋은 것을 주십니다. 눈물을 거두고 하느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똑바로 서기를 바라십니다. 내면과 외면 모두, 육체와 영혼 모두 온전하고 아름다운 존재로 행복한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애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이영근신부-
사람들이 중풍병자를 평상에 뉘어 예수님께 데려왔습니다. 그는 몸이 마비가 된 지라 제 발로 걸어올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백인대장의 믿음을 보시고 그의 하인의 중풍을 치유하셨듯이,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병자를 치유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질병의 치유에 앞서 중풍병자에게 ‘죄의 용서’를 선언하십니다.
“애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태 9,2)
“애야.”하며, 사랑스럽게 부르시며, 먼저 영혼을 치유하십니다. 이 엄청난 사실 앞에, 감히 하느님만이 할 수 있는 ‘죄의 용서’를 선포하신 이 사실 앞에, 아니 이 무뢰하고 불경한 사실 앞에, 율법학자들은 어안이 벙벙해졌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자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하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이 아니고서는 그 누구도 용서할 수가 없거늘, 감히 “죄를 용서받았다.”고 누가 선언할 수 있을까요? 하느님이 아니고서는 말입니다. 히에리무스는 말합니다.
“말하기는 쉬워도 이루기는 어렵습니다.
중풍병자가 용서받았는지는 용서하실 수 있는 오직 한 분만이 확실히 아십니다.”
그러니, 결국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느님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의 생각을 아시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마테 9,6)
이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십니다. 당신이 용서권자요, 하느님이심을 직접 드러내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권한을 직접 선언하십니다. 그리고 그 증거로 중풍병자를 치유를 보여주십니다. 곧 영적 표징의 증거를 보여주기 위한 육체적 표징을 보여주십니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마태 9,7)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먼저 죄를 용서해주셨고, 이어서 건강을 회복시키는 당신의 능력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중풍병자가 평상을 가지고 가게 함으로써 육신이 병과 고통에서 벗어났음을 똑똑히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중풍병자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게 하심으로써, 믿는 이들이 아담의 죄로 떨어져 나온 낙원으로 가는 길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알려주셨습니다.’(힐라리우스)
이렇게 하느님이신 당신께서 영혼과 육신 모두의 창조주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리고 영혼과 육신의 마비 모두를 고쳐주셨습니다. 그러자, “이 일을 보고 군중은 두려워하며,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습니다.”(마태 9,8)
그렇습니다. 용서는 치유를 가져오는 권능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치유받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먼저 용서하십시오. 용서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먼저 하느님께서 나를 용서하셨음을 받아들이십시오. 그리하면, 이미 치유 받은 것입니다. 아멘.
-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마태 9,6)
주님!
당신께서는 치유 받은 이에게 평상이 더 이상은 필요하지 않으나
평상을 가지고 가라 하십니다.
당신께서 십자가의 상처를 가지고 가셨듯이,
구원의 표시로 들고 가라 하십니다.
사랑이 흘러나오는 그 상처를 더 이상은 거부하지 않게 하소서.
그 구원의 샘에서 사랑을 퍼내게 하소서.
아픈 이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평상이 되게 하소서. 아멘.

하느님은 언제나 우리를 사랑하신다
-반영억신부-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그런데 단순히 외적인 병을 고쳐주신 것이 아니라 그의 죄까지 용서해 주셨습니다. 당시는 병은 죄에 대한 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중풍병자는 신체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죽음에 직면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한 말씀으로 생명과 활력을 주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병의 근원을 고쳐주신 것입니다. 그야말로 영육의 치유를 이루어주셨습니다.
많은 경우 사람들은 외적인 질병의 치유에 매달립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원인을 다스리는 치유의 손길을 펼치십니다. 우리는 그러한 능력을 지니신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병의 치유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과 구원을 보여주는 표징일 따름입니다. 손가락 끝으로 달을 가리킬 때 우리가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 ‘손가락’이 아니고 ‘달’인 것처럼(견지망월) 우리가 만나야 할 분은 나를, 우리를 구원하실 예수님이지 병의 치유가 모두는 아닙니다.
눈으로 보이는 현상에 매달리는 것보다 언제든지 그러한 은총을 베풀어 주실 수 있는 주님을 만나는 것이 더 소중합니다. 만남을 위해서 그분께 대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또한 환자 자신이 갖는 믿음도 중요하지만 중풍병자를 평상에 뉘어 주님께 데려온 이웃의 믿음과 사랑도 그에 못지않습니다. 사실 중풍병이 문제가 아니라 영적인 무지와 껍데기 믿음이 더 큰 문제입니다. 행동이 따르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미국 남북 전쟁시에 링컨의 참모가 “하느님께서 우리의 편이 되시게 하기위해 기도합시다.”라고 하였을 때 링컨은 “하느님이 우리 편에 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느님 편에 서기 위하여 기도하도록 합시다.”라고 답변하였다고 합니다. 하느님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믿음의 사람은 생각하는 차원이 다릅니다. 하느님께서 나의 편이 되어주시고 나의 기도를 들어주시길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나의 편이 되어주셨고 죄를 용서해 주시며 마음의 자유를 주셨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주님께 대한 믿음을 다지고 새롭게 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 앞에 신실하지 못하더라도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나에게 잘해주고 계십니다. 어떤 어려움이 생길 때 내가 죄인이라서 벌을 받는구나. 또는 내가 못나서 이런 고통을 당하는구나! 하고 낙담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이미 하느님의 모상, 하느님의 걸작품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렇게 느끼지 못하는 것은 나의 우둔한 믿음 탓입니다. 지금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이 외부에서 오는 위기인지 아니면 연약한 내 마음에서 오는 것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께 대한 믿음에 눈뜨는 오늘이기를 기도합니다. 오늘도 ‘주책’을 생각합니다. ‘주책’ 아시죠? 주님께서 책임져주신다는 믿음으로 산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계시는 분>
-송영진신부-
“사람들이 어떤 중풍 병자를 평상에 뉘어 그분께 데려왔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그러자 율법학자 몇 사람이 속으로 ′이자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고 생각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에 악한 생각을 품느냐?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그런 다음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그러자 그는 일어나 집으로 갔다. 이 일을 보고 군중은
두려워하며,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마태 9,2-8).”
이 이야기는, “예수님은 사람의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계시는 분,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과 같은 권한과 권능을 가지고 계시는 분,
즉 예수님은 하느님이신 분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예수님이 바로 그런 분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이야기에서 예수님께서 중풍 병자의 병을 고쳐 주신 이야기는
부수적인 이야기일 뿐입니다.)
1) 사람들이 예수님께 중풍 병자를 데리고 온 것은
그 병자의 병을 고쳐 달라고 청하기 위해서입니다.
(누구나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병자의 병을 고쳐 주시지는 않고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라는 말씀은,
“나는 너의 죄를 용서한다.” 라는 뜻입니다.)
중풍 병자 자신이 병의 치유보다 죄의 용서를 더 원했을 수도 있고,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그 병자의 몸을 고쳐 주는 일보다
죄를 용서하는 일이 더 급하고 더 중요한 일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2) 율법학자들이 “이자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고 생각한 것은,
‘용서는 하느님만의 권한’이라는 믿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하느님만이 사람의 죄를 용서하실 수 있다는 믿음은 올바른 믿음입니다.
(우리가 이웃을 용서하는 일은, 어떤 권한을 가지고서 하는 일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용서의 은총을 이웃과 나누는 일입니다.)
만일에 예수님이, ‘하느님이 아닌 그냥 사람’이라면,
“나는 너의 죄를 용서한다.” 라고 말함으로써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모독했다는
율법학자들의 생각은 맞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느님과 같은 권한과 권능을 가지고 계신 분이고,
하느님이신 분이기 때문에 율법학자들의 생각은 틀린 생각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생각은 ‘악한 생각’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하느님의 일’을 부정하는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3)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라는 질문의 답은 “둘 다 어렵다.”입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둘 다 어렵고,
두 일은 모두 ‘하느님의 힘’으로만 할 수 있다는 뜻으로 하신 질문입니다.)
만일에 예수님이 사람들을 속이려고 하는 거짓 예언자라면,
죄를 용서하는 일이 더 쉬운 일입니다.
용서의 결과는 눈에 보이지 않고,
몸의 병을 고치는 일은 눈에 보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하느님이신 예수님에게는 둘 다 쉬운 일입니다.
너무 어려워서 주님이 못할 일은 없습니다(창세 18,14).
4)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라는 말씀에 있는 ‘땅에서’ 라는 말은,
‘바로 지금, 여기에서’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일은, 나중에 내세에서나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곳에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우리 구원은 예수님을 믿는 순간부터 시작되어서
나중에 하느님 나라에서 완성됩니다.
죄를 용서받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들을 실천하는 일은
바로 지금, 이곳에서부터 해야 하는 일입니다.
‘권한’이라는 말에는, ‘결정권’이라는 뜻과 ‘힘’이라는 뜻이 모두 들어 있습니다.
‘결정권’으로 생각하면,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라는 말은, 예수님은 사람의 죄를
용서하거나(사람을 구원하거나) 용서하지 않을(구원하지 않을) 권한을
모두 가지고 계신 분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힘’으로 생각하면,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계시는 분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그 구원은 받기를 희망하고 받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만 받게 됩니다.)
5)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라는 말씀은,
뜻으로는 “너희가 알게 될 것이다.”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이 가지고 계시는 권한을 율법학자들에게 알려 주려고
계획에 없던 병자 치유를 행하신 것은 아닙니다.
이 이야기에서 율법학자들이 품었던 의문은 일종의 상황 설정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생각과 상관없이 중풍 병자의 죄를 먼저 용서해 주시고,
그 다음에 그의 병을 고쳐 주려고 작정하셨을 것입니다.
6) 이 이야기에는 중풍 병자의 병을 고치는 말씀은 없고,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라는 말씀만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예수님은 한 마디 말씀만으로 기적을 일으키시는 분’이라고
표현하는데, 어떤 경우에는, 예수님께서는 ‘한 마디 말씀’도 없이
그냥 당신의 의지만으로 기적을 일으키시기도 합니다.
(병의 치유는 ‘권능’으로 하신 일이고, 죄의 용서는 ‘권한’으로 하신 일입니다.
우리가 눈에 보이는 ‘예수님의 권능’을 하느님의 권능으로 믿는다면,
보이지 않는 ‘예수님의 권한’이 하느님의 권한이라는 것도 믿을 수 있습니다.)
7) 그 자리에 있던 군중은 예수님의 권능과 권한에 압도되어서
‘두려워하며’ 하느님을 찬양하는데,
이 말에는 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뜻이 들어 있지 않습니다.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이라는 말은, 기적을 직접 목격했으면서도
여전히 예수님을 ‘사람’으로만 생각했음을 나타냅니다.
율법학자들의 반응에 대한 언급은 없는데, 아마도 그들은 침묵을 지켰을 것입니다.
그들의 침묵은 ‘믿기 싫은 것을 안 믿으려고 하는’ 침묵입니다.
하느님의 일을 안 믿으려고 하는 고집은 중풍보다 더 나쁜 ‘영혼의 병’입니다.

복음: 마태 9,1-8: 중풍병자를 고치시다.
-조욱현신부-
중풍 병자 한 사람이 다른 사람들에 의해 침상에 실려 왔다. 자기 자신의 힘으로는 어쩌지 못하는 상태였으나, 그 사람들의 도움으로 그렇게 되었으리라고 본다. 예수님께서는 중풍 병자가 아니라, 그를 데려온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병자에게 “애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2절) 하신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겸손을 나타낸다. 죄를 용서해 주시고 아들을 부르듯이 부르신다.
사지의 힘을 다 잃어버리고 누워있는 그의 치유를 위해 완전한 의사이신 주님 앞으로 들려왔다. 그분의 자비로 우선 마음이 치유되면 그 육체는 곧바로 자기 침상을 들고 갈 수 있는 충분한 힘을 얻을 것이다. 이 경우에는 치유 받을 사람이 천사들에 의해 예수님 앞으로 옮겨졌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죄를 용서받았다. 그러나 그가 죄를 지어서 병이 든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에 악한 생각을 품느냐?”(4절) 하느님께서는 “나, 바로 나는 너의 악행들을 씻어 주는 이”(이사 43,25)시다. 하느님 말씀을 자기들 마음대로 해석하는 율법학자들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모독했다고 따진다. 그러나 그들의 생각을 주님께서는 읽으시고 당신이 마음에 숨겨진 것들을 아시는 하느님이심을 보여주신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5절) 이 말씀은 어떤 행위가 더 쉽다는 의미가 아니다. 인간으로서는 아무도 그러한 말을 할 수 없다. 두 가지는 모두 전능하신 하느님께만 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여기서 복음은 예수께서 이 모든 권능을 지니셨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하시고는 중풍 병자에게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그러자 그는 일어나 집으로 갔다.”(6절). 이 행위로써 예수님은 죄를 용서해 주시는 권한과 건강을 회복시키는 당신의 능력을 보여주셨다. 병자가 집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잃었던 낙원으로 다시 돌아간다는 의미이다. 이것을 본 사람들은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동시에 찬양을 드렸다고 한다. 사람들이 하느님을 찬양한 이유는, 하느님의 ‘말씀’을 통해 사람들에게 죄의 용서와 육신의 부활과 하늘로 돌아가는 권한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병자의 치유행위는 죄를 용서하는 행위를 증명하는 것이다. 그분은 영혼과 육신의 마비를 모두 고쳐주셨다. 영혼의 치유는 육신의 치유를 통해 분명하게 드러난다. 우리가 이렇게 고백하는 주님께 우리 이웃도 함께할 수 있도록 인도하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우리 자신도 하느님을 알고 신앙을 갖게 된 것이 오늘의 환자와 같이 다른 사람의 인도를 받았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총에 감사드리며, 우리도 그들과 같이 우리 이웃의 천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믿음이 어떻게 표현되는지 보여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마태 9,2)
사람들이 중풍 병자를 평상에 뉘여 예수님께 데려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반드시 병자를 치유해 주실 거라 믿기에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지요. 믿지 않았다면 자칫 병세를 악화시킬 수도 있는 모험은 시도조차 하지 않았을 겁니다.
"이자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마태 9,3)
하지만 다 같은 생각을 하고 있지는 않은 것 같지요. 군중 가운데 있던 율법 학자들은 병자에게 "죄를 용서받았다"고 위로하시는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깁니다. 자기들이 배우고 가르치는 내용과 어긋난다고 여기고, 그저 냉정하기 짝이 없는, 차가운 잣대를 떠올립니다.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마태 9,6)
경외심과 순종으로 하느님께 철저히 믿음을 증거하신 예수님은 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계십니다. 아버지께서 당신을 믿고 목숨을 내놓는 아드님께 모든 것을 맡기셨기 때문이지요.
제1독서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닥친 시련의 이야기입니다.
"너의 아들,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사악을 데리고 모리야 땅으로 가거라. 그곳, 내가 너에게 일러 주는 산에서 그를 나에게 번제물로 바쳐라."(창세 22,2)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해 보시려고 이처럼 고통스런 명령을 내리십니다. 그토록 오랜 기다림 끝에 축복으로 허락하신 아들이고, 그를 통해 후손까지 약속하셨건만, 당신 말씀을 이렇게 뒤집으시니 인간적 생각으로는 참 막막하고 참담했을 것 같습니다.
"얘야, 번제물로 바칠 양은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하실 거란다."(창세 22,8)
장작을 지고 가던 이사악의 질문에 아브라함이 답을 합니다. 목적지에 도달하기까지 아들을 안심시키기 위한 임기응변이었을까요, 아니면 정말로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해 주셨던 이사악을 이제 그분 뜻대로 되돌려 드린다는 의미에서였을까요...
"네가 하느님을 경외하는 줄을 이제 내가 알았다."(창세 22,12)
"네가 나에게 순종하였으니"(창세 22,18)
아브라함의 무한한 믿음은 하느님을 항한 경외와 순종으로 표현되었습니다. 그는 하느님을 경외하기에 믿고, 믿기에 순종합니다.
복음에서 예수님이 하느님을 모독한다고 여겼던 율법 학자들은 스스로 하느님을 경외한다고 여겼을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세상에 오신 하느님을 하찮게 여긴 것입니다. 그분을 알아보는 눈이 닫혀 있었기 때문이지요. 반면 중풍 병자를 데려온 순박한 이들은 예수님을 하느님께서 보내신 메시아로 경외하고 존중했습니다. 의심 없이 단순하게 믿었기 때문이지요.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그러자 그는 일어나 집으로 갔다."(마태 9,6-7)
자기로 인해 촉발된 논쟁으로 뭔가 불편한 분위기 속에서 병자는 아마도 자기 몸에 일어난 변화를 감지하고 있었을 겁니다. 죄를 용서해 주시는 예수님의 따뜻한 말씀에 마음이 녹고, 그와 동시에 굳어 있던 몸이 녹는 것을 충분히 느꼈을 테지요.
그는 예수님께 순종하여 곧바로 일어나 평상을 집어들고 집으로 갑니다. 그분께서 하라고 하시니, 진짜로 할 수 있는지 없는지 떠보거나 간 보며 주저하지 않습니다. 말씀대로 일어나 집으로 갑니다.
"이 일을 보고 군중은 두려워하며,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마태 9,9)
모든 과정을 보고 들은 군중의 마음에 경외심이 떠오릅니다. 그리고 이 경외심이 찬양으로 이어지지요. 믿음은 하느님을 "경외함"에서 생겨나 "순종"으로 이어지고 "찬양"으로 완성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계실 때, 당신을 죽음에서 구하실 수 있는 분께 큰 소리로 부르짖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고, 하느님께서는 그 경외심 때문에 들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뒤에는 당신께 순종하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으며"(히브 5,7-9)
오늘의 말씀이 히브리서의 이 대목을 소환합니다. 제1독서에서 장작을 진 이사악은 십자가를 진 예수님의 표상이지요. 아브라함은 아들의 죽음을 감수해야 하셨던 성부 하느님을 가리키고요. 창자가 끊어질 듯 고통스러우셨을 하느님의 마음을 아브라함의 침묵의 고뇌와 순명에서 읽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주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은 어떻게 표현되고 있는지 살피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우리의 영육의 질병과 죄의 상처를 낫게 하시는 분, 당신을 제물로 바쳐 용서를 보장하신 분께서 이 모든 권한을 베풀고 싶어하신답니다. 주님을 경외함으로 더 충실해지고, 그분께 순종함으로 그분을 점점 더 닮아가는 벗님을 축복합니다. 7월을 힘차게 시작하십시오.

잔인함일까요? 사랑일까요?
-김찬선신부-
오늘 창세기 얘기는 하느님의 잔인한 테스트입니다.
아브라함에게 가장 소중한 것,
그것도 물건이 아닌 사람이요 사람 중에서도
늘그막에 얻은 외아들을 포기하라는 테스트입니다.
그런데 이런 테스트를 지금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하느님의 잔인함일까요, 그렇게 이해하기 쉽진 않지만, 오히려 사랑일까요?
테스트는 보통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현재의 상태나 정도를 알기 위함이고,
다른 하나는 단련이나 성장 또는 성숙을 위함입니다.
저도 양성 책임을 맡고 있을 때 이런 의미에서 테스트를 하곤 했는데
예를 들어 집안에 중요한 일이 있어서 가보겠다고 할 때
보내주기로 이미 마음먹고 있으면서도 갈 수 없다고 하고는
청원자가 포기한 것을 안 뒤에 허락을 하곤 하였지요.
이때 청원자는 어떻게 이렇게 중요한 행사에 보내지 않는지 그 비인간적인
처사에 일차적으로 화가 나 부글부글 끓고 나중에 허락을 받고는
청원장이 자기를 가지고 놀았다는 생각에 더 큰 분노를 하곤 하였지요.
그러나 저는 교육적인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를 위한 것이고 사랑으로 그리한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가족마저 버려야 한다는 것,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지 말고,
죽은 자의 장례는 죽은 자에게 맡기라는 가르침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었고,
무엇보다 자기 의지를 꺾고 주님께 순종하는 것을 가르치기 위한 거였지요.
오늘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테스트하신 것도 이와 같은 것이었을 겁니다.
복음적 권고인 순종과 가난과 정결의 실천과
이 모든 실천의 기초인 믿음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었을 겁니다.
그러니까 하느님을 믿는다면 어떤 것을 명해도 순종해야겠지요.
하느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는다면 말입니다.
그것이 지금 보기에는 매우 잔인하고 고통스러울지라도
나를 위한 사랑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믿는다면 아무리 소중해도 그것을 포기해야겠지요.
하느님께서 선이시고 또 모든 선의 주인이시며
그 선을 주시는 분임을 믿는다면 말입니다.
그런데 이미 소유한 것을 포기하는 것도 가난이지만
더 좋은 것을 더 좋은 때에 주시는 하느님께서 알아서 주시도록
아예 소유하려는 마음 곧 욕심을 포기하는 것이 더 나은 가난입니다.
이것이 오늘 창세기의 아브라함이 얘기하는 야훼 이레의 가난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느님이 믿는다면 만유 위에 하느님을 사랑할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소중한 것도 하느님만큼 소중하지 않고,
아무리 부모와 자식을 사랑해도 하느님보다 더 사랑하지 않으며
하느님 사랑과 자식 사랑 중에 택일을 해야 한다면 하느님 사랑을
선택하고 오늘 아브라함처럼 자식 사랑을 포기하고 희생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믿습니다.
아브라함이 오늘 자기 외아들 이사악을 봉헌한 것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 그리스도를 우리에에
희생 제물로 봉헌하신 것의 예표라는 것을 말입니다.
사실 이런 하느님을 믿고 이렇게 하느님을 믿는 것은 너무도 어려운 것이고,
그래서 우리는 아들이 아니라 하느님을 포기하는 것이 더 쉬운데
아무튼,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믿음의 테스트를 받고 있고,
하느님을 선택할 때까지 이 테스트는 계속될 것입니다.
이것이 잔임함일까요? 사랑일까요?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마태오 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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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은 100세에 얻은 아들 이사악을 하느님의 제단에 바치려고 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 제물로 바치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말씀을 따랐습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욥도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좋은 것을 주셨을 때 감사했다면, 하느님께서 나쁜 것을 주셨을지라도 감사드립니다.” 인간의 이성으로 생각하면 이해하기 어려운 것들도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 바라보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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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남북 전쟁시에 링컨의 참모가 “하느님께서 우리의 편이 되시게 하기위해 기도합시다.”라고 하였을 때 링컨은 “하느님이 우리 편에 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느님 편에 서기 위하여 기도하도록 합시다.”라고 답변하였다고 합니다. 하느님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믿음의 사람은 생각하는 차원이 다릅니다. 하느님께서 나의 편이 되어주시고 나의 기도를 들어주시길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나의 편이 되어주셨고 죄를 용서해 주시며 마음의 자유를 주셨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주님께 대한 믿음을 다지고 새롭게 해야 합니다.
-반영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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