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1년 4월 30일 부활 제4주간 금요일

Margaret K 2021. 4. 30. 06:55

2021년 4월 30 부활 제4주간 금요일  


“너희는 걱정하지 마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요한 14,1-6)


Do not let your hearts be troubled. 
You have faith in God; have faith also in me.  

"I am the way and the truth and the life. 
No one comes to the Father 
except through m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서철신부-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건너가셔야 할 시간이 되자, 사랑하시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며 그들을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그 모범을 바탕으로 제자들에게 새 계명을 주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것처럼 목숨을 내어놓기까지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당신의 마지막 길을 준비하시자 시몬 베드로는 예수님께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요한 13,36) 하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러 간다고 말하였겠느냐? ……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 그러자 토마스가 나서서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묻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길’이시라고 말씀하십니다. 육체를 지닌 우리 인간은 영적 존재이신 하느님을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져 보아야 ‘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참하느님이시면서 참인간이 되신 예수님을 통해서만 하느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 가는 ‘길’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 때 삼위일체 하느님을 보여 주셨고, 당신의 말씀과 가르침뿐 아니라, 가난하고 아파하는 이들과 함께 먹고 마시고 치유해 주시며,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기까지 사랑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말씀 안에 머무르면서, 그 말씀에 따라 살고자 할 때 “하느님은 사랑”(1요한 4,16)이시라는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그 사랑의 하느님께서 생명을 주십니다. 사랑은 돌보는 힘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생명을 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만드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만드실 뿐 아니라 돌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만드시고 돌보실 뿐 아니라 우리를 당신의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게 하십니다.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그 사랑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 그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게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생명’이십니다.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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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혼자 어느 섬의 둘레길을 갔던 적이 있습니다. 방송에도 여러 차례 소개되었고, 그곳에서 촬영한 영화도 있어서 시간이 날 때 그 섬을 혼자 찾아갔습니다.


아침 일찍 배를 타고 건너가 섬 둘레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곳곳에서 소개한 것처럼 섬 둘레길은 정말로 멋졌습니다. 그런데 너무 힘이 들었습니다. 경사도 가파르고 제대로 길이 닦여있지 않아서 땀을 뻘뻘 흘리며 겨우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힘들어서 허벅지가 터지는 느낌이었습니다). 더군다나 중간에 가게 하나 없어서 갈증으로 고생도 많았습니다.

몇 년 뒤에, 아는 지인들과 똑같은 코스를 함께 가게 되었습니다. 지인들에게 엄청 힘든 코스니까 물과 간식거리를 꼭 준비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혹시 허벅지가 터질지도 모른다고 겁도 잔뜩 주었습니다.

둘레길을 모두 함께 다녀온 뒤에 지인들은 뭐라고 말했을까요? 모두가 그렇게 힘들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뭐가 힘들다고 겁을 잔뜩 줬냐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왜 이런 차이를 보였을까요? 함께했기 때문입니다. 고통을 나누면 절반이 된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혼자 하면 나눌 수가 없으니 힘이 더 들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삶 안에서도 함께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고통을 이기는 길이 바로 이 ‘함께함’에 있습니다. 특히 우리의 부족함과 나약함을 우리의 힘만으로는 이겨낼 수 없기에 주님과 함께해야 합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왜 당신과 함께해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당신 없이는 아버지 하느님께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바로 주님께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길로 삼고 따르는 것은 우리가 하느님을 통하여 하느님에게 가면서 완성을 향해 십자가를 따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진리이기도 하시므로, 그분은 우리를 그릇된 길로 인도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생명이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희망하며 본디 우리를 위해 창조된 불멸의 삶을 회복시켜 줄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과 함께해야 하느님 아버지께 갈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의 첫 절을 우리에게 전해주십니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이렇게 주님께서는 믿음을 촉구하십니다. 믿음은 그 무엇보다 강력해서 겁쟁이를 용감한 군사로 바꾸어놓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으로 무장해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과 함께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구원이 멀리에 있지 않습니다.
그릇은 비어있어야만 무엇을 담을 수 있다(노자).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

레프 니콜라에비치 톨스토이(Lev Nicholaevich Tolstoy)의 단편 중에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바흠이라는 농부는 평범하지만 별 욕심 없이 행복하게 살던 한 소작농이었습니다. 우연한 기회에 땅을 조금 얻을 수 있었는데, 그 뒤에 땅 욕심이 계속 생기는 것입니다.

어느 날, 바흠은 어떤 지방에서 땅을 싸게 판다는 말을 듣고 그곳을 찾아갑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뜻밖의 말을 듣습니다. 글쎄 하루 종일 자기 발로 걸은 만큼의 땅을 준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해가 지기 전에 그 출발점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무효가 된답니다.

그는 잠시도 쉬지 않고 구덩이를 파고 표시를 하면서 땅을 넓혔습니다. 이렇게 해서 해가 막 떨어질 무렵 출발점에 간신히 돌아올 수 있었지만, 그만 심장이 터저 그 자리에서 피를 토하며 죽습니다.

바흠의 하인이 그를 땅에 묻었는데, 그 땅은 바흠의 키보다 조금 큰 3아르신(약 2미터) 불과했습니다. 정작 그에는 단지 반 평 남짓의 땅만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욕심이란 끝이 없습니다. 그러나 정작 필요한 것은 이 욕심이 아닌, 이미 가지고 있는 것에 만족하면서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이 아닐까요?

 생명으로 이끄는 길: 열매를 위해 꽃을 떨어뜨리는 길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도 역시 죽음을 앞두시고 제자들과 마지막 식사를 함께하실 때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떠나시는 이유가 아버지께 가서 우리가 거처할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 목적은 당신을 따르는 이들도 아버지의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유명한 말씀을 하십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당신 의견과 당신 삶을 따라야만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지금 이 세상에서 예수님의 의견을 따르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우리는 누구나 어떤 의견을 받아들이며 살아갑니다. 아주 많은 사람이 진화론을 받아들이고 그 의견대로 살아가고, 어떤 사람들은 이도 저도 아니고 그냥 돈과 명예, 쾌락에 빠져 살아갑니다.

    아마도 지금 우리가 즐겨 받는 의견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면 내가 유튜브나 TV, 인터넷에서 어떤 정보를 많이 접하는지 살펴보면 될 것입니다. 보통 내가 가장 시간을 많이 할애하여 보는 프로그램이 내가 따르고 싶은 의견이 무엇인지 반영하고 있을 것입니다. 저에게도 수많은 사람이 이런 의견을 주고 저런 의견을 줍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의견의 홍수 속에서 참 생명으로 이끄는 의견을 어떻게 구분해 낼 수 있을까요? ​
 

    며칠 전에 우연히 TV를 보았는데 귀신이 나타나 장군에게 전투에 관한 의견을 주는 야사 역사 이야기였습니다.

    신립 장군이 소년 시절, 경기도 광주에서 무술을 연마한 후 조선 시대 모자인 초립을 쓰고 외출을 하려는데 보라매 한 마리가 날아와 신 장군의 초립을 낚아채 남쪽으로 날아갔습니다.

    신 장군은 초립을 찾으려고 보라매를 쫓아 달려가다 보니 어느 기와집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날은 저물고 배는 고파 할 수 없이 주인을 찾았으나 과년한 한 처녀가 있을 뿐이었습니다. 처녀는 한숨을 내쉬며 오늘 저녁은 자신이 귀신에게 바쳐져 죽는 날인데 나를 살려만 주신다면 초립은 찾아 드리겠노라고 애원하였습니다.
 

    신 장군의 호기심도 있고 자신의 담력이나 무술도 시험해 보려고 처녀를 병풍 뒤에 숨게 하고 요귀들과 맞섰습니다. 삼경이 되자 요란한 소리와 함께 마당에서 소란이 일더니 괴수들이 나타났고 신 장군은 그것들을 물리치고 여자를 구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신 장군이 작별을 고하니 처녀가 홀로 남은 자신도 장군님을 따라 같이 가겠다고 합니다. 신 장군은 자신이 이미 혼인한 처지이니 그럴 수 없다고 완강히 거절하였습니다. 종으로라도 써 달라는 그녀의 말을 등 뒤로 하고 떠날 때 처녀는 귀신이 되어서라도 장군과 함께하겠다며 몸을 던져 자살합니다.

    그 뒤에 신 장군은 무과에 급제하여 오랑캐를 쳐부수고 북병사에 올라 그 용맹과 지략의 명성이 국내에 떨쳤습니다. 임진왜란 때 부산에 상륙한 왜적이 파죽지세로 영남의 각 읍을 석권하고 북상하니 서울 장안은 불안에 떨었습니다.

​    선조임금은 신립 장군에게 나라의 흥망이 장군의 몸에 달렸으니 적을 막아 나라의 근심을 없애라고 명령하고 큰 칼을 내려 명령에 불복하는 자는 참하라고 어명 하였습니다.

    신 장군은 불시에 모병한 8천 명의 군사를 지휘하여 새재에 이르렀습니다. 신 장군은 장안으로 가는 실질적 마지막 관문인 새재에서 왜군과 목숨을 걸고 싸워야 했습니다. 그러나 군졸들이 오합지졸인 데다 수적인 열쇠, 그리고 조총 등의 무기를 당해낼 재간이 없었습니다.

    이때 꿈에서 전에 자신이 목숨을 구해주었던 처녀가 나타나 장군을 도와줍니다. 장군의 정예부대는 말을 타는 기마부대였습니다. 따라서 새재와 같은 산에서 전투를 벌이면 그들의 능력이 발휘될 수 없으니 탄금대로 옮겨 진을 치라고 권합니다. 왜군이 아무리 소총을 지녔다 해도 명중률이 낮고 배수진을 치면 오합지졸인 군사들도 목숨을 걸고 싸울 수밖에 없어 승리할 것이라 하였습니다.
 

    신 장군은 자신이 구해준 처녀 귀신의 말을 듣고 진을 새재에서 탄금대로 옮기자고 합니다. 그러나 종사관 김여물 등 뛰어난 부관들이 이를 절대 만류합니다. 천의 요새를 버리고 왜 평지로 내려가 그 많은 병사와 싸워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신 장군은 선조가 준 칼로 위협하며 자신에게 복종하지 않으면 목을 치겠다고 합니다. 어쩔 수 없이 군대는 탄금대로 내려갔고 처녀귀신의 말과는 반대로 전투에서 왜군들에게 몰살을 당해 강줄기가 피로 물들었습니다.
 

    TV 프로그램 ‘천일야사’에서 처녀 귀신은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패배할 것을 몰랐단 말이오. 당신이 나를 진정으로 위했다면 내 시체라도 거두어 제사를 지내주었어야 할 것이오. 당신은 당신을 위해 나를 구한 것이고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아 떠난 것이오. 나는 당신을 속여 이 한을 풀려고 한 것이었소.”  귀신에게 속았음을 안 신립은 그 자리에서 자결하고 그렇게 서울까지의 길을 터 준 덕분으로 선조는 피난길에 올라야 했습니다.

 

    물론 이 이야기가 야사이기는 하나 나름대로 생각할 거리도 있습니다. 아무리 신립이 훌륭한 장수이기는 하지만 모든 참모가 반대하는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는 것은 자신의 의견에 그만큼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결정은 왜군들도 이해할 수 없는 결정이었습니다. 야사만 놓고 본다면 신립은 위대한 장군이라기보다는 보편적이지 않은 의견에 집착하는 고집불통으로 자기 명예만 추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살려는 사람은 결국 생명을 주지 못하는 것의 의견을 받아들입니다. 같은 부류끼리 어울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귀신은 죽어야 하는데 살려고 발버둥 치는 존재입니다. 꽃으로 치자면 떨어져야 하는데 끝까지 버티는 꽃입니다. 세포로 치자면 암세포와 같습니다. 죽지 않기 위해 버티는 이유는 그 생명의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열매는 꽃이 떨어져야 맺힙니다.
    “꽃이 떨어져야 열매가 맺힌다.”

    이것이 자연에 존재하는 생명의 법칙입니다. 꽃이 떨어지지 않으면 생명의 씨앗을 품은 열매가 맺히지 않습니다. 김창옥 씨는 어떤 신부님으로부터 “자존심의 꽃이 떨어져야 인격의 열매가 맺힌다.”라는 충고를 들었다고 합니다. 스스로 죽을 줄 아는 사람이 생명을 간직합니다.

    예수님께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시는 이유는 당신의 십자가가 유일한 생명이신 아버지께 가는 길이란 뜻입니다. 야사에 나오는 신립 장군은 이 세상에서 자신의 명예를 추구하였기 때문에 꽃이 떨어지지 않게 만드는 의견을 따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죽어야만 영원한 생명에 이를 수 있음을 알려주셨습니다. 누가 참 생명을 주는 의견일까요?
 

    우리가 유튜브, 인터넷 등 여러 정보를 접할 때, 과연 그런 것들이 이 세상에서 내가 꽃을 떨구고 십자가를 지게 만들어 이웃을 살게 하는 것인지 아니면 나를 영화롭게 만들어 이 세상에서 꽃처럼 빛나게 하는 것인지 살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나를 죽이는 정보는 영원한 생명으로 이끄는 의견이고, 이 세상에서 나를 살게 만드는 의견은 나를 귀신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생명과 진리의 길은 당신을 죽이고 아버지로 사셨듯, 우리 자신을 죽이고 그리스도로 사는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함께 지내는 신부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중학생 때 자전거로 학교엘 다녔다고 합니다어느 날자동차와 접촉사고가 났습니다다행히 큰 상처 없이 돌아왔지만 어머니는 무척 놀라셨습니다어머니가 막내아들을 위해서 노란색 종이에 빨간 그림이 그려져 있는 것을 주셨습니다잘 가지고 다니면 사고가 나지 않을 거라고 하셨습니다노란종이가 자신을 지켜주지는 않겠지만 어머니의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합니다나중에 어머니는 세례를 받았고이제는 노란종이 대신에 작은 십자가를 주셨다고 합니다늘 가지고 다니면 하느님께서 지켜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십자가를 보면서 어머니의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합니다노란종이든 십자가든 중요한 것은 자식을 사랑하는 어머니의 마음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게 고생할 때입니다이집트 땅에서 지낼 때가 좋았다고 불평과 불만이 많았습니다이집트에서는 힘은 들었지만 배불리 먹었기 때문입니다광야에서는 자유로웠지만 먹는 것도자는 것도 불편했기 때문입니다하느님께서는 불뱀을 내리셨고많은 사람들이 뱀에 물려 죽었습니다사람들은 모세에게 도와달라고 청하였습니다모세는 하느님께 기도했고하느님께서는 구리뱀을 만들어 높이 매달라고 하셨습니다구리뱀을 보는 사람은 뱀에 물렸어도 깨끗하게 치유되었습니다나중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리뱀만 보았습니다구리뱀이 자신들을 구원한다고 믿기 시작하였습니다모세는 구리뱀을 부셔버렸습니다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는 것은 구리뱀이 아니라하느님의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비봉 추모관에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유품이 있습니다아버지께서 사용하시던 알이 굵은 일단 묵주가 있습니다어머니께서 사용하시던 오래된 5단 묵주가 있습니다부모님의 결혼식 사진도 있습니다가족들의 사진이 있습니다한국에 있을 때면 가끔 찾아가서 인사를 드리고연도를 바쳤습니다유품이 소중한 것은 부모님에 대한 기억과 추억이 있기 때문입니다유품에서 부모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신앙인의 집에는 고상(苦像)이 있습니다성당의 제단 뒤에도 십자고상(十字苦像)이 있습니다고상이 우리를 지켜주는 것은 아닙니다고상을 보면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억하는 것입니다나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를 지고가신 예수님의 희생과 고통을 기억하는 것입니다주님의 십자가로 온 세상을 구원하셨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합니다.” 십자가는 바라보는 것이 아닙니다십자가는 예수님처럼 지고 가는 것입니다십자가는 우상이 아닙니다십자가는 내가 지고가야 하는 아픔과 고통입니다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만이 부활의 기쁨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차에 묵주를 걸거나십자가를 붙여놓은 분들이 있습니다묵주와 십자가가 지켜주는 것이 아닙니다신앙인으로서 준법운전을 하겠다는 약속입니다신앙인으로서 안전운전을 하겠다는 다짐입니다신앙인으로서 양보운전을 하겠다는 각오입니다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주님하고 부른다고 다 하느님의 나라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하느님의 의로움과 하느님의 뜻을 따라는 사람이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사랑입니다하느님을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사랑하는 것이고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사랑은 십자가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사랑이신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주님께 항복합시다! 그분 손길에 우리 존재 전체를 내어 맡겨 드립시다!

 -양승국신부-

 

작은 바람 한 줄기에도 흔들리는 갈대처럼, 끝도 없는 방황을 거듭하는 우리를 향해 예수님께서는 오늘 참으로 큰 위로의 말씀을 건네십니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요한 복음 14장 1~2절) 

 

결국 우리가 최종적으로 의지할 곳은 영원한 보루이신 주님이십니다. 이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질적으로 다른 참 평화, 잠깐의 평화가 아닌 영원한 평화를 주실 분은 홀로 주님뿐이십니다.

  

우리의 내면이 주님의 현존으로 가득 차 있을 때, 열렬한 기도를 통해 그분과의 지속적인 통교를 맺고 있는 사람들은 지옥과도 같은 현실 앞에서도 잔잔한 호수 같은 내적 평화를 유지할 수 있으리라 확신합니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란 말이 있습니다. 세상만사 마음먹기 달렸다는 말입니다. 회심한 재소자 형제들의 삶을 통해서 느끼는 바입니다만, 감방과 수도원은 마음먹기 차이입니다. 

 

감방 안에 하루 온 종일 갇혀 있다할지라도 마음이 자유로우면, 그래서 감사와 찬미로 하루를 보낼 수 있다면, 그곳이 바로 수도원입니다. 거룩한 분위기의 수도원 담 안에서 생활한다할지라도 마음이 꼭 닫혀있으면 그곳이 곧 감방입니다.

  

우리네 인생은 대체로 다 그런가 봅니다. 어느 정도 쓸쓸하고, 어느 정도 허전하고, 어느 정도 외롭고, 고달프고...누구나 다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나 다 공허하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 누구든 가슴에 구멍 숭숭 뚫리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 허전함을 무엇으로 채우느냐가 중요합니다. 엄청난 양의 술로도 채워보지만 잠시 뿐입니다. 이런 저런 취미활동이나 세상의 좋은 것으로 다 채워 봐도 허사입니다. 결국 절대자이신 하느님 앞에 홀로 서야 됩니다. 그분 앞에 철저한 심연의 고독도 느껴봐야 합니다.

  

예수님과 동고동락했던 제자들 역시 내면 깊숙한 곳에는 다양한 근심걱정들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한곳에 정주(定住)하지 못하고 떠돌아다니는 생활에서 오는 불안함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집요하게 그물망을 좁혀오는 바리사이들의 존재도 큰 위협이었습니다. 과연 예수님을 따라나선 것이 좋은 선택이었는가 하는 의문도 꼬리를 물었습니다.

 

이런 제자들의 내면을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파악하고 계셨던 예수님이셨기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근본적으로 인간은 불안정한 존재입니다. 성경에서도 인간을 끊임없이 방랑하는 존재, 불안정하게 이리저리 헤매는 존재로 묘사합니다. 마르틴 하이데거 역시 인간에 대해 ‘본질적으로 근심하는 존재’로 정의했습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예외 없이 근심을 지니고 살아갑니다. 어쩌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에 대해 걱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살아있는 동안에야 근심과 걱정으로부터 해방될 수 없습니다.

  

인간 본성상 어쩔 수 없이 안고 살아가게 되는 근심 걱정, 그 앞에서 결국 해답은 마음 크게 먹은 일이더군요. 대범해지는 것입니다. 관대하게 마음먹는 일입니다. 최종적으로 주님께 항복하는 일입니다. 그분 손길에 우리 존재 전체를 내어맡기는 일입니다.

  

자신의 실존을 위한 염려에만 얽매이지 말고, 인간의 실존을 가능하게 했고, 인간을 잘 알고 계시며 인간을 위해 섭리하시는 하느님의 섭리에 믿음으로 자신을 내맡기는 작업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결국 끊임없는 근심걱정, 갖은 고민거리에서 벗어날 수 있는 지름길은 그간 집중되었던 우리의 시선을 나 자신에게서 이웃에게로, 더 나아가서 하느님께로 돌리는 일입니다.

  

어떻게 해서든 마음의 평화를 얻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잔잔한 호수처럼 완벽한 평화, 그 어떤 풍랑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견고한 평화. 결국 그런 평화는 우리의 삶을 온전히 주님께 맡기는 데서 출발합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께 온전히 봉헌하는데서 시작됩니다

 하느님을 믿고 나를 믿어라. 내 아버지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이 지상을 떠나시기 전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하시는 유언 말씀입니다유언이란 남는 이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가장 귀중한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이는 앞 장면에서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요한 13,36)라고 묻는 베드로의 질문에 이어지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을 믿고 나를 믿어라. 내 아버지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요한 14,1-2)

 

이는 당신이 아버지의 집으로 가신다는 것을 말해주며동시에 그곳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는 것을 통해 당신이 그곳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밝혀줍니다그리고 당신은 본 바를 말하니아버지를 믿고 또한 당신을 믿으라 하십니다왜냐하면아무리 거처할 곳이 많고 생명의 집이 있어도 가서 거주하지 않으면그 집은 나의 거처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그러니 믿는 이가 그 거처를 얻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그런데도 토마스는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요한 14,5) 하고 묻습니다.

이에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당신의 신원을 통해 밝히십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 14,4)

 

“길”의 표상은 본디 이집트 탈출의 상징에 속했습니다곧 해방의 길입니다그 “길”은 이스라엘 민족이 하느님의 부름에 따라 약속의 땅에 다다르기 위하여 믿음으로 걸어가야 하는 멀고 험한 길입니다그런데 점차 이 길의 표상은 주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영원한 보상을 위해 제시하는 삶의 방향을 가리켜주는 율법에 적용되었습니다곧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길’은 율법이었습니다그런데 이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곧 “길”이라고 선언함으로써“길”의 의미가 율법에서 예수님의 인격으로 옮겨갑니다사실이는 엄청난 발언이요혁명적 발언이었습니다.

“진리”(áληθεια)의 원어의 뜻은 감추어진 보물을 드러내는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곧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성부를 완전히 드러내 보여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진리”이십니다동시에아버지께 가는 길을 드러내는 보물이 이기에 예수님은 “진리”입니다그러니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만난 사람은 진리를 발견하고 만난 사람입니다곧 당신이 “진리요 생명”이라는 말씀은 당신은 단순히 구원에 인도하는 분이 아니라당신 자체가 구원의 원천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말 속에 머물러 있으면 참으로 내 제자들이다.

              그러면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고 진리는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1-32)

 

예수님께서는 믿는 이들에게 이 신적생명을 베푸십니다당신께서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요한 6,35)이시기 때문입니다우리는 이 생명의 빵이신 말씀을 먹고 생명을 얻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이미 알면서도 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깨우쳐줍니다곧 제자들이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아직도 알지 못함은 믿지 않는 까닭이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믿음이 참된 앎의 길입니다그저 안다고 해서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아는 것 그것을 믿을 때라야 그 앎을 진정 알게 됩니다참된 앎은 진리를 머리로 아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그 것을 믿고 온 인격으로 받아들이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오늘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을 믿고 나를 믿어라.”(요한 14,1).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 14,6)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

발길에 밟히며 아래에서 저를 이끄셨듯이,

저도 형제들 아래에서 그들이 밟고 가는 길이 되게 하소서!

제 주장에 밀려 옳고도 져주셨듯이,

저도 형제들에게 져줌으로 진리의 빚을 밝히게 하소서!

씹히고 부서져 제 속에서 살이 되셨듯이,

저도 형제들 안에서 부서지고 씹혀 생명의 양식이 되게 하소서!

이제 더 이상은 제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게 하소서아멘.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송영진신부-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러 간다고 말하였겠느냐?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요한 14,1-4).”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

 

이 말씀들은, 예수님만이 ‘아버지의 집’으로 가는 유일한 ‘길’이고, 예수님의

말씀만이 유일한 ‘구원의 진리’이며, 예수님에게서만 ‘참되고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제자들의 신앙고백과 같은 말씀들입니다.

<예수님의 수난 전에는 제자들이 이해하지 못했던 예수님의 말씀들이 많았습니다.

그랬는데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성령강림을 체험한 뒤에는

그 말씀들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고, 이해하게 되었고, 믿게 되었습니다(요한 2,22).

복음서는 제자들이 그렇게 깨닫고, 믿고, 이해한 뒤에 기록한 책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해도,

그 말씀들은 모두 사실상 제자들의 신앙고백, 또는 증언입니다.>

 

여기서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

라는 말씀은, 제자들을 ‘아버지의 집’으로 데리고 가시겠다는

예수님의 약속이기도 하고, ‘아버지의 집’에서 예수님과 함께 살게 될 것이라는

제자들의 믿음과 희망이기도 합니다.

<뒤의 18절에,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 라는

약속의 말씀이 있습니다.

마태오복음 28장에는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라는

약속의 말씀이 있습니다(마태 28,20).

신앙인들은 고아처럼 버려져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살다가 언젠가는 예수님을 따라서 ‘아버지의 집’으로 가서

하느님, 예수님과 함께 영원히 살 사람들입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겠다.” 라는 말씀은,

없는 자리를 새로 만들겠다는 뜻이 아니라,

당신의 수난과 죽음은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한 일이라는 뜻입니다.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라는 말씀은, 당신의 구원 사업은

‘모든 사람’을 위한 일이라는 것을 공간적인 개념으로 표현하신 말씀입니다.

‘아버지의 집’은 ‘모든 사람’이 들어가서 살 수 있는 곳입니다.

즉 하느님께서는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든 사람’이 당신의 집으로 들어와서 살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나 그 집에 들어가서 사는 것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많고,

들어가기를 거부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들이 안 들어감으로써 못 들어가게 됩니다.)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 라는 말씀에서,

‘알고 있다.’ 라는 말은 ‘알아야 한다.’ 라는 뜻이고,

그래서 이 말씀은, “너희는 아버지의 집으로 가는 길을 알아야 한다.”로

해석되는데, 여기서 ‘길’은 ‘삶’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너희는 아버지의 집으로 들어가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고 있어야 하고, 알고 있는 그대로 살아야 한다.” 라는 뜻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는 이미 예수님께서 충분히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라는 말씀은, 당신이 수난을

당하는 것을 보더라도 믿음이 흔들리면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넓은 뜻으로 모든 신앙인에게 하신 말씀으로 생각하면,

지상에서 사는 동안에 어떤 고난과 시련을 겪더라도

믿음이 흔들리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는 부활로 가는 과정일 뿐이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또 현세에서 겪는 고난들과 시련들도 지나가는 일일 뿐이고,

우리가 그 일들을 잘 참고 견디면서 믿음을 지키면 하느님과 예수님께서

반드시 우리를 ‘아버지의 집’으로 데리고 가신다는 것도 믿어야 합니다.

<믿음 없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부활을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믿는 우리는 십자가에서 부활, 승리, 생명, 영광을 봅니다.

우리 자신의 십자가도 마찬가지입니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라는 말씀은,

“온갖 두려움과 슬픔과 걱정을 믿음으로 극복하여라.”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수난 때에 제자들은 그 다음 과정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절망했고,

슬퍼했고, 두려워했습니다.

그랬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그 모든 어둠에서 해방되었고, 큰 기쁨과 행복을 얻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알고 있고, 믿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믿음을 우리 자신의 십자가에도 적용해야 합니다.

당장 눈앞에 닥친 고난, 시련, 어려움들이 너무 크게 보이고,

감당하기 어렵다고 느껴져도, 그게 전부가 아니고, 또 그게 마지막이 아니고,

그 고난, 시련, 어려움들보다 더 큰 영광과 더 큰 기쁨을 얻게 될 때가

반드시 온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입니다(히브 11,1).”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는 힘이고, 지금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일들일지라도 그 일들이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믿고 희망하는 힘입니다.>

“우리 믿음의 영도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그분께서는 당신

앞에 놓인 기쁨을 내다보시면서, 부끄러움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견디어 내시어, 하느님의 어좌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죄인들의 그러한 적대 행위를 견디어 내신 분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낙심하여 지쳐 버리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히브 12,2-3).”

<예수님은 우리 믿음의 시작이신 분이고 완성이신 분입니다.

‘믿는 사람’은 예수님을 따라가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길은, 수난, 죽음, 절망, 슬픔 등을 지나서

영광, 승리, 생명, 기쁨, 행복을 얻는 길입니다.

그러니 눈앞만 보지 말고 그 길의 끝을 보아야 합니다.>

“여러분의 시련을 훈육으로 여겨 견디어 내십시오. ... 모든 훈육이 당장은

기쁨이 아니라 슬픔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그것으로 훈련된 이들에게

평화와 의로움의 열매를 가져다줍니다(히브 12,7ㄱ.11).”

<믿음이 있더라도 힘든 것은 힘든 것이고, 슬픈 것은 슬픈 것입니다.

그래서 힘들어 하는 것 자체가 잘못은 아닌데, 힘들다고 포기하면 안 됩니다.

가장 큰 죄는 바로 ‘포기하는 죄’입니다.>

복음: 요한 14,1-6: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조욱현신부-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1절)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당신께서 돌아가신다는 것에 대해 놀라고 혼란스러워하자 그들을 위로하신다. 이 말씀은 아들에 대한 믿음과 아버지에 대한 믿음을 하나로 만들며, 그분의 하느님이심을 아버지의 하느님이심과 하나로 만든다. 즉 그분도 하느님이시라는 말씀이다.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2절) 여기서 아버지의 집은 바로 하느님의 성전이며, 아드님께서 아버지께 바칠 하느님의 나라이기도 하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자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마태 25, 34) 하신 그 나라이다.

 

하느님의 이 집, 하느님의 이 성전, 하느님의 이 나라와 하늘나라는 지금 지어지고 세워지고 준비되고 있다. 거기에 거처가 마련될 것이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면 그 자리가 마련된다. 사랑을 살며 감사하는 삶으로 마련하는 자리이다.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3절) 이렇게 살아서 그 자리가 마련되면 우리가 그분과 함께 있게 되리라 하신다. 우리가 함께 있는 곳은 바로 그분이다. 그분이 영원한 생명이시고, 그분이 우리를 받아주실 때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기 때문이다. 그분이 영원한 생명이시므로 우리가 있게 될 거처는 바로 그분이시다. 여기서 생명은 바로 그분 자신이라는 말이다.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4절) 그 거처를 마련하는 삶을 이 세상에서 믿음과 희망과 사랑으로 살았다면, 우리는 그 ‘길’을 아는 것이다. 이 길은 그분을 통하지 않고는 결코 갈 수 없다. 그러나 토마스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모른다고 한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6절) 여기서 ‘길’은 거룩한 삶을, ‘진리’는 거룩한 교회를, ‘생명’은 영원한 행복을 의미한다. 그 ‘길’은 완덕으로 가는 길이다. 그 길은 우리를 복된 목적지, 곧 아버지께로 인도하는 길이다. 그래서 그분은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6절) 하신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하느님의 아들을 통해 하느님께로 가는 길이다. 아버지께로 가는 길은 아들을 통하는 길이다.

 

참 하느님에게서 나신 참 하느님이시므로 아들 그리스도는 진리이시다. 그러기에 아버지 하느님께서 참 하느님이라고 하면, 아들이신 하느님만이 진리이시다. 그러므로 아드님은 참되신 분과 같은 분이시다. 그분은 우리의 생명이시다. 우리를 일으켜 세우고, 죄의 저주로 죽은 우리를 되찾아 태초의 상태로 돌려주실 수 있는 분이시다. 우리가 생명에 도달하는 방법은 그러므로 세 가지가 있다. 온갖 덕을 실천함으로써, 올바른 믿음으로써, 그리고 장차 우리에게 올 삶을 소망함으로써이다. 우리의 인도자요 수단이 되는 분이 바로 아들이시다. 그분은 생명 자체이시다. 그러므로 ‘나는 생명이다.’라고 하시는 것이다. 구원은 바로 그분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구원의 약속을 보증해 주십니다.

"내 아버지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요한 14,2)

예수님께서 제자들 곁을 떠나시기 전에 그들에게 희망의 말씀을 하십니다. "아버지의 집"은 통상적으로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에 머무르시는 공식적인 현존 장소인 성전을 가리키지만, 초월적으로는 하느님 나라를 의미하기도 하지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는 스승이 걸어갈 고난과 박해와 죽음의 길이 고스란히 기다립니다. 당장은 그들이 깨닫지 못하지만 이미 예수님께서 누차 말씀하신 바지요. 어쩌면 이 지상에서 머리 둘 곳 없으셨던 스승처럼 제자들에게도 그럴듯한 자리가 주어지지 않을 겁니다.

"거처할 곳"은 살 곳, 곧 생명의 자리입니다. 제자들에게는 영화롭고 안정된 육적 생명의 지상 거처가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누릴 아버지 나라의 거처가 마련될 것입니다.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요한 14,3)

아버지의 집, 그곳은 아버지와 아들의 거처일 뿐만 아니라 그분께서 사랑하시고 또 그분을 사랑하는 이들에게도 허락된 거처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이미 자리가 있다는 건 말 그대로 구원의 약속입니다. 결코 변하지 않고 번복되지 않을 구원의 보증이지요. 

제1독서에서는 말씀이 곧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선포합니다.

"이 구원의 말씀이 바로 우리에게 파견되셨습니다."(사도 13,26)

하느님께서는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파견하심으로써 당신의 구원 의지를 이루십니다. 예수님이 곧 하느님의 말씀이시고, 그 말씀의 실현이시지요.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과 현존 자체가 하느님 구원 의지의 확고한 표현이고 완성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은 이천 년 전 팔레스티나 지역에서 일어난 일회성 사건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 매일 매일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말씀"으로 우리에게 파견되어 오시니까요. 주님의 말씀이 어느날은 우리 심금을 울리고 또 어느날은 복잡하고 바쁜 일정에 밀려 버리기도 하시지만, 깨어서 말씀에 귀기울이는 이에게 그분 말씀은 변치 않는 구원의 보증입니다.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사도 13,33)

하느님의 이 말씀은 성경 안의 한 사건으로 머물지 않고, 말씀을 듣고 받아들여 자신 안에 육화하시도록 허용하는 모든 이에게 매일 실현되는 약속입니다. 주님은 말씀에 목말라 당신 앞에 모여든 이들에게 잉태되시고 출산되시면서, 동시에 말씀을 받아들여 말씀이 된 이를 낳으십니다. 말씀을 품어 말씀과 하나된 이는 그래서 매일 매일 새롭게 태어나는 하느님의 아들/딸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

예수님은 우리와 아버지를 잇는 유일한 길이십니다. 우리는 말씀에 머무르고 성체를 모심으로써 예수님과 하나 되어 아버지께 나아갑니다.

나름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자선과 나눔을 게을리하지 않는 이라도

 여전히 들러붙는 악습과 죄악으로 자신의 구원에 의문이 들 때가 있을 겁니다. 이렇게 불완전하고 못난 자신이 과연 하느님 나라에 갈 수있을지 두려움마저 들 수도 하지요. 그럴 때는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러 간다"는 예수님 말씀에 희망을 걸고, 부족한 자신을 인내하며 말씀께서 자신을 정화해 주시도록 겸손히 드리고 온전히 내어맡겨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아버지 안에 우리의 거처가 있습니다. 반드시 마련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부족하나마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과 함께 말씀 안에서 '우리의 거처'로 나아가는 여정 되시길 기원합니다. 말씀은 우리에게 구원을 보증해 주시는 은총의 선물이랍니다.

 아버지! 지금부터

 -김찬선신부-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러 간다고 말하였겠느냐?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

 

어제 방송을 듣게 되었는데 어떤 분이 돌아가신 부모님에 대해 얘기하면서

'저승에 계시다면 그곳에서라도 자기를 지켜봐 주시기를 바란다.'는 말을

하는 거였고, 이 말을 들으면서 죽으면 저승에 간다고 생각하는 것이

천국에 익숙한 제게는 생경스러워 잠시 생각게 되었습니다.

 

둘 다 사후 세계이고,

우리 인간이 죽고 나면 가는 곳이지만

왠지 저승은 음습하고 가기 싫은 곳인 데 비해

천국 또는 천당은 꽃이 만발하고 즐거움이 넘치는 그래서 가고픈 곳입니다.

 

그런데 오늘 진지하게 자문해봅시다.

천당, 정말 가고 싶은 곳입니까?

그리고 지금 당장 가고 싶은 곳입니까?

 

뒤집어서 지금 이 세상을 떠나도 되고 지금 당장 떠나고 싶습니까?

천국을 가기 위해 지금 당장 이 세상을 떠나고 싶냐는 말씀입니다.

 

제 생각에 '지금 당장'을 기준으로 하면

내가 있고 싶은 곳은 이 세상이고

천국이나 저승은 죽고 난 뒤 나중에나 갈 곳이고,

지옥 가는 것보다는 천당이 낫기에 가고 싶은 것이 아닌가요?

 

혹 이 세상 사는 것이 너무도 힘들고 고달픈 분들에게는

천국이나 저승이 지금 당장 가고 싶은 곳일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지금 당장은 이 세상에 천국은 나중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제일 있고 싶은 곳이 이 세상인 이유나

천국이나 저승이 그다음인 이유가 사실은 장소 때문이 아니라 사랑

때문이고, 내가 제일 사랑하는 사람들이 아직 이 세상에 있기 때문이지요.

 

올해 포르치운쿨라 행진은 김대건 신부님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는

행진이기에 지난주 답사차 <걷기 월 피정>을 임원들과 했는데

은이 공소를 가기 위해 제 고향 수원을 거쳐서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제가 얘기했지만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다 떠나고,

동네도 다 바뀐 고향은 이미 제게 고향이 아니고 그래서 고향에 갔다가

실망한 저는 이후 고향에는 더 이상 가고 싶지 않고, 같은 이유로 이제

제가 가고 싶은 곳은 어머니, 아버지와 할머니가 묻혀 계신 곳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천국이 아니라 '아버지의 집'에 더 주목을 합니다.

내 아버지 집에는 있을 곳이 많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셨는데

내가 있을 곳, '내 거처'는 천국이 아니고 '아버지의 집'인 것입니다.

 

천국이나 '아버지의 집'이 같은 말이고 다 그게 그거지만,

아버지의 집, 그것도 내 아버지의 집이 천국보다

더 인격적이고, 더 사랑이 담겨 있는 곳이잖나요?

 

그러니 우리가 주님의 기도를 매일 바칠 때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매일 진정 나의 아버지로 만나고,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길 매일 간절히 바랐다면,

더 나아가 이미 오신 하느님 나라에서 이미 살기 시작했다면

그 연장 선상에서 내 아버지의 집인 천국도 빨리 가고 싶을 곳일 겁니다.

 

그렇다면 예수님도 '내 아버지의 집'이라고 하신 그곳에

우리도 길이신 예수님을 주저함 없이 그대로 따라갈 것이고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집에 우리도 길이신 예수님을

죽고 난 뒤가 아니라 지금부터 따라가게 해주세요.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20년 5월 8일 부활 제4주간 금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너희는 걱정하지 마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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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합니다.” 십자가는 바라보는 것이 아닙니다십자가는 예수님처럼 지고 가는 것입니다십자가는 우상이 아닙니다십자가는 내가 지고가야 하는 아픔과 고통입니다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만이 부활의 기쁨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주님하고 부른다고 다 하느님의 나라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하느님의 의로움과 하느님의 뜻을 따라는 사람이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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