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28일 사순 제2주일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마르코 9,2-10)
“This is my beloved Son.
Listen to him.”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박형순신부-
오늘 제1독서인 아브라함과 이사악의 이야기에서,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향한 아브라함의 순종이 강조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나치지 말아야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백 살에 아들 이사악을 낳았고, 창세기에서 이사악을 지칭할 때 사용된 “아이”(창세 22,5.12)는 아기가 아닌 10대의 소년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백 살이 넘는 노인이 힘으로 10대 청소년을 제압하여 제단에 묶어 놓을 수 있었을까요?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이사악의 순종도 함께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는 복음에서 다시 언급됩니다. 바로 하느님 아버지와 그분의 외아드님이신 예수님의 관계입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느님과 예수님의 관계가 아버지와 아들로 명확하게 언급됩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자 아들을 봉헌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뜻과 의지로 당신의 외아들을 기꺼이 희생시키고자 하셨습니다.
그럼 이사악을 보겠습니다. 이사악은 기꺼이 아버지 아브라함의 뜻을 따랐지만, 죽음을 맞이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사악을 뛰어넘는 순종의 길을 가셨습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에 대한 신뢰 속에서 수난의 길, 십자가의 희생 제물이 되는 길을 걸어가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길을 걸어가실 수 있으셨던 힘은 바로 당신을 사랑하시는 아버지를 사랑하시고, 당신을 신뢰하시는 아버지를 신뢰하시는 깊은 관계에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 변모의 모습을 보고 기뻐하면서도 두려움을 느꼈던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말씀만 듣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온전히 순명하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신뢰하시며 사랑받으시는 아드님으로 좁고 험한 길을 가셨던 것처럼, 이제는 우리가 예수님의 뜻을 따라, 아버지를 신뢰하면서 그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그 결심의 시기가 바로 사순 시기입니다.
다시 주님께 돌아가는 시간입니다.
-키엣대주교-
우리가 주님과 멀어지는 이유는 아주 많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뒤를 돌아보십시오.
다시 주님께 돌아가는 노력, 나의 잘못을 직면하고 회개하는 진실된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주님의 자비와 은총이 필요합니다.
주님께 돌아가려면 길을 건너야합니다. 주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께 돌아가는 길을 이미 만들어주셨지만 지금 이곳에서 주님께 다가가는 길은 바로 우리가 만들어야합니다. 그 길이 평탄하고 험한지는 우리의 관계에 달려있습니다.
자비의 아버지이신 주님께 돌아간다면 한 없는 주님의 사랑을 누릴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처럼 자비를 베푸는 사람만이 그 사랑을 받을수 있습니다.
자비와 사랑의 은총을 받는다는 것은 주님과 하나된 결과입니다. 그러나 그 자비와 사랑이 바로 주님을 만날 수 있는 조건입니다.
자비의 은총을 간절히 기도하고 있다면 이웃에게 먼저 자비를 베풀어야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판결의 선택권을 주셨습니다. 이웃에게 엄격하다면 주님으로부터 엄격한 판결을 받을 것입니다. 이웃에게 관용을 베풀었다면 주님께서도 관용을 베풀어주실 것입니다. 내가 이웃에게 베푼 것보다 훨씬 많이 몇배로 사랑과 자비의 은총으로 돌려주실 것입니다.
사순시기에 주님께 돌아가는 길을 찾는 것은 바로 내 옆에 있는 가족과 형제, 이웃에게 돌아가는 길을 찾는 것입니다. 인간이 바로 주님께 돌아가는 길이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 길이 넓고 반듯한 길인지 좁고 구불구불한 길인지 그것은 바로 우리가 선택하고 우리가 결정할 일입니다.
마음 속의 사랑을 드러내고 적극적으로 실천할 때 비로소 주님께 돌아갈 수 있습니다.
용서의 마음이 있을 때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내 마음이 따뜻할 때 주님의 따뜻한 사랑을 받을 수 있습니다. 형제 자매에게 용서와 자비의 사랑을 베푸는 내 마음 안에 나도 모르게 주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 속에 주님을 모시고자 한다면 주님이 하신 용서와 사랑을 내 옆에 있는 가족과 이웃에게 먼저 보여주십시오. 이것이 바로 사순시기의 시작이자 목표입니다.
주님께서는 멀리계시지만 또 너무나 가까이 계십니다. 다만 우리가 주님을 찾지 않기 때문에 볼 수 없을뿐입니다.
마지막으로, 이번 사순시기에는 주님과의 친밀한 사랑 속에서 나 자신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의 권능 아래 나는 단지 한 줌의 모래밖에 되지 않는는 존재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주님의 온화한 사랑에 비해 나는 너무 부정적이고 악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으십시오. 주님 용서의 사랑에 비해 나는 단지 얄팍한 인간의 계산을 하는 사람일 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 생명의 물을 마시면서, 우리 몸에 간직하고 있는 죽음의 뿌리들을 발견해야합니다. 주님의 순수한 빛의 근원에 다가감으로써 나는 눈먼 어둠이라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주님과 나 자신에 대한 진실을 알면 인간과 세상에 대해 다른 시각을 갖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눈으로 세상 사람들을 보십시오. 세상이 마치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처럼 모든 것이 달라져 보일 것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은 다 하느님 구원의 사랑의 결과입니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은 바로 십자가의 길이라는 것을 깨달아야합니다. 그 길을 가는 동안 우리가 맞이하는 고통들은 우리가 주님께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우리의 영혼을 정결히 해주는 은총이 될 것입니다.
주님, 저희 영혼을 씻어주소서. 아멘

1.지금 어떤 길을 가고 있습니까?
2.주님과 어느 만큼 멀어져 있습니까?
3.사순시기에 주님께 다시 돌아가는 시간을 가져보십시오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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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이 당구를 좋아합니다. 저 역시 한때 당구에 푹 빠져서 당구장을 즐겨 찾았던 적이 있었지요. 그렇다면 여기서 문제, 당구공은 무엇으로 만들었을까요? 1번) 쇠, 2번) 코끼리 상아, 3번) 플라스틱, 4번) 돌.
현재 당구장에서 사용하는 당구공은 모두 플라스틱으로 만듭니다. 사실 19세기 중반까지 이 당구공은 코끼리 상아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당구의 인기가 올라가면서 코끼리 상아의 공급이 수요를 따라갈 수 없게 되었죠. 그에 따라 야생 밀렵 코끼리 사냥이 성행해지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그래서 코끼리 상아의 대체재로 1868년에 미국의 인쇄업자 J.W.하야트가 동생과 함께 당구공을 플라스틱으로 만들게 되었습니다. 야생동물을 구하기 위한 선한 목적에서 탄생한 것이 바로 천연수지로 만든 최초의 플라스틱이었습니다.
이런 선한 목적을 가지고 탄생했던 플라스틱인데, 지금은 지구 환경 파괴의 주범이 되었습니다. 야생동물을 구하고자 나온 플라스틱이 오히려 많은 야생동물을 죽이는 주범이 되었습니다(야생동물 사체의 뱃속을 보면 플라스틱이 가득합니다).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쁜 것인지를 구분하기 힘든 혼돈의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믿음을 갖고 의지하는 마음이 더 필요해집니다. 인간의 힘만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는 주님의 거룩한 변모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거룩한 변모는 그 사건 자체를 뛰어넘어 마지막 부활을 향하여 나아감을 상징적으로 가리킵니다. 하늘 나라에서의 영광을 미리 보게 된 세 제자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나서서 그 자리에 초막을 지어 함께 살자는 말을 합니다.
모세와 엘레야는 그분보다 먼저 온 주님의 종이므로, 그들을 그리스도와 동등하게 취급하는 천막 셋은 그릇된 제안이었습니다. 아직 주님의 완전한 영광이 드러날 때가 오지 않았으므로, 베드로의 제의는 성급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주님의 신성을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늘에서 이런 소리가 들립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아마 그 순간에는 자신의 판단이 맞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자신의 판단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님의 판단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의 말보다 주님의 말을 철저하게 따를 수 있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모두를 위해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오히려 모두를 위해 가장 안 좋은 일이 될 수 있는 인간의 나약함과 부족함을 내세워서는 안 됩니다. 철저히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나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조던 피터슨은 인생의 중요한 법칙 중 한 가지로 ‘세상을 탓하기 전에 방부터 정리하라.’를 뽑았습니다. 자신의 삶을 단순화하고, 옳지 않은 것은 중단하고, 주어진 일상에 충실하라는 말이었습니다.
이 구절을 보면서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다른 것이 중요하다면서 온 방을 난장판으로 만들어 놓은 뒤에야 찾아야 할 물건을 찾지 못해서 겨우 방 정리를 하는 게으른 제 모습을 떠올려 봅니다. 솔직히 정리되어 있어야 일 처리도 쉽습니다. 그러나 그 기본을 자주 잊습니다.
기도할 시간이 없다라고 하는 분이 있습니다. 기본이 갖춰져 있지 않으니 늘 어수선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시간도 늘 부족합니다. 그러나 영적으로나 일상 외적 삶에서나 잘 정리된 사람은 어떤 일에서도 흔들리지 않게 됩니다. 어느 책에서 읽은 구절입니다.
“아침에 일어나 귀찮음을 떨치고 침대를 정리한다. 사소한 일이지만 나는 하루의 시작부터 이겨냈다. 첫 번째에서 이겼다면 두 번째에서도 이길 것이고, 그렇게 이겨낸 경험이 쌓으면 승리는 습관이 될 것이다.”(조윤제, ‘다산의 마지막 습관’ 중에서).

예수 없는 십자가, 십자가 없는 예수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엔 예수님의 변모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으로 변모하시며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제자들은 그것을 감당할 수 없어 겁을 먹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영광에 함께 하고 싶어 베드로는 그 산에 초막을 짓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하늘에서는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라는 소리가 들립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당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수난에 대해 예고하실 때 베드로는 반대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으로부터 ‘사탄’이란 소리를 들었습니다. 베드로는 십자가를 거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이 상황과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십자가를 거부한 채 하느님 영광만을 추구하면 사탄과 같아집니다. 선악과를 바치지 않으며 에덴동산에 살려고 했던 아담과 하와의 모습과 같습니다. 아담은 에덴동산에 사는 영광을 추구하면서 동시에 하와가 내미는 선악과도 즐기려 했습니다. 이는 어쩌면 십일조를 바치지 않으며 예수님처럼만 되려는 모습과 같습니다. 예수님처럼 되는 것이 하늘의 영광인데 십자가를 통하지 않고서는 그 영광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이런 경우 십자가를 버리고 벽에 예수님만 매다는 경향을 보일 수 있습니다. 요즘 성당을 지을 때 적지 않게 십자가를 없애고 부활하시는 모습의 예수님만을 표현하는 예도 있습니다. 의무는 다하지 않고 영광만을 추구하겠다는 뜻이 깊이 박혀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 십일조와 같은 의무를 말하면 극단적으로 거부합니다. 하느님께서 꼭 그런 의무를 해야만 축복을 주시는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물론 개신교는 예수님을 없애고 십자가만을 답니다. 의무만 철저히 지키려 하지만 예수님처럼 되는 영광은 감히 상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술과 담배는 하지 않고 십일조도 내지만 정작 그리스도와 같아지는 성체성사나 고해성사를 통한 죄의 용서는 바라지 못합니다. 약간은 바리사이, 율법학자적인 모습으로 하느님 자녀의 영광은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눈물을 흘리며 그저 죄인이라고 고백만 할 뿐입니다. 동시에 자신이 실행한 의무 때문에 이웃을 더 많이 판단하는 사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처럼 아버지로부터 바로 용서받을 수 있으며 그래서 원수까지 용서할 수 있는 하느님 자녀가 지녀야 할 능력을 좀처럼 믿기 어려워합니다.
이 두 모순적인 방향에서 균형을 잡는 가장 좋은 방법은 십자가의 시작인 십일조와 그리스도 영광의 정점인 성체를 연결하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십자가가 부담스러워 십일조를 하지 않으며 성체를 영하면, 술과 담배, 그리고 육체적인 쾌락에는 지나치게 관대하면서 성체만 영하고 고해성사만 보면 된다는 식의 지나친 관용주의에 빠지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이래도 괜찮고, 저래도 용서할 분이라고 지나치게 자비만 강조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는 단식하지 않고 술과 음식에 정신이 혼미해진 상태에서 기도하겠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수술하는 고통은 받지 않으려 하면서 병만 낫기를 바라는 모습과 같습니다.
김흥순 자매는 불교 신자입니다. 장이 유착된 상태여서 음식을 넘기지도 못하고 다 게워내며 걷지도 못하는 극단적 상황이었습니다. 유명한 병원엔 다 다녀봤지만 수술해봐야 소용이 없다는 진단도 받았습니다. 그래서 죽음을 준비하기 위해 호스피스 병동에 들어온 것입니다. 그랬더니 그 병원에서는 수술하면 2~3년, 길면 5년은 더 살 수도 있다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자매는 수술이 두려워서인지 이미 자포자기 상태였습니다.
베드로 수녀님이 설득하자 자매는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처음에는 솔직히 그랬어요. 수녀들은 뭐 하러 죽어가는 사람들이나 만나러 다니고, 냄새나서 가족들도 만지기 꺼리는 환자들의 손을 주물러 주고 말동무까지 해 주는 건가? 특히 무더운 날에도, 치렁치렁 머리까지 긴 옷을 걸치고 다니면서 기도를 해 주는 걸 볼 때면, 자식도 남편도 없이 사는 수녀들 인생이 참으로 딱했어요.”
이 자매는 십자가 죽음과 희생의 가치를 아직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기도나 자선, 단식과 같은 가치를 조금씩 잃어가는 우리의 모습과도 비슷할 수 있겠습니다. 누군가 사순 동안 단식이나 단주, 혹은 금연을 하면 괜한 것을 한다고 딱하다고 여기기도 합니다. 예수님 등 뒤 십자가를 거부했던 베드로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몸의 욕구를 죽이는 것은 그리스도처럼 되기 위해 꼭 가야만 하는 가치 있는 길입니다.
수녀님은 수술을 거부하는 자매에게 이렇게 현실적으로 설득을 했습니다.
“맞아요. 저희 같은 딱한 사람들도 이렇게 기쁘게 사는데, 자매님은 더더욱 사셔야죠. 수술도 한번 못 해 보고 포기하면 가족들 마음이 어떻겠어요? 자매님이 싫어도 가족을 위해 수술을 받아보셔야 해요. 수술 결과가 나빠도 최선을 다했으니 후회가 없지 않을까요?”
그러나 여전히 다른 병원에서는 다 소용없다는데 이 병원에서만 유난히 수술하라는 말을 잘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수녀님의 설득으로 수술을 결심하게 됩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자신과 같은 암 환자들이 하느님을 믿는 것만으로도 아프다고 소리를 지르지도 않고 웃기도 하며 죽음을 준비하는 신자들의 모습을 보기도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단 대세를 받고 수술도 받아보겠다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데레사라는 세례명으로 대세를 받고는 “나는 무조건 하느님을 믿습니다.”라고 선포하고 다녔습니다.
수술실에 들어설 때 흰 가운을 입은 의사가 인자한 모습으로 다른 의사들과 간호사들 사이에서 자신을 바라보며 마치 “걱정하지 마세요. 잘 될 겁니다.”라고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 의사가 자신을 분명히 고쳐줄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고 그렇게 수술을 잘 받았습니다. 그리고 깨어나서는 수술을 받을 때 자신의 발 쪽에 서 계셨던 흰 가운을 입은 의사를 찾았습니다. 그러나 수술실에는 모두 청색 가운을 입게 되어 있어서 흰색 가운 입은 의사는 없었다는 것입니다.
자매는 빠른 속도로 회복하였습니다. 두 달 후 교리를 받고 정식 세례를 받았습니다. 병자성사를 받을 때는 온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워짐을 느꼈고 걷지도 못했던 그 자매는 기쁨에 취해 병실을 두 바퀴나 돌았습니다. 그리고 기도실에 들어선 자매는 감실 쪽을 보더니 “선생님, 여기 계셨군요! 얼마나 찾았는데요. 저를 치료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라고 큰절을 올리는 것이었습니다. 자매는 기적적으로 일어서서 걸을 수 있게 되었고 모든 사람이 기적이라는 소리를 하는 것을 들으며 퇴원하였습니다. 지금까지도 수녀님과 연락을 주고받으며 잘 사신다고 합니다.
[출처: 『내 가슴에 살아있는 선물』, 이영숙 베드로 수녀, 비움]
김흥순 데레사 자매는 고통을 불행으로만 여겼습니다. 수녀님을 보면서도 쓸데없이 고통만 받는다고 여겼고, 자신이 수술을 받는 것도 그렇게 여겼습니다. 하지만 그 고통의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믿음이 생겼을 때 치유자로서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십자가를 지는 용기 없이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날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받아들이기 전에는 복음을 선포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그것은 복음이 아닌 허황한 꿈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도 십자가를 받아들인 이후에 비로소 영광의 복음을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가톨릭교회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내어주는 타볼산과 같습니다. 이젠 그 산에서 내려와 십자가를 져야만 그 영광이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선포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시작이 선악과를 내어드리는 고통, 즉 십일조를 다시 정착하는 일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그 고통도 감수할 수 없는데 부활의 영광인 성체를 모신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내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수술 없이도 치료해 달라고 청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멜키체덱이 아브라함에게 축복을 줄 때 아브라함은 소유의 십 분의 일을 바쳤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멜키체덱은 아브라함을 축복하기 위해 빵과 포도주를 가져 나왔습니다. 이는 세상에서 거둘 수 있는 소출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고까지 말씀하신 십일조를 잊고 성체를 영한다면 십자가를 거부하며 그리스도의 영광 안에만 있으려고 하다가 사탄이라는 소리를 들은 베드로와 비슷해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등 뒤에 있는 십자가를 떼지 맙시다. 십자가는 우리가 영광을 위해 기도와 단식과 자선의 못으로 우리 자신을 박을 수 있는 귀한 도구입니다. 기도와 단식과 자선을 모두 박을 수 있는 가장 기초 중의 기초인 십자가는 십일조입니다. 그것을 통해 온전한 기도와 단식과 자선이 실현되고 그러면 그 위에 죽은 나 자신 대신 그리스도께서 나와 하나 되어 사시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성체성사와 고해성사를 준비하는 길입니다. 죽음 이후에 부활이 온다는 사실을 깨닫기 전까지의 복음선포는 십자가 없는 예수님만 선포하는 모순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조재형신부-
예전에 ‘거인들의 발자국’이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저자는 구약과 신약성서에서 2명씩 지도자를 소개하였습니다. 구약에서는 아브라함과 모세를 소개하였고, 신약에서는 베드로와 바오로를 소개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의 지도력은 ‘안정형’이었습니다.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하느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살았습니다. 하느님께서 정든 땅을 떠나라고 하시면 아무런 미련 없이 떠났습니다. 하느님께서 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라고 하시면 역시 주저 없이 제물로 바치려고 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순명을 기뻐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많은 후손을 주시겠다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모세의 지도력은 ‘신중형’이었습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입니다. 모세는 말 주변이 없다고 사양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형 아론이 있으니 걱정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느라고 늘 피곤하였을 때입니다. 모세의 장인은 협조자를 선발하라고 도움을 주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벌하려고 하실 때입니다. 모세는 하느님께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구하셨는데 광야에서 죽여 버린다면 이방인들이 무엇이라고 말하겠습니까?” 하느님께서는 모세의 이야기를 들으셨고, 이스라엘 백성을 용서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신중했던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젓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베드로의 지도력은 ‘사교형’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여러분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합니까?”라고 물으셨습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거룩하게 변모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스승님 여기에 천막을 3개 지어서 살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어오실 때입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주님! 저도 물 위를 걷게 해 주십시오.” 베드로는 잠시지만 물 위를 걸을 수 있었습니다. 두려움 때문에 물속에 빠지기도 했고, 나약함 때문에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회개하였고, 언제나 적극적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천국의 열쇠를 맡겨주셨고,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바오로의 지도력은 ‘주도형’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교회를 박해하던 바오로를 복음의 사도로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을 직접 보지도 못했고, 뒤늦게 사도가 되었지만 바오로는 언제나 당당하였습니다. 해박한 지식으로 초대교회의 신학과 교리의 토대를 마련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사도들의 결정에도 반대의 뜻을 분명하게 밝혔습니다. 지역 공동체에 편지를 보내면서 공동체의 신앙을 격려하였고, 잘못은 꾸짖었습니다. 바오로는 그리스도께서 생의 전부라고 하였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산다고 하였습니다. 복음을 위해서는 지금 죽는 것도 좋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당당했던 바오로 사도를 통해서 복음이 이스라엘을 넘어 온 세상에 전해질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신앙 안에서 거인의 발자국을 남겨주었던 아브라함, 모세, 베드로, 바오로는 결코 완벽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나약함 때문에 사랑하는 아내를 누이라고 하기도 했습니다. 욱하는 성격 때문에 사람을 죽이기도 했습니다. 두려움 때문에 스승을 3번이나 모른다고 배반하였습니다. 그릇된 신념 때문에 교회를 박해하였습니다. 사순시기를 지내는 우리들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내 탓이라고 고백은 하지만 늘 누군가를 비난하고, 원망하면서 지내곤 합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면서도 언제나 내 뜻과 욕심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곤 합니다. 아브라함, 모세, 베드로, 바오로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예”라고 응답한 것입니다. 우리들 또한 하느님의 부르심에 “예”라고 응답하면 좋겠습니다.
며칠 전에 읽은 글이 생각납니다. ‘잔잔한 파도는 훌륭한 뱃사공을 만들어 내지 못합니다. 산이 깊어야 계곡의 물도 마르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함께 하신다면 시련과 갈등은 우리를 영적으로 성장 시키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을 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신데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당신의 친 아드님마저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어 주신 분께서, 어찌 그 아드님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바오로 사도는 오늘 우리에게도 똑 같은 말을 하시리라 생각합니다. 누가 우리를 하느님께로부터 떼어 놓을 수 있겠습니까?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느님을 가장 기쁘게 해드리는 것은 변화된 모습을 보여드리는 것입니다!
-양승국신부-
타볼산 위에서 이루어진 주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을 묵상하다가, 언젠가 동료 신부님들과 한잔 하면서 나눈 대화가 머릿속에 떠올랐습니다. 그날 주제는 ‘원판불변의 법칙’이었습니다.
인간은 웬만해서는 변화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계획, 인간의 의지적인 노력만으로 회심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특별한 계기나 사건이 필요하답니다.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은총과 자비가 필수랍니다.
예를 들면 바오로 사도처럼 말에서 제대로 한번 떨어진다거나, 벼락을 한번 맞는다거나, 예기치 않았던 큰 사고를 당해 거의 요르단 강을 건너갔다가 다시 돌아왔다거나...그렇지 않고 한 인간의 자의적인 노력만으로 회개는 힘들다는 데 다들 공감했습니다.
원판불변의 법칙, 곰곰히 생각해보니 참으로 지당한 법칙인 것 같습니다. 저 자신의 지난 삶을 돌아봐도 맞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다짐하고 또 결심하면서 변화를 위한 노력을 계속해왔지만, 아직도 진정성 있는 변화는 요원합니다.
아직도 오래전 그 모습 그대로입니다. 젊은 시절의 미성숙과 불완전과 나약함이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스쳐 지나가는 작은 바람 한줄기에도 심하게 요동치고 방황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오래고 질긴 악습을 아직도 끼고 발버둥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저 위에서 오는 힘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변화와 회개를 갈구하는 간절한 기도만으로 부족한 것 같습니다. 플러스 알파로 하느님 편의 개입과 도움, 은총과 자비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변화를 위한 최선의 노력을 다한 다음, 겸손하게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를 구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진정한 회개를 위해 나 자신을 온전히 내려놓고, 하느님의 손길에 완전히 내맡기는 전적인 봉헌이 필요합니다.
변화되지 않고 사는 것이 편합니다. 굳이 애써 회심이나 회개하지 않아도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선물로 주신 단 한번뿐인 인생, 손톱만큼도 변화되지 않고, 전혀 성장하지도 않고, 부끄러운 이 모습 그대로 그분께로 돌아간다는 것은 너무나 송구스러운 일인 것 같습니다.
작은 변화가 시작되면 하느님의 은총 역시 가속도가 붙기 시작합니다. 회개의 삶이 시작될때 뒤따라오는 하느님의 축복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마치 누에고치가 허물을 벗고 한 마리 어여쁜 나비가 되어 날아오르는 분위기입니다.
회심 전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집니다. 더 이상 고통이 고통이 아니라 축복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병고 역시 주님을 진정으로 만나는 은총의 장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십자가는 주님의 또 다른 얼굴로 변모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가장 기쁘게 해드리는 것은 변화된 모습을 보여드리는 것입니다. 성장하는 모습을 선보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느님께서 가장 어여삐 받으실 우리의 봉헌입니다.
우리가 보다 긍정적으로 변화되는 것, 이기적인 신앙을 떨치고 보다 이타적인 신앙에로 나아가는 것, 유아기적인 신앙에서 성숙된 신앙에로 성장하는 것, 어둠에서 밝음으로 나아가는 것, 죄에서 해방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가는 것이 우리가 하느님께 드릴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일 것입니다.

니는 내가 사랑하는 이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이영근신부-
오늘은 사순 2 주일입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 말씀에 공통으로 들어있는 말 한마디는 “아들”이라는 말입니다.
<제1독서>에서, 주님의 천사는 아브라함에게 말합니다.
“너의 아들, 너의 외아들까지 아끼지 않았으니, 나는 너에게 한껏 복을 내리고,
네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한껏 번성하게 해 주겠다.”(창세 22,17)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로마인들에게 말합니다.
“당신의 친 아드님마저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어준 분께서,
어찌 그 아드님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베풀어주지 않으시겠습니까?”(로마 8,32)
그리고 <복음>에서, 성부께서는 예수님의 세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이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르 9,7)
이 세 이야기는 모두 산에서 벌어진 이야기입니다.
<제1독서>는 모리야의 산에서, <제2독서>는 갈바리 산에서, <복음>은 타볼 산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이처럼, 산은 하늘과 땅을 연결하고 있습니다.
<제1독서>에서 주님의 천사는 아브라함에게 말한다.
“너의 아들,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사악을 데리고 모리야 땅으로 가거라.
그곳, 내가 너에게 일러준 산에서 그를 나에게 번제물로 바쳐라.”(창세 22,2)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네가 사랑하는 것을 바쳐라 하십니다.
사실, 아브라함은 아들을 끔찍이도 사랑했습니다.
늦게야 얻은 아들, 자신을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해줄 보증수표인 아들, 그는 자신의 분신이요 자신의 미래였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약속하신 미래와 종족의 미래까지도, 온전히 모조리 바쳐라 하십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을 벼랑으로 끌고 온 것은 그를 벼랑에서 떨어트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그 벼랑을 건너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벼랑 건너에는 더 낳은 미래가 펼쳐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 진정한 미래를 주기 위해서는 벼랑까지 끌고 와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야말로 하느님께 대한 전적인 신뢰요, 무조건적인 승복의 요청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이끄심에 따라, 비로소 자신의 희망과 믿음이 아니라, 하느님의 희망과 믿음이 이루어지도록 순명하였습니다. 이는 믿음에 따라 이루어진 은총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의 말합니다.
“약속은 믿음에 따라 이루어지고 은총으로 주어집니다.”(로마 4,16)
이처럼, <제1독서>가 아브라함이 사랑하는 아들인 이사악을 하느님께 번제물로 바치는 희생에 대한 이야기라면,
<제2독서>는 반대로, 이제 하느님께서 당신의 사랑하는 아드님을 인간을 위해 내어주신 이야기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당신의 친 아드님마저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어준 분께서,
어찌 그 아드님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베풀어주지 않으시겠습니까?”
오늘 <복음>에서는 바로 이러한 아버지의 사랑을 드러내줍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이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르 9,7)
이 말씀은 세 가지 사실을 암시하고 밝혀줍니다.
첫째, “너는 내 아들이니”란 말의 출처는 <시편> 2편 7절,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로, 이는 온 땅을 다스리게 될 왕인 메시아에 대한 선포입니다.
둘째, “내 사랑하는”이란 말의 출처는 이미 <제1독서>에서 본 <창세기> 22장 2절, “너의 아들,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사악을 ~나에게 번제물로 바쳐라.”로, 이는 머지않아 십자가에 바쳐지게 될 희생을 암시합니다.
셋째,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는 <신명기> 18장 15절, “주 너희 하느님께서 ~나와 같은 예언자를 일으켜주실 것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야 한다.”로, 이는 모세와 같은 예언자를 보내겠다는 메시아에 대한 약속입니다.
결국, 구름 속에서 들려온 이 말씀은 예수님이 왕으로서의 메시아요, 제사장으로서의 메시아요, 예언자로서의 메시아임을 밝혀줍니다.
한편, 세례 때,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르 1,21)에 나오는 “내 마음에 드는”이란 말의 출처는 <이사야> 42장 1절,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내가 선택한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로, 이는 종 메시아에 대한 예언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이러한 메시아에 대한 선포에 따라,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 깨우쳐주십니다.
그것은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들려주신 말씀이 우리 안에서 성취도록 말씀께 승복하는 일입니다.
말씀께서 우리를 맘껏 쪼물딱거릴 수 있도록 자신을 허용하는 일입니다.
자신을 그야말로 말씀이 이루어져야 할 공간이요 장소로 내어드리는 일입니다.
그것은 자신이 아니라, 말씀을 주인 되시게 해 드리는 일이요, 주님을 주님 되시게 해 드리는 일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변모될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대로, “더욱더 영광스럽게 그분의 모습으로 바뀌어 걸 것입니다”(2코린 3,18 참조). ‘이 건물(초막)은 주님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나고,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함께 지어지게 될 것입니다.’(에페 21-22 참조)
이 변모가 바로 사순절의 근본정신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거룩한 그리스도의 신성에 참여하게 되는 일이요, 하느님이신 그리스도의 신성이 우리에게서 드러나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분의 말씀을 듣고 순명하는 일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 자신을 외아들 예수님과 함께 아버지께 번제물로 드리는 일이 될 것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르 9,7)
주님!
말씀 아래에 머물게 하소서.
말씀께 제 자신을 건네 드리게 하소서.
맘껏 쪼물딱거릴 수 있도록 제 자신을 허용하게 하소서.
말씀이 제 안에서 성취되도록 저를 승복하게 하소서.
제 자신이 말씀이 이루어지는 장소가 되게 하소서. 아멘

이제는 우리의 몫입니다
-반영억신부-
사랑합니다. 한 주간 안녕하셨습니까? ‘코로나19’로 인해 미사참례도 못하는 안타까움이 큽니다. 확진자도 계속증가하고 불안이 커갑니다. 속히 안정되어 일상을 회복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리고 세상을 떠난 이들에게 하느님의 자비를 간구합니다. 특별히 건강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시련 안에서도 하느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는 은총이 함께 하기를 기도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필리피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미래의 희망을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내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내달리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하늘로 부르시어 주시는 상을 얻으려고, 그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다……..내가 이미 여러분에게 자주 말하였고 지금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는데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의 끝은 멸망입니다. 그들은 자기네 배를 하느님으로 자기네 수치를 영광으로 삼으며 이 세상 것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늘의 시민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구세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고대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당신께 복종시킬 수 있는 그 권능으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런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필리3,13-15.19-21).
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위로와 희망을 얻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같은 위로와 희망을 줍니다. 주님을 믿고 따르면 과거를 하느님의 자비에 맡길 수 있고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영광스러운 미래를 희망하며 오늘을 최선에 최선을 다하여 살 수 있습니다. 주님을 온전히 믿고 따르면 구원이 우리의 것이요, 영광스러운 변모가 나의 것입니다.
친구 둘이 집으로 돌아가는 산길 이었습니다
갑자기 곰이 나타났습니다.
둘이서 곰을 피하여 도망치는데 나무 한 그루가 보였습니다.
곰은 아직 친구들을 따라오지 못하였고
서로 받쳐주면 올라갈 수 있는 나무였습니다.
나무를 잘 타는 친구가 먼저 나무를 타고서 올라갔습니다.
나무를 잘 타지 못하는 친구는 겁에 질려 ‘곰은 죽은 짐승은 먹지 않은다’는 할머니의 이야기를 떠 올리며 그저 죽은 척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나무를 타고 올라간 친구가 아래를 보니 죽은 척 하는 친구에게 곰이 쿵쿵 다가와 흠흠 냄새를 맡았습니다. 얼마 후 곰이 돌아가고 나무에 올라간 친구가 내려와 말했습니다.
- 야, 곰이 너한테 뭐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더라. 뭐라고 하든?
- 응, 위급할 때 혼자 도망치는 놈하고는 친구하지 말래.
우리말에도 “친구는 어려울 때 알아본다.”는 말이 있습니다. 서로 깊은 우정을 가진 사람인지는 시련을 앞에 두면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신뢰와 사랑이 깊은 친구관계는 어려울 때 빛을 발하는 법입니다. 마스크 하나 구입하기도 어려운 오늘의 위기 안에서 서로의 관심과 배려가 그 어느 때보다도 필요함을 느낍니다.
이것은 신앙인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예기치 않은 어려움에 직면할 때가 있습니다. 이때 하느님께 대한 신앙체험이 있는 사람은 시련이 은총의 시기요, 위기를 기회로 만들게 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 대한 체험이 없고 건성으로 신앙생활을 한 사람은 시련에 그대로 쓰러지게 됩니다. 그리하여 냉담을 하기도 합니다. 좋은 체험을 갖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은총이고 복입니다.
오늘 복음은 바로 제자들에게 좋은 체험을 만들어주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산에 오르시어 당신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당신의 수난과 죽음에 앞서 희망을 주고 용기를 북돋아 주기 위한 것입니다. 어떠한 처지에서든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지키기를 바라셨습니다. 특히 당신의 십자가 죽음 앞에서도 사흗날에 다시 살아나신다는 희망을 간직하고 강건하기를 당부하신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빛나는 모습은 예수님의 고유 모습입니다. 다만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했을 뿐입니다. 요한복음 8장12절에 보면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입니다.”하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또한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5,14-16) 그리고 창세기 1장 26절.27절에는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모습대로 사람을 만들어”….. “당신의 모습을 닮은 사람을 창조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도 역시 영광스러운 모습을 지닌 것입니다.“그분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그분의 옷은 빛처럼 하얘졌다.”(마태17,2)고 하였는데 이제 해처럼 빛나야 할 사람은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의 삶이 해처럼 빛나서 주님을 드러내야 합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권고합니다. “여러분은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도록 하십시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하도록 하십시오.”(로마12,2) 쉽지 않지만 이 선택의 여정에서 하느님을 분명하게 선택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의 삶은 빛나게 되고 주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 같이 거울을 보고 얼굴을 가꾸며 몸단장을 하듯 영혼의 상태를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에 비추어 점검하고 부족함을 채워야 하겠습니다.
베드로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께,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고 거기서 머물고자 하였습니다. 초막은 하느님께서 거처 하시는 곳을 말합니다. 좋은 것을 보면 그것을 소유하고 싶고 아름다운 것을 보면 그곳에 오래도록 머물고 싶은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너무 쉽게 얻으려고 하는 것이 문제 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초막을 지으려면 자기의 취미나 하고 싶은 것, 돈 되는 것, 세상의 것을 버리는 희생이 요구됩니다. 쉽게 얻은 것은 쉽게 잃어버리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허황된 초막은 헐어버려야 합니다. 수고와 땀, 사랑과 정성이 깃든 초막이 필요합니다.
어떤 이들은 큰 믿음의 소유자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또 다른 이들은 기도를 잘하는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기도를 하지 않습니다. 기도는 기도하면서 배우게 되고 더 깊은 기도를 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노력하지 않고 쉽게 얻으려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들은바 대로 행해야 큰 믿음을 간직할 수 있고 믿음의 열매를 맛볼 수 있게 되며 확신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더 큰 믿음으로 나가게 됩니다. 그러나 믿음에 따르는 행동, 실천이 부족합니다.
사순절을 맞아 판공문제지를 나눠 드렸는데 풀어보신 분도 있고, 그렇지 않으신 분도 있습니다. 매일 성경을 읽고 성체조배를 하며 아침저녁기도를 빠뜨리지 않고 하시는 분이 계신가 하면, 일주일이 되도록 성경 한 줄도 안 읽고 기도를 소홀히 하신 분도 계십니다. 누가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겠습니까? 알면서도 행하지 못하니 열매가 없습니다.
복음을 보면 베드로가 주님과 함께 머물기를 희망하며 초막 셋을 지어 드리겠다는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빛나는 구름이 그들을 덮고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태17,5)하는 소리가 났습니다. “그의 말을 들어라.”는 말씀을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이제는 황홀경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믿고, 말씀대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초막 셋을 지어 천국 같은 그곳에서 천년만년 살고 싶어 했습니다. 안주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데리고 산에서 내려옵니다. 현실로 돌아와서 거기서 희망을 갖고 살아가기를 바라셨습니다. 이는 미사 안에서 기도하고 영성체하며 기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그 정신을 살아가라는 명령이기도 합니다. 행동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 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마태17,9) 명령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그 부활의 영광의 신비를 깨닫기 전까지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실 입이 가벼운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의 말에는 진실성이 없습니다. 요즘 세상에는 여러 체험을 자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기도의 체험, 이상한 현상이나 꿈을 과장하고 떠벌립니다. 거기에는 겸손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혹 그가 진정으로 하느님을 체험했다면 말이 아니라 삶이 변화되었을 것입니다. 이러저러한 현상이나 사건 안에서 진중하게 하느님의 뜻을 헤아릴 줄 아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제발 말하지 마라! 먼저 말씀대로 행하라.’고 당부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을 따르는 삶이 더 큰 언어입니다. 주님의 얼굴이 해처럼 빛났듯이 이제 우리의 모습이 빛나기를 기도합니다.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인간으로서 주님의 영광을 빛나게 하는 한 주간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미사참례를 못하는 요즈음 성경을 더 자주 읽으며 그 안에서 위로와 희망을 얻고 문제의 해답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주님, 제가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저의 희망은 오직 당신께 있습니다”(시편39,8).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송영진신부-
“엿새 뒤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다.
그분의 옷은 이 세상 어떤 마전장이도 그토록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다. 그때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사실 베드로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던 것이다. 제자들이 모두
겁에 질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에 구름이 일어 그들을 덮더니
그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 그 순간 그들이 둘러보자 더 이상 아무도 보이지 않고
예수님만 그들 곁에 계셨다(마르 9,2-8).”
1) 제자들의 믿음은 어떤 이론을 공부하거나 연구해서 얻은 것이 아닙니다.
직접 보고, 직접 듣고, 직접 체험해서 얻은 믿음입니다.
제자들의 체험 가운데에서 가장 큰 사건은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예수님께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신 일’은
당신의 부활을 미리 체험하게 해 주신 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2) 제자들의 체험을 ‘눈으로 본 일’과 ‘귀로 들은 말씀’으로 나누어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본 것은,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과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부활 예고 말씀’ 때문에
당황하고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용기와 힘을 주시려고
하느님 나라에서의 당신의 영광을 미리 보여 주셨습니다.
“그분의 옷이 새하얗게 빛났다.” 라는 말은,
하느님의 영광으로 예수님께서 눈부시게 빛났다는 뜻입니다.
(옷이 아니라 예수님이 빛났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얗다.’ 라는 말은 ‘흰색’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눈부심’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 일은, 예수님의 본래 모습을 보여 주신 일이기도 하고,
십자가는 십자가로 끝나지 않고
부활과 영광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보여 주신 일이기도 하고,
신앙생활의 목적지인 하느님 나라를 미리 체험하게 해 주신 일이기도 합니다.
율법의 대표자인 모세와 예언의 대표자인 엘리야가 나타난 일은
모든 율법과 예언이 주님이신 예수님에게 종속된다는 것을 나타내고,
“예수님은 율법을 완성하고 예언을 실현하시는 분”이라는 것도 나타냅니다.
두 사람이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눈 일은,
대등한 위치에서 이야기를 나눈 일이 아니라,
주님을 섬기는 위치에서 주님의 말씀을 듣거나 주님께 말씀을 드린 일입니다.
3)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라는 말은, “이대로 영원히
살고 싶습니다.”, “이 순간이 영원히 지속되면 좋겠습니다.”,
“이대로 시간이 멈추면 좋겠습니다.” 등으로 해석할 수 있는 말입니다.
이 말은, 너무나도 행복하고 황홀해서 한 말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인간의 상상을 초월한 곳,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행복한 곳이고, 그 행복은 한 번 체험하면 결코 잊을 수도 없고,
다른 행복은 바라지 않게 되는, 그런 곳입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던 것이다.” 라는 말은,
황홀함에 도취되어서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채로 말했다는 뜻입니다.
제자들이 모두 겁에 질려 있었다는 말은, 무서워했다는 뜻이 아니라,
행복감과 황홀함에 압도되어 있었다는 뜻입니다.
4) 제자들이 ‘하느님의 음성’을 직접 들은 일도
‘예수님께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신 일’을 직접 본 일만큼이나
중요한 체험입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 직접 예수님의 신원을, 즉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 구세주라는 것을 증언해 주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 라는 베드로 사도의 신앙고백이 옳다는 것을
하느님께서 직접 확인해 주신 말씀입니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수난 예고 말씀과
앞의 8장 34절의 말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라는 말씀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따라가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라는
베드로 사도의 요청을 거절하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5) 십자가 너머에는 부활의 영광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의 목적지인 하느님 나라는 영원하고 참된 행복을 누리는 곳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건너뛰고 부활로 바로 갈 수는 없습니다.
또 지상에서의 인생을 생략하고 하느님 나라로 직행할 수도 없습니다.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려면 각자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바란다면, 자신의 인생을 충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왜 꼭 그렇게 해야 하는가?
그냥 하느님 나라의 부활과 생명으로 직행하면 안 되는가?”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여러분은 마지막 때에 나타날 준비가 되어 있는 구원을 얻도록, 여러분의 믿음을
통하여 하느님의 힘으로 보호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니 즐거워하십시오.
여러분이 지금 얼마 동안은 갖가지 시련을 겪으며 슬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로 단련을 받고도 결국 없어지고 마는 금보다 훨씬 값진
여러분의 믿음의 순수성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밝혀져, 여러분이
찬양과 영광과 영예를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1베드 1,5-7).”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가 지금 겪는 일시적이고 가벼운 환난이 그지없이 크고 영원한
영광을 우리에게 마련해 줍니다.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우리가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보이는 것은 잠시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합니다(2코린 4,17-18).”
예수님의 수난, 죽음, 부활을 하나로 묶어서 ‘파스카의 신비’ 라고 부릅니다.
‘신비’는 인간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고,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하느님 뜻이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가는 우리의 신앙여정도 ‘파스카의 신비’에 속한 일입니다.

-조욱현신부-
오늘 전례는 제자들에게 부활의 영광을 미리 보여줌으로써, 고통과 죽음은 예수께 파스카로 가는 길에 불과할 뿐이다. 만일에 그리스도께 성금요일이 없었다면 환호하는 부활의 기쁨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순절의 여정이 비록 광야를 거쳐 피곤하고 어려운 길로 우리 자신을 끊고 극복해야 하는 험난한 과정이지만 결정적으로는 부활의 쇄신과 변모의 기쁨과 빛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새기도록 한 것이다. 사순절은 그러므로 사랑의 실천을 위한 자기 극복을 지향한다.
제1 독서에서 이사악의 희생의 의미는 다름 아닌 생명의 포기와 희생은 사랑에서 왔다는 것이다. 즉 아브라함의 하느님께 대한 신앙과 사랑에 대한 증명이었다. 그것이 결정적으로 해결되는 것은 천사의 말씀이었다(창세 22,12). 하느님께서는 이어서 아브라함에게 무수한 자손을 약속하신다(창세 22,16-17). 이렇게 생명의 포기와 희생에 의미를 주는 것은 사랑뿐이다.
복음: 마르 9,1-9: 예수님의 모습이 그들 앞에서 변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변모는 십자가의 죽음의 여정을 시작하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예시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그 영광은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도 이 미래의 영광을 기대하고 지향해 가면서, 삶의 어두운 나날들에 의미를 부여하도록 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그 영광은 고통과 시련의 시기를 생략할 수는 없다. 베드로가 엉겁결에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5절) 하고 소리치는 것처럼 그 시기를 뛰어넘을 수는 없다. 여기서 초막의 의미는 결정적으로 하느님 안에 쉬는 ‘종말론적 안식’의 환희와 기쁨을 예시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지상에서의 싸움을 시작하실 때이다. 하느님의 아들은 수난과 죽음의 시련을 거쳐 우리보다 먼저 천상 영광에 오르셨다.
예수님의 변모 때의 찬란히 빛나는 옷은 신적 세계의 표지이며 기쁨과 승리를 상징한다. 부활 때 천사는 순백의 옷으로 나타난다(마르 16,5). 구름은 하느님의 신비로운 현존의 독특한 상징이다. 세 사도에게 예수께서는 당신 자신에 대해 예외적이고도 형언할 수 없는 체험을 하게 해 주셨다는 것이다. 이제 이 찬란한 변모의 의미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있다. 우선은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4절)와 구름 가운데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7절)는 소리다. 구약의 위대한 두 인물은 하느님의 구원계획이 단계적으로 그리스도에게서 완성된다는 것을 말해준다. 즉 구약성경의 이 두 인물은 그리스도와 함께 마지막 때가 도래하는 그 순간에 실현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구름 속에서 들려오는 아버지의 말씀은 십자가를 향해 가시는 예수가 누구인지를 계시해주는 말씀이다.
즉 사도들에게 그 신비를 이해하고 구원의 메시지를 받아들이라는 권고이다. 갈바리아 산 위에서 예수께 일어날 사건은 바로 그분이 하느님한테서 나오셨다는 것에 대한 증명이다. 하느님의 마음을 닮은 사람만이 그리스도가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할 수 있다. 십자가 밑에 있던 백인대장이 고백한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15,39)는 말은 오늘 아버지의 말씀의 반향일 것이다.
로마서에서도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입증해 준다.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신데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당신의 친 아드님마저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어 주신 분께서, 어찌 그 아드님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지 않으시겠습니까?”(로마 8,31-32). 이사악의 사건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실현되었다. 그리스도께는 대신 희생될 수양이 없었다.
이렇게 하느님은 당신의 아들을 아끼지 않으셨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의 죽음을 통하여서까지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신 것이다. 여기서 또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사랑은 죽음을 넘어서도 영구히 지속된다는 것이다. “돌아가셨다가 참으로 되살아나신 분, 또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신 분, 그리고 우리를 위하여 간구해 주시는 분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로마 8,34). 이렇게 보면 항상 주제는 같다. 즉 모든 행위의 궁극적 목표는, 비록 사랑의 고통스러운 시련은 겪어야 한다고 하더라도, 기쁨과 아름다움과 생명을 달성하는 것이다.
주님의 변모는 그분의 고통과 기쁨, 능욕과 영광의 신비이며, 우리 인생의 신비를 더 잘 이해시켜주는 ‘빛의 순간’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아버지께서 ‘사랑하는 아들’로서 받아들이고 그분의 말씀을 귀담아들을 때, 즉 말씀을 실천할 때, 말씀을 실천할 때, 우리 자신의 존재도 변모될 것이다. 우리의 삶 속에서 모든 일에 있어서 의미를 발견하고 그 체험을 하면서, 즉 구원을 체험하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변모를 이루게 될 것이다. 이것이 사순절의 근본 의미이다. 우리 자신의 변화를 이룰 수 있는 은총의 때가 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는 아버지의 사랑이 절절히 묻어 있습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르 9,7)
예수님께서 거룩히 변모하신 순간에 하늘에서 들려온 하느님의 음성입니다. 예수님은 일찌기 세례 때에도 비슷한 말씀을 들으셨지요. 제자들 가운데서 "따로" 불리어 "높은 산"에서 이 영광의 순간을 목도한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은 이 목소리를 생생히 듣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아들"
이 말씀은 오늘 복음 환호송, 복음, 영성체송에서 세 차례나 반복됩니다. 그만큼 사순 제2주일의 말씀이 전하고자 하는 정수이고 핵심이지요. 이 안에는 외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성부 하느님의 진심이 들어 있습니다. 성부와 성자는 한 분이시고 성령과 함께 사랑의 유대 안에 온전히 일치하십니다. 사랑이신 하느님께 아드님은 사랑 그 자체십니다.
제1독서에서는 아브라함과 이사악 이야기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희생제사를 예견합니다.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사악을 데리고 모리야 땅으로 가거라. 그곳, 내가 너에게 일러 주는 산에서 그를 나에게 번제물로 바쳐라."(창세 22,2)
하느님은 아브라함에게 이사악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사랑하는 외아들"임을 잘 아십니다. 그런데도 당신에 대한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해 보시려고" 이처럼 고통스런 명령을 내리시지요.
성경은 아브라함의 심경에 대해 구체적인 언급을 절제하며 자신에게 내린 하느님의 뜻을 묵묵히 이행하는 모습을 전합니다. 간결히 표현된 아브라함의 말과 행동에서 우리는 말로 다할 수 없는 고통을 읽습니다. 이 고통에서 먼 훗날 외아드님을 세상에 내어 주실 하느님의 고통 또한 함께 감지하게 되지요.
아브라함의 순종은 곧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인간의 손에 당신 외아드님을 내어 맡기신 하느님의 순종을 보여 줍니다. 하느님은 이미 '사람은 어려서부터 악한 뜻을 품기 마련'(창세 8,21 참조)임을 아시니, 인간의 자유의지에 외아드님의 처분을 맡기시고 얼마나 마음 졸이셨을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과 아드님의 관계를 통해 우리의 위상을 이야기합니다.
"당신의 친아드님마저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어 주신 분"(로마 8,32)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드님을 내어 주십니다.(요한 3,16 참조) 사람들이 그분을 어떻게 대할지 모든 가능성을 모르지 않으시면서도 아드님의 순종과 사람의 자유의지를 존중하십니다. 이유는 우리에 대한 사랑입니다.
이처럼 하느님은 철저히 우리 편이십니다. 나약한 죄인인 우리가 때로 악하기까지 하다는 걸 아시면서도,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존재의 죽음과 당신이 받을 상처까지 수용하실 정도로 우리 구원에 매진하십니다. 하느님 모상인 우리의 존엄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제사로 완성됩니다.
오늘 세 제자가 마주한 예수님의 놀라운 모습은 험한 고난의 여정을 거친 후에 마주할 영광입니다. 거기에 가 닿기까지 얼마나 아프고 슬픈 배반과 회피와 버림받음의 사연이 남아있는지요!
하지만 괜찮습니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이 아무리 험난하고, 그 길에서 드러날 우리의 민낯이 아무리 형편 없어도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시니까요. 우리가 곧 아버지의 "사랑하는 아들/딸"이니까요.
사랑하는 벗님! 이처럼 우리에게 희망을 품어도 좋다고 격려하시는 사순 제2주일의 말씀을 지팡이 삼아 길게 남은 사순 시기의 순례 여정을 묵묵히 걸어가시길 기원합니다. 아버지 하느님의 고통, 아브라함의 고통 속에 배어 있는 엄청난 사랑에 깊이깊이 머물러 하느님의 사랑받는 존재로 활짝 피어나길 바랍니다.

-김찬선신부-
말씀 나누기 - 사순 제2주일-시련 중에서 희망과 사랑을 보는 믿음 (ofmkorea.org)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마르코 9,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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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악은 기꺼이 아버지 아브라함의 뜻을 따랐지만, 죽음을 맞이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사악을 뛰어넘는 순종의 길을 가셨습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에 대한 신뢰 속에서 수난의 길, 십자가의 희생 제물이 되는 길을 걸어가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길을 걸어가실 수 있으셨던 힘은 바로 당신을 사랑하시는 아버지를 사랑하시고, 당신을 신뢰하시는 아버지를 신뢰하시는 깊은 관계에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 변모의 모습을 보고 기뻐하면서도 두려움을 느꼈던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말씀만 듣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온전히 순명하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신뢰하시며 사랑받으시는 아드님으로 좁고 험한 길을 가셨던 것처럼, 이제는 우리가 예수님의 뜻을 따라, 아버지를 신뢰하면서 그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그 결심의 시기가 바로 사순 시기입니다.
-박형순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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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욕구를 죽이는 것은 그리스도처럼 되기 위해 꼭 가야만 하는 가치 있는 길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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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잔한 파도는 훌륭한 뱃사공을 만들어 내지 못합니다. 산이 깊어야 계곡의 물도 마르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함께 하신다면 시련과 갈등은 우리를 영적으로 성장 시키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을 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신데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당신의 친 아드님마저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어 주신 분께서, 어찌 그 아드님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바오로 사도는 오늘 우리에게도 똑 같은 말을 하시리라 생각합니다. 누가 우리를 하느님께로부터 떼어 놓을 수 있겠습니까?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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