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27일 사순 제1주간 토요일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
(마태오 5,43-48)
Be perfect,
just as your heavenly Father is perfect."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박형순신부-
주님의 규정과 법규를 따르고 실천하면 하느님께 복을 받습니다. 이것은 신명기 가르침의 핵심입니다. 상선벌악의 가르침은, 구약 시대에만 유효한 것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유효한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막상 주님의 가르침을 따르면서 살겠노라고 결심하고 살아가려면 많은 희생이 요구되지요. 나만 바보가 되는 것 같은 모습에 억울하기도 합니다. 그뿐만이 아니지요. 주님의 계명에 충실하게 사는 사람보다, 악을 일삼는 사람들이 떵떵거리며 사는 모습에 화가 나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공정과 정의가 이 세상에서 드러나기가 어려워 보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세상이 어떤 곳인지를 알려 주십니다. 이 세상은 바로 하느님의 자비가 넘치는 세상입니다. 우리는 흔히 하느님 나라가 자비가 넘치는 세상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반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악인과 선인을 동등하게 대우해 주십니다. 악인과 선인에게 똑같이 당신의 햇빛을 비추어 주시고, 의로운 사람과 불의한 사람 모두에게 비를 내려 주십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하느님의 심판으로 가득하고 하느님의 자비가 없는 곳이라면, 하느님께서는 선인에게만 해를 비추어 주시고 비를 내려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공정과 정의가 실현되지 못하는 모습에 우리는 속상한 마음을 품어 왔습니다. 그러나 공정과 정의는 우리가 훗날 맞이하게 될 하느님 나라에서 완성될 것입니다. 지금은 공정과 정의보다 하느님의 자비가 더 큰 세상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자비가 가득한 세상에서 완전한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공정과 정의의 심판 앞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 길은 지금 이곳에서 주님의 계명과 가르침에 충실한 삶을 살아가면서 시작됩니다. 그 길이 지금 우리의 눈에는 부당하고, 억울하게 보일지라도 말입니다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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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제가 중학생 때였을 것입니다. 학교에서 적금을 들어야 한다면서 거의 반강제로 적금을 붓게 했습니다. 예금이라는 것도 잘 모르는데 매달 얼마씩 적금을 부어야 한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만기일까지 제대로 적금을 부으면 높은 이자와 함께 목돈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용돈도 부족할 때, 적금을 붓는다는 것은 너무 큰 어려움이었습니다. 하지만 용돈을 아끼고, 차비도 아껴서 중학교 졸업할 때 적금 만기가 되어 10만 원이 조금 넘었던 돈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지금이야 얼마 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당시 짜장면이 1,000원을 넘지 않았고, 버스요금이 200원이 되지 않았던 시절이었으니, 10만 원은 학생에게 정말로 큰돈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돈으로 무엇을 했을까요? 사실 오랫동안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끼고 아껴서 모은 것이라 차마 이 돈을 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쉽게 벌었던 세뱃돈의 경우는 먹고 노는데 금세 써버렸지만, 이 경우는 달랐습니다. 먹고 싶은 것, 놀고 싶은 것 등 모두 참으면서 아끼고 아껴서 부은 적금을 그냥 한순간의 만족으로 없애버릴 수는 없었습니다.
본인이 힘을 쏟을수록 정성을 기울일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에 대해서도 그렇지 않을까요? 만약 지금 주님 만나는 것을 소홀히 하고 있다면 그만큼 주님과의 만남에서 정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과의 만남을 가장 우선시한다면, 늘 주님께 정성을 기울이는 사람일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실천하기 힘든 말씀을 전해주십니다.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할 수 있겠다 싶지만,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이 과연 쉬울까요? 나를 힘들게 하는 박해자를 위해 기도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하늘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우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그렇게 지키기 힘든 사랑의 계명을 철저히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주님을 첫 번째 모신다면 어떨까요? 이 말씀을 지키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완벽한 사랑을 실천하라고 하시니까요. 그러나 주님이 내게 첫 번째가 아니라면, 불가능한 말씀을 하신다면서 불평불만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여질 것입니다.
주님의 계명을, 특히 사랑의 계명을 어떻게 지키고 있느냐에 따라 주님께 대한 우리의 정성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남들만큼만 하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의 자녀는 남들만큼 사는 삶이 아닌 그 너머에 있는 가치를 따르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느님 아버지처럼 완벽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존경하던 채제공의 당호인 매선당에 기문으로 남긴 글인 ‘매선당기’에서 이렇게 적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아홉 가지 일을 모두 악한데 한 가지 일이 우연히 착하다 해도 그는 착한 사람이라고 할 수 없고, 또 아홉 가지 일은 모두 착한데 한 가지 일이 우연히 악하다 해도 착한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어떤 항아리가 그 전체는 모두 깨지고 주둥이만 온전하다 해도 깨진 항아리라고 하며, 그 전체는 온전한데 오직 하나 구멍 하나만 뚫렸어도 깨진 항아리라고 합니다.
사랑이 매사에 선을 다하지 못한다면, 끝내 착하지 않은 사람이 됨을 면치 못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이 선을 이루기 어려움이 이와 같습니다.”
높은 기준으로 빈틈없이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래야 충분한 만족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이쯤이면 괜찮아. 나 하나쯤이야.’ 등의 안일한 생각은 이제 내 삶에서 떠나보내야 할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려면: 그리스도가 되어야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라는 불가능해 보이는 계명을 주십니다. 하지만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라고 하시며 우리 의무라고 하십니다.
하지만 어떻게 원수를 사랑하고 그 사람을 위해 축복기도를 해 줄 수 있을까요? 영화 ‘밀양’에서 전도연 씨가 자신의 외아들을 납치해 살해한 원수를 용서하러 가서 더 상처를 받고 돌아오는 장면이 있습니다. 용서하러 갔는데 범인은 이미 예수님께 용서를 받아 마음의 평화를 찾은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 범인을 위해 또 용서를 해 줄 수 있을까요? 전도연은 세상에서 유일하게 힘든 사람이 자신이고 그것을 이길 수 없어 칼로 자해를 합니다.
정말 어떻게 하면 우리가 원수까지 사랑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원수까지 나보다 더 행복하기를 바랄 수 있을까요? 그것은 하느님만이 가능한 일입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최후의 만찬’을 그리기 바로 전에 동료 미술가와 심한 말다툼을 했습니다. 복수할 생각으로 작품에 등장하는 가리옷 유다의 얼굴에 그 동료의 모습을 그려 넣었습니다. 예수님을 배신한 가리옷 유다의 얼굴에 그 동료의 얼굴을 넣음으로써 그림을 감상하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그가 경멸의 대상이 되리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그 얼굴이 다빈치와 싸운 사람의 모습임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습니다. 이어서 그는 예수님의 얼굴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전혀 작업에 진전이 없었습니다. 동료에 대한 미움이 예수님 얼굴을 그리는 것을 방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빈치는 즉시 유다의 얼굴을 지워버렸습니다. 그리고 우선 예수님의 얼굴을 찾아보기로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성당 성가대에서 목소리가 기가 막히게 좋은 남성 성가대원을 발견하곤 환호했습니다. 그는 젊고, 건강하고, 활기찼습니다. 레오나르도는 이 청년을 자신의 화실에 초대하였고 그를 모델로 삼아 그렸습니다.
이젠 유다의 얼굴을 다시 찾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찾을 수 없었습니다. 찾기 어려웠습니다. 몇 년의 시간이 흘러 그림이 거의 완성되었습니다. 그림을 의뢰한 수도회 측에서는 속히 작품을 마무리하라고 압박하였습니다.
다빈치는 거리를 다니며 작품 속 유다의 얼굴을 찾았습니다. 몇 날 며칠을 고생한 후, 레오나르도는 참 슬프고, 외롭고, 술에 취해 있고, 현세의 삶과 완전히 동떨어져 사는 듯한 한 젊은이를 찾았습니다. 그를 초대하여 유다의 얼굴을 그렸습니다. 다빈치가 자신의 작품을 완성했을 때, 그 젊은이가 작품을 보며 소리쳤습니다.
“앗! 이 그림을 전에도 본 적이 있었는데!”
다빈치는 놀라서 젊은이에게 언제 이 그림을 보았냐고 물었습니다.
“3년 전에요. 제가 소유한 모든 것을 잃기 전에요. 그땐 전 성가대에서 아름다운 성가를 불렀어요. 꿈도 많았었지요. 어느 화가분이 저를 초대해 예수님 얼굴 모델이 되어달라고 했었어요.”
그렇습니다. 이 젊은이는 예수님의 얼굴과 유다의 얼굴, 즉 두 얼굴의 주인공인 것이죠.
위 이야기는 실화가 아닙니다. 그렇더라도 우리에게 묵상 거리를 던져줍니다. 처음에 다 빈치는 미운 동료를 먼저 그렸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유다의 얼굴에 갇혀 예수님의 얼굴을 그릴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먼저 예수님을 그리니 이젠 유다를 찾기가 어렵습니다. 그의 마음엔 예수님의 얼굴이 새겨졌기 때문입니다. 그가 바라보는 나쁜 사람들은 모조리 ‘상처받은 예수님’의 모습일 뿐입니다.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 눈에는 부처만 보인다는 말이 있습니다. 오직 부처만 돼지를 위해 기도해 줄 수 있습니다. 돼지는 부처가 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믿기에 자기 미움 속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기도해 줄 수 없습니다. 가능하다고 믿어야 기도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개는 꽃이 예쁜 줄 모릅니다. 인간이 되어야 꽃이 예쁜 줄 알고 사람을 꽃과 비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조금 덜 예쁜 사람이 있다면 예뻐지도록 기도해 줄 수 있습니다. 모든 이가 꽃이 되기를 바랄 때 그 사람은 이미 꽃이 된 것입니다. 하지만 개나 돼지는 꽃을 볼 수 없기에 자신은 물론이요, 남을 위해서도 아름답게 되도록 바라거나 기도해 줄 수 없습니다.
원수를 사랑하기 위해 원수를 위해 기도해주려면 먼저 유다의 시선에서 예수님의 시선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모든 인간이 당신처럼 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유다를 위해서도 기도해주십니다. 하지만 유다는 예수님까지도 자신의 모습으로 끌어내리려 합니다. 돼지이고 바리사이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시선을 가지려면 내가 먼저 그리스도가 되어야 합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의 그림을 그려놓아야 합니다. 그래야 나도 겸손해질 수 있고 다른 사람들도 다 그리스도의 모델이 될 수 있음을 보게 됩니다. 아버지처럼 완전해지는 길은 아버지를 내 안에 모시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 길밖에는 원수까지 사랑할 방법이 없습니다.

-조재형신부-
원숭이, 바나나, 판다 곰’을 보여주면서 서로 관련이 있는 것을 짝지어 보라고 할 때, 동양인과 서양인의 판단이 다른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동양인은 ‘원숭이와 바나나’를 묶어서 생각한다고 합니다. 원숭이가 바나나를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동양인은 관계를 중심으로 사고하는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서양인은 ‘원숭이와 판다 곰’을 묶어서 생각한다고 합니다. 원숭이와 판다 곰은 같은 동물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서양인은 종류를 중심으로 사고하는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 저도 원숭이와 바나나를 묶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생각했습니다. 원숭이가 바나나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의 동양인과 서양인은 큰 차이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동양인과 서양인은 각기 다른 문화와 역사를 만들어왔습니다. 동양인은 순환적인 생각을 많이 한다고 합니다. 계절이 가고 오듯이, 윤회와 업보를 생각하며 운명을 받아들이라고 말합니다. 서양인은 직선적인 생각을 많이 한다고 합니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듯이, 최후의 심판을 생각하며 깨어 있으라고 말합니다.
동양인 중에서도 한국인은 ‘우리’라는 독특한 문화와 전통을 간직하였습니다. 우리라는 문화와 전통은 국가적인 위기를 극복하는 힘이 되었습니다. 전쟁이 벌어지면 의병들이 외부의 적과 싸우기도 했습니다. 경제위기로 국가의 부도 사태가 있을 때는 ‘금 모으기 운동’을 통해서 위기를 극복하기도 했습니다. 2002년 월드컵 때입니다. 많은 사람이 거리에서 대한민국 팀을 응원하였습니다. 저도 광화문에 갔던 기억이 있습니다. 우리 팀이 좋은 경기를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태안 바다에 유조선의 침몰로 기름 유출이 있을 때는 많은 사람이 유출된 기름을 제거하였습니다. 우리의 바다가 오염되었기 때문입니다. 코로나19의 팬데믹에서도 ‘거리두기, 손 씻기, 마스크 쓰기’를 잘 지켰습니다. 우리 모두가 위험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디지털 세대인 요즘의 젊은이는 ‘우리’라는 관계보다는 ‘개인’의 자유와 창의성을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합니다. 여행이 자유롭고, 인터넷을 통해서 실시간으로 소통하면서 동양인과 서양인 그리고 한국인의 생각도 석물리는 것 같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주 너희 하느님께서 이 규정과 법규들을 실천하라고 너희에게 명령하신다.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그것들을 명심하여 실천해야 한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주님의 규정과 법규를 지키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야할 길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살면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모든 민족들 위에 높이 세우시고, 찬양과 명성과 영화를 받게 하신다고 합니다.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신다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거룩한 백성’이 가야할 길을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 박해하는 이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신앙인이 가야할 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하느님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거룩한 사람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행복하여라, 온전한 길을 걷는 이들,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이들! 행복하여라, 그분의 법을 따르는 이들, 마음을 다하여 그분을 찾는 이들!”

어렵고도 어려운 원수 사랑,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서는 가능합니다!
-양승국신부-
운전 중에는 언제나 가톨릭평화방송 라디오 고정입니다. 반가운 김남조 마리아 막달레나 시인께서 출연하셨습니다. 저도 가뭄에 콩나듯이 출연하는 ‘행복을 여는 아침’ 초대석에 나오셨더군요. 아흔을 훌쩍 넘긴 연세에도 총기와 시심(詩心)은 여전했습니다.
몇몇 말씀들이 오늘따라 사무치게 다가왔습니다. “인생의 끝자락, 추수 끝 황량한 들판에서 서서 뒤돌아보니, 그 모든 것이 다 사랑이었습니다.”“주님께 드리는 것, 바치는 것, 봉헌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고통도 드리고, 상처도 드리고, 기쁨도 드리고, 사랑도 드리는 가운데, 주님께서 우리에게 응답하십니다.”
사순시기를 보내고 있는 애청자들을 위해 직접 최애시(最愛詩)를 낭독해주셨는데, 정말이지 감동이었습니다.
우도(右盜)의 비유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양 옆에
두 사형수가 함께 처형되었다.
주님이 오른편 죄수의
신심을 읽으시고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셨다.
내가 나에게 물었다.
주님 곁에서
우도처럼 죽을 수 있겠는가?
나는 불가능을 능히 알았다.
그러나 동트는 새벽녘에
“할수 있다.”고 대답했다.
주님의 고통
그 한 부스러기가
안개와 눈물로
평생 같은 긴밤을
몽롱하게 나를 적시더니
이 대답에 이르렀다.
오늘 주님께서는 그 어려운 원수 사랑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상식선에서는, 인간의 마음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당부를 하고 계십니다. 하다 하다 안될 때 결국 방법은 한 가지뿐입니다.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 뿐입니다.
원수 사랑이라는 것, 김남조 선생님의 말씀처럼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을 통해서는 가능합니다.
리지외의 성녀 소화 데레사가 수련자 시절, 한 연로한 수녀를 부축하는 일을 맡게 되었습니다. 하루에도 몇번씩 데레사는 노인 수녀를 병실에서 성당으로, 식당으로 조심스럽게 모시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그 수녀는 성미 고약하고 까탈스럽기로 유명했습니다.
데레사의 모든 것이 못마땅했던 까칠한 수녀는 틈만 나면 이렇게 외쳤습니다. “내가 넘어지지 않도로 잘 보란 말이야! 넌 어리고 아무것도 모르잖아, 그러니 늘 조심하라구!”
성심성의껏 최선을 다해도 그 마음과 노고를 몰라주는 까칠한 수녀가 밉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했던 데레사는 자서전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몹시 힘들게 하는 수녀를 위해 나는 진심을 다해 기도했다. 그녀를 위해 할 수 있는 한 잘해 주려고 했지만, 뭐라고 쏘아붙여 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을 때는 서둘러 밝게 웃어 보이며 화제를 돌려버렸다.”
데레사는 매일 매순간 데레사는 까칠한 수녀가 내뱉는 불평불만을 기꺼이 참아냈습니다. 때로 상대방을 한대 쥐어박고 싶은 마음이 들때는 서둘러 그 자리를 벗어나 성당으로 달려갔습니다. 한동안 말없이 십자가를 바라보곤 했습니다.
지속적으로 깐죽거리는 까칠한 수녀가 “날 두고 또 어딜 가는거야?”라고 따질 때, 인내의 한계에 도달할 때 마다, 데레사는 제의방에 중요한 일이 있어 간다며, 초스피드로 그 자리를 빠져나오곤 했습니다.
어렵고도 어려운 원수 사랑입니다. 백방으로 노력해도 불가능한 원수 사랑입니다. 이 땅에 두 발을 딛고 서 있는 이상 도달 불가능해보이는 원수 사랑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통해서는 가능해집니다. 십자가를 뚫어지게 바라볼 때 가능해집니다. 십자가를 기쁘게 질 때 가능해집니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이영근신부-
사순시기를 보내고 있는 우리에게 오늘 <복음>도 계속해서 의로움에 대한 말씀을 들려줍니다.
오늘은 마지막으로 여섯 번째의 의로움인, 완전한 사랑에 대한 말씀입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마태 5,44)
이는 악을 선으로 갚으라는 말씀입니다. 곧 사랑에는 한계를 두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단지 사랑에 한계를 두지 말라는 말씀인 것만은 아니라, 나아가서 우호적이지 않은 사람일수록 오히려 사랑이 더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마치 죄인이기에 처벌하기보다 용서받아야 할 대상이듯이 말입니다.
동시에, 이는 자기 자신만 구원받아야 할 존재인 것이 아니라, 타인도 구원받아야 할 존재임을 깨우쳐줍니다.
자기 자신에게가 아니라, 그에게 사랑이 되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자기 자신만 사랑받아야 하는 존재인 것이 아니라, 타인도 사랑받아야 할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있는 그대로 사랑하고, 존재 자체를 사랑하고, 호의로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 다음에 한 말씀을 덧붙이십니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4)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만 하지 않으시고, 그를 위해 기도하라고 덧붙이셨습니다.
마치, 스테파노가 돌을 맞아 죽어가면서도 자기에게 돌을 던지는 이들을 위해 기도했던 것처럼(사도 7,60), 사도 바오로가 고난을 당하면서도 유대인들을 위해 기도했던 것처럼(1코린 4,12) 말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나의 기도가 가장 필요한 사람이 누구일까요?
지금 나를 가장 힘들어 하는 사람, 또 내가 가장 힘들어 하는 사람, 바로 그 사람이 아닐까요?
또 오늘, 대체 누가 나의 사랑이 가장 필요한 사람일까요?
지금 나를 가장 힘들어 하는 사람, 또 내가 가장 힘들어 하는 사람, 바로 그 사람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는 자기 형제나 이웃만 사랑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자기에게 잘해주고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사실, 친구를 사랑하는 사람은 죄는 짓지 않을지 몰라도, 의로움을 행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친구가 아닌 원수를 사랑할 때라야, 의로움을 행하게 될 것입니다.
악을 피하는 것을 넘어 선을 행할 때라야, 비로소 완전해지는 까닭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하늘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8)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4)
주님!
되갚지 않을 뿐 아니라 억울한 고통도 기꺼이 지게 하소서.
미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받아들여 사랑하고,
사랑할 뿐 아니라 기도하게 하소서.
죄짓지 않을 뿐 아니라 죄인을 용서하고,
용서할 뿐 아니라 선을 베풀게 하소서.
개방할 뿐 아니라 받아들여 수용하고,
수용할 뿐 아니라 그로 말미암아 변형되게 하소서. 아멘.

사랑이 약이다
-반영억신부-
홍문택 신부님의 ‘사람을 상대할게 아니랍니다’라는 글입니다.
“누가 당신을 모함합니까? 누가 당신을 두고 빈정거립니까?
누가 당신을 험담하고 다닙니까? 누가 사사건건 당신을 반대합니까?
누가 당신을 미워합니까?
그래서 얼마나 속이 상하십니까? 얼마나 분하십니까?
얼마나 야속하십니까? 얼마나 그가 밉겠습니까?
하지만 당신이 미워하시는 사람들과 싸우지 마십시오.
당신이 싸울 상대는 그 사람이 아닙니다.
당신이 싸울 상대는 그 사람 안에 있는 악(惡)의 세력입니다.
그러니
그가 상대가 아닌 만큼 그를 미워하거나
그에 대한 미움과 실망을 부질없이 누구에게도 말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싸움 상대가 악의 세력인 만큼
악의 세력과 싸워 이기는 방법을 생각하십시오.
악을 이기는 방법은 오로지 완전한 선(善)입니다.
오로지 완전한 사랑입니다. 오로지 진실뿐입니다.
그리고 철저히 자제된 침묵입니다. 그렇게 싸워야 이길 수 있습니다.
악의 세력과 싸워 이긴 예수님의 방법이 바로 그 방법이었답니다.ㅍ
절대,
당신을 비난하고 욕하며 미워하는 사람과 상대하여 싸우지 마십시오.
그건 적을 모르고 싸우는 꼴입니다. 싸움을 부추긴 장본인은 멀쩡히 놔두고
엉뚱하게 딴 사람과 아웅다웅하는 꼴이 되는 셈입니다.”
미운 사람을 용서하기란 너무도 힘이 듭니다. 용서를 넘어 사랑하기란 불가능해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먼저 길을 알려주셨기에 믿고 따르면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주신다.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마태5,44-46)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원수를 골라서 사랑하라는 말씀도, 원수이기 때문에 사랑하라는 말씀도 아닙니다. 상대가 누구이든 가리지 말고 사랑하라는 말씀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삶에서 만난 억울한 일들을 그저 ‘억울함’으로 안고 살면 그것은 억울한 채로 남아서 슬픈 인생을 만들어 냅니다.”따라서 그것을 넘어서야 합니다. 선인에게나 악인에게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가슴에 담고 행복해야 하겠습니다. ‘돼지는 열 받으면 바비큐’가 된답니다. ‘사람은 열 받으면 쓰러집니다.’ 그리되면 누가 손해입니까? 마음에 화를 담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로멘틱한 사랑을 진정한 사랑으로 착각하고 살기 때문에 사랑한다는 명분으로 서로에게 더 큰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참된 사랑은 커다란 맛을 느끼는데 있지 않고 매사에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이란 한가할 수 없고 한가로운 사랑은 벌서 잘못되었다는 표시인 것입니다(예수의 성녀 데레사). 참된 “사랑에 불타는 영혼은 조금도 피로하지 않고 또 남을 피로하게 만들지도 않습니다”(십자가의 성요한). 따라서 십자의 죽음을 통해 드러난 사랑,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랑에 지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내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눈 밖에 난 사람에게도 마음을 두어야 하고 허물을 안고 있는 상대방을 보면서 바로 나의 숨겨진 연약함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상처를 입힌 미운 사람을 주님의 눈으로 바라보면, 그의 모습이 곧 나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내 안에도 어둠이 도사리고 있으며 언제든지 걸려 넘어질 수 있으니 그는 나를 비추는 거울입니다. 그는 결국 나를 올곧게 살아가게 하는 빛입니다. 따라서 그에게 감사해야 하고 한편으로 그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의 허물은 그의 본래 모습이 아니라 어둠의 세력에 한 순간 이용당한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면서도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23,34) .하고 기도하셨습니다. 우리도 나를 어렵고 힘들게 하는 사람과 마주치게 될 때 오히려 내 마음의 넓이와 깊이를 확인하는 순간으로 받아들이고 그를 위해 사랑으로 기도할 수 있는 시발점으로 삼았으면 좋겠습니다. 미움에는 세월이 약이 아니라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이 약이라는 것을 잊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결코 자만하지 마십시오. 방심하면 한 순간에 어둠의 세력에 지배당하게 될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으로 마칩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참된 정의의 실현을 수반합니다. 죄인들에게 내리시는 하느님의 정의는 우리가 죄악으로부터 해방되도록 양심을 지니게끔 도와주는 용서를 우리에게 계속해서 선사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정의는 용서입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선하신 하느님 아버지의 자녀들인 우리도 서로 용서하기 위하여 하느님의 용서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으로 사랑에 사랑을 더하여 사랑합니다

복음: 마태 5,43-48: 하느님 완전하심 같이 완전하게 되어라
-조욱현신부-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44절) 주님께서는 원수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다. 원수들이 사랑받을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는 아무도 미워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원수를 귀하게 여기라는 말이 아니다. 원수를 미워하는 것은, 우리가 단지 그를 미워하기만 해도, 우리는 그에 대해서보다 우리의 영에 더 큰 해를 입힌다는 것이다. 우리가 원수를 미워해도 그에게는 아무런 해를 입히지 않는다. 그러나 그 미움이 우리를 더 휘저어 놓게 된다. 그러기에 우리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다면, 그 사람보다 우리 자신에게 더 이로운 일을 하는 것이다. 즉 우리 자신을 위해 원수를 사랑하고 자비를 베푸는 것이다.
주님의 법은 모든 법을 뛰어넘는다.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일도 하느님께는 가능하기 때문이다(루카 18,27 참조). 주님께서는 사랑하라고만 이르시지 않고 기도하라고도 하신다. 이것은 원수에 대한 최고의 정점이다.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미워하지 않고 사랑하기까지 하는 것이며 그런 사람에게 선을 베풀라고 하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를 위해 하느님께 기도해 주라고 하신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자세가 어디까지 가야 하는지를 확실히 알 수 있다.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45절). 그러므로 그분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아드님께서 주신 계명을 지킬 때만이 가능하다. 이 자녀들은 아드님과 함께 공동 상속자가 될 것이라 바오로 사도는 말하고 있다.
주님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주신다.”(45절) 아드님을 통해 자녀로 부르시는 것은 우리가 당신과 닮은 모습이 되도록 하시려는 것이다. 해와 비는 바로 당신의 가르침이다. 이 가르침은 선인에게나 악인에게나 분명히 드러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가르침을 따라 당신의 자녀가 되고 공동 상속자가 되게 하신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46절) 친구를 사랑하는 삶은 하느님 때문이 아니라 자기 때문에 친구를 사랑하는 것이므로 대단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자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 때문에 사랑한다. 이때 그는 큰 보물을 지닌 사람이 된다. 자기 본능을 거슬러 행동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친구를 사랑하며 악을 피하고 원수를 사랑함으로써 의로움을 지니라고,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48절) 하신다. 하느님의 상속자는 행실로써 하느님을 닮아야 한다. 우리가 아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완전한 사랑이라는 선행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알려주셨다. 이런 사랑은 믿지 않는 이들과 죄인들 사이에서도 흔하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가 우리를 사랑하는 이들만 아니라 원수까지도 사랑함으로써 복음적인 사랑의 법으로 인간적 사랑을 넘어서길 바라신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아버지의 선하심을 본받을 수 있을 것이다.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 48)
-한상우신부-
새로운 삶으로
불리움 받은
우리들이다.
완전한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불완전한
우리들을
구원하신다.
완전하신
아버지
하느님의
은총을 믿는
우리들이다.
완전한 사람은
회개로
하느님께
돌아가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버리고
비우고
이루어나가는
사람들이다.
이와같이
사람에서
출발하는
완전함의
여정이다.
불완전한
사람이기에
완전한
하느님 사랑이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다.
완전하신
하느님께서는
잃어버린
소중한 것을
되찾아주신다.
바르고
진실되고
참된 것이
완전한 것이다.
평범한 것이
완전하고
위대한 것이다.
하느님만을
바란다.
우리 힘이
아니라
완전하신
하느님의
힘이다.
하느님께
초점을
맞춘다.
하느님의
온전한
사랑속에
살고있는
우리들 삶이다.
완전하신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기에
완전한 사람이
될 수 있다.
사랑으로
완전한 사람은
자신의 삶을
파괴하지 않는다.
우리가 먼저
괜찮은 사람이
되어야한다.
완전하신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
삶이란
완전하신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사람의 여정이다.
새로운 삶이란
완전하신
하느님께서
하시도록
맡겨드리는
새로운 삶이다.
새로운 삶은
기본으로
돌아간다.
단순하고
기본적인 것이
완전한 하느님의
은총임을 믿는다.
완전한 사람은
감사의 여정을
걸어가는
사람이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아버지의 자녀다움을 이야기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마태 5,45)
하느님 아버지는 모든 이에게 공평하십니다. 아웅다웅 도토리 키재기를 하며 차별과 갑질을 일삼는 인간의 눈에는 낯설게 보일지 몰라도, 아버지께는 당시의 모든 피조물이 그저 사랑스럽고 귀할 뿐입니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8)
누구도 가리지 않고 품으시는 아버지는 그래서 완전하십니다. 그분 마음속에 모든 피조물은 저마다 자기 자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완전함은 아버지의 모상으로 창조된 우리에게도 요구됩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4)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큰 도전이 되는 말씀을 던지십니다. 이는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라는 옛 말씀을 뛰어넘는 가르침입니다.
본능대로 사는 이들에게는 참 어려운 요구이지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를 넘어, 받은 몇 배로 앙갚음해야 직성이 풀리는 이라면 못 들은 체, 귀를 막고 싶을지도 모릅니다. 그만큼 자아와 감정을 역행하는 권고이기 때문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이스라엘 백성과 계약을 맺으신 주님의 선언을 들려줍니다.
"주님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그분 소유의 백성이 되고"(신명 26,18)
"주 너희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분의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시겠다는 것이다."(신명 26,19)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선택하시어 당신의 소유, 당신의 거룩한 백성으로 삼으십니다. 그런데 이 선택과 계약의 수혜자는 철저히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하느님께서 한 백성의 주인이 되셨다고 해서 그분께 이롭거나 득이 될 일은 없으니까요.
이스라엘은 이 계약을 유지하기 위해 "그분의 길을 따라 걷고 그분의 규정과 계명과 법규들을 지키며 그분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낱낱의 문자에 코를 박고 살라는 의미가 아니라 이런 실천이 한 영혼을 차츰 하느님으로 물들어 가게 해주기 때문이지요. 인간에게 주어진 모든 법규와 규정과 계명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으로 방향지워져 있으니까요.
원수까지도 사랑하고 박해자를 위해 기도하는 행위는 하느님의 소유인 거룩한 백성이 사는 방식입니다. 예수님도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박해자들을 위해 용서의 기도를 바치셨지요. 교회 역사 안에는 인간 본성만으로 어려운 이 무모한 사랑에 수많은 증거자가 몸을 던져 길을 내주었습니다.
살면서 밉고 서운한 사람이 하나도 없고, 박해와 공격의 대상이 된 적이 없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현실은 그리 만만치 않습니다. 마냥 피할 수도 덮어만 둘 수도 없는 아픈 인연들이 인생길 갈피 곳곳에 남아 있을 수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오늘 예수님께서, 잘해 주는 이에게만 잘하지 말고, 또 좋아하는 이만 축복하지 말고 한번 담을 성큼 뛰어 넘어보라고 초대하십니다. 우리 미움과 분노 안에 갇혀 있던 이를 풀어 주어 가게 하라고, 그러다 보면 결국 우리 자신이 자유와 해방을 얻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극단적으로 원수나 박해자까지는 아니어도, 내가 사랑하기 어렵고 축복해 주기 망설여지는 이들을 마음에 품고 주님 앞에 머무르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사순 제2주일을 준비하며, 완전하신 아버지를 닮아가는 자녀로서 자아와 감정의 경계를 넘는 역설적 사랑에 몸을 던져보시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이처럼 쉽지 않고 만만치 않은 사랑의 길을 주님만 믿고 따라가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기도는 사랑의 물꼬
-김찬선신부-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오늘 주님은 “그래야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그러기 전에는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가 아니고,
자녀가 됐다가도 그러지 않으면 하느님의 자녀가 아니라는 말씀인가요?
우선 하느님의 자녀가 아닌 사람이 없다는 것을 전제해야 할 것입니다.
설혹 누가 자기는 하느님의 자녀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그가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니 하느님의 자녀인 것이니까요.
그러니까 이 말씀은 <하느님의 자녀다움>, 정체성과 관련된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라는 정체의식이 있는 사람인가,
하느님의 자녀로서 그답게 살아가려고 하는 사람인가와 관련된 거지요.
사실 너무도 많은 사람이 자기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정체성 없이 살고,
그리스도교 신자라는 사람들도 인구 조사할 때나 자녀임을 생각하고,
조금 나은 신자라도 주일미사에 가서나 하느님의 자녀임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설사 하느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은 얼마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하느님 자녀답게 살아야겠다는 의식이 없이 사는 사람이 대다수이고,
자녀답게 살려는 의식이 있더라도 잘못 알고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자녀답게 사는 것을 주일 미사에 빠지지 않는 정도로 알고 있고,
교무금이나 교회 의무를 다하는 것으로 자녀답게 산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믿지만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고,
하느님을 사랑한다지만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며,
이웃을 사랑하다지만 원수는 사랑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면서 자녀로서 해야 할 것은 다 하며 산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주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과
박해자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하느님의 자녀의 기준이라고.
그러니 아직 원수를 사랑하지 못하면 하느님의 자녀가 못된 것이겠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런 것입니까?
제 생각에 원수를 사랑치 못하는 것과
원수를 사랑치 않는 것은 구분해야 하지 않을까요?
원수를 사랑하려고 하는데도 못하는 것은
사랑치 않는 게 아니라 사랑에 발을 담근 것이며
다만 완전한 사랑에 아직 도달하지 못한 것일 뿐입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우리 사랑의 차이가 이것입니다.
우리도 사랑을 하지만 아직 완전한 사랑에 이르지 못했고,
십자가의 주님처럼 원수를 사랑하는 데까지 미치지는 못했습니다.
제가 “아직”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이 말은 언젠가 우리도
완전한 사랑에 도달해야 하고, 도달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오늘 주님께서도 우리를 격려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
어떻게 이 하느님의 완전한 사랑에 도달할 수 있을까요?
불가능한 것을 가능한 것인 양 말씀하시는 것은 아닐까요?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원수를 위해서 기도를 하다 보면 하느님 사랑이 들어올 것입니다.
기도란 사랑의 물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원수, 박해자까지 사랑하려는 의지를 가지기만 하면 되고
사랑의 의지를 가지고 기도를 하면 터진 사랑의 물꼬를 통해
우리 안으로 들어온 하느님 사랑이 원수를 사랑할 수 있게 할 것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마태오 5,4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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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나의 기도가 가장 필요한 사람이 누구일까요?
또 오늘, 대체 누가 나의 사랑이 가장 필요한 사람일까요?
지금 나를 가장 힘들어 하는 사람, 또 내가 가장 힘들어 하는 사람, 바로 그 사람이 아닐까요?
친구가 아닌 원수를 사랑할 때라야, 의로움을 행하게 될 것입니다.
악을 피하는 것을 넘어 선을 행할 때라야, 비로소 완전해지는 까닭입니다.
-이영근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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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을 이기는 방법은 오로지 완전한 선(善)입니다.
오로지 완전한 사랑입니다. 오로지 진실뿐입니다.
그리고 철저히 자제된 침묵입니다. 그렇게 싸워야 이길 수 있습니다.
악의 세력과 싸워 이긴 예수님의 방법이 바로 그 방법이었답니다.ㅍ
절대,
당신을 비난하고 욕하며 미워하는 사람과 상대하여 싸우지 마십시오.
그건 적을 모르고 싸우는 꼴입니다. 싸움을 부추긴 장본인은 멀쩡히 놔두고
엉뚱하게 딴 사람과 아웅다웅하는 꼴이 되는 셈입니다.”
선인에게나 악인에게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가슴에 담고 행복해야 하겠습니다. ‘돼지는 열 받으면 바비큐’가 된답니다. ‘사람은 열 받으면 쓰러집니다.’ 그리되면 누가 손해입니까? 마음에 화를 담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반영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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