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1월 22일 그리스도왕 대축일(성서 주간)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
(마태오 25,31-46)
'Amen, I say to you,
whatever you did
for one of the least brothers of mine,
you did for m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허규신부-
우리는 연중 시기의 마지막 주일인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에 최후 심판에 관한 복음을 듣습니다. 마지막 날에 “사람의 아들”께서는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사람들을 심판하십니다. 그리하여 의인들은 세상 창조 때부터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이미 창조와 함께 시작된 하느님의 구원이 완성되는 모습입니다.
이와 반대로 악한 이들은 영원한 불 속에서 벌을 받습니다. 그러나 의인이나 악인이나 모두 자신들이 “언제” 예수님을 위하여 무엇인가를 하였는지 또는 하지 않았는지 묻습니다. 이 질문에 예수님의 답은 명확합니다. 기준은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마태오 복음은 예수님의 수난 전에 마지막으로 최후 심판의 내용을 전합니다. 이 말씀은 마태오 복음의 전체적인 구도와도 잘 어울립니다. 마태오는 예수님께서 공생활 초기에 하신 산상 설교를 통하여 가르침을 요약합니다(5-7장 참조). 그리고 산상 설교의 마지막 가르침에서,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슬기로운 사람과 같다고 하며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을 강조합니다(7,24 참조). 최후 심판에서 강조되는 것 또한 말씀을 실행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가장 작은 이들에게 말씀을 실행하였는지가 심판의 기준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과 구분되어 있지 않습니다. 심판은 마지막 날에 있겠지만 지금 여기에서 말씀을 실행하며 사는지 아닌지가 심판의 기준이 됩니다. 따라서 최후 심판에 관한 말씀은 지금 여기서의 삶을 생각하게 합니다. 결국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은 가르침을 실행에 옮기는 데에서 시작됩니다.
나눔과 사랑의 실천
-키엣 대주교-
신약에서는 나눔과 자비의 정신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나눔과 공정(공평함)은 더 높은 수준의 정의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나누어 주셨는데 부족한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어느 누군가가 너무 많은 것을 가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회적 격차가 불안의 근원이 되고 있습니다.
나눔은 선택이 아니라 의무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은 주님의 자녀이기에 우린 형제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세상의 가난한 사람들과 하나가 되셨습니다. 그들을 돕는 사람은 바로 주님을 돕는 사람이며, 나눔을 실천하는 사람은 바로 주님의 나눔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으로 주님 자비의 사랑, 그 가치를 높이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최후의 심판을 볼 수 있습니다.
나를 지켜주었던 세상의 모든 물질들과 나를 포장했던 명성과 재산들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에게 덮여 있던 화려한 포장, 이 세상의 가치들이 벗겨지면 세상 모든 사람은 똑 같이 주님의 자녀일 뿐입니다. 모두가 동등한 자격으로 주님의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순간입니다. 주님 앞에서 세상에서 행한 일을 밝혀야 합니다. 감추고 싶은 모든 것들도 낱낱이 드러날 것입니다.
세상에서 불의로 힘든 생을 살았다면 최후의 심판에서는 완벽한 공평함으로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지금 이 세상에서처럼 불의로 심판관을 유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나라로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기회는 지금 이 세상입니다.
새로운 세상은 예기치 않게 다가올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부터 준비해야 합니다. 삶은 그리 길지 않습니다. 내일로 미룰 수 없습니다. 영원한 나라로 들어갈 수 있는 기회가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영원한 나라로 들어갈 수 있는 답을 알려 주셨습니다.
바로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입니다.
굶주림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른 사람에게 물을 주고, 헐 벗은 사람에게 옷을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을 나누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약한 사람, 감옥에 갇힌 사람을 찾아보는 것입니다. 힘들고 고통받는 사람에게 관심과 사랑을 나누는 것 또한 주님의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는 일입니다. 어렵지 않습니다. 내 옆을 돌아보면 보일 것입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을 하는 것이 사람의 나눔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지금 바로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십시오.
기회는 이 세상이 끝남과 동시에 사라집니다. 그러므로 서둘러 사랑의 율법을 실천해야 기회를 잃지 않을 것입니다.
사랑의 왕이신 주님, 주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사랑을 실천하는 법을 알고 그것을 행할 수 있게 인도하여주소서. 아멘.

1. 영원한 나라로 들어갈 수 있는 기회는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그 기회는 오직 이 세상에서 이루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순간 무엇을 해야 주님의 영원한 나라로 들어갈 수 있는 지 생각해 보십시오.
2. 모든 사람은 주님의 정의를 실천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 의무를 실천하고 있습니까?
3. 주님 앞에 섰을 때 나는 무엇을 말할 수 있는 지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그리스도를 참된 왕으로 모시자
-임상만신부-
한해의 마지막 주일인 ‘그리스도왕 대축일’이다. 아직은 코로나 19로 인한 힘든 상황이 종결될 기미가 보이진 않지만, 그럼에도 이 주일을 기점으로 우리는 주님의 섭리 안에서 새로운 희망과 기다림의 시간인 ‘대림 시기’를 맞이하게 된다.
‘그리스도왕 대축일’은 1925년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제정됐다. 세상에 만연하는 무신론과 세속주의 속에서 예수님을 참된 왕으로 모시고 그리스도의 통치가 개인과 가정 그리고 온 우주에까지 두루 미치고 있음을 드러내는 희망과 기쁨의 축일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한 번 하느님의 손길이 더 이상 미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작금의 현실 속에서도 이 세상에 곧 펼쳐질 그리스도의 재림과 더불어 시작될 하느님 나라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야 하겠다.
사실 세상이 원하는왕은백성들의실제적인필요적 요소들에 대한 해결능력을가진 권력자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유다 백성들도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을 배불리 먹게 해주신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려고 했을 것이다.(요한 6,15) 이런 까닭에 이세상의왕들은 하나같이 백성들이 원하는 먹고 마시는 기본적 욕구들을 해결해주겠다고약속한다.그러나예수님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태4,4) 그리고“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요한18,36)라고 천명하시며, 세상의 왕권이 내미는 달콤한 세속주의와 물신주의에 빠지지 말고 곧 다가올 하느님 나라를 깨어 준비하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들 중에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세상의 구원자로서 믿기보다는 단지 당장 먹을 빵을 많게 하신 오병이어의 기적만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마치 더 가지고 더 누리게 되는 것이 신앙의 열매이고 믿음생활의 근본적인 조건이라고 생각으로 예수님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이 먹고도 죽어갈 빵의문제나 경제문제 등의 해결사가 아니라 인간을 본질적으로 죄에서 해방시켜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이끄시는 왕 중의 왕, ‘그리스도 왕’이시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예수님은 ‘최후 심판’이라는 오늘 복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더 이상 세상 것에 대한 욕심이 아니라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따라 새롭게 변할 것을 요구하신다. 가진 자들과 권력자들이 가난한 자들과 미천한 자들에 대해 온갖 갑질을 해대는 세상에서 이제는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앞장서 인간 차별을 없애고 연민과 보살핌으로 그 사랑을 실천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 순간에도 심판의 오른편과 왼편 사이에 끼어있는 경계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또한, 예수님을 믿으며 살면서도 매 순간 더 많이 얻어 누릴 것만 생각하며 살고 있는 나약한 존재들임을 고백하게 된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나눔과 내어줌에 특별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 더 많이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야 한다. 마지막 심판 날에 ‘그리스도 왕’께서 우리도 당신 오른편에 설 수 있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왕이 되어주심에 감사드리며, ‘모든 이에게 모든 것(omnibus omnia)’이 되신 예수님께서 세상에 다시 오실 때 우리 모두 이 축복의 말씀을 듣도록 변화된 삶을 살아야겠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마태 25,34)

기장 작은 형제를 사랑하는 것
-김창선-
전례력으로 마지막 주일인 오늘은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왕(마태 28,18)이시고, 우리를 생명의 길로 이끄시는 ‘착한 목자’(요한 10,11)이십니다. 우리는 그분의 양 떼입니다.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순례길에 함께하는 가장 작은 형제들에게 우리는 사랑의 디딤돌이 되는 기쁨을 누립니다.
또한 금주는 성서주간입니다. 성서는 진리를 가르치는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라틴어 성경(Vulgata)의 저자인 예로니모 성인은 “성서를 모르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네 복음서의 중심에 계십니다. 주님의 ‘말씀’과 교회의 가르침을 경청하여 마음의 등불을 밝히고, 말씀의 씨앗을 나누면 좋은 열매를 맺습니다.
기원전 6세기 예언자인 에제키엘은 주님께서 목자처럼 당신의 양 떼를 찾아 돌보시고 양과 염소 사이의 시비를 가리신다고 전합니다(제1독서). 잃어버린 양을 찾아내고 흩어진 양을 불러 모으며, 부러진 양은 싸매주고 아픈 양은 원기를 돋우십니다. 기름지고 힘센 양은 없애고 어린 양들을 골고루 먹이십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가정에서 최초로 기른 동물은 양과 염소입니다. 오랜 세월 동안 유목 생활을 해 왔기에 양의 성별과 나이에 따라 구분하는 히브리어가 많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인도로 약속의 땅을 찾아왔고, 이집트에서 탈출하여 40년간 광야 생활을 했습니다. 침묵 중에 고통을 견디는 양들에 감명을 받고 사람을 양에 비유합니다.
양의 특성을 알면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화답송, 시편 23편).”라고 하느님께 대한 절대적 신뢰를 드러내 찬미합니다. 양은 초식성 동물로 되새김질을 합니다. 두 눈의 시야가 좁아 떼 지어 다니고, 방향감각이 없어 흩어지기 쉽습니다. 성질은 온순하나 고집이 세면서도 겁이 많습니다. 몸의 70%가 물인 양은 샘물을 찾습니다. 푸른 풀밭에서 쉬게 하고, 목마르면 물가로 이끌어 새 생기를 돋우어주며 바른길로 이끌어주시는 주님이 계시기에 어둠의 골짜기를 간다 한들 어찌 두렵겠습니까?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께서는 우주 차원에서 역사의 시작이요 마침이시고, ‘모든 것 안에 모든 것’이 되실 창조의 힘과 생명의 주인이심을 밝힙니다.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첫 인간 아담은 흙에서 와 흙으로 돌아갔는데, 그를 통해 죄와 죽음이 세상에 들어왔습니다. 새 아담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아납니다.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께서 영광에 싸여 천사와 함께 재림하실 때 죽은 이들의 부활 순서를 들려줍니다. 첫째는 죽은 이들의 맏물이신 그리스도이시고, 다음은 그분께 속한 이들이며, 마지막은 종말입니다. 종말에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것을 굴복시켜 ‘새 하늘 새 땅’을 성부께 넘겨 드리는 역사의 심판자이십니다.
오늘의 복음은 마태오에 나오는 독특한 담화로 그리스도의 재림(Parousia)과 최후의 심판에 관한 내용입니다. 마지막 날에 ‘사람의 아들’(마태 25,31; 요한 3,15)께서는 옥좌에 앉으시어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당신 오른쪽에 양들을, 왼쪽에 염소들을 세울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의인과 악인을 양과 염소로 비유하십니다. 양은 침묵 중에 고통을 참는 사랑의 표지이고, 염소는 절제하지 않는 선정적 동물이기에 수치의 표지입니다.
주님께서는 굶주린, 목마른, 집 없는, 헐벗은, 병든, 그리고 옥살이하는 가장 작은 이들을 ‘내 형제’라고 하시며,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말씀하십니다. 악조건에서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도 여기에 포함됩니다. 주님을 섬기듯 가장 작은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심판의 기준입니다.
삼위일체 하느님께서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변함없는 사랑과 영원한 생명을 위해 활동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양들을 돌보시고, 그들을 위하여 당신 목숨을 바치신 ‘참된 목자’이십니다. 교회는 양우리이며 그리스도께서는 그 유일한 문이십니다(요한 10,9; 14,6).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문을 지키는 이는 베드로가 아니라 가난한 사람입니다.
오늘날 물질문명과 가치혼돈의 시대에 많은 이들이 이기와 탐욕, 고통과 불안, 불의와 분열 속에 흔들리는 삶을 삽니다. 코로나바이러스19 감염위기로 비대면의 수난을 겪고 있습니다. 하느님만을 믿고 살기엔 불안한 사람들은 재물, 권력, 명예, 인맥, 집착 등을 위안으로 삼는 것일까요? 알고 보면 이 모두가 우상인데 말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가장 작은 형제들에게 자선과 기부와 시간을 많이 보냅니까? 말과 행동만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은 어디에 둡니까? 깨어 기도하는 가운데 사랑의 계명을 따릅니다. 주님의 축복을 받은 자녀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삶의 중심은 미사입니다. 살아계신 하느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생명의 양식과 구원의 음료로 마련된 성찬에 감사드립니다. 하느님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고,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청합니다.

갑과 을
-김상우신부-
언젠가부터 갑을관계가 사람들 입에 자주 오르내립니 다. 보통 계약서에서 주도권을 지닌 쪽을 ‘갑’, 반대쪽을 ‘을’이라고 기재함에서 유래합니다. 갑을관계 문화는 위아 래를 철저히 구분해, ‘갑’은 자신보다 아랫사람이라고 판단 되는 ‘을’에게 무례하게 대하며 ‘을’은 ‘갑’의 권위에 맹목적 으로 복종하고 맞춰야 한다는 문화입니다. ‘갑질’과 반대되 는 ‘을질’도 존재합니다. ‘을’이 상대적 약자임을 역이용하 여 ‘갑’의 정당한 권리 행사를 방해하고 ‘갑’을 곤경에 처하 게 하는 경우입니다. 그런데 이번 주일 성경말씀에서 갑을 관계로 잘못 이해될 수 있는 부분이 나옵니다. 제1독서(에제 34,11-12.15-17)에서 하느님께서는 에제키엘 예언자를 통해 “나 이제 양과 양 사이, 숫양과 숫염소 사 이의 시비를 가리겠다”(에제 34,17)고 말씀하십니다. 복음(마태 25,31-46)에서 예수님께서는 “모든 민족들이 사람의 아들 앞 으로 모일 터인데, 그는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그들 을 가를 것이다. 그렇게 하여 양들은 자기 오른쪽에, 염소 들은 왼쪽에 세울 것이다”(마태 25,32-33)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은 그리스도왕 대축일입니다. 이 축일을 기점으로 전례력의 한 해를 마무리하는 교회는 최후 심판에 관한 말 씀을 경청합니다. 최후 심판의 핵심은 양과 염소를 가르 는 기준입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 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 태 25,40)와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마태 25,45)를 기준으로 하느님의 마지막 심판이 내려질 것입니 다. 각자에게 주어진 인생 여정을 어떻게 걸어왔는지에 따 라,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인 ‘을’을 어떻게 대했느 냐에 따라 최후 심판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런데 굳이 갑을관계로 따지자면, 예수님이야말로 참 된 ‘을’로 사셨던 분입니다. 제2독서(1코린 15,20-26.28)에서 “아드님께서도 모든 것이 당신께 굴복할 때에는, 당신께 모든 것을 굴복시켜 주신 분께 굴복하실 것입니다. 그리하 여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실 것입니다” (1코린 15,28)라고 바오로 사도는 선포합니다. 우리를 위해 죄 없으신 분이 누명을 뒤집어쓰고 돌아가셨기에, 십자가 죽 음은 우리를 향한 예수님 사랑의 절정입니다. 영광스러운 부활은 그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세상에 밝혀주었습 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참된 ‘을’로 사셨던 그리스도 를 본받으며 살아야 합니다. 물론 ‘을’로 산다는 것은 자존 감을 떨어뜨립니다. ‘을’로 산다는 것은 억울합니다. ‘을’로 산다는 것은 고통스럽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처럼, 예수님 을 위해, 예수님과 함께 ‘을’로 산다는 것은 기쁨이며 희망 이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여기에서 ‘갑’으로 살고 계십니까? 아니면 ‘을’로 살고 계십니까?

누가 진찌 왕인가?
여한준신부-
이스라엘 백성들은 430년 동안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했습니다. 그토록 긴 세월을 이집트 파라오를 자신 의 왕으로 섬기며 산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울부짖음을 들으신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탈출시켜 자유를 주시고, 시나이산에서의 계약을 통해 당신 백성으로 삼으십니다. 그리고 40년간 광야의 여정을 보내 며,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을 왕으로 모시고 그분만을 섬기는 백성으로 서서히 변해갔습니다. 하느님이 참 된 왕이심을 알고 그분의 말씀(십계명과 법규정)을 지키며 그분에게 참된 예배를 드리는 거룩한 하느님의 백 성으로 살아갔습니다. 그리스도 왕 대축일! 오늘 복음 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세상 종말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말씀해 주시는 내용입니다. 과연 그날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먼저, ‘진짜 왕이 누구인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렇게 드러난 진짜 왕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동시에 ‘나는 평생 누구를 왕으로 섬기며 살아왔는지’ 명백하게 밝혀집니 다. 예수님을 왕으로 섬긴 사람들은 세상 창조 때부터 준비된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여 영원한 생명을 누리 게 되고, 그렇지 않고 진짜 왕이 아닌 가짜 왕을 섬긴 사람들, 자기 자신을 왕이라 착각하거나 세상의 권력 과 돈과 명예를 섬기며 살았던 사람은 악마와 그 부하들을 위하여 준비된 불 속으로 들어가 영원한 벌을 받 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이 그날에 명명백백히 밝혀집니다. 이것이 진짜 왕을 섬긴 사람과 가짜 왕을 섬긴 사람 의 차이입니다. 우리는 오늘부터 한 주간의 ‘성서 주간’을 보내게 됩니다. 전례력으로 한 해를 마감하며, 지난 시간 하느님 의 말씀에 얼마나 충실했는지를 되돌아보기 위해서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은 우리를 세상과 물질과 죄와 이기심이라는 노예로부터 탈출시켜 하느님의 참된 자녀로 살아가도록 이끌어주는 최고의 안내자입니 다. 성경의 안내를 따라가면 누가 참된 왕인지, 그래서 내가 누구를 왕으로 모시고 섬겨야 하는지 알게 됩니 다. 성서 주간을 살아가며 우리도 하느님을 왕으로 섬기는 그분의 백성으로 서서히 변해가면 좋겠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왕은 누구입니까?

우리가 꿈꾸는 왕
-이정근신부-
이스라엘 백성들은 430년 동안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했습니다. 그토록 긴 세월을 이집트 파라오를 자신 의 왕으로 섬기며 산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울부짖음을 들으신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탈출시켜 자유를 주시고, 시나이산에서의 계약을 통해 당신 백성으로 삼으십니다. 그리고 40년간 광야의 여정을 보내 며,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을 왕으로 모시고 그분만을 섬기는 백성으로 서서히 변해갔습니다. 하느님이 참 된 왕이심을 알고 그분의 말씀(십계명과 법규정)을 지키며 그분에게 참된 예배를 드리는 거룩한 하느님의 백 성으로 살아갔습니다. 그리스도 왕 대축일! 오늘 복음 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세상 종말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말씀해 주시는 내용입니다. 과연 그날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먼저, ‘진짜 왕이 누구인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렇게 드러난 진짜 왕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동시에 ‘나는 평생 누구를 왕으로 섬기며 살아왔는지’ 명백하게 밝혀집니 다. 예수님을 왕으로 섬긴 사람들은 세상 창조 때부터 준비된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여 영원한 생명을 누리 게 되고, 그렇지 않고 진짜 왕이 아닌 가짜 왕을 섬긴 사람들, 자기 자신을 왕이라 착각하거나 세상의 권력 과 돈과 명예를 섬기며 살았던 사람은 악마와 그 부하들을 위하여 준비된 불 속으로 들어가 영원한 벌을 받 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이 그날에 명명백백히 밝혀집니다. 이것이 진짜 왕을 섬긴 사람과 가짜 왕을 섬긴 사람 의 차이입니다. 우리는 오늘부터 한 주간의 ‘성서 주간’을 보내게 됩니다. 전례력으로 한 해를 마감하며, 지난 시간 하느님 의 말씀에 얼마나 충실했는지를 되돌아보기 위해서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은 우리를 세상과 물질과 죄와 이기심이라는 노예로부터 탈출시켜 하느님의 참된 자녀로 살아가도록 이끌어주는 최고의 안내자입니 다. 성경의 안내를 따라가면 누가 참된 왕인지, 그래서 내가 누구를 왕으로 모시고 섬겨야 하는지 알게 됩니 다. 성서 주간을 살아가며 우리도 하느님을 왕으로 섬기는 그분의 백성으로 서서히 변해가면 좋겠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왕은 누구입니까?

믿고 희망하며 늘 사랑하고 더 사랑합시다!
-장재봉신부-
전례력의 막바지 주일, 왕이신 예수님의 사랑을 온 세상에 선포하 며 기쁨을 누립니다. 그런데 올해 는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는 것 같 습니다. 기쁨을 훼방하는 여건이 참 많으니까요. 설상가상 ‘사랑의 해’ 플래카드가 치워질 텐데 그마 저 아쉽습니다. 세 해 동안 믿음을 키우고 희망을 탄탄히 하여 충만한 사랑을 살고자 다짐했던 교구민들 의 설렘이 기억나기에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일을 미루고 뒷걸음을 쳐 야 했던 아픔이 아직도 고스란하니 그렇습니다. 뜻하지 않았던 ‘거리두기’는 이웃 과의 만남을 단절시켰고 ‘비대면’이 라는 생경한 상황에서 우리는 사랑 할 기회를 접어야 했습니다. 그럼에 도 저는 믿습니다. 이 스산한 환경 이 더 많은 분들께 더 큰 영혼의 갈 증을 발견하게 했으리라고 말입니 다. 외부적 활동에 제약을 받아야 했던 만큼 주님과의 해후는 더 잦았 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사랑은 결코 슬로건에 맞추어 솟구쳤다 사그라 드는 그런 시시한 것이 아니니 말입 니다. 그러기에 ‘사랑의 해’에 더 많 은 사랑을 실천하지 못했던 아쉬움 과 사랑을 제대로 살아내지 못했던 회한까지도 축적된 사랑의 동력이 될 것이라 믿어 봅니다. 성경은 세상의 위기가 하느님께 서 “내버려 두시어”(로마 1,24) 외면하 는 때일 수 있다고 기록합니다. 세 상이 힘들어지는 것은 곧 그리스도 인들의 삶이 재정비되어야 하는 시 기라는 의미로 읽어집니다. 삶에서 가장 우선되던 것을 내려놓는 결단 을 요구하는 다급한 상황이라 싶습 니다. 왕이신 예수님을 뵙고 영광과 찬미를 올리는 오늘, 진정 왕이신 예수님의 뜻을 제대로 살아냈는지 를 세밀히 따져보는 지혜를 요구하 시는 것이라 새기게 됩니다. 과연 어떤 마음으로 이 대단하고 의미 깊은 주일을 맞으시는지요? 그동안 예수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믿음생활을 하셨는지요? 그리스도 예수님을 왕으로 모신 충신의 자세 를 진정 살으셨는지요? 주님의 백 성다운 품위를 지키는 하느님 자녀 에 걸맞은 삶을 살아내셨는지요? 이 작은 인간이 하느님 사랑을 품 어 주님의 일을 할 수 있는 것입니 다. 그러니 은혜입니다. 당신처럼 믿고 희망하며 사랑하는 삶을 온전 히 살아낼 수 있을 터이니, 감격입 니다. 우리의 새해가 왕이신 예수님의 어명에 충실함으로 하느님께 기쁨 이기를, 소원합니다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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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책에서 읽은 구절입니다. 가슴을 꽝 때리는 듯한 충격으로 와닿는 구절이었습니다. 우리는 축하할 일은 계속하지 않고, 또 부끄러워 숨기고 싶은 것은 그만두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알코올 중독자 한 명을 알고 있습니다. 물론 지금은 술을 완전히 끊고서 모범적으로 살고 있지만, 예전에는 술만 마셨다 하면 끝장을 보듯이 마셔대서 직장에서 쫓겨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글쎄 일주일 내내 술을 마신 적도 있다고 합니다. 병원에 실려 갈 때까지 술을 마신 것이지요). 그는 단주 모임을 가면서 자신의 생활을 변화시킬 수 있었습니다. 술 마시는 부끄러움을 더는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술 없이는 못 살 것 같았지만, 지금은 술 없이 잘살고 있습니다.
축하할 것과 숨길 것을, 그리고 계속해야 할 것과 그만둘 것을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새로운 세계, 기쁨과 행복으로 나아가는 세계를 찾을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구분 속에서 축하할 것과 계속해야 할 것을 행동하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의 마지막 시간에 주님 앞에 섰을 때 떳떳할 수 있는 이유가 되지 않을까요? 만약 숨길 것을 계속하고, 축하할 것을 그만두는 삶을 산다면 주님 앞에 감히 설 수도 없을 것입니다.
전례력으로 연중 시기의 마지막 주일로,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입니다. 이 축일 이름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인간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임금)이심을 기리는 날입니다. 왕이신 예수님께서 마지막 순간에 어떻게 하실 것인지를 오늘 복음을 통해 분명히 보여 주십니다.
우리의 생각을 아시고, 인간이 하는 일을 예견하시며 공정하게 판결할 줄 아시는 분께서는 목자가 염소와 양을 가르듯이 각 사람의 잘잘못에 따라 그들을 갈라놓으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양이 의로운 사람들을 나타내는 까닭은 그들이 아무도 해치지 않고 온유하며 누구에게 해를 입어도 저항하지 않고 견디는 인내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을 염소라고 표현하십니다. 변덕, 자만심, 호전성 같은 악덕이 염소의 특징이기 때문입니다.
양의 모습을 갖춰야 한다는 것입니다. 양의 모습을 갖추고 있는 것을 축하하고, 그 모습을 계속 간직해야 합니다. 온유와 인내, 그리고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삶을 통해 우리는 왕이신 주님께 기쁘게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주지 않은 것이다.”라는 주님 말씀을 새기며, 계속해서 행해야 할 일을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큰 축하를 받을 것입니다.


여행은 혼자의 여행이 진짜라고 생각합니다. 누구와 함께 가면 솔직히 여행을 온전히 느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단순히 ‘누구와의 여행’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혼자 가면 여형 전체를 즐길 수가 있습니다. 자연을 볼 수 있고, 맑고 깨끗하며 신선한 공기도 마음껏 흡입할 수 있습니다.
누구와 함께 하는 여행도 분명히 의미가 있습니다. 하지만 어디에 목적을 두고 있는지가 명확해야 합니다. 만약 자연 자체를 느끼고자 한다면 무조건 혼자 여행을 해야 할 것입니다. 실제로 이런 적이 있습니다.
어느 형제님이 계셨는데, 이 형제님은 주변을 밝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항상 이분 주위는 시끌벅적합니다. 쉴 새 없이 떠들기 때문이지요. 이런 시끄러움 가운데, 일행 중 어떤 분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자연 좀 조용히 즐깁시다.”
함께하는 여행에서 조용히 자연을 즐길 수 있다고 생각한 자체가 잘못이 아닐까요?
이렇게 목적이 중요합니다. 주님과 우리의 관계도 이 측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 나아가는 목적이 분명합니까? 그 목적이 분명해야지 내 삶의 방향을 제대로 잡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건 '자기 정체성'이지 바보야!
-전삼용신부-
오늘은 한 해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그리고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입니다. 왜 교회에서 마지막 주일에 그리스도왕 대축일을 지낼까요? 마지막에 그리스도께서 왕이심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왕이시라면 우리는 무엇일까요? 그분의 백성이나 신하들이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해도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사시니 우리는 그분의 나라가 됩니다. 이렇게 생기는 정체성이 나를 만들고, 그 나를 만든 정체성에 당연하게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만이 심판을 이기게 만드는 유일한 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심판관으로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십니다. 그때 양과 염소로 나뉘어 있습니다. 양과 염소는 본성의 차이를 말합니다. 태어날 때 본성이 결정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본성은 ‘자기 정체성’,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믿음으로 결정됩니다. 내가 늑대라 믿으면 늑대의 정체성에 당연하게 살 것이고, 사람이라 믿으면 사람으로서 당연한 삶을 살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워낙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기 때문에 우리가 오늘 심판 기준대로 ‘가장 작은 이들을 그리스도처럼 대하기 위해서는 내가 그리스도의 종이 되는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작은 이들을 그리스도처럼 대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나의 정체성에 있다는 것을 내용이 막장인 한 영화를 통해 보고자 합니다. ‘경축! 우리사랑’(2007)입니다.
이야기는 노래방을 함께 운영하는 한 하숙집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봉순씨는 쉰이 된 가정을 책임지는 여자입니다. 남편은 노는 것만 좋아하고 심지어 외도까지 합니다. 딸도 집에서 놀기만 하며 하숙하고 있는 남자와 사귑니다. 무작정 결혼만 하겠다던 딸은 취직이 되어 결혼자금을 벌어오겠다면 집을 나가버립니다. 다 자기 멋대로입니다.
졸지에 헤어지게 된 하숙집 남자 구상은 술에 찌들어갑니다. 이를 불쌍히 여긴 봉순씨는 술 취해 쓰러져있는 구상에게 이상한 감정을 느낍니다. 그리고 그의 아기를 임신하게 됩니다. 남편도 외도 중이라 뭐라 하지 못하고 빨리 딸을 불러들입니다. 그러나 봉순씨의 사랑은 진심입니다. 구상도 봉순씨의 딸보다는 봉순씨를 더 좋아하게 됩니다. 봉순씨는 결국 딸의 애인이었던 구상의 아기를 낳습니다. 그리고 그냥 그렇게 살아간다는 이야기입니다. 가족 중 아무도 자신을 아내나 엄마 취급해 주지 않았기에, 지금 엄마, 아내의 역할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누구도 봉순씨를 뭐라 하지 못합니다. 물론 구상에게 계속 마음이 있는 딸이 엄마에게 울며 이렇게 말하는 장면이 기억에 남습니다.
“엄마가 뭐 이래? 엄마가 뭐 이래!”
이때 봉순은 잠깐 흔들립니다. 그러나 아내이고 엄마이기를 다시 포기하고 구상의 애인이기를 선택합니다.
말도 안 되는 스토리지만 지금까지 남편이 남편답지 않게, 자식이 자식답지 않게 살던 그 가정에서 봉순씨도 아내이고 엄마이기를 포기하고 새롭게 사랑을 시작하는 모습이 전혀 공감되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나는 누구인가?’가 나의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지난번 강론에서 씨돌, 요한, 용현으로 산 분을 소개해 드렸습니다. 그의 삶은 가장 작은 이들을 위한 삶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산 이유를 ‘인간으로서 당연한 일’이라 적었습니다. 그는 끊임없이 인간이란 자기 정체성을 지키려 살아온 것입니다. 그것뿐인데 가장 작은 이들을 위한 삶을 살 수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구원받기 위해 나의 정체성이 아닌 행동만을 바꾸려 하면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처럼 됩니다. 행위만 바꾸려 하면 본성은 안 그러면서 그런 척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예수님은 구원자가 되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우리와 한 몸이 되심으로 당신의 아버지를 우리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이 정체성이 우리 본성을 염소에서 양으로 바꾸고 결국 양으로써 당연한 삶을 살게 해줍니다.
김신조씨도 삶과 죽음 앞에서 ‘나는 누구인가?’를 물었습니다. 그리고 김일성과 북한을 위해 죽는 것을 선택하지 않고 사는 것을 택했습니다. 그리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나는 나!’라는 정체성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이름입니다.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불러서는 안 됩니다. 나는 그리스도라던가, 나는 하느님의 자녀라던가, 나는 하느님의 본성을 입었으니 나도 사랑이라던가의 대답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본성이 나를 하느님의 자녀로서 당연하게 살게 만들고 마지막 날 심판 때 양으로 분류됩니다.
고속도로에서 사고가 나서 차 위에서 발이 끼어 있는 사람을 구급차에 신고만 하고 저는 저 갈 길을 간 적이 있습니다. 만약 우리 가족이었다면 그렇게 바로 떠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혹은 ‘나는 사제다!’라는 생각만 했어도 행동이 달랐을 것입니다. 나의 행동은 나의 정체성에 지배당합니다. 결국, 나와 나의 자녀를 어떻게 성장시키고 싶으냐는 어떤 자기 정체성을 넣어주고 싶으냐는 것에서 결정됩니다. 물론 그 정체성은 진리와 은총, 즉 나의 사랑과 가르침으로 새겨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정체성이 나에게 왕이 되어 나를 지배하게 됩니다. 나의 정체성이 그리스도가 되게 한다면 그것으로 그리스도는 나의 왕이 되십니다. 그리고 그분을 왕으로 여기는 정체성으로 산 사람만이 마지막 심판 때에 양으로 인정받습니다.

-조재형신부-
노자의 도덕경 41장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아주 큰 사각형은 각이 없고, 아주 큰 소리는 들리지 않으며, 아주 큰 형체는 보이지 않고, 아주 큰 그릇은 채우지 못한다.(大方無隅, 大音希聲, 大衆無形, 大器晚成)” 지구는 둥굴지만 사람들은 지구가 둥근지 몰랐었습니다. 사람이 볼 수 없을 만큼 컸기 때문에 몰랐습니다. 사람이 들을 수 있는 소리의 영역이 있습니다. 아주 큰 소리나 아주 작은 소리는 듣지 못합니다. 우리는 우주의 크기를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태양계는 우주에서는 아주 작은 점과 같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모든 물이 바다로 흘러가지만 바다는 넘치는 적이 없습니다. 바다가 넓고 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기만성은 성공의 기준이 아닙니다. 대기만성은 겸손과 아량의 표징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예수님 시대에 사람들은 그 의미를 알지 못하였습니다. 율법학자들은 베들레헴에서 구세주가 태어날 수 없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헤로데는 구세주의 탄생을 경쟁자가 태어난 것으로 알았습니다. 2살 이하의 어린아이를 죽이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도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잘 몰랐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께서 영광의 자리에 오르면 오른쪽과 왼쪽에 앉을 수 있는 자리를 청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면 안 된다고 말했다가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뜻을 찾지 않고 사람의 뜻을 찾는다.’라고 야단맞았습니다. 로마의 총독이었던 빌라도도 예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매달도록 했습니다.
율법을 많이 알았던 사람도 예수님을 몰랐습니다. 나라의 왕도 예수님을 몰랐습니다. 제자들도 예수님을 몰랐습니다. 로마의 총독도 예수님을 몰랐습니다. 예수님은 지식으로 알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능력으로 알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권력으로 알 수 없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았을까요? 밤을 새워 양들을 돌보던 목동들은 예수님의 탄생을 알아보았습니다. 눈이 멀었던 소경은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세관장이었던 자캐오는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막달레나는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백인대장은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가난한 사람, 헐벗은 사람, 병든 사람은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회개한 사람, 겸손한 사람은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기름을 준비한 슬기로운 처녀가 신랑을 기쁘게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갈망이 있는 사람, 꾸준히 기도하는 사람, 영적으로 깨어있는 사람, 회개하는 사람, 가진 것을 나누는 사람은 우주보다 크신 예수님을 볼 수 있었습니다.
캐나다 토론토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가난한 노숙자가 길에서 죽었습니다. 날씨가 너무 추웠기 때문입니다. 조각가는 그 뉴스를 보고 벤치에 누워있는 노숙자의 모습을 만들었습니다. 노숙자는 담요를 덮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특이한 것은 노숙자의 발이었습니다. 발에는 못 자국이 있었습니다. 조각가의 눈에는 길에서 죽었던 노숙자가 예수님처럼 보였습니다. 그리고 토론토 시에 제안했습니다. 그 노숙자가 죽은 자리에 자기가 만든 노숙자의 동상을 세우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토론토 시는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노숙자를 돌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조각가는 뉴욕의 주교좌 성당에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뉴욕의 성당에서도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성당의 외관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조각가는 교황청에 편지를 보냈습니다. 자신이 만든 동상을 로마의 바티칸에 보내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편지는 교황님에게 전달되었습니다. 교황님은 조각가에게 어떤 답장을 하였을까요? 조각가를 바티칸으로 초대하였습니다. 교황님께서 직접 동상을 축성하였습니다. 그리고 동상을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못 자국을 만져보며 기도하였습니다. 사람들은 무심했던 자신을 돌아보았습니다. 가난한 사람, 헐벗은 사람, 아픈 사람을 생각하였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한국의 한 사제도 조각가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작품을 한국에도 보내 줄 수 있는지 물어보았습니다. 조각가는 기쁜 마음으로 동상을 가지고 한국으로 왔습니다. 그리고 못 자국이 있는 노숙자의 동상은 한국에서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동상은 아닐지라도 우리가 마음을 열면 얼마든지 우리 곁에 계신 예수님을 볼 수 있고, 만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리신 것을 보고 먹을 것을 드렸고,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렸습니까? 언제 주님께서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따뜻이 맞아들였고,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렸습니까? 언제 주님께서 병드시거나 감옥에 계신 것을 보고 찾아가 뵈었습니까? 그러면 임금이 대답할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으로 갈 것이다.”

작고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거부와 배척은 곧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에 대한 거부와 배척입니다!
-양승국신부-
종말과 최후의 심판에 대한 예수님의 훈화 말씀은 ‘양과 염소’의 비유를 통해 마무리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무척이나 강경하고 단호합니다. 마지막 날에 전혀 다른 두 부류의 동물인 양과 염소를 갈라놓듯이, 모든 사람들을 갈라 놓으시겠답니다.
예수님 말씀이 꽤나 섬뜩하게 들리지만, 결코 협박의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당신 양떼를 향한 사랑과 연민이 가득 담긴 격려의 말씀입니다. 달릴 곳을 열심히 달린 사람들을 향해서는 위로와 칭찬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에 싸여 모든 천사와 함께 오면, 자기의 영광스러운 옥좌에 앉을 것이다.”(마태오 복음 25장 31절)
이 땅에 강생하신 메시아께서 최초로 보여주신 모습은 아주 작은 아기의 모습이었습니다. 지상생활 동안 보여주신 모습은 사랑으로 가득한 목자의 모습이었습니다. 마지막 날 그분께서는 위엄과 영광으로 가득한 만왕의 왕의 모습으로 당신 왕좌에 좌정하십니다.
목자로서 살아가실 때 예수님께서는 길잃은 양들을 불러 모으려고 백방으로 노력하셨습니다. 그분의 외침 앞에 어떤 사람들은 기쁘게 호응하였지만, 어사람들은 콧방귀도 뀌지 않고 무시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권능과 심판을 행사하시는 온 누리의 임금이신 그리스도 왕이십니다. 이제 그분은 쇠 지팡이로 모든 민족들을 다시리실 것입니다(요한 묵시록 12장 5절) 커다란 쇠뭉치가 달린 긴 지팡이로 목자께서는 세상 모든 사람들을 양과 염소를 갈라놓듯이 두 편으로 갈라 세우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양과 염소를 갈라놓은 기준이 과연 무엇인가를 눈여겨봐야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아주 쉽고 구체적으로 설명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오 복음 25장 40절)
세상속 굶주리고 목마른 이들, 헐벗고 떠도는 이들, 병들고 갇힌 이들을 기꺼이 형제로 받아들이고, 그들을 위한 구체적인 나눔을 실천한 사람들은 예수님의 오른 쪽에 앉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왼 쪽에 앉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백번 천번 기억해야 할 진리 하나가 있습니다. 종말에 가서는 이 세상 사는 동안 우리가 실천한 이웃 사랑이 맏형이신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이라는 것이 명백해 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따져보니 오늘 우리가 별것 아니라고 여기는 작은 사랑의 실천,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작은 친절과 봉사가 결코 작은 것이 아니라, 엄청난 것이 분명합니다.
오늘 우리가 내면에 간직하고 있는 거룩하고 깊은 믿음이 이웃 사랑의 실천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면, 그 믿음은 울리는 종과 같이 허망한 것일 뿐입니다.
우리가 오늘 지닌 신앙이 아무리 고고하고 수고한 것이라 할지라도 허리를 깊이 숙이고 겸손하게 작은 사람들에게 봉사하지 않을 때,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될 것입니다.
작고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거부와 배척은 곧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에 대한 거부와 배척입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나에게 해준 것이다
-이영근신부-
전례력으로 연중 마지막 주일인 오늘, 우리는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그리스도 왕 대축일”을 보내면서 <복음>으로 마지막 때의 심판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는 왕의 권한 행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에제케엘 예언자가 예고한 임금이신 목자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는 양 떼를 찾아와 보살펴주고, 그들을 먹이고 쉬게 하는데, “잃어버린 양은 찾아내고 흩어진 양은 도로 데려오며, 부러진 양은 싸매주고 아픈 것은 원기를 북돋아줍니다.”(에제 34,16). 그러면서도 공정으로 양떼를 먹이시고, 양과 양 사이, 숫양과 숫염소 사이의 시비를 가리십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죽을 때 예수님께서는 판관이요 임금으로 오시지만, 그분이 오는 목적은 벌이 아니라 상을 주시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두 번째 오심을 예고하신 것은 심판으로 겁주려는 것이 아니라, 격려하기 위하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하여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구원하러 왔기 때문이다.”(요한 12,47)
바로 이를 위해, 곧 당신의 구원이 실패가 아니라 성공으로 끝나도록 하기 위해, 이토록 마음을 쓰시며 격려와 예고로 경각시키십니다. 이토록, 우리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우리를 보살피고 가없는 사랑을 쏟으십니다.
그런데 사실,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다윗을 이어받은 훌륭한 왕으로서, 새 이스라엘을 건설할 분으로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이 원하는 그런 왕이 되는 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결국, 유다는 예수님을 팔아 넘겼고, 군중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런데 대체 왕은 누구인가?”
한마디로, 전권을 가진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마태 28,18)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를 잘 말해줍니다. 죽은 이들 가운데서 되살아나 맏물이 되신 그리스도께서는 재림 때에 모든 죽은 이들을 살리시고 ‘모든 권세와 권력과 권능을 파멸시키시고 나서, 나라를 하느님 아버지께 넘겨드릴 것’(1코린 15,24)이고, ‘하느님께서 모든 권세를 그리스도의 발아래 잡아다 놓으실 때까지는 세상을 다스리실 것’(1코린 15,25)임을 밝혀줍니다.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 왕 대축일’을 지내며, 예수님께서 왕이심을 고백합니다.
“그런데, 대체 그분은 어떤 왕인가?”
그것은 ‘그가 대체 어떻게 왕이 되었는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도 바오로의 “그리스도 찬가”(필리 2,6-11)에서 잘 보여줍니다. 곧 그는 낮추어 종이 되어 십자가의 죽기까지 순종하여 왕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낮추어 종이 되고, 죽기까지 순종하신 까닭은 우리 인간을 그토록 사랑하신 까닭이었습니다. 결국, 종으로 낮추어 왕이 되셨고, 죽기까지 순종하여 왕이 되셨고, 사랑으로 왕이 되셨습니다. 그러니 세상의 왕들처럼 권력을 휘두르고 위에서 힘으로 지배하고 군림하는 왕이 아니라, 섬김의 왕이요 사랑의 왕이십니다. 그러니 그분의 통치방식은 권세와 힘이 아니라, 자신을 낮추는 섬김이요,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이십니다. 따라서 그분을 왕으로 모시고 그분의 나라에 사는 우리 역시 사랑과 섬김을 삶의 원리로 살아가는 이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한 13,34)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르10,43)
오늘 <복음>은 이를 분명히 말해줍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준 것이
나에게 해준 것이다.”(마태 25,40)
이토록, 인간을 섬기고 사랑하는 것이 하느님을 섬기고 사랑하는 것이 되고, 그렇게 우리는 하느님을 인간들 사이에서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마더 데레사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세상 사람들이 외면하는 버려진 사람들의 얼굴 속에서 하느님의 얼굴을 보았다.”
그렇습니다. 진정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이 형제에게 속해있고, 동시에 하느님께 속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신 우리는 이제 ‘섬김과 사랑의 법’ 아래서, 섬김과 사랑의 왕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왕국의 백성인 자녀로 살아가는 모습이 될 것입니다. 아멘.
-오늘 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마태 25,40)
주님!
어느 누구에게나 무관심하지 않게 하소서.
어느 누구든지 하잖게 여기지 않게 하소서.
나에게 필요해서가 아니라, 그가 존귀하기에 귀중하게 여길 줄 알게 하소서.
결코, 당신의 선물을 보잘 것 없이 여기지는 일이 없게 하소서. 아멘.

최후의 심판
-송영진신부-
“사람의 아들이 영광에 싸여 모든 천사와 함께 오면, 자기의 영광스러운 옥좌에
앉을 것이다. 그리고 모든 민족들이 사람의 아들 앞으로 모일 터인데, 그는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그들을 가를 것이다. 그렇게 하여 양들은 자기 오른쪽에,
염소들은 왼쪽에 세울 것이다(마태 25,31-33).”
여기에 묘사되어 있는 ‘최후의 심판’ 장면을 보면,
재판은 이미 끝났고 선고만 남은 상황입니다.
(피고인의 ‘죄의 유무’를 검사와 변호사가 다투는 상황은 이미 끝났고,
재판장의 선고 절차만 남은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죄의 유무’를 따지는 재판은 언제 이루어졌을까?
최후의 심판이 시작되면서 한순간에 끝나버렸을 수도 있고,
심판이 시작되기 전에 이미 결정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사실 우리 인생 자체가 매 순간, 순간이 재판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죄를 지으면 심판대의 왼쪽에 서는 것이고,
진심으로 회개하면 다시 오른쪽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죄는 자기가 짓는 것이니, “어느 쪽에 서는가?”도 자기 자신이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죄의 유무’를 따지는 심리 과정이 필요 없을 것입니다.
‘최후의 심판’에 대해서 생각할 때, ‘심판’이라는 말 때문에
‘처벌을 위한 재판’으로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실제로는 ‘처벌을 위한 재판’이 아니라 ‘구원을 위한 재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진노의 심판을 받도록 정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차지하도록 정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살아 있든지 죽어 있든지 당신과 함께 살게 하시려고,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1테살 5,9-10).”
마태오복음에 있는 다음 말씀은, 우리에게는 무척 중요합니다.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마태 12,20-21).”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는 구제불능처럼 보이는 사람도 어떻게든 구원하려고
애를 쓰시는 분이다.” 라는 뜻입니다.
노력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고, 구원받기를 원하고, 희망하고,
구원받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누구나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최후의 심판 때 내리는 ‘멸망 선고’는,
구원받기를 원하지도 않고, 구원받으려는 노력도 하지 않는 사람이 받게 됩니다.
(처음에는 노력했더라도 끝까지 가지 않고
중간에 포기하는 사람도 멸망 선고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구원받을 사람의 수와 구원받지 못할 사람의 수는 얼마나 될까?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서는 아시겠지만, 우리는 모릅니다.
어느 쪽이 더 많을지, 그것도 알 수 없습니다.
아직은 아무것도 결정되어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구원받을 사람과 구원받지 못할 사람을
미리 정해 놓으신 것은 아니라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심판의 결과는 ‘나 자신’의 의지와 노력에 달려 있습니다.
(그 결과가 이미 정해져 있다면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때에 임금이 자기 오른쪽에 있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마태 25,34-36)”
여기서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이라는 말에서 ‘너희’는
특정인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충실한 신앙생활과 사랑 실천으로
구원받을 자격을 얻은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임금이 ‘구원 선고’의 이유로 말하는 ‘사랑 실천’들은
마태오복음 7장 21절의 말씀을 구체적으로 풀이한 것입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구원을 선고받는 의인들은,
하느님과 예수님을 믿고, 하느님의 뜻을 충실하게 실행한 사람들입니다.
‘사랑 실천’은 ‘하느님 뜻 실행’에서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의인들은 자기들이 주님께 사랑 실천을 했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마태 25,37-39).
임금은 그들에게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라고 설명해 줍니다(마태 25,40).
(주님은 온 세상의 임금이시면서도
‘나보다 더 작은 이’의 모습으로 나에게 오시는 분입니다.
그것은 나를 시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에게 ‘구원받을 자격을 얻을 기회’를 주기 위해서입니다.)
의인들은 순수한 마음으로 ‘작은 이들’에게 사랑을 실천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주님께 사랑을 드렸고,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구원받을 자격을 얻었습니다.
‘왼쪽에 있는 자들’, 즉 구원받을 자격을 얻지 못한 자들은
자기들이 왜 ‘멸망 선고’를 받아야 하는지를 납득하지 못합니다(마태 25,44).
그들의 질문은, “주님께서 언제 그런 처지에 놓이셨습니까?
그 작은 이가 바로 주님이시라는 것을 알았더라면
저희는 곧바로 주님께 모든 것을 다 드렸을 것입니다.” 라는 뜻입니다.
임금은 그들에게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 라고 설명합니다(마태 25,45).
그들의 죄는 “‘작은 이들’이 곧 주님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던 죄”가 아니라,
“작은 이들에게 사랑을 실천하지 않은 죄”입니다.
(만일에 누군가가 그들에게 “작은 이들이 곧 주님이다.” 라고
미리 가르쳐 주었더라도, 그들은 “그럴 리가 없다.” 라고 부정했을 사람들입니다.)
지금 이 이야기는 ‘최후의 심판’(공심판)에 관한 이야기이지만,
개인의 사심판도 별로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공심판과 사심판이 다를 이유가 없습니다.)
누구든지 지상에서의 생을 마치고 하느님 앞에 서게 되면,
자기의 ‘믿음 실천’과 ‘사랑 실천’에 대해서
상세하게 진술서를 작성해서 제출하게 될 것입니다.
바로 그때, 자신이 어떤 선고를 받게 될지를 즉시 알게 될 것입니다.
어떤 변명도, 핑계도 통하지 않을 것입니다.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
-조욱현신부-
오늘은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왕 대축일’로써 전례력을 마치는 날이다. 그리스도의 왕권이란 통치권과 지배권만의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긍정이며, 그분의 영광에 ‘우리를 결합하는’ 그분의 의지이다. 즉 우리 모두를 초대하시는 ‘참여적’ 왕권이시다. 제1독서에서 ‘목자’라는 개념은 ‘왕의’ 품위로 나타난다. 주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목자이신 왕으로 드러내신다. 그러나 다른 왕들과는 다른 왕이시다. 즉 다스리는 왕이 아니라 ‘섬기는 왕’이시다. 사랑의 왕권이지 지배의 의미나 착취의 의미가 아니다. 그분은 길 잃은 양 떼를 찾으러 가시고 다친 양들을 돌보시고 보호해 주신다. 이것은 메시아에 대한 암시이다.
복음: 마태 25,31-46: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의 행위-최후의 심판의 기준
오늘 복음에서도 이러한 내용이 나타난다. 예수께서는 당신 자신을 ‘왕’으로서 동시에 ‘심판관’으로서 드러내신다. 여기서 심판관이 주시는 ‘나라’는 당신을 충실히 섬긴 보상이며, 당신이 다스리시는 ‘왕권’이 있음을 의미한다. “나라를 차지하여라.”(34절)는 그리스도께서는 다스리실 뿐 아니라, 그들과 ‘함께 다스리시기를’ 원하신다.
함께 다스린다는 것은 역사 내에서 그렇게 준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그분의 왕권은 갑자기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매일의 행위를 통해 서서히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분의 왕권이 드러나고 또 인간이 그 왕권에 참여한다는 것은 그분의 최후의 ‘심판’의 기준에서 나타나듯이, 형제들의 괴로운 몸과 마음 안에 계신 그분의 ‘위격’에 행하는 사랑의 크기에 좌우될 것이다(35-36.40절). “이 가장 작은 이들”(40절)이란 어떤 사람들인가에 대해 많은 의견들이 있지만, 그들이 그리스도인이냐 아니냐하는 문제와는 상관없다. 그들은 그저 일반적으로 가난한 사람들, 어려운 사람들, 버림받거나 소외된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들의 공통점은 바로 그들의 불행한 처지와 다른 사람들로부터 버림받은 상황이다.
이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사랑은 구약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는 목록들이다(이사 58,7; 토비 4,16 참조). 이제 예수께서는 여기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시고, 그것을 거절하는 행위를 준엄하게 다루신다고 하신다. 바로 그들 안에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신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미 지상 생활에서 예수께서도 가난하셨고 당시 사회로부터 압박과 핍박을 당하셨으며 거부와 배척을 당하신 분이시다. 그리고 그분은 “세상의 죄를 없애시러”(요한 1,29) 오시는 분으로 어디서든지 악을 고발하고 단죄하셨다. 그래서 불의를 당하는 사람들 편에 항상 가까이 계셨던 분이다.
이렇게 볼 때,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은 인간에 대한 재평가이며 모든 인간의 손상된 몸과 마음속에 원래 새겨져 있는 품위에 대한 재인식임을 알 수 있다. 그러기에 우리 안에 항상 그리스도를 위한 자리가 만들어져야 한다. 그분을 받아들일 때만이 인간의 품위를 진정으로 증진 시킬 수 있고 인간의 모든 어려움과 원의를 해결해갈 수 있다. 우리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께서 온전히 현존하실 수 있도록 그분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은 바로 우리 이웃을 통해서이다. 특히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통해서이다. 바로 그들 안에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시기 때문에 그들에 대한 사랑을 거절하는 것은 바로 그분을 거절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왕권’은 당신의 삶을 통하여 ‘섬김’과 ‘십자가에 내어주심’에서 얻으신 것이다. 이 삶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그 ‘왕권’을 인간들에게도 참여하게끔 해주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왕권에 참여한다는 것은, 곧 그리스도께서 살아가신 삶을 우리도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이때 우리는 그분과 함께 영광의 나라에서 그분의 왕권에 참여하고 생명을 차지할 것이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을 쳐서이기셨기 때문에 ‘왕’이시라고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이 승리에 참여케 하시며 ‘새 아담’ 즉 새 인류의 영적인 머리(1코린 15,21-22 참조)라고 하였다. 맨 처음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반드시 우리를 당신 왕권의 승리로 이끌어주실 것이다. “죽은 이들의 맏물”(1코린 15,20)이라는 상징적 표현은 지상의 첫 결실들이 나중에 얻게 될 수확의 ‘보증’이듯이 우리 부활의 보증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왕권은 완성되지 않았다. 죽음이 아직 극복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그리스도의 왕권은 종말론적 요소를 지니고 있다.
죽음을 이기신 후 모든 만물은 하느님의 직접적 절대 통치권 아래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하느님의 이 마지막 결정적 통치권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행사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당신 자신과 더불어 하느님 아버지께 바치실 것이다. 우리가 없다면 그분은 하느님께 바칠 ‘왕국’을 갖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그분께 속해있는 것뿐 아니라, 그분과 함께 다스리는 자들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왕권에 참여한다는 것은 이웃 안에서 그분을 뵙고 사랑하고 봉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왕권에 참여하며 살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에 싸여 모든 천사와 함께 오면, 자기의 영광스러운 옥좌에 앉을 것이다.(마태 25, 31)
-한상우신부-
아파하고
부서지며
한 해를 살았다.
더욱 소중해지는
생명의 겸손한
시간이다.
모든 삶에는
끝이 있다.
우리와 함께하신
그분의
사랑을 인정하고
감사하는
은총의 시간이다.
마지막이라
여겼던 곳에서
뜨거운 사랑과
구원을 체험한다.
우리 삶의
모든 길의
끝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기다리고 계신다.
사랑과 용서는
끝이 없다.
한 해를
마무리하지
않고서는
기쁜 새 해를
맞이할 수 없다.
삶의 끝은
언제나
그리스도와의
만남이 있고
사랑이 있다.
모든 여정을
완성시키시는
사랑이시다.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과 감사로
주님께
나아가는 것이다.
길이요 진리이며
생명이 되시는
우리 삶의
그리스도왕이시다.
그리스도왕께
우리의
한 해를
떠나보낸다.
그리스도왕께
의탁하지
않고서는
이 어려움을
헤쳐나갈 수 없다.
우리모두를
살리시는
분이시다.
우리가 사랑해야
할 그리스도의
사람들이다.
그 어떤 것도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 할 수 없다.
생명을 돌보시고
구원하시는
그리스도를
진실로 믿고
따른다.
신앙인의 삶이란
그리스도를 닮은
사랑의 삶으로
그리스도왕을
섬기는 복음의
사람들입니다.
부서졌고
무너졌던
이 시간을
봉헌한다.
생명을
내어주신
그리스도왕께서
몸소 보여주셨다.
서로 사랑하고
서로 용서하는
삶이 그리스도의
삶임을 기억하며
기쁘게 따른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의 사랑에
진심으로
감사한다.
특별한
한 해의
마무리이다.
더 좋은 사랑을
주시는 분이심을
믿고 기도드린다.
우리 모두의
아픔과 어려움
이 모든 것을
그분께
올려드리자.
모두들
고생 많으셨다.

-오상선신부-
전례력으로 올해의 마지막 주일인 그리스도왕 대축일입니다. 오늘 미사의 말씀은 임금이신 주님이 누구신지 고루 보여주고 계십니다.
"그는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그들을 가를 것이다."(마태 25,32)
복음 말씀은 온 누리의 임금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심판하는 분이심을 보여 줍니다. 하느님께서 아드님께 심판의 권한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아들의 날이 오면 예수님께서는 당신 앞에 나아온 이들을 바라보시고 그들이 살아온 대로 그들의 자리를 정해 주실 것입니다.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 해 주지 않은 것"(마태 25,40/45)
예수님은 가장 작은 이들과 당신을 동일시하시지요. 그들에게 연민과 자비로 베푼 것이 바로 당신께 해 준 것이고, 무관심과 멸시로 외면한 것은 바로 당신을 소외시킨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 심판의 기준은 사랑입니다. 지상에서 어느 처지의 삶을 살아가건, 가장 작은 이들에게 해 준 것과 해 주지 않은 것이 기준이 됩니다. 과부의 헌금 일화에서 보았듯이 희사의 많고 적음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주님, 저희가 언제...?"(마태 25,37.44)
예수님의 심판 앞에서 우리는 이 질문을 던질 것입니다. 그런데 두 부류의 질문 어조는 상이하겠지요. 아낌없이 내어주면서 준 것을 바로 잊어버리고 또다시 새로운 나눔의 기회를 찾는 이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칭찬과 축복이 어리둥절해서 이렇게 여쭐 것이고, 자신과 가족의 안위와 사치를 당연한듯 누리며 주변에 누가 힘든지 외면하고 산 이들은 항변하듯 따질 것입니다. 당신이 언제 내 눈앞에 나타나셨느냐고, 당신이라고 밝혔으면 내가 정말 잘해드렸을 거라고 말이지요.
진정한 사랑은 대가를 바라지 않으니, 주님께서 가난한 이들 안에 당신을 감추시는 것이야말로 신의 한수일 겁니다. 신앙과 사랑의 옥석은 여기서 갈리지요.
제1독서 대목은 온 누리의 임금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랑과 자애가 넘치는 착한 목자이심을 보여 줍니다.
"내가 몸소 내 양 떼를 먹이고, 내가 몸소 그들을 누워 쉬게 하겠다."(에제 34,15)
당신께서 몸소, 친히 우리를 돌본다고 하십니다. 사실 주님은 우리 대신 살림을 살아주는 분이십니다. 먹이고 입히고 키우는 분, 생명을 더 풍요롭게 살리는 분이시라는 뜻입니다. 그런 주님의 사랑을 믿지 못해 의탁을 거두고, 아등바등 진을 다 빼가며 헛손질하는 것이 인간의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화답송)
시편 저자는 착한 목자 품안에서 사랑받으며 살아가는 양의 마음을 노래합니다. 탐욕은 아쉬움밖에 모르고, 감사는 아쉬움을 모릅니다. 목자를 신뢰하고 온전히 의탁하는 양에게는 감사뿐이니 아쉬움이 없지요. 각자 느끼는 아쉬움의 정도는 영혼의 상태와 신앙을 가늠하는 척도가 될 겁니다.
제2독서에서 보여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은 대속자입니다.
"죽은 이들의 맏물이 되셨습니다."(1코린 15,20)
예수님은 하느님이시지만, 우리에 대한 사랑 때문에 우리를 대신해 죽음을 받아 안으셨습니다. 그분의 속량으로 우리는 하느님과 화해를 이루고 구원을 받았지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아날 것입니다."(1코린 15,22)
주님을 믿는 우리는 육신의 죽음을 끝이라 여기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겪는 고통과 슬픔 역시 동 트기 직전의 어둠으로 여겨 쉬이 절망에 빠지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공로로 우리 모두가 영원한 생명이 보장받았음을 믿고 알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은 이런 분이십니다. 사랑 빼고는 그분을 이야기할 수 없다는 걸 오늘의 말씀들이 보여주고 계시지요.
사랑의 임금이신 예수님 안에서 사랑이 되는 오늘 되시길 축원합니다. 우리 사랑이 필요한 이들이 도처에서 우리의 눈길과 마음길과 손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 구원을 위해 주님께서 펼쳐 주신 선물일 겁니다. 가난한 이들이 우리를 하늘 나라에 들어가게 한다고 프란치스코 교황님도 말씀하셨지요.
언젠가 사랑의 심판대 앞에 설 때 사랑이신 분과 기쁘게 해후하고 하나 될 수 있도록, 우리, 사랑의 기회를 놓치지 맙시다. 주님을 닮아 사랑이 되어가시는 벗님을 축복합니다.

우리를 왕이 되게 하시는 왕
-김찬선신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왕으로 모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형제로 삼으신다는 것이
오늘 그리고 이번 그리스도 왕 축일이 제게 주는 메시지입니다.
오늘 그리스도 왕 축일은 그리스도께서 왕권을 차지하셨음을
축하하는 축일이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도를 왕으로 섬기겠다는
우리의 믿음과 충성과 사랑을 고백하는 축일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왕 축일이 이 세상 임금의 축일과 다른 점입니다.
이 세상 임금들은 자기가 기를 쓰고 왕권을 차지한 것이지만
우리의 그리스도는 우리가 우리의 왕으로 추대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추대는 그리스도께서 빵의 기적을 일으키고 난 뒤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왕으로 추대하려고 한 것이나 제자들이
주님께서 왕이 되기를 바란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빵의 기적 후 주님을 왕으로 모시려고 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주님을 배나 부르게 해주는 임금으로 생각한 것이니
이는 마치 트럼프나 부자 되게 해 줄 거라는 생각으로
과거 우리가 뽑았던 모 대통령과 다를 바 없는 것이고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식으로 주님을 왕으로 모셔서는 안 되겠지요.
또 제자들은 자기들이 권력의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리라는
희망으로 주님께서 왕이 되시기를 바란 것이니 이런 것이어서도 안 되지요.
그리고 우리가 주님을 왕으로 모시겠다는 것은 이런 뜻도 있습니다.
세상의 임금을 왕으로 삼지 않고 주님을 우리의 왕으로 모시겠다는,
그럼으로써 우리는 그리스도 왕의 백성이 되겠다는 뜻입니다.
이런 뜻에서 한번 우리 자신을 성찰해봅시다.
지금 나의 왕은 누구입니까?
이제 다음으로 우리가 볼 것은 오늘 축일을 지냄의 또 다른 의미이고,
그것은 우리의 왕이 어떤 분인지를 제대로 알기 위함이라는 점입니다.
그것은 앞서 봤듯이 우리가 주님을 왕으로 삼지만
주님께서는 우리를 형제로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의 비유에서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우리를 그리고 가장 작은 이들을 당신의 형제로 생각하시는 분이
우리의 왕이고, 진정한 왕이며, 세상의 임금과는 다른 왕이십니다.
진정 백성을 자신의 형제로 생각하는 임금이 세상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가 가장 훌륭한 임금으로 여기는 세종대왕일지라도 임금으로서
백성을 사랑해주는 정도였지 백성을 자기 형제로 생각지는 않았지요.
우리의 임금이신 그리스도는 우리를 당신의 형제라고 하심으로
우리도 왕이 되게 하시는 분이시고 그러므로 여기에는 두 가지
움직임, 곧 주님의 내려오심과 우리의 올라감이 있으며
그러므로 주님이 내려오심으로 우리는 올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도 당신처럼 왕직을 수행하라시는 모범입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음으로 그리스도의 사제직과 예언직과 왕직을 받게 되는데
주님께서 최후만찬 때 제자들의 발밑으로 내려가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며
당신이 하셨듯이 제자들도 그렇게 하라고 하셨듯이
우리도 우리가 내려감으로 형제들을 올라가게 하는
그런 왕직을 수행해야 한다는 가르침도 받고 묵상도 하는 오늘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 (마태오 25,3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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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의 통치방식은 권세와 힘이 아니라, 자신을 낮추는 섬김이요,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이십니다. 따라서 그분을 왕으로 모시고 그분의 나라에 사는 우리 역시 사랑과 섬김을 삶의 원리로 살아가는 이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신 우리는 이제 ‘섬김과 사랑의 법’ 아래서, 섬김과 사랑의 왕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왕국의 백성인 자녀로 살아가는 모습이 될 것입니다. 아멘
-이영근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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