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1월 21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은 성모님께서 원죄 없이 잉태되실 때 가득했던 그 성령의 감도로 어린 시절부터 하느님께 봉헌되신 것을 기리는 날이다. 성모님의 부모인 요아킴과 안나는 성모님께서 세 살 되던 해에 성전에서 하느님께 바쳤다고 전해 온다. 이날은 본디 6세기 중엽 예루살렘에 세워진 성모 성당의 봉헌을 기념하는 날이었으나, 1472년 식스토 4세 교황이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로 선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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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
(마태 12,46-50)
For whoever does the will of my heavenly Father
is my brother, and sister, and mother."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허규신부-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말씀은 사람들에게 놀라움을 주기에 충분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그분의 어머니와 형제들이라는 표현 때문에 혼란스러워합니다. 마리아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에 의구심을 가지기도 하고 다양한 해석을 제시하기도 합니다. 그 가운데 하나를 소개한다면 당시에 ‘형제’라는 표현이 지금보다는 넓은 의미로 이해되었고 사촌들에게도 적용되었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이 강조하는 것은 새로운 관계입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함께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을 형제자매로 생각합니다.
복음서는 예수님께서 사람들과 새로운 관계를 맺으시는 것을 보여 주고 우리에게 증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시 죄인으로 여겨지던 이들과 함께 어울리시고 그들을 용서하시고 받아들이십니다. 이것 때문에 종교 지도자들과 마찰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들과 과부들도 돌보시고 병자들을 고쳐 주시고 공동체에서 소외된 이들을 공동체 안으로 돌려보내십니다. 이미 예수님께서는 기존의 관계에서 벗어나시어 새로운 관계를 형성해 가십니다. 제자들과 예수님의 관계도 이런 새로운 관계 가운데 하나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뜻을 따르며 새로운 관계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인이 가지는 새로운 정체성입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군대에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처음으로 부모님과 함께하지 못하는 명절이었습니다. 사제가 물론 누구와 같이 사는 것이 아니지만, 이제까지 함께했던 시간은 뒤로하고 이제 혼자서 보내야 한다고 생각하니 괜히 외로움이 밀려오는 것입니다.
부모를 잃어야 비로소 어른이 될 수 있었다는 어느 작가의 글이 생각납니다. 저 역시 성장통을 겪으면서 어른이 되어가나 봅니다. 그리고 이제까지 부모님의 자리가 얼마나 컸던 것인지도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는 것이 당연하고, 이를 위해 외로움을 이겨내고 자신의 자리에서 기쁨을 찾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우리가 어른이 되기를 원하셨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어떤 이가 예수님께,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라고 말합니다. ‘어머니’라는 말만 들어도 곧바로 밖으로 뛰어나가야만 할 것 같습니다. 더군다나 어머니 성모님을 너무나 사랑하셨던 예수님이 아니십니까? 그러나 어머니께서 들으시면 서운하실 수 있는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그리고 곧바로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이 예수님의 말씀은 당신 가족을 하찮게 여기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보다 육신보다 영혼으로 가까운 것을 더 귀하게 여겨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세속의 가족에 얽매여서 하느님께 나아가지 못하는 우리를 위한 말씀입니다.
오늘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로, 성모님께서 원죄 없이 잉태되실 때 가득했던 그 성령의 감도로 어린 시절부터 하느님께 봉헌되신 것을 기리는 날입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하느님께 봉헌의 삶을 사신 성모님이십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뜻을 늘 마음에 새기셨고, 하느님 뜻대로 그대로 자신에게 이루어지길 청하셨습니다. 그런 성모님이라는 것을 잘 아셨기에 서운한 말씀도 과감하게 내뱉으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깨우칠 수 있도록 말이지요. 주님의 뜻을 기억하면서, 세속의 것보다 하느님 것을 먼저 생각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어떤 어린이가 뛰어갑니다. 그리고 뒤를 바라보며 할아버지로 보이는 형제님께 “빨리 오세요.”라고 말합니다. 부지런히 걷고는 계시지만 아무리 어리다고 해도 뛰는 아이의 속도를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대체로 어린아이는 뜁니다. 그러나 어른들은 주로 걷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걷는 것도 힘들어집니다. 저 역시 이제 잘 뛰지 않습니다. 뛰면 내 몸의 중심이 어디인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내 몸의 중심은 아픈 곳입니다. 아픈 곳으로 중심으로 우리는 말하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이렇게 걷는 것조차 힘들어할 줄 몰랐습니다. 그동안 운동을 잘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게으른 생활 습관이 저도 모르게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도 힘든 일이 되게 한 것입니다.
기도와 묵상도 그렇지 않을까요? 어렸을 때는 그리 어렵지 않았을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하고 주님을 체험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세상일에 집중하면서 주님과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기도와 묵상을 통해 다시 주님과 함께하고 주님을 체험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소비해야 합니다. 그래야 참 기쁨을 발견하고 다시 힘차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누군가를 내 뜻 안에 머물게 하려면
-전삼용신부-
오늘은 성모님께서 성전에 봉헌되신 일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전승에 의하면 성모님께서 3살 때 요아킴과 안나로부터 성전에 봉헌되었다고 합니다. 이는 당시 동정녀들을 성전에서 키우며 메시아의 어머니가 될 것을 준비하던 관습에서 비롯됩니다. 요아킴과 안나는 성모님을 메시아를 맞이하기 위해 제물로 성전에 봉헌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전에 봉헌된다는 말은 ‘하느님의 뜻’에 봉헌한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누구의 집에 살려면 그 주인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집에 봉헌된다는 말은 하느님의 뜻에 봉헌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예수님께서 형제요, 누이라고 하시는 이유는 같은 집에 살기 때문입니다. 같은 부모님의 같은 뜻을 따르기 때문에 같은 집에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집에 살려면 하느님의 뜻에 자신을 봉헌해야 합니다.
내가 하느님의 집에 나 자신을 봉헌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그러면 이제 그분이 내 안에 사시게 됩니다. 하느님이 성모님의 집에 사시게 되는 것입니다. 제르뚜르다 성녀에게 예수님은 “네가 내 뜻을 따라주기로 결심한 순간부터, 내가 네 뜻을 따라주기로 결심하였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분 집에 살기로 결심하면 그분이 내 집에 사십니다. 이것이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삼위일체 신비의 핵심입니다. 여기서 뜻은 성령님이 됩니다.
이 원리를 인간관계에 적용하면 어떻게 될까요? 누군가를 나의 뜻 안에 머물게 하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내가 먼저 그 사람의 뜻에 머물러야 합니다. 그러면 일반적으로 그 사람도 내 뜻 안으로 들어옵니다. ‘일반적으로’라고 말한 이유는, 가리옷 유다처럼 끝까지 거부하는 사람도 없지 않아 있다는 말입니다.
《순간포착 세상에 이런 일이》에 〈50년째 돌 속에 사는 할아버지〉 사연이 나왔습니다. 할아버지는 매일 싸우는 부모 밑에서 두려움 속에서 살았습니다. 유일하게 그 할아버지를 아껴 주었던 분이 할머니였습니다. 그러나 할머니마저 돌아가시자 할아버지는 산으로 올라왔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만나지 않고 산 깊은 곳에서 무려 50년을 돌 틈에 움막을 짓고 살았습니다. 바로 밑이 고향이었지만 할아버지는 동물 사료를 훔치러 내려가는 것 외에는 누구도 만나지 않았습니다. 사람을 극도로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프로그램 제작팀이 할아버지에게 다가갔을 때 할아버지는 두려움에 몸을 떨었습니다. 부모가 다 돌아가시고 안 계시는 상황이었지만 할아버지는 좀처럼 세상으로 내려가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할아버지의 옛 친구분들을 불러서 설득해보려 했지만, 할아버지는 도망쳤습니다. 이대로 두었다가는 할아버지의 건강이 걱정이었습니다.
이때 이 프로그램 제작진이 항상 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할아버지가 사는 움막 옆에 텐트를 치고 무작정 같이 지내는 것입니다. 할아버지는 먼저 내려오라는 말보다 당신과 함께 살아줄 사람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게 한 열흘 정도 있다가 보면 숨어 사시는 분들도 마음을 열게 됩니다. 열흘 동안 할아버지가 먹고 마시고 일하시는 것을 함께 하다 보니 할아버지도 제작진의 설득을 받아들여 검사를 받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할아버지가 드시는 것을 함께 먹어야 할 수도 있습니다. 다른 프로그램에서는 쓰레기를 뒤지며 산에 숨어 사시는 할머니를 설득하기 위해 함께 머무르며 사는데, 그때는 할머니가 남이 버린 음식으로 만든 것을 함께 먹어주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니 그 할머니도 병원 치료받는 것을 허락했습니다.
모든 것이 이와 같을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나의 뜻을 강요하기 이전에 먼저 상대의 뜻을 들어주어야 합니다. 이것은 상대의 거처에 함께 머무는 것과 같습니다.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예수님께서 성모님의 뜻을 들어주실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성모님께서 항상 주님의 뜻 안에 머무시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도 가족이나 이웃들을 주님께 데려와야 하는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나의 뜻을 비치는 것보다 그들의 뜻이 무엇인지 헤아린 후 나의 뜻을 따라줄 수 있도록 호감을 얻어야 합니다. 남이 나의 말을 안 들어준다고 불평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나도 남의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항상 주님이나 이웃들에게 나의 뜻을 이야기하기 전에 내가 먼저 그들의 집에, 혹은 그들의 뜻에 나 자신을 봉헌했는지를 먼저 살펴야 할 것입니다. 누군가의 마음에 드는 것은 매우 어렵고, 많은 사람의 마음에 들려면 그 모든 사람들의 뜻에 따라주고 있어야 합니다.

-조재형신부-
가끔 한국에서 우편물이 옵니다. 코로나19로 몇 주일씩 늦게 온 적도 있습니다. 제가 보낸 편지도 늦게 도착할 때도 있었습니다. 생일을 축하하는 카드가 1달 정도 늦게 도착하면 생일잔치를 한 달 동안 하는 호사를 누리게 됩니다. 코로나19로 매달 받던 ‘좋은생각’ 5월호가 10월에 도착했습니다. 5개월 전의 글을 읽으면서 아직도 봄을 지내고 있다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가슴이 따뜻해지는 글이 있어서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매년 생일이면 어머니를 찾아가서 밥을 해드리던 형제님이 있었습니다. 밥과 반찬을 해서 상을 차리고, 식사하기 전에 어머니께 큰 절을 올렸다고 합니다. 낳아주신 아버지는 하느님의 품으로 가셨기에 어머니께만 절을 올린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식사를 하시면서 벌써 몇 번을 들었던 이야기를 다시 하신다고 합니다. 태몽 이야기, 아팠던 이야기를 하시고 대부분은 아들이 똑똑하고 공부 잘했던 이야기를 하신다고 합니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에게 자식은 이미 ‘신화(神話)’입니다. 2020년 생일에는 어머니를 찾아뵙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어머니께서 먼저 전화하셔서 좋은 시절이 오면 오라고 하셨다고 합니다. 아내가 한 가지 제안을 했다고 합니다. 올해는 꽃 선물을 하면 좋겠다고 합니다. 시장에서 꽃을 사서 정성스럽게 다듬었고 출근길의 직원들에게 한 송이씩 나누어주었다고 합니다. 직원들이 무슨 꽃이냐고 물으면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코로나퇴치를 위한 장미 선물입니다.’ 어머니를 사랑하는 형제님의 이야기가 따뜻하였습니다. 색다른 생일 선물을 제안한 아내의 마음도 따뜻하였습니다.
5개월 전에 제가 이 글을 읽었다면 저도 어머니께 전화를 드렸을 것 같습니다. 저의 생일이 5월이기 때문입니다. 저의 생일에 한 번도 어머니를 찾아 뵌 적이 없었습니다. 어머니를 위해서 밥상을 차린 적도 없었습니다. 어머니에게 축하선물을 받은 적이 많았습니다. 어머니는 언제나 가족들의 생일을 기억하셨습니다. 멀리 있어서 밥을 차려드리지는 못했겠지만 감사의 인사를 드렸을 것 같습니다. 내년 생일에 백신과 치료제가 나와서 코로나19에 대한 염려가 없어도 생일에 어머니를 위한 밥상을 차리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지난 9월 사랑하는 아버지가 계신 하느님의 품으로 가셨기 때문입니다. 내년 생일이 오면 저를 낳아 주신 부모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미사를 봉헌하려 합니다. 직원들과 함께 식사하면서 어머니의 신화(神話)를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는 신화입니다.
신앙 안에서 어머니들의 삶을 돌아봅니다. 황사영의 부인 정난주 마리아의 이야기를 생각합니다. 남편 황사영은 순교하였고, 정난주 마리아는 2살 된 아들과 제주도로 유배를 갔습니다. 정난주 마리아는 관비가 되어서 유배를 갔기 때문에 2살 아들 황경한과 헤어져야 했습니다. 제주도 최초의 신앙인이었던 정난주 마리아는 그 모든 슬픔을 가슴에 담고, 신앙의 모범을 보여주었습니다. 최방제 프란치스코 신학생의 어머니 황 안나의 이야기를 생각합니다. 함께 유학을 갔던 김대건 안드레아와 최양업 토마스는 사제가 되어서 조선으로 돌아왔지만 아들 최방제 프란치스코는 먼 타국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자식을 먼저 하느님의 품으로 보내야 했던 어머니의 슬픔은 말할 수 없이 컷을 것입니다. 다른 두 아들까지도 먼저 하느님의 품으로 보내야 했던 황 안나는 오직 충실한 신앙으로 모든 것을 참아냈다고 합니다.
이 땅의 모든 어머니들은 하느님께서 보내 주신 ‘수호천사’입니다. 그분들은 하느님의 뜻을 생각하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사셨기 때문에 예수님의 형제와 어머니가 되실 수 있었습니다. 성모님께서 예수님을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서 성모님의 의견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성자 예수님을 성모님께로 보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모님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자신을 선택하신 예수님을 사랑으로 돌보셨습니다.
“영원하신 성부의 아드님을 잉태하신 동정 마리아는 복되시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이다
-이영근신부-
오늘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입니다. 성모님께서 하느님께 봉헌된 것을 기리는 날입니다. 곧 성모님께서 원죄 없이 잉태되실 때 가득했던 그 성령의 감도로 어린 시절부터 하느님께 봉헌되신 것을 기리는 날이다.
전승에 의하면, 성모님은 세 살 때, 그의 부모인 요아킴과 안나에 의해 하느님께 봉헌되었다고 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찾아온 어머니와 형제들을 문전박대하십니다. 사실, 마리아는 이와 같이 아들로부터 냉대당한 것은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열두 살 되던 해에 잃었던 아들을 성전에서 찾았을 때,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루카 2,49)라고 했을 때도 그러했고, 카나의 혼인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졌을 때, 어머니가 예수님께 “포도주가 없구나.” 하였을 때, “여인이시여,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요한 2,4) 하였을 때도 그랬습니다. 이는 마치, 옷가지와 음식을 마련하여 찾아오는 어머니를 돌로 쫓았던 성철스님 이야기를 떠올려줍니다. 이는 참으로 불효처럼 여겨지지만, 사실은 진리를 향한 결연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누가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들이냐?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이다.”(마태 12,48-50)
이 말씀은 언뜻 보기에는 예수님께서 성모님을 내치신 것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성모님에 대한 외적인, 가시적인 이해를 뛰어넘도록 해줍니다. 사실, 성모님께서는 육적인 혈연으로서만이 아니라, 영적으로 당신의 첫 번째 가족이셨음을 드러내줍니다. 왜냐하면 어머니 마리아는 그 누구보다도 먼저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천사 가브리엘의 방문을 받고 아기예수님을 잉태하실 때 바로 그렇게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였습니다. 그렇게 성모님은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여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그러니 분명, 성모님께서도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분으로서 예수님의 영적 가족이 되셨습니다.
이처럼, 성모님께서는 아렸을 때부터 또한 아기를 잉태하는 순간부터 자신을 봉헌하고 또한 축성 받으셨습니다. 결국, 성모님도 예수님도 다 같이 아버지께 봉헌하고 아버지의 뜻을 따라 사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님과 함께 하루하루를 아버지께 봉헌하고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면서 살아야 할 일입니다.
오늘, 제 자신을 들여다봅니다. 성모님과 그리스도와 함께 아버지를 향하여 있는지, 그분의 뜻을 실행하고 있는지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이다.”(마태 12,50)
어머니!
당신은 진정 어머니셨습니다.
말씀을 듣고 지키셨기에 복되십니다.
당신은 어머니가 되시기 전에, 이미 제자가 되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따르시고 당신 아들의 제자가 되셨습니다.
오늘, 제가 어머니와 함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
아빠 아버지를 부르는 당신 아들의 형제자매가 되게 하소서. 아멘.

복음: 마태 12,46-50: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조욱현신부-
오늘 축일은 예루살렘 성전 가까이에 세워진 성당의 봉헌을 기념하는 이 날, 성모님이 원죄 없이 잉태되실 때 충만히 내리신 성령의 감도로 성모님이 어린 시절부터 하느님께 당신을 바치신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전승에 의하면, 성모님의 부모인 요아킴과 안나는 마리아가 세 살 되던 해에 성전에 봉헌하였는데, 세 살 된 마리아가 선전으로 올라갈 때, 계단에는 성모님의 발자국마다 장미가 피어났다고 한다.
예수님께서는 되돌아오는 악령에 관한 말씀을 하셨다. 여기에는 선한 영 일곱과 악한 영 일곱이 있다. 선한 영은 지혜, 분별, 경륜, 용맹, 지식, 경건, 하느님을 두려워함의 영이며, 악한 영은 어리석음, 오류, 무모함, 비겁, 무지, 불경과 하느님을 두려워함과 반대되는 교만의 영이다. “자기보다 더 악한 영 일곱을 데리고 그 집에 들어가 자리를 잡는다. 그리하여 그 사람의 끝이 처음보다 더 나빠진다. 이 악한 세대도 그렇게 될 것이다.”(45절) 하셨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반박하기 위해, 악마는 교활하게, 예수님의 육에 따른 친척들을 등장시킨다. 그리하여 사람들의 눈길을 그 친척들에게 향하게 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신성을 알아보지 못하게 하려 했다.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47절) 이 말은 인간에게서 태어난 이가 하느님의 아들일 수 없다는 말이며, 땅에 뿌리를 두고 있으면서 어떻게 하늘에서 왔다고 하느냐는 말이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악마인 그 자를 보시며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48절) 하신다. 그리고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49절) 하신다. 즉 그분은 순종하는 이들을 가리키신다. 순종하는 친족 관계로 당신과 맺어진 이들에게 가족관계에 따른 모든 이름을 붙인다. 당신의 말씀을 실천하며 따르는 사람들을 가리키신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50절) 신앙으로써 주님의 형제자매가 될 수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분의 어머니가 될 수 있을까? 바로 복음을 전함으로써 그분의 어머니가 된다. 이것은 주님을 낳아, 듣는 이들의 마음에 그분을 불어넣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삶을 통해 이웃의 마음에 주님께 대한 믿음과 사랑이 생겨나도록 하는 사람이 어머니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말씀을 믿고 받아들이셨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실천하셨기 때문에 복되신 분이시다. 그리스도는 진리이시며 육신이시다. 그리스도는 마리아의 마음속에서 진리이시며, 마리아의 태중에서 육신이시다. 그분의 어머니이신 것은 그 진리를, 말씀을 실천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우리도 말씀을 실천하며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마리아를 닮는 우리가 되도록 하여야 한다.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 12, 50)
-한상우신부-
사랑과
봉헌 사이에
우리가
살고 있다.
날마다
봉헌이다.
복되신
동정 마리아를
살게했던
봉헌이다.
봉헌으로
사랑이 된다.
사랑의 핵심은
봉헌이다.
우리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에서
봉헌은
시작된다.
말씀과 실행을
하나되게
하는 것이
봉헌이다.
봉헌으로
우리 삶은
정화된다.
봉헌은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강렬한 뜻이다.
순종이
봉헌이다.
봉헌의 가치는
신앙의 참된
가치이다.
가장 아름다운
말씀의 실천은
봉헌의 삶이다.
신앙은
봉헌이다.
지금 이순간이
봉헌이다.
복음의 길은
봉헌의 길이다.
자신을 뜻을
자아를 비우는
봉헌으로
하느님의 힘은
더욱 강렬해진다.
봉헌은
하느님을
드러내는
가장 빛나는
영광이다.
오늘도
봉헌이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주님과 우리의 관계를 고찰하게 해 줍니다.
"그분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그분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있었다."(마태 12,46)
예수님이 집 안에서 군중들에게 말씀을 들려주고 계실 때 그분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집앞에 다다른 것 같습니다. 어느 친절한 이가 예수님께 이를 알리지요. 보통 사람이라면 가족이 우선일 테니까요.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 12,49-50)
그런데 예수님은 당신 곁에 있는 제자들을 가리키며 어머니고 형제라 하십니다. 육신과 인간 사회의 질서 안에서 태어나 자라셨지만 동시에 하느님과 같은 분이신 예수님은 영의 질서 안에서 모든 것을 포괄하고 또 초월하는 분이십니다.
"안"과 "밖"을 관상합니다. 예수님 말씀을 듣자 하니, 우리와 예수님과의 관계가 제도나 신분, 육적 관계나 물질적 기여도, 관습만으로 좌우되기는 어려워 보이네요. 이런 "밖"의 조건들에서 넉근히 우위를 차지한들, 그것들만으로는 자신이 있는 "밖"으로 예수님을 불러낼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과 진정으로 관계 있는 존재가 되려면 우리가 예수님 곁으로 가야 합니다. 속된 말로 계급장 다 떼고 가면도 다 벗어버리고, 영혼의 민낯과 알몸으로 그분이 계신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거기서 그분과 맺는 관계를 통해 우리는 주님의 어머니고 형제가 됩니다.
먼저 우리는 예수님이 계신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거기서 말씀을 듣습니다. 그분의 말씀이 우리를 그분과 강하게 결속시킵니다. 그리고 듣고 품은 말씀을 실행해야 합니다.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와 우리 행동을 통해 세상에 탄생하는 것입니다. 말씀이 우리를 통해 육화하는 것이지요.
그러니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예수님의 어머니고 형제일 수밖에 없습니다. 영혼의 태 안에 그토록 귀하신 말씀을 잉태해 품고 세상에 낳아주었으니 말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시온에 당신의 현존을 약속하시는 주님의 밝은 음성이 울려퍼집니다.
"딸 시온아,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정녕 내가 이제 가서, 네 한가운데에 머무르리라."(즈카 2,14)
주님께서 우리 한가운데에 몸소 들어와 머무르시겠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그분 계신 곳에 들어갈 수 없으니 그분께서 친히 움직이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분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게 되면 우리가 있는 곳이 더 이상 "밖"이 아니라 "안"입니다.
"모든 인간은 주님 앞에서 조용히 하여라."(즈카 2,17)
그분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시는 구원의 때에 모든 인간은 삼가고 경외하며 깨어있어야 합니다. 그분이 들어오시니 모든 분심과 소음은 잠잠해져야 합니다. 말 많고 탈 많은 이 세상에, 우리 존재에 하느님께서 친히 개입하시는 그때, 온갖 인간의 말과 인간의 행위는 그만 숨을 죽이고 그쳐야 합니다. 말씀하시는 분은 오직 주님이셔야 하고, 움직이시는 분도 오직 그분이셔야 합니다. 그분의 시간이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복음 속 예수님은 어머니 마리아와의 육친관계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마리아께서 육적으로만이 아니라 영적으로도 가장 가까운 관계임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마리아 안에 들어 오실 때 마리아는 순종과 침묵으로 인류 역사상 가장 귀한 열매를 품으신 것이니까요. 마리아의 순종은 이 세상에 하느님의 현존을 가능케 했습니다. 구원이 들어와 거처를 삼으신 것이지요.
사랑하는 벗님! 성모님의 봉헌을 기리며, 침묵과 순종 안에 구원의 말씀을 품는 오늘 되시길 축원합니다. 말씀을 품고 살아가며 실천으로 열매 맺는 우리는 이미 주님의 어머니고 형제랍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은 행복하여라."(복음 환호송)

우리가 가야할 곳은 초심이 아니라 완성
-김찬선신부-
오늘 축일의 우리말 이름이 '자헌'이기에 성모님이 봉헌되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을 봉헌하신 것처럼 이해되기 쉽습니다.
그런데 전승적인 차원에서 보면 세 살 때 부모가 봉헌하신 것이지요.
그런데도 오늘 축일의 의미를 성모님이 스스로 자신을 봉헌하신
그런 의미로 이해해야 하는데 그것은 부모가 봉헌했지만,
마리아가 그 봉헌을 뒤집지는 않으셨을 테니 말입니다.
인간적으로 미성숙한 사람의 경우 부모가 대신 결정하는 일이 많고,
그렇게 결정된 것을 미성숙한 자식은 내 결정이 아니라며
그 결정을 뒤집거나 불성실하게 따르는 경우가 많지요.
그러나 성숙한 사람은 자기가 미성년일 때 부모가 결정한 것을 어른이
되어도 뒤집지 않고 성숙하게 다시 받아들여 자기의 결정이 되게 하지요.
그런데 인간적으로만 성숙해도 이러한데 영적으로 성숙한 성모님은
더욱더 부모의 봉헌을 따라 자신을 재봉헌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축일의 의미를 두 가지로 보면 좋을 것입니다.
하나는 이른 봉헌이고 다른 하나는 재봉헌입니다.
그렇습니다.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은
성숙할수록 일찍 자신을 봉헌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성녀 소화 데레사의 경우 언니들이 수녀원에 들어간 영향도
있었겠지만 아주 어린 나이부터 자신을 봉헌하고픈 열망이 있었지요.
가끔 저에게 성소 문의를 하는 분들이 있는데
너무 안타깝게도 늦은 나이에 수도원에 들어오고 싶어 합니다.
이들 중에는 결정장애가 있어서 그런 분도 있지만
대부분은 늦게야 자신을 봉헌할 마음이 생긴 분들이고,
뒤집어 얘기하면 늦게야 봉헌의 의미를 찾은 분들입니다.
그러면 그전에는 어땠던 겁니까?
자신의 봉헌이 아니라 자신의 실현에 의미를 뒀겠지요.
프란치스코가 젊은 시절 기사가 되고자 했던 것처럼.
실상 하느님을 모르고 그래서 하느님을 사랑하기 전에는
누구나 자기의 실현이 삶의 의미이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봉헌이란 영적 성숙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사랑의 문제인 것입니다.
다음으로 재봉헌의 의미를 보겠습니다.
재봉헌이란 봉헌이 한 번으로 그칠 수 없고,
끊임없이 갱신해야 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한 번의 봉헌으로 봉헌이 완성될 수 없기에
재봉헌을 통해 완성을 이루어가는 뜻입니다.
우리는 종종 어렸을 때의 마음 또는 초심을 잃고
마치 토했던 것을 다시 먹듯 과거로 돌아가곤 하기에
초심을 잃지 않기 위해서 마음의 갱신을 하곤 하지요.
이처럼 갱신이 초심 또는 과거로 돌아가는 면이 있다면
완성은 초심을 잃는 것을 두려워서가 아니라
더 완전한 봉헌을 위해 끊임없이 나아감의 뜻이 큽니다.
사랑으로 치면 풋사랑인 첫사랑 또는 처음 사랑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더 완전한 사랑으로 사랑이 성숙해가는 것이지요.
우리는 종종 초심이나 첫사랑 같은 것에 향수와 같은 것이 있고
그래서 그리로 돌아가고 싶거나 돌아가야 한다는 마음도 있는데
우리가 가야 할 곳은 초심이 아니라 완성이지요.
초심에 순수한 면은 있지만, 초심이 완전한 것은 아니니
공연히 초심과 첫사랑에 대한 패배주의적 향수 때문에
완성을 위한 열망을 꺾지 않는 오늘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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