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9월 30일 연중 제26주간 수요일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
예로니모 성인은 340년 무렵 크로아티아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찍부터 로마에서 라틴 말과 그리스 말을 깊이 공부한 뒤 정부 관리로도 일했으나, 수도 생활에 대한 관심으로 사막에서 오랫동안 은수 생활을 하며 히브리 말을 연구하는 데 몰두하였다. 사제가 된 그는 다마소 1세 교황의 비서로 일하면서 교황의 지시에 따라 성경을 라틴 말로 번역하였다. ‘대중 라틴 말 성경’이라고 하는 『불가타(Vulgata) 성경』이 그것이다. 또한 성경 주해서를 비롯하여 많은 신학 저술을 남기고 420년 무렵 선종한 예로니모 성인은 암브로시오 성인, 그레고리오 성인, 아우구스티노 성인과 함께 서방 교회의 4대 교부로 존경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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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기를 잡고 뒤를 자꾸 돌아다보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없다
(루가 9,57-62)
No one who sets a hand to the plow
and looks to what was left behind is
fit for the Kingdom of God.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박병규신부-
예수님께서는 잠시도 마음 편히 쉬실 곳이 없으셨습니다. 안타깝지요, 우리의 주님께서 쉬실 곳이 없으시다니요. 그런데 저는 다르게 생각합니다. 오히려 쉬실 곳이 없으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장례도, 가족에게 작별 인사도 허락하지 않으시는 예수님의 단호함을 만납니다. 어디에 얽매여 있어서는 예수님을 따를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십니다.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먼저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겠다. 그 어디에도 나만의 쉼터와 공간을 마련하지 않겠다.’ 하셨습니다.
복음을 논하고 묵상하는 데에 가장 큰 걸림돌은 이미 알고 있는 신학이나 주석학 지식을 맹신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다 읽기도 전에 이미 우리는 기존의 지식으로 복음의 의미를 판단합니다. 오늘 복음을 듣고 읽으면서 어쩌면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려면 다 버려야 해!’라고 속으로 수없이 외쳤겠지요.
그러나 저는 다르게 보입니다. 버리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해방되어야 한다는 것이 보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알리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하느님 나라의 선포는 기존의 지식과 삶의 방식에서 해방되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더 좋은 것이 있으면 기존에 즐기고 아끼던 것을 과감히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버림으로써 아까운 마음이 든다는 것은 새롭게 추구하는 것이 더 좋은 것이 아니라는 증거입니다. 하느님 나라로 떠날 때 기존의 삶이 아쉬운 것은, 그만큼 하느님 나라가 제 삶에서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겠지요.
예수님께서는 자유인이셨습니다. 저도, 우리도 자유로워지기를 기도합니다. 숨 한번 크게 들이켜고, 자신만의 세상에서 얼른 빠져나와 하느님 나라로 멋지게 여행하기를 기도합니다. 이제 우리는 자유인입니다.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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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는 그저 이 아이가 행복하게 잘 살기를 바라는 마음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해야 한다면서 이 아이를 재촉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를 부모가 자신을 간섭한다고, 자신을 힘들게 하고만 있다고 생각하니, 부모의 자신에 대한 마음을 전혀 알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하느님도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크게 기대하지 않으십니다. 그저 행복하게 잘 살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계속해서 주시고 계십니다. 그런데 이 하느님의 마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어떨까요? 혹시 자신을 간섭하고 힘들게 하는 어떤 의무감으로만 받아들이려고 한다면 어떨까요? 하느님과 나의 관계는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그토록 강조하셨던 사랑의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따라라.”라고 이르십니다. 이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달라고 하지요. 그러나 아버지의 장사보다 더 중요한 하느님의 일을 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이때 이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아마 예수님의 부르심을 짐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또 작별 인사도 못하게 하는 예수님의 말씀에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이번에도 예수님의 부르심을 짐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특별한 기대를 하고 계실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당신의 전지전능한 힘으로도 충분히 모두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부르십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당신 안에서 행복해지길 바라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사람은 하느님의 일을 인간의 일보다 먼저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의 큰 사랑을 알아채고, 하느님께서 바라는 대로 커다란 기쁨과 행복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주님 따르는 것을 짐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또 주님을 따르는 것이 하나의 의무감으로도 받아들이지 마십시오. 주님께서는 우리가 행복해지길 원하실 뿐입니다.


미국 배우 케리 워싱턴은 자신의 SNS 계정에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내가 무언가를 원할 때 신은 세 가지 답 중 하나를 주신다. 하나는 “예스(YES).”, 다른 하나는 “예스(YES). 그런데 당장은 아니야.”, 또 다른 하나는 “안 돼(NO). 왜냐하면, 내가 너를 위해 더 나은 걸 준비하고 있기 때문이야.”
이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은 하느님과의 연결고리를 놓지 않을 것입니다. 절망도 없고 언제나 희망 안에서 자신의 길을 개척해 나갈 수 있습니다. 실제로 하느님은 우리가 필요한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위의 세 가지 답을 우리 상황에 맞춰서 말해주십니다.
실망과 절망, 좌절의 삶이 아닌 희망의 삶. 기쁨의 삶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조금만 바꿔 생각하면 언제나 하느님과 함께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무언가 새로 시작합니다. 작게는 학교에 다니기 시작하기도 하고 더 나아가 직장, 결혼이나 수많은 인간관계도 우리의 결정으로 시작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일은 끝까지 해내지 못하고 중도 포기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내 전체 인생도, 물론 처음엔 내가 원하지 않아도 시작되기는 하였지만, 결국 내가 잘살아보려고 결정하고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나 인생도 중도 포기하거나 죽음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하다가 끝나는 경우가 생깁니다.
얼마 전, ‘유퀴즈온더블럭’에 고독사, 자살, 범죄현장의 특수 청소 전문가 김새별씨가 나온 적이 있습니다. 그는 수많은 죽음 뒤에 남겨진 쓸쓸한 집을 수습하고 청소하며 살아왔습니다. 이 과정에서 그도 감정이 북받쳐 일할 수 없었던 때가 있었다고 합니다. 자신도 딸을 키우는 처지에서, 딸의 죽음을 이기지 못해 딸의 자리에 인형들을 동그랗게 둘러놓고 아빠가 죽음을 선택한 집이었습니다.
왜 우리는 한번 시작한 길을 끝까지 갈 수 없을까요? ‘당신도 그런 처지를 당하면 어쩔 수 없을걸요?’라는 말을 들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왜 그런 일이 있을 수도 있음을 예상하지 못했나요?’라고 되물을 수밖에 없습니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왜 딸이 사라진 뒤에라도 살아야 하는 이유를 만들어놓지 못했나요?’라고 물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죽음이 닥쳐왔을 때의 준비가 되어있나요? “이제 길어야 3개월 남았습니다.”라는 어쩌면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 처신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나요?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그런 일이 지금 나에게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인생은 꽃길이 아닙니다. 햇빛이 좋은 날도 있지만,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태풍이 몰아칠 때도 있습니다. ‘왜 하필 나한테 이런 일이?’라고 말해 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셔도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 세상인데 우리에게야 어떤 일이든 일어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타임」지의 수석 기자 아만다 리플리는 1917년 몽블랑 군선의 폭발에서부터 2001년 9·11 테러에서 살아남은 1만 5천 명의 생환기까지, 역사적인 재난의 생존자들을 추적해 『언씽커블』이란 책을 출판했습니다. 이 제목은 우리 말로 ‘상상도 못 할 일’ 정도로 번역이 될 것 같습니다.
그녀는 재난을 당한 사람들이 일반적인 예상과는 다르게 행동한다는 결과를 내어놓았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쓰나미나 테러와 같은 재난을 당했을 경우 당연히 가능한 한 빨리 현장을 빠져나가리라 생각하지만, 실제로 생존자들은 재난 신호를 감지한 후 ‘한참 뒤에야’ 대피하기 시작했다고 말합니다. 대부분 ‘설마 그런 일이 나에게 닥치겠는가?’라고 생각하며 현실을 부정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9·11 테러 당시에 세계무역센터 빌딩에 있던 사람 중 많은 비율이, 비상계단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잘 모르고 있었고, 곧바로 대피해야 하지만 이리저리 전화하거나 사소한 물건들을 챙기느라 시간을 허비하곤 했습니다. ‘몸이 얼어붙는’ 반응 때문에 허둥대다 빠져나오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대부분 사람은 불행은 남의 일이라 생각합니다. 암에 걸리기라도 하면 ‘왜 하필 나야?’라고 원망합니다. 그러나 내가 아니면 누구에게 일어날까요? 우리는 특별하지 않습니다. 우리만 꽃길을 가라는 법이 어디 있을까요? 예수님도 가시밭길을 가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겠다고 말하는 이에게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라고 하십니다. 당신을 따르는 길이 절대로 순탄치만은 않을 것을 알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멀미하는 사람도 자신이 운전하면 멀미하지 않습니다. 예상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길을 나서기 전에 닥칠 어려움이 있을 수도 있음을 먼저 예상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아만다 리플리는 나에게 닥쳐올 일들에 대해 예상하는 것을 넘어서서 그런 일이 발생했을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지도 훈련해 놓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야 몸이 얼어붙는 상황에서도 훈련된 대로 행동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도 의연히 해야 할 일을 할 것을 종용하십니다.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라고 청하는 이에게,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라고 하십니다.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할 수 있음을 예상하는 것은 그 일이 발생했을 때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도 예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길은 단호해야 합니다. 아만다 리플리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특정한 위기 상황 때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알려주는 일이에요. 그리고 정말로 위기가 닥쳤을 때, 그렇게 할 수 있는 단호한 태도도 필요하고요.”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주님,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허락해 주십시오”라고 미적대는 이에게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라고 하십니다. 어차피 그 일을 하기로 했다면 단호하게 그것만 행할 마음을 가지라는 뜻입니다.
‘히노 오키오’의 『내일 세상을 떠나도 오늘 꽃에 물을 주세요』란 책이 있습니다. 내일 지구가 망해도 오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스피노자의 말을 조금 바꾼 제목입니다. 말기 암 선고를 받은 환자들에게 죽음보다 삶에 더 충실하여지자고 말하는 책입니다. 죽음 앞에서 무력해지지 않으려면 사형선고를 받더라도 그것과 상관없이 해야 할 오늘의 일이 있어야 합니다.

-조재형신부-
형님은 책을 좋아하셨습니다. 가끔씩 형님이 읽은 책을 읽곤 했습니다. 이광수의 흙, 펄벅의 대지, 스탕달의 적과 흑, 헤르만 헤세의 지와 사랑, 리처드 버크의 갈매기의 꿈을 읽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모두가 현실이라는 벽을 넘어서려는 내용이었습니다. 농촌의 계몽을 위해서 안정된 자리를 버리고 농민들과 함께하는 이야기였습니다.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는 가족의 이야기였습니다. 비천한 신분을 넘어 더 높은 곳으로 가려는 이야기였습니다. 자유를 찾아 떠나는 고독한 영혼의 이야기였습니다. 단순히 살기 위해서 나는 것이 아니라 더 높은 가치를 향해서 날아가는 이야기였습니다. 장미꽃을 담은 종이에서는 장미향이 나기 마련입니다. 생선을 담은 종이에서는 생선 비린내가 나기 마련입니다. 책을 좋아하는 형님이 있어서 문학의 향기를 맛볼 수 있었습니다.
9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2020년 나는 이웃에게 어떤 향기를 나누어 주었는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내 마음에 간직한 것이 ‘분노, 시기, 욕심, 절망, 편견’이었다면 아마도 코를 찡그리게 하는 냄새가 났을 겁니다. 내 마음에 간직한 것이 ‘인내, 친절, 온유, 나눔, 겸손’이었다면 지친 마음에 위로를 주는 향이 났을 겁니다. 오늘은 예로니모 성인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예로니모 성인은 암브로시오, 아우구스티노, 그레고리오 성인과 더불어 존경받는 서방교회의 4대 교부입니다. 무엇보다 예로니모 성인은 평생을 성서를 번역하고, 성서를 연구하면서 지냈습니다. 예로니모 성인은 ‘성서를 모르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복음서를 통해서 전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의 활동은 사도행전을 통해서 전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거룩하심과 자비하심은 구약성서를 통해서 전해지기 때문입니다.
성서는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닮은 사람을 창조하신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거룩하심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성서는 하느님의 사랑을 멀리했던 이스라엘 백성의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이방의 신을 섬기던 이스라엘 백성의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하느님과 멀어지고 타락한 사람을 사랑하신 하느님께서는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신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가셨음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음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시고, 평화를 주셨음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두려움에 떨던 제자들은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였음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성서는 하느님의 창조, 인간의 타락,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 믿는 이들의 구원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성서를 가까이하면 믿음은 희망이 되고 희망은 사랑으로 꽃이 필 것입니다.
중학생 때의 일입니다. 학교에 가려고 버스를 탔습니다. 추운 겨울이었고, 바람도 불었습니다. 다음 정거장에서 내려야 하는데, 버스 안이 너무 좋아서 그냥 지나친 적이 있습니다. 결국 종점까지 갔다가, 다시 학교로 왔습니다. 저는 당연히 내려야 하는지 알았지만 어렵게 잡은 자리가 좋았고, 버스에서 내리면 추울 거라는 생각에 그만 내리지 못하였습니다. 살면서 중학생 때와 같은 실수를 되풀이 하지는 않지만 다른 면에서 중학생 때와 비슷한 행동을 하곤 합니다. 담배를 끊는 것이 좋다는 것을 알면서도 17년 동안 담배를 피웠습니다. 지금은 담배를 끊은 지 25년이 되었지만, 처음에 담배를 끊는 것이 어려웠습니다. 담배가 가지는 중독성이 그만큼 강했기 때문입니다. 술도 그렇습니다. 지나친 음주는 건강에도 좋지 않고, 다음 날 일을 하는데도 지장을 줍니다. 무엇보다 기도하는 시간을 빼앗기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한잔 술의 알뜰한 유혹을 이겨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신앙인들에게 꼭 필요한 덕목들이 있습니다. ‘기도, 희생, 봉사, 나눔’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바쁘다는 핑계로 기도의 정거장을 지나치곤합니다. 좀 더 여유가 생기면 나누겠다고 하면서 지금 나눌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립니다. 성당에서 주어지는 희생과 봉사의 시간들과 나의 여가 시간이 겹쳐지면 내 몸과 마음은 희생과 봉사보다는 인생을 즐기는 여가 시간으로 기울어집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 나라는 지금 이곳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하십니다.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하십니다. 죽은 이들의 문제는 죽은 이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예수님을 따르려면
-송영진신부-
1)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바란다면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야 하는데,
예수님을 따르는 일은 가장 중요하고, 가장 급하고, 가장 먼저 할 일입니다.
구원과 영원한 생명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
‘온 세상’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것이고(마태 16,26),
“집주인이 문을 닫아 버리면” 열어 달라고 아무리 애원해도
소용이 없다는 점에서(루카 13,25) 가장 급한 일입니다.
그래서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입니다.
2) 예수님을 따르기로 결심했으면,
한눈팔지 말고, 딴 생각 하지 말고 예수님만 바라보면서 가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수많은 유혹이 끊임없이 다가옵니다.
사탄이 유혹할 때도 있고, 세속이 유혹할 때도 있고,
자기 안에서 유혹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사탄은 예수님도 유혹했습니다.
예수님은 주님이시니까 간단하게 그 유혹을 물리치셨지만,
우리는 우리 힘만으로는 사탄을 물리치지 못합니다.
사탄은 기도가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나가게 할 수 없습니다(마르 9,29).
그래서 끊임없이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예수님만 바라보면서 예수님을 따라가는’ 방법입니다.
세속의 유혹이나 자기 안에서 생긴 유혹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지 못합니다.
3) 예수님을 따라 나섰으면, 끝까지 가야 합니다.
중간에 그만두면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어버립니다(루카 14,28-30).
이 말은, “끝까지 갈 자신이 없으면 시작도 하지 마라.” 라는 뜻이 아니라,
힘들어도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전력을 다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어떻게 하나 하고 내버려 두고 보기만 하다가
마지막에 심판이나 하시는 그런 분이 아니라,
우리를 끝까지 데리고 가려고 애쓰시는 분입니다.
신앙생활은 우리 힘만으로 하는 생활이 아닙니다.
하느님과 예수님과 성령의 보호와 도움을 받으면서 하는 생활입니다.
그 보호와 도움은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에게 베풀어집니다.
꾸준히 ‘기도하면서’ 노력한다면, 누구나 그 도움을 받아서 끝까지 갈 수 있습니다.
<가다가 넘어질 수도 있고, 다칠 수도 있습니다.
그런 때에는 예수님께서 우리 손을 잡아서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힘들어서 못 걸어가겠다고 하소연하면 우리를 업고서라도 가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뒤쫓아 가고, 찾으면 크게 기뻐하면서
그 양을 어깨에 메고 집으로 돌아가는, 우리의 목자이신 분입니다(루카 15,4-5).>
“그들이 길을 가는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루카 9,57-58)”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은,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온갖 고난과 시련,
사람들의 냉대와 배척을 참고 견딜 각오를 해야 한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따라서 걸어가는 길은 ‘꽃길’이 아니라, ‘고난의 가시밭길’입니다.
물론 처음부터 줄곧 그렇다는 것은 아니고, 편안하고 쉬운 구간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좁은 문’을 향해서 걸어가야 하는
힘들고 어렵고 험한 길이라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 길 끝에서
부활, 생명, 승리, 영광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들을 얻어 누리는 행복은, 예수님을 따르는 과정에서 겪었던
고난과 시련들을 모두 잊어버릴 정도로 크고 강력할 것입니다.
그리고 고난은 잠깐이고 행복은 영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라라.’ 하고 이르셨다. 그러나 그는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 하고 말씀하셨다(루카 9,59-60).”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어떤 사람은 아마도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는 일 때문에 걱정을 많이 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여기서 ‘죽은 이들’은 ‘하느님을 안 믿는 사람들’입니다.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 라는 말씀은,
집에 가지 말라는 뜻도 아니고,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지 말라는 뜻도 아니고,
“세속의 일에 연연하지 마라. 그런 일로 걱정하지 마라.”로 해석됩니다.
(그 제자는 아마도 장사를 지내는 일 자체가 아니라,
사소하고 세부적인 절차 같은 것을 걱정하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합니다.)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 라는 말씀은,
“무엇이 가장 중요한 일인지 잊지 마라.”로 해석됩니다.
신앙인은 세속의 일을 걱정하거나 집착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부모에게 효도하여라.” 라는 십계명을 형식적으로 지키는
위선자들을 엄하게 꾸짖으신 분입니다(마르 7,9-13).
효도는 살아 있는 부모에게도 해야 하고,
돌아가신 부모에게도 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부모가 세상을 떠난 일 때문에 충격과 슬픔에 빠져서
신앙생활을 중단하거나 부르심에 응답하지 못하는 경우가 실제로 있습니다.
그 충격과 슬픔은 비난받을 일이 아닌데, 그렇다고 해서 그 일이 신앙생활을
중단하거나 부르심에 응답하는 일을 중단할 이유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또 장례식의 세부 절차 때문에 가족들이 다투거나
갈등을 겪는 것을 볼 때가 있는데,
그런 일들은 정말 중요한 것을 놓치고 사소한 것에 집착하는 모습입니다.>
“또 다른 사람이 ‘주님,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루카 9,61-62)”
여기서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에 못 들어간다.” 라는 뜻입니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것은 세속 일에 대한 미련과 집착을 뜻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해서 생각하면,
이 사람은 주님을 따르려는 마음은 있지만, 그 마음이 그다지 간절하지도 않고,
또 그 마음이 가족들을 생각하는 마음보다 우선순위가 뒤로 밀려 있습니다.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는 것 자체가 잘못은 아닌데, 세속 일을 ‘먼저’ 하고,
주님을 따르는 일은 ‘나중에’ 하겠다는 그 마음은 잘못입니다.

-조욱현신부-
복음: 루가 9,57-62: 예수님을 따르려면
어떤 사람이 주님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57절)하고 말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받아들이시지 않고,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58절)라고 하신다. 그 사람은 주님을 따른다고 하는 것이 사도의 영예를 받으려는 것 같다. 사도들은 주님께서 부르셨고 그들에게 영예도 주셨던 것이다.
주님께서 그 사람에게 이 말씀을 하신 것은 그를 바로 잡아서 하느님 안에 잘 성장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여기에 나오는 하늘의 새와 여우는 교활하고 부정한 권능들로 악마의 무리를 의미한다. 우리 마음에 떨어진 말씀의 씨앗을 채 가서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하는 사악한 영들을 두고 하신 말씀이다. 우리 안에 여우의 굴과 새들의 보금자리가 있으면 주님께서 어떻게 들어오셔서 쉬실 수 있겠는가?
다른 사람은 예수님을 따르라고 했더니,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59절) 하였다. 주님께서는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60절)고 하셨다. 여기서 죽은 이들은 아직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세례로 새로이 태어나지 못하였기 때문에 죽은 이들로 표현한 것이다.
다른 사람은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허락해 주십시오.”(61절)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단호하게 말씀하신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62절) 주님의 제자가 되려는 사람은 인간적인 일이 아무리 중요하게 생각되어도, 주님의 뜻을 따르는데 우리의 발걸음을 조금이라도 더디게 한다면 가차 없이 끊어 버려야 한다.
이 말씀은 또한 우리가 세례를 받으면서 끊어버리고 도망쳐 나온 악마와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며 반대의 길로 가려하는 세상으로 다시 돌아가는 일이 없도록 우리에게 하신 말씀이다. 또 이렇게도 말씀하셨다. “마찬가지로 들에 있는 이도 뒤로 돌아서지 마라. 너희는 롯의 아내를 기억하여라.”(루카 17,31-32) 아무도 재물에 대한 욕심이나 개인적인 이유 때문에 우리가 믿고 따르고 있는 주 그리스도를 등지는 일이 없어야 함을 말씀하신 것이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고자 하는 사람은 어둠을 향해 걷는 것이 아니라, 밝아오는 여명을 향해 걸어야 하기에 과거에 집착해서 현실에서 머뭇거리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는데 몰두하는 적극적인 삶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마땅한 거처도 없으셨던 주님을 따르고, 주님을 따르는데 망설임 없이 즉시 따를 수 있는 자세와, 지금의 현실에 안주하여 집착하지 않고 자꾸 뒤를 돌아봄이 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다.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루카 9, 60)
-한상우신부-
치열한
사랑 없이는
말씀과 함께
살아갈 수 없다.
말씀은
모든 시간의
마디마디와
함께한다.
말씀이
돋아나고
점점 자라난
말씀은 드디어
익어간다.
말씀 하나로
모든 것은
사랑으로
소통된다.
사람의 길은
말씀의 길이다.
말씀이 익어가면
마음도 익어간다.
말씀의 길은
소통과 진정한
자유의 길이다.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 내면을 향해
뜨겁게 타들어간다.
말씀에
자신을 봉헌한
성 예로니모
사제의 축일이다.
하느님의 빛은
말씀의 빛으로
우리를 밝힌다.
말씀의 빛은
하느님 나라의
참된 등불이다.
말씀을
사랑한 삶이
은총의 삶이다.
그에게서
성경의 번역은
가장 적극적인
말씀의 실천이었다.
말씀의 대중화는
귀한 말씀의
보편적 만남이며
새로운 시작이 된다.
말씀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없다.
말씀은
사랑처럼
가까이 더욱
다양한 방법으로
풍요롭게
전하여 져야한다.
가장 행복한
사람은
하느님을 찾는
사람에게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다.
말씀의 번역은
하느님을 사랑한
사람의 가장
아름다운
기도였다.
말씀으로
사랑으로
이 세상을
다 물들이길
기도한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에게 주님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묻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루카 9,58)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루카 9,59)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루카 9,61)
복음의 대목에서는 주님을 따르고자 하는 세 사람이 등장합니다. 각각의 경우마다 사정과 정황이 다른 듯하지요. 그에 따라 예수님의 답변도 달라집니다.
가난하고 병들고 약한 이들에게는 한없이 자비로우시고 자애가 넘치시는 예수님이시지만, 부르심과 소명에 대해서는 이처럼 단호한 모습을 보이십니다. 아마도 그건 제자들이 주님의 은총을 전하는 전달자로서 마냥 수혜자로만 머물러서는 안 되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주님께서 파견하신 이, 그분의 대리자로서 그에 합당한 영혼과 정신을 가지고 소명을 수행해야 할 테니까요.
기껏 주님께 다가가 추종의 의사를 밝혔다가 냉정한 답변을 들은 이들 편에서는 다소 냉혹하기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버지 장례나 가족과의 작별 인사조차 금하는 스승이라면 제자단 입문을 재고해야 할까 인간적으로 고민을 할지도 모르겠네요.
그런데 가만히 주님의 말씀을 들여다보면, 예수님이 무슨 감정이나 편견을 가지고 답을 하신 건 아님을 알겠습니다. 그 사람에게 그렇게 답변하신 이유는 어쩌면 예수님과 당사자 둘만 알 겁니다. 이 말씀들은 그의 영혼 깊은 곳에 있는 갈망과 욕망을 모두 아시는 예수님의 개인 맞춤형 답변이지요.
주님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는가에 대한 답은 사실 우리 각자의 내면에 있습니다. 내면 깊숙한 곳에 자리한 상처와 어둠, 두려움과 분노 등이 주님을 향한 시각에 필터로 지나치게 작동하면 올바른 하느님관을 지니기 어렵지요. 말씀을 문자 그대로 집착해 해석하는 것을 넘어서, 말씀하시는 분의 마음을 알아듣도록 애써야 합니다.
제1독서 대목은 삶의 밑바닥까지 떨어진 욥에게 친구들이 충고하자 욥이 답하는 내용입니다.
"분노하시어, 뒤엎으시는 분, 요동치게 하시는 분, 솟지 말라 명령하시고, 봉해 버리시는 분, 등을 밟으시는 분, 잡아채시며..."(욥 9,5-12)
욥의 말 안에 드러난 하느님 모습이 많이 낯설지요? 우리가 아는 "흠 없고 올곧으며 하느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하는"(욥 1,8) 욥의 목소리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입니다. 그가 말하는 하느님이 아주 폭력적이고 강압적이며 권위주의적으로 느껴지네요.
어쩌면 지금 가족과 재산, 건강까지 비극적으로 한꺼번에 잃은 욥의 내면에 감추어져 있던 분노와 억울함, 서러움, 두려움이 한껏 끌어올려지는 것 같습니다. 욥과 함께, 묵묵히 듣고 계실 주님의 마음에도, 읽고 있는 우리의 마음에도 고통이 파고드는 것을 느낍니다. 욥은 지금 그 피폐해진 영육 안에, 불행이 뒤범벅 되어 절규하며 울부짖는 모든 인류를 담고 있습니다.
"내 소리에 귀를 기울이시리라고는 믿지 않네."(욥 9,16)
욥은 하느님께서 침묵하고 방관하신다고 여겨 더욱 슬퍼합니다. 하느님을 고통 중에 함께하시는 분으로 더이상은 믿지 않는 것. 이 오해는 주님께도 너무나 큰 아픔입니다.
앞으로 욥은 우리도 얼마쯤은 체험으로 알고 있는 시험의 시간을 통과할 것입니다. 상실과 시련, 가난 속에서 예전에 부유하고 행복하고 충만했을 때 가졌던 하느님관이 무참히 부서졌다가 이내 영적으로 거듭 정화되는 죽음과 부활의 영적 여정을 지나게 될 것입니다. 욥은 지금 황망함과 두려움으로 거칠어진 속내를 여과없이 내비칠지언정, 끝까지 하느님을 놓지 않습니다. 하느님도 고통받는 이에게서 흘러나오는 울분과 불평, 악담으로 욥을 내치지 않으시고요.
사랑하는 벗님! 나는 주님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살펴보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자라온 환경과 배움과 사회적 만남 안에서 형성된 하느님관이 주님의 진심을 이해하는데 방해가 되는지, 혹은 도움이 되는지요? 우리를 각자의 자리로 불러 주시고, 각자에게 알맞게 권고하시고 이끄시는 그분 목소리를 어떻게 받아들이는지요?
복잡한 생각을 내려 놓고 주님을 바라봅시다. 그분의 부르심에는 오직 사랑, 사랑밖에 없다는 걸 우리는 언젠가 반드시 알게 될 것입니다.
성 예로니모,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마음만은 풍요로운 한가위 명절 되시길 빕니다.

먼저 해야 할 것
-김찬선신부-
오늘 복음은 주님을 따름과 관련한 가르침입니다.
오늘 복음엔 주님을 따름과 관련하여 세 가지 예가 나오는데
주님을 따르려는 사람들의 얘기 중에 <먼저>라는 눈에 들어왔습니다.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
"주님,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허락해 주십시오.“
이에 대한 주님의 대답은 이렇게 단호합니다.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그러니까 주님을 따르려는 사람은 먼저 할 것을 얘기하는데
주님은 그들이 먼저 하겠다고 하는 것을 허락지 않으십니다.
그것이 먼저 해야 할 것은 아니라는 말씀이 되겠지요.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잖습니까?
그러니까 앞으로 계속 주님을 따를 것인데
그 전에 정리해야 할 것을 깔끔하게 정리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입니다.
이런 것이 결코 나쁜 것이거나 비신앙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엘리사가 엘리야의 제자될 때의 얘기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열왕기를 보면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작별 인사를 한 뒤에 선생님을
따라가게 해 주십시오."라고 엘리사가 청하자 엘리야는 "다녀오너라.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하였다고 그러느냐?"고 답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먼저 하고자 한 것을 주님께서 그렇게 단호하게
허락지 않으신 것은 그것이 하지 말아야 할 짓이거나 비신앙적인
것이어서가 아닌데 그렇다면 그것은 뭣 때문입니까?
주님을 따름은 다른 무엇보다 절대적으로 우선적인 것임을,
주님을 따르고자 할 때는 다른 것은 아무것도 고려하지도
생각하지도 말아야 함을 강조하기 위해서지요.
그런데 이것보다 더 큰 이유 그러니까 따름의 절대성을 강조하기 위함보다
더 큰 이유가 있으니 그것은 따름의 즉각성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주님을 따르기로 하였다면 그 따름은 즉각적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꼭 그렇게 즉시 따라야 하는지,
언제라도 따르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있지요.
그래서 가능한 한 늦게 세례를 받으려고 하고
재속 프란치스코회의 경우 가능한 한 늦게 입회하려고 하고,
수도원 입회자의 경우 일찍 입회한 것을 억울하게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만일 임금님이 가자고 하면 즉각 따르지 않겠습니까?
아니, 임금님보다 더 소중한 분 그러니까
내가 너무도 사랑하는 분이 가자고 하면 즉각 따르겠지요.
미룰 이유가 없습니다.
뒤를 돌아볼 이유도 없습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망설이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당신을 억지로가 아니라 사랑으로 따르라고 하시고,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행복을 위해 따르라고 하십니다.
오늘 주님은 우리가 당신을 따르라고 애걸하지 않으시고
행복하고 싶다면 당신 말씀대로 즉각 당신을 따르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매우 고압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주님은 우리의 선택을 기다리고 계시는 거지요.
강요치 않고 우리의 선택을 존중하시는 주님 사랑에 감사하는 우리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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