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9월 28일 연중 제26주간 월요일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이를 받아들이면
곧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며 또 나를 받아들이면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루가 9,46-50)
“Whoever receives this child in my name
receives me,
and whoever receives me
receives the one who sent m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박병규신부-
사람마다 문제의 크기를 다르게 받아들입니다. 누군가에게는 작은 것이지만 또 누군가에게는 엄청나게 크게 다가오는 것이 세상의 상대적 논리입니다.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굳이 내 편, 네 편을 갈라 세우거나 옳고 그름을 명확히 하는 것이 신앙이 아닙니다. 반대나 찬성이 명확해서 도저히 타협할 수 없는 자리에 신앙의 가능성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이데거의 제자였던 독일의 정치 이론가 한나 아렌트의 표현을 빌리자면 악은 평범합니다. 악은 결코 섬뜩한 악마의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인자한 아버지의 모습일 수도, 해맑은 아이의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악은 제 모습을 숨기고 나타나는 절대적 존재가 아니라, 선한 것 안에서도 옳은 것 안에서도 얼마간의 부족함과 어긋남으로 발생하는 것이기도 하지요.
세상은 쉬운 답을 원합니다. 사실 쉽다기보다는 편한 답을 원합니다. 모두가 인정하는 답, 모두가 그럴 것이라 추정하는 답 말입니다. 그래서 낯설고 불편한 답은 옳더라도 피하는 것이 세상입니다. 오래전 어렸을 때, 동네에 서커스단이 오면 그렇게도 가고 싶었지요. 그러나 문 앞에서 호객하는 서커스단 관계자의 말은 늘 이랬습니다. “애들은 가라!” 이 말을 다시 고쳐 보면, 애들은 돈이 안 된다는 말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 예수님께서는 그 ‘애들’을 당신 곁에 세우십니다. 인간이 덜된 존재로 하찮게 여기던 어린이를 통하여 가장 큰 것을 보시는 예수님을 사람들은 불편해했고 죽이기까지 합니다.
누가 큰 사람인지 답이 분명한 사회는 죽은 사회입니다. 누구든 큰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설렘이 가득한 사회는 하느님 나라가 멀지 않은 사회입니다. 지금의 기준으로 선악과 정의를 논하면서 흡족해하는 이들의 편협성을 오늘 복음은 질타합니다. 절대 선과 정의를 좇고 있는 신앙인은 자신의 판단과 식별 안에 아름다운 척하는 섬뜩한 악마가 함께 있음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자신의 판단과 식별을 과신하지 말아야 할 이유입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열여섯 시간 동안 실험을 진행하며 쥐들은 480회의 전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탈진한 쥐는 전기 충격을 받은 쥐가 아니라 이 고통을 관찰할 수밖에 없었던 쥐였다고 합니다. 유리창 너머의 고통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두려움과 스트레스를 느꼈고, 바라보는 것밖에 할 수 없다는 사실에 더 큰 무력감을 느끼게 된 것입니다.
고통 속에 있는 사람보다 고통을 바라보는 사람의 아픔이 더 큽니다. 그런데 고통 속에 있는 사람은 그 사실을 잘 모릅니다. 그래서 오랜 병으로 힘들어하는 환자와 그 가족이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고통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힘들 정도로 무시무시합니다. 그렇다면 이 고통을 이겨낼 힘은 무엇일까요?
함께 하는 것입니다. 고통 안으로 들어가서 함께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함께 하는 마음보다는 ‘나만 아니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품을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과연 마음이 편안할까요? 더 큰 고통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육이 되신 하느님의 말씀인 예수님께서는 누가 가장 큰사람인가를 두고 다투는 제자들의 생각을 아십니다. 사실 다투게 되면 절대로 함께할 수가 없습니다. 특히 그 다툼의 이유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함이 아닌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면 더욱더 함께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영혼의 위대한 의사답게 어린아이를 그들 앞에 본보기로 세우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
어린이까지 받아들여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눈높이를 낮춰야지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어린이의 행동과 어린이의 말을 따라 하게 되지요. 어린이 앞에서는 세상의 체면이나 명예가 별 소용이 없습니다. 이렇게 자기 자신을 낮춰서 함께 하는 사람만이 주님과 함께할 수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고통을 이겨내는 방법은 ‘혼자’가 아닙니다. 자신을 낮춰서 누구든지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이 고통과 시련을 이겨내면서, 지금을 기쁘고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강의 부탁을 받으면 아무리 멀고 환경이 좋지 않더라도 가려고 합니다. 그래서 해외에도 또 사람이 없는 시골 본당에 가서도 강의를 해왔습니다. 저를 불러주시는 것에 감사하면서, 지금까지 거부하지 않고 기쁘게 강의를 해왔습니다(물론 올해는 코로나19로 거의 강의를 못 했습니다). 그런데 망설일 수밖에 없었던 강의 청탁이 있었습니다. 어쩌면 두려움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곳은 신학교였습니다. 수준 높은 강의를 들어 온 신학생에게 어떤 깨달음을 줄 수 있을까? 부족한 저의 강의를 들어는 줄까? 등의 생각으로 강의를 하겠다고 마지못해 허락했지만, 불안을 멈추기가 힘들었습니다.
망설임, 두려움. 사실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나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의지만 있다면 그 어떤 것도 별것 아닌 것이 됩니다. 스티브 프레스필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대부분에게는 두 개의 삶이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삶과 우리 내면에 있는 살지 않은 삶. 이 둘 사이에는 저항이라는 게 버티고 있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저항을 부숴야 자신이 살고 싶은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남의 단점이 나의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면
-전삼용신부-
참으로 성공한 인생은 무엇일까요? 하느님 눈에 큰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제자들이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것으로 다투고 있었습니다. 크게 되려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이 하나를 세우신 다음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라고 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의 크기를 심판하실 때 사용하시는 유일한 기준은 ‘겸손’입니다. 예수님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은 이 세상에서 자신을 가장 낮출 줄 아는 사람이라 하십니다. ‘사랑’이 큰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교만하면 사랑을 할 수 없으니 겸손의 크기가 곧 사랑의 크기라 할 수 있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아주 작고 보잘것없는 사람들까지도 잘 받아들이기에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입니다. 하느님은 가장 크시지만 가장 작은 밀떡 안에 계신 것처럼, 가장 작은 사람들 안에 계십니다.
캐나다 몬트리올 어떤 초등학교에서 정신적으로 조금 모자란 랄프라는 아이는 성탄 연극 때 여관 주인 역할을 하며 오갈 데 없는 요셉과 마리아를 자기 방으로 들어오라고 했습니다. 그는 가장 작은 이들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그 태중에 예수님이 계셨고 예수님은 또 하느님을 품고 계셨습니다. 그러니 그는 하늘만큼 큰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사람을 판단하기 때문에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오늘 예수님의 제자들도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와 함께 스승님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 하게 막아 보려고 하였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사람에게서도 단점을 찾아냅니다. 예수님은 “막지 마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너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라고 하십니다. 제자들은 여전히 자신들만의 특권의식을 내세우려 하였습니다. 이것이 교만입니다.
교만에서 벗어나려면 나의 단점들을 극복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나에게 단점이 있으니 남의 단점도 보이는 것입니다.
제가 지금도 기억하는 어머니께 잘못한 일이 있습니다. 잘 기억은 안 나지만 버스에서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사람이 많아서 어머니와 저는 서서 있었습니다. 한 정류장에서 앉아있던 사람이 내리자 어머니는 재빨리 그 자리로 뛰어가 앉았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 앉을 자리에 저도 앉으라고 손짓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앞에는 그 자리를 맡으려고 기다리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저는 창피해서 어머니에게 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인상도 찌푸렸던 것 같습니다. 어머니는 내려서 매우 서운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온종일 저 때문에 뛰어다녀서 몹시 지쳐있었는데, 어머니보다 그 앞에 있는 사람이 더 소중하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할 말이 없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저는 공중도덕을 잘 지키는 사람이라는 특권의식을 지키려 어머니에게 해야 할 의무를 소홀히 했던 것입니다. 나의 단점을 커버하기 위해 어머니의 단점을 나의 것처럼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남의 단점을 받아들이면 나의 단점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남을 받아들이려면 먼저 나의 단점들을 극복해야 합니다. 나이 들며 유일하게 신경 써야 하는 것은 남의 단점들도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일입니다.
저희 어머니는 어렸을 때 길을 잃어 고아로 크며 남의집살이하며 고생하실 수밖에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어떤 물건이, 혹은 누군가가 버려지는 것을 그냥 보지 못하십니다. 저희 집에는 이미 쓴 물건들이 많이 쌓여있고 그것을 버리라고 하면 어머니에게 혼이 납니다. 물론 그런 것들을 흘려보내 주는 것을 배운다면 더욱 좋겠지만 지금처럼 사시는 것만으로도 참으로 훌륭해 보이십니다.
저희가 어렸을 때 어머니는 길을 잃고 방황하는 한 아이를 집에 들여 씻겨주고 재워주고 좋은 옷을 주시고 당분간 머물게 하신 적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아이에게서 당신의 모습을 발견하셨기 때문입니다.
포용력이란 무조건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익은 사람이 자신의 옛 모습을 가진 이들을 이전의 자신처럼 대해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익어간다는 뜻일 것입니다. 남의 단점을 판단하지 않고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내가 그 단점을 극복했어야 합니다.
쭉정이는 자신도 곡식이라는 것을 뽐내기 위해 익지 못한 것들을 판단합니다. 하지만 이미 익은 곡식은 새싹이든, 자라고 있든, 속이 아직 차지 않은 쭉정이든, 자신이 그런 적이 있어서 언젠가는 가득 차게 될 것으로 봅니다. 그래서 이미 익은 곡식은 익지 않은 다른 것들도 자신처럼 곡식으로 봅니다. 부족한 이들도 모두 자기 자신처럼 보는 것입니다.
나이 들며 더욱 포용력이 향상되는 이유는 그만큼 이전의 단점들에서 벗어나기 때문일 것입니다. 산도 벗어나야 볼 수 있습니다. 아직도 남의 단점이 나의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면, 그 단점을 내가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겸손은 낮아지는 것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인정할 수 있는 넓은 마음입니다.

-조재형신부-
미주가톨릭평화신문의 지면 중에 ‘평화 책꽂이’가 있습니다. 책을 소개하고 필자의 느낌과 의견을 나누는 자리입니다. 한영국 선생님은 정채봉님의 ‘초승달과 밤배’를 소개하였습니다. 그동안의 주로 외국 작가의 책을 소개하였는데 이번에는 한국 작가의 책을 소개한다고 하였습니다. 내용을 알고 싶으신 분은 미주가톨릭신문 홈페이지 지면보기 9월 13일자를 읽어보시면 좋겠습니다. 예전에는 ‘연좌제와 신분제’의 사회를 살았습니다. 연좌제는 부모의 잘못, 특히 사상과 관련된 잘못이 있으면 자녀들 또한 영향을 받는 제도입니다. 공무원 시험에 응시할 수 없고, 정보원에 의해서 감시를 받기도 했습니다.
초승달과 밤배에서 할머니는 손자와 손녀를 키우고 있었습니다. 아들이 사상범으로 몰려 죽었기 때문입니다. 손자와 손녀 역시 사상범의 가족이라는 족쇄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 많은 사람이 연좌제로 인해 고통을 받았습니다. 저의 주변에도 그런 분들이 있었습니다.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얻었지만 면접에서 떨어지곤 했습니다. 연좌제의 벽이 높았기 때문입니다. 민주주의가 발전하고, 인권이 신장되면서 ‘연좌제’는 더 이상 삶을 가로막는 족쇄가 되지 않고 있습니다.
미국이 가끔씩 큰 홍역을 치루는 경우가 있습니다. ‘Black Lives Matter'입니다. 지금 미국에 있는 흑인의 선조들은 대부분 아프리카에서 노예로 팔려왔습니다. 알렉스 헤일리의 ’뿌리(Roots)'를 통해서 미국 흑인 노예들의 삶과 애환을 알 수 있습니다. 한 세기 전만해도 대부분의 나라는 신분제의 사회였습니다. 한국도 ‘사농공상(士農工商)’이라는 신분이 있었습니다. 그 아래에는 ‘천민(賤民)’이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상상하기 어렵지만 사람이 그 신분에 따라서 등급이 매겨지는 사회였습니다.
신분이 다른 사람과는 사랑할 수도 없었고, 사랑한다고 해도 결혼할 수 없었습니다. 재능과 능력이 있어도 신분이 천하면 재능과 능력을 인정받지 못하였습니다. 때로는 그 재능과 능력 때문에 힘든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시대가 변하면서 우리는 더 이상 피부색 때문에, 성별 때문에, 신분 때문에 차별 받지 않는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유엔 인권 선언문은 이렇게 선포하였습니다. “우리 모두는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고, 존엄성과 권리에 있어서 평등하다. 우리 모두는 이성과 양심을 가졌으므로 서로에게 형제자매의 정신으로 행해야 한다. 피부색, 성별, 종교, 언어, 국적, 갖고 있는 의견이나 신념 등이 다를지라도 우리는 모두 평등하다.”
연좌제와 신분제는 민주주의와 인권의 신장에 따라서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어쩌면 가장 쉬운 일인데 인류가 아직 해결하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가난의 문제입니다. 가난은 사상과 신분의 문제가 아닙니다. 가난은 물질과 재물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나누면 해결 되는 문제입니다. 그러나 가난은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안겨주고 있습니다. 굶주려서 죽는 사람이 있습니다. 치료받지 못해서 죽는 사람이 있습니다. 배움의 기회를 얻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집이 없어서 거리에서 지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코로나19는 가난한 국가와 가난한 사람들을 더욱 힘들게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도 가난한 이들을 우선적으로 배려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들은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가난한 라자로를 외면했던 부자는 하늘나라에 갈 수 없었다고 하셨습니다. 재물을 창고에 가득 쌓아 놓은 부자는 세상을 떠나는 순간에 후회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재물을 하늘에 쌓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진 재물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워 주었던 자캐오를 축복하시면서 오늘 이 집은 구원받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재물을 하늘에 쌓는 것은 가난한 이들과 재물을 나누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은 초대교회의 공동체가 기쁜 마음으로 가진 것을 서로 나누었다고 전해줍니다. 가난한 사람도, 굶주린 사람도, 과부도, 어린아이도 주님의 식탁에서 함께 먹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오늘 욥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알몸으로 어머니 배에서 나온 이 몸 알몸으로 그리 돌아가리라.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 받으소서.” 우리가 이 세상에 빈 몸으로 왔음을 안다면 재물과 돈에 그리 연연해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기쁘게 나눔으로서 하늘에 보화를 쌓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은 세상에서 재물을 많이 쌓은 사람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선행을 많이 쌓은 사람입니다. 연좌제와 신분제의 벽을 허물었다면 가난한 이들의 아픔과 함께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 모든 것이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소중한 생명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겪는 시련은 하느님을 찾게 하고 하느님께 더 집중하게 만드는 은총의 도구입니다!
-양승국신부-
혹시 그런 체험 해보신 적이 있는가요? 불행이 한꺼번에 몰려오는 체험 말입니다. 주변을 돌아보면 의외로 그런 분들 참 많습니다. 불행이라는 것은 결핍투성이인 인간 존재가, 불완전한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겪어야만 하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때로 해도 해도 너무 지나칠 때가 있습니다.
욥이 그랬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평화롭고 만사형통하던 욥에게 상상을 초월하는 혹독한 시련을 체험케하십니다. 그가 연속적으로 겪은 불행의 강도가 얼마나 컸던지, 위로 방문 온 친구들은 할말을 잃습니다. 너무나 받아들이기 힘겨웠던 욥 역시 나중에는 자신의 태어난 날 마저 저주하게 됩니다.
평화롭던 욥의 집에 갑작스레 적군들이 들이닥칩니다. 적군들은 가축들 중에서도 가장 값나가는 소들과 암나귀들을 약탈했고, 가축들을 돌보던 목자들을 무자비하게 살해했습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유일한 생존자가 달려와서 욥에게 사건의 개요를 보고했습니다.
유일한 생존자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이번에는 양치기 한명이 달려와서 외쳤습니다. “하느님의 불이 하늘에서 떨어져 양떼와 머슴들을 불살라 버렸습니다. 저 혼자만 살아남아 이렇게 소식을 전해 드립니다.”(욥기 1장 16절)
그게 다가 아니었습니다. 그 양치기의 보고가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또 다른 사람이 다가와 외쳤습니다. “칼데아인들이 세 무리를 지어 낙타들을 덮쳐 약탈하고 머슴들을 칼로 쳐 죽였습니다. 저 혼자만 살아남아 이렇게 소식을 전해 드립니다.”(욥기 1장 17절)
갈수록 점입가경입니다. 욥은 설마 설마 했는데, 또 다른 이가 와서 가장 슬픈 소식을 전해주었습니다. “자제분들 위로 집이 무너져 내려 모두 죽었습니다. 저 혼자만 살아남아 이렇게 소식을 전해 드립니다.”(욥기 1장 19절)
보십시오. 욥은 순식간에 재산이며 가축이며 자식들이며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불과 몇분 사이에 그간 욥에게 베푸셨던 모든 선물들을 다 거두어가신 것입니다.
제가 욥같았으면, ‘하느님도 무심하시지? 어떻게 내게 이런 가혹한 현실을 허락하시는가? 이런 상황 속에서 내 삶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으랴?’하고 울부짖으며 좌절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욥의 태도를 보십시오. 놀랄 지경입니다. 욥은 자리에서 일어나 애통과 슬픔, 참회의 표시로 겉옷을 찢고 머리를 깎았습니다. 그리고 외쳤습니다.
“알몸으로 어머니 배에서 나온 이 몸, 알몸으로 그리 돌아가리라.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받으소서.”(욥기 1장 21절)
더 놀랍게도 욥은 그 어처구니 없는 일을 당하고도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 따지지도 않았으며 원망하지도 않았으며 부당한 행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욥은 흠 없고 올곧은 사람이었습니다. 언제나 하느님을 경외하며 악을 멀리하였습니다. 그런 욥이었기에 하느님의 축복도 풍성했습니다. 그는 동방에서 가장 큰 부자였습니다.
당시 가축의 숫자는 부의 기준이었습니다. 욥에게는 양이 칠천 마리, 낙타가 삼천 마리, 겨릿소가 오백 마리, 암나귀가 오백 마리나 되었고, 가축을 돌보는 일꾼들의 숫자도 엄청났습니다.
욥과 그 가족들은 끝도 없이 펼쳐진 푸른 초원 위에 평화로이 풀을 뜯고 있는 가축들을 흡족한 얼굴로 바라보며 하느님께 깊은 감사를 드렸습니다. 동시에 선물로 주어진 부를 마음껏 향유하였습니다.
없이 살던 사람, 이미 밑바닥에서 살던 사람에게 시련은 면역이 되어 있어서 그리 크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잘 나가던 사람, 누리던 사람에게 시련은 훨씬 더 크게 다가옵니다. 욥이 그랬습니다.
이 세상 살아가는 그 누구든 실패나 좌절이 없는 평탄한 인생을 기대합니다. 그러나 이 땅 위에 숨쉬며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든 예외없이 시련을 체험합니다.
욥은 자신에게 다가온 큰 시련 앞에서 처절하게 절망하기도 하고 하느님을 원망도 하지만, 그 시련을 통해 하느님을 더 깊이 체험하게 됩니다. 동시에 한 가지 큰 깨달음에 도달합니다.
자신은 크신 하느님 앞에 한갖 티끌같이 작은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것, 그래서 창조주이신 하느님께서 주신 모든 것, 좋은 것은 물론이고 나쁜 것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는 깨달음이 이르게 됩니다.
이렇게 우리가 겪는 시련은 그 자체로 고통의 원인이지만, 결국 시련은 하느님을 찾게 하고 하느님께 더 집중하게 만드는 은총의 도구입니다. 시련은 우리 인간을 더 큰 믿음의 사람, 더 큰 그릇으로 만드는 도구입니다

겸손한 마음
-반영억신부-
보다 크게 되고 싶은 마음, 다른 사람보다 높아지고 지배하며 마음대로 소유하고자 하는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드러내기보다 숨기고 있습니다. ‘아닌 척’하면서 포장을 하고 위선을 떨지만,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환히 들여다보고 계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루가9,48).
스스로 낮추고 다른 사람을 섬긴다는 것은 말같이 쉽지 않으나 그 길이 주 하느님을 만나는 길이라면 용기 있게 그 길을 가야 합니다. 알게 모르게 과장하고 포장한 가면을 벗고, 있는 그대로 몸에서 배어 나오는 겸손을 갖추게 될 때 예수님의 참모습을 비추게 될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노는 겸손이란 '자신을 갖는 것'이라고 하였고,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자신의 주제를 넘지 않는 자이며, 하느님의 은총 앞에 자신의 마음을 온전히 열어 놓을 뿐만 아니라, 이웃에게 관용함'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우리 자신에 대해 자랑하지 말고 주님을 자랑해야 합니다”(성 아우구스띠노). 겸손이야말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비결입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마태23,12).
만약 “성인들이 다른 사람들 앞에서 빛나 보이고 싶어 하면,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섭리로써 그들을 깊숙한 곳에 감추어 두십니다. 사랑하기 때문에”(성 안또니오). 겸손은 천국의 문을 열고 교만은 지옥의 문을 엽니다. “교만은 천사를 악마로 만들었으나 겸손은 인간을 천사로 만들었습니다”(성 아우구스띠노).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겸손함을 갖추길 원하며 낮은 사람이 되라고 했지만, 제자들의 응답은 아직도 엉뚱한 모습입니다. 아직도 특권의식이 배어있었습니다.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와 함께 스승님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 하게 막아 보려고 하였습니다.”하고 말하는 것을 보면 아직도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선한 일을 하면 다 환영할 일이건만 제자들은 자신들이 더 우월한 지위에 있다는 것을 은연중에 내세웠습니다. 누가 하든지 주님의 일을 하면 환영하고 그를 통해서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사람들이 구원의 혜택을 입으면 기뻐할 일입니다. “아무려면 어떻습니까? 가식으로 하든 진실로 하든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니, 나는 그 일로 기뻐합니다. 사실 앞으로도 기뻐할 것입니다”(필리1,18). 그러나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과 ‘내가 너보다 낫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내가 더 고참이다.’,‘내가 더 연장이다.’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주님의 제자로서 아직도 자격 미달입니다. 낮아짐을 두려워 마십시오. 주님께서 거기 계십니다. 우리에게 자랑할 것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자랑과 희망을 주님께 두는 오늘이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신부님이 강론을 시작할 때가 되면 어김없이 자리를 뜨는 신자 한 분이 계셨습니다. 한 번도 아니고 매번 그러니 마음이 쓰였습니다. 그래서 하루는‘신자 한 분이 매번 자리를 뜨니 그 이유를 좀 알아봐 주세요.’하고 회장님께 부탁을 하였습니다. 이날도 아니나 다를까 강론을 시작하자마자 밖으로 나가는 겁니다. 기다리던 회장님이 정중하게 물었습니다. 무슨 급한 볼일이 있으십니까? 아니면 어떤 사정이라도? 그랬더니 신자분이 말씀하셨습니다. “아! 예. 저는 화장실에 갑니다. 무슨 특별한 병이 있어서가 아니라 저는 잠자기 전에 꼭 화장실을 다녀오는 습관이 있거든요. 뭐 잘못됐습니까?”
@@@ 인간(human)과 겸손(humble) 어원은 흙(humus)
인간(human)과 겸손(humble)의 어원은 흙(humus)이다. 단지 한 줌의 흙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첫 인류인 아담(םדָאָ)이라는 이름도 ‘흙’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아다마’(המדא)에서 나왔다고 한다. 흙은 나무의 뿌리를 보듬어안으며 열매와 잎을 맺도록 양분과 수분을 제공한다.흙은 언제나 사람의 발아래에서 사람을 우러러볼 때 흙은 진정한 흙일 수 있다.
흙은 머리 위에 얹으려 해도 안 되고 멋진 의자에 앉으려 해도 안 된다. ‘흙’의 성질은 더이상 낮춰질 수 없는 ‘최저의 낮음’, 한 줌의 힘으로도 바스러지는‘연약함’이다. 겸손은 ‘흙’과 같은 태도를 말한다. 사람은 흙에서 나왔고, 흙의 성질은 겸손함이니, 사람이 사람답게 되려면 흙과 같아져야 하며 ‘흙’과 같이 되려면 겸손해야 한다. 아무리 어렵더라도 이만함을 감사하고 겸손해야 한다[글/허준혁].

너희들 가운데 가장 작은 사람이라야 가장 큰 사람이다.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은 “가장 큰 사람”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너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라는 말씀을 전해줍니다. 먼저, 제자들 가운데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논쟁이 일어났고, 이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누구둔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너희들 가운데 가장 작은 사람이라야 가장 큰 사람이다.”(루카 9,48)
가장 작은 사람이 ‘가장 큰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는 작아질수록 커진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작은 사람은 어떤 사람이며, 작은이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큰 사람인 작은 사람’이란? ‘어린이를 받아들이는 사람’, 곧 작은이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말씀하십니다. ‘어린이’는 성경에서 무능하고 힘없는 사람, 그래서 돌보아주지 않으면 곧 죽게 되는 약한 이를 표상합니다. 따라서 ‘어린이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사회에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는 미천하고 버려진 이, 천대받고 소외된 이를 받아들이는 것을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곧 ‘자신을 타인보다 위에 두지 않는 사람, 곧 높이 있어 우러름 받는 이가 아니라 아래에서 천대받는 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제 <제2독서>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바오로 사도의 말을 들었습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십시오.”(필리 2,3)
사실, 상대방을 허물이 있는 채로 받아들이는 것, 결핍과 허약함이 있는 채로 받아들이는 것, 그것은 바로 용서의 다른 형태이기도 합니다. 결국, 작은이를 받아들여 자신이 작아진 이가 되는 것, 그것은 허물에 떼를 묻혀 허물을 함께 지는 이가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그러하셨습니다. 이토록, 예수님께서는 모두가 높아지고 커지고 첫째가 되고자 안달인 이 시대에, 작아지고 낮아지고 꼴찌가 되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 앞에, 그리고 형제들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작아지는지가, 진정한 큰 사람이 됨을 말해줍니다.
<복음>의 후반부는 요한과 예수님의 대화입니다.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하게 막아보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막지 마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너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루카 9,49-50)
이는 교회 안에서 자기들과 함께 하지 않는 다른 이들에 대해 배타적인 태도를 취하는 편협한 그리스도인들에게 관용의 정신을 가르쳐줍니다. ‘나는 해도 되지만, 너는 안 된다’는 특권의식이나, ‘우리는 되지만, 너희는 안 된다’는 편파의식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곧 독점되어서도, 배타적이어서도 안 될 일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들’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자신과 생각이 다른 이들뿐만 아니라, 원수마저도 받아들이는 혁명적인 전환을 요청하십니다. 아멘.

-조욱현신부-
복음: 루카 9,46-50: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이를 받아들이면...
예수님께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인가를 두고 다투는 제자들의 생각을 아신다. 그들은 저마다 우두머리가 되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었다. 사탄이 그들에게 뿌려놓은 욕망의 씨앗을 뿌려놓았고, 그 씨앗이 자라나고 있음을 보셨다. 그것이 가라지가 되어 멸망하게 되는 것을 바로 잡아 고쳐주신다.
제자들이 이렇게 다투는 것을 아시고 예수께서는 어린이 하나를 당신 옆에 세우시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여기서 예수님 옆에 있다는 것은 가장 높은 영광의 자리에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누구든지 이런 작은 아이 하나를 대접하는 자는 당신 자신을 대접하는 것이라고 하시면서, 또한 당신을 대접하는 자는 하느님을 대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어린이는 순수함과 겸손의 본보기이다. 어린이는 속이지 않는다. 어린이는 생각이 단순해서 높은 지위를 탐하지도 않고 높아지는 것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한다. 바로 이런 아이를 두고 예수께서는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48절)라고 하신다. 가장 작은 사람이 되는 것은 그리스도처럼 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이 어린이와 같은 사람만이 당신 곁에 서 있을 자격이 있고, 당신의 발자취를 따를만한 자격이 있다고 하시는 것이다.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와 함께 스승님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하게 막아 보려고 하였습니다.”(49절) 제자들은 그러한 권한을 자기들만 받았다고 생각했다. 사도로 불림을 받지도 않았고, 교사로도 임명받지 않은 사람이 그 일을 해도 되는지 알고 싶었던 것이다.
구약에도 이런 내용이 있다. 모세가 70명의 원로들을 주님 앞에 오게 했을 때, 두 사람은 진영에서 영이 내려 예언을 하였다. 이 때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그들을 말려야 한다고 모세에게 말했다. 모세는 “너는 나를 생각하여 시기하는 것이냐? 차라리 주님의 온 백성이 예언자였으면 좋겠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당신의 영을 내려 주셨으면 좋겠다.”(민수 11,29) 이것은 성령께서 모세를 시켜 하신 말씀이다.
여기서는 아드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신다. “막지 마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너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50절)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이름으로 사탄을 쫓아내시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일하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의 은총을 입은 우리와 같다. 우리는 그들 안에서 일하시는 분이 그리스도시라는 것을 안다.
주님께서 당신 자신을 낮추셔서 세상의 구원을 위해 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삶 속에서 참된 봉사를 통하여 진정으로 “주님 옆에” 있는 사람들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이에 맞는 은총을 구하자.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루카 9, 48)
-한상우신부-
작아지는
길 외에
다른 길은 없다.
너무
커져버린
우리자신을
보게된다.
꼭 빠르고
큰 걸음으로
가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복음은
작아짐의 길을
천천히
따라간다.
사랑은
점점
작아지는
것이다.
교만이 아닌
작아지는
겸손의 길이다.
작아지면
모든 것은
선물이다.
작아지면
모든 것에서
자유롭다.
잃어버린
행복의 중심또한
작아짐에 있다.
자아를 버리면
작아질 수 있다.
작아지면
말씀을 간절히
들을 수 있다.
작은 이들의
눈물을
닦아주시는
주님이시다.
자아에
욕망에
갇혀있는
우리를
꺼내는 방식은
작아지는
복음의 길이다.
작아짐이
알차게
익어가는
삶이다.
작아지신
하느님을
만나는 은총의
시간이다.
작아짐이
삶의 참된
이정표임을
믿는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보여 줍니다.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루카 9,46)
제자들 사이에서 서열 문제로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스승 예수님 다음으로 누가 가장 높은지 우열을 가리고 싶은가 봅니다. 세속적인 서열과 권력의 욕망이 아직 정화되지 않아서겠지요.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루카 9,48)
예수님께서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곁에 세우시고 답하십니다. 당신을 따르려면 세속의 질서와 역행해야 한다고 알려주십니다. 모두가 크고 힘 있고 강하고 부유한 사람이 되려고 경쟁하는 세상에서, 작고 힘 없고 약하고 가난한 사람이 되려고 애써야 한다는 뜻입니다.
"가장 작은 사람"
사실 예수님은 가장 작은 이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가장 작은 이가 되기를 원하셔서 실제로 가난한 목수와 한 시골 처녀의 아들로, 그것도 객지에서 태어나셨지요. 공생활 동안에도 머리 둘 곳 없는 떠돌이 가난뱅이셨습니다. 죽음도 가장 작은 자로서 맞이하셨지요. 모두가 고개를 돌리는 사형수로 생을 끝맺으셨으니까요. 가장 작은 이가 되는 것은 비우고 낮추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바람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제자들이 그 바람을 이어받기를 바라시지요.
"막지 마라"(루카 9,50)
예수님 말씀을 알아들었는지 못 알아들었는지, 요한이 무용담 하나를 들려드립니다. 마귀를 쫓아내는 어느 사람이 자기들과 같은 제자 무리가 아니라서 못 하게 하려 했다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그를 막지 말라고 이르시지요. "우리"에게 속하건 속하지 않건 하느님의 선한 일은 널리 퍼져나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일화는 제자들은 이미 큰 사람 흉내를 내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반증 같습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님께서 하시는 하느님의 선한 일들을 규제하고 막듯이 예수님의 제자들도 또다른 기득권 그룹을 형성해 버린 듯합니다. 이렇듯 악은 인간 욕망의 아주 미세한 빈틈을 노려 가차없이 파고듭니다.
"막지 마라"
예수님의 이 말씀에는 어떠한 욕망이 담겨 있지 않습니다. 그분의 바람은 오직 하느님 뜻과 사람의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명성이나 권력 따위는 예수님의 관심사가 되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나 허용하십니다. 당신 자신의 죽음까지도 말이지요.
제1독서에서는 욥의 신앙 여정이 시작됩니다.
"흠 없고 올곧으며 하느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하는 사람"(욥 1, 8)
주님께서 보시는 욥의 모습입니다. 그의 충실함과 신실함에 대한 주님의 평가가 부러울 지경입니다. 욥의 모습은 모든 신앙인의 귀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욥이 까닭 없이 하느님을 경외하겠습니까?"(욥 1,9)
사탄은, 주님께서 욥에게 축복을 내리셨으니 그가 응당 그런 거라고 응수합니다. 주님과 인간의 관계를 이처럼 사랑이 아닌 거래로 보는 것은 악에서 오는 생각임을 알 수 있지요.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받으소서."(욥 1,21)
지금부터 욥에게 지난한 시련의 여정이 닥치겠지만, 아직까지 욥은 주님께 대한 신뢰를 거두지 않습니다. 그동안 누린 것이 모두 주님의 축복이었으니 거두어 가신들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그가 주님께 드리는 것은 원망이나 항변이 아닌 오히려 찬미입니다.
이 고백 안에서 예수님을 봅니다. 그분은 아버지의 구원 계획을 위해 당신께 떨어진 영광도 치욕도 가리지 않고 달게 받으셨지요.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 예수님은 철저히 당신 자신을 잊으셨던 것입니다. 작아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는 모욕 당하고 조롱 받고 버림받고 실패하고 비천한 이로 내쳐지는 것을 받아들일 용기를 지닌 사람입니다.
제자들처럼 큰 사람, 높은 사람이 되고 싶은 것까지는 아니어도 작은 이가 되는 것이 두려울 수 있습니다. 우리가 발을 딛고 살아가는 이 세상의 어떤 면은 작은 이에게 무례하고 무자비하며 잔인하기까지 하니까요. 당장 제자들도 예수님을 등에 업고 "우리"가 아닌 이에게 힘을 행사할 지경이니 세상 편의 혹독한 갑질은 슬프게도 전염성이 매우 강한 듯 보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그래도, 작은 이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맙시다. 작고 작아져서 눈에 띄지도 않는 지경에 다다르면, 비로소 거기서 사랑하는 주님을 발견할 것이니까요. 작은 이 안에 예수님이, 그 예수님 안에 하느님이 계시니, 작아진다는 것은 스스로 하느님을 품는 것입니다. 또 작은 이를 받아들이는 것은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것이지요.
지금 우리가 속한 곳에서 작은 이를 환대하고 또 가장 작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우리가 찾고 바라고 갈망하는 주님의 거처는 가장 작은 이들의 마음이랍니다. 그러니 우리, 거기서 만납시다.

악한 사람이 악한 사람이 된다
-김찬선신부-
http://www.ofmkorea.org/ofmhomily/381650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이를 받아들이면 곧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며 또 나를 받아들이면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루가 9,4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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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께서 인간의 크기를 심판하실 때 사용하시는 유일한 기준은 ‘겸손’입니다. 예수님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은 이 세상에서 자신을 가장 낮출 줄 아는 사람이라 하십니다. ‘사랑’이 큰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교만하면 사랑을 할 수 없으니 겸손의 크기가 곧 사랑의 크기라 할 수 있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아주 작고 보잘것없는 사람들까지도 잘 받아들이기에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입니다. 하느님은 가장 크시지만 가장 작은 밀떡 안에 계신 것처럼, 가장 작은 사람들 안에 계십니다.
나이 들며 더욱 포용력이 향상되는 이유는 그만큼 이전의 단점들에서 벗어나기 때문일 것입니다. 산도 벗어나야 볼 수 있습니다. 아직도 남의 단점이 나의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면, 그 단점을 내가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겸손은 낮아지는 것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인정할 수 있는 넓은 마음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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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티노는 겸손이란 '자신을 갖는 것'이라고 하였고,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자신의 주제를 넘지 않는 자이며, 하느님의 은총 앞에 자신의 마음을 온전히 열어 놓을 뿐만 아니라, 이웃에게 관용함'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우리 자신에 대해 자랑하지 말고 주님을 자랑해야 합니다”(성 아우구스띠노). 겸손이야말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비결입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마태23,12).
-반영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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