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0년 9월 13일 연중 제24주일

Margaret K 2020. 9. 12. 05:56

2020 9 13  연중 제24주일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잘못을 저지르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이면 되겠습니까?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

(마태오 18,21-35)

 

Lord, if my brother sins against me,
how often must I forgive?
As many as seven times?”

Jesus answered, “I say to you,

not seven times but seventy-seven times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박병규신부-


마태오 복음에서 교회는 하늘 나라를 가시적으로 드러내는 형제적 공동체를 가리킵니다. 흔히 ‘교회의 복음’이라고 일컫는 마태오 복음에서 ‘형제애’란, 공동체 구성원의 상호 책임을 바탕으로 한 끝없는 용서와 화해를 가리킵니다.

예수님 시대에 아이를 사고파는 일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아내와 자식을 팔아서라도 빚을 갚으라는 이야기는 가혹하기 그지없습니다. 빚의 문제가 아니라 형벌의 문제로 뒤바뀐 이 불행한 이야기는 26절부터 급격한 반전을 보여 줍니다. 종이 엎드려 애원하니 주인이 종의 빚을 탕감해 주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조건이나 약속도 없이 주인은 종의 간절한 청을 기꺼이 들어준 것입니다.

주인의 자비는 주인이 ‘빚’이 아니라 ‘부채’라는 단어를 사용한 데에서도 분명히 드러납니다. ‘빚’(오페이레테스)은 상당한 책임과 의무, 그리고 죄책감마저 담고 있는 단어인 반면, ‘부채’(다네이온)는 상호 동등한 경제적 거래 차원에서 이해될 수 있는 말입니다. 주인이 종의 빚을 탕감하는 것은, 단순히 금액의 문제가 아니라 동등한 형제적 관계로 받아들인다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빚을 탕감받은 종의 무자비함에서 불행은 다시 불거지는데, 자신에게 빚진 동료를 감옥에 가두어 버린 것입니다. ‘동료’라는 그리스어 단어는 ‘쉰둘로스’인데, ‘쉰’이라는 말은 ‘함께’라는 의미를 지니지요. 함께해야 할 사람을 감옥에 내던지는 이의 냉혹함은 주인의 자비로움과 대비되어, 보는 이에게 분노를 불러일으킵니다.

교회는 저마다 사는 처지가 다르고 능력이 달라도 서로 형제로서 책임을 함께 지는 데 그 본디 가치가 있습니다. 산다는 것은, 어찌 보면 서로에 대한 빚을 갚아 나가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 우리는 서로에게 빚이 있습니다. 네가 있기에 내가 살아간다는 최소한의 책임 의식이 교회는 물론이거니와 사회 공동체를 지탱합니다. 돈 몇 푼에 살의마저 느끼는 살벌한 세상에 교회의 형제애는 눈물겹도록 요긴한 신앙인의 책무입니다.

 

용서는 나를 위한 것입니다

-키엣대주교-


용서는 꼭 필요하다는 걸 알고 있지만 실천은 너무나 어렵습니다. 그러나 용서가 없다면 세상 누구와도 같이 살수 없을 것입니다. 사람은 완전하지 않은 존재이기에 실수와 잘못은 너와 나, 우리 모두의 일상입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용서해주지 않았다면 나도 지금 이처럼 편하게 살 수 없었을 것입니다. 내가 알지 못하는 동안 수 많은 나의 잘못을 용서해 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없을 때 주님께 먼저 용서를 구하십시오. 그리고 그 사람을 마음으로부터 용서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형제 자매를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용서는 말이 아니라 마음으로 진정 그 사람을 이해하고 용서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주님께 용서받을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이며 세상을 구하는 방법입니다. 잘못과 죄악이 넘치는 세상에서 그나마 용서의 마음이 있기에 세상이 존재하는지도 모릅니다.

세상에는 의도적으로 죄를 짓는 사람도 있지만 무의식 중에 죄를 짓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조금만 더 생각하고 행동한다면 피할 수 있는 잘못을 무의식중에, 분노를 참지 못하여 죄를 짓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으로 인해 피해를 볼 때마다 분노한다면 가슴 속에 한이 쌓일 것입니다. 그들로 부터 나를 보호하고 피하고자 한다면 스스로 세상과 단절되어 고독한 인간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용서가 필요합니다. 내가 바로 용서를 받아야 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남을 용서하기에 앞서 나 자신을 용서하십시오. 자신을 용서하지 못한다면 죄의 고통 속에서 비참한 인생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용서하십시오. 나 또한 그들에게 많은 죄를 지었고 앞으로도 잘못할 수 있는 나약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들을 용서해 준것처럼 그들도 나를 용서해 줄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께 죄 많은 사람들입니다. 만일 주님께서 당신께 죄지은 사람들에게 가혹한 벌을 내리시는 분이셨다면 나는 이미 오래전에 죽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먼저 주님께 간절히 용서를 빌어야합니다.

용서는 사람의 영혼을 아름답게 하며 아름다운 영혼은 인간의 가치를 드높여줍니다. 용서는 서로를 이해하는 소통의 세계,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줍니다. 그것이 바로 형제애가 넘치는 세상, 하느님을 닮은 세상입니다.

주님, 저희가 자비의 주님을 세상에 밝히기 위해, 세상 사람들에게 주님을 알리기 위해 주님의 용서를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하여 주소서.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다른 사람의 잘못으로 피해를 입었을 때 어떻게 분노를 조절하고 있습니까?

2. 마음으로부터 용서를 해 보았습니까?

3. 다른 사람을 용서한 후 어떤 느낌을 경험했습니까?

4. 지금 내 마음 속에 있는 미움, 갈등은 무엇입니까? 그를 용서하는 것이 나를 위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계속 용서하는 것이 이득이다

-임상만신부-


베드로가 예수님께 물었다.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마태 18,21) 성경의 위경 중 ‘벤 시라’의 지혜서를 보면, 이웃이 범죄 했을 때는 두 번의 기회만 주라는 대목이 있고, 랍비들은 이웃의 범죄는 세 번까지만 용서하라고 가르친 것에 비하면 베드로는 아주 넉넉하게 일곱 번이라는 숫자를 잡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예수님은 예상 밖의 답변을 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22절)

사실 베드로는 유다인들의 율법적 용서 개념을 훨씬 넘어서는 자신의 관대함을 자랑이라도 하듯이 일곱 번까지 용서하면 충분하지 않으냐고 물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베드로의 관대함을 훨씬 뛰어넘어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렇게 예수께서는 ‘끝없는 용서’, ‘제한이 없는 사랑’을 가르치시며 이에 대해 구체적인 예화를 말씀하셨다.

“임금이 셈을 시작하자 만 달란트를 빚진 사람이 끌려왔다”(24절)라는 말씀으로 하느님의 심판을 드러내신다. 한 달란트가 금 34kg 정도이기에 만 달란트는 340톤이나 되므로 이것은 결국 평생을 노예로 살아도 그 빚을 갚을 수 없는 엄청난 양의 돈이다. 그런데 이 종이 그 빚을 절대로 값을 수 없다는 것을 안 주인은 그를 가엾게 여겨 빚을 모두 탕감해 주었다. 그리고 그 탕감 문서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여러분은 잘못을 저지르고 육의 할례를 받지 않아 죽었지만,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그분과 함께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모든 잘못을 용서해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불리한 조항들을 담은 우리의 빚 문서를 지워 버리시고, 그것을 십자가에 못 박아 우리 가운데에서 없애 버리셨습니다.”(골로 2,13-14).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자비하심과 무한한 사랑으로 서명된 빚과 죄의 탕감 문서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용서는 우리가 상대방에게 무엇이라도 받으려고 하면 절대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그냥 또 하나의 은혜를 베푸는 것이다. 그러기에 용서는 그를 불쌍히 여기고 가엾게 여기는 마음과 그에 대한 자비의 사랑에서만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회개하는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 더 논리적이고 합리적이며 성서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인간적이고 율법적인 의미에서의 용서가 아니라 더 차원이 높은 자비와 사랑을 통한 무조건적인 용서를 우리에게 요청하신다. 그러므로 바오로 사도는 “서로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하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에페 4,32)라는 말로 우리가 용서받기 위해서는 우리가 이미 용서받은 것처럼 남을 용서해야 한다는 것을 당부하고 있다.

우리는 남의 죄를 용서해야 한다. 비록 자비나 사랑이 아니더라도 최소한 우리도 용서받았으니 용서해야 한다는 말이고, 남의 죄를 용서할 수 없다면 나도 용서받을 수 없으니 용서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코, 갚을 길 없는 만 달란트를 탕감받은 우리가 일상의 작은 것, 달랑 백 데나리온의 잘못도 용서하지 못해서 우리 빚의 탕감이 무효가 되는 어리석음은 피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선 자기 자신의 더 큰 죄, 더 큰 빚을 탕감받기 위해서 계속 용서하라는 것이다. 남을 사랑하고 용서하고 불쌍히 여겨야 우리 자신이 사랑받고 용서받고 하느님의 자비하심 안에 영원함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너희가 서서 기도할 때에 누군가에게 반감을 품고 있거든 용서하여라. 그래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잘못을 용서해 주신다.”(마르 11,25)

 

그리스도인 삶의 원칙, 용서

-장재봉신부-


맑고 청량한 하늘을 오래 올려다보았습니다. 물감을 풀어 놓은 듯 푸른 하늘에서 우수수… 천국 이야기가 쏟아져 내릴 것만 같았습니다. 이 좋은 계절 9월에, 우리는 순교자 성월을 기념합니다. 온 교회가 한국의 순교자들께 마음모아 경하 드리고 그분들의 삶을 본받아 살고자 다짐하며 하늘의 은총을 청합니다. 그래서 더욱 오늘 들려주시는 주님의 말씀이 진중히 다가오는데요. 발등에 떨어진 문제에 몰입하느라 하늘 한번 올려다보지 못하고 지내는 우리를 채근하는 듯 읽힙니다. 어쩌면 예수님께서는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과 하느님께서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이 전혀 다르며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점을 일깨우려 하신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됩니다. 한마디로 잡다한 것에 마음이 묶이면 주님을 잊을 것이고 주님을 잃은 마음은 결국 주님의 뜻을 미루고 미루는 어리석음을 살게 될 것이란 경고로 들렸으니까요. 이런 마음에 스치듯 성녀 카타리나의 고백이 떠올랐습니다. “시간을 기다리지 마세요. 시간은 당신을 기다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언제 어떻게 용서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푸념하는 우리, 무조건 양보하고 용서하기엔 억울하다며 머뭇대는 못난 마음을 얼른 치우지 않으면 용서의 때를 놓칠 수도 있다는 엄한 가르침을 단단히 새겨 살고 싶습니다.

우리는 “원수를 사랑하라” “원수를 용서하라”는 말씀을 익히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너무도 자주 스스로 증오심에 묶여 원망을 쏟아내며 지내기도 합니다. 매사를 부정적으로 받아들이며 결국 절망하여 삶의 문제에 얽혀서 믿음인의 정체성을 잃고 상황에 이끌려 대충대충 살아가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말씀의 요점은 주님께서 이르신 용서가 그저 속이 끓어오르고 분통이 터지는데도 억지로 참으라는 뜻이 아니라는 걸 알아야 하리라 싶습니다. 주님께서 이르신 용서를 살기 위해서는 먼저 스스로의 삶을 돌아보며 큰 자비를 입은 자의 기쁨과 감사를 표출하는 것임을 일깨우고 계시니까요. 복잡하게 뒤틀려서 뒤숭숭한 마음을 말끔하게 정리 정돈할 수 있는 해결책은 오직 ‘용서’뿐임을 분명히 알려 주시니까요.
 

마리누스 반 레이메르스바엘의 ‘매정한 종의 비유’.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라는 엄중한 경고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내 안에 자리한 나쁜 것, 흉한 것, 하느님의 것이 아닌 것들을 깨달을 때에만 우리는 상대를 판단하는 오만의 우를 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미 우리 모두의 죄를 용서하셨다는 사실에 민감하여 오직 감사드리며 지낼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들보 같은 내 죄에 비해서 티끌 같은 상대의 허물의 하잘것없음을 새기며 마음에 옹이를 남기지 않는 가벼움을 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진실로 지금 이 순간, 이 허약하기 이를 데 없는 존재가 삶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끊임없이 부어주시는 하느님의 자비 덕분임을 고백하는 것이 진정한 믿음임을 잊지 맙시다.

따져보면 잘못한 상대를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을 용서하겠다는 각오를 살아내기만 한다면 상대의 어떤 잘못도 이해하게 될 것이며 그 어떤 상황도 너그러이 수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혹시 “그걸 누가 모르냐 싶으십니까?” “좋은 주님의 말씀, 좋고 좋은 주님의 뜻을 누군들 실천하고 싶지 않아서 이러겠느냐?” 되물으십니까?

맞습니다. 백번 옳은 항변입니다. 틀림없이 상대가 당신께 잘못을 저질렀을 것이 분명하니까요. 당신은 그로 인해서 손해를 입었고 무시를 당했는데 그는 자신의 허물을 도대체 인정하지 않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그 마음을 주님께서 이미 알고 계신답니다. 때문에 주님께서는 아주 간단한 용서의 방법을 일러주십니다. “잘못을 눈감아 주어라.”

우리의 지난 잘못을 전혀 기억하지 않으시는 주님의 당부가 이리 따뜻한데, 어찌 토를 달겠습니까? 다만 상대의 허물에 눈을 감으라고만 하시니 말입니다. 그저 상대의 잘못을 찾아내려 애쓰지 말고, 더 세세히 밝히려 들지 말고, 확실하게 확인하려는 생각을 삼가라고만 하시니 말입니다. 뿐인가요? “복수는 내가 할 일, 내가 보복하리라”(로마 12,19)고 단단한 약속까지 해주시니 말입니다.

따라서 오늘 말씀의 요지는 용서야말로 그리스도인 삶의 원칙이라는 사실에 있습니다. 용서를 살아내는 것은 하느님나라를 추구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실천해야 할 불변의 법칙이라는 사실에 있습니다. 사랑과 용서는 하느님의 변치 않는 뜻이기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실천 사항이며 의무라는 사실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은 절대적 진리입니다. 진리는 따지고 검증하는 것이 아니라 믿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감사하게도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자신을 들여다볼 줄 알게 해주셨으며 또 반성할 줄도 아는 존재로 빚어주셨습니다. 모든 인간에게는 마음만 먹으며 얼마든지 도덕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자질을 선물해 주셨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미 용서할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교회는 주님께로부터 세상의 상처를 치유하는 복음의 약을 공급받은 곳입니다. 교회인 우리에게는 세상의 모자람을 채워주며 끊임없이 보듬어 돌볼 수 있는 지혜의 명약을 사용해야 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하느님께서 쏟아주신 사랑을 아끼지 말고 나누어야 합니다. 그런 마음으로 너끈히,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도 거푸 용서하는 고귀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 주간, 사랑하고 용서하는 것이 하느님의 원칙임을 깊이 새기기 바랍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해주신 맑고 푸른 세상을 형편없는 생각과 지저분한 행색으로 덕지덕지 때를 묻힌 허물을 참회하기 바랍니다. 정말 순수하게 이웃을 사랑한 적이 있는지 곰곰이 되돌아보며 혼과 영과 몸을 정갈하게 가꾸면 참 좋겠습니다. 그렇게 주님께 받은 사랑을 축내지 않고 고스란히 전하는 정직한 믿음의 증표로 살게 되면 정말 좋겠습니다. 하여 저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이 되는 순교자적 삶을 살아내는 그날이 오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오직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끝까지 사랑하고 일흔일곱 번을 용서하는 너그러움으로 하느님나라의 불변의 원칙에 충실하시길, 기도드립니다.

한국의 모든 순교성인이여!
저희 한국교회의 모든 교우의 삶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당신의 은총으로 영원한 격려와 좋은 희망을 주신 하느님 우리 아버지께” 기쁨이 되도록 빌어주소서!

 

'나와 너'의 친밀함, '영원한 나'의 현존

-구요비 주교-


학적인 통설에 의하면 10만 년 전 이 지구상(地球上)에는 최소 6종류의 인간종(種)이 살고 있었는데(예컨대 네안데르탈인, 호모에렉투스, 크로마뇽 등) 그중 현재의 인간종 호모 사피엔스 (homo sapiens)만이 살아남게 되었다고 합니다.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는 그 생존의 이유 중 하나로 호모 사피엔스는 ‘뒷담화 문화(文化)’가 있어서, 뒷담화를 통하여 서로 협력하고 연대하여 자기들의 생존력과 생존 영역을 넓히고 발전시켜 왔다고 진단합니다(「사피엔스」, p42~60). 여러분은 뒷담화 하기를 좋아하십니까? 뒷담화(談話)란 앞에서는 아무말 못하면서 나중에 뒤에서 비판하고 욕하며 스트레스를 푸는 수다를 의미하는데, 부정적인 행동으로 여겨집니다. 하지만 그는 이런 뒷담화 문화 안에도 소통, 친교, 대화라는 창의적이고 긍정적인 순기능이 있음을 지 적합니다. 바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당신 제자들 의 삶의 모습에서도 소통과 대화가 강조됩니다. “네 형제 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 그러나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 을 더 데리고 가거라. … 그가 그들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마태 18,15-17)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대화의 하느님이십니다. 대화의 하느님이심은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를 나와 너의 친밀한 관계로 대해 주심을 말합니다. 구약성경은 야훼 하느님께 서 이스라엘 백성을 부르실 때, 늘 “나 야훼가 너 이스라엘 에게 말한다!”로 시작합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너’라고 말씀하실 때, 이는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공동체 안에서, 구체적인 ‘너’를 통하여 구체적 인 개인인 ‘나’에게 말씀을 전하시길 원하신다는 뜻이겠습 니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 18,20) 철학자 마르틴 부버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나 와 그것이 아니라 나와 너라는 친밀함이 있을 때 그 뒤에는 ‘영원한 나’가 현존(現存)한다’고 통찰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 대화의 하느님이심은, 우리가 믿는 하느님 이 사랑이시라는 신앙고백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당 신의 외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사랑으로 내 어 주심으로 우리 각자를 ‘나와 너’의 관계로 만드시고 시간 과 공간을 초월하여 우리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시길 원 하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들인 우리가 성숙한 하느님 의 자녀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나와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이웃 사람들을 인격적으로 신뢰하고 언제든 어떤 처지에서 든 대화의 문을 열어 놓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특 별히 나에게 상처를 입히고, 죄까지 범한 사람까지도 마음 으로 증오하지 않고, 관계의 끈을 놓지 않는 사람, 이것이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일 것입니다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와 은총

-김성태신부-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형제가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하는지’를 묻는 베드로에게 끝없이 용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매정한 종의 비유’로써 이 말씀을 설명해 주시는데, 그 비유 안에는 ‘하느 님의 무한한 자비와 용서’ 대 ‘인간의 옹졸함과 비정함’이 잘 대조되어 있습니다. 비유에는 1만 탈렌트를 빚진 사람과 100데나리온을 빚진 사람이 나옵니다. 1탈렌트는 당시의 로마 화폐 로는 6천 데나리온이었는데, 1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었습니다. 따라서 품삯을 5만원으로 계산 해도, 1만 탈렌트는 약 3조원에 해당하는 거액입니다.(6천만 데나리온×5만원) 로마시대의 역사가 플라비우 스 요세푸스가 쓴 『유다의 고대 풍속』이라는 책에 따르면, 기원전 4년에 유다와 이두메아와 사마리아 지역 에서 거두어들인 세금의 총액이 600탈렌트(약 1,800억)였고, 갈릴래아와 페레아에서는 연간 200탈렌트(약 600억)를 거두었다고 합니다. 이것을 감안한다면 1만 탈렌트는 개인이 진 빚으로는 천문학적인 액수입니 다. 그리고 100데나리온은 약 500만원입니다. 3조원과 500만원! 과연 이게 비교가 됩니까? 따라서 3조원 이나 되는 엄청난 빚을 탕감 받은 사람이, 자기에게 단돈 500만원 빚진 사람을 못살게 굴고 감옥에 가두었 다는 것은 너무나 파렴치한 태도입니다. 그야말로 적반하장(賊反荷杖)인 것입니다. 어쨌든 오늘 비유 말씀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께로부터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엄청 난 부채를 탕감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속죄하심으로써, 우리는 모든 죄를 용서받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으며, 하늘나라를 상속받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일만 탈렌트나 빚 진 종에 비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엄청난 은혜를 받은 우리 역시, 작은 잘못을 범한 형제 들에게 자비와 용서를 베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가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도 이러한 하느님의 엄청난 은총이 작용하는 결과라 하겠습니 다. 그러나 100데나리온 정도의 가치밖에 안 되는 우리의 선행이나 공로도 반드시 거기에 보태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작은 선행과 공로에 따라 하느님의 은총이 달라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비유 말씀을 통해 하느님의 엄청난 은총을 묵상하고 감사드리며,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형제들에게 자비 와 용서를 베풀고 많은 선행과 공로를 쌓아야 할 것입니다. 비록 그것이 하느님께는 미미하고 하찮은 것일 지라도 말입니다

 

진정한 용서란?

-용영일신부-


“하느님께 도달하는 과정은 우리 영혼에 무엇을 덧붙이는 것이 아니라 영혼에 묻은 무엇을 덜어내는 것이다.” (마에스트 엑카르트) 예전에 이 글을 보고 한동안 멍하니 있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주변에서 한 번쯤은 들어봤을 말 이고 여러 번 접해봤을 이 말이 그날따라 새삼스럽게 제 삶을 사로잡았습니다. 왜 이제야 이 말 이 내게 전해졌지? 진작 알지 못한 후회스러운 마음과 더불어서 말입니다. 살아가면서 어느 순간 우리에게는 그런 경험이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많은 말을 들었는데 어떤 한 마디가 온통 나를 점령하는... 그리고 왜 진작 알아듣지 못했지? 하는 후회가 밀려오는 경험.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한 번도 힘든 용서를 일흔일곱 번까지도 용서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실천하기에 너무 어렵게 느껴지지는 않으신가요? 해 보려고 했는데도 잘 안돼서 하느님께 등을 보이고 돌아서 본 적은 없으신지요? 오늘 복음 말씀은 쉬울 수도 있지만 매우 어려운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럼, 하느님께서 언제나 크신 자비와 용서를 한없이 내게 보여주고 계시는 것을 알고는 있는 지 한번 각자의 삶을 들여다보십시오. 이 과정을 통해 신자로서 살면서 매 순간 내 삶 속에서 내 가 미처 알지 못하는 죄까지도 용서해주시는 예수님을 느껴 보시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삶 속에 용서를 통해 현존하시는 예수님을 만나 보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오늘 복음 말씀이 새로 운 것이 아니라 진작 알아듣지 못했던 예수님의 사랑에 점령당하는 시작이 되기를 바라봅니다. 저는 오늘 복음 말씀을 묵상하면서 용서는 영혼에 묻은 것을 덜어내는 것이고, 그래서 하느님 께 나아가는 과정이며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용서는 누구나 할 수 있지 만 아무나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마음 깊이 깨달은 사람만이 진정으로 용서할 수 있 습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우리나라는 ‘자살 공화국’이라 불릴 정도로 2016년에 13년간 연속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가입국 중 자살률 1위라는 오명을 가지고 있습니다(2017년에 2위가 되기도 했었지만, 2018년에 다시 1위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극단적 선택의 이유는 무엇일까요? 대부분 경제적인 이유로 ‘돈’과 연관이 많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가난한 나라일까요? 미국에서도 한미방위비 협상에서 분담금을 올리려는 이유를 ‘한국은 부자나라다’가 아닙니까? 그러나 대부분 국민은 우리나라를 부자나라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2019년 국제통화기금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일 인당 국내 총생산은 3만 불이 넘습니다. 이는 세계 27위에 해당하지요. 여기에 한국의 국내 총생산(GDP)은 1조 6422억 달러로 OECD 회원국 중 10위에 해당합니다.

분명 과거보다 엄청나게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있지만, 가난하다는 상대적 박탈감 속에서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긴 좋은 집에 살고, 비싼 자동차를 타고 다니며, 골프를 치러 다니면서도 “힘들다”라고 말씀하시는 분들을 너무 많이 보게 됩니다.

‘돈’이라는 물질에서 벗어날 때 행복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돈’이 기준이 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한다고 말할 때도 그 이유가 ‘돈’으로 인한 아픔에서 오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용서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 용서는 세상의 기준을 뛰어넘습니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일흔일곱이라는 수는 모든 세대의 모든 죄가 용서되었음을 상징합니다. 여기에는 한 세대도 빠지지 않으므로, 십자가 안에서 주어진 하느님의 용서라는 충만한 선물을 받지 못한 세대는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우리를 완전히 용서해 주셨듯이, 우리도 서로 용서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용서를 이처럼 여러 번 하라는 것은 분노할 시간이 없음을 보여줍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로 우리의 죄를 모두 용서하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매정한 종의 비유에 나오는 매정한 종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어떻게든 용서하지 못하는 종이 아닌, 어떻게든 용서할 수 있는 종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많은 용서를 계속해서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세상의 기준이 되는 돈과 같은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들에서 자유로운 우리가 될 때, 하느님의 기준을 가지고 사랑하고 용서할 수 있게 됩니다. 집회서 저자의 말씀을 기억하며 살아야 합니다.

“네 이웃의 불의를 용서하여라. 그러면 네가 간청할 때 네 죄도 없어지리라.”(집회 28,2)
늘 행복하고 지혜로운 사람이 되려면 자주 변해야 한다(공자).


약간 떨어져서 바라보세요.

외국인이 한국에서 와서 가장 놀라는 것은 사람들이 물건을 훔치지 않는 것이라고 합니다. 카페에서 음료를 주문한 뒤에 찾으러 갈 때, 자기 자리에 노트북과 가방을 그냥 두고서 간다는 것입니다. 다른 나라에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라고 합니다. 또 누구나 친절한 것, 저렴한 외식과 무료 화장실, 인터넷, 그밖에도 편리한 대중교통과 재미있는 밤 문화에 놀랐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한국은 항상 빠르게 발전하는 나라라고 표현합니다.

하긴 이렇게 편하고 빠른 것들을 누리다가 외국에 나가서 답답함을 느낄 때가 참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만큼 우리나라의 발전 속도가 빠른 것이지요. 그러나 이 안에 살고 있으면서는 이 모든 것을 느끼기 힘듭니다.

지구가 계속해서 자전과 공전을 하며 움직이고 있지만 아무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나라에 살면서도 다른 나라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것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이를 느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약간 떨어져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때 얼마나 많은 것을 누리면서 살고 있는지를 깨달을 수 있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당연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으면 안 됩니다. 특별한 삶을 사는 나를 발견해야 합니다.

용서? 아침에 고행하라!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은 우리가 잘 아는 일만 탈렌트를 탕감받은 종에 관한 비유입니다. 1만 탈렌트를 탕감받았으면서 100데나리온 빚진 동료에게 빚 독촉을 해대는 못된 종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죄를 용서받았으면서 이웃을 용서하지 못하는 우리 모습과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누군가를 진정 용서했는지, 그렇지 못한지는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요? 왠지 용서한 것 같으면서도 또 그 사람을 보면 화가 나는 수가 있습니다. 영화 ‘밀양’에서 전도연은 자기 아들 유괴범이 마음이 편한 것을 보고 화를 참지 못합니다. 머리로는 용서하였지만, 마음으로 되지 않은 것입니다.

 

      마음으로 용서하였다면 그 사람이 그런 모습을 하고 있어도 마음이 동요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마음이 동요한다는 것은 마음으로 용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진정 용서했다면 나는 그 사람이 어떤지에 상관없이 항상 기분이 좋아야 합니다. 그분이 좋아지지 않는 용서는 아직 진정한 용서에 이른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어떻게 원수 앞에서 기분이 좋아질 수 있을까요?

 

      알바니아 예수회의 ‘안톤 룰릭’ 신부는 서품을 받은 해 12월 19일, 공산정권에 의해 17년간은 감옥에, 그 후 다음 17년간은 노동수용소로 보내졌습니다. 그의 첫 번째 감옥은 몹시 추운 외딴 산골 마을의 한 작은 화장실이었습니다. 그곳에서 9개월간 누울 수도, 다리를 펼 수도 없는 상태로 인분 위에 앉아 있어야 했습니다.

      그해 성탄절 밤에 간수들은 그를 다른 화장실로 끌고 가서 옷을 벗기고 밧줄에 묶어 매달았습니다. 조금씩 혹독한 냉기가 전신을 휘감았고 심장은 곧 멈출 것만 같았습니다. 룰릭 신부는 엄청난 절망감으로 크게 소리를 내어 울었습니다. 그러자 간수들이 달려와 그를 바닥에 내려놓고 마구 구타하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날 밤, 그 더럽고 혹독한 고통 속에서 룰릭 신부는 예수님의 강생과 십자가의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자신을 위해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러자 위로가 느껴졌고, 심지어 마음 깊이 신비로운 기쁨이 차올랐습니다. 고문자들에게 그는 어떤 미움도 느끼지 않았습니다.

 

      1989년 79세의 나이로 감옥에서 석방되었을 때, 룰릭 신부는 우연히 만난 간수에게로 달려가 그를 진심으로 껴안았습니다.

 

[출처: ‘안톤 룰릭 SJ 신부 이야기’, 김영석 신부(예수회), ‘기도의 사도직’ 카페]

      안톤 룰릭 신부의 용서는 거짓이 아니었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기분을 들어 높이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그런데 성령은 당신의 가치를 인정하는 이에게만 당신 은총을 허락하십니다.

 

      100데나리온은 1만 탈렌트의 6십만 분의 1입니다. 6조 원의 로또가 당첨된 사람이 천만 원 빚진 사람의 멱살을 잡고 감옥에 가두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 일상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왜 그럴까요? 일상에서는 내가 돈의 가치를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가 받은 죄 용서의 가치는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 6조 원을 거저 받아도 기분이 좋지 못한 것입니다. 기분이 좋지 못하니 작은 일에도 분통이 터지는 것입니다.

 

      내가 받은 돈의 가치를 알려면 그것을 조금은 써봐야 합니다. 돈의 가치를 모르는 아기에게 그 많은 돈을 주어봐야 사탕 하나 때문에 짜증 낼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기쁘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쁘지 않은 이유는 자신이 받은 것의 가치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주님께로부터 받는 1만 탈렌트의 가치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일만 탈렌트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피 값으로 죄를 용서받았습니다. 우리 대신 죗값을 치러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감히 그 가치를 올바로 깨달을 수 없습니다. 다만 조금은 알 수 있습니다. 1만 탈렌트를 다 써봐야 그 값을 아는 것이 아니라 그중에서 한 데나리온만 써봐도 그 가치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한 데나리온의 가치는 내가 고행을 할 때 깨닫게 됩니다. 주님 피의 값을 알기 위해 아주 조금만이라도 그 고통에 동참해보는 것입니다.

      요즘 고행을 말하면 중세시대 낡은 골동품 취급을 당합니다. 그러나 요한 마리아 비안네 성인과 어느 한 젊은 사제의 대화를 들어봅시다. 한 젊은 신부가 비안네 신부에게 물었습니다.

 

“신부님,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합니까?”

비안네 신부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습니다.

“이것은 내가 한 일이 결코 아닙니다. 하느님의 은총이 나를 통해 하신 것이며 나는 그저 도구였을 뿐입니다.”

젊은 신부가 대답했습니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누구도 하느님의 은총 없이는 영혼들에게 아무 일도 할 수 없지요. 하지만 왜 다른 신부들은 신부님이 고해성사 중에 하시는 기적을 행할 수 없는 걸까요? 그들도 하느님 은총의 도구인데요. 그들도 영혼들에게 좋은 일을 하려고 매우 열심히 기도하는데요.”

      비안네 신부는 망설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거룩한 친구이며 스승인 밸리 신부가 자신에게 종종 말하던 것을 그 젊은 신부에게 들려주었습니다.

 

“죄인들의 변화는 기도로 시작하여 참회로 끝납니다. 그런데 그 죄인이 사제이든 친구이든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누군가의 회심을 위해 기도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기꺼이 그들을 위해 ‘고통’을 받아야 합니다. 기도는 물론이요 단식하고, 잠을 포기하고라도 힘든 고행을 감수해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고, 또 자신의 양 떼들을 성인으로 만들기 위해 고통을 겪지 않는 목자는 완전히 실패할 위험 속에 있는 것입니다.”

      내가 참아 받는 고통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통과 일치하게 될 때 우리는 그분께서 우리에게 내리시는 은총의 가치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 은총에 감사하고 기쁘지 않을 수 없고 내가 그들에게 흘려주는 은총의 가치가 어떤 것인지도 알게 됩니다.

      기도 자체가 고행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맞갖은 고행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별히 아침은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기 전 40일 동안 단식하시며 기도하신 그 시간을 짧게라도 반복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분께 받은 1만 탈렌트에 감사하게 되고 하루 동안 나에게 잘못하는 이들을 어렵지 않게 용서할 수 있게 됩니다. 고행하기 어려우면 운동을 조금 힘들게 해도 됩니다. 건강도 좋아지니 일거양득입니다.

 

      용서하려고 노력하기보다 내가 받은 용서의 가치를 먼저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를 위해 기도하고 공부하고 고행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 기쁨이 넘칠 것입니다. 우리 죄의 용서는 공짜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흘리신 일만 탈렌트입니다. 그리고 그 기쁨은 많은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 에너지가 됩니다. 이 기쁨 없인 어떠한 용서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조재형신부-


지금은 대부분 자동차를 타고 다니지만 어릴 때는 손수레우차마차를 많이 보았습니다손수레를 앞에서 끈 적은 없고 주로 뒤에서 밀었습니다이사 갈 때 뒤에서 밀었습니다김장 배추를 담은 손수레를 뒤에서 밀었습니다솜씨가 좋은 작은 형은 손수레에 좌판을 만들고 지붕은 천막으로 덮어 멋진 포장마차를 만들었습니다형과 함께 동네 모퉁이에서 포장마차를 했었습니다학교 가는 길에 소달구지의 뒤에 앉아서 간 적도 있습니다.

 

손수레는 구루마라고도 불렀습니다. 50년 전에는 시장에 많은 구루마가 있었습니다지게로 짐을 나르던 사람들에게 구루마는 자동차와 같았습니다바퀴가 달려서 더 많은 짐을 나를 수 있었습니다지난 성모승천 대축일 때입니다한국에서 80년 된 구루마를 십자가로 만들었고교황님께 선물로 드렸다고 합니다교황님께서는 십자가의 의미를 들으시고 기쁜 마음으로 십자가를 축성하셨다고 합니다. 80년 동안 노동자와 함께 했던 구루마가 하느님과 사람을 이어주는 십자가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십자가로 변하였습니다.

 

서울의 밤을 나타내는 것들이 많습니다남산 타워의 불빛이 있습니다한강 다리의 조명이 있습니다홍대신촌대학로에는 젊은이들이 많습니다청계천에서는 물고기를 볼 수 있습니다광화문 광장에서 경복궁을 볼 수 있습니다하천이 정비 되어서 산책할 수 있습니다서울의 밤은 안전하고 쾌적합니다서울의 밤을 나타내는 또 다른 특징이 있습니다빨간 색의 네온사인으로 빛나는 십자가입니다십자가는 교회를 나타내는 표시입니다자동차에도 묵주나 십자가를 걸어 놓는 분들도 있습니다교우들의 가정에는 눈에 잘 보이는 곳에 십자가가 있습니다.

 

주님 수난 성지주일에는 성지(聖枝)를 십자가에 놓습니다예수님을 환영하며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던 이스라엘 백성을 기억합니다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했던 이스라엘 백성을 기억합니다십자가를 고상(苦像)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이 고통스럽기 때문입니다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께서 양손과 양발 그리고 허리에 상처를 입으셨기 때문입니다십자가의 진정한 의미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받아들이신 고통을 기억하고 함께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해 주십시오저 사람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믿고 사랑했던 제자들은 모두 두려워서 도망갔습니다유다는 은전 몇 닢에 예수님을 팔아 넘겼습니다천국의 열쇠를 맡겼던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배반했습니다눈이 먼 사람은 뜨게 해 주셨고걷지 못하는 사람은 걷게 해 주었고나병환자는 깨끗하게 해 주었고중풍병자는 일어나게 해 주었고듣지 못하는 사람은 듣게 해 주었습니다굶주린 사람들은 배불리 먹게 해 주었습니다그렇게 사랑했던 사람들이 조롱과 야유를 보내며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를 쳤습니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자신들이 누리고 있던 기득권이 중요했습니다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그들에게는 앞으로 다가올 참된 자유와 평화보다는 지금의 풍족함이 더 중요했습니다빌라도는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 진리를 외면하였습니다코로나19는 분명 우리의 신앙생활에 어려움을 주었습니다미사에 참례할 수 없었고단체 활동을 할 수 없었고경제적인 어려움이 있었습니다그러나 우리가 찾으면 코로나19의 위험에도 신앙생활을 충실하게 할 수 있습니다. 2000년이 지났지만 우리는 여전히 욕심 때문에이기심 때문에 예수님께 받았던 사랑을 외면하고 있습니다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버림받으셨지만 모든 사람을 용서하셨습니다.

 

오늘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용서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용서는 적당히 할 수 없는 것입니다. 30%만 용서한다. 50%만 용서한다는 말은 없습니다용서는 온전히 100% 용서여야 합니다조금이라도 미진한 마음으로 용서한다면 그것은 참된 용서가 아닙니다우리는 말로는 용서한다고 하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 분노와 원망이 있기 때문에 기쁘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우리의 영혼이 자유롭기 위해서는 나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해야 합니다용서는 내가 베푸는 선행이 아니라 어쩌면 용서는 내가 자유롭기 위해서 행해야 하는 최선의 방법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오늘 제2독서는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에는 자신을 위하여 사는 사람도 없고 자신을 위하여 죽는 사람도 없습니다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그러므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의 이 말씀은 하느님만이 우리에게 참된 자유를 주신다는 신앙 고백입니다그 하느님은 우리가 용서하고 용서받을 때 더욱 가깝게 느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눈만 뜨면 용서하십시오! 밥먹듯이 용서하십시오!

 -양승국신부-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우리 평생에 걸쳐 매일 매순간 밥먹듯이 되풀이해야하는 매일의 과제, ‘용서’에 대해서 생각하는 주일입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오 복음 18장 22절)

  

우리 모두 용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누군가 내게 지은 죄나 잘못에 대해서, 꾸짖거나 벌하지 않고 무조건적으로 덮어주는 일입니다.

  

그러나 용서란 개념이 그리스도교 안으로 들어오면, 훨씬 폭넓은 의미로 확장됩니다. 잘못한 사람의 죄나 허물을 덮어주는 것을 넘어섭니다. 용서의 대상을 완전히 새롭게 하여 의로운 상태를 만들어주는 것을 포함한 하느님의 거룩한 구원 활동이 곧 용서입니다.

  

2007년 개봉되어 큰 화제를 몰고왔던 이창동 감독님의 ‘밀양’이라는 영화의 한 장면이 늘 목에 걸린 가시처럼 남아있습니다. 주인공 신애(전도연 분)는 모든 것을 잃고 난후, 어린 아들 손을 잡고 죽은 남편의 고향 밀양으로 내려옵니다.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발버둥치던 신애에게 업친데 덮친격으로 청천벽력같은 사건이 발생합니다. 유일한 희망이고 의지처이던 아들이 유괴·살해된 것입니다.

  

너무나 큰 충격 앞에 주저앉아 있던 신애는 오로지 신앙에 매달리며 돌파구를 찾기 위해 발버둥칩니다. 그리고 마침내 주변 사람들의 권고를 받아들여 아들을 죽인 살인범을 면회하러갑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그를 용서해주러 간 것입니다.

  

면회실에서 신애는 살인범의 태도에 또 한번 무너지고 맙니다. 그녀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겨우 진정시키며 백번천번 준비했던 말을 꺼내려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당신을 용서합니다.”란 말을 하고 마음의 평화를 찾으려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말을 꺼내기도 전에 살인범은 세상 편한 얼굴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미 제 죄를 다 용서해주셨습니다.” 그러면서 마치 신선같은 미소를 짓는 것입니다.

  

밖으로 나온 신애는 가슴을 쥐어뜯으며 울부짖습니다. 이렇게 외칩니다. “그 사람은 이미 용서 받았데요. 그런데 내가 어떻게 또 다시 그를 용서하냐구요?”

  

곰곰히 따지고 보니 용서는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용서에는 식별과 절차와 과정이 필요한 것입니다.

  

누군가와의 관계 안에서 큰 상처를 입었는데, 원인을 곰곰히 분석해보니 50:50 쌍방과실이라면, 용서하는 게 맞습니다. 50:50까지 아니어도, 상대방이 70, 내가 30 정도 된다 할지라도, 억울하겠지만 큰 마음 먹고 용서하는 게 좋습니다.

 

그런데 이 한 세상 살아가다보면 1:100 같은 경우도 만납니다. 나는 아무 잘못도 없는데, 일방적으로 당하는 경우 말입니다. 그럴 경우에 필요한 것이 용서 이전에 정당한 과정이요 절차입니다. 때로 징계나 처벌도 필요합니다. 그리고 진정성 있는 사과가 뒤따라야겠지요. 그 다음에 필요한 것이 용서인 것입니다.

  

씻을수 없는 깊은 상처와 치명적인 고통을 안겨준 인간 말종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끝내 사과 한 마디 없이 큰소리 떵떵치는 사악한 존재들, 피해자들은 매일 죽어가고 있는데 해맑은 얼굴로 호의호식하고 있는 인간들은 결코 용서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섣불리 용서했다가는 나중에 두고두고 홧병을 앓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한 인생이나 가족을 송두리째 망가뜨린 범죄자들, 끝까지 인간이기를 포기하며 살아가고 있는 일제군국주의자들, 친일파들, 자기 한목숨 건지기 위해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들, 사익을 위해 선량한 백성들에게 총부리를 겨눈 군부 독재자들은 그냥 용서하면 안됩니다. 합당한 처벌과 배상, 진정성있는 사과가 반드시 먼저 이루어져야 마땅합니다.

  

물론 무조건적 용서는 가장 좋은 선택입니다. 그러나 어렵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노력이 예수님의 권고에 따라 일흔일곱번 용서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눈만 뜨면 용서하는 것입니다. 밥먹듯이 용서하는 것입니다. 결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최선을 다해 노력하되, 인간의 힘으로 안될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무조건 하느님께 맡겨드려야겠지요.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이영근신부-


가을이 왔습니다가을의 맑고 푸른 드넓은 하늘처럼우리 마음이 너그럽고 맑아졌으면 좋겠습니다오늘 <말씀전례>의 주제는 드넓고 한계가 없는 무한한 용서를 입었으니너희도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1독서>에서는 인간이 죄인을 용서해주면 하느님께서는 용서하는 그 사람의 죄도 용서해 주리라고 말씀하십니다곧 용서하는 것이 용서받는 길임을 말해줍니다.

                             “네 이웃의 불의를 용서하여라.

                    그러면 네가 간청할 때, 네 죄도 없어지리라.”(집회 28,2)


<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이들과 산 이들의 주님이 되시기 위해서 돌아가셨다가 살아나셨기에“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로마 14,88) 라고 고백합니다곧 주님의 자비를 입었으니 자비를 베풀라는 말씀입니다.

<복음>에서 베드로는 예수님께 다가와 묻습니다.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마태 18,21)


사실베드로의 이 질문은 오늘 <복음>의 앞 장면에서 예수님께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8,18)라는 말씀을 듣고서 하는 것이기에하느님 자비와 용서를 한계 짓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대답하셨습니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2)


‘일흔 일곱 번’이라는 이 말씀이 용서에 대한 베드로의 시각을 얼마나 바꾸어 놓았는지 이해하기 위해서우리는 <성경>에서 ‘일흔 일곱 번’이라는 말이 어떻게 쓰였는지를 볼 필요가 있습니다.

<창세기>에서하느님께서는 카인을 죽이는 이는 누구든지 카인이 아벨을 죽이고 받았던 것보다 일곱 배나 더 큰 벌을 주겠다고 위협하셨는데이는 카인에게 내리는 자비의 표시였습니다.

다시 말하면하느님께서 그를 용서해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그를 보호하기까지 해 준다는 큰 자비의 표시였습니다그런데 카인의 후손 라멕은 자신에게 가볍게 상처를 입힌 사람과 막대로 자신을 건드린 사내아이를 무자비하게 살해했다고 두 아내 앞에서“나를 조금이라도 해치는 이는 누구든지 일곱 배가 아니라 ‘일흔일곱 배’로 앙갚음을 할 것이다!”라고 자랑삼아 떠벌립니다(창세 4,23-24).

여기서 보듯이사람은 악하기 때문에 되갚고 앙갚음을 합니다.

그리고 그 악함이 클수록 앙갚음도 더 격렬해서눈에는 눈손에는 손으로 되돌려주는 것이 아니라그에 더하여 죽이기까지 한 것입니다그 반면에하느님은 자비롭고 용서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 용서는 그 한계를 두지 않는데서 더 잘 드러납니다.

그러니 ‘일흔 일곱 번’까지 용서하라는 말씀은 상대방의 악함보다 항상 더 큰 선으로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그것은 단지 용서할 뿐만 아니라끝까지 무한히 용서할 뿐만 아니라더 나아가서 그를 보호해 주라는 말씀입니다그를 도와주고그가 잘 되도록 기도하고돌보아주라는 말입니다.

곧 용서를 넘어서는 용서용서한 다음에 거기에 더하여 사랑하라는 말입니다이를 산상설교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4)


예수님께서는 이를 설명하시기 위해오늘 <복음>에서 무자비한 종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이 비유에는 대조적인 두 인물이 등장합니다곧 ‘조금만 참아달라는’ 종의 간청에 대해 단지 참아 주는 것을 넘어서청하지도 않은 빚을 아무런 조건 없이, ‘먼저’ 탕감해주는 자비로운 왕과 “동료의 간청을 들어주기는커녕 오히려 그 동료를 끌고 가서 빚진 돈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어버리는”(마태 18,30) 카인의 루손 라멕과 같은 무자비한 종이 있습니다.

이 비유에서 용서는 빚진 종을 왕이 “가엾이 여겨, 그를 놓아주고 빚을 탕감해주는 것”(마태 18,26)으로 드러납니다곧 자비로 드러납니다.

 그 자비는 단지 놓아 줄뿐만 아니라빛을 탕감해주고 잘 살아가도록 도와줍니다.

더구나 그것은 청하기도 전에 미리 헤아려 먼저 베풀어지고 선사되는 자비로 드러납니다.

그래서 왕은 종에게 말합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너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할 것이 아니냐?”(마태 18,33)

이는 우리가 왜 용서해야 하는지용서의 이유를 밝혀줍니다그것은 우리가 잘못을 인정하기도 전에고백하기도 전에아니 용서를 청하기도 전에당신께서 먼저’ 우리를 용서하셨기 때문입니다.

 곧 우리가 사랑하기도 전에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고우리가 구원을 청하기도 전에 먼저’ 우리를 구원해주신, ‘먼저’ 베풀어진 자비와 용서를 입었기 때문입니다나아가 용서에 더하여 선으로 앙갚음되는 더 큰 은총의 사랑과 자비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역시 하느님의 호의(헤세드)의 마음으로 형제를 용서해야 할 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무자비한 종의 비유를 마치시고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마태 18,36)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용서하십시오.”(에페 4,32)

“주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해야 합니다.”(골로 3,13)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2)


주님!

용서할 수 있게 하소서.

아니용서하기에 앞서 용서받았음을 깨닫게 하소서.

그리하여 더 큰 사랑으로 용서하게 하소서.

일곱 번이 아니라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끝까지 용서하게 하소서.

무한히 용서할 뿐만 아니라더 큰 선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그가 잘 되도록 기도하고 도와주고 돌보게 하소서.

꺾이고 또 꺾이어도 결코 희망과 믿음과 사랑을 버리지 않으신 주님처럼,

저 역시 당신의 희망과 믿음과 사랑을 저버리지 않게 하소서.

오늘도 먼저 용서하고, 용서에 사랑을 더하게 하소서. 아멘.


매정한 종의 비유 ♣

-송영진신부-


1) 용서의 출발점은 ‘감사드리는 마음’입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에 감사드리면서,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 형제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는 것,
그것이 용서입니다.
(주님께 직접 은혜를 갚을 길은 없습니다.
그래도 한 가지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주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형제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는 것입니다.)
형제를 용서하는 것을 어렵게만 생각하는 것은,
주님의 은혜에 감사드리는 마음이 너무 작거나 없기 때문입니다.
2) 용서는 ‘나의 자비’를 형제에게 주는 일이 아니라,
주님께서 나에게 주신 ‘주님의 자비’를 형제에게 나누어 주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 10,8).”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나에게 거저 주신 것을 나누어 주는 일이기 때문에
용서를 실천한 다음에 생색낼 것도 없고, 대가를 요구할 것도 없습니다.
3) 용서는 형제에게 선과 사랑을 실천하는 일이고, 형제를 위한 일이지만,
선과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내가 덕을 쌓는 일이기 때문에
일차적으로는 나 자신을 위한 일입니다.
반대로 생각하면, 용서하기를 거부하는 것은 주님의 뜻을 거스르는 일이기 때문에
‘내가’ 죄를 짓는 일이 되어버립니다.
(우리는 용서하려고 노력해도 용서가 안 되는 경우와
처음부터 용서하기를 거부하는 경우는 구분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4) 주님께서는 우리가 서로 용서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용서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용서하라고 명령만 하시고 내버려 두시는 것이 아니라,
서로 용서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힘만으로는 용서하기가 너무 힘들고 어려울 때에는
주님께 도움을 요청하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하늘나라는 자기 종들과 셈을 하려는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임금이 셈을 하기 시작하자 만 탈렌트를 빚진 사람 하나가 끌려왔다.
그런데 그가 빚을 갚을 길이 없으므로, 주인은 그 종에게 자신과 아내와
자식과 그 밖에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갚으라고 명령하였다.
그러자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제발 참아 주십시오. 제가 다 갚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 종의 주인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를 놓아주고 부채도 탕감해 주었다(마태 18,23-27).”

우리 입장에서는 이 이야기에 언급된 ‘만 탈렌트’를 주님께 갚아야 할 ‘빚’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로 생각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비유에서, 주인이 종에게 가족들과 재산을 다 팔아서 빚을 갚으라고 명령했다는
말은, 주님의 은혜는 인간의 힘으로는 갚을 수 없는 무한히 큰 은혜라는 것을
강조하는 표현일 뿐이고, 실제로 주님께서 그렇게 무서운 분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종이 “다 갚겠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은 실제로 갚을 수 있다는 뜻으로
한 말은 아니고, 그냥 애원하는 말이고, ‘빈 말’입니다.
(주님의 은혜를 찬미하고 찬양하는 기도를 하거나 성가를 부를 때가 많은데,
마음으로 깊이 느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습관적으로, 또 형식적으로
하는 것이라면, 그 기도나 성가는 모두 ‘빈 말’이 됩니다.)
주인이 모든 부채를 탕감해 준 일은,
‘만 탈렌트’나 되는 빚은 빚이 아니라 은혜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주인은 탕감해 주면서 아무런 대가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은혜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거저 주신 것”임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조건’은 있습니다.
주인이 자비를 베푼 것처럼
종도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는 조건입니다(33절).

이 이야기에서, 종이 주인에게 감사를 드렸다는 말이 전혀 없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복음서 저자가 일부러 생략한 것은 아닐 것이고,
그 종이 자기가 은혜 받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서
주인에게 고마워하지 않았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우리도 주님에게서 은혜 받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주님께 감사기도 드리는 것을 잊어버릴 때가 있는데,
그러면서도 이웃에게 은혜를 베푼 것에 대해서는 생색을 낼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용서를 받는 것은 우리의 권한도 아니고, 주님의 의무도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께 용서를 요구할 수 없고, 간청할 뿐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는 것은 ‘자비’를 베풀어 주시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 하나를 만났다.
그러자 그를 붙들어 멱살을 잡고 ‘빚진 것을 갚아라.’ 하고 말하였다. 그의 동료는
엎드려서, ‘제발 참아 주게. 내가 갚겠네.’ 하고 청하였다. 그러나 그는 들어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가서 그 동료가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었다.
동료들이 그렇게 벌어진 일을 보고 너무 안타까운 나머지,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죄다 일렀다. 그러자 주인이 그 종을 불러들여 말하였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그러고 나서 화가 난
주인은 그를 고문 형리에게 넘겨 빚진 것을 다 갚게 하였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마태 18,28-35).”

앞에서 말한 것처럼 여기서도 ‘빚’을 ‘은혜’로 생각한다면,
‘백 데나리온’은 동료에게 베풀어 주어야 할 ‘작은 은혜’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비유에 나오는 종은 주인에게서 도저히 갚을 길이 없는 ‘큰 은혜’를 받았으면서도,
동료에게 ‘아주 작은 은혜’를 베풀어 주는 것을 거절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당신이 베풀어 주신 은혜를
당신에게 갚으라는 것이 아니라, 이웃과 나누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에, 왜 그렇게 용서하는 일이 힘들고 어려울까?
사실, 비유에 나오는 ‘매정한 종’과 같은 사람은 실제로는 별로 없고,
어떻게든 용서하려고 노력하지만 상처가 너무 커서,
그래서 용서가 안 되는 것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사람은 많은 것이 현실입니다.
1) 상처가 아물 때까지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 시간은 며칠 정도가 아니라 몇 년, 또는 몇 십 년이 될 수도 있습니다.
2) 나에게 상처를 준 그 사람이 미안하다고 말하기는커녕
“나는 잘못한 것이 없다.” 라고 우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정말로 용서하기가 어렵습니다.
바로 그런 때에, 그 사람이 자기 잘못을 깨닫고 회개할 수 있도록
그를 인도해 달라고 주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용서에 대한 가르침

-조욱현신부-


오늘의 전례는 하느님의 자비를 찬양하는 대목들로 가득 차 있음을 알 수 있다독서에서도 교회의 혼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랑과 형제애에 관한 주제가 나오고 그중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의 중대한 의무인 용서에 대해 강조하고 있다이것이 쉽지 않은 것임을 예수께서도 아시기 때문에 그분은 인간들에게 용서를 베풀어주시는 하느님의 경우를 제시하시며 가르치신다.


복음마태 18,21-35: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오늘 복음에서의 형제의 용서에 대한 베드로와 예수님의 대화를 보자. “‘주님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주어야 합니까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21-22). 이는 무한히 용서하라는 말씀이다일곱 번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한 베드로의 마음을 넓힐 필요가 있었다여기서 또한 베드로의 역할이 조심스럽게 고려되고 있다즉 베드로는 전 교회의 일치를 위해 맡은 책임이나또 그가 차지한 위치 때문에 가장 심하게 상처를 받을 수 있다그러기에 용서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


이 말씀에 이어 나오는 무자비한 종의 비유는 무한한 용서를 나타내는 것보다는 순수하게 그리고 진심으로 용서해준다(35)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강조하고 있다예수께서는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을 무한히 용서하시는 것은 용서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지만 불가능한 일도 아니고 오히려 반드시 해야 할 일이라는 점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이다이 비유는 세 가지 행위로 전개되고 있다.


첫째는 왕에게 큰 빚을 진 종이 셈을 바쳐야 하는데 왕은 관대하게 그의 모든 빚을 탕감해주고 있다(23-27). 그 종은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지만도저히 갚을 수 없는 큰 빚을 지었다. 1달란트는 금으로 따지면 42kg(11,200)에 해당한다그런데 그것이 일만 달란트이다어떻든 그 딱한 종은 자신과 자신의 가족 그리고 자기 재산을 다 팔아도 그 빚을 갚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여기서 뜻하지 않게 왕은 관대함을 베풀어 그 종을 탕감해준다. “그 종의 주인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그를 놓아주고 부채도 탕감해주었다.”(27). ‘가엾은 마음이 들어라는 말은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를 나타내며마태오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인간적 불행을 위로하시는 측은지심을 뜻한다(9,36; 14,14; 15,32; 20,34 참조). 즉 왕의 관대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참으로 감동적인 장면이다.


그러나 두 번째 행위는 우울한 기분이 든다그 종은 주인과 같은 자비를 가진 것이 아니라편협한 마음에 사로잡혀있다그 종은 왕에게서 물러 나와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를 만나서 왕의 태도와는 대립적인 요소를 드러내고 있다우선 그 종은 화를 내고 그가 주인에게 한 것과 똑같은 간청을 들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동정심을 느끼지 않고 그 동료를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30감옥에 처넣는다이 경우에는 그 동료의 빚을 탕감해주거나 연기해주는 일이 앞의 경우보다는 쉬운 일이었다. 100데나리온은 100일간의 임금이기 때문이다이렇게 금액의 차이를 강조하는 것은 인간의 마음의 편협성과 폐쇄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세 번째 행위가 극적이다다른 종들이 그 광경을 보고 분개하여’ 주인에게 일러바치고주인은 모든 것을 취소하고 무자비한 종을 빚을 다 갚을 때까지 형리에게 넘겼다(32-34)고 한다이 태도는 가엾게 여기던’ 모습과는 대조적이다그러나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주인은 정의의 규범을 초월하는 사랑의 법을 세워주었는데그 무자비한 종은 율법주의적 사고에 사로잡힌 사람이었다.


그는 사랑과 용서를 다시 나눔으로써’ 새로운 공동체가 창조될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그러므로 그 종은 무상으로 받은 선물을 빼앗기고 마는 것이다우리가 사랑을 다시 나누어줄 줄 모른다면 그것은 우리가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이때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서 그 사랑을 거두어 가실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항상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해당한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하실 것이다”(35).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이제 우리가 형제들 상호 간에 어떻게 형제애를 실천하느냐에 따라 심판하실 것이다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면서도 아버지저들을 용서해주십시오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라고 하셨다.


그렇게 하셨기 때문에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시는 것은 무리한 요구가 아니라는 것이다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서로 용서를 베풀어야 한다서로의 잘못을 용서해주지 않으면 교회는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교회는 신자들이 주님께 끊임없이 용서받고 또 서로 간에 용서를 나눌 수 있을 때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용서를 거부하는 자는 이미 교회 밖에 있는 것이다그리스도의 몸으로부터 제외하는 죄가 바로 이 죄이다그러므로 화해의 성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다.


용서와 화해에 대한 필요성은 제독서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네 이웃의 불의를 용서하여라그러면 네가 간청할 때 네 죄도 없어지리라인간이 인간에게 화를 품고서 주님께 치유를 구할 수 있겠느냐인간이 같은 인간에게 자비를 품지 않으면서 자기 죄의 용서를 청할 수 있겠느냐?”(집회 28,2-4). 이미 신약의 정신이 나타나고 있다.

 

바오로 사도도 제독서에서 다른 형제들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의무를 상기시키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셨다가 살아나신 것은바로 죽은 이들과 산 이들의 주님이 되시기 위해서입니다.”(로마 14,9). 당신 자신을 내어주시고 용서해주심으로써 우리에게 그렇게 하라고 하시는 것이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대하시는지 알려 줍니다.

"그 종의 주인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마태 18,27)

엄청난 빚을 갚지 못하는 종이 주인에게 엎드려 간청하자 주인의 마음이 움직입니다. 주인은 다른 조건을 제시하거나 기한을 연장하지 않고, 흔쾌히 부채를 탕감해 줍니다. 동기는 오직 하나, 가엾이 여기는 마음입니다.

돈이 중요하고 재산 증식이 제일의 목표가 되어 버린 세상에서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설정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이 비유가 어이없는 만큼, 그만큼 파격적이고 헤프다는 뜻입니다.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마태 18,35)

주인에게서 큰 은혜를 받은 종이 자기 채무자를 혹독히 벌하다 결국은 기껏 얻은 은혜를 다 잃게 됩니다. 이유는 자기가 받은 용서를 타인에게 베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용서와 자비, 사랑을 베푸실 때는 어떤 목적을 품고 하시지 않습니다. 그 순간에 목적은 오직 우리뿐이지요. 우리가 죄에서 해방되어  자유롭게 되는 것, 죄의 상처를 치유받고 온전한 아름다움을 회복하는 것이 바로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지향입니다.

그런데 용서 안에는 특별한 매카니즘이 작동합니다. 용서는 용서를 낳고, 또 그 용서는 또다른 용서를 낳는 자기 증식의 DNA를 품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받은 용서가 나에게 해를 입힌 이들에게까지 흘러가 그들을 자유롭게 할 때 비로소 하느님과 나의 관계 회복이라는 용서의 진정한 완성 단계에 다다릅니다. 내가 아직 타인을 용서 못하는 상태라면, 아직 나는 하느님의 용서를 마음 깊이 받아들이지 못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마음으로부터 용서"받은 이는 "마음으로부터 용서"하기 마련이니까요.

제1독서에서 집회서 저자는 분노와 용서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지금 무언가로 인해 마음이 불편하다면 큰 도움이 될 실질적 조언들입니다.

"인간이 같은 인간에게 자비를 품지 않으면서, 자기 죄의 용서를 청할 수 있겠느냐?"

부연 설명이 필요 없는 말씀입니다. 자비를 입은 이에게서 자비가 흘러 나오고, 용서 받은 이에게서 용서가 이어집니다. 자비를 실천하지 않으면서 자기 허물에 대해서만 용서를 기대하는 것은 염치 없는 태도가 되겠지요.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인간 사이에 벌어지는 갈등의 해법이 될 말씀을 제시합니다.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로마 14,8)

이 말씀에 깊이 머무르면, 인간 사이의 미움과 분쟁, 소유와 허세 들이 얼마나 부질없는지 알게 됩니다. 제 한 몸의 영화와 제 이름의 명예에 집착해 형제도 이웃도 다 떨쳐내고 달려온들 그 무엇도 제 것이 아니니까요. 자기 자신조차 주님의 것인데, 손에 움켜쥔 무엇인들 내 것일 수 있겠습니까!  

오늘 말씀 안에서 언급된 "분노와 진노, 복수, 화, 적개심"
(제1독서) 등의 감정이 어떤 계기로 우리 안에 잠시 들어올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대개는 자신이 받은 용서와 화해의 기억을 통해 정화하고 떠나보내기 마련이지요. "자비, 너그러움, 자애, 은혜, 용서"(화답송) 등의 말씀들이 우리가 받았던 은혜로운 체험들을 소환해 주니까요.

혹시 이 쓰고 독한 감정들을 길고 짙게 붙들고 있다면 아직 자신이 주님의 것임을 모르거나 인정하지 않고 있는 상태일 겁니다. 용서하시는 자비의 하느님과 관계 맺지 못하고 스스로를 고통 속에 잡아 앉힌  안타까운 처지일 수도 있지요. 만일 그러고 있다면 이제는 자기 마음의 문 바깥에서 서성이고 계시는 하느님께 문을 열어드릴 때도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용서 못하는 아픈 감정에서 헤어나오고 싶다면 말입니다.

주님의 것인 "내"가 주님의 것인 "그대"를 용서합니다. "주님의 것"인 그대가 "주님의 것"인 "나"를 해방합니다. 사랑하는 벗님! 잃은 것도, 당한 것도, 더 얻지 못한 것도 한 걸음 물러서서 "주님의 것"으로 의연히 바라보고 담담히 떠나 보내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용서가 한결 쉬워질 것 같습니다. 

고 도미니코 OFM( 터키 에페소 기도의 집)

http://www.ofmkorea.org/ofmhomily/380226

오늘 독서와 복음의 핵심 주제는 용서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하기 어려운 것 두가지를 말한다면 죄를 짓지 않는 것과 내게 상처준 사람을 용서하는 일일 것입니다.

우리가 용서하지 못할 때 마음에는 화 · 분노 · 쓰라림 · 적개심 · 복수심 · 모멸감 · 우울함 · 무가치 등 온갖 부정적 감정이 쌓입니다. 이러한 감정이 가득차게 되면 무엇보다 우리 몸이 견디지 못하게 됩니다. 열이 나고, 가슴이 답답해지고, 심장이 아프고, 소화가 안 되고 잠을 이룰 수 없고 안절부절 못하게 됩니다. 가슴에 가득 차 있는 화, 치를 떨게 만드는 분노는 우리 몸과 영혼을 망가뜨리는 독소입니다. 이러한 독소가 스며들 때 내적 자유도 평화도 은총의 삶을 느끼지 못합니다.

용서를 위해 용서 전문가들이 공통적으로 강조 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첫째, 용서는 의지적으로 결심함으로써 가능한 것, 둘째, 용서란 상처에서 비롯한 울화와 분노의 악순환에서 해방되는 것,
셋째, 용서란 내면의 평화와 자유와 힘을 되찾는 것,
넷째, 용서란 상처 준 사람이 더 이상 내마음을 차지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
다섯째, 용서란 나의 책임 아래 있음을 받아들이는 것,
여섯째, 용서란 상처를 치유하는 데 목적이 있을 뿐 상처를 준 상대방과는 상관이 없다는 것,
일곱 번째, 용서는 있었던 일을 잊는 것이 아니라, 다시는 같은 일로 상처 받는 일이 없도록 기억하는 것,
마지막으로, 용서와 화해는 다르고, 우리는 용서하는 동시에 우리에게 상처 준 사람과 화해하거나 상대방과 헤어져 나만의 새로운 길로 나아갈 수 있으며 선택은 나에게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용서 신학’을 전개한 신학자 스미즈는 이렇게 말합니다. ‘용서하는 것은 60킬로그램짜리 배낭을 지고 12킬로미터 정도 산을 오른 후 배낭을 내려놓는 것이다. 용서하는 것은 죄수를 풀어주고 나서 그 죄수가 바로 자신이었음을 알게되는 것이다’

남을 용서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도 용서를 받을 것입니다(루까 6,37). 남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으면 주님도 여러분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입니다(마태 6,14; 참조: 마르 11,25)

성 프란치스코의 말을 상기하고자 합니다.
“분노와 흥분은 본인과 다른 사람들에게 있어 애덕의 장애물이 되므로, 누구의 죄 때문에 화내거나 흥분하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우리가 완전히 용서하지 못하는 것을, 주여, 완전히 용서하게 해 주시어, 우리가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는 일 없이 주님 때문에 원수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원수를 위하여 당신께 열심히 기도하며 당신 안에서 모든 이에게 유익한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게 해 주소서.”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1년 9월 11일 연중 제24주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