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9월 12일 연중 제23주간 토요일
나에게 와서 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가르쳐 주겠다.
그 사람은 땅을 깊이 파고 반석 위에 기초를 놓고
집을 짓는 사람과 같다.
(루가 6,43-49)
Listens to my words, and acts on them.
That one is like a man building a house,
who dug deeply and laid the foundation on rock;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박병규신부-
나무와 열매의 인과 관계는 배움이 실천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당위를 환기합니다. 누구인가 그러더군요. 머리에서 발까지가 가장 긴 여행이라고요. ‘생각이 실제 움직임으로 곧장 이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가도 가만히 다시 생각해 보니, 무작정 실천하는 경솔함도 함께 고민해 보아야겠다 싶습니다.
나무가 열매를 맺고 배움이 실천으로 이어지는 것을, 모든 것이 가시적 성과를 내야 한다고 바꾸어 얘기할 수는 없습니다. 설익은 생각들이 부지런한 행동으로 이어질 때, 공동체는 온갖 구설수에 휘말리고 소모적 논쟁으로 몸살을 앓고는 합니다. 어쩌면 생각을 단단히 다지고 공고히 하는 숙성의 시간이 공동체에게는 필요할지 모를 일입니다.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세상에 앞장서 저 멀리 ‘장밋빛 인생’을 제안하는 힐링 센터가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이 치고 나가며 흩어 놓은 수많은 아픔과 슬픔을 사유하고 보듬는, 그래서 비가 온 뒤 적셔진 대지가 더욱 단단히 굳어지듯, 세상의 어설픔과 경솔함으로 갈라진 틈을 단단히 메꾸어 나가는 일이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일이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의 ‘반석’은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이해하는 데 꽤 멋진 비유입니다. 우리의 행실로 맺은 열매는 반석처럼 굳건해야 하고, 우리의 생각을 드러내는 실천은 우리 삶처럼 단단해야 합니다. 이리저리 쓸려 다니고 흔들릴 바에야 세상의 논리에 내맡기는 것이 하느님 앞에 오히려 솔직한 모습이겠지요. 지난 시간을 다시 반추해 봅니다. 그리고 작은 것 하나라도 제대로 굳건히 다시 세워 보아야겠습니다. 잘하려 들기보다는 똑바로 할 수 있도록 지금의 생각부터 차근차근 다듬어 보아야겠습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어느 분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어렸을 때, 제 형님이 저를 너무 많이 혼냈어요. 그래서 그때 이후 자존감이 엄청나게 낮아졌어요.”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분의 형을 잘 알고 있으므로 나중에 살짝 돌려서 물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동생을 너무나 사랑하고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부로 골탕먹으라고 혼낸 것이 아니라, 더 잘되라고 조언을 해준 것이었습니다. 이를 질책과 비난으로 받아들인 것이지요.
다른 사람으로 인해 자존감이 떨어지는 것은 제대로 듣지 않아서는 아닐까요? “이것은 이렇게 해야지. 자꾸 실수를 반복하면 어떻게?”라는 말을 “너는 이것도 못 하는 쓸모없는 존재야.”라고 듣는 것입니다.
물론 상대방이 제대로 말해주지 못해서 상처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상대방 말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또 어떻게 듣느냐는 매우 중요한 것 같습니다. 상대방과 당시 상황의 진실만 제대로 파악해도 자신을 쓸데없이 괴롭히는 일은 줄어들지 않을까요?
이것이 우리 삶의 중요한 기초가 됩니다. 다른 사람의 말과 행동에 흔들리지 않는 기초가 탄탄해야 합니다. 그 기초는 주님 안에서 완성할 수 있습니다.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이는 그리스도이시고, 그분께서 짓는 집은 교회입니다. 땅을 깊이 파고 반석 위에 놓은 튼튼한 기초는 예수님의 교의적 가르침, 성조들, 예언자들 그리고 사도적 교회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의 밭에서 그리스도라는 반석 위에 집을 지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의 삶과 죽음과 부활로 이루신 공로라는 반석 위에 집을 짓습니다.
이런 기초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이런 기초 없이 과연 집이 제대로 세워질 수 없습니다. 강물로 상징되는 고통과 시련이 오면 곧바로 무너져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완전히 허물어져 버립니다.
만약 다른 사람의 말과 행동으로 내가 세운 집이 무너지고 있다면 분명히 주님이라는 기초가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더욱더 알기 위해 노력하고, 주님과 함께해야 합니다.


제가 아는 신부님 중에서 고기를 구울 때는 반드시 자신이 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분이 계십니다. 다른 사람이 고기 굽는 것을 인정하지 못합니다. 심지어 고깃집에서 직원이 구워주는 것도 못마땅하게 생각합니다. 잘못 굽고 있다면서 말이지요.
특히 이 신부님의 고기 굽는 법은 자주 뒤집지 않는 것입니다. 자주 뒤집으면 고기의 육즙이 증발해서 맛이 없어진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신부님과 함께 강원도에 한우로 유명한 고깃집을 간 적이 있습니다. 한우에 대한 자부심이 높은 곳으로, 고기 굽는 것을 사장님께서 직접 해주십니다. 이 사장님 역시 남이 고기 굽는 것을 인정하지를 않습니다.
잠시 뒤에, 이 사장님의 고기 굽는 법과 앞서 말씀드린 신부님의 고기 굽는 법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글쎄 사장님은 고기를 계속 뒤집는 것입니다. 그래야 육즙이 고기의 한가운데 모이게 된다는 것이었지요.
전혀 다른 고기 굽는 법이지만 두 방식 모두 맛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맞는 것일까요? 누군가가 이렇게 말하네요.
“고기는 무조건 맛있는 것 아냐?”
자기 방식만 맞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너도 맞고, 나도 맞고, 서로를 인정하는 것이 어쩌면 고기를 제일 맛있게 먹는 비결이 아닐까요?

꽃이 될 것인가, 열매가 될 것인가?
-전삼용신부-
한국의 2015년 기준 65세 이상 노인 자살률은 10만 명당 58명으로 OECD 국가 중 1위입니다. OECD 평균 18명보다 훨씬 높고 심지어 2위인 35명보다도 압도적으로 앞선 1위입니다. 노인 자살의 주된 원인으로는 경제적, 정서적 독립이 부족한 것을 꼽습니다.
그런데 가난하면 다 자살해야 할까요? 사실 코로나가 발생하고 자살률이 줄었다고 합니다. 힘들수록 더 어떠한 목표를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코로나가 끝나고 다시 편안해지면 오히려 자살률이 증가할 것이라 합니다. 사람은 힘이 좀 들어야 삶의 에너지가 생기는 모양입니다.
켈리 맥고니걸의 『움직임의 힘』에는 한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더는 빛이 보이지 않는 터널 속에서 그는 자살하겠다는 마음을 먹습니다. 그런데 땀이나 실컷 흘려보고 죽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다음 날 죽기로 하고 오늘은 헬스장을 찾았습니다. 벤치프레스를 했는데 80킬로가량 들 수 있었습니다. 땀을 쭉 빼고 나니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자신이 몇 킬로까지 들 수 있는지 궁금해졌습니다. 목표가 생기니 죽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습니다. 5년 뒤 그는 140킬로까지 들 수 있게 되었습니다.
목표란 ‘고통’이란 것을 수반합니다. 따라서 내가 어떠한 목표를 위해 받을 고통을 거부한다면 삶의 의욕이 떨어지는 것입니다. 목표를 위해 고통을 참아 받는 능력을 키울 때 삶의 활력이 넘칩니다.
쥐를 가지고 한 실험입니다. 꼬리에 전선을 연결해서 수시로 전기 자극을 줍니다. 쥐는 언제 자극이 올지 모르고 자극이 와도 피할 방법이 없습니다. 이것이 반복되면 쥐는 우울증에 빠지게 됩니다. 소위 ‘학습된 무기력’이라는 심리 상태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 쥐를 물이 가득한 양동이에 넣으면 헤엄을 치지 않습니다. 가만히 물에 가라앉는 익사를 선택합니다.
다른 그룹의 쥐는 전기 자극을 주는 것은 같지만 그 쥐가 옆에 있는 쳇바퀴에 올라타 돌리면 자극을 중단합니다. 자극이 언제 올지는 모르지만, 이 쥐는 그 자극을 피할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스스로 땀을 흘려 고통을 감내하면 된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이런 그룹의 쥐는 절대 우울증에 빠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물이 가득한 양동이에 넣어도 힘이 다 빠질 때까지 헤엄을 칩니다.
사람이 죽고 싶은 마음이 드는 이유 중의 하나는 더는 살아봐야 아무에게도 쓸모없는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는 절망감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절망감은 꽃이 되려는 목표로 살았기 때문에 올 수 있습니다. 꽃은 화려할 때는 사람들이 좋아합니다. 그러나 꽃은 시듭니다. 그러면 아무 가치가 없습니다. 자살하는 일부 노인들은 어쩌면 꽃이 되려는 마음으로 살아왔을 수 있습니다.
꽃이 아니라 열매가 되려는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사람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은 꽃이 아니라 열매입니다. 내가 기도하는 모습이 아닙니다. 만약 그 모습이 꽃과 같다면,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열매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어떠한 모습을 기대하십니까? 타볼산에서 변모하시는 멋진 모습입니까, 아니면 양식이 되어 오시는 모습입니까? 아무리 예쁜 꽃밭이 있더라도 굶은 사람에겐 배를 채울 수 있는 과일이 필요합니다.
제가 어렸을 때 어머니 젖을 만지다가 가끔은 어머니 팔뚝을 물기도 했었습니다. 왠지 먹고 싶었습니다. 식인종도 아닌데 참으로 이상합니다. 그런데 어른들도 아기들에게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것입니다. 아이들의 손과 발을 입에 넣고 깨물기까지 합니다. 실제로 부모가 아기들을 먹고 싶어 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합니다. 예쁜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꽃은 한계가 있습니다. 열매를 원하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는 먹고 싶은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좋은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지 않는다. 또 나쁜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다”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열매가 ‘말과 행동’임을 말씀하십니다. “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라고 하시는 것은 ‘말’에 관련된 것이고, “너희는 어찌하여 나를 ‘주님, 주님!’ 하고 부르면서, 내가 말하는 것은 실행하지 않느냐?”라고 하시는 것은 ‘행동’입니다. 우리는 말과 행동으로 남을 먹일 수 있습니다.
내가 좋은 나무가 되려면 말과 행동에서 그리스도의 말과 행동이 나와야 합니다. 당신의 뜻이 행동으로 드러나도록 노력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사람과 같다’고 하십니다. 반면 말과 행동으로 그리스도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사람과 같습니다.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사람은 신앙의 목적을 미사나 기도에 둡니다. 미사하고 기도하면 구원받는 줄 압니다. 그러나 그것은 말씀은 받아들이는 시간이고 그 말씀이 말과 행동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사람이 되기 위해 가장 먼저 연습해야 하는 것은 고통을 참아내는 일입니다. 이것을 할 수 없으면 누구에게도 도움이 될 수 없습니다. . 예수님께서 왜 40일 동안 광야에서 단식하셨겠습니까? 당신이 식욕이 강하면 양식이 되는 사람이 아니라 남을 먹는 사람이 되는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꽃이 아니라 열매가 되려는 사람은 자기를 죽이는 고통을 감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래 달라기를 하는 사람들은 ‘러너스 하이’라는 것을 느낍니다. 힘든데 쾌감이 찾아오는 느낌입니다. 나무는 열매를 목적으로 성장하지 꽃을 목적으로 성장하지 않습니다. 꽃은 아름답지만, 열매를 맺는 것은 크나큰 고통입니다. 잘 다져진 반석이란 아마 고통을 인내할 수 있는 마음일 것입니다.
그러니 필요한 사람이 되려면 먹히는 고통을 감내할 줄 아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평소에 조금 힘든 운동을 하는 습관을 들이는 것이 좋습니다. 그 고통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연결하면 더 좋습니다. 꽃에서 열매가 되는 중간에는 반드시 치러야 하는 고통이 있습니다. 내가 열매가 되어 누군가에게 계속 먹힌다면 그 사람은 삶의 의욕을 잃을 수 없습니다.

-조재형신부-
날씨가 더워지면서 산보 가는 길에 물을 가지고 다닙니다. 보온병에 얼음을 넣고 레몬을 썰어 넣었습니다. 마음속으로 정해 놓은 장소에 도착할 때까지 목이 말라도 물을 마시지 않았습니다. 드디어 쉼터에 도착하면 물을 한 모금 마십니다. 시장이 반찬이라는 말이 있듯이 땀을 흘리고 갈증이 났을 때 마시는 물은 꿀맛입니다. 목마르지 않았다면, 땀을 흘리면서 걷지 않았다면 그저 그런 물맛이었을 겁니다. 작년에 이태리의 돌로미테로 산행을 갔을 때도 경험했습니다. 높은 산을 오르고 또 올라 정상의 산장에 도착해서 산 아래를 바라보며 마시는 한 잔의 물은 정말 맛있었습니다. 뒤에 올라오는 분들에게 건네주는 물은 정말 단물이었을 겁니다.
예루살렘의 시장 길에는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이 있습니다. 두려움 때문에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가시는 십자가의 길에 함께 하지 않았습니다. 3번씩이나 넘어지는 십자가의 길에 위로가 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타는 목마름을 적셔준 사람이 있었습니다. 키레네 사람 시몬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갔습니다. 베로니카가 예수님 얼굴에 흐르는 피와 땀을 수건으로 닦아 드렸습니다. 성모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과 함께 하셨습니다. 많은 순례자들이 시끄러운 시장의 소음 속에서도 십자가의 길을 바치면서 순례를 합니다. 십자가의 길 5처와 6처에서 많은 순례자들이 눈물을 흘리는 걸 보았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3번에 걸쳐 선교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많은 협력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천막장수였던 프리스카와 아퀼라가 있었습니다. 자색옷감 장수였던 리디아가 있었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아들처럼 여겼던 티모테오와 티토가 있었습니다. 옥중에서 시중들던 오네시모가 있었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신학과 바오로 사도의 열정적인 선교는 많은 협력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할 수 있었습니다. 한국에서도 주문모 신부님과 파리 외방 전교회 신부님들이 사목할 수 있었던 것은 목숨을 바치면서 신부님들을 도와 드렸던 협력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제를 모시기 위해서 두만강을 몇 번씩 건넜던 정하상 바오로 성인이 있었습니다. 사제를 집에서 모신 복자 강완숙 골롬바가 있었습니다.
미국에서 있으면서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LA에 갈 때면 늘 반갑게 맞이해 주시는 가족들이 있습니다. 함께 미사를 봉헌하기도 하고, 신문 홍보에 도움을 받기도 합니다. 애틀랜타에도 도움을 주시는 형제님이 있습니다. 자매님은 신문에 복음 묵상을 그려 주십니다. 워싱턴과 필라델피아에는 교구 신부님들이 있어서 편하게 지낼 수 있습니다. 달라스에는 동창신부가 있어서 마음이 든든합니다. 지난 1월에 성지순례를 함께 갔었던 교우들도 있습니다. 뉴욕은 신문사가 있는 곳이고, 옆에는 퀸즈 한인 성당이 있습니다. 주일 미사를 도와 드리고 있고, 신부님들께서도 가족처럼 대해 주십니다. 제가 코로나19의 엄중한 시기에도 잘 지낼 수 있는 것은 많은 분들이 도와 주셨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2000년 역사를 지닐 수 있었던 것은 아름다운 성전이 있었기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위대한 설교자가 있었기 때문만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교리와 법을 만들어낸 신학자들이 있었기 때문만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베드로의 수위권을 이어받은 교황님들이 있었기 때문만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정말 묵묵히 자신의 자리에서 참된 신앙의 열매를 맺어온 이름 없는 순례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행각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굳센 믿음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샘이 깊은 물과 같은 믿음을 가지라고 합니다. 반석위에 세운 집과 같은 믿음을 가지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그 믿음이 사랑의 열매를, 희망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나의 믿음이 흔들리는 믿음이어서는 안 됩니다. 어떤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믿음으로 참된 신앙의 열매를 맺어서 이웃들에게 나누어 주면 좋겠습니다. 동생 수녀님은 한국에서 어머니를 위해서 기도하였고, 저는 미국에서 어머니를 위해서 미사 봉헌하고, 연도를 하였습니다. 한국에서, 미국에서 기도하니 어머니께서도 좋아하실 겁니다. 어머니를 위해서 기억하고 기도해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실행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
-반영억신부-
말에서 마음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속마음이 말이 되어 나옵니다. 그리고 행동하게 됩니다. 마음에 담아둔 것은 언젠가 밖으로 나오게 마련입니다. 아무리 조심하고 마음을 닫아걸고 있어도 마음이 한번 흔들리면 속에 있는 모든 것이 쏟아져 나옵니다. 그러니 일상 안에서 마음을 잘 다스리지 못하면 낭패를 보기 십상입니다. 마음 안에 좋은 것을 담아야 좋은 것이 나오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거를 건 거르고, 삭힐 건 삭히고 담아야 하겠습니다.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들은 율법을 따르는 행동을 선한 행동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속마음보다 형식과 겉모양을 중시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행동은 그 사람의 내적 태도가 선할 때 선이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선한 사람은 마음의 선한 곳에서 선한 것을 내놓고, 악한 자는 악한 곳간에서 악한 것을 내놓는다. 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루카6,45). 안에서 나오는 것은 곧 마음에서 나오는 것인데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사기, 방탕, 중상, 교만, 어리석음…같은 여러 가지 악한 생각들인데 이런 악한 것들이 사람들을 더럽힌다(마르7,21이하).
그야말로 가시나무에서는 무화과를 따지 못하고 가시덤불에서 포도를 거두어들이지 못하는 법입니다(루가6,44). 그러므로 닦고 가꾸어야 할 것은 말보다 먼저 마음입니다. 마음을 깨끗이 닦아야 고운 말도 나오고 바른 행동도 나옵니다.
어떤 사람은 개소리만 합니다. 자기 집 강아지가 얼마나 귀여운지 강아지 얘기만 합니다. 그 강아지에게 마음 쓰는 만큼 사람에게 정성과 사랑을 쏟으면 그 사람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변할 터인데…. 동물 애호가나 반려동물과 함께 하는 분에게는 듣기 싫은 소리겠지만 그래도 사람이 먼저입니다. 마음속에 강아지로 가득 차 있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이 보이겠습니까?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존재 자체가 사랑받아야 할 이유입니다. 그러나 어떤 때는 짐승만도 못한 취급을 받는 사람이 있어서 안타깝습니다.
어떤 이는 남 얘기만 합니다. 자기 속을 보지 않고 남의 사생활을 속속들이‘콩 나라 팥 나라’합니다. 다른 사람의 부족한 점을 보고 도움을 주기는커녕 온통 남의 흉, 허물로 자기 마음을 가득 채워 놓는 이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반석 위에 기초를 놓고 집을 지으라 하시는 데 남의 흉, 허물, 험담 위에 집을 짓고 있으니 그 집이 어찌 온전하겠습니까? 그 사람은 ‘기초도 없이 맨땅에 집을 지은 사람과 같습니다. 강물이 들이닥치자 그 집은 곧 무너져 버렸습니다. 완전히 허물어져 버렸습니다’(루가6,49).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 안에 성경말씀과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주 예수님을 잘 모셔야 합니다. 항상 주님을 마음에 품고 있으면 기쁘거나 위기가 닥칠 때나 어느 때이든 그분 것이 우리 마음에서 나옵니다. 그러므로 “눈을 깨끗하게, 귀를 조용하게, 그리고 마음을 평온하게 지키십시오”(토마스 머튼). 잠언에서는 “무엇보다도 네 마음을 지켜라. 거기에서 생명의 샘이 흘러나온다”(잠언4,23).라고 말합니다.“네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신뢰하고 너의 예지에는 의지하지 마라. 어떠한 길을 걷든 그분을 알아 모셔라. 그분께서 네 앞길을 곧게 해 주시리라”(잠언3,5-6). 주님을 마음에 담는 하루를 축복해 주시길 기도합니다.
신앙은 매사에 예수님의 눈으로 보고 그 삶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세상의 논리와 현실의 이해관계 때문에 예수님의 가르침을 부수적인 것으로 생각한다면 신앙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신앙인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행동으로 옮깁니다. 성당 안에서뿐 아니라 일상 안에서 직접 몸을 움직입니다. 마음에 담긴 것을 마음껏 이웃을 향해 봉사합니다. 주님의 가르침을 실행하는 가운데 행복하시길 빕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다" 실행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조욱현신부-
복음: 루카 6,43-49: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삶
오늘 복음에서 ‘좋은 나무’는 성령을 나타낸다. ‘나쁜 나무’는 악마와 그의 부하들이다. 그러므로 성령을 모신 사람은 성령의 열매를 맺는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입니다.”(갈라 5,22-23) 이와 반대는 가시나무와 엉겅퀴, 즉 불명예스러운 욕정들이다.
“나무는 모두 그 열매를 보면 안다.”(44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나 포도 같은 달콤한 열매를 기대한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마찬가지로 위선자나 저속한 자들에게서 고상함을 기대한다면 참으로 우스운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선한 사람은 마음의 선한 곳간에서 선한 것을 내놓는다.”(45절) 이와 반대되는 자는 자기 속에 깊이 감추어졌던 것을 내놓는다.
아무리 그리스도인으로 신앙을 가졌다 해도 지금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함을 말씀하고 계시다. 주님의 말씀을 잘 알고 있다고 하면서 입으로만 “주님! 주님!” 하는 사람의 삶 속에 신앙이 부족함을 안타까워하신다. 덕이 있는 자는 그 품위에 맞는 말을 하고 사악한 사람은 은밀한 곳에 숨겨 둔 더러운 것들을 게워내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은 우리의 삶 속에 드러나는 행위를 통해 나타난다. 그래서 그 행위를 보면 진정으로 우리가 하느님을 섬기고 있는지, 아닌지, 그 자세가 어떤지 예를 들어주신다. “좋은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지 않는다. 또 나쁜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다. 나무는 모두 그 열매를 보면 안다.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따지 못하고 가시덤불에서 포도를 거두어들이지 못한다.”(43-44절). 하느님 앞에서는 마음자세에 따라 그 신앙생활도 진실한지 아닌지, 하느님을 향한, 하느님을 선택하는 삶인지 아닌지가 드러난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뜻을 항상 마음에 새기고 실생활에서 실천하는 삶이 튼튼한 반석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다고 하신다. 이렇게 하는 사람이 입으로만 헛되이 주님을 찾는 사람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하신다. “나에게 와서 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가르쳐주겠다. 그 사람은 땅을 깊이 파고 반석 위에 기초를 놓고 집을 짓는 사람과 같다.”(47~48절)라고 하셨다.
주님을 안다는 것은 성경에도 나와 있지만,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 안에 있을 때만이 우리는 하느님을 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사랑은 바로 이웃 사랑을 통해서 드러나는 사랑이어야 한다. 그래서 구체적인 삶을 통하여 사랑이 드러나고 그래서 사랑이신 하느님을 알아야 한다. 그 앎은 우리의 삶을 통하여, 즉 우리의 체험을 통하여 아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하느님을 알면 알수록, 더 큰 체험을 원하게 되고 그 하느님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 삶으로 하느님을 이 세상에 더욱 깊이 확산시킬 수 있도록 하자.

나무는 모두 그 열매를 보면 안다.(루카 6, 44)
-한상우신부-
순식간에
지나가는
시간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올바른 실행이다.
우리는
어떤 나무이며
어떤 열매인지를
묻게되는 힘겨운
가을이다.
좋은 삶은
좋은 실행에
있다.
실행없는
열매가 있을 수
없듯이 뿌리없는
나무또한 있을 수
없다.
나무가 자라야
열매가 열린다.
자라나야 할
우리자신이다.
나무와 열매는
분리될 수 없다.
열매는
사람을
향한다.
열매가 익어가듯
나무도 익어간다.
열매를 주는
나무가 좋은
나무이다.
열매는
속이지 않는다.
좋은 열매는
하느님을
드러낸다.
나무의 힘은
열매로
드러난다.
열매와
함께하는
나무처럼
실행과
함께하는
우리 신앙이길
기도한다.
열매가 있는 곳에
기쁨이 있듯
실천이 있는 삶에
익어가는 신앙이
있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이미 좋은 나무이면서, 마음에 선한 곳간을 지닌 우리가 어떻게 자신과 이웃을 충만하게 할 수 있는지 알려 주십니다.
"좋은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지 않는다."(루카 6,43)
우리는 나무를 보면서 열매를 떠올리고, 또 열매를 보면서 나무를 기억합니다. 나무와 열매의 인과 관계는 명확하지요. 좋은 열매를 맺었다면 나쁜 나무일 수 없고, 나쁜 열매를 맺었다면 좋은 나무일 수 없습니다.
"나에게 와서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실행하는 이"(루카 6,47)
좋은 나무로서 좋은 열매를 맺는 사람은 이렇습니다. 그들은 먼저 주님을 향해 다가오지요. 마음에 가득 찬 선한 내용들이 선하신 주님을 향해 본능적으로 끌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주님을 듣습니다. 그분의 말씀과 행동과 마음에 귀기울여 경청합니다. 그의 존재를 타고 들어오는 주님의 모든 것이 곧 들을거리입니다.
이어서 그는 들은 것을 실행합니다. 주님에게서 전해진 모든 것은 지식으로 축적되거나 스스로 향유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내 존재를 통해 외부로 표현됩니다. 우리는 이를 열매라고 하지요.
"땅을 깊이 파서 반석 위에 기초를 놓고 집을 짓는 사람"(루카 6,48)
"땅을 깊이 파기"
세상 중심에 계시고 또 내 존재의 가장 심부에 계신 주님을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물론 힘이 들고 고통도 따르는 지난한 여정입니다. 세상과 이웃의 이해도 기대할 수 없을지도 모르지요.
"반석 위에 기초 놓기"
바위이신 주님께 내 존재를 뿌리 내리는 것입니다. 바위이신 그분에게서 흘러 나오는 생수를 마시고 석청으로 배불리며 온전히 그분께 밀착하는 과정입니다. 잘 아시겠지만 바위를 뜷는 일은 간단하지 않습니다. 세상이 제공하는 온갖 소음들 속에서 그분 목소를 감지하고 알아듣는 과정도 마찬가지입니다. 될 때까지, 무수히 반복하고 기다리고 인내하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기적과 같을 겁니다.
"집을 짓기"
이제 비로소 집을 짓습니다. 결과가 겉으로 보여지는 과정입니다. 땅을 깊이 파고 바위 위에 기초를 놓는 노력이 가시적 열매로 드러나는 겁니다. 모든 수고를 다 해놓고도 정작 집을 짓지 않으면, 주님에게서 받은 온갖 선하고 좋은 선물은 고작 자신만을 위한 것으로 그치게 됩니다. 인간적인 재능 정도로 제 안에서 고여 있다가 스러지는, 아직 열매도 은총도 되지 못하고 쭉정이 씨앗으로 사라질 뿐이지요.
"홍수가 나서 강물이 들이닥쳐도, 그 집은 잘 지어졌기 때문에 전혀 흔들리지 않는다."(루카 6,48)
주님께 다가가 말씀을 듣고 실행에까지 이른 사람은 모진 세파와 혼란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단단히 서 있을 수 있습니다. "큰 물도 사랑을 끌 수 없고 강물도 휩쓸어가지 못한답니다."(아가 8,7) 하는 아가의 한 구절이 떠오릅니다. 아가 저자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사랑의 절정을 이렇게 표현했지요.
주님께 다가가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과정을 편의상 따로 떼어서 설명했지만, 실상은 사랑의 행위 안에 녹아들어 막힘없이 이어지는 하나의 행위입니다. 그분께 이끌리는 갈망이 부단한 노력을 거쳐 실행으로 이어질 때 비로소 사랑이 완성되지요. 마음에 넘치는 것이 사랑으로 육화되어 세상에 주님 현존이 되고 사랑이 되는 신비입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우상숭배에 대해 경고합니다.
"여러분이 주님이 식탁에도 참여하고 마귀들의 식탁에도 참여할 수는 없습니다."(1코린 10,21)
영혼에 선한 곳간을 지닌 이가 일부러 악의 곳간을 헤매고 다니지 않습니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지요. 우리는 축복의 잔을 마시면서 이미 그리스도의 피에 동참하고, 빵을 떼어 나누면서 이미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있는 좋은 나무들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도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가서 그와 함께 살리라."(복음 환호송)
주님께 다가가 그분을 듣고 들은 바를 실천하는 우리 안에는 이미 성삼위 하느님께서 들어와 살고 계십니다. 이 사랑의 일치 안에서 우리는 어쭙잖은 금액으로는 환산 불가능한, 선하고 좋은 열매를 세상에 낼 수 있지요.
사랑하는 벗님! 우리 안에는 어떤 강물도 휩쓸어 갈 수 없는 열렬하고 굳건한 사랑의 불길이 활활 타오르고 있습니다. 이 사랑 안에서, 주님께 다가가 듣고 실행하는데 지치지 않는 우리 모두는 복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맺는 이 맛깔스런 열매를 맛보시려 자기 정원에 찾아오십니다.(아가 4,16 참조), 우리는 주님과 함께 목마르고 허기진 세상을 향해, "먹어라, 벗들아. 사랑에 취하여라."(아가 5,1) 하고 초대할 것입니다. 이 사랑의 열매는 길이 남을 것입니다. 아멘.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나에게 와서 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가르쳐 주겠다. 그 사람은 땅을 깊이 파고 반석 위에 기초를 놓고집을 짓는 사람과 같다. (루가 6,4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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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요한 사람이 되려면 먹히는 고통을 감내할 줄 아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평소에 조금 힘든 운동을 하는 습관을 들이는 것이 좋습니다. 그 고통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연결하면 더 좋습니다. 꽃에서 열매가 되는 중간에는 반드시 치러야 하는 고통이 있습니다. 내가 열매가 되어 누군가에게 계속 먹힌다면 그 사람은 삶의 의욕을 잃을 수 없습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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