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0년 5월 18일 부활 제6주간 월요일

Margaret K 2020. 5. 17. 18:53

2020 5 18일 부활 제6주간 월요일  


보호자께서 오시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히실 것이다.

(요한 16,5-11)


"When the Counselor comes,

he will convince the world

concerning sin

and righteousness"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박병규신부-


복음을 읽을 때 간혹 실수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예수님과 그분을 따르는 이들을 내 편으로 여기고 그렇지 않으면 무조건 반대편으로 갈라서 내 편, 네 편을 갈라서 사고하는 습관입니다. 90년 무렵 회당에서 그리스도인을 쫓아낸 유다 사회는 하느님을 저버리고 메시아를 포기해서 한 행동이 아닙니다. 유다 사회는 그 누구보다 하느님을 열심히 믿었고 따랐으며 찬양하였습니다. 
유다 사회가 믿었던 하느님은 바빌론 유배(기원전 587-538년)를 거치며 세상 모든 것을 만드신 창조주 하느님으로 이해되어 왔습니다. 그러다 시간이 흐르면서 모든 이의 모든 것이신 하느님을 유다 사회는 유독 자신들만의 하느님으로 포장하는 데 열심이었습니다. 모든 이의 하느님께서 우리만의 문화와 관점 아래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 그래서 다른 민족과 다른 문화의 방식으로는 도저히 하느님을 따르고 찬미드릴 수 없다는 것을 강변한 것이 유다 사회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유다 회당에서 쫓겨난 것은 그들이 하느님을 믿지 않아서가 아니라 유다 사회가 굳건히 간직한 하느님에 대한 유다인들만의 인식의 틀을 거부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민족주의의 폐쇄성이 창조주 하느님의 개방성을 가로막아 버렸습니다. 내 편이 아니면 무조건 반대편이라는 폐쇄성이 세상의 다양한 관점과 개방성 속에 활동하시는 하느님을 거부하게 됩니다.  

오늘은 5·18 민주화 운동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국립 5·18 민주 묘지에는 저와 같은 이름이 새겨진 비석이 있습니다. 저는 이를 통하여 저의 죽음을 생각하게 됩니다. 타인의 아픔과 불편함, 타인의 고통과 슬픔이 곧 자신의 일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했으면 합니다. 우리는 모두 창조주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이고 모든 사람과 피조물에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증언하는 신앙인이니까요. 

 

조명연신부-

초등학교 때, 발표력이 정말로 좋은 친구가 있었습니다. 선생님이 질문하면 이 친구가 늘 제일 먼저 손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늘 정답이 아닌 오답만 말한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산수 시간에 “누가 앞에 나와서 이 문제를 풀어볼래?”라고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면, 이 친구가 여지없이 손을 들고 앞에 나와 문제를 풀었습니다. 물론 맞추는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나중에 선생님께서는 “너는 한 번만 더 생각하고 답을 해보면 어떨까?”라고 이야기하셨고, 우리도 “너는 그만 가만히 있어.”라고 말했습니다. 

아무튼, 이 친구에 대한 기억은 틀려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뻔뻔함을 가지고 있지만, 공부는 잘하지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이 친구가 명문 대학에 우수한 성적으로 들어갔다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틀리고 실패했을 때가 뇌가 성장하는 최고의 순간이라고 뇌 과학자들은 말합니다. 문제가 어렵다는 느낌이 들어야 뇌가 성장한다는 것입니다. 앞서 소개했던 제 친구 역시 틀리면서 뇌가 성장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대다수 사람은 어떻습니까? 틀리는 것을 주저하고 부끄러워합니다. 즉, 이를 실패로 여기고 이 실패를 두려워하지요. 그러나 틀리고 실패하는 체험은 자신을 성장시키는 역할을 담당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해 예언하시면서 제자들을 환난에 대비시키십니다. 그 힘이 바로 보호자이며 진리의 영인 성령에게서 나온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이 성령을 받은 사람은 주님에게서 떨어져 나가지 않으며 박해를 비롯한 모든 시련을 극복할 수 있게 됩니다. 

사실 박해하는 자는 자기들이 잘못하는지를 모릅니다. 오히려 하느님께 봉사하고 있다고 착각했습니다. 당시의 종교자들의 모습이 그러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착각을 인내로 극복하는 사람에게만 하느님의 궁극적인 보상이 주어진다고 하시지요. 실제로 제자들은 하늘 나라의 영광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반대를 받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반대를 받는 것이 실패가 아니며, 반대를 받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뜻을 철저하게 따르게 될 때 더 큰 선물을, 진정으로 성공이라고 할 수 있는 길에 들어서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틀리고 실패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맞는 것이고 진정한 성공이었습니다. 이를 우리는 부활의 영광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우리도 주님 안에서 세상의 실패보다 주님 안에서의 성공을 꿈꿀 수 있습니다.
 
누구나 자기 인생이라는 이야기에서는 주인공이다(존 바스).


 

우리는 무조건 옳은 판단을 할 수 없습니다.

연세가 지긋하신 어르신께 ‘노인’이라고 말하면 별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늙은이’라고 말하면 어떻게 될까요? 아마 예의 없는 사람이라고 난리가 날 것입니다. 그런데 ‘노인’은 한자이고, 늙은이는 순우리말입니다. 왜 순우리말이 막말 취급을 받는 것일까요?

계집이라는 말도 순우리말이지만, 여성을 향해 ‘계집’이라고 하면 여성 비하를 한다고 비판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15세기에 출간된 ‘두시언해’를 보면 ‘老妻(노처)’를 늙은 처녀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성에 대한 순우리말은 과거부터 써왔던 말입니다. 

아내를 향해 ‘마누라’라고 지칭하는 것도 아내를 우습게 보는 말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구한말 흥선대원군은 명성황후를 향해 마누라라고 호칭했습니다. 며느리인데도 말입니다. 당시 마누라는 지체 높은 사람의 부인을 높여 부를 때 사용하는 말이었던 것입니다. 

시간에 따라, 또 장소에 따라 옳고 틀림이 달라질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런데 우리는 자신에게만 맞춰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무조건 옳은 절대로 틀리지 않는 판단을 할 수 있는 우리가 아닙니다. 그런 판단은 오직 하느님만이 가능하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주님 존재에 대한 가장 깊은 확신은 '마음의 든든함'이다

-전삼용신부-


지난 월요일에 평화방송 녹화 중 사회자의 좋은 질문이 있었습니다.

주님 승천 대축일에 대한 질문인데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다면 왜 떠나신 것일까요, 그리고 보이지 않는 주님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요?”입니다.

그러나 만약 주님께서 계속 함께 계시며 당신만을 바라보라고 강요하시면 우리의 일상생활이 가능할까요?

   참사랑은 자신의 존재를 강요하지 않으면서도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는 것입니다.

 

   레나 마리아는 두 팔이 없고 한 다리는 30cm밖에 안 되는 중증 장애인입니다. 물론 장애인 올림픽에서 많은 금메달을 따고 음악과 그림 등에 소질이 있으며 인기도서 작가이기도 하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레나 마리아의 어머니는 마리아를 장애인으로 여기지 않아 일반 학교에 다니게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딸이 침울하게 돌아오자 엄마는 왜 그러느냐고 물었습니다.

   레나 마리아는 “엄마, 난 친구가 없어요!”라고 말했습니다. 엄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왜 친구가 없어. 예수님이 네 안에 계시잖아!”

 

   레나 마리아는 음악을 배웠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오늘은 더는 수업을 할 수가 없겠다. 노래는 마음에서 나오는데, 너는 너무 슬퍼. 그러면서 어떻게 기쁜 노래를 부를 수 있겠니?”라고 말하고 가버렸습니다. 레나 마리아는 엎어져 엄청나게 울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전화가 왔습니다. 레나 마리아는 유일하게 전화기를 잡을 수 있는 다리로 전화를 받았습니다.

   “레나 마리아시죠?”

   “네...”

   “예, 저를 모르실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기도 중에 예수님께서 전화하라고 하셨어요. 레나 마리아를 많은 사람이 응원하고 있고 기도하고 있음을 알려주라고 하셨어요!”

 

   레나 마리아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다시 일어섰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증언합니다.

   “만약 예수님이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계심을 증명하라고 한다면, 나는 나약한 저의 육신과 날마다 주님을 찬양하는 제 입술을 당당히 보여주겠습니다.”

 

 

   TV에서 보았던 어떤 실험에서 아기가 엄마를 어떻게 인식하는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방 안에 아기가 좋아할 장난감들을 넣어놓고 아기를 놀게 하였습니다. 조금 후 슬며시 엄마가 밖으로 나가봅니다. 한참을 놀다 엄마가 함께 없다는 것을 알게된 아기는 장난감에는 관심이 없고 울며 엄마만 찾았습니다. 그래서 엄마가 다시 그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랬더니 이젠 엄마에겐 관심이 없고 장난감으로 놀기에 정신이 없는 것입니다.

 

   엄마를 눈으로 보는 것이 엄마의 존재에 대한 더 큰 확신일까요, 아니면 엄마가 보이지는 않지만 즐겁게 놀 수 있는 것이 더 큰 확신일까요?

 

   사람은 세 단계로 어떤 존재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눈으로 확신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확신은 속을 확률이 높습니다. 마귀들도 예수님의 모습을 하고 나타날 수 있습니다. 눈으로 보이는 것만을 곧이곧대로 믿고 사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다음은 머리로 확신하는 것입니다. 신학을 부지런히 공부하여 주님께서 함께 계심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완전하지 못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회당에서 내쫓을 것이다. 게다가 너희를 죽이는 자마다 하느님께 봉사한다고 생각할 때가 온다.”

 

   사도들을 박해할 이들은 머리로 하느님을 믿는 이들이었습니다. 머리로 알고 믿어서는 아직 구원의 수준에 오른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당신을 증언할 영을 보내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너희에게로 보낼 보호자, 곧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

 

   성령께서는 우리 마음 안에서 사랑과 기쁨과 평화의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박해받아 죽어가면서도 찬송가를 불렀던 순교자들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러한 순간에도 찬송가를 부를 수 있는 마음이 솟아나는 것을 보면서 어떻게 주님을 확신하지 못할 수가 있을까요?

 

   주님 존재에 대한 가장 확실한 증거는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 험난한 세상 속에서도 기쁘고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성령께서 주시는 마음의 확신’입니다.

   이 확신은 마음의 평화라고도 할 수 있겠고, 든든함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눈으로 보는 것보다 마음으로 느끼는 성령의 위안이 비교도 안 될 만큼 큰 주님 존재에 대한 확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성령을 주시기 위해 아버지께 올라가신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위기는 기회라는 말이 있습니다. 공룡이 지배하던 시대에 포유류는 주로 밤에 활동했다고 합니다. 어느 날 공룡이 사라졌습니다. 화산 폭발이 있었다고도 하고, 소행성의 충돌이 있었다고도 하고, 빙하기가 왔다고도 합니다. 공룡이 사라지면서 포유류는 낮에도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포유류의 시대입니다. 사람도 포유류입니다. 1920년대 말 대공황이 있었습니다. 당시 미국에는 50개가 넘는 자동차 회사가 있었습니다. 공항이 끝나면서 3개의 자동차 회사가 남았고 그 회사들은 지금도 있습니다. 1970년대에 중동의 오일쇼크가 있었습니다. 당시에 많은 전자회사가 있었습니다. 오일쇼크가 끝나면서 3개의 전자회사가 남았고 지금도 있습니다. 2008년 미국을 시작으로 금융위기가 왔습니다. 당시 많은 반도체 회사가 있었습니다. 금융위기가 끝나면서 3개의 반도체 회사가 남았다고 합니다. 이 회사들이 세계의 반도체 시장을 점유하고 있습니다.

 

코로나19가 시작되었고 아직도 진행 중입니다. 전문가들은 코로나19 이후에 새로운 변화가 있을 거라고 예상합니다. 한국은 감염병의 확산 방지를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적극적인 검사, 환자의 능동적 격리, 투명한 공개,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통해서 국경의 폐쇄 없이, 사회의 봉쇄 없이 문제를 해결하였습니다. 코로나19의 엄중한 상황 속에서도 전국단위 선거를 치룰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 또 다른 감염병이 온다면 많은 나라가 한국식 방법을 받아들일 것 같습니다. 연대와 협력이 이루어지면 경제적인 손실을 최소화 할 수 있습니다. 모든 나라가 서로 협력하고 연대할 수 있으면 바이러스는 갈 곳이 없습니다. 총과 칼로는 바이러스를 막아낼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국방비를 줄이고, 감염병 예방에 대한 연구와 백신 개발에 국가적인 지원을 해야 합니다.

 

빛은 입자의 모습을 하기도 하고, 파동의 모습을 하기도 합니다. 입자인 경우에는 위치와 시간에 속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눈으로 보는 모든 물질들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에 머물게 됩니다. 그러나 파동인 경우에는 위치와 시간에 속하지 않습니다. 시간과 공간이라는 에서 자유롭습니다. 동양에서는 그것을 ()’라고 해석을 하기도 합니다. 2000년 전 예수님께서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에 머물러 계셨습니다. ‘말씀, 표징, 으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래야만 제자들과 사람들이 이해 할 수 있고, 받아들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보호자를 말씀하십니다. 보호자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틀에 속하지 않는 분이십니다. 파동과 에너지와 같아서 가시적으로 볼 수는 없지만 사도들에게 용기를 주시고, 힘을 주시고, 고난을 이겨낼 수 있는 믿음을 주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교회는 그 보호자를 성령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리디아는 세례를 받고 사도들을 집으로 초대하였습니다. 그것이 옷감을 파는 것보다 더 소중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늘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 마시오. 아버지께서는 그 모든 것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의 뜻을 찾으십시오. 그러면 그 모든 물질적인 것들은 하느님께서 다 채워 주실 것입니다.” 갈매기의 꿈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다른 갈매기들은 하루하루 먹이를 찾고, 쉬면서 지내고 있었습니다. 갈매기들에게 하루 배를 채울 수 있는 먹이를 찾는 것만도 큰일입니다. 그런데 주인공 조나단은 그런 일에 갈증을 느꼈습니다. 좀 더 빨리, 좀 더 높이 날고 싶어 했습니다. 삶의 의미를 찾아서 끊임없이 노력했던 조나단은 또 다른 차원의 세상을 만나게 됩니다.

 

인류의 새벽을 기다렸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문명과 역사의 첫 단추를 풀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새로운 것들을 찾아서 좀 더 멀리, 좀 더 높이 날개를 폈던 분들입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앞에 새로운 세상을 보여 주신 분입니다. 그분이 보여 주었던 십자가의 길, 그분이 보여 주셨던 사랑의 길은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길입니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너희에게로 보낼 보호자, 곧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

 

어제의 범죄를 벌하지 않는 것은 내일의 범죄에 용기를 주는 것입니다!

 -양승국신부-

 

5월이 돌아올때 마다 시대의 아픔에 함께 하지 못한 큰 송구함과 죄책감이 묵직하게 가슴을 내리누릅니다. 광주 시민들과 학생들의 짊어졌던 무거운 십자가의 무게를 조금이라도 나눠지지 못했음에 대한 부끄러움에 크게 가슴을 치게 됩니다.

 

우리 대한민국 사람들은 인정이 많은건지 아니면 심성이 고와서인지 대학살의 주인공들은 아직도 고개 빳빳하게 쳐들고 큰소리를 치고 있습니다. 총칼로 뺏은 천문학적 비자금으로 세세대대로 호의호식하고 있습니다.

 

군부 독재 세력과 결탁했던 잔당들 역시 아직도 우리 사회 곳곳 다양한 분야에서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망언을 남발하며 버젓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518 민주화 영령들과 유가족들에게는 너무나 큰 상처요 모욕이 아닐수 없습니다.

 

깨어있는 애국 시민들의 목소리를 정치인들이 외면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자라나는 이 땅의 새싹들을 위해서라도 아직까지 제대로 청산되지 않은 그릇된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 합심해야겠습니다. 

 

“어제의 범죄를 벌하지 않는 것은 내일의 범죄에 용기를 주는 것입니다. 그는 아직도 국민 앞에 사죄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학살 범죄 행위를 자위권 발동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의 처는 그를 ‘민주주의의 아버지’라고 치켜세우고 있습니다. 이 모든 역사적 퇴행은 독재의 잔재를 청산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라고 볼 수 없는 학살의 주인공들과 동조 세력들에게는 그에 합당한 강력한 조치가 필요합니다. 끝끝내 ‘잘못했다! 용서를 청합니다!’라고 말한 마디 하지 않는 그들에게 더 이상의 인간적인 대우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천문학적 액수의 검은 돈을 어딘가에 차곡차곡 쌓아놓고 흥청망청 살고 있는 파렴치한 인간들에게는 제대로 된 인생의 쓴맛을 보여줘야 마땅합니다. 

 

사랑이신 주님께서 그 비참한 인간들에게도 자비를 베푸시어, 진리와 진실 앞에 꽉 막힌 그들의 귀를 열게 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무슨 일을 했는지도 잘 모르고 있습니다. 자신들이 저지른 악행들이 얼마나 큰 죄인지를 깨닫게 해주시기를 빕니다. 

 

5월을 맞아 많은 분들이 이구동성으로 말씀하고 계시는 부분이 있습니다. ‘왜 그때 학살의 주범들을 사면해줬는가?’하는 분노요 안타까움입니다. ‘기대할 사람에게 기대했어야지’ 하는 회한입니다. 

 

우리 모두 지난 역사를 통해서 온 몸으로 느끼는 바는, 제대로 청산되지 않은 과거는 언제나 또 다른 악순환을 반복한다는 진리입니다. 그토록 큰 관대함으로 눈물을 머금고 사면을 해줬다면, 하루에도 수백번씩 감사하면서, 남은 생애는 언제나 가슴치면서, 쥐죽은 듯이 조용히 지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마치 비온 뒤 여기 저기 스물스물 피어오르는 독버섯과도 같습니다. 불사조(不死鳥) 같다고나 할까요? 진정성있는 반성이나 참회는 절대로 기대할 수 없습니다.

 

혹시라도 올해는 기적처럼 자신들의 잘못에 대한 성찰이나 사죄가 있으려나 기대해보지만, 웬걸 안그래도 쓰라린 유족들과 희생자들의 가슴에 굵은 소금을 왕창 뿌려대는, 상상을 초월하는 망언만을 남발하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교에서 강조하는 용서와 화해에 대한 가르침도 사실은 상식적인 것이고 일반적인 토대 위해 성립됩니다. 상대방의 인생에 평생 씻지 못할 치명적 과오와 상처를 입혔다면, 그에 합당한 방식과 절차에 따른 진정성 있는 사죄와 다시는 동일한 잘못을 반복하지 않겠노라는 결심이 선행되어야만 합니다. 그런 절차가 이루어진 다음에 용서나 화해라는 단어가 사용 가능한 것입니다.

  

국가와 국민의 안전을 수호해야할 군인으로서 자신의 신분을 망각한 채, 오로지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무고한 시민들에게 총부리를 겨눈 사람들, 채 피어나지도 않은 무수한 꽃봉오리를 무참하게 꺾어버린 대학살의 주범들, 역시 결코 용서와는 다른 차원에서 접근해야 마땅합니다.

 


사랑이신 주님께서 518민주화 영령들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시고, 유가족들과 부상자들에게 오직 주님만이 주실 수 있는 따뜻한 위로를 베풀어주시길 청합니다. 아직까지도 정리되지 않은 불행한 역사 역시 조속히 청산되길 또한 기도합니다.


."아버지에게서 나오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할 것이다.”(요한 15,26)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상으로부터 오는 고난과 박해가 오면 제자들은 오히려 그리스도를 증언하게 될 것이라고 미리 알려주십니다. 증언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그 증언의 확실성인데, 그 확실성의 근거는 직접 눈으로 목격한 사실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도 증언하면서, 직접 보았다는 것을 증언의 근거로 이렇게 제시합니다.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내가 증언하였다.”(요한 1,34)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을 증언하게 될 이들이 둘이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예수님을 직접 본 이들입니다.

<첫 번째>로 증언하게 될 이는 바로 성령이십니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너희에게 보낼 보호자,

곧 아버지에게서 나오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할 것이다.”(요한 15,26)


그렇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 직적 목격한 성령께서 예수님을 증언할 것입니다. 그러니 그 증언은 확실한 것입니다.

<두 번째>로 증언하게 될 이는 제자들입니다.

너희(제자들)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나를 증언할 것이다.”(요한 15,27)


그렇습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 예수님을 목격했습니다. 그러기에 직접 목격한 그들의 증언은 확실한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직접 목격한 이들이 당신을 증언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미리 말한 이유를 우리가 떨어져 나가지 않게 하려는 것(요한 16,1)이요, 당신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게 하려는 것(요한 16,4)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박해에 대한 예수님의 이러한 예고는 우리를 당혹하게 합니다. 왜냐하면, 단지 박해를 예고만 할뿐, 박해를 피할 방도나 극복할 방법을 제시하지는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단지 그러한 때가 오면 내가 한 말을 기억하라고 너희에게 이렇게 미리 말해 두는 것이다(요한 16,4)라고만 말씀하십니다. 기껏 기억하라고만 할 뿐입니다. 참으로 무력해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예고만 하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당신을 따르는 길에서, 고통과 박해는 없어져야 할 그 무엇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통해 당신이 구세주이심을 증거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인은 사도 바오로가 말한 것처럼, 고난을 특권으로 받은 이들입니다. 곧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하는 특권을, 곧 그리스도를 믿을 뿐만 아니라 그분을 위하여 고난까지 겪는 특권을 받았습니다.”(필립 1,29). 그러니 고통과 박해는 없어져야 할 그 무엇이 아니라, 우리 신앙생활의 일부일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통해서 그것 속에서 그리스도를 증언해야 할 공간이고 배경인인 것이 됩니다. 바로 그리스도께 보내신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그렇게 증언을 동행할 것입니다. 아멘.


-오늘 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

때가 오면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기억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6,4)


주님!

미움과 박해가 닥치면 피할 방도를 찾기보다 당신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게 하소서.

안정과 편안을 찾기보다 당신의 증인으로 부름 받았음을 기억하게 하소서. 피할 수 없는 고통이 불가항력으로 닥칠 때,

도저히 용서될 수 없을 것 같은 죄와 끝내 치유될 수 없을 것 같은 상처를 당할 때,

바로 그때가 당신을 증거 해야 할 때임을 알게 하소서!

바로 그것이 당신을 증언할 수 있는 선물임을 알게 하소서! 아멘.

 

성령의 힘이 함께 합니다

-반영억신부-


그리스도인은 세상 속에 살면서도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의 약육강식의 논리를 따르지 않고 진리를 추구합니다. 몸이 힘들고 고달프더라도 끊임없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기억하며 선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결정적으로 선과 진리에 어긋나는 것에는 반대를 분명히 합니다. 그래서 세상의 미움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세상의 미움에 승리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어떻게든 살아가는 우리네 현실은 믿음의 수련기관이고, 그 기간 동안 단순히 육체적 고통만이 아니라 우리 영혼의 아픔 또한 겪어 내야합니다. 이 기간 동안 우리는 홀로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을 보내 주시기 때문입니다”(박병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증언하는 것은 예수님을 처형한 세상의 권력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권력자들은 교회를 박해하였습니다. 

이것을 아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성령을 계시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먼저 시련과 박해의 시간에 “떨어져 나가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누구나 시련과 고통이 생기면 마음이 흔들리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마음을 아시기에 당신의 협조자 성령을 약속하셨습니다. 성령께서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 대한 신앙을 강화시켜 주시고 혹독한 박해 속에서도 용기 있게 그리스도를 증언할 힘을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같은 힘을 주십니다. 내 삶의 역사에서 하느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셨는지를 기억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거기에 따라 나의 삶을 변화시키고자 노력한다면 바로 그 성령께서 우리의 믿음을 새롭게 해 주시고 우리의 마음을 지켜주실 것입니다. “그분의 영을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가 세상을 배척하지 않으면서 세상의 속임수와 타협하지 않고 세상을 위해 목숨을 내놓을 수 있도록 우리 마음 안에 많은 사랑을 품을 수 있게 해 줍니다. 세상과의 타협은 위험합니다. 타협을 거부하고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가는 것은 하늘나라의 삶이고, 가장 큰 기쁨이며 진정한 기쁨입니다....복음과 일치하는 삶이 사람들의 박해를 유발할지라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이 길을 걸어가는데 우리를 지탱해 주시는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하십니다”(프란치스코 교황). 

신앙생활을 시작한 모든 사람이 성령의 손길을 통해 어려움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굳건함과 그리스도의 평화를 간직할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아울러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성령 안에서 예수님께 대한 열망을 키워감으로써 시련과 역경 안에서도 흔들림 없는 참 신앙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거룩하게 사는 이들은 그분을 추구합니다. 그분은 성령이십니다. 성령께서는 당신 입김으로 그들에게 생기를 주시고 도움을 주십니다”(성 바실리오). 

사실 “성인들은 자기가 받은 은총에 늘 만족하며 살았고 하느님이 주시는 시련과 고통도 그분의 뜻으로 알고 살았습니다”(아빌라의 성 요한).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시련이 벌이 아니고 오히려 은총의 기회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련을 이겨 내십시오. “시련을 견디어 내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렇게 시험을 통과하면, 그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화관을 받을 것입니다”(야고1,12). 이 시간 위로의 성령을 통해 우리의 삶이 변화되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세상 가운데에서 

-송영진신부-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너희가 떨어져 나가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회당에서 내쫓을 것이다. 게다가 너희를 죽이는 자마다
하느님께 봉사한다고 생각할 때가 온다. 그들은 아버지도 나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한 짓을 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그들의 때가
오면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기억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6,1-4ㄱ).”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이라는 말씀에서 ‘이 말’은,
앞의 15장 18절-25절에 있는 ‘세상의 미움’에 관한 말씀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내가 너희에게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고 박해할 것이다.’
라고 말한 이유는”입니다.
“떨어져 나가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는
“믿음이 흔들려서 교회를 떠나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입니다.
4절의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기억하게 하려는 것이다.” 라는 말씀은,
“세상의 미움과 박해를 받거든 내가 모든 일을 미리 알고서 예고했음을
기억하여라. 내가 모든 일을 미리 알고 있다는 것은 그 모든 일이 다
하느님의 계획과 섭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승리는 항상 하느님 쪽에 있다. 너희는 그것을 믿어라.” 라는 뜻입니다.

“너희를 죽이는 자마다 하느님께 봉사한다고 생각할 때가 온다.” 라는 말씀은,
유대교의 박해 상황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당시에 유대인들은 ‘하느님을 위해서’ 라는 명목으로 그리스도교를 박해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리스도교를 박해할 때 죄의식을 느끼기는커녕
하느님을 위해서 옳은 일을 한다고 믿었습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바오로 사도입니다.
“우리 열두 지파는 밤낮으로 하느님을 열렬히 섬기며 그 약속이 이루어지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 사실 나도 한때 나자렛 사람 예수님의 이름을 반대하여
많은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예루살렘에서 하였습니다.
나는 수석 사제들에게서 권한을 받아 성도들 가운데에서 많은 이를 감옥에
가두고, 그들을 처형할 때에도 찬성표를 던졌습니다. 또 자주 회당마다 다니며
그들에게 형벌을 주어 예수님을 모독하도록 강요하였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너무나 격분하여 나라 밖 여러 고을까지 그들을 쫓아갔습니다(사도 26,7-11).”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신념으로 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박해는 더욱 철저했고 잔인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아버지도 나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한 짓을 하는 것이라고 설명하십니다.
여기서 ‘알지 못하다.’ 라는 말에는, ‘모른다.’ 라는 뜻도 들어 있고,
‘일치되어 있지 않다. 관계가 없다.’ 라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말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 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는 그들의 신념은 잘못된 신념이고,
그들의 그리스도교 박해는 하느님의 뜻과 계획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자기들 마음대로 그것을 판단하고서 하는 잘못된 행동입니다.
(‘하느님을 위해서’ 하는 일이라고 주장하지만,
사실은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범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말씀에 대해서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우리가 세상의 미움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인가?”
(항상 당연히 세상의 미움을 받아야 하는가?)
‘세상의 미움’에 관한 예수님 말씀을 보면,
언제나 항상 세상의 미움을 받아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세상이 우리를 미워할 때도 있다고 말씀하셨을 뿐입니다.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는 초대 교회의 모습을 보면
처음에는 세상의 미움을 받은 것이 아니라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날마다 한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이 집 저 집에서 빵을 떼어
나누었으며, 즐겁고 순박한 마음으로 음식을 함께 먹고, 하느님을 찬미하며
온 백성에게서 호감을 얻었다. 주님께서는 날마다 그들의 모임에
구원받을 이들을 보태어 주셨다(사도 2,46-47).”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백성 가운데에서 많은 표징과 이적이 일어났다.
그들은 모두 한마음으로 솔로몬 주랑에 모이곤 하였다.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감히 그들 가운데에 끼어들지 못하였다. 백성은 그들을 존경하여,
주님을 믿는 남녀 신자들의 무리가 더욱더 늘어났다(사도 5,12-14).”
호감과 존경은 선교활동의 발판이 되었고, 입교자의 증가로 이어졌습니다.

< 만일에 모든 사람들로부터 미움만 받는다면 선교활동을 전혀 할 수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적이 아니라 이웃이고, 함께 구원받아야 할 형제들입니다.
그들 가운데에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는’(요한 3,19) 자들은 교회와
신앙인들을 미워하고 박해하지만, 빛을 갈망하는 이들은 교회와 신앙인들이
더욱 적극적으로 복음을 전해 주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교인들 가운데에 살면서 바르게 처신하십시오. 그래야 악을 저지르는
자들이라고 여러분을 중상하는 그들도 여러분의 착한 행실을 지켜보고,
하느님께서 찾아오시는 날에 그분을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1베드 2,12).”
“......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남편들도 아내인 여러분의 말 없는 처신으로
감화를 받게 하십시오. 그들은 여러분이 경건하고 순결하게 처신하는 것을
지켜보다가 그리될 것입니다(1베드 3,1-2).”
대부분의 세상 사람들은 신앙인이 신앙인답게 사는 모습을 보면서
존경하고 호감을 갖게 되고 감화를 받게 됩니다.
반대로, 신앙인이면서도 신앙인답게 살지 않으면 비웃고, 싫어하고, 비난합니다.
(신앙인답게 살지 않는 것은 미움 받을 짓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미움 받을 짓을 해서 미움 받게 되었으면서도
그것을 신앙에 대한 박해라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입니다.
어쩌면 그것은 신앙인답게 살지 않는 것에 대한 ‘주님의 질책’일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아버지도 예수님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를 미워하고 박해하는
것이라면, 그러면 우리는 아버지 하느님과 예수님을 얼마나 잘 알고 있는가?
(하느님,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는 생활을 하고 있는가?)
혹시 신앙을 핑계로 세상과 담을 쌓고 살면서, 미움과 박해를 자초하지는 않는가?
교회는(또는, 신앙인의 공동체는)
사람들을 위한 피난처와 안식처가 되어 주어야 합니다.
누구든지 찾아와서 기도할 수 있어야 하고, 의지할 수 있어야 하고,
안식을 얻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려면 ‘사랑’이 ‘밖으로’(온 세상으로) 흘러넘치는
교회가(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는 않고 이기적인 집단의 모습만 보인다면,
세상 사람들이 미워하기 전에 주님께서 먼저 꾸짖으실 것입니다. 

성령 안에서의 증언

-조욱현신부-

 

복음: 요한 15,26-16,4: 진리의 성령이 나를 증언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보호자 성령에 대해 말씀하신다. 성령을 보호자라고 하는 것은 성령께서 우리를 위로하고 격려하며 나약한 우리를 도와주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기쁨으로 채워주시는 분이시다. 성령 안에 사는 사람들은 참 기쁨이 있다. 이 성령을 주님께서는 내가 아버지에게서 너희에게 보낼 보호자, 곧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15,26)이라고 하신다. 성령은 아버지의 영이라고 아들은 말씀하신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마태 10,20)

 

바오로 사도는 성령이 아들의 영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의 영을 우리 마음 안에 보내주셨습니다. 그 영께서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고 계십니다.”(갈라 4,6) 우리 마음 안에 사랑을 부어 주심으로써 그분 안에서 우리가 그렇게 부르는 것이다. 그래서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을 모시고 있지 않으면, 그는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로마 8,9)라고 한다. 바로 사랑의 관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친교는 바로 성령 안에서라는 것이다. 이렇게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에게서 오시는 분이시다. 그 영은 아버지의 영이시며, 아들의 영이시다.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26) 성령은 아버지에게서 나와 아들에 대해 증언하신다. 또한 그분은 아버지에 대해서도 증언하신다. 성령께서는 아버지의 비밀을 아시는 아버지와 나뉘지 않는 분이시며 아들과 똑같이 아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성령께서 내려오시면 당신이 말씀하신 것들이 사실임을 확인해 주실 것이라고 하신다. 우리도 또한 성령 안에서 하느님의 말씀과 뜻을 더 깊이 알아듣게 될 것이다. 이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성령 안에 머무는 것이다. 성령에 잠기는 삶을 살아야 우리도 그분과 더욱 가까운 사이가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갑자기 예기치 않은 환난이 닥쳤을 때, 제자들의 믿음이 무너지지 않고, 이 어려움을 통해 더욱 굳세게 주님께 포도나무 가지처럼 결합되어 있도록 말씀하신다. “사람들이 너희를 회당에서 내쫓을 것이다. 게다가 너희를 죽이는 자마다 하느님께 봉사한다고 생각할 때가 온다.”(2)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것은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저버리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버리지 않으려는 복음을 전하는 이들을 회당에서 쫓아내고 죽이는 것이 하느님을 위하는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렇게 그들은 그리스도를 모욕하였지만, 순교자들은 그 이름을 찬양하였다.

 

그들은 아버지도 나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한 짓을 하는 것이다.”(3) 그들이 그러한 짓을 하는 것은 바로 당신을 모욕하는 일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사무엘에게 이스라엘 자손에 관하여, “그들은 사실 너를 배척한 것이 아니라 나를 배척하는 것”(1사무8,7)라고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이에 대해 이미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마태 5,11-12)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그들의 때가 오면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기억하게 하려는 것이다.”(4) 이 말씀은 성령에 관한 약속과 그들이 고난 받을 때, 주님께서 알려주실 증언에 관한 말씀이다. ‘그들의 때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떠나신 다음 제자들이 홀로 남아있게 되는 때이며, 그들이 적대자들로부터 박해를 받는 때를 말한다. 그러니 우리도 이런 일을 당할 때에 우리 믿음의 영도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봅시다.”(히브 12,2)라는 말씀을 기억하며 우리의 성덕을 위한 것임을 기억하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이제 우리는 하느님 앞에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한다. 하느님 앞에 두려워하는 마음을 갖는다는 것은 바로 그분의 뜻을 제대로 따르지 못할까 자신에 대해 긴장하고, 노력하는 삶이다. 인간을 통해서 나오는 박해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다. 이 박해는 다른 모습으로 우리에게 닥칠 수 있다.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도록 교묘하게 나타나기도 한다. 이것은 유혹으로 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삶 속에서도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길을 인도해주실 것이다. 성령의 도움을 청하면서 오늘 하루를 이끌어 주시기를 청하면서 이 미사를 봉헌하자.

 

아버지도 나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한 짓을 할 것이다.(요한 16, 3)

-한상우신부-

우리 자신이
그 사람입니다.

끝나지 않은
어리석은
짓거리는 

안타깝게도
계속 이어집니다.

우리의 한계를
우리의 무능을
아프게 인정하는
힘든 시간입니다.

여전히 바뀌지
않고 있습니다.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지를
성찰합니다.

모든 악의 출발은
하느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무지에서
출발합니다.

무지에 묶인 채
한 걸음도 
선(善)을 향해
내딛지 못하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결단의 때
결심의 실천이
필요한 때입니다.

사람이 사람인 것은
잘못된 부분을 찾아
수정하고 고쳐나가는
데 있습니다.

다시금 주님을
향해 길을 내어야
할 우리들입니다.

삶이란 
바꾸고 변화되길
애쓰며 기도하는
사람들의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망가뜨리는 
우리가 아닌

하느님의 뜻을
제대로 실행하는
우리들이길
기도드립니다.

망가뜨림과
새로워짐 사이에
우리가 있습니다.

새로워지게 하시는
하느님을 믿습니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에게 '신념'에 대해 묵상하도록 초대합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회당에서 내쫓을 것이다. 게다가 너희를 죽이는 자마다 하느님께 봉사한다고 생각할 때가 온다"(요한 16,2).

예수님께서 뒤에 남겨질 제자들이 앞으로 겪게 될 일에 대해 직설적으로 숨김없이 말씀하십니다. 회당에서 쫓겨나는 것은 공동체로부터 파문되는 고립을 의미합니다. 종교 중심의 사회에서는 사형선고와 다를 바 없는 통첩이지요.

게다가 죽임까지 당한다고 하시네요. 파문으로 영혼이 죽은 이에게서 육적 생명마저 앗아간다니 기가 막힙니다. 스승의 수난과 죽음 예고에 펄쩍 뛰며 만류하고, 질문조차 못할 만큼 두려워하던 그들이, 이제는 스승의 운명을 자신들의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순간을 직면한 겁니다.

"하느님께 봉사한다고 생각할 때가 온다."

그런데 앞으로 당하게 될 박해와 죽음이 하느님께 대한 봉사의 미명으로 이루어진다고 하니 갈수록 태산입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이 그 하느님의 이름으로 쫓겨나고 죽어야 한다면, 유다인들이 믿는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의 하느님이 다른 걸까요?

제1독서는 바오로 일행이 마케도니아 지역의 첫째가는 도시인 필리피에서 복음을 전한 이야기입니다.

"이미 하느님을 섬기는 이였던 리디아라는 여자도 듣고 있었는데 바오로가 하는 말에 귀 기울이도록 하느님께서 그의 마음을 열어 주셨다"(사도 16,14).

리디아는 여느 이방인과는 달리 이미 하느님을 믿고 섬기는 이였지요. 결국 그녀는 온 가족과 함께 세례를 받아 새로운 길에 들어섭니다.

하느님을 섬기는 것으로 보면 유다인들이나 리디아나 크게 다를 바 없는데, 한 쪽은 하느님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한 쪽은 하느님과 함께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것입니다. 이 두 부류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귀 기울이도록 하느님께서 그의 마음을 열어 주셨다."

리디아는 하느님께서 바오로가 전하는 복음에 대해 마음을 열어 주신 덕분에 귀를 기울입니다. 그녀는 하느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자신도 모르게 단순히 순종하고 따랐을 뿐이지요. 그녀는 자신 안에서 일어나는 의식의 흐름과 변화, 마음의 움직임 모두를 하느님께 맡겨드리는 이였습니다.

반면 유다인들은 들으려 하지 않고 보려 하지 않았지요. 하늘에서 온 이가 아니면 행할 수 없는 무수한 표징과 가르침에 눈과 귀를 닫은 채, 예수님에게서 율법과 배치되는 흠을 찾아내는데 혈안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이미 단단히 구축된 신념, 즉 선민사상과 율법주의가 하느님 자리를 대신 꿰차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아버지도 나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한 짓을 할 것이다"(요한 16,3).

유다인들은 스스로 하느님을 안다고 착각하지만 실은 아버지를 모르기에 그런 짓을 저지르는 것입니다. 율법과 관습을 수호한다면서 오히려 민족적 정체성인 하느님 자녀됨을 거부하는 모습이지요. 그러면서도 스스로는 잘 하는 줄 알고 있으니 그들에 대한 예수님의 안타까움이 얼마나 크시겠습니까!

신념 자체는 귀한 것입니다만, 민족과 율법에 대한 유다인들의 신념이 사람을 구분하고 배척하기보다 포용하고 섬기는 데 작용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큽니다.

어느덧 5.18 민주화 운동이 40주기를 맞았습니다. 40이라는 상징적 숫자만큼 그간 항쟁의 의미와 해석에 대해 많은 공방과 부침이 있었지요. 신념이 권력 유지와 자리 보전을 위해 맹목적으로 작동할 때 폭력이 될 수 있음을 우리는 봅니다.

리디아처럼 자신 안에서 고요히 움직이시는 하느님의 영을 따라 눈과 귀를 열 때 진리와 정의는 제 본 모습을 드러냅니다. 우리의 신념이 하느님의 모상인 인간의 존엄성과 공동선을 향할 때 진정 하느님께 봉사할 수 있습니다.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 귀한 생명을 바친 모든 영혼들, 아직도 슬픔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유가족들, 그리고 가해자건 피해자건 극심한 트라우마에 갇혀 고통 속에 살아가는 모든 이들을 주님께 봉헌하며 기도드리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40년간의 험난한 광야 여정을 끝내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우리 모두도 이제 5.18의 교훈을 민주화의 원체험으로 삼으며 새로운 대한민국의 길을 함께 열어 가기를 기원합니다.

 

능력과 사랑에 대한 증언  

-감찬선신부-


오늘 주님의 말씀을 잘못 이해하면
주님께서 매우 전전긍긍하시고 안달복달하신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

내가 죽고 난 뒤에 내가 아버지에게서 보내는 진리의 성령께서 오시면
당신이 누구신지 그 진리의 성령께서 증언해주시고 알게 해주셔서
그것을 알게 된 너희 제자들도 당신을 증언할 수 있을 정도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이런 얘기를 하는 이유가 너희가 떨어져 나가지 않게 하려는
거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어찌 보면 제자들을 못 믿으시는 것이고,
제자들이 떨어져 나갈까 봐 전전긍긍하시는 거지요. 
그런데 정말 그런 것입니까? 전전긍긍이고 안달복달입니까?

요한복음 15장은 그 유명한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입니다.
주님께서 당신은 포도나무이시고 제자들과 우리 인간은
그 가지라는 것을 이 비유를 통해서 가르쳐주신 거지요.

그런데 앞서 이 비유를 들려주고 가르쳐주신 이유가
오늘 얘기와 연결되면서 더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가지가 나무에서 떨어져 나가면 말라버려 죽게 되니
너희는 내게서 떨어져 나가지 말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이 떨어져 나갈까 봐 전전긍긍하시고 안달복달하시는 것은
맞다고 해야겠지만 그 이유가 당신이 배신당할까 봐 그러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떨어져 나가 죽게 될까 봐 전전긍긍하시고 안달복달하시는 거지요.

사실, 전전긍긍과 안달복달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자기가 잘못될까 봐 전전긍긍, 안달복달하는 것과
사랑하는 사람이 잘못될까 봐 전전긍긍, 안달복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보내시는 성령께서는 주님께 대해 뭘 증언하시어
제자들이 떨어져 나가지 않게 하신다는 것일까요?

무엇보다도 예수께서 그리스도라는 것을 증언하실 겁니다.
제자들은 그렇게 허무하게 죽임을 당하신 예수께서 자기들이 믿어 온
그 그리스도일 수가 없다고 생각되어 믿음이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첫 번째 수난 예고를 하시면서 그리스도는 수난을 당해야 한다고
하자 베드로는 절대로 그러실 수 없다고 그 말씀을 부정하였고 주님께서는
이에 베드로를 사탄이라고 강하게 나무라셨지요.

그런데 이것은 베드로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모두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고,
그래서 주님의 수난 예고를 듣고도 믿지 않았는데 실제로 주님께서
힘없이 돌아가시고 자기들마저 위험에 처하자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처럼
제자들은 주님 공동체에서 떨어져 나가 뿔뿔이 흩어질 지경이 됐을 겁니다.

성령께서는 이런 제자들에게 그리스도께 대한 올바른 증언을 하셔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수난당하시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부활하시는 그리스도라는 것을 말입니다.
더 정확히 얘기하면 수난당하시고 마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부활하시는 그리스도가 진짜 그리스도라는 것을 증언하실 겁니다.

이것이 능력의 주님께 대한 증언이라면 성령께서는
또 다른 증언, 곧 사랑의 주님께 대한 증언도 하실 겁니다.

주님이 제자들을 떠나가심은 제자들을 버려두고 떠나시는 것이 아니라
생전에 제자들에게 이미 말씀하신 대로 제자들이 있을 곳을 마련하기 위해
먼저 하느님께 가는 것임은 물론 예수께서 떠나셔야 당신이 오시기 때문에
예수께서 떠나가시는 것임을 성령께서는 제자들이 믿게 하실 겁니다.

제가 요즘 가끔 이런 생각을 하며 위안을 받곤 합니다.
돌아가신 어머니 생각을 하며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은
우리를 버리고 떠나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 되돌아가신 것이기에
제가 죽어도 저 우주 컴컴한 곳에 저 혼자 헤매는 게 아닐 것이고,
먼저 가신 어머니를 따라 가는 것이니 결코 외롭거나 무섭지 않을 
것이라라는 위안 말입니다.

아무것도 주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고,
누구도 주님 사랑에서 떨어질 수 없다는 바오로 사도의 말을 
다시 또 묵상하는 오늘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7년 5월 23일 부활 제6주간 화요일

2018년 5월 7일 부활 제6주간 월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